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너희도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되고 어긋나는 자신만의 이해, 생각, 상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머리로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런 관념과 상상은 모두 진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한다. 그럼 사람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겠느냐?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전파와 주입이며, 그 밖에도 사회의 흐름, 가정 교육의 영향 등이 있다. 몇천 년간 무신론의 지배를 받아 온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겠느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또한 벽을 통과해 드나들 수 있고 물질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그럼 사람의 상상과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겠느냐? 주로 전통문화의 영향, 그리고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몇천 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무신론 교육은 일찌감치 중국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신론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그동안 사탄과 여러 악령은 사람을 현혹하고 통제하기 위해 민간에서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냈는데, 그런 일은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어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다. 악령이 사람을 현혹하고 우롱하며 해를 끼치기 위해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게 되면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수히 많은 관념과 상상을 가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모두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사회의 영향과 주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사탄의 교육, 전통문화, 지식의 전파와 주입을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사람에게 여러 관념과 상상이 생겨난 것이다. 관념과 상상은 비록 사람의 일과 학업, 그리고 정상적인 생활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이런 관념과 상상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크게 가로막았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였다 해도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크게 방해하여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어도 여전히 믿음이 너무 작고, 자주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서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바로 관념과 상상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선행을 베풀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보면 금전을 베풀어야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에게 고마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고마워해야 할 분은 하늘에 계신 저 하나님이십니다. 이건 하늘에 계신 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듣고 나면 그는 아주 흡족해하고 크게 위로받는다.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분명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위로받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가 받는 위로는 진짜이겠느냐, 가짜이겠느냐? (가짜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짜이다. 그는 그 위로가 든든하고 진실되며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이런 위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위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의 관념으로 인해 생겨난 허상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처신해야 하며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행하면 하나님이 분명 흡족해하기에 결국 틀림없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확신’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람의 관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관념과 상상이 그에게 이런 확신과 허상을 심어 주어서 그는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겠느냐? 하나님에게 이는 그저 사람의 좋은 행위 중 하나로, 관념과 인위적인 호의에 따라 행한 행위일 뿐이다. 언젠가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여 책망을 받고 나서 좋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반발심이 생겨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여태껏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고, 나보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나님만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 문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람의 관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럼 주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입니다.) 주요 원인은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관념 때문에 사람은 늘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에게 이런저런 요구와 판단, 평가 기준을 갖게 된다. 또 관념 때문에 사람은 늘 잘못된 생각과 관점으로 사물의 옳고 그름, 사람의 좋고 나쁨,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충성심이나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가늠한다. 이런 잘못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은 비록 식사나 수면 등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머릿속과 마음속에 존재하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사람을 쫓아다닌다. 만약 관념을 제때 해결하지 않는다면 관념은 수시로 너의 생각과 판단, 행동,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좌우할 것이다. 이제 명확히 알겠느냐? 관념은 아주 심각한 문제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있는 것과 같아 사람은 하나님의 진면목과 진실한 성품, 진실한 본질을 볼 수 없게 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이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 관념으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어떤 내적 상태에 자주 빠지겠느냐? 사람이 관념 속에 살면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 순종한다 한들 그 역시 관념과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관념과 상상에 근거한 것에는 사탄과 세상에 속하는 개인적인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는 문제는 아주 심각한데, 이는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큰 문제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온갖 의심을 품는다.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품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겠느냐?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의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하나를 판단하게 된다. 사람의 이런 행위는 무엇이냐?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정죄하는 것이자 판단하고 모독하며 겨루는 것이다. 심각한 경우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하나님과 ‘결투’를 벌이려고까지 한다. 사람의 관념은 가장 심각한 경우 어느 정도에 이르겠느냐?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기도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부정하고 정죄하며 모독하고 배신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뿐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아주 끔찍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주 끔찍한 문제이다. 관념은 사람에게 백해무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관념이란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교제하고 해부하는데 이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보통 너희는 어떤 관념을 가지게 되느냐? 어떤 생각과 인식, 평판이나 관점이 관념에 속하겠느냐? 이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사람의 행위는 관념에 속하지 않지만 행위 이면의 사상 관점은 관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의 관념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여러 관념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무엇을 얻고 어떤 길을 걸을지를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온갖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대한 관념이다. 사람은 특히 성육신에 대해 많이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많은 관념이 생긴다. 이는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갖게 되는 관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 하나님이 드러낸 성품,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 대해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념을 갖게 된다. 이 세 가지를 더 상세하게 나눌 수도 있지만 사람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씩 교제해 보도록 하자.

우선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여러 관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측면의 관념은 비교적 광범위한 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낯설든 낯설지 않든, 예전에 믿은 적이 있든 없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갖고 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될 거야. 천국에 들어갈 거야.’ 그러고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거나 확정하게 되면서 여러 관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고 난 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상상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담배, 술, 도박은 다 끊어야 하고 사악한 곳에도 가면 안 돼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웃는 얼굴로 예의를 차려야 하죠.” 이는 무엇이겠느냐? 관념이겠느냐, 아니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이겠느냐? (마땅히 해야 할 행위입니다.) 이는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이는 관념도, 상상도 아닌 합리적인 생각이다. 어떤 연로한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나이도 많고 하나님을 믿은 지도 오래됐으니 말하고 행동할 때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점잖고 품위 있는 모습과 반듯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야지 히죽거리며 채신없이 굴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그는 젊은이와 말할 때 엄숙한 태도로 케케묵은 이야기만 한다. 이를 본 젊은이들은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여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예배할 때 형제자매가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는 눈의 욕망을 통제해야 하고 옳지 않은 것은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신을 단속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투덜거린다. ‘저 젊은이들은 저렇게 여유롭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답답함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해.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은 걸 어쩌겠어!’ 그는 입으로는 보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몰래 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가식적으로 구는 것이다. 이런 가식적인 모습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왜 이런 궁상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보여야 할 행위와 태도에 대해 상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의 지배를 받다 보니 말과 행동이 괴이하고 가식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아주 자유롭지만, 그는 꼭 죽은 사람처럼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생기나 사람다운 모습은 조금도 없다. 그는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 늙은이 티를 좀 내야 하지 아이처럼 순진하게 굴면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가 보이는 모든 모습은 다 가식적이고, 전부 큰 인물을 흉내 내 억지로 꾸며 낸 것이다. 이런 가식적인 행위를 보이면 다른 사람이 보고 배울 게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걸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느냐? 첫째, 그가 가식적이라고 생각되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둘째, 그가 아주 위선적이라고 생각되고 또 역겹고 징그럽게 느껴지고 그와 대화할 때 마음이 답답할 것이고 속박받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자칫하면 그에게 이렇게 꾸짖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이보게 젊은이들, 지금 자네들 꼴을 좀 보게. 자네들은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어! 매일같이 명절을 쇠듯 잘 먹고 잘 입으면서도 이것저것 가리기나 하고 만족할 줄도 모르잖아. 우리 어렸을 때는 끼니도 간신히 때웠는데 말이야.” 이렇게 꼰대질을 하며 다른 사람을 꾸짖다 보니 젊은이들은 그를 피하기 일쑤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이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예의 없다고 비난까지 한다. 이런 말은 관념과 사람의 뜻을 담고 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겠느냐? 하지만 이는 모두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그가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이롭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실행하고 처신하며 하루하루 생활하면 과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겠느냐? 그는 이렇게 묵상해 보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요구하셨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 내가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그는 분명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생각해 보았다면 설령 분명하게 생각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입니다.) 그가 관념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보여야 할 행동과 태도를 그릇되고 터무니없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이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전통문화의 영향도 있고 학교 교사의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노인은 채신없이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갖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상한 행위를 할 때도 있고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다. 어쨌든 한눈에도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행위가 이상하든 표정이 이상하든 그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진리와 분명 거리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일 뿐인데 마음속에 뿌리내린 관념 때문에 이런 황당한 행동 방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지 못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일부 기이한 행위와 태도, 그리고 황당한 행태를 보이게 되고, 젊은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지 못하고 상상과 관념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으면 그들 역시 일부 잘못된 태도와 행위를 보이게 된다. 그럼 어떤 잘못된 행동과 태도를 보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젊은이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생기발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른이 되지 않는 갓난아이일 뿐이야. 그럼 우리는 말하고 걸을 때도 어린아이처럼 굴어야 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지 알겠어. 어린아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깨달았고. 예전에는 늘 간사한 사람이 되어 너무 노련해 보이고 무감각하고 우둔해 보였어. 앞으로는 좀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야지.’ 그러고는 현 사회의 젊은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관찰하여 일련의 행동 방식을 정리해 낸 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대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늘 어린아이같이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과 말하고 응석을 부리는데, 마음속으로 이런 목소리야말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일부 기이한 손짓을 하여 보기에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하나님이 말하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생기발랄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깨닫지 못하고 그저 위장, 모방, 가식 등 표면적인 행위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치우치게 이해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의 행위와 행동 방식, 그리고 이방인의 조류에 결부하기까지 한다.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으며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하며 혹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전통 문화 속이나 과학 지식 속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이방인의 지식 속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 처신의 근거를 찾으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어쨌든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 사람에게 제시하는 모든 요구는 사람이 어느 차원까지 이해할 수 있든 모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 절대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행위도 아니며, 특정한 행동 방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으로, 사람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원칙과 기준이다. 사람은 이 원칙을 파악하고 갖추어야 한다. 이런 세세한 문제를 분명하게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느 정도 도리만 깨달을 수 있을 뿐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는 어렵다.

조금 전에 표면적인 행위 측면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는 관념과 상상에 대해 교제했다. 이에 관해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느냐? 관념에 대해 얘기하자면, 관념은 과연 올바른 것이겠느냐, 아니면 잘못된 것이겠느냐? (잘못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관념은 명백히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에 위배되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근거 없이 상상해 낸 것이든, 아니면 근거가 있는 것이든, 어쨌든 모든 관념은 다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럼 관념을 교제하고 해부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에게 우선 관념이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관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동시에 진리란 무엇인지 깨달아 진리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 것이다. 네가 가진 관념이 아무리 일리 있고 근거가 충분해도 결국에는 관념일 뿐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체할 수도 없다. 네가 만약 관념을 진리로 여긴다면 진리는 너와 무관해지고, 너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무관해지며 너의 믿음은 보잘것없어진다. 네가 너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은 진리와 무관해지고 하나님과도 무관해지며,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정죄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이다. 너희는 이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것이다.

관념을 해결하는 첫걸음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무엇이 관념인지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영화를 막 찍기 시작했을 때, 영상 제작팀에서 아주 역겨운 일이 발생했다. 사람의 관념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일을 꺼내 해부하는 것은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분별력을 길러 주고 너희가 이 일을 기억하여 관념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관념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해부를 마치고 나면 분명 너희 모두 이 일이 큰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 어떤 색깔과 스타일의 옷을 선택할지의 문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난히 보수적이라 그런지 전적으로 회색과 황토색 옷을 골랐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어째서 저런 색의 옷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회색과 황토색이어서 장면 전체가 무척 어두침침했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왜 여러 가지 색깔을 고르지 않았을까? 예전에 분명 옷은 여러 가지 색깔을 입어도 되고 스타일도 적절하고 대범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집의 요구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회색과 황토색 옷감을 골라 옷을 만든 것이겠느냐? 어째서 이런 행위를 한 것이겠느냐? 이는 반성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 일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말도 듣지 않으며 순종하지도 않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 내면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본성은 무엇이겠느냐? 이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핵심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마음이 강퍅한 것이다.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것이고 진리를 구하고 싶다고 하지만 행동할 때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만약 개인의 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자기’를 최우선으로 여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너 자신의 생명 진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네 행동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역과 영광, 그리고 교회의 명성과도 관련된다. 그러니 사람이 계속 자기 뜻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쉽다. 하나님 집에서는 개인의 옷차림에 간섭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는 가볍지 않고 단정하여 남들이 보고 배울 게 있을 정도면 된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데 하나같이 진부한 회색과 황토색 옷을 입자고 한다면 이것이 적절한 주장이겠느냐?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관념에 기대어 일 처리하는 것이다. 회색과 황토색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지표이자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이런 색깔을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색깔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이다. 이런 색깔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만약 관념에 기대어 일 처리하고 이런 색깔을 일종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관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과 행동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이 관념과 상상을 진리로 여기고, 회색과 황토색 복장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상징적인 옷차림으로 여기면서 진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는 제쳐 놓고 배척하며 사람의 관념과 기준으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실 옷의 색깔과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은 외적인 일로, 진리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사람의 관념으로 인해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하고 일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이는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닥치고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 관념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람은 계속 이런 관념을 따른다. 늘 이런 관념 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에 휘둘리고 지배당하며 통제받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 행위, 생활 방식, 처신하는 원칙, 인생의 방향과 목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것마저도 관념의 색채를 띠게 되고, 사람은 진리상에서 조금도 자유와 해방감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10년, 20년 동안 관념을 고수하고 지금까지도 초반의 관념이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아무도 관념을 해부해 주지 않았고 스스로도 전혀 성찰해 본 적 없으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적은 더더욱 없다. 관념을 진지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성과가 있겠느냐? 성과가 없을 게 뻔하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람이 끊임없이 관념을 해부하고 인식하고 난 뒤 관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점차 개선되는 것이다. 이 말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너의 관념이 하나님을 이제 막 믿기 시작했을 때의 상태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해 너희가 의존하는 관념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냐? 너희가 항상 바람직하고 진리에 부합하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무엇이냐? 너의 행위와 추구,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 영향을 끼쳐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늘 미적지근하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태에 놓여 있게 하는 관념은 무엇이냐? 너는 스스로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 고생하려는 의지가 커졌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다. 너희 스스로 해부해 보면 사람마다 의존하는 관념이 있을 것이고 그중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 총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어떤 관념들이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또 어떤 관념과 상상이 사람의 진리 실행을 방해하는지, 사람의 본분 이행,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간의 정상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지,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말해 보겠느냐? (제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비교적 큰 관념은 바로 매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관념과 상상이다. 그럼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지가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만약 본분을 이행할 때 제멋대로 군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으로, 그런 자는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징벌까지 받게 된다. 너희는 이런 일을 다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간파하지도 못하면서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까지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겠느냐? 이런 생각은 그저 사람의 일방적인 소망에 불과하다.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너희 내면에는 관념과 상상에 속하는 것이 너무도 많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상상, 이해, 정의, 이런 것들이 다 관념이다. 너희는 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저는 이행한 본분이 중요할수록, 하나님을 증거한 성과가 많을수록 공로가 더 많고 하나님에게 더 인정받으며 나중에 복도 더 많이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관념은 모두 사람이 근거 없이 상상하고 추론해 낸 것이다. 설령 근거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근거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의 지배를 받아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이런 생각의 지배를 받아 행동하면, 이리저리 행동하다가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했고 원칙을 위배했으며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소극적으로 변한다. 언젠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상상과 관념에 기대어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많은 세월이 낭비되었고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다. 너희가 해결하지 못한 관념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저를 축복해 주시고 저에게 이득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저를 위해 활로를 열어 주셔야 하며, 하나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환경이 닥쳐 어려움이 생기면 저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렇게 이해한다. 사람들은 이득을 얻으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만약 이득을 얻지 못하면 틀림없이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이런 관념이 해결되었느냐? 너희는 돌아서기 시작했느냐? 이런 관념이 너의 행위를 좌우하거나 네가 나아가는 방향에 영향을 끼칠 때 너는 해결하고자 진리를 구했느냐?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규정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도록 우리 가정에 축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평안하도록 보살펴 주셔야 해. 그리고 내가 본분을 이행하긴 하지만 이건 하나님의 사역이니까 내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 위험, 시험이 닥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마땅히 모든 책임을 지시고 모든 일을 잘 안배해 주셔야 해. 만약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그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런 관념이 생기기 쉽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이런 관념이 자주 나타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항상 관념과 상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뿐, 관념을 해결하려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생명 진입도 있을 수 없다. 너에게 진리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게 되고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 만약 하나님을 믿을 때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자주 예배하고 설교를 듣고 영 생활도 매우 정상적이지만, 행동하고 처신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관념에 기대고 관념에 근거하며 관념으로 여러 일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면, 이런 사람은 관념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관념 속에 사는 사람이라면 설교를 얼마나 듣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시든 변화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과연 그의 이런 믿음을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인정할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 내면의 관념을 해부하는 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별 탈 없이 평안할 때, 전통 종교 의식을 지킬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역하고 진리를 선포할 때면 온갖 관념을 갖는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예배할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다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다 어려움에 부딪치면 수많은 관념을 갖는다. 이 밖에도 육적으로 편안하고 삶을 즐길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다가 병에 걸리고 환난을 만나면 자연스레 관념을 갖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이 평탄했는데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판단당하거나 차별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 체포당해 고문에 시달리다가 후유증이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는 동안 난 왜 일이 순조롭지 않은 거지? 내가 믿는 분은 참하나님이시잖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켜 주지 않으시는 걸까? 내가 악인에게 구타당하고 마귀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시고도 왜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체하시는 거야?’ 사람에게는 이런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런 관념이 생기는 연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상 나는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봐 주셔야 해. 내가 먹고 거주하는 걸 신경 써 주셔야 하고, 내 앞길과 운명, 나와 우리 가족의 신변 안전에도 신경 써 주셔야 해. 내가 모든 일이 잘되고 별 탈 없이 평안하게 살도록 해 주셔야 한다고.’ 만약 현실이 자신의 요구나 상상과 다르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좋지는 않구나. 그렇게 쉽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토록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시련도 겪어야 하는 거였어. 왜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시지?’ 과연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지는 않는 것이냐? 하나님은 당연히 좋은 뜻으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얻어 진리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진리는 구하지 않고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평가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고통 없이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장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어떤 사람은 육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한평생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된다. 누구든 다 고통을 받아야 한다.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모든 사람이 육체적 삶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체험하게 한다. 고통은 너에게 다양한 느낌과 이해를 갖게 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인생의 체험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인데, 사람의 경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네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이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책임이다. 무슨 책임일까? 이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네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고 견딜 수 있으면 그것은 간증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워하며 부끄럽게 여기는데,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병고 속에서도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갖가지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할 수 있다면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이는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간증이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간증이며, 사탄에게 수치를 안기고 사탄을 이기는 간증이다. 그러니 어느 측면에서 고통을 받든 모든 피조물과 모든 하나님 선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이해하고, 공과를 배워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 다 이렇게 안배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특정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준 것은 특정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부탁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너는 응당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그런 요구를 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왜 그런 것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네가 그런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면 네 패괴 성품과 관념, 패역을 해결할 수 있어 너에게 다시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거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너는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간증을 함으로써 사탄에게 수치를 안길 수 있으며,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있다. 네가 만약 자기 관념과 견해대로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해 주셔야 해. 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복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겠느냐? 네가 이해하는 복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먹을 것 걱정 없고,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는 것,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평생 평안하고 순탄하게 윤택한 삶을 살고 조금도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너는 그런 것들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복이겠느냐? 그런 것들은 복이 아니라 화이다. 육적인 안일을 탐하고 즐기는 길을 걷는다면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이 사악한 세상에 갈수록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창조주의 부름을 받을 때 아쉬움이 많아 이런 육적인 누림을 내려놓지 못한다. 하나님이 네게 부탁을 맡기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라고 해도 너는 자기 몸을 몹시 아낀다. 오늘은 몸이 편치 않고 내일은 기분이 좋지 않고, 부모와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육적인 일들만 생각한다. 또 제대로 이행하는 본분도 하나 없으면서 누리기는 남들보다 더 잘 누리려고 한다. 이렇게 기생충처럼 살면서 네가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간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생 부귀하고 평안하고 주변 사람 모두 자기 덕을 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낼 뿐 아니라, 가난해지지도 않고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 닥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상상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정상이겠느냐, 아니면 비정상이겠느냐? 틀림없이 정상일 리가 없다. 그럼 이런 관념과 상상은 너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게 하겠느냐? 그것은 오직 너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에게 반항하도록 할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리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는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다. 즉, 사람이 이런 관념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마음속에도 덩달아 패역하고 소극적인 상태가 생겨난다. 이럴 때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람에게 맡긴 하나님의 부탁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여러 요구를 깨닫고 나면, 이 모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하고 처신할 수 있다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해결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레 관념을 버리게 되는데, 그때부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더욱 정상적이 된다. 관념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를 해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관념을 내려놓고 해결한 뒤에야 비로소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마음속 관념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너희가 생활 속에서 자주 영향을 받고 지배를 받는 관념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네가 가진 관념이 자연스레 튀어나오며, 그 후 너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 따지고 하나님과 겨룬다. 이로 인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금세 변해 버린다. 처음에 너는 자신이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아주 충성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에게 일생을 바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갑자기 또 마음이 변해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은 것과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다. 심지어 너를 택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갑자기 변하게 만드는 관념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을 마련해 저에게 시련을 주시고 저를 드러내실 때,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계속 본분을 이행해 왔으니 제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이상 하나님도 저를 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일종의 관념이다. 너희는 이런 관념을 자주 갖지 않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는 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는 것이 너희를 원하지 않고 구원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역시 일종의 관념이다. 그럼 이런 관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상상에 기댄 것이겠느냐, 아니면 근거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좋은 결말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말했느냐? 사람의 이런 생각은 온전히 사람 스스로 규정한 것이다. 이제 그것이 관념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핵심적인 문제는 이런 관념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 관념이라고 의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런 관념은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우선 이런 관념이 지식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사탄 철학에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떤 해악이 있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명확히 알고 나면 자연스레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살펴본 다음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조하여 관념을 해부해야 한다. 관념은 잘못된 것이고, 황당한 것이며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분별할 줄 안다면 기본적으로 관념을 해결한 것이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지도 않는다면 관념이 왜 잘못된 것인지 철저히 분별할 수 없고 관념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설사 관념임을 알지라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너의 관념과 하나님의 요구가 서로 모순될 때, 너는 네 관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기는 해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네 관념을 고수할 것이며, 관념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 관념도 성립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 진입이 없으며 분량도 크게 부족하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종착지와 결말, 본분의 조정이나 교체에 특히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 대해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일단 교체되어 지위가 없어지거나 혹은 하나님이 싫어한다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규정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원하지 않고 결말도 이미 다 정해졌으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사람이 듣기에 아주 이성적이고 염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는 어떤 생각이냐?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자 자포자기다. 그가 자포자기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 간파하지 못하며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포자기하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알고 있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사람은 관념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노력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고 구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자포자기한다면 하나님은 무척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그 사람이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서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것도 사람의 관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취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다. 네가 자포자기하여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고 네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한다. 만약 네가 “저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최선을 다해 실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은사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것이며, 만약 별 능력이 없다면 순종하고 따르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저는 제 본분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면 계속 따르거라. 하지만 너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뿐이지 하나님은 영원히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든 최종에 구원받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것은 실패를 한 번 경험하거나 책망과 훈계, 또는 심판과 형벌을 한 차례 겪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온전케 되기까지 수백 번의 연단을 겪었다. 끝까지 힘쓰고 살아남게 되는 사람 중에 그저 8~10번의 시련과 연단을 겪고 길 끝까지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을 보면 관념이 생기고, 반발심이 생긴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를 좋아하지 않고, 너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는 악을 행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이니 너만 보면 마음이 언짢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은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런 말씀들은 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규정했어.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한 이상 나도 하나님을 안 믿을 거야.’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면 사람의 패괴된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을 보고 자주 관념과 오해가 생겨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겨냥한 거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포기하고 구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으로 변해 대성통곡을 하면서 더는 하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규정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포기하는지 모르며,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포기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한쪽에 내버려 두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전부 원칙과 배경이 있다. 너는 이 세부적인 일에 관해 밝히 알지도 못하면 쉽게 예민해져서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근거로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이는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할 때 주로 사람의 어떤 면을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고 드러내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이다.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은 사람의 사탄 성품과 사탄 본성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다양한 태도와 행동이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늘 자신만의 속셈과 목적을 품고 있는 것을 정죄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죄가 사탄 성품이 있는 사람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것도 밝히 알지 못한다면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늘 이것저것 의심하며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너는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했다고,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소극적으로 변해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신을 포기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이는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잠 10:21)라는 구약 성경의 구절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포자기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규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건 어떤 한 사람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견해를 선포한 것이다. 이는 전부 진리와 원칙에 속하는 말씀이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화나거나 분노할 때 한 말씀이라고 해도 그건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고, 이 말씀은 곧 진리이며, 나아가 원칙에 속한다. 사람은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절대 어떤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최후의 종착지나 상과 무관하며, 최후에 내리는 벌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심판하거나 책망하는 말씀이고,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이고, 사람을 깨우치고 지적하는 말씀이자 하나님의 마음속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심판의 말씀 한마디에 쓰러지거나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한다. 이런 자는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말도 안 통하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자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연약해졌다가도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그는 ‘안 돼. 계속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 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삶은 아무 가치가 없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 한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본분을 이행하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고,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겠느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난을 좀 겪었다고 늘 원망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마땅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하는지 봐야 하고 그 요구대로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부족하다고 하면 너는 부족한 것이다. 자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규정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대항하지도 말고, 순종하며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러면 실행 길이 보이지 않느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떠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가끔 하나님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하나님은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단지 네가 자신을 반성하도록 한편에 내버려 둔 것이다. 네가 혐오스러워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정말 너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힘을 들이며 본분을 이행하지만, 그의 본질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님 편에서는 사실상 그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징계하고, 채찍질하고, 심판한다. 심지어 정죄하고 저주까지 하며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갖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차갑게 대하고 상처를 주는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게 존엄도 없는 것 같고, 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에 교회를 떠나 버린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이성적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여 저버린다. 사실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포기하고 마는데, 이것이 정말 양심적인 행동이냐? 하나님은 가끔 사람을 멀리하기도 하고,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한동안 내버려 두기도 하지만, 이는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지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이나 불신파, 적그리스도를 진정으로 포기한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성령 역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성령의 깨우침이 없는데, 혹시 하나님께서 저를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이는 착각이다. 여기에 성품의 문제도 있다. 이것은 억지 부리고, 늘 자신만의 이치를 따지고 막무가내이며 조금의 이성도 없는 것이다. 이는 성품 문제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너를 포기했다고,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하나님이 네 결말을 규정했느냐? 하나님은 그저 네게 화가 나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런데 너는 왜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고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냐? 네가 가끔 성령 역사를 느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너에게서 말씀을 읽을 권리를 박탈하지 않았고, 네 결말을 규정하지 않았으며, 네가 구원받는 길도 차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괴로울 게 뭐가 있느냐? 자신의 내적 상태가 좋지 않고 마음가짐과 사상 관점에 문제 있으며 마음 상태가 비뚤어졌는데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는 않고 늘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책임을 다 하나님께 미룬다. 나아가 “하나님이 저를 원하지 않으시면, 저도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생떼를 부리는 것 아니냐?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 아니냐? 이런 사람은 너무 억지스럽고,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고 말이 안 통한다.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구원받기도 어렵다.

너희는 이 말을 기억해라. 베드로는 수백 번의 연단을 겪고 나서야 온전케 됐다. 너희의 관념과 상상으로는 수백 번의 연단이란 하나님을 따르면서 갖은 고생을 하고 결국 하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렬한 일생일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왜 그것을 사람의 관념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손에서 안배되고 진행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백 번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베드로를 수백 번 연단했는지, 이 수백 번이란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이해한다. 그 결과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중 일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실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인도하며 온화한 태도로 이야기한다면, 사람에게 시련은 영원히 빈말일 것이고 그저 하나의 단어이자 정의, 개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에게 자주 하는 사역은 다음과 같다. 때로는 병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닥치게 하여 너를 낙담하게 하고 연약해지게 한다. 또 때로는 어려운 환경이 임하게 하여 네가 대응하기 어렵게 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한다. 이런 것들이 너에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뜻대로 되지 않는 이 모든 것, 모든 고통과 고충, 어려움, 심지어는 사탄의 시험에 이르기까지, 만약 네가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시련으로, 수백 번의 시련 중 하나로 여기고 받아들여 그 속에서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네 내적 상태는 변화할 것이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도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시련이 닥쳤을 때 거부하고 무작정 피하고 반항하며 맞선다면 이 수백 번의 시련은 너에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빈말로 남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너에 대한 태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를 몰라 불쾌함을 느낄 때, 만약 혈기와 육으로 산다면 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좋지 않은 태도로 그를 대할 구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에게 온전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너에게 닥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련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다양한 방식의 시련인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 훨씬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후련해진 것 같지 않으냐? 너희가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너희의 행위와 관점을 비춰 볼 수 있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이야기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주로 어떤 측면과 관련이 있느냐? 하나는 표면적인 행위 측면으로, 바리새인처럼 무척 고상하고 신사적인 척 위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식주 측면이다. 이 밖에,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이해 측면도 있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복을 받고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욥은 이 측면을 어떻게 체험했느냐? 욥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그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련이자 사탄의 시험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 몇몇은 욥에게 닥친 시련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들은 욥이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화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욥은 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겠느냐? 그것은 바로 욥이 이런 일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에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는 기간에 그는 체험을 했고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했으며, 그에게는 사람의 관념과 생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러니 하나님의 손이 임했을 때 그가 오해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않았기에 원망하지 않았고 거역하지도 않았으며 진실로 순종할 수 있었다. 옳은 말 아니겠느냐? (옳은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옳겠느냐? 사람이 만약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 ‘아멘’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로 여긴다면, 올바른 것, 기준, 지고한 것, 사람이 실행해야 할 원칙으로 여긴다면, 순종하게 되고 오해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오해할 때 항상 보이는 모습이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자신의 생각이 있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고 저촉된다. 이럴 때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겉으로는 받아들였을지라도 위장한 것일 뿐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 때도 있다. 반드시 진리를 구하여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찬성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과 합하게 된다. 네가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해하며 심지어 반항하고 대항한다면 이는 네 내면에 무엇인가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자기 내면의 것을 해부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네 관념은 해결될 것이다. 반면, 치우치게 이해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거나 혹은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조할 줄도, 인식하거나 해부할 줄도 모르고, 관념이 생겨도 알지 못한다면 네 관념은 해결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속마음을 말하면 체면을 구기고 무시당할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만약 누가 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지도 않으면서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분별할 줄 모르며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럼 네 관념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해결될 수 없다. 너에게 닥친 일이 네 관념과 관련이 없을 때 너는 마음이 아주 편안하며,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네 관념을 건드리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튀어나온다. 반발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느냐? 때로는 불만을 가지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도 불만을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더욱 깊어지고, 거기에다 패괴 성품이 팽창하면 관념을 퍼뜨리고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순간, 이는 생각과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탄 성품의 표출이다. 사람이 무지몽매하여 행위 면에서 조금 반항하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품 면에서 직접적, 의식적으로 반항한다면 이는 골치 아픈 일이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념이 있으면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해결해야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를 해결할 수 있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를 해결해야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에게는 이제 관념이 없습니다. 저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도 다 해결됐고요. 저는 이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걸로 되겠느냐? 관념을 해결하는 목적은 단지 관념을 해결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오해하지만 않으면 되죠. 그러면 만사가 순조롭고 안전해질 거예요.” 이는 진실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진실로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의 관념을 해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념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느냐? 관념을 해결하는 것의 최종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너는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그럼 진리를 깨달았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면 설령 네게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없다고 해도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해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별 탈 없이 평안할 때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단 사람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이 닥치면 자연스레 관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하며 심지어 불평하기도 한다. 사람이 이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때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어째서 개인의 이익과 관련되기만 하면 관념과 오해가 생겨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사탄 본성과 사탄 성품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 개인의 이익과 관련되거나 관념, 상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오해는 환경에 따라 생겨난다. 만약 그가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관념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하고 그와 하나님의 관계도 영원히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관념이 있음에도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한 것은 바로 패괴된 인류의 관념과 상상, 지식, 철학, 전통문화 등 진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분석함으로써 사람에게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어떤 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사탄의 철학이고 무엇이 사탄 논리인지 깨닫게 한다. 이런 일들을 간파하는 순간 사람은 올바른 인생길을 추구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 요구대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관념을 분석하시는데, 제게는 관념이 없어요. 보통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 아니면 신학자나 바리새인이 관념을 가지고 있죠.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겠느냐? 그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자신을 비춰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 이제 일반적으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고 진리도 어느 정도 깨달으면 모든 사람에게 관념과 상상에 속하는 것, 그리고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이를 분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분별력이 생기고 자신도 성장하여 진리를 더욱 빨리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공개적으로 자신을 분석할 수 있다. 관념을 분석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을 내려놓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를 해결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신경 쓰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길에 진입하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늘 이렇게 실행하면 궁극적으로 당연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한 측면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사악한 관념과 상상, 또는 지식에서 비롯된 것과 같은 많은 부정적인 사물을 거부하고 저항할 면역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종교 지식인, 신학자, 또는 교계 목사나 장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너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의 갖가지 관념과 상상, 온갖 사설과 그릇된 논리를 진리로 반박할 수 있다. 이는 네가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 분별력이 있고, 진리를 좀 깨닫고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너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나 종교 인물들을 마주할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가 말하는 지식, 학문, 철학, 심지어 그의 전체적인 사상과 이론은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네가 이미 종교의 글귀와 도리, 관념과 상상 같은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더 이상 그것들에 미혹되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 부족하다. 너희는 종교 사기꾼이나 바리새인, 혹은 지위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겁을 집어먹는다. 그가 하는 말이 옳지 않고, 관념과 상상이고, 지식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면서도, 어떤 방법으로 대처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분석해야 할지, 어떤 말로 그를 폭로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이는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자신을 분석하고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다른 사람을 간파할 수 있지만,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영영 다른 사람을 간파할 수 없다. 사람과 일을 간파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기반이 되게도, 생명이 되게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간파할 수 없다.

각종 관념과 상상을 해결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생기고,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사람에게 생긴 각종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해결되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본질,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여러 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어떻게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되겠느냐? 바로 사람이 여러 가지 관념과 사람의 상상을 내려놓고, 지식, 철학, 전통문화, 또는 세상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와 관계된 여러 가지 관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는 순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되고, 또한 진리로 문제를 사고하고 바라보게 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갖은 관념과 오해를 해결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곧장 개선할 수 있고 자신의 생명 진입을 위해 길을 닦을 수도 있다. 사람이 이렇게 변화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겠느냐?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변화한다. 이 관계에서는 겨룸도 시험도 없고 거역도 거의 없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 많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이해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에게 더욱 충성을 다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정직한 마음이 더 많아지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게 된다. 사람의 관념이 해결되고 나면 삶에 이런 변화가 발생한다. 이렇게 변화할 수 있다면 너희는 관념을 해결하고 싶지 않겠느냐? (해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관념을 해결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사람은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자신의 관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집착하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일생 동안 추구하고 동경해 온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사람이 스스로를 저버려야 하고, 자신이 사탄 세계에서 배운 지식과 철학, 심지어 생존의 길까지 내려놓고 진리를 기반으로 하고 진리를 생존의 근간으로 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은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고통은 육의 질병이나 삶에서 비롯되는 괴로움과 어려움이 아니라 너의 마음속 여러 사물과 인간에 대한 다양한 견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여러 측면의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세상, 인생, 인간,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과 견해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조금 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교제하면서 너희가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었다. 나중에 너희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고 함께 교제하면서 주어진 사례들로 여러 상황을 미루어 봐야 하고, 그럼으로써 점점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여러 관념을 성찰하고 인식하며 분석한 후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어쨌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다양한 상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든 아니면 결혼이나 가정, 또는 일에서든 일단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판단하면서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은 왜 나를 지켜 주지도 축복해 주지도 않으시지?’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이 늘 “하늘은 불공평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은 생활이 편안하고 행복할 때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재난이 닥치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나면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고 일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다 예비해 줄 것이니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맡기면 하나님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병에 걸리면 하나님이 치료해 주며, 재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날이 오면 우리 모두 모습이 변화할 것이고,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다. 사람은 본분 이행의 필요에 따라 익혀야 하는 본분과 관련된 업무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 그게 바로 실무와 본업에 힘쓰는 것이다. 공상을 해선 안 되고 상상에 기대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자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이는 절대로 바꿀 수 없고 반드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고 사람이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관점이다. 이는 관념이 아니라 진리이며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사람의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만약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다면 사람은 그 일에서 통과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집요하게 관념을 고집하고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와 옳은 것,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네가 진리와 옳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네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고수한다면 너는 진리를 적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너희가 이런 원칙과 오늘 교제한 말들을 근거로 비춰 보도록 해라.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교제한 세 가지 관념 중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것이며 관련된 진리도 그다지 깊지 않으니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성육신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교제하겠다. 사람은 성육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 성육신한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 때 사람은 수많은 상상을 하지 않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성육신하면 무엇이든 알고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완벽해야 하며, 사람에게는 너무 높아 다가갈 수 없는 육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사람이 가지는 이런 상상이 바로 관념인데, 그것은 사람의 일부 판단이나 지식, 종교 신앙, 전통문화 교육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사람은 또 일부 새로운 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겼구나. 말씀은 이렇게 하시고 성격은 이러시구나. 어떻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나의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 리 없는데.’ 사실 하나님이 어때야 하는지는 사람 자신도 알지 못하고 명확히 말하지도 못한다. 사람은 계속 관념을 갖게 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책망하며 관념과 상상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고 하나님이 하는 일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관념이 끊임없이 밖으로 튀어나오며 마음속에서는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역시 하나님이 하신 게 옳아. 관념을 가지면 안 돼.’라고 생각하지만 관념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하고 여전히 불복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도대체 사람이야, 하나님이야? 하나님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지.’ 여기에 딱 걸린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찾아 교제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신이 너무 우매하고 믿음이 없으며 치우치게 이해한다고 비웃을까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혼자 참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 있든 없든,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생길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많은 진리를 선포했고 사람이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이런 문제를 아주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교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관념과 오해가 생긴다면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서 관념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고, 치우치게 이해하여 관념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해 관념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됐든 사람의 생각과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고, 혹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며 부인하고 대적하는 생각과 관점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관념이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교제하겠다. 아마 너희 중 많은 사람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어 봤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했을 때나 특정한 환경에서 누군가 너에게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혹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설날, 남들은 다 집에 돌아가 설을 쇠는데 그리스도는 눈보라 속에서 돌아갈 곳 없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고 누군가 얘기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크게 감동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오신 뒤 고생을 참 많이 하시네요! 인간이 깊이 패괴되어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받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요.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세요!” 그는 하나님의 위대함이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고 이 이야기에서 얻은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너희는 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왜 이런 이야기에 감동하겠느냐?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육신에 대해 관념과 요구, 그리고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 관념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만약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인간 세상에 오면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했는데, 만약 이 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인자의 생활 상태가 이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복을 누렸다면 사람은 탄복하지도, 격려를 받지도 않을 것이며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도 않고 조금만 고생을 해도 언짢아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은 응당 고생을 해야 하며 그래야만 모든 인간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와서 부귀영화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부귀영화는 세상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고생하러 세상에 오시는데, 고생을 다 겪고 나면 모든 인간이 할 말을 잃고, 그 일로 감동하고 탄복하여 하나님을 따르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님에게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에 아주 공감하고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 너희는 그 일이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알고 싶으냐? 너희는 그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길 바라느냐, 아니면 있었던 일이 아니길 바라느냐? 쉽게 답하기 어렵지 않으냐?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사람은 관념에 아주 부합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면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영웅적 모범이 사라져 버리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충격을 받지 않겠느냐? 타격을 입지 않겠느냐? 사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사람의 관념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그의 생활과 생활 환경, 삶의 질, 그리고 그의 의식주와 이동에 대해 평가 기준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 관념은 바로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와서 반드시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영향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람이 숭배하고 존경하며 우러러볼 만해야 한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으며 정상적인 사람은 갖지 못하는 일부 특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따를 가치가 있고 ‘능력이 뛰어난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관념과 상상이 만약 현실이 되면 사람은 의욕이 넘치고 확신에 차 믿을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이 사람의 관념, 상상과는 다르다면,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집권자들에게 쫓기면 사람은 ‘하나님이 쫓기는 고통을 받다니 내가 상상했던 영웅이나 구세주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며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된 것 아니겠느냐? 이런 관념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사람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유명 인사와 위인이 가진 형상의 영향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 정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유명 인사와 위인은 칫솔 하나를 이삼십 년 동안 쓰고 옷 한 벌을 수선해서 평생 입는 소박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어떤 유명 인사나 위인은 음식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게다가 밥을 다 먹으면 그릇까지 싹싹 핥아 먹으며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기도 한다. 마음속에 위인은 비범하다는 인상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이런 인상을 가지고 성육신한 하나님을 평가한다. 만약 하나님이 그 인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관념을 가지게 되고, 그 인상에 완전히 일치하면 관념을 가지지 않게 된다. 사람이 이런 것들로 그리스도를 비춰 보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유명 인사와 위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그들의 본성 본질이 정말로 성인(聖人)이겠느냐? 사실 유명 인사와 위인은 모두 마귀이자 마왕으로, 그중에는 정상적인 인성 본질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표면적으로 사람의 관념으로 평가하면 장점도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본성 본질과 행동거지로 보면 그들은 본질이 마귀요, 사탄이다. 너희가 마귀, 사탄의 형상을 성육신한 하나님과 대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원래부터 사탄 마귀는 위장에 가장 능하다. 그들은 겉으로 말하고 행동할 때는 항상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르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속으로 궁리하고 뒤에서 하는 일은 전부 떳떳하지 못한 마귀적인 짓거리이다. 만약 아무도 폭로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사탄과 마왕이 하는 말은 전부 외식하는 것이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이다.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늘 마귀와 위인의 형상을 성육신한 하나님과 대조하면서 맞지 않으면 언짢아하고 관념을 갖게 되며 관념을 계속 내려놓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겠느냐? 분명 많을 것이다. 방금 내가 했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일을 처음 들었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게 일어난 일인데 당사자인 나는 정작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참으로 우스운 일이고 사실이 아닌 엄청난 거짓말이다. 그때 그 환경에서 이 단계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인 형제자매는 많지 않았지만 일부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받아들였고, 게다가 그들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단계의 사역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사랑을 강조하고 절대로 그리스도를 문전박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설을 쇨 때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이들도 있었다. 더구나 형제자매가 그렇게나 많은데 내가 어느 집에 간들 대접을 못 받았겠느냐? 그렇게 말하면 마치 형제자매가 모두 패역하여 나를 맞아 주는 이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처럼 들린다. 그것은 형제자매를 모함하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근거 없는 일이고 저의가 불량한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너희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어째서 그 일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었겠느냐? 그건 사람이 성육신 하나님 자체에 일부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 욕망 또는 심리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회를 틈타 이런 이야기를 날조한 다음 극성스럽게 홍보하고 퍼뜨리며 거짓말을 보태 추론하고 조작했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그 일을 사실로 여긴 것이다. 내가 그 일을 해명하지 않으면 너희는 평생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깨달았느냐? 애초에 그런 일은 없었다.

너희가 성육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일을 더 이야기해 주겠다. 하나님이 이 단계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에서는 찬양을 어느 정도 만들어야 했는데, 그때 나도 한 곡 만들었다. 당시 이미 성육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증거된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만든 찬양을 보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이상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찬양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만드셨어요? 단어를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신 거죠?” 이 말을 들은 나는 상당히 답답했다. ‘가사를 쓰는 데 단어가 필요한가? 지식이 필요한가? 그럼 그의 눈에는 내가 선포한 말이 다 무엇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는 관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마음속으로 성육신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은 전부 단어요, 문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성육신 하나님의 행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말로 해석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사람은 거북해하고 역겨워했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럼 이 일은 어느 측면의 관념과 관련이 있겠느냐? 그도 성육신이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관념으로 이 일을 평가한다. 그는 그리스도라면 지식과 소양을 갖춰야 하고,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그들이 믿고 따르게 해야 한다고, 설사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자질과 재능, 능력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반드시 특출나거나 남다른 부분이 어느 정도 있어야만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격만 있으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리스도의 본질을 갖춰야만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념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생명 진입을 하는 것을 어떻게 가로막겠느냐? 사람은 늘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하나님의 육신을 분석하며 연구한다. 사람은 늘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구한다. ‘이 사람이 한 말이 과연 논리에 부합할까? 정상적인 사고에 부합할까? 어법에 부합할까? 저런 말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저 머리와 지식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며 의심한다. 어떤 관점이나 관념으로 이 사람을 평가하고 대하든,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진리를 얻지 못할 게 뻔하다. 네가 간파하지 못한 측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사람은 그가 과연 성육신 하나님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와 그가 폭로한 비밀을 통해 그가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그의 말은 모두 진리이자 생명이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늘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연구하고 그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그 사람의 신분과 본질, 그리고 그의 사역을 항상 의심할 것이다. 즉, 그 사람이 도대체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는 아마 하나님이 보낸 사자나 선지자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자의 내면에는 이 육신과는 맞지 않는 틀과 관념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맞지 않는데도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그대로 관념을 고수하여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믿어 보라고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관념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떠나라고 하면 그는 또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런 사람이냐, 아니냐? 비록 너희 중 대부분은 성육신 하나님임을 확신하지만, 사실 80~90%만 확신할 뿐 여전히 10~20%의 의혹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라도 기본적으로는 확신한다고 할 수 있고, 얼마 되지 않는 나머지 의혹과 의심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 정도의 관념은 해결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도의 관념이나 의심도 만약 제때 해결하지 않으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너희의 관념으로 볼 때 내가 너희를 어떻게 대해야 만족하겠느냐? 어떻게 대해야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대해야 하는 방식이라고 느끼겠느냐?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하고 모든 면에서 너희에게 관심을 갖고 너희를 보살펴 주어야 하는 것이냐? 언젠가 내가 너희 중에 황당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호되게 꾸짖고 따끔하게 폭로하고 심판하여 너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너희는 또 내가 하나님 같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누구보다 부드럽고 자애롭다고, 자애로움이 가득해야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너희의 관념과 상상 속 하나님에 부합하겠느냐? 아직까지도 하나님에게 이렇게 요구한다면 너희는 몹시 이성적이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성육신에 대한 관념에 관하여 너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20년 전 중국에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그때 나는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 나이대에는 사람들이 말과 행동이 노련하지도, 성숙하지도 못하고 젊은 사람 같은데, 이는 정상이다. 만약 늙은이 같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나이대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정상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했고 인류에게 정상적인 성장 법칙을 정해 주었다. 물론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이 법칙에 따라 생존하고 인생을 체험한다. 이 법칙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은 이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이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는 그의 일부 행위가 젊은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에 한번 이사할 때 일부 형제자매가 떠나면서 일부 필기구와 공책을 놓고 갔는데, 나는 버리기도 아깝고 다른 형제자매가 필기할 때 쓸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정리해 두었다가 몇몇 자매에게 쓰라고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관념이 생겨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 원하는 사람이 직접 가져가게 두면 되죠. 뭐하러 나눠 주는 거예요?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요!”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소한 일이겠느냐, 아니면 큰일이겠느냐? 만약 보통 사람을 어린애 같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정상이다. 그건 하나의 말일 뿐,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말이 관념이나 관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어떤 행동 방식이겠느냐? 그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그의 관념과 상상 속 성육신 하나님은 설사 나이가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더라도 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매일 엄숙하게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농담이나 잡담도 하지 않고 아주 점잖고 침착한, 지혜롭고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처럼 보여야 한다. 내가 필기구와 공책을 나눠 준 것처럼, 일단 늙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나 행동 방식을 보이면, 그렇게 하는 게 그리스도답지 않고 어린애 같다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같지 않다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내린 정의가 아니겠느냐? 이런 정의는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이겠느냐?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느냐? 설마 성육신 하나님을 두고 어린애 같다고 말하는 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겠느냐? 그의 이 말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그에게 이런 관념이 생기게 된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 인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부인합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육신 하나님은 창조된 인간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아주 초자연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성육신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 성질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정죄하는 것이자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가 이렇게 부인하는 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그는 왜 이렇게 부인하겠느냐?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이시니 정상적인 나이에 맞는 정상 인성을 드러내선 안 돼요. 당신은 스무 살도 되지 않았지만 쉰 살처럼 성숙하고 노련해야 해요. 당신은 하나님이시니 정상 인성의 성장 법칙을 위배하여 살아가야 해요. 당신은 초자연적이어야 하고 남달라야 해요. 그래야만 당신은 그리스도이고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이에요.’ 그는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관념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했느냐? 이 일이 없었다면 그의 관념이 드러났겠느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바로 이 일을 계기로 그가 드러난 것이다. 그가 이 일에 관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를 간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는 구할 여지가 있고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많은 일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똑같이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어떤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기다리며 진리를 구한다. 이는 성질이 다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간파하지 못했을 때 어떤 성질을 보인 것이겠느냐? 그는 바로 정죄해 버렸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관념이 생기면 사람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의심하고 심한 경우 정죄하며 부인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방금 성육신에 대한 관념의 예시를 세 가지 들었다. 이 세 가지 예시는 몇 가지 문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첫 번째 관념은 무엇이냐? (사람이 위인에 대한 정의로 성육신한 하나님을 규정한 것인데, 하나님은 응당 고생을 하여 전 인류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은 바로 성육신 하나님은 응당 고생을 많이 하여 전 인류에게 모범과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관념은 무엇이냐? (그리스도라면 응당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과 소양을 갖추어야 하고 그래야만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은 지식이나 은사, 또는 파악하고 있고 깨달은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적지 않은데, 이 역시 관념이다. 세 번째 관념은 무엇이냐? (그리스도라면 정상 인성을 표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육신 하나님은 초자연적이어야 하고 남보다 뛰어나야 하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느 측면에서 보든 평범하고 정상적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의욕이 없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심한 경우 부인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너희가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만약 근거 없이 이 방면의 진리를 교제하면 아마 너희에게는 아주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고 너희는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야기했으니 너희는 듣고 나서 실제적이고 이해하기 쉽다고 느낄 것이고, 이런 일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일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른 일이 닥친다면 너희는 진리로 평가하고 대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활용할 줄 안다면 너희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고 그 속에 담긴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활용할 줄 모른다면 너희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고 그 속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에서 그 속에 담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이 인식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입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하고 얻어야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다. 반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도 그 일 자체에만 흥미를 느끼고 그 일은 기억하지만 진리는 내팽개친다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속에 담긴 진리를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보람이 있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실제 사례를 들려줄 것이고 어떤 일이든 다 끄집어내어 분석할 것이다. 너희에게 인식을 가지게 할 수만 있다면, 너희가 진리를 깨달아 일을 간파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잘잘못을 논하는 일을 얘기하는 것을 무엇보다 꺼린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너희가 진리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얘기할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말을 좀 많이 해야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내가 귀찮게 잔소리한다고 너희가 싫어한다면 나도 말을 줄일 수밖에 없다.

내가 했던 이야기 가운데 사람이 해결해야 할 관념은 무엇이겠느냐? 우선 너희는 하나님이 성육신할 때 하나님이 이 육신의 인성 본질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정상 인성의 모든 활동에 종사할 수 있고 다른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고 인도하며 이끌 수 있다. 그의 정상 인성이든 신성이든, 아니면 성격이든, 어느 방면에서든 그는 반드시 그가 맡은 사역과 그가 이행하는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성육신을 평가하는 기준이자 그가 사역하는 기준, 정의하는 기준이다. 예수가 사역할 때 그의 인성은 이번의 성육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초자연적인 부분이 좀 있었다. 이적을 나타내는 것,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잠재우는 것,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 불리는 것 등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그의 정상 인성과 의식주는 사람이 보기에 모두 특별히 정상적이고 실제적이었다. 그는 서른세 살 반의 나이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다. 그는 서른세 살 반까지 사는 동안 매일, 매년을 일 분 일 초씩 살아가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수한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삼십삼 년 반을 살고 나서야 이 사역을 완수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이다. 하나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이 단계의 사역은, 너희에게 말하는 일과 교제하는 진리는 모두 너희의 분량, 너희의 생명 성장 정도, 그리고 하나님이 마련한 전체적인 환경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나는 어떤 진리를 교제하는 게 가장 적절할지, 너희에게 어떤 진리를 깨닫도록 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육신이 혼자 이런 일들을 사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영도 함께 행사하고 있다. 또한 이 사람이 협력할 때 하나님의 영이 이 모든 것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이 육신의 본질과 그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하는 것,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영의 모든 경륜과 영원히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나아가며 방향도 같고 상호 보조적이다. 하나님의 영이 만약 이 육신을 입지 않는다면 얼굴을 맞대고 너희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너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도,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육신만 있고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과연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사역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이 정상적인 육신은 반드시 매일, 매월, 매년 이렇게 조금씩 살아가야 한다. 그의 인성은 계속해서 성숙해지고 있고 경험도 끊임없이 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에서 해야 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 단계의 사역을 할 때, 나는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때부터 교회에서 사역을 하며 형제자매와 어울리기 시작했고 예배하고 교제하고 교회들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을 접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의 문장 구성 능력과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능력이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장이 너희와는 어떻게 다르겠느냐? 너희는 내가 한 말과 내가 교제한 진리를 통해 다시 체험해야 하고, 체험하는 과정에서 내가 한 말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리이며 옳다는 사실을, 너희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고 너희를 구원받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확증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떻겠느냐? 너희가 성장하는 동안 나 역시 끊임없이 깊이 성장하고 있다. 계속해서 너희를 알아가면서 나도 내가 교제하려는 말이 너희의 필요를 점진적으로 공급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우리가 분량이 점점 자라고,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변화하고 성장하며 하나님과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게 하려고 하시는데 당신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루시죠?” 사람은 이를 근심할 필요 없다. 나는 절대 구하지 않고, 금식 기도도 할 필요 없고, 혹은 비를 내려 달라고 구하듯 너희에게 공급할 말을 어서 공급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 육신 자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그는 이 직분을 이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를 선포해 사람에게 공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패괴된 인류의 차이이다. 그러니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나는 특별히 알아볼 필요 없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무언가를 공급하고 무언가를 교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꼭 필요한 것임이 틀림없다. 나의 말과 사역에 따라 나아가면 너희의 내적 상태는 갈수록 좋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생명도 이에 따라 점점 성장할 것이다. 동시에, 내가 너희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이 협력하는 일을 하는데, 사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인성에 협력하는 동시에 인성이 신성에 협력하는 것으로, 모두가 동시에 행사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너희를 양육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은 너희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너희를 깨우치고 너희에게 빛 비춤을 준다. 그다음 너희가 여러 진리에 진입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환경과 여건을 마련해 준다. 인성과 신성은 이런 식으로 협력한다. 그렇다면 육신과 영의 이런 협력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네가 만약 이 방면의 진리로 하나님의 경영 전체를 인식하지도 이 육신을 대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영영 이 육신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이 육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는 대체 어떻게 사역하는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면 너는 영원히 그가 사람인지 하나님인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 면을 간파하거나 이 면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육신인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시에 성령도 협력하며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 인류 가운데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영이 일하는 동시에 육신도 영의 일에 협력한다. 그들은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며 하나가 되어 영원히 충돌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시련이 닥치면 제가 공과를 배우도록 성령이 저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진리를 선포하시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는 전혀 모순되지도, 충돌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점차 심화하면서 진리를 선포한다. 성령이 사람의 체험을 인도할 때도 각기 달리 한다. 이는 획일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설교할 때 하나님 선민의 현실에 존재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근거해 진리를 교제하고, 성령은 사람을 인도할 때 개인의 상황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모순이나 충돌하는 부분이 없다. 사람마다 시기와 단계별로 분량도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 즉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 길, 생명에 있다. 그의 사역은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모두 진리이다. 성령이 너에게 깨우쳐 주는 진리와 깨닫게 하는 빛 비춤은 무엇을 근거로 하겠느냐? 바로 지금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진리들, 그러니까 지금 너희에게 깨닫게 하는 이런 진리와 길, 생명을 근거로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희에게 당신의 육신은 필요 없어요. 저희는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만 있으면 돼요. 당신이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시대에 들어설 수 있어요. 구원도 받을 수 있고요.”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예수를 이천 년간 믿어 왔다. 성령이 그들을 인도한 이천 년 동안 그들은 무엇을 얻었느냐? 구속의 복음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었을 뿐 하나님이 말세에 선포하려는 진리는 얻지 못했다. 그러니 만약 말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이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아무리 큰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 아무리 많은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혹은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고 사용한다 하더라도 너는 선지자나 사도는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세에 성육신하여 선포한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온전케 되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이제 너희는 성육신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성육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념을 가지고 있고 성육신 하나님이 바로 실제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지금 너희가 나와 어울리다가 내가 일부 외부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면 너희는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도 모르시는군요. 그러면 안 되죠. 당신은 성육신 하나님이시니까 뭐든지 다 아셔야 하고 전지전능하셔야 해요. 어디에나 존재하시지는 못하더라도 모르시는 게 있어서는 안 되죠!’ 이는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역시 관념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 인성이란 어떤 개념이냐? 성육신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초자연적이지도 막연하지도 공허하지도 않고, 정상인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로 닿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도 깊이 연구하여 닿을 수 있지만 이 방면에 특기가 있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정상이다. 이 밖에 그의 말과 행사 역시 정상 인성의 논리와 사고에 따르고 초자연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그의 사고 역시 정상 인성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정상 인성은 왜 이런 것이겠느냐? 이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합리적입니다.)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정상인은 계단을 오를 때 한 걸음에 몇 계단을 오르느냐? (한 계단을 오릅니다.) 한 걸음에 한 계단을 오른다. 이는 정상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 걸음에 계단 여러 개를 올라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간다면 너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너희는 그럴 수 없는데 내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면 너희는 어떻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너희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는 사역 대상의 필요에 따르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교제할 때 하나의 주제와 중심을 가지고 최대한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말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례를 들어가며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알아듣지 못하고 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만약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가장 심오한 것과 가장 큰 틀의 것만 얘기한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얻지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 이 사역은 공허하고 현실적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한 걸음에 한 계단을 오르듯 성장할 수 있으니 나도 한 걸음에 한 계단을 오르듯 너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너희는 나를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걸음에 네 계단을 오른다면 결과는 어떻겠느냐? 너희는 영영 나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나의 사고가 앞서 나가고 비약적이라면 너희는 전혀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그러니 이 육신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실제적이어도, 나아가 하나님의 영처럼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모든 것은 인류의 필요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이 공급하는 대상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성육신하면 반드시 정상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사고란 무엇이겠느냐? 그가 한 말을 설사 자질이 평범하거나 심지어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라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고가 정상적이기만 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고, 그가 교제하는 진리를 깨달은 다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하는 모든 단계의 사역,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이 결실을 이룰 수 있고 결과를 볼 수 있다. 이것이 현실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만약 관념을 껴안은 채 내려놓지 못하면서 “예전에는 한 번 보면 잊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좋고 책 읽는 속도도 아주 빠른 제왕도 있었는데, 하나님도 그래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만약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너무 평범하시니까요. 대단한 인물 같은 모습을 갖추셨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이미 구제 불능일 정도로 무지해진 것이다. 정상인의 사고와 자질을 조금 가지고 있는 것 외에, 하나님의 택함과 하나님의 사역 아래 하나님을 따를 마음이 있고 양심과 이성이 조금 있는 것 외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이 정상 인성이고 패괴 성품인지, 관념과 상상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최소한 어떤 양심과 이성을 갖추어야 하는지 등과 같은 것조차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알기 쉽게 말해도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가 보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패괴된 인류,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인류를 마주하여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어떤 본질과 인성, 어떤 정상인의 사고를 갖추어야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데려올 수 있겠느냐? 너희 생각에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거 아니었어요? 어째서 표적과 기사를 많이 나타내어 사람을 정복하지 않으시는 거죠?”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여기에는 사람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이 드러나고 해결될 수 있겠느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들어 넣어 줄 수 있겠느냐? 사탄이 과연 굴복하겠느냐? (굴복하지 않습니다.) 지금 너희가 “굴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마 도리일 수 있다. 그러나 체험하다 보면 언젠가 너희도 사람이 얼마나 무감각하고 우둔한지, 얼마나 패역하고 강퍅하며 사악한지,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지 알게 될 것이다. 체험하다 보면 언젠가 너희도 하나님이 입은 육신, 정상 인성을 가진 이 육신이 전 인류가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여전히 갖은 상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너 자신에게는 무책임한 태도이고, 하나님에게는 일종의 모독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고심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네가 ‘우리는 지식과 소양,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말세에 태어났고 우리 중 일부는 세상에서 고등 교육도 받았지. 집안도 나름 좋고. 우리는 현대인이고 문화인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그리스도를 거부할 이유가 있어. 당신에게 관념을 가질 이유가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패역하고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면 해결할 수 있지만 관념이 해결되고 나서도 목을 뻣뻣이 세우고 하나님의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의 일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골치 아픈 일이다. 이러면 구원받을 수 없다. 체험을 하다 보면 언젠가 너도 하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정상 인성,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의 표출이 정상적일수록 우리에게는 더 큰 구원이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초자연적이라면 지상에 사는 사람 중 구원받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바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으로 인해, 사람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인류는 구원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사람에게는 패역과 사탄의 패괴 성품, 패괴 본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온갖 관념과 오해, 반발심이 생긴다. 나아가 이런 관념으로 인해 사람은 득의양양하게, 혹은 떳떳하게 이 그리스도와 그의 정상 인성을 부인한다. 이는 완전히 잘못됐다. 네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선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에 대한 여러 관념과 상상, 옳지 않은 정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너는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서 비롯된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한 말, 그가 선포한 진리가 조금씩 너의 마음속에 들어가 너의 생명이 될 수 있다. 네가 만약 그를 따르고자 한다면 너는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영이든, 그의 말씀이든 아니면 그의 육신이든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를 받아들였다면 너는 그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관념에 기댄 채 계속 그를 오해하고 거역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관념을 고수한 채 계속 그를 의심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반항하고 대항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런 태도는 너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뿐이고 너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럼 서둘러 진리를 구해 해결해라. 이는 패괴 성품에 속하는 문제인데, 해결하지 못한다면 너는 패괴 성품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현재 하나님 말세 사역의 형식에 대해 설령 일부 사람들이 어떤 상상이나 관념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현상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룬 성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정복당하여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참도에 뿌리를 내리고 참도임을 인정하고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과에 이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가 해결되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건 사람 내면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 그리스도에 대한 상상과 요구, 관념이 아직도 많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념은 너의 생각과 추구 방향, 목표를 주도할 수 있고 너의 내적 상태에 자주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만약 네게 닥친 일이 너의 관념과 관련이 없다면 너는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너의 관념과 충돌하고 너의 관념을 벗어나서 갈등이 생긴다면 너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관념을 내버려두겠느냐, 아니면 대처하고 억제하고 저버리겠느냐? 어떤 사람은 어떤 일 앞에서 관념이 생기면 내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거나 기회가 있으면 입 밖으로 내서 다른 사람에게도 관념을 심어 준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일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게 과연 적절한 말이냐? (아닙니다.) 올바른 길은 어떤 것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이 생겼을 때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겼고, 만약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에게 반발심과 의심을 품고 나아가 배반할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는다. 먼저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부인한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에게 쉽게 순종할 수 있다. 관념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것을 완전히 내려놓지도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생명 진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나아가 심각한 경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도 있는데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이미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가끔 어떤 일에서 관념이 생긴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크게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진리가 그의 내면에서 그의 생각과 행위를 주도하고 본분 이행을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념은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언젠가 설교 교제를 듣고 깨닫게 되면 그 관념이 해결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관념이 생긴 뒤로는 본분을 이행할 생각도 없고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으며 계속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진 채 마음속에 반발심과 불만, 원망을 품는다. 이게 과연 옳은 행위이겠느냐? 이는 해결하기 쉬운 일이겠느냐? 예를 들어, 너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에게 멍청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는 그 말에 화가 나고 반발심이 생겨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감히 내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말한 적 없어. 이런 말은 오늘 처음 듣는다고.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면 어떻게 교회를 이끌 수 있지? 사역을 이토록 많이 할 수 있겠어?’ 갈등이 생기지 않았느냐?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과연 사람이 쉽게 반성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반성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하는 사람은 반성할 수 있다. 네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너는 우선 이 일에서 자신을 부인할 것이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설사 견해와 관점이 좀 있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네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지 자신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훨씬 착실해지며 태도도 단정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멍청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아직 지각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한 그 말씀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너의 신념으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틀린 말씀을 하시겠어?’라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각과 다르더라도 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깨닫지 못하더라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분명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비이성적인 것이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일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이는 도리가 아닌 실제이며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다음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너는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신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을 뿐 아니라 상당히 어리석고 결함과 부족함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 너는 그런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먼저 하나의 규례, 정의나 개념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다음 실생활에서 맞추어 보고, 인식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스스로를 정확히 평가하게 된다. 그때 가서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겠느냐? 네가 그 일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갈등이 없는데도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 (거부할 수 없습니다.) 너는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여서 그 부분을 확실히 깨달으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못 받아들이면 영원히 제자리에 머물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그 어떤 거부감이나 적의를 갖지 마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교체되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마치 지위가 없어져서, 지위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연약하고 소극적인 것은 순전히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나 형제자매가 내린 평가가 본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와 부합하지 않고 스스로 내린 평가와 인식보다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복하고 평정심을 잃게 되면서 결국 소극적으로 대항하고, 자포자기한다. ‘저는 글렀다고 하셨죠? 그럼 아무것도 안 할 테니 두고 보세요.’ 그 결과 본분에 지장을 주고, 하나님께 죄짓고, 자신의 생명 진입도 멈추게 되는데, 그 손해는 상당히 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가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저보고 어디가 부족하다고 하셨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그분 행동도 백 프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평가하거나 정죄할 때, 혹은 처리하거나 안배할 때 실수하지는 않을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상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뭐라고 하셔도 저는 두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분은 저를 정죄하실 수 없고 저의 결말을 정하실 수도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분명 있다. 내가 책망하면 그는 “하늘의 하나님은 공의로워요!”라고 하고, 내가 그를 처리하면 그는 “어쨌든 제가 믿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세요!”라고 한다. 그는 이런 말들로 대응한다. 이는 어떤 말이겠느냐?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말로,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의 관념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으로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와 하늘의 하나님, 즉 이 육신과 하늘의 영이 어떤 관계인지 영영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땅 위의 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영원히 사람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진리를 많이 선포하고 아무리 설교를 많이 해도 여전히 사람이다. 설사 일부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을 구원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땅 위에 있고, 사람이기에 하늘의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을 믿어야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믿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한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렇게 상상한다. ‘땅에 계신 이 하나님이 내게 잘해 주고 내 뜻대로 되게 해 주시면 그분을 존중하고 사랑할 거야. 하지만 나를 보통으로 대하고 못마땅해하신다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고 늘 나를 책망하고 훈계하신다면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셔. 나는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을 믿을 거야.’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너희를 포함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이런 사람을 어느 정도 접해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을 때는 극진히 시중을 들면서 꽤나 잘해 주지만 교체되는 순간 그는 곧장 내게서 등을 돌린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에게 잘할 때는 하나님을 정말로 하나님이라고, 그리스도라고 확신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보고 그러는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에 빌붙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든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만을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확신한다. 땅의 이 하나님이 진리를 얼마나 선포하든, 사람에게 도움과 유익을 얼마나 주든, 정상 인성으로 사는 육신이라면 결국 하늘의 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가 땅의 하나님을 아무리 치켜세우고 시중들고 존경해도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어떻겠느냐? 이 관점은 많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고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급과 목양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의심할 뿐 아니라, 아울러 하늘의 공의로운 하나님이 내려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평가하길 바란다. 어째서 하늘의 하나님이 평가하길 바라는 것이겠느냐? 그는 자신의 기호와 관념 상상에 따라 멋대로 하늘의 하나님, 즉 그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자기 기호에 맞게 자신을 대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땅의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데, 땅의 하나님은 그저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 원칙을 얘기할 뿐이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사심 없이, 조건이나 아무런 제한 없이 사람을 사랑하셔. 반면 땅의 이 하나님은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뭐라도 하나 실수한 걸 알아채는 순간 설교에서 반면교사로 삼아 분석하기 시작하시지. 그러니 조심해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분이 모르시게 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모르게 한 일이라고 해서 내가 분석하지 못하겠느냐? 나는 네가 한 일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너의 성품과 내적 상태를 분석한다. 나는 꼭 그런 일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진리를 교제할 수 있고, 설교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다. 불신파는 마음속으로 이 육신, 이 하나님은 눈으로 보지 못한 일은 알 수 없고 영계와 진리에 관한 일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이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으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 이 육신은 알아채지 못하고, 이 육신이 사람의 패괴 본질을 모두 알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신파의 논리적 추론이다. 그들은 항상 연구하고 의심하는 태도, 심지어 불신하는 태도로 그리스도를 대하는 동시에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자기가 상상한 것을 이용해 그리스도를 평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할 때, 자기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기 성품이 어떤지 상대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말할 때도 그렇게 말하며 보통 사람을 대하듯 나를 대하며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은 그가 한 거짓말을 개의치 않으니 나에게도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나와 대등해지려 하며 늘 친구 사이가 되려고 한다. 그는 친해지면 그래도 된다고, 나는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관념이자 무지이다. 이 무지에는 사탄의 사악한 성품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사악한 성품 때문에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사람의 본성을 폭로하거나 간파하기 위해 그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시시각각 그의 생각과 관점을 관찰하고 그의 모든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비록 너희는 매일 사람을 가까이하고 어울려 살지만 사람의 본성 본질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 닥치든 겉모습만 간파할 수 있을 뿐 본질은 간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를 철저히 드러내야 너희는 조금이나마 분별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몇 년 동안 가까이 지내도 간파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하루 이틀만 가까이하다 보면 그가 하는 행동, 하는 말, 내비치는 관점을 통해 기본적으로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나와 어울리거나 함께 일하지도 않는 상황이기에 내가 의문을 품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일을 만나서 그가 관점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이 곧장 드러난다. “드러난다고 바로 간파하실 수 있나요? 무엇을 근거로 간파하신 거죠? 어째서 우리는 간파할 수 없나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을 평가할 수 없고 영원히 기준이 있을 수 없으며 기준이 없으면 사람을 간파할 수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기준이 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깨달았기에 사람을 평가할 때 날카롭고 빠른 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이 행사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이가 좀 들면 일과 사람을 간파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진실로 간파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무엇을 간파한 것이겠느냐? 정치적 속임수, 상업적 속임수, 경제적 속임수 또는 성적 속임수 등 이 사회에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 간파한 것이다. 이런 일은 많이 겪어 보고 들어 보면 피할 수 있다. 체험과 경험이 적은 사람은 자주 속는데, 속는 횟수가 늘어나 경험이 생기면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패괴와 본성, 사탄에 의해 패괴된 본질은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영원히 간파할 지혜가 없고 한 가지 일 이면의 온갖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이 무엇인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영영 간파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을 간파하지 못하면 너는 이 일, 그리고 관련된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너는 처리할 방법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에 이 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조급해하며 아주 곤란해한다. 만약 진리를 밝히 깨달았다면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성품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을 보고 그의 본질을 인식하여 그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그를 경계하고 분별해야 할지, 어떻게 이 일에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이는 지혜의 원천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사람을 간파하고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진리 실제를 갖추어 생명이 되게 한다면 너희도 지혜가 생겨 사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이 갖는 관념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신앙에 대한 사람의 과거의 이해에서 비롯되는 관념도 있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상상에서 비롯되는 관념도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사람은 공중에 희고 큰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아 만민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사역이라고 상상했다. 이제는 이런 상상이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는데, 이런 상상은 사람의 기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고생하려 하지 않고 늘 손쉽게 길 끝까지 하나님을 따를 수 있기를, 충분히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생각이냐! 꽃가마를 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가지는 가장 흔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이 밖에,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 닥칠 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 내면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그 사역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광대하다’와 ‘더없이 크다’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는데, 나는 너희가 아마 이 두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도 이해한 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두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너희 모두의 주의를 끈 다음 곰곰이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두 표현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허한 것 같지만 분명 특정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더라도 ‘광대하다는 건 하늘처럼 광활하고 하나님의 품처럼 넓다는 뜻이야. 하나님은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시는구나!’라고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고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해 낼 수 없다. 소양과 지식으로 그 말을 해석하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체득하고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말하는 사랑과는 다르다는 사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통 사람의 사랑과는 다르고 인류 전체가 이해하는 사랑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우선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모성애를 예로 들자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식을 각별히 보살펴 주며 무척이나 따뜻하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성애와 같은 느낌과 의미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고, 잘못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 남편이나 아내, 자식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관심과 분리하여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도, 혈연관계의 영향도 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드러남으로써 사람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체득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게 하며,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빈말도, 하나님의 행위도 아니며 진리이다. 진리로 여겨 받아들인다면 너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이 측면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쉽게 인식할 수 없다. 행위란 무엇이겠느냐? 어머니가 그녀의 청춘과 온 정성을 바쳐 자식을 기르는 것과 유사하다. 어머니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준다. 자식의 행동이 옳든 그르든, 자식이 어떤 길을 가든 사심 없이 주면서 자식을 만족시킨다. 절대로 자식이 옳은 길을 가도록 교육하거나 돕지도, 인도하지도 않고 오로지 보살피고 사랑하며 보호할 뿐이다. 그 결과 자식은 마지막까지도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모성애, 혹은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혈기나 감정, 육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정반대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의 표출 방식은 늘 그 사람을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이다. 비록 네가 느끼기에는 채찍질과 징계 속에서 사느라 편한 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체험하면 너는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람을 대할 때 분별력과 지혜가 생기고, 진리도 좀 깨달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네가 상상하는 모성애, 부성애처럼 알뜰살뜰 보살펴 주고 덮어놓고 감싸 주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몸소 느끼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은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해야만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 알 수 있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패괴된 사람이 어떻게 아무 근거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고심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측면에서 가장 쉽게 생기는 오해이자 가장 깨닫기 어려운 하나님의 본질의 한 측면이다. 반드시 깊이 체험하고 자신을 상황에 대입하여 실제로 접하고 몸소 느껴야만 인식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단 것을 좋아하면 쓴 것은 주지 않고, 설사 가끔 쓴 것을 주더라도 그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그것은 사심과 감정, 혈기가 담겨 있고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사역을 하든, 어떻게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든, 채찍질하고 징계하든, 책망하고 훈계하든, 설사 네가 그를 오해하거나 심지어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하더라도 여전히 인내심 있게 너에게 사역할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런 방식으로 너를 깨우쳐 네가 언젠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를 보았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얻겠느냐? 사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 기간 동안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잘 따르고 진입하여 최종적으로 진리 실제를 살아 내는 것, 사람의 모습으로 살며 더 이상 사탄에게 현혹되고 유혹당하고 시험당하지 않는 것, 사탄을 저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매우 흡족해하고 그로써 하나님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얻겠느냐?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을 얻게 되고 너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너의 그 정도의 찬양이 하나님에게 그리 대단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게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게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지위가 바뀌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이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이자 사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너희가 이해하는 광대하고 더없이 큰 하나님의 사랑에 이런 뜻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여기까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하여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구원할 리 없을 듯한 상황에서도, 그가 반성하고 뉘우치며 손으로 행한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과오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관념이다. 사람은 여러 관념과 상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야만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다. 관념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만 관념을 철저히 바꾸는 것은 어렵다. 만약 너에게 또다시 유사한 일이 닥쳐 또 관념이 생긴다면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그 관념이 네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에서는 진리 교제를 통해 관념을 포기할 수 있지만 어떤 일에서는 내려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서 관념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만 사람에게 관념을 철저히 해결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진리를 많이 깨달아야만 관념이라는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닥친 일에서 진리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역을 해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인식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라는 문제가 철저히 해소될 수 있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란 무엇인지, 이런 관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해부해야 한다. 주로 네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 대해 지니는 여러 가지 상상과 반발심, 요구 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고,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모든 것을 오해하고 거기에 반항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관념은 무척 심각하기에 해부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말씀을 읽고 관념이 생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저 같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아마 저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지요.” 이것은 관념이 아니냐? 이런 관념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 너에게 어떤 패괴가 있고 네가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 하나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회개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진리를 받아들여 패괴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면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겠느냐? 너는 어째서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하느냐? 너의 그런 소극적인 생각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고, 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심지어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떤 교회에 적그리스도, 악인이 나타나 교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미혹했다면 이는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조롱하고 드러내는 것이냐?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은 만사 만물을 이용해 봉사하게 함으로써 그가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원한다.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진리를 얻지만,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원망한다. “하나님의 이런 사역 방식은 부적절해요. 절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모른다고요! 하마터면 적그리스도를 따를 뻔했죠. 정말 하나님이 안배하신 거라면 어떻게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들 수 있죠?” 이건 어찌 된 일이냐? 네가 적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네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뜻이고, 네가 적그리스도를 따라갔다면 그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너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적그리스도, 악인들이 교회에서 교란을 일으키는 것은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겉보기에는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적그리스도, 악인이 드러나면 너는 분별력이 생기고, 그들 또한 제명되고, 네 분량도 자라게 된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다시 마주쳤을 때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너는 분별력이 생겨 그를 버릴 수 있다. 그 일 덕분에 너는 공과를 배우고, 유익을 얻게 된다. 너는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고,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너희가 볼 때 적그리스도가 교란을 일으켜 사람을 미혹한 일이 좋은 일이 아니냐? 이 정도까지 겪고 나면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일을 하지 않고,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교란하도록 허락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도록 허락한 것은 사탄을 이용하여 봉사하게 한 것으로,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람은 그제서야 하나님의 고심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적그리스도에게 두 번이나 미혹됐는데도 아직도 적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만약 더 교활한 적그리스도를 만나면 또 미혹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체험을 통해 공과를 배우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만 인류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두 가지 표현으로 형용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예사롭지 않고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다’와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 사역을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패괴된 인류가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하나님의 사역 방식, 하나님이 사탄과 전쟁을 치를 때의 지혜와 같은 것들을 사람은 알지 못한다. 모든 인류가 이 방면에서는 백지상태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은 생각이나 관념을 가지는 것이냐? 사람은 지식을 좀 배워 도리를 알고, 또한 자신의 기호가 있으면 관념과 상상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계에 관한 일, 하나님이 하는 사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말세에 창조주가 모든 인류를 향해 직접 음성을 발해 말씀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마주하여 공개적으로 사역하고, 자신의 경륜을 공개하고, 아울러 인류 가운데서 그것을 실시하고 수행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생소한 분야다. 따라서 사람이 이 분야에 관념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상적이라는 말이 진리에 부합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관념이 아무리 정상적일지라도 그것은 역시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 뜻과도 어긋난다. 이를 즉시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일이나 사람의 생명 진입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관념이 아무리 사람의 상상과 뜻에 맞더라도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아니다. 관념이 아무리 사람의 상상에 맞더라도 분별해야 하지 절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긍정적 사물이다. 사탄에 속하는 것은 아무리 좋아 보이고 사람 상상에 맞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창조주의 요구를 충족게 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이치를 얘기하고 권면한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쉽지 않다. 사람은 올바른 일은 그다지 견지하지 않으면서 각종 관념이나 부정한 것, 치우친 것은 쉽게 고수하고 잘 내려놓지 못한다. 이는 어떤 이유 때문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념이 크든 작든,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관념은 쉽게 해결된다. 사실 관념은 결국 일종의 생각일 뿐이지만 사람이 교만함, 강퍅함, 심지어 사악함과 같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념이 도화선이 되어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오해하며 심지어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고도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 그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판단하며 심한 경우 정죄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관념은 패괴 성품에서 생겨나고, 관념이 튀어나오면 패괴 성품이 표출되며, 표출된 패괴 성품은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았어요.” 이는 거짓말이다. 그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반항하고 있고, 그의 행위에도 반발심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실 사람의 패괴 성품도 해결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된다면, 사람의 미숙하고 유치한 많은 생각들, 심지어 이미 관념이 형성된 것도 사람에게는 사실 문제가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관념은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때로 관념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행동을 지배하지 않는다. 너의 직접적인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는 너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념의 그 이면에 패괴 성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네 관념과 충돌하면 너는 모종의 태도로 그 관념을 고수한다. 그런 태도는 네 성품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 성품은 강퍅함일 수도 있고, 교만함일 수도 있고, 흉악함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들게 된다. “제 관점은 많은 학술 논증을 거친 것으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고수해 오던 것인데, 왜 고수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당신의 말씀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니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또 그것이 진리이고, 지고지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 관점이야말로 전 인류 중에서 지고지상한 것입니다!” 하나의 관념으로 인해 너는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대들게 된다. 이는 무엇으로 초래된 것이냐? (패괴 성품입니다.) 그렇다. 바로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관념과 사람의 패괴 성품은 직결되어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각종 관념이 해결된다면,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쉽게 순종하게 된다. 그러면 굽은 길도 가지 않고, 방해도 교란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하지 않으며 더욱 순조롭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의 관념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발심이 생긴다. 관념이라면 옳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관점임이 틀림없고, 완전히 진리와 반대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각종 반발심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 반발심 때문에 너는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게 순종하지 못한다. 동시에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도 지장을 받는다. 보다 큰 틀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생긴 각종 관념 때문에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부인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해 관념이 생기든, 그 이면에는 패괴 성품이 숨어 있다. 그 관념 때문에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욱 심각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패괴 성품으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성품을 대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부추기게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관념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다.

전에도 우리는 사람의 관념을 자주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이 어느 방면과 어떤 일에 관념을 가지고 어떤 종류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교제한 적은 없었다. 너희가 자신이 어느 방면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하나씩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오늘 이렇게 몇 가지로 나누어 교제하고 분석하여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관념을 하나하나 해결한다면 사람은 각 방면의 진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 앞에 놓인 길도 점점 뚜렷해질 것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도 갈수록 안정되고 밝아질 것이다.

2018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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