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단속받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자신의 관점과 의견, 견해에 부합하지 않는 말은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의 말이 옳든 그르든, 누가 어떤 배경에서 한 말이든, 자기 책임이나 본분과 관계가 있든 없든 일절 개의치 않고, 자기 기분을 만족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은 제멋대로인 것이 아니냐? 제멋대로인 성품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느냐? 진리를 얻기가 힘들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고, 최종적인 결과는 네가 진리를 얻기 힘든 것이다.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들은 모두 진리와 적대적이고 진리와 무관하다. 진리에 부합하거나 진리에 가까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구원받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취향대로만 행동하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뜻에 맞지 않는 일이 닥쳤을 때 충동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일단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제멋대로 굴지 말고 먼저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견지하며,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수 있다면, 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일들을 마주할 수 있다면, 네가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혹은 예전에 어떤 과오를 저질렀든 상관없이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다 해결할 수 있고, 어떤 시련이 닥치든 굳게 설 수 있다. 네 마음가짐이 올바르고,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 때때로 약간의 패역과 반발심을 품고, 자신의 이치를 따지며 순종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패역한 상태에서 돌아설 수 있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왜 패역과 반발심이 생겼는지 반성하며 원인을 찾은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면, 이 측면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패와 좌절을 몇 번 반복하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면 패괴 성품을 조금씩 벗어 버릴 수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 함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일을 좀 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성질을 부리면서 “나는 오늘 기분이 별로야. 그러니까 밥도 안 먹을 거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와 상의하러 왔다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멋대로 굴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하겠느냐? “저도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먹고 살 걱정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랐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고모, 이모들까지 저를 무척 귀여워하셨죠. 부모님은 더더욱 저를 아끼셨고요. 저는 온 집안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어요. 가족들은 무슨 일이든 다 제 뜻을 따라 주고 저를 사랑했고요. 그래서인지 이렇게 제멋대로인 성격이 되었네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다른 사람과 상의하거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게 돼요.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힘들고요. 이게 제 잘못인가요?”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인식이 올바르냐?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편식을 한다든가,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 사람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는 “저는 어릴 때부터 이랬습니다. 습관이 돼서 다른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죠.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며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껴 주셨거든요. 저는 온 집안 가족들의 보물 같은 존재였죠.”라며, 추잡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행동 아니겠느냐? 부모가 너를 아끼면 다른 사람들도 다 너를 아껴야 한다더냐? 네 가족이 너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면, 하나님 집에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더냐? 그것이 이유가 된다더냐? 이것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어떤 패괴 성품이나 인성 생활상의 문제가 생기든, 그는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 모면하고 해명하고 설명한다. 진리를 구하는 법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법도 없다. 반성하지 않는데 자신의 문제점과 패괴를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한다면 어떤 상태로 살아가겠느냐? 스스로를 용인하는 상태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패괴를 드러냈지만 악을 행하지는 않았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도 않았다고, 진리 원칙에 어긋나기는 해도 고의는 아니었으니 정상 참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보여야 할 상태겠느냐? … 일을 처리할 때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도,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해 핑계를 댄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다. 사탄의 본성과 성품을 지닌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탄에 속하는 자이며, 마귀이자 사탄의 후예, 큰 붉은 용의 자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 큰 붉은 용의 자손임을 인정하며, 자신을 인식할 때 아주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막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 누군가가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면,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은 철저히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는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이 왜 책망과 훈계 앞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흔히 있지 않으냐? 이런 일을 분별하기가 쉬우냐, 쉽지 않으냐? 사실 분별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 자신이 마귀이자 사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회개도, 변화도 없다. 그럼 자신을 인식하는 그 말은 과연 진실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진실한 인식이겠느냐, 아니면 외식하며 남을 기만하는 것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진실로 자신을 인식했는지를 알려면 그가 말하는 인식만 들어서는 안 된다.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든 남들이 책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책망하고 훈계하는 이가 어떤 사람이어도 안 된다. 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은 괜찮으며,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폭로하고 질책하고 책망한다면,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 중 어떤 측면에 대해 폭로하든 그는 극도로 반항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진정한 순종은 조금도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교회의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에 대해 말하지도 못한다. 좋은 점을 말하면 기뻐하지만, 안 좋은 점을 말하면 화를 낸다. 만약 누군가 그를 폭로하면서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함부로 행동하고 늘 제멋대로입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부족한 점과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린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는 “저는 악을 행하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책망하는 거죠? 저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모두 저를 무척 아꼈죠. 저는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도 저를 아껴 주지 않네요. 정말이지 사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저의 이런저런 단점만 보면서 저를 책망하고 싶어 하죠. 대체 저더러 어떻게 살아가라는 겁니까?”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알아챌 것이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사랑을 받아 응석받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지도 못한다. 가족들의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인 태도가 인이 박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중에서
또 다른 일부의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육의 안일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내키는 대로 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분이 좋으면 더 고생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도 그에게 피곤하냐고 물으면 그는 “피곤하지 않아요. 본분을 이행하는데 피곤하다니요.”라고 대답한다. 그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데 네가 그에게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내게 한다면 그는 언짢아할 것이고, 만약 그를 질책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억압을 느낀단 말이에요. 계속 잔소리하시면 본분을 이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나중에 복을 못 받으면 당신 탓입니다. 모두 책임지셔야 할 거예요!”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으면 변덕을 부린다.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조금만 고생해도 원망한다. 사소한 일에도 그는 언짢아하고 기분이 상해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도 읽으려 하지 않고 찬양도 부르려 하지 않으며 예배 때 설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며칠 지나면 훌훌 털어내고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만족스럽지 않은 일만 있으면 그는 억압을 느낀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 제멋대로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잠을 자고 싶으면 꼭 자야 한다. “제가 지금 졸려서 자고 싶어요. 의욕이 없으니 자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10분만 참을 수 있겠어요? 일이 곧 끝날 거예요. 마무리하고 다 같이 쉬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면, “안 돼요. 지금 자야 한단 말이에요!”라고 대꾸한다. 누가 타이르면 마지못해 참아 보지만 속으로는 억압과 반감을 느낀다. 그는 이런 일로 자주 억압을 느끼고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리더의 감독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어떤 단속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규정, 저런 제도 같은 걸 따질 게 아냐. 열심히 지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당신들은 잠자코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고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는다. 그 어떤 사역 환경에서도 그 어떤 단속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규정,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고, 처신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지키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즐거울 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득이 되거나 편한 일이면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런 단속을 받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자유와 해방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욕망, 자신의 이상과 소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방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뒷일이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 하나님을 믿으면 이행해야 하는 본분 혹은 지키고 살아 내야 하는 진리 실제,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어딜 가든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며 하나님 집에서 인성과 인내, 관용을 중시하니 하나님 집에 오면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방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도 행정과 규정이 있기에 그는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억압의 부정적 정서는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 어떤 책임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최종 목적은 자아를 찾고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신의 취지도 이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자기만족이 그들 평생의 소원이자 추구 목표인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은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어떤 본분도 다 이행하고 고난도 참아 내지만, 성품이 불안정하고 감정적이며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오직 기분에 따라 일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수중의 일을 매우 잘하며, 누구와 협력하거나 함께 지내든 잘 어울리고, 본분도 더 많이 이행하고 싶어 하고, 어떤 본분이든 책임감을 갖고 이행한다. 이는 내적 상태가 좋을 때의 모습이다. 그의 내적 상태가 좋은 데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본분을 훌륭히 이행해 칭찬을 받았거나 모두에게 우러름과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바람을 가득 넣은 풍선처럼 점점 더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날마다 똑같은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거나 진리 원칙을 구하지는 않고, 늘 경험에 의지해 일한다. 경험이 진리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이 믿을 만하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은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니 반드시 실패할 때가 온다. 그 결과, 어느 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가 생겨 책망을 받고 다들 그에게 불만을 느끼게 되면, 그는 소극적으로 변해 “저는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니 그만두겠습니다. 누가 하든 저보다 낫겠죠. 저만 못 하는 것일 테고요. 그러니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귀담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일에 교제할 만한 게 뭐가 있나요? 자꾸 진리가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안 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저는 안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분이 좋을 때 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본분 이행이든,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든, 남들과 교제하는 것이든, 삶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그는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밝아지고, 고조되었다가 갑자기 침체되고, 열의에 차 있다가 갑자기 식어지고, 적극적이다가 갑자기 소극적으로 변하는 등의 모습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그의 내적 상태는 좋든 나쁘든 특히 두드러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하는 법 없이 자기 성질대로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좀 제대로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제대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일을 하지 않고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자기 기분과 요구, 그리고 환경을 따라야 하며, 고난을 겪을 의지는 전혀 없다. 귀하게만 자라 버릇이 없고, 억지를 부리고 난폭하게 굴면서도 자제하지 않으며,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노발대발한다. 그러고 난 후에는 바로 소극적으로 변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밖에도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자기 기호를 따른다. “이 일이 좋으면 하겠지만, 싫으면 안 할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안 할 겁니다.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 저랑은 상관없으니까요.”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쁘고 내적 상태가 좋고 마음이 감동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며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겠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인 내적 상태지만, 그의 이런 성품, 모습, 표출을 보면, 남들은 그가 열 살 정도 되는 아이인 줄 알 것이다. 그는 성품도, 삶의 방식도 제멋대로여서 무슨 일을 하든 꾸준함과 충성심, 책임감, 부담이 없다. 고난을 겪는 법도 없고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하든, 고난을 좀 겪든, 자기 이익이 손실을 보든 다 괜찮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내적 상태가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 문제에 그치지 않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무지몽매하며 유치한 모습이다. 제멋대로인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어떤 사람은 “성품이 불안정한 것입니다. 너무 어리고 고난을 너무 조금 겪은 데다가 변덕스러워서 종종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사실, 제멋대로인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다. 마흔이 넘은 성인도, 일흔이 넘은 노인도 제멋대로일 때가 있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제멋대로인 것은 사실 성품 문제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만약 그가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다면 본분과 사역 진도에 지장을 주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칠 수 있다. 평범한 본분을 이행한다 해도 때때로 본분에 영향을 주고 일을 망치니 타인과 자신에게, 그리고 교회 사역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가 얼마간 일을 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이런 사람은 적지 않다. 제멋대로인 것은 패괴 성품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물론, 패괴 성품은 다 사탄 성품의 일종이며, 제멋대로인 것 또한 패괴 성품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가볍게 말하자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하자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는 기분이 좋고 이익을 얻었을 때만 잠깐 순종할 수 있지 기분이 나쁘고 이익이 없으면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내고, 대적하고, 배반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니 뭐니 하는데, 중요한 건 내 기쁨과 만족이야.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누가 뭐래도 다 소용없다고! 진리는 뭐고, 하나님은 또 뭔데? 내가 대장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성품이다. 여기에 교만함과 방자함이 있지 않겠느냐? 강퍅함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심각한 내적 상태가 하나 더 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누구에게나 잘하는 데다가 본분도 책임지고 이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훌륭하고 순종적이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진리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는 순간, 책임을 내팽개치고 원망하며, 심지어는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그 흉악한 모습이 드러나면 누가 책망해도 소용이 없다. 또 그는 “저는 모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저 실행하지 않을 뿐이죠. 저만 편하면 그만이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이런 악인을 누가 책망하기라도 하면, 그는 반항할 뿐만 아니라 마치 악귀처럼 상대방을 상처 입히고 해치기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흉악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나이가 어려서 생긴 문제겠느냐? 나이가 많으면 제멋대로 굴지 않겠느냐? 나이가 들면 철이 들고 이성이 생기겠느냐? 아니다. 이는 사람의 성격이나 나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패괴 성품이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숨어 있는 것이며,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는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데 순종하겠느냐?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요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전부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중에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너무 제멋대로 굴면서 항상 자기 뜻만 고집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몹시 위험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혐오하여 내치고 한쪽에 내버려둔다.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도태될 위험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반면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 태도와 진리를 구하지 않는 태도, 이 둘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네가 얻게 될 내적 상태와 결과도 다르다. 너희는 어떤 결과가 좋으냐?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은총을 받고 싶다면 사람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느냐? 항상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지니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든, 사람과 교류하든, 혹은 처리해야 할 어떤 특수한 문제가 생겼든 간에 항상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네게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만약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 없이 자신을 고집하며 완강하게 맞서고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싫어한다면, 당연히 수많은 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종일관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얼마나 많은 일을 경험했든지, 얼마나 많은 환경을 겪었든지, 하나님이 마련해 준 공과를 얼마나 많이 체험했든지 상관없이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며, 결국 진리 실제에도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를 계속 준행할 수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항상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따르겠노라 외치는데 그것이 간단한 일이겠느냐?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는 인생에서 큰일이다! 본분을 잘 이행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실행 원칙을 알려 주겠다. 즉, 네게 닥친 일에서 구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춘다면, 너는 보호받게 될 것이다. 너를 보호받도록 하는 게 최종 목적이 아니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최종 목적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사역을 제대로 해낸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워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나 정상인, 좋은 사람이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나님이 징계하도록 해야 한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등지고 내려놓아 제멋대로인 성질과 사리사욕을 조금씩 줄여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일과 시기, 사역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네게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행사할 것이며 네 내적 상태와 사상을 바꿔 줄 것이다. 성령이 약간 역사하여 네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면, 네 마음은 달라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도 변화할 것이다. 네게 변화가 생기면 이렇게 사니 억압받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며, 억압적인 내적 상태와 정서가 다소 바뀌고 해소되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렇게 살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규칙을 지키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에 기대 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쩜 그렇게 제멋대로였을까? 예전에는 사탄의 철학과 사탄 성품으로 살아서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지. 그러다 보니 살아갈수록 고통스러웠고. 이제 진리를 깨닫고 나니 패괴 성품을 어느 정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뻐!’ 이는 마음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으면, 그 근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면 변화의 희망이 생긴다. … 먼저 본연의 일을 하는 법을 배우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정상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 그 후 규칙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 집의 관리, 감독,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 이것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다음으로는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과 관련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생각과 관점에 대해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 하며, 네 부정적 정서와 억압을 없애고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고충을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네게 추가적인 것도 아니고 부담이나 결박도 아니라 한 명의 정상적인 성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즉, 성별과 자질, 능력과 특기를 떠나 성인이라면 누구나 적응해야 하는 생존 환경,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 사명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역 등을 너는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의 피땀 어린 결실을 거저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규정과 제도, 관리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과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받아들이는 법, 사람들과 함께 생존하고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올바로 대하며, 직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 등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직면해야 할 부분이다. 또 이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삶과 생존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삶이 아무리 곤궁해도 자기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는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자 다해야 할 책임이며 완수해야 할 의무이다. 너는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얼마나 고생하든, 얼마나 대가를 치르든,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 너는 그것을 속으로 삭여야지, 부정적 정서를 품거나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이런 일을 반드시 감당해야 하며 원망도, 저항도, 나아가 도피나 거부도 하지 말아야 한다. 허송세월하거나 빈둥대면서 자기 맘대로,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 가져야 할 생활 태도가 아니다. 모든 성인은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고난이나 병, 나아가 갖가지 어려움 등의 압박감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모두가 겪고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인의 삶이다. 그 압박감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너무 연약하고 못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 살면서 이런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감당해야만 한다. 사회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모두가 똑같다. 이것은 네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중임이고 감당해야 할 일이니 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항상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억압적인 정서가 찾아와 너를 계속 옭아맬 것이다. 반면, 네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네 삶과 인생의 일부로 여긴다면 이 문제들은 네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나는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성인으로서 갖고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자기가 처한 삶과 사역의 환경에서 정상 인성으로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 조화롭게 어울리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완수해야 할 사역과 이행해야 할 의무, 책임을 더 잘 완수하기 위해서이며, 사역에서 직면한 문제들로 초래되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네 사역이 이뤄야 할 성과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고 사람들 속에서 사역할 때 너는 이것을 해내야 한다. 사역으로 인한 압박감의 경우, 그 압박감이 상부에서 오든 하나님 집에서 오든, 아니면 형제자매로부터 오든 그것은 네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압박감이 있어 못 하겠어요.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과 사역은 한가롭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쾌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성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 집은 네 안일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삶과 일에서 어느 정도의 부담과 위험을 감수한다. 어떤 사역이든, 특히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은 모두 최고의 성과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자 요구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이자 관점, 기준, 원칙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 집의 규정과 제도를 준수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준수하는 법과 규칙을 배워 착실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처신할 때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이방인처럼 무위도식하고 악행을 일삼으며 허송세월하거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너를 싫어하게 만들지 말고, 모두의 눈 밖에 나서 눈엣가시가 되지 마라. 또 모두가 너를 멀리하거나 버리게 하지도, 그 어떤 사역의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도 마라. 이는 역시 정상적인 성인이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이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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