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제 2 부

시대와 인류가 발전하고 만물이 운행함에 따라, 또한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며 인도하고 이끎에 따라 인류와 만물 그리고 이 우주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천 년간 율법 아래에서 단속받으며 살아가던 인류는 결국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하나님이 열어 준 다음 시대인 은혜시대로 진입했다. 은혜시대의 도래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예언을 전제로 펼쳐진 사역이다. 이 사역은 사람의 관념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훈훈하거나 사람의 뜻대로 되지도 혹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일들이 마치 예언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 못 할 일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성육신 하나님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를 풍겼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발단이 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가 바로 지금 너희 모두가 알고 있는 은혜시대인 것이다. 은혜시대는 마치 율법시대의 하나님의 예언을 어긴 상태에서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성육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도래한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은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옛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펼친 것이다. 비록 이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모든 일이 믿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풍기고 나아가 너무 갑작스럽고 사람의 생각처럼 아름답거나 훈훈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은혜시대의 첫 장면이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아팠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엇이겠느냐? 율법시대의 종식은 더 이상 하나님이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류의 각종 언행을 인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에 따라 인류가 다음의 새 시대를 향해 발을 힘껏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기다림의 시간이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류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원으로 진입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큰 진전을 이루었으며 그 사역의 진전에 따라 하나님의 바람이 점차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그 시작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은혜시대가 도래하면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의 인류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목표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니 이는 기쁘고 축하할 일인 것이다. 비록 인류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사람이 보기에 비통한 일이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순간은 하나님의 다음 시대인 은혜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그 시대의 사역이 곧 펼쳐지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첫 번째 성육신의 대업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승리하는 방식으로, 또한 새로운 이름과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을 마주하며 새로운 사역의 내용을 인류에게 밝히고 알렸다. 인류의 입장에서 인류는 더 이상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뇌할 필요도,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벌받을 필요도 없어졌다. 은혜시대의 도래는 인류를 하나님의 예전 사역에서부터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사역의 환경과 사역 단계, 그리고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진입하게 함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진입,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인류와 하나님 간의 관계도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성육신했기에 사람은 하나님과 마주하여 실제적 음성과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역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등을 볼 수 있었다. 인류는 여러모로 직접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간 세상에 와서 사람과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비록 하나님이 그때 성육신하여 사역하는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당시 인류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생활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경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많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많은 사역을 하였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 역시 많았다. 인류는 옛 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삶을 철저히 끝내고 전혀 새로운 시대인 은혜시대를 맞이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진입한 후 인류는 더 이상 율법의 단속 아래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말씀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과 요구로 인해서 인류에게 다른 형태의 새로운 삶 그리고 다른 형태와 내용의 믿음 생활이 주어졌다. 이러한 생활은 과거 율법 아래에서의 생활에 비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의 기준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새로운 계명을 세우고 새롭고 더 정확하며 당시 인류에게 더 적합한 행동 준칙, 즉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행동하는 준칙과 원칙을 만들었다. 당시의 말씀이 지금처럼 구체적이거나 분량이 방대하지는 않았지만 율법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정도의 말씀과 요구면 충분했다. 당시 사람의 분량이나 역량으로 볼 때 사람이 도달하거나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예를 들면, 사람은 겸손하고, 인내하며, 포용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등의 가르침은 모두 율법에 이어 사람답게 사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이다. 이 외에도 율법 아래 살던 사람은 은혜시대의 도래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한량없는 큰 은혜와 축복 등을 누렸다. 그 시대의 인류는 모두가 하나님의 눈동자이자 품 안의 자식처럼 그야말로 안식처에서 행복하게 살아갔다.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선행이 더해져 인류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 예를 들어, 귀신 들린 사람의 병을 고치고, 더러운 귀신을 사람의 몸에서 쫓아내거나, 사람이 고충이 있거나 곤궁할 때 하나님이 전례 없는 기적을 나타냄으로써 사람의 갖은 질병을 치유하고, 사람의 육체를 배부르게 하여 먹고 입는 것에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이 누린 은혜와 축복은 실로 대단했다.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인류는 기껏해야 인내, 관용, 헌신하는 것이 전부였다. 진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에 관련되는 더 많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만을 누리려는 사람의 마음과 사람에 대한 예수의 약속으로 인해 사람이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일은 끝이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창조주를 경배하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줄은 몰랐다. 또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누리는 것 외에도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은혜시대에 은혜와 축복 아래 살던 인류가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본질은 긍휼과 사랑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또한 긍휼과 사랑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본질의 상징이며,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혹은 단순히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잘못 여겼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정의, 그리고 인류 및 사람 자신에 대한 은혜시대 인류의 정의와 인식은 이 정도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그 원인으로서 이러한 결말을 초래한 것은 결국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고 좀 더 구체적이고 온전히 말씀하지 않았다고 원망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사람에게 돌릴 수도 없다. 어째서겠느냐? 사람은 인간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시대로 진입한 후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몇 년의 세월이 흘렀든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면 사람은 그것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이 역사하면 사람은 알 수 있다. 이를 제외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은 것, 말씀하지 않은 것, 밝히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인류는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환경에서 보나 거시적인 배경에서 보나 수천 년간 발전해 온 인류가 은혜시대라는 시대로 진입한 상태에서 여기까지만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도 그러한 사역만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벗어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나 형벌, 정복이 아니며, 온전케 함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무엇이겠느냐? 속죄 제물, 하나님의 보혈이었다. 하나님의 보혈인 속죄 제물은 율법에서 벗어난 인류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기에 인류의 필요와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은 성육신 하나님의 보혈을 속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인류를 율법에서 속량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보혈을 대가로, 그리고 속죄 제물로 인류의 죄를 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죄 사함을 받아야만 비로소 무죄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은혜와 인도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보혈을 인류에게, 그리고 인류를 위해 바침으로써 인류는 속량될 수 있었다. 갓 속량된 인류는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느냐? 갓 속량된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했겠느냐? 만약 곧바로 정복하고 심판하며 형벌을 내렸다면 인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능력도, 이해할 능력도, 깨달을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인류는 하나님의 속죄 제물과 하나님의 은혜, 축복, 관용, 인내, 긍휼, 자비 외에 사람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간단한 요구들만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을 뿐이다. 인류가 어떤 그릇된 생각과 관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류의 본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요즘 교제한 바 있는 인류가 고수하는 전통문화의 본질은 무엇이며 사탄은 어떻게 인류를 패괴시켰는지 등 이 모든 것은 인류가 구원받는 것에 대한 더 깊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어 당시의 인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은 가장 단순한 방식과 직설적인 방식, 처신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요구를 통해 인류를 깨우치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은혜시대의 인류 역시 은혜를 누리고 끝없이 하나님의 보혈을 속죄 제물로 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혜시대에 가장 큰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 일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구원할 인류의 죄가 하나님의 보혈로 인해 사함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며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한 가장 큰 일이다. 죄 사함 받은 인류가 더 이상 죄 된 몸의 이미지나 죄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속죄 제물로 죄 사함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는 여전히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 창조된 인류와 창조주의 관계에 미치지 못했다. 은혜 아래의 인류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의 역할에서 여전히 멀기만 했다. 그러니 하나님은 기다리고 인내해야 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런 인류가 계속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은혜시대 하나님의 여러 사역 방식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구원할 인류는 소수의 무리나 하나의 민족에 그치지 않으며, 하나의 민족, 하나의 파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혜시대는 율법시대와 마찬가지로 수천 년을 거쳐야만 했다. 인류는 똑같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시대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했다. 한해 또 한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그렇게 인류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영겁의 세월과 상전벽해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인류는 시기마다 다른 변화를 겪고, 지구상의 만물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을 거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은혜시대에 예수가 인류를 속량한 사실이 지구 끝까지,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전해져 세상 만인이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 시대, 즉 율법시대에 이은 은혜시대가 일단락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묵묵히 기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다리면서 은혜시대의 인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했다. 그는 계속 은혜 위주의 사역을 이어가면서 그 시대의 인류에게 은혜와 축복을 내리고, 그의 행사, 은혜시대에 한 그의 사역과 말씀, 그리고 그가 행한 사실과 그의 뜻이 그가 선택하려는 모든 사람의 귀에 이르게 하여 그들이 더는 죄 된 몸의 이미지나 죄인의 신분으로 그의 앞에 서지 않도록 그의 속죄 제물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비록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더 이상 율법시대의 일면식도 없는 관계가 아닌 신자와 주,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로 발전했지만 이런 관계는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는 궁극적인 관계인 인류와 하나님,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그런 관계가 피조물과 창조주라는 관계와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지만 율법시대의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에 비해 큰 진전을 이루었으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계속 인류를 인도해야 했다. 마음속 깊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상상, 토색과 요구, 패역과 대적이 충만한 이런 인류를 계속해서 앞으로 인도해야 했다. 어째서겠느냐? 이런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 말고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 말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신분, 지위,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류가 사탄의 패괴를 거쳐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본질, 마음속 깊은 곳의 수많은 관념과 사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립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지 모르고, 어떡해야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될 수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하니 창조주를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류가 이 정도로 패괴되었는데 세상 만물을 이런 패괴된 인류의 손에 맡긴다면 그 결과는 세상 만물을 사탄의 손에 넘기는 것과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벽하게 같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사역을 이어 나가고, 인류를 하나님이 하려는 다음 사역으로 인도해야 했다. 그 사역은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대하며 갈망했고 예전부터 이를 위해 오랜 시간 인내했던 사역이다.

인류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넘치게 받은 후, 이 세상과 인류는 마침내 어떤 면에서든 하나님이 진정 인류 구원 사역을 해야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님이 인류를 정복하고 심판하고 형벌하며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온전케 하고 만물 가운데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인류를 얻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 시기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며 은혜시대의 인류를 은혜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할 필요도, 은혜 아래의 인류를 공급하고 목양하며 돌보고 지킬 필요도 없다. 인류에게 무조건적인 은혜와 축복을 끊임없이 공급해 줄 필요도, 탐욕스럽고 몰염치하게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면서 전혀 그를 경배하지 않는 은혜 아래의 인류를 무조건 인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이 하려는 것은 그의 뜻과 성품, 본질을 나타내고 그의 참된 마음의 소리를 전하는 것이다. 이 기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필요한 다방면의 진리와 말씀을 공급하는 한편, 그의 진실한 성품, 즉 공의로운 성품을 드러내고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면서 그저 심판, 정죄의 말을 공허하게 몇 마디 던짐으로써 일을 매듭짓는 것이 아니며, 사실을 통해 인류의 패괴와 본질, 사탄적 추태,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패역과 대적, 버림 그리고 수많은 관념과 배반을 들추어낸다. 이 기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긍휼과 자비도 베풀긴 하지만 그보다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 혐오, 반감, 정죄를 드러낸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성품 및 신분의 대전환과 변화로 인해 인류는 미처 손쓸 새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전광석화처럼 그의 성품을 나타내고 말씀을 선포한다. 물론 하나님도 대단한 인내와 관용으로 인류의 필요를 공급한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다양한 방식과 각도로 피조물을 대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류를 향해 말씀하고 그의 성품을 나타낸다. 이런 방식은 말씀이든 사역이든 모두 하나님이 육천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바라던 것이다. 육천 년의 바람과 기다림은 육천 년의 인내를, 육천 년의 기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지만 육천 년간 기나긴 세월과 상전벽해를 거듭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이 처음 창조했을 때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하나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본 인간은 하나님이 기대하면서도 증오하기도 하고 차마 볼 수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세 가지를 말했다. 기억했느냐? 이런 인간은 하나님이 기대하면서 증오하기도 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서 차마 볼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차마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모습이 인간에게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느냐? 율법을 경험하고 다시 구속을 경험하고 나서 마침내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율법과 계명을 깨달은 것을 기반으로 오늘에 이른 인간,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단순하고 마음속 깊은 곳이 백지상태였던 아담과 하와 같지 않은 인간, 마음속에 새로운 것,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던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조금 생긴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이 증오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증오하느냐? 모두 이것을 알고 있느냐? (사람의 패역과 대적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다. 사람도 귀신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니 더 이상 뱀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비록 인간은 저마다 사상 관점과 주관, 만사 만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들이 전혀 없다. 인간은 생각할 때는 주관을, 일을 할 때는 입장과 방식 그리고 태도를 가지지만 인간이 가진 이 모든 것은 사탄의 패괴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두 사탄의 관점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나 진심은 전혀 없고, 사탄의 독소에 젖어 사탄의 사상 교육과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사역을 펼쳐 사람의 생존 방식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준칙과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효과를 보기 전까지는 인간은 하나님이 보기에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이 그가 증오하는 대상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그때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 깊은 곳에 행복이 있겠느냐, 기쁨이 있겠느냐, 아니면 위로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위로나 기쁨은 조금도 없고 오직 증오로 가득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말씀하는 것 외에, 끊임없이 말씀하는 것 외에, 하나님이 유일하게 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인내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서 받는 하나님의 느낌의 두 번째 방면인 증오이다. 세 번째 방면은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초심으로 보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의 관계였다. 이 관계는 비록 인간처럼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이 관계는 인간의 육적인 혈연관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처음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모습과 말세에 하나님이 본 인간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처음 사람의 모습은 단순하고 미숙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순결하고 깨끗했다. 두 눈을 보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의 맑고 투명함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이 지닌 갖가지 패괴 성품인 강퍅함, 교만함, 사악함, 간사함은 볼 수 없었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하나님이 흡족해한 인간임을 사람의 언행, 두 눈,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다시 마주했을 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과 두 눈은 더 이상 맑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속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의 표정, 언행은 하나님을 증오하게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차마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사실은 무엇이더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온 인간은 하나님이 손수 창조했지만 이 인간은 더 이상 시초의 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두 눈에서부터 생각까지, 더 나아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과 배반으로 가득했다. 사람의 두 눈에서부터 생각까지, 나아가 마음속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사탄의 성품이 인간의 몸에 오롯이 흘러넘쳤다. 사람의 눈빛이든 표정이든 사람의 강퍅함, 교만함, 간사함, 사악함, 진리를 싫어함 등 사탄의 성품은 숨김없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거나, 하나님과 마주할 때조차 사람의 사탄적 패괴 성품,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의 본질은 고스란히 흘러나온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밖에 형용할 수 없게 만든다. 바로 ‘목불인견’이다. 오늘날까지, 이 순간까지 걸어온 인간이지만, 전반적인 사회 환경을 보나 개개인의 여러 가지 실제적인 상황과 조건으로 보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의 세 번째 단계 요건에 부합한다. 이런 인류에 대해 하나님은 기대로 충만하면서도 증오로 가득하기도 하다. 물론, 인류의 패괴된 면면을 차마 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더 이상 무의미하게 인내할 필요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은 육천 년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바랐던 사역,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품을 나타내고, 그리고 모든 진리를 선포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택한 이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이 오랫동안 바랐던, 만물을 다스리고 만물의 주인이 될 사람의 무리가 곧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면 각각의 일은 모두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 아프고 슬픈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할 일은 바로 인류가 사탄의 패괴를 겪는 날이 끝났다는 것이다. 인류는 율법의 세례와 하나님의 구속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의 마지막 단계, 즉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정복을 받아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인류에게는 크나큰 복음이며 하나님에게도 물론 오랫동안 기대했던 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든 이는 인류 전체에 있어 가장 좋은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패괴, 세상의 조류, 사회의 구조, 인류의 정치, 전 세계의 자원, 지금의 재난 등 어떤 면에서든 인류의 결말이 다가온 것이다. 인류는 마지막에 다다랐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오히려 절정이자 인간이 기념하고 축하하기에 가장 가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 물론 하나님의 육천 년 경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니 과거 인류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다리고 인내했는지를 떠나 이는 모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다루려 했던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돌아와서,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의 경륜을 세 단계의 사역으로 나누었고 앞선 두 단계의 사역은 이미 완수하였다. 그 두 단계의 사역에서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율법이든 계명이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인간이 율법과 계명, 하나님의 이름,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의 신앙, 일부 좋은 행위와 신조를 지키게 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만물을 다스리고 만물의 주인이 되는 기준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 기준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를 거친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시킨다면 그들은 율법의 방식이나 은혜시대 사람에게 내린 은혜와 축복의 방식으로 만물을 대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만물을 다스리는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칠 것이고, 인류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는 일과 직책 그리고 본분을 결코 완수할 수도, 만물의 주인 그리고 다음 시대의 주인이라는 요구 기준에 도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진리와 다방면의 실행 원칙을 선포하여 사람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인지, 사람은 만물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며 다스려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창조주의 권세 아래 진정한 피조물로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한다. 이런 것들을 알고 나면 사람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람이 그것들에 도달하고 나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도 도달하게 된다. 율법, 계명, 간단한 행동 준칙이 진리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세에 사람의 실행,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관련된 많은 말씀 그리고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이 어떻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는 곧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이 말한 그 모든 진리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하나님에게 받은 부탁과는 무관하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네 곁에서 함께 보내는지, 너를 감찰하는지를 떠나 너는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고 네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을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진정 하나님이 안심하고 부탁을 맡길 만하며 합당한 자격을 갖춘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제 깨달았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추구는 단순히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거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한 진리 추구는 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는 진정으로 사람의 결말과 운명과 관련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느냐? 미시적으로는 사람이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이다. 거시적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편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경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그리고 인류에게 거는 하나님의 희망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일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누구든 네가 언제부터 하나님을 믿었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도태되는 대상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나님의 사역은 세 단계이다. 경륜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부터 있었고 각 단계의 경륜을 인간에게 실시했다.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인간을 오늘날까지 인도하면서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이고 오랫동안 인내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선포한 진리, 인간에게 알려 준 다방면의 요구 준칙이 사람에게서 생명이 되고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시하는 일이겠느냐. 하나님은 이토록 많은 말씀을 선포했고, 이런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는 수많은 예비 사역을 했다. 그렇게 말씀을 선포했는데, 궁극적으로 네가 말씀을 추구하지도 진입하지도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이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자질이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믿음을 가진 지 얼마나 되었든 진리 추구의 길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객관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말고 무조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허송세월 보내지 마라. 네가 진리 추구를 인생의 큰일로 삼고 추구하며 노력했는데도 최종적으로 얻고 도달한 진리가 네가 바랐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는 너의 태도와 진심을 보고 적절한 종착지를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제부터는 종착지니 결말이니, 훗날이 어떨지, 미래는 어떨지,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 죽지 않을 수 있을지 등을 중시하지 마라.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구하지도 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대로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여라. 그리고 하나님의 육천 년의 기다림과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약간의 위로를 주어 하나님이 네게서 희망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염원이 네게서 실현되게 하여라. 그럼 하나님이 너를 박대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설령 최종의 결과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조물로서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개인의 계획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지켜야 할 자세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다.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거시적인 측면의 교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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