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초이다 (제 1 부)
먼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하나님 말씀 찬양부터 들어 보아라.
1. 하나님은 너희가 독립적으로 먹고 마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 살며,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지고 가득 찬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네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진정으로 그런 정도로 가까워져 언제나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면, 너는 어떤 일을 해도 어리둥절하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함께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할 수 있다.
2. 사람과 일, 사물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 말씀이 언제나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네가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행하도록 인도하고, 일거수일투족 네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헤매지 않고 새로운 빛 안에서 살게 하고, 더욱 많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하리. 어떻게 하고 어떻게 행할지를 사람의 관념대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에 순종하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고 많이 묵상하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3. 하나님은 너의 전능자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 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방금 틀어 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찬양을 다 듣고 나서 너희는 어떤 빛이나 실행의 길을 얻었느냐? 어느 말씀에서 깨우침과 빛을 얻었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헤매지 않으리”라는 말이 옳으냐? 이 말이 진리이냐? (그렇습니다.) 이 찬양의 어느 말씀 때문에 네가 현실의 삶에서 네 체험에 특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읊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자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부분에서 어느 말씀이 실행의 길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현실의 삶에서 일이 닥쳤을 때의 실행 원칙이겠느냐? 너희가 짚어 낼 수 있느냐? 생각해 보아라. 사람들이 신문, 잡지나 여러 서적을 읽으면 저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어떤 부분이 눈길을 끌겠느냐? 하나는 사람이 관심을 갖는 부분이고, 하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며, 또 하나는 사람이 일상에서 알아 둬야 하는 중요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 말씀에서는 어느 말씀이 눈길을 끄는 부분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분명히 밝히는, 일상에서 일이 닥쳤을 때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원칙이겠느냐? 알아볼 수 있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읊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자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의 뜻을 모두 이해하겠느냐? (네.) 전부 구어체 문장이라 추상적이지 않고 평이하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짚어 낼 수 있느냐? 무엇이 원칙이냐? 크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원칙이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다소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고, 나아가서는 조금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칙은 바로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갖춰야 하는 실행의 길과 준칙이다. 이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정확하게 말하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미 알려 준 실행의 길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을 때 잘 들어 보아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하나님은 너의 전능자임을 믿어라.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고 갈망하며 구하라. 사탄의 구실과 속셈, 간계를 거절하고, 실망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하고 기다려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고, 내면의 걸림돌을 없애라.”) 이 부분을 세 번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좀 있느냐? 세 번 읽고 나니 평소에 별생각 없이 들었을 때랑 좀 다른 느낌이 드느냐?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 너희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실행 원칙은 무엇이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진리의 한 측면은 무엇이냐? 이 측면의 진리는 실행의 원칙과 관련된다. 여기에서의 원칙은 도대체 무엇이냐? 어떤 현실적 문제와 관련되느냐? 첫 소절에 있으니 바로 이해되지 않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이해되지 않는 일이란 진리의 측면, 실행의 측면, 성품 변화의 측면 그리고 본분 이행 중 업무의 측면, 개인의 내적 상태의 측면 및 사람의 본질을 분별하는 법에 관한 측면 등이 해당된다. 분명 이런 일은 네 주변에서 일어나 네가 보고 듣게 되지만, 너는 이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여기에 관련되는 실행의 길과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물론 여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등도 알지 못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간파하지 못하여 가장 큰 고충이 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많다. 그것이 외부의 일이든, 하나님 집의 일이든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떡해야 하느냐? 먼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어떤 진리 원칙이 있는지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읽어 보고 우선 진리 실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은 다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다음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을 확실히 정하면 진리를 깨닫기가 수월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구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느냐? (이해됩니다.) 이런 환경과 이런 사람, 일, 사물은 하나님이 배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네게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조급하게 정의하거나 단정 짓지도 말며, 그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네가 그 일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런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이 일을 네 눈앞에 배치하여 너를 그런 환경에 두었다면 하나님의 태도는 확실하다. 하나님은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속히 이해하고, 또 당장 단정 짓고 결론을 내어 어떤 해결 방안을 내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이 일은 네게 익숙하지 않고, 네가 이해하지 못하며, 접해 본 적 없고, 배우지 못한 공과이기 때문에, 또 네가 이 일에 대해 아무런 경험이나 교훈도 없고 그 어떤 체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네게 답을 내놓으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마련하신 거라면 어째서 빨리 결과를 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하는 목적은 네가 속히 하나의 이론적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이런 환경과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그 속의 사람과 일, 사물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공과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체험하고 몸소 경험하고 나면 이 일이 네게 의미 있는 일이 되고, 게다가 그 의미와 가치는 더없이 클 것이다. 결국, 네가 이 일을 겪고 난 후 얻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나 관념, 상상, 판단이 아니고, 사람이 정리한 경험 교훈도 아니라 몸소 깨달은 하나의 체험이자 사물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진리에 근접하거나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은 것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이토록 명확하고 분명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네가 속히 답을 도출하여 답안지를 제출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네가 이런 환경을 겪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태도가 이러하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의 요구 기준을 갖게 되었다. 그 기준은 바로 사람이 실행하는 하나의 원칙이다. 무엇이 실행의 원칙이겠느냐? 그것은 실제로 일이 닥쳤을 때 네가 그 일을 처리하는 경로와 방식, 방법이다. 그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태도를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에는 유래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왜 이런 요구 기준을 제시했는지 알고 있느냐? 네가 슈퍼맨이 아닌 보통의 사람이고, 네 생각이 정상인의 생각이며, 네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40, 50살, 나아가 80살까지 살았든 너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한평생 영원히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지금 너의 이런 경력과 경험, 체험, 견문, 이력 등 각 측면과 네 마음, 생각 속에서 인지하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쌓인 것이다. 이것을 정상 인성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정상 인성의 성장 과정이며,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고 생소한 일이 네게 닥쳤을 때 하나님은 네가 로봇처럼 신속하게 반응하여 속히 답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로봇은 한 번에 모든 정보를 기억 장치 속에 입력하기 때문에 네가 답을 원할 경우, 기억 장치 속에 저장만 되어 있다면 검색 한 번으로 답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경험과 경력, 이력, 진실한 체험 등의 정상 인성과 관련된 것만 있을 뿐이다. 이는 슈퍼맨, 로봇,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정상 인성에 필요한 것과 갖춰야 할 것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요구 기준을 제시하고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었다. 이 실행의 길이 무엇이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네가 급히 알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보통 사람이다. 설사 네가 과거에 겪은 일이라 경험이나 체험을 조금 해 봤다고 한들 미래에 동일한 일이 일어났을 때 네가 꼭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찾게 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진리에 따라 실행하는 것도 아니며,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조급하게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정상 인성을 이해하게 해 준다. 정상 인성은 비범하지 않고, 고상하지 않으며,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체험과 경험, 인식, 이해 그리고 각 부류 사람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모두 여러 환경,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이다. 초자연적인 일은 없고, 아무도 이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이 법칙을 뛰어넘으려 한다면 이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네가 정상 인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몹시 교만하고 실속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은 환경을 마련하여 네가 그 안에서 사람의 패괴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인식하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상 인성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실행의 길은 무엇이겠느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쳤는데 사람이 간파하지 못하고, 이해도 되지 않으며, 접해 본 적도 없고, 생각도 안 해 봤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사람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의 요구 원칙이 무엇이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게 이렇게 요구한다. 그럼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어떤 태도로 이 일을 대해야겠느냐?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간파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으며 겪어 보지 못한 일, 나아가 속수무책인 일에 직면하면 먼저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은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간파하지도 못하고, 겪어 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어. 어떤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운 건 아냐.’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인식하면 끝이냐?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부끄러울까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저 이런 일에 대한 하나의 인식이고 태도일 뿐이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속으로 ‘이런 일은 체험해 보지도 못했고 간파하지도 못하겠어.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마련하신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성과를 거두려 하시는지, 하나님은 어떤 태도이신지 모르겠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되는대로 놔두고 신경 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슨 태도이냐?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태도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태도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태도겠느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속으로 ‘이 일은 내가 간파하지도 못하겠고 이해도 안 돼. 겪어 보지도 못했고. 대학 다닐 때 이런 일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도 없어. 내가 석사, 박사에 한때는 교수까지 했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겪어 보지 못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면 너무 창피한 일 아닌가? 다들 날 무시하지 않겠어? 안 되지. 간파하지 못하겠다고 하지 말고, ‘이런 일은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고 구하면 알게 됩니다.’라고 하는 게 좋겠다. 간파하지 못하겠다거나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엇으로 여기느냐? 자기를 성인이나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는 ‘내가 명색이 대학생, 저명한 학자, 석사, 박사, 명사, 위인인데 이해하지 못하거나 간파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럴 순 없지! 설사 그런 게 있다 한들 당신들도 모르는 거니까 문제 될 게 없어. 내가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그걸 당신들이 알게 할 수는 없어. ‘간파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수 없다’ 따위의 말은 절대 내 입에 담을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말씀을 읽고 실행의 길을 얻었느냐? 깨달음은 좀 얻었느냐? 만약 얻지 못했다면 읽은 게 헛수고이다. 어째서 이렇게 평이한 구어체 문장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여러 해 공부하고 글을 익혔는데도 쓸모가 없구나. 이렇게 간단하고 직설적인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정말 못난 인간이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라는 이 말씀에서 실행의 길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갖춰야 할 태도는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본능이 무엇에 이를 수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무엇이 정상 인성인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말씀한 정상 인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슈퍼맨이나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한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네가 이해되지 않는 일을 아는 척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그런 척해도 알 수는 없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한 태도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에게 너도 모르는 일, 간파하지 못하는 일, 겪어 보지 못한 일이 있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정상 인성의 모습이니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후에는 어떡해야 하겠느냐?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 일은 저도 겪어 보지 않았고, 간파하지도 못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요. 저도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보다 나은 면은 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을 보았고 실행의 길을 보았거든요. 제겐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 희망이 어디에 있느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이 일을 가슴에 담아 수시로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구하고, 이 일을 가슴에 담아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부담으로 변화시키고, 네 책임, 네가 구하는 방향과 목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너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로 구하고, 예배 교제 시에도 이 일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고 묵상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저 형식적으로, 건성으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이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 일의 본질을 간파하고자 해야 한다. 아울러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와 고민, 그리고 자신의 패괴 성품이나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 따위의 문제도 해결하고자 해야 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완전한 실행의 길이다. 이 말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환경을 마련해 주는 목적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다방면으로 여러 일을 겪어 그로부터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 말씀의 다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체험이 더 풍부해지고 하나님, 자신, 환경, 인간을 더 다각적이고 포괄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특수한 환경을 마련하고 특수한 공과를 안배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살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사실상 사람은 무척 수동적이고 강제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끌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고심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일수록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필요하며,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기에 더 많은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심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올수록 네 마음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 네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머물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머물수록 사람이 추구하는 바와 걷는 길, 그리고 사람 내면의 상태가 점점 좋아질 것이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까워져 네가 하나님 앞에 자주 나아와 진실한 마음을 바칠수록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진실해지고, 네 생활과 일 처리, 행동, 처신에 절제가 생길 것이다. 이 절제는 어떻게 생기느냐? 사람이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것에서 생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거나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마음속에 언제나 하나님의 지위가 있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네가 수시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분 본질,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으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생기고, 너는 하나님의 감찰을 받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해야 절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이 짧은 말에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태도,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겠느냐? 일이 닥쳤을 때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무심한 태도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고, 간파하지 못하거나 이겨 낼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더 나아가서는 너를 연약하게 하는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급히 알려고 하지 마라. 하나님은 등 떠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에게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네게 시키거나 요구하는 일은 모두 정상 인성이라면 이룰 수 있고, 도달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조금도 터무니없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정상 인성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네가 늘 상상에 따라 남보다 뛰어나고, 남보다 높고, 남보다 능력 있고, 남보다 더 잘하고자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늘 이렇다. 하나님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진리를 구해야 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런 요구를 제대로 묵상해 보지도 않고 기어코 단숨에 일을 해치우려 하고, 멋지게 해내서 남의 기를 죽이려 한다. 그는 슈퍼맨이 되려고 하지 절대 평범한 사람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자연법칙을 어기려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며, 정상 인성이 없고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한 정상 인성 범위 안에서의 요구를 경시하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정상 인성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기준을 경시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 낮아.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고작 정상인이 되겠어? 비범한 사람, 일반인보다 월등한 사람, 명사나 위인은 돼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여 신경 쓰지 않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위 슈퍼맨이나 위인이 경시하는 그 평범하고 일반적인 말씀으로 사람이 지키고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지하고 객관적이며 실제적이냐! 사람에 대한 요구는 하나도 높지 않고, 전부 사람이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상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뜬구름을 잡기보다는 땅에서 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자신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으로 삼아야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는 안 된다.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말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사람의 실행 원칙임을 더더욱 깨달아야 한다. 그럼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뜻하겠느냐? 바로 정상인을 말한다. 정상 이성과 정상적인 판단을 가지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며 객관, 실제, 평범, 보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말이다. 너희는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라는 말을 다시 자세히 음미해 보아라. 이 말은 평범하고, 고상하지는 않지만 정상 인성의 이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최우선으로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이다. 또한, 정상 인성과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이다. 조금도 공허하지 않다. 이 평범한 가사를 너희는 여러 번 부르고 들었지만 아무도 이 말을 진리로 여겨 자세히 묵상하거나 신경 써서 교제하지 않았다. 이토록 귀한 말씀을 그냥 흘려버린 것이다. 사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조언과 훈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등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비이성적으로 그 말씀을 평범한 말로 취급하면서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묵상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결국 누가 손해 보고 손실을 입겠느냐? 바로 사람 자신이다. 이것이 교훈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사람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손쉽게 실행할 수 있다. 어렵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성과도 있을 것이니 결국 너는 차츰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물론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는 원칙을 실행하면 진리, 성품의 변화, 여러 환경을 겪어 얻은 인식 등의 측면에서도 발전할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이냐! 이렇게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가르침 속에서 이성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실행한다면 하나님이 여러 환경을 배치할 때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환경에서 얼마간 수확과 체험이 생기고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수확을 얻으면 하나님이 왜 이런 환경을 배치했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사람에게 무엇을 얻게 하려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사람이 이런 환경을 겪을 때 어떤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었는지, 어떤 치우친 인식을 갖게 되는지, 어떤 비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념과 거부감을 갖게 되는지 등이 이런 환경을 겪는 과정에서 점점 폭로되고 드러난다. 폭로되고 드러난 그런 것들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한동안 체험해야만 분명히 알 수 있고 인식이 생긴다. 이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함의가 응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네가 꿰뚫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겪어 보지 못한 일을 마련하여 네가 무언가를 깨닫고 얻고 체험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루 이틀 안에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을 거쳐 하나님이 한 걸음씩 인도하고 깨우치며 이끌어야 네가 차츰 깨닫고 성과를 볼 수 있다. 절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폭발적이고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단숨에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서 초자연적인 행사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네가 한 가지 일의 원인과 결과를 체험하게 하여 차츰차츰 터득하게 한다. ‘이제 보니 이 부류 사람들의 본질은 이렇구나. 이런 일의 진상과 본질은 이렇구나. 이게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응한 거구나.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달았어. 하나님이 이런 일,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침내 깨달았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네가 체험을 통해 터득하게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터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동안의 체험을 통해 얻은 인식과 깨달은 진리는 도리적이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네 절실한 체험과 참된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이미 진입한 진리 실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급히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 원인과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네가 겪은 일 가운데서 수확을 얻게 한다. 그것은 네가 그저 형식만 따르고 하나의 이론만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과 인식 그리고 긍정적인 관점과 올바른 실행 방법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몇 마디 안 되는 짤막한 내용이지만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것과 사람에게 준 실행 원칙은 무척 중요하다. 지식과 도리를 대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즉, 이런 일에 처할 때마다 이 원칙과 방식대로 실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몇 마디 말이 아니다. 비록 언어적 표현 방식과 구현 방식이 구어체라 말씀이 무척 직설적이고, 화려한 미사여구도, 고상한 어휘 사용도, 점잖은 화법도, 더욱이 권위적인 말투도 아니며, 마음과 얼굴을 맞대고 진심으로 하는 경고이자 요구이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이 가장 일상적인 하나님 말씀은 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오하거나 오묘한 말씀만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는데, 이는 치우치게 이해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이다. 일상적인 말씀이든, 심오한 말씀이든 그 속에는 진리가 있고 오묘한 뜻이 있어 수년간 체험하고 어느 정도 분량이 있어야 깨닫고 인식할 수 있다. 방금 너희가 부른 찬양 속에 이렇게 중요하고 좋은 하나님 말씀이 있건만 아무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노래를 만들어 몇 년을 부르는데도 아무도 그 속에서 중요한 실행 원칙을 찾아내지 못했다. 설령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급히 알려고 하지 말고, 자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진실한 마음을 바쳐라.”라고 알려 주는 것 같다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이러이러한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해도 그 말씀을 현실의 삶 속에서 실행하고 실천하며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하나님 말씀조차 행하지 못하니 여기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실용적이고 원칙적이지만 저희는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눈길도 주지 않으며 실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너희는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평소 저희는 하나님 말씀을 대강 훑기만 합니다. 사전적 의미만 통하면 그냥 넘어가니 하나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인지,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부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너희가 이론적인 것은 제법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꿰뚫어 보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속에서 평생 쓰고도 남을 보배, 황금,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런 보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많은 데다가 전부 진리이니 어떤 것이 보배인지 모르고 다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골치 아프다.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그 진리가 사람의 삶과 인생에 그 무엇보다 쓸모 있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것을 알며, 하나님 말씀을 보배로 여겨서 늘 애지중지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이 가장 값진 보배임을, 그 어떤 명사나 위인의 인생 격언보다 백배, 천배 귀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얻고,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발견하여 얻게 되면 네 가치가 올라가고 하나님에게 칭찬받기 때문에 너는 이 진리를 무척 소중히 여기게 된다. 실생활에서의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어떤 여자가 예쁜 옷 한 벌을 사서 집에 돌아와 입어 보고는 거울 앞에 서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생각한다고 해 보자. ‘이 옷 진짜 예쁘다. 원단도 너무 좋고 박음질도 잘 됐어. 착용감도 보들보들한 게 참 편해. 이런 좋은 옷을 손에 넣다니 난 정말 복받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니까 아껴 입어야지. 격식 있는 곳에 가거나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만 입어야겠다.’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옷을 꺼내 감상하고 입어 본다. 반년이 지나도 그 옷에 대한 애착이 여전해 애지중지한다. 이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이 정도까지 대하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는 여자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옷을 아끼는 정도보다도 못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숱하게 읽어도 진리를 얼마 발견하지 못하고 도무지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너희는 그저 이론적으로만, 입으로만 하나님 말씀이 전부 진리라고 떠들 뿐이다. 만약 가장 단순한 말씀, 하나님이 최초에 선포한 말씀을 언급하며 거기에 담긴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적잖이 읽고 들었건만 어째서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데 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로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원칙, 그리고 실행의 길을 발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일이 닥쳤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원칙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일을 겪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별다른 발전이나 변화도 없으니 그 수확이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도 불쌍하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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