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제 2 부)

너희는 대체 어떤 자가 바리새인인 줄 아느냐? 너희 주변에 바리새인이 있느냐? 그들은 왜 ‘바리새인’이라 불리는 것이냐? ‘바리새인’이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바로 외식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가식적이고 위장한다. 어떻게 위장하느냐? 훌륭한 사람인 양, 선하고 긍정적인 사람인 양 위장한다. 사실, 그가 훌륭하고 선하고 긍정적인 것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가식이라고 하면 모든 모습과 드러내는 것이 거짓되고 위장한 것으로,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한 면은 어디 있느냐? 드러내지 않고 속에 깊이 감춰둔 것이다. 겉모습은 전부 위장한 것이고 모조리 거짓된 것이다. 이는 사람만 속일 수 있을 뿐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한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면 그가 하는 말은 아무리 듣기 좋아도 다 진리 실제가 아닌 글귀와 도리이다. 어떤 사람은 글귀와 도리를 떠들어 대는 것만 중요시한다. 누가 수준 높은 설교를 한다면 바로 따라 한다. 그 결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도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수준이 점점 높아져 많은 사람이 탄복하고 숭상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언행에 각별히 신경 쓰며 무척이나 경건하고 영적인 척한다. 그는 이런 소위 영적인 이론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어디를 가든 그따위 것들을 말하는데, 진리 실제가 전혀 없이 모두 사람의 관념에 맞는 사이비한 것들이다. 그는 사람의 관념과 입맛에 맞는 그런 것들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을 미혹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의 경건함과 겸손함은 실은 가짜다. 그의 포용과 인내, 사람을 향한 사랑은 꾸며 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도 거짓된 것이다. 사람은 그를 성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성결함 역시 가짜다. 진정으로 성결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전부 거짓된 것으로, 전부 꾸며 내고 포장한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듯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연기한 것이다. 사람 뒤에서는 전부 건성으로 일을 하는데,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또한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가정과 직장을 버렸지만 뒤에서는 무엇을 하겠느냐? 교회에서 개인의 사업과 경영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역한다는 기치하에 교회 밥만 먹고 제물을 훔쳐 먹는다…. 이런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이방인 가운데서 생겨났겠느냐? 그렇지 않다. 전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생겨났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 왜 바리새인으로 변할 수 있었겠느냐? 어느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본성 본질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가는 길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거나 공밥을 얻어먹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의 머리와 혀를 무장하고, 거짓된 영적 이론을 전하여 자신을 성인(聖人)으로 포장함으로써 그것을 밑천으로 공밥을 얻어먹으려는 목적을 이룬다. 그들은 도리를 전했을 뿐, 진리를 실행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도를 준행한 적이 없으면서 글귀와 도리까지 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들의 그 소위 좋은 행위와 모습, 버림과 헌신 등은 다 사람의 의지로 억누르고 꾸며 낸 것으로, 전부 거짓된 것이며 위장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티끌만큼도 없고 참된 믿음도 전혀 없다. 나아가 그들이 바로 불신파이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길에 들어서서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이것이 아주 끔찍하지 않으냐?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는 종교적 장소는 매매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그곳을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도 아닌, 종교로 본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의 글귀나 표면적인 도리를 아무리 많이 갖춰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갖춰도 소용없다면 아예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어리석은 말이 아니냐?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냐? 그런 말을 교제하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네게 하나님 말씀을 갖추지 말라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갖춰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 네가 너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네가 교회에 얹혀살 수 있는 자본도 아니며, 네가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진리이자 길이며 생명이다. 네가 이 말을 제대로 활용하고 실행한다면 너는 진리를 얻게 된다. 진리는 네게 있어서 표면적인 도리나 글귀가 아니라 네 생명 실제가 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얻으면 너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조금 전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화제에 대해 얘기했는데 내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어떤 미인이 부자와 결혼했다. 그런 경우 세상 사람들은 그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미인은 부자의 돈을 원하고 부자는 미인의 미모를 원하는 것이라고, 각자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니 진정한 사랑이 없는 거래 결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의 상상대로라면 이 미인이 돈을 펑펑 쓰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평범한 가정주부들처럼 집안일을 하고 날마다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생활했으며, 남편과 가족들에게 잘해 주어 현숙한 아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그녀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먼저 그는 미인이 진심으로 자신과 살 수 없지 않을까 걱정하고, 자신들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과 중요한 물건을 아내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보관하고 자기 명의로 두었다. 그래도 미인은 개의치 않고 남편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든, 자신을 믿지 못하든, 경제적으로 자신을 제한하든, 싫어하거나 언짢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더 부지런하게 일했다. 몇 년 뒤 아이를 몇 명 낳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온 가족을 잘 보살피고 현모양처로서 남편을 잘 따르고 늘 부드럽게 세심하게 대했다. 마침내 어느 날 부자는 아내가 자기 생각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내는 그의 재산을 탐내지 않고 그의 그 어떤 물건도 탐내지 않으며 정당한 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집을 건사하기 위해 젊은 시절, 미모, 시간 등 많은 것을 바쳤다. 또 그녀는 그 집을 위해 부지런하고 착실히 일하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 부자는 무척 감동했다. 감동받은 뒤 그에게 처음 든 생각이 무엇이겠느냐? 그는 ‘아, 내 아내가 이토록 믿을 만한 사람인데 나는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어. 이것은 그녀에게 부당한 대우야. 내 재산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겨야 해. 그녀는 내 참된 사랑이고, 가장 믿어야 하고 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그녀를 믿지 못하고 경계한다면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고 인격적이지 못한 행동이야. 그녀는 이미 오랜 검증을 거쳤으니 더 이상 그녀를 의심해서는 안 돼.’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런 사실을 깨달은 뒤에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일이 닥쳤을 때 그녀의 행동을 관찰한 뒤에 그에게 그런 판단이 선 것이고, 그런 판단을 바탕으로 그가 그런 정의를 내린 것이다. 그래서 부자가 감격하며 모든 재산을 아내 명의로 바꿔 놓음으로써 아내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고, 아내가 오랫동안 자신에게 보여 준 충성과 헌신에 보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사람의 양심과 판단, 도덕과 윤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이 일이 끝났겠느냐? (아닙니다.) 법적 절차를 거쳐 부자가 모든 재산을 아내 명의로 바꿔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가 밥을 먹으러 귀가했는데 문을 들어서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내가 그를 맞이하러 나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집 안이 썰렁했다. ‘평소에는 이 시간에 식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오늘은 왜 밥을 하지 않았을까?’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식탁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종이 위에는 두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안녕!

이야기를 여기까지 들으면 너희도 대략적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너무 잘 위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자는 거짓된 모습에 미혹되었다. 이 미인은 아주 감쪽같이 위장해 그렇게 오랫동안 작은 허점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부자는 그녀와 그토록 오래 살면서도 그 어떤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이 미인은 어떤 물건이겠느냐? (음흉하고 간교하고 몹시 교활합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런 속셈이 있었겠느냐, 아니면 나중에 재산을 받은 뒤에 그런 속셈이 생겼겠느냐?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부자와 결혼한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그녀가 그것을 겉으로 드러냈느냐? (드러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면 그녀가 겉으로 드러낸 것은 무엇이겠느냐? (거짓된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거짓된 모습이었다. 거짓된 모습 이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돈과 이익을 손에 넣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부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을 탐낸 것이었다. 10년이든 20년이든 결국 그의 재산을 가로챌 수만 있다면 그와 결혼해서 그를 위해 오랫동안 청춘과 노동력을 바쳐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위해서 한 일들은 어떤 성질을 띠겠느냐? (위장과 속임수입니다.) 사람이 기념할 만한 것이냐, 아니면 싫어하는 것이냐? (사람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선이냐, 악이냐? (악입니다.) 모두 악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녀의 모든 행동과 겉으로 치른 그 대가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겠느냐? 이 결론이 어디서 나온 것이겠느냐? (그녀가 일을 행할 때의 속셈과 출발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깨달았느냐?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는 틀림없다. 사람은 어째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느냐? 사람은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이 일을 행하는 속셈과 동기를 발견할 수 있느냐? 너희는 분별할 수 있느냐? (일부 표면적이고 분명한 것들은 분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겉면의 행동을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다. 그런데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되면 사람의 본질까지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은 전능하며,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정확한 판단 기준이 있어서 하나님처럼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같은 부류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은 같은 부류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 간에 구별이 있느냐? 진리를 갖춘 사람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갖추어야 비로소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째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가 있느냐?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고,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평가하는 준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의 실제적인 측면은 무엇이겠느냐? 한 사람의 겉면의 행동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해도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네게 진리 실제가 있을 때 판단할 수 있다. 네게 진리 실제가 없다면, 한 사람의 행동이 완벽하고 겉으로 감쪽같이 위장해 빈틈이 없을 때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 네가 알 수 있겠느냐? 너는 분별할 수 없다. 네게 진리 실제가 없다면 너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 겉면의 행위가 훌륭하고 말도 사근사근하게 하고, 많이 고통받고 헌신하고, 겉으로 드러내는 것도 별로 문제가 없고 결점을 찾을 수 없다면, 너는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떻게 판단하고 분별할 것이냐? 너에게는 판단 기준이 없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위와 행동 방식에 기만당하기 쉽다. 네가 그에게 기만당하고 속으면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찰할 수 있단 말인가요?”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다. 설령 진리를 조금 깊이 깨닫는다 해도 진리 실제를 갖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싫어하는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적대시하는 사람인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외식하는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 실제를 갖추어야 합니다.)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꿰뚫어 볼 수가 없고, 온갖 우매하고, 진리에 어긋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은 가련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사람을 볼 수밖에 없다. 사람을 판단하고 한 사람을 규정하는 일에서 그는 사람의 자질과 지식만을 보고, 겉면의 행위가 윤리와 전통문화, 도덕 기준에 부합하는지, 그의 행동이 사람에게 이로운 점이 있는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이 기본적으로 경우에 맞고 사람의 윤리와 도덕적 관념에 완전히 부합하며, 대중의 취향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사람은 그것을 근거로 그를 좋은 사람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느냐? 사람이 결론짓는 모든 방식과 출발점이 하나님이 한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기준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규정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출발점, 다시 말해, 의도와 목적을 근거로 한 사람의 본성 본질을 규정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겉면의 행동과 한 말 또는 글의 행간에 드러난 의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기껏해야 그것들만 볼 수 있으므로 사람은 그저 겉으로 보고 들은 것만 가지고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규정할 때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하는지, 또는 사람이 그 일을 하는 성질이 무엇인지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가장 진실한 생각을 보려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일을 하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사람의 본성 본질 속에서 생긴 것이 무엇이며, 사람이 어떤 길을 걷도록 지배하려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본다. 그러면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데 폐부란 무슨 의미겠느냐? 간단히 말해서 내면의 가장 진실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네가 아무리 위장하고 감추고 꾸며 내도 너의 가장 진실한 생각과 내면에 가장 깊이 감춰진 것을 하나님은 훤히 파악하고 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 무엇도 하나님의 감찰을 피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그 미인은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수십 년의 행동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속였다. 너희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속지 않겠느냐? (속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자기 남편뿐만 아니라 너희도 속이고, 모든 사람을 다 속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녀의 마음속 가장 진실한 생각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모르게 완벽하게 위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은 모두 보고 있고, 그녀가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 부자가 겉으로는 똑똑해 보이고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한 여자에게 당했다. 그것이 그의 순간적인 부주의 때문이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가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너희는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람으로서 처신할 때는 바른길을 걸어야지, 그릇된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무엇이 그릇된 길이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옹졸하게 굴고, 수작을 부리며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또 자신의 패괴와 결함, 단점, 자질이 부족한 문제 등을 숨기고 늘 사탄의 철학으로 일을 처리하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일에서 하나님과 리더에게 아첨을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도 않는 것이다. 늘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최근 내 모습이 어떨까? 모두 내 편을 들어 줄까? 내가 한 좋은 일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실까? 알고 계신다면 나를 칭찬해 주실까? 나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가치가 있을까?’ 그 뜻은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얻을 수 있겠는지, 도태되지는 않겠는지 하는 것이다. 늘 이러한 것들만 생각하니 그릇된 길 아니겠느냐? 이는 바로 그릇된 길이고 바른길이 아니다. 그럼 바른길이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를 얻고 성품 변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바른길이다.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만이 참도이며 바른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과 가장 진실한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구더기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성 본질을 근거로 얘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얘기하고, 본 ‘구더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내적 상태가 어떻게 표출되는지, 너희가 그것을 분석해 본 적이 있느냐? 사람의 어떤 본질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겠느냐? 하나님은 왜 사람을 ‘구더기’라고 했겠느냐? 이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 눈에 분명 피조물이지만 사람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이행했더냐?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떠하더냐?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주동적이지 않고, 책망과 훈계, 징계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또 늘 예배하고 교통하고 공급해야 비로소 약간의 믿음, 약간의 적극적인 면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뜻대로 일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할 때도 많다. 자주 양육하고 책망하고 훈계하지 않고, 하나님이 항상 환경을 마련해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자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 태업하고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기만하는 지경까지 타락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대체 무슨 성질이겠느냐? 모두 악행에 속하는 것으로, 온갖 악만 행한다고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진리와 무관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과 무관한 생각만 하며 먹고 놀기만 할 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다. 설령 약간의 생각이 있다 해도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할 뿐 조금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 마음속에는 온통 어떻게 육을 위해 복과 이익을 취할지, 어떻게 하면 지위와 명예를 얻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 가운데 입지를 다져 지위와 명망을 얻을 수 있을지 하는 생각뿐이다. 하나님이 내려 준 음식을 먹고 하나님이 공급해 준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혐오한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형식만 거친다. 교회에서는 이방인 지도자가 업무를 시찰하는 것처럼 한 바퀴 돌아보고 구호를 외치고 형제자매들을 훈계하여 모두들 착실하게 말을 듣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무성의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을 보고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내 지위를 위협하지도 않으니 참견하지 말아야지.’ 하루하루 이렇게 어영부영 보내며 실제적인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실제적인 문제도 하나도 해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먹고 놀기만 할 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매일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흐리멍덩하게 지내고, 하나님이 좋아하는지 혐오하는지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감찰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또 자기가 하는 일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책임을 다했는지, 충성심이 있는지, 무성의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일할 때 자신을 높이지 않았는지, 하나님을 증거했는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먹고 놀기만 할 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얹혀사는 사람’이라고 통칭한다.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밥그릇 들고 먹는 것조차 힘들다고 남이 시중들어 주길 바란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날마다 되는대로 지내면서 밥맛이 좋은 곳이나 잠자리가 편한 곳으로 가고, 누가 치켜세워주면 또 그리로 간다. 이런 사람들은 구더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다를 바가 없이 똑같다. 사람의 그런 행동을 보면 사람을 ‘구더기’라고 하는 것이 억울한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타락한 본성 속에서 살면서 실제적인 일을 조금만 해도 공을 바란다. 어떤 이들은 “내가 본분을 이행한 지 5~6년이 됐다. 매일 꾸준히 본분을 이행하느라 머리카락이 다 하얘졌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이 역겹지 않으냐? 너는 어째서 바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공을 바라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상을 요구하는 사람을 통틀어 어떤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거지가 아니냐? 이런 사람들은 뻔뻔하지 않으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데, 고생하며 사역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너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일하는 것인데, 무슨 공을 바라고 상을 달라는 것이냐? 하나님이 네게 베푼 은혜와 축복이 적단 말이냐?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라고 하나님이 네게 그 생명을 주었겠느냐? 하나님께 손 내밀어 밥을 구걸하라는 것이겠느냐? 너는 지금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네 의무이자 책임이다. 하나님이 네게 본분을 맡긴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너는 아무것도 받아 내려 하지 마라. 네가 받아 내려 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고 역겨워할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나님께 은혜와 상을 받아 내려 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인격이 비천하고 후안무치한 사람이 아니냐? 너희에게 그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런 내적 상태가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네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할 때 그런 내적 상태인지 너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안 뒤에 서둘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 자신의 추태와 본성 본질 속의 것을 끄집어내 해부해야 한다.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고 난 뒤에 형제자매 앞에 가서 교제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교제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런 내적 상태가 천천히 해결될 것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패괴 성품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한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속으로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수 있다. 자신을 증오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만약 항상 패괴 성품에 따라 살아도 별로 나쁜 점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허용되며, 악행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헛소리가 아니냐? 그런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된 내적 상태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교제해야 한다. 사람의 패괴된 내적 상태와 패괴 표출에 결부하고 또 패괴된 인류는 구더기라고 폭로한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면 이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느냐? 너희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더기라고 한 것은 주로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냐? 사람의 어떤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에 대해 한 말이냐? 사람의 어떤 측면의 패괴된 본성을 폭로한 것이냐? 구더기에 속하는 사람은 일단 무가치하고 염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기에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존재들이다! 왜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한 푼 값어치도 없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만들고 네게 생명을 주었건만, 너는 기본적인 본분조차 이행하지 못하고 밥이나 빌어먹고 있다. 하나님의 눈에 너는 쓰레기로,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존재이다! 이런 사람이 구더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구더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자신의 위치를 찾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며, 창조주와 정상적인 관계를 쌓고 하나님께 보여 줄 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마음을 쏟아부어야 한다. 창조주를 건성으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며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한다. 이제 너희는 사람을 구더기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나 반발심이 있느냐? 자신과 대조할 수 있느냐? “나는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했으니 구더기가 아니겠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린 말입니다.) 어째서 틀렸느냐? 구더기인지 아닌지는 네가 겉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 무관하다. 하나님은 네가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는지, 네가 어떤 내적 상태에서 본분을 이행하는지, 네가 무엇에 기대 본분을 이행하는지, 네 본분 이행에 효과가 있는지, 네 책임을 다했는지, 네 본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했는지를 본다. 네가 만약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충성을 다했으며 본분 이행에 합격해 하나님을 만족게 했다면, 너는 ‘구더기’라는 호칭을 벗어 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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