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제 2 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행정 법령,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부당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이 나서서 저지해 주셔야 해. 그게 하나님의 구원이고 사랑이지.’ 이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사역해서 사람을 구원하느냐?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서 사람을 구원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 말고도, 하나님 생각에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사람의 양심과 인성이다. 만약 네 인성 안에 양심과 인격, 이성이 없으면, 그러니까 일이 닥쳤을 때 네 양심과 이성이 정상적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네 행위를 단속하고 규범화할 수 없고, 네 속셈과 관점을 교정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선 네 양심과 이성이 작용하게 한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너는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겠어?’ 너는 진일보로 구하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진입할 것이다. 하지만 이 첫발조차 떼지 않고, 양심을 갖추지 못한 탓에 속으로 가책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그 모든 요구와 진리는 무엇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춘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방금 한 형제 얘기를 했는데, 그에게 만약 양심이 있고, 이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면, 시럽형 감기약을 보고 나서 그가 어떤 행동을 취했겠느냐? 어떤 태도를 보였겠느냐? ‘이건 하나님께 드리는 거니까 분명 좋은 거겠지.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릴 게 아니라 내가 마시자.’ 이런 생각이 든 순간, 그에게 만약 양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약병을 따서 첫 모금을 마셨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이냐? (양심의 지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그를 통제하고, 그의 양심이 작용했다면 이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첫 모금을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일의 결과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고 전혀 다른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그런 마음이 생긴 뒤 양심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병뚜껑을 따고 첫 모금을 마신 것이다. 그 후에는 가책도 참소도 없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자기 뜻대로 됐다며 즐거워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기회를 잘 잡는지 보라고. 당신들은 멍청해서 이런 일을 잘 모르지. 여문 생강이 매운 법! 누구 하나 이런 생각도 못 하고, 감히 이렇게 하지도 못할걸. 나나 되니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지. 그랬다고 어쩔 건데? 첫 모금을 마셨는데 본 사람 누가 있어?’ 그는 이득을 봤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한술 더 떠서 그것이 특별한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이 거듭될수록 돌이킬 수 없었고, 약을 끝까지 다 마실 때까지 그는 양심의 참소도,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양심과 이성의 경고가 전혀 없었다. “이 물건은 네 것이 아니야. 하나님이 마시지 않고 버리신다 해도, 개나 고양이에게 줘 버리신다 해도 너에게 준다고 하시지 않은 이상 사용하면 안 돼. 그건 네가 누려야 할 물건이 아니야.” 그의 양심은 이렇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냐? 바로 짐승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 양심이 없으면 그렇게 행동한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건만, 그 형제는 오래전에 이 일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기억력이 좋다면 아마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때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의 심각성과 그런 일을 저지른 성질이 무엇인지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규정하고 드러내고 도태시켜 이런 결말을 줄 때, 하나님이 규정하는 원칙과 근거가 무엇이냐? (그의 본성 본질에 근거합니다.) 양심의 지각이 없고, 이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조건을 갖추었겠느냐? 이런 본질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그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누구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 안에 담긴 뜻은 무엇이냐? (불신파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형제자매도 아니라 불신파이다. 그의 어떤 모습에서 그가 불신파임을 알 수 있느냐?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말하고 행동할 때는 전부 자신의 뜻, 자신의 관념과 상상, 기호를 따를 뿐,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양심의 작용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자기 이득만 챙기려 한다면, 그러고도 그의 마음에 하나님 자리가 있겠느냐? 전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행동과 말의 동기와 출발점, 방향, 그리고 그에게서 표출되는 것이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오로지 자기 이익, 자신의 목적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전혀 가책이나 단속을 받지 않는다. 그의 이런 행위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공기로 생각합니다.) 맞았다. 그야말로 딱 맞는 말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하나님이 사람 곁에서 언제나 사람을 감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런 단속도 받지 않고 행동했겠느냐?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게 하나님은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 하든,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도하든, 하나님을 얼마 동안 믿고 어떤 일을 하고 얼마큼의 대가를 치르든 관계없이, 그의 언행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본성이 전부 드러난다. 그가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모독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난 왜 느껴지지 않지? 또 하나님 제물을 훔쳐 먹으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신다고 하는데, 여태껏 제물을 훔쳐 먹고 벌을 받은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이 무슨 사역을 한다는 거야? 사람을 또 어떻게 구원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나무랐지? 누구를 징벌했지? 난 본 적이 없어.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봉헌한 건 마음대로 써도 돼. 오늘 내가 맞닥뜨렸으니 이건 내 거야. 내게는 특별한 은혜지 뭐. 먼저 보거나 먼저 맞닥뜨린 사람이 임자고, 하나님이 그 사람한테 은총을 베푼 거야.” 이건 무슨 논리냐? 사탄, 강도의 논리다. 마귀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자에게 진실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듣고도 이렇게 마귀적인 말을 쏟아 내다니, 조금이라도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들은 설교는 다 어디로 갔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확신하고,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다. 비록 몇 년을 따르며 어느 정도 고생도 하고 대가도 치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막연한 하나님, 상상 속의 하나님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공기로 정의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전혀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상대해 주시지 않는데 그 사람들은 왜 아직도 하나님 집에 남아 있습니까?” 그들은 힘을 쓰고 있다. 힘을 쓴다는 건 어떤 개념이냐? 진리에 관심이 없거나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지만 복과 맞바꾸려고 힘을 좀 들일 수밖에 없다. 비록 겉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욕을 퍼붓거나 대항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사탄 부류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별로 좋지 않은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속으로 이런 자들을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구원하지도 않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겠느냐? “너는 이 측면의 진리를 잘 모르니 잘 듣고, 저 측면의 진리를 모르니 열심히 묵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에게 말하겠느냐? 또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게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거나 그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많이 줘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줘야 하느냐?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것에는 원칙이 있다.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속 역사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 혹은 진리에 닿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는 하나님이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지처럼 사방으로 떠돌아다닌다. 그에게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도 볼 수 없고,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는 그저 힘만 쓸 뿐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다. 단지 그뿐이냐? 사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조금은 누릴 수 있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기도 한다. 그가 중병에 걸렸을 때도 하나님이 그를 낫게 해 주고, 심지어 그에게 특별한 재주를 베풀어 주거나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이적과 유사한 일을 행하거나, 특별한 일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정말 제대로 힘쓰며 교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념은 어떠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지요. 그럼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다가 다 쓰면 그냥 버리실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잊지 마라. 하나님은 창조주다. 모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어느 종교 어느 교파 사람도, 어느 인종에 속하는 사람도 하나님 눈에는 다 피조물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했다. 이 말은 창조주인 하나님이 일할 때의 한 가지 원칙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해서 최후에 그에게 어떤 결말을 주든, 혹은 그에게 결말을 주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할지 말지, 그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가 하나님 집과 하나님 사역을 위해 어느 정도 일하고 힘을 쓸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에 따르면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막연하고 어렴풋해서 있는 듯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저 성의를 다하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어느 정도 은혜를 베풀고, 현생에서 축복하고 보호해 줘서 그들이 하나님 집의 온기를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누리게 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현생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너그러우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으니 더 나아가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 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이건 사람의 관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데, 너는 그런 사람 마음에 하나님을 심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그에게 아무리 많은 진리를 교제하고 아무리 많은 말을 해 줘도 소용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은혜와 축복, 보살핌, 보호만 조금 베푸는 것뿐이다.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 은혜도 누리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깨우침과 빛 비춤까지 주시면 그가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진리를 알아듣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정해졌다. 그래서 하나님도 무의미하거나 소용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게 아니에요. 가끔은 그도 징계를 받거나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어느 정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사역에 관계된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갖추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도 속으로 다 생각이 있고,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 커다란 능력을 조금 나타내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기준이 있다. 사람은 반드시 진실된 믿음을 갖추어야 하고, 진리를 사랑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하는 것에도 기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평소에 심판과 형벌을 자주 받습니다.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일종의 기호가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어떻게 아니라고 확정할 수 있느냐? 구원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인데 그래도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내리겠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또 이 부분에서 사람의 오해도 있다. 너희가 볼 때 하나님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대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끔 맞닥뜨리는 것은 무엇이냐? (징계입니다.) 그렇다, 징계다.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전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결코 받아들일 리 없으며,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런 본질과 태도를 가진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들의 본성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려는 올바른 마음가짐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와서 복받기를 바랄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약간의 축복과 은총, 보살핌과 보호를 베푸는 것 말고, 어떤 방식으로 창조주가 해야 할 일을 하느냐? 바로 말씀으로 일깨우고, 경고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훈계하고, 책망하고, 꾸짖고, 징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는 사역은 여기까지이고, 이것이 한계다. 하나님이 하는 이 사역으로 사람에게서 거두게 되는 효과는 무엇이냐? 사람이 고분고분 단속을 받고, 하나님 집에서 착실하게 하나님을 위해 힘쓰고, 교란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으로 그들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이냐? 그들이 받은 은혜와 축복, 보호와 보살핌,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 등이 그들에게서 성품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들의 성품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 사역으로 이루게 되는 효과는 무엇이냐? 그들이 행위에서 어느 정도 단속을 받고, 규칙을 지키게 한다. 겉으로 볼 때 조금 사람다운 모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말을 잘 듣고, 축복과 은혜 때문에 억지로라도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고, 규례와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따르며 일 처리하게 된다. 그저 이뿐이다. 이 정도가 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냐? 아직도 부족하다. 그들의 행동이 기본적으로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 원칙에 따라, 또 일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행위에 변화가 생긴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위에 변화가 생긴 이상, 그 성품도 변화에 이르게 한다면 그건 더 좋지 않겠느냐? (그들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닿을 수 없고, 이를 수 없다. 이것도 한 가지 원인이다. 가장 주된 원인이 무엇이냐? 그건 바로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아예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일부 알아듣는 사람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말씀은 정말 좋은데, 안타깝게도 실행을 못 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게 수술대에 올라 심장 이식을 받는 것보다 힘들어요.” 자기 이익이 손해를 볼 때, 자신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 그는 마음이 심란해서 실행하지 못한다. 지쳐 죽어도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 내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는 영원히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진리입니까?” 그는 몰라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돈이 벌립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베풀어 주시나요? 종착지가 바뀔 수 있는 겁니까?”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진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가 어떤 의의가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 즉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이 그가 볼 때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 곧 창조주임을 모르고, 창조주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니냐? 일부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 생각과 관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 집에서 기꺼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기꺼이’에 따옴표를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느냐? 하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혹은 복을 받아야 할 필요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는 경우가 있다. 또 하나는 다른 출구가 없어서 억지로 잠시 이렇게 따르면서 약간 본분을 이행하거나 힘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 속으로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저 힘을 들이며 본분 이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축복과 맞바꾸려 할 뿐이다. 그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따르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은 시대를 끝내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비록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심장 이식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는 것을 탓할 수 없다. 그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탓해야 한다. 그에게 그런 복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우선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관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심판과 형벌 역시 하나의 관문이고, 시련과 연단은 또 다른 관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못해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순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안주하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무척 사랑해서 진리를 얻기 위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과 책벌을 견디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관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높여 주심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해서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심판과 형벌을 겪고 난 뒤, 시련과 연단도 받아들이며 여전히 진리를 추구한다. 시련과 연단이 아무리 커도 거기서 하나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헌신하고, 책망과 훈계를 아무리 받아도 힘들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또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은 후 철저하게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된다. 이것이 하나님 사역을 겪은 뒤 도달하게 되는 최고의 단계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과 책벌이라는 관문만 통과한 사람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라는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분명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채찍질과 책벌이라는 단계까지만 하고 더 이상 역사하지 않고, 나머지는 사람의 선택과 자각에 맡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른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떤 뜻이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할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일, 미래, 집, 배우자, 감정 등 모든 것에 시달리는데, 이런 건 결과적으로 어떠냐? (진리와 무관합니다.) 그렇다. 진리와도 무관하고 하나님 사역과도 무관하다. 네가 그러는 건 쓸데없이 시달리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는 과정이 아예 없이 그저 발버둥치고 시간을 때우는 것일 뿐이다. 그건 연단받을 때의 시달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건 너 스스로가 자신에게 시달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너를 연단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래도 하나님이 너를 연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일방적인 착각일 뿐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연단받을 자격도 없다. 형벌과 심판이라는 관문도 아직 통과하지 않은 주제에 하나님에게서 시련과 연단을 바란다면 그게 가능하겠느냐? 구름 잡는 생각 아니냐? 시련과 연단이 일반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냐? 일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이 일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책벌한 뒤, 만약 그의 교만한 성품 때문에, 그의 강퍅함, 간사함과 사악함,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성품 때문에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이나 많은 일에서 그에게 심판, 징계, 뚜렷한 채찍질을 하여 그가 하나님에게 징계받은 이유를 알게 한다. 이로써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생겨나고, 성품에도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진리에 대해 참된 순종이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이런 사역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집에서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합격’에는 아주 많은 조건도 필요 없고, 그저 순종과 충성심 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우선은 그 사람 자체가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한다.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야 진리를 받아들일 선결 조건을 갖춘 것이다.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하나님의 채찍질과 책벌을 받아들일 때 진리를 구하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다음 하나님이 비로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절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만약 하나님 집에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하나님 주재에도 전혀 순종하지 않고 본분 이행에도 합격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잘 안 풀리거나 혹은 드러나거나, 혹은 책망과 훈계를 만났을 때 기껏해야 하나님의 책벌, 징계를 받을 뿐이다. 심판과 형벌은 아예 받지 않으며, 시련과 연단은 더더욱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과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사역하는 대상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하는지, 그리고 사람에게 역사할 때 사람의 생명 진입이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또 사람이 적어도 어떤 본질과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교제해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은 어떤 것이었느냐? 사람의 생각은 이렇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고, 곧바로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도 뒤따를 거야. 그러니 우린 항상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를 받으며 가정과 감정, 지위, 앞날을 박탈당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감정과 지위, 앞날 때문에 시달리는 거야.” 이런 말이 정확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중 단어 하나를 사람이 생각하는 영적인 용어로 바꾸는데, 왜 그런 것이냐? 사실 사람의 시달림은 발버둥치고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그것을 시련과 연단으로 생각해서 이를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말한다. 그건 커다란 착각이다. 이는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며, 전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오해가 아니겠느냐? 그건 오해다. 이런 오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에 의존하면서 이런 오해가 생겨난다. 나중에 사람은 그 오해를 여기저기 마구 선전하고 퍼뜨려서 결국 이런 ‘시달림’에 대한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사람이 교체된 것 때문에 소극적으로 지내는데 지위 때문에 시달리고 있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위 때문에 시달리는 것은 시련과 연단을 겪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위를 잃어서 감정적으로 좌절한 것뿐이고, 실패해서 내면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말하는 ‘시달림’이 하나님이 말하는 연단과 차이가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진정한 연단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느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내리기 전에 많은 준비 사역을 한다는 점이다. 일단 사람을 선택하는데, 하나님은 옳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하나님 눈에 옳은 사람인지, 그가 갖춰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얘기했다. 먼저 인성 면에서 적어도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하고,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책망과 훈계, 징계, 채찍질을 여러 해 겪어야 한다. 아마 너희는 징계와 채찍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여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징계, 채찍질은 비교적 무형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는 사람이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있으며, 특히 명확한 언어와 어조가 있어서 그게 어떻게 된 건지 다 알 수 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원칙을 위배했을 때, 혹은 함부로 굴었을 때, 혹은 독단을 일삼았을 때,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에 해가 되는 일을 했을 때 책망을 받는다면, 이것이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책벌과 징계는 어떤 것이냐? 예를 들면, 팀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충성심도 없고, 진리 원칙과 교회 규정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교체되었다. 이것은 책벌이냐 아니냐? 이것이 일종의 책벌이다. 표면적으로 교회에서 처리한 것이든 어느 리더가 교체한 것이든, 하나님 입장에서 그건 하나님이 한 일이고, 하나님 사역의 일부다. 이것이 일종의 책벌이다. 또한 사람이 평소 내적 상태가 좋을 때는 빛 비춤도 있고, 새로운 깨달음도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내적 상태나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사역을 엉망으로 하고 드러났다면 이는 책벌이냐, 아니냐? 이것도 일종의 책벌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심판과 형벌에도 해당하느냐? 아직까지 이런 것들은 심판과 형벌로 치지 않는다. 그러니 시련과 연단에는 더더욱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받는 책벌일 뿐이다. 책벌의 형태는 때로 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마다 체면을 구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본인이 지금까지 잘해 오던 일에서 길을 찾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이 다 책벌에 해당한다. 물론 때로는 옆사람의 지적을 통해서, 혹은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사람이 망신을 당하고 속으로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책벌이다. 만약 하나님의 책벌이 있다면 이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좋은 일이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모두 좋은 일이다. 최소한 하나님이 너를 책임지고 있으며,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너에게 역사하고 일깨우면서 이끌어 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직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 담긴 한 가지 뜻은, 이후 하나님은 아마 계속해서 너를 책벌하고 징계할 것이고, 네가 좋은 태도를 보이고 옳은 길을 가게 될 경우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의 일은 얘기하지 말자. 지금은 하나님이 너를 여러 번 책벌하고 징계할 것이고, 그 후에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네가 순종하기 때문에, 네가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를 심판하고 형벌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가벼운 책망과 훈계는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만 아직 겪지 않았을 뿐, 이미 많은 사람이 겪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양심의 감각에 따라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가책을 받고, 하나님 말씀이 바로 귓가에서, 혹은 마음에서 일깨워 주고 있음을 느낀다. “난 그러면 안 돼. 그건 패역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이자 권면, 경고이다. 사람이 겪는 책망과 훈계에는 몇 가지가 있다. 리더 일꾼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형제자매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상부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책망과 훈계도 있다. 아마 이런 책망과 훈계를 겪은 사람들은 많겠지만,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를 겪은 사람은 적다. 적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그럼 시련과 연단은 어떻겠느냐? 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 그 거리는 더 멀고 더 요원하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서 입가에 물집이 생겼어요.” “하나님께 심판과 형벌을 받았어요. 일 하나 잘못하고,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며칠 동안 두통에 시달렸죠. 이번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어떤 건지 알았어요.” 지금까지 사람이 해 오던 이런 생각들은 오해가 아니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 중에는 이런 오해가 가장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오해한다. 이 오해가 일으킨 부정적인 작용 때문에 사람은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는 줄 아는데, 그건 완전히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는 일과 너무나 맞지 않다.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다다를 수 있겠느냐? 분명 거리가 있을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 책망과 훈계를 겪고, 말씀의 일깨움과 권면을 겪었지만, 그게 다다.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이 단계까지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째서 책망과 훈계, 말씀의 일깨움, 징계, 책벌은 심판과 형벌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이 겪은 말씀의 일깨움, 책망과 훈계, 책벌과 징계로 볼 때 그것으로 이룬 성과가 무엇이냐? (표면적 행위가 구속을 받았습니다.) 행위에 일부 변화가 발생했다고 해서 이것이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고, 설교도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성품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저희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행위만 조금 변화된 건 너무 가련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언제부터 저희를 구원하시는 겁니까? 언제면 저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몇 측면의 하나님 사역을 겪은 사람들이 어떤 수확과 변화를 거두었는지 한번 얘기해 보자. 방금 누군가 행위에 변화가 좀 있다고 했는데, 그건 좀 두루뭉술한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사람이 교회에 처음 와서 본분을 이행할 때, 책망과 훈계를 겪지 않았을 때, 사람은 모두 싸움닭 같고, 다 결정권을 갖고 싶어 한다. 마음속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어. 교회에는 인권과 자유가 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 징계를 겪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한 후에는 감히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사실 그렇다고 완전히 점잖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개념이 좀 생기고 도리를 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다른 이가 하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면 옳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것이 많이 점잖아진 것 아니겠느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행위 면에서 일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온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권면과 일깨움, 그리고 위로를 받음으로써 변화된 것이다. 때로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징계, 책망, 훈계가 필요하고, 원칙을 교제해 주면서 이 일은 반드시 이렇게 처리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알려 주어야 한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 진리가 저기 놓여 있는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하나님이 최고이고, 진리가 최고이며, 하나님 집은 진리가 다스리는 곳이다. 이런 이론적인 기초가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깨어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원래는 미개하고 방종하고 전혀 단속받지 않고 행동하던 사람, 규칙이 무엇이고 하나님 믿는 게 어떤 건지 모르고, 하나님 집은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좋은 마음과 열정, 그리고 ‘위대한’ 포부와 바람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과 권면, 양육과 목양, 책망과 훈계를 받고, 또 여러 차례의 채찍질과 징계를 받으면서 점차 인성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어떤 변화겠느냐? 사람됨의 도리를 알게 되고, 자신이 과거에는 너무나 사람답지 못했다는 것을, 경박하고, 미개하고, 콧대 높아 누구에게도 불복하고, 말하는 것도 사람답지 않고, 행동도 버릇없고, 진리도 구할 줄 몰랐다는 것을, 하나님 믿는 일을 그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가면 되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 등을 인식하게 된다. 한마디로 미개함이 철철 넘쳤으면서도 그래도 자기는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충성,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다 사람의 상상에 해당하고 사람의 좋은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중 일부는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들을 전부 부인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진리를 최고로 여기고, 범사에서 진리가 다스리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한 이 말씀들이 내면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얼마나 크게 작용했든, 결론적으로 이 말씀이 옳은 말씀이고, 진리이고, 긍정적 사물의 실제임을 누구나 이론적으로 이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내면 깊이 받아들였다. 그 후에는 무형의 채찍질과 징계를 겪고, 의식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어느 정도 생겨난다. 처음 하나님을 막연히 상상하던 때부터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또 나아가 하나님이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러한 느낌을 가질 때, 사람의 사상 관점, 일을 바라보는 관점, 도덕적 기준, 그리고 사유 방식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너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간사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해도 속으로는 간사한 것이 안 좋다는 것도 알고,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범죄이고 사악한 성품이라는 것도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예를 들면, 지금도 너는 교만한 성품이 있다. 이따금 자제하지 못하고 자주 드러내고, 하나님도 자주 거역하면서 언제나 저 혼자만 잘났다며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자기가 모든 걸 결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이 패괴 성품임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비록 두드러진 변화는 없지만 행위에 이미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비록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아서 성품에는 아직 변화가 없지만, 너는 내면 깊이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밝히 알게 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것이 네 행위를 이끌고 바꾸면서 네가 갈수록 사람답게 살게 되고, 네 양심에 차츰 지각이 생기게 된다. 만약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르면 마음이 편치 않고, 그 일을 언급했을 때는 그렇게 무감각하지 않고 속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너는 뉘우치고 고치려 할 것이다. 비록 그 방면의 성품이 당장 바뀌지는 않지만, 네 내적 상태를 짚어 주면 너는 본인에게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음을 의식한다. 너는 내면에 지각이 있고 이 지각이 네 행위를 바꾸고 있다. 이런 변화는 단지 행위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변화가 진행 중이고, 또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이 성품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건 결코 성품 변화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다소 거북하게 느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큰 변화도 성품의 변화가 아니라고 하시면, 도대체 성품이 변화된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어떤 변화가 성품 변화에 해당합니까?” 이 문제는 일단 접어 두자. 조금 전에 얘기했던, 사람이 이미 이룬 변화, 즉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이 사람에게 일으킨 작용과 사람에게서 이룬 효과에 대해 계속해서 얘기해 보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사상 관점을 열심히 바꾸는 사람은 일을 만나면 이를 인지하고 대조해 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일은 진리에 맞지 않아요. 하지만 제 관점을 아직 내려놓지 못해서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이는 단지 의식한 것뿐이고, 네 관점이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이것이 네 관점이 바뀌고 그 관점을 내려놓았다는 뜻이냐? 그렇지 않다. 네 관점은 바뀌지 않았고, 너는 아직 그걸 내려놓지 못했다. 이것은 네 패괴 성품이 아직도 원래 그대로이고, 아직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네 의식, 네 내면에 이미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만 그렇고, 주관적인 바람일 뿐인데, 하나님 말씀은 아직 네 생명이 되지 않았고, 네 실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실제가 될 때, 너는 네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의 관점을 응용해서 일체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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