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2) 제 3 부
방금 다루었던 ‘내 의지할 곳은 어디에’라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아직 다 분석하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뒤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직접 한 모든 말씀을 귀담아듣기까지 이 기간에 하나님은 명확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이 깨달아야 할 모든 일을 사람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은 네게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고 신학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으로 네게 고분고분한 사람, 좋은 사람, 동경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네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으로 네게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도를 준행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도 수긍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관점과 소원, 나아가 처신 원칙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목표도 아닌 것 같고요. 저는 나쁜 일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속이지도, 남의 등을 쳐 먹지도 않아요.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더 좋은 사람이 됐어요. 다른 사람에게 진실만을 말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도 거짓됨이 없죠. 본분을 이행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안배를 따르고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깨닫도록 요구하는 진리는 아주 많고,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도 적지 않다. 특히 이상 방면의 진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자 기초적인 부분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상상에만 기대어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교회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거나 심지어 더 많을 수도 있다. 너희는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도 사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어.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리석고 완고하고 우매한 사람을 깨우쳐 주지 않으시는 거지?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사역을 더 많이 하지도, 그들에게 더 공을 들이지도 않으시는 거지? 어째서 성령께서는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이 더 이상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우매한 사람들이 더 이상 우매하지 않도록 그들을 감동시키거나 징계하지 않으시는 거지?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걸까?’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적으냐? 하나님이 말씀을 너무 많이, 자세하게, 심지어 수다스러울 정도로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는지 아는 사람 있느냐? 그건 바로 사람이 너무 강퍅하고 패역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절대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역한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이미 너무도 많아 사람이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에게 강요하겠느냐? 사람은 왜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야기에서 평생 고통을 겪은 주인공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도를 들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누가 자신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 있는지, 자신의 소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으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네가 방향을 바꿔 하나님이 제시한 방향과 알려 준 길을 향해 착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실행하며 아무런 의문이나 의심도 갖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 기대, 그리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환상을 꽉 잡고 놓지 않으며 그것들을 자신의 생명줄로, 나아가 생존의 근간으로 여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향은 제쳐 놓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너에게 좋은 것을 주었지만 네가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니 하나님은 거두어 간다. 거두어 가고 나면 사람은 무엇을 얻겠느냐? 빈털터리가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마음 깊이 ‘하나님께서 과연 내 의지처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복을 받고 미래의 종착지를 얻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알지 못했고 갈수록 더 모호해졌다. 결국,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떤 아쉬움이 남았겠느냐? 의지하고 신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일생이냐! 창조주가 사람에게 일생을 안배한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그녀는 모호해졌고, 알 수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평생을 체험하면 늙어서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똑똑히 알지 못하거나 정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인생의 정확한 방향과 목표가 생기지 못한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얻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 사람의 일생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은 이미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환경을 마련했고 깨우치고 인도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혹은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에게 계속 살아갈 원동력을 주며 최대한의 사랑과 지지력으로 그녀를 지금까지 살게 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그녀가 돌아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서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아무도 너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 없고, 어느 누구에게 의지해서도, 자신에게 기대어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려고 해서도, 그 어떤 소원을 가져서도 안 되며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너조차도 너의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겠느냐? 아무런 불평이나 조건 없이 창조주 앞에 와서 그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의 도를 준행해야 한다. 고통이든 질병이든 모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부분이다. 일생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도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더 하겠느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계속 자신의 관념과 욕망, 고집 속에서 살면서 강퍅하고 집요한 태도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오기를 부리는 태도로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일생이 곧 끝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배치한 이런 환경이나 과정을 그가 차근차근 겪어 왔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에 대한 그의 인식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일생의 운명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의 일생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창조주는 더 이상 개입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역할 때 사람은 또 어떤 관념과 상상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을 보고 관념이 생겨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은 평생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창조주께서는 그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 불쌍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푼다고 해서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겠느냐?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의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창조주가 사람에게 축복, 은혜, 물질적 향락을 얼마나 베풀어 주든,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재촉하거나 도울 수 없다면, 인생의 바른길을 걷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해 준 길을 걸으며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도록 도울 수 없다면 하나님이 한 모든 사역은 그에게서 허사가 된다. 이를 통해 이 사람의 하나님 믿는 생애가 곧 마침표를 찍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어떤 관념이 쉽게 생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포용과 인내, 위대하고 드넓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면서 왜 이런 사람 하나 사랑하지 못하시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이 과연 그를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결실을 맺었느냐?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또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은 또 어떻게 하겠느냐? 사실상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했고 그에게 역사했으며 신경 써서 그의 일생을 정해 주었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의 일생을 배치했다. 그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가 일생의 여러 과정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원동력을 주었다. 또 일부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일생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지켜 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아무리 고집스럽고 집요하더라도, 아무리 교만하고 강퍅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사랑과 도량으로, 하나님의 책임으로 그가 순조롭게 일생을 끝마치게 한다. 그가 일생 동안 위태로운 상황과 시험을 얼마나 많이 마주했든, 나아가 절망을 느껴 목숨을 버릴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가 이번 생을 끝까지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그의 일생은 분명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여러 유혹과 시험, 또는 위험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런 고통과 환난,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 것들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은 계속 사랑과 관용이라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긍휼, 은혜, 축복을 베풀어 주고 마지막에는 또 지극히 큰 인내와 사랑으로 진리를 선포해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게 한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성과를 이루고, 차근차근 사람을 인도하여 사람이 인생을 인식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가 있는지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얕게 말하자면 사람이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통과 자신에게서 생기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고, 더 깊이 있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면서 정상적인 사람, 진정한 사람을 살아 내고 창조주의 인도 안에서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개인의 자유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 사고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사람은 지식, 전통문화, 사회의 흐름, 가정 교육 등 세상과 사회의 많은 것들을 받아들였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항상 혐오하고 폭로하여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터무니없고 허위적이며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사탄에게 속하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도록 사람을 격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사람이 직접 경험하고 분별하며 그 안에서 올바른 인생 체험과 인식을 얻도록 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사람은 얻을 수 있는 만큼만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사람에게는 어떤 관념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걸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는 따뜻한 희망이 그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약간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잔혹함을 느끼는 동시에 사람의 관념도 드러난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게 돕는다 해도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하나님을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믿었지만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네가 그를 불쌍히 여겨 돕고자 해도 그에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겠느냐? 그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겠느냐? 너는 전혀 그럴 수 없다. 그럼 너는 왜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역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그 본인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원망해서야 되겠느냐? 그 안에는 분명 사람의 관념이 많이 들어 있다.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께서는 기왕 그렇게 많은 일을 하셨으면서 왜 마지막 한 단계를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않으시는 거지? 이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 같지 않아. 하나님이 하셔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기왕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신 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실 거야. 이런 성과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사역의 완벽한 결과라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람을 도태시키셨을까? 그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위배되잖아. 사람이 오해하게 하기 십상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렇게 하신 거지? 사람의 뜻에 좀 맞지 않는 거 아닌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원래 그렇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너희도 체험해 보아라. 그러면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일부 관념과 상상에 관련된다. 그 안에는 사람의 상상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너의 요구나 상상과 충돌할 때 기분이 좋지 않고 괴로워서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내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 하나님은 당신 같을 리 없어요.’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네 하나님이란 말이냐?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주 이런 내적 상태와 관념 속에 살게 되고 마음속으로 자주 이런 관념과 요구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게 되며, 자기 행동의 옳고 그름, 자신이 가는 길의 정확성을 판단하게 된다. 이는 골치 아픈 일이다. 하나님의 요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길을 걷고 있다면 설사 네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한들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결과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 경영 사역 중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이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네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거나 구원받을 가망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추리와 판단일 뿐이다.
방금 했던 이야기에서 어떤 것들이 사람의 관념과 관련 있는지 너희가 정리해 보겠느냐? 정리가 다 됐으면 읽어 보아라. (하나님, 네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합리적인 소원과 추구를 가지는 것이 지나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응당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시며 사람에게 역사하셨는데도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인생의 바른길을 알 수 있도록 응당 초자연적인 사역을 하여 곧장 깨우쳐 주셔야지 사람이 평생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 탐색하고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두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셨으니 결국 성과를 보셔야 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일부 요행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있느냐? 누가 더 말해 보겠느냐? (또 다른 관념이 있는데, 즉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이토록 큰 사역을 하셨으니 응당 사람을 더 많이 얻으셔야 하고, 만약 적게 얻으시면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다섯 가지이다. 더 있느냐? (저도 한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체포와 박해 같이 일부 특수한 체험을 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류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증거하면 그것을 자본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그런 체험 간증이 있으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생존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은 자신의 사역이 클수록, 자신이 치른 대가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칭찬을 더 많이 받게 되고 구원받을 희망도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확률이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근거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정비례해야지 반비례해서는 안 되고 연관되어 있어야지 무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념이다. 이것까지 일곱 가지이다. 또 있느냐?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는 사람을 깨우쳐 깨닫게 하시는 건 괜찮지만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거나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고통스럽게 하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념이다. 또 어떤 관념이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얻으신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는 동시에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이는 사람의 이기적이고 비열한 생각이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사역의 결과를 완벽하게 상상한다. 그 또한 관념이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할 때는 응당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말은 반드시 완벽해야 하고,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며, 사람의 상상에 부합하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동경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는 사실이 사람의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 모든 것의 결말도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람도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 소수만 생존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율법시대에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신도가 몇 명 되지 않자 사람은 하나님이 전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사역의 결과가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이런 정의 자체가 바로 관념이고, 사람이 상상하는 완벽주의의 한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려는 것과 하나님이 사역하는 원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또 어떤 관념이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해야 패괴를 벗어 버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반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하나님께서 변하라고 하시면 사람은 바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알려 주어도 사람은 실행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며 늘 편한 길만 찾고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길 바란다. 이는 공허한 상상이 담겨 있는 관념이다. 또 있느냐? (평생 고생을 많이 하고 벽에 많이 부딪힌 사람은 마지막에는 좋은 결말을 맞이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결국 하나님께 얻어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려 하실 때 사람은 ‘좋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문제겠느냐? 너희는 그저 일, 그리고 자신의 감성적 인식만을 조금 설명했을 뿐 그것이 관념의 문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주로 사람의 어떤 관념이 담겨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불쌍한 정도와 고생한 정도에 따라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당연히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과 도량, 관용, 사랑, 동정심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하고 평생 불쌍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가 진리를 깨달았는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했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그가 불쌍하고 고통을 많이 받고 자신의 꿈을 그토록 고집한다는 점을 봐서 이례적으로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많다. 수많은 ‘당연’함으로 하나님이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정의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고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그것이 오해뿐이겠느냐? 사람의 패역도 생겨난다. 관념은 사람에게 이런 폐해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관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이 온갖 관념으로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것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발생한 모든 일과 하나님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을 보고 사람에게는 또 많은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그런 것들이 다 관념이다. 너희가 더 말해 보아라. 사람은 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왕 그토록 큰 사역을 하시는 김에 사람을 더 많이 얻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능한 만큼만 얻겠다고 하시니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 많이 얻길 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여 추구하지 않습니다.) 관념이 사람의 추구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많이 얻길 원하지 많이 얻길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최종적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사람에게 더 이상 역사하지 않겠다고 하고 사람을 포기하겠느냐? 이에 관해 하나님에게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칙이자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이 기준과 원칙, 마지노선에 대해 관념을 가지거나 간파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약간의 반발심이나 상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그토록 공을 많이 들이셨는데도 그녀는 바뀌지 않았어요.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지 않고 고집하며 하나님 앞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포기하신 거예요.” 이것이 주요 원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주요 원인이겠느냐?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이 든 주인공은 얼굴도 변했고 세월이 흘러 나이도 지긋해졌고, 시대도 변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원과 거의 희미해진 환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이런 소원을 계속 고집하게 했겠느냐? (강퍅하고 패역한 성품입니다.) 그렇다. 그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기에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교만하고 강퍅하며 고집스러운 그런 패괴 성품으로 인해 그녀는 계속 자신의 소원과 이상을 고집하며 자신의 이상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는 무엇으로 초래된 것이냐? 그녀의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길 끝까지 걸어갔을 때에도 성품이 여전히 강퍅하고 교만하며 고집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보았다면 그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에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았고 본질적으로는 생명의 진입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게 버려진 것이다. 그는 삶의 여정을 완주하여 비록 하나님 앞에 왔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사람의 운명도 안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간 그의 강퍅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성품은 끝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하는 마지막 기준이자 하나님의 원칙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 원칙과 기준에 대해 어떤 견해와 평가를 갖든 하나님은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다. 네가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보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속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그의 성품이 어떤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본다면, 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원칙과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행사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을 판단할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하겠다. 인생의 온갖 고통을 겪은 이런 불쌍한 사람, 즉 평생 고통을 겪은 사람을 하나님은 왜 그런 식으로 처리하겠느냐? 하나님은 왜 그를 포기했겠느냐? 모든 사람이 그런 결과를 보길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확실히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그를 그렇게 대했겠느냐? 그런 사람의 추구와 성품, 그가 걷는 길을 봤을 때 하나님이 10년 더 사역한다면 그가 바뀌겠느냐?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50년을 더 사역하여 그가 좀 더 오래 살게 한다면 그가 바뀌겠느냐?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바뀌지 않겠느냐? (그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믿어도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 사람 있느냐? (그가 걷는 길이 옳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10년, 20년을 더 믿어도 그가 걷는 길과 그의 인생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내면에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형식적으로 계속 따르는 것을 추구할 뿐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10년, 20년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30년, 50년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결국 흘러나오는 것, 살아 내는 것은 영영 변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이 결정한 것이다. 그가 가진 그런 성품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처리하는 방법에는 원칙이 없겠느냐? 원칙이 있다. 사람은 늘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자신이 꽤나 너그럽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하나님만큼 너그럽겠느냐? 네 사랑이 하나님 사랑만큼 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너그러움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을 너는 어떻게 확인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로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걷고 실행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관점을 계속 고수한다. 그럼 그가 일생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를 포기한 적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한 적 없다. 그의 인생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한 모든 일, 그에게 체험하게 한 모든 일을 진지하게 끝까지 책임졌다.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진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좋은 결과, 만족스럽고 마음에 드는 결과를 보아 그의 소원 속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너그러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어떤 결과를 보았겠느냐?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원했던 결과를 보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고, 이미 희망이 보이지 않았었다. 하나님이 희망을 잃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 희망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고, 흔한 말로 절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이다. 하나님은 너그러움과 사랑을 실제로 사람에게 행하지 단지 빈말 한마디로 끝내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그 사람의 패괴 성품이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고 고집스러움도 그대로이며 소원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복받기를 원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 앞에 왔다. 사람은 사소한 소원조차 평생 고집하고 지키며 꼭 붙잡고 있었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일생, 자신의 가족을 모두 하나님에게 맡겼지만 실제로는 어땠느냐? 그는 스스로 주관하길 원했다. 주변 사람, 자신의 가족, 자기 자신을 주관하고자 하며 서로 의지하고자 했지 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았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을 걷고 있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에 전혀 들어서지 않았다. 그는 평생 고난과 평범하지 않은 일을 그토록 많이 겪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려 낸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무도 강퍅한 사람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지 않은 사람은 결국 이런 결과를 맞이한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인의를 다해 도와주었고, 사람의 상상과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사람에게 너무도 많이 주었다. 사람의 패괴와 성품,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보면 사람은 이런 것들을 얻어선 안 되고, 이런 축복을 얻을 자격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포기하였느냐? 하나님은 포기하기 전에 많은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은혜와 축복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이런 것들을 얻고 나서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했느냐? 여전히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했으며 마음속으로 자주 의심하고 경계하고 반발하고 포기했다. 그는 왜 항상 사람에게 기대어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려 했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바른길로 데려가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늘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가 선택한 길과 그의 요구대로 그를 돕고 그가 목적을 실현하게 이끈다면 그는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내게 한다. 이는 그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길을 걷고 자신의 삶을 살려 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기대야지 하나님에게 기대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만 고수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진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사람은 너무도 심하게 패괴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오직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만이 진리이며 모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에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이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를 수 있다.
방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사람에게 역사하는 여러 방식을 교제했다. 사람이 여기에 관념이 생긴다면 자주 성찰하고 반성하고 인식한 다음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것이 관념과 상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대체 어떻게 했는지를 인식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욱 잘못되고 치우친 관념을 갖기 쉽겠느냐?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패역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 관념이 생기기 쉽다.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이 생기고, 거기서 또 다른 관념이 생기며 온갖 관념이 끊임없이 생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동시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오해하고 또 끊임없이 반성한다. 그런 다음 또 부단히 진리를 깨닫는다. 이런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은 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무엇이 관념인지 모르고 자신 내면의 관념을 인식하지 못하며 자신의 관념을 반성하지도, 전혀 내려놓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만 중시할 뿐 하나님이 어떻게 했는지, 하나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전혀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패괴 성품 외에 또 다른 것이 생기고 그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람은 어떤 것들이 사람의 관념인지 더 자세하고 세세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관념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을 내려놓기 위한 것이겠느냐? 사람이 되도록 빨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입하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떻게 한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 상상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사역이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절대로 너에게 깨우쳐 주지 않고 명문 규정으로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면 네가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일도 있는데, 너는 늘 하나님이 너를 감동시키고 깨우쳐 주길 기다린다. 그 결과 그 기다림 때문에 사역을 그르치고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 교체된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느냐? (관념 때문입니다.) 이제 보니 사람의 관념은 사람의 진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영향을 끼치겠느냐? 작게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크게는 사람의 올바른 선택에 영향을 끼쳐 사람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하기 십상이다. 사람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기 가장 쉽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심판, 형벌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고 진실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일부러 자신과 대립하고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 도태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행하든 그는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을 바보로 대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바른길을 제시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광명 속에서 살게 하지만 사람은 한사코 사탄 철학과 사탄 논리에 기대어 어둠 속에서 살려고 한다. 그러면 그가 걷는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한사코 하나님과 반대로 하려 하니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점점 더 멀어지지 않겠느냐?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 너는 철저히 도태될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잠 10:21) 죽음은 심각한 일이겠느냐? 말세에 죽음은 심각한 일이 아니다. 멸망이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죽음은 멸망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멸망하면 필연적으로 결말이 없을뿐더러 영원히 죽는다. 과거에는 사람이 미련하여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미련한 건 아무것도 아니다. 미련한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죽음도 별것 아니다. 왜냐하면 죽는다고 반드시 멸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은 무엇 때문에 멸망하겠느냐? 사람은 고집과 횡포 때문에 멸망하는데, 이는 미련하여 죽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러면 결말이 없다. 왜 고집과 횡포가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하겠느냐? 이는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된 문제이다. 고집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강퍅함이다.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문제가 심각하다. 때때로 그는 깨닫지 못하여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깨달았음에도 그렇게 하려 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밖에 횡포도 성품 중 하나로, 막무가내인 것이다. 그 안에는 교만과 흉악이 있다. 이 두 가지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이게 단순한 일이겠느냐? 너희는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느냐? 교만하고 흉악한 성품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누구든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 창조주 앞에서 하는 것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대로 사람을 판결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만하고 흉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들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왜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라고 하겠느냐? 아마 다들 답을 알 것이다. 자, 이 이야기와 관련된 관념은 여기까지 다루겠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 아직 다 다루지 못한 게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과 관련된 내용은 오늘 너희가 들은 것뿐이겠느냐?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사람을 드러내는 것,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 등을 다룬다면 어떤 내용과 관련 있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심판, 형벌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시련과 연단에 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데는 원칙과 범위가 있으며, 사람의 분량과 추구, 인성, 그리고 진리를 깨달은 정도를 근거로 한다. 오늘은 이를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징계하며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줄 때는 이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원칙은 사람의 분량에 따라 어디까지 할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라는 말이 너희에게는 다소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 여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구분하면 대부분 사람이 지금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에 임했겠느냐? 아직 일러서 근처에도 못 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방식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몇 가지 절차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 방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근거로 이 몇 가지 절차를 확정한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차와 원칙을 가지고 사역한다. 그는 너의 추구와 인성, 이해력, 그리고 네가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보고 이런 것을 근거로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사람을 어떻게 이끌지 확정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살펴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은 한두 가지 일을 근거로 대충대충 규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어떤 일을 행하든 그렇게 경솔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주신 그 방식이 두려워요. 정말로 제게 임한다면 저는 아직 하나님을 증거할 수도 없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거두어 가신다면 저는 어떡하죠?” 걱정 마라.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대충 네게 행하지 않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느냐? 너는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사실을 통해 자신을 설득하고 자신의 분량을 살펴보아야 한다. 욥만큼 믿음이 있는지, 욥만큼 순종하는지, 욥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욥만큼 충성스럽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것을 가늠해 보고 만약 해당 사항이 한 가지도 없다면 너는 안심해도 된다. 하나님은 너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분량이 닿지 않고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에 대해서도 사람은 의심, 두려움, 회피, 경계 등을 포함해 관념과 상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과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는지를 철저히 인식한다면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사람은 진리 추구를 중시하며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네가 하나님을 따를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해야 한다. 색안경을 끼고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소인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사역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로 역사하는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네가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이 모든 진실을 깨달은 뒤 더 착실하게, 마음 놓고 대담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길 바란다. 네가 길 끝까지 걸어갔을 때 하나님이 너에게 준 기준에 이르고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다면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측면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서는 우선 대략적으로 여기까지만 다루겠다. 세부적인 측면은 아직도 많다.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명확히 말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드러내고 표출하는 일부 실제 사례를 들어야 한다. 그 밖에 이런 실제 사례를 통해 너희가 사람의 관념이 대체 무엇인지 인식하거나 해독할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은 관념이고 비현실적이며 하나님이 행하는 원칙과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물과 줄거리를 적절히 섞어 소소한 이야기도 좀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도 그러지 않는데 너는 무엇 하러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궁리하는 것이냐?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 너는 절대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못하며, 늘 하나님의 요구와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실행 길을 찾지 못하고 늘 속박받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고, 곳곳에서 벽에 부딪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그렇게 전혀 순조롭지 않다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자격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서글프냐!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너희에게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진지하게 따질 때가 됐다.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소꿉장난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하려는 결심을 내렸고 이 사역을 철저히 하려 한다. 어떻게 해야 철저히 하겠느냐? 각 측면의 진리를 모두 사람에게 알려 주어 분명히 깨닫고 치우친 길을 가지 않게 해야 한다. 네가 치우친 방향으로 걸으면 하나님은 너를 징계한다. 네가 자기 길로 치우칠 때가 많으면 바른길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너를 징계한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사역을 마쳤지만 네가 아직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너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때 사람은 가슴을 치며 통곡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받아들인 후 진리를 구하고 일상생활과 연결 지을 수 있어야만 서서히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너는 설교를 들을 때 표면적으로 알아들으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알아들은 것은 그저 도리를 이해한 것일 뿐이다. 알아듣고 난 뒤 현실 생활 속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 자신의 진입과 연결 지어 자신을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도 너와 관련이 없게 된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2018년 10월 11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