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제 4 부
현재 하나님 말세 사역의 형식에 대해 설령 일부 사람들이 어떤 상상이나 관념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현상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룬 성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정복당하여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참도에 뿌리를 내리고 참도임을 인정하고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과에 이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오해가 해결되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건 사람 내면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 그리스도에 대한 상상과 요구, 관념이 아직도 많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념은 너의 생각과 추구 방향, 목표를 주도할 수 있고 너의 내적 상태에 자주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만약 네게 닥친 일이 너의 관념과 관련이 없다면 너는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너의 관념과 충돌하고 너의 관념을 벗어나서 갈등이 생긴다면 너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관념을 내버려두겠느냐, 아니면 대처하고 억제하고 저버리겠느냐? 어떤 사람은 어떤 일 앞에서 관념이 생기면 내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거나 기회가 있으면 입 밖으로 내서 다른 사람에게도 관념을 심어 준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일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게 과연 적절한 말이냐? (아닙니다.) 올바른 길은 어떤 것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이 생겼을 때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겼고, 만약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하나님에게 반발심과 의심을 품고 나아가 배반할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는다. 먼저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부인한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에게 쉽게 순종할 수 있다. 관념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것을 완전히 내려놓지도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생명 진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나아가 심각한 경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도 있는데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이미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가끔 어떤 일에서 관념이 생긴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고 크게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진리가 그의 내면에서 그의 생각과 행위를 주도하고 본분 이행을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관념은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언젠가 설교 교제를 듣고 깨닫게 되면 그 관념이 해결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관념이 생긴 뒤로는 본분을 이행할 생각도 없고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으며 계속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진 채 마음속에 반발심과 불만, 원망을 품는다. 이게 과연 옳은 행위이겠느냐? 이는 해결하기 쉬운 일이겠느냐? 예를 들어, 너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에게 멍청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는 그 말에 화가 나고 반발심이 생겨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감히 내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말한 적 없어. 이런 말은 오늘 처음 듣는다고.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면 어떻게 교회를 이끌 수 있지? 사역을 이토록 많이 할 수 있겠어?’ 갈등이 생기지 않았느냐?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과연 사람이 쉽게 반성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반성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하는 사람은 반성할 수 있다. 네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너는 우선 이 일에서 자신을 부인할 것이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설사 견해와 관점이 좀 있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네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지 자신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훨씬 착실해지며 태도도 단정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멍청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하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아직 지각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한 그 말씀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너의 신념으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틀린 말씀을 하시겠어?’라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각과 다르더라도 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깨닫지 못하더라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분명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비이성적인 것이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일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이는 도리가 아닌 실제이며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다음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너는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자신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을 뿐 아니라 상당히 어리석고 결함과 부족함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 너는 그런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먼저 하나의 규례, 정의나 개념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다음 실생활에서 맞추어 보고, 인식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스스로를 정확히 평가하게 된다. 그때 가서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겠느냐? 네가 그 일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갈등이 없는데도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 (거부할 수 없습니다.) 너는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여서 그 부분을 확실히 깨달으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못 받아들이면 영원히 제자리에 머물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그 어떤 거부감이나 적의를 갖지 마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교체되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마치 지위가 없어져서, 지위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연약하고 소극적인 것은 순전히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나 형제자매가 내린 평가가 본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와 부합하지 않고 스스로 내린 평가와 인식보다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복하고 평정심을 잃게 되면서 결국 소극적으로 대항하고, 자포자기한다. ‘저는 글렀다고 하셨죠? 그럼 아무것도 안 할 테니 두고 보세요.’ 그 결과 본분에 지장을 주고, 하나님께 죄짓고, 자신의 생명 진입도 멈추게 되는데, 그 손해는 상당히 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가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저보고 어디가 부족하다고 하셨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그분 행동도 백 프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평가하거나 정죄할 때, 혹은 처리하거나 안배할 때 실수하지는 않을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상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뭐라고 하셔도 저는 두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분은 저를 정죄하실 수 없고 저의 결말을 정하실 수도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분명 있다. 내가 책망하면 그는 “하늘의 하나님은 공의로워요!”라고 하고, 내가 그를 처리하면 그는 “어쨌든 제가 믿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세요!”라고 한다. 그는 이런 말들로 대응한다. 이는 어떤 말이겠느냐?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말로,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의 관념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으로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와 하늘의 하나님, 즉 이 육신과 하늘의 영이 어떤 관계인지 영영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땅 위의 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영원히 사람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진리를 많이 선포하고 아무리 설교를 많이 해도 여전히 사람이다. 설사 일부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을 구원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땅 위에 있고, 사람이기에 하늘의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을 믿어야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믿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한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렇게 상상한다. ‘땅에 계신 이 하나님이 내게 잘해 주고 내 뜻대로 되게 해 주시면 그분을 존중하고 사랑할 거야. 하지만 나를 보통으로 대하고 못마땅해하신다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고 늘 나를 책망하고 훈계하신다면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셔. 나는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을 믿을 거야.’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너희를 포함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이런 사람을 어느 정도 접해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을 때는 극진히 시중을 들면서 꽤나 잘해 주지만 교체되는 순간 그는 곧장 내게서 등을 돌린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에게 잘할 때는 하나님을 정말로 하나님이라고, 그리스도라고 확신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보고 그러는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에 빌붙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든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만을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확신한다. 땅의 이 하나님이 진리를 얼마나 선포하든, 사람에게 도움과 유익을 얼마나 주든, 정상 인성으로 사는 육신이라면 결국 하늘의 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가 땅의 하나님을 아무리 치켜세우고 시중들고 존경해도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어떻겠느냐? 이 관점은 많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고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공급과 목양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의심할 뿐 아니라, 아울러 하늘의 공의로운 하나님이 내려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평가하길 바란다. 어째서 하늘의 하나님이 평가하길 바라는 것이겠느냐? 그는 자신의 기호와 관념 상상에 따라 멋대로 하늘의 하나님, 즉 그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자기 기호에 맞게 자신을 대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땅의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데, 땅의 하나님은 그저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 원칙을 얘기할 뿐이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사심 없이, 조건이나 아무런 제한 없이 사람을 사랑하셔. 반면 땅의 이 하나님은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뭐라도 하나 실수한 걸 알아채는 순간 설교에서 반면교사로 삼아 분석하기 시작하시지. 그러니 조심해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분이 모르시게 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모르게 한 일이라고 해서 내가 분석하지 못하겠느냐? 나는 네가 한 일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너의 성품과 내적 상태를 분석한다. 나는 꼭 그런 일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진리를 교제할 수 있고, 설교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다. 불신파는 마음속으로 이 육신, 이 하나님은 눈으로 보지 못한 일은 알 수 없고 영계와 진리에 관한 일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이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으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 이 육신은 알아채지 못하고, 이 육신이 사람의 패괴 본질을 모두 알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불신파의 논리적 추론이다. 그들은 항상 연구하고 의심하는 태도, 심지어 불신하는 태도로 그리스도를 대하는 동시에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자기가 상상한 것을 이용해 그리스도를 평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할 때, 자기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기 성품이 어떤지 상대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말할 때도 그렇게 말하며 보통 사람을 대하듯 나를 대하며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은 그가 한 거짓말을 개의치 않으니 나에게도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나와 대등해지려 하며 늘 친구 사이가 되려고 한다. 그는 친해지면 그래도 된다고, 나는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관념이자 무지이다. 이 무지에는 사탄의 사악한 성품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사악한 성품 때문에 사람에게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사람의 본성을 폭로하거나 간파하기 위해 그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시시각각 그의 생각과 관점을 관찰하고 그의 모든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비록 너희는 매일 사람을 가까이하고 어울려 살지만 사람의 본성 본질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 닥치든 겉모습만 간파할 수 있을 뿐 본질은 간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를 철저히 드러내야 너희는 조금이나마 분별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몇 년 동안 가까이 지내도 간파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하루 이틀만 가까이하다 보면 그가 하는 행동, 하는 말, 내비치는 관점을 통해 기본적으로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나와 어울리거나 함께 일하지도 않는 상황이기에 내가 의문을 품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일을 만나서 그가 관점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이 곧장 드러난다. “드러난다고 바로 간파하실 수 있나요? 무엇을 근거로 간파하신 거죠? 어째서 우리는 간파할 수 없나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을 평가할 수 없고 영원히 기준이 있을 수 없으며 기준이 없으면 사람을 간파할 수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기준이 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깨달았기에 사람을 평가할 때 날카롭고 빠른 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이 행사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나이가 좀 들면 일과 사람을 간파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진실로 간파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무엇을 간파한 것이겠느냐? 정치적 속임수, 상업적 속임수, 경제적 속임수 또는 성적 속임수 등 이 사회에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 간파한 것이다. 이런 일은 많이 겪어 보고 들어 보면 피할 수 있다. 체험과 경험이 적은 사람은 자주 속는데, 속는 횟수가 늘어나 경험이 생기면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패괴와 본성, 사탄에 의해 패괴된 본질은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영원히 간파할 지혜가 없고 한 가지 일 이면의 온갖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이 무엇인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영영 간파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을 간파하지 못하면 너는 이 일, 그리고 관련된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너는 처리할 방법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에 이 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조급해하며 아주 곤란해한다. 만약 진리를 밝히 깨달았다면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성품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을 보고 그의 본질을 인식하여 그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그를 경계하고 분별해야 할지, 어떻게 이 일에 대응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이는 지혜의 원천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사람을 간파하고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진리 실제를 갖추어 생명이 되게 한다면 너희도 지혜가 생겨 사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이 갖는 관념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신앙에 대한 사람의 과거의 이해에서 비롯되는 관념도 있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상상에서 비롯되는 관념도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사람은 공중에 희고 큰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아 만민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사역이라고 상상했다. 이제는 이런 상상이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는데, 이런 상상은 사람의 기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고생하려 하지 않고 늘 손쉽게 길 끝까지 하나님을 따를 수 있기를, 충분히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생각이냐! 꽃가마를 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가지는 가장 흔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이 밖에,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 닥칠 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 내면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그 사역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광대하다’와 ‘더없이 크다’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는데, 나는 너희가 아마 이 두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도 이해한 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두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너희 모두의 주의를 끈 다음 곰곰이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두 표현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허한 것 같지만 분명 특정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더라도 ‘광대하다는 건 하늘처럼 광활하고 하나님의 품처럼 넓다는 뜻이야. 하나님은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시는구나!’라고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고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해 낼 수 없다. 소양과 지식으로 그 말을 해석하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체득하고 체험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말하는 사랑과는 다르다는 사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보통 사람의 사랑과는 다르고 인류 전체가 이해하는 사랑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우선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모성애를 예로 들자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식을 각별히 보살펴 주며 무척이나 따뜻하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성애와 같은 느낌과 의미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고, 잘못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 남편이나 아내, 자식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관심과 분리하여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도, 혈연관계의 영향도 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드러남으로써 사람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동시에 체득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게 하며,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빈말도, 하나님의 행위도 아니며 진리이다. 진리로 여겨 받아들인다면 너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이 측면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쉽게 인식할 수 없다. 행위란 무엇이겠느냐? 어머니가 그녀의 청춘과 온 정성을 바쳐 자식을 기르는 것과 유사하다. 어머니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준다. 자식의 행동이 옳든 그르든, 자식이 어떤 길을 가든 사심 없이 주면서 자식을 만족시킨다. 절대로 자식이 옳은 길을 가도록 교육하거나 돕지도, 인도하지도 않고 오로지 보살피고 사랑하며 보호할 뿐이다. 그 결과 자식은 마지막까지도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모성애, 혹은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혈기나 감정, 육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정반대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의 표출 방식은 늘 그 사람을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이다. 비록 네가 느끼기에는 채찍질과 징계 속에서 사느라 편한 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체험하면 너는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람을 대할 때 분별력과 지혜가 생기고, 진리도 좀 깨달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네가 상상하는 모성애, 부성애처럼 알뜰살뜰 보살펴 주고 덮어놓고 감싸 주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몸소 느끼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은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해야만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 알 수 있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패괴된 사람이 어떻게 아무 근거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고심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측면에서 가장 쉽게 생기는 오해이자 가장 깨닫기 어려운 하나님의 본질의 한 측면이다. 반드시 깊이 체험하고 자신을 상황에 대입하여 실제로 접하고 몸소 느껴야만 인식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단 것을 좋아하면 쓴 것은 주지 않고, 설사 가끔 쓴 것을 주더라도 그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그것은 사심과 감정, 혈기가 담겨 있고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사역을 하든, 어떻게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든, 채찍질하고 징계하든, 책망하고 훈계하든, 설사 네가 그를 오해하거나 심지어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하더라도 여전히 인내심 있게 너에게 사역할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런 방식으로 너를 깨우쳐 네가 언젠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를 보았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얻겠느냐? 사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 기간 동안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잘 따르고 진입하여 최종적으로 진리 실제를 살아 내는 것, 사람의 모습으로 살며 더 이상 사탄에게 현혹되고 유혹당하고 시험당하지 않는 것, 사탄을 저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매우 흡족해하고 그로써 하나님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얻겠느냐?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을 얻게 되고 너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너의 그 정도의 찬양이 하나님에게 그리 대단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게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게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지위가 바뀌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이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이자 사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너희가 이해하는 광대하고 더없이 큰 하나님의 사랑에 이런 뜻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여기까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하여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구원할 리 없을 듯한 상황에서도, 그가 반성하고 뉘우치며 손으로 행한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갈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과오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관념이다. 사람은 여러 관념과 상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드시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야만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다. 관념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만 관념을 철저히 바꾸는 것은 어렵다. 만약 너에게 또다시 유사한 일이 닥쳐 또 관념이 생긴다면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그 관념이 네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에서는 진리 교제를 통해 관념을 포기할 수 있지만 어떤 일에서는 내려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서 관념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만 사람에게 관념을 철저히 해결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진리를 많이 깨달아야만 관념이라는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닥친 일에서 진리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역을 해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인식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라는 문제가 철저히 해소될 수 있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란 무엇인지, 이런 관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해부해야 한다. 주로 네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 대해 지니는 여러 가지 상상과 반발심, 요구 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고,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모든 것을 오해하고 거기에 반항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관념은 무척 심각하기에 해부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말씀을 읽고 관념이 생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저 같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아마 저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지요.” 이것은 관념이 아니냐? 이런 관념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 너에게 어떤 패괴가 있고 네가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 하나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회개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진리를 받아들여 패괴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면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겠느냐? 너는 어째서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규정하느냐? 너의 그런 소극적인 생각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고, 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심지어 네가 하나님을 저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떤 교회에 적그리스도, 악인이 나타나 교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미혹했다면 이는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조롱하고 드러내는 것이냐?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은 만사 만물을 이용해 봉사하게 함으로써 그가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원한다.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진리를 얻지만,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원망한다. “하나님의 이런 사역 방식은 부적절해요. 절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모른다고요! 하마터면 적그리스도를 따를 뻔했죠. 정말 하나님이 안배하신 거라면 어떻게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들 수 있죠?” 이건 어찌 된 일이냐? 네가 적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네게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뜻이고, 네가 적그리스도를 따라갔다면 그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너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적그리스도, 악인들이 교회에서 교란을 일으키는 것은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겉보기에는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적그리스도, 악인이 드러나면 너는 분별력이 생기고, 그들 또한 제명되고, 네 분량도 자라게 된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다시 마주쳤을 때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너는 분별력이 생겨 그를 버릴 수 있다. 그 일 덕분에 너는 공과를 배우고, 유익을 얻게 된다. 너는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고,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너희가 볼 때 적그리스도가 교란을 일으켜 사람을 미혹한 일이 좋은 일이 아니냐? 이 정도까지 겪고 나면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일을 하지 않고,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교란하도록 허락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도록 허락한 것은 사탄을 이용하여 봉사하게 한 것으로,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람은 그제서야 하나님의 고심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적그리스도에게 두 번이나 미혹됐는데도 아직도 적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만약 더 교활한 적그리스도를 만나면 또 미혹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체험을 통해 공과를 배우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만 인류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두 가지 표현으로 형용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예사롭지 않고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다’와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 사역을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패괴된 인류가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하나님의 사역 방식, 하나님이 사탄과 전쟁을 치를 때의 지혜와 같은 것들을 사람은 알지 못한다. 모든 인류가 이 방면에서는 백지상태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은 생각이나 관념을 가지는 것이냐? 사람은 지식을 좀 배워 도리를 알고, 또한 자신의 기호가 있으면 관념과 상상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계에 관한 일, 하나님이 하는 사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말세에 창조주가 모든 인류를 향해 직접 음성을 발해 말씀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마주하여 공개적으로 사역하고, 자신의 경륜을 공개하고, 아울러 인류 가운데서 그것을 실시하고 수행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생소한 분야다. 따라서 사람이 이 분야에 관념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상적이라는 말이 진리에 부합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관념이 아무리 정상적일지라도 그것은 역시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 뜻과도 어긋난다. 이를 즉시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일이나 사람의 생명 진입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관념이 아무리 사람의 상상과 뜻에 맞더라도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아니다. 관념이 아무리 사람의 상상에 맞더라도 분별해야 하지 절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긍정적 사물이다. 사탄에 속하는 것은 아무리 좋아 보이고 사람 상상에 맞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창조주의 요구를 충족게 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이치를 얘기하고 권면한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쉽지 않다. 사람은 올바른 일은 그다지 견지하지 않으면서 각종 관념이나 부정한 것, 치우친 것은 쉽게 고수하고 잘 내려놓지 못한다. 이는 어떤 이유 때문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념이 크든 작든,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관념은 쉽게 해결된다. 사실 관념은 결국 일종의 생각일 뿐이지만 사람이 교만함, 강퍅함, 심지어 사악함과 같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념이 도화선이 되어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오해하며 심지어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고도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 그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판단하며 심한 경우 정죄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관념은 패괴 성품에서 생겨나고, 관념이 튀어나오면 패괴 성품이 표출되며, 표출된 패괴 성품은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았어요.” 이는 거짓말이다. 그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반항하고 있고, 그의 행위에도 반발심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실 사람의 패괴 성품도 해결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된다면, 사람의 미숙하고 유치한 많은 생각들, 심지어 이미 관념이 형성된 것도 사람에게는 사실 문제가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생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관념은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때로 관념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행동을 지배하지 않는다. 너의 직접적인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는 너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념의 그 이면에 패괴 성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네 관념과 충돌하면 너는 모종의 태도로 그 관념을 고수한다. 그런 태도는 네 성품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 성품은 강퍅함일 수도 있고, 교만함일 수도 있고, 흉악함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들게 된다. “제 관점은 많은 학술 논증을 거친 것으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고수해 오던 것인데, 왜 고수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당신의 말씀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니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또 그것이 진리이고, 지고지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 관점이야말로 전 인류 중에서 지고지상한 것입니다!” 하나의 관념으로 인해 너는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대들게 된다. 이는 무엇으로 초래된 것이냐? (패괴 성품입니다.) 그렇다. 바로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관념과 사람의 패괴 성품은 직결되어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각종 관념이 해결된다면,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쉽게 순종하게 된다. 그러면 굽은 길도 가지 않고, 방해도 교란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하지 않으며 더욱 순조롭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쉽게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의 관념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발심이 생긴다. 관념이라면 옳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관점임이 틀림없고, 완전히 진리와 반대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각종 반발심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 반발심 때문에 너는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게 순종하지 못한다. 동시에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도 지장을 받는다. 보다 큰 틀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생긴 각종 관념 때문에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부인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해 관념이 생기든, 그 이면에는 패괴 성품이 숨어 있다. 그 관념 때문에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욱 심각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패괴 성품으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성품을 대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부추기게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관념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다.
전에도 우리는 사람의 관념을 자주 언급하긴 했지만 사람이 어느 방면과 어떤 일에 관념을 가지고 어떤 종류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교제한 적은 없었다. 너희가 자신이 어느 방면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하나씩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오늘 이렇게 몇 가지로 나누어 교제하고 분석하여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관념을 하나하나 해결한다면 사람은 각 방면의 진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 앞에 놓인 길도 점점 뚜렷해질 것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도 갈수록 안정되고 밝아질 것이다.
2018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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