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제 1 부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너희도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되고 어긋나는 자신만의 이해, 생각, 상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머리로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런 관념과 상상은 모두 진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한다. 그럼 사람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겠느냐?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전파와 주입이며, 그 밖에도 사회의 흐름, 가정 교육의 영향 등이 있다. 몇천 년간 무신론의 지배를 받아 온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겠느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또한 벽을 통과해 드나들 수 있고 물질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그럼 사람의 상상과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겠느냐? 주로 전통문화의 영향, 그리고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몇천 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무신론 교육은 일찌감치 중국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신론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그동안 사탄과 여러 악령은 사람을 현혹하고 통제하기 위해 민간에서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냈는데, 그런 일은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어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다. 악령이 사람을 현혹하고 우롱하며 해를 끼치기 위해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게 되면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수히 많은 관념과 상상을 가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모두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사회의 영향과 주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사탄의 교육, 전통문화, 지식의 전파와 주입을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사람에게 여러 관념과 상상이 생겨난 것이다. 관념과 상상은 비록 사람의 일과 학업, 그리고 정상적인 생활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이런 관념과 상상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크게 가로막았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였다 해도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크게 방해하여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어도 여전히 믿음이 너무 작고, 자주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서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바로 관념과 상상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선행을 베풀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을 보면 금전을 베풀어야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에게 고마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고마워해야 할 분은 하늘에 계신 저 하나님이십니다. 이건 하늘에 계신 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듣고 나면 그는 아주 흡족해하고 크게 위로받는다.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분명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위로받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가 받는 위로는 진짜이겠느냐, 가짜이겠느냐? (가짜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짜이다. 그는 그 위로가 든든하고 진실되며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이런 위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위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의 관념으로 인해 생겨난 허상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처신해야 하며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행하면 하나님이 분명 흡족해하기에 결국 틀림없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확신’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람의 관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관념과 상상이 그에게 이런 확신과 허상을 심어 주어서 그는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겠느냐? 하나님에게 이는 그저 사람의 좋은 행위 중 하나로, 관념과 인위적인 호의에 따라 행한 행위일 뿐이다. 언젠가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여 책망을 받고 나서 좋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반발심이 생겨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여태껏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고, 나보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나님만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 문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람의 관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럼 주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입니다.) 주요 원인은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관념 때문에 사람은 늘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에게 이런저런 요구와 판단, 평가 기준을 갖게 된다. 또 관념 때문에 사람은 늘 잘못된 생각과 관점으로 사물의 옳고 그름, 사람의 좋고 나쁨,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충성심이나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가늠한다. 이런 잘못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은 비록 식사나 수면 등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머릿속과 마음속에 존재하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사람을 쫓아다닌다. 만약 관념을 제때 해결하지 않는다면 관념은 수시로 너의 생각과 판단, 행동,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좌우할 것이다. 이제 명확히 알겠느냐? 관념은 아주 심각한 문제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있는 것과 같아 사람은 하나님의 진면목과 진실한 성품, 진실한 본질을 볼 수 없게 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이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 관념으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어떤 내적 상태에 자주 빠지겠느냐? 사람이 관념 속에 살면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 순종한다 한들 그 역시 관념과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관념과 상상에 근거한 것에는 사탄과 세상에 속하는 개인적인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는 문제는 아주 심각한데, 이는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큰 문제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온갖 의심을 품는다.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품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겠느냐?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의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하나를 판단하게 된다. 사람의 이런 행위는 무엇이냐?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정죄하는 것이자 판단하고 모독하며 겨루는 것이다. 심각한 경우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하나님과 ‘결투’를 벌이려고까지 한다. 사람의 관념은 가장 심각한 경우 어느 정도에 이르겠느냐?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기도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부정하고 정죄하며 모독하고 배신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뿐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아주 끔찍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주 끔찍한 문제이다. 관념은 사람에게 백해무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관념이란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교제하고 해부하는데 이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보통 너희는 어떤 관념을 가지게 되느냐? 어떤 생각과 인식, 평판이나 관점이 관념에 속하겠느냐? 이는 생각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사람의 행위는 관념에 속하지 않지만 행위 이면의 사상 관점은 관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의 관념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여러 관념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무엇을 얻고 어떤 길을 걸을지를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온갖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대한 관념이다. 사람은 특히 성육신에 대해 많이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많은 관념이 생긴다. 이는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갖게 되는 관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 하나님이 드러낸 성품,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 대해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념을 갖게 된다. 이 세 가지를 더 상세하게 나눌 수도 있지만 사람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씩 교제해 보도록 하자.
우선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여러 관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측면의 관념은 비교적 광범위한 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낯설든 낯설지 않든, 예전에 믿은 적이 있든 없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관념과 상상을 갖고 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될 거야. 천국에 들어갈 거야.’ 그러고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정의하거나 확정하게 되면서 여러 관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고 난 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상상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담배, 술, 도박은 다 끊어야 하고 사악한 곳에도 가면 안 돼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웃는 얼굴로 예의를 차려야 하죠.” 이는 무엇이겠느냐? 관념이겠느냐, 아니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이겠느냐? (마땅히 해야 할 행위입니다.) 이는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이는 관념도, 상상도 아닌 합리적인 생각이다. 어떤 연로한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나이도 많고 하나님을 믿은 지도 오래됐으니 말하고 행동할 때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점잖고 품위 있는 모습과 반듯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야지 히죽거리며 채신없이 굴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그는 젊은이와 말할 때 엄숙한 태도로 케케묵은 이야기만 한다. 이를 본 젊은이들은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여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예배할 때 형제자매가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는 눈의 욕망을 통제해야 하고 옳지 않은 것은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신을 단속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투덜거린다. ‘저 젊은이들은 저렇게 여유롭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답답함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해.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은 걸 어쩌겠어!’ 그는 입으로는 보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몰래 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가식적으로 구는 것이다. 이런 가식적인 모습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왜 이런 궁상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보여야 할 행위와 태도에 대해 상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의 지배를 받다 보니 말과 행동이 괴이하고 가식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아주 자유롭지만, 그는 꼭 죽은 사람처럼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생기나 사람다운 모습은 조금도 없다. 그는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 늙은이 티를 좀 내야 하지 아이처럼 순진하게 굴면 비웃음거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가 보이는 모든 모습은 다 가식적이고, 전부 큰 인물을 흉내 내 억지로 꾸며 낸 것이다. 이런 가식적인 행위를 보이면 다른 사람이 보고 배울 게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걸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느냐? 첫째, 그가 가식적이라고 생각되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둘째, 그가 아주 위선적이라고 생각되고 또 역겹고 징그럽게 느껴지고 그와 대화할 때 마음이 답답할 것이고 속박받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자칫하면 그에게 이렇게 꾸짖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이보게 젊은이들, 지금 자네들 꼴을 좀 보게. 자네들은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어! 매일같이 명절을 쇠듯 잘 먹고 잘 입으면서도 이것저것 가리기나 하고 만족할 줄도 모르잖아. 우리 어렸을 때는 끼니도 간신히 때웠는데 말이야.” 이렇게 꼰대질을 하며 다른 사람을 꾸짖다 보니 젊은이들은 그를 피하기 일쑤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이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예의 없다고 비난까지 한다. 이런 말은 관념과 사람의 뜻을 담고 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겠느냐? 하지만 이는 모두 사소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그가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이롭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실행하고 처신하며 하루하루 생활하면 과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겠느냐? 그는 이렇게 묵상해 보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요구하셨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 내가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그는 분명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생각해 보았다면 설령 분명하게 생각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입니다.) 그가 관념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보여야 할 행동과 태도를 그릇되고 터무니없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이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전통문화의 영향도 있고 학교 교사의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노인은 채신없이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갖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상한 행위를 할 때도 있고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다. 어쨌든 한눈에도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행위가 이상하든 표정이 이상하든 그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진리와 분명 거리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일 뿐인데 마음속에 뿌리내린 관념 때문에 이런 황당한 행동 방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지 못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일부 기이한 행위와 태도, 그리고 황당한 행태를 보이게 되고, 젊은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깨닫지 못하고 상상과 관념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으면 그들 역시 일부 잘못된 태도와 행위를 보이게 된다. 그럼 어떤 잘못된 행동과 태도를 보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젊은이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생기발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른이 되지 않는 갓난아이일 뿐이야. 그럼 우리는 말하고 걸을 때도 어린아이처럼 굴어야 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지 알겠어. 어린아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깨달았고. 예전에는 늘 간사한 사람이 되어 너무 노련해 보이고 무감각하고 우둔해 보였어. 앞으로는 좀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야지.’ 그러고는 현 사회의 젊은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관찰하여 일련의 행동 방식을 정리해 낸 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대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그는 늘 어린아이같이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과 말하고 응석을 부리는데, 마음속으로 이런 목소리야말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일부 기이한 손짓을 하여 보기에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하나님이 말하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생기발랄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깨닫지 못하고 그저 위장, 모방, 가식 등 표면적인 행위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치우치게 이해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의 행위와 행동 방식, 그리고 이방인의 조류에 결부하기까지 한다.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으며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하며 혹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전통 문화 속이나 과학 지식 속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이방인의 지식 속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 처신의 근거를 찾으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어쨌든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 사람에게 제시하는 모든 요구는 사람이 어느 차원까지 이해할 수 있든 모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 절대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행위도 아니며, 특정한 행동 방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으로, 사람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원칙과 기준이다. 사람은 이 원칙을 파악하고 갖추어야 한다. 이런 세세한 문제를 분명하게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느 정도 도리만 깨달을 수 있을 뿐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는 어렵다.
조금 전에 표면적인 행위 측면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갖는 관념과 상상에 대해 교제했다. 이에 관해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느냐? 관념에 대해 얘기하자면, 관념은 과연 올바른 것이겠느냐, 아니면 잘못된 것이겠느냐? (잘못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관념은 명백히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에 위배되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근거 없이 상상해 낸 것이든, 아니면 근거가 있는 것이든, 어쨌든 모든 관념은 다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럼 관념을 교제하고 해부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에게 우선 관념이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관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동시에 진리란 무엇인지 깨달아 진리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 것이다. 네가 가진 관념이 아무리 일리 있고 근거가 충분해도 결국에는 관념일 뿐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체할 수도 없다. 네가 만약 관념을 진리로 여긴다면 진리는 너와 무관해지고, 너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무관해지며 너의 믿음은 보잘것없어진다. 네가 너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은 진리와 무관해지고 하나님과도 무관해지며,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정죄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이다. 너희는 이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것이다.
관념을 해결하는 첫걸음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무엇이 관념인지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영화를 막 찍기 시작했을 때, 영상 제작팀에서 아주 역겨운 일이 발생했다. 사람의 관념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일을 꺼내 해부하는 것은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분별력을 길러 주고 너희가 이 일을 기억하여 관념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관념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해부를 마치고 나면 분명 너희 모두 이 일이 큰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것이다. 영화를 찍을 때 어떤 색깔과 스타일의 옷을 선택할지의 문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난히 보수적이라 그런지 전적으로 회색과 황토색 옷을 골랐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어째서 저런 색의 옷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회색과 황토색이어서 장면 전체가 무척 어두침침했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왜 여러 가지 색깔을 고르지 않았을까? 예전에 분명 옷은 여러 가지 색깔을 입어도 되고 스타일도 적절하고 대범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집의 요구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회색과 황토색 옷감을 골라 옷을 만든 것이겠느냐? 어째서 이런 행위를 한 것이겠느냐? 이는 반성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 일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말도 듣지 않으며 순종하지도 않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 내면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본성은 무엇이겠느냐? 이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핵심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마음이 강퍅한 것이다.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것이고 진리를 구하고 싶다고 하지만 행동할 때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만약 개인의 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자기’를 최우선으로 여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너 자신의 생명 진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네 행동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역과 영광, 그리고 교회의 명성과도 관련된다. 그러니 사람이 계속 자기 뜻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쉽다. 하나님 집에서는 개인의 옷차림에 간섭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는 가볍지 않고 단정하여 남들이 보고 배울 게 있을 정도면 된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데 하나같이 진부한 회색과 황토색 옷을 입자고 한다면 이것이 적절한 주장이겠느냐?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관념에 기대어 일 처리하는 것이다. 회색과 황토색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지표이자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이런 색깔을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색깔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이다. 이런 색깔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람이 만약 관념에 기대어 일 처리하고 이런 색깔을 일종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관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과 행동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이 관념과 상상을 진리로 여기고, 회색과 황토색 복장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상징적인 옷차림으로 여기면서 진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는 제쳐 놓고 배척하며 사람의 관념과 기준으로 그것을 대체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실 옷의 색깔과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은 외적인 일로, 진리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사람의 관념으로 인해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하고 일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이는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닥치고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 관념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람은 계속 이런 관념을 따른다. 늘 이런 관념 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에 휘둘리고 지배당하며 통제받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 행위, 생활 방식, 처신하는 원칙, 인생의 방향과 목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것마저도 관념의 색채를 띠게 되고, 사람은 진리상에서 조금도 자유와 해방감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10년, 20년 동안 관념을 고수하고 지금까지도 초반의 관념이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아무도 관념을 해부해 주지 않았고 스스로도 전혀 성찰해 본 적 없으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적은 더더욱 없다. 관념을 진지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성과가 있겠느냐? 성과가 없을 게 뻔하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람이 끊임없이 관념을 해부하고 인식하고 난 뒤 관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점차 개선되는 것이다. 이 말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너의 관념이 하나님을 이제 막 믿기 시작했을 때의 상태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해 너희가 의존하는 관념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냐? 너희가 항상 바람직하고 진리에 부합하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무엇이냐? 너의 행위와 추구,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 영향을 끼쳐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늘 미적지근하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태에 놓여 있게 하는 관념은 무엇이냐? 너는 스스로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 고생하려는 의지가 커졌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다. 너희 스스로 해부해 보면 사람마다 의존하는 관념이 있을 것이고 그중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 총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어떤 관념들이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또 어떤 관념과 상상이 사람의 진리 실행을 방해하는지, 사람의 본분 이행,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간의 정상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지,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말해 보겠느냐? (제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비교적 큰 관념은 바로 매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관념과 상상이다. 그럼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지가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만약 본분을 이행할 때 제멋대로 군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으로, 그런 자는 구원받지 못할 뿐 아니라 징벌까지 받게 된다. 너희는 이런 일을 다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간파하지도 못하면서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까지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겠느냐? 이런 생각은 그저 사람의 일방적인 소망에 불과하다.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너희 내면에는 관념과 상상에 속하는 것이 너무도 많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상상, 이해, 정의, 이런 것들이 다 관념이다. 너희는 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저는 이행한 본분이 중요할수록, 하나님을 증거한 성과가 많을수록 공로가 더 많고 하나님에게 더 인정받으며 나중에 복도 더 많이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관념은 모두 사람이 근거 없이 상상하고 추론해 낸 것이다. 설령 근거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근거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고, 복을 받으려는 욕망의 지배를 받아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이런 생각의 지배를 받아 행동하면, 이리저리 행동하다가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했고 원칙을 위배했으며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소극적으로 변한다. 언젠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이 상상과 관념에 기대어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많은 세월이 낭비되었고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다. 너희가 해결하지 못한 관념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저를 축복해 주시고 저에게 이득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저를 위해 활로를 열어 주셔야 하며, 하나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환경이 닥쳐 어려움이 생기면 저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렇게 이해한다. 사람들은 이득을 얻으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만약 이득을 얻지 못하면 틀림없이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이런 관념이 해결되었느냐? 너희는 돌아서기 시작했느냐? 이런 관념이 너의 행위를 좌우하거나 네가 나아가는 방향에 영향을 끼칠 때 너는 해결하고자 진리를 구했느냐?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규정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도록 우리 가정에 축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평안하도록 보살펴 주셔야 해. 그리고 내가 본분을 이행하긴 하지만 이건 하나님의 사역이니까 내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 위험, 시험이 닥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마땅히 모든 책임을 지시고 모든 일을 잘 안배해 주셔야 해. 만약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그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런 관념이 생기기 쉽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이런 관념이 자주 나타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항상 관념과 상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뿐, 관념을 해결하려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생명 진입도 있을 수 없다. 너에게 진리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게 되고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 만약 하나님을 믿을 때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자주 예배하고 설교를 듣고 영 생활도 매우 정상적이지만, 행동하고 처신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관념에 기대고 관념에 근거하며 관념으로 여러 일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면, 이런 사람은 관념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관념 속에 사는 사람이라면 설교를 얼마나 듣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시든 변화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과연 그의 이런 믿음을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인정할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 내면의 관념을 해부하는 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별 탈 없이 평안할 때, 전통 종교 의식을 지킬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역하고 진리를 선포할 때면 온갖 관념을 갖는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예배할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다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다 어려움에 부딪치면 수많은 관념을 갖는다. 이 밖에도 육적으로 편안하고 삶을 즐길 때는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다가 병에 걸리고 환난을 만나면 자연스레 관념을 갖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이 평탄했는데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판단당하거나 차별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심지어 체포당해 고문에 시달리다가 후유증이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는 동안 난 왜 일이 순조롭지 않은 거지? 내가 믿는 분은 참하나님이시잖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켜 주지 않으시는 걸까? 내가 악인에게 구타당하고 마귀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시고도 왜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체하시는 거야?’ 사람에게는 이런 관념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런 관념이 생기는 연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상 나는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봐 주셔야 해. 내가 먹고 거주하는 걸 신경 써 주셔야 하고, 내 앞길과 운명, 나와 우리 가족의 신변 안전에도 신경 써 주셔야 해. 내가 모든 일이 잘되고 별 탈 없이 평안하게 살도록 해 주셔야 한다고.’ 만약 현실이 자신의 요구나 상상과 다르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좋지는 않구나. 그렇게 쉽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토록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 시련도 겪어야 하는 거였어. 왜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시지?’ 과연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지는 않는 것이냐? 하나님은 당연히 좋은 뜻으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얻어 진리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진리는 구하지 않고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평가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고통 없이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장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어떤 사람은 육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한평생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된다. 누구든 다 고통을 받아야 한다.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모든 사람이 육체적 삶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체험하게 한다. 고통은 너에게 다양한 느낌과 이해를 갖게 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인생의 체험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인데, 사람의 경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네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이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책임이다. 무슨 책임일까? 이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네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고 견딜 수 있으면 그것은 간증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워하며 부끄럽게 여기는데,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병고 속에서도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갖가지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할 수 있다면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이는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간증이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간증이며, 사탄에게 수치를 안기고 사탄을 이기는 간증이다. 그러니 어느 측면에서 고통을 받든 모든 피조물과 모든 하나님 선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이해하고, 공과를 배워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 다 이렇게 안배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특정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준 것은 특정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부탁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너는 응당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그런 요구를 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왜 그런 것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네가 그런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면 네 패괴 성품과 관념, 패역을 해결할 수 있어 너에게 다시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거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너는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간증을 함으로써 사탄에게 수치를 안길 수 있으며,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있다. 네가 만약 자기 관념과 견해대로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해 주셔야 해. 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복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겠느냐? 네가 이해하는 복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먹을 것 걱정 없고,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는 것,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평생 평안하고 순탄하게 윤택한 삶을 살고 조금도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너는 그런 것들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복이겠느냐? 그런 것들은 복이 아니라 화이다. 육적인 안일을 탐하고 즐기는 길을 걷는다면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이 사악한 세상에 갈수록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창조주의 부름을 받을 때 아쉬움이 많아 이런 육적인 누림을 내려놓지 못한다. 하나님이 네게 부탁을 맡기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라고 해도 너는 자기 몸을 몹시 아낀다. 오늘은 몸이 편치 않고 내일은 기분이 좋지 않고, 부모와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육적인 일들만 생각한다. 또 제대로 이행하는 본분도 하나 없으면서 누리기는 남들보다 더 잘 누리려고 한다. 이렇게 기생충처럼 살면서 네가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간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생 부귀하고 평안하고 주변 사람 모두 자기 덕을 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낼 뿐 아니라, 가난해지지도 않고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 닥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런 상상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정상이겠느냐, 아니면 비정상이겠느냐? 틀림없이 정상일 리가 없다. 그럼 이런 관념과 상상은 너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게 하겠느냐? 그것은 오직 너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에게 반항하도록 할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리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는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다. 즉, 사람이 이런 관념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마음속에도 덩달아 패역하고 소극적인 상태가 생겨난다. 이럴 때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람에게 맡긴 하나님의 부탁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여러 요구를 깨닫고 나면, 이 모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하고 처신할 수 있다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해결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레 관념을 버리게 되는데, 그때부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더욱 정상적이 된다. 관념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를 해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관념을 내려놓고 해결한 뒤에야 비로소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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