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다 (제 2 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상 관점 가운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패괴 성품에 속하는 것,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만함, 독선, 거짓말, 간사함과 같은 패괴 성품은 모두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진리를 몇 번 교제하거나, 혹은 자주 교제하거나, 또는 형제자매가 상태를 짚어 주기만 하면 조금 알 수 있다. 게다가 교만함이나 간사함은 정도와 경중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지니고 있으므로 비교적 쉽게 인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사상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분별이 쉽지 않다.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행위,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 변화가 생길 때 사람은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행위의 변화일 뿐, 그 사람의 사물 보는 관점이 진실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아직도 관념 상상에서 비롯된 것, 각종 전통문화적인 사상 관점과 독소가 많이 있다. 또한 사람 내면에 숨겨져서 아직 파헤쳐지지 않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것들도 많다. 이런 것들이 바로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근원이고, 사람의 본성 본질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관념에 맞지 않으면 반발하고, 반항하고, 하나님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모두 진리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또 순종하려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왜 순종할 수 없느냐? 왜 반발하고 반항하느냐? 바로 사람의 사상 관점에 담긴 많은 것들이 하나님에게 적대적이고,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과 하나님의 본질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것들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교제했으니 너희는 깨우침을 얻고 어느 정도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너희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관념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을 리가 없어. 만약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고, 이런 말도 안 했을 거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사랑이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아.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 사람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부분에는 구할 만한 진리가 있다고 말이야. 그러니 나 자신을 반성하자. 내 마음속에 있는 관념 상상이 훼방을 놓아서 하나님 사역을 규정하게 만들고 있는 거니까, 하나님을 오해해선 안 돼.’ 이렇게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옳다. 하나님 사역과 말씀이 네 관념에 맞지 않아 보일 때는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서둘러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과 맞춰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한다면, 이것이 곧 길이 생긴 것이 아니냐?

지금까지 부모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해 교제했다. 많은 사람들이 항상 부모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느낀다. 부모는 평생 나를 위해 고생도 많이 하고, 나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해 준 존재다. 어느 날 부모가 아프면 네 양심에 걸리고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갑작스레 너는 부모 곁을 지키면서 열심히 효도하고, 만년을 즐겁게 보내도록 부모에게 위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식으로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그 의무를 이행하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를 한다든가 생각지 못한 시련을 내린다면, 그것은 네가 그래서는 안 되고, 하나님 믿는 것,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다. 가령 하나님이 너에게 네 부모에게 그런 식으로 효도하지도 말고, 네 부모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도 말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한다면 너는 속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전통적인 관념으로 이 일을 바라보고,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네 생각에 하나님이 그러는 것은 인정에 어긋나고, 하나님이 그러는 것은 네 효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효심이 가득하고, 인성이 가득하고, 양심이 가득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 양심, 네 효심을 따르도록 하지 않을 때, 너는 반항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많이 한 이유는, 사람의 패역한 본성의 근원과 본질이 주로 사람의 사상 관점에서 비롯되었고, 이 사상 관점은 바로 가정에서의 교육, 사회에서의 교육을 받아들이고 전통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들이 가정에서의 유전, 사회의 영향, 학교 교육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 조금씩 심어진 뒤로 사람은 이런 것들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이런 전통문화는 올바른 것, 나무랄 데 없고 비난할 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반드시 전통문화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야 진정한 사람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 인성에 어긋나거나 인성이 없는 것이고, 스스로도 넘어갈 수가 없다. 사람의 이런 사상 관념은 진리와 차이가 매우 크지 않으냐? 사람의 사상 관점, 사람이 좇는 목표는 세상을 향하고 사탄을 향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고, 광명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 두 가지 목표는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린 목표와 요구를 따른다면 너는 갈수록 정상 인성을 되찾고, 사람다워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다. 만약 네가 전통문화적 사상 관점을 따른다면 갈수록 양심과 이성을 잃고, 거짓으로 위장하고, 세상의 풍조를 좇아가서 사악한 세력의 구성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때는 완전히 흑암 속에서 살고 사탄의 권력 아래 살게 되는데, 그러면 너는 진리에 완전히 어긋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현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다.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사람의 사상 관점에는 전통문화의 요소가 적지 않다. 특히 전통문화는 여자에게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현모양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여자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아가며, 가족들 세끼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을 훌륭히 해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인정하는 현모양처의 표준이다. 여성들도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에 어긋나고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덕 기준에서 벗어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남편과 자식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서 진리를 이해하고 일을 간파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이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현모양처가 되는 일이 부딪히지 않느냐? 현모양처가 되려면 본분에만 전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본분에만 전념하려면 현모양처가 될 수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책임 있게 교회 사역을 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을 택한다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데, 이럴 때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네 사상에는 어떤 파동이 일겠느냐? 네 자식과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겠느냐? 너의 그런 미안함과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드느냐? 미안함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면 그것은 네 마음과 네 사상 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해한 바는 무엇이냐? 전통문화이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네 사상 속에는 현모양처가 못 되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바른 여자가 아니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너는 이 관념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하나님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여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분 이행과 현모양처 되는 일이 부딪혔을 때, 너는 비록 마지못해 본분을 택하거나 하나님께 충성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틈이 생기면 자식과 남편에게 더 많이 보상해 주려는 마음에 여전히 그들을 챙길 기회를 찾는다. 설령 본인이 더 고생스럽더라도 마음만 편하면 된다. 이것은 전통문화 중에서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일이 아니냐? 너는 지금 양다리를 걸친 채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고 싶고 현모양처도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책임과 의무, 너희의 사명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하나뿐이다.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였느냐? 어째서 또 다른 길로 빠지려 하느냐? 설마 네 마음속에 죄책감도 참소도 없단 말이냐? 진리가 아직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 마음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지 못한 까닭에 너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다른 길로 빠진다. 비록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실 진리의 기준,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던 하나님 말씀은 무슨 뜻이냐?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부모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고, 대자연에서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단지 우리 육만 부모를 빌려서 나왔고, 우리 자식은 우리를 빌려서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두 하나님에게 달렸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자 하나님이 정한 운명,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에게도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사람의 일생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너는 합격된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이 볼 때 너는 현모양처이자 훌륭한 주부, 효녀, 사회의 선량한 시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 자신의 의무와 본분을 전혀 다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부탁을 받고도 완성하지 못한 사람, 도중에 포기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다. 네가 아무리 훌륭한 현모양처이고, 사회적 도덕 기준이 아주 높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해도, 그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네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정상 인성이 없는 사람, 마음속에 아예 하나님이 없는 사람임을 증명할 뿐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요구와 너무 거리가 멀지 않으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전통문화적 사상과 이론에만 의지해 살아가고 사회 풍조만 좇느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빈곤하고 불쌍한 자가 아니냐? 어리석고 무지한 자가 아니냐? 네가 현모양처가 되고 사람이 좋아하는 좋은 여자가 되는 것이 여전히 자랑하고 우쭐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사람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은 사실 모두 다 진리와 어긋나고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것, 좋은 것,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포함된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혐오스러운 것일 뿐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올바른 관점과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이 말하는 진리와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그 차이는 너무나 커서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문화 교육에서부터 우리의 추구, 기호에 이르는 모든 것, 우리의 사상 관점에서부터 우리가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에 이르는 모든 것을 깊이 파헤치고 해부할 가치가 있다. 이것들 중 일부는 집안에서 유전된 것이고, 일부는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고, 일부는 사회 환경으로부터 영향받고 감화된 것이고, 일부는 책에서 배운 것이고, 또 일부는 우리의 상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가장 무섭다. 그것이 우리의 사상을 통제하고, 우리가 일하는 동기와 속셈, 목표를 통제하고, 우리의 언행을 옭아매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파헤쳐서 끊어 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요구를 온전히 받아들여 실행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면에 자신만의 사상 관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너는 온전히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곧이곧대로 실행하지 않고, 분명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공하고 자기 관념에 맞춘 다음 실행할 것이다. 너는 이렇게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그 사람도 네 방식을 따르도록 만든다. 이것은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불순물에 속한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 모르면서 자기가 진리를 실행한다고 생각하고, 벌써 진리 실제에 진입해서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 아니냐? 이런 상태가 두렵지 않으냐? 진리를 실행하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 오류가 나타나고, 늘 자기 상상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게 된다. 그러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이를 수 없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자신에게 아직 어떤 관념 상상이 남아 있고, 또 자신이 사물을 보는 관점 중에 어떤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해부하려면 몇 마디 말로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생활 속에는 더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전에 정리한 사탄 독소 백여 가지를 너희는 글자 그대로는 이해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에게 맞추어 보느냐? 반성해 보았느냐? 이 독소들에 너 역시 몫이 있지 않으냐? 너는 이 독소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느냐? 네가 뭔가를 행할 때도 이 독소들에 따라 행동하지 않느냐?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네 개인적 체험에서 파헤쳐 보고 맞춰 보아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사탄 독소를 폭로하는 말만 골라 읽으면서 쓱 훑어보거나, 혹은 단순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들이 정말 사탄 독소이고, 사람을 패괴시키고 해를 끼칠 수 있겠다고 인정한 다음 한쪽으로 제쳐 놓는다면 네 패괴 성품은 해결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실제에는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글자만 읽으면서 쓱 훑어본다. 문자적인 의미만 알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한 줄 알고, 심지어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은 한 번도 반성하지 않는다. 패괴 표출이라는 것을 알고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내적 상태가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또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을 인정하면 그걸로 끝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이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일, 이십 년을 믿어도 성품이 변화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데, 그 근본 원인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쏟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실행하는 과정에서 규례를 지키고 커다란 악행만 저지르지 않으면 진리를 실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실행상의 오류가 아니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냐? 사람은 생명을 지닌 존재이고, 다들 사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누구나 패괴 성품이 마음에 뿌리를 내렸고, 모두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아 온갖 사상 관점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사상 관점은 모두 사탄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근거로 해부하고 인식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면 패괴 성품은 정결케 될 수 없다. 어째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교만하고, 독단적이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느냐? 바로 여러 가지 사물을 대할 때마다 다양한 사상 관점을 지니고, 또 그들을 이끌 몇몇 사상과 이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내면에 담긴 사상 관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상 네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사상 관점이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어떤 방향으로 하도록 지배한다. 만약 이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자주 반성하도록 해라. 그러면 네 내면에서 어떤 사상 관점이 계속 네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지금 네가 스스로의 사상 관점을 성찰해 보면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신은 아주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데다가 본분도 기꺼이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할 수 있어서 모든 게 다 괜찮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너를 진지하게 대하며 너에게 네 관념과 어긋나는 일을 하도록 했는데, 그 일이 네가 하기 싫은 일이라면 너는 어떻게 대할 것이냐? 그때는 네 사상 관점과 패괴 성품이 봇물 터지듯 나와서 제어하기 힘들고, 그것이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가로막을 것이다. 너는 말한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왜 하나님께 대적하고 싶지 않은데도 대적하는 거지? 하나님을 판단할 마음도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념을 가지고 싶지 않은데, 왜 난 여전히 하나님을 판단하고 관념을 가질까?” 이럴 때 너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네 내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현재 행하는 사역에 맞서고 엇나가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성찰한 뒤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로써 해결한다면 너는 생명이 자라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이다. 중국인들은 모두 무신론 교육과 진화론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만물은 대자연에서 유래했다느니, 인류의 조상은 원숭이라느니 하는 말이 널리 퍼졌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읽은 뒤에야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진실임을 믿게 되었다. 대자연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 특히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인류 역사가 생겨난 뒤 어떤 원숭이도 사람으로 변한 예는 볼 수 없고, 증거도 없다. 이것은 모두 사탄의 거짓말이자 속임수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사탄의 허튼소리와 사설과 궤변을 부정하고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깊이 신뢰한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완전히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의혹을 품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 어째서 나는 보지 못했지? 내가 못 봤으니 믿을 수 없어.’ 그는 눈으로 보아야 하나님을 믿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인류를 이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류의 운명을 주재했다. 이것이 사실이다. 말세에 이르러 하나님이 이 비밀을 모두 드러내며 말하길, 사람은 윤회하고 환생하며 사람의 생명과 영혼은 하나님이 준 것,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진리다. 그러나 이 방면의 진리를 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진리라고 믿지 않기에 본인의 사상 관점으로 이 말씀을 가늠한다. ‘사람이 원숭이가 변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을까?’ 너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능력도, 지혜도, 권병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숨을 불어 넣거나 말 한 마디로 인류가 생겨난 일이 사실이라는 것도, 진리라는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의혹을 품는 순간 하나님의 이 말씀에 반발한다. 입으로는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일종의 반발하는 상태, 반발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면 듣지 않으려 하고 속으로 반감을 품고 하나님 말씀에 ‘아멘’이라고 답하지도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사람을 창조했는지, 사람은 언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그걸 누가 목격했는지, 증언할 사람이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이런 걸 연구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정말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행사를 알고 나면, 스스로가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 지금 사람이 눈여겨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나님 사역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한 분이 사역하고 말씀하며 인류를 가르치며 이끌고 계신다. 이 하나님은 존재한다. 지금껏 하나님이 이토록 많은 말씀을 하시는 동안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그분 사역을 체험하고, 그분 말씀을 먹고 마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았다. 게다가 그 말씀들은 계속 우리를 이끌고 변화시키고 있다. 이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그 사실을 믿고, 하나님이 최초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네가 이 하나님이 존재함을 믿고 지금 하나님 앞에 왔는데, 그래도 여호와가 하신 그 사역이 바로 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증거가 필요하냐? 만약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목격한 사람도 없다면 못 믿겠다는 말이냐? 아니면 은혜시대 사역의 경우, 네가 예수를 못 봤다면 예수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못 믿겠다는 말이냐? 지금의 이 하나님, 그분 말씀, 그분 사역, 그분의 성육신을 직접 보지 않으면 너는 믿지도 않겠다는 말이냐? 그 일들을 네가 하나도 보지 못했거나, 혹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 한 명도 없다면 너는 하나도 믿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 내면에 있는 황당한 관점이고,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 무슨 일이든 꼭 직접 봐야만 하고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데, 이것은 틀렸다.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한 이 말씀들을 보고 하나님 음성을 들었는데, 이는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사역과 말씀을 믿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더 이상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이 아니냐?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을 때 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 성육신이 진리를 선포하여 인류를 구원하고, 실제로 사역하고 있는 광경, 교회들을 다니며 인류 가운데서 일하는 광경은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본 것도 아니지만 너는 믿는다. 왜 믿으려 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모두 진리라고 생각해서, 그것이 참도이고 하나님 사역이라고 생각해서 믿는 것이 아니냐? 너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이번 사역을 하실 때, 저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도 보았습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셨는데, 저는 그분의 못 자국을 만져 보지 않았기에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하신 그 사역들을 보지 못했고, 율법을 반포하신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세가 그걸 듣고 모세 5경을 썼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이냐?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불신파이다. 마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 12:2)라고 한 것과도 같다. 그들의 뜻은 바로 ‘모세가 하는 말은 듣지 않겠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라’는 것이다. 마치 은혜시대에 누군가가 자기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도, 죽음에서 부활한 것도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도마라고 하는 제자가 예수의 못 자국을 꼭 만져 봐야겠다고 하자 예수가 그에게 뭐라고 했느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습니다.)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니, 어찌된 일이냐? 정말 보지 못한 것이냐? 사실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부터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 사람은 마땅히 이를 믿어야 한다. 그가 이적과 기사를 더 나타내지 않아도, 말씀을 더 하지 않아도, 그의 못 자국을 만져서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것이다. 정말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눈으로 봐야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검증되면 끝까지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도마는 눈으로 본 것만 믿는 불신파이다. 너희는 도마 같은 사람이 되지 마라.

교회에는 확실히 일부 도마 같은 사람들이 있다. 속으로 늘 성육신에 대해 의문을 품고, 땅에서 삼층천으로 돌아간 하나님의 참모습을 봐야 믿는 사람들이다. 그는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기에 한 말씀을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믿기 시작할 때는 모든 게 늦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께 정죄되어야 할 때이다. 예수가 도마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은 바로 예수가 이미 그를 불신파로 정죄했다는 뜻이다. 네가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주님이 한 모든 말을 믿는다면, 너는 복되다. 네가 주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르고도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지 않는다면, 너는 진실된 믿음이 없는 것이고, 복을 받을 수 없다. 믿어야 얻을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네 앞에 친히 나타나 보여 주고 납득시켜 주어야 믿을 수 있겠느냐? 사람인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친히 네 앞에 나타나라고 요구한단 말이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너처럼 패괴된 사람한테 친히 말씀하라고 한단 말이냐? 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모든 일을 분명히 말해 줘야 믿겠다고 한단 말이냐? 네게 이성이 있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보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네게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어떻게 말씀하든 신경 쓰지 않고 이 말씀들이 진리임을 보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임을 마음으로 오롯이 믿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의심 많은 사람은 지나치게 간사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면서 비밀만 알고 싶어 하고, 그 비밀을 완전히 알고 나면 그제서야 믿는다.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한 전제는 바로 성육신 하나님은 어떻게 왔는지, 언제 왔는지, 와서 얼마나 있다가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과정은 어떤지, 성육신 하나님은 어떻게 사역하고 어떻게 떠나는지 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비밀들을 알려고 하는 것인데, 그는 진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비밀을 캐러 온 것이다. 그 비밀들을 알지 못하면 믿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처럼 느낀다. 그가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으면 곤란하다. 그는 비밀을 연구하려 할 뿐, 진리를 살펴볼 마음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살펴볼 마음도 없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가 자신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귀에 매달리고, 비밀에 매달리고, 구석진 일,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일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깨우치거나 형제자매가 진리를 자주 교제하며 도와준다면 그도 돌아설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는 과거 자신의 관점이 너무나 황당하고 자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나머지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말을 하든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정 시간 겪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갈수록 믿음이 커진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진리를 믿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2008년 봄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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