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실행해야 생명 진입이 있다 (제 2 부)
이제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진리를 견지하며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보통 어떤 면에서 어려움이 있느냐? (다른 사람이 일을 처리하다가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면 지적할 때가 있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태도가 좋지 않으면 논쟁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타협해 버립니다.) 그럼 타협하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 입장을 고수하면 논쟁이 생기고 감정이 상해서 남들이 저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질까 봐 염려됩니다.) 논쟁을 피하는 방식이 타협 하나뿐이겠느냐? 어떤 상황에서 타협해도 되겠느냐? 개인적인 체면이나 이익과 관련된 작은 일이라면 굳이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으니 참고 양보하며 타협하는 것을 선택해도 된다. 그러나 교회 사역에 영향을 주거나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주는 일이라면 반드시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체면과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선택하고 진리의 원칙을 포기한다면 이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 아니겠느냐? 본분에 무책임하고 하나님께 충성심이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본분을 이행할 때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계속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느냐? 이런 상황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앞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문제를 공개 석상으로 가져온 후 쌍방이 각각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는 모두 함께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가져와 교제해야 한다. 진리 원칙을 명확히 교제하면 쌍방이 모두 순종할 수 있다. 모두가 진리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대부분 사람은 진리에 순종하는데 극소수의 사람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악인의 성질이 있으니 하나님 선민은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교회에서 논쟁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진리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원칙이다. 원칙 없이 타협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하나님 집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대가로 사적인 관계, 자신의 체면과 이익을 지키려 한다면 이는 사탄과 타협하는 것이고 원칙이 없는 것이자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저마다 자기 체면만 세우려 하고 각자의 이유를 내세운다면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태도이겠느냐? 이것이 본분을 이행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려면 그 누구도 명리를 다투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도록 하고 진리가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과 사역 성과를 최우선시해야 한다. 이 원칙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만약 너희가 모두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논쟁을 벌일 일이 뭐가 있겠느냐? 논쟁을 벌일 일이 없다. 늘 개인의 이익만 지키고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늘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는 대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은 더더욱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불신파이자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남과 충돌하고 논쟁하며, 어느 정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문제가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며 하나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 원칙을 견지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일에서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입장을 확실히 하고 원칙을 견지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며, 패괴 성품 표출과 관련되지 않는다. 명심해라.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명 진입은 가장 핵심적인 일이다. 생명 진입은 주로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진리 추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 주로 진리 추구와 관련이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다. 생명 진입이 있으려면 그것은 진리 실행과 관련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느냐? 어떤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지 알고 있느냐? 첫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어떠냐?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자신의 내적 상태와 모습에 결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신은 알고 있겠느냐?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속으로 꽤 흡족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모든 말씀이 다 규례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해. 나에게 버리라고 하시면 버리고, 헌신하라고 하시면 헌신도 하지.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순종하니까 구원을 받을 거야.’ 그는 몇 년 동안 이렇게 믿고서는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울은 여전히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존재로, 너무도 보잘것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도리, 구호, 상상, 관념, 지식, 철학 등 이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고, 이를 토대로 제멋대로 추구했다. 그 결과 아무리 행해도 진리 실제를 살아 내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지 못했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 중 으뜸은 바울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진리에 닿지 못하고, 진리에 닿지 못하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주된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교제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진리를 아무리 분명하게 교제해도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자질이 많이 떨어지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추구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이 폭로하는 내적 상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자신을 비춰 보지도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규례, 글귀, 구호, 도리로 여겨 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이는 자질이 많이 떨어지고 이해 능력이 전혀 없는 모습이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이다.
두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자신에게 맞추어 볼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진입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자신에게 맞춰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맞춰 볼 수 있다는 것은 한 측면이다.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패괴 성품과 다양한 내적 상태를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이 말씀한 원칙이 어떤 것이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깨닫는다. 그래서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 자신에게 대조할 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 이것은 이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는 자질과 능력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그럼 이 자질과 능력을 갖추면 반드시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몇 가지 상황으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자신을 전혀 비춰 보지 않고 다른 사람만 비춰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들추고 약점을 잡으며 내적 상태를 파헤치고 심중을 헤아린다. 탐지기처럼 틈만 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속내가 어떤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셈, 의도, 동기, 염원이 무엇인지, 일을 처리할 때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했는지 등을 탐지한다. 그가 이런 것들을 탐지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을 비춰 보고 나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 씨라는 사람의 생활 환경과 가정 배경이 어떤지,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는지, 이 사람은 보통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성품 변화를 추구할 때 어떤 연약한 부분이 있는지, 일이 닥쳤을 때 흔히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소극적으로 변하기 쉬운지, 본분은 어떻게 이행하는지,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영적 생활은 정상적인지,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는 아주 총명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총기를 알맞은 곳에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해결해 주면서도 그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보통 이런 부류의 사람은 리더 일꾼이거나 책임을 좀 짊어진 사람이다. 이 부류 사람의 그런 추구 방식에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문제가 있는,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추구 방식이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겠느냐? 이에 대해 교제해 보아야 한다. 이 부류의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비춰 볼 줄도 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자신을 비춰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춰 본다. 그가 다른 사람을 비춰 보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잘 구슬리기 위해 자신을 과시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본성과 관련이 있고,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추구하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가 사역할 때 마음을 다하고 맡은바 직책을 다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여러 내적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만약 그가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에 대해 각별히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심혈을 기울이며 공을 들인다면, 사역도 잘하고 형제자매의 여러 내적 상태에 대해 자주 진리를 구하며 나중에 이런 문제들을 다 해결한다면, 그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겠느냐? 그의 이런 모습과 표출을 보고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확정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그가 다른 사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자신은 전혀 비춰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는 해결해 본 적도 없는 그가 다른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한 것이겠느냐? (글귀와 도리로 해결한 것입니다.) 그는 글귀와 도리를 좀 이해했고 잔꾀가 좀 있으며 기억력도 좋고 반응도 빨라서 설교를 듣고 나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가서 과시한다. 이런 일을 봤을 때 그에게 진입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도 자신의 어려움은 전혀 해결하지 않는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는 그저 도리, 하나님의 말씀, 또는 여러 수단과 방식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타이르거나 설득할 뿐이고, 그가 이해한 글귀와 도리를 이용하거나 생명 체험의 언어를 흉내 내고 따라 하여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지 자신의 체험과 진실한 경험을 이용해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도리입니다.) 왜 도리라고 하느냐? 그 자신이 경험이나 실제 체험을 통해 얻은 것도 아니고 그가 진실로 인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도리와 글귀이며, 사람을 타이르고 위로하는 말이다. 어쨌든 사람의 방법과 수단, 또는 잔꾀를 이용해 문제에 옳게 답하긴 했으니 그는 이로써 문제를 해결했고 사역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모습, 그가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과 그가 사역하는 방식,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길을 봤을 때,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진입하지도 않았으면서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니, 이는 명예를 얻으려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명예를 얻으려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자 외식하는 것이며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양육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사람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렇듯 교회 사역의 모든 면이 다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교회의 실질적인 사역은 잘할 수 없다. 그나마 사무적인 사역은 좀 할 만하다. 그래서 리더를 맡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고생해도 사역을 잘할 수 없으며, 본분에 직책을 다할 수도 없다. 그들은 사역할 때 틈만 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문제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간단하게 해결한다.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도리를 좀 교제하고, 소극적이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격려해 주고 권면해 준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이런 사람들을 감시하여 그들이 빈둥거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게만 하면 사역을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기저기 다니며 사역하는 것을 검사하고 지도하기도 한다. 아무도 그를 적발하거나 폭로하지 않기에 그는 어디에 가든 설교하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막힘없이 순조롭다. 이로써 그는 책임과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위로 사역하는 것이지 진리를 사용해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역만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지위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무작정 도리와 구호로 이 사람에게 권면해 주고 저 사람에게 격려해 주면서 시종일관 분주하게 일한다. 그는 자신이 빈둥거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는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고 두 번째로는 부지런해야 하며 세 번째로는 고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이며 문제가 있는 곳이 있으면 빨리 가서 해결해야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늘 부지런히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반드시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겠느냐? 이는 아직은 물음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첫 번째 모습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실제적인 면을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을 비춰 볼 수도 있지만 스스로는 전혀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않으며, 자신을 단속하지도 않는다. 일이 닥치면 그저 남이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을 듣도록 하려고만 하고 그 자신은 진리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다른 사람의 책임, 의무, 본분이자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자신을 제삼자로 생각한다. 얼마나 알아들었든, 얼마나 비춰 볼 수 있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는 무엇을 하겠느냐? 그 역시 아주 바쁘긴 하다. 교회에 가서 누가 그에게 불만이 있는지 기록한 다음 골머리 빠지게 ‘해결’ 방법을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마음을 열고 교제해 봅시다. 당신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에게 어떤 견해나 불만이 있는지 거리낌 없이 얘기해 보세요. 제가 최대한 고치고 변하겠습니다.” 그가 고치려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불만이 있거나 불복하면 그는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찾아 ‘해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리더 일꾼을 뽑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어요. 형제자매가 누군가를 리더로 뽑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여러분은 순종해야 해요. 저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진리에 순종하는 겁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는다면 징벌이 닥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은 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고, 사실을 왜곡하며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이런 사람들이 그에게 별로 복종하지 않는 것 같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 복종하지 못하겠다 이거지? 너를 다룰 방법이라면 더 있어. 대단한 걸 보여 주지.’ 그는 자신에게 불복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탁한 일은 다 끝마쳤나요?” 그 사람이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일에 지장은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 게 지장이 없는 겁니까?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많이 남은 거예요. 충성심 없는 모습이네요. 도대체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는 겁니까?” 사실, 그가 이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겠느냐? 그의 마음속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상대방을 제압하고 무너뜨려서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형제자매가 간파하고 그를 폭로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허울 좋은 이유와 구실을 찾아 일을 처리해야 하고 ‘정당한 명분’으로 억눌러야 한다. 억누르고 나서도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당사자도 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도 달성해야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음험하고 교활합니다.) 음험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것으로, 지위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는 지위와 무관한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지만, 일단 그의 지위, 명리, 체면, 그리고 교회에서의 위치와 관련된 일이라면 물고 늘어져 진지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평소에 예배에서 진리를 교제할 때 그도 가끔은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폭로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목적과 속셈이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며 숭배하도록 하여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야심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지위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다 지위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는 지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지만 교회 사역을 위해서라면 문제를 발견하고도 해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문제를 보고해도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기름병이 넘어져도 일으켜 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이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아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명리와 지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비열한 소인배입니다.) 지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조금이라도 양심과 지각, 수치심, 존엄, 인격이 있다면, 형벌과 심판, 책망과 훈계, 또는 시련과 연단을 좀 겪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강퍅한 데다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많이 깨닫는다 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깨달아도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늘 지위를 위해 말하고 일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분주하고 바빠 보이더라도,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니더라도, 아무리 노력하고 버리며 헌신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고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의 약점을 잡고,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며, 남을 괴롭히고 다스릴 뿐 아니라 발아래 짓밟는다. 심지어 징벌받고 보응받는 위험을 무릅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뒷생각도 없이 그저 지위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무엇을 추구하겠느냐? (지위를 추구합니다.) 이는 바울의 어떤 점과 유사하겠느냐? (면류관을 추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공의로운 면류관, 그리고 지위와 명리를 추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진리가 아닌 지위와 명리를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모든 면에서 명리와 지위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명리와 지위를 위해 일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남을 미혹하는 데 아주 뛰어나다. 그를 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너는 그를 간파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설교에 일가견이 있고 말하는 것도 실제적인 것처럼 보이며 사역도 꽤 적절하게 안배하여 나름 자질이 있는 듯 보일 것이고, 너는 그에게 매우 탄복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도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고 매일 고생하며 일해도 힘든 티를 내지 않으며 조금도 나약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연약한 모습을 보여도 그는 연약하지 않으며 육적 안락을 탐하지도 않는다. 그는 반찬 투정도 하지 않고, 대접하는 사람이 좋은 음식을 해 주어도 먹지 않고 거절하며, 평소 집에서 먹는 음식이나 좀 먹는다. 이런 사람은 보는 이마다 탄복한다. 그렇다면 그가 지위를 위해 일하는지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느냐? 우선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는 어디에서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일을 처리하는 그의 속셈과 출발점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중시할 것이다. 만약 자신에 대한 인식을 자주 교제한다면 자신에게 부족함이 많고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진리를 더 많이 추구할 수 있다. 늘 지위를 위해 말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책망 훈계가 닥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명예가 훼손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럼 그는 하나님이 심판하고 형벌하는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겠느냐? 자기 체험의 오류를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만약 이런 모습이 하나도 없다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정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진리는 사랑하지 않고 지위만 추구하는 사람은 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의견을 제기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변명하고 설명하며 이유를 대면서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냅니다. 만약 누군가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그는 그 사람을 공격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공격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체면과 지위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변명하는 것은 분명 일하는 마음가짐과 목적이 옳지 않은 것이고, 전적으로 지위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말하고 일하는 게 전부 지위를 위해서라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진리를 실행하려면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며, 그러면 지위도, 지위의 복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리와 지위, 그리고 상을 얻는 것만을 추구하기로 한 것이다.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은 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또 어떤 일을 행하겠느냐? (만약 그의 주변에 상대적으로 진리를 추구하여 양성할 가치가 있는 인재들이 있고 형제자매가 다 그 인재를 옹호하면 그는 이를 보고 이런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를 대체하고 그의 지위를 위협할까 봐 두려워 그런 인재를 억압할 방법을 찾고 갖은 이유와 핑계를 대며 이런 사람들을 폄하합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매우 교만하고 독선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늘 사람들을 단속하면서 그들이 규정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도록 하고 하나님 집에서 그들을 발탁하거나 양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더 보충할 것이 있느냐? (그는 늘 자신을 증거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며, 늘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영광스러운 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자신의 추한 면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고도 자신을 반성하거나 해부하지 않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어떻게 고생하며 대가를 치렀는지, 하나님은 또 어떻게 그를 인도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한다. 이 역시 지위를 지키고 공고히 하려는 모습 중 한 측면이다. 지위를 추구하고 지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또 다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어떤 일이 닥치든 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 혼자서 주인의 위치에 서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이다. 무슨 일이든 다 그의 말을 따라야 하고, 누구든 문제가 있으면 다 그에게 구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는 이런 지위의 복을 누리려는 것이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는 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고, 그의 말이 옳든 그르든, 설령 옳지 않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며, 다른 사람이 그의 말에 따르고 순종하도록 하려고 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무슨 일이든 그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고, 아는 일이든 모르는 일이든 다 참견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한다. 리더 일꾼이 무슨 문제를 교제하든 의사 결정은 전부 그가 내려야 하고 다른 사람은 말할 여지가 없다. 그가 어떤 방안을 말하든 다른 사람은 다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내고 책망한다. 만약 누군가 불만이나 견해를 가지면 설령 그것이 옳고 진리에 부합하더라도 그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반박하려 한다. 그는 특히 궤변에 능해서 몇 마디만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 그의 뜻을 따르게 된다. 어떤 일이든 그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야 하고 사역자나 동역자와는 전혀 상의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그가 매우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에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만약 큰일이나 중요한 일이 닥쳤을 때 사람들에게 평가하고 입장을 밝히도록 한 뒤 마지막에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어떻게 실행할지 확정한다면 분명 하나님 집 사역에 손해도 입히지 않고 사역 전반에도 유리할 것이다.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는 사람이자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원칙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을 이렇게 처리하겠느냐? (그럴 리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다른 사람이 의견을 제기하기 전에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방안이나 결심이 있다. 그가 마음속으로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설령 누군가 지적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진리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교회 사역에 이로운지, 형제자매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그가 고려하는 범위 안에 없다. 그는 무엇을 고려하겠느냐? 그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야 한다. 이 일의 결정자는 그 자신이어야 하며, 이 일은 그의 방식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그는 이 일이 그의 지위에 유리한지 유리하지 않은지 알고 싶어 한다. 그는 이런 관점에 따라 일을 바라본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늘 자신의 지위와 명리, 이익만 고려한다. 이것이 그가 일하는 출발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런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긴 하다. 그들이 보이는 주된 모습 중 첫 번째는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일하느라 바쁘면 즐거워하고 성취감과 존재감을 느낀다. 두 번째 모습은 지위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들은 야심과 욕망이 유달리 크고 늘 사람을 통제하고 구슬리려 하며 항상 하나님을 대체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대체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바울의 어느 측면의 추구와 관련이 있느냐? (그리스도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지위를 추구하는 목적은 단지 고상한 사람, 지위 있는 사람, 숭배받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목적은 바로 사람을 구슬리고 통제하여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도록, 모두 그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믿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사람 마음속의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역과 명망을 추구하는 것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복받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렇다. 그가 대가를 치르고 헌신하며 고생하는 것, 여러 일에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는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이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세 번째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바울처럼 복을 받고 종착지를 얻기 위해 일하고 고생하며, 심지어 아무리 많은 대가를 치른다 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일하는 목표는 명확하다. 그는 복받는 데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만 골라 하고, 형제자매의 찬성과 지지를 얻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상부에서 그를 어떻게 보는지, 하나님 마음속에 그가 있는지만 중시하고, 확실히 복을 받고 상을 받을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진리로 자신이 한 일을 가늠해 보지 않고, 복받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도 않는다. 만약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하여 책망을 받고 상부에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가 복받을 희망이 사라졌고 좋은 종착지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나가자빠져서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을 믿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추구 방식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걷는 길이다. 교회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다 자신의 이익, 복과 상을 받는 것과 관련짓고, 생명 진입, 진리를 깨닫는 것, 성품 변화와는 전혀 관련짓지 않는다.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고 본분을 몇 년 동안 이행했든 한 번도 자기 인식과 생명 진입을 추구한 적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역시 추구한 적 없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어떤 패괴를 표출하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비춰 보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다 이기적이고 비열한 속셈을 품고 있는데, 모두 자신이 복을 받고 이익을 꾀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책망을 받든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소극적으로 변하는 일이 매우 적으며, 복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고생을 얼마나 하든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말로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죽어도 자신을 인식하거나 반성하지 않으며, 자신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모습에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많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 사람의 여러 내적 상태를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설령 알아들었다고 해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그는 흥미도 느끼지 못하면서 왜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이겠느냐?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땅에 계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하고 분간할 수도 없습니다. 주로 진리를 교제하실 수 있는 것 같은데, 이른바 진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좋은 말씀을 해 주시지만 그분이 과연 하나님이신지는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큰 의심을 품으면서도 왜 하나님 집에 머물며 떠나지 않는 것이겠느냐? 바로 그의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관점과 상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계속 여기서 지내면 결국 죽지도 않고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다른 사람은 성품 변화를 추구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만 그는 그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 제가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이끌어 주세요. 제가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는 당신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말은 들어 보면 틀리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고 잘못이 있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땅에 있는 하나님, 즉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리고 하나님 심판의 말씀에 대해서는 마치 그와 무관한 듯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단순하고 공허하게 하나님을 믿는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 성품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패괴가 많은 거야? 나는 왜 없지?’라고 생각하며 자신은 완전무결한 사람이고 자신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다고 여긴다.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데, 그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그저 좋지 않은 사상일 뿐이니 억제하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거역한 적 없어.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는 이런 말만 몇 마디 할 뿐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으며 어떻게 일해야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는 왜 자신이 훌륭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겠느냐? 어째서 그런 것이겠느냐? 이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관념 속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은 다 어떤 사람이겠느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언변이 좋고 영리하며 말을 금세 흉내 내고 이해력이 뛰어나다. 네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그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도리 역시 유달리 빨리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깨달았든 복받는 것을 추구하는 그의 방향과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신학 이론이자 일종의 교리나 학설로 여긴다. 그는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고 생활 속에서 적용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도리만 받아들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도리를 말해 많은 사람이 그에게 탄복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진리 실행 여부, 자기 인식 여부는 그에게 모두 사소한 일,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영적인 도리를 말하고 문제에 옳게 답하여 다른 사람이 그에게 탄복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래야만 지위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 실행을 전혀 중시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으며 그저 높은 도를 말할 줄 아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진리인 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체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우롱하는 사람이다. 이 문제의 성질은 매우 심각하지 않으냐?
너희는 이제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도 이런 사람의 모습이 있지는 않으냐? (있습니다. 주로 지위를 위해 일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지위를 위해 말하고 일한다면, 전부 지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데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지위를 위해 일하면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주로 자신의 체면, 이미지, 존엄을 중시하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신이 갖는 지위,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든 그저 이런 것들만 중시하며 하나님을 높이거나 증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을 보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아무것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그를 무시한다. 상대방이 진리를 구하려고 해도 그는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떤지, 그 사람이 말을 어떻게 하는지,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 따진다. 만약 상대방의 자질이 떨어지면 그는 진리를 교제하려 하지 않고 격려하는 말 몇 마디만 하면 끝이다.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으니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고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밑천은 바로 지위를 차지한 일종의 모습이다. 밑천이 생겨서 지위를 차지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지위는 누군가 그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가 자처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역하고 말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는 않으냐? “하나님을 믿은 지 10년이나 된 저에게 믿은 지 겨우 2년 된 사람과 협력하라고 하다니 이건 저를 모욕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와 얘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만 더 해도 피곤해요. 그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교만한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네가 만약 지위욕이 없고 자격과 서열을 중시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밑천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이는 분명 네 안에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드러내는, 사람을 대하는 이런 방식은 남들이 보더라도 덕이 되지 않는다. 이는 너의 패괴 성품, 너의 추구, 너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 폭로된 것이다. 지위를 위해 일하는 모습은 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전문 지식을 좀 배웠거나 한 가지 업무에 능숙하지만 이 업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면 기분 나빠 하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다들 말하는 게 어쩜 저렇게 비이성적일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고 있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대학 때 이 학과를 전공했고 이런 일만 연구했어요. 나중에 직장에서도 몇 년간 이 분야의 일을 했죠. 하나님을 믿고 나서 이 업무를 안 한 지 10년 정도 됐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도 다 외울 수 있을 정도예요. 원래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어요. 말하면 꼭 저를 과시하는 것 같아서요.” 이 말이 어떠냐? 이건 이방의 지식인이 말하는 방식이다. 그는 사탄 철학에 기대어 이런 말을 하는데, 보기에는 유식해 보이고 다들 그의 말에 찬성한다. 그는 자신을 과시하고 싶지 않다고도 말하지만 사실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이 분야의 전공을 공부한 햇수와 거기서 얻은 수확 등 이런 밑천을 다 말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전문가라는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네가 전문가라고 해서 반드시 그 분야에 정통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전문가라고 해서 꼭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집에서 일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야 하고, 형제자매와 함께 상의하고 구해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 구해야 한다. “제가 실상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몇 년간 이 분야를 전공해서 이 방면에 대해 조금 알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이 방면의 업무를 사용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점을 하나님 집에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우리 같이 상의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께 이 방면의 상식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이성적이고, 업무에 대해 알고 있지만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일을 잘하고 싶은 것이고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다 알려 주고 싶은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서이고 진리를 얻어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여러 면에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을 염두에 둔다. 무슨 일을 하든 우선 여러 사람들과 교제한 뒤 함께 상의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형제자매들이 함께 방안을 내놓고 힘을 바쳐 한마음 한뜻으로 그 일을 잘 처리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한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이 혐오감을 일으키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혐오감을 일으킵니다.) 네가 업무를 조금 안다고 해도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네가 업무를 조금 안다고 해도 남을 폄하하고 통제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리더 일꾼이 되고 나면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며 걷거나 말할 때도 거만을 떨고 허세를 부릴 뿐 아니라 원론적인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 방식은 더욱 혐오감을 일으킨다. 네가 설령 지위가 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자랑하고 꼴사납게 젠체할 필요는 없다. 너는 맡은바 직책을 다하며 형제자매가 본분을 잘 이행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책임이자 네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네가 만약 인성과 충성심이 있다면 너는 일할 때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책임을 다해야 하겠느냐? 바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쉽게 실수하는 부분, 쉽게 미혹되는 부분을 명확히 교제하고, 드러난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아 주어 모두 올바른 방법에 따라 일하도록, 다시 잘못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과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이 네가 지위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실행하는 원칙과 길은 이미 옳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라면 그것은 온갖 추태를 부리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도록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자신을 과시하지 못하게 되고 아무도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 보류하고 감추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패역한 것이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내팽개치고 방관하며 이렇게 고소해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어? 나는 말하더라도 전부 다 말하지는 않을 거야. 오늘 조금, 내일 조금 얘기할 거라고. 진실을 알려 주지도 않을 테니 어디 당신 스스로 생각해 보시지. 내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다니 어림없어! 만약 당신이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깨달은 것을 전부 알려 준다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 반면 당신들은 나보다 더 대단해지겠지. 그럼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 참으로 악독하다! 별 좋은 인간이 아니다. 이런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도 그런 일을 저지른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한 지 조금 오래되고 성과가 좀 나면 스스로 자본과 밑천이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 저에게 좋은 방식이나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았을 때 저는 바로 답변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넘어서면 저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봐 “제자에게 전부 다 가르쳐 주면 스승이 굶어 죽는다.”라는 사탄 독소에 따라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위세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역시 이겨 내기 쉽지 않다. 명예와 이익은 사람이 평생 동안 노력하는 목표이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칼 두 자루로, 그것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에게 이로운 일을 좀 하고는 자신이 나름대로 기여했고 교회에서 지위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도록, 그의 밑천과 지위, 그리고 교회에서 그가 가진 명망과 위치를 이해하도록 자신이 했던 좋은 일들을 쭉 이야기한다. 그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겠느냐?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랑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자신은 또 무엇 하러 내세우는 것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치켜세우며 숭배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얻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느끼겠느냐? (즐깁니다.) 지위의 복을 즐긴다. 너희도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는 않느냐? 사람의 이런 마음과 생각, 사상은 다 어떻게 초래된 것이겠느냐?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근원은 바로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으로 인해 이런 것들을 표출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자주 우월감을 갖곤 하는데, 어떤 우월감이겠느냐? 무엇으로 인해 이런 우월감이 생기는 것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외국어를 할 줄 알아서 자신에게 은사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 만약 자기들 같은 사람이 없으면 사역을 펼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길 바란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타인을 접할 때 어떤 식이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집에서 다양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는데, 첫 번째는 리더, 두 번째는 특수한 재능이 있는 사람, 세 번째는 평범한 재능이 있는 사람, 마지막은 후방에서 여러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다. 중요하고 특수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을 밑천이자 진리 실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는 너무도 터무니없지 않으냐? 그는 특수한 본분을 좀 이행한다고 해서 교만해지고 안하무인으로 남을 무시한다. 그는 타인을 접할 때 늘 상대방에게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 묻고, 만약 상대방이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면 그 사람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업신여긴다. 다른 사람이 그와 함께 교제하려고 하면 그는 겉으로는 그럭저럭 응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와 교제하겠다고? 당신이 뭔데? 그까짓 본분이나 이행하는 주제에 내 대화 상대가 되겠어?’ 만약 상대방이 이행하는 본분이 그의 본분보다 더 중요하면 그는 아부하고 부러워한다. 그는 리더 일꾼을 만나면 노예처럼 입발림 소리를 한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원칙이 있는 것이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이행하는 본분에 따라 사람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대합니다.) 그는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며 재능과 은사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드러내느냐? 이는 한 사람의 추구와 생명 진입, 본성 본질, 그리고 인품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윗선 리더를 대할 때 굽실거리고 예의를 차린다. 능력이 좀 있고 은사가 있으며 말솜씨도 좋은 데다가 하나님 집에서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 적이 있고 상부에서 발탁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대할 때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말한다. 반면 자질이 떨어지거나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당신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하층민이야. 나랑 맞먹으려 하고 나에게 생명 진입과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교제하려 하다니, 당신은 그럴 자격 없어!’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하고 흉악하며 사악한 성품이다. 교회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너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상대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지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 표출, 그리고 평소의 모습은 그가 가진 생각, 관점, 속셈, 추구, 걷는 길을 모두 드러낸다. 네가 드러내는 것과 너의 일관된 모습이 네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드러낸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설령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결부하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춰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원칙으로 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 상상, 속셈, 목적, 욕망, 그리고 기호로 일을 대하고 처리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불신자가 처세하는 원칙과 방식이 있다. 또한, 그는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며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을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사람을 진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관점과 기준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는 비록 말하고 설교할 때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면에서 진리 실제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내면에 패괴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는 구원받는 요구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그가 만약 늘 이런 것들을 밑천으로 삼는다면 깨달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의 마음속에 과연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겠느냐?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가 그에게 별다른 가치가 있겠느냐? 그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것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분명 그것은 사탄 철학과 사람의 유전,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일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리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그는 늘 상부에서 그를 어떻게 보는지, 그를 좋게 평가하는지, 하나님 마음속에 그가 있는지, 하나님이 그를 알고 있는지 이런 것만 고려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상부에서 그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본다.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우한다. 마음속으로 늘 이런 것들을 중시하는 그에게 과연 진리가 크게 작용할 수 있겠느냐? 늘 이런 내적 상태와 처세 철학 속에 사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겠느냐? 그가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는 사탄 철학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유식하고 박식하며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꽤 즐기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 집을 무엇으로 여기느냐? (사회로 여깁니다.) 사회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런 관점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럼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실을 다 인정할 수 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겪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하고 밑천, 은사, 지식, 이력과 같은 것들의 본질을 간파한 뒤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패괴 본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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