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함(2) 제1부분
오늘은 찬양 한 곡을 불러 보거라. 너희가 좋아하고 평소 자주 부르던 곡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은 마음으로 느끼며 헤아리는 티 없이 순수한 감정.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느니라. 의심도 간교도 없고 기만도 없느니라. 어떠한 거래도, 어떠한 불순함도 없는 감정이라. 사랑하면 기만 않고 원망, 배반, 거역 하지 않으며,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느니라.
2. ‘사랑’은 마음으로 느끼며 헤아리는 티 없이 순수한 감정.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느니라. 의심도 간교도 없고 기만도 없느니라. 어떠한 거래도, 어떠한 불순함도 없는 감정이라. 사랑한다면 봉헌하리. 고난받고 하나님과 합하리. 그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가정과 앞날 포기하고, 청춘과 결혼 포기하리. 그렇지 않다면 너의 사랑은 기만이고 배반이라!
찬양을 참 잘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찬양을 좋아하느냐? (네.) 이 찬양을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느냐? (아직 거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찬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이냐? (“‘사랑’에는 조건도, 장벽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기만도 없고, 거래도 없으며, 간교도 선택도 없고, 어떠한 불순함도 없다.”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불순물이 있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부분, 그리고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저는 확실히 아직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네 사랑은 어떤 수준에 있느냐?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느냐?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너의 분량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어느 정도에 도달했느냐? 기만이 있느냐? 원망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해 요구나 욕망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불순물은 어떤 상황에서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이 저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저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런 패괴된 성품이 드러납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 너희도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느냐?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느냐? (저도 이 찬양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임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이런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참된 사랑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서는 노력하며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더해 주신 힘과 기도로 하나님과 협력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임하거나 드러나 저 자신에게 앞날이나 운명, 종착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특히 연약해집니다. 한동안 체험한 후 기도를 통해 이런 상태들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말하는 ‘운명과 앞날’은 도대체 무엇이냐? 가리키는 것이 있느냐? 하나의 그림이냐? 아니면 상상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직접 그 앞날과 운명이란 것을 보기라도 했느냐?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냐? 너희 모두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날과 운명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것은 자신의 불순물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이야말로 티 없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저 자신과 대조해 보면, 하나님을 믿어 온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헌신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드러날 때는 이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는 생각에 소극적인 상태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종착지, 앞날, 운명을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는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는 모양이구나. 너희가 이 찬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실제 체험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서 언급된 매 구절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원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앞날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거역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느냐?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사람이 보기에도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들이 사람에게는 다 생소한 것이다. 사람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갖추어 바라는 것이 없고,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않고,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수 있다면,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갖춘 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완벽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진공 속에서 살면 모를까, 이 세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체험하면서 이런 말씀과 자신을 대조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했고, 심지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저버리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과 패역, 욕망과 요구를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사람에게 얼마 동안의 시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이 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즉시,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조금씩 사랑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 아니더냐?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심하더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알고 있다. 진실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완벽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 중에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더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느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 베풀거나 바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말에 불과하며, 본질적인 면은 없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말씀은 하나님의 한 가지 측면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어떤 측면의 본질이겠느냐?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그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했던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 그 단어가 자주 제기되지만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단어는 무엇이겠느냐?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다. 지난번에는 일부만 교통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측면의 본질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느냐? 어떤 인식과 말씀들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거룩함과 내가 교통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느냐? 여기에 대한 인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한 측면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다고,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셨기에 그런 진노를 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이는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화제는 ‘거룩함’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다 조금씩은 들어 보았고, 또 조금씩은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흔히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같이 놓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는 모두에게 생소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함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하나님이 나타낸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지만, 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어떤 나타냄이나 소유, 어떠함들이 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본 것은, 사람은 늘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그것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예로 들자면,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함’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나타나는지(원문: 兌現)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이 멍해 사람은 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하나님에게서 구현시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실제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한지 부정확한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나도 덩달아 입버릇처럼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단어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사람은 기본적으로 ‘거룩함’이란 단어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방금 부른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어떤 사람은 ‘거룩함’을 ‘사랑’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지닌 본질의 일부지,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관념적으로 이 글자를 볼 때 늘 본인이 순결하거나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소위 말해서 불결하지 않고 정결한 것들을 연상한다. 일례로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거룩함’이란 단어를 연꽃과 연결시킨다. 또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꾸며 낸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성도나 사도와 같은 인물, 또는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자들의 영적 체험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의 상상이자 관념이다. 사람은 왜 그런 관념을 갖고 있겠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접하고, 체험한 것이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사탄의 패괴,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간의 암투와 싸움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고, 말씀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내도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는 참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 패괴 속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으므로 빛을 보지 못한다. 또한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긍정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래서 거룩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존재하겠느냐?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이 거룩하므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번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에 대해 일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일부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는 데 어느 정도 깨우침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부족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알게 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함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더욱이 거룩함의 참뜻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나타난다는 내용을 깨닫게 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번에 우리는 세 가지를 나누었다. 이제 네 번째 주제로 넘어갈 차례이다. 성경을 읽어 보자.
사탄의 시험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는 마귀가 첫 번째 시험에서 예수에게 한 말이다. 어떤 내용이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이 말은 간단하지만 그 내용에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으냐?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그럼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랐겠느냐? 그가 그리스도임을 몰랐겠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만일’이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시험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마귀는 순종하거나 경배하였느냐? (아닙니다.) 마귀는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냐? 그런 방법, 그런 말로 예수를 격노하게 하여 꼬임에 빠지도록 유인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가 자신의 뜻대로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 아니겠느냐? 사탄의 본성은 어떠하냐? (교활하고 사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그럼 사탄의 어떤 면이 부정적이냐?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한 것 아니겠느냐? 사탄은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격했다. 그러고는 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탄의 음흉한 속셈 아니겠느냐? 사탄은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사탄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다. 즉, 그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신분을 부인하려 한 것이다. 사탄의 그 말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그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거나 망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악독함이다. 사탄의 악독함은 본성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육신 하나님임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짓, 그러니까 하나님을 뒤쫓고, 계속 공격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망치는 짓을 하는 것이다.
다시 사탄이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돌을 떡이 되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냐? 있는 음식을 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이냐? 이는 무의미한 일 아니더냐? 그때 예수가 금식을 하고 있긴 했으나 설마 먹을 것이 없었겠느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한 그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또 사탄이 아주 음험하고 악독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터무니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탄이 한 일들을 통해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망치는 짓들을 보고 있자면 너무나 가증스럽고 화가 난다. 그런데 반대로 사탄이 한 그런 일과 말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몹시 유치하고 황당하지 않으냐? 이는 사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 본성이 있기에 그런 짓을 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그 말을 보면 황당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런데 사탄은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니 사탄을 무지하고 그릇되다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탄의 사악함은 어디서나 시시각각 드러난다. 예수는 어떻게 대답하였느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지 않으냐? (강력합니다.) 이 말씀이 강력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살려면 떡에만 의지해야 하느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다. 그가 아사하였더냐? (아닙니다.) 그가 아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다가와 그런 말을 하며, “돌을 떡으로 만들면 먹을 것이 생기지 않느냐? 그럼 금식을 할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라는 식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람이 비록 육으로 살고 있으나 사람의 육을 살게 하고 숨 쉬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그를 진리로 여길 수 있도록 믿음을 주며, 하나님을 진리로,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말씀에 그의 실제적인 면도 담겨 있지 않으냐? 예수는 사십 주야를 금식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냐? 살아 있지 않았더냐? 이것이 실례(實例) 아니겠느냐? 예수가 사십 주야를 금식했음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강력한 증거이다. 간단한 말씀이긴 하나 예수가 이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이 예수께 가르쳐 주어서이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곧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은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냐? 후천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진리이자 생명이다. 어떤 일이 임해도 그에게서 발현되는 것은 다 진리이다. 그가 말한 내용이 길든 짧든 그 진리, 그 말씀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또한 사람이 그 말씀에서 진리를 얻게 하고, 인생의 길을 알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즉,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의 근원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 긍정적인 것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한 말은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사악하고 악독한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아니더냐? 사탄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자가 있더냐? 도와준 자가 있더냐? 협박한 자가 있더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사탄은 그 뒤를 쫓는다. 사탄이 한 행동, 말의 본질과 본색이 바로 사탄의 본질, 즉 사악하고 악독한 본질이다. 사탄은 또 어떤 말을 하였느냐? 다음 내용을 읽어 보도록 하자.
마 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우선 사탄이 한 말을 살펴보자.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라고 했고, 또한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성경 말을 인용하였다. 사탄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 굉장히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하고 황당하며 역겹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항상 어리석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여기며, 늘 성경 말을 인용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했던 말씀까지 인용한다. 이런 말을 통해 역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 계획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한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탄의 사악한 속셈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짓은 언제나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람을 시험하고 유인하고 유혹하는 방식으로 빙 돌려 말한다. 사탄은 평범한 사람을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우매하고 어리석으며 사물의 본모습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고, 또한 그것의 본질, 교활함과 음흉한 속셈을 간파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어리석은 면 아니겠느냐? 또한, 사탄은 당당하게 성경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말이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다고 여겼다. ‘당신이 무슨 빈틈을 찾을 수 있겠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사탄의 터무니없고 유치한 점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더냐? 너희도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더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하더냐? 역겹지 않더냐? (역겹습니다.) 역겨운 마음이 들면서 혐오감과 증오심이 생기지 않더냐? 그럴 때면 사탄, 그리고 사탄에 의해 생성된 패괴 성품이 사악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 않더냐? 그런 느낌이 들 때, ‘사탄의 말은 공격성과 유인책을 담고 있어 참으로 황당하고, 가소로우며, 유치하고 역겹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를 보면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거나 사역하신 적이 없어. 그런 방식은 한 번도 없었다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냐? 물론 그때도 사람은 그런 느낌만 들 뿐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의 현재 분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야. 우리에게 이로우니 받아들여야 해.’라는 정도만 느낄 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입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 자체가 곧 거룩함이요, 하나님이 곧 거룩함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럼 방금 사탄이 했던 말에 예수는 어떻게 대답했느냐? 예수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예수의 이 말씀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가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명령의 말씀, 아주 간단한 말씀 같아도 사람과 사탄은 이를 자주 거스른다. 그래서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사탄은 항상 그렇게, 그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과 본질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한다. 이 때문에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항상 한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하지 않으냐? (유효합니다. 저희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가득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에서 사탄이 했던 말들을 사람도 자주 하지 않더냐?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사탄의 패괴 성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아주 간단한 말씀을 했지만, 이는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탄과 언쟁을 벌이며 한 말씀이 있더냐? 사탄과 맞붙어 싸우면서 한 말씀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역겹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혐오스럽고 역겹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사탄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사탄에게 큰 이치를 설명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왜 그랬겠느냐? (사탄은 줄곧 그렇게 해 왔고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치로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다. 사탄에게 혐오스러운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예수를 시험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시도해 보려고 했다. 징벌을 받을지라도 그렇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런 짓을 계속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맞섰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함 아니겠느냐? 하나님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다. 하나님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그를 건드린 적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화를 내는 것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사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세상의 풍조며, 놀 거리, 먹거리, 스타, 미인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란 단어만 언급해도 성을 내니, 이것이 사악한 본성 아니겠느냐? 이것으로 사람의 사악한 본성이 충분히 증명된다. 너희는 진리를 언급하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과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반감이나 혐오감이 들고 듣기 싫은 경우가 있느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은 진리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어떤 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꾸짖는 말씀이잖아!’ 심지어 ‘맨날 이런 이야기만 하시지. 입만 열면 시련이요, 심판이요 하는 것들뿐. 도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거지? 언제쯤이면 좋은 종착지에 이를 수 있는 거냐고!’라며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원인 모를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한 본성입니다.) 이는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 초래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나 인류의 패괴 성품에 대해 사람과 언쟁을 벌이거나 따진 적이 없고, 또는 사람의 우매한 행동을 크게 문제 삼은 적도 없다. 하나님에게서는 인류가 특정 사물에 대해 갖는 관점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인류의 관점이나 지식, 과학, 철학, 상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행하고 나타낸 모든 것은 진리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과 모든 일은 다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 진리는 터무니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진리와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 생명으로 인해 발현된 것이다. 그런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일들의 본질이 진리이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행사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와 빛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실제를 보게 하고 길을 알려 줘 바른길을 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너희도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마 4:8~11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탄 마귀는 앞에서의 두 가지 방법이 통하지 않자 또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예수에게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마귀의 어떤 본모습을 알 수 있느냐? 사탄 마귀는 참으로 뻔뻔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뻔뻔하냐?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 역으로 만물을 보여 주며 “만국의 이 부귀영화를 보라. 당신이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하다니,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 뻔뻔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다고는 하나 그 모든 것을 누리더냐? 하나님은 만물을 인류에게 주었다. 사탄은 이를 삼켜 버릴 속셈을 품고 있었고, 그다음 하나님께 보여 주며 “내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탄의 추악한 몰골 아니겠느냐! 사탄은 ‘수치’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모른다. 여기서 또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수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주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사탄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귀 사탄은 뻔뻔하게 하나님께 이 만물을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탄이 또 한 번 어이없고 낯 두꺼운 일을 저지른 것 아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사탄이 어떤 짓을 하든 예수가 그 꼬임에 넘어갔더냐? 예수는 어떻게 말씀했느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실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제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의 말에서는 사탄의 사악함과 뻔뻔함을 알 수 있다. 그럼 인류가 사탄을 경배한다면 어떤 결말을 맞겠느냐? 만국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도 사탄처럼 뻔뻔하고 가소로워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과 똑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 즉, 주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거나 사탄 마귀를 경배한다면, 너는 사탄과 한패가 되는 것이며, 사탄과 똑같이 뻔뻔하고 사악해질 것이고, 사탄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네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멸망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몇 번의 시험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사탄은 계속해서 시험했더냐? 더 이상 시험하지 않고 떠나갔다. 이로써 무엇이 증명되었느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 악독함,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단 세 마디로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풀이 죽어 도망갔으며, 더 이상 예수를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예수는 이미 사탄의 그 시험을 이겼으므로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 담당한 사역을 순조롭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예수가 한 이러한 말씀과 일들을 오늘날로 가져와도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겠느냐?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쉬운 일이냐? 그러려면 사람이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탄의 시험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탄의 시험에 들었을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을 간파할 수 있다면 사탄을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그릇되고 황당무계한 면을 알게 되면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과 같이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에게서 사탄의 뻔뻔함과 악독함이 발로될 때, 이를 확실히 깨닫고 의식한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탄을 저버리고 내칠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성찰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탄의 미혹과 통제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사탄이 한 이 모든 말을 통해 사탄의 본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리해 보자. 우선, 사탄의 본질은 전반적으로 사악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대립된다. 왜 사탄의 본질이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사탄이 사람에게 한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근거해 살펴보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일을 하고, 사탄이 패괴시킨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점령되고 동화되어 사탄의 패괴 성품, 즉 사탄의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탄의 말과 행위에서 교만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간사함과 악독함을 보지 못했느냐? 사탄의 교만함은 주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느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더냐?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사역과 지위를 없애고 자신이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 들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고, 옹호하고, 경배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만한 본성이다.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킬 때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직접 알려 주더냐? 사탄이 하나님을 시험할 때 “당신을 시험하고 공격하겠습니다.”라고 직접 이야기하더냐? 사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하느냐? 유인하고, 시험하고, 공격하고, 함정을 파 놓으며, 심지어 성경 말을 인용해 다양한 방식의 말과 행위로 음흉한 속셈과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사탄이 이렇게 한 후, 사람에게서 발로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람도 교만해지지 않더냐? 수천 년 동안 사탄에게 패괴되면서 사람 역시 교만하고, 간사하고, 악독하게 변했고,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의 본성이 초래한 결과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을 가졌기에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도 그 사악한 본성이고, 그 사악한 패괴 성품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며, 사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고, 시험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게 되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