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 (2)

다들 잘 지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 안녕하세요?) 형제자매들, 오늘 찬송 한 곡 부르자. 너희가 부르기 좋아하는 것, 평소에 늘 부르던 것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을 가리킨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간격도 거리도 없고, 의심과 추측이 없고 간교도 기만도 없으며,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으면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배반도 거역도 하지 않을 것이며, 토색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을 얻고자 바라지 않을 것이며, 얼마를 얻고자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2.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을 가리킨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간격도 거리도 없고, 의심과 추측이 없고 간교도 기만도 없으며,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으면 달갑게 봉헌하고 고난받을 것이고 하나님과 합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고, 너의 가정과 앞날을 가정과 앞날을 포기할 것이며, 너의 청춘과 너의 결혼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고 배반이다!

참 좋은 노래를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노래를 좋아하는가? (네.) 이 노래를 다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는가?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인가? (바로 “‘사랑’에는 거리도, 간격도, 조건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기만도 없고 거래도,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선택도 없고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도 많은 뒤섞임이 있고 아직도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부분이 있으며 또한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저에게는 확실히 아직도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 없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 없다면 어떤 사랑이 있는가? 그 사랑은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는가? (단지 이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입니다.) 너의 분량으로, 자신이 경력(역주: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그 사랑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가? 기만이 있는가? 원망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받아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요구나 무슨 욕망이 있는가? (그런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 뒤섞임은 어떤 상황에서 보이는가? (하나님이 안배하신 환경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이런 패괴된 성정이 유로(역주: 흘러나옴)됩니다.) 너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부르는가?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는가?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는가? (저도 이 노래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 ‘사랑’이 완전한 사랑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자신은 이런 기준과 아직 차이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은 다만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조금 버릴 수 있고 조금 헌신할 수 있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정도일 뿐, 일단 자신의 앞길이나 운명에 관련되면 혼자 속에 또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데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매우 작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진실한 사랑과는 아직도 매우 큰 거리가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적극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 말씀에서 얻은 힘에 의지하고 또한 이런 환경 가운데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존 관점에 연관되면 어떤 때에는 이겨 내기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그럼 너는 이겨 내기 힘들 때, 거기에 어떤 것이 가로막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이런 것을 성찰해 보았는가? (성찰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자신의 허영심과 체면 때문입니다. 또 앞길과 운명이 큰 가로막음이 됩니다.) 그럼 너는 앞길과 운명으로 인해 가로막음이 클 때, 왜 너에게 그렇게 큰 가로막음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앞길과 운명이 왜 너의 가로막음이 될 수 있는가? 너는 너의 앞길과 운명에 대해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 환경이 임하면 자신에게 앞길과 운명이 없는 것 같고 심지어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저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귀숙이 없다고 느껴지는데, 이럴 때는 특별히 연약해집니다. 이 부분이 자신에게 매우 큰 가로막음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동안 경력한 후, 기도를 통해 이런 정형들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너희들이 말하는 ‘앞길과 운명’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앞길과 운명’은 바로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혹시 운명과 귀숙이 없지 않은가’라는 느낌이 들어 아주 연약해집니다.) 그럼 너희가 말하는 ‘운명과 앞길’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리키는 바가 있는가? 하나의 그림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또 아니면 직접 앞길과 운명이란 것을 보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실체인가? (바로 귀숙입니다.) 귀숙이란 무엇인가? 너의 앞길은 또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길과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또한 본분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께 합격되어 쓰임받는 데에 달하고 합격되는 본분을 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늘 하나님께 드러나기 때문에 차이가 매우 크다고 느껴집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 말해 보아라. (바로 개인의 뒤섞임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지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하면서 끝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사랑이 있어야 그 사랑이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대조해 볼 때, 하나님을 믿은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화비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러날 때는 자신이 이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소극적인 정형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은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귀숙, 앞길, 운명을 한시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사람의 교통에,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고 ‘사랑’에는 반드시 실제적인 표현이 있어야지 입으로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 교통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조해 보면 자신은 아직도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됩니다.)

너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부르는 모양이구나. 너희가 이 노래에 대해 이해를 좀 하고 있고 실제 경력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많은 사람은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의 내용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달갑게 따르려 하고, 어떤 사람은 앞길을 내려놓으려 하며,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고 혹은 패역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는가?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사람은 이런 사랑에 닿을 수 있는가? 사람이 보기에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이 사람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정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구비하여 바라는 것이 없고, 또한 무엇을 얻으려고 바라지도 않고, 달갑게 봉헌할 수 있으며, 달갑게 고난을 받고,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달갑게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구비한 자는 사람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는가? 하나의 완벽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런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그가 진공 속에 살면 모를까,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경력 가운데서 이런 말과 자신을 대조하면서 자신을 대처(역주: 책망)하고 억제하였고 심지어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하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도, 패역도 내려놓고 욕망과 요구도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여전히 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어느 기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는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는가? 그런 부분이 이 말씀에 있는가? 이 말씀에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즉시 사랑해야 한다고, 당장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점차적으로 사랑이 생기겠는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에 대해 근거 없이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런 논법을 펴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구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럼 너희는 그것을 어디에서 보았는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보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근거 없이 의심하는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있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음, 진실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는데, 그럼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랑이나 혹은 하나님의 실질이 바로 완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람 중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는 어떤 상황하에서 내리는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베풀고 봉헌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맞습니다.) 간단하고 실질적인 면은 없다.

하나님이 사랑에 대해 내린 정의와 그것에 대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한 방면의 실질에 연관된다. 어느 방면의 실질인가?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이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하고 제기했었던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자주 제기되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사람은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이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 (거룩입니다.) 음, 거룩,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의 주제이다. 지난번에는 일부분만 교통하고 다 교통하지 못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는가? (생겼습니다.)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는가? 너희들이 새롭게 얻게 된 어떤 인식과 말들이 너희가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거룩과 내가 교통했던 하나님의 거룩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는가? 기억하고 있는가? 인상이 있는가?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면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뒤섞임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에 대한 한 방면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한 방면이다. 또 보충할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에도 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에서 하나님의 완벽, 신실, 지혜를 보았고 또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인식했습니다.) ‘만유를 주재한다’는 것은 권병을 말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통하는 화제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하나님의 거룩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그렇게 인식하거나 정의를 내리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통을 듣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본래의 실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았기에 그런 진노를 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역시 피조물에게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류도 긍휼과 비슷한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이 있지만 안에는 모두 뒤섞임이나 목적이 있고 또한 소위 사람의 긍휼은 모두 가상이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인류에 대한 구원을 보았고 또한 그런 긍휼은 사람을 직접 구원받는 길로 이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가 아름다운 귀숙과 염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실질에 구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하나님이 진노로 한 성을 훼멸하려고 했다가도 긍휼의 실질로 인해 하나님은 또 언제든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인식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이 방면에 대해 인식이 있구나.

방금 내가 너희에게 질문했을 때, 너희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이 없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이 방면의 화제를 말하겠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을 같이 연결시킨다.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내용에 대해 다 조금씩은 알고 있고 또 조금씩은 들어 보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을 같이 놓고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하다고 말한다. ‘거룩’이란 이 단어는 각 사람에게 있어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고 또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유로한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런가? 네가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 하나님의 거룩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에는 하나님의 어떤 유로들이나 소유소시들이 있는가?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본 것은 사람들이 늘 입에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거룩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거룩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이란 이 단어를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실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현현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다 마음이 흐릿하여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거룩한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 모두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거룩’이란 이 단어를 재현시켜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의 실제 내용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 나도 덩달아 입버릇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거룩’이란 이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이란 이 단어는 보기에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 사람이 생각하는 ‘거룩’이란 이 단어는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뜻이다. 마치 방금 부른 노래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거룩’과 ‘사랑’을 서로 연결시킨 것은 틀리지 않다. 이것도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실질의 한 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 속에서 사람이 글자로만 이 단어를 봤을 때, 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순결한 것, 깨끗한 것 혹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소위 더럽지 않은 것, 정결한 것을 연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데, 사람은 연꽃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렸는가? (“진흙탕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는다”입니다.) 진흙탕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는다고 정의를 내린 다음, 사람은 ‘거룩’이란 이 단어로 연꽃을 묘사한다. 또 어떤 사람이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내용을 거룩한 것으로 보거나 사람이 꾸며낸 어떤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인물들, 성도나 사도 혹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어떤 영적인 경력을 거룩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다. 사람에게 왜 그런 관념이 있게 되는가? 여기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는데,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사람이 패괴된 성품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사람이 보고 접촉하고 체험하는 것은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패괴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귀다툼과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했을지라도, 설령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나타냈을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심지어 사람이 늘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바로 이 까닭이다. 사람이 더러움과 패괴 속에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광명을 보지 못하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모르고 더욱이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거룩이 무엇인지를 진정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이렇게 말했는데, 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실질만 거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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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⑤정직(正直): 여기서는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

⑥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여기서는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