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

우리가 금방 하나님이 처음으로 한 일련의 모든 사역을 교통했는데, 이런 일은 매 한 가지마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성품, 하나님의 실질과도 관련된다. 하나님의 더 많은 소유소시를 요해하려면 우리는 구약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율법시대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마치고 은혜시대를 시작한 동시에 우리의 발걸음도 따라서 은혜시대로━은혜가 충만하고 구속이 충만한 시대로 오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일을 하였다. 그 새 시대의 사역은 하나님께 있어서든 아니면 인류에게 있어서든 모두 하나의 새로운 기점인데, 이 새로운 기점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첫 번째 새 사역이다. 이 새로운 사역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예상치 못했던, 만물도 다 예상치 못했던 한 가지 파천황(역주: 전대미문)의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은 바로 지금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류 중의 일원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의 신분으로 그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사역은 그가 이미 율법시대의 사역을 끝마쳤음을 뜻하고, 하나님이 더는 율법 아래에서 그 어떤 일이나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고 율법의 형식과 율법의 원칙과 규례로써 말씀하거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음을 뜻한다. 즉, 율법을 위주로 하는 모든 사역이 다 영원히 정지되고 더는 계속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과 새로운 일을 하려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또 새로운 기점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솔해야 하였다.

이 일이 사람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인지 아니면 불길한 소식인지, 그것은 사람의 실질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불길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할 때 율법 규칙만 지키고 규례만 지키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 사람들이 흔히 옛 사역으로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정죄할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길한 소식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첫 번째 도성육신(역주: 성육신)은 단순하게 털어놓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 성심(誠心)이 있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특대 희소식이다. 왜냐하면 인류가 생긴 이래 하나님이 첫 번째로 사람에게서 태어난 인자의 방식으로, 인자의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한 것이지 영의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는 사람의 관념을 타파하였고 또한 모든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익’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은 낡은 시대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의 낡은 역사 방식과 역사 ‘풍격(風格)’도 끝냈고 더는 그의 사자(使者)에게 그를 위해 그의 뜻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고 더는 구름 속에 ‘숨어’ ‘천둥 치는’ 방식으로 높은 곳에서 굽어 보며 사람에게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람에게 말씀하지도 않았으며 ‘정상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게’━사람이 상상도 못한 방식,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으로써━말씀이 육신 됨으로써━인자로 됨으로써 그의 이 시대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이 거동은 인류를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게 하였고 또한 인류를 난처하게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 또 여태껏 한 적이 없는 한 가지 새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오늘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에 어떤 새로운 사역을 하였는지, 이런 새로운 사역에서 우리가 또 하나님의 어떤 성품과 어떤 소유소시를 요해할 수 있는지를 보자.

다음은 성경 신약에 기록된 말이다.

1.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마 12: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먼저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 경문을 보자.

왜 이 경문을 골랐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가 이 단락 말씀에서 우선 알다시피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안식일에 외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거느리고 밀밭을 지나갔는데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제자들이 또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은 안식일에 사람이 마음대로 외출해서는 안 되고 마음대로 활동해서는 안 되며 안식일에 여러 가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예수의 이 거동은 율법 아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비난을 사기까지 했다. 사람이 어떻게 몰이해하고 예수의 모든 행사를 어떻게 의논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잠시 논하지 말고 먼저 예수가 무엇 때문에 굳이 안식일을 골라 이 일을 하였는지를 말해 보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 아래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 하였는지를 말해 보자.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이 경문과 하나님 성품과의 연계이다.

예수는 와서 그의 실제 행동으로써 인류에게 하나님이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으니 이 새로운 사역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고 ‘안식일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미리 체험하는 것일 뿐 진정 큰 사역은 계속 상연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예수가 역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율법시대에 정한 규칙과 원칙을 타파하였는데, 율법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의 몸에서 그 어떤 종적도 없었다. 그는 전부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더는 사람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너는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 사이로 지나갔고 주님이 안식하지 않았고 밖에서 역사하면서 쉬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그의 이 거동은 사람의 관념을 반격하였고 사람들에게 그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생활하지 않고 안식일을 벗어나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역사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이 거동은 사람들에게 그가 새로운 사역을 가져왔는데 이 새로운 사역이 바로 율법을 벗어나고 안식일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할 때, 그는 더는 옛것을 생각할 리가 없고 더는 율법시대의 규칙을 고려할 리도 없으며 지나간 시대에 했던 사역의 영향도 받지 않고 안식일에도 여전히 사역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시장하면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이었다.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이 하려는 많은 사역과 많은 말씀은 모두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는데, 새로운 시작이 있을 때는 이전에 했던 그의 옛 사역을 더는 언급하지 않고 더는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데는 그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하려 할 때가 바로 그가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이끌어 가려 할 때이자 역시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할 때인데, 사람이 만약 낡은 논법이나 규칙을 계속 하거나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이 기념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이미 새로운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역사 단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사역을 가져올 때 그는 새로운 형상, 새로운 각도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서로 다른 방면의 성품과 소유소시를 보게 하는데, 이것이 그가 새로운 사역을 하는 그중 하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걷지 않는다. 그가 역사하고 말씀하는 데는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이런저런 금기(禁忌)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전부 해방 자유이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속박도 없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그는 살아 있는 하나님이고 그는 진실하게, 확실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그는 나무 인형이 아니고 흙 인형도 아니며, 그는 사람이 공양하는 우상과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분이고 그의 역사와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생명과 광명이고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그가 하려는 모든 사역을 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지, 인류가 어떻게 그의 새 사역을 대하고 어떻게 그의 새 사역을 평가하든지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할 것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도 꺼릴 리가 없고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그 어떤 사람의 비난, 심지어 그의 새 사역에 대한 사람의 극렬한 반대와 대적도 꺼릴 리가 없다. 피조물 중의 그 누구도 사람의 도리와 사람의 상상 및 사람의 지식 또는 사람의 도덕관념으로써 하나님이 한 것을 가늠하고, 하나님이 한 것을 규정하고, 하나님이 한 사역을 비방하거나 방해하고 파괴하려고 망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일을 하고 역사함에는 그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을 놓고 말하면, 그는 영원히 이긴 군왕이어서 모든 적세력과 인류에게서 나온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를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놓고 밟는다. 그가 어느 단계의 새 사역을 하든지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도 막힘없이 통행되고 큰 성공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 지혜이자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광명정대하게 안식일에 밖에서 역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 그 어떤 규례도 없었고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으며 그가 소유한 것은 곧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도이고 그가 한 사역은 다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날마다 사탄의 결박 속에서 살고 있고 불합리한 각종 제도에 속박되어 오늘은 이것을 금기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하면서 조금의 자유도 없이 살아가는데, 마치 목에 칼을 차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와 같아 기쁨이라고는 말할 나위도 없다. ‘금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속박을 뜻하고 결박을 뜻하며 사악을 뜻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면 거짓 신을 섬기고 악령을 섬기는 것이며, 금기도 곧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도 먹어서는 안 되고 저것도 먹어서는 안 되며, 오늘 외출해서는 안 되고 내일 부뚜막에 올라가서는 안 되고 모레 이사해서는 안 되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날짜를 택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를 낳는 것까지도 날짜를 택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이런 것이 곧 금기인데, 바로 사람에 대한 결박이고 바로 사탄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심령과 육체를 속박하는 쇠사슬인 것이다. 하나님께 이런 금기가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할 때면 너는 마땅히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는 그 어떤 금기도 없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고 말씀을 하는 데는 원칙이 있지만 그 어떤 금기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곧 진리이고 곧 길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음 경문을 보자. (마 12:6~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의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통속적인 말로 하면 ‘성전’은 화려하고 높고 큰 건물을 가리키는데,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에 쓰이는 곳이었다. 예수가 말씀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아주 뚜렷한바, ‘이’는 바로 말씀이 육신 된 주 예수이다. 이는 예수만이 성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가?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배경은 율법 아래의 사람들이 이미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큰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경배한 것은 성전이란 그곳이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예수가 사람들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였다. 보다시피, 예수의 눈에는 율법 아래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더는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과정만 거칠 뿐이었는데, 이 과정이 예수에 의해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정해졌다. 우상을 섬기는 이 사람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더 높게 보았는데, 그들의 마음에는 성전뿐이고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 없으면 그들이 머물 곳을 잃게 되고 성전이 없으면 경배할 곳도 없게 되고 제사 드리는 일도 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머물 곳’이란 바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 안에 있으면서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곳이다. ‘제사드리는 일을 행하는 것’이란 바로 그들이 성전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함으로써 그들 개인의 부정한 행동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는가 하는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으로 덮어 감추고, 제사드리는 것을 구실로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일러준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에 가져와서 말해도 마찬가지로 유효하고 마찬가지로 겨냥하는 바가 있다. 비록 지금의 사람과 율법시대의 사람은 하나님의 서로 다른 역사를 경력(역주: 체험)했지만 사람의 본성 실질은 똑같다. 지금 이런 역사 배경 하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성전이 하나님보다 크다’는 것과 비슷한 성질의 일을 해낼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본분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간증하고 큰 붉은 용과 싸우는 것을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 자유를 쟁취하는 정치 운동으로 여기며, 얼마간의 기술 수준이 있는 본분을 자기의 사업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종교의 교리로 삼아 지키는 등등이다. 사람의 이런 표현이 바로 ‘성전이 하나님보다 크다’는 성질과 같은 것이 아닌가? 다만 2천년 전의 사람은 유형의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하였고 오늘의 사람은 무형의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할 따름이다. 규례를 중히 여기는 그 사람들이 규례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고 지위를 좋아하는 그 사람들이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고 사업에 몰두하는 그 사람들이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는 등등 사람의 각종 표현은 나로 하여금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다고 칭송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보다 크다”라고 말하게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따르는 도중에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찾으면, 일단 자기의 경영과 자기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가 몰두하는 사업에 온몸을 던지고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의 마음에 관해서는 일찌감치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런 정형이 2천년 전 성전에서 개인의 여러 가지 경영을 한 사람들과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계속해서 이 단락의 경문 중 마지막 그 한 마디를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는가, 없는가?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한 매 마디 말씀은 마음속에서부터 발표해 낸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말씀을 하였겠는가?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지금은 너희가 아마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사람들이 금방 율법시대에서 나왔으니 그들을 놓고 말하면, 안식일에서 나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무엇이 진정한 안식일인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이 말씀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인 것임을 알려 준다. 비록 하나님이 너에게 모든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줄 수도 있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을 얻었을 때 이런 물질이 너에게 가져다준 만족은 진리에 대한 너의 추구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주 뚜렷한바, 대체할 수 없다! 우리가 교통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 이런 것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니 절대로 그 어떤 고가의 물질로도 가늠할 수 없고 돈으로도 그의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물질이 아니고 그가 각 사람의 심령의 필요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비물질적인 진리의 가치는 당연히 네가 여기는 그 어떤 좋은 물건의 가치를 뛰어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새겨봐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중점은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전부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가장 중요하고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예를 하나 들겠다. 네가 배가 고플 때, 음식으로 보충해야 하는데 이 음식은 좀 좋아도 괜찮고 좀 별로여도 괜찮다. 네가 배불리만 먹으면 배고픈 그 느낌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며, 네가 거기에 앉아 있어도 잠잠해질 수 있고 너의 육체가 편히 쉴 수도 있다. 사람의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제로라고 느낄 때 너의 심령의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또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너의 이런 심령 속의 허기는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을 경력하는 과정에서 성정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지 못했다면 너는 아주 조급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는 심령이 아주 갈급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의 이런 느낌은 너의 심령에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령의 허기는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겠는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거리를 거닐고 일부 사람들은 몇몇 괜찮은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하고 일부 사람들은 한숨 푹 자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보거나 본분을 하는 방면에 공을 많이 들이고 힘을 많이 쓰는데, 이런 것이 너의 실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행실에 대해 너희는 모두 깊은 체득이 있다. 네가 힘에 부침을 느낄 때, 너로 하여금 진리의 실제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나님의 깨우침 얻기를 매우 사모하고 있음을 느낄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너에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고 몇 마디 마음에 딱 맞는 말도 아니며 더욱이 육체가 잠시적인 안일과 만족을 얻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하라는지,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너에게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알려 주고 너에게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 네가 이런 것을 깨달은 후에는 설령 세부적인 것일지라도 너의 심령이 한 끼 배불리 먹는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의 심령이 만족을 얻었을 때는 너의 심령이나 너의 전인이 진정한 안식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일을 이렇게 비유하고 이렇게 분석하니, 너희는 지금 왜 내가 너희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이 말씀을 보라고 하는지 요해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 말씀의 뜻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전부는 네가 전에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한가지 물건이나 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보다 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만약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한다면, 사람이 만약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후의 경력 중에서 너희는 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이 단락 말씀을 보라고 하는지를 느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께 있어서 하는 매 한 가지 일은 다 진리이고 다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을 놓고 말하면, 바로 사람 생명 중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사람이 어느 때든지 떠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가장 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록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너에 대한 진리의 중요성은 홀시할 수 없는 것이고 진리는 너의 심령에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터득함에 있어서 자신의 정형에 결부시킬 줄 아는가? 현실 생활 속에서 네가 먼저 자신이 경력한 인ㆍ사ㆍ물이 어떤 진리에 관련되는지를 생각해야 이런 진리 속에서 너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결부시킬 수 있다. 네가 만약 너에게 닥친 일이 어느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를 모르면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비교적 맹목적이어서 효과에 달할 수 없다.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우선 너에게 닥친 일이 어떤 부류의 일인지, 어떤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를 보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너의 경력에 상응한 진리를 찾은 다음 상응한 진리에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러면 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한 가지 규례에 맞추거나 한 가지 공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고 법칙도 아니며, 죽은 물건이 아니라 생명이고 살아있는 것이며, 피조물이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것과 사람이 생존하는 데에 반드시 구비해야 할 법칙인데, 이것은 네가 경력 중에서 많이 체험해야 한다. 네가 어느 정도까지 경력하든지 모두 하나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진리를 떠날 수 없으며, 네가 요해한 하나님의 성품과 인식한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표해 낸 것인데, 그들과 진리와의 관계는 모두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이다. 다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에서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하나의 진실한 체현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모두 구체화하고 명문화하여 더욱 직설적으로 너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알려 주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을 기뻐하는지를 알려 줄 뿐이다. 하나님이 발표한 이런 진리의 배후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보았고 하나님의 실질을 보았는데, 이런 것이 곧 하나님 성품의 유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는 것 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그래도 사람의 실제 경력 중에서 달해야 한다. 사람이 만약 현실 생활을 떠나 하나님을 아는 데에 달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서 얼마간의 인식을 얻었을지라도 단지 도리와 글자 표면에만 국한되었을 뿐 진정한 하나님 자신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

우리가 지금 교통하는 이 범위는 모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발생한 이런 일을 해부함을 통해 하나님이 전에 발표한 성품과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 넓게, 더 깊게, 다방면으로, 다양하게 하나님의 여러 가지 면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럼 하나님의 여러 가지 면을 알려면 이런 이야기로밖에 달할 수 없는가?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국도시대(역주: 왕국시대)에서 한 말씀과 한 사역은 더욱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전면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일부 사례나 이야기를 통해 사람에게 좀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요해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만약 현재 하나님이 발표한 이런 심판 형벌의 말씀과 발표한 이런 진리로써 한 글자 한 구절씩 차례대로 너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한다면 너는 너무 무미건조하고 너무 지루하다고 여기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공식적인 성질을 띠고 있는 것 같다고 여기겠지만 성경의 이런 이야기를 내놓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한다면 사람은 무미건조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언어로써 당시에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그 세부적인 것까지 다 사람에게 알려 주고, 하나님의 그 당시의 심정, 가히 말해서 기분이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공식이 아니고 전설이 아니고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이 체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종 목적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참고로 하여 하나님이 하였던 사역을 더 광범위하게 요해하게 하고 하나님이 하였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하며 또한 하나님이 발표한 이런 성품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요해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의 구체적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요해하게 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의 구체적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요해하게 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깊은 인식이 있는 데에 달하게 한다. 이것을 너희가 모두 느꼈으리라 믿는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이런 사역 범위에서 너는 하나님의 다른 한 방면의 소유소시를 볼 수 있는데, 이런 소유소시는 모두 육신을 통해 발표되고 인성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보게 하고 느끼게 한다. 인자의 몸에서 사람은 육신 중에서의 하나님의 인성의 살아냄을 보았고 육신 중에서의 하나님의 신성의 발표도 보았는데, 이 두 방면의 발표가 사람에게 한 분의 실제적인 하나님을 보게 하였고 하나님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도 있게 했다. 하지만 창세 이후와 율법시대가 끝나는 이 기간에 즉, 은혜시대 이전에 사람이 본 것, 들은 것이나 느낀 것은 전부 하나님의 신성의 방면이고 하나님이 하나의 비물질세계에서 한 것이고 말씀한 것이며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본체가 발표해 낸 일부의 것이다. 이런 것은 많은 경우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너무 높고 커서 접근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더 많은 인상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사람으로 하여금 그토록 신비하여 알 수 없고 그토록 예측하기 어려워 사람이 전혀 달할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데, 상고하고 체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아주 요원한데, 요원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게 하여 그가 마치 하늘가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알거나 하나님의 그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달하지 못하는 것이고 더욱이 너무 멀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일부 구체적인 사역을 하고 이와 동시에 일부 구체적인 말씀도 발표하고 일부 구체적인 성품도 발표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일부 체험할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일부 진실한 인식이 있게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비물질세계에서 발표한 하나님의 소유소시이며, 사람이 요해한 것과 인식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 방면의 소유소시이다. 이런 소유소시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념을 줄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상을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영체’, 이런 범위에 멈춰있게 한다.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한가지 구체적인 물건이나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늘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께 하나의 표준을 정하여 하나님을 물질화하고 인성화하려고 하는데, 예컨대, 하나님은 얼마나 높다든가, 하나님은 얼마나 크다든가, 하나님의 생김새는 어떠하다든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애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성격은 어떠하다든가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를 잘 알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한가지 방식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인성 안에도 있고 신성 안에도 있다. 예수가 사역을 하는 기간에 사람이 본 하나님은 인성의 표현이 아주 많이 있었다. 예컨대, 그는 춤을 출 수도 있었고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도 있었고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말씀할 수도 있었으며 혹은 한가지 일을 담논할 수도 있었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신성 방면을 대표하는 많은 사역도 하였는데, 물론 이런 사역은 다 하나님 성품의 발표와 유로인 것이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신성이 하나의 정상적인 육신 중에 실제화되어 사람에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사람에게 더는 하나님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여 접근할 수 없다고 느껴지지 않게 하였다. 반대로 사람은 인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자의 말씀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상고할 수 있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요해할 수 있었다. 말씀이 육신 된 인자가 하나님의 신성을 인성에 의해 발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것에 의해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 중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는데,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이 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 된 인자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소시 등등을 모두 구체화하고 인성화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하면,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국한성이 있지만 인자의 실질과 소유소시는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할 수 있는데, 단지 발표하는 형식 상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이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다만 하나님이 이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역사하고 육신의 각도에서 말씀하고 인자의 신분과 지위에 서서 인류를 마주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역사하는 것을 접촉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있게 하고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성과 낮춤 중에서의 하나님의 높고 큼에 대해 견식을 넓히게 하며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인 요해가 있게 하고 초보적인 정의도 있게 할 따름이다. 비록 예수가 한 사역과 그의 역사 방식, 말씀하는 각도는 영계 중의 하나님의 본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그의 모든 것은 다 조금도 틀림없이 사람이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그 한 분의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지, 어떤 각도에서 말씀하든지,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지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을 대표할 리도 없고 그 어떤 패괴(敗壞)된 인류를 대표할 리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곧 하나님 자신인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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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②요해(了解):인식하다.

③도(道):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