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의 시험과 결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제 2 부)

패괴된 인류는 지위를 추구하고 지위의 복을 누리길 좋아한다. 모든 사람은 지금 네게 지위가 있든 없든, 지위를 포기하거나 지위의 시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우며 사람의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 어떤 협력이 필요하겠느냐? 주로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지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믿음이 생긴다. 이 밖에도 몇 가지 방법을 더 생각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시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실행 길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보호받을 수 있다. 이런 실행 길이 없으면 너는 항상 시험에 빠질 것이다. 너는 올바른 길을 가고 싶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에는 큰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에게 자주 닥치는 시험에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해서 성과를 조금 얻고 형제자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면 우쭐대며 그 기분을 누리고, 이런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도 있고 알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험이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자신이 리더이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이 가끔 특별한 대우를 해 줍니다.) 그것도 역시 시험이다. 시험이 닥쳤을 때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그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고, 이런 시험들이 너를 괴롭고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가 네게 의식주의 측면을 비롯해 특별한 물질적 대우를 해 주었을 때, 네가 이미 그가 주는 것보다 좋은 것을 쓰고 있다면 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부자를 만나서 그가 자신이 입지 않는 것이라며 좋은 옷을 준다면 너는 그 시험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 ‘그는 돈이 많으니까 이 옷이 별 것 아니잖아. 어차피 그는 입지 않는 옷이니까 내게 주지 않아도 버릴 텐데 그냥 내가 받자.’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겠느냐? (지위의 복을 누린 것입니다.) 어째서 이것이 지위의 복을 누린 것이겠느냐? (이런 좋은 물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네게 좋은 물건을 줄 때 그걸 네가 받는다면 그것이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이냐? 만약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때마침 네게 필요한 것이어서 받았다면, 그 역시 지위의 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물건을 받은 것은 모두 다 해당합니다.) 이런 일은 아마 꿰뚫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리더가 아니고 지위도 없었다면 그가 네게 물건을 주었을지 생각해 보았느냐?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었을 리 없다. 네가 리더이기 때문에 네게 준 것이므로 성질이 변하게 된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베푼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네가 그에게 “제가 리더가 아니라 평범한 형제자매라면 그래도 제게 이걸 주겠어요? 어떤 형제자매에게 이것이 필요하다면 그에게 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면 줄 수 없어요.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잖아요. 당신이 리더이기 때문에 주는 거예요. 당신에게 특별한 지위가 없다면 제가 줄 수 있겠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이런 상황도 모른 채 그것이 입지 않는 옷이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은 그가 너를 속인 것이다. 네가 그걸 받은 뒤 그에게 잘해 주고 그를 특별히 대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는 그런 속셈으로 네게 그걸 준 것이다. 사실 네게 지위가 없다면 그가 네게 주지 않았을 것임을 너도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를 후하게 대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너는 지위의 복을 누렸을 뿐 아니라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 하나님 선민의 물건을 누렸다. 이것은 몰염치한 행동이 아니냐? 사람이 양심과 지각이 없고 염치도 없는 것은 문제다. 설마 이것이 그저 행동 방식의 문제겠느냐? 설마 남의 물건을 받으면 옳지 않고, 받지 않으면 옳겠느냐? 그러면 너희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 말씀이나 교회의 행정 법령 규정을 찾아보고,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아봅시다.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면 저는 이 물건을 받을 수가 없어요.” 네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찾아보고 난 뒤 그것이 원칙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네게 주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을 이겨 낼 수 없고, 남에게 더 많이 받고 특별 대우를 더 누릴 수 있기를 갈망한다. 네가 옳은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오늘 이런 일이 임한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자 하나님께서 제게 배치해 주신 공과일 것입니다. 저는 진리를 구하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에게 지위가 있으면 시험이 너무 커서 일단 시험이 닥치면 이겨 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므로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며 또 진리를 구하고 항상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고 평안해질 것이다. 그런데 네가 물건을 받은 뒤에 기도하면 편안하고 평안한 기분이 들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겠느냐, 혐오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혐오한다. 이것이 물건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문제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냐? 문제는 바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네가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갖고 있는지, 네가 자의적으로 행동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구하는지, 네게 양심의 기준이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일이 닥쳤을 때 네가 하나님에게 기도했는지, 먼저 너 자신의 욕망을 충족했는지 아니면 먼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에 문제가 있다. 이 일은 사람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면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실행 원칙이 있어야 한다. 먼저 겉으로 이런 특별한 물질적 대우를 거절하고, 이런 시험을 거절해야 한다. 네가 특히 좋아하는 물건이나 네게 때마침 필요한 물건이라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의식주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특별한 물질적 대우는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 어째서 거절해야 하느냐? 이것이 그저 행동 방식의 문제이겠느냐? 이것은 협력하는 태도다.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시험에서 떠나고자 한다면 우선 이렇게 협력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네게 이런 태도가 있으면 시험에서 떠날 수 있고 네 양심이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서 받은 뒤에 네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다소 느끼기는 하지만, 네 나름대로 이유와 핑계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하고 또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때 양심의 느낌이 그리 정확하지 않고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이유나 사상, 관점의 영향 때문에 양심이 그리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이 양심의 기준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무슨 경종이겠느냐? 양심의 느낌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고, 진리 원칙을 구해야만 믿을 수 있다. 진리의 구속이 없으면 사람은 시험에 빠질 수 있고,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지위의 복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한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 원칙이란 나는 모든 특별 대우를 일절 거부하고 떠나며 절대적으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거절할 수 있으면 악을 떠나는 선결 조건에 도달한 것이다. 네가 악을 떠나는 선결 조건을 갖추면 어느 정도는 이미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이런 실행 원칙을 갖고 이런 원칙을 지킨다면, 너는 이미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있는 것이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네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있는데 또 무슨 양심을 검사할 필요가 있겠느냐?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양심의 기준을 넘어선다. 사람에게 협력할 뜻이 있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기준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사람의 협력에 달려 있으며, 사람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욥을 예로 들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에게는 그만한 분량이 있고, 그만한 실제가 있기에 어떠한 시험에 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즐기는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만한 말이나 행동을 쉽게 내뱉거나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런 장소는 가지 않았겠느냐?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좋아하지 않은 것은 객관적인 이유이고, 너희가 생각하지 못했을 실제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은 몇 가지 방법과 행동 방식을 취하여 보호받고 죄를 저지르지 않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인위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그 외에, 사람의 패괴 본성으로 인해 몇몇 특정 장소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시험이 있는 자리는 가지 않았고, 그렇게 시험을 면할 수 있었다. 욥이 왜 그런 연회에 가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느냐? 그런 장소는 누구에게나 너무 큰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 시험이 너무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죄를 저지를 수 있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겨우 그까짓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까짓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까짓 의지만으로는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시험에 든 네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알겠느냐? 누가 네게 특별 대우를 해 줄 때 너는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모두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어떤 행동 방식이냐? 이것은 사람이 가진 어떤 측면의 문제에 대한 원칙이자 규정이냐? (사람의 탐욕스러운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서 시험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너는 이런 시험을 피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원칙이나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강력하고 효과적인 협력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상황을 나누어 이런 상황은 받아들이고 저런 상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가 잘 조절할 수 있겠느냐? (잘 조절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잘 조절할 수 없느냐? (사람에게 사탄의 본성이 있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일이 닥치면 원칙이 사라져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는다. 남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제물이며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서 자기 주머니에 넣으며, 감히 횡령하고 차지하고 심지어 속으로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자연히 그런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안일함을 탐하고 지위의 복을 누린 결과다. 네가 늘 시험에 빠지고 시험을 멀리하지 않으면, 결국 너도 모르게 이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패괴 성품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닥치든 진리 원칙을 굳게 지키고 특수한 문제는 특수하게 처리해야 하며, 규례를 고수해서도 안 된다. 시험을 이겨 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

물질적인 측면의 시험은 그래도 이겨 내기가 쉬운 편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고 자기 마음에 만족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쉽게 이겨 낼 수 있다. 하지만 명리와 지위의 시험은 이겨 내기가 가장 어렵다. 가령 두 사람이 협력하는데 다른 사람이 너보다 지위가 조금 낮고, 네가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조금 높으면 기쁘고, 네가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조금 낮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마음이 괴로우며, 이런 마음에 통제받아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겠느냐?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물질적인 시험에서는 거절하고 떠나고 물들지 않을 수 있지만, 지위, 명리, 허영, 체면은 사람이 이겨 내기가 가장 힘들다.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명리와 지위가 공허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명리와 지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너는 명리와 지위를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갖고 명리와 지위의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이 온갖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패괴된 모습으로 사는 것이며, 그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고, 인성이 없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진리에 순종하지 않든, 간사하고 속셈을 가지고 일 처리를 하든, 아니면 탐욕스럽고 야심과 욕망을 품었든, 이런 모든 문제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 사탄의 패괴 성품이 초래한 것이고, 사탄의 본성이 사람을 통제하여 초래된 것이다. 사람이 지위를 가지려고 다투는 것은 그중 한 가지 모습일 뿐이다. 이 모습은 사람의 교만한 성품이나 하나님에게 패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겠느냐? 역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기만 하면 이런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다. 네가 지위가 없을 때는 항상 자신을 해부하고 인식하여 남들이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다. 또 네가 지위가 있을 때도 항상 자신을 해부하고 인식하여 남들에게 네 장점을 보여 주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제 체험이 있으며 참된 변화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남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 지위가 있든 없든 진리를 실행하고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으며 사람들이 너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닫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 지위는 네게 무엇이겠느냐? 사실 그것은 가외의 것이고 부가적인 것이다. 옷이나 모자 같은 장식품이며, 그 어떤 작용도 할 수 없고,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다. 네게 지위가 있든 없든, 너는 역시 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는 지위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네가 지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만 하면 그것은 널 통제할 수 없다. 네가 지위를 좋아하고 특별히 중시할 때만이 그것이 널 통제하게 된다. 그러면 너도 너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려 하며, 말하고 일하고 사람들을 대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리더의 신분을 내려놓지 않으려 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것은 지위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지위에 올라서서 말하고 일하며 내려오지 못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냐?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깨달아 지위가 있어도 지위 위에 올라서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기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다하고, 자신을 평범한 형제자매와 똑같이 여긴다면, 너는 지위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지위에 통제받지 않고 정상적인 생명의 진입이 있으면 남과 높고 낮음을 비교할 수 있겠느냐? 남이 너보다 조금 높다고 해서 몹시 괴로워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진리를 구하고 지위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통제받지 않고, 자기 본분을 다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다.

패괴된 인류에겐 일반적으로 이런 병폐가 있다. 지위가 없을 때는 누구와 접하거나 이야기할 때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특정한 방식이나 어조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스스로를 포장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떠한 심리적 압박감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 털어놓고 교제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는 친화력이 있어 접근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위를 획득하게 되면, 그는 거만해지고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누구도 그를 가까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존귀하고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일반인을 업신여기고 말할 때 거드름을 피우고 다른 사람들과 터놓고 교제하지도 않는다. 왜 그는 터놓고 교제하지 않겠느냐? 그는 자신이 지위가 있고 스스로를 리더라고 생각한다. 리더는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하며, 더 큰 분량을 갖고 더 많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인내심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고생을 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하며 어떠한 사탄의 시험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리더는 부모나 다른 가족이 죽더라도 울음을 억제해야 한다고, 혹은 앞에서는 울지 않고 몰래 울어 아무도 그들의 단점이나 결점, 연약함을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극적이 될 때도 어떤 사람도 알게 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모든 것을 숨겨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이 지위를 가진 후 행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정도로 자신을 통제한다면, 지위가 그의 하나님, 그의 주님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가 아직도 정상 인성을 지니고 있겠느냐? 사람이 일단 그런 생각을 갖고 자신을 그러한 범위 안에 가두어 규정하고, 자신을 그런 인물로 포장한다면, 그는 지위를 매우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 남이 그보다 더 강하고 훌륭하다는 사실이 그의 치명적인 곳을 건드린다면, 그가 육을 이길 수 있겠느냐? 남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지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의 속셈과 생각, 마음에서 그것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제거하느냐? 원래 지위가 없었을 적 너는 어떤 사람들이 눈에 거슬리면 그냥 상대하지 않았다. 현재 지위가 생긴 너는 누군가 눈에 거슬리거나 문제가 있으면 그를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껴 그와 많이 교제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렇게 실행하면 마음속에 어떤 기분이 드느냐? 기쁘고 평안한 기분이 든다. 네게 어려움이 있거나 네가 실패했을 때도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추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어려움과 연약함,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는지, 그 후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는지, 어떻게 하나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교제해야 한다.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효과는 어떠하냐? 틀림없이 매우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절대 너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고, 네 체험을 부러워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사람에게 지위가 있으면 관리다운 모습을 갖추고 말도 점잖게 해야 남들의 존중과 우러름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이 맞느냐? 만약 네가 지금 이런 생각이 옳지 않음을 의식할 수 있다면 너는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육적인 것을 저버려야지 허세를 부리거나 외식하는 이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진리를 구하지 않아 그 사상과 관점이 네 안에서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리면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하게 된다. 그럼 아무도 너를 꿰뚫어 보거나 네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게 빈틈없이 포장할 것이다. 남을 대할 때는 가면을 쓰고 말해 남들이 네 마음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네 마음을 보이는 법을 배우고,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사람과 가까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너는 육적인 기호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해야 한다. 그러면 네 마음은 평안해질 것이며, 내면에 기쁨이 깃들 것이다. 어떤 일이 닥치든 먼저 자신의 의식과 생각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만약 또다시 자신을 포장하고, 꾸미고 싶어진다면 너는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하나님, 저는 또 포장하려 했고, 음모와 간계를 꾸미려 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마귀입니다! 정말이지 당신의 혐오를 받는 존재입니다! 지금 저는 저 스스로가 역겹습니다. 바라옵건대 저를 질책하고 징계하고 징벌해 주십시오.’ 너는 자신의 태도를 꺼내 놓고 기도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에게 의지해 그것을 폭로하고 해부하고 제약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해부하고 제약한다면 네가 행하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패괴 성품이 위축되어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네 마음이 어떤 기분이겠느냐? 적어도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고 평안하고 기쁜 기분이 들 것이며, 고통도 줄어들고 연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잠깐 상실감이 들 뿐, ‘나는 리더이고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통 사람과 같을 수가 있겠어? 어떻게 보통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순수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겠어? 이 얼마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 봐라. 또 작은 문제가 있다. 사람에게 있는 패괴 성품은 단번에 깨끗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시간에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네가 패괴 성품을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명백하게 교통하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게 되면 그 즉시 패괴 성품을 없앨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은 곧 패괴 성품과 싸우는 과정이다. 사람 자신의 생각과 상상, 사치스러운 욕망 같은 것들은 기도를 통해 저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이겨 낸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번 반복된 싸움을 거쳐야만 완전히 포기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 때가 되어야 진정으로 효과에 다다를 수 있다. 특히 큰일에서는 마음속에서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한다. 때로는 한두 달, 때로는 반년 또는 일 년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상당히 완고해서, 그 어떤 패괴 성품도 한두 번 진리를 교통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여러 번 너와 겨루기를 반복할 것이다. 계속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가 명백해지고 패괴 성품을 완전히 인식하며 육적인 것과 사탄을 증오하기 시작하면, 항상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진리의 실행이 특히 자연스러워지며 조금도 힘들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육을 이기고 사탄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이 싸움의 기간 동안 사람은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하며, 절대로 이방인이나 마귀, 사탄에게서 길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교통해야 한다. 참으로 진리를 깨달아야만 육적인 것과 사탄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네 마음을 본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불의와 악을 떠나고자 하고, 비록 패괴 성품으로 인해 네게 사상과 의견, 속셈이 생겨도 그 속셈과 사상에 네 행동이 통제받지 않고 네 뜻이 꺾이거나 무너지지도 않으며, 네가 결국 그것과 싸워 이긴다면 하나님도 너를 기념할 것이다. 네가 항상 이렇게 실행하면 네 안의 내적 상태가 점점 좋아질 것이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 측면의 패괴 성품과 철저히 싸워 이겼다고 할 수 있고, 또 이 측면의 성품에 변화가 생기고 진리 실제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느냐? 비록 네가 가끔 나쁜 생각과 마음이 들고 속셈과 욕망이 조금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더 이상 네 마음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네가 더 이상 그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여겨야 한다. 그것들이 생겨나자마자 분별해 내고, 인위적으로 억제하거나 저버릴 필요도 없고 일부러 하나님의 감찰이나 징계, 징벌을 받을 필요도 없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네가 그것을 가볍게 이겨 내고 포기할 수 있으며, 네 마음이 힘들지 않고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너는 분량이 생긴 것이고, 성품이 변화한 것이다. 너희에게 지금 약간의 진입이 있느냐? 약간의 변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분량이 아주 작은 것이다. 잘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잘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러면 언제 또 이런 일이 닥칠 때 너는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굳게 서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정말로 분량이 생긴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고 굳게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너희는 아직 안 되며 아직 모색하는 단계에 있다. 이런 실제 상황에 대해 얘기하면 너희는 너희가 이 모든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한 번도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 아니냐?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는데 생명이 있겠느냐? 이것이 아직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고, 아직 생명도 없는 것이다. 육의 생명과 사탄의 성품만으로 산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구원받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글귀와 도리를 조금 말할 줄 알고 규례를 조금 지킬 수 있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자신을 진실하게 인식해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고 명예와 지위의 본질을 꿰뚫어 보며, 지위를 내려놓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사실 지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들은 모두 패괴 성품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며 또 모두 사람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만 하면 지위는 네게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지위를 놓고 다투면서 “오늘은 네가 나보다 더 두각을 나타냈지만, 내일은 내가 너보다 더 높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것이 그저 지위 때문에 초래된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초래된 일이겠느냐? (패괴 성품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일이다.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이런 문제들도 해결된다. 결국에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려면 모든 일에서 자기 반성과 자기 인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이 생겨나고, 설사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형식적인 것일 뿐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면 된다"고만 말하지 마라. 너무 두루뭉술한 얘기다. 실행의 길이 없으면 안 된다. 구체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다루고, 규례를 융통성 없이 적용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살아 있는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진리 원칙에 따라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실제적인 문제로 진리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 일꾼이 아니다.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설령 그가 리더 일꾼이 된다 해도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진리가 없고 일 처리를 할 때도 원칙이 있을 수 없다. 이런 리더 일꾼은 진리 실제가 없다.

2017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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