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본성 본질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제 1 부)

너희는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라는 하나님 말씀을 오랫동안 교제해 왔다. 이 말씀은 무슨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어떤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로 이야기하는 화제는 베드로와 바울이 걸은 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토록 오랫동안 교제했으니 너희 모두 분명 수확이 있었을 것이고, 적잖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너희는 그간 들은 설교의 정수를 정리해서 갈피를 잘 잡고 그 맥락에 따라, 정리해 낸 중요한 것들과 중요한 흐름에 따라 체험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체험할지, 본분을 어떻게 잘 이행할지, 간증을 어떻게 잘할지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정리를 마친 뒤 너희의 생명 진입과 영적인 분량에 큰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이 말씀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 실제를 정리하자면 바울의 체험부터 정리해야겠느냐, 아니면 베드로의 체험부터 정리해야겠느냐? (바울입니다.) 어째서냐? (바울의 실패 원인과 대조하며 자신을 반성해 보면 자기가 걷는 길이 바울의 길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보면 추구 방향과 목표가 생깁니다.) 사실상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이 겪은 일 하나하나에서 또는 바울이 걸은 길에서 교훈을 얻고 경험을 정리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바울이 걸은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며 바른길을 걸으라고 하는지, 바른길이란 어떤 길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다면 현실 환경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치우친 길을 걷거나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있기에 바울처럼 결국 벌받는 결말, 말로를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바울의 체험과 결부하여 정리해 보자. 바울에게는 그가 걸은 길, 하나님을 믿은 방식, 그가 추구한 목표 방향 등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이 몇 가지 측면에서 바울이라는 사람의 인품과 성품을 살펴보겠다. 바울의 생애와 바울에게 있었던 스토리를 통해 볼 때 바울이라는 사람이 지녔던 몇 가지 성품으로는 교만함, 독선, 간사함, 진리에 대한 증오, 사악함 그리고 흉악함이 있다. 지금 사람이 확인할 수 있거나 정리해 낼 수 있는 바울의 주요한 성품이 몇 가지이든지 간에 바울의 그러한 성품만을 이야기한다면 너는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너는 바울의 그러한 성품을 언급할 때 그의 추구와 인생 방향,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걸은 길과 연결 지었느냐? 너는 그가 교만하다고 말할 때 사실을 바탕으로 삼았느냐? 너는 무슨 일에서 그의 교만함을 보았느냐? 무슨 일에서 그의 간사함을 보았느냐? 무슨 일에서 그가 진리를 증오한다는 것을 보았느냐? 그의 추구와 인생 방향,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걸은 길이 어떤 길인지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그의 그러한 성품의 본질만을 정리한다면 너무 공허할 것이며, 현시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유익한 작용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추구 관점과 그가 걸은 길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사람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본성 본질은 그가 아무것도 안 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평소에 드러내는 것과 그가 일을 하는 속셈 및 출발점을 봐야 한다. 그의 추구, 그의 욕망, 그가 걷는 길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할 때, 그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거나 책망 훈계를 하거나 혹은 친히 빛 비추어 인도할 때 그가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로 사람의 이 몇 가지 측면을 본다. 이 몇 가지 측면은 모두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한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생활하고, 처신하는 원칙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방향, 목표, 그가 걷는 길과 관련이 있고,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생존 토대가 무엇인지 등 이런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제쳐 두고 그의 본성 본질만 이야기한다면 아무리 많이 전면적으로 이야기해 봤자 공허할 뿐이다. 바울의 여러 면을 통해 그의 본질을 보고 현시대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교훈을 주려면 우선 바울이라는 사람이 걸은 길, 그의 추구 목표와 생존의 토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던 태도부터 정리해야 한다. 이 몇 가지 측면에서 그의 각 측면의 성품을 분석한다면 근거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교제하고 정리하면 한편으로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는 주된 목적은 현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주재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바울의 길을 걷는 것과 바울처럼 벌받는 결말을 피할 수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가장 좋은 성과가 난다.

바울의 모든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 추구의 출발점, 동기는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충분히 개괄해 낼 수 있다. 바울의 주요 태도 중에 첫 번째는 무엇이냐? (고된 사역과 면류관을 맞바꾸려 한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에게 그런 태도와 내적 상태가 있음을 알게 되었느냐? (그가 한 말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그의 명언을 통해서이다. 보통 명언은 긍정적이다. 의지, 희망, 포부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한 것으로, 격려와 촉진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명언은 무슨 작용을 하겠느냐? 바울은 꽤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비교적 유명한 말은 무엇이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입니다.) 그 말은 바울이 가진 어떤 측면의 본성 본질을 대표하느냐? 그 성질을 진리로 어떻게 규정해야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 것입니다.) 교만한 본성이 그를 지배하여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다. 면류관 없이는 열심히 뛰어다니지 않고, 면류관 없이는 사역하지 않고, 심지어 면류관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설교를 많이 들은 현시대 사람들은 바울이 드러낸 이러한 태도와 내적 상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 성질을 정할 수 있겠느냐? 정리라는 것에는 성질 규정이 필요하다. 성질을 규정해 내면 그것이 바로 참된 인식이다. 성질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어야만 네가 그 문제를 간파했음이 증명된다. 성질을 규정하지 못하고 남이 성질을 규정한 말만 그대로 읊을 줄 안다면 네게 참된 인식이 없다는 뜻이다. 당시 바울의 심리 상태와 내적 상태가 어떠했길래 바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냐? 어떤 속셈이 그가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냐?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울의 그런 추구의 본질은 무엇이냐?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당했기에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라는 사람의 본성 본질이고,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다. 아까 너희는 이것을 거래하려 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울의 어떤 태도를 대표하느냐? 지금 정리하려는 것은 면류관과 복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바울의 가장 진실한 태도가 무엇인가이다. 바울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들었는지,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손한 태도입니다.) 그것은 태도가 아니라 성품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할 것은 그의 태도이다. (탐욕스러움입니다.) 그것은 복받으려는 속셈이 있고 욕망이 있는 것과 같으며, 본성 본질 안에 있는 것이다. 태도란 무엇이냐? 예를 들어, 내가 매운 음식을 자주 먹으면 위에 좋지 않다고 했더니 사람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치자. “매운 음식이 몸에 나쁘다는 건 알지만, 저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걸요! 매운 음식을 끊으면 뭘 먹어요?” 내가 “네 건강을 위해서 매운 음식을 안 먹는다면 끼니마다 다른 것을 사 먹도록 5위안을 주마.”라고 하면 그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좋아요! 매운 것 안 먹을게요.” 거래가 성사됐고, 그는 약속을 지킨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도록 자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실 돈 때문이다. 돈을 주지 않는다면 그는 약속을 어기고 원래 먹던 대로 매운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이고 돈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태도이며,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것이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냐? 말을 잘 듣기 위한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냐? (아닙니다.) 전부 다 아니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 자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태도는 속이고, 무성의하게 대하고, 거래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심지어는 본래보다 더 심각하다. 아주 딱 맞는 예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예시를 바울과 대조해 본다면 어떤 부분이 서로 비슷하겠느냐? (바울이 복받으려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하고, 헌신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양육하는 이 모든 것을 의의 면류관과 맞바꾸기 위한 조건이자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고생하든, 헌신하든, 열심히 뛰어다니든, 고초를 얼마나 겪든 간에 그의 마음속 유일한 목표는 의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의의 면류관을 얻고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정당한 목적으로 삼았다. 고생하고, 헌신하고,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수단이었다. 그의 그 모든 외적인 좋은 행위는 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외적인 좋은 행위로 최후의 복을 얻으려 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죄이다.

바울의 말과 행동, 그가 드러낸 것, 그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속셈과 목적 그리고 태도를 볼 때 거기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의 안에는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조금도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한 것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반성했느냐?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자기 상상을 평생 추구할 목표로 삼았느냐는 것이다. 그가 설마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을까? 남들은 안 하는 생각을 나만 하는데,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라는 고민은 한 번도 안 해 보았단 말이냐? 그는 이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속 말을 편지로 써서 여러 교회에 보내 모든 사람이 돌려 보게 했다. 이는 어떤 성질이냐?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자기 생각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예수의 말씀에 비춰 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것이냐? 그는 자기가 상상한 것과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는 어떤 문제이냐? 그는 자기가 상상한 것과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고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는 너무나 교만하고 독선적이지 않으냐? 그러고도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었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할 수 있었겠느냐? 만약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겠느냐? 자기도 하나님이 되고 싶지 않았겠느냐? 그게 아니었다면 자기 생각과 관념 속에서 상상한 일을 자기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지 않았을 테고, 자기 관념과 상상 속의 일을 진리로 삼아 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진리이고 진리에 부합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전하고 주입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준수하게 하였으며,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예수의 말씀을 대신하였고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 이것이 바울의 두 번째 죄 아니겠느냐? 바울의 이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하다!

역대로 바울과 비슷한 사람은 많았는데 왜 하필 바울을 전형으로 삼겠느냐? 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황당한 이론과 그릇된 주장, 그리고 그 본인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기에 파괴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미혹하고 해를 입힌 사람이 워낙 많고, 대대로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심하냐? (크리스천 모두가 그를 본보기로 삼아 본받았고, 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며 실행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 말씀을 교제한다면 아무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네가 바울이 한 말을 교제한다면 사람들이 곧바로 귀를 쫑긋 세울 것이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냐?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그리스도로 여기는 것으로, 바울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극악무도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울은 유사 이래 최악의 적그리스도이다! 그가 무슨 속셈으로 말을 했는지 너무나 분명하다. 그의 음험함과 그의 목적이 모두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의 본질은 너무도 음험하고 악독하다. 성질이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콕 집어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하지 않으면 사람이 계속 그에게 미혹될 것이다. 단, 분석하려면 바울이라는 반면교사가 현시대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작용을 하게 해야 한다. 조금 전에 바울의 죄 두 가지를 정리했다. 첫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바울은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을 면류관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삼았고, 복과 면류관 얻는 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여겼습니다.) 맞다. 그러한 것들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본디 패역과 사악한 본성이 깃든 거래였으나 바울은 그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바울은 자기 상상과 관념으로 옳다고 여긴 것들을 진리로 삼고 단 한 번도 반성하거나 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을 미혹하고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준수하게 하고 그의 황당한 이론을 지키게 하였으며 그를 그리스도로 대하게 하였습니다.) 이 항목은 상당히 심각하다. 우선 조목조목 확실히 기록해 두고, 모두 정리한 다음 대조해 봐야 한다. 한 가지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우선 그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그런 다음 대조해야 한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분석하는 것은 모두에게 한편으로는 경고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올바른 길을 선택한 뒤에 정확한 실행 길을 찾아서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된다. 이러면 완벽히 성과를 낸 것이다.

바울은 또 하나의 심각한 죄가 있다. 즉,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지능, 자신의 지식과 문화, 자신의 신학 지식 이론에 근거해 사역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에 관련된 것이다. 너희는 그러한 것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도 정리하고 살펴봐야 한다. 이 역시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어떠한 모습과 연관되는지, 그런 모습에서 보이는 그의 본성 본질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그가 마음 깊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라. 그의 속셈과 목적이 곧 그가 잘못된 길을 걷게 된 근본 원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똑똑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바울은 율법시대의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구약 성경만 있었다. 바울이 성경 문구를 숙독했기 때문에 성경 지식은 매우 해박하다. 마치 지금의 신학 교사나 목사, 설교자, 신부와 같은 레벨이다. 그는 아마 이들보다도 신학 지식이 더 풍부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후천적으로 익힌 것들이다. 바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은 무엇이냐? (자질입니다.) 바울은 태생적으로 총명하고, 언변이 좋아 말을 잘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두려움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타고난 자질, 은사, 총명, 재능과 지혜, 그리고 후천적으로 익힌 지식을 중점적으로 얘기해 보자. 그의 뛰어난 말솜씨는 무엇을 뜻하느냐? 그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 어떤 태도를 지녔느냐? 그는 과장해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고상한 영적 도리와 이론, 지식, 그리고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바울이 한 말의 성질을 한 단어로 뭐라고 개괄할 수 있느냐? (‘공허’입니다.) 공허한 말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처음 들을 때는 강력한 느낌을 받지만, 그런 힘은 이내 사라진다. 보아라. 바울이 말한 것들은 헛되고 실속이 없다. 다시 말해,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너는 그가 말한 이론 속에서 실행의 길과 실행 방향을 하나도 찾지 못할 것이며, 네가 현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정확한 무언가를 찾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이론이든, 근거든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가 말한 종교 이론과 영적 도리는 전부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런 것을 말한 목적은 무엇이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항상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많이 농락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한 후 사람을 많이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얻으면 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맞느냐? (아닙니다.)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은사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있기에 그렇게 자신을 뽐낼 수 있었는데, 그와 같은 행위와 태도가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는 이를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궁하려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가 지닌 문제의 본질이고, 그런 일을 저지른 근본 원인과 동기다. 무엇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모든 것, 즉 지금 봤을 때 도리, 논조, 신학 지식이든, 그의 타고난 은사든 혹은 그 자신이 이해한 것이든, 종합적으로 봤을 때 바울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그 모든 것들을 진리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그런 신학 이론을 이용해 사람들을 농락하고 가르쳤다.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그는 어떤 것들을 진리로 간주했느냐? 하나는 그의 타고난 은사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배운 지식과 신학 이론이 있다. 신학 이론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거나 성경 문구를 읽어 얻은 것이고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상상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뜻으로 이해한 그런 관념과 상상을 모두 진리로 간주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다 진리로 간주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이런 것들이 진리라고 생각했겠느냐? 그에게 진리에 대한 개념이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것들을 무엇으로 간주했겠느냐? (생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수준 높은 설교를 많이 할수록 생명도 그만큼 커진다고 여겼다. 그가 그런 것들을 생명으로 간주한 일은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에 영향을 주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는 길에 영향을 줍니다.) 그것이 한 측면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그는 그런 것이 있으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복을 받는 것과 관계된다. 그는 생명이 커지는 만큼 천국에 들어가고 천당에 올라갈 자신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천당에 올라가는 데에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는 것입니다.) 바울이 천국에 들어가려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 가지 더 있다. 이것은 그의 말 속에서 드러났다. 어떤 말이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는 말입니다.) 그가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 그 말은 어떤 의미겠느냐? 죽으면 하나님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냐? 이 얼마나 커다란 야심이냐! 이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 그럼 우리가 바울에 대해 분석한 것이 잘못된 일이겠느냐?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바울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의 은사와 후천적으로 배운 지식을 생명으로 여기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큰 죄다. 바울의 세 가지 죄에서 모두 그의 본성 본질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죄에서 그의 본성 본질의 특징이 조금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고, 모두 그의 본성 본질을 대표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의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대표적인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바울이 서신에 자주 사용했던 관용어가 무엇이냐? 성경 원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찾아보아라. 함께 분석하고 해부하면서 바울이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하나님은 왜 그를 혐오하고 증오했는지 살펴보자. 바울처럼 유명한 인물이, 초대 교회의 사역에 그토록 크게 공헌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최후에는 벌받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냐?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바울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보는지, 하나님이 왜 바울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고 결론을 내렸는지, 하나님이 마지막에 바울의 성질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런 결말을 내린 근거는 무엇인지, 이 몇 가지를 열거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을 대적한 사실을 보여 주고, 사람들이 그가 까닭 없이 정죄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겠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겉만 보고 남을 정의 내리기 쉽다. 겉만 보고 정의 내릴 때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이냐? 한 측면으로는 전통문화와 사회 교육을 들 수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가정 교육, 그리고 시시비비와 흑백에 대한 이념 및 개념이 있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학교 교육이 있다. 이것이 사탄의 전반적인 교육 체계이다. 사탄이 이러한 것들을 주입한 결과 사람은 자기 관념과 기호에 따라 이게 좋고 저게 나쁘다, 이게 맞고 저게 틀리다 하는 식으로 무언가의 성질을 규정하게 됐다. 사람이 이렇게 성질을 규정할 때마다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사실 사탄의 이론과 철학을 근거로 한다. 사람의 이러한 근거들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패괴된 인류가 한 사람 혹은 한 가지 사물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건 전부 틀린 것이며, 전부 진리와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진리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 사물의 발현이요, 모든 긍정적 사물의 실제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사람이 접촉 가능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는 진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 그 사람의 본성 본질, 그 사람이 일하는 출발점과 가는 길, 그리고 긍정적 사물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런 것에 근거해 정한다. 하나님이 만사 만물에 대해 결론을 내린 결과가 진리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사탄은 만사 만물의 성질을 규정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사탄의 철학과 논리를 근거로 한다. 진리와는 딱 반대되는 것이다. 인류는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으므로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다. 사람은 사탄을 대변하며, 사탄의 화신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성질을 규정하는 근거는 사탄의 철학과 논리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모든 것의 성질을 규정한 결과는 무엇이냐? 그 결과는 정확히 진리에 맞서는 것이요, 진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바울이 서신에서 자주 쓰던 관용어를 찾았느냐? 읽어 보아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입니다.) 보아라. 바울이 매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순위는 이러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바울의 순위는 몇 번째이냐? (세 번째입니다.) 그의 마음속 1위는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세 번째는? (바울 자신입니다.) 바로 그 사람 본인이자 그 자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이 말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 하늘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인자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이라 칭하든, 주라 칭하든 그는 땅의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고 인간이 따를 수 있는 일개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도의 역할은 무엇이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순방하며 설교하고 서신을 쓰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뜻은 바로 ‘당신이 가지 못했던 곳은 내가 대신 가고, 당신이 가기 원치 않는 곳은 내가 대신 가서 살펴본다.’라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도는 바로 이런 개념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정한 서열은 바로 자신도 보통 사람이고, 예수 역시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와 예수 그리스도는 지위가 대등한 인류로, 본질적으로 지위와 신분상의 차이가 없고, 직분상의 차이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이름과 나이, 가정 환경 배경이 다르고 외적인 은사나 지식에 격차가 존재할 뿐, 나머지는 바울이 생각하기에 그 자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둘 다 인자라 칭할 수 있지만, 단지 현재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권력을 행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아 교회를 순방하며 교회 사역을 하는 바람에 예수에 버금갈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생각한 사도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이다. 그는 그렇게 이해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중 “부르심을 입은”이라고 한 말에서 바울의 마음 자세를 알 수 있다. 그가 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을 썼겠느냐?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나한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할 권력이 없다. 나는 예수의 명령을 따르거나 예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같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중이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다 똑같은 인자라고 생각했다. “부르심을 입은”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그의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 주었고, 그를 하나님이 정하고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심각하겠느냐?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예수의 부름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라고 명령할 권력이나 자격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없고 오직 하늘의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하늘의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늘의 하나님이 첫째고, 자신이 둘째라는 의미다. 그는 예수를 어떤 위치에 두었느냐? (그와 동등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그는 입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임을 몰랐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이 관계를 몰랐다는 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느냐? (그는 예수님이 성육신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맞다. 그것이 아주 심각한 부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육신이고,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부인했다. 그럼 여기에 숨은 뜻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인했는데 예수의 말씀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의 가르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가장 심각한 부분이냐? 2천 년 전에 예수는 이 땅에 와서 가장 큰 사역, 즉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을 하였다. 성육신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전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 이 사역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그것은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으로, 하나님 자신이 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울에게서 강하게 부정당했다. 그는 예수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 자신이 한 사역임을 부인했고, 하나님이 이미 구속 사역을 이룬 이 사실을 부인했다.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니냐? 너무나 심각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에 대해 그는 구하면서 알아 가기는커녕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전 인류를 구속한 사실도, 하나님이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된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인류 전체가 하나님이 역사한 후 이미 구속되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여겼고, 예수가 인류를 구속한 그 사실이 그에게는 인정되지 않고 전부 말살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다. 앞서 바울을 가리켜 2천 년 이래 가장 큰 적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 사실은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들이 없이 하나님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한 적그리스도였다고 말한다면 사람이 믿을 수 있겠느냐?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그런 서신들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고, 그런 서신이 있다는 사실적 증거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신빙성 없는 발언이 되고, 너희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바울이 했던 그 말을 다시 살펴보아라. 예수가 했던 그 많은 말이 바울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느냐? 예수가 한 그런 말들을 바울은 그 자신의 종교적 도리만도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예수가 떠나고 난 뒤 바울이 전도하고 사역하고 설교하고 교회를 목양했지만, 한 번도 예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거나 체험하지도 않았다. 그가 전한 것은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의 말로,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빈말이다. 지난 2천 년간 주를 믿는 사람은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바울의 그 공허한 이론을 받아들이다 보니 결국 그에게 2천 년간 기만당했다. 지금 네가 교계에 가서 바울이 틀렸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항의할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이요, 그들 종교의 창시자이고, 그들은 바울의 충실한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미혹되었느냐? 그들은 이미 바울과 같은 편에 서서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똑같은 관점과 본성 본질을 갖고 있고, 똑같은 방법으로 추구하며, 철저하게 바울에게 동화되었다. 이것이 바울의 네 번째 큰 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율법시대 이후에 한 은혜시대의 사역을 부인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부류라고 보았다. 이것 역시 무척 심각하다. 바울은 그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다. 즉, 인류의 일원으로, 패괴된 인류와 같은 본성 본질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랬던 것이냐?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화신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사실 그가 믿은 것은 하늘 위의 막연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가 곧 진리이고 생명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말해 보아라.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고 예수님을 대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두 사실에 부합하는 말이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과 죄는 그 심각함이 점입가경이다.

바울이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대단한 말이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라는 말을 썼다. 일반적으로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쓴 것도 대단한데, 누가 감히 ‘의’라는 수식어로 면류관을 정의할 수 있겠느냐? 유독 바울만이 이런 말을 썼다. 왜 그는 그런 말을 썼겠느냐? 이 말은 출처가 있는 말이고, 아무렇게나 쓴 말이 아니다. 그가 한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뜻은 무엇이냐? (그런 말로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협박은 한 측면이다. 분명 거래하려는 의도가 있고, 하나님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성질을 띠고 있다. 또한, 그가 늘 의의 면류관을 전파한 것에는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만약 바울이 면류관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고 사람들이 오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동하고 미혹하는 성질을 띠고 있는데, 이는 바울의 야심 욕망과 관련이 있다. 그는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을 얻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일종의 수단을 썼다. 바로 곳곳에서 전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전한 목적이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하기 위한 것이다. 즉, 청중들에게 ‘나처럼 헌신하고 길을 달리고, 내 방식처럼 추구하면 의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라는 일종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듣고 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면류관을 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라고 당연히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듣는 대신, 바울처럼 추구하고 길을 달리고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바울이 곧 본보기이자 주님이고, 사람이 가야 할 방향과 목표이니 그를 따라 하면 그와 같은 면류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그에게는 가장 악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그 면류관을 얻지 못하고, 그것이 나 혼자 상상하고 일방적으로 바란 것에 그친다면, 나를 비롯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가 잘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땅의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 존재도 부인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시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내가 그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형제자매들이 당신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당신은 내가 선동한 사람들, 내가 한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신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겠습니다. 당신은 의롭지 않습니다. 나 바울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악독한 면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행위가 아니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악마의 행위다. 즉, 선동하고 미혹하고 현혹하며,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하는 것이다. 바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아. 내가 면류관을 얻는다면 그 면류관이 바로 의의 면류관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진정한 공의야.’ 그가 말한 ‘의의 면류관’이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선동하고 미혹하는 동시에 이런 방법을 통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반역이라고 한다. 이런 행위의 성질은 무엇이냐? 그가 한 말은 표면적으로 볼 때 품위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주 정당해 보인다. 의의 면류관을 얻고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두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별 자질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 천당에 가려는 목적이 있다. 설령 청소부나 문지기가 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속내와 목적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고, 이해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 그는 그 일에서 무척 많은 노력과 공을 들였고 또 많은 방책을 꾀하였다. 바울이 한 그런 말들을 통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남들이 모르는 어두운 부분과 악독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애초에 바울은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공허한 이론들을 전파했다. 또한 자기 관념과 상상, 그리고 지식을 통해 배우고 머리로 추론해 낸 것들을 전파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것들을 전파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그들 마음속에 얼마나 큰 해악을 가져다주었겠느냐! 또한, 그의 서신을 통해 그릇된 깨달음을 얻을 후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의 그런 말을 읽은 사람들은 너무 깊이 중독된 나머지 오랜 시간 그런 것을 없애 버리지 못한다! 얼마큼 깊이 중독되었겠느냐? ‘바울 효과’라는 현상도 생겨났다. ‘바울 효과’란 어떤 것이냐? 종교에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는 것은 사람들이 바울의 그런 사상과 관점, 논조, 그리고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특히 집안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 온 크리스천 가문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주님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세속을 떠나 집과 생업도 버린 채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죠. 우리가 한 모든 일은 바울이 행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면류관을 얻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께 따져 묻겠습니다.” 이런 논조가 없느냐?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기풍의 기세가 약하지 않다. 이 기풍은 어떻게 생겼느냐? (바울의 전파로 생겼습니다.) 바로 바울이 심은 악성 종양에서 생겨난 나쁜 결과다. 바울이 이렇게 선동하지 않았다면, 자꾸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람은 그 시대의 배경이 없어 애초에 그런 일을 몰랐을 것이다. 설사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그렇게 행할 담력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바울이 부추기고 선동한 것이다.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감히 주께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또 셋째 하늘에 가서 예수를 고발하려 할 것이다. 이는 종교계가 예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종교계가 바울의 영향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바울의 다섯 번째 죄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이 말한 ‘의의 면류관’의 이유를 도출해 볼 때 여기의 계책은 ‘의’란 단어에 있다. 바울이 왜 ‘의’란 말을 입에 담았겠느냐? 땅에서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하나님 선민들을 선동하고 미혹하며, 하늘에서는 ‘의’를 들먹이며 하나님을 협박하고 하나님께 큰소리치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비록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큰소리치는 목적과 기세가 그 단어에 낱낱이 드러나 공개되었다. 이는 다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간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바울의 본성 본질을 개괄할 수 있겠느냐? (개괄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지금 이 사실들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그 성질을 정하면 바울의 본성 본질을 더 분명하고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실에 근거해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이루는 효과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큰소리친 것은 뒤에서 기분이 좀 언짢거나 패역한 성품을 좀 드러내거나 불순종한 것이 아니다. 이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서신이나 공공장소에서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모든 사람이 들고일어나 분개하며 다 함께 하나님께 대항하고 큰소리치도록 선동하고 미혹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바울은 혼자서만 하나님께 큰소리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선동했다. 이것은 교만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같은 행동이다! 지금 언급하는 죄는 앞에서 언급한 죄보다 더 심각하다. 언급할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부하는 것이 어떠냐? (좋습니다.) 왜 좋으냐? (바울에 대해 더욱 분별력이 생깁니다.) 네가 분별력이 생기면 바울의 각종 태도, 패괴 표출, 진면목을 철저히 파헤쳐 똑똑히 알 수 있다. 그것으로 목적을 이루었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도출해 낸 모든 태도와 그것의 핵심 내용, 주제, 본질을 너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과 대조해 보고, 자신이 가는 길과 자신의 본질이 바울과 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히 알면 완전히 결실을 거두고, 우리가 바울을 해부한 목적도 이루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바울이 의의 면류관을 추구한 것과 같은 태도는 저에게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너에게 그런 태도나 본질이 심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그 본질이 약간은 있을 것이다. 바울에게 그런 태도가 있다면 너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보이는 태도가 10이나 12라고 한다면 너는 얼마나 되느냐? (7이나 8쯤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그런 상태를 드러내고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너는 항상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주 그런 상태를 드러낸다. 네 평생에서 아마 절반의 시간은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내적 상태로 지냈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하나님 사역이 너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이 너를 책망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한 환경이 네 뜻과 다를 때 너는 그런 내적 상태가 생길 것이고,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할 것이다. 그럴 때는 우리가 지금 바울이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한 행동을 분석한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왜 도움이 되겠느냐? 네가 지금 마음속으로 바울의 그런 행동의 성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드러난 패괴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마의 본성 본질이었다. 너에게 그런 내적 상태가 생겼을 때 너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아차리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야 할 참된 길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할 법칙이다. 이렇게 교제하면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