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란 찬양에 관한 교제 (제 2 부)

이제 <사랑 때문에>라는 노래의 두 번째 단락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말세에 다시 성육신해 큰 붉은 용 나라에 오셨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커야 하느냐? 너는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치욕을 견디며 중대한 일을 짊어지게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여 큰 붉은 용 나라에 와서 온갖 굴욕을 겪게 하였다. 이 생각이 옳은 것이냐? 하나님이 단지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하겠느냐? 너는 좋은 일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 속에 한 가지 본질이 있다. 바로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병이 발현된 것인데 어찌 사랑 때문이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패괴된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큰 굴욕을 겪으면서까지 큰 붉은 용 나라에 올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사람은 개미만도 못하고, 구더기만도 못하다.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다. 네 뜻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계속해서 굴욕을 견디고 사탄의 박해를 참으며 이 패괴된 인류에게 계속 그의 사랑을 바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냐? 너무도 황당무계한 생각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돌아와 큰 붉은 용 나라에 왔든, 아니면 다른 어떤 사역을 하든 그건 그의 사역 절차다. 사역 절차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역을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겠느냐?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그의 경륜에서 구원하려는 대상이 바로 패괴된 인류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패괴된 인류는 국가와 종족을 막론하고 그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사역 대상이자 부각물일 뿐이다. 일개 부각물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겠느냐?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고, 그렇게 위치를 정립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게 경륜이 있기 때문에, 또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하여 이루고자 하는 사실 때문에 네가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유업으로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큰 복이다. 그런데 네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이렇게 유도하는 것은 잘못이며, 순전히 헛소리다.

또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버림과 비방 참으며 온갖 핍박과 환난의 고통 겪으시네.” 이것이 옳은 말이냐? 하나님이 버림과 비방을 참으며 온갖 핍박과 환난의 고통을 겪었다. 무엇을 참았든 간에 하나님 마음속의 생각과 바람,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그의 경륜 실현이다. 하나님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모두를 행하는 것은 인류를 위해 바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적대하며 원수로 여기는 이 패괴된 인류를 위해 사랑을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자신의 모두를 바치는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사역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버림과 비방, 환난을 참으시는 것이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실 가치가 없겠군요.” 이것이 옳은 말이냐? (아닙니다.) 왜 옳지 않으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이런 사역을 하지만, 사실 사람은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뿐이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을 위해 버림과 비방을 참으며 온갖 핍박과 환난을 겪었는데, 이 사실과 이 일이 긍정적인 사물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이냐?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경륜을 위해 버림과 비방을 참으며 온갖 굴욕을 겪은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다. 어째서 이것을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하는지 너희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경륜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사탄을 물리치고, 사람을 인도하여 사탄의 결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사탄을 물리치겠느냐?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겠느냐? 구체적인 사역 항목은 무엇이겠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호하지 않겠지? 사탄을 물리치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포함된 구체적인 내용, 즉 하나님의 사역에 포함된 구체적인 항목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인류 구원이라는 이 일을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면 정의로운 사업이냐, 정의롭지 못한 사업이냐? (정의로운 사업입니다.) 이는 정의로운 사업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버림과 비방을 참고 온갖 고통과 굴욕을 겪는 것이 잘못이냐?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냐? 이것이 이기적인 것이냐?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째서 분명히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토록 명백하고 뚜렷한 일을 너희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아무렇게나 규정한다. 이것은 너무 어리석고 무지한 것 아니냐? 하나님이 경륜 사역을 하는 것은 아주 큰 항목이고, 그 구체적인 항목 안에 있는 세부 사항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자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이것이 이기적인 것이냐? (아닙니다.) 어째서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이 일을 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고 의미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인류 전체의 생존과 종착지, 결말, 생존 상태에 너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자신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아름다우며 참된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행하는 이 일과 하나님이 계획한 이 일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인류가 타락하고 사탄을 따르며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 차 있고, 또 하나님에 대한 거역, 대적, 모독, 적대시함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귀찮게 여기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이 인류를 구원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경륜에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이기적인 것이냐? 인류는 하나님의 전체 경륜 중 가장 큰 수혜자이자 최종적인 수혜자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준 약속과 축복, 좋은 종착지를 유일하게 이어받는 자이자 상속받는 자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이기적이냐?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단지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 아주 깊은 의미와 가치,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진리가 담겨 있는데 어찌 고작 사랑 때문이겠느냐? 사랑은 감정의 작은 한 부분이 표현된 것일 뿐이고, 정서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발현된 일부분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경륜 사역을 펼치고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전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비와 긍휼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외에도 공의, 위엄, 진노, 저주 등 많은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세 단계 사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성품 본질을 차츰 발현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만,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왜 이렇게 어색하고 역겨운 것이냐? 하나님의 이토록 의미 있는 사역, 또 인류의 종착지와 결말에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역을 사랑이라는 작디작은 감정 하나로 규정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헐뜯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고심을 헐뜯는 것이 아니겠느냐?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감춰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시네.” 그는 이 역시도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사랑 때문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해서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사람을 사랑해서 자신을 낮추고 감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인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얼마나 사랑스럽기에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고 또 기꺼이 원해서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또 성육신해서 자신을 낮추고 감추기까지 해야 한단 말이냐? 이것이 사실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자신을 낮추고 감춰 인간 세상에 오신 뒤 진리를 선포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춰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매우 기뻐하고 윤택하게 지내며, 날마다 매우 즐겁고 인류의 일거수일투족과 인류가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런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실은 무엇이냐?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론이다. 사실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기쁘겠느냐? 행복하겠느냐? 즐겁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느낌이겠느냐? 예를 들어,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서 자신이 무척 올바르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를 무직 청년이나 불량배, 암흑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고 날마다 그들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일을 하게 한다면 너희 기분이 어떻겠느냐? (싫은 마음과 반감이 들 것입니다.) 너를 그 강간범, 살인범들과 함께 있게 하면 너희 기분이 어떻겠느냐? (역겨울 것입니다.) 너희가 역겨워할 줄도 아는구나. 그러면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 행복하겠느냐? 기쁘겠느냐?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행복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데 사랑이 어디서 나오겠느냐? 조금도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은데 자신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고 몹시 아낀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니겠느냐? 위장하는 것 아니겠느냐? 사실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데 그 외에 진정으로 드는 기분은 무엇이겠느냐? (고통입니다.) 고통은 확실한 느낌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혐오감입니다.) 혐오감도 역시 느낌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에 대한 증오입니다.) 증오, 반감, 혐오이다. 그 외에도 가장 진실한 느낌이 있다. 즉,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고, 특히 함께 지내고 대화하고 함께 일하고 왕래하면서 엄청난 굴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정상 상태에서 정상적인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멀리할 것입니다.) 멀리하는 것은 소망이고 마음가짐이다. 사실을 직시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이들을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인류에 대해 공급하고 교육하고 꾸짖고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해야 하며, 때로는 징계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필요하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오랜 기간에 걸쳐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하는 사역을 하기가 쉽겠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참아야 하겠느냐? (굴욕과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크나큰 인내심을 가지고 사역한다. 이런 인내에 무엇이 수반되겠느냐?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 마음에 기쁨도 행복감도 없다.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데 마음속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겠느냐? 사랑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사역을 하겠느냐? 무엇에 의지해 하겠느냐? 바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직분이며 본질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보고, 알고, 말해야 하고, 해야 하는 것들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책임을 다하겠느냐?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때문이고, 또 하나님의 성육신에 이런 부탁과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인류에게 이런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든, 어떤 패괴된 인류와 함께 생활하든 상태는 모두 이렇다.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느냐? 행복하지 않고 기쁘지도 않고 굴욕을 참아야 할 뿐 아니라 귀찮게 여기지 않고 반복해서 사람의 각종 패괴와 패역을 참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참는 동시에 귀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설명해 주어야 하고, 또 사람이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면 징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사역 절차와도 관계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구체적인 사역 항목과는 더더욱 관계가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자신의 책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발현하는 것은 그의 본질이자 성품이다. 그러면 성육신의 본질, 즉 이 보통 사람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특히 말세의 이 사역을 하면서 그는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고 어떤 남다른 능력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갖춰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모든 진리를 사람에게 알려 주고, 사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패괴 성품을 폭로해 사람들이 알고 인식하게 하며, 인류의 패괴된 본질과 패괴된 참모습을 인식하여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게 하고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으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고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그러면 성육신의 사역과 책임도 다하게 된다. 사람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면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성육신 사역은 끝이 난다. 책임을 다하고 사역도 끝나는 것이다. 성육신 사역이 끝나고 너희를 정상 궤도로 인도하게 되면 이는 그의 직분이 완성되어 너희에 대한 그 어떤 의무도 없다는 뜻이다. 아무런 의무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더 이상 이들과 함께 있을 필요가 없고, 이들의 패괴, 관념, 거역, 대적, 버림 등 이런 일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보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구체적으로 하는 어느 항목의 사역을 보든 그저 사랑 때문인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단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 인류를 보는 관점이 어떠하다면,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땅에서 인류를 보는 관점도 거의 같다. 어째서 ‘거의’라고 하겠느냐? 땅에서 성육신한 하나님이 인류를 보면 상대적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다. 그에게 인성이 있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류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또 패괴된 인류와 똑같이 사람이라는 외적 속성 때문에 성육신과 사람이 함께 생활하면 하늘의 하나님에 비해 조금 더 융화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약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더라면 너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며 이 사역을 하고 그것도 친히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에게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면, 한편으로는 공간적인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가 불편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말세에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말씀을 하는데 하늘에서 이렇게 말씀한다면 어떤 면으로 보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유일하고도 가장 좋은 선택이면서 또 인류에게도 가장 이롭고 하나님의 경륜과 인류 구원의 사역에도 가장 이로운 방법이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유일한 선택이자 유일한 사역 방식이다. 성육신만이 이런 사역을 할 수 있고, 이런 사역을 감당할 능력이 있으며, 이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말세에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을 보아라. 분량으로 볼 때 이렇게 성육신 방식으로 행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하늘에서 천둥 치는 방식으로 말씀한다면, 매번 악인을 심판하고 정죄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어야 하겠느냐? 몇 명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말씀하고 불길 속에서 말씀한다면, 얼마나 많은 회오리바람과 불길을 일으켜야 이런 말씀을 다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인류 전체가 방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성육신이 몇 년 동안 이런 말씀을 하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친 적이 있었느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게다가 전 세계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것은 성육신 사역의 목적을 완전히 이룬 것이다. 성육신이 아니라면 이 사역은 확실히 할 수가 없다. 성육신 사역 자체에 은밀성이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류 전체가 알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이 아예 선택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은밀한 상태에서 이런 말씀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육신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다. 성육신해야만 이렇게 은밀할 수 있다. 성육신이 인류와 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인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인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형식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이다. 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인류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경륜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이렇게 큰 경륜을 그저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단순하고 사실에 위배되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요컨대,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한 것은 사역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이 형식으로 볼 때 전 세계와 전 인류를 크게 뒤흔들었고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만 보아도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 수 있다. 성육신이라는 사실과 이 형식으로 볼 때, 그 자체로 전 세계와 온 교계에 논쟁을 일으키는 일이다. 또 인류가 적대시하는 일이고, 인류에게 정죄되고 버림받는 일이며, 인류가 가장 예측하기 어렵고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전능, 권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 알량한 사랑 때문도 아니고, 눈곱만한 일이나 사소한 이유 때문도 아니다. 다시 말해, 온 교계와 정치계, 전 인류, 심지어 우주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일이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경륜, 소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단계 사역에서 가장 큰 이상이며, 사람이 알아야 하고 인식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가장 큰 이상이다. 만약 네가 이 이상을 그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를 한 번 사랑하셨는데 이번에 또 성육신으로 우리를 또 한 번 사랑하려고 오셨습니다.”라고 규정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이렇게 큰 사역 이상을 사랑 때문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너무 얄팍하다. 네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걸로 됐다. 얼른 입을 틀어막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함부로 관점을 떠벌이지도 마라. 내가 예전에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하나님 사역 측면의 이상에 관계된 일은 사람이 제멋대로 판단해서도 안 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되고, 제멋대로 규정해서도 안 되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조금 깨달았으면 얼른 “제가 이 정도는 깨달았지만 감히 함부로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옳은지 틀린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여 뒤에 주석과 주해를 달아야 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함부로 말할 경우, 작게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에게 착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으며, 크게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를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이 거대한 사역의 성질을 사랑으로 규정하고, 사랑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고 성질을 규정한다면 이것은 허튼소리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따귀를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따귀를 맞아야 하느냐? 이것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고, 전체 가운데 일부만 취해서 제멋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만한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며칠이나 믿었느냐? 네가 하나님을 보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느냐? 네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상 측면의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규정하는데, 이것은 간덩이가 부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큰 일을 네가 감히 ‘사랑’이라는 말로 규정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은 커다란 과오가 아니냐? 이것은 커다란 과오다. 어떤 이들은 “저도 모릅니다. 저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르기 때문에, 네가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너 같은 보통 사람이 제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느냐? 인류 전체가 모두 모여 똘똘 뭉쳐도 하나님의 일을 분명히 말할 수가 없는데, 너 혼자 몇 마디 말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하나님의 본질을 규정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노래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허튼소리이고 공허한 말이고 주제넘는 말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할 수 있고, 또 사람을 관념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남겨 둬도 되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으며,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진리 선포해 영원한 생명의 도를 가져다주셨네.” 이런 말로 규정하는 것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계속 읽어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류의 사탄 본성 심판하고 밝히시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엄한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면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기 때문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증오하시고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증오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냐? (공의로움과 거룩함입니다.) 그렇다. 사랑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위치 정립이고,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에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담겨 있느냐?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단편적인 인식이자 잘못되고 치우친 해석이다. 이 말은 성질을 잘못 규정했다. 다음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로 우리의 패괴 성품 정결케 하시네.” 이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은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동일한 문제다. 다음을 보자. “하나님, 당신의 사역과 말씀에서 나타난 것은 전부 사랑.” 이것도 역시 규정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발현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거룩함, 사랑스러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하나님에게는 진노와 위엄도 있고, 긍휼과 자비도 있는데 어떻게 전부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너무 역겹고 독단적이다! 이것은 교만함으로 초래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가 해석하고 요약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 음성을 발하며 발현한 성품 본질과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전부 사랑’이라고 했다.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치고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을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사랑은 일종의 감정이고, 동작과 행동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주된 본질은 아니다. 하나님은 함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나고 사랑을 베풀 곳이 없어서 사탄과 패괴된 인류, 원수까지도 사랑하겠느냐? 그렇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원칙 없는 사랑이 아니라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부정적인 사물과 사악한 사물을 증오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며 마음속으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증오하면 사람의 이 ‘증오’는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사랑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으면 그는 더더욱 긍정적인 사람이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하고, 마귀 사탄을 증오하며, 악인을 저주하고 징벌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원칙 없는 사랑이 아니라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긍휼히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을 분명히 알아야지 하나님의 사랑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함부로 말하고 제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하는 일이다.

다음을 보자. “하나님, 당신의 사랑은 자비와 긍휼, 더욱이 형벌과 심판.” 이것이 옳은 말이냐? (이론적으로는 옳지만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 짓는 것은 너무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옳은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은 헛소리이며, 네가 말할 필요가 없다. 다음을 보자. “하나님, 당신의 심판과 형벌은 가장 진실한 사랑, 가장 큰 구원.” 이 말이 어떤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가장 큰 구원으로 규정했습니다. 사실 심판과 형벌만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 전체를 위해 속죄하고 온 인류의 죄를 짊어졌다. 이것은 가장 진실한 사랑이 아니냐? 가장 큰 구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심판이나 형벌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가장 큰’ 것이냐? 사실 엄격하게 분석한다면 이 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너무 생뚱맞게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모두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사람에게 구원이자 긍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이라는 말을 붙여 그것을 제일 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가장’이라는 말은 유일한 것이어서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하나님이 행하는 다른 사역과 비교할 때 ‘가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노래를 지었는데 이런 가사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사랑하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보다 더 사랑하네.”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린 말입니다.) 왜 틀린 말이냐?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거룩함, 자비와 긍휼을 등급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고 나서 생긴 진실한 체험이다. 이 진실한 체험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느냐? 여기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누리면 은혜를 받기만 할 뿐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 영원히 인식할 수 없고 패괴 성품을 영원히 벗어 버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겪고 숱한 시련과 연단의 고통을 받아야만 이 패괴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바탕 위에서, 또 이런 배경에서 사람에게 이런 인식이 생긴 것은 정확한 것이고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논리가 아니다. 이 노래는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데도 너희가 알아보지 못하니 정말로 분별력이 없구나.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분별력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랑 때문에>라는 노래는 전부 헛소리이고 실제적이지 않다. 나는 이 노래를 싫어하고 한 구절도 부르지 않는다. 너희는 아주 흥이 나서 목청 높여 술술 부르니 너희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 것이냐! 너희는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진리도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의 본질과 경륜에 대해 평론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비이성적인 사람이 감히 함부로 말하다니 이는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실효성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또 다음을 보자. “우리는 당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사랑을 증거하리. 당신은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하다. 이것은 물론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는데도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분량이 조금 있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조금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사랑을 증거하리. 당신은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네.”라고 한 이 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수식하고 있는 말이 무엇이냐? ‘거룩하고 공의로운’이다. 이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아라. 하나님의 본질로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롭고 거룩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를 네가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평범한 사랑은 누리고 싶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보호도 누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사랑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이냐? 사실로 보든, 논리적인 추리로 보든 크게 틀린 말이고, 온통 헛소리다. 이것은 정신병자가 제멋대로 단어를 가져다 붙여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너는 여기가 세상이라고 생각하느냐? 세상의 온갖 악령과 더러운 귀신, 온갖 사람들과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란만 일으키는 소인배들, 또 수완이 조금 있는 자들, 말재주가 있는 자들, 얼굴이 두꺼운 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다. 이 작은 귀신들은 모두 무대에서 밀어내야 하고 교회에서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그들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를 샅샅이 분석해 모든 이들이 공개적으로 분별하고 그들의 성질을 규정하게 해야 한다. 지금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 공의롭고 거룩하다고 한다면 맞는 말이겠느냐?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작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냐? (심판과 형벌, 위엄과 진노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본질은 곧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안에 있고, 하나님의 감정 속에 있고,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고, 하나님의 행사 가운데 있다. 네가 분명히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공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하고 감히 이렇게 규정하다니 네 간덩이가 너무 크구나! 네가 이렇게 규정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이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겨워한다. 너의 그 말은 허튼소리이고 온통 헛소리뿐이다! 네가 제멋대로 찬양하는 것은 쓸모도 없고, 하나님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인류의 찬양이 별로 필요치 않고, 하나님은 그런 욕망도 없다. 사람이 찬양해 주어야만 하나님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힘이 솟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에게 필요가 있겠느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아름다운 종착지를 주려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인류의 생존을 위해 사역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목적이 사람의 찬양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는 성과 가운데 인류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제멋대로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람이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찬양이 하나님에게 몹시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은 황당한 해석이 아니냐? 인류는 하나님을 고작 그 정도로 찬양하고, 고작 그 정도로 증거하면서 하나님이 몹시 감동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당연히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다음을 보자.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과 사물 움직여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 얻게 하시네.”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린 말입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앞에 있는 ‘사랑 때문에’라는 다섯 글자 때문이 아니냐? 모든 것은 앞에 있는 다섯 글자 때문이다. 이 다섯 글자가 사람을 심하게 오도하고 미혹하며,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앞으로는 ‘사랑 때문에’라는 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이 다섯 글자 뒤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람과 사물 움직여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 얻게 하시네.”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것의 성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병, 지혜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동원해 그가 구원하려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만사와 만물을 동원해 그가 구원하려는 인류와 그의 경영 사역을 위해 봉사하게 하는데 그 최종적인 수혜자는 인류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게 되니 말이다. 만약 네가 사랑 때문이라고만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혜, 권병,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사랑 때문이라고만 하면 틀린 말이므로 이 말이 가리키는 방향도, 위치 정립도 모두 잘못됐다. 무엇을 두고 모두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겠느냐?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말하는 것은 진리 실제가 아니고, 사람이 체험하는 진리의 실제적인 측면이 아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