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제 6 부
사교성이 좋은 것과 사교성이 부족한 것
사교성이 좋은 것은 어떤 측면이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이는 선천적인 조건으로, 사람이 인간 사회에서 처세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어떤 이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귀찮아하지 않고 좋아하며, 어떤 성격의 사람과도 어울릴 수 있고 어울리려 한다. 반면 어떤 이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하고, 남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이는 타고난 성격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성격과 관련되니, 당연히 선천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다. 사교성이 좋은 것은 사람의 성격과 관계가 있을 뿐, 인성의 장단점과도, 당연히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다. 이것은 꽤 간단하다. 그럼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어떤 측면이냐? (타고난 성격입니다.)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 문제는 의견이 갈리는데, 그렇다면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도대체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성격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은 인성의 결함이며, 성격 자체도 선천적인 조건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기도 하고 인성의 결함이기도 하다. 이는 패괴 성품에 속하지 않으며, 사람됨과도 관련이 없다.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늘 사람들을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를 꺼리며, 혼자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도 싫어하고, 오직 고립된 환경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많을 때는 말하기를 꺼리고 남과의 교류에도 서툴며, 사람들과 교류할 때는 불안해하고 공황 상태가 되거나 난처하고 어색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선천적인 조건 중 성격의 문제이며, 물론 인성의 결함과도 관련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겁이 많은 것과 대담한 것
이제 겁이 많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는 선천적인 조건이자 인성의 결함이다. 무엇을 가리켜 겁이 많다고 하겠느냐?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못하고, 쥐와 지네, 전갈을 무서워하며,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고 복잡한 일을 마주하기를 꺼리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겁이 많은 모습이다. 혹자는 뱀만 보고도 놀라 기절하고, 혹자는 어디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만 들어도 놀라서 온몸을 떨며, 혹자는 하나님을 믿으면 박해받고 잡혀가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겁에 질려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또 혹자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간파하지 못하거나 해 보지 않은 일은 참여하지도 시도해 볼 엄두를 내지도 못한다. 그는 위험한 일이나 활동만 시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평소 정상인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라고 하면 그는 “저는 운전할 용기가 안 납니다. 길에 차가 너무 많고, 속도도 너무 빠른데 만에 하나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쩝니까?”라고 한다. 누가 “왜 늘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을 하는 겁니까? 좀 조심하면 되지 않겠어요?”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운전을 시작하면 마음대로 되지 않잖아요. 정말 사고가 나면 아무도 어쩌지 못한다고요!”라고 한다. 그는 항상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한다. 겁이 많은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자 인성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겁이 많은 사람은 모든 일을 조심조심하기에 일반적으로 큰 잘못이나 나쁜 짓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어떤 측면에서 봐도 이것을 장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그렇다면 대담함은 어떻겠느냐? 대담함은 보통 어떤 단어들과 관련이 있느냐? (‘만용을 부린다’, ‘겁 없이 날뛰다’ 등의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겁 없이 날뛰다’, ‘간이 크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 등의 표현이 대담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럼 대담한 게 과연 좋겠느냐? (어떤 일에 대해 대담한지에 따라 다릅니다.) 상황을 봐야 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 인성 측면에서 논하자면, 대담함은 장점이라고도, 단점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선천적인 조건으로 귀결하도록 하자. 사람의 대담함은 어떤 일에 대한 것인지에 따라 다르고, 일을 처리할 때 마지노선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며, 또 그의 인품이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만약 인품이 나쁜데 대담하다면, 법을 어기고 악을 행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도처에서 이익을 취하고 부당 이득을 챙기거나 사기를 칠 수 있다. 또 누가 돈을 주며 매수하면 나쁜 짓도 저지를 것이다.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을 고려하지도 않는, 이렇게 겁 없이 날뛰는 사람이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하겠다며 사방에서 사기를 친다. 그의 사업은 불법이고 실체 없는 페이퍼 컴퍼니지만 그는 대담한 데다가 사기 수법이 뛰어나서 한순간에 큰돈을 벌어 별장에 살고 고급 자동차를 타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그가 누리는 돈과 물질적인 것들이 대담함으로 인해 사기 쳐서 얻은 것인데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너희는 이런 대담함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담한 사람을 볼 때는 그가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아야 한다. 대담함 때문에 서슴없이 사기를 친다면 이는 큰 악을 행하는 것이다. 많이 속이고 남의 이익을 많이 점할수록 나중에 더 큰 징벌을 받지 않겠느냐? 이는 재앙을 불러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겁이 많은데도 사기를 치려 한다면, 사기 규모가 작아서 나중에 받는 징벌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바른길을 걷지 않는 자들에게는 겁이 많은 게 좋겠느냐, 대담한 게 좋겠느냐? (겁이 많은 게 좋습니다.) 바른길을 걷지 않고 사기를 치는 부류, 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늘 법의 허점을 노려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 하고 언제든 법을 어길 수 있는 부류, 이런 부류에게는 대담함이 재앙이며, 인성의 결함이자 병폐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겁이 많은 게 좋은 것이고, 보호가 된다. 겁이 많은 사람은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의 돈을 벌고 약간의 사치품을 누리면 그만이라, 나중에 받는 징벌도 가볍다. 한편 대담한 사람은 서슴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다. 남의 이익을 점했다면 나중에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받게 될 징벌은 더욱 무거워질 테니, 한두 생 안에는 갚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는 한평생 식당을 운영하거나 장사를 해서 수백만, 심지어는 수천만 위안의 자산을 모으지만, 자신은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전부 빚 갚는 데 써 버린다. 70, 80대가 되어서도 빚을 다 갚지 못하니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다. 지난 몇 번의 생에 남의 것을 너무 많이 점했기에 몇 번의 생에 계속해서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전생에 너무 탐욕스럽고 지나치게 대담해서 남의 이익을 많이 점했기에 이번 생에 그 보응을 받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른길을 걷지 않는 사람에게 겁이 많은 것은 보호가 되고, 대담함은 좋지 않은 신호가 된다.
사람이 바른길을 걷는다면, 대담한 것이 좋겠느냐? (좋습니다.) 무엇이 좋겠느냐? (대담하면 핍박받으면서도 하나님을 계속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담함이란 단순히 육적인 담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만약 육적인 담력이라면, 그런 종류의 대담함은 무모하고 경솔하며, 다소 충동적이고 맹목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대담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다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20, 30년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만약 두려워한다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모한 것으로, 진정한 대담함이 아니다. 무모하지 않은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담력이 있었고, 진실한 믿음도 있었다. 이 진실한 믿음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을 믿는 데 다음과 같은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다가 박해받고 체포되어 고문당해도 목숨을 걸고 버틸 거야. 얼마나 고통받든, 어느 정도로 고통받든 절대 교회를 팔아먹거나 유다가 되지 않겠어.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네가 정말 체포와 박해에 직면하여 큰 붉은 용이 교회를 팔아먹으라고 너를 위협할 때,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그것에 속박되지 않는 데다가 굳게 서서 증거하며 “사람의 모든 것과 생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무모하거나 담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이다. 네가 이런 진실한 믿음을 갖고 굳게 설 수 있다면, 그것은 네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 없이 그저 “나는 두렵지 않아.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고 말하다가 막상 체포되면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싸고, 체포된 후에는 먼저 ‘고문을 당할까? 내 몸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전기 고문을 당하면 못 견디지 않을까? 고문이 심해지면 죽는 거 아냐? 죽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실까? 구원받지 못하는 거 아냐? 정말 못 견디겠으면 교회를 팔아먹고 유다가 되자. 유다가 된 후에는 징벌받고 멸망에 빠져도 상관없어. 최소한 눈앞의 고통은 모면할 수 있잖아.’라는 생각부터 든다면, 증거를 잃은 것 아니겠느냐? 만약 공산당이 너를 위협하며 네 가족으로 너를 협박한다면, 네 자식이 대학에 가지 못하게 하고 네 부모가 의료보험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면, 너는 두려워하며 진실한 믿음을 잃을 것이다. 네 담력은 어디로 간 것이냐? 네가 정말 대담한 사람이겠느냐?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네 대담함은 무모한 것이다.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네 그 담력도 진실한 것이다. 체포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내가 체포되게 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이 들자 대담해졌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담력과 식견,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체포되지 않았을 때 이미 이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 두었다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 하나님께서 정말 내 목숨을 거두신다면 나는 순종해야 해. 앞으로 어떤 종착지를 맞이할지는 하나님의 한마디로 정해지는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시고 어떤 종착지를 주시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니, 나는 순종할 거야.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감옥에서 죽게 하신다면 그건 내 영광이지. 나는 이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신조가 하나 있어. 바로 내 목숨을 하나님 손에 맡기겠다는 거야. 사탄이 아무리 괴롭히고 유린하고 고문해도 나는 사탄과 타협하지 않을 거야. 죽을까 봐 걱정되지는 않아. 설령 죽더라도 그건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정하신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거야!” 너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담력을 가질 수 있다. 체포되지 않고 사실이 닥치지 않았을 때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갖는다면, 생사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진실한 인식과 수용을 하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손에 맡길 수 있다면, 실제로 체포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이더라도 마음속의 이러한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네 믿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무너지거나 꺾이지 않는다면, 네 담력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체포되지 않았을 때나 사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일들을 깊이 생각해 두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나는 목숨을 바치고 싶어. 내 목숨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기껏해야 죽어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라고 생각한다면, 큰 붉은 용이 고문하고 나서 10년 형을 선고할 때 너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죽으면 다 끝일 줄 알았어. 순교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테고. 그런데 이 증거를 이루지 못하고 10년 형까지 선고받았네. 10일이나 10개월이 아니라 10년이라고. 이걸 어떻게 버티지?’ 그전까지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한다면 깨닫기가 쉽겠느냐?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사람은 그저 어떻게 처리하고 벗어날지만 생각한다.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크면 곤경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는 힘은 매우 작아진다. 그래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런 환경에 순종하기가 몹시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속히 진리를 구하고, 이런 일들을 분명히 생각해 두어야 한다.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할지, 그 길도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을 감옥에서 보낸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아내(남편)가 나와 이혼하지는 않을까? 10년 후에 우리 아이는 얼마나 커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나를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를 부양해 주지 않는 것 아닐까? 출소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10년 후에는 부모님도 나이가 드셨을 텐데, 나는 부모님께도 효도를 못 했으니 불효자가 되는 것 아닐까? 10년 후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지 않을까? 나는 감옥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설교도 듣지 못하고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10년 동안 낙오되는 것 아냐? 그건 도태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실까? 이런 고난을 겪는다고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실까? 만약 기억해 주지 않으시고,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 감옥살이는 헛된 것 아닐까? 10년 동안 세상은 크게 변할 텐데,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많은 것을 잃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어려움이 밀려올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직면해야겠느냐? 하루하루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이런 일들을 분명히 생각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달아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체포될 상황에 처하는 순간 생사가 한순간의 생각에 좌우된다. 한순간의 두려움과 공포, 한 가지 생각이 너를 유다로 만들어 교회를 팔아먹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있다. 이 일을 깊이 생각하지도 꿰뚫어 보지도 못한다면, 앞날과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의 생사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생사에 관한 일에서 꿰뚫어 보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며 대충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면, 환경이 닥치는 순간 드러날 것이다. 체포된 후 ‘3서’에 서명하여 하룻밤 사이에 유다가 된 자들은 사탄에게 짐승의 표가 찍힌 사람이다. 사람의 생사는 때로 한순간의 생각에 좌우되며, 진리 없이는 난관을 통과하기가 몹시 힘들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담함이란 무엇이겠느냐? 순간의 용기로 어떤 일을 해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대담함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것은 충동일 뿐이다. 진정으로 담력 있는 사람은 수많은 긍정적, 부정적 사물을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고, 긍정적인 사물을 내면에서 통과시키고 받아들이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실한 담력을 갖게 된다. 만약 네 마음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네 그 대담함은 그저 무모한 만용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면 단순히 담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 필요하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저는 대담하고, 박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도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다. 너는 무모하게 대담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네 어리석음과 무지, 순수함을 보고 네게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일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진리의 양육과 공급을 더해 네가 적잖은 진리를 깨닫고 얻게 한다. 그리하여 점차 네 무모한 대담함 속에 진실한 믿음의 성분이 생겨나고, 네 담력은 더욱 커져서 앞으로 닥칠 환경이나 박해를 더 용감히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진실한 믿음 없이 한때의 기세에 기대 “나는 하나님을 믿을 자신 있어. 난 박해받는 것도,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라고 한다면, 그 담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공급이 없고, 하나님이 실생활 속에서 환경을 마련해 너를 연습시키고 훈련하며 각종 사물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네 그 대담함은 순전히 무모한 대담함일 뿐, 결코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만약 정말 무모한 대담함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경솔하고 어리석으며 무지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무 단순한 사상을 갖고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을 따르는 데 어떤 위험이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가 결국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만약 대담함이 인성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대담한 사람은 최소한 단순하고 순수하지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며, 이것저것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대담함이 복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이며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받을 수 있고, 재난을 피해 죽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 나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내 모든 걸 걸고!’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무모한 기세에 지배되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게 아니라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네 그 대담함은 기껏해야 무모한 대담함일 뿐, 인성의 장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담한 사람의 경우, 그의 인성 본질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가 어떤 양심도 이성도 없고 그저 무모하게 대담한 사람일 뿐이라면, 아무 가치가 없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면,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만약 대담한 사람이 이렇다 할 이해 능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면서 오직 복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믿으며, 복을 받기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박해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성의 장점이 아니라 잘못된 사상 관점일 것이다. 잘못된 사상 관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겁이 많든 대담하든 그것은 모두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으로, 인성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에 대해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스스로 분별할 수 있겠느냐? (단순한 것은 분별할 수 있겠지만, 좀 복잡한 것은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차이를 교제했으니 이제 분별할 수 있겠느냐? (예전보다는 조금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특수한 예를 더 든다면, 내가 교제한 바에 근거하여 분별할 수 있겠느냐? 확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다음에도 계속 이어서 각 측면의 문제를 교제해 보자. 교제를 많이 하면 여러 측면의 문제를 어떻게 분별할지에 대해 어느 정도 규칙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성, 선천적인 조건,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 중 교제한 적이 있는 모습들은 기본적으로 분별할 수 있겠지만, 교제하지 않은 모습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거나 진리를 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조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할 테니, 더 많이 듣고 물어봐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교제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원히 모호하게 남을 것이고, 말할 때도 애매할 것이며, 너희의 인식은 진리에 대한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과 항상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오늘은 자질에 대해 교제하였다.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 분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대략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겠다면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접하게 될 테니, 교제한 말씀들을 실생활에 적용해 사람들의 모습과 조금씩 대조하면서 자신도 분별하고 남도 분별하며, 자신도 알아가고 남도 알아가다 보면 점차 가늠이 되고 기준이 생길 것이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도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다.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교제했다. 어떤 측면의 모습이나 인성의 어떤 표출을 교제하든 모두 공허하지 않으며, 네가 실생활에서 접하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비춰 보며 각 부류의 일과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제한 여러 내적 상태와 각종 문제들을 실생활에 적용해 비춰 보는 법을 배워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조금씩 성장할 수 있고, 진리와 관련된 여러 측면의 문제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으며, 각 측면의 진리 원칙도 점차 파악할 수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우리가 말한 문제들은 주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내적 상태와 표출을 분별하기 위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게 해 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문제는 모두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들은 사람의 관념으로 볼 때는 마치 인성이나 선천적인 조건, 또는 일부 눈에 띄는 패괴 성품과 관련된 것 같아도 어떤 문제든, 어떤 가르침이든 모두 사람의 진리 진입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은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는 길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것들이며, 피할 수 없다. 인성의 각 측면 문제와 모습들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전부 네가 일상생활의 여러 환경에서 직면해야 하고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 네가 각종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 분별할 줄 모르거나 모두 똑같이 취급하며, 교제한 이 진리 원칙들을 규례나 도리로 바라본다면, 영영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영원히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3년 11월 25일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