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0) 제 1 부
지난번에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서 ‘내려놓기’ 측면의 실행 가운데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기’ 중 성육신에 대한 관념 및 상상 측면의 문제에 대해 교제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교제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과 관련된 진리에 대해 지난번에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지난번에는 ‘꾀지 않기’에서 ‘말을 모호하게 하지 않기’ 측면과 지위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교제하셨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패괴된 인류와 견주지 마라’라는 주제 중 ‘꾀지 않기’와 관련된 내용을 교제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지위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해서도 교제했다. 이 측면의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너희가 인식한 것을 이야기해 보아라.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신분을 갖고 계시고, 지위가 아주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높은 지위를 자처하지 않으시며, 결코 그 지위를 누리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르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도 이런 지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 대해 책임을 다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또 예전에는 지위가 높으면 권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사실 지위는 그저 일종의 직함을 나타낼 뿐임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집에서 리더 일꾼을 맡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 가지 부탁과 책임을 주신 것과 같은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제를 마치신 후에 저는 이런 인식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측면의 내용을 교제하든 한편으로는 각 측면의 사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이고,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성품 본질에는 어떤 진실한 모습과 표출이 있는지, 사람이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는 사람이 인식해야 하는 바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내용에 관한 교제를 통해 사람에게 여러 가지 사물을 대하는 올바른 관점을 주고, 여러 가지 사물을 대하고 처리하는 원칙을 깨닫게 한다. 지위를 대하는 일을 예로 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땅에 와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을 때, 즉 그가 정상 인성 가운데서 살아갈 때, 지위를 대하는 그의 사상 관점이 어떤지, 그리고 지위를 처리하는 그의 원칙은 어떤지, 네가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이 알아야 하는 바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위를 대하는 측면의 내용을 교제할 때, 사람은 마땅히 인식해야 할 진리들을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주요하게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 올바른 사상 관점과 실행 원칙을 가지고 이 측면의 문제를 대하고 처리해야 한다. 요컨대, 어떤 측면의 문제를 교제하든 한편으로는 네가 이 측면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알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도 알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비록 하나님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선민들 가운데서 지위도 가지고 있지만, 이 지위는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일컬어지는 지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 편에서 이 지위를 보면, 한편으로는 진리 측면과 관련된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생명과 본질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지위는 하나의 직위가 아니라, 성육신이 지닌 생명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패괴된 인류가 일컫는 지위는 사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지위와 차이가 있다.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의 지위란 무엇이냐? (권력의 상징입니다.)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의 지위는 사람의 신분, 본질과 상관이 없다. 그저 하나의 직함일 뿐이다. 예를 들어, 패괴된 인류 가운데 일부는 회장, 사장이거나,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하나의 직함이거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의 계층, 등급의 구분일 뿐, 그 사람의 진정한 신분,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니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소위 ‘지위’는 인류 사회에서의 통치자와 다르다. 그는 통치자도 아니고, 기득권자도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가지는 이 지위는 단지 그의 본질과 신분을 두고 하는 말일 뿐이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은 단지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 성품으로 인해 하는 말일 뿐이다. 하나님의 이 지위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의 직함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을 인류의 각 계층 중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견주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각 계층 중 지위를 가진 사람은 어느 계층이든 통치 계층이라고 통칭한다. 통치 계층의 본질은 이렇다. 한편으로 그들은 지위에 걸맞은 일을 맡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통치 계층은 어느 시기든, 어떤 사회 환경에서든 기본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지도자, 출중한 자, 기득권자 등이다. 특히 백여 년 전에는 사회에서 지위와 신분을 가진 통치 계층의 대부분이 기득권자였다. 그렇다면 이 기득권자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바로 권력과 지위로 자기 자신을 위해 이익을 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익을 꾀하는 수단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신의 정권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통해 피통치자들을 통치하는 것이다. 피통치자들은 그의 통치와 관리 아래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금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지위와 통치 계층의 이 지위는 본질상 차이가 있다. 사회나 사람들 가운데 어느 계층의 통치자든, 혹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든 그들의 지위는 그저 하나의 직위이자 직함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기가 통치하거나 관리하고 관할하는 범위 안의 사람들을 단순히 관리할 뿐이다. 크게 말하면 통치라고 하고, 작게 말하면 관리, 관할이라고 한다. 그들은 통치, 관리, 관할을 통해 지위가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권력과 온갖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와 인류 가운데 있는 각 통치 계층이 하는 일이나, 그 일의 본질, 그리고 지위 자체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다. 성육신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은 통치하거나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공급하고, 인도하고,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역을 하는 목적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사람에게 하는 모든 사역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은 바로 진리를 공급하고, 생명을 공급하여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것이다. 성육신이 하는 것은 이런 사역이다. 하나님이 땅에서 하려는 사역과 하고자 하는 말씀을 사람에게 행하고 들려주어 사람이 듣고 깨닫게 하고, 사람에게 실행의 길이 생기게 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패괴된 인류가 성육신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주로 진리의 공급, 생명의 공급, 길의 공급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순종하게 되고, 진정한 피조물,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흡족게 하며,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열납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류가 될 수 있다. 인류가 성육신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성육신은 비록 이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사역을 했지만, 인류의 공양을 누리지는 않았다. 성육신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떤 통치 계층이 누리는 지위의 복도 누리지 않았고, 지위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온갖 후한 대우도 누리지 않았다. 그러니 성육신은 성육신 하나님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기득권자가 아니며, 착취 계급도 아니다.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영이 온 인류를 이끄는 것과 같다. 인류에게는 공급이고, 인도이며, 붙듦이고, 도움인 것이다. 그는 인류에게 어떠한 물질적인 것도, 비물질적인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육신이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사역할 때, 설령 인류의 눈에 보이는 지위나, 인류의 사상과 관념 속에 가지고 있는 지위가 그에게 있다고 해도 그는 결코 사람으로부터 공양을 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사역이나 인류에 대한 그의 공급은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이고, 인류에게 어떠한 수수료나 세금, 보수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너희가 한 푼이라도 돈을 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돈을 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소에 출입 카드도 두지 않고, 예배에 참석할 때 표를 살 필요도 없다.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희가 읽는 책이나 너희가 보는 영상, 너희가 듣는 설교 녹음도 모두 무료이다. 한 번도 너희에게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한 푼도 받은 적 없이 모두 무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이 헌금할 땐 비율에 따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도 않다. 헌금은 모두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땅히 바쳐야 할 십일조가 있을 뿐이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든 바치지 않든, 혹은 오분의 일을 바치든 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바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예배드리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으며,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지금껏 헌금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설교를 들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예배를 드릴 권리, 본분을 이행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율법시대부터 지금의 하나님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이렇듯 한결같이 인류에게 공급해 왔다. 하나님의 영이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한 때부터 첫 번째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한 말씀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행한 사역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는지, 인류에게 공급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으며, 이미 계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류에게 돈 한 푼이라도 요구한 적이 있었느냐? 전혀 없었다. 곡식 한 자루조차 인류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 오직 한결같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이렇게 사람에게 공급해 온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든, 하나님 자신이든 그는 지고지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방식은 무상이며, 사람과 동등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하며 그렇게 인류에게 공급한다. 더욱이 인류를 이끌 때는 손과 손을 맞잡고 그렇게 이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이끌고, 한 가지 사역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친히 이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역할 때는 대리인을 쓰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한다. 이를 인류의 말로는 ‘예현하사’, ‘미복잠행’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 가운데 와서 말씀하고 사역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면서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니,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듣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직접 눈으로 보며, 또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도 있다. 비록 사람 편에서 보면, 하나님에게 지위가 있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보거나 느끼는 그런 거리감은 전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분을 자처하며 높은 곳에서 인류를 내려다보지 않고, 인류와 동등하게 말하고 사역한다. 그동안 너희와 이야기하고, 예배하면서 교제한 것도 바로 이런 방식 아니었더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크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그런 방식으로 사역하지도 않았다. 비록 패괴된 인류는 패괴로 점철되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원수지만, 하나님이 사역하며 사람을 구원할 때는 인류에 대한 인내와 포용, 긍휼과 자비가 가득하고, 인류에게 사역하고 말씀함에 있어 사랑이 가득하다. 심지어 노파심에 신신당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나님은 조금도 아끼지 않고 인류에게 공급한다.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풀게 하거나, 뜸을 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너희가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는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공급하고, 너희가 이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조금도 남김없이 주어서 너희가 얻게 하며, 분명히 알고 깨닫게 한다. 특히 너희가 깨닫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노파심에 당부하고 또 당부하며, 반복해서 강조한다. 너희가 알아들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사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이 사역하는 것은 언제나 같다. 비록 구원하는 대상은 패괴된 인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인류를 싫어한 적이 없다. 사람과 하나님은 본질 면에서, 그리고 생명 면에서 완전히 다르고 차이가 있지만,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을 원수로 여긴 적도, 진정한 패괴 인류로 여긴 적도, 혐오하여 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긴 적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을 사역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 외에 더 중요한 한 가지는 사람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심정, 그리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지위를 어떻게 보든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결코 높은 자리에 서서 높은 지위의 시선으로 인류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과 동등하게 지낸다. 심지어 사람과 마주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지위상의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을 놓고 보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지녔기에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통치 계층의 사람과도 다른 마음가짐으로 인류를 대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인류 중 그 누구도 불가능하니, 통치 계층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사역을 했든 사람에게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깨달아야 할 더 많은 진리와 실행해야 할 길, 그리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사람에게 베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상생활 중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도 베풀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람 생명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생활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늘 ‘난 그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을 이행하려고 내 앞날과 학업, 결혼까지 포기했는데, 지금까지 얻은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원망한다. 특히 일부 제명된 사람들과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그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주장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정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돈이라든지, 명리라든지, 지위같이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것을 얻어야 마땅하다고,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수많은 진리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가 그동안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할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생겼을 것이다. 비록 물질적인 것은 얻지 못했지만, 더 가치 있는 것, 인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었을 것이다. 이는 그 어떤 돈이나 물질적인 이익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성육신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지위가 있지만, 인류 가운데 지위를 가진 사람들처럼 지위의 복을 누리지도, 사람들의 공양을 누리지도, 지위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권력과 그 어떤 좋은 대우도 누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인류 가운데 지위를 가진 사람들처럼 높은 자리에 군림하며 명령을 내리거나, 높은 위치에 서서 지위를 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높은 위치에 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동등하게 지내고,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사람의 생명 진입에 필요한 것 외에도 추가적으로 사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까지 공급해 준다. 성육신 하나님은 적절한 때나 필요할 때, 마찬가지로 사람의 일상생활과 사역에 참여하고, 너희가 정상적이고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우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도록 지도하고 도와준다. 그러니 어느 관점에서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지위를 대하는 것은 지위를 가진 그 어떤 인류와도 같지 않다. 그는 이런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행하는 사역, 그의 일상생활,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그의 원칙은 그저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성육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는 직분을 다하는 것이고, 인류에게 있어서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성육신 하나님이라는 지위를 가진 것을 바탕으로 인류에 대한 성육신 하나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인류에 대한 책임 중 한 측면은 인류의 생명에 가장 필요한 진리를 공급하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은 인류의 정상 인성 측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고, 사람이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원칙대로 생활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속으로 생각한다. ‘저희는 모두 성인이니, 일상의 이런 일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도해 주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너희가 모두 성인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정상 인성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에서 음식을 먹는 것만 해도 건강하고 적절하게 먹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간혹 이런 측면의 문제를 때마침 볼 때면, 조금 지도해 주고, 참고할 만한 의견을 조금 준다. 또 너희가 인성 생활과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내가 보거나, 듣거나, 접하게 될 때도 너희에게 몇 가지 의견을 주고, 검토해 주며, 너희의 잘못된 관점과 잘못된 행동 방식을 바로잡아 준다. 그리고 너희에게 몇 가지 원칙을 주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런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 주곤 한다. 비록 나도 겪어 보지 못했고 처리해 보지도 않은 특수한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을 마주할 때 나는 원칙을 파악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다. 나는 너희를 위해 검토해 주고, 너희에게 어느 정도 조언이나 의견을 주어서 너희가 생활의 여러 가지 일에서도 정상 인성의 원칙과 기준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양심을 어기지 말고, 최소한의 도덕의 선을 어기지 말며, 이성을 가지고 일하라고 하고, 이방인들처럼 규범 없이 일하지 말고, 규범을 지키라고 하며, 양심과 최소한의 도덕의 선을 어기지 않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고 한다. 이런 일들을 보게 될 때도 나는 너희에게 지적해 주고, 검토해 주며, 너희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주 등을 단속한다. 이는 행동 측면의 단속이나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측면의 단속에 모두 유익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배움이 짧고, 바깥세상의 많은 일에 참여해 본 적도 없잖아요. 사회에서의 게임 룰도 모르면서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단속한다는 거죠?” 내가 말해 주겠는데, 나는 정말로 너희를 단속할 자격이 있다. 비록 내가 바깥세상의 일들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사람이 가는 길이나 사람의 추구와 관련된 일, 진리 원칙 측면과 관련된 일이라면, 너희를 도울 수 있다. 나는 원칙을 알고, 처신에 있어 최소한의 선을 안다. 네가 최소한의 선을 넘었는지, 원칙을 어겼는지 나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알지만, 너 자신은 모른다. 어째서 너 자신은 모르겠느냐? 너는 패괴 성품 속에 살고 있고, 또 세상의 온갖 사악한 흐름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부족해서 늘 잇속을 차리려 하고, 늘 잔꾀로 이득을 보려 하거나 빈틈을 타려고 한다. 심지어 잇속을 차리려고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며 항상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할 궁리를 한다. 나는 네가 이런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조금 짚어 주고, 검토해 주며, 그러지 말라고 일깨워 준다. 일깨워 주거나 검토해 주지 않으면, 너는 늘 네가 하는 일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다. 너의 그 이치란 것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바로 네가 ‘이방인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어째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왜 그런 손해를 봐야 해?’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겨났다. 그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처신할 때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너는 늘 손해 볼까 봐 걱정한다. 또 단순히 손해를 볼까 봐 걱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잇속을 차리고 빈틈을 타려고 한다. 그러니 단속할 필요가 있고,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 이런 조짐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얼른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하는 것은 역겹다고 일깨워 준다. 너는 그 작은 잇속을 차려서 뿌듯하고 흡족하겠지만, 네가 팔아넘긴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 양심이고, 인격이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네게 나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 나쁜 평가 하나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상쇄하는지 아느냐? 너는 모른다. 느끼지도 못한다. 네가 모르고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일에 내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규범을 지켜야지, 잇속을 차려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서 나는 지위로 너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원칙을 교제해 주고, 네 행동을 단속하며, 네 양심이 지각을 갖게 하고, 양심과 이성의 기준을 하나 더해 주는 동시에 네가 인생의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알게 한다. 앞으로 네가 다시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양심에 걸리고, 낯 뜨겁게 느껴지며, 그렇게 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한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고, 성과를 거둔 것이 된다. 이것을 단속이라고 한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