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제 4 부

③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포용하고 양보할 줄 알며, 말도 교양 있게 한다. 또 사역할 때는 화끈하고 위엄 있으며 인성도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전형적인 지도자의 풍모를 보인다. 그러나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어느 측면의 문제든 도리로 해결하며 본질적인 사역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데다가 사역지침도 시행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쓸모없는 인간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겉보기에는 옷차림이 멀끔하고 단정하며 점잖은 데다가 교양도 있고 규율을 잘 지키며 예의를 중시한다. 자애롭고 포용적이며 인내할 줄 아는 것은 물론, 행동거지가 특히나 분수에 맞는다. 남과 말할 때도 아주 상냥하며 몹시 겸손하고 자신을 낮춘다. 아무런 허점이나 빈틈, 결함도 찾아낼 수 없고, 인성 측면에서 보면 유독 믿음직하고 식견이 있으며 고상하고 기품까지 있어서 마치 중국인이 말하는 품위 넘치는 군자 같다. 그런데 인성이 완벽하고 겉보기에 흠잡을 데 없다 한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겠느냐? 다양한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깨달았겠느냐? 예배 때마다 몇 시간씩 말을 하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탄복하면서 그가 언변이 뛰어나고 하는 말마다 조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듣자마자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도리이며 결코 사람의 문제에 맞춰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도리만 공허하게 이야기하고 거창한 얘기만 늘어놓으며, 말을 끝내고 나면 상당히 기가 살아서 자신이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 실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인성의 겉모습을 완벽하고 우아하게 위장해 고급스럽고 격조 있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괴 성품과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패역, 오해와 경계와 의심, 특히 하나님에 대한 무리한 요구나 사치스러운 욕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의 인성이 ‘완벽’하다고 할 때, 여기에서 ‘완벽’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이다. 완벽한 인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그 ‘완벽’은 순전히 포장하고 위장해 만들어 낸 것이다. 결함이 없는 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포장해 낸 것이니,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겉모습이 완벽한 사람일수록 경계하고 관찰하고 분별해야 한다.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많이 접촉하고 대화하며 그가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저는 마귀요, 사탄이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저는 패괴되었다고요! 저는 죄인이자 괴수이니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혐오하십니다!”라고 하거나 “저는 눈이 멀었고 어리석은 데다가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더럽고 불결하다고요!”라고 한다면 그가 하는 이런 말 속에 실제 사실이 있느냐? 본질적인 인식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저 빈말이나 이론만 늘어놓을 뿐이다. 그런 빈말이나 이론은 그가 마음속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체험한 인식이 아니다. 그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데, 전부 자신을 포장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해 보라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어떤 책망과 훈계를 겪었는지, 그런 다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결했는지 말해 보라고 하면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쓸데없는 말만 또 한 무더기 쏟아 낸다. “저는 자질이 부족해요. 선천적으로 죄인이고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미천한 사람이니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가든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그저 지위를 얻는 것만 좋아합니다.” 어떻게 그런 문제를 해결했냐고 물어도 그는 이렇게 동문서답한다. “사람은 지위를 가져서는 안 돼요. 지위를 가지면 끝장이죠. 지위를 추구하는 건 사치스러운 욕망이에요. 제일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가장 낮은 의자에 앉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야 한다고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잖아요. 그게 바로 겸손이죠.” 본질적인 변화가 있느냐? 진실한 체험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겠느냐?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 그가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만약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 패괴 표출을 비춰 볼 것이고, 패괴를 표출할 때 왜 특정한 상황에서 패괴를 표출하게 됐는지,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고 무엇에 지배받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 비춰 보고 그게 바로 패괴 성품임을, 알고 보니 자신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성결하고 순수하지 않음을, 자신도 간사함과 사심,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코 진리 실제를 가진 사람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그가 이런 체험을 해 봤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스스로 패괴 성품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사실적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진리를 전혀 체험하지 않고 도리만 이야기하며, 어떻게 자신을 포장하고 치장하고 자기 인성의 흠과 결함을 숨길지만 고민한다. 또 그는 영적인 척하는 표면적인 행위와 행동 방식, 표정, 분위기, 기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패괴 성품은 필사적으로 단단히, 치밀하게 내면에 감춘다.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가진 여러 측면의 문제나 각종 이야기를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유의하지 않으며 마음에 새기지도 않고, 그저 인성의 겉모습에만 공들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에 관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인류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인식하고 체득했는지에 관해 말해 보라고 하면 그는 그런 현실적인 주제는 회피한 채 영적인 이론만 또 한바탕 떠들어 댄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만유를 주재하십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기묘하죠! 하나님은 사람의 칭송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시고,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지고지상하죠!” 누가 “그럼 당신의 체험에 대해 한번 말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함을 보았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말한다. “하나님은 몹시 위대하시고 사람은 아주 보잘것없습니다.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요!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땅 위의 개미만도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높여 주시죠!” 인식이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런 인식도 없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외식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그저 구호나 도리로만 본다. 그도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묵상 노트를 쓰며 예배에 참석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이런 절차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빠짐없이 이행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무엇을 받아들였겠느냐? 무엇을 얻었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패괴 성품이나 관념, 상상, 치우친 사상 관점에 초점을 맞춰 비춰 봄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실행 과정에서 행할 길을 얻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도리를 무장함으로써 예배 시간에 강의를 하여 남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매번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며 오랜 시간 끝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하나님 말씀을 골라 교제하여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위장에 특히 능한데,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 비열해질 수 있겠느냐? 그는 내가 했던 말을 듣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면 외워 놓았다가 예배 시간에 기회를 틈타 한 수 보여 주려고 한다. 특히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설교를 많이 듣지 않았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좀 읽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는 이런 허점을 노려 새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뽐내기 시작한다. 그럼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 영적인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기 위해 이런 수단으로 자신을 뽐내는 것은 비열하지 않으냐?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평생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의 근거를 구해 네 패괴 성품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해결한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구원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평생 자기 인성의 흠과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들이고 길을 찾는다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아무런 흠이나 결함 없이 만들어 남다르고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심지어 어떤 사람처럼 “저는 순수한 사람, 위대하고 고상한 사람, 모든 정상 인성을 초월한 사람이 될 거예요.”라고 한다면, 말하건대 너는 실패할 것이다! 인성의 어떤 흠과 결함을 해결하든 모두 네가 구원받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성의 결함과 흠을 해결하더라도 기껏해야 표면적으로 그 흠이 보이지 않게 되어 겉보기에 완벽하고 고아해질 뿐이다. 인성의 흠과 결함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 설사 변한다 하더라도 더욱 큰 흠이자 결함인 패괴 성품은 여전히 내면에 숨겨져 있다! 자신을 포장할수록, 자신의 인성이 아무 결함 없이 완벽해지는 것을 추구할수록 패괴 성품은 더욱 깊이 뿌리내려 너를 얽매고 묶을 것이며, 네가 더욱 교만하고 간사하며 사악하고 강퍅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진리와 진리 추구의 길에서 더욱 멀어져 도태되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럼 끝장이다. 하나님은 네가 겉보기에 완벽하고 순수한 사람 같다고 해서 이례적으로 너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네가 아무 결함 없는 완벽한 인성을 추구할수록 하나님은 너를 더욱 혐오하고 네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자신이 패괴 성품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뉘우치고 괴로워한다. 뉘우치는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생겨서 진리를 얻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게 되며,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갈수록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고, 점차 여러 측면의 진리에 어느 정도 진입하고 수확을 얻으며 실제로 살아 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양한 측면의 사람과 일,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상응하는 진리 원칙으로 실행하고 점검하게 된다. 이렇게 수년간 체험한 뒤에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책망과 훈계를 통해 스스로 진리 추구 과정에서 치른 대가를 통해 내면에 점차 진리를 갖추어 생명으로 삼게 되고 구원받을 희망은 갈수록 커지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비록 그 인성의 결함과 흠, 고유한 조건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겠지만 패괴 성품은 오히려 갈수록 줄어들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어 더욱더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며 쓰임 받기에 합당해진다. 이런 사람이 이런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반드시 구원받는 대상이 된다.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여 구원하려는 대상이다. 주변 사람들을 한번 관찰해 보아라. 누가 늘 겉모습이나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 약점에 한결같이 공들이고 전력을 다해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하여 남들에게 우러름과 칭찬, 숭배를 받으며 사람들 마음속에서 지위를 가지려 하는지 살펴보아라. 그 부류가 바로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최종적으로 맞이하는 결과는 오직 한 가지, 쥐와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부류가 끝장나고 도태된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의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회복시키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바꾸려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자주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상 인성의 회복은 무엇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겠느냐?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린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정상 인성이 점차 회복된다는 것은 사람의 양심에 감각이 생기고 이성이 정상화되며 정상 인성의 관점에서 옳은 일을 하고 옳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충동적, 맹목적으로 굴거나 혈기에 휘둘려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근거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 이성이 매우 정상화되고 인성은 무척 정직하고 선량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반으로 이런 것들을 이루고 이런 수준까지 회복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변화하는 것,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을 기반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바꾸지 않고 벗어 버리지 않는다면, 설사 인성이 꽤 좋고 양심과 이성을 좀 갖추고 있더라도 진리가 생명이 되지 않는다면, 네 양심과 이성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으며 너는 늘 패괴 성품에 영향받고 종용당하고 부추김 당해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를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설사 어느 정도 정의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바람과 의지일 뿐이며 그저 그 정도의 선량한 인성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면에서는 패괴 성품이 생명이 되어 너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만 이를 수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나쁘지 않다. 혹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이 영향받지 않는 상황에서만 악을 행하지 않을 뿐, 일단 직접적인 이익이 영향받으면 패괴 성품이 바로 튀어나와 양심과 이성을 억누르고 자신의 이익과 권익을 지키도록 한다. 이런 경우 양심과 이성이 주도권을 잡게 하기 어렵다. 왜 그렇겠느냐? 진리가 아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너의 이익이 손해 보지 않는 상황에서만 인성의 양심이나 이성을 약간 표출할 뿐, 일단 너의 이익이 손해 보거나 위협받는 순간 패괴 성품이 바로 튀어나와 네 양심과 이성을 억누르고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르게 한다. 즉, 도덕과 도의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해도, 심지어 어떤 일이라고 해도 다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는 행동마다 전부 진리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살아 내는지는 그가 가진 인성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내재적인 생명 본질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정말 진리가 생명이 된다면 그의 생명 안에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道)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영향을 발휘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결국 진리를 실행해 내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의 생명 본질이 패괴 성품이라면 그의 양심과 이성은 인성의 마지노선을 넘지만 않을 뿐 최저 기준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 마지노선은 무엇이겠느냐?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상대한다.” 등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라는 것도 있다. 이는 수많은 이방인이 처신할 때 지키는 마지노선이다. 이방인으로서 이렇게 실행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다. 너희는 이를 통해 무엇을 이해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고, 생명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 또 생명 본질이 변화하지 않으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본질적으로 회복될 수 없으며, 그저 형식적으로 인성의 마지노선을 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생명의 본질이 변화한다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어느 정도 완전해지고 발전한다. 여기서 ‘완전’과 ‘발전’은 무슨 뜻이냐? 양심과 이성이 정상적으로 발휘되고, 단순히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 실행의 기준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이방인 가운데 소위 좋은 사람도 단지 양심과 이성을 좀 중시하고 눈에 띄는 악을 행하지 않으며 도의의 최저선을 넘지 않는 데 그치는데,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은 편이고 꽤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진리가 생명이 된 사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시비와 여러 부류의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럼 그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 원칙이다. 그는 진리 원칙을 갖추고 있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라는 기준보다 훨씬 높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가 생명이 되었으며, 다양한 일을 분별하는 근거가 패괴된 보통 인류의 기준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복잡한 사물을 직면했을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 하는 것을 견지한다. 진리 원칙을 파악하고 나면 그의 생각은 더 이상 흐리멍덩하지 않으며 사고가 뚜렷해진다. 뚜렷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을 맞닥뜨려도 그는 실행하는 진리 원칙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 그는 진리를 제대로, 명확히 파악하여 이미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 여러 복잡한 사람과 일, 사물을 직면할 때도 그는 기본적인 준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 원칙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진리 원칙은 사람이 여러 복잡한 사물의 본질과 문제의 진상을 꿰뚫어 봄으로써 판단해 내게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이성이다. 이 이성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수준에 이르면 이성이 발전되고 완전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상 인성을 원하지 멍청이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온순하고 못나서 늘 괴롭힘만 당해요.”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는 자질이 형편없고 능력이나 재주도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깨달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진리 원칙을 깨닫고 정직한 사람의 기준과 원칙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설사 이방인에게 어리석다며 비웃음당해도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이성이 건전하고 완전해지며 보통 사람보다 나아져 어떤 일을 맞닥뜨리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고, 올바른 원칙과 입장, 목표를 근거로 삼아 그 일을 처리하게 되며 머리는 깨어 있고 생각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또 원칙과 기준에 맞추어 행동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당시에 사람들이 그 일을 꿰뚫어 보았든 꿰뚫어 보지 못했든 시간이 흘러 이해하게 됨에 따라 수긍하게 될 것이며, 네가 그 일을 하여 큰 도움을 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이런 성과를 이루는 근원은 무엇이냐? 진리가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 이성은 네가 어떤 사람, 어떤 일을 대하든 정확하게 판단하고 규정하고 결론짓도록 하고, 정확한 실행 원칙을 가지는 것은 물론, 사람을 돕고 지도하는 정확한 원칙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성이 발전되고 완전해진 것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이 이런 이성을 가지게 된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진리입니다.) 진리가 생명이 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인류이다. 어리석고 온순하고 못나서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려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혹은 세상에서 능력이 뛰어나고, 유독 눈치를 잘 살피고 흐름을 읽을 줄 알며 눈치껏 약삭빠르게 행동한다 해도 소용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오직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으며 여러 진리를 다 파악하고 실행해야만, 체험과 체득을 얻고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만 비로소 다양한 일에 대해 정확히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확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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