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오늘은 지난번 화제를 이어서 교제하겠다. 지난 시간에는 각 부류 사람들의 출처에 대해 교제하면서 세 가지 부류를 언급했는데, 그 세 부류를 기억하고 있느냐? (짐승에게서 환생한 부류,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 그리고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였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냐?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는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으며, 인성 안에 양심과 이성이 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맞고 틀림을 아는 두 가지 측면의 특징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맞고 틀림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사람이 이 두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된 주요 원인은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맞고 틀림을 알 수 있다. 이 측면에 대해 우리는 몇몇 세부적인 내용들을 교제했으며, 주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맞고 틀림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하여 여러 내용을 교제하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모습을 폭로하였다. 그 후에는 또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오늘은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에 대한 화제를 이어서 교제하겠다.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에 속하는 자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 외에도 맞고 틀림을 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주로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부정적인 사물인지 안다는 것이다. 즉, 각 부류의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줄 알며, 설령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물이라고 할지라도 양심과 이성에 기대 간단하게 판단을 할 수 있다. 만약 그 부류의 사물을 접해 봤는데, 양심상 꺼려지거나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선택을 할 것이며, 무의식적으로 그 부류 사물의 맞고 틀림, 혹은 옳고 그름을 느낄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람은 기본적인 양심 또는 이성의 느낌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낯선 사물을 판단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낯선 사물이든 익숙한 사물이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거나 맞고 틀림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사회에 나타나는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는 더더욱 맞고 틀림을 알지 못한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사회에 긍정적인 사물이 나타나도 그는 세상의 흐름대로 그것을 대하고 정죄하고 저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와 비인류의 차이다. 보아라. 똑같이 사람인데 어떤 이는 진리를 들어 본 적도,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아 본 적도 없지만, 어떤 환경에서든 일을 할 때 기본적인 선이 있다. 적어도 양심의 마지노선이 있어서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부정적인 사물에 반감을 갖고 있고,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기본적인 도덕의 마지노선이 있다. 반면, 비인류는 그 속성과 특징으로 볼 때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한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부정적인 사물들, 심지어 명백히 그릇된 사물에 대해 반감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고, 저항력도 없으며, 오히려 부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사악한 흐름을 따르기도 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고 말하는 몇몇 사람들조차 이방인처럼 사악한 흐름을 따라 사악한 일을 한다는 것이며, 그런데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심지어 양심의 가책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로 셀카를 찍는다.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진을 찍겠느냐? 의미 있고 기념할 만한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개인 사진이라고 해도 우아하고 품위 있으며 단정하고 올바른 모습을 찍는다. 그들은 이런 일들을 모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한다. 반면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다르다. 똑같은 셀카라도 그들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몇몇 여성은 어떤 사진을 찍더냐? 단정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사진 대신, 인터넷에서 이방의 여성들이 찍은, 선정적이고 성적인 사진이나 몹시 기이하게 찍은 사진을 모방한다. 또 남성들이 보면 침을 줄줄 흘리고 성적 욕망을 느낄 만한 사진, 즉 요부나 탕녀 같은 사진, 성적인 사진들만 찍는다. 어떤 여성은 야하고 짙은 화장을 즐겨서, 얼굴은 하얗게 분을 바르고 입술은 붉게 칠하며, 눈은 괴물처럼 그린다. 그러고는 의도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유혹적이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는데, 눈빛이 꼭 보는 이의 혼을 빼앗는 듯하고 음란해서 이성을 성적으로 자극한다. 또 어떤 여성은 긴 머리를 얼굴에 드리우고 얼굴을 반쯤 들어 머리카락 사이로 유혹적이고 음란한 눈빛을 보낸다. 요컨대, 자신이 유혹적이고 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표정과 자세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몹시 도취되는데, 수시로 자신의 선정적인 사진을 감상하며, 가장 뿌듯하고 마음에 드는 셀카를 컴퓨터와 휴대전화 배경 화면으로 설정한다. 심지어 일부는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자신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스타가 될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분명 대스타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보기에는 이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으냐? 그녀는 이런 사진을 혼자 수시로 감상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보여 준다. 사람들이 보고 칭찬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탐탁지 않아 하고, 같은 부류가 매우 감탄하며 “이 사진 정말 잘 찍었다. 꼭 유명 연예인 같잖아! 어떤 연예인이랑 비슷해.”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더욱 흡족해하며 매일 거기에 도취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사진 꾸미기를 좋아한다. 토끼 귀를 머리에 달아 놓고 고양이 수염을 붙인 뒤 자기가 토끼나 고양이보다 더 귀엽다고 생각하며, 누굴 만나기만 하면 “제가 토끼 같나요, 아니면 고양이 같나요?”라고 묻는다. 상대가 “이도 저도 아닌데요.”라고 하면 화를 낸다. 말해 보아라. 사람 노릇은 제대로 하려 들지 않고 동물이 되고 싶어 하니, 이는 변태 아니겠느냐? 그는 자신의 그 ‘걸작’들을 인터넷에 올려 더 많은 사람의 찬사를 얻고자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셀카를 찍을 때 자신을 검객이나 협객, 또는 서양 영화의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 멋있고 차갑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꾸미며,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거나 동조하면 매일 거기에 도취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이들은 비인류이다. 비록 셀카가 사악한 흐름 속 단순하고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취향과 추구, 인품과 인성적 수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을 드러낸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은 휴대전화라는 도구를 이용해 긍정적이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을 찍지만, 인성의 특징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이고 사악한 것들, 그의 본성 본질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찍는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지고,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찍는 사진이 달라지며,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자신을 꾸미고 자신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은 단정하고 올바르며 우아하고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기겠지만, 정상 인성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따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한다. 이는 사소한 일이지만, 사람 내면 깊은 곳의 취향과 추구를 십분 보여 준다. 어떤 일에서든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명확히 알지 못할지라도, 양심과 이성의 제약 때문에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한다. 만약 일시적으로 분별하지 못해 부정적인 사물을 선택하거나 무의식중에 부정적인 일을 했다면, 마음속에서 빠르게 느낌이 올 것이고, 양심에 찔리거나 이성적으로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을 몹시 평범하고 지루하며, 언급할 가치도 없고 무시당할 만한 것으로 느낀다. 반면 부정적인 사물, 특히 사악한 흐름 속에서 크게 유행하는 것들은 마음속으로 매우 좋아하고 숭배한다. 만약 이런 부류에게 단정하고 올바른 스타일로 사진을 찍으라고 하면 반감을 느끼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누가 그런 사진을 찍나요? 그런 사진은 한물갔어요!”라고 말하며 선정적인 사진을 찍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런 사진을 보면 역겨워하고 차마 눈을 두지 못하지만, 그는 “이건 섹시한 거예요. 섹시한 게 뭔지 모르나요? 이건 유행이고 고상한 예술이라고요. 당신은 예술을 모르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선정적인 사진을 찍는 것을 역겨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렇듯 유행하는 선정적인 것들을 몹시 좋아하며 따른다.
비인류는 부정적인 사물에 몹시 몰두한다. 사악한 흐름 속에 부정적인 사물이 나타날 때 그들은 아주 빨리 그 정보를 포착하며 높은 수용성을 보인다. 기회와 여건이 갖춰진다면, 그들은 반드시 사악한 흐름 속에서 자신들이 좋아하고 인정하는 일들을 할 것이다. 절대 거절하지 않고, 방관자가 되지도 않으며, 더욱이 혐오하거나 멀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뛰어드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들은 서양에서 비롯된 몇몇 유행하는 말과 행동 방식을 적극적으로 추종한다. 예를 들어, 서양의 핼러윈은 사실 귀신 축제다. 그날이 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무대 의상이나 연극용 의상 같은 것을 입는다. 어떤 이는 마녀로, 어떤 이는 왕자나 공주로, 또 어떤 이는 개구리나 뱀, 공룡 등으로 분장하고, 바구니나 봉투를 들고 상가, 개별 점포,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어먹는다.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들도 이 축제를 기념하며, 귀신 복장을 입고 매우 즐거워한다. 여러 캐릭터로 분장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의상을 선택하느냐? 군인, 장군이나 영웅처럼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의상은 입지 않고, 굳이 마녀나 주술사의 옷을 입으며, 온갖 마귀의 모습으로 분장한 채 귀신 축제를 기념한다. 그러면서 즐겁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마음속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인간 세상의 부정적인 사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이 부류는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부정적 사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다. 전통문화의 것들과 세속의 흐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참된 인식도 없고, 자기가 과연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모른다. 그는 자기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지만, 사람답게 처신하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오히려 귀신이나 짐승처럼 행동하라고 하면 즐거워서 지겨운 줄도 모르고, 거부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종종 “양심이 얼마나 가치 있는데요? 요즘 누가 양심을 말합니까? 누가 의리를 말하나요? 누가 도덕을 말하죠?”라고 한다. 하지만 주술사 옷을 입고 주술사 역할을 하거나 공룡 옷을 입고 공룡 역할을 하라고 하면 전혀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이는 어떤 사람이냐? 그의 본성 본질 속에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그가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 과연 반감을 갖겠느냐? 그가 선택한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 분명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고,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반감 역시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는 긍정적인 사물에 몹시 반감을 가지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 부정적인 사물, 특히 사악한 흐름 가운데서 크게 유행하는 것들, 현재 인기를 끄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인정한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사악한 흐름을 따르고, 마귀나 악령, 짐승 분장을 할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 분명하며, 사악한 흐름에서 비롯된 것일수록 더 좋아한다. 특히 일부 동양인들은 서양에서 무엇이 유행하는지, 서양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입고 무엇을 사용하는지 들으면 아무 분별 없이 전부 받아들이고 따라 한다. 설령 그것이 사악한 것이거나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것, 진리에 어긋나는 것일지라도 전부 받아들인다. 혹자는 “그것은 서양 사대주의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성 본질적으로 그 사악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 동양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은 고상하지 않다고 여기며 서양의 유행을 따라, 독특하고 남다른 면을 보이며 다른 이들의 우러름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 이런 부류는 인성의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의 취향과 추구,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한 사상 관점과 표출로 볼 때, 그들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없으며, 그들의 사상 관점은 비인류, 심지어 마귀, 사탄의 사상 관점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어떤 일을 대하는 입장과 시각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인의 입장 및 시각과 정확히 반대되고 대립된다. 반면, 진정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가졌기에, 자신의 양심과 이성의 감각에 따라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고, 그 가운데서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하며, 옳고 그른 일을 분별할 수 있다.
혹자는 동양의 사회 환경에서 동양 전통문화의 제약을 받아 몇몇 동양의 전통을 지킬 줄 알며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그런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환경이 변하고 기회가 생기는 순간, 인성의 그 진실한 면이 드러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비인성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 비인성적 특징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바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맞고 틀림을 알지 못하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동양에 있을 때는 품행이 올바르고 단정하며, 현숙하고 우아하고, 특히 가정적이고 나쁜 소문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서양에 가면 달라진다. 그는 “서양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남녀관계가 자유롭다”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사실 이는 실제와 부합하지 않지만, 그는 사상, 관념 속에서 서양에 왔으니 자유롭다고, 명성이나 명예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동양 전통문화의 가르침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여성은 아녀자의 도리를 지킬 필요가 없고, 남성도 일부일처제를 지킬 필요가 없으며, 서양에서는 남녀관계에서 방탕하게 굴어도 된다고, 그래도 아무도 비웃거나 비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서양 문화는 그런 것이며, 그것이 사회의 흐름이고,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바른길과는 멀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그의 인성 안에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드러날 것이고, 인성의 본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동양인, 특히 중국인들이 서양에 가면, 배우자는 중국에 두고 혼자 낯선 타국에서 지내면서 일하고 생활하며 복잡한 일들까지 처리해야 하니 삶이 몹시 힘들어 외롭다고 느낀다. 그래서 미국 화교 사회에서는 ‘투쟁 부부’라는 것이 유행한다. 임시 배우자를 찾아 임시 가정을 만들고 함께 살면서 서로 도와 생활상의 어려움에 함께 대처하고, 이와 동시에 육체적, 생리적 욕구까지 채우는 것이다. 타향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이성과 함께 ‘투쟁 부부’가 되어 여러 가지 수요를 충족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일부 ‘투쟁 부부’는 수년간 함께 살다가 양쪽 배우자가 오면 두 가정이 친구가 되어 서로 왕래한다고 한다. 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힘든 생활에 대처하기 위해 유행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일을 하는 자가 있겠느냐? (일부 불신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 많은 자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또 일부는 명백한 불신파로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양심과 이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은 부정적 사물에 관해 들을 때 사실 마음속 깊이 반감을 느끼지 않으며, 수용 가능하다고 여기고, 심지어 일부는 거기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일을 역겨워하지 않으며, ‘이건 더없이 정상이야. 이방인들은 다 이렇게 하는걸. 이건 시류지, 죄를 짓는 게 아니라고. 일단 법을 어기지 않았고, 풍기를 어지럽히지도 않았잖아. 마지막으로 이건 인간의 생리적인 수요라고. 이렇게 하는 건 감정적으로도, 이치적으로도 맞고 합법적이기도 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긴다. 이방인은 차치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부류는 인성이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이런 역겨운 짓을 할 수 있지만, 인성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사악한 흐름의 사상 관점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며, 마음속 깊이 반감을 품고 혐오한다. 서로를 돌봐 주기 위해서든, 다른 어떤 목적이 있든,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투쟁 부부’ 관계는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일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아닌지, 합리적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과연 양심과 인성이 있겠느냐? 혹자는 “그 일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경외하지도 않아서 아무 지각 없이 그런 일을 하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이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그는 그 일의 맞고 틀림을 모르고, 그 일이 긍정적인 사물이 맞는지,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는지 모르지만, 인성의 기본적인 양심과 이성으로 판단할 것이다. 설령 그것의 옳고 그름을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도덕과 인성에 위배되며 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알아챌 수는 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니,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거부할 것이다. 반면, 거부하지 않고 전부 받아들이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상 인성이 없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 부정적인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양심과 이성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심과 이성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통해 그런 일을 분별하거나 물리치거나 거부하지 않으니, 이런 부류는 확실히 인성에 문제가 있다. “그 부류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짐승에 속합니까, 아니면 마귀에 속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짐승에 속하든 마귀에 속하든, 결국 비인류로 통칭할 수 있다. 그들은 서양에 가서 서양 국가가 발달하고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사회 제도가 동양 국가보다 선진적인 것을 보고, 서양의 모든 것이 옳고 동양보다 좋다고 여긴다. 동양인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식견이 없지만, 서양인은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식견이 있다고 말이다. 특히 결혼이나 이성 관계에서 매우 개방적이어서 길거리에서 남녀가 만나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서양인들이 만나서 포옹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으며, 만났다고 해서 무작정 포옹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인들은 그런 행동을 많이 하지 않으며, 그런 것은 대부분 젊은이들이 좋아한다. 오히려 아시아인들이 모인 곳에서 남녀가 공공장소, 특히 사람들이 붐비는 길거리에서 온갖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심지어는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해 보는 사람을 몹시 역겹게 한다. 어쩌면 일부 아시아인이 서양에 여행을 갔다가 서양인의 문화생활과 예절을 보고 “서양인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성적으로 해방되었다”라는 식의 말을 하니, 많은 아시아인이 그런 말에 근거하여 머릿속으로 온갖 사악한 일들을 제멋대로 상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서양 사회에 정말 깊이 들어가거나 서양인들과 깊이 접촉하고 교류하면, 많은 일이 아시아인의 상상이나 말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종교적 배경이 있는 일부 지역사회나 외딴 지역사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어서, 아시아인들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서양인들의 이성 관계가 개방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소위 ‘개방성’을 스스로 실천하여 제멋대로 육적인 정욕을 풀어놓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문제일 뿐, 어떤 사회의 흐름이나 문화,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서양 문화나 전통이 그를 잘못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동양인들은 서양인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서양인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성적으로 해방되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의 이면에는 정욕을 마음껏 풀어놓는 것도, 심지어 비윤리적인 관계까지도 가능하다는 뜻이 숨어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사상 관점에 지배되어 서양에 간 후 방탕해지기 시작한다. 이는 실제로 그런 현상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 자체가 사악함을 좋아하는 것이며, 소위 서양 문화나 서양 전통을 구실로 자신의 육체를 방탕하게 풀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부류는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며, 인성의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타고난 본성부터 부정적인 사물과 온갖 그릇된 사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갖가지 구실과 명목을 내세워 긍정적인 사물과 상반되는 일, 심지어 적대되는 일들을 하며, 그러면서도 스스로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재 서양인들 모두가 그렇다고 여긴다. 정말 그러하냐? 전부 헛소리이고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 부류가 “서양인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성적으로 해방되었다”라고 말하는 데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 즉, 자신의 정욕을 마음껏 풀어놓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왜 이 부류가 이렇게 당당하게 그 부정적인 사물들을 따를 수 있겠느냐? 먼저, 그들은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어서, 낯선 일을 직면했을 때 양심과 이성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분명 인성의 특징이 없다. 명백히 긍정적인 사물을 긍정적 사물로 이해하지 못하고, 긍정적 사물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그런 부류는 분명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른다면, 그는 분명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릇된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설사 잘못된 일,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지각이 없다. 단언컨대 이런 부류는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으며, 삶이나 생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고, 양심으로 어떤 일의 맞고 틀림을 가늠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종종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잘못된 일을 하고, 그 후에도 아무 지각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이 매우 이치에 맞다고, 자신이 한 일이 지극히 옳으며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집 아이가 말썽을 부리는 것을 보면 “아이가 이렇게 말썽을 피우니 딱 봐도 좋은 재목은 아닌 걸 알겠네. 나중에 커도 제대로 된 일을 못 하겠지. 저 애한테 무슨 미래가 있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기 아이가 말썽꾸러기라는 소리를 들으면 “말썽 좀 피우는 게 뭐가 어때서? 아이가 말썽을 피운다는 건 잘났다는 증거야. 크면 두각을 드러내겠지. 아주 높은 자리에 오를지도 몰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아이가 말썽을 피우면 미래가 없을 거라고 하고, 자기 아이가 말썽을 피우면 커서 두각을 드러낼 거라고 하는데, 그의 말 중 어느 것이 맞겠느냐? (둘 다 맞지 않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의 이런 말이 공정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양심의 지각이 없다는 증거이다. 아직 자라지도 않은 남의 집 아이를 두고, 어떻게 나중에 미래가 없다고 단정한단 말이냐? 사람이 커서 성공할지 안 할지는 하나님이 예정한 바와 그가 걷는 길에 달려 있다. 어찌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겠느냐!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양심의 지각이 없다는 뜻이다. 똑같은 말썽꾸러기라도 자기 아이는 긍정적으로 말하고, 다른 사람 아이는 부정적으로 말하는데, 그의 말이 공정하겠느냐?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공정하겠느냐? (양심 있는 사람이 공정합니다.) 양심 있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니, 바로 정직함과 선량함이다. 정직함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말하고 행동할 때 마음이 올바르며, 하는 말이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며 치우치거나 두둔하지도, 감정에 연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 아이가 말썽을 피우면 커서 변변한 사람이 못 될 거라고 하고, 자기 아이가 말썽을 피우면 장래성이 있다고 한다. 똑같은 말썽꾸러기를 두고 각각 다른 얘기를 하는데, 이런 사람이 정직하겠느냐? (정직하지 않습니다.) 감정대로 말하는 사람에게 양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에게 양심이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다. 자기 아이에게는 좋은 말만 하고 축복과 기대를 싣지만, 남의 아이에게는 저주를 담아 말한다면 이는 선량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양심이 없기에 그렇게 악독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공정한 말은 하지 않고 궤변만 늘어놓는데, 이는 한편으로 그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씨가 선량하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음씨가 선량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의 상황이 어떻든 다 나쁘게 말한다. 그는 말할 때 꿍꿍이가 있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잘 안되기를 바란다. 또 악의와 저주를 담아 말하는데, 늘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도 양심상 꺼려지는 법이 없다. 그는 다른 이의 일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이런 식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외도를 했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봐 겁나 이렇게 말하는 여성이 있다. “제 남편이 바람을 피운 건 너무 잘나서예요. 잘생겼고 능력도 있으니까요. 지금 이 사악한 사회의 여자들은 너무 뻔뻔하죠. 그래서 제 남편한테 달라붙는 거예요. 여기에서 제 남편이 얼마나 잘났는지 알 수 있죠. 또 제가 남편을 잘 골랐다는 것도 알 수 있고요. 제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남편이 외도를 하면 “그 사람은 딱 봐도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에요. 돈도 없고 얼굴도 잘생기지 않았으면서 밖에서 바람까지 피우다니. 그 사람한테 붙어 있는 여자들은 다 눈이 멀었어요!”라고 말하며, 얼른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상대가 “당신 남편도 바람을 피웠잖아요. 당신은 왜 다른 사람을 찾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제 남편은 당신 남편과 다르죠. 당신 남편은 망나니지만, 제 남편은 너무 잘나서 다른 사람이 억지로 달라붙는 거잖아요. 제 남편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고, 당신 남편은 적극적으로 바람을 피운 거예요.”라고 말한다. 보다시피,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닥치면 말이 달라진다. 그녀 자신과 관련된 일은 모두 참작의 여지가 있고 특수 상황이라며 좋은 쪽으로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180도 달라져서 나쁘게 말한다. 그럼 만약 이 부류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하겠느냐? “제 부모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에서는 좋은 사람들이에요. 남을 때리거나 욕하는 일도 없고, 누가 어려움에 처하면 항상 도와주죠. 사람 좋고 선하기로 소문이 났달까요. 제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분명 우리보다 훨씬 나았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형제자매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당신 부모님은 마귀입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형제자매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도 명목상 믿는 거겠죠. 좋은 분들은 아닐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당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지지해 주지 않는 거죠?”라고 말한다. 무슨 일에 대해서든 그의 말에는 일관성이 없다. 그의 말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는 법이 없고 공정하지도 않다.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런 기준을,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말할 때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각종 사람과 일을 판단하는 공정한 기준이 없다.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 좋고 긍정적이고 온갖 정당한 이유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전부 정죄되고 저주받고 내쳐져야 마땅한, 마귀 사탄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 형제자매지만, 교회의 형제자매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며, 이 사람은 불신파고 저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없어서 모두 제명해야 한다는 둥 말을 늘어놓는다. 형제자매가 실수를 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즉시 모든 사람 앞에서 폭로하고, 눈을 부라리며 훈계하고 깎아내리지만, 자기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두루뭉술하게 굴며 애써 궤변을 지껄인다. 이런 사람에게 공정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조금도 공정하지 않다. 그는 형제자매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눈을 부라리고 ‘원칙’을 ‘고수’하면서 스스로 진리 실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사람들 앞에서 수시로 “제가 얼마나 원칙을 잘 지키는지, 얼마나 입장을 확실히 하는지, 얼마나 진리를 잘 실행하는지 보세요.”라고 으스댄다. 하지만 자기 집안 일, 자기 남편(아내), 자녀, 친척, 심지어 자기 집 강아지를 대할 때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그가 기르는 개가 낯선 사람을 보면 짖어 대고 집에 아는 사람이 와도 함부로 물면 그는 “우리 개는 정말 충직한 집지기랍니다. 주인인 저한테 절대적으로 충성하죠. 언제나 변함없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집 개가 낯익은 사람을 보고 그렇게 함부로 물면 “이 개는 눈이 삐었군요. 누가 온 건지 보지도 않네요. 집을 지키는 데 원칙이 없어요. 함부로 물어 대다니!”라고 말한다. 개를 대할 때조차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런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고 합리적이며 긍정적인 사물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심지어 자신이 진리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행하는 모든 불공정한 일과 자신이 말하는 모든 왜곡된 논리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고, 절대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네가 지적하고 폭로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는 자기 말과 소위 원칙을 시종일관 고수하며, 심지어 자신을 정의의 화신으로 여겨 모든 일을 판단하려 한다. 사실 그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취하는 관점과 입장은 진리 원칙과 완전히 대립되고 반대되는데, 그 자신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한다. 또 그의 입에는 궤변과 그릇된 주장만 가득한데도 시종일관 고수하려 하고, 심지어 진리에 대항하면서 시비와 진리를 아는 사람들과 논쟁하려고 한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사리 분별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설사 그의 행동과 그가 고수하는 일이 사람들 눈에 잘못으로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갖가지 모습에서 드러나듯 그는 결코 정직함, 선량함, 이성이라는 인성의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 일상생활 속 각종 사람과 일을 대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는 어린아이나 개를 대할 때조차 판단이 왜곡되어 있다. 자신이 기르는 개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개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개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의 입에서는 “좋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절대 어떤 사람이나 일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으며, 더욱이 공정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인성에는 오직 감정과 편파적 태도만 존재하며,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 일만을 지킨다. 그 외에는 살면서 자신이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집단에서든, 어떤 일에서든 그가 드러내는 본성의 특징은 모든 객관적 사람과 일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다. 그는 순전히 자신의 사상 관점, 또는 자신에게 유리한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하고 대한다.
인성의 특징이 없는 이런 부류는 인성의 정직함, 선량함,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이 부류는 다루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루기도 어렵고 상대하기도 어렵다. 너는 절대 그들이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일 기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떠한 올바른 사상 관점도 받아들일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많은 올바른 관점과 긍정적인 사물들이 그들에게 오해받고 왜곡된다. 또 왜곡된 후에는 이 부류 특유의 갖가지 사상 관점과 주장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아무리 많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 아무리 많은 설교와 교제를 들을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시종일관 자신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고수하며, 줄곧 내려놓지 못한다. 하나님이 진리를 공급해 주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어떤 사람이나 일을 올바른 말과 방식으로 대하고 평가하지도 못한다. 인성적 특징을 볼 때, 그들은 오직 그들 고유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 각 부류의 사람과 일을 대하며, 또 그렇게 계속 고수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류에게서는 교만하고 간사한 성품 외에도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성품을 하나 볼 수 있는데, 바로 몹시 강퍅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볼 때, 이 부류는 매우 집요하고 고집스러우며, 심지어 썩어 있다. 이런 부류와 접촉해 몇 가지 화제에 대해 대화할 때, 혹은 그와 교류하다가 함께 어떤 일을 대면할 때, 너는 그가 일을 대하는 태도와 성품이 몹시 강퍅하고 집요하며 고집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분명 정상인이라면 쉽게 받아들일 옳은 일, 옳은 사상 관점이라도 그는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하고, 많은 난관을 마주해 너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한다. 그리하여 너는 그 사람이 매우 골치 아프다며 ‘이렇게 간단한 일이 왜 그 사람한테만 가면 난제가 되는 거지? 그는 사람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옳은 일이나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늑대에게 고기를 포기하고 각종 채소를 먹으라고 하는 것만큼 힘들다. 이는 그의 속성을 바꾸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몹시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소한 일에서 입이 아프도록 말을 하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 겨우 그를 설득해 받아들이게 했을지라도, 다음에 또 일이 닥치면 그 강퍅한 성품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치우치고 집요할 것이며, 고집스럽고 썩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류를 많이 접하고 경험하다 보면 사람마다 내면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부류의 본질에 대해 말하자면, 네가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에서 아무리 애를 써 그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 겨우 성과를 얻었을지라도, 관점과 입장의 문제,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영원히 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사람에게는 고유한 속성이 있고, 사람마다 속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하면서 순조롭게 소통이 되지 않고, 조화롭게 협력할 수도 없으며, 어떤 일을 논하든 관점이 금방 조화롭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둘의 속성은 다른 것이다. 맞고 틀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런 부류는 인성에 맞고 틀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명백히 맞는 사상 관점, 맞는 말, 맞는 일을 놓고도 절대 그것이 왜 맞는지, 어디가 맞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뭘 근거로 당신의 말이 맞다는 겁니까? 뭘 근거로 제 말은 틀렸다는 거죠? 당신의 말이 대체 어디가 맞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때로는 네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을 나열하고, 도리를 설명하고, 많은 예시와 비유를 드는 등 엄청난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야 그에게 한 가지 일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 간신히 그 일을 설명했을지라도, 다음에 일어나는 일 역시 많은 심혈과 노력을 들여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 매번 이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흘러 결국 네 그런 노력으로도 한 사람의 속성을 바꿀 수는 없음을, 너는 무의미한 일만 잔뜩 한 것임을 알게 된다. 아무리 많은 힘을 쏟고 큰 희망을 걸어도 네가 얻는 성과는 매우 작을 것이다. 사람의 속성은 아무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맞고 틀림조차 모른다면, 그의 속성을 바꿀 유일한 방법은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것뿐이다. 운이 좋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지만, 운이 나빠 또다시 사람이 아닌 것으로 태어난다면, 이 부류가 맞고 틀림을 알게 될 가망은 없다. 바로 이런 것이다.
인성의 특징이 없는 이 부류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특이점을 보인다. 바로 그는 누구에게서든 갖가지 결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똑같은 결점이 자기에게 있으면 결코 그것을 결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장점과 뛰어난 점이 있든 그는 보지 못하며, 그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아내고 약점을 들추어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모두가 그와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한다고,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남 탓이고 자신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스스로를 인식해야 할 쪽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 부류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절대 이성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못하고, 또 이성적이고 올바르며 공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대하지도 못한다. 말해 보아라. 그의 이러한 일 처리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옳으냐, 그르냐? (그릇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알고 있겠느냐? (모를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도덕적 우월감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대한다.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시선은 자신이 생각하는 소위 ‘맞고 틀림’으로 남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잘못됐다고, 자신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논쟁이 생겨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 다른 사람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이 초래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으니 바뀌고 변화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오직 결점과 문제점만 볼 뿐, 단 하나의 장점도 보지 못한다. 반면 자신은 전부 장점뿐이며 결점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성이 없는 사람에게 눈이 있어 무엇하겠느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는 각 부류 사람의 장점과 뛰어난 점을 보지는 못하고 단점만을 ― 사실 그것 또한 꼭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 물고 늘어지며 확대해서 떠들어댄다. 문제가 없을 때는 상관없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상대방의 단점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당신이 저보다 뭐가 낫죠? 당신이 저보다 낫다면 왜 이런 문제를 만든 겁니까!”라며 내면 깊은 곳의 불만을 모두 터뜨리고, 마음속 진실한 관점을 전부 드러낸다. 그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는 법이 없다. 다른 사람의 어떤 모습이든 그의 눈에는 문제나 결점으로 보이며, 그의 사상 관점에서는 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 그릇된 것, 부정적인 사물이고, 그가 꼬투리를 잡아 판단할 대상이다. 이런 부류는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면 깊은 곳에서 그들의 소위 ‘옳고 그름’이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옳은 것이고, 그릇되었다고 여기면 그릇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과 취향, 그리고 이익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며, 공정하게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 자신과 맞지 않는 것,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 눈에 차지 않는 것은 일괄적으로 그릇된 것, 나쁜 것이고, 상의할 여지조차 없다고 여긴다. 이런 부류는 다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섭기까지 하다. 네 곁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사상 관점이 표출되는 순간, 그 인품도 낱낱이 드러나 그의 영혼 깊은 곳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그가 좋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런 것들을 보고 평생 그를 역겨워할 것이다. 물론 그의 이 모든 문제가 드러날 때, 치우치게 이해하는 모습이나 강퍅한 성품 아래에서 드러나는 집요함, 고집스러움, 편집증적인 모습 등에 대해 너는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답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 부류는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즉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왜곡된 논리를 붙들고 옳은 도리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토록 많은 설교를 들었으니,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어야 하며,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일말의 변화가 생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도 이방인의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고, 잘못된 관점과 왜곡된 논리를 옳은 도리, 진리라고 여기며, 심지어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옳은 일까지 부정적인 사물로 여겨 정죄하는 것이겠느냐? 그의 그릇된 사상 관점이 드러날 때 너는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삶 속에서 흑백을 전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말을 이토록 많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속성이 있으니,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부모가 교육한 것이 아니고, 환경의 영향도 아니며, 사회 교육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그의 인성적 특징이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는 존재다.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성을 드러내는지,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지, 생활 속 일상적 모습은 무엇인지 등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속성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이 지닌 속성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는 뱀이 그 구불거리는 속성 때문에 절대 곧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과 같고, 옆으로 걷는 게를 좁은 공간에 두어도 똑같이 옆으로 걷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속성으로, 속성은 바꿀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맞고 틀림을 알지 못하는 특징은 그 사람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삶 속에서 이와 관련된 모습을 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더없이 정상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나 처신 측면에서 맞고 틀림을 모르며, 마찬가지로 남녀의 행동 방식 측면에서도 맞고 틀림을 모른다. 예를 들어, 이성과 접하고 교류할 때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어떤 화제와 말, 행동을 피해야 하는지, 일상적인 언행에서는 어떤 세부적인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지 등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이성과 교류할 때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을 누군가가 가르쳐 줘야겠느냐? 어릴 때는 부모가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분별력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가정이나 사회에서 교육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천성 아니겠느냐? 남녀 간에 선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은 인성의 한 특징이다. 인성의 특징 안에는 양심과 이성이 있으니, 당연히 염치가 무엇인지 안다. 또 염치를 알면 이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것이다. 만약 그것을 모르고, 일을 처리할 때도 염치가 없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잘못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하고 이성적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지나치고 선을 넘는 것인지조차 모른다면, 그 사람의 인성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정상인이라면 최소한 알아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알고 또 지킬 수 있다면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춘 것이고, 이것들조차 몰라 남들이 일깨워 주고 제지해 줘야 한다면 그런 사람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특히 어떤 부류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동성과 함께 앉지 않고, 일부러 이성 옆에, 그것도 아주 바짝 붙어 앉는다. 그는 그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주의를 줘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붙어 앉으면 좀 어때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제가 몇 살인데, 당신이 지켜봐야 하죠? 왜 자꾸 저만 쳐다보는 겁니까?” 그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요?”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데, 염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꼭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문제가 되는 것이냐? 아무 짓도 안 하면 남녀 간에 선이 없어도 되는 것이냐? 남녀는 유별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유별하다면 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을 지키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염치 때문이다. 염치가 있으면 이성과 접할 때 자연스럽게 선을 지키게 된다. 다른 사람이 감시하거나 환경적 제약이 없어도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정도 염치조차 없어서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일깨워 줘야 한다면 그런 부류는 매우 위험하다. 어떤 사람들은 남녀 간의 일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며, 툭하면 이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수작질을 한다. 특히 어떤 사람은 이성 앞에서 과시하기를 유독 좋아해서, 이성이 많을수록 더 교만해지고 흥분하며, 더욱 신이 나서 과시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적절하고 낯이 서지 않는데, 본인은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정상적인 거지. 남자와 여자 사이는 이래야 하는 거 아니겠어? 여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난 거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거 아니냐고. 같이 좀 노는 게 뭐 어때서? 아주 즐거운 일 아니야? 당신들처럼 그렇게 진지하게 살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사람들 하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남녀가 함께 협력하면 지치지 않는다고 말이야!’ 보아라. 어떤 사상과 관점이든 그는 다 받아들인다. 특히 그는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인 말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반발하고 반박하고 거부한다. 네가 일깨워 주면 그는 반감을 갖고 마음속으로 너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식의 행동을 고수한다. 어떤 사람은 한순간 자제력을 잃거나 부주의로 인해 가끔 방종하게 구는데, 남들이 일깨워 주지 않아도 마음이 불안해져서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갖춰야 할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는 이미 도가 지나치고 심하게 선을 넘어서 육체의 정욕을 풀어놓는 지경에 이르렀고, 많은 이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고 하나님에게 혐오받아 도태될 테지만, 막상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욕을 풀어놓는다고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라며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무 살이 넘은 여자가 이성과 제멋대로 어울리며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소문이 나서 명예가 더럽혀질 수 있는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염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염치가 조금도 없다. 남녀를 막론하고 남녀 관계의 일에서 마음속에 아무런 마지노선이 없고 ‘염치’라는 두 글자조차 모른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인성의 특징이 없음을 십분 증명한다. 인성의 특징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 관계에서 잘못을 저지르거나 가끔 과한 행동을 했을 때 평생 후회하며,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 한편이 바늘로 찌르는 듯 불편하고 불안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고 앞으로는 영원히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원한 오점으로 남는 것이다. 정상인은 남녀 관계에서 염치와 마지노선이 있어서 억제하고 절제하며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설령 잠시 자제력을 잃어 남녀 관계에서 실수를 범했을지라도 후회하며,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상황이 허락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방종하거나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절제한다. 이 절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겠느냐? 바로 양심과 이성의 제약이 가져다주는 좋은 결과이다. 양심과 이성은 너를 제약하고 관리하며, 너에게 마지노선을 제시해 준다. 그 마지노선은 네가 이런 일을 대하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이 마지노선을 넘지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연약함이나 어떤 특수한 이유로 한순간 자제하지 못해 남녀 관계에서 실수를 범하면, 마음속 깊이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끼며 심지어 평생을 후회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성이 없는 사람은 그런 일을 하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방에 떠벌리며, 심지어 다른 사람과 비교까지 하면서 그 또한 능력이고 재주라고, 매력이 있는 것이고 이득을 챙기는 것이니 챙길 수 있을 때 챙기지 않으면 손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에게 기회가 생기면 또 그런 일을 하지 않겠느냐? 답은 뻔하다. 분명히 할 것이다. 그런 일을 하고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떠벌리니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게 실망스러운데, 떠벌리기까지 하니 더더욱 역겨운 것이다. 그가 한 일은 남들이 보기에도 수치스러운데, 그 자신은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이런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 이처럼 수치스러운 일을 자주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후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으며, 앞으로 기회와 여건이 되면 또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몰염치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부류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때 괴로워하거나 가책을 느끼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가책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양심과 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수치스러운 일을 할 때, 이방인조차 부끄러워할 만한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할 때는 더더욱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실행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것이 이방인 눈에는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없고, 인성과 도덕에 위배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원칙을 어겨 책망 훈계를 받을 때, 양심과 이성이 있기에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고 양심이 불편해질 것이다. 반면,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몰염치한 일, 남들이 침 뱉을 역겨운 일을 하고도 괴로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니,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더없이 정상적인 일 아니겠느냐?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므로 이런 부류는 구제 불능이다.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많겠느냐? 주변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 동료,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보아라. 그들 중에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매우 적습니다.) 맞고 틀림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즉, 이 세상에서 인성이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은 많지 않고, 언행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함부로 굴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사리에 맞게 말하고 억지 논리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이방인 중에는 이런 사람이 더욱 드물다. 어떤 이방인과 접하든 그가 하는 말만 들어 봐도 어떤 작자인지 알 수 있다. 이방인의 말에는 과장이 너무 많고 불순물이 너무 많이 섞여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감정에 치우치거나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말한다. 떠 어떤 잘못된 언행을 하든 마음속 깊이 아무런 자각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서,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맞고 틀림을 모르고, 자기가 하는 말과 고집하는 관점이 모두 틀렸는데도 한사코 그것을 고집하며, 그릇된 관점을 올바른 것, 진리로 여기고, 그런 관점으로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려 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삼십 년, 심지어 평생 믿었지만 긍정적인 사물이 무엇이고 부정적인 사물이 무엇인지,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전혀 모르는 채, 자기에게 이로우면 좋아하고 지키고, 자기에게 이롭지 않으면 나쁘다, 틀렸다 하며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처세 철학과 처세 태도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받겠다고 말하니, 웃기는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말하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을 증거한단 말이냐? 맞고 틀림조차 모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겠다니, 헛소리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어리석은 사람을 써서 하나님을 증거하게 할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으십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옳다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그의 사상과 관점으로 판단할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은 그의 사상과 관점에도, 관념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당연히 그의 육적인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하나님 말씀이나 사역은 그의 바람이나 개인적인 욕망, 야심, 각 측면의 이익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10~20년씩 믿은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진심의 말 한마디, 즉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맞고 틀림이 없다는 말을 끌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하나같이 숨겨진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몇 년간 몸으로 느낀 것이 있고, 또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공직에 오르고 싶었지만 오르지 못했고, 복을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으며,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아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있지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한다. 말했다가 하나님을 노하게 할까 봐,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힐까 봐, 또 사람들 마음속에 만들어 둔 자신의 좋은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서 많은 것을 마음속에 억눌러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각이 없고 무언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무언가’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한 모든 긍정적 이해와 인식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쌓여 온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 불복종, 불만, 그리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믿는 대상이 하나님이기에 말을 하지 못한다. 왜 그의 마음속에는 말 못 할 것들이 이렇게 많겠느냐? 이 또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추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그 일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진리를 구하거나 실행할 길을 찾지도 않았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이자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한 번도 없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거나 중시하지도 않았으며, 진리를 어떻게 실행할지 참답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줄곧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엿보고 의심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말씀에 반발하거나 자신의 그 소위 ‘옳은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평가하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온 끝에 드디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은 게 뭐지?” 이 말인즉슨 하나님을 믿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세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고 적잖은 대가를 치렀는데, 복 받고 싶은 욕망과 명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충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 주지 않았다고 여겨 마음속으로 불복과 불만을 느끼며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복을 받기 위해, 종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집에서 억울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했지만, 결국에는 바라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류가 있지 않겠느냐? 이런 부류가 적어도 일부는 있다. 그들이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문제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을 능력이 없는 데다, 복 받으려는 속셈을 품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따랐다. 비록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헌신했고, 많은 대가를 치르며 숱한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에는 시종일관 관심이 없었고, 한 번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으며,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도 진리를 교제할 수 있고, 또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진리 실제가 없다고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진실한 체험 간증 한 편 써 내지 못한다. 그럼 그들의 진리 실제는 어디에 있겠느냐? 그들의 언행은 여전히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이방인과 비교할 때, 얼마간 행위상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처신하는 방식과 방법, 만사와 만물을 대하는 사상과 관점에 있어서, 특히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맞고 틀린 일에 대해서 자신의 사상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뿐, 한 번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 일을 바라본 적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곧 긍정적인 사물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 곧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는 법이 없고, 자신이 직면한 사람과 일에서 결코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자신의 바람과 의도, 기호대로 일하고 생활하며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자신이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큰 기여라고,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여긴다. 자기 방식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상상한 하나님을 믿고, 자기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자기 뜻대로, 함부로 행동하다가 책망 훈계를 받거나, 하나님 집에서 중용되지 않을 때면 낙심하고 실망하며, 마지막에는 이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어서 뭘 얻었지?’ 그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진리를 얻지 못한 이유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고, 진리도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도, 하나님이 네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해서도 아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묵상하거나 생각하거나 실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진리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 눈을 막고 네 마음을 닫은 것이 아니라, 네 취향과 그릇됨이 네 마음을 가로막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공급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네가 한 번도 하나님 말씀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너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고 순종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네게는 그저 하나의 형식이자 공식일 뿐, 너는 진리와 생명을 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을 믿어 최종적으로 얻을 결과는 단 하나,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뿐이다.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 무엇 때문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 개인이 걸어온 길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노파심에 간곡히 타이르며 도와주었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책망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늘 복 받기를 추구하거나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너 개인이 걸어온 길 때문이니,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이지, 하나님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고, 진리도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네가 사람인 이상, 네 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설령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정상인보다 조금 떨어진다 해도, 마음을 다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면, 몇몇 도리를 깨달아 일부 규례를 지키는 데 그친다 해도 어느 정도 수확을 얻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를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너는 해내지 못했겠느냐? 똑같이 설교를 듣고 본분을 이행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진리를 얻고 기준에 맞게 본분을 이행하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겠느냐? 하나님은 네게 본분 이행의 환경을 안배해 주었으며,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 내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너를 막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너는 시종일관 속세와 육적인 향락을 탐했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거부했고, 사탄 철학과 문화, 지식을 긍정적인 사물이자 진리로 여겨 지키는 한편, 하나님 말씀과 진리는 원수, 반대편으로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음속으로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지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구원받고 싶어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했는데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인정받겠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으며,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너는 이방인과 같으니 구원받지 못한다.
단 한 번도 마음속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발탁하여 쓰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하나님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까? 하나님 집에서는 왜 계속 나를 발탁해 중용하지 않는 거지? 나는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고, 목표와 의지도 있어. 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학식도 힘도 있고 고생하며 대가도 치를 수 있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왜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기회가 주어지는데 왜 나만 기회가 없는 거지?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셔!’ 그런데 왜 네가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발탁하여 쓰는 원칙에 부합하는지는 살펴보지 않는 것이냐? 네 마음은 하나님에게 닫혀 있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거부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네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느냐? 너는 일을 할 때 하나님 말씀을 구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도, 진리 원칙도 구하려 하지 않는데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너를 쓰겠느냐? 설령 하나님이 환경을 안배하고 하나님 집에서 기회를 주어 너를 발탁해 쓴다고 해도, 네가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역을 맡아 해낼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을 교회 사역에 쓴다면 틀림없이 자기 뜻대로 함부로 굴면서 방해하고 교란할 것이다. 결국 그에게는 도태되는 결말 하나밖에 없다. 도태되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거짓 리더로서 실질적인 사역을 감당하지 못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적그리스도로서 제멋대로 굴며 단독으로 행동하고, 교회 사역도 하나님 집의 이익도 지키지 않아서 결국 도태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법이 없고, 하나님 말씀 읽기를 싫어하며, 마음이 하나님에게 닫혀 있고, 일을 할 때도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기회를 주고 하나님 집에서 너를 발탁하여 쓴다고 해도,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떤 일도 독립적으로 맡아 해내지 못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집에서 발탁하고 써 주기를 바라는 네 마음이 올바르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얻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네 그 마음은 야심과 욕망에 불과하며 교만한 성품이 작동한 것이니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데, 하나님 집에서 너를 쓸 엄두나 낼 수 있겠느냐? 너를 쓰면 교회 사역에 골칫거리와 손실만 생길 것이다. 또 너는 아무 일도 제대로 못 해내서 나중에 여러 사람이 지원하고 수습하러 다니게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너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어떤 것이든 다 매우 중요한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일이 생기면 책임질 수 있겠느냐? 감당하지도, 맡아 해낼 수도 없으면서 하나님 집에서 중용해 주기를 바라니, 야심이 꽤 크구나. 정말로 발탁받아 교회 사역을 책임지고 싶다면, 어째서 진리를 더 많이 갖추고 깨닫는 데 공들이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지 말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으며,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읽어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라도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너는 순종하는 태도조차 없으니,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집에서 발탁받아 교회 사역을 하겠다니, 그러면 며칠도 못 가 도태될 것이다. 이런 부류는 내면 깊은 곳에 저마다 포부가 있는 것 같지만, 그 포부는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마음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며 버리고 헌신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이 줄곧 하나님에게 닫혀 있고 진리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네 말이 정말 맞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라고 말하겠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정말 진리를 조금이라도 얻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고, 네 안에는 진짜 보배가 있는 것이니, 하나님 집에서도 너 같은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가 얻은 것은 진리도, 보배도 아니라 가슴 가득한 억울함과 불복, 불만, 원망이다. 너는 네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말도 맞다. 정말 그러하다. 네가 조금이라도 진리를 깨닫고 얻었다면 억울함, 불복, 원망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해, 헤아림, 순종, 경외 등 긍정적인 것들만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네 내면에는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온통 부정적인 것뿐인데, 너는 그것들을 죽도록 붙잡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구실로 삼을 수 있고 핑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네 그 분노와 증오, 판단, 불복, 불만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독소이니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절대 너를 구원받게 해 주지 못하고,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적나라하게, 솔직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한 피조물이 됨으로써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게 하지도 못한다. 반대로, 만약 네가 그런 것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며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네 내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가라앉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갈수록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요구와 성품 본질에 대해서도 갈수록 반감을 품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것은 너에게 치명적인 재앙이니, 반드시 바로잡아야지,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멸망으로 걸어갈 뿐이니, 그것들을 꺼내 솔직히 털어놓고 해부하며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혹자는 “저희 같은 부류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하는데,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말하건대, 네 안의 억울함과 불만, 불복, 분개, 증오, 판단 등은 전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다. 이 말을 알아듣고 네 안의 문제를 분별하게 되었다면 그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혹자는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니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규례를 지키는 것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선행을 많이 하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악인을 따르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문제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 집에 보고하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할 수 없다면, 솔직히 말해 너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네 앞에 놓인 것은 광명이 아니라 암흑이며, 너는 여전히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니 구원받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다면, 어떤 일이 닥치든 어느 정도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많은 일에서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남들에게 기괴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사람과 함께 지내거나 일을 처리하면 많은 일에서 통하지 않고 많은 말이 먹히지 않으며, 생각과 관점이 매우 별나고 극단적이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사람들이 다 옳다고 인정하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궤변과 사설을 늘어놓는다. 특히 어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늘 뒷공작을 벌이고 이간질하며 시비를 일으키고, 매일 제대로 된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사람과 일을 판단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아무도 그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않고 흥미를 갖지 않아도 그는 지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뒤에서 남을 판단하며 시비를 일으키고,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뒤에서 불평을 늘어놓고 원망하며 심지어 판단한다. 그의 삶은 온통 이런 것들뿐이다. 그에게서 자기 인식을 교제한다거나 하나님 말씀에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었다거나 어떤 일에서 체험이 생겨 함께 나누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렇듯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때일수록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으며, 그저 의욕 없이 기운이 빠진 모습을 보인다. 그가 열중하는 것은 이간질하고 시비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방인처럼 시비와 옳고 그름의 각도에서 바라볼 뿐, 정상 인성과 양심, 이성의 관점에서 갖가지 일을 논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모기나 파리, 쥐 같은 역할을 자처하며 다른 이의 정상적인 삶을 교란하고 방해할 뿐이다. 그가 말을 하고 관점을 보이거나 어떤 일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순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싫어하고 교란된다. 분량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 미혹되어 속박받기도 한다.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늘 좋지 않은 역할을 한다. 끊임없이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일으키고 이 사람 저 사람 흉을 보며 이 일 저 일을 늘어놓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오히려 사람은 살면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잘못된 삶과 처세 방식을 옳은 것으로, 정상 인성이 지녀야 할 삶의 방식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이 책망하고 폭로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방식이 이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지 않으면 다른 무리로 가서 자기와 뜻이 맞는 동류를 찾아 시비를 논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는 순간 매일 행복하고 즐겁다고 생각한다. 이 부류는 어떤 자리에서든 시비를 일으키고 이간질하며 사람을 포섭하고 교란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한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무슨 목적을 이루려는 것인지 물어봐도 그는 자기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어쩌면 뚜렷한 목적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일상은 이런 모습과 행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는 어떤 속성이겠느냐?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거냐고 하면 그는 오히려 이유를 잔뜩 늘어놓는다. “저는 남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지장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교란하려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집 사역을 교란할 생각도 없었고요. 그냥 마음속 말을 좀 한 것뿐인데 그것도 안 됩니까?” 그를 폭로해도 그는 불복하며 기어코 그렇게 행동하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누구를 판단하든, 어떤 시비를 일으키든 그처럼 살고 처신하는 방식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낙으로 삼으니, 이 부류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심각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옳은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본연의 일인지 알지 못하고, 어떤 것이 본연이 일인지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영락없이 건달이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교란을 끼쳤는지 여부를 떠나, 매일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모르고, 시비 일으키기와 이간질을 본업으로 삼으며, 양심에 자각이 없는 그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정말 정상 인성이 있다면 언행에 어떤 원칙이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더욱이 사람으로 처신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바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은 무엇이 필요한지,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정상 인성이 없으니 짐승과 다름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하다. 고양이는 낮에 잠을 자고 때때로 놀다가 날이 저물면 쥐를 잡으러 간다. 쥐는 인간에게 해로우니,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인간에게 이로운 일이다. 개의 삶도 보아라. 개는 주인 옆에서 노는 것 외에도 집을 지킨다. 낯선 사람이 오면 짖어 주인에게 알리고, 데리고 외출하면 곁에서 주인을 지키며,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주인을 보호한다. 그렇게 경비와 집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양이든 개든 모두 본연의 일을 한다. 물론, 동물이 이렇게 하는 것은 양심에 지배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천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동물들을 창조할 때 그런 천성을 만들어 주고 그런 사명을 주었으니, 그 사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동물도 책임을 다하고 본연의 일을 하는데, 사람이라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매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일이 진리와 관련 있고 어떤 일이 본연의 일이 아닌지, 마음속에 기준과 마지노선이 있어야 하며, 이 기준과 마지노선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으로 금방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탕하고 절제 없이 살며 시비 일으키기를 즐기는 것 등은 어떤 사람이 하는 짓이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건 다 본업이 없는 양아치나 건달이 하는 짓이지. 정상적인 사람은 제 할 일도 바쁜데,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아무 의미도 없잖아! 게다가 시비를 일으키고 이간질하는 것은 다 부정적이고 잘못된 일이니,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그런 일은 아예 하지 말아야지. 가끔 특수 상황에서 누가 기분을 상하게 하면 혈기 때문에 몇 마디 불평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거나 본업으로 삼아서는 안 돼!’라고 의식할 수 있다. 이는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렇기에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런 일을 본업으로 삼는다. 본분 이행에 지장이 생겨도 조급해하지 않고, 사역을 제대로 못 해서 다른 사람이 재촉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모두가 본분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데 못 본 척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눈다. 또 시비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간질을 한다. 이는 다 정상 인성의 모습이 아니라 비인류의 모습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성인이 된 후에는 마땅히 올바른 일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수립해야 하는지, 어떤 이상과 추구하는 바를 가져야 하는지, 무엇을 믿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고 의미 있는지 등 마땅히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어떤 사역이든 양이 많고, 진도와 효율이 있어야 하니 모두가 바쁘다. 시비나 일으키고 이간질할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 대다수는 그런 짓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취미가 없으며, 그런 취미가 있다면 매우 특이하고 별나게 보인다. 시비 일으키기와 이간질을 취미로 삼는 사람은 비인류이다. 정상인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정상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일 처리 원칙도 어기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작자들로, 정상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비인류의 역할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고, 옳다고 여기니, 이것이 바로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늘 좀도둑질을 한다. 예를 들어, 남들의 개인 정보, 사적인 일기나 묵상 노트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기도를 몰래 엿듣거나,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며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피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컴퓨터에 어떤 메시지가 와 있는지, 누구와 연락하는지,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영상을 보는지 몰래 들여다보는 등 늘 남의 사생활을 엿본다. 손버릇이 나쁜 사람들은 다른 이의 개인 물건을 함부로 뒤지고, 짐 보따리를 뒤적이며, 심지어 남의 침대까지 들춰본다. 남이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을 모두 살피다가 좋은 것을 발견하면 가져다 쓰고, 쓰다 보면 자기 물건으로 여긴다. 다른 사람이 간식이나 과자를 사 놓으면 몰래 들여다보다가 맛있는 게 있을 때 한 입 먹거나 하나 집어 가기도 한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쳐다보는 게 아니다. 입이 심심해서 먹고 싶은 것이다. 먹고 싶으면 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아무도 비웃지 않을 텐데, 왜 뒤에서 몰래 다른 사람 것을 훔쳐 먹는단 말이냐? 이렇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데, 심지어 자주 그런다. 남의 물건을 자기 것처럼 뒤지다가, 들키면 그냥 좀 봤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없을 때를 틈타 또 뒤지고 훔친다. 그는 염치가 없어 이런 일을 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나 하는 짓이냐? 보통 예닐곱 살 어린아이도 분별이 생기면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짓을 한다면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된 것이다. 마치 소매치기가 어딜 가든 되는 대로 슬쩍 집어 드는 것처럼,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훔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되어 손을 거두지 못하고, 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된다. 그는 천성이 도둑질하는 작자인 것이다. 이것이 비인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호기심에 기어이 남의 개인 물건을 들여다보려고 하는데, 봐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봐도 네 것이 되지 않고, 얻을 것도 없다. 정말 한 번 빌려 쓰고 싶다면 말을 해라. 상대의 동의를 구해 쓰면 된다. 일 처리가 당당해야지, 수상하게 굴어선 안 된다. 남의 옷을 입고 싶다면 당당하게 빌려라. 그리고 상대가 빌려주겠다고 해야 입을 수 있다. 상대가 아까워하면서도 빌려주는 것 또한 형제자매의 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빌려주지 않으면 몰래 입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인인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행실이 바르지 않고, 심지어 손버릇까지 나쁘다. 남의 물건을 몰래 뒤지면서도 잘못인 줄 모르고, 들켜서 지적을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물건 좀 살펴본 게 뭐가 어때서? 물건이 없어진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당신 물건이 거룩하게 구별된 것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좀 보면 안 된다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오히려 궤변을 늘어놓으니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행위 문제가 아니라 인성 본질의 문제이다. 어떤 본질 문제겠느냐? 이런 부류는 잘못을 저질러도 전혀 자각이 없고, 누가 발견하여 지적하면 받아들이기는커녕 변명하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계속 똑같이 하려 한다. 이런 자가 바로 비인류이다. 비인류의 특징 중 하나는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법이 없고, 전혀 뉘우치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고, 이유까지 한가득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일, 치우친 일, 그릇되고 사악한 일을 전부 옳은 일이라고 말하니, 이것이 바로 그릇된 이치를 올바른 이치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이런 특징을 갖추고 있고, 양심과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양심과 이성이 결여된 사람은 곧 비인류이다. 비인류는 이런 모습을 보인다. 그는 다른 사람 물건을 몰래 뒤지는데, 네가 아무리 폭로하고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뉘우치기는커녕 궤변을 늘어놓는다. “저는 그냥 다른 사람 물건을 좀 살펴봤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잘못입니까? 음란을 일삼고 살인, 방화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비하면 저는 최고로 좋은 사람입니다! 저처럼 좋은 사람을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제 불능이다. 혹자는 이토록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만, 인성이나 도덕으로 따져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진리로 가늠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자질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인성 측면에서 보자면, 양심과 이성이 결여된 사람은 곧 비인류이다. 스스로 얼마나 좋고 선하고 위대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든, 양심과 이성의 모습이 없고, 비인류의 모습만 잔뜩 살아 내고 있으며, 심지어 구체적인 행동 방식과 잘못된 사상, 관점까지 많다면, 그것이 바로 비인류이다. 비인류의 주된 특징은 진리도, 긍정적인 사물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것을 올바른 관점으로 여겨 받아들이며, 시비를 뒤섞고 흑백을 전도해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것이다.
딸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알고 딸을 이용해 큰돈을 벌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딸을 부자에게 시집보내기로 하고 많은 예물을 요구했다. 하지만 예물을 손에 넣은 후에는 먹고 마시며 즐기기 시작했고, 시간이 흘러 돈이 거의 다 떨어지면 다시 신랑 측에 가서 요구했다. 상대가 예물은 이미 줬으니 더 줄 수 없다고 하자, 딸을 또 다른 집에 보내기로 하고 많은 예물을 받았다. 첫 번째 집에서 딸을 시집보내지 않을 거면 예물을 돌려 달라고 하자, 그가 무슨 말을 했겠느냐? “내 딸이 그 집으로 시집가지 못 가는 건 그 집에서 예물을 충분히 주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 예물은 돌려줄 수 없소. 그러게 누가 넉넉히 주지 말랍니까? 돈도 충분히 주지 않고 내 딸을 데려가겠다니, 어림없는 소리지!” 돈을 갈취해 놓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첫 번째 집은 사기꾼에 무뢰한을 만났다는 걸 알고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집도 마찬가지로 속아 넘어갔다. 그 딸은 이리저리 여러 집과 혼약하며 괴롭힘만 당하다가 결국 시집도 못 갔지만, 가족은 적지 않은 돈을 챙겼다. 그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좋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는 딸의 혼사를 이용해 신랑 측을 속여 돈을 얻어냈으며, 돌려 달라는 말에도 그릇된 주장을 늘어놓는 등 조금도 이성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옳고 그름도 모르고 염치도 없으니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그는 전부 갖추고 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모르고 염치도 없으며, 남을 속여 얻어낸 돈을 쓰면서도 마음의 가책 없이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매일 태평하게 산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런 자가 있지 않겠느냐?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남을 속이기 위해 온갖 수법을 쓰기에,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다. 이방의 속세가 원래 그런 곳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남을 속인다면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니며 본성이 몹시 나쁠 것이니, 하나님을 믿어도 불신파이다. 이는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인과응보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남의 예물을 속여 빼앗고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으니, 이는 기만이다. 게다가 한 집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을 속이고도 태평하게 살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리해서 내보내야 한다. 하나님 집은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바꿔 놓을 수 없고,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어딜 가든 남을 속이는데, 하나님 집에 와서 형제자매를 속이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을 속이지 않겠느냐? 분명 그럴 리 없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어떤 사람이냐? 정확히 말하면 비인류이고, 비인류란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여기저기서 함부로 사기를 치지 않겠느냐?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어떤 형제자매들은 사랑으로 그를 대하며 어려움이 있으면 돕고 곤란한 일이 있으면 베풀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가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기꾼임을 알게 될 텐데, 이는 속아 넘어간 것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반드시 사기꾼을 분별할 줄 알아야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형제자매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니, 이런 사람을 발견하면 응당 제명해야 한다. 그는 소문이 좋지 않고 무슨 나쁜 짓이든 다 할 수 있으니, 그가 바로 사회의 무뢰한이다. 무뢰한이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교회에서는 무뢰한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무뢰한은 하나님의 선민들 가운데 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제명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자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물건 빌려 쓰기를 유달리 좋아해서 먹을 것이든 입을 것이든, 도구든 컴퓨터든 가구든 가리지 않고 빌리며, 심지어는 돈이나 액세서리, 자동차까지 빌린다. 또 혹자는 돈이 있으면서도 사지 않고 남의 것 빌려 쓰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남의 이득을 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외출할 때 남의 차를 빌려서 기름을 다 쓰고도 채우지 않고 돌려주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빌린 차를 쓴 후에도 돌려주지 않다가 상대방이 달라고 찾아와야 돌려준다. 또 어떤 사람은 빌린 도구를 망가뜨려 놓고도 수리해 주지 않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빌린 돈을 다 써 놓고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마치 자기 돈 쓰듯 하면서 상대가 그 일을 잊어버리기만을 바란다. 이는 고의로 남의 이익을 점하는 것이다. 그는 남의 돈으로 장사하거나 먹고 마시고 놀면서 자기 돈은 따로 모아 이자를 불리거나 주식에 투자한다. 누가 언제 돈을 갚을 거냐고 물으면 “돈이 생기면 갚죠. 지금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갚습니까!”라고 한다. 보아라. 이는 본색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의 속셈은 돈을 갚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자가 바로 무뢰한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손목시계가 좋아 보이면 이틀만 차 보고 싶다며 빌려 가서는 시계를 더럽혀 놓고, 상대가 돌려달라고 하면 외려 불쾌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말 쩨쩨하네요. 며칠이나 썼다고 벌써 가져가요!” 이것은 무슨 심보냐? 늘 남의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니, 이는 탐욕 아니겠느냐? 그는 물건을 빌리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늘 기회를 잡아 남의 물건을 빌리고, 무엇을 빌리든 돌려줄 생각은 안 하며, 자기가 가지려고 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불량배이고 무뢰한이며, 비인류입니다.) 이방인 중에는 이런 무뢰한, 비인류가 매우 많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이런 자가 없겠느냐? 만약 교회에 이런 자가 섞여 들어왔다면, 불량배, 무뢰한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뢰한 부류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며, 형제자매와 접할 때 늘 이득을 점하려는 심보를 품고 있다. 그는 언제나 형제자매 중에 누가 돈이 있고, 세력이 있는지, 누구 집에 좋은 것이 있는지 살피면서 오직 그런 사람들만 노린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용하고, 이익을 점할 수 있는 사람과는 어울리면서 늘 ‘형제자매는 한 가족’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형제자매의 물건을 빌리거나 그들을 부려 고, 심지어는 형제자매에게 자기를 접대해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일부 새 신자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다가 분별력이 없어 이런 자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집에 눌러앉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보면 먹어 치우며, 좋은 것을 보면 함부로 쓴다는 것을, 그러면서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며 온종일 이득만 취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반감을 품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기도 한다. 속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사람을 택하실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섞여 들어온 자로, 복음을 전한 사람도 그의 내막을 알지 못해 교회에서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님은 절대 이런 무뢰한, 비인류를 택하지 않는다. 이런 악인, 무뢰한을 발견하면 멀리하고 끊어 내며, 형제자매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저 밥이나 축내러 온 자일 뿐이다. 이런 무뢰한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네가 치우치게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최소한 인성이 좋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절대 무뢰한이나 악인을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뢰한과 악인을 구원하지 않으며, 이런 사람을 원치 않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하나님에게 드러나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느냐? (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모두가 극도로 반감을 느끼며 혐오하고 역겨워한다. 그럼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느냐?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택할 리도 없다. 하나님 집은 그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는 어떤 일도 맡을 수 없다. 그는 그저 건달이고, 밥만 축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이다. 그가 하나님 집에 온 것은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서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성실하며, 매우 솔직하고 사랑이 넘치고 남을 돕고자 한다고, 남에게 돈을 빌려줘도 차마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돈을 갚지 않아도 고발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득을 취하기가 제일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침 일하기 싫은데 형제자매에게 돈을 빌려 쓰면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교회에서 도와줄 테니 방세도, 용돈도 해결되어 생활상의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는 분별력이 없어서 정말로 이런 사람을 먹여 살리며 그가 이득을 취하게 하고 빈틈을 파고들게 한다. 이는 분별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무 어리석어서 사람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면 때때로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할 수 있습니다.) 분별할 수 있다면 이 부류를 정리하여 내보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니 뭔가 사랑을 베풀 필요는 없다. 그는 늘 공짜로 이득을 취하고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데, 이런 자가 바로 건달이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쓰고 네 물건을 함부로 사용한단 말이냐? 이런 사람을 용납하고 방임하며 먹여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준 본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네게 맡간 부탁이나 사명도 아니다. 너에게는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 진정한 형제자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에 부합하며, 그것은 너의 책임이자 의무다. 진정한 형제자매를 공급해 주고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것은, 설령 그것이 돈이나 물질적인 도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으며, 선행이고, 하나님에게 기억될 일이다. 하지만 비인류들에 대해서는 예의 차릴 필요도, 사랑을 논할 필요도 없다. 사랑과 포용, 인내는 진정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것이다. 비인류들, 불량배나 무뢰한, 건달에게는 사랑과 포용, 인내를 베풀 필요가 없다. 이는 원칙이다. 염치도 모르고 옳고 그름도 모르는 건달, 밥이나 축내는 이에게 시종일관 인내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리석고 원칙이 없는 것으로, 하나님은 조금도 기억하지 않는다. 네가 하는 그런 일은 진리와 무관하고, 하나님에게 열납되지도 않으니 헛수고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시로 형제자매를 공격하고, 리더 일꾼을 공격하고, 하나님 집과 하나님 집의 사역 지침을 공격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공격하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무슨 명목을 내세우더냐? “저는 일 처리가 공정합니다. 제 마음에는 딴생각이 없어요. 저는 오직 진리를 구하고 참답게 대하는 태도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라고 한다. 꽤 일리 있고 당당한 말 같지만, 사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다 진리에 맞지 않고, 잘못된 사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회 사역에 방해와 교란을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옳아. 나는 이치에 맞다고. 그러니 당신은 나를 정죄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공격하고, 마음속은 하나님에 대한 불복과 분노로 가득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폄하하고 경시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올바른 일로 여기면서 자신의 본분이자 의무로 삼아 행한다. 이런 부류는 패괴된 인류 중에서도 문제가 가장 심각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모습과 표출은 정상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 잘못된 사상 관점이나 처세 방식이 아니고, 인성의 결함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의 처세 방식이나 수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 및 태도와 관련된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일말의 순종도 없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음속으로 늘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과 말씀을 공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라는 것도 부인하고,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 지침까지 배척한다. 겉으로는 대놓고 어떤 주장, 말을 퍼뜨리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선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마음속 깊이 늘 하나님을 판단하고 공격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잘못된 사상, 관점을 퍼뜨리고, 소극적인 분위기와 죽음 같은 것을 퍼뜨려 남들의 마음을 흩트리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이런 사람들의 본질은 곧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그릇된 사상과 관점이 너무도 많다. 그들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사람들과 접촉할 때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그런 사람은 마귀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하셨는데, 그는 늘 하나님을 공격하고 판단하면서 마음속으로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니, 이는 마귀의 본질입니다.) 보아라. 내가 여기에서 설교하면 모두가 똑같이 듣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어떻게 해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듣는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뭘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패괴된 모습들을 나한테 대입해 보고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지?’ 이는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속에서 살면서 늘 깨우침과 빛을 얻는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은 하나님의 사역과 긍정적인 사물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저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 이해가 느리고, 때로는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내적 상태가 좋지 않아질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진리를 향해 뻗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부분 정상적이다. 가끔 패괴 성품에 교란받아 소극적인 상태가 생겨나고, 하나님과 그다지 가깝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연구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반항하거나 배척하지도 않으며, 폄하하거나 조롱하거나 구경거리로 보는 태도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다르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진리에 대해 갈망하고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의심하는 태도로 듣는다.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저런 말을 하는 목적이 뭐야? 누구를 폭로하거나 드러내려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를 치거나 정죄하려는 거야? 저게 나랑 무슨 관계가 있지?’ 다른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면, 그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러다가 누가 이러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몹시 득의양양해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이렇게 생각한다. ‘드디어 웃음거리 대상을 봤네. 드디어 약점을 잡았어!’ 그는 늘 이런 심보로 설교를 듣는다. 특히 어떤 내용이 자신의 내적 상태와 모습을 겨냥할 때, 그는 받아들이거나 겸허하게 낮추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발하고 반감을 품으며 혐오한다. 그는 네 말이 훈계하는 것, 허풍떠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들으려 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 특히 그의 아픈 곳과 약점을 건드릴 때는 더욱 반감과 혐오감을 느끼며, 마음속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가 불편한 것은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 때문에 뉘우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폭로하는 방식과 말, 내용, 본질에 대해 반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상인의 경우, 어떤 교회 사역을 할 때 겸허한 태도, 순종하는 태도로 상부의 사역 지침이나 공급과 인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 안 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요령과 방법을 터득하며, 실행 원칙과 길을 찾게 된다. 즉, 늘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며 얻는 것이 있다. 하지만 반발심을 품은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연구, 반발, 조소와 경계가 가득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는 모두 연구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진리를 갈망하지 않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은사나 얄팍한 재주에 기대 일을 처리한다. 그러다가 막상 문제와 어려움이 닥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에 전혀 눈을 뜨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측면의 일이든 진리 원칙과 관계되기만 하면 힘겹고 버거우며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마치 오리더러 횃대에 올라가라고 하거나 소더러 나무 위에 올라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사람은 영 어설프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 온 세월 동안 과연 하나님 말씀을 읽기는 했는지, 진리를 교제하기는 했는지, 교회 생활을 하기는 했는지 의심하게 되고,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부류는 무척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런 부류에게 딱 맞는 표현이 하나 있으니, 바로 총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간단한 일을 해도 방법을 찾지 못하고, 힘을 써도 요령을 찾지 못한다. 총기가 없다는 것이 꼭 굼뜨고 멍청하게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일을 처리할 때 머리를 쓰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해도 원칙과 방향을 찾지 못하며, 아무리 오래 해도 규칙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과 관련해, 학식이 있고 나이도 젊은 데다 생김새가 똑똑해 보여도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할 때는 유난히 서툴러서,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고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멀쩡한 사람이, 학식도 있고 은사도 있는데, 왜 어떤 사역을 해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어떻게 그렇게까지 서투르겠느냐? 원래 속세에서 일을 할 때는 그리 못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 하나님 집 사역만 하면 그렇게 어색하고 어설퍼 보이는 것이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이 되어도 글귀와 도리나 조금 알 뿐, 말을 하면 구호만 외쳐 대고, 일 처리에 원칙이 전혀 없다. 하나님을 믿은 지 7~8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그런 말을 하며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다. 마치 조화(造花)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고,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 말씀에 조금도 진입하지 못하고 얻는 것도 전혀 없다. 그가 진리를 교제하면 마치 이야기를 하거나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는 것 같아서, 어쩜 그렇게 어색하게 들리나 싶다. 누가 “우리는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심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우리 열심히 해 봅시다. 잘해 보자고요. 더 잘해 보는 겁니다!”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십수 년이 됐는데도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라는 몇 마디 말조차 할 줄 모르고, 그저 “더 힘내서 더 많이 일합시다.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 집을 위해 목숨을 바칩시다. 우리한테 다른 건 없어도 힘만큼은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만 할 뿐이다. 그는 전부 문외한 같은 소리나 하고, 영적 용어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른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믿은 햇수도 적지 않다. 최소 7~8년, 십수 년은 됐고, 줄곧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설교도 적잖이 들었다. 그런데 왜 말을 할 때 영적 용어를 제대로 쓸 줄 모르겠느냐? 이 부류가 매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신경 쓰고, 되새기고, 궁리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야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한동안 관찰하면 그들이 매일 생각하고 궁리하고 신경 쓰는 것이 사실 전부 육적인 일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속이 옹졸하며 사사건건 따지고 들어서, 온종일 누가 좋고 누가 별로인지, 개인적인 은원이 무엇이 있는지 등등 하찮고 무의미한 일들에 얽매여 있는데, 이는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의 사상과 견해, 관점은 전부 잘못되고 그릇되며 황당하다. 이런 부류는 표면적으로 학식도 교양도 있어 보인다. 심지어 사회에서 사업체를 운영했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왜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조금의 총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겠느냐? 아무리 봐도 그들은 그저 나무 인형이나 로봇 같다. 그들은 왜 어떤 본분을 이행해도 그렇게 서투른 것이겠느냐? 그들의 입에서 영적인 용어가 나오면 왜 그렇게 어색한 것이겠느냐? 그들은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만도 못하다. 앵무새 앞에서 늘 “아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면 앵무새도 유창하게 따라 하는데, 이 부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조차 할 줄 모르고 “하나님, 감사해요.”라고 말한다. 다시 그의 처세 원칙을 돌아보면, 그가 매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전부 부정적인 사물, 사악한 흐름의 사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부류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다는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예배에 참석해 교제할 때도 그가 교제하는 내용과 드러내는 사상, 관점은 다 치우치고 그릇되어 있다. 그는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아 어떤 빛 비춤이나 깨우침도 얻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서 얻은 깨우침과 빛 비춤, 인식을 교제하고 나눌 때, 그는 몹시 어색해하고 이질감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한다. 힘을 써서 일하는 것은 그래도 좀 할 수 있고 열심히 일하려는 의지도 있지만, 진리를 교제하라고 하면 아무것도 교제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사람이 살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닫지 못한다. 얼마간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50~60세가 되면 사람이 살면서 갖춰야 할 상식과 식견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인생의 철학도 어느 정도 깨닫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하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되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고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반면,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랜 세월 믿어도 인생에 대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과 영에 관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깨달음도 느낌도 없다. 백 살까지 살아도 그 몇 마디 도리나 늘어놓고 그 몇 가지 관점만 죽도록 고집할 뿐이다. 이런 부류는 참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 부류가 인성이 악하다면 마귀 사탄이다. 악인은 아니고 그저 어리석고 무감각하며 우둔한 사람이라면, 어떤 존재겠느냐? (짐승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짐승이 환생한 것이다. 마귀의 환생과 짐승의 환생, 이 두 부류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는 진리를 교제하기만 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반발한다. 그는 모든 진리에 대해 명확한 생각과 사상, 관점을 가지고 맞선다. 반면, 동물에게서 환생한 부류는 명확한 사상, 관점 없이 흐리멍덩하게 마음속으로 반감을 갖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역시 근본적으로 설득력 없는, 치우친 사상 관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관점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고 정상인이라면 입에 담지도 못할 것들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몹시 소중히 여긴다. 요컨대, 마귀의 환생과 짐승의 환생, 이 두 부류는 진리에 대해 극도로 반감을 갖고 혐오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주관적 의식이 매우 강한 반감과 혐오, 정죄이고, 다른 하나는 무심하고 무감각한 반감과 혐오, 거리 두기로,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지만, 진리를 대하는 태도의 본질은 같다. 그러므로 이 두 부류는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 된 사람이 영적 용어를 제대로 잘 말하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영적 용어는 모두에게 낯설며 새롭게 생겨난 언어 종류이기 때문에,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소, 많은 영적 용어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은 지 5년 이상이 되면 자주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하면서 이런 언어를 접해 점차 익숙해지고, 거침없이 유창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운용할 줄 알게 되며, 자기 언어, 삶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정상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정상인의 모습이 없는 사람은 여기에 이르지 못해서, 기본적인 영적 용어를 말할 때도 몹시 어색해 보이고, 듣는 사람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 이성적인 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듣기가 어렵다. 무슨 말을 해도 반토막이어서 앞은 있는데 뒤가 없거나 뒤는 있는데 앞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 사고가 없이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다. 나이가 꽤 되는데도 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 마음속 생각이나 직접 겪은 일을 표현하지도, 묘사하지도, 명확하게 말하지도 못한다. 늘 반토막 말만 하고, 바보같이 굴며, 치우친 사상 관점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보나, 일상생활에서 드러내는 인성의 모습으로 보나, 그 나이까지 살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으로 보나, 이 부류는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비인류이다. 비인류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보면 볼수록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부류가 진리를 깨닫는 것은 쉽지 않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예시를 통해 옳고 그름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느냐? 우리가 다룬 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사례로, 사람은 부정적 사례와의 대조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알 수 있다. 무릇 인성의 특징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부정적 일들에 대해 자각이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사람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며, 설령 한다고 해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비인류들은 다르다. 그들은 100년간 이런 일을 해도 잘못인 줄 모르고, 오히려 옳다고 여기며 끝까지 고집한다. 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폭로하면 오히려 이렇게 반박한다. “무슨 근거로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잘못됐다고 하는 거죠? 나는 이렇게 한 지 몇 년이나 됐어요. 그런데 아무도 내가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고요.”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게 잘못이라고 말해 줘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옳고 그름을 전혀 알지 못하니, 너는 그저 할 말이 없어진다. ‘당신한테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네. 당신과는 그냥 말을 안 해야겠어!’라고 말이다. 비인류의 모습을 분명히 알겠느냐? (네.) 비인류들은 삶과 감정, 처신과 일 처리 측면의 일이나 인격, 존엄에 관한 일을 전부 알지 못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태연하게 잘못된 사상, 관점과 방식을 선택하여 사람과 일을 대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며, 한결같이 고집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이는 그들의 인성 안에 근본적으로 양심과 이성이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니 그들은 인성의 특징을 갖추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비인류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들은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고, 오로지 사탄 철학에 기대 살면서 스스로는 꽤 괜찮다고 여기며 모두에게 불복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헌신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 부류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품고 있으며, 하나님의 행사가 자기 관념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판단하고 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감히 자기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큰소리를 치니, 말이 통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종교계에는 이런 부류가 너무도 많다. 그들은 입으로는 성경을 말하고 겉으로는 무슨 도리든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육신한 하나님을 정죄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약점을 잡아 하나님을 공격하려 하며, 늘 하나님을 음해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말씀과 행사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연구하려 한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그 많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을 하나라도 하면 바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대적하고 정죄하니, 이것이 바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비인류로, 하나님을 믿을 자격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없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보자꾸나!
2024년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