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0)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첫 번째 실행 ― 내려놓기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기

1.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 ―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

6) 하나님은 사역으로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킨다

최근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과 관련된 문제를 몇 차례 교제했는데, 주로 이 세 가지 측면이 나타내는 일부 모습들을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교제했다. 이렇게 세부적으로 교제하고 나니 너희도 그런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측면에 속하는지 얼마간 인식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의 구체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나니 사람이 왜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는지, 혹은 사람이 어떤 것들을 바꾸고 벗어 버려야 하는지 좀 더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어떤 것들을 바꿔야 하고 어떤 것들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지, 어떤 것들을 진리 원칙대로 실행해야 하는지, 어떤 것들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고 안배해 준 선천적인 조건이기에 패괴 성품과 무관하고 사람이 공들이거나 바꿀 필요가 없는지 말이다. 이런 것들을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전보다 좀 더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알고 나니 하나님이 사역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고,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구원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의를 깨닫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사역과 말씀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폭로할 때 무엇을 겨냥하는지도 명확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모든 문제가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을 겨냥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의 타고난 인성의 결함을 겨냥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겨냥한 것이냐? (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입니다.) 주로는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겨냥한 것이며, 그 밖에도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 등의 문제를 겨냥한 것이다. 패괴 성품이란 무엇이냐? 패괴 성품은 사탄의 본성에서 비롯되고 사탄의 본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것들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 방식과 모습에 속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주된 것들로, 사람이 진리를 위배하고 배신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위배하는 근원이다. 반면 선천적인 조건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일 뿐, 현재 인류가 의지해 생존하고 있는 생명은 패괴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역으로 바꾸려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패괴 성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자 사탄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부정적인 사물의 총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드러내는 여러 측면의 패괴 성품, 또는 패괴 성품과 관련된 온갖 내적 상태 및 세부적인 표출과 모습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은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도, 사람에게 있는 특정 측면의 인성적 결함도 아니라, 패괴 성품을 생존 기반으로 하는 생명이며, 이 생명은 바로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것도, 벗어 버려야 하는 것도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물론, 사람의 패괴 성품이 바뀌어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만 구원받은 것이며, 구원받아야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고 완전히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의 진정한 함의는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진리를 준칙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진정한 함의와 이루려는 성과는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우리는 앞서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측면의 일부 구체적인 표출과 모습을 교제했다. 그 모습 중에는 선천적인 조건도 있었고 인성의 결함도 있었으며 인품의 악랄한 모습이나 패괴 성품의 구체적인 모습도 있었다. 인성의 결함과 인성의 악랄한 본질은 사람이 가장 쉽게 혼동하는 부분이다. 인성의 결함은 대부분 선천적인 조건에 가깝다. 예를 들어, 말을 더듬는 사람도 있고 성격이 느긋한 사람도 있으며 반대로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는데, 이런 인성의 결함이 악랄한 인품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조건에 포함된다. 반면 인품이 악랄한 것은 선천적인 조건과 무관하고 패괴 성품의 표출에 속하므로 패괴 성품으로 분류해야지 선천적인 조건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인품의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인 양심과 이성을 주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의 인품이 악랄하다면 그것은 양심과 이성에 관계된 문제이며, 분명 선천적인 조건이 아니라 패괴 성품에 해당한다. 한 측면의 패괴 성품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다. 사탄에게 패괴된 이후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사탄에게 완전히 미혹되었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사상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사악한 흐름의 주장과 논조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완전히 패괴되고 침식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양심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고도 할 수 있고, 이로써 그 사람은 몹시 형편없고 악한 인품을 드러내게 된다. 즉,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것들을 수없이 많이 받아들였고, 그런 것들이 그의 인성을 심각하게 패괴시켜서 인성이 형편없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세상에서 비롯된 ‘스스로를 위하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는다’라는 사탄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의 양심이 좋아지거나 그대로 유지되겠느냐, 아니면 나빠지겠느냐? (나빠질 것입니다.) 그럼 나빠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느냐? (그는 어떤 일을 하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남을 해칠 수도 있고 도덕과 양심에 위배되는 짓도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는데, 그런 짓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잔인해지고 음흉해지며 점점 더 양심이 무감각해지고 인성을 잃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해치고 속인다. 아는 사람도 속이고 모르는 사람도 속이며 동료, 가족,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도 속일 수 있다. 심지어 누구보다도 그를 믿어 주는 사람마저도 해칠 수 있다. 그런 짓을 막 저지르기 시작할 때는 그도 내심 갈등하고 양심이 조금이나마 깨어 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지만 고민하며, 먼저 잘 모르는 낯선 사람부터 손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자기 혈육마저 서슴없이 해친다. 보아라, 그의 인성은 서서히 패괴되고, 소위 ‘이익 지상주의’, ‘스스로를 위하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는다’와 같은 사탄의 사상 관점에 점차 침식당한다. 점차 침식당하는 과정은 바로 그의 양심이 서서히 무뎌지고 아무 작용도 못 하게 되어 결국 사라져 버리는 과정이다. 급기야 그는 행동할 때 도덕적 마지노선도 지키지 않게 되고 양심도 무감각해져서 누구든 속일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누구든 속일 수 있겠느냐? 그 근원은 무엇이냐? 그건 바로 그가 사탄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였고 사탄의 사상 관점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성의 양심과 이성, 즉 인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아무 작용도 못 하게 되고 사탄의 사악한 사상에 철저히 침식당하고 통제당해 버린다. 침식당하고 통제당하는 과정은 그가 그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은 물론 그가 패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패괴되면 결국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형편없는 인성이다. 더 심각하게는 인성을 아예 잃어버린다. 이는 정상적인 패괴된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인성의 몇 가지 모습이다.

그 밖에 일부 특수한 상황도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사람이 환생한 것이 아니다. 비록 윤회와 환생은 추상적이고 사람이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이 알기 쉽고 이해할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부류는 사람이 환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환생한 것이겠느냐? 동물이 윤회하고 환생한 경우도 있고 마귀가 환생한 경우도 있는데, 선천적으로 인성이 없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데, 이는 단지 패괴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타고나기를 살아 있는 사탄이나 살아 있는 마귀로 태어났고, 마귀가 환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는 악인이다. 애초에 악인이 환생한 존재인데, 후천적으로 사탄에 속하는 사상 관점을 많이 받아들이다 보니 기존의 것에 후천적인 것이 더해져 갈수록 더 악해지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천성적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며, 긍정적인 사물에 심한 거부감과 반감을 품는다. 따라서 이런 부류에게서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 인성의 모습이 나타나며, 인성의 장점이나 강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장점은 결코 노래를 잘 부르거나 자신의 관점을 잘 전달하는 것, 혹은 특정 방면의 기술 업무에 능한 것이 아니다. 그런 장점이 아니라 인성 측면에서 충후(忠厚)하고 선량하며 남을 이해하고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등의 장점이다. 즉, 그들에게서는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범위 내에 있는 이런 구체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인성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냐? 사악하고 악한 것, 바로 이 두 가지가 주된 특징이다. 그들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들으면 옳다고 인정은 하지만 결코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마음속의 모든 것들과 표출하는 것들은 전부 사악함이나 악함과 관련이 있다. 이게 바로 선천적으로 인성 본질이 악한 사람의 주된 특징이다. 이런 부류는 마귀와 사탄이 환생한 존재이므로 후천적이고 인위적으로 주입하고 지도하고 전염시키고 영향을 끼치지 않아도 이미 몹시 악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런 작자이며 그의 사상 관점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탄에 속하는 본질적인 것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이에 더해 사탄에게서 비롯되는 사악한 흐름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후천적으로 많이 받아들이면, 이런 부류의 본성 본질은 설상가상으로 더욱 악해지고 나빠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온갖 악한 것을 다 갖추게 되고 상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이 환생한 경우와 마귀가 환생한 경우라는 두 가지 특수한 상황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타고난 인성의 결함이 무엇이든 간에 인품이 악랄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으면 패괴 성품의 범주에 속한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으며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결국 패괴 성품을 모두 벗어 버릴 수 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나면 인품이 악랄한 부분도 그에 맞게 변화하며, 그러면 이 부류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패괴된 인류이다. 설사 네가 인품이 좋지 않거나 인격이 형편없거나 인성의 일부 모습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아 남에게 혐오감을 주더라도 네게 양심과 이성이 아직 존재하며 그것들이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면, 즉 양심과 이성이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좌우하고 네게서 여전히 작용한다면, 결국 네 패괴 성품은 변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주도할 수 없다면, 그 부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류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어렵다. 왜 그렇겠느냐? 이런 부류는 양심과 이성이 아무 작용도 못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는 이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조건도 갖추고 있지 않아서 이런 부류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인성에 어떤 문제가 있든 인성과 진리를 위배해 행동하려고 할 때 너는 네 양심이 깨어 있는지, 네 마음이 아픔을 느끼고 가책을 받는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네 마음속에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일을 하면 도덕과 양심을 위배하지는 않는지, 나아가 진리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지를 판단할 경계선이나 기준이 있는지도 성찰해야 한다. 만약 양심이 깨어 있어서 그 일이 인성과 진리에 위배된다고 판단할 수 있는 데다가 양심과 이성이 작용해 자신을 단속하고, 자신의 손발을 통제해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진리를 받아들여서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는 기회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일을 하든 양심이 무감각하며 그 일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줄 모른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이 인성과 도의,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 모른다면, 게다가 그 일을 할 때 만약 그 일이 양심과 인성, 혹은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데도 양심이 그 부정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작용을 하지 못한다면, 이런 부류는 기본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가 전혀 없으며 그러다 보니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기회도 없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는지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는 몹시 명확하다. 그리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그의 양심이 깨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럼 사람의 양심이 깨어 있는지 알려면 무엇을 봐야 하느냐? 그가 일을 처리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인성이 갖춰야 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행동하고 말할 때 양심이 작용하는지를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양심과 사실에 위배되는 말로 남을 모함할 때, 혹은 네가 거짓말을 할 때 네 양심이 ‘이렇게 말하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 거짓말하고 속이는 거야.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감찰하고 계시고 나도 양심상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건 적절하지 못해.’라며 너를 꾸짖는다면, 이런 생각이 든다면, 네 양심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이 작용할 때 네가 내뱉는 말은 과장이나 사람의 뜻이 좀 섞여 있어서 100% 정확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양심이 작용하는 상태에서 내뱉은 말이기 때문에 이미 상대적으로 적절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진리를 실행해 원칙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네가 내뱉는 말은 완전히 적절해질 것이고 너는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 되거나 정직한 말을 내뱉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예를 들어, 상부에서 그에게 어떤 사람의 상황을 물어볼 때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사람은 훌륭하긴 해. 자질도 좋고 인성도 꽤 좋지. 상부에서는 그를 발탁하려고 그에 대해 묻는 건가? 그를 발탁하면 나는 발탁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겠어. 그냥 평범하다고만 하면 돼.’ 이렇게 그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할 궁리만 한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때 그의 양심이 작용하느냐? 그는 양심이 없고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인성이 없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는 거짓말을 해도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양심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양심과 이성의 구속을 받지 않고 아무 구속력도 없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고 원하는 대로 자기 뜻에 따라 거짓말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사람이 드러내는 본질은 무엇이냐? 행동할 때 양심의 구속력이 없는 것, 즉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악을 행해도 속으로 참소를 받거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이익을 준칙으로 삼는다. 그럼 이런 부류는 구속력도 전혀 없고 양심도 작용하지 않는데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 자신의 인성이 대체 어떤지 가늠할 때는 주로 말과 행동이 양심과 이성의 지배를 받는지, 진리를 실행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네 양심과 이성이 아직 정상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 너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네가 말하고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에 구속받지 않고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굴며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다면, 너는 단지 양심과 이성만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인성이 아예 없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의 인성이 드러내는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인품이 악랄한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성이 없는 것이다. 인성이 없는 징표는 바로 양심과 이성이 없고 행동할 때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게 처신할 때는 양심과 인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양심이 무슨 소용 있어? 양심을 지키면 돈이라도 생겨? 양심이 밥이라도 먹여 주냐고?’ 반면 양심 있는 사람은 다르다. 가끔 일시적으로 사욕에 눈이 멀어 나쁜 짓을 저지르고 남을 해치더라도 얼마 후 자책하고 뉘우치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한 짓을 했어. 악을 행한 거잖아? 그때는 어쩌다 귀신에게 홀렸을까? 왜 스스로를 구속하지 못했지? 어떻게든 보상해 줘야 해.’ 보아라, 당시에는 남을 속여서 이익을 얻긴 했지만 그 이익을 생각하면 내심 불안해하고 자신을 미워한다. ‘내가 어쩌다 그런 짓을 저질렀지?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면 안 돼. 가난에 시달리고 끼니를 굶을지언정 그런 짓은 저질러선 안 된다고.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런 짓을 저지르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런 짓을 한 번 저지르면 죽은 파리라도 먹은 것처럼 역겨워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뉘우치고 속으로 괴로워한다. 반면 인성이 없는 사람은 온갖 꾀를 부려 남을 속이는 데 몰두하고 가차 없이 속이면서도 양심의 참소도 받지 않고 마음도 약해지지 않는다. 그는 남을 처참하게 해치고도 ‘그래도 싸지! 그러게 누가 나한테 걸리래? 그 사람을 안 속이고 어떻게 배겨? 날 만난 건 다 그 사람이 재수 없는 탓이지!’라며 기뻐한다. 이런 부류의 양심이 깨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을 아무리 처참하게 속이고 무참히 해쳐도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흡족해하고 즐거워한다. 속여서 얻은 것을 즐길 때마다 속으로 괴로워하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능력과 재주가 있고 똑똑하다고, 그때 했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좀 더 속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부류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악을 행한 뒤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니 네가 보기에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가 다시 이런 일을 마주하면 또 속일 수 있지 않겠느냐? (또 속일 수 있습니다.) 속일수록 수단이 교묘해지고 득의양양해하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속이면 속일수록 마음은 더 음흉해지고 수법은 더욱 잔인해지며 수단은 더욱 악랄해질 수밖에 없으니, 이런 자는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이런 부류는 이미 사탄에게 철저히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으며, 영락없는 악인이자 마귀요, 깡패다. 이런 부류에게 양심이나 인성을 따져 봤자 그는 너를 비웃을 것이다. “당신은 참 멍청하네요. 양심이나 인성을 중시한다고 누가 돈이라도 주나요? 가난에 찌들기밖에 더 하겠어요? 봐요, 저는 이렇게 잘나가는데 당신은 꼴이 그게 뭐예요!”라며 너를 비웃고 깔볼 것이다. 이런 인성에는 이미 양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이런 부류는 양심이 사라졌고 철저히 마귀에게 잠식되어 이미 영락없는 산 귀신이 된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런 부류에게 진리를 이야기하지 마라.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상 인성조차 없는 그가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될 때 마음속에 마지노선이 있다. 그 마지노선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양심의 구속과 통제를 받는 것이다. 그가 양심의 구속과 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인성이 있고 처신에 마지노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사람은 어느 정도 분수를 지키면서 행동하고, 남들과 함께 지내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만약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는지 모르더라도 적어도 양심의 마지노선은 지킬 수 있다. 그의 양심은 그래도 깨어 있고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이 작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가 있다. 그러면 그의 양심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결국 인품이 좋지 않은 부분도 어느 정도 바뀔 것이고, 이렇게 점차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다양한 패괴 성품도 점차 벗겨져 나갈 것이다. 이제 확실히 알겠느냐? (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 사람의 어떤 부분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지 사람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확실히 인식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똑같이 인품이 악랄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중 일부는 패괴 성품의 표출과 관련된 부분으로, 주로 진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에 속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사람이 보기에는 법률에 위배되지 않고, 법률에 의해 정죄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에게 정죄된다면 그것은 패괴 성품에 속하는 것이다. 일부 인품이 악랄한 모습은 단순히 패괴 성품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성 본질이 흉악한 문제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으며 완전히 악인에 속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품의 한 측면에만 문제가 있을 뿐 말하고 행동할 때는 양심과 이성이 있고 단지 특수한 상황에서만 악을 좀 행한다면, 그는 악인에 속하지 않는다. 악인은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데,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더더욱 그럴 리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의 양심이 작용하고 구속력이 있다면 그의 인품과 행실은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양심이 없고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런 부류의 인품과 행실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을 분별할 때는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이 어떤지만을 봐서는 안 되고 주로 그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양심과 이성이 작용하는지도 봐야 한다. 만약 양심과 이성이 있고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이 작용한다면 기본적인 인성을 갖춘 것이다. 반면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인성을 갖추지 않은 것, 즉 인성이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양심이 작용하고 기본적인 인성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있지만, 기본적인 인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면 주로 무엇을 봐야 하느냐? (주로 그의 내면에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렇다. 그럼 너희는 한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분별할 줄 아느냐? (조금 분별할 줄 압니다. 한 사람이 행동할 때 그의 내면이 양심과 이성의 구속을 받는지, 도덕적 마지노선을 지키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도리상이나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말하는데, 구체적인 사례는 없느냐?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위배해 제멋대로 굴어서 형제자매가 문제를 지적하거나 책망하고 훈계할 경우,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앙심을 품거나 심지어 공격하고 보복할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좋은 사례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 남에게 질책을 받으면 죄책감과 가책을 느끼고 속으로 뉘우칠 수 있는데, 뉘우치면 회개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려 하게 된다. 반면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나쁜 짓이나 잘못을 저질렀어도, 교회 사역에 아무리 큰 손실을 초래했어도, 형제자매에게 아무리 큰 골칫거리를 안겨 주며 심각한 교란을 일으켰어도 누가 그를 질책하면 수많은 이유를 대며 변명하고 자신을 변호할 뿐 자신의 과오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 사역에 손실을 초래했음에도 그는 속으로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데, 네가 보기에 그가 뉘우치겠느냐? (뉘우치지 않습니다.) 뉘우치지 않는다.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겠느냐?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는 똑같은 짓을 또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느냐? (그는 양심이 무감각해서 계속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계속 그럴 것이고 남들이 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나는 이렇게 할 거야! 교회 사역이 손실을 입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손실을 입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 이 주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너희는 우리가 교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묵상하고 자신과 비춰 보며 천천히 이해해라. 이런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 자신을 바라보다 보면 이런 일들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⑥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

추잡하다

우리는 전에 인성, 선천적인 조건, 패괴 성품과 관련된 구체적인 모습을 적잖이 교제한 바 있다. 오늘도 이어서 이 세 가지 측면과 관련된 구체적인 모습을 교제하겠다. 우선 첫 번째로 다룰 모습은 추잡함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대범하지 않고, 점잖고 단정하지도 않으며, 행동이 수상쩍다는 뜻입니다.) (행동거지가 비교적 사악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비교적 사악하다는 말은 다소 추상적이라서 보통 사람은 네가 말하는 그 사악함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더 있느냐? (행동거지가 비교적 상스럽다는 뜻입니다.) 몇 가지 측면을 이야기했느냐? 행동이 수상쩍고, 사악하고, 상스럽고, 비열하며, 떳떳하지 못한 것 등을 이야기했다. 맞느냐? (맞습니다.) 그럼 추잡하다는 말을 비열하고 상스럽다는 말로 대체해도 되겠느냐? (그래도 됩니다.) 추잡한 모습은 무엇에 포함되느냐? (인품이 악랄한 것에 포함됩니다.) 이것이 인성의 결함이겠느냐? (아닙니다.) 이 모습은 인성의 결함보다 성질이 훨씬 더 심각하므로 인성의 결함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추잡함은 인품이 악랄한 한 측면의 모습이다. 추잡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리켜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추잡한 모습은 늘 사람들을 불쾌하고 역겹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추잡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분명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하고 조금도 대범하지 않으며 비교적 저속하고 늘 비열한 짓을 저지를 것이다. 다시 말해, 일 처리 수단이 비열하고 몰염치하며 떳떳하지 못하고 광명정대하지도 않으며, 대다수의 사람은 그를 보면 반감과 혐오감을 품는다. 이게 바로 비열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몹시 천하고 저속하고 비열하며, 어떤 행동이나 말이든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늘 수작을 부리며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 같은 경우에도 모두가 인정하는 정당한 일이고 사람이라면 다 이해하고 동의하는 일이지만, 그는 하나님 믿는 것을 마치 잘못된 길을 걷는, 떳떳하지 못한 일처럼 생각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비열하고 추잡한 부류이다. 추잡한 사람은 무리에서 보통 어떤 역할을 하느냐? (부정적인 인물이나 소인배 역할을 합니다.)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부류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겉으로는 나쁜 사람인 것처럼, 혹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동안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가 늘 당당하지 못하게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꽤나 듣기 좋게 말하지만 뒤에서는 또 다르게 행동하여 늘 부정한 속셈을 품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무엇을 하려는지도 말해 주지 않아서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게 한다. 결국 너는 그 사람이 몹시 못미덥고 비열한 수작만 부리며 언제든 네 일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부류가 바로 추잡한 사람이다. 이런 부류는 공개적으로 남과 다른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법이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꽤나 듣기 좋게 “우리는 그런 짓을 저질러서는 안 돼요. 양심적으로 행동해야죠.”라고 말하겠지만, 뒤에서는 일부 일을 조종하고, 분별력 없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그의 의도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그가 자기 뜻대로 일을 성사시키고 그 성과를 누려도 그가 뒤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보기에는 대놓고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일은 결국 그가 조종하는 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보면 이 부류는 다소 음험하기까지 하다. 너희 주위에는 추잡한 사람이 없느냐? 보통 사람이 추잡한 사람을 분별하거나 꿰뚫어 보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이 부류는 상당히 깊게 숨긴다. 또 이런 부류는 인품에 문제가 있고 인성 본질이 나쁘다. 너희는 추잡한 부류를 만난 적이 있느냐? 이런 부류가 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확실히 알고 있느냐? (잘 모릅니다.) 앞으로 주위의 어떤 부류가 수시로 각종 추잡한 모습을 보이는지 유의해 살펴보아라. 이 측면의 모습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은밀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설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이런 부류를 발견하면 그를 관찰해도 좋다. 그가 행동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기록하고 이 부류의 특징과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살펴본 뒤 마지막에 정리해 보아라. 추잡한 측면의 모습은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상스럽다

다음으로 살펴볼 모습은 상스러움이다. 먼저, 상스러움이 어느 측면의 문제에 속하는지 말해 보겠느냐? (인품이 악랄한 것에 속합니다.) 인품이 악랄한 것에 속한다. 그럼 상스러움은 보통 어느 측면의 문제를 가리키느냐? (행실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상당히 정확하게 말했다. 상스러움은 보통 남녀의 행실과 관련된 문제를 가리킨다. 그럼 상스러운 것은 남자에 대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여자에 대한 것이겠느냐? (남녀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이는 단지 한 가지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자 중에도 이런 부류가 있고 여자 중에도 이런 부류가 있다. 따라서 상스러움은 단순히 남자를 겨냥한 말이 아니다. 여자도 행실에 문제가 있으면 상스러운 것이다. 그럼 상스러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느냐? 늘 이성들 사이에서 장난치거나 뽐내기 좋아한다면,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좀 상스러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성만 보면 흥분하는데, 이성이 많을수록 더욱 흥분하며 더 뽐내려 한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뽐내겠느냐? 가슴과 등을 노출하고 도발적으로 행동하고 말한다. 이는 상스러운 모습 아니냐? (그렇습니다.) 주위에 이성이 있기만 하면 그 이성이 나이가 몇이든, 자기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화려하게, 혹은 관능적이거나 요염하게 차려입고 유혹한다. 이는 상스러운 모습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가 가장 흔하다. 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익숙해서 대수롭지 않은,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이다. 그들은 이것이 상스럽지 않고 아주 정상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든 여자든 보기 좋게 꾸며서 이성이 좋아하고 흠모하게 만들어 구애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상스러운 사상 관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늘 이성에게 주목받으려 하고 이성을 유혹하려 하며 이성으로부터 관심을 받으려 한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행동하며 이런 생각을 가득 품은 채 살아간다. 이는 상스러운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성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뽐내기 좋아하는 것은 대다수 사람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별로 상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고 요염하게 꾸미거나 도발적인 말을 하는 것, 혹은 외모를 뽐내는 것과 같은 상스러운 모습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럭저럭 넘어간다. 더욱 심각한 모습은 바로 어떤 환경에서든 이성만 보면 신체 접촉을 하고 만지며, 상대방이 동의하든 말든 제멋대로 다가가 접촉하는 것이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친근하게 굴고, 유독 눈치가 빨라서 상대방이 반감을 품지 않거나 비교적 온순한 것 같으면 제멋대로 상대의 머리나 등을 만진다. 심지어 이성과 바짝 붙어 앉기도 하며 상대방이 저항하지 않으면 손도 잡는다. 어떤 여자는 남자의 무릎에 올라가 앉기까지 하는데, 남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뽐내는 것에서 실질적으로 더 나아간 것이다. 상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상스러움을 보통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의하지 않고 “그건 상스러운 게 아니에요. 남녀가 서로 즐기는 건 정상이잖아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남자는 여자를 낙으로, 여자는 남자를 낙으로 삼아야 사는 게 재미있죠.”라고 한다. 만약 그 어떤 이성도 그에게 이런 상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는 ‘내가 매력이 없나? 왜 이성을 유혹하지 못하지?’라고 생각하며 낙담한다. 이런 부류는 상스러운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면 속으로 몹시 만족하고 내심 좋아한다. 적어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얻고 이번 생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으니 의미 있게 산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이런 상스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이성을 좋아하고 속으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늘 너를 상대해 주지 않고 네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너는 속으로 낙담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가끔 너를 한 번 만지거나 네게 집적거리면, 혹은 네 손을 쓰다듬거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다가와 앉으면, 더 나아가 너를 희롱하기라도 하면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머, 기분 좋아라. 나를 좋아하나 봐. 이번 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상스러운 짓 한 번 당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 보아라,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스러움도 경멸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인다. 그의 태도는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한 이성이 자기 마음에 드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상대방이 자기가 좋아하고 반감을 품지 않는, 나아가 속으로 동경하는 대상이라면 그런 상스러운 사람이나 행동도 경멸하지 않고 속으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맞춰 주고 마음속에 자리를 내어 준다. 따라서 이런 상스러운 부류를 일부 사람은 마음속으로 받아들인다. 상스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인 이상 상스러운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상스러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상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상스러움보다 더 심각한 모습도 있다. 단순히 뽐내거나 눈빛을 교환하고 눈을 맞추는 것, 혹은 신체 접촉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상스러운 일들뿐이다. 만약 연애하는 단계라면 정상적인 모습이겠지만, 나이와 현실적인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이성만 보면 오직 그런 일들만 생각한다면, 그런 모습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이성을 마주하면 마음속으로 늘 일종의 욕망과 갈구가 생기고, 뭔가 목적이 생긴다. 단순히 심리적인 수요를 충족하고 그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인 제스처나 관계의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시시각각 이런 것들을 좇는다. 머릿속으로 상스러운 일을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위 면에서도 적절한 이성을 찾고 접촉해 욕정을 풀어놓고 분출하려 하는 것이다. 이 부류가 상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부류의 상스러운 사람들에 비해 이 부류의 상스러운 사람은 아주 위험하고 무섭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부류의 상스러운 사람은 언제든 일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몹시 사악하고 상스럽다. 이보다 더 저급한 부류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 이 세 가지 부류의 상스러움 중 너희는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즉, 너희가 정상적이고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별로 반감이 들지 않고 그다지 경멸하지도 않는,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너희는 어떤 등급의 상스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모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느냐? (마지막 상스러움은 성질이 상당히 악랄합니다. 또 첫 번째 상스러움은 이성 앞에서 뽐내는 것에 그치기는 해도 주위 사람들까지 교란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마음속으로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이성과 접촉할 때 남녀 간의 경계를 주의한다. 특히 여자가 남자와 접촉할 때는 남자 앞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이성과 접촉하기를 좋아해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기만 하면 흥분하고, 기회가 생겼다 하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접촉하려 한다. 의도적으로 이성과 접촉하려는 사람은 모두 얼마간 마음이 비정상이다. 첫 번째 유형의 상스러운 부류는 실질적으로 상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으며 성범죄와도 관련이 없지만, 그 모습을 보고 행실을 논하자면 남녀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마음속에 명확한 선이 없으며, 정상인이라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고 남에게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상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지각이 없다면 그건 정상인이 아니고, 적어도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성별의 경계를 지켜야 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애초에 남자와 여자를 구분 지어 만들었으므로 남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늘 남녀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고 이성 앞에서 뽐낸다면, 그것은 단순히 방탕하고 자제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 행동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든 없든 드러내는 모습이 행실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인성의 염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남녀 문제에서 염치를 모르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이성 앞에서 일부러 외모를 뽐내거나 상대방을 유혹한다면 더 심각한 상스러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처음에는 뽐내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신체 접촉을 하기 쉽고, 신체 접촉을 하다가 실질적인 관계로 발전하기 쉬워 결국 걷잡을 수 없어진다. 보다시피 어떤 등급의 상스러움이든 상스러움이라는 범위에 포함되기만 하면 모두 행실의 문제와 관련되며, 행실의 문제와 관련되면 경중 없이 모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뽐내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다가 신체 접촉을 하거나 호감을 갖게 되기 쉽고, 그다음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며, 그다음 단계로까지 발전하면 걷잡을 수 없어져서 후회해도 늦는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결국 수습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어느 측면의 상스러운 모습을 보이든 그것이 행실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자제하지 않고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즉 남이 뭐라고 하고 어떻게 평가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너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위험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처음에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스러운 동작과 모습만 보이지만 나중에는 결국 타락해서 황당한 일을 저질러 평생 후회하게 되기 쉽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따라서 상스러움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제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골치 아파진다. 만약 이런 모습을 보이거나 이런 것들을 추구하길 좋아한다면 인성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무슨 문제겠느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행실이라는 문제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관련된다. 네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런 행동을 할 때 마지노선이 없고 생각하는 대로 무슨 행동이든 할 것이다. 네 생각과 욕망은 통제도, 제재도 받지 않게 되어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면 그 틈을 타 발현되고, 점차 팽창하고 들어차서 결국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너희 주변에 이런 상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그의 상스러운 문제가 가끔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도발적인 말을 한마디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렇게 행동하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라면, 남들이 경멸하고 일러 주고 경고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행동하고, 심지어 점점 더 심해진다면, 너희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피해야 한다. 왜 피해야겠느냐? 상스러운 사람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행동에 제약을 받겠느냐? 자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피하고 최대한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만약 사역할 때 반드시 접촉해야 해서 피할 수 없다면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처리하되 가능하면 다른 사람도 몇 명 함께하는 게 좋다. 그와 단둘이 접촉하지 말고, 그에게 허튼짓을 할 기회를 주지 마라. 둘만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고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어떤 유형의 상스러운 모습이든 염치없는 행실을 보이고 아무 이성이나 꼬신다면, 심지어 많은 이성이 있는 상황에서도 음란한 얘기를,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해서 듣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고 민망해하며 듣기 거북해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아 하고 지각이 없으며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 부류를 피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특히 그와 단둘이 접촉할 때 네게 유독 관심을 갖고 너를 특별히 보살펴 주며 네 결점이나 결함도 용인해 주는 데다가 수시로 신체 접촉을 한다면, 혹은 겉으로는 점잖고 품위 있게 행동하지만 항상 음란한 뉘앙스로 얘기를 한다면, 이런 부류는 아주 위험하니 경계해야 한다. 또 일이 생기면 동성에게 교제하거나 사역에 대해 문의하고 인계해도 되는데 기어코 동성이 아닌 이성을 찾는 사람이 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늘 그에게 질문하고 치근덕거리며 일부러 화제나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밖에, 물어도 그만, 안 물어도 그만인 쓸데없는 질문만 하고 어떻게든 그 이성과 단둘이 접촉할 기회를 만든다. 그가 접촉할 기회를 노리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이런 부류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거절하고 명확히 말해야지, 단지 조용히 멀리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가 가끔 한 번씩 치근덕거린다면 너는 그가 집적거리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이렇게 치근덕거린다면 명확히 말해야 한다. 어떻게 말해야겠느냐? 이렇게 말해라.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제게 치근덕거리는데, 왜 그러는 거죠? 확실히 말하세요! 우리가 정말 이렇게 같이 사역하는 사이인가요? 저 많은 사람은 놔두고 하필 저한테 묻고 저를 찾아오는데, 우리가 그렇게 친한가요? 이러지 마세요. 저는 관심 없어요. 저는 이런 방식으로 남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요.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어요. 계속 이렇게 괴롭히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런 부류에게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겠느냐? (멀리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몇 번이고 타일러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교회의 행정 법령과 규정에 따라 처리하여 격리하거나 제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무골호인이라서 남에게 미움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이런 부류를 두려워하는데, 그러면 아주 골치 아파지며, 결국 이런 부류에게 놀아날 수밖에 없다. 이런 부류는 반드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차가운 표정을 짓되, 책상을 내리칠 필요는 없다. 그냥 담담하게 이렇게 말해라. “우리 이런 유치한 놀이는 하지 맙시다. 당신이 왜 이러는지 알아요. 하지만 이런 수작을 부려 봤자 소용없어요. 저는 당신이 싫으니 앞으로는 귀찮게 굴지 말아 주세요! 계속 치근덕거리면 저도 얼마든지 대응할 방법이 있어요!” 이러면 거절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렇게 거절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그렇게 거절할 용기가 없었는데 말씀을 듣고 나니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예시를 하나 든 것뿐이다. 이런 일은 단순히 여자가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희롱당하는 것도 포함된다. 요컨대 희롱당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이런 상스러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정상적으로 접촉하며 속을 터놓고 얘기하거나 질문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면 거절해도 된다. 이런 부류와 접촉하면 그의 속셈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니 응당 경계하며 “우리는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가 여러 번 괴롭혀도 민망해서 거절하지 못한 채 그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하고, 같은 형제자매이니 포용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포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는 알아야 한다. 그가 마음에 들고 그와 어울리고 싶다면 그건 네 자유다. 물론, 상스러운 사람을 동정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아주 멍청한 것 아니겠느냐? 그가 네게 상스럽게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다.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 즉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바로 거절하고, 거리를 두자고 명확히 말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상스러운 부류란 인성 측면에서 염치가 없는 부류다. 물론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만나면 가끔씩 다소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관적이지 않고 아무런 행동이나 결과도 일으키지 않으며 얼마 후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상스럽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다소 비정상적인 모습까지 전부 상스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 상스러운 것은 인성 안에 염치가 없는 모습이다. 이런 부류는 주로 행실 측면에서 전혀 염치가 없고 언행을 삼가거나 자제하지 않는 데다가 유독 방탕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결국 인성이 상스러운 모습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이제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겠느냐? (그렇습니다.) 상스러움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저열하다

이번에는 저열한 모습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는 어느 측면의 문제이냐? (인품이 악랄한 문제입니다.) 저열한 것은 인품이 악랄한 것에 속하고, 인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저열한 것은 추잡한 것과 얼마간 유사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역시 인품이 악랄한 한 측면의 모습이다. 저열한 것은 일을 처리할 때 규율을 지키지 않고 대범하지 않으며, 일 처리에 원칙이 없고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이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비열하고 저속한 것이다. 저열한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를 들어, 자기는 살 형편이 안 되는 좋은 차를 누가 사는 걸 보면 지나가다가 “차 정말 좋네요. 부자신가 봐요!”라고 인사를 건네며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가고 나면 그 차에 대고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저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침을 뱉는 이런 행위는 무엇이냐? (저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열한 것이다. 저열한 것은 몹시 비열하고 추악하고 천박하며 떳떳하지 못해서 남들에게 조롱과 경멸을 당하며 인격이 형편없고 못나다는 느낌을 준다. 어떤 사람은 이웃집에서 좋은 개를 한 마리 기르는 걸 보면 속으로 ‘저 집은 저렇게 좋은 개를 기르는데 나는 왜 저런 좋은 개를 못 샀지?’라고 질투하고, 해칠 방법을 궁리해서 그 개를 죽게 만든다. 그러고는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와 축하하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진수성찬을 차려 먹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자는 나쁘지 않으냐? (나쁩니다.) 이게 바로 저열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서 즐거워하면 그는 기분 나빠하고 그 사람의 일을 망칠 궁리를 하며, 다른 사람이 화를 입은 걸 보면 고소하게 생각한다. 이런 부류는 아주 저열하다.

저열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들은 아주 부정적이다. 어떻게 부정적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주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좋은 물건이네요. 전에는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는 필요 없어졌나 봐요. 다른 사람한테 주지 않고 가장 먼저 저한테 주다니, 우린 진정한 친구예요!”라며 아주 고마워할 것이다.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인다. 반면 저열한 사람은 마음속 생각이 삐뚤어져서 ‘쓸모없어지니까 주는 거지, 쓸모 있었으면 줄 리가 있겠어? 자기는 좋은 걸 쓰고 나쁜 건 나한테 주는 거잖아. 누가 필요하대? 내가 거지야? 내가 무슨 물건이 좋은지도 모를 줄 알아? 자기가 안 쓰니까 나한테 주면서 고마워하기를 바라다니, 누굴 바보로 아나?’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이런 간단한 일도 그는 이토록 비열하고 추악하고 천박하게 생각한다. 너는 그에게 물건을 줘서 오히려 번거롭게 됐다. 왜 번거롭게 됐겠느냐? 물건을 준 대상이 저열한 사람, 생각이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든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원칙이나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상대의 인품, 혹은 상대의 처신 원칙이 아닌 자신의 극단적이고 편집적인 사상 관점을 근거로 사람을 바라본다. 이런 부류는 몹시 저열하다. 그와 왕래하지 않거나 그에게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별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지만 막상 그와 어울리거나 그를 도와주면 오히려 자주 판단당하거나 질책당한다. 그는 네가 뭔가 좋은 물건을 쓰는 걸 보면 늘 갖고 싶어 하고, 네가 주지 않으면 옹졸하고 쩨쩨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며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그는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늘 몰래 너와 겨룬다. 즉, 마음속으로 네게 나쁜 생각들을 품는다. 속된 말로 하면, 이런 부류는 마음과 생각이 지저분하다. 나는 ‘지저분하다’라는 말이 사람의 추악한 생각과 마음을 묘사하기에 상당히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깨끗하지도, 긍정적이지도, 선량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긍정적인 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면 부정적인 일이 된다. 네가 그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일을 해 줘도 그는 감사히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를 비하하고 모함하며 네게 나쁜 속셈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뭐라도 좀 주면 그는 네가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그에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그는 네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인간미 없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남의 기분을 신경 쓸 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와 소원해져서도 안 된다. 그러면 그는 또 뭐라고 한다.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다. 네가 그와 어떻게 지내든 그는 늘 불만을 품는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네가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어떤 골칫거리를 초래할지 너는 모른다. 따라서 이런 부류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함께 어울리지 않고 멀리하는 것이다. 친구를 사귈 때도 이런 부류는 피해야 한다. 그들은 몹시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와 어울리면 몹시 골치 아파지고 크게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곤란과 골칫거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저열한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양심과 이성, 도덕적 마지노선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냐? (그는 정상인처럼 사고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상인처럼 사고하지 않는 것이 한 측면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에게 염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염치도, 정상 인성의 사고도 없으며 억지 논리와 궤변만 늘어놓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전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억지 논리이다. 그에게 물건을 주면 그는 네가 자신을 무시한다면서 쓰지 않는 물건이라 주는 것이라고 하며, 물건을 주지 않으면 또 네가 너무 쩨쩨하다고 한다. 그의 말은 억지 논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몹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게 바로 억지 논리이다. 이방인은 이치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고 늘 말한다. 이치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억지 논리만 이야기하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물건을 주면 그건 네게 잘해 주고 싶은 것이고, 물건을 주지 않더라도 그건 정당하다. 자기 물건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건데 줘도 트집을 잡고 안 주면 쩨쩨하다고 하니, 이는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억지 논리를 늘어놓는 사람은 저열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참으로 저열하다! 저열한 사람은 사리 분별을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치를 말해 줘도 통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에 따르고, 진리 원칙을 근거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저열함은 추잡함과 조금 비슷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돈을 주고 어떤 물건을 샀는데, 그 물건이 그만한 가치가 없고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당신은 나한테서 이득을 봤으니 난 어떻게든 당신이 손해를 보게 할 거야.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열하고 저열한 부류는 늘 남에게서 이익을 취할 궁리를 하고 손해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항상 손해를 보지 않아야만 만족한다.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면 경사스러워하고, 기쁜 나머지 꿈을 꾸다가 웃으면서 깬다. 네가 얼마를 주고 물건을 사든 그것은 스스로 원해서 산 것이지, 아무도 네게 강제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스로 원해서 사면서 왜 내키지 않아 하고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며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단 말이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몹시 저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는 슈퍼에 가서 장을 볼 때도 채소가 너무 비싼 것 같으면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봉지를 몇 개 더 가져온다. 마침 설이나 명절이라서 슈퍼에서 달력을 나눠 주면 기어코 몇 개를 더 가져와야 만족한다. 그는 이익을 보면 속으로 흡족해하고 자신이 능력과 재주가 있다고 여기저기서 뽐낸다. 이런 부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겠느냐? 어떤 일을 대하든 늘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지 않는 것으로 가늠한다. 그의 이런 사상 관점은 몹시 저열하고 비열하다. 물론, 여기에는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면과 악한 면도 있다. 즉, 이런 부류는 상대하기 어려운 데다가 까다롭다. 이 저열한 부류는 수많은 인성의 결함을 드러낸다. 즉, 그들의 생각을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상식적인 도리나 규율에 부합하지 않으며, 정상 인성의 도덕적 마지노선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도 맞지 않으며, 몹시 치우치고 저속한 데다가 거칠다. 이런 부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이 저열한 부류는 인품이 악랄하고 상대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물질 측면의 이익, 혹은 체면이나 지위와 관련되기만 하면 이런 측면의 품행을 특히나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억지 논리나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 저열한 부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이기적이다

또 한 가지 모습은 이기적인 것이다. 이기적인 것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그럼 먼저 말해 보아라, 이기적인 것이 선천적인 것이냐? (아닙니다.) 이기적인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 어느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인품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기적인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기적인 것 중 일부는 사람의 본능적인 모습에 속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한 가지 본능이자 사람이 가져야 할 일종의 권리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하나의 권리이다. 만약 그것이 인성 본능의 한 측면 모습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그것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자 합법적 권익을 지키는 한 가지 모습이다. 이런 유형의 이기적인 모습은 정당하며, 인성의 결함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이기적인 모습보다 더욱 심각한 모습이 하나 있는데, 타인의 이익을 해치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한 측면의 인성적 결함으로, 이미 인품의 문제에 이른 것이다. 이런 문제는 분별해야 한다. 어떤 이기적인 모습이 정당한 모습인지, 어떤 이기적인 모습이 인성의 결함인지, 어떤 이기적인 모습이 인품의 문제와 관련되는지 등 이런 문제들을 꿰뚫어 본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가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완전히 다하며 스스로를 잘 관리하되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만 잘 관리하고자 하는데, 이 역시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기적인 것 아니냐?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일종의 본능적인 반응이자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고유한 권리이다. 즉, 너는 우선 타인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킬 권리가 있다. 자신의 인성 생활을 잘 지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며, 이는 정당하다. 물론,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생각만 하고 남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모습이지만, 이 이기적인 모습은 인성의 한 가지 정상적인 모습으로, 정당한 것이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인성의 한 가지 결함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는 인성의 결함이 아니다. 자기 생각만 하면서 자기만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자기 사역만 잘하고 의무만 다하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은 보살피지 않으며 보살피려 하지도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가진 일종의 권리이자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일종의 본능이다. 선천적인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사람이 자기 자신조차 잘 보살피지 못하고 이런 선천적인 본능조차 없다면, 어른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비록 자기 생각만 하고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 지키며 자신의 의식주나 생활, 사역 범위 내의 일만 지키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정죄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인품이 악랄한 이기적인 모습의 수준에 이르려면 자기 생각만 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권리까지 점유하거나 침해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인권까지 침해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진정으로 이기적인 것이자 인품이 악랄한 문제이다. 만약 자신의 이익과 명예, 지위, 체면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강제로 차지하거나 가로챈다면, 즉 다른 사람의 이익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생각만 할 뿐 남은 고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남에게 살길을 남겨 주지도 않는다면,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바로 인품이 악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밤에 남들은 다 자는데 혼자 흥이 나고 잠이 안 와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벅차올라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하며, 음악까지 틀어 놓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면 너는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지겠지만, 다른 사람은 시끄러워 잠에서 깬 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행동을 바로 이기적이라고 한다. 이는 인품이 악랄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행동은 왜 인품이 악랄한 것에 속하겠느냐?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너 혼자 즐겁자고 다른 사람의 휴식과 수면 시간을 희생시키는 것까지 불사하며 남들도 다 너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해 주길 바란다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이익과 권익을 침해한다면, 즉 네가 네 이익을 지키는 조건이 타인의 이익과 권익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이런 모습을 두고 이기적이라고 한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가리켜 인격이 비열하고 인품이 악랄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런 행동이 타인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다. 네가 부당한 수단으로 자신의 이익은 지키면서 타인의 이익은 해치고 침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럿이 함께 식사할 때 어떤 사람은 고기 먹을 생각만 하며 다른 사람의 몫까지 먹어 버린다. 그럼 고기를 많이 먹는 이 사람은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처신할 때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며 남은 고려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이기적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왜 이기적이라고 하겠느냐? 왜 인품이 악랄하다고 하겠느냐?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점유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차지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한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바로 인성이 비열하고 인품이 악랄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권익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점유하고 해친다면, 이는 바로 이기적인 사람이자 인품이 악랄한 부류이며, 인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리거나 망가뜨리지 않으며 단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그래도 용인될 수 있다. 그는 기껏해야 그다지 선량하지 않고 마음이 좁으며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고, 인품이 악랄한 정도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이기적인 성질에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정도와 행동의 본질로 변별하면 사람 내면의 품성은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일은 결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만 신경 쓴다. 이런 사람은 그다지 열정적이거나 다정하지 않으며 남과 별로 친밀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교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거짓말, 소문을 지어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의 것을 점유하거나 강제로 차지하는 일도 없다. 물론, 자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도 않아서 쩨쩨하고 인색해 보이지만, 결코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처신할 때 원칙이 있다. 이런 부류에게는 ‘나는 당신에게서 이익을 취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내게서 이익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고, 나는 결코 당신을 이용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마라.’라는 마지노선이 있다. 그는 매우 원칙적이다. 이런 부류는 비록 쌀쌀맞고 열정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며 남과 어울리지 않는 데다가 그다지 다정하거나 따뜻하지도 않지만 결코 남을 해치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아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때로는 부러워하고 질투도 하지만 욕심 내 차지하려 하지는 않는다. 슬며시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이롭도록 다른 사람의 이익을 점유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그의 인성이 좋겠느냐? 인성이 좋은지를 알려면 그의 양심과 이성이 어떤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를 봐야 한다. 그건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태도와 방식을 보면,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악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겉보기에는 몹시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만 하며 자기만의 좁은 세상 속에 살면서 타인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결코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인품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다. 즉, 네가 그와 교류하거나 물질적, 사회적 왕래를 한다면 그는 최소한 네 이익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 아이디어를 생각해 달라고 하거나 생각의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하면 도와주겠지만, 네가 부탁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너를 돕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보아 그는 상당히 쌀쌀맞은 사람 같다. 하지만 결코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래도 인성이 있고 사람이 꽤 괜찮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확하고 객관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기적인 사람이 다 악인이나 인품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차지할 정도로 이기적인지도 살펴야 한다. 또한 그가 처세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그의 인품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가 처신할 때 마지노선이나 원칙이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남들과 어울릴 때 대범하고 정이 많으며 남에게 베풀고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일을 처리해 주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걸 보기만 하면 네가 말하기도 전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는 꽤 선량한 것 같다. 그러나 네가 만약 그에게 미움을 사거나 무심코 그의 이익에 해가 되는 일을 저지르면 그는 물고 늘어지며 네게 앙심을 품고 지난 일을 들추어내면서 너를 끝까지 괴롭히려 든다. 그렇다면 그는 악인이고, 겉으로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부류보다 인성이 훨씬 나쁜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 두 부류 중 사람들 속에는 어떤 부류가 더 많으냐? 너희는 어떤 부류를 좋아하느냐? 대다수 사람은 남에게 쌀쌀맞고 이기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부탁하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며, 네게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준다. 이런 사람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잘 베풀며 잘 도와준다. 한편, 어떤 사람은 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아도 자발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지만 네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준다. 이런 사람은 다소 수동적이긴 해도 그래도 나쁘지 않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네가 아무리 큰 어려움을 겪어도 도와주지 않는데, 부탁을 해도 이유와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이런 자가 바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세요.”라고 말하며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는 특히 열정적이고 자발적이며 적극적으로 군다. 하지만 정말로 일이 생겨서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그는 돕고 나서 은근슬쩍 대가를 요구하는 말을 한다. “제가 그 일을 처리하려고 상사에게 선물을 주느라 얼마를 썼어요….”라고 말이다. 보아라, 그는 겉으로는 상당히 열정적이고 대가 없이 너를 위해 힘쓰며 일을 처리해 주는 것 같지만, 일이 다 처리되면 너는 그에게 끝없이 신세를 갚아야 한다. 이 얼마나 음험하냐! 이런 사람과 사귈 수 있겠느냐? (사귈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부류와는 사귀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입에 발린 말을 하고 특히나 열정적이고 다정한 데다가 면전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 양의 탈을 쓴 늑대요, 웃는 얼굴 뒤로 칼을 품은 사람이다. 아무 일 없을 때는 늘 너와 웃고 떠들면서 꽤나 친한 척하지만 정말로 일이 생겨서 그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종적을 감춘다. 그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이유와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손 하나 까딱하면 되는 쉬운 일에 대해서도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또 일을 처리해 준 다음에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받으려 한다. 그에게 진 신세는 아무리 갚아도 끝이 없다. 반면 겉보기에 상당히 쌀쌀맞고 꽤나 이기적인 것 같은 부류는 오히려 늘 처신할 때 마지노선이 있고 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한다. 미온적인 태도로 남을 대하지만 결코 너를 음해하지는 않는다. 네가 정말로 일 처리를 도와달라고 하면 그는 분명 진지하게 처리해 줄 것이고 처리한 다음에는 네가 그에게 진 신세를 갚든 물질적인 것으로 보답하든 그 역시 올바르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그는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그까짓 일을 입에 달고 살며 신세를 갚으라고 하거나 잔셈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는 진실해서 겉과 속이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가 이기적이고 어울리기 어려우며 쌀쌀맞고 인간미가 없다면서 이런 사람과 교류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부류 중에도 인성이 꽤 괜찮은 사람이 있다. 주변에 누가 이런 부류인지 살펴보아라. 그들은 비록 언변이 좋지 않고 성격도 비교적 쌀쌀맞으며 겉보기에 인간미가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거나 말을 잘 붙이지도 못하지만, 처신할 때는 꽤 원칙이 있다. 그다지 선량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마음씨가 악독하지 않고 최소한 대다수 사람에게 악의가 없다. 겉과 속이 같고, 수단이나 처세 철학을 써서 남을 구슬리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순수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기적인 부류를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지 근거가 생기지 않았느냐? 무엇을 근거로 대해야겠느냐? 네 느낌이나 기호, 네가 그런 부류를 좋아하는지 여부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너와 마음이 맞는지, 네게 도움이나 이득이 되는지, 너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어떤지 등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되고 이 부류의 인품, 인성 본질, 그리고 사람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근거로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그 이기적인 부류를 대해야 한다. 그가 정말 악인이라면 악인으로 여겨 처리해야 하지만, 그가 겉보기에는 이기적이지만 인성은 악하지 않다면 악인이나 인성이 나쁜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거나 이런 부류가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서툴다고 해도 너는 그가 겉보기에 이기적이라고 해서 그를 악인이나 인성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런 부류에 대한 편견이다. 그럼 이제 이 이기적인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원칙이 생기지 않았느냐? 획일적으로 대하지 말고 이 부류의 인성 본질, 이 부류가 진리와 본분, 처신을 대하는 태도를 원칙으로 삼고 대해야 한다. 이기적인 모습이라는 측면의 문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장광설 늘어놓기

다음 모습은 장광설만 늘어놓고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이것이 어떤 측면의 문제인지 이야기해 보자. 비현실적인 도리와 장광설을 늘어놓기 좋아하며, 예배 시간에는 늘 자신의 이상과 다짐, 인식, 사역 계획을 말하지만, 실질적인 일을 할 때가 되면 맥을 못 추는 부류의 사람은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것은 선천적인 조건이냐, 인성이냐, 아니면 패괴 성품이냐? (패괴 성품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패괴 성품이냐? 이 안에 두 가지 문제가 있지 않으냐? 하나는 인성 한 측면의 결함으로, 실질적인 일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실질적인 일을 하면 마음을 써야 하고 고생하며 대가도 치러야 하며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점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는 다소 나태하다는 의미가 아니냐? 나태함은 인성의 결함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렇게 나태한 사람이 실질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데다가 높은 단상에 서서 남에게 비현실적인 도리를 설교하기 좋아하면, 이는 성품이 좋지 않은 것 아니냐? 패괴 성품의 요소도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느 측면의 패괴 성품이냐? (교만함입니다.) 교만한 패괴 성품에다 나태함, 일하기 싫어하고 편안함만 탐하는 점까지 더해져 일을 착실하게 하지 않고 열심히 하려 하지 않으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지위를 내세워 남에게 설교나 하려 들고, 입만 놀리고 손은 놀리려 하지 않으니, 인성의 결점이 꽤 크고 패괴 성품이 상당히 뚜렷하다. 아주 명백한 두 측면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꽤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사역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끝없이 떠들지만, 실질적인 일을 할 때가 되면 뭉그적거린다. 이런 사람은 자질이 어떤지 논할 것도 없이 입만 놀리고 실질적인 일은 안 하는 것만으로도 폐인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곳에서 지위의 복을 누리려 한다. 이는 비이성적일 정도로 교만한 것 아니냐? 입만 놀리고 실질적인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게으르고 교만하니, 폐인이 아니겠느냐? 그에게 행동에 나서서 실질적인 일을 하라고 하고, 사역을 배치하고 계획하고 시행하라고 하면, 그는 하지 않으려 하고 마음 깊이 반발심을 품는다. 사람이 얼마나 게으르면 그러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망나니이다. 쓸데없이 함부로 떠들어 대기나 좋아하고 아무것도 안 하려 한다. 그저 되는대로 살려 하고 좋은 것을 먹고 입으려 하며,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좋은 대우, 지위 높은 사람 대우를 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인성은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너희가 보기에는 이런 사람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만 살았지 실질적인 일은 안 하는 자를 보고 선망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말이 청산유수고 항상 조리가 있어.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가 자주 하는 말들이 자기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 집 설교와 교제에서 배운 것임을, 그래서 그는 설교만 잘할 뿐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시간이 지나면 그가 사실 사기꾼이라는 것을 누구나 똑똑히 알게 된다. 네가 어떤 문제를 제기해도 그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실행 원칙과 길도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네가 자기를 우러러보기를 바란다. 어떻게 네가 우러러보게 하겠느냐? 연기와 웅변으로 네 마음속에서 지위를 차지하여 자기를 선망하고, 탄복하고, 우러러보게 한다. 이런 부류는 염치가 없지 않으냐? 실질적인 사역은 아무것도 안 하고 하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이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해 가며 자기 장광설을 들어주길 바라는데, 결국 그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한두 해 된 사람은 그에게 미혹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어 진리 실제를 약간 깨달은 사람은 그의 장광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네가 안 들어주면 그는 너에게 불만을 품고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부류는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떤 측면의 진리든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도리를 조금 알기는 해도 명확하게 설명은 못 하면서 굳이 남에게 설교하려 하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네가 듣지 않으면 그는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들어주기에는 네 마음이 괴로워서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왜 앉아 있을 수가 없겠느냐? 네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고 해야 할 사역이 많아서 그의 장광설을 들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장광설을 늘어놓는 자를 정말로 선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같이 한가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도 충성을 다하지 않고,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저 되는대로 살면서 밥이나 축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려고 한다. 매일 심오한 도리를 조금 들으며 시간을 때우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며 얻은 것이 있고 성장했다고 느낀다. ‘설교에 깃든 진리의 수준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서 곧 삼층천에 닿겠어. 그야말로 천상의 비밀이야!’ 그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많은 도리를 말하는 것을 들어도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법도,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의 말을 들어봤자 쓸모가 있겠느냐? (쓸모가 없습니다.)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비현실적인 도리를 말하는 이런 부류를 만나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뒤를 졸졸 따르겠느냐, 아니면 거부하겠느냐? (거부하겠습니다.) 어떻게 거부하겠느냐? 거부할 줄 알아야 하고, 왜 거부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를 거부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를 거부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고 고민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골치 아프게 된다. 그것은 분별이 없고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도리를 듣고도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속으로 찬동한다면, 몹시 어리석은 것이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부류가 말하는 도리에 대해 분별이 있다면 거부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전부 도리나 빈말이라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가리켜 ‘그림의 떡으로 배고픔을 달랜다’, ‘매실을 떠올리며 갈증을 푼다’라고 하는데, 실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그가 수많은 도리를 얘기했어도 사람이 본분 이행 중에 마주하게 되는 실제 문제는 그가 말한 도리와 어느 하나도 들어맞지 않아 결코 해결되지 않으므로, 그런 도리는 들으나 마나다. 복음 사역이나 교회 생활 중 어떤 문제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고, 사역지침을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어떤 사역에 결함이나 허점이 있어서 보완하고 점검해야 하는지 모르고, 누가 치우친 관념을 제기했을 때 어떻게 해결하고 반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모르니 그의 장광설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거부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그런 장광설은 거부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도리이기 때문이다. 도리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말이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겨냥해 진리 원칙을 교제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듣기에 좋고 구구절절 조리가 있지만,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말은 도리에 속하는 것이고,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진리 원칙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말은 평이해도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다. 비록 욕설처럼 듣기 거북한 말일지라도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고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말이다. 반면 어떤 말은 듣기 좋고, 완곡하고, 우아하고, 심오하지만, 실제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진리 원칙과 조금도 관련이 없고, 사람에게 길이나 방향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며, 온통 겉만 그럴듯한 도리뿐인데, 그런 말은 거부해야 한다.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장광설로 인해 본분을 이행할 시간과 진리를 구할 시간, 그리고 개인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부해야 한다. 어떻게 거부하느냐? 간단히 “안녕히 계세요.”라고 거부하면 되지 않겠느냐? 아니면 “그만 말하세요. 그건 저도 다 아는 이야기예요. 제가 물어본 문제에 대답은 언제 할 건가요? 대답 못 하겠으면 제 시간을 빼앗지 말고 당장 저리 가세요.”라고 거부하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좋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거부하겠느냐? 그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도리를 말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을 듣기 거부하는 것은 곧 바리새인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런 부류는 실질적인 일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한다. 그는 인성이 기준에 맞지 않고 자질도 부족해서 실질적인 사역은 아예 하지 못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도리로 너를 미혹한다. 만약 네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너무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부류를 만나면 거부하는 것이 맞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며 자리를 뜨면 된다. 아주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냐? 장광설만 늘어놓고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는 부류는 이렇게 대해야 한다. 그런 부류는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에는 신빙성이 없고, 미련을 둘 가치가 없으며, 유효한 건의나 길로 삼아 들을 가치도 없다. 그러니 그들의 장광설은 그냥 거부하면 된다. 기록할 필요도 없고 소중히 여길 가치도 없다. 장광설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다른 모습을 하나 더 말하자면,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나라 정세나 국제 정세, 고위 정치인들의 정책이나 발언, 그들의 시정 강령과 정치 노선, 각종 정책을 실시하는 방식과 수단 등등을 논하기 좋아한다. 요컨대 늘 정치 관련 주제를 입에 올리는데, 옛날 일이건 오늘날의 일이건, 국내 일이건 국제적인 일이건 가리지 않고 수시로 얘기한다.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선천적인 조건에 속하겠느냐, 인성에 속하겠느냐, 아니면 패괴 성품에 속하겠느냐? 잘 모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관련된 주제가 약간 특수하기 때문이다. 그가 논하기 좋아하는 것은 정치인데, 너희가 보기에 정치는 긍정적인 일이 아니다.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선천적인 조건에 포함된 흥미와 기호라고 하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런 흥미와 기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성이 나쁜 것이라고 하기에는 단지 이야기만 조금 했을 뿐 특별히 몹쓸 짓을 한 것도 아니니 인성이 나쁘다고 할 정도는 못 되며 패괴 성품에는 더더욱 못 미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떤 측면으로 분류해야겠느냐? 이래서 끝까지 결론이 안 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겠느냐? 왜 끝까지 결론이 나지 않겠느냐? 어디에서 막힌 것이냐? ‘정치’라는 두 글자에서 막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내가 미술, 음악, 무용, 디자인 혹은 경제를 논하기 좋아한다고 하면, 이는 어느 측면으로 분류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의 흥미와 기호로 분류됩니다.) 만약 역사나 미식을 논하기 좋아한다고 하면, 어느 측면으로 분류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으로 분류됩니다.) 무언가를 논하기 좋아한다거나, 연구하기 좋아한다거나, 잘한다는 것은 그 분야를 좋아하고 그 분야에 흥미가 있다는 뜻이므로, 선천적인 조건의 흥미와 기호로 분류된다. 하지만 논하기 좋아하는 대상이 정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뜻 이렇게 분류하지 못한다. 왜 선뜻 분류를 못 하느냐? 정치라는 주제가 매우 민감하고, 정치는 그리 긍정적인 것이 못 되기 때문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정치는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방금 언급한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논하는 것’이므로, 선천적인 조건의 흥미와 기호로 분류해야 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선천적인 흥미와 기호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정치에 참여도 하느냐? 아직 거기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현시점의 ‘이야기한다’는 행위만 놓고 본다면, 선천적인 조건의 흥미와 기호로 귀결시킬 수밖에 없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이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고대의 군왕에 관해 논하기를 좋아해서 늘 어느 시대 제왕이 신하와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 어느 시대 군왕이 집권하는 동안 정무에 힘쓰고 백성을 아껴 국가의 식량 비축분이 많았고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어느 시대 제왕이 폭군이어서 집권하는 동안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기는 궁에 주지육림을 만들어 극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또 현재 일부 정치인들의 문제점을 논하며 누가 잘하고 누가 잘 못하는지 등등 단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할 뿐이다. 즉, 그 사람은 태생적으로 그런 주제 혹은 그런 일에 비교적 흥미가 있는 것이고, 일상생활 속 여가를 즐기는 방식이 바로 정치에 관한 일을 논하는 것이며, 그것을 소일거리 삼아 시간을 때우니, 그것이 그 사람 생활의 일부분이다. 만약에 단순히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저 흥미와 기호일 뿐인데, 그것이 인성과 관련이 있겠느냐? 단지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면만 봐서는 그의 인품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정치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그런 주제를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그런 일에 흥미를 느낄 뿐이며, 이는 그의 처신 원칙과는 무관하다. 그저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할 뿐이어서 그것을 자기 일상에서 심심풀이용 주제 혹은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사람들을 대할 때 자주 꺼내는 하나의 화제로 삼는다면, 그것은 흥미와 기호이지 인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 흥미와 기호를 가진 사람은 다른 기호를 가진 사람과 똑같고 평등하다. 그 사람이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야심이 있다거나, 인성이 좋지 않다거나, 인품이 악랄하다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지만, 정치 자체만 놓고 말하자면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정치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나, 그렇다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일일 뿐이므로, 단지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는 한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누가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제정신이 아니라거나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누가 전자 제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큰일을 할 인물이라거나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렇게 평하는 것이 과연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평가해야겠느냐? 자기 흥미와 기호를 바탕으로 무엇을 하는지 봐야 한다. 만약 정의로운 사업을 한다면 흥미와 기호는 유익한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흥미와 기호로 하는 것이 부정적인 일, 남을 모해하고 남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라 해도 흥미와 기호가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성이 좋지 않고 걸어가는 길이 잘못된 것이다. 흥미와 기호를 이용해 나쁜 짓을 저질렀더라도 흥미, 기호, 특기, 관련 업무, 기술, 지식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흥미와 기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활용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바른길을 걸으면, 자기 흥미와 기호를 바탕으로 해낸 일이 정의로울 것이다. 반면 바른길을 걷지 않으면, 자기 흥미와 기호를 이용해 하는 일이 정의롭지 않고 사악할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그저 하나의 기계일 뿐이고, 기술 측면에 속하는 것이다. 너는 컴퓨터로 예배하고, 설교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나쁜 사람, 사악한 사람들도 컴퓨터로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업을 할 때 너는 컴퓨터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고, 사악한 일을 할 때도 컴퓨터가 사악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부류가 정치 이야기를 즐겨 하는 그 모습은 흥미와 기호에 속할 뿐, 인성 본질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그 밖에,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정치 측면의 주제를 좋아하며, 항상 시시비비를 따지기 좋아하고, 늘 사람들과 정치적 관점에 관련된 주제들을 놓고 논쟁하기를 좋아한다. 유명인이나 위인과 관련된 주제에 특별히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주제에 특별히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마음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 이제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를 다 한 것 같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흥미와 기호이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이 수반된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한담거리나 오락거리가 아니고, 그저 흥미와 기호에 그치거나 관심을 갖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걷는 길과 연관된다. 그렇다면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걷는 길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인성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느 측면으로 귀결시켜야 하느냐? 너희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테고 꿰뚫어 보지 못할 테니 함께 교제해 보도록 하자.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든, 그중에는 반드시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이가 있다. 보아라, 농민은 비록 사회 하층에 살지만 어떤 농민들은 정치 상층부의 일을 아주 많이 알고 있어서 어느 정도 정치와 관련된 관점을 말할 수 있다. 상업과 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문예, 교육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 이야기를 한다. 즉, 업계마다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있고, 정치 주제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떤 업계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정치에 일종의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흥미는 사람이 타고난 자질,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그는 정치권력 범위 내의 그러한 일들을 이해할 수준이 되기 때문에 수시로 자기 관점을 표명한다. 이런 부류의 모습은 선천적인 조건의 흥미와 기호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정치 참여는 이런 사상 차원의 흥미와 기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종사하던 직업을 버리고 정치 일에 종사하기를 선택하며 정치 무대에 뛰어들어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무엇이 문제냐?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도 평소에 정치 이야기는 별로 안 할 수 있지만, 그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것이 정치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흥미를 잃고 앞길이 암담하다고 느끼며, 정치 참여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시퍼렇게 빛내면서 흥미를 느낀다. 누가 시장, 주지사, 의원,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내심 낙담하고 자기도 어떻게든 참여하려고 한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극도로 큰 부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인성에는 무엇이 하나 더 있겠느냐? 그는 돈에 목숨을 거느냐, 아니면 권력에 목숨을 거느냐? (권력에 목숨을 겁니다.) 그는 권력을 무엇보다도 귀하게 보고, 생명처럼 여기며, 자기가 일생 추구할 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이런 부류의 인성에는 일반인에게 없는 무엇이 하나 더 있느냐? (야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그는 야심과 욕망을 갖고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권세를 잡으려고 합니다.) 권세를 잡는 것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직접적인 이익은 무엇이냐? (지위를 얻고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고 핵심이 아니다. (그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거의 근접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직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맡은 자리가 그저 이름뿐이고 수하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권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특권도 없고 공직자로서 어떤 이익도 누릴 수 없는데, 그의 입장에서 그런 공직에 오르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권력에 대해 지극히 강렬한 야심과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야심과 욕망을 갖고 있는 한, 그가 달성하려는 목적은 단순히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숭배하고, 선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직에 올라 결정권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다. 그에게 이런 야심과 욕망이 있는데, 만약 지위가 없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그의 말을 사람들이 듣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기에 그는 지위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지위가 있으면 사람들이 말을 듣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 때 순종하여 따를 것이며 그의 야심과 욕망, 그가 하려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게 말하면 고상하고 큰 뜻을 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벼슬에 눈이 먼 자이고 공직을 밝히는 것이다. 공직에 오르지 못해 결정권이 없고 수하에 거느리는 사람이 거의 없으면 그는 의기소침해지고 인생이 암담하다고 느끼지만, 일단 공직자가 되어 자기 말을 듣고 자기를 따르는 이들이 생기면 살맛이 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인성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성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분명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이겠느냐? (패괴 성품의 문제입니다.) 만약 인성의 각도에서 말한다면, 이런 부류는 믿을 만하겠느냐?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인품은 좋으냐, 나쁘냐? (나쁩니다.) 왜 나쁘냐? (그는 늘 사람을 통제하려 하고, 결정권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런 부류는 지위욕이 유달리 강해서 늘 무슨 기회든 잡아 결정권을 행사하려 하고, 지도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믿을 만하지 않고, 인품도 좋지 않다. 하나님 집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하나님 집에서 한 가지 사역을 그에게 맡기면 그는 그것을 공직에 오르고 지도자가 된 것으로 여긴다. 그가 진리 원칙을 구하겠느냐? 사역지침을 시행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만약 책임자가 되고 리더가 되는 것을 감투 쓰는 일로 여긴다면, 그는 분명히 사역지침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그는 자신의 경영을 하고, 자기 위신을 세우고,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기 뜻을 모두 전달해서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듣게 하고, 사역지침과 하나님의 뜻, 진리를 전부 유명무실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본질은 바로 이러하다. 지위가 없을 때는 온 힘을 다해 지위를 추구하고, 일단 지위를 얻으면 기회를 잡은 것처럼 군다. 기회를 잡아 무엇을 하겠느냐? 자기 야심을 최대한 채우고 자기 지위를 공고하게 한다. 그런 기회를 이용해 자기 야심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품이 나쁜 것이면서 동시에 패괴 성품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느냐? (교만함과 흉악함이 있습니다.) 교만함, 흉악함, 진리를 싫어함, 강퍅함, 이런 패괴 성품들이 다 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심각한 패괴 성품은 무엇이냐? 흉악함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전형적 특징은 흉악함이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세상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고, 정치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고, 정치권에 들어갈 연줄도 구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도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에 참여하려고 든다. 그래서 각급 리더를 선출하는 것을 공직자 선출로 여기며, 각급 리더 선출이 있을 때마다 단단히 벼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를 뽑으라고 유세를 벌인다. 리더가 됐다 하면 그는 자기가 공직에 올랐다고 생각해서 지위를 제 것으로 독점하고 권력을 장악해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나님 집에서 맡긴 사역과 자기가 이행해야 할 본분은 내팽개쳐 두고, 오직 지위의 복만을 탐한다. 리더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관리 노릇을 하는 것으로 여기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자기 위신을 세우고,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듣게 하고, 권력에 대한 자기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만 하면서 하나님 집의 사역과 사역지침의 요구 사항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 아직은 적그리스도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적그리스도의 싹이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있느냐? 없다. 권력에 대해 지극히 강한 욕망을 가진 이런 부류는 진리를 사랑할 수 없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극도로 강렬해서 그의 양심과 이성으로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추구를 억제하거나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거나 정치 참여에 지나치게 광적으로 빠지고 강렬한 욕망을 갖는 것은 이런 부류가 지위와 권력에 대해 강한 야심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의 속셈과 목적, 근거는 모두 자기가 권력을 얻을 수 있는지, 자기 야심이 채워질 수 있는지를 기반으로 하지, 양심과 이성을 잣대로 가늠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인성은 아주 무섭다. 그들은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와 가장 가깝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 이 점을 볼 때, 이런 부류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고 권력에 대해 지극히 강렬한 욕망을 가진 남자가 있다고 치자. 정치에 참여해 자기가 동경하던 권력과 지위를 얻을 기회가 생겼을 때, 만약 추구하는 지위를 얻는 대가로 사랑하는 여자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럴 것이고, 절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기 부모도 아무 거리낌없이 희생시킨다.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으면서 오직 지위만은 내려놓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일이든, 사물이든 모조리 지위를 얻기 위한 조건과 대가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인품을 봤을 때, 그들에게 과연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무섭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양심과 이성은 사라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 양쪽 다 가능성이 있다. 왜 양쪽 다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위가 없을 때, 정치 측면의 일과 관계가 없을 때는 남들과 아주 잘 지낼 수도 있고, 남을 도와줄 수도 있으며, 절대 남에게서 이익을 취하지도 않는다. 베풀 줄도 알고, 아주 관대하며 겉보기에는 인성이 있고 양심과 이성이 모두 정상이다. 그러나 너는 그가 뼛속 깊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가 뼛속 깊이 사랑하는 것이 지위와 권력임을 발견했을 때, 그의 인성을 다시 관찰하면 네 관점이 바뀔 것이고, 그의 인성에 대한 너의 인식과 평가가 바뀔 것이다. 지위나 권력과 관계가 없을 때 그는 남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정상적이고,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위와 권력이 생겼다 하면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너는 그에게서 양심과 이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그제야 그가 몹시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가 드러낸 인성은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그저 어떤 환경과 이익의 영향을 받아 그가 사랑하는 권력이나 지위와는 무관한 상황에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일단 지위와 권력에 관계되면 그의 진정한 인성이 드러난다. 그의 진정한 인성을 보면, 너는 그를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게 될 것이다. 즉,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했을 때는 그가 사람들과 꽤 잘 어울리고 인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정으로 그의 내면세계와 인성 본질을 알게 되고, 그가 사랑하는 것이 지위와 권력임을 확인하게 됐을 때는 그 사람에게 인성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이방인들은 이런 모습을 뭐라고 하느냐? 다중 인격 아니냐?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의 육체를 뒤집어썼으니, 그가 사람들과 접촉할 때 너는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없기에 그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좋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무섭게 느껴진다. 이런 것이 바로 비인간이다. 비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비인간이 드러내는 모습은 조금 사람다워 보일지라도 진짜가 아니다. 그에게는 진리 실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가끔 드러내는 좋은 모습은 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진정으로 길을 선택할 때 드러내는 인성이야말로 그의 본질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겉모습에 미혹되어서는 안 되며, 그가 걷는 길과 그의 본질을 보는 것이 관건이다. 이 일은 확실하게 설명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어떤 사람이 정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더라도 만약 그가 단지 사상 차원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일종의 흥미와 기호일 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사상 문제가 아니라, 사람됨의 문제와 사람이 걷는 길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람됨과 걷는 길에 관련된 문제면 인품과도 연관되고, 인품과 연관되면 대부분 패괴 성품과도 연결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 정치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측면의 모습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문학, 과학기술 등을 좋아한다

다른 모습을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문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이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태생적으로 문학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문학을 좋아해서 문학과 관련된 주제, 서적, 일에 대해 특별한 호감과 호기심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을 좋아하는 것은 어떤 측면이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외부 사물의 방해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이 마음속으로 어떤 사물에 큰 흥미를 느끼고, 그런 종류의 서적을 즐겨 읽으며, 그런 종류의 주제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동시에, 그의 이상 또한 그런 종류의 일과 관련된 직업이나 업종에 종사하는 것이다. 이는 선천적인 것으로, 누가 개입할 필요도 없고 교육할 필요도 없으며, 당연히 누가 후천적으로 일부러 영향을 주거나 주입할 필요도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것들을 좋아한다. 과학기술을 좋아하는 것이 선천적인 조건이라면, 생물을 좋아하는 것은 어떠하냐? (역시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생물을 좋아하고 나무, 곤충, 조류에 관심을 두고, 특히 작은 동물들과 교감하며 가까이에서 접촉하기를 좋아하고, 작은 동물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인내심을 갖는 것은 선천적인 조건이다. 보아라, 선천적인 조건에 갖추어진 이런 것들은 아주 정상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에 들어가는 교만함이나 사악함 같은 그릇되고 부정적인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항공이나 역사, 천문 지리를 좋아하고, 영양학, 의학, 법률, 농업을 좋아하는 것은 어떤 측면의 모습에 속하느냐? (선천적인 조건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농업을 좋아해서 각종 식물의 접목, 개량, 수확량을 연구하기를 즐기고, 기후나 온도가 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를 즐기며, 채소나 곡물을 기르고 나무와 꽃을 심는 것을 즐긴다. 매일 손이 진흙투성이가 되고 손에 온통 굳은살이 박여도 의사, 변호사, 공직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밭을 일구고 식물과 교감하기를 좋아해서 아주 자유롭게 살아간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흥미와 기호를 가졌는지가 인성과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인성에 영향을 주느냐? (주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농민은 그리 고상하지 않으며 그들 역시 패괴 성품이 있다고는 하나, 수준 높은 지식인들, 과학기술이나 문학, 의학 또는 법률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농민보다 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배우고 많은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고, 그저 책에서 조금 더 배우고 지식과 식견을 조금 늘렸을 뿐이다.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어떠한 인생길을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경배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생활 각 방면의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처신 원칙에 맞는가, 이런 것들은 하나도 모른다. 각종 분야의 흥미와 기호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그 업계에 종사하고 싶어 하며, 나중에는 그 업계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어떤 업계에 뛰어들든 이 사회에 몸담고 있는 한 모두 사탄에게 물들고 패괴된다. 흥미와 기호, 종사하는 업종이 남들보다 고상하고 체면이 선다고 해서 인성까지 고상해지는 사람은 없고, 종사하는 직업이 수준 낮고 비천하며 무시당한다고 해서 남들보다 비천해지거나 더 패괴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흥미와 기호가 무엇이든, 어떤 특기나 은사를 이용해 무슨 업종에 종사하든 결국 사람이 가진 사상 관점은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다 똑같고, 표출하는 것은 전부 패괴 성품이다.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공통성이다. 그러므로 어떤 흥미와 기호가 있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인성이 그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인성이 좋아지거나 잠식당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선천적인 조건은 개인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개인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 이러한 흥미와 기호는 기껏해야 사람이 의지해 살아가는 하나의 도구나 선천적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으로 하여금 종사하는 업종에서 수입을 얻게 하고,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생계를 유지하며 각 업종 종사자 가운데서 받아들이는 갖가지 사상 관점은 모두 똑같다. 그래서 어느 업계에 있든, 어느 구석에 있든, 어떤 집단이나 어떤 인종 속에 있든 결국 사람이 받아들이는 패괴는 똑같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일이나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고상해지거나 다른 사람보다 덜 패괴되는 것도 아니고, 종사하는 업종이 저급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패괴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선천적인 흥미와 기호가 무엇이든 결국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이 이 사회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탄에 의해 패괴된다.

재무 회계 업무를 좋아한다

또 하나의 모습을 이야기하겠다. 어떤 사람은 재무 회계 업무를 좋아하고, 숫자를 다루는 일을 즐긴다. 평생 재무 업무에 종사하면서 매일 기장과 결산, 송금과 수금 처리를 하느라 온종일 머릿속이 숫자로 가득해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재무 업무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 속하느냐? (선천적인 조건에 속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한 방면의 특기이다. 네가 그것을 잘하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평생의 밥그릇이 생긴 것이다. 네 생계가 이렇게 해결됐다. 이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만나나 메추라기를 내려 주어 먹을 것이 생긴 것과 같다. 흥미와 기호는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다. 네게 떨어져 그와 같은 흥미와 기호를 갖게 했고, 너는 당연하게도 흥미나 기호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며 지금까지 생계를 유지했다. 네가 잘하든 못하든, 몇 년이나 일했든 네가 타고난 것이기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위해 정해 둔 것이고, 곧 선천적인 조건이다. 결론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사람이 자랑할 것은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업에 뛰어나다

사업을 좋아하고 사업에 뛰어난 것은 어떤 측면에 속하느냐? (선천적인 조건에 속합니다.) 사업에 뛰어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그만큼 경영을 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두세 달 경영하다가 망할 수 있고, 본전까지 다 날릴 수도 있지만, 그는 두세 해 경영하면서 점점 더 번창하고, 서서히 살림도 넉넉해져서 식구들이 좋은 것을 먹고 입게 된다.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도 하고, 작은 차를 큰 차로 바꾸며, 생활이 나날이 나아져서 부자 사업가가 된다. 사업에 뛰어난 것은 선천적인 조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업에 뛰어나다는 이 선천적인 조건이 바로 그의 특기이다. 그는 사업하는 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부모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는데, 소규모 장사를 자기 힘으로 어렵지 않게 성공시켜 돈을 벌었다. 그에게 “장사가 어렵지는 않았어요?”라고 물으면 그는 “아뇨. 머릿속으로 이렇게 하면 돈 벌기 좋겠다 싶어서 그대로 했더니 역시 돈이 벌리더라고요.”라고 한다. 너는 “당신은 장사를 참 간단하고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왜 그게 안 될까요?”라고 하는데,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그런 특기를 주지 않아서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특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쭐대면 안 되고, 특기가 없는 사람도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준 것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고, 네가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그것에 뛰어나게 하여 그 특기로 평생 밥벌이를 하거나 생계를 꾸려 갈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다른 사람은 공부도 하고, 남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실천도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너는 배우지 않고도 할 줄 안다.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너를 못 따라가고, 너만큼 경영을 잘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네 그 특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타고난 것 아니냐? 타고난 것이면 곧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 아니냐? 너는 늘 네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네가 구해서 얻은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서 유전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다른 것은 유전되지 않았느냐? 네가 그 특기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 한들 가능하겠느냐? 네게 결정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있을 리 없다. 네가 가진 특기는 하나님이 준 것으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시기해도 가져가거나 빼앗을 수 없으며, 네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너에게 준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면 너는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우쭐대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마라. 우쭐대고 자랑하는 것은 모두 무지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준 특기를 올바르게 대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만약 하나님 집에서 네가 그 방면의 본분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면, 네 특기를 본분과 교회 사역에 활용해라. 특기를 아낌없이 모두, 최대한으로 발휘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에게 특기를 준 것이 헛되지 않으며, 네가 누린 하나님의 은총과 특별한 대우에 보답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양심 있는 사람이다. 자기 이익만 도모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보답하였으니, 올바르게 행한 것이다. 설령 네가 ‘내게는 이런 특기가 있고, 이런 흥미와 기호가 있으니 이 정도 일쯤은 식은 죽 먹기지.’라고 생각한다 해도 네가 그것을 본분으로 여기는 이상 네 특기와 흥미, 기호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알려 준 원칙과 하나님 집의 요구에 따라서 해야 하고, 거기에 네 특기를 더해야 한다. 그것이 합쳐지면 너는 본분을 잘 이행한 것이고, 충성을 다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줬을 때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줬을 때 그는 매우 기뻐했지만, 하나님이 거두어 가려 했을 때도 그는 기꺼이 오롯하게 하나님에게 바쳐야 했다. 남겨 둘 수도, 조건을 내세울 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성심성의껏, 진심으로 바쳐야 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때 너는 기뻐하고 만족하며 네가 득을 봤다고, 하나님이 너를 선대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서 하나님이 네게 바칠 것을 요구할 때 너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너는 버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남김없이 바치고 돌려줄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대로 고스란히 하나님에게 돌려준다면, 원망하거나 남겨 두거나 네가 차지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에게 바친다면, 너는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고 기준에 맞게 본분을 이행한 것이며 하나님이 만족한다. 하나님의 요구는 과하지 않다.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이 네가 바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게 생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네가 의지해 살아가는 자본과 조건도 줬다. 그런 특기, 흥미와 기호가 생긴 덕에 네가 얼마나 많은 득을 봤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렸느냐? 지금까지 너는 하나님에게 얼마나 보답했느냐? 네가 지금에서야 하나님에게 보답하기 시작한다면 너무 늦은 것이다. 만약 네가 예전에 잘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하나님에게 남김없이 바쳐야 한다. 자기 특기, 자기가 파악한 업무 기술, 각종 업무의 원칙을 남김없이 모두 본분에 활용해야 한다. 네가 바치는 것은 원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런 것들을 바쳐서 본분에 활용하면 하나님이 열납하는 한편, 너는 진리와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 너는 조금의 손해도 없이 크게 득을 본다. 동시에 하나님은 네게서 흥미와 기호, 특기를 누릴 권리를 거두어 가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그 흥미와 기호를 네게 이미 베풀어 준 이상 영원히 거두어 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얼마를 바치든 네게는 남은 것이 있을 테고, 하나님은 그것이 언제까지나 끊임없이 네 안에 있게 한다. 그것은 너라는 사람의 일부분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는다면 너는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고, 너는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진심이 없는 것이다. 네게 진심이 있다면 하나님에게서 받아 네가 소유하게 된 것으로 하나님에게 보답해야 한다. 너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만큼, 네가 깨달은 만큼,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남김없이 하나님에게 다시 바쳐야 한다. 하나님이 그냥 바치게 하겠느냐? 아브라함을 보아라.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요구하자 그는 이삭을 제단에 바쳤다.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서 하나님이 정말로 이삭을 거둬 갔느냐?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삭을 그에게 돌려주고 옆에 양 한 마리를 예비해 두었다. 그는 이삭을 하나님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리 준비된 양 한 마리도 얻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에게 준 축복은 그의 생각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고, 그가 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으며, 이렇게 사람을 축복한다. 이는 하나님이 원해서 한 일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너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줬는데, 네가 정말로 하나님에게 보답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적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주는 축복은 네 생각을 초월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특기를 모두 바쳐서 본분에 활용하는 것이 어렵겠느냐? 만약 ‘내가 선천적으로 가진 특기, 흥미, 기호는 타고난 것이고, 부모님이 물려준 거야. 내 유전자와 출신이 좋아서 가지게 된 거라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팔자를 꽤 잘 타고났고 운이 좋은 거지. 하나님에게 돌려줄지 말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아직은 별다른 계획이 없는걸.’이라고 생각한다면, 양심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설령 하나님이 이미 네게 베풀어 준 흥미, 기호, 특기 등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눈에 기준에 맞는 피조물로 보이지 않으며, 최소한 하나님은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흥미, 기호, 특기를 베풀어 줄 때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있다. 사람이 그 흥미, 기호, 특기를 대하는 방식에도 진리에 부합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자본으로 삼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하나님 집 사역을 위해 흥미, 기호, 특기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할 필요가 있을 경우 기꺼이 본분을 자기 의무로 여기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을 오롯이, 남김없이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한 피조물의 진심과 순종을 하나님이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준 은사와 특기를 하나님에게 바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게 빚지는 것이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은사와 특기를 베풀어 줄 때는 기뻐했으면서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자 화를 내고, 하나님을 위해 쓰기는 싫어하면서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쓰려고 한다면 그것이 이성적인 행동이겠느냐? 그것은 사유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이다. 하나님이 준 것이니 하나님이 필요로 하면 응당 바쳐야 한다. 바칠 수 있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진심이 있다는 뜻이고, 바치기 싫어하거나 아주 억지로, 마지못해 바친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진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인성과 인품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또 보자!

2023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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