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본성 본질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너희는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라는 하나님 말씀을 오랫동안 교제해 왔다. 이 말씀은 무슨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어떤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로 이야기하는 화제는 베드로와 바울이 걸은 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토록 오랫동안 교제했으니 너희 모두 분명 수확이 있었을 것이고, 적잖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너희는 그간 들은 설교의 정수를 정리해서 갈피를 잘 잡고 그 맥락에 따라, 정리해 낸 중요한 것들과 중요한 흐름에 따라 체험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체험할지, 본분을 어떻게 잘 이행할지, 간증을 어떻게 잘할지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정리를 마친 뒤 너희의 생명 진입과 영적인 분량에 큰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이 말씀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 실제를 정리하자면 바울의 체험부터 정리해야겠느냐, 아니면 베드로의 체험부터 정리해야겠느냐? (바울입니다.) 어째서냐? (바울의 실패 원인과 대조하며 자신을 반성해 보면 자기가 걷는 길이 바울의 길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보면 추구 방향과 목표가 생깁니다.) 사실상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이 겪은 일 하나하나에서 또는 바울이 걸은 길에서 교훈을 얻고 경험을 정리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바울이 걸은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며 바른길을 걸으라고 하는지, 바른길이란 어떤 길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다면 현실 환경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치우친 길을 걷거나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있기에 바울처럼 결국 벌받는 결말, 말로를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바울의 체험과 결부하여 정리해 보자. 바울에게는 그가 걸은 길, 하나님을 믿은 방식, 그가 추구한 목표 방향 등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이 몇 가지 측면에서 바울이라는 사람의 인품과 성품을 살펴보겠다. 바울의 생애와 바울에게 있었던 스토리를 통해 볼 때 바울이라는 사람이 지녔던 몇 가지 성품으로는 교만함, 독선, 간사함, 진리에 대한 증오, 사악함 그리고 흉악함이 있다. 지금 사람이 확인할 수 있거나 정리해 낼 수 있는 바울의 주요한 성품이 몇 가지이든지 간에 바울의 그러한 성품만을 이야기한다면 너는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너는 바울의 그러한 성품을 언급할 때 그의 추구와 인생 방향,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걸은 길과 연결 지었느냐? 너는 그가 교만하다고 말할 때 사실을 바탕으로 삼았느냐? 너는 무슨 일에서 그의 교만함을 보았느냐? 무슨 일에서 그의 간사함을 보았느냐? 무슨 일에서 그가 진리를 증오한다는 것을 보았느냐? 그의 추구와 인생 방향,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걸은 길이 어떤 길인지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그의 그러한 성품의 본질만을 정리한다면 너무 공허할 것이며, 현시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유익한 작용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추구 관점과 그가 걸은 길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사람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본성 본질은 그가 아무것도 안 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평소에 드러내는 것과 그가 일을 하는 속셈 및 출발점을 봐야 한다. 그의 추구, 그의 욕망, 그가 걷는 길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할 때, 그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거나 책망 훈계를 하거나 혹은 친히 빛 비추어 인도할 때 그가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로 사람의 이 몇 가지 측면을 본다. 이 몇 가지 측면은 모두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한 사람이 일을 처리하고, 생활하고, 처신하는 원칙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방향, 목표, 그가 걷는 길과 관련이 있고,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생존 토대가 무엇인지 등 이런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제쳐 두고 그의 본성 본질만 이야기한다면 아무리 많이 전면적으로 이야기해 봤자 공허할 뿐이다. 바울의 여러 면을 통해 그의 본질을 보고 현시대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교훈을 주려면 우선 바울이라는 사람이 걸은 길, 그의 추구 목표와 생존의 토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던 태도부터 정리해야 한다. 이 몇 가지 측면에서 그의 각 측면의 성품을 분석한다면 근거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교제하고 정리하면 한편으로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는 주된 목적은 현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주재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바울의 길을 걷는 것과 바울처럼 벌받는 결말을 피할 수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가장 좋은 성과가 난다.

바울의 모든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 추구의 출발점, 동기는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충분히 개괄해 낼 수 있다. 바울의 주요 태도 중에 첫 번째는 무엇이냐? (고된 사역과 면류관을 맞바꾸려 한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에게 그런 태도와 내적 상태가 있음을 알게 되었느냐? (그가 한 말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그의 명언을 통해서이다. 보통 명언은 긍정적이다. 의지, 희망, 포부가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한 것으로, 격려와 촉진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명언은 무슨 작용을 하겠느냐? 바울은 꽤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비교적 유명한 말은 무엇이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입니다.) 그 말은 바울이 가진 어떤 측면의 본성 본질을 대표하느냐? 그 성질을 진리로 어떻게 규정해야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 것입니다.) 교만한 본성이 그를 지배하여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다. 면류관 없이는 열심히 뛰어다니지 않고, 면류관 없이는 사역하지 않고, 심지어 면류관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설교를 많이 들은 현시대 사람들은 바울이 드러낸 이러한 태도와 내적 상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 성질을 정할 수 있겠느냐? 정리라는 것에는 성질 규정이 필요하다. 성질을 규정해 내면 그것이 바로 참된 인식이다. 성질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어야만 네가 그 문제를 간파했음이 증명된다. 성질을 규정하지 못하고 남이 성질을 규정한 말만 그대로 읊을 줄 안다면 네게 참된 인식이 없다는 뜻이다. 당시 바울의 심리 상태와 내적 상태가 어떠했길래 바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냐? 어떤 속셈이 그가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냐?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울의 그런 추구의 본질은 무엇이냐?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당했기에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하고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라는 사람의 본성 본질이고,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다. 아까 너희는 이것을 거래하려 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울의 어떤 태도를 대표하느냐? 지금 정리하려는 것은 면류관과 복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바울의 가장 진실한 태도가 무엇인가이다. 바울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들었는지,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손한 태도입니다.) 그것은 태도가 아니라 성품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할 것은 그의 태도이다. (탐욕스러움입니다.) 그것은 복받으려는 속셈이 있고 욕망이 있는 것과 같으며, 본성 본질 안에 있는 것이다. 태도란 무엇이냐? 예를 들어, 내가 매운 음식을 자주 먹으면 위에 좋지 않다고 했더니 사람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치자. “매운 음식이 몸에 나쁘다는 건 알지만, 저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걸요! 매운 음식을 끊으면 뭘 먹어요?” 내가 “네 건강을 위해서 매운 음식을 안 먹는다면 끼니마다 다른 것을 사 먹을 돈을 주마.”라고 하면 그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좋아요! 매운 것 안 먹을게요.” 거래가 성사됐고, 그는 약속을 지킨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도록 자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실 돈 때문이다. 돈을 주지 않는다면 그는 약속을 어기고 원래 먹던 대로 매운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이고 돈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태도이며,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것이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냐? 말을 잘 듣기 위한 것이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냐? (아닙니다.) 전부 다 아니다. 그가 매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 자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태도는 속이고, 무성의하게 대하고, 거래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심지어는 본래보다 더 심각하다. 아주 딱 맞는 예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예시를 바울과 대조해 본다면 어떤 부분이 서로 비슷하겠느냐? (바울이 복받으려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하고, 헌신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양육하는 이 모든 것을 의의 면류관과 맞바꾸기 위한 조건이자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고생하든, 헌신하든, 열심히 뛰어다니든, 고초를 얼마나 겪든 간에 그의 마음속 유일한 목표는 의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의의 면류관을 얻고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정당한 목적으로 삼았다. 고생하고, 헌신하고,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수단이었다. 그의 그 모든 외적인 좋은 행위는 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외적인 좋은 행위로 최후의 복을 얻으려 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죄이다.

바울의 말과 행동, 그가 드러낸 것, 그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속셈과 목적 그리고 태도를 볼 때 거기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의 안에는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조금도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한 것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반성했느냐?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가 어떻게 자기 상상을 평생 추구할 목표로 삼았느냐는 것이다. 그가 설마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옳을까? 남들은 안 하는 생각을 나만 하는데,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라는 고민은 한 번도 안 해 보았단 말이냐? 그는 이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속 말을 편지로 써서 여러 교회에 보내 모든 사람이 돌려 보게 했다. 이는 어떤 성질이냐?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자기 생각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예수의 말씀에 비춰 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것이냐? 그는 자기가 상상한 것과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는 어떤 문제이냐? 그는 자기가 상상한 것과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고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는 너무나 교만하고 독선적이지 않으냐? 그러고도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었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할 수 있었겠느냐? 만약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겠느냐? 자기도 하나님이 되고 싶지 않았겠느냐? 그게 아니었다면 자기 생각과 관념 속에서 상상한 일을 자기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지 않았을 테고, 자기 관념과 상상 속의 일을 진리로 삼아 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이 진리이고 진리에 부합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전하고 주입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준수하게 하였으며,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예수의 말씀을 대신하였고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 이것이 바울의 두 번째 죄 아니겠느냐? 바울의 이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하다!

역대로 바울과 비슷한 사람은 많았는데 왜 하필 바울을 전형으로 삼겠느냐? 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황당한 이론과 그릇된 주장, 그리고 그 본인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기에 파괴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미혹하고 해를 입힌 사람이 워낙 많고, 대대로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심하냐? (크리스천 모두가 그를 본보기로 삼아 본받았고, 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며 실행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 말씀을 교제한다면 아무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네가 바울이 한 말을 교제한다면 사람들이 곧바로 귀를 쫑긋 세울 것이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냐?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그리스도로 여기는 것으로, 바울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극악무도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울은 유사 이래 최악의 적그리스도이다! 그가 무슨 속셈으로 말을 했는지 너무나 분명하다. 그의 음험함과 그의 목적이 모두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의 본질은 너무도 음험하고 악독하다. 성질이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콕 집어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하지 않으면 사람이 계속 그에게 미혹될 것이다. 단, 분석하려면 바울이라는 반면교사가 현시대 사람들에게 더욱 좋은 작용을 하게 해야 한다. 조금 전에 바울의 죄 두 가지를 정리했다. 첫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바울은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을 면류관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삼았고, 복과 면류관 얻는 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여겼습니다.) 맞다. 그러한 것들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본디 패역과 사악한 본성이 깃든 거래였으나 바울은 그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바울은 자기 상상과 관념으로 옳다고 여긴 것들을 진리로 삼고 단 한 번도 반성하거나 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을 미혹하고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준수하게 하고 그의 황당한 이론을 지키게 하였으며 그를 그리스도로 대하게 하였습니다.) 이 항목은 상당히 심각하다. 우선 조목조목 확실히 기록해 두고, 모두 정리한 다음 대조해 봐야 한다. 한 가지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우선 그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그런 다음 대조해야 한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분석하는 것은 모두에게 한편으로는 경고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올바른 길을 선택한 뒤에 정확한 실행 길을 찾아서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된다. 이러면 완벽히 성과를 낸 것이다.

바울은 또 하나의 심각한 죄가 있다. 즉,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지능, 자신의 지식과 문화, 자신의 신학 지식 이론에 근거해 사역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에 관련된 것이다. 너희는 그러한 것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도 정리하고 살펴봐야 한다. 이 역시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어떠한 모습과 연관되는지, 그런 모습에서 보이는 그의 본성 본질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그가 마음 깊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라. 그의 속셈과 목적이 곧 그가 잘못된 길을 걷게 된 근본 원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똑똑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바울은 율법시대의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구약 성경만 있었다. 바울이 성경 문구를 숙독했기 때문에 성경 지식은 매우 해박하다. 마치 지금의 신학 교사나 목사, 설교자, 신부와 같은 레벨이다. 그는 아마 이들보다도 신학 지식이 더 풍부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후천적으로 익힌 것들이다. 바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은 무엇이냐? (자질입니다.) 바울은 태생적으로 총명하고, 언변이 좋아 말을 잘했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두려움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타고난 자질, 은사, 총명, 재능과 지혜, 그리고 후천적으로 익힌 지식을 중점적으로 얘기해 보자. 그의 뛰어난 말솜씨는 무엇을 뜻하느냐? 그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 어떤 태도를 지녔느냐? 그는 과장해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고상한 영적 도리와 이론, 지식, 그리고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바울이 한 말의 성질을 한 단어로 뭐라고 개괄할 수 있느냐? (‘공허’입니다.) 공허한 말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처음 들을 때는 강력한 느낌을 받지만, 그런 힘은 이내 사라진다. 보아라. 바울이 말한 것들은 헛되고 실속이 없다. 다시 말해,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너는 그가 말한 이론 속에서 실행의 길과 실행 방향을 하나도 찾지 못할 것이며, 네가 현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정확한 무언가를 찾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이론이든, 근거든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가 말한 종교 이론과 영적 도리는 전부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런 것을 말한 목적은 무엇이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항상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많이 농락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한 후 사람을 많이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얻으면 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맞느냐? (아닙니다.)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은사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있기에 그렇게 자신을 뽐낼 수 있었는데, 그와 같은 행위와 태도가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는 이를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궁하려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가 지닌 문제의 본질이고, 그런 일을 저지른 근본 원인과 동기다. 무엇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모든 것, 즉 지금 봤을 때 도리, 논조, 신학 지식이든, 그의 타고난 은사든 혹은 그 자신이 이해한 것이든, 종합적으로 봤을 때 바울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그 모든 것들을 진리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그런 신학 이론을 이용해 사람들을 농락하고 가르쳤다.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 문제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그는 어떤 것들을 진리로 간주했느냐? 하나는 그의 타고난 은사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배운 지식과 신학 이론이 있다. 신학 이론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거나 성경 문구를 읽어 얻은 것이고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상상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뜻으로 이해한 그런 관념과 상상을 모두 진리로 간주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다 진리로 간주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이런 것들이 진리라고 생각했겠느냐? 그에게 진리에 대한 개념이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것들을 무엇으로 간주했겠느냐? (생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수준 높은 설교를 많이 할수록 생명도 그만큼 커진다고 여겼다. 그가 그런 것들을 생명으로 간주한 일은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에 영향을 주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는 길에 영향을 줍니다.) 그것이 한 측면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그는 그런 것이 있으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복을 받는 것과 관계된다. 그는 생명이 커지는 만큼 천국에 들어가고 천당에 올라갈 자신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천당에 올라가는 데에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는 것입니다.) 바울이 천국에 들어가려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 가지 더 있다. 이것은 그의 말 속에서 드러났다. 어떤 말이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는 말입니다.) 그가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 그 말은 어떤 의미겠느냐? 죽으면 하나님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냐? 이 얼마나 커다란 야심이냐! 이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 그럼 우리가 바울에 대해 분석한 것이 잘못된 일이겠느냐?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바울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의 은사와 후천적으로 배운 지식을 생명으로 여기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큰 죄다. 바울의 세 가지 죄에서 모두 그의 본성 본질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죄에서 그의 본성 본질의 특징이 조금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고, 모두 그의 본성 본질을 대표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의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대표적인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바울이 서신에 자주 사용했던 관용어가 무엇이냐? 성경 원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찾아보아라. 함께 분석하고 해부하면서 바울이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하나님은 왜 그를 혐오하고 증오했는지 살펴보자. 바울처럼 유명한 인물이, 초대 교회의 사역에 그토록 크게 공헌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최후에는 벌받는 결말을 맞이한 것이냐?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바울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보는지, 하나님이 왜 바울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고 결론을 내렸는지, 하나님이 마지막에 바울의 성질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런 결말을 내린 근거는 무엇인지, 이 몇 가지를 열거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을 대적한 사실을 보여 주고, 사람들이 그가 까닭 없이 정죄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겠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겉만 보고 남을 정의 내리기 쉽다. 겉만 보고 정의 내릴 때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이냐? 한 측면으로는 전통문화와 사회 교육을 들 수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가정 교육, 그리고 시시비비와 흑백에 대한 이념 및 개념이 있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학교 교육이 있다. 이것이 사탄의 전반적인 교육 체계이다. 사탄이 이러한 것들을 주입한 결과 사람은 자기 관념과 기호에 따라 이게 좋고 저게 나쁘다, 이게 맞고 저게 틀리다 하는 식으로 무언가의 성질을 규정하게 됐다. 사람이 이렇게 성질을 규정할 때마다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사실 사탄의 이론과 철학을 근거로 한다. 사람의 이러한 근거들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패괴된 인류가 한 사람 혹은 한 가지 사물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건 전부 틀린 것이며, 전부 진리와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진리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 사물의 발현이요, 모든 긍정적 사물의 실제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사람이 접촉 가능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는 진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 그 사람의 본성 본질, 그 사람이 일하는 출발점과 가는 길, 그리고 긍정적 사물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런 것에 근거해 정한다. 하나님이 만사 만물에 대해 결론을 내린 결과가 진리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사탄은 만사 만물의 성질을 규정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사탄의 철학과 논리를 근거로 한다. 진리와는 딱 반대되는 것이다. 인류는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으므로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다. 사람은 사탄을 대변하며, 사탄의 화신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성질을 규정하는 근거는 사탄의 철학과 논리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모든 것의 성질을 규정한 결과는 무엇이냐? 그 결과는 정확히 진리에 맞서는 것이요, 진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바울이 서신에서 자주 쓰던 관용어를 찾았느냐? 읽어 보아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입니다.) 보아라. 바울이 매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순위는 이러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바울의 순위는 몇 번째이냐? (세 번째입니다.) 그의 마음속 1위는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세 번째는? (바울 자신입니다.) 바로 그 사람 본인이자 그 자신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이 말에는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 하늘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인자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이라 칭하든, 주라 칭하든 그는 땅의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고 인간이 따를 수 있는 일개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도의 역할은 무엇이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순방하며 설교하고 서신을 쓰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뜻은 바로 ‘당신이 가지 못했던 곳은 내가 대신 가고, 당신이 가기 원치 않는 곳은 내가 대신 가서 살펴본다.’라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도는 바로 이런 개념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정한 서열은 바로 자신도 보통 사람이고, 예수 역시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와 예수 그리스도는 지위가 대등한 인류로, 본질적으로 지위와 신분상의 차이가 없고, 직분상의 차이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이름과 나이, 가정 환경 배경이 다르고 외적인 은사나 지식에 격차가 존재할 뿐, 나머지는 바울이 생각하기에 그 자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둘 다 인자라 칭할 수 있지만, 단지 현재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권력을 행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아 교회를 순방하며 교회 사역을 하는 바람에 예수에 버금갈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생각한 사도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이다. 그는 그렇게 이해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중 “부르심을 입은”이라고 한 말에서 바울의 마음 자세를 알 수 있다. 그가 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을 썼겠느냐?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나한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할 권력이 없다. 나는 예수의 명령을 따르거나 예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같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중이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다 똑같은 인자라고 생각했다. “부르심을 입은”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그의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 주었고, 그를 하나님이 정하고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심각하겠느냐?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고, 예수의 부름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라고 명령할 권력이나 자격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없고 오직 하늘의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하늘의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늘의 하나님이 첫째고, 자신이 둘째라는 의미다. 그는 예수를 어떤 위치에 두었느냐? (그와 동등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그는 입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임을 몰랐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이 관계를 몰랐다는 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느냐? (그는 예수님이 성육신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맞다. 그것이 아주 심각한 부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육신이고,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부인했다. 그럼 여기에 숨은 뜻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인했는데 예수의 말씀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의 가르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가장 심각한 부분이냐? 2천 년 전에 예수는 이 땅에 와서 가장 큰 사역, 즉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을 하였다. 성육신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전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 이 사역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그것은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으로, 하나님 자신이 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울에게서 강하게 부정당했다. 그는 예수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 자신이 한 사역임을 부인했고, 하나님이 이미 구속 사역을 이룬 이 사실을 부인했다.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니냐? 너무나 심각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에 대해 그는 구하면서 알아 가기는커녕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전 인류를 구속한 사실도, 하나님이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된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인류 전체가 하나님이 역사한 후 이미 구속되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여겼고, 예수가 인류를 구속한 그 사실이 그에게는 인정되지 않고 전부 말살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다. 앞서 바울을 가리켜 2천 년 이래 가장 큰 적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 사실은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들이 없이 하나님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한 적그리스도였다고 말한다면 사람이 믿을 수 있겠느냐?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그런 서신들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고, 그런 서신이 있다는 사실적 증거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신빙성 없는 발언이 되고, 너희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바울이 했던 그 말을 다시 살펴보아라. 예수가 했던 그 많은 말이 바울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느냐? 예수가 한 그런 말들을 바울은 그 자신의 종교적 도리만도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예수가 떠나고 난 뒤 바울이 전도하고 사역하고 설교하고 교회를 목양했지만, 한 번도 예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거나 체험하지도 않았다. 그가 전한 것은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의 말로,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빈말이다. 지난 2천 년간 주를 믿는 사람은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바울의 그 공허한 이론을 받아들이다 보니 결국 그에게 2천 년간 기만당했다. 지금 네가 교계에 가서 바울이 틀렸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항의할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이요, 그들 종교의 창시자이고, 그들은 바울의 충실한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미혹되었느냐? 그들은 이미 바울과 같은 편에 서서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똑같은 관점과 본성 본질을 갖고 있고, 똑같은 방법으로 추구하며, 철저하게 바울에게 동화되었다. 이것이 바울의 네 번째 큰 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율법시대 이후에 한 은혜시대의 사역을 부인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부류라고 보았다. 이것 역시 무척 심각하다. 바울은 그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다. 즉, 인류의 일원으로, 패괴된 인류와 같은 본성 본질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랬던 것이냐?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화신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사실 그가 믿은 것은 하늘 위의 막연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가 곧 진리이고 생명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말해 보아라.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고 예수님을 대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두 사실에 부합하는 말이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과 죄는 그 심각함이 점입가경이다.

바울이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한 말을 분석해 보자. 대단한 말이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라는 말을 썼다. 일반적으로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쓴 것도 대단한데, 누가 감히 ‘의’라는 수식어로 면류관을 정의할 수 있겠느냐? 유독 바울만이 이런 말을 썼다. 왜 그는 그런 말을 썼겠느냐? 이 말은 출처가 있는 말이고, 아무렇게나 쓴 말이 아니다. 그가 한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뜻은 무엇이냐? (그런 말로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협박은 한 측면이다. 분명 거래하려는 의도가 있고, 하나님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성질을 띠고 있다. 또한, 그가 늘 의의 면류관을 전파한 것에는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만약 바울이 면류관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고 사람들이 오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동하고 미혹하는 성질을 띠고 있는데, 이는 바울의 야심 욕망과 관련이 있다. 그는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을 얻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일종의 수단을 썼다. 바로 곳곳에서 전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전한 목적이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하기 위한 것이다. 즉, 청중들에게 ‘나처럼 헌신하고 길을 달리고, 내 방식처럼 추구하면 의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라는 일종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듣고 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면류관을 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라고 당연히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듣는 대신, 바울처럼 추구하고 길을 달리고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바울이 곧 본보기이자 주님이고, 사람이 가야 할 방향과 목표이니 그를 따라 하면 그와 같은 면류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그에게는 가장 악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그 면류관을 얻지 못하고, 그것이 나 혼자 상상하고 일방적으로 바란 것에 그친다면, 나를 비롯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가 잘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땅의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 존재도 부인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시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내가 그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형제자매들이 당신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당신은 내가 선동한 사람들, 내가 한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신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겠습니다. 당신은 의롭지 않습니다. 나 바울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악독한 면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행위가 아니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악마의 행위다. 즉, 선동하고 미혹하고 현혹하며,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하는 것이다. 바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아. 내가 면류관을 얻는다면 그 면류관이 바로 의의 면류관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진정한 공의야.’ 그가 말한 ‘의의 면류관’이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선동하고 미혹하는 동시에 이런 방법을 통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반역이라고 한다. 이런 행위의 성질은 무엇이냐? 그가 한 말은 표면적으로 볼 때 품위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주 정당해 보인다. 의의 면류관을 얻고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두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별 자질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 천당에 가려는 목적이 있다. 설령 청소부나 문지기가 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속내와 목적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고, 이해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 그는 그 일에서 무척 많은 노력과 공을 들였고 또 많은 방책을 꾀하였다. 바울이 한 그런 말들을 통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남들이 모르는 어두운 부분과 악독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애초에 바울은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공허한 이론들을 전파했다. 또한 자기 관념과 상상, 그리고 지식을 통해 배우고 머리로 추론해 낸 것들을 전파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것들을 전파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그들 마음속에 얼마나 큰 해악을 가져다주었겠느냐! 또한, 그의 서신을 통해 그릇된 깨달음을 얻을 후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의 그런 말을 읽은 사람들은 너무 깊이 중독된 나머지 오랜 시간 그런 것을 없애 버리지 못한다! 얼마큼 깊이 중독되었겠느냐? ‘바울 효과’라는 현상도 생겨났다. ‘바울 효과’란 어떤 것이냐? 종교에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는 것은 사람들이 바울의 그런 사상과 관점, 논조, 그리고 그가 드러낸 패괴 성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특히 집안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 온 크리스천 가문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주님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세속을 떠나 집과 생업도 버린 채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죠. 우리가 한 모든 일은 바울이 행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면류관을 얻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께 따져 묻겠습니다.” 이런 논조가 없느냐?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기풍의 기세가 약하지 않다. 이 기풍은 어떻게 생겼느냐? (바울의 전파로 생겼습니다.) 바로 바울이 심은 악성 종양에서 생겨난 나쁜 결과다. 바울이 이렇게 선동하지 않았다면, 자꾸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람은 그 시대의 배경이 없어 애초에 그런 일을 몰랐을 것이다. 설사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그렇게 행할 담력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바울이 부추기고 선동한 것이다. 언젠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감히 주께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또 셋째 하늘에 가서 예수를 고발하려 할 것이다. 이는 종교계가 예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종교계가 바울의 영향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바울의 다섯 번째 죄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이 말한 ‘의의 면류관’의 이유를 도출해 볼 때 여기의 계책은 ‘의’란 단어에 있다. 바울이 왜 ‘의’란 말을 입에 담았겠느냐? 땅에서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하나님 선민들을 선동하고 미혹하며, 하늘에서는 ‘의’를 들먹이며 하나님을 협박하고 하나님께 큰소리치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비록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큰소리치는 목적과 기세가 그 단어에 낱낱이 드러나 공개되었다. 이는 다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간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바울의 본성 본질을 개괄할 수 있겠느냐? (개괄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지금 이 사실들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그 성질을 정하면 바울의 본성 본질을 더 분명하고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실에 근거해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이루는 효과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큰소리친 것은 뒤에서 기분이 좀 언짢거나 패역한 성품을 좀 드러내거나 불순종한 것이 아니다. 이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서신이나 공공장소에서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모든 사람이 들고일어나 분개하며 다 함께 하나님께 대항하고 큰소리치도록 선동하고 미혹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바울은 혼자서만 하나님께 큰소리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선동했다. 이것은 교만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같은 행동이다! 지금 언급하는 죄는 앞에서 언급한 죄보다 더 심각하다. 언급할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부하는 것이 어떠냐? (좋습니다.) 왜 좋으냐? (바울에 대해 더욱 분별력이 생깁니다.) 네가 분별력이 생기면 바울의 각종 태도, 패괴 표출, 진면목을 철저히 파헤쳐 똑똑히 알 수 있다. 그것으로 목적을 이루었느냐? (아닙니다.) 우리가 도출해 낸 모든 태도와 그것의 핵심 내용, 주제, 본질을 너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과 대조해 보고, 자신이 가는 길과 자신의 본질이 바울과 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히 알면 완전히 결실을 거두고, 우리가 바울을 해부한 목적도 이루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바울이 의의 면류관을 추구한 것과 같은 태도는 저에게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너에게 그런 태도나 본질이 심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그 본질이 약간은 있을 것이다. 바울에게 그런 태도가 있다면 너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보이는 태도가 10이나 12라고 한다면 너는 얼마나 되느냐? (7이나 8쯤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그런 상태를 드러내고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너는 항상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주 그런 상태를 드러낸다. 네 평생에서 아마 절반의 시간은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내적 상태로 지냈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하나님 사역이 너의 관념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이 너를 책망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한 환경이 네 뜻과 다를 때 너는 그런 내적 상태가 생길 것이고, 하나님께 큰소리치고 대항할 것이다. 그럴 때는 우리가 지금 바울이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한 행동을 분석한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왜 도움이 되겠느냐? 네가 지금 마음속으로 바울의 그런 행동의 성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드러난 패괴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마의 본성 본질이었다. 너에게 그런 내적 상태가 생겼을 때 너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아차리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야 할 참된 길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할 법칙이다. 이렇게 교제하면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바울이 또 어떤 대표적인 말을 했느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살고 있는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신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그리스도로 자처했다. 이는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는 역겨운 일이고, 이 문제의 본질은 아주 심각하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스도라는 신분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는 왜 그렇게 그리스도가 되고 싶어 했을까? 만약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가 아주 평범하고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 혹은 보잘것없는 사람,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 별다른 능력도 없고, 고귀한 신분도, 일반인을 뛰어넘는 비범한 능력과 재능도 없는 존재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했겠느냐?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학식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초인, 위인,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되려고만 했다. 그런 그가 주목받지 못하는 그리스도가 되려고 했을 리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란 도대체 어떤 지위이며 어떤 역할이었겠느냐? 어떤 신분과 지위를 가지고 어떤 권병, 능력, 기세를 보여야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겠느냐?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마음속 상상과 인식, 그리고 바울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는 야심과 욕망을 품은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되고자 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서신에도 일부 드러났다. 몇 가지 사실을 분석해 보자. 예수는 사역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는 일들을 했다.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신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자 개념으로 비쳤다. 어떤 일들이겠느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렇다. 바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일이었다. 설사 바울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예수가 보여 준 이적과 기사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때 그는 한 번도 예수가 한 말씀과 설교를 전하지 않았다. 불신파인 바울의 눈에는 그리스도가 한 그렇게 많은 말씀과 설교와 사역,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따름으로써 예수가 영예로운 신분과 지위를 얻은 것이 굉장히 영광스럽고 고상하게 보였고, 예수의 지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히 존귀하고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바울이 본 것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역할 때 나타낸 모습과 드러낸 성품, 그리고 신분 본질에서 바울이 본 것은 하나님의 본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 길, 생명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지혜도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이겠느냐? 현대인들의 말로 하자면, 그가 본 것은 유명인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예수의 팬이 되기를 갈망했다. 예수가 말하고 사역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와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겠느냐! 이는 바울이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었기에 그는 그 순간이 오기를 선망했다. 언젠가는 자기도 예수처럼 유창하게 설교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부러움과 갈망하는 시선으로 자기 한 사람을 주목하고, 오직 자신만을 따르고자 하기를 바랐다. 예수의 그런 기운은 그를 탄복하게 했다. 사실, 그는 진정으로 탄복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앙망하고 주목하고 숭배하고 우러러보게 하는 그런 신분과 기백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는 이런 것을 부러워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느냐? 바울은 그런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신분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갖는 인물이나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존재가 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느냐? 바로 사방으로 설교하러 다니고 이적도 행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한마디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내면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켰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했느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그가 이루려고 했던 주요 목표다. 그는 그리스도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의 개인적인 추구, 그가 걸은 길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는 권세를 숭상했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이다.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 것은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지 그의 말 한마디로 그를 규정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일하는 스타일, 방식, 원칙 등을 보면 그가 한 모든 일이 다 그리스도가 되려는 목적을 중심으로 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근원이자 본질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되고 싶어 했다. 이것은 그의 추구와 인생길, 그의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 영향을 미친 행위들은 어떤 것이 있느냐? (바울은 사역하고 설교할 때 곳곳에서 자신을 뽐내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그중 한 가지다. 바울은 곳곳에서 자신을 뽐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고통을 받고 어떻게 일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명하여 듣는 이들에게 그가 마치 그리스도 같다는 인상을 주고,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싶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목적이다. 만약 누군가 정말로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면 그가 부인하였겠느냐? 거부하였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추구에 영향을 주었던 행위 중 하나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서신을 썼습니다.) 그렇다. 서신을 써서 오랜 세월 전해지게 했다. 바울은 서신에서도, 또 사역을 하면서도, 교회를 목양하는 과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그 이름을 받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가 항상 이런 식으로 사역하고 설교함으로써 일으킨 부정적인 효과는 무엇이겠느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느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고 그가 예수를 대신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요? 저는 잘 모르는데요. 우리는 바울 그리스도만 믿습니다.”라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랬다면 너무나 기뻐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 역시 그가 추구한 목표 중 하나다. 하나는 바울의 사역 방식인데, 늘 과장되고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사역 능력이 뛰어나고 설득력 있고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강력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그 외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의 이름조차 높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말씀과 사역이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었는지도 증거한 적이 없다. 회개의 도에 대해 그가 설교한 적이 있느냐? 그것도 설교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 사람들에게 가르친 여러 진리를 바울은 한 번도 전하지 않았고, 마음속에서 그것을 부정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람에게 가르친 진리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말과 사역, 가르침을 진리로 여겨 예수의 말씀을 대신함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말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고 지키도록 했다. 무엇이 바울이 그렇게 행동하고 드러내도록 부추겼느냐? (그리스도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려는 속셈과 욕망, 야심에 부추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실행 및 추구와 맞아떨어진다. 이것이 바울의 여섯 번째 큰 죄다. 이는 심각하지 않으냐? (심각합니다.) 사실 어느 죄든 다 죽을병처럼 심각하다.

이제 바울의 일곱 번째 죄에 대해 교제하겠다. 이것은 더욱 심각하다. 바울은 주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유대교 사람이었다.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에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나와 아름다운 가나안 땅으로 가며 겪었던 일들,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난 일,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 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한 일, 율법을 반포한 일 등 이 모든 것이 당시 유대교인들에게는 상상과 관념, 전설이었느냐, 아니면 사실이었느냐? 그때 당시의 하나님 선민,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은 하늘의 하나님은 계시고 또 진실하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이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널리 전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과 의무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신파 부류는 그런 일을 전설로 여긴다. 이 사실을 검증한 사람도 없고, 진실 여부를 알아본 사람도 없으므로 이들은 반신반의한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는 하나님이 진실하여 자신의 추구나 간구, 갈망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고, 얻고 싶은 것이 있어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도 이런 하나님이 존재하길 바란다. 이는 하나님을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이미 불신파다. 가장 못한 부류는 어떤 모습이 있느냐?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고, 각종 의식을 지키고, 심지어 온갖 전설을 믿을 뿐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그들의 관념과 상상 속의 하나님은 막연하고 공허하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신봉하느냐? 바로 유물론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전설 속의 것, 막연한 것, 혹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영계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존재도 그들이 믿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데, 이런 것은 그들이 철석같이 믿는다. 과학이니, 전기니, 미생물이니, 화학 물질이니 하는 것들은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런 것에 대한 불신파의 믿음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데, 이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진실로 믿는 부류, 반신반의하는 부류, 아예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유물론자 등 세 부류의 사람들을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과연 하나님이 있을까요?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계신다던데요. 그 셋째 하늘은 얼마나 높고 얼마나 멀리 있나요? 얼마나 넓은가요? 천국이라는 곳이 있고, 거기에는 황금 벽돌과 청옥 기와, 황금으로 된 벽도 있다고 하던데 어디 그렇게 좋은 곳이 있나요? 말도 안 되지요! 율법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들에게 율법을 반포하시고 그 율법이 새겨진 증거판도 있다고 하던데 그건 아마 다 전설이겠죠. 전부 지배 계급이 하층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겠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진짜이냐, 거짓이냐? (거짓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지금껏 인도해 왔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직업이나 밥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직업이나 밥줄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세 번째 부류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본성 본질과 연관이 있다. 바울은 거창한 얘기를 늘어놓길 좋아했고, 공허한 것들, 상상하는 것이나 막연한 것들, 이해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것들을 좋아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길 좋아했고, 고집스러웠고 치우쳤다. 이런 사람은 비인간적인 사람인데, 그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바울의 성품과 본성 본질, 그리고 취향, 바람, 추구, 지향을 봤을 때, 비록 그가 회당에서 섬기고, 훌륭한 스승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가 배운 그런 지식은 그저 자신의 욕망과 야심, 허영심을 채우거나 사회에서 밥줄과 신분, 지위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바울의 본성 본질과 그의 추구를 보면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그의 믿음은 약속이 아닌 빈말이다. 그는 바로 불신파이자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이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바울이 불신파인데, 그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은혜시대의 복음을 전파했을까요?”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바울이 왜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느냐? 어떤 것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냐? 어떤 일이 전환점이 되어 그로 하여금 그런 역할을 맡게 하고, 그와 같은 불신파가 그런 길을 걸을 수 있게 하고, 방향을 바꾸게 한 것이냐? 여기서 전환점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바로 다메섹 길에서 바울을 친 일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바뀌었다. 하나는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던 그가 그 존재를 믿게 된 것이다. 그가 핍박하던 예수가 다메섹 길에서 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는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주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뭐라고 했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울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상상도 못 했던 그분, 자신의 상상보다 더 대단한 주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이 어떻게 증명되었느냐? 바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바울이 절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바울 앞에 나타난 사실에서 증명된 것이다. 예수의 능력이 얼마나 크냐? 바울의 눈이 큰 빛을 만나 멀어진 순간에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느냐?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네 마음속에 믿음이 있고 토대가 있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의 음성이나 뒷모습만 나타나 말씀하고 네 이름을 부르더라도 너는 하나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바로 ‘이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셔. 나는 보았고, 들었어. 하나님이 내게 임하셨어.’라고 말이다. 네가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 순간을 간절하게 바랐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겠느냐?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아예 없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올랐겠느냐? (두려움입니다.) 그는 두려워했다. 그분이 자기를 칠 수도,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옥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혼비백산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에 예수가 사역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든, 설교하든,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 대단한 기세와 장면이 펼쳐졌더라도 바울에게 예수는 그저 한낱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바울은 예수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업신여겼던 그 평범한 인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더는 예전의 평범한 사람의 육신이 아니었다. 음성만 들린 것이 아니라 불기둥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생을 여러 번 반복해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너무나 눈부신 빛이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바울을 쳤느냐? 하나님이 바울에게 임했을 때 바울은 순간 눈이 보이지 않아 그 자리에 엎드려졌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그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냐, 아니면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닙니다. 그는 전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지닌 존재로, 전혀 견딜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말로 임할 때는 예수를 보았을 때의 그런 평범한 육신의 모습이 아니다. 온화하고 비천하고 평범하고 피와 살이 있는 모습으로, 그냥 보아 넘기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임하면 너를 치지 않더라도 너는 견딜 수 없다! 바울의 내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내게 임하신 분이 바로 예전에 내가 핍박하고 무시하던 예수로구나. 이 빛은 너무나 대단해!’ 하나님이 그에게 엎드리라고 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너는 엎드려야 한다.”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엎드렸겠느냐? (두려웠습니다.) 아니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인류는 너무나 미천한 존재다. 하나님의 빛이 인간이라는 속물에 임할 때 인간은 저도 모르게 엎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한 분이다. 인간의 담력이나 본능으로는 전혀 감당할 수 없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이고 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엎드릴 수 있었겠느냐? 그는 어떤 기량도 발휘하지 못하고 엎드려진 것이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녹초가 되어 버렸다. 오기, 교만, 방자함, 독선, 거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의 앞에 하나님의 본체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 그에게 비쳐 그가 보게 된 것뿐인데도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컸다. 이는 바울의 전환점이다. 만약 특수한 배경이 있어서 특별 케이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전환점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인간성과 양심이 있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것이 일생의 추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역대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그 수가 극히 적은데, 욥은 시련을 받은 후 하나님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욥은 평생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 인식하기를 추구했지만, 일흔이 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저 하나님의 주재를 느낀 것이 전부이건만, 욥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 자기 귀로 직접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믿음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승화라는 전환점이었다. 다시 말해 그때부터 그의 믿음이 더 커졌고, 자기가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옳고 좋으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함을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 겪는, 의혹 섞인 믿음이 진실한 믿음과 의혹 없는 믿음으로 바뀌는 그런 작은 전환이 아니라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승화였다. 그렇다면 바울의 경우, 하나님이 그를 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그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었느냐? 승화된 것은 절대 아니다. 그에게는 원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승화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겠느냐? 그것은 바울의 추구와 연관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힘쓰는 것으로 속죄하려 했습니다.) 바로 그랬다. 그 역시 죽음이 두려웠으며, 그는 꽤 교활했다. 그는 자기가 박해하던 예수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깜짝 놀라 이렇게 생각했다. ‘이걸 어쩌면 좋지? 주님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겠어. 안 그러면 죽게 될 거야!’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전하며 힘쓰기 시작함으로써 속죄하고자 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복음 전파가 정말로 성공해서 주님께서 만족하시면 면류관과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복받을 더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주의 부탁을 받아들여 자기 죄를 씻으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를 믿고 받아들인 속셈이자 목적이다. 다메섹 길에서 예수와 만나고 하나님이 그를 쳤을 때부터 그의 추구와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그 전환점으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이 새로운 시작이 긍정적이었느냐, 아니면 부정적이었느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저 하나님의 위엄이 두렵고 하나님이 자신을 치는 것이 두려워서 더욱 교활하고, 입에 담기 힘들고, 떳떳하지 못한 거래의 방식으로 예수의 부탁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는 더더욱 역겨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 중점적으로 교제할 내용은 이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크게 빛 비춤을 받은 이후의 전환과 갖가지 행동을 통해 바울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본성 본질을 가진 인간이었는지가 이로써 완전히 확실해졌다.

하나님이 친 뒤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에서 갑자기 땅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어쩔 수 없이 예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성육신한 하나님, 즉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힘썼다. 물론 그가 힘쓴 목적은 한 측면으로는 자신의 죄업을 씻는 것이었고, 다른 측면으로는 복받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고 자기가 원하는 종착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바울의 말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이겠느냐, 아니면 예수이겠느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믿는 분은 여호와인데 어째서 예수가 나를 친 거지? 예수가 나를 칠 때 여호와께서는 왜 막지 않으셨을까? 둘 중에 대체 누가 하나님이시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가 예수를 자기 하나님으로 생각할 일은 절대로 없었다. 입으로는 인정했을지라도 속으로는 의심스러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차 ‘여호와야말로 하나님이다’라는 신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후 모든 서신에 써넣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의 ‘하나님’은 아마 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가 곧 여호와라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고, 예수를 항상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며 ‘자’라고 했지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통해 바울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가 유일한 참하나님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의심하고 반신반의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을 대하는 관점과 바울의 추구 방식을 볼 때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성육신의 비밀을 알지 못했고 예수가 유일한 참하나님임을 알지 못했다. 이를 통해 바울이 권세를 숭상하는 약삭빠르고 간사한 사람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악함과 세력, 지위를 숭상하는 바울의 상황을 볼 때, 바울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느냐? 그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참된 신앙이 없었다. 그럼 그가 마음속으로 정의한 하나님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하며 사역했겠느냐? (복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당한 것입니다.) (벌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로 귀결된다. 벌받는 것이 두려웠던 데다가 그의 몸에는 빠지지 않는 가시가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 가시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행동과 말들, 그리고 그가 다메섹 길에서 보인 반응과 하나님이 친 일이 이후 그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그의 마음에는 그 어떤 신앙도 없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를 불신파나 무신론자라고 확정할 수 있다. ‘난 대단한 사람을 믿고, 대단하고 나를 항복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위해 뛰어다니며 목숨을 바칠 거야. 누가 나에게 종착지와 면류관을 줄 수 있고, 복받으려는 내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다면 난 그 사람을 따를 거야. 끝까지 말이야.’라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그의 마음속의 하나님은 누구냐? 그보다 대단하고, 그를 항복시킬 수만 있다면 누구나 그의 하나님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울의 본성 본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메섹 길에서 바울을 친 그분, 바울이 최종적으로 믿은 그분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별칭일 뿐 사실 그가 믿은 것은 그의 마음속의 하나님이다. 그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네가 그에게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늘에 계십니까? 만물 가운데 계십니까? 인류를 주재하시는 그분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아니, 내 하나님은 다메섹 길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하나님인 것이다. 바울은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다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하고,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쳤다. 그렇게 확 변하게 된 것은 그의 신앙이 바뀌었기 때문이냐?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과연 무엇이 바뀌었겠느냐? 그의 정신적 지주가 바뀐 것이다. 전에 그의 정신적 지주는 하늘에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공허하고 막연한 것이었다. 정신적 지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바꾼다면 그의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보통 사람이고 자신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종교가들은 더더욱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고, 자신을 항복시킬 수 있으며, 자신에게 복을 내려 줄 수 있는 분을 찾고 싶어 했다. 그는 다메섹 길에서 만난 그분이 가장 위대한 분이고 응당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앙이 바뀐 동시에 그의 정신적 지주도 바뀌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한마디로 정리해 보자. 바울은 어떤 영향으로 그렇게 추구하고 그런 길을 가게 된 것이냐? (그의 정신적 지주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럼 바울의 일곱 번째 죄는 어떻게 성질을 정해야 하겠느냐? 바울의 신앙은 완전히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공허하고 막연한 신앙이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불신파이자 무신론자였다. 그와 같은 무신론자, 불신파는 왜 종교계에서 나가지 않겠느냐? 한편으로는 막연한 상상 속의 귀속 문제가 걸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의 밥그릇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명예와 이익, 지위, 밥그릇은 그들이 현세에서 추구할 것이고, 내세의 종착지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다. 이것이 이 부류의 사람들이 추구하고, 드러내며, 그런 길을 가게 된 근원이자 지주이다. 이런 것을 통해 보면 바울은 어떤 인간이냐? (그는 불신파로, 막연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바로 기독교 내에 섞여 있는 불신파, 기회주의자이다. 네가 그를 바리새인이라고만 한다면 가볍게 언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바울이 서신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고 한 표면적인 말을 보면 ‘바울은 하늘의 하나님을 가장 높은 분으로 생각했어. 그저 사람의 관념과 무지 혹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등급으로 나누었을 뿐이야. 그건 사람의 우매함이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야. 종교계에서도 다 그렇게 여기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분석해 보니 정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은 무신론자이자 불신파이니 마땅히 무신론자, 이방인과 같이 분류시켜야 한다.

바울의 일곱 가지 죄를 다 정리했다. 너희가 귀납한 것을 말해 보아라. (첫째,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과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여겼습니다. 둘째, 바울은 자기 상상과 관념 속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여기저기 전하며 사람을 미혹했습니다. 셋째, 바울은 은사와 지식을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넷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본질을 부정하고, 예수님이 하신 구속 사역을 부정했습니다. 다섯째, 바울은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전했는데, 공개적으로 사람을 선동하고 미혹하며 하나님을 협박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대항했습니다. 여섯째, 바울은 그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여기며 예수님이 선포하신 진리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대체하여 사람들이 준수하고 실천하게 했습니다. 일곱째,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습니다. 철두철미한 무신론자이자 불신파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문제를 이처럼 세세하게 분석하여 바울을 숭배하는 모든 사람을 각성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너희 생각에 바울이 나타내고 드러낸 성품과 본질, 혹은 바울 개인의 추구 방식 중 너희와 확실히 대조해 볼 만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전부 다입니다.) 첫째는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여긴 것이었다. 왜 이를 잘못된 것이라 하고, 반드시 반성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하겠느냐?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추구했고 복받기를 추구했으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추구했다. 즉, 이러한 혜택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로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생활에서 너희가 나타내고 드러내는 것 중 이 내적 상태와 같은 것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때때로 큰 사역을 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 집에 공헌하기를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가 행한 사역과 이행한 본분을 공적 기록부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자기가 이행한 본분을 공적 기록부처럼 여기는 것은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동류이며 내적 상태가 똑같다. 이것을 위해 사역하고 이것을 위해 고생한다. 네가 하는 고생의 출발점도, 동력도 모두 이것의 조종을 받는다. 만약 이것이 조종하지 않으면 너는 맥이 빠지고 완전히 기가 죽는다. 또 누가 말해 보겠느냐? (자기가 이전에 포기하고 바친 것, 겪었던 고생, 체포되어 감옥에 갔던 일, 이러한 것들을 자기 자본으로 여기고 복받을 근거와 이유로 여깁니다.) 이것은 한 가지 말일 뿐이다. 이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어떤 일에 처하면 너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게 되느냐?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리 없다. 평소에 밥 먹고, 잠자고, 또는 일할 때 속으로 항상 이렇게 생각했을 리 없다. 어떤 배경에서, 어떤 상황에서 너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본분에 효과가 조금 있으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하여 세운 공이 크다며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을 위해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야심과 욕망이 나옵니다.) 사실 너의 야심과 욕망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라 진작 마음속에 숨어 있던 것이 지금 표출되고 드러난 것이다. 이때 너는 겸손하지 않고, 발언이 노골적이 되고 거만해지기 시작한다. 바울의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바로 그가 모든 일을 하는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올바르지 않아 그가 일하는 출발점도 올바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자신은 발견하지 못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부정확한 방향을 따라 추구했고, 그 결과 계속 역효과를 낸 것이다.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했다. 지금의 사람들도 똑같다. 네가 추구하는 관점, 방향이 언제나 틀리는데도 그것을 정확한 추구 방식으로 여긴다면 최종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너는 실망감을 얻을 수 있고, 네 본성이 부풀어오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네게 특별한 축복을 조금 내리고 특별한 은혜를 조금 얻게 하면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총을 베푸시는구나. 내가 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이겠지.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거야. 대가를 치르고 심혈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푸대접하지 않으셔.’ 너는 하나님이 사람을 푸대접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 또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치우친 이해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잘못되고 치우친 마음가짐, 관점, 추구를 어떻게 올바르고 순수한 사상 관점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올바른 사상 관점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제 사람은 설교를 자주 들음으로써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자신과 대조해 보기 시작했다. 본분 이행에 존재하는 자신의 문제점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기 안의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와 과분한 욕망, 패괴 표출을 전부 의식하게 됐다. 아무런 지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딱 한 가지 문제는 내적 상태가 옳지 않거나 패괴 표출이 있음을 의식했을 때 사람에게는 그것을 억제할 능력이 없고 진리를 구해서 해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사탄 철학에 따라 살면서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고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변화가 조금도 없다. 그저 그렇게 되는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믿은 지 8년~10년이 돼도 참된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지금 해결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네 잘못된 추구 방향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하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옳은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려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현실적 문제이다. 너희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자주 교제해야 한다. 또, 진리 추구에 관한 체험 간증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누구의 체험 간증이 훌륭한지 살펴보아 전부 받아들이고 본받아야 한다. 거기에서 이익을 얻어 패괴 성품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과오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추구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됐으며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많은 사람이 명리와 지위를 추구한다. 날마다 어떻게 해야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남들이 우러러볼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품격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따위만 생각한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고 이렇게 사는 것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흐지부지 가다가 몇 년인지 모를 세월이 흐른 뒤에 벽에 부딪히고 넘어지고서야 깨닫게 된다면 생명 성장의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과 자신이 선택한 길을 똑똑히 봐야만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런 성과에 도달하려면 자신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남의 일은 속속들이 살피고 아주 똑똑히 분별한다. 남을 분별할 때 왜 자기와 대조해 보지 않는 것이냐? 만약 네가 항상 남에 대해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간사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면 이는 골치 아픈 일이다. 늘 자기 문제는 보지 못한다면, 진리의 도를 아무리 많이 듣고 깨닫는다 한들 자신과 대조해 보지 않는다면, 또 자기 내적 상태를 성찰하길 원하지 않고 자기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면 네게는 생명 진입이 없을 것이다. 도무지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가 없으면 사람 내면의 느낌이 공허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사역을 했는지 느끼지 못하고, 지각이 없는 것처럼 항상 흐리멍덩한 상태이고, 올바른 추구 목표와 방향이 없어서 그저 자기 기호에 따라서 추구하고 자기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면 이는 바울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는 것만 추구할 뿐 진리는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네 마음이 항상 막연한 상태이고 올바른 추구의 길이 없다면 설교를 몇 년이나 들어도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참도가 시종일관 네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도리는 잔뜩 떠들 수 있겠지만, 네 소극적인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혹은 네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면 네가 이해한 도리는 네가 그 고비를 넘기고, 난관을 순조롭게 헤쳐 나가고, 자신의 내적 상태를 바로잡고, 양심과 지각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자유와 해방을 얻고, 그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는 데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네가 한 번도 이런 내적 상태였던 적이 없다는 것은 곧 진리 실제에 아예 진입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싶다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자기 내적 상태와 대조해 본 다음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하고 진입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자신과 대조해 보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의 지나치게 교만한 성품을 폭로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겸손하고 조용한걸. 나는 교만하지 않아.’ 하나님이 말하는 교만이란 무엇이냐? 일종의 성품이다. 네 건방진 성격에서 나오는 태도가 아니며, 네 목소리가 크고 지나치게 날뛴다는 뜻도 아니라 네 성품 안에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어떤 일에도 승복하는 법 없이 뭐든 깔보고 업신여기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성품을 말한다. 너는 교만하고 방자하고 독선적이며 늘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누구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진리가 담긴 말씀을 듣고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진리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들은 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긴다. 자기가 어느 누구보다도 낫다고 생각하며 남들에게 자기 말을 따르라고 한다. 이런 자가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생명 진입이 없고 진리 실제도 없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느냐?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선 네가 정말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정말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예를 들어, 네 성품이 교만한지, 일을 처리하면서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지 알지 못한다면 너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내적 상태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드러내는 패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고,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할 때 진리에 근거할 줄 모르고, 무슨 일이 닥쳐도 분별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바라보든 멋대로 규례에 맞추고, 옳고 그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자신에게 교만한 성품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실제 상태를 분별할 수 있고, 진실로 회개하고 변화할 것이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할지 알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 실제 측면에 대한 인식이 없고,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패괴 본질에 대해 반성하며 자신과 대조해 보지 않는다면 너는 영영 어리석은 자이다. 오직 진리만이 네게 분별력을 주고 시비와 흑백을 가리게 해 준다. 오직 진리만이 너를 슬기롭고 이성적이게 하고, 지혜롭게 하며,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명확히 분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것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어리석은 자로, 내적 상태가 항상 무지몽매하고 흐리멍덩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힘쓰는 것조차 합격점을 받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아주 명망 높은 사람이 어떠한 일을 했다고 하자. 다수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보라고 하면 그는 분별력이 있기에 그 일에 악의가 숨겨져 있음을, 그것은 외식하는 것이고, 기만이자 속임수로, 악인이나 마왕만이 그러한 일을 저지른다고 확정적으로 말한다. 이는 무엇에 근거한 말이냐? 진리에 근거해 그 ‘좋은 일’의 본질을 규정한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진리를 근거로 판단해야만 본질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판단하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관념까지 생길 수 있다.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왜 폭로되고 정죄를 당해야 해요? 이러면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죠!” 너는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한 너의 판단 근거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 상상이다. 항상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해 일을 바라본다면 너는 영원토록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표면적 현상에 미혹될 수밖에 없다. 네게 진리가 없다면 어떠한 일을 바라보든 영원히 혼돈 상태일 것인데, 어렴풋하고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듯 불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네게 견해와 생각이 있다고 여긴다. 이는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벌받아 마땅한 악인이라고 하는데 네가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한 적 있는 호인이라고 한다면 네 말이 하나님 말씀과 정확히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분별력이 없어 생기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래 믿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밝히 알지 못하는 일이 많고,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에게 쉽게 미혹된다. 어떠한 일이 닥치든 악인이 교란만 했다 하면 대번에 갈팡질팡하고 저도 모르게 악인을 따라 말하다가 악인이 폭로되고 드러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이러한 사람은 늘 무지몽매한 상태로 살아가는데, 그 본질은 어리석은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질이 전혀 없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미혹될 수 있다. 이러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가 없다. 어느 교회에나 이러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다. 거짓 리더가 사역하면 거짓 리더를 따르고, 적그리스도가 미혹하면 적그리스도를 따른다. 한마디로, 상대가 누구든 리더면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르는 부류의 인간이다. 좋은 사람이 이끌면 좋은 사람을 따르고, 나쁜 사람이 이끌면 나쁜 사람을 따른다. 그에게는 자기 주관이나 자기 입장이 없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마라. 힘만 조금 쓸 수 있어도 다행이다. 성령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역사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자질이 있고,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 집의 설교를 듣고 이해할 수 있다. 교계에서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얼마나 많이 유포하고 전파하든,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세력이 어떻게 비방하고, 정죄하고, 박해하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하나님 집의 설교와 체험 간증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자 진실한 간증임을 믿는다. 이는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생명 실제임을 알 수 있다면, 네게 이러한 인식이 있다면 네가 이미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모두 긍정적인 사물이고 진리 실제임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미 확신했고, 100% 인정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 사람만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미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진리이며, 인류에게 너무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이방인 세계의 것들이 전부 부정적인 사물로,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고, 아무리 번지르르한 이론을 읊어도 사람을 미혹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인 사물이며, 진리이고, 사람에게 있어 모두 구원이다. 사탄 마귀가 행하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며, 터무니없고 황당한 것이자 하나같이 사람을 미혹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행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 측면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분별력이 생긴다. 만약 거기에 더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말씀을 자신과 대조해 보고, 이로써 자신의 패괴된 실상을 알게 되는 한편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각종 환경에서 네가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면, 마지막에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도 분별할 수 있고, 또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인지, 불신파가 누구인지, 거짓 리더가 누구인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남을 미혹하는 자가 누구인지 등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모두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다면 진리를 깨달았고 실제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네 친척이나 부모가 악을 행하고 교란했거나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현재 제명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너는 그들에 대한 분별력이 없고 그들이 왜 제명되었는지 몰라서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하나님 집에 사랑이 없고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한다며 자꾸 원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그들이 도대체 어떤 부류인지 판단해야 마땅하다.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들의 자리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전부 옳으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는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며, 친척이나 부모 대신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너희의 혈연관계를 찢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그 성질을 규정하여 네가 그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도태되었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으로 정말 똑똑히 알게 되었다면, 네 관점이 올바르고 진리에 맞는다면 너는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설 수 있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님 말씀에 완전히 합하게 된다. 만약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람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계속 육적인 관계에 입각해 그 각도에서 사람을 바라본다면 너는 영원히 육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들을 네 가족처럼 대하고, 심지어는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이할 수도 있다. 그러면 가족을 바라보는 네 관점이 하나님 말씀과 모순되고, 더 나아가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네가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설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까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우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전통 관념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이나 일을 대하든 네 견해와 관점이 항상 하나님과 같아야 하며, 진리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면 네 관점과 네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하나님과 맞서지 않게 된다. 또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다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얻으려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여러 내적 상태를 대조해 보는 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첫걸음이다. 더 깊숙이 진입하려면 자신의 패괴 성품을 더 깊이 해부하고 인식해야 한다. 인식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실행하고 진입할 길을 찾아야 하고,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알게 된 후 소극적이 되어 자신은 내쳐진 봉사자이고 부각물이라고 울고불고하며 본분조차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릇된 사람이고 생떼를 쓰는 사람이다. 그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으냐? 최소한 울지 말고, 난동 부리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등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늘 복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받는 사람이 이성을 잃기 제일 쉬우며, 이성이 없는 사람이 제일 가여운 법이다. 매사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냈을 때 이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선택해야 하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구해야 하고, 절대 흐리멍덩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고 자신의 패괴된 실체를 깨닫는 것은 좋은 일인데 왜 소극적이 되느냐?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는 것은 너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사실, 네가 드러낸 패괴 성품은 네 본성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지 않았어도 너는 줄곧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살지 않았느냐? 너는 사탄 성품으로 사는 인간이다. 이런 일로 호들갑 떨지 마라. 패괴를 조금 드러냈다고 해서 소스라치게 놀라 네가 이제 끝장이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것이며 이전에 했던 모든 일이 허사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호들갑 떨 것 없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패괴된 인간이지 로봇이 아니다. 패괴된 인간이란 무엇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하나님을 적대하고, 바울의 길을 걷는 인간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는 이러한 인간이다.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 마음속에 존재하는 패괴 성품과 자기가 매일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마주해야 한다. 또한, 매일 진리를 구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고, 자기가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분별하고 해부하는 한편 그것과 싸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몇 번 싸우다 실패한 뒤 “난 왜 늘 교만을 드러내지? 남들은 왜 드러내지 않지?”라고 말한다. 사실 모두가 드러낸다. 남들이 드러낼 때 너는 모르지만, 그 자신은 안다. 어쩌면 그가 드러낼 때 그 자신조차 모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안다. 그 밖에 또 하나 기억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사람의 행동 방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일하면서 한때 속셈을 품거나 혹은 어떤 행동 방식, 혹은 가끔 나태함이나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패괴 성품을 증오한다. 언젠가 네가 드러내는 것이 패괴 성품이라고 느껴진다면, 하나님이 너를 징계하지 않아도 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증오하지는 않을까, 너를 내치지는 않을까 추측하지 말고, 너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그런 다음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변화할 수 있는지 구해야 한다. 이는 이성이 정상적인 태도다. 너는 우선 ‘이 말은 비이성적이었고, 교만을 드러냈어. 이 일을 못 하면서도 큰소리쳤어. 이건 허풍이 아니겠어? 허풍 떨고, 큰소리치는 것, 이건 교만한 성품이야.’라고 깨달아야 한다. 네가 한 허풍 몇 마디에 하나님이 너를 정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너도 그것을 모른 척 넘길 것이냐? 넘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석해야 한다. ‘난 왜 이렇게 허풍을 잘 떨고 큰소리를 잘 칠까? 못하는 일, 혹은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몰랐던 일을 두고 왜 허풍부터 쳤을까? 나한테 왜 이런 문제가 있을까?’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일종의 나쁜 습관이다. 큰소리치는 것은 교만한 성품의 표출이다. 사탄 성품이 너를 지배해 그런 내적 상태로 살게 하는 것으로, 완전히 성품에 지배당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억제할 수 있어서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교만한 성품이 없어졌다는 뜻이겠느냐? 해결된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네가 행동 방식을 바꿔서 겉으로 점잖고 착실하고 오만하게 굴지 않고 의젓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에 새로운 문제를 더한 가식이며, 결과는 더 골치 아프다. 교만을 해결하고 여러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리더가 네게 본분 한 가지를 안배해 줬다. 너는 듣자마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 측면의 본분은 예전에도 이행해 봤어요. 이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죠!” 바로 이어서 너는 자기가 교만을 드러냈다는 것과 그게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기도하여 바로잡는다. “하나님, 제가 또 교만을 드러냈습니다. 저를 책망해 주세요.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럼 어떻게 본분을 대해야 하겠느냐? 너는 ‘이건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니 신중히 대해야 해. 실수하면 안 돼. 실수하면 망신이야!’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고민하며 ‘아니야. 왜 망신할까 두려워해?’라고 생각한다. 내적 상태가 또 올바르지 못하고 또 잘못된 길로 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겠느냐?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으냐? 이 또한 진리를 실행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관된다. 네가 ‘망신당하는 건 두렵지 않아. 중요한 건 교회 사역에 해를 입히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내적 상태가 되돌려진다. 하지만 다시 ‘교회 사역에 해를 입혀서 책망 훈계를 받으면 어떡하지? 창피해서 얼굴을 어떻게 들어?’라는 생각이 들면 내적 상태가 또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늘 본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게을러서 질질 끌고, 거기다 이렇게나 교만하니까 책망받아야 해. 하나님께 기도해서 역사해 달라고 해야겠어. 나란 인간은 너무 까탈스러워.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는 거야. 하나님께 의지하자.’ 이게 맞다. 이렇게 실행하면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재간을 주어 약간의 지식을 배우게 한다고 해서, 네가 그걸 배웠다고 해서 꼭 본분을 잘 이행하리란 법은 없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이 결론은 어떻게 나온 것이겠느냐?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측면의 체험으로 너는 교훈 한 가지와 경험 한 가지를 얻는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람이 본래 가진 것이나 사람의 자본이 아니며, 하나님이 준 것은 언제든 다시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무언가에 아무리 능해도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고자 할 때면 너는 그것을 잊고 써먹지 못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 네가 이렇게 기도한다고 치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조금 할 줄 아는 것은 전부 당신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의 사역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축복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겠느냐? 이렇게 말해라. “하나님, 당신의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저는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측면의 업무를 조금 할 줄 알고 거기에 대해 조금 알지만, 그렇다고 꼭 잘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패괴 성품의 교란 때문에 저는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할 때가 많고 일 처리가 세심하지 못하며 본분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저 자신을 컨트롤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힘을 다해서 해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 만약 네가 본분을 잘 이행했는데 공로의 8할만 하나님에게 돌리고 2할은 본인이 차지한다면 이것이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하나님이 행하지 않았다면 네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었겠느냐? 절대로 못 했을 것이다. 너는 진리를 갖추지 못한 데다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어떤 패괴된 내적 상태가 존재하든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면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이 된다.

때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사상과 생각이 생겨나고, 이것이 마음을 교란한다.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맴돌며 하루 이틀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우선 그 잘못된 사상과 생각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너를 옭아매 소극적인 상태에 빠뜨리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온갖 패역과 추태를 드러내게 하였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이 패괴 성품의 부추김이었고 하나님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를 징계하시어 제가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우게 해 주세요. 제가 드러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창피도 망신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당신의 행정 법령을 거슬러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길은 옳다. 하지만 네게 이런 분량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분량이 없으면 이 방향으로 기도할 수 없겠느냐? 옳은 길이라면 응당 이 방향으로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사람의 분량이 작기에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많이 보호해 달라고, 징계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러다가 분량이 커져서 혼자 책임지고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도 그렇게 마음 쓸 필요가 없어진다. 항상 너를 보호하고, 징계하고, 네게 시련을 주거나 너를 지켜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 네가 겉으로 얼마나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든 하나님은 네 태도를 본다. 종일 아무 말도 안 하더라도 속으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겠느냐? ‘이 본분이 내게 맡겨진 이상 그것을 잘해 낼 책임이 있어. 하지만 나란 인간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몸에 배어 있어 무슨 일이든 내 성질대로 해. 내게 그런 결함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주인이 되어 처리하지는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환경을 마련해 주셨으면 좋겠어. 나를 방해하거나 내가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악영향을 주는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치워 주셔서 시험에 들지 않고 하나님의 시련과 징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 너는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모를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상관 안 할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일을 행한다. 때로 네가 이렇게 한두 번 기도해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과 진심을 테스트할 때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해서 네가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네가 늘 하나님을 시험하며 “제가 이렇게 하는 게 과연 맞을까요? 하나님, 보이세요?”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옳지 않은 내적 상태이다. 그저 행하기만 하여라. 하나님이 너를 징계하든, 이끌어 주든, 시련을 주든, 아니면 너를 인도하든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네가 깨달은 진리를 바탕으로 공을 들이기만 하여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면 된다. 결과가 어떠하든 대부분의 경우에는 네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자기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바쳐야 할 시간과 대가를 바치면 된다. 진리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는 전부 성찰하고 공을 들여 깨달아야 한다. 관건은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걷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네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시련과 징계 그리고 환경을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할지, 이런 것들은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행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 저는 분량이 작으니 시련을 주지 마세요. 무서워요!”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겠느냐? (아닙니다.) 너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저는 분량이 이렇게나 크고 자신만만합니다. 왜 제게 시련을 주지 않으시나요? 제게 욥의 시련을 주셔서 제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러지 않는다. 너는 네 분량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너무 잘 안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협력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사람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람의 본위를 지킨다. 사람의 본분은 무엇이냐? 사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임무이다. 네게 부여한 임무에 무엇이 포함되느냐? 네가 잘 아는 업무, 교회에서 네게 맡긴 것, 네가 해야 하는 것, 그리고 네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은 생명 진입과 관련된 일이다. 너는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진입하는 것만 생각하여라.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혹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하지 마라. 거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거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별 필요가 없는 일이고, 그것은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복과 화, 수명, 그리고 사람이 평생 체험하는 모든 일, 사람의 운세, 생명은 사람이 바란다고 얻어지는 것도,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는 이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다. 사람은 반드시 이를 마음속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똑똑히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대신해 마음 쓸 생각 말고, 하나님이 하려는 일을 결정하려 하지 마라. 너는 네가 해야 할 것, 진입해야 할 것, 가야 할 길만 잘 알면 된다. 이후에 네 종착지가 어떠할지 네가 관여할 수 있겠느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럼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한편으로는 매일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다. 네가 이 세상에 온 뒤 하나님이 너를 지금까지 인도하며 네게 각종 은사를 주든, 너를 양성하며 네게 재주 혹은 재능을 주든 이는 다 하나님이 네게 맡길 부탁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길 부탁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므로 하나님이 네게 직접 말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네가 영어를 할 줄 안다면, 분명 하나님이 이 분야에서 네게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네 본분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네게 “너는 번역 분야의 본분을 이행해라. 그러지 않으면 너를 벌할 것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이 너 스스로 분명히 알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정상적인 이성과 사고, 생각, 그리고 이 언어를 이해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네게 준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네게 하라고 한 것을 너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네게 베푼 긍정적인 인도, 양육, 공급을 포함해 하나님이 네게 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설교를 듣고, 교회 생활을 하고, 진리를 교제하고, 조화롭게 협력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들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생명 진입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늘 자기한테 생명과 수확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측면을 반성해 보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집중하지는 마라. 농작물은 해마다 심는 것이지만, 그걸 심는 사람 중 누구도 올해 수확을 어느 만큼 거두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수확을 거두지 못하면 못 산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우매한 사람은 없다. 시기에 맞춰 씨를 뿌린 다음 정상적으로 물과 비료를 주며 관리하다 보면 정해진 계절에 반드시 수확이 있기 마련이다. 너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다. 항상 하나님에게 좀스럽게 따지면서 이렇게 말하지 마라. “그동안 대가를 치렀는데 하나님께서 상 안 주시나요?” 늘 상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월말이면 급여를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늘 급여를 받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것없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곧 구원받는 길이고 진정한 인생이며 사람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이고 피조물이 응당 영위해야 할 생활임을 네가 정확히 보았다면, 진리를 추구하고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행하기만 하여라. 그것이 옳은 것이다. 자꾸 하나님에게 “하나님,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언제쯤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상과 면류관은 언제 받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날은 언제 오나요?”라고 묻지 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내적 상태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고 해서 이것이 옳은 것이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수가 저지른 범법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이다. 이 말은 성립되지 않으며,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이런 내적 상태가 있다는 것은 다들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이 관문을 넘어야 한다. 남들이 어떤지 보는 데에 집중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자신을 성찰하는 동시에 패괴된 내적 상태가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 사람은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가서 언제나 생각이 갈팡질팡한다. 왼쪽으로 치우쳤다가도 오른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항상 엉뚱하게 군다. 바른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걷지 않고 굳이 사람을 따르며 굳이 세상의 사악한 풍조를 따라 그릇된 길을 걷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가 안 된다. 통제가 안 된다면 통제할 필요는 없다. 옳지 않은 속셈과 관점이 튀어나올 때마다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패괴 표출이 점점 줄어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기도를 통해 꾸준히 인식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안 되고 계속 튀어나올 때도 있다. 그러면 아예 상관하지 말고 네 할 일을 해라. 이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본분을 잘 이행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고 잘 완수해야 한다. 그 밖에 개인의 생명 진입 측면에서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힘을 다하여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 네가 진입할 수 있는 수준까지 노력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합격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하나님이 결정할 것이다. 사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규정하든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자기 행위가 어떻고 자신의 마지막 결말이 무엇일지 판정할 수도 없다. 그 판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방인의 말로 하자면, 너는 자기가 시작한 일을 스스로 감당하고, 사실을 직시하고,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 밖에 사람은 늘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내적 상태나 관점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해 돌이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중요하다. 이러면 너도 모르는 사이 네 안의 올바르지 못한 내적 상태가 점점 줄어들고, 그것에 대해 점점 분별이 생기고, 돌이킨 후 네 안에 긍정적인 부분이 점점 늘어나 네 본분 이행의 순결 정도가 점점 높아진다. 겉으로 하는 말과 성격은 그대로지만, 생명 성품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네가 일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 원칙대로 할 수 있고, 책임질 줄 알게 된 것이다. 남이 일을 건성으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부당하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그릇된 풍조와 사악한 현상이 눈에 거슬리면서 볼수록 반감을 느끼고 점점 더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또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꽤 길고 글귀와 도리는 명확하게 잘 말하는데 실제적인 일은 하지 않고 원칙도 없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고 혐오감이 든다. 특히 리더 일꾼이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고 늘 도리를 말하고 하나님을 믿은 수년 동안 변화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별할 수 있고 그를 폭로하고 고발할 수 있으며 정의감이 생기게 된다. 너는 너 자신을 증오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악하고 불의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증오한다. 이것이 바로 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다. 네가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관점과 긍정적인 사물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너를 평가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너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누가 일을 건성으로 하는 것을 보면 ‘정상이지. 나도 그런걸. 저 사람이 건성으로 하지 않으면 내가 건성으로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라고 생각했고, 모두가 건성으로 하면 너는 자신이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건성으로 하면 안 돼. 하나님 집의 사역은 중요하다고. 내가 대충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패역한데, 너희가 왜 나처럼 대충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예전에는 자신이 너무 철이 없었다고, 그렇게 일을 바라본 것은 너무 비열하고 창피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고, 네 양심에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과 느낌이 있는 것은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네 안에 뿌리내리고 싹이 텄음을,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미 바뀌었음을, 예전에 패괴 성품 속에서 살던 그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음을, 이미 진실로 변화가 생겼음을 증명한다. 너희는 지금 조금의 변화가 생겼느냐? (조금 생겼습니다.) 지금은 조금 변화가 생겼다. 가끔 누가 일을 건성으로 하고 진리를 실행하려 하지 않고 늘 육적인 안일을 즐기는 것을 보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게 그 사람을 돕고 붙들어 주라고 할 경우 너는 여전히 사탄 철학에 구애된다. 상대에게 미움을 살까 봐 문제를 발견하고도 감히 말하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도 한다. ‘다들 나를 팀장으로 뽑아 준 것도 아니잖아. 괜히 참견할 필요는 없지.’ 정의롭지 못한 일이나 부정적인 사물과 마주쳤을 때 너는 진리 쪽에 서서 말하거나 일을 처리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못한다. 그저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그런 처신이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어 참 좋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랑은 무관한 거야. 잘 피해 가는 셈이지.’ 네가 여전히 이런 관점을 가졌다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네 마음에 이런 관점이 있다면 너는 불신파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 진입이 있으려면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기를 감독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속으로 책망을 느끼면 자신을 반성하고 그 책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감찰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자신의 그러한 내적 상태가 생기는 것 때문에 자꾸 통회하고, 하나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마음이 불안해야만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진입하는 원동력이 생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고 실제적인 행동이 있다. 너희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입했느냐? (환경이 임했을 때 자신의 부족한 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내적 상태 속에서 계속 맴돌 때가 많습니다. 자기한테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리의 각도에서 해부하거나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해 뚜렷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밝히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내적 상태도 밝히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밝히 알지 못하면 타인도 밝히 알 수 없다는 말이 맞다. 너는 남한테 무슨 문제가 있든 너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적 상태는 서로 통하고 똑같은 것이다. 자기의 내적 상태를 밝히 알지 못한다면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문제는 더더욱 해결할 수 없다. 네가 자기 문제를 해결하면 남의 문제가 확실하게 보여서 바로 해결해 줄 수 있게 된다. 생명 진입을 원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해 자신의 각종 옳지 않은 관점, 사상, 입장, 속셈, 내적 상태를 바로잡고 여러 잘못된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네게 빠져나올 힘이 있다면 사탄을 이기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변화하게 된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와 그 내적 상태에 구애되지도, 통제받지도 않는다. 이것 자체가 성장이다. 너희는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너희에게는 어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적 상태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난 그냥 이 모양이야. 아무리 해도 교만한 성품이 해결이 안 돼. 어차피 하나님께서도 아실 거야. 하나님께서 이미 성질을 규정하셨을걸. 몇 번이나 노력했는데 여전히 이래.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야.’ 너는 자신을 아주 좋지 않게 본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내적 상태의 일종으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직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인데 너는 왜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느냐? 사람은 흔히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일시적인 패괴 표출이 있다고 해서 자기 성질이 이미 규정됐다고, 자기는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소극적인 내적 상태이니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너희에게는 또 어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적 상태가 있느냐? (늘 은사와 자질에 기대어 일하는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느라 생명 진입이 부족합니다. 이 측면의 내적 상태가 꽤 심각합니다.) 은사와 자질에 기대어 일할 때는 항상 남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너는 해낸 일을 나는 왜 못 하는데? 이 일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공을 들여서 너보다 더 잘해 낼 거야!’ 또 마귀적인 성질이 나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네 안에 이런 동기와 출발점이 있더라도 그냥 무시해라. 그것은 일시적인 표출 또는 일시적인 무지한 생각이다. 그것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만 않으면 된다. 일 처리는 착실하게, 마땅히 해야 할 방식대로 해야 한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보아라. 다른 사람이 잘하면 그와 교류하면서 배워라. 이렇게 하면 잘못된 내적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할 때는 네 내면에서 패괴가 표출된 것이지만, 네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기에 그 패괴 성품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도 그렇게 했다면, 행동으로 옮길 때는 더 심했다면 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무엇보다도 증오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대할 때, 하나님은 네게 그것을 포장하고, 싸매고, 위장하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표출하게 하며, 너를 드러내 네가 인식하도록 한다. 네가 인식하면 그것으로 끝이겠느냐? 아니다. 인식한 뒤에 패괴 성품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고 통하지 않는 길임을 알았으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하면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어 네게 올바른 실행 길이 생기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 말씀 속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언급되어 있으나 사람은 패괴 성품을 가졌기에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하려 하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서 하려고 들 때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느냐? 네게 자유를 주고 일단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다. 네가 쭉 행하다가 벽에 부딪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 너는 다시 하나님 앞으로 와서 어떻게 해야 될지 답을 구한다. 하나님이 “내 요구 사항을 마음속으로 똑똑히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을 듣지 않았느냐?”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저를 징계해 주세요.” 막상 하나님이 징계하면 너는 또 고통스러워하면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 어쩌면 나를 이렇게 심하게 대할 수가 있지? 하나님은 인정미가 없어.’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야 지금처럼 하지 않겠다. 네 계획대로 행하거라.” 너는 다시 원래 그 길로 돌아간다. 일을 조금 처리하다가 또 벽에 부딪히면 너는 곰곰이 생각한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뉘우치고 죄를 자백해야겠어.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너는 또다시 하나님 앞으로 와서 기도하고 구한다. 하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행한다. 그런데 행하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하자니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일단 체면부터 챙기자.’ 이러면 또 문제가 된다. 또 에누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사람이 자신을 반성한다면 자기 오류를 발견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체험을 하는 동안 분량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뜻이 있는 사람, 진리를 실행하길 원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좌절과 실패가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부분과 진리를 사랑하는 부분은 점점 늘어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체험하는 과정에 실패와 패역이 있더라도 허용한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보지 않는다. 네가 잠시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너를 영영 내쳐 지옥에 떨어뜨리고 사형을 선고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동안 하나님은 지극히 큰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바로 여기,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인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네게 관용을 베푼다. 그러나 방임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이란 하나님이 사람의 분량과 본능, 그리고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표출하고 사람의 분량이 어느 정도에 이를 수 있는지 알고 네 표출을 허락하면서 일정한 범위를 주는 것이다. 네가 뉘우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받아 준다. 또한, 하나님은 네 회개에 어린 진심을 인정한다. 그래서 네가 뉘우치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물으면 하나님은 계속 네게 알려 주고 답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싫은 기색도 없이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음을 알려 주어 네가 확인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네가 또 마음이 바뀌어 “하나님, 저는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한테는 이득이 없어서 기분이 좋지 않아요. 마음이 꺼림칙합니다. 역시 제 뜻대로 해야겠어요. 그러는 편이 체면도 살아요. 약게 처신하면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어요. 우선 개인적인 욕망을 채울래요.”라고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에누리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 에누리로 결국 손해를 보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너 자신일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는 기간에 때때로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을 용인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포용이자 사람에 대한 긍휼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군다.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을 일종의 무능으로 보거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을 안 들어도 되는 구실로 삼는다. 이는 사람의 패역함이고 사악함이다. 사람은 반드시 이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과 인내는 기한 없이 계속된다. 네가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하나님이 너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구원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이 원칙에 따라 일을 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하지만 극단적인 방식을 쓰지 않는다. 어째서냐? 하나님은 네가 갖은 풍파를 겪게 하고, 갖가지 굴곡과 환난을 겪게 하며, 또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게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이러한 일을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 옳고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또한, 너 자신의 생각과 관념, 상상, 지식, 철리, 철학, 그리고 세상에서 배우고 부모에게서 교육받은 것들이 다 잘못되었음을, 그런 것들은 네가 올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인도할 수 없음을,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네가 여전히 이런 것들로 살아간다면, 네가 가는 길은 실패의 길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길이다. 결국, 하나님은 네가 이 일을 똑똑히 알게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네가 반드시 겪어야 할 것이다. 오직 이렇게 겪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에게는 패역과 패괴 성품이 있어 반드시 고통을 겪고 이러한 좌절을 겪어야 한다. 이런 고통을 받지 않으면 정결케 될 수가 없다. 사람이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다양한 방식의 하나님 구원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이런 대가를 치르길 원한다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실 하나님도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고 그렇게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단지 사람이 너무도 패역하여 말을 듣거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바른길이나 지름길은 걷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길을 걷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뿐이다. 사람은 패괴된 존재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갖가지 환경 속에 두어 끊임없이 단련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 가운데서 다양한 경험과 교훈을 얻게 하고, 각종 사악한 사물의 본질을 알게 한다. 그 후에 사람은 돌이켜 보고 비로소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고 인정하며,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자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며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그분임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패역하여 굽은 길을 걷길 원하고 이런 고통을 받길 원하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은 사람을 갖가지 환경 속에 두어 끊임없이 단련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는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단련하겠느냐? 이렇게 말할 때까지 단련한다. “저는 다양한 환경을 모두 체험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제외하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도 제가 진리를 깨닫고 누리게 하거나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지 못함을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고분고분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고분고분 사람의 본래 자리를 지키고 피조물의 지위와 본분을 지키며, 고분고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어떤 원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치스러운 욕망도 없이 창조주 앞에 참으로 순종해야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에 이른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럼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체험할 어떤 환경도 배치해 줄 필요가 없다. 너희는 어떤 길을 걷기를 원하느냐? 사람의 주관적인 바람은 모두 고통을 받지 않고, 좌절과 실패, 어려움, 굴곡, 풍파 등의 일을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사탄 본성이 있고, 너무 패역하다. 사람의 사상 관점은 지나치게 복잡하다. 네 마음은 하루하루 갈등과 싸움으로 채워진 채 소용돌이친다. 너는 깨달은 진리가 적고 생명 진입이 얕아 육적 관념과 상상, 패괴 성품을 이겨 낼 능력이 없다. 너는 사람이 늘 쓰는 방식을 취해 끊임없이 실패와 굴곡을 겪으며, 여기서 넘어지고 구르고, 진흙탕에서 뒹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날, “힘들고 지긋지긋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런 실패는 겪고 싶지 않다고. 창조주 앞에 가서 고분고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거야.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바른길이야.”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너는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하는 그날이 되어야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지 않으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다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다. 어떤 환경을 배치하든, 네게 어떻게 하라고 하든, 그는 가장 좋은 결과를 보길 바란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에 부딪혀 좌절과 실패를 겪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실패했다고 낙담하며 자신이 완전히 끝이라고, 사탄에게 사로잡혔다고 생각해 자포자기하고 그 일로 재기 불능이 되고 의기소침해지는 이런 결과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겠느냐? 네가 그 일에서 실패했을지라도 진리를 구해 자신을 반성하고 실패의 원인을 찾은 뒤 실패의 교훈을 얻고 명심하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옳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나빠. 나한테는 사탄의 패괴 성품과 패역이 있어.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인과 거리가 너무 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어.’라고 깨닫기를 바란다. 네가 이 사실을 분명히 보고, 이 일의 진상을 알며, 이번 좌절과 실패를 통해 사리를 분별하고 성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모습이다. 성장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얻을 수 있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바른길을 걷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하나님이 일할 때 각별히 마음을 쓰는 것, 이는 전부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람은 늘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속이 좁고 옹졸하다. 잠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소극적이 되고 토라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철없는 어린애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환경을 배치해 은혜와 축복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알게 하고, 사람에게 있어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이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그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너는 듣지 않고 기어코 먹으려 한다. 그럼 하나님은 네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결국 너는 그걸 먹고 나서 병이 난다.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 사람이 겪은 좌절과 실패, 고통은 무엇으로 바뀌겠느냐? 한편으로는 네가 하나님의 고심을 깨닫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믿고 확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이 실패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은 진리임을 깨닫게 되며, 진리 실행의 원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패를 겪는 것은 사람에게 좋은 일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며, 일종의 단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단련으로 네가 결국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삼아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그러한 단련, 좌절, 실패를 겪는 것도 헛된 일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길 원하는 결과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런 관용을 베푸신다면 저는 내키는 대로 행동할래요. 제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예요.” 이래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가리키는 올바른 길을 따라 실행하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부합할 수 없다면 그저 진리를 어기지 않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만 있어도 된다. 이것이 최저 기준이다. 만약 네가 진리에서 벗어나 기도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이미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어져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 장소를 이미 떠났다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면 네게는 기회가 없으며, 아예 구원받는 것을 논할 수조차 없다. 네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우선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너로 하여금 깨닫고 진입하게 하려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네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알 수 있다. 알게 된 뒤에는 하나님이 행하려는 일, 하나님이 네게 이루려는 것에 혼신의 힘을 다해 협력해야 한다. 만약 네가 도저히 협력하지 못하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면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이 모든 힘을 다하지 않았다.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축복받거나 공의의 면류관을 얻는 데에만 온 힘을 쏟는데, 이는 바른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너는 진리 실행에 힘을 쏟고 하나님이 네게 준 사명과 본분에 협력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하여 이런 일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 하나님은 본분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칙 없이 일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상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관용과 포용, 인내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어떤 일을 겪을지 알고 있다. 사람이라는 피조물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무슨 일을 할 수 없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이 어떤 연령대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아주 똑똑히 알고, 사람 본인보다도 훨씬 더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네가 “그러면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이 종일 앉아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기만 기다릴래요. 하나님이 다 하시면 되잖아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자기가 마땅히 수행하고, 진입하고, 실행해야 할 것들과 본래 할 수 있는 것들에 전력을 다해 협력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협력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본분 이행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때로는 자기 체면과 허영심,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하고, 자기 종착지에 대한 소망과 복받으려는 욕망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내려놓아야 할 이런 것들을 너는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이 “육적인 즐거움에 연연하지 마라. 그것은 네 생명 성장에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였으나 너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 뒤에 몇몇 실패를 겪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 말씀이 맞아. 그런데 나는 왜 실행하지 못하고 육을 저버리지 못할까? 나는 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보시고 구원하시지 않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냥 힘만 쓰는 사람이 되자. 끝까지 힘만 쓰면 그만이야.’ 이래도 되겠느냐? (안 됩니다.) 사람은 흔히 이러한 내적 상태를 보인다. 복받고 면류관을 얻기만 추구하거나 실패를 몇 번 겪고서 자기는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 하나님도 자기를 그렇게 규정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네가 제때 바로잡고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손으로 행하던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죄를 인정한다면, 네가 행했던 일과 걸었던 길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네 실패를 인정한 다음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길을 따라 실행한다면, 네게 얼마나 많은 불순물이 있든 진리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옳은 것이다. 성품 변화를 체험하여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람은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하지 못하는 난관, 자신의 각종 사상 관점, 상상, 패괴 성품, 또 지식과 은사 혹은 자신의 각종 고충과 문제가 있다. 너는 다양한 난관과 싸워야 한다. 갖가지 난관과 내적 상태를 모두 해결하고 마음속 싸움을 끝내면 네게 진리 실제가 생겨 그러한 것들에 결박되지 않고 자유롭고 해방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흔히 직면하는 문제가 있다. 자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낫고 남들은 복을 못 받아도 자신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바울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자기 앞의 난관을 발견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대로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언제나 양극단을 오간다. 이 양극단을 모두 해결해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난관에 직면했을 때, 설령 그 문제가 뿌리 깊은 폐단이고 해결하기 몹시 어렵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해도 너는 그것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해야 한다. 진리를 구함으로써 개미가 뼈를 갉아 먹듯이 그 문제를 아주 조금씩 해결해 내적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면 네게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과 순종하는 태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진리를 얻을 가망이 생긴다. 중간에 또 무슨 난관이 닥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얼른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밀히 너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경영 사역의 이 장소, 이 흐름, 이 범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네게는 희망이 있으니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전부 정상적인 패괴 성품의 표출일 경우 네가 인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할 수만 있으면 언젠가는 그런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너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진리인데 너의 그까짓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느냐? 전부 해결할 수 있는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너는 왜 자신을 포기하려 하느냐? 포기해서도 안 되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도 안 된다. 올바르게 마주해야 한다. 너는 생명 진입의 정상적인 법칙을 알아야 하며, 패괴 성품의 표출과 모습, 일시적인 소극성과 연약함, 막막함을 정상적인 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성품이 변화하는 과정은 아주 길고 번복이 잦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패괴 성품을 너무 심각하게 드러내서 남이 보기에도 역겹고 스스로도 자신이 싫어질 수 있다. 또는 때로는 너무 제멋대로 굴어서 징계가 임할 수도 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이 너를 징계한다면, 하나님이 아직 너를 보살피고 지킨다면, 하나님이 아직 네게 역사한다면, 하나님이 줄곧 너와 함께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끔 하나님이 너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어둠 속에 떨어진 것 같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네가 아직 살아 있고 지옥에 있지 않다면 여전히 기회는 있다. 만약 바울처럼 고집스럽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결국 자신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다. 각성할 수 있다면 네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네게 있는 기회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하고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이 측면의 진리와 실행 길을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십시오.’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기만 하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고 끝까지 갈 수 있다. 이것으로 확실히 설명이 되지 않았느냐? 너희가 그래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느냐?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길이 넓어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길이 좁아지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걸을 길이 없어진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렇다. 도량이 좁아 항상 사소한 일에서도 따지고, 언제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다가 결국 가면 갈수록 길이 없어진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의 상상처럼 사람을 대한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것이다.

바울의 일곱 가지 죄는 패괴된 인류의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표출이다. 바울은 그저 그 정도가 가장 심했을 뿐이다. 그의 본성 본질은 이미 성질이 규정됐다. 그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패괴 성품의 것들은 패괴된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진 성질로, 정도는 다르더라도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한 내적 상태는 전부 패괴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네가 바울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그런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너는 바울처럼 심각하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너희 대부분 사람의 그런 내적 상태는 하나님이 보기에 패괴 성품의 표출에 속한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패괴 성품을 드러내기만 한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걷고 죽어도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형을 받았고 정죄됐으며, 악마 본성을 가진 사람에 속한다. 진리를 증오하는 악마 본성을 가졌으니 그는 구제 불능이다. 나중에 이 내용을 다시 교제하고 자신과 대조해 보아라. 바울이 저지른 그런 잘못의 심각성을 알고, 그런 다음 바울과 비슷한 자신의 패괴된 내적 상태를 찾아내서 차근차근 해결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은 점점 더 사람답게 살게 하고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만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고,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이 보기에 흡족할 수 있다. 너희는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느냐? (그 측면은 부족한 편입니다.) 너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진리이다. 진리야말로 너희가 진입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 너희 안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패괴된 것과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너희는 일부 엉터리 지식을 가지고 있고, 꿍꿍이가 너무 많으며, 항상 거래하고 교환할 생각을 한다. 너희에게는 소극적인 부분도 너무 많다. 일을 제대로 못 해도 소극적이 되고, 난관을 만나도 소극적이 된다. 하나님의 사역이 네 마음에 안 들어도 소극적인 정서가 생겨 반발하고 대항한다. 일에서 약간만 성과가 났다 하면 곧바로 자기 처지를 잊고 우쭐거린다. 또한, 교만에 빠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며, 하나님에게서 면류관과 상을 대가로 받아 내려 하고, 보란 듯이 제멋대로 군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내적 상태와 바울의 내적 상태는 공통되고 동일한 것으로, 양쪽 다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일곱 가지 죄를 정리하고 그 성질을 규정했다. 바울은 마지막에 이르러 징벌의 대상이 됐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의 결말을 정할 때 그중 한 가지 죄만을 근거로 결정을 내렸겠느냐? (아닙니다.) 그것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그런 결말, 그런 말로를 맞이한 것이 마땅하다. 사실이 눈앞에 있으니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너희 중 누군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과 같은 길을 걷고, 바울의 일곱 가지 모습을 모두 가졌으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하겠느냐? (바울과 같은 결말입니다.) 바울처럼 적그리스도 악마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벌을 받을 때 공의롭지 않다며 하나님을 탓하지 마라. 그때 너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바울의 일곱 가지 죄를 폭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확실하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진입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2천 년 전과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진리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려 줬다. 글로 확실히 기록해 네게 알려 줬고, 들려줬고, 네가 깨닫도록 했다. 현실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이룬다는 것을 네게 보여 줬다. 그런데도 네가 진리에 진입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공의 성품에 따라 너를 벌하더라도 원망하지 마라. 하나님이 <계시록>에서 한 말씀이 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하나님은 각 사람이 일한 대로 각자에게 갚아 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폭로한 바울의 일곱 가지 죄를 근거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여 진정한 회개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2018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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