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는지에 관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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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자질이 많이 떨어지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닿지 못하고,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음에도 진실한 체험 인식을 말하지 못한 채 자신은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 몇 년을 더 믿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확신한다.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어. 자질이 많이 떨어지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자가 아니니 믿는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어.’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너무나 크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에게 공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데는 원칙이 하나 있다. 즉, 개인의 태도, 그리고 행동에 따라 최종적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늘 오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늘 비관적이고 실망한다면 이는 자업자득 아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해야 하지 맹목적으로 자신은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자가 아니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너는 전혀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6천 년 경영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고심은 더더욱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자포자기하여 하나님에 대해 추측하고 의심한다. 자신이 봉사자이고, 봉사하고 나면 도태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늘 생각한다. ‘내가 왜 본분을 이행해야 하지?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건 봉사하는 거 아닌가? 만약 봉사하고 나서 버려지면 나는 속은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은 어떠냐? 분별할 줄 알겠느냐? 너는 하나님에 대해 늘 오해하고 하나님을 세상에서 집권하는 마왕과 한 부류로 구분하며 늘 하나님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다. 또한, 늘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이기적이고 비열한 존재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진심도 여태껏 믿은 적 없다. 너는 늘 자신을 봉사자로 규정하고 봉사하고 나면 도태될까 봐 두려워하는데 이는 불신파의 교활한 마음가짐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느냐? 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 너는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지도,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고생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가 되었음에도 진리를 얻지 못했고, 종국에는 오히려 책임을 모두 하나님에게 전가하며 하나님이 너를 예정하지 않았고 너에 대해 성의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성령 역사를 얻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봉사자가 될 자격조차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흥정할 자격이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왜 하나님을 믿느냐? 너는 늘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너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며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길 바라고, 그래야만 하나님 집을 위해 힘을 들이려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너는 절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 얼마나 패역하고 강퍅하냐! 나는 성품 변화를 전혀 중시하지 않고 진리 실행은 더더욱 중시하지 않으면서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 하나님이 그를 도대체 어떻게 대하는지, 그가 예정되어 백성이 될 자인지 등 이런 뜬소문들을 여기저기 물어보는 것만 중시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느냐? 지금 나는 너희에게 정중히 이르겠다. 예정해 놓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에 따라 실행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의 최종적인 결말은 도태되는 것이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전력을 다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비록 사람이 보기에 그는 예정되어 살아남은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따라 그의 종착지는 소위 예정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보다 낫다. 너는 이 말을 믿느냐? 만약 네가 이런 말을 믿지 못하고 계속 잘못을 고집하며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네가 틀림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전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왕 이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와 행동으로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예정은 그저 객관적으로 조금 역할을 할 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이 말을 깨달았느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품이 좋지 않아서 아무리 추구해도 변할 수 없어. 그럼 그냥 순리에 따르자. 추구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이런 사람은 너무 소극적이어서 자포자기하고 만다. 이게 바로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너는 노력을 거쳤느냐? 만약 정말 노력을 거치고 기꺼이 고생한다면 어찌 육을 저버리지 못할 리가 있겠느냐? 너는 마음과 생각이 있는 사람 아니냐? 너는 매일 어떻게 기도하느냐? 너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할 줄 모르느냐? 네가 순리에 따르는 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순리에 따른다는 의미는 마치 “어차피 하나님이 모두 예정해 놓으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이 정말 이렇겠느냐? 만약 이렇지 않다면 너는 왜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주 소극적이 되며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과오를 저질러도 이렇게 추측한다.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고 도태시킨 게 아닐까? 나는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 아닐까?’ 하나님이 이번에 사역하러 온 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과오 없는 사람이 없는데 만약 모두 죽인다면 그게 구원이겠느냐? 사람은 일부 과오는 고의로 저지르고 일부 과오는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다.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일에서 네가 인식하고 나서 변화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네 변화를 기다리지 않고 너를 죽여 버리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원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네가 패역 성품이 있든 자신도 어쩔 수 없든, 기억해라.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서둘러 돌아서서 힘을 다해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하고, 어떤 상황이 나타나든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구원하려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이지 않는다. 이는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정말로 결국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한 일은 틀림없이 공의로운 것이다. 때가 되면 무엇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 네가 알도록 할 것이고 진심으로 탄복하게 할 것이다. 지금 너희는 오로지 진리에 공을 들이고 생명에 진입하는 것만 중시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만 추구하여라. 이는 바람직하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든 틀림없이 공의로울 것이니 너는 이를 의심해서는 안 되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록 지금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탄복할 것이다. 하나님은 일할 때 항상 광명정대하고 공개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낸다. 너희가 이 방면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이 하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인 만큼 사람이 만약 패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야만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나서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다. 하나님은 정도는 다르겠지만 사람에게 보응할 것이고, 사람도 자신의 과오로 인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네가 가끔 무심코 제멋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은 너에게 지적하고 책망 훈계할 것이고, 네가 좋은 방면으로 변화하면 하나님은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성품이 변화하는 정상적인 과정이며, 구원 사역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남녀 경계 문제에서 네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려서 늘 그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유혹하는 말을 하고는 나중에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 상스러운 행동 아니야? 죄를 범하는 거 아닌가? 남녀 경계가 불명확한데 이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지?’ 인식하고 나서 서둘러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또 죄를 범했습니다. 이 일은 참 추하고 망신스럽습니다. 저는 패괴된 육체가 증오스럽습니다. 저를 징계하고 징벌해 주십시오.” 너는 각오를 다지고 그 후 이런 일을 만나면 멀리하며 이성과 단둘이 만나지 않는다. 이는 변화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에게 이런 변화가 있으니 이전의 조심스럽지 못했던 행동은 정죄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노닥거리며 유혹하기까지 하면서도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증오하거나 경계하지도 않는다면, 육을 저버릴 각오도 다지지 않고 하나님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궤도를 벗어나는 일을 많이 저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갈수록 심각해져서 너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너를 정죄할 것이다. 네가 거듭해서 죄를 범하면 이는 일부러 죄를 범하는 것에 속한다. 일부러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정죄할 것이다. 일부러 죄를 범하면 구제 불능인 것이다. 만약 정말로 어쩔 수 없이 패괴 성품을 조금 드러내고 나서 네가 진실로 회개하고 육을 저버려 진리를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 사역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면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변화할 수만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늘 하나님에게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사람은 생명 진입이 없고 결국 손해 보고 말 것이다.

과거의 일은 단번에 말소해 준다고, 미래로 과거를 대체해 준다고, 하나님의 아량은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고 전에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에도 원칙이 있는데, 네가 얼마나 큰 죄를 범하든 하나님이 다 말소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는 다 원칙이 있다. 전에 이 방면의 행정 법령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기 전에 범했던 죄는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이 모두 사해 주고 용서해 주지만,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계속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죄를 한 번 더 범하면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지만 두 번 범하거나 몇 번이나 타일러도 고치지 않는다면 출교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역할 때 늘 사람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는 것이 정말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 이를 때까지도 네가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다면 이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고 돌이킬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고 변화시키는 데는 과정이 있다. 사람이 패괴 본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과정에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차피 본성이니까 실컷 드러나게 두자. 드러나고 나서 내가 다시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되지.’ 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정말로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패괴 표출이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일들을 잘못했는지 보고 자신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도 같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서둘러 바로잡고 절대로 그런 일들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변화한 것 아니겠느냐? 또는 때때로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육을 저버릴 수 있다. 이 역시 정결케 되는 성과를 거둔 것 아니겠느냐? 어느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든 다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 일회적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나서 패괴 성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여러 번에 걸쳐 진리를 구하고 여러 차례 책망과 훈계, 처벌과 징계를 거쳐야만, 나아가 심판과 형벌을 겪어야만 패괴 성품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이러고 나서 다시 진리를 실행하면 조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거치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변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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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세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를 보고 그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그 태도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너희가 생각하는 태도란 일할 때 드러내는 패괴 성품이겠지만, 사실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태도란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을 갖는지를 의미하며, 또 하나님을 믿는 네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 고난을 겪겠다는 의지, 그리고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킨다. 네가 전에 저지른 심각한 과오, 나중에 회개하고 변화한 정도, 이런 것을 종합한 것이 너의 태도이다. 이 태도는 네가 얼마나 많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성과를 내고 얼마나 참되게 변화했는지를 뜻한다. 만약 사람이 본성으로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냈는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심각하게 패괴되었으며,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많은 패괴를 드러내든, 마지막에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회개하고 참되게 변화할 수만 있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구원받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리더는 패괴 성품을 좀 더 많이 드러내며, 패괴를 많이 드러내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도태되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이 옳으냐? 리더는 비록 패괴를 많이 드러내지만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할 자격이 있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을 아름답게 증거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실한 변화가 있는 사람이다. 만약 패괴 성품을 얼마나 드러내는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리더 일꾼일수록 더 빨리 드러날 텐데, 정말로 이렇다면 누가 리더 일꾼을 할 엄두를 내겠느냐? 누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고 온전케 되겠느냐? 이런 관점은 너무나 터무니없지 않으냐? 하나님은 주로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는지, 굳게 설 수 있는지, 진실한 변화가 있는지를 본다. 만약 사람이 진실한 간증과 진실한 변화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면 드러내는 패괴가 적은 것 같지만 진실한 체험 간증과 진실한 변화가 없으니 하나님도 칭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와 본질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이 태도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과 사랑이 있는지, 진리를 실행했는지, 성품 변화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가리킨다. 바로 이런 태도와 본질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패괴 성품을 얼마나 드러냈는지에 따라 정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표출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사실, 사람의 패괴 본질은 모두 같다. 그저 인성의 좋고 나쁨의 차이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패괴 성품을 얼마나 드러내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너는 숨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 마음을 속속들이 살핀다. 네가 사람 앞에서 한 일이든 사람 뒤에서 한 일이든 아니면 네가 하고 싶은 일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드러나고 활짝 열려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태도라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겠느냐? 이는 스스로도 기만하고 남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사실,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간사하든, 사람이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든, 위장과 기만을 얼마나 잘하든 하나님은 다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리더 일꾼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으니 평범하게 따르는 자를 대할 때도 손금 보듯 훤히 알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리더가 되는 사람은 모두 무지몽매해.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 거야. 리더가 되면 패괴를 드러내 하나님에게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만약 사역하지 않으면 패괴 표출이 이렇게 많을 리 있겠어?’ 이런 생각은 얼마나 황당하냐! 네가 리더가 되지 않으면 패괴를 드러내지 않겠느냐? 리더가 되지 않으면 드러내는 패괴는 적겠지만 그게 구원받는다는 뜻이겠느냐? 이런 주장에 따르면 리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살아남아 구원받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주장은 너무나 황당하지 않으냐? 리더는 하나님 선민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다. 이 요구 기준은 전보다 높아진 것이므로 막 훈련하기 시작할 때는 일부 패괴된 내적 상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는 정상적인 것으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우침과 빛 비춤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도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와 사역에 순종한다면 생명 성장이 일반 사람보다 빠를 수 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게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사람의 이해에 따르면, 리더가 얼마나 큰 변화가 있든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리더 일꾼이 패괴를 얼마나 많이 드러냈는지만 보고 패괴 표출에 따라 정죄한다는 것이다. 리더 일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패괴를 적게 드러냈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황당하지 않으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느냐? 네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심각하게 대적하는데도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너는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는 주로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진실한 간증이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고, 주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본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과오를 저질러 심판과 형벌이 닥쳐도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과 일만 하지 않는 한 분명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만약 너희의 상상대로라면 끝까지 따르는 평신도는 모두 구원받을 수 있고 리더들은 다 도태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에게 리더를 하라고 할 경우 너희는 안 하면 안 된다고, 하면 또 어쩔 수 없이 패괴만 드러내게 되어 그야말로 단두대에 오른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모두 너희가 하나님을 오해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만약 사람의 패괴 표출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다면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것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정말 이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이 태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거둔 성과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한 과수원에서 주인이 과일나무에 물과 비료를 주고 열매를 수확하길 기다린다. 열매를 맺으면 좋은 나무이니 남겨 두고 열매를 맺지 않으면 좋은 나무가 아니니 남겨 둘 수 없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자. 어떤 나무는 열매는 맺었지만 병이 들고 말았다. 일부 가지가 좋지 않아 잘라 버려야 한다. 너희가 보기에 이 나무는 남겨 두어도 되겠느냐? 남겨 둘 수 있다. 가지를 좀 정리하고 병을 고치면 된다. 또 다른 상황도 있다. 어떤 나무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남겨 두어선 안 된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느냐? 바로 하나님 사역이 성과를 거두는 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동안 패괴 표출과 일부 과오를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만약 하나님이 성과 측면을 보지 않고 패괴 성품 표출의 측면만 본다면, 구원을 논할 수 없다. 사람을 구원한 성과는 주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런 면에서 사람의 성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고, 다시 사람의 과오가 얼마나 심각한지 살핀 후 두 가지를 종합해서 그 사람의 결말을 결정하고, 그 사람을 남겨 둘 것인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 패괴를 유독 많이 드러내고, 육을 돌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 싫어하고, 교회 이익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이 수년간 설교를 듣고 실로 변화하여 이제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대로 하고자 노력할 줄 알고, 본분 이행에 갈수록 성과를 보이며,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편에 서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킨다면, 이것이 바로 생명 성품의 변화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변화이다. 그 밖에, 과거에 관념이 있으면 늘 유포해 다른 사람도 관념이 생기게 해야 마음의 평형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관념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진리를 구하고, 순종하며, 유포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변화가 아니겠느냐? 과거에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즉시 반항했던 사람이 지금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받아들이고 자신을 인식하고 나서 정말로 어느 정도 변화하게 된다면, 이는 성과가 아니겠느냐? 하지만 아무리 변화해도 과오가 전혀 없을 수는 없고, 본성이 단번에 완전히 변화할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해 매사에 진리를 구할 줄 알고, 패역이 좀 있어도 그 즉시 깨닫고, 그런 후 재빨리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그것을 바로 바꾼다면,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한두 번 실수해도 세 번, 네 번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변화다.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다고 해서 패괴를 드러내지 않고 조금의 과오도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변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나서 실행할 수 있는 진리가 비교적 많아졌으며, 하나님의 요구를 일부 실행할 수 있게 되어 과오가 점점 줄어들고, 패괴 표출이 점점 적어지며, 거역하는 내용이 점점 가벼워진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이 성과를 거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성과를 거두게 된 그런 구체적인 태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공의롭고 합리적이다. 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네가 실천해야 할 진리를 용감하게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너를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생각해 보아라.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의심하면서 자신이 진리를 실행해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자신이 충성을 다해도 하나님이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모르는 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본분 이행에도 의욕을 잃으며, 충성심도 사라진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이 없어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교만하고 잘난 체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책망과 훈계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해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사람의 결말이 정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정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께 좀 충성하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말아야 하고, 훈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고 잘못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할 엄두를 못 낸다. 사실, 결국은 사람이 너무나 간사해서 고생을 전혀 원치 않고 손쉽게 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는 일이 모두 공의롭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그 누구를 대하든 모두 공의롭지만 사람은 단 한 번도 이 일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늘 자기 이치만 따진다. 자기가 어떤 나쁜 일을 했든,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든,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든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닥치기만 하면 하늘은 불공평하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는 것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사람의 생각에 어긋나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사람이 어떤 과오를 저질렀든 하나님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않고 사람의 패역을 꾸짖지도 않으며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게다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먹고 함께 누리도록 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것이며, 능청스럽게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겠느냐?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이 사람의 생명 성품을 정결케 하고 변화시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려는 것임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임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꾸짖고 폭로하고 책망하기만 하면 사람은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며, 늘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고 원망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불평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사람이 회개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규정한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 그는 늘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는데, 그러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가 진실한 변화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내적 상태가 지속되면 아주 위험하며 정결케 되지도, 하나님에게 온전케 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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