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교회란? 종교 단체란?

2017.05.31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 집이란 도대체 무엇이더냐? 이론적으로 정의한다면,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는 곳이며, 하나님 말씀을 실행의 원칙으로 삼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 곧 하나님 집이다. …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하는 곳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곳이고, 하나님 말씀이 사람들에게서 실행되고 이뤄지는 곳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하나님의 경륜이 실현되고 성취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이지, 어떤 한 사람이 권력을 부리고 자신의 경영을 하며, 개인적인 바람과 계획, 거창한 사업을 이루는 곳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하나님 집을 자기 집안 세상으로 생각한다> 중에서

각 단계마다 하나님은 사역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것을 사람에게 요구한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자에게는 모두 성령의 함께함과 징계가 있지만,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는 전부 사탄의 지배를 받으므로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 협력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시기에 요구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징계를 받게 되며 심한 경우 성령께 버림받게 된다. 성령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성령의 흐름 속에서 살면서 성령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깨우침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성령의 징계가 있고 심지어 징벌도 임한다. 어떤 사람이든 성령의 흐름 속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기꺼이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의 축복을 받지만, 그를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은 바로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새 사역을 받아들인 이상, 하나님과 상응하는 협력을 해야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패역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이다. 그러나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들이니 성령의 징계나 책망 같은 것은 아예 말할 것도 못 된다. 그들은 온종일 자신의 육체와 머릿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해 낸 이치지, 성령의 새 역사에서 비롯된 요구도, 더욱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으며, 축복이나 보호 같은 것은 더더욱 논할 수 없다. 그들의 언행은 대부분 지난날 성령 역사에서 비롯된 요구를 지키는 것으로, 이치이지 진리가 아니다. 그런 이치와 규례들은 그들의 집합체가 종교일 뿐, 선민이나 하나님의 사역 대상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 준다. 그들 모든 사람의 집합체는 종교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뿐, 교회라고 칭할 수는 없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새 역사가 없고, 그들의 모든 행위에서는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며, 그들의 삶은 전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함께함과 역사가 없으며, 더욱이 성령의 징계나 깨우침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시체이고, 영성(靈性)이 없는 구더기이다. 그들은 사람의 거역과 대적에 대해 알지 못하고, 사람의 온갖 악행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모든 사역과 지금의 뜻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무지한 소인배들이고, ‘신자’로 불릴 자격이 없는 인간 말종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하나님의 경영과는 관계가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도 없다. 그들의 언행은 너무나 역겹고 초라하여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지 않은 자들이 행하는 것은 성령의 새 사역과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성령은 징계하지도, 깨우쳐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성령에게 버림받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악을 행하는 자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육을 좇아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사역할 때 고의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거슬러 역행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지 못하는 것만 해도 이미 크나큰 패역인데, 하물며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역행하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가리킨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이’는 성육신한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 아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말씀은 현재에 적용해도 효과가 있고, 현재 상황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과 율법시대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의 본성과 본질은 같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어떤 교회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두 명이어도 괜찮고, 수십 명이어도 상관없다. 성령 역사를 잃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과 아무 관계도 없는, 종교 단체로 전락한다. 그럼 몹시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어떤 일이 생기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으며, 사람의 지배와 조종을 받는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기도하거나 진리의 원칙을 구하는 법이 없다. 그저 남에게 물어보고 남의 말을 듣고 남의 눈치를 봐서 행동하고 남의 지휘봉이 향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 막연하고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가장 현실적이고 또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선택해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이에게 물어보고, 다른 이의 말을 듣는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일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를 구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어째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만 하면 형식상,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을 믿는 것으로 변질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냐? 어째서 하나님을 따르다가 한순간에 사람을 따르게 된단 말이냐? 어째서 그렇게 빨리 변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었으면서 왜 아직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이냐?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던 적이 없고, 그는 하나님과 늘 무관했다. 일 처리나 말, 생활, 처세, 심지어 본분 이행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그가 드러낸 모든 행위, 모습, 나아가 모든 생각이 하나님과 무관하다. 그럼 이 사람이 그동안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하나님을 믿는 분량의 크기를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증명해 줄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구원받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규례로 여겨 지킨다면 종교 의식으로 바뀌기가 쉽지 않겠느냐? 그럼 그 종교 의식이 기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말에 깊이를 더하고, 어느 정도 앞서간 면은 있겠지만, 규례나 의식으로 바뀐다면 그것은 곧 기독교로 바뀐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의는 새로운 것과 옛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만약 교의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고, 사람에게는 하나의 의식이나 규례가 된다면, 사람 역시 거기에서 진리를 얻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믿음법 아니겠느냐? 기독교의 본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의 행위와 본분 이행 중 어떤 것들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과 같거나 비슷한 관점, 내적 상태겠느냐? (규례를 지키고 글귀나 도리를 갖추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영에 속하는 것, 겉면의 좋은 행위, 경건함, 겸손함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겉면의 좋은 행위를 추구하고, 영에 속하는 겉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기를 쓰고, 사람들의 관념과 상상에 그럭저럭 맞는 일을 하고, 외식하고, 높은 강단 위에 서서 글귀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진리를 깨달으라고 가르치고, 영적인 도리를 말하고, 영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영적인 사람인 양 가장하는데, 말과 행동, 드러내는 것이 전부 영적인 겉모습뿐인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고, 일이 임하면 전부 사람의 뜻뿐이고, 하나님을 한쪽에 밀어 두고 진리의 원칙대로 일하지도 않는다. 또 진리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이러한 일들을 참답게 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의 이 모든 표면적인 행위와 내적인 상태, 믿음법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추구와 무관한데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진리 추구와 무관한 사람은 몇 년을 믿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어떤 길을 걷겠느냐? (바리새인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무엇을 채우고 있겠느냐? 글귀나 도리를 채우고 있지 않겠느냐? 온종일 글귀나 도리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포장하여 더욱 바리새인에 가깝게, 더욱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소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지 않겠느냐? 그럼 이 모든 행위의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겠느냐?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대충 형식만 취하는 것이며, 종교 의식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하에 종교 의식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속이고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교회에 있는,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구원받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중에서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지었느냐? ‘유대교’라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 내렸느냐? (‘기독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종교 단체나 교파로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규정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규정한 그 교파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분명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명목상으로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들이겠느냐?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언젠가 하나님 눈에 교파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교파 사람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교파 사람으로 전락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명목상으로는 참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교파의 사람에 불과한 이런 자들, 그들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들고 있지만, 종래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도,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다시 말해, 그들이 가는 길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저버리며 사탄과 마귀를 경배하고 사람의 경영을 하며 독립 왕국을 세우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그 믿음의 방식이 하나님께 교파나 단체로 규정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할 사람으로 규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가 없고, 전혀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는 단체나 무리가 경배하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따르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형식상으로, 명목상으로는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누구를 따르는 것이냐?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들은 사람의 조종과 지배, 통제하에 있다. 그들이 따르는 것은 사탄과 마귀, 하나님의 적대 세력,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할 리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구원하지 않겠느냐? 그들이 회개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사업, 사람의 경영을 하고 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맞이할 결말은 하나님께 혐오받고 버림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또한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사탄에게 사로잡혔고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졌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구원받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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