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인류에게 어떻게 그의 공의 성품을 드러내시는가?
관련된 하나님 말씀:
시대를 끝내는 마지막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형벌과 심판으로 나타나며, 온갖 불의를 드러내어 만민을 공개적으로 심판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런 성품이라야 시대를 끝낼 수 있다. 말세가 되었으니 만물은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며, 각각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른 부류로 나뉠 것이다.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를 드러내는 때이다.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의 패역과 불의는 모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의 결말은 오직 형벌과 심판을 통해서만 오롯이 드러나고, 사람은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만 본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은 악한 자는 악한 자끼리, 선한 자는 선한 자끼리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다. 형벌과 심판을 통해 만물의 결말을 드러내어 상선벌악하며, 그리하여 만인이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게 한다. 이런 사역은 모두 공의로운 형벌과 심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극도로 패괴되었고 사람의 패역은 너무나 심해서, 오직 형벌과 심판을 위주로 하는, 말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만이 사람을 철저히 변화시키고 온전케 할 수 있으며 악을 드러낼 수 있다. 이로써 모든 불의한 자들을 강하게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품은 모두 시대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성품을 나타내고 공개하는 것은 모든 새 시대의 사역을 위한 것이지, 아무 의미 없이 마음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결말을 드러내는 말세에도 여전히 끝없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며 사랑해 주고, 공의로운 심판 없이 사랑하기만 하면서 관용을 베풀고 인내하고 죄를 사해 주며,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언제나 용서해 주고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지 않는다면, 전체 경영은 언제 마무리할 수 있겠느냐? 그런 성품으로 언제 사람들을 인류에게 적합한 종착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사람들을 언제나 사랑하기만 하는 재판관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지르든 사랑해 주고, 그 누구든 아껴 주고 감싸 준다면, 공정한 판결은 언제 할 수 있겠느냐? 말세에는 오직 공의로운 심판만이 인류를 각기 부류대로 나눌 수 있고, 사람을 더 새로운 경지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심판과 형벌의 공의 성품으로 전체 시대를 끝내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 이상 3> 중에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가장 낙후되고 더러운 곳에 임해야 그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성품을 전부 드러낼 수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무엇을 통해 드러나겠느냐? 바로 사람의 죄와 사탄에 대한 심판, 죄에 대한 혐오, 그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원수에 대한 증오를 통해 드러난다. 오늘날 내가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고 사람의 패역을 저주하려는 데 있다. 사람의 간사함과 교활함, 사람의 언행 등 그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심판받아야 하며, 사람의 패역은 정죄받아야 한다. 심판을 중심으로 말하는데, 사람의 불의를 심판하고 사람의 패역을 저주하며 사람의 모든 추한 면모를 밝혀냄으로써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낸다. 거룩함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상징으로, 그의 거룩함이 곧 그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오늘날 이런 말들을 하는 배경은 다 너희의 패괴 성품을 빌려 말하고 심판하며, 정복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사역이며,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부각시킬 수 있다. 만약 네게 패괴 성품이 조금도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네게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나 더럽고 패역한데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를 심판하지도 않고 너의 불의로 인해 너를 형벌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존재는 근본적으로 죄를 미워하지 않을뿐더러 사람과 똑같이 더럽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너를 심판하는 이유는 너의 더러움 때문이며, 오늘 내가 네게 형벌을 가하는 이유는 너의 패괴와 패역 때문이다. 너희에게 위풍을 떨거나 일부러 너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러운 땅에 태어난 너희가 더러움에 너무 많이 물들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정말이지 인격도 인간성도 잃어버렸으며, 가장 더러운 곳에 태어난 돼지와 다름이 없다. 바로 너희의 이러한 점 때문에 너희를 심판하고 너희에게 진노하는 것이다. 또 너희는 바로 이러한 심판 때문에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며 거룩한 하나님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거룩하고 공의롭기 때문에 너희를 심판하고 너희에게 진노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패역을 보고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며, 사람의 더러움을 보고 거룩함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그가 바로 흠 없이 거룩한 존재이자, 또한 더러운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과 더불어 더러운 것을 좇는 자라면 그에게는 거룩함의 요소도, 공의로운 성품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불의를 심판할 자격도, 사람을 심판할 자격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 아니겠느냐?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 더러운 전 인류를 심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거룩한 하나님 자신뿐이다. 사람이 어찌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또 어찌 사람의 죄를 볼 수 있겠으며,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께 사람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면 그가 어찌 공의로운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말씀으로 심판해야 사람에게 그가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그가 사람의 죄를 심판하고 형벌하고 드러내면 그 어떤 존재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러운 것은 모두 그에게 심판을 받으니 그의 이러한 성품이야말로 공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를 어찌 명실공히 부각물이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두 번째 정복 사역은 어떻게 성과를 거두는가> 중에서
지금 네 인식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느냐? 네 마음과 생각, 처신, 언행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거룩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지 않더냐? 너희가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폭로한 패괴 성품 아니더냐? 너의 마음과 생각, 속셈, 그리고 네가 드러내는 패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거룩함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똑같이 더러운 땅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고, 똑같이 더러운 세상에서 생활하지만 그는 이성과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더러운 것을 혐오하며, 너의 언행과 너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더러운 것까지 모두 발견하고 짚어 줄 수 있다. 오늘날, 네가 지닌 낡은 것들, 교양도 식견도 이성도 없는 모습과 낡아 빠진 생활 방식들을 하나님은 전부 폭로하며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렇게 사역하기에 사람은 그의 거룩함과 공의로운 성품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여 인식하게 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훤히 꿰뚫고 있기에 네게서 마귀의 본성이 드러날 때 그것을 짚어 줄 수 있다. 그는 너희들 가운데서 생활하며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환경에서 살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너를 드러낼 수 있으며, 사람의 패괴된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사람의 처세 철학이나 간사함, 교활함은 모두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사람의 육적인 왕래를 증오한다. 그는 사람의 처세 철학은 모르지만 사람이 드러낸 패괴 성품은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폭로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의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가르침을 주는 사역을 한다. 또한 이러한 것을 통해 사람을 심판하며, 그의 공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보여 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두 번째 정복 사역은 어떻게 성과를 거두는가> 중에서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패괴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빛이며, 흠이 없이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노할 때, 사악한 세력은 저지당하고 사악한 사물은 멸망되지만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사물이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거나 교란시키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롭고 긍정적이며 아름답고 선한 사물의 존재를 수호하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규칙과 법칙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노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우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또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다른 속셈이나 교활함이나 음모가 없고 패괴된 인류에게 공존하는 욕망, 간사함, 악랄함, 폭력성, 사악함 등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의 본질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았고, 이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한 목표와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 두루뭉술하거나 맹목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며, 원칙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또한 하나님 진노의 실제적인 면이다. 인류는 바로 하나님 진노의 이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인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 추락하게 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선한 모든 사물은 멸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피조물의 생존 법칙과 규칙이 파괴되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진노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악한 사람과 사물,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은 징벌받고 통제되고 멸망된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자, 사탄의 공범자 그리고 사탄의 종이 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끊임없이 치고 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로운 일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온 인류를 주로 긍휼과 관용으로 대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대부분의 시간과 사건에서 가려져 있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기 아주 어렵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기도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사역과 절차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했을 때, 즉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풀고 경고했을 때도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로 긍휼을 거두고 사람에게 진노만을 발한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의 진노를 표현할 수 있고 사람을 징벌하고 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패괴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든 간에,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져 뜻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을 멸할 것이라 선포하기 바로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점차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이 하나의 일에서 동시에 나타났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순되지 않음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완전히 다른 두 본질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본질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 것이다.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는 자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참된 회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리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마음을 되돌렸을 때, 그가 베푼 긍휼과 관용이 거짓이었겠느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측면의 성품이 전환되어 나타난 것을 보며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분리되지 않고 완전하다. 그가 사람에게 진노하든,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모두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며, 그는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가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음을 인류에게 말해 준다. 그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 자신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사람은 규례에 끼워 맞추기를 좋아하고,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공식(公式)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실질적인 견해도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물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며,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측면의 하나님 본질이 드러난다.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의 생명이 확실히 존재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진실로 드러냄으로써 인류에게 그의 진노와 긍휼과 자비 그리고 관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물의 발전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드러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누군가 의심하거나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누군가 바꾸거나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은 만사와 만물 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만물의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고, 모든 순간순간에 생생하게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국한되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발현되고 나타난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을 멸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오직 긍휼이요 자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노는 빈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긍휼을 거두고 크게 진노할 때, 하나님에게 인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한다. 그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과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용과 긍휼은 어떤 흠도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결하며 아무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용은 곧 관용이고, 긍휼은 곧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와 다양한 태도에 따라 진노를 드러내기도 하고 긍휼과 관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드러냈든 그것은 모두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피조물의 본질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사역의 원칙, 마음과 생각 혹은 하나님이 내린 어떤 결정이나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결정한 이상 그렇게 행하며, 그렇게 이룬다. 그 결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하다. 그 근원에 흠도 오점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어떤 흠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역시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어떤 연구와 검증(원문: 推敲與體驗)도 통과할 수 있다.
너희는 니느웨 성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서 다른 측면의 본질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인류 중에 이러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지닌 사람이 있더냐?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가진 사람이 있더냐? 피조물 중에 크게 진노하여 인류를 멸하기로 결정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있더냐? 또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죄를 사해 줌으로써 인류를 멸하겠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는 자가 있더냐? 창조주는 자신의 고유한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도 좌지우지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의 고유한 성품으로 볼 때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없고, 그를 설득하거나 그가 내린 결단을 바꾸지 못한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심판받는다. 그가 진노하든, 긍휼을 베풀든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본질, 즉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다!
너희는 니느웨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달라진 태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유일무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 긍휼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 중 한 측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한 것으로, 사람의 거스름도, 누구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피조물과 비피조물 모두에게 없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성품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측면인 긍휼도 거룩하며,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 그 어떤 피조물도,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참된 발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는 그가 노할 때 사람에게 그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드러낸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반면 사람이 심히 패괴되고 하나님을 끝없이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 노는 어느 정도까지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분출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노가 사라진다. 즉, 누구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길 원하든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지만,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고, 나아가 하나님이 시종일관 나타내고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이다. 즉,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므로 끝까지 따르기만 하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의로우신데, 끝까지 따른 사람을 어떻게 뿌리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공의로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나의 요구에는 다 적합한 기준이 있어서 내가 무엇을 요구하든 사람은 다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 나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경력이나 관록을 갖고 있는지 보지 않고, 오직 네가 나의 도를 행하는 사람인지, 또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인지만 본다. 너에게 진리가 없고 오히려 내 이름을 모욕하며 나의 도에 따라 행하지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르기만 한다면, 그때는 내가 너의 악을 이유로 너를 치고 징벌할 것이다. 그때 네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오늘 내가 한 말을 다 지킨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칭찬할 것이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고 비바람 속에서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며 환난을 함께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지는 못했다. 너는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헌신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또 너는 “어쨌든 저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헌신했는데,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꼭 저를 기억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의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고, 사람의 뜻이 전혀 없으며, 육적인 것도, 사람처럼 거래하는 것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니 나중에 제게 축복을 조금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는 내가 한 말을 지켰느냐?” 네가 말한 공의는 거래를 전제로 한 것이다. 너는 내가 공의로우니 그 누구도 차별할 리가 없으며,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고 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따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나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끝까지 따르는 사람은 나에게 완전히 얻어지는 사람이고, 또 나에게 정복된 후 진리를 구해 온전케 되는 사람이다. 너는 몇 가지를 해냈느냐? 끝까지 따랐다면 그 외의 것은 어떠냐? 너는 내 말을 준행했느냐? 너는 내가 내놓은 다섯 가지 요구 가운데 하나만 충족했을 뿐, 그 외의 네 가지는 충족시킬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너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길을 찾아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추구한다. 나의 공의로운 성품은 너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형벌이자 심판이고 공의로운 응징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공의로운 징벌이다. 나의 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설령 끝까지 나를 따른다고 해도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다. 이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 사람을 징벌할 때가 되면 사람은 매우 당혹해할 것이다. 하나님을 따를 때 그의 도를 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동안 고난만 조금 받았지,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는 않았으니 할 말이 없어. 그냥 형벌을 받자!’라고 할 것이다. 또 마음속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아무튼 나는 끝까지 따랐으니 형벌을 받더라도 너무 무거운 형벌은 받지 않겠지. 형벌을 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받아 주실 거야. 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아. 그러니 나를 계속 이렇게 대하지는 않으실 거야. 어쨌든 난 멸망당할 사람들과는 다르거든. 멸망당할 사람은 무거운 형벌을 받겠지만 나는 좀 가벼운 형벌을 받을 거야.’ 공의 성품은 네가 말한 것과 다르다.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고 해서 가볍게 처벌하지는 않는다. 공의란 바로 거룩함이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다. 더러운 자와 변화되지 않은 자는 모두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공의로운 성품은 법률이 아니라 행정 법령, 하나님나라의 행정 법령이다. 이런 행정 법령은 진리와 변화가 없는 모든 자에게 있어 공의로운 징벌이며, 돌이킬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이는 사람이 각기 부류대로 나뉠 때, 상선벌악(賞善罰惡)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류의 종착지가 드러나는 때이자 구원 사역이 끝나는 때이므로 그 후로는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지 않고 악을 행한 모든 사람을 응징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너는 무엇이 심판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이해했느냐? 만일 이해했다면 고분고분 심판받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 이끌려 그의 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없을 것이다. 심판받기만 하고 끝까지 정결케 되지 못하는 자들, 즉 심판 사역에서 도망간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께 혐오받고 버림받을 것이다. 그들의 죄상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무겁고 더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했으며, 하나님의 반역자이기 때문이다. 봉사할 자격조차 없는 그들은 더 무거운 징벌, 게다가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입으로는 그에게 충성한다고 하면서 그를 배반하는 어떠한 변절자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이 다 징벌받는 보응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발현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드러내는 목적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심판 기간 동안 많은 악행을 쌓은 사람을 악령이 득실거리는 곳에 두어 악령이 마음대로 그 육체를 훼손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육체에서는 시체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이다. 하나님은 충성하지 않은 거짓 신자와 거짓 사도 그리고 거짓 일꾼들의 각종 죄상을 일일이 그들의 기록 책에 적어 두었다가 적합한 때에 그들을 더러운 귀신들 속에 던질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이 마음대로 그들의 온몸을 더럽혀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고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동안 봉사했지만 끝까지 충성하지 않고 외식한 자들을 악인들 가운데 두어, 악인들과 한 패거리인 오합지졸이 되게 하였다가 최종적으로 그들을 멸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적이 없거나 작은 힘도 바친 적이 없는 자들을 한쪽에 내버려 두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시대를 바꿀 때 모두 멸해 버릴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땅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고 마지못해 건성으로 대한 자들은 백성들을 위해 힘을 쓴 사람들 속에 넣어 둘 것이다. 이들 중 적은 수만이 살아남을 것이며, 대부분은 봉사조차 제대로 못 한 자들과 함께 멸망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와 한마음 한뜻이 된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과 아들들 그리고 그가 제사장으로 예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어갈 것이다. 이들은 다 하나님이 사역해서 얻은 결정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눈 부류에 속하지 못한 자들은 다 이방인의 행렬에 들게 된다. 그들의 결말이 어떨지는 너희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희들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 어떤 사람도 기다리지 않으며,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누구에게나 무정하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 중에서
내 말이 모든 것을 이룰 것이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고, 아무도 내가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다. 나는 온 땅의 기운을 깨끗하게 하고, 땅의 마귀들을 흔적도 없이 소탕할 것이다. 나는 일을 시작했고, 큰 붉은 용이 사는 곳에서 형벌의 시작 단계 사역을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 형벌은 이미 온 우주에 내렸고, 큰 붉은 용과 온갖 더러운 귀신은 결코 내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내가 온 땅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땅의 사역을 완성할 때, 즉 심판 시대가 끝날 때, 나는 본격적으로 큰 붉은 용을 형벌할 것이다. 나의 백성은 틀림없이 내가 그것에게 내리는 공의로운 형벌을 볼 것이고, 나의 공의에 칭송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나의 공의로 말미암아 영원히 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본격적으로 너희의 본분을 이행하고, 온 땅에서 나를 영원토록 찬미할 것이다!
심판 시대가 절정기에 들어설 때, 나는 내 사역을 서둘러 끝내지 않고, 더 나은 효과를 위해 형벌 시대의 ‘증거’들을 결합해 모든 백성에게 보여 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내가 큰 붉은 용에게 형벌을 가하는 수단이다. 나는 백성에게 이것을 직접 보게 하여 나의 성품을 더 잘 알게 할 것이다. 백성이 나를 누릴 때가 큰 붉은 용이 ‘형벌받을’ 때이다. 큰 붉은 용의 민중이 일어나 그것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나의 계획으로, 이는 내가 백성을 온전케 하는 방식이자 모든 백성의 생명이 자랄 좋은 기회이다. … 오늘날 나는 사람과 함께 형벌 시대로 발을 내디디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간다. 나는 나의 사역을 하고 있다. 즉, 인간 세상에, 인류의 패역한 곳에 나의 채찍을 내리친다. 사람의 눈에 나의 채찍은 초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나의 채찍은 내 원수들을 놓아주지 않고, 나를 대적하는 자에게서 원래 기능을 발휘한다. 내 손에 있는 모든 것은 내 본래 뜻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내 뜻을 거스른 것과 변질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이에 물은 포효하고, 산은 무너지고, 강은 붕괴되고, 사람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떨고, 태양은 어두워지고, 달은 칠흑으로 변한다. 사람은 더 이상 평안할 날이 없고, 땅은 더 이상 평온할 때가 없으며, 하늘은 더 이상 차분하지도, 침묵하지도, 인내하지도 않는다. 만물은 다시 ‘바뀌어’ ‘원래 모습’을 회복한다. 땅의 가정은 모두 ‘파탄’되고, 땅의 나라는 ‘분열’되며, 더 이상 ‘부부가 함께 모이는’ 날도, ‘모자가 재회하는’ 때도, ‘부녀가 만나는’ 시간도 없을 것이다. 땅의 모든 옛 모습은 나에 의해 깨질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ㆍ제28편> 중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악인들이 받는 징벌 또한 내 공의로운 성품의 증거이자, 나아가 내 진노의 증거가 된다. 재난이 닥칠 때, 나를 대적한 모든 자는 기근에 빠지고 전염병에 걸려 슬피 울 것이며, 오랜 세월 나를 따랐지만 온갖 악을 저지른 자들 역시 죄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천만년 이래 보기 드문 재난 속에 떨어져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르면서 나에게 일편단심 충성한 사람들은 오히려 기쁘게 손뼉 치며 나의 큰 능력을 찬양할 것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한 마음으로 내가 인간 세상에 한 번도 베푼 적 없는 즐거움 속에서 살 것이다. 나는 사람의 선행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의 악행을 극도로 증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오면서 나와 한마음 한뜻인 사람들을 얻기를 기대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었던 자들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으로 미워했다. 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그걸 보며 통쾌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마침내 나의 날이 왔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마지막 사역은 사람을 징벌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종착지를 안배하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나의 행사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옳고,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내 성품의 발현임을 보게 할 것이다. 인류를 창조한 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대자연이 한 것은 더욱 아니라 만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령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내’가 한 것이다. 나의 존재를 잃어버리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고 재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도 다시는 아름다운 해와 달과 푸르른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음산하고 차디찬 암흑의 밤과 저항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인류의 유일한 구원(원문: 救贖)이자 희망이며, 나아가 전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의지처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라도 나를 잃으면 인류는 즉시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오직 멸망의 재앙을 당하고 온갖 유령에게 짓밟힐 것이다. 나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역을 행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조금의 선행으로 나에게 보답하는 것뿐이다.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을지라도 나는 인간 세상에서의 여정을 끝내고 다음 단계에 전개할 사역을 행할 것이다. 내가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바쁘게 일한 결과가 이미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선행이다. 요컨대, 나는 너희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길 바란다. 그래야만 나를 만족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 엄습할 재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재난은 내가 일으키며 또 당연히 내가 지배한다. 너희가 내 앞에서 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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