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3)
2. 성육신 하나님을 멸시한다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 중 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에 대해 교제했다. 해당 항목을 우리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자세하게 교제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멸시한다’, 두 번째는 ‘성육신 하나님을 멸시한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로, 이 세 가지에 근거해서 제10조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을 해부하고 있다. 첫 번째는 교제를 마쳤다. 두 번째, 성육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모습은 네 가지로 나누어 교제하는데, 그 네 가지가 무엇이냐? (‘첫째, 환심을 사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춰 좋은 말을 한다. 둘째, 연구하고 분석하며 호기심을 갖는다. 셋째,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 넷째, 그리스도가 하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따르거나 순종하지 않는다.’입니다.) 지난번에는 처음 두 가지를 교제했고, 이번에는 세 번째 내용을 교제할 차례다.
3)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
세 번째는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이다. 이 간단한 말로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너희의 기억, 혹은 너희가 보고 체험한 일 중에 이 방면에 관한 실제 사례가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설교만 들었습니다. 이 항목과 관련해서 실제로 체험한 것도 없고, 여기에 해당하는 실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와 관련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이 항목에 맞춰 볼 수 있는 어떤 느낌이나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자세하게 교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 항목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접했을 때의 여러 태도와 모습에 관계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사람이 성육신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모습과 태도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모습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와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 본질이 있는 하나님 자신을 대할 때, 그 태도는 과연 어떤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참된 믿음이 있는지, 참된 순종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사람이 다양한 일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대하는 여러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과연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네가 이 평범한 사람을 대하고 그리스도를 대할 때 관념이 있는지, 참된 믿음과 순종이 있는지는 네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대할 때 참된 믿음과 순종이 있는지를 말해 준다. 하늘의 하나님을 대할 때 사람의 태도와 관점, 사람이 가진 생각은 막연한 것이어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참된 태도는 볼 수 없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만났을 때, 만질 수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성육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진짜 태도가 모조리 드러난다. 사람이 하는 말,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 속으로 규정하고 간직한 관점,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대하는 생각과 태도 등은 사실상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가지 모습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대할지, 어떻게 규정할지, 순종할지 말지 등과 관련하여 사람에게는 사실 사람이 드러내는 것이 옳은지, 진리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그리스도가 된 뒤에는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이 모든 모습과 태도에 판단 기준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참된 태도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특히 믿음이 있고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은 위대하고 지극히 높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과연 사람의 진실된 분량이냐, 아니면 단지 일종의 기분이냐? 그건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는 사람이 어떤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든 그 안에는 늘 막연하고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이 섞여 있고, 사람의 공허한 상상이 담겨 있다.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보고 접할 때는 사람에게 과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되는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들이 모두 드러난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육신할 때, 특히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더는 평범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때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 육신, 이 평범한 사람은 각자에게 시련이 되었고, 각자의 믿음, 각자의 참된 분량을 드러냈다. 네가 하나님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래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육신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된 것을 보았을 때 너는 속으로 관념을 가득 품게 될 것이다. 이때 네가 믿는 그리스도, 이 평범한 사람은 너의 믿음에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사람, 성육신 하나님, 즉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또 사람은 이 평범한 사람,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진실한 모습을 보이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여러 가지 진실한 태도와 관점을 드러내는지, 오늘은 이에 대해 교제해 보기로 하자.
세 번째 항목의 주된 내용은 사람이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는 것이다. 이 기분이 과연 무엇인지가 오늘 교제의 핵심이자 요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기분’은 하나의 대명사, 하나의 개괄에 불과할 뿐, 어떤 한 가지 기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도사린 것은 사람의 각종 관념과 상상, 그리고 사람의 각종 패괴 성품, 심지어 사탄의 본성 본질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데 자신을 가로막거나 자기 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없고 모든 게 아주 순조로울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항상 기도할 수 있고, 생활도 무척 규칙적이고, 아주 즐겁고 평안하다. 주변 상황도 무척 순조롭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낼 때도 대부분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나 업무를 배울 때도 하나님이 늘 인도해 주고,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고, 실행의 원칙도 비교적 밝히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척 정상적이고 순조롭다. 이럴 때 사람은 하나님에게 믿음이 충만하고 속으로 하나님과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자주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아주 기분이 좋고 늘 평안과 즐거움 속에 살면서 예배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매일 제때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운다. 모든 것이 다 특히 좋고 순조로울 때 사람은 계속해서 속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몰래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겠다고 다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무척이나 위대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면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다. 이런 광경은 아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지 않으냐? 여기에 사람의 충성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의 대가가 보이는 듯하고, 모든 게 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온화하고, 그토록 순조로워 보인다. 이 모든 모습으로 볼 때 사람은 오로지 일방적으로 적극 노력하며 하나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협력하는 것이라 별로 나쁜 게 없다. 따라서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땅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무한한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하다. 매번 찬양에서 ‘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노래할 때마다 사람의 마음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정말 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나를 구원하고 내게 기회를 주어서 내가 오늘 하나님 집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구나!’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직접적으로 말한다. “실제의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여, 당신께 감사드리고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이 모든 축복을 주시고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제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이고, 당신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당신이 바로 제가 따르려는 그분이십니다. 당신께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이 모든 장면이 그토록 온화하고 아름답고 또한 조화로워서 마치 사람이 구원받는 일이 무척이나 쉽고 수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조화로움과 온화함이 정말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겠느냐? 정말 변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1)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의 태도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패괴 성품을 표출하지 않기가 어렵고, 자신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원망을 터뜨리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갖지 않기가 어렵다. 제멋대로, 자기 뜻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기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열정이 충만하고 하나님에 대해 상상과 관념이 충만한 사람이 참된 분량으로 이 모든 것을 마주하고, 진실되게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순조롭게 이런 환경을 넘길 수 있겠느냐? 이 점은 의문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토록 위대하고 진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고 드러나게 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그것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곤혹스럽고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순간적으로 흑암에 빠져 앞길이 보이지 않고, 자기가 눈앞에 맞닥뜨린 환경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사람은 예전의 그런 느낌을 찾고 싶어 하지만, 예전의 기분, 예전의 사상 관점과 태도로 기도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 때 사람은 속으로 생각한다. ‘설마 하나님이 날 원하지 않으시는 건가? 하나님이 날 버리신 건가? 설마 내게 패괴 성품이 있다고 하나님이 날 좋아하시지 않게 된 건가? 하나님이 날 도태시키시려는 건가? 그러면 난 끝난 게 아닌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 믿는 것만 못하겠군.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금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또 가정이 화목하고 괜찮은 앞날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지금까지 하나님 믿으면서 별로 얻은 것도 없어. 하지만 정말 믿지 않으면 그동안 노력한 게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어? 지금까지 헌신하고 대가를 치른 게 다 헛수고가 되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사람은 문득 처량해지고 온몸이 편치 않다. ‘하늘의 하나님은 저렇게 멀리 계신데, 땅의 이 하나님은 진리를 교제하고 공급하는 것 말고 내게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 뭘 베풀어 주실 수 있을까? 그분은 너무 미미하고 정말 사람 마음에 맞지 않아.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좀 있는 게 어때서? 사람의 방식대로 처리한다면,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질 게 아니라 약간의 패괴 성품은 눈감아 주고 관대하게 처리해 주셔야지. 이만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책망하고, 징계하고, 또 상대도 안 해 주시는 걸까? 이런 환경에서 사람이 이런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건 별일도 아닌데 이런 일로 혐오하시다니,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사랑하시기는 하는 걸까? 하나님 사랑이 과연 어디서 드러나는 거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걸까?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 하나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속으로 순식간에 하늘의 하나님과 멀어지고, 땅의 이 그리스도, 이 평범한 사람과는 더욱 멀어진다. 속으로 이렇게 처량함을 느낄 때 사람은 몇 번이고 기도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겁낼 것 없어. 하늘의 하나님께 희망을 걸면 돼. 하나님은 내 든든한 방패이고 내 힘이셔. 하나님은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야.’ 그 순간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하늘 위에 있고, 만물 가운데 있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야말로 사람이 앙망하고 우러러 받드는 하나님이다. 사람의 방패가 되어 주고, 사람에게 언제나 도움이 되고,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사람의 정신과 마음, 육을 기댈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땅의 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순간 사람의 마음에 더 이상 의지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 달라지느냐? 책망과 훈계를 받고 드러날 때, 좌절을 만날 때 사람의 참된 믿음이 드러난다.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사람의 소위 참된 믿음을 곧바로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에게 의탁한다. 반면 땅의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무엇이냐? 맨 처음 반응은 버리고, 포기하고, 다시는 의지하지 않고,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회피하고, 숨고, 멀리하려 한다. 사람은 이런 기분이 든다.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사람이 깨달은 진리와 소위 참된 믿음, 충성심, 사랑과 순종은 금세 변해서 쉽게 무너진다. 이 모든 환경이 바뀌는 순간, 성육신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도 그에 따라 바뀐다. 사람이 과거에 바쳤던 충성심, 헌신, 대가, 그리고 소위 순종은 그 순간 충성심도, 참된 순종도 아닌 일종의 열정으로 드러난다. 이 열정 안에는 무엇이 뒤섞여 있느냐? 사람의 감정, 인위적인 좋은 것, 그리고 인류의 의기가 뒤섞여 있다. 이 의기는 혈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를 따른다면 반드시 의리를 지킵니다.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힘을 쓰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걸 바쳐야죠.” 이것은 인류의 혈기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인류의 이런 모습은 이 순간에 드러난다. 무엇 때문에 드러나느냐? 그건 바로 사람의 사상 관점 안에서는 이미 이 평범한 사람이 성육신 하나님이자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라는 사실, 이 평범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듯하지만, 사람의 실제 분량, 사람이 깨달은 진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볼 때, 사람은 이 평범한 사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평범한 사람을 그리스도, 하나님으로 여겨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축복과 빛 비춤, 하나님의 인도와 은총을 느낄 때,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할 때 사람은 주관적인 바람에서 하나님이 증거한 이 평범한 사람을 사람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환경이 바뀌었을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앗아 갔을 때, 사람이 참된 인식도 없고 참된 분량도 갖추지 않았을 때는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전부 드러난다. 그리고 사람이 표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실제 태도이다. 이 실제 태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그 근원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안에 담긴 사람의 패괴 성품은 무엇이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이후, 내면에 하나님에 대해 일종의 방어하는 태도가 생기고, 장벽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든 사람은 늘 ‘하나님이 나를 해하려고 하시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단지 장벽만 존재하느냐? 그렇게 간단한 것이냐? 단지 장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다른 본질의 문제다.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지만, 하나님은 패괴 성품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은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냐?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느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느냐? (사람에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해서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 보자. 둘은 설령 말을 해도 겉으로만 몇 마디만 나눌 뿐 속으로 장벽이 생겼다. 이 장벽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 두 가지 다른 관점이 서로 맞지 않은 데다 누구도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지 않아서 관점을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은 이렇게 생겨난다. 그렇다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 말은 정도가 약하고 부적절하지 않으냐? 장벽이 생긴 것은 맞지만, 장벽이라는 단어로 사람 내면의 패괴 성품 문제를 설명한다면 정도가 너무 가볍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뒤로 사탄의 패괴 성품과 패괴된 본질을 지니게 되었고,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느냐? 사탄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느냐? 참된 믿음도 없고, 참된 순종도 없다. 이것이 사탄이다. 사람은 사탄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패괴 성품, 패괴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도, 참된 순종도 없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 참된 순종이 없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하나님을 적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것이 모두 사람의 입맛과 기분에 맞고, 사람의 필요에 맞고, 사람의 기호를 만족시켜서 모든 게 순조롭고 뜻대로 이루어질 때, 사람은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럴 때 하나님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한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덕을 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좋은 말을 몇 마디 한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덕을 보고 아양을 떤다고 한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내뱉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참된 것이겠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겠느냐? (거짓된 것입니다.) 진리에 맞지 않고, 하나님 본질에 맞지 않는 이런 인식은 참된 인식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과 혈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상상이자 관념이다. 이 관념이 무너지고 폭로되고 드러날 때 사람은 좌절한다. 이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람이 전에 하나님은 사랑스럽다느니, 하나님은 어떻게 어떻게 좋다느니 하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람에게서 비판받고 정죄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정반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말과 행동, 본분 이행, 하나님을 섬기는 일, 사람들과 지내는 일 등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고심을 느끼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면, 그럴 때 네 내면의 불순물은 줄어들 것이다. 그때 네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 하나님의 본질은 진실한 것이다.
사람은 징계를 받고 훈계와 책망을 받으면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원망, 오해를 품는다. 이런 게 생겨나면 갑자기 하나님이 사람 뜻에 맞지 않고, 하나님이 생각만큼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다고 느껴진다. ‘다들 하나님이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난 왜 그렇게 느껴지지 않지? 하나님이 사랑스러운 분이라면 마땅히 나를 축복하고 위로해 주셔야 해. 내가 실수했을 때는 망신당하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나한테 귀띔해 주셨어야지! 이런 일들을 모두 나보다 먼저 행하셔서 내게 문제가 생기거나 길을 돌아서 가지 않게 하셨어야 해!’ 이와 같은 관념이나 생각은 사람이 역경을 만났을 때 일제히 마음속에서 고개를 든다. 이때는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때 그렇게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는다. 사람은 책망과 훈계를 받고 역경을 만나서 기분이 안 좋아지면 하나님이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고 그다지 은총을 베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렇게 총애를 받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으셔. 그런데 내가 뭣 하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전에 하나님과 대화할 때는 하나님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무척이나 적극적이고, 언제나 몇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 하고, 늘 못다 한 말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모두 얘기하고 표현하는 등 하나님의 소울메이트가 되고 싶어 했다.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그는 하나님도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고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묻는 말에도 간단하게 한 마디로 얼버무리고,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하나님이 묻는다. “요즘 본분 이행은 어떠냐?” “괜찮습니다.” “뭐 어려운 점은 없느냐?” “가끔 있죠.” “형제자매들과는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느냐?”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흥, 내 일도 제대로 챙기기 힘든데 남들하고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겠어?’ “연약함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것도 귀찮고, 완전히 소극적이고 불평하는 태도다. 사람이 완전 기가 죽고 의기소침해서 원망과 억울함으로 꽉 찬 상태라 한마디도 더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이냐? 지금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고 내적 상태도 착 가라앉아서 누구와 얘기를 나눌 기분이 아닌 것이다. “요즘 기도는 하느냐?”라는 질문에 “기도해도 늘 그 말이 그 말이죠.”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요즘 내적 상태가 안 좋은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진리를 구했느냐?” “저는 다 알아요. 다만 적극적인 마음이 들지 않아요.” “하나님께 오해가 생겼구나. 자신의 문제가 어디서 생겼는지 인식하였느냐? 어떤 패괴 성품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있느냐? 어떤 문제가 너를 이렇게 소극적으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것도 귀찮아하게 됐느냐?” “저도 모르겠어요.” 이건 어떤 태도냐? (소극적이고 대항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 일말의 순종도 없고, 원망과 억울함만 가득하다. 그의 정신세계, 사상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불상, 보살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무슨 짓을 하고 어떻게 살든 그 불상이나 보살은 그저 사람에게 지배받을 뿐 영원히 아무 말이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그를 훈계하면 안 되고, 그에게 상처를 주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하나님은 위로만 해 줘야지 책망하거나 폭로해서는 안 되고, 드러내서도 안 되고, 징계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 성품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려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한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만족해야 하고,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기뻐하고 열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렇게 사람 생각과 다르게 해도 하나님인가? 그래도 내가 그분을 위해 애쓰고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을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데도 진심을 바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따라서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사람의 첫 반응은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폭로한 사람의 문제, 내적 상태, 성품이 도대체 무엇인지 경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인도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이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의 기분, 체면, 연약함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람은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려 하지 않으며 피조물이 되기 싫어한다. 하나님이 순탄한 환경을 마련하여 모든 것이 사람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면 사람은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역경을 마련하여 사람을 징계하고 드러내서 사람이 그 가운데서 공과를 배우고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면 사람은 즉시 하나님을 등지고 피조물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때, 그런 관점과 위치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사람의 기분이 좋고, 내적 상태가 괜찮고, 열정이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상황에서, 책망과 훈계가 닥치고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이 닥칠 때 하나님을 저버리고 싶은 상황에 이르기까지 이 얼마나 큰 변화이냐!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이냐?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피조물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춰야 하는 태도가 대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준행해야 할 원칙은 대체 무엇이냐? 한 사람으로서, 패괴된 인간으로서 도대체 어떤 관점과 위치에서 하나님이 준 모든 것과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대해야 하는 것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를 대체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대해야 하느냐? 사람은 이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이런 일들을 반성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때이든, 네가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든 사실상 사람의 신분은 변하지 않는데, 사람은 영원히 피조물이다. 만약 네가 피조물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네가 매우 패역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너는 성품 변화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에서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네가 기꺼이 피조물이 되려 한다면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겠느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최소한 이 한 가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즉, 언제가 되었든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잘못이 없고, 단지 잘못은 사람에게만 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 있든, 특히 사람이 역경에 처했을 때나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고 폭로할 때 사람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언행과 패괴 성품을 성찰해야지,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의 옳고 그름을 검사하거나 연구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자신의 본래 위치를 지킬 수 있다면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패괴 성품이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문제는 커진다. 패괴 성품이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너는 제멋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기분과 취향, 그리고 감정 내키는 대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과 교류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정죄하며 하나님께 대항하고, 심지어 속으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저버리며,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고 하나님의 행사가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네게 이런 것들이 생겨난다면 아주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위험하다.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지금 네 감정, 의지, 소망, 이상이 얼마나 크든, 지금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든 그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다. 마치 목사가 결혼식 주례를 설 때 두 사람에게 묻는 것과 같다. “당신은 신부(신랑)의 남편(아내)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플 때나, 재난이 닥칠 때나, 가난할 때나 모두 아내(남편)와 함께 이겨 나가겠습니까?” 두 사람 다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하고 가슴이 벅차서 상대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상대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서로 맹세한다. 그 순간의 굳은 맹세는 무엇이냐? 사람의 순간적인 기분과 바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둘에게 그런 인격이 있겠느냐? 모두 그런 인성을 갖추었겠느냐? 그건 미지수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이면 진심을 보게 될 것이다. 3~5년이 지나면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10년이 지나서 이혼하는 사람도 있고, 30년 후 갑자기 헤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처음 바람은 어디로 갔느냐? 굳은 맹세는 어디로 갔느냐? 일찌감치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굳은 맹세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건 단지 바람이나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다. 기분과 바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이번 삶을 함께하고, 함께 생애를 마칠 수 있는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기준을 높게 잡자면, 최소한 두 사람이 모두 인격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고, 올바른 인품을 갖춰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일생 동안 크고 작은 일, 좋은 일, 나쁜 일, 환난, 좌절, 곤란 등 수많은 일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중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십중팔구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는 진심 어린 포용과 인내, 사랑, 이해, 배려 등 인성 안에 담긴 비교적 긍정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고, 두 사람이 서로 부축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없이 그저 언약에만 의지하고, 당시의 이상과 바람, 그리고 그 환상적인 말에만 의지한다면 끝까지 갈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하다. 하나님을 믿는 일도 마찬가지다. 만약 진리를 구하지 않고 그저 열정과 바람에만 의지한다면 결코 굳게 설 수 없고, 절대로 하나님을 길 끝까지 따를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를 때 어떻게 해야 기분대로 하지 않고, 환경과 기분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최소한 무엇을 갖추어야 하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구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의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맹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없으면 안 되지만, 여기에는 단계가 있다. 사람이 믿은 지 1, 2년 되었을 때는 그런 게 없으면 사람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사람에게 열정이 없으면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는 뜨뜻미지근해서 별로 추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만 한다. 이런 사람은 따라오기가 쉽지 않고, 명확한 태도가 없다. 따라서 갓 믿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열정이 필요하다. 이 열정은 사람에게 매우 긍정적인 것을 가져오고, 사람이 진리와 이상(異象), 하나님 사역의 취지를 빠르게 깨달아 얼른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열심히 헌신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고, 진리 실제에도 빨리 진입할 수 있다. 갓 믿었을 때는 이런 열정이 필요하고, 의지와 이상(理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믿은 지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열정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아마 위험할 것이다. 이런 위험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은 늘 상상과 관념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성품 변화의 일을 대하고, 상상과 관념대로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한다. 그러면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을 믿는 동안 평생을 온실에서만 살고, 은총과 축복 속에서만 사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 너는 언젠가는 현실 생활을 마주해야 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각종 환경을 마주해야 한다. 네가 그런 다양한 환경을 마주할 때,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할 때 네 열정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 단지 네가 자제하고, 대가를 치르고, 고통을 겪게 할 뿐,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뜻을 깨닫게 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네가 만약 진리를 구하고 깨닫는다면 얘기가 다르다. 어떻게 다르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열정과 관념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우선 하나님 앞에 와서 구하고 기도하며 진리 원칙을 찾고 순종할 수 있는 이런 의식과 태도가 생긴다. 이런 태도는 무척 중요하고, 이런 의식도 매우 중요하다. 아마 이번에 닥친 시련 속에서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진리에서도 별로 깊어지지 않고, 진리 실제가 과연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시련 속에서 이런 순종의 의식, 순종의 태도를 얻은 덕분에 너는 피조물로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정당한지를 진실로 체험했다. 너는 비록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얻게 하려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런 환경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한 이런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는 네가 피조물의 본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대항하지 않음을 느끼고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너는 마음이 편안한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에게 막연하게 기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땅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게 되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약간의 경외심을 갖는 동시에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되었다. 보아라, 사람이 진리를 구해서 순종할 수 있는 것과 열정에 기대어 의지만 갖고 있는 것, 이 두 가지는 차이가 크지 않으냐? 무척 차이가 크다. 사람이 열정에 기대고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일이 닥쳤을 때는 반항하고, 이치를 따지고, 원망하고, 억울해한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하실까? 난 나이도 많지 않은데 왜 날 달래 주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왜 내가 전에 공을 얼마나 세웠는지 헤아려 주지 않으시지? 어째서 상은 고사하고 벌을 주시지? 내 나이가 겨우 몇 살인데, 내가 뭘 알겠어? 집에서는 부모님도 날 이렇게 대하지 않으셨어.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아기처럼 대해 주셨어. 하나님 집에 온 뒤로 내가 많이 자랐으니 하나님이 날 이렇게 대하시는 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이런 억지를 부린다. 이런 억지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느냐? 만약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이를 깨달았다면 이런 억지가 나올 수 있겠느냐? 만약 사람이 평소에 본분을 이행할 때 이런 진리를 모두 깨닫고, 모두 인식했다면 일이 닥쳤을 때 여전히 이런 원망과 혈기가 생기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평범한 피조물로 생각할 것이고, 나이와 성별, 높고 낮음, 귀천의 구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순종하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의 요구에 귀 기울일 때 사람의 내면에는 순종이 자리한다. 의식적으로 순종할 수 있을 때, 순종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때 사람은 기분이나 정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에게 사랑과 순종, 경외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훈계와 책망을 마주했을 때의 반응들이다. 주된 반응은 무엇이냐?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고 좌절을 겪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와 따스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사람은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한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속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싶어 한다. 하늘의 하나님도 멀리하고 싶어 하고 땅의 하나님도 멀리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두어 마디 책망하면, 다음번에 나를 만날 때는 숨어 버리고 나와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한다. 평소 책망과 훈계를 받지 않을 때는 늘 내 곁에 와서 차도 따라 주고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본다. 기분도 좋고, 바지런하고, 말도 많이 하고, 하나님과 사이도 가깝다. 그러다 책망을 받는 순간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도 따르지 않고, 안부도 묻지 않고, 몇 마디 물어보면 자리를 피하고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전에 중국에 있을 때 어떤 형제자매들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갓 믿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부터 관념이 무척 많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패괴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도 나는 책망할 수가 없었고, 말을 할 때도 부드럽게 해야 했다. 정말 책망하기라도 했다간 관념과 패역을 품을 것이기 때문에 살살 달래면서 상의하고, 진리를 많이 교제해서 그들을 인도해야 했다. 상의도 교제도 없이 곧바로 요구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네가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음식이 너무 짜군요. 다음엔 좀 싱겁게 하도록 해요. 너무 짜지 않게요. 너무 짜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하나님 믿는 사람은 상식에도 신경 써야지 무식해선 안 돼요. 긍정적인 사물은 받아들여야죠. 만약 못 믿겠으면, 짠 음식이 신장을 상하게 하지 않는지 의사한테 물어봐도 돼요.” 이렇게 상의하는 건 그나마 낫다. 만약 네가 “음식을 이렇게 짜게 하면 먹고 죽으라는 겁니까? 뭣 하러 이렇게 짠 것만 먹나요? 너무 짜면 먹을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무식해요? 앞으로는 이렇게 짜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러면 다음번 식사 때는 아예 네 음식에 소금을 빼 버릴 것이다. “왜 이렇게 싱거워요?” “싱거우세요? 너무 짜다면서요? 너무 짜서 신장이 상한다면서요. 그럼 아예 소금을 안 넣으면 되잖아요. 신장도 상하지 않고 말이에요.” 말을 심하게 해선 안 되고 역시 달래며 상의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과 얘기할 때는 방식이나 시간에 신경을 써야 했고, 또 그들의 기분을 살피며 상의해야 했다. 가끔 어쩌다 조금이라도 엄하게 말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속으로 반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속은 달랐다. 평소에 네가 뭘 시키면 재빨리 하다가도 한번 기분이 상하면 그는 뭘 하든 그다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질질 끌면서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가 기분이 안 좋은데 당신에게 잘할 수 있습니까? 기분이 좋을 때야 당신에게도 잘하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대충 하면 되지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 사람은 다루기 어렵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런 존재다. 어처구니가 없고 이치고 뭐고 없다. 그는 반성한 다음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자백하고 통곡했지만, 나중에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책망하고 훈계했더니 역시 그대로였다. 이런 자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냐? 이런 사람은 제멋대로 굴고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역경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요컨대,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분이 상하면 혈기로 하나님을 대한다.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나와 만날 때 책망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도 인상을 찌푸리며 말도 퉁명스럽게 하고 태도도 좋지 않고 물건을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되고 돌려 말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야 한다. 내가 사람처럼 그렇게 빙빙 돌려서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받아들이든 말든 나는 사실대로 말할 것이고,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겉으로는 별 반응이 없지만 속으로는 토라진다. 그러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늘 실수를 저지르면 교회에서는 원칙에 따라 그를 처리해야 한다.
(2) 그리스도가 쫓겨 다니며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하루하루가 위험의 연속이다. 상황이 무척 좋지 않고 언제든 잡혀갈 가능성이 있다. 너희가 모두 쫓겨 다니는 상황을 겪었는데,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니었겠느냐? 우리는 똑같은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피할 수 없다고 하겠다. 나 역시도 그런 상황에서 자주 숨어 다녔다. 하루에 두세 군데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고, 심지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간 적도 있었다. 가장 힘든 순간은 갈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할 때였다. 낮에 어느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밤에는 어디가 안전할지 알 수가 없었다. 때로는 간신히 지낼 곳을 찾았는데, 큰 붉은 용이 하도 조사를 다녀서 다음 날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어. 이건 하나님이 치르신 대가이고,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 중 하나야. 이게 바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거구나. 이건 진짜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소 이런 고통을 겪고 계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사역하며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힘든 일임을 알 수 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치르는 대가에 감사할 것이다. 인성이 아주 형편없고, 악독하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자들, 그리고 호기심에서, 혹은 기적을 보고 싶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그들은 이 장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지낼 곳이 없다고요?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이고,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군요. 내일 어디서 지내야 할지 본인도 모르고, 지금 몸 둘 곳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겠어요?’ 상황이 위험할수록 그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완전히 버리지 않고 마지막 한 수는 남겨 뒀지요. 어때요? 당신은 돌아갈 집이 없죠! 난 당신이 결국 이렇게 ‘머리 둘 곳 없는’ 지경에 이를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당신이 지낼 곳을 알아봐 드려야겠네요.’ 사람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이 부류의 사람이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장면을 본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갈 때,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겠느냐? 그들이 그래도 계속 따르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본질을 부정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정할 것이다. 줄행랑을 치고 저 살 길을 찾아 떠나지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 과거에 설교를 얼마나 들었든, 그런 설교들은 그의 마음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진짜라고 믿고,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다고 믿는다. ‘이 사람은 사람이 맞아. 하나님의 신분 본질이 어디 있다는 거야? 하나님인데도 이렇게 피해 숨어 다니고, 사탄에게 쫓겨 머리 둘 곳도 없고, 몸 둘 곳도 없다고? 하나님이라면 쫓길 때는 사람들 앞에서 사라지는 요술이라도 부려서 아무한테도 안 보이게 몸을 숨길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하나님이지!’ 중국의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어떤 형제자매들은 내가 온 것을 보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나를 접대하고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줄행랑을 치고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뒤에서 비웃으며 관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그런 자들이 바로 불신파, 적그리스도이다. 그런 자들은 내가 몸을 숨길 곳이 없을 때, 그 일을 어떻게 인식하겠느냐?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그리스도도 위험해서 잡혀가게 생겼어. 어쩜, 교회도 끝장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도 끝이구나. 이번 사역은 틀렸어. 하나님이 증거한 것도 틀렸어. 이건 하나님이 증거한 게 아니야. 그러니 나도 얼른 내 삶을 살고 돈이나 벌러 가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행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쫓겨 몸을 숨길 곳, 머리 둘 곳이 없을 때,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과 같이 고통을 견디면서 하나님과 함께 이런 상황에서 교회 사역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방관자가 되어 우스갯거리로 삼고 심지어 사람들을 선동해서 무너뜨리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역할을 한다. 더 심한 경우, 내가 숨을 데가 없고 머무를 데가 없는 것을 알고 그 틈에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하나님 집 재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도 이렇게 생각하는 불신파와 적그리스도들이 적지 않았다. ‘교회는 끝났고, 하나님 사역도 끝장이야. 사탄에게 완전히 무너졌어. 우리도 얼른 도망치자. 얼른 흩어지자!’ 이들 불신파, 적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을 마주하든 그들의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고, 불신파의 민낯을 드러낸다. 교회에 약간이라도 변고가 생기고 힘든 상황이 닥치면 바로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려 하고, 형제자매들이 서로 흩어지고 물러나서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는 이 흐름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고, 하나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몰골이다. 이는 좋지 않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이다.
(3) 그리스도에게 관념이 생겼을 때의 태도
또 한 가지는 적그리스도가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겼을 때의 태도이다. 예를 들어, 성육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씀을 할 때 사람의 분위기가 강하고, 하나님의 분위기는 전혀 보이지 않으면,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반발심이 생기고, 관념과 정죄가 생긴다. ‘어쩌면 어디로 보나 하나님 같은 구석은 하나도 없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 같을까? 사람 같은데도 하나님일 수 있을까? 만약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따르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 그는 그리스도가 말씀하고 일하는 것에 관념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생활, 차림새에도 관념이 생기고, 그리스도가 말하는 방식, 어투, 어휘 사용 등에도 모두 관념이 생긴다. 관념이 생겼을 때 그는 어떻게 대하느냐? 속으로 그 관념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관념을 붙들고 있는 것이 바로 관건을 붙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건’은 너무나 시기적절하게 온다. 이 관념이 생기면 약점이 생긴 것이고, 약점이 있으면 일이 손쉬워진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관념을 가진 것을 약점을 잡은 것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성육신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적그리스도는 왜 그런 마음을 먹습니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 사탄 무리가 하나님의 대업이 성공하길 바라겠느냐, 바라지 않겠느냐?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바라지 않느냐?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적그리스도 무리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이 사실은 그들 마음속에 무척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를 폭로하고 심판하는 말씀은 모두 이런 적그리스도, 악인들을 정죄하는 것이고 그들에 대한 정죄와 심판, 저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속으로 견디기 힘들고 불편해한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은 다 나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있어.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겠네. 즉, 도태되고 버려져야 할 것들이지.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데, 그럼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치만 사실상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성육신한 하나님이셔. 그리고 말씀도 정말 많이 하시고 따르는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이걸 어떡한담?’ 그는 이 일로 속을 끓이면서 자기가 얻지 못하면 남도 얻지 못하기를 바란다. 남들이 얻는데 자기는 얻지 못하면 그는 속으로 몹시 미워하고 기분이 언짢아한다. 그는 이 성육신이 하나님이 아니기를 바라고,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이 사역이 가짜이기를, 하나님이 한 게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평정을 찾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 이 사람이 성육신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을 따르는 이 사람들은 다 속은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언젠가는 흩어져야 해. 이들이 흩어지면 아무도 얻지 못하겠지. 그러면 내가 얻지 못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이런 마음이다. 자기가 못 얻으면 남들도 얻지 못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도 얻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한 사역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한 모든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정죄받지 않게 되고, 아무것도 못 얻어도 만족스럽고 편안하며, 그 일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관념이 없겠느냐? 관념이 있을 경우에는 해결하느냐?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그에게 관념이 생기기는 매우 쉽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나는 당신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그 말씀을 하게 된 동기가 뭔지, 그 말씀은 어디에서 온 건지를 봅니다. 당신이 어디서 들었거나 배운 겁니까, 아니면 누가 얘기하라고 시킨 겁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보고하고 일러바친 건 아닙니까? 누구를 폭로하는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연구한다. 그렇다면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속으로 반발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발하고, 진리를 증오하며, 이러한 본성 본질을 가지고 설교를 듣기 때문에 그가 듣는 것은 이론과 도리를 제외하면 전부 관념이다. 어떤 관념이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군. 때로는 우스갯소리도 하는데, 그건 경건하지 않아! 헐후어를 쓸 때도 있는데, 이것도 그다지 엄숙하지가 않고 말이야! 말씀하실 때 언변이 뛰어나지 않고, 수준도 높지 않아! 어떤 때는 말씀에 사용하는 표현을 보면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하던데 대학을 나온 거야 만 거야? 어떤 때는 어떤 대상을 겨냥해서 말씀하시는데,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이지? 누가 고자질한 게 아닐까? 누가 얘기했을까? 그리스도는 말씀하실 때 왜 맨날 내 얘기만 하시지? 하루 종일 나만 응시하고 지켜보고 계신가? 하루 종일 사람 흠만 찾으시나? 그리스도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성육신이 말씀하실 때는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처럼 우레가 치는 것 같은 무게감이 없어. 그가 나타내는 것들은 어쩜 그렇게 사람 같을까? 사람이 맞아. 암만 봐도 사람이야. 성육신에게는 연약함이 있을까, 없을까? 속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실까? 사람과 교류할 때 처세술이 있을까, 없을까?” 이런 관념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머릿속으로 궁리하는 것은 하나같이 진리와 무관한 것들이고, 전부 사탄의 사상과 논리, 처세 철학이다. 그의 내면에는 사악함이 가득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와 성품이 가득하다. 그는 하나님을 연구하러 온 것이지 진리를 구하고 얻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관념은 언제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다. 그가 관찰할 때도 관념이 생기고, 연구할 때도 관념이 생기고, 판단하고 정죄할 때도 관념이 형성되는데, 그는 그것들을 한사코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가 성육신에게서 인성의 일면을 볼 때 관념이 생겨나고, 신성의 일면을 볼 때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또 관념이 생겨난다. 그리스도,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순종도 아니고,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 반대편에 서서 그리스도의 눈빛과 속마음, 행동거지를 관망하고 연구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그리스도가 말씀할 때의 어조와 말투, 어휘 사용, 그리고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은 모든 것에 귀를 바짝 세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관망하고 연구할 때, 그의 태도는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은 뒤 그리스도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는 이 사람을 연구하려 한다. 이 사람을 낱낱이 연구해서 알아내려 한다. 연구해서 무엇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냐? 바로 이 사람이 과연 어디가 하나님 같은지 연구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같으면 받아들이지만,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 같지 않으면 그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심정으로 성육신에 대해 계속 관념을 품은 채 놓지 않고 혹은 복을 받을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얼른 기회를 찾아 떠난다.
적그리스도에게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의 적그리스도 본질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는 본질 때문에 그는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받쳐 들고 보면서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다가도 성육신 하나님을 마주했을 때 첫눈에 하나님 같지 않으면 즉시 관념이 생기고 태도가 달라진다. 성육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 말씀만 받쳐 들고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또 막연한 환상과 복받으려는 속셈을 품고 억지로 하나님 집에서 힘이나 좀 들이고 본분이나 좀 이행하면서 하나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의 머릿속은 온통 관념으로 가득해서, 설령 책망을 받지 않더라도 본분을 이행하려는 열의가 아마 크게 꺾일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과 성육신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과 성육신 하나님을 따로 떼어 놓은 채,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으로,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성육신 하나님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을 때, 자신의 관념에 어긋날 때는 서둘러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강제로 자신의 관념을 억누르고, 자신의 관념을 봉쇄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으로 여겨 받든다. 마치 관념이 해결된 것 같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 도사린 그리스도에 대한 불복과 불평, 경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일에서 계속해서 관념이 생기고, 더 나아가 관념을 한사코 붙잡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 관념이 없을 때는 연구하고 분석하지만, 관념이 있을 때는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도 모자라 관념을 한사코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는 관념이 있어도 해결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이런 자는 사탄에 해당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나님을 대하는 적그리스도에게 관념이 있을 때 드러내는 태도이다.
(4) 발탁되거나 교체되었을 때의 태도
교회에서 자질도 좀 있고, 사역 능력도 좀 갖춘 어떤 사람들은 발탁되었을 때, 매우 열정적이고 본분 이행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책임감을 갖고, 흔쾌히 대가를 치르려 하며, 충성심도 있다. 하지만 사역을 감당하지 못해 해임되고 지위가 없어지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지위가 있을 때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제자매는 어떻습니다. 우리 그 집은 인테리어를 할 때가 됐고요. 우리 마당도 정리해야 하고요….” 뭐든 ‘우리’라고 한다. 발탁될 때, 그는 하나님 집 사람이다. 그럴 때 그는 마치 하나님과 한마음, 한집안 식구인 것처럼 호흡을 맞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하나님 집 사역을 처리하며, 하나님과 평등하게 지낼 수 있다. 발탁되고 중용될 때 그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책임감을 느낀다. 또 나에게 말하든 아니면 형제자매에게 말하든 말끝마다 ‘우리’라고 한다. 언뜻 듣기에는 그 사람이 퍽이나 괜찮고, 마음씨도 좋으며, 따뜻한 것 같다. 하나님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어떤 일이든 그렇게 마음을 쓰며 책임지고, 모든 일에 앞장서려 하는 등 진리를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대가를 치르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체될 때도 그가 그렇게 말하겠느냐? 교체되자마자 그런 마음은 싹 사라지고, 그런 태도도 자취를 감추며, 더는 ‘우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또 무슨 일을 맡겨도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다. 그의 생각은 어떤 것이냐? ‘전에는 당신이 저를 발탁해서 지위도 있었고, 당신과 한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지위가 없어져서 한집안 식구가 아니니 스스로 알아서 하세요. 어떻게 하든 저한테 상의하지 말고, 제가 알게 하지도 마세요. 이제 저랑은 상관없으니까요. 저야 당신 심부름이나 하고 말이나 전해 주면 그만이죠. 시키는 일은 하겠지만 당신과는 이제 한마음이 아닙니다.’ 그는 너를 외부인 취급한다. 일을 시키면 마치 삯일을 해 주는 것처럼 겉으로만 건성으로 할 뿐이다. 전에는 다섯 가지를 처리했다면 지금은 한두 가지만 처리하고, 형식적으로 대충대충, 표면적인 일만 좀 하고 끝이다. 왜 그렇겠느냐? 그는 말한다. “전에는 당신과 한마음이어서 이것저것 도와드렸습니다. 당신 일을 제 일이라고, 우리 공동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당신을 대신해서 처리했죠. 그런데 결국 당신은 말 한마디로 저를 교체시켰습니다. 제 체면도 생각 안 해 주고요! 그랬으면서 어떻게 저더러 당신 대신 일하라고 하십니까? 당신이 다시 저를 발탁해서 지위를 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관두세요. 저한테 다시 일을 시키고 싶어도 전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저를 쓰려면 명예와 지위를 줘야 합니다. 지위도 안 주면서 말로만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건 무슨 명분입니까? 뭐라고 설명이라도 해 줘야죠!” 이제 그는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일을 시켜도 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마음과 뜻을 다하지 않는다. 태도가 변한 것이다. 내가, 혹은 하나님 집에서 어떤 일을 시켜도 그는 그것을 별도의 일, 외부인의 일로 치부한다. 만약 가서 한다면 그건 너의 체면을 크게 세워 준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일을 안 하자니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가서 하자니 마음이 내키지가 않아서 형식적으로만 하고 끝이다. 그는 왜 그렇게 하겠느냐? 그의 생각은 이렇다. ‘전에는 당신을 100퍼센트 신뢰했습니다. 당신의 일을 제 일로 생각하며 처리했죠. 그런데 당신은 안 쓰겠다고 하고는 바로 저를 교체시켰습니다. 그 일 때문에 저는 마음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당신은 저를 푸대접한 겁니다. 좋아요. 당신이 저에게 인을 베풀지 않았으니 저더러 의가 없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다시 저를 쓴다고 해도 저는 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 우리 사이는 이미 끊어졌으니까요. 저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렇게 부려 먹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누굽니까?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남들에게 농락당하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교체되어 지위를 잃을 때, 이렇게 태도가 확 달라진다. 지위가 있을 때, 그는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하면서 ‘우리 집’을 입에 달고 살지만, 하나님 집 일을 자기 집 일로 생각하며 처리하지 않았다. 교체되어 지위를 잃고 난 뒤에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라고 시켜도 원하지 않으며, 그와 상의해야 하고, 심지어는 설명하고 명분을 줘야 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에 당신은 저를 교체했죠. 쓰지 않겠다고 하고는 바로 교체하더군요. 이번에 저한테 뭘 시키려면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 직접 와서 얘기하든가 성육신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셔야지, 그게 아니라면 얘기할 필요도 없어요!” 이 얼마나 대단한 허세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을 쓰겠느냐? (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인간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네게 아무리 뛰어난 재주, 대단한 수완이 있더라도, 아무리 리더십이 있더라도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악인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시는 겁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게 아니다. 이는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이자 사람을 쓰는 원칙이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손에 쥐게 한다면 형제자매와 교회에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나쁜 일을 하겠느냐?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가 적그리스도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무리해서라도 발탁해서 봉사하도록 쓸 수 있지만, 적그리스도로 드러난 뒤에도 하나님 집에서 그를 발탁하겠느냐?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는 혼자 착각하고 김칫국부터 들이켠다. 일부 적그리스도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흥, 하나님 집은 내가 없으면 안 될걸. 내가 없으면 그 사역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지. 누가 날 대신할 수 있겠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도발하려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하나님 집에 그런 적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 사역이 술술 풀리는지 아닌지, 완성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지금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은 온갖 적그리스도, 악인들을 교회에서 제명하고 출교한 일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큰 관계가 있다! 적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는 그들을 제명하고 출교하고 제한했기 때문에 하나님 집의 사역이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직도 잘난 체하고 원망하고 있다! 뭐가 그리 원망스럽단 말이냐? 너는 자신이 재주 있고, 머리 좋고, 자질 있고, 사역 능력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하나님 집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 이들은 사탄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그들이 없으면 하나님 선민들의 교회 생활, 본분 이행 생활, 일상생활은 더욱 안정되고, 순조로워지고, 평온해질 것이다. 그들은 이걸 모른다. 이 적그리스도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하나님 집에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나님 집에 자기가 없으면 사역이 전개되지 못하고, 각종 업무 사역이 진행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은 공의와 진리가 권세를 잡는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왜 모르겠느냐? 이런 간단한 일을 어째서 적그리스도는 깨닫지 못하겠느냐? 이건 적그리스도에게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본질이 있어서 그렇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하고, 진리가 뭔지 모르고, 긍정적인 사물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온갖 사악하고 악독한 모습이 좋고 옳은 것이라고, 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이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자신만이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잡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이며, 모든 적그리스도는 정죄되고 버림받고 도태될 대상이다. 하나님 집에 그들의 자리는 없을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은사와 자질, 수완이 좀 있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데 능한 적그리스도들이 있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자신들이 당연히 발탁되고 중용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정죄되고 제한되고 버려졌으며, 심지어 교회에서 이미 제명되고 출교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기처럼 ‘고귀한’ 인물, 이렇게 수완이 대단하고 재주도 뛰어난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곤두박질치고 하나님 집에서 버림받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며, 도무지 납득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그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사탄에게 이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사탄에게 이치를 논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와 같다. 사탄을 형용하는 말은 오직 한마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게 뭐가 좋습니까? 거짓말 좀 하고 사람을 속이는 게 뭐가 나쁘죠? 교활하고 간사한 게 뭐가 나쁩니까? 충성심이 없는 게 뭐가 나쁜가요? 얼렁뚱땅 넘기고 대충 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하나님을 판단하는 게 뭐가 나쁜가요?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있으면 어때서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뭐가 나쁘죠? 무슨 큰 죄를 짓는 건가요? 이건 무슨 원칙 문제라고도 할 수 없죠!”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수완 있는 사람이 독립 왕국을 세우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닌가요? 이 세상에서는 큰 물고기가 새우를 잡아먹고, 큰 새우가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죠. 수완이 있으면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게 당연한데, 이게 뭐가 나쁜가요? 수완이 좋은 만큼 권력도 큰 거고, 권력이 크면 그만큼 많은 사람을 다스릴 수 있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음란한 게 뭐가 나쁜가요? 음란한 게 어때서요? 사악한 흐름을 따르는 게 뭐가 나쁘죠?” 이런 말들을 들으니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역겹습니다.) 단지 역겹기만 하냐?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은 이렇게 느낀다. ‘똑같이 인두겁을 쓰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인 사물을 혐오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걸까?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혐오하는 거지? 사람 간에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진리를 싫어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는 그 사람들은 왜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왜 부정적인 사물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심지어 보물처럼 생각하는 거지? 왜 그런 부정적인 사물의 사악함과 역겨움을 인식하지 못할까?’ 사람은 속으로 개탄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사람은 한편으로는 역겨움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할 말을 잃는다. 그들의 본성은 정말 고치기 어렵고, 바뀌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와 사탄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인류이지 짐승이나 마귀 부류가 아니다. 적그리스도 부류가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마귀요 짐승으로, 그들은 인류로 분류되지 못한다. 이제 이 일에 대해 분명히 이해가 되었느냐?
(5) 교회가 처한 각종 상황을 대하는 태도
적그리스도가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는 항목에서 방금 모두 몇 가지를 교제했느냐? 그중 하나가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였다. 또 뭐가 있었느냐? (성육신 하나님께 관념이 생겼을 때, 발탁되거나 교체되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쫓겨 다니는 것을 마주했을 때입니다.) 모두 네 가지였다. 교제를 계속해 보자.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리를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의 계산과 의도,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세력을 좋아하고 권세를 좋아한다. 따라서 그들은 관망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믿는다. 어떻게 관망하느냐? 한편으로는 믿으면서 한편으로는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인원이 늘고 있는지, 복음 사역의 확장 상황은 어떤지, 순탄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 집의 위세가 꾸준히 강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힘쓰는 사람,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회적 배경과 교육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사회에서의 신분과 지위는 어떤지 살펴본다. 이렇게 관찰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 집의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게다가 더 많은 사람이 가정과 직장, 미래를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일들을 목격하는 순간 그들은 나중에 복을 받을 때 자기도 몫을 챙기려면 더는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집 사역에 몸을 던지고, 본분 이행의 대열에 뛰어들어서 그중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 집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미래와 운명을 한 번도 포기한 적 없고, 여전히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멈추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는 이런 야심과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도 하나님 집의 지위와 명망이 계속 올라감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력을 다하여 자기 미래와 운명을 위해 따져 보고, 저울질하고, 경영하는 한편, 하나님 집의 발전 상황이 어떤지, 국내외 위세가 어떤지, 인원은 점차 늘고 있는지, 교회 규모는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지, 사회 유명 인사들과 연락이 되는지, 서양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졌는지 등을 관망한다. 그들은 이런 것을 계속해서 관망하며 알아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 사역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늘 자기 미래와 운명을 저울질하며 교회의 발전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홈페이지에서 이런 정보들을 찾는 한편, 교회 안에서는 이런 소식들을 알아보고 다니는 것이다. 하나님 집의 해외 사역이 순조롭게 확장되어 전망이 점차 밝아지고, 서양에서의 사역이 점차 크게 확장되고 추세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안심이 된다. 안심한다고 해서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이 안심하면서 성육신인 그리스도를 약간 더 ‘존중’하고 우러러보게 되었을 뿐, 진심으로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중국에서 사역할 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육신 하나님은 잡혀갈까? 집권당의 손아귀에 넘어갈까?’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할 때 속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얼마간 멸시했다. 성육신 하나님이 머물 만한 곳이나 머리 둘 곳 없을 때도 많고, 쫓기느라 여기저기 숨어 지낼 때도 많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과 억지 ‘존중’은 철저히 무너졌다. 그런데 성육신 하나님, 즉 그리스도가 인류가 동경하는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성육신 하나님을 내심 부러워했다. 여기서는 존중이 아닌 부러움이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이 서양에서 인간들에게 버림받고, 비방당하고, 정죄되고, 판단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적그리스도의 내면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하나님인데 어째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나요? 당신은 하나님인데 어째서 교계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에 대한 그 많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건가요? 당신은 왜 나서서 해명하지 않습니까? 변호인단이라도 꾸려야지요! 인터넷상의 당신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말, 교계에서 퍼트리는 당신에 대한 유언비어는 듣기 거북할 지경이라고요! 당신을 따르는 우리가 다 부끄럽고 그런 일을 입에 올리기도 민망해요. 당신은 동양에서 정죄되고, 서양에서도 정죄되고, 교계와 인류,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우리가 다 창피해요.’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이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창피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기 눈에 보이는, 속으로 생각하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멸시와 동정심도 생긴다. 이 동정심은 억지로 갖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동정심이 생겼겠느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큰 사역을 하면서 당신은 사사로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시니, 사심 없이 바치는 것이겠죠.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큰 고통과 굴욕을 당하시는 겁니까? 이치대로라면 당신은 좋은 사람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큰 굴욕과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정말 딱하세요. 어려운 일이죠. 속으로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그는 그리스도에게 이 정도의 동정심을 갖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저라면 그렇게 큰 고통은 감당 못 할 것 같아요. 변호해 줄 사람들을 찾아야죠. 변호인단을 꾸려서 인터넷에 떠도는, 사실과 다른 소문은 없애고, 또 교계를 찾아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서 과연 누가 하나님인지,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보여 줄 겁니다. 비방과 정죄를 일삼는 그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징벌받게 해서 본때를 보여 줘야죠. 그러면 그들도 감히 그런 짓을 못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겁니까? 어째서 지금껏 자신을 위해 해명 한마디 없습니까? 그럴 능력이 없고 그럴 배짱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그럴 용기가 없는 겁니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설마 겁쟁이인가요? 아, 당신은 너무 많은 일을 가슴에 묻으시는 것 같아요. 이런 큰 억울함을 당해도 꾹 참으면서 사역을 확장하고, 또 노파심에 교회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공급하시지만 그들은 관념이나 품고 거역하기만 합니다. 속으로 얼마나 괴로우시겠어요! 이 모든 걸 견디다니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고 동정할 만한 사람이군요.’ 그의 동정심은 이런 식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동정심이다. 지금까지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면서 그가 한 ‘좋은 일’이란 이게 전부다. 고작 이 정도의 ‘좋은 일’을 어떻게 했느냐? 제대로 하긴 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현생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와 이런 고통을 함께 겪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정죄받고 버림받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가 받는 이 모든 고통을 그가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부정하기 위한 빌미와 증거로 삼았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모든 고통을 겪고자 하는 염원과 태도가 없고, 방관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가 받는 이 모든 고통을 관찰하고 이 인류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관찰하면서 그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하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복음 사역이 차츰 온 인류에게 확장되어 전망이 밝을 땐, 조금씩 성육신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 일말의 존경과 부러움을 갖는다. 동시에 그는 전력을 다해 하나님 집에 접근하고자 하며, 하나님 집의 일원, 하나님 사역을 확장하는 일원이 되고자 한다. 그뿐이겠느냐? 이렇게 간단하겠느냐? 아니다. 그는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이 확장되는 상황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집과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것이다. 만약 인류 사이에서, 특히 서양의 민족 중에서 “이 말씀들은 정말 권병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군요!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보이니 이 평범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이 도(道)가 바로 참도인 게 틀림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은근히 기뻐한다. ‘다행히 난 떠나지 않았는데, 정말 참도가 맞구나! 봐, 서양인들도 성육신 하나님이 어디 계신다고 하잖아. 그분 말씀을 많이 듣고, 당장 가서 설교를 들어야겠어!’ 그 순간 적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리고, 자신의 심령을 깨끗이 씻어 주는 것만 같아서 소중히 여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그리고 인류 사이에서 하나님 집의 확장 사역이 이따금 좌초될 때, 혹은 하나님 집의 사역이 교란이나 지장을 받고 외부 세력의 간섭을 받을 때, 나아가 하나님 집이 곤경에 부딪힐 때 적그리스도의 마음에 또다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지? 말씀하셨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까? 하나님 선민들 중 겁먹은 사람은 없나? 하나님 집을 떠난 사람은 없나? 바깥세상의 유명 인사, 원로 인사 중에 하나님 집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고, 팔 걷고 나서 주는 사람은 없나? 없다고 하던데, 그럼 어떡하나? 하나님의 교회가 곧 끝나는 건 아닐까? 나도 얼른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크게 파문이 일고 있지 않느냐? 이럴 때 그가 하나님 설교를 다시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공허한 말이나 고상한 말은 이제 그만 하세요. 당신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집이 언제든지 이 세상에 점령당하는 마당에 당신이 하는 그 말씀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게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집의 위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으니 하나님 집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지겠죠.’ 내 말도 듣기 싫어하는데 나를 존경할 리가 있겠느냐? 동정할 리가 있겠느냐? (그럴 리 없습니다.) 남은 게 무엇이냐? 조롱하는 것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험담하고 헐뜯으며, 하나님 집을 조롱한다. “보니까 곧 큰일 나겠네. 당신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당신의 그 진리들이 소용이 있나요? 당신의 말이 무슨 소용이죠? 어떤가요? 일이 닥치지 않았나요?” 마귀의 모습이 튀어나온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은 하나같이 마귀가 하는 짓이 아니냐?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없이 사악하기 짝이 없다. 뒤통수를 친다! 하나님 집의 밥을 먹고,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 누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누리면서 일만 생기면 팔이 밖으로 굽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고 하나님 집을 조롱한다. 이런 게 마귀가 아니면 무엇이냐? 영락없는 마귀다! 그는 하나님 집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성육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마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처럼 군다. 하나님 집이 사탄에게 둘러싸여 정죄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는다. 하늘을 받치고 우뚝 선 사나이가 발아래 황금이 있다고 어찌 남에게 무릎을 꿇겠느냐? 그는 조롱하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목청과 어조를 높여 얘기하며 관리처럼 굴기 시작한다. 정상이 아니다. 마귀 모습이 튀어나오면서 순식간에 변한다. 너희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언제면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 (영원히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너무나 진실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탄의 족속이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탄에게 속하는 자이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하는 본성 본질이고, 사탄에게 속하는 적그리스도 부류의 추악한 민낯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집을 비웃고 성육신 하나님을 조롱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부정할 거리를 준비하고 수집하며, 언제 어디서나 팔을 밖으로 굽혀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먹으려 한다. 하나님 집에 문제가 생길 때가 바로 그에게는 가장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다. 반면 형제자매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집 사역의 모든 질서가 바로 서 있으면 그는 괴롭고 속이 쓰리다. 하나님 집에 어서 일이 터지기를, 그리고 하나님 집의 사역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암초를 만나 좌초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들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모두가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등, 모든 게 순조로울 때 적그리스도는 심기가 불편해진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행할 때, 모두가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그리스도를 크게 높일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높일 때, 그때가 적그리스도의 마음이 가장 괴로울 때이고, 그가 가장 크게 심판받고 고통받는 때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집에서 온갖 소식을 알아보고 다닌다. 그런데 만약 오랫동안 하나님 집의 복음 사역 확장이 어떤지, 하나님 집의 각종 업무 사역이 어떻게 진전되고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해외 인원이 늘고 있는지, 교회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지, 각국에 교회가 세워졌는지 등 소식을 듣지 못하고, 또한 뜻이 있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집에 더 많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그들은 속으로 성육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의미하고 흥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성육신 하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하고, 심지어 시끌벅적하고 세력이 큰 종파가 있으면 거기로 가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따금 하나님 집에 관한 좋은 소식, 이를테면 형제자매들의 간증 영상이 어떤 인권단체의 눈에 띄어 크게 주목받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는 속으로 좋아하고, 희망과 기쁨에 휩싸인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이 어느 유명 단체에 주목을 받아 보도가 되면 그는 더욱 좋아하고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평범한 사람이 대단한가 봐. 일이 이루어지려나 보군!” 만약 운 좋게 교회 이름이 어느 큰 인물, 심지어 지도자에 의해 거론되기라도 하면 적그리스도는 더욱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번 생에 내가 내린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선택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일이야. 이제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속으로 그분을 받들어 모실 거야. 모 지도자가 이 하나님을 존경하니까 말이야. 그 사람이 존경하는데 나도 존경해야지. 이 하나님은 지도자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정받았어. 그럼 내가 그분을 믿고 따르는 데 무슨 유감이 있을까? 더더욱 그분을 끝까지 따라야 하지 않겠어? 이제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떠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좋은 태도를 보여야지. 고생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고, 무슨 일이든 형제자매들과 많이 의논하고,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지. 나중에 교회가 확대되고 명성이 높아지면 높은 직함을 얻고 출세할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할수록 흐뭇하기만 하다. ‘너무나 탁월하고 확실한 선택이야! 난 어쩜 이리 똑똑할까? 전에는 떠나고 싶었는데, 그때는 왜 그리 바보 같았는지! 젊어서 충동적이고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내리기가 쉬웠지.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온건해지고 숨길 줄도 알다 보니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구나. 떠나지 않기를 잘했고, 그 소문들을 믿지 않기를 잘했어. 소문에 미혹되거나 좌지우지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너무 위험했어! 이제는 좀 조심해야지. 이분이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 잘해 드리자!’ 그는 순간적인 흥분과 충동으로 건강식품이나 좋은 물건들을 사서 바쳤다. 윗면에는 “사랑하는 하나님께 바칩니다. 물건을 몇 가지 넣었습니다.”라고 적혀 있고, 밑면에는 “이에 삼가 바칩니다. OOO 올림, OOOO년 OO월 OO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선물로 무척 귀하지만, 그 이면에는 숨은 뜻이 있고, 사연이 있다. 너희는 이 말을 듣고 “이제 보니 하나님은 사람이 바친 제물을 이렇게 이해하시는구나.”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물건이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일부 사람들이 물건을 바치는 데는 이면에 바로 이런 속셈, 이런 배경의 영향과 부추김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객관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모든 일을 저울질할 때 ‘이익’이라는 단어를 가장 우선시한다.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무슨 일이든 나름대로 저울질을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각각의 일반 신도들은 대부분 하나님 집 각종 사역의 진전 상황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무적인 일들을 알아보는 것은 진리 추구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네가 알아도 소용이 없다. 알았다고 해서 네가 생명과 진리를 갖추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네가 분량이 작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고, 네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건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런 일을 물고 늘어진다. 그들은 이런 일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하며 알아보고 수집하는데, 수집한 다음에는 자기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사방에 퍼트린다. 그는 형제자매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나는 여간해서 그런 일을 알아보지 않는다. 관계자를 만날 경우 얘기는 좀 나누겠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알아보러 다니지는 않는다. 다만 몇몇 사역이 대체 어떻게 진행되고, 사역의 진전 상황은 어떤지, 무슨 문제나 빈틈은 없는지 알아야 할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만 가서 알아본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궁금하거나 관심이 간다고 해서 그런 일을 알아보지 않는다. 내가 그런 상황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단지 사역과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소식의 출처, 호기심과는 관계가 없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에 그런 일을 파고들기를 좋아하며, 그가 이런 일을 파고드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들은 겉면의 이런 형편, 환경을 이용해, 그리고 교회가 각각의 시기에, 또 각 종파에서, 각 종족 집단에서 처한 상황을 이용해 하나님이 한 사역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이는 어떤 작자냐? 이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분명히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외부에서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교회가 각국에서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자세히 알아보고 있다. 이런 자는 엄연히 불신파이다. 딴생각을 품고 있는 불신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아마 다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적그리스도의 각종 본질을 폭로할 때마다 일부 사람들을 정죄한다. 이들은 폭로당하면 꼬리를 감추고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특히 이번에 이렇게 교제하면 몇몇은 더 이상 알아보러 다닐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떠도는 소문을 알아볼 것이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묻고 다니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몰래 알아볼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 교회에 대한 이방인이나 종파, 그리고 서방 국가들의 평가나 의견을 알아보려고 머리를 짜낼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말이다.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눈이 뒤집혀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다.
방금 우리가 폭로한 것은 적그리스도가 교회가 처한 상황과 하나님 사역의 확장 상황을 통해 교회와 성육신 하나님을 대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하는 모습의 한 측면이다. 내가 말한 이런 일이 교회에 존재하지 않느냐? 이것이 심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언급할 만한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일을 교제하는 가치는 무엇이냐? 어떤 사람들이 교제를 듣고 다시는 감히 이런 상황을 묻고 다니지 않고, 교회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냐? 겨우 이만한 가치밖에 없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폭로하는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여기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이냐? 지금 생각해 보지 않았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에 다시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런 일은 너희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당장은 너희가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수집하고 말을 정리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고, 아직 제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깨달은 것들은 너무나 적고 보잘것없다. 어떤 일의 본질과 경위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교회, 하나님 집,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며,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은 바로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자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똑같이 취급될 수 있으며, 하나의 개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으로 성육신했을 때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교회, 하나님 집, 하나님(즉 그리스도), 이 셋이 쉽게 분리된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거야.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거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은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래. 이건 어찌 보면 사람의 시중을 든다는 뜻도 되지 않나? 사람에게 일을 해 준다는 뜻도 되지 않나?’ 많은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이 세 가지는 확실히 나누기도 어렵고, 또한 같이 연결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목표로 하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개념이다. 즉,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교회라는 단체, 칭호를 위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교회의 상사는 누구냐? 당연히 하늘의 하나님이며,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형제자매라는 이 칭호, 이 집단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물론 본분 이행이라는 범주로 귀결되어 역시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교회, 형제자매, 하나님 집 사이에는 등호가 성립되며, 모두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이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든 일을 처리하든, 그들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교회라는 무형의 기구이기도 하고, 형제자매라는 유형의 집단이기도 하고, 나아가 하늘의 그 막연하고도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이렇게 세 가지다. 성육신 하나님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볼 수도 있고, 형제자매의 최고 지도자라는 역할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 집의 대변인, 대리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목표로 하는 대상에 대해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 예를 들어, 그에게 형제자매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게 하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하면 그는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혹은 그에게 교회를 위해, 하나님 집을 위해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면 그는 좋아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그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분부하거나 맡기면 그는 속으로 실망한다.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건 사람을 위해 일하러 온 게 아니야. 본분을 이행하러 온 거지. 난 아무개의 시중을 드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개를 위해 봉사하고 힘쓰는 사람도 아니라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교회를 위해 일을 좀 해 달라고 하거나 하나님 집을 위해, 형제자매를 위해 일을 좀 해 달라고 하면 아주 흔쾌히 받아들이며 거기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해. 이건 내 본분이고 내 책임이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 달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런 이론적 근거는 온데간데없다. 그는 속으로 내키지 않아 하고 언짢아하며 하기 싫어한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거라면 괜찮지. 나는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는 거라면, 형제자매는 모두 하나님 집에 속하고 하나님에게 속하는 사람들이니 그것도 괜찮아.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거라고 한다면, 하나님 집이라는 칭호는 신성하고, 위대하고, 고상하니까 내가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은 정당하고, 체면도 서고, 명분도 있어. 하지만 당신처럼 하찮은 사람을 위해 일하는 건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건가? 명분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아. 이건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고 사역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는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건 사역도 아니고, 본분 이행도 아니고, 형제자매를 위해 혜택을 도모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나보고 당신을 위해 해 달라고 하는데, 좋습니다. 간단하게 해 드리지요. 하지만 떨떠름하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건 명분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니까요! 당신을 위해 일하는 걸 누가 기억하고 알겠습니까? 누가 좋게 봐 줍니까? 상이나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도 본분 이행에 해당합니까? 진리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까?’ 그는 속으로 내키지가 않고, 그 일이 번거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받아들이면 안 되는 임무를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난처해하며 마지못해 그 일을 한다. 동시에 속으로는 이익만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입으로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무척 하기 싫은 티를 낸다. 나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내 개인적인 일은 억지로 시키지 않을 테니 내키면 하고, 안 그럼 다른 사람을 알아봐서 하겠다는 사람에게 시키겠다고 했다. 간단하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 따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마음에 드는,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고,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나님 집에서 믿을 만하고 착실한 인성에 업무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겠느냐? (찾기 쉽습니다.) 내가 비록 뒤에서 아주 가깝게 지내거나 사이 좋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사적으로 교류하며 정이 특히 깊은 사람도 없지만, 30년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고 들은 것은 전부 내가 한 말이다. 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든 내면 깊은 곳으로든, 아니면 표면적으로든 입으로든, 모두 이 사람을 믿고 따른다. 비록 내가 직접적으로 누구에게 특별한 이로운 점이나 약속을 준 적도 없고, 직접적으로 누구를 칭찬하거나 발탁한 적도 없지만, 이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따를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라도 하나님 말씀을 적잖이 먹고 마셨다. 내가 얘기한 그 말에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든, 사람됨의 도리를 깨달았든 많이 얻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나는 너희에게 신세 진 게 없지 않으냐? 이 말은 하면 안 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해야겠다. 너희는 나에게 빚을 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너희 중 누군가에게 일을 좀 해 달라고 했을 때 너희가 싫어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든, 내가 너희에게 일을 맡길 때 너희를 달래고, 너희 비위를 맞추고, 또 너희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고 약속을 해 줄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을 위해 일하려니 왜 이리 김이 샐까요? 콩고물 떨어지는 건 고사하고, 피곤하기만 하고 정말 귀찮아 죽겠어요!” 이 말을 들으니 너희는 어떤 기분이냐? (화가 납니다.) 만약 한 평범한 서민이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데, 한 고위 관리가 그의 집을 방문해서 일을 맡긴다면 그는 어떻게든 빌붙으려 할 것이다. 어찌나 기쁘고 영광스러운지,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이렇게 대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대하지 않고, 왜 그렇게 해내지 못하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건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가 지위가 있는 사탄과는 서로 합할 수 있으면서 그리스도는 속으로 멸시하고, 반발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고, 저버린다.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라고 하면 그는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고 걸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렇게 많이 얻었으면서도, 그에게 일어서서 그리스도와 평등하게 대화하며 어울리라고 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 그는 마귀에 속하는 자이지 사람이 아니다. 나중에 내가 또 사람을 시켜 일을 부탁했는데, 이 사람은 그래도 괜찮았다. 말을 전한 사람이 얘기했다. “이번 사람은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거지, 이깟 일이 뭐라고. 그건 당연한 거니 말을 전해서 직접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는 이런 말 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들으니 어떤 느낌이냐? 마음이 차갑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것이냐? (그건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첨하려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일을 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선심 쓰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인격은 어떠냐? (인격이 저열하고 양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성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얘기만 하면 감동받은 나머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건 무한한 감격이다! 이런 주제를 꺼낼 때마다 그 사람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요동을 친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이 성육신 하나님을 위해 뭘 좀 하라고 하면 그는 큰 치욕을 느끼며 속으로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건 어찌 된 일이냐? (그가 믿는 대상은 막연한 하나님이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위대하게 여기고, 성육신 하나님은 하찮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형제자매에게는 구두도 닦아 주고, 양말도 빨아 주고, 심지어 빨래도 기꺼이 해 주면서 그리스도에게 뭔가를 좀 해 달라고 했더니 싫어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어쩜 저럴 수 있죠? 형제자매 일은 해 주면서 그리스도 일은 하기 싫어하다니,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하나 맡기면서 하나님 집 원칙에 따라, 교회 규정에 따라 하라고 하면 그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제자매들한테 물어봐야겠어요.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익을 얻게 형제자매들을 고려해야죠.” 예를 들어,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과일나무 심는 일을 맡기고, 이 일대에 어떤 과일을 심는 게 적합한지 시장에 가서 좀 알아보라고 했다. 현지 기후와 토양에도 맞아야 하고, 현지 사람들은 어떤 과일을 영양가가 높다고 생각하는지 알아본 다음, 그런 과일을 선택해서 적당량을 심자고 했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으니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얼른 시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시행해야 하느냐?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세부 내용을 이해한 다음 시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말대로 시행하는 것이다. 현지 기후에 맞춰야 하고, 또 어떤 과일들이 영양가가 있는지도 봐야 한다. 너희가 볼 때 내가 꼼꼼하고도 실제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시행했겠느냐? 현지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의견을 발표하라고 했다. 다들 어떤 과일을 좋아하는지 물어본 다음, 모두가 좋아하는 과일에 대해 통계를 내서 수량과 비율에 따라 과일나무를 심었다. 이런 식으로 시행했다. 그가 형제자매의 의견을 널리 구한 것은 이 형제자매라는 집단, 형제자매라는 칭호가 그의 마음속에서 지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형제자매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가 본분을 이행하는 취지이자 목표인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형제자매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 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곧 형제자매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제자매가 기뻐하고 만족하면 하나님 역시 기뻐하고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한 대표이며, 진리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대변인이고, 결정권이 있고, 하나님 집의 대들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 형제자매라는 이 칭호와 집단을 떠날 수 없고, 어느 누가 하나님 집에서 일하고 본분을 이행하든 유일한 봉사 대상은 곧 형제자매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시행했고 내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구체적으로 일러 줘도 그에게는 공허한 도리와 구호에 불과했다. 그는 형제자매가 충분히 의견을 발표하도록 충분한 발언권과 결정권을 주어서 하나님 집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말하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그저 떠벌리기만 하고 형식만 갖추면 그만이죠. 나머지는 다 형제자매들 일이고 당신과 상관없으니 그냥 옆에 가만 계세요! 저희가 뭘 먹고 마시든 당신과 관계없으니 당신은 돈만 내면 됩니다. 저희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이 있는 것, 이것이 지극히 높은 진리죠. 하나님 집에 봉사하고, 형제자매에게 봉사해서 형제자매를 기쁘게 하고 충분한 인권과 자유를 누리게 해 주는 것이 최고의 진리라고요.’ 이는 어떤 인간이냐? 이건 적그리스도의 소행이 아니냐?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첫 번째 모습이 바로 진리를 정죄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이 실행할 수 있고 굳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과 구호를 따로 찾아내 시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진리를 위배하고,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저버린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 드러났는데, 이런 자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아이고, 형제자매가 화난 것 좀 보세요.” “아이고, 형제자매가 좋아하는 것 좀 보세요.” “아이고, 형제자매들이 타격받은 것 좀 보세요. 형제자매가 정말 괴로워해요.” 그의 마음에서 형제자매의 지위가 어쩜 그리 높으냐?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형제자매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사랑하다니, 네 가슴은 얼마나 넓어야 하겠느냐? 그럼 좋다. 내가 얘기하는 대로 해 봐라. 네가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면 나 한 사람 늘어나도 별거 아닐 테니 당연히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는 오히려 내가 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모든 형제자매를 받아들일 수 있고, 교회 사람 하나하나를 다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그리스도만큼은 못 받아들인다. 이건 어떤 인간이냐? 이게 사람이냐?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될 자격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는 어떻게 성질을 정해야 하느냐? (마귀,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일을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형제자매가 참여하도록 하고, 형제자매가 의견을 발표하게 하고, 형제자매가 리더를 선출하고 교체하도록 하고, 형제자매가 결정하게 하니까, 그는 형제자매가 하나님 집에서 지극히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이는 하나님 집의 민주적 선거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민주적 선거의 원칙은 무엇이냐? 형제자매가 민주적 선거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냐? 사람의 패괴 성품에 내맡기는 것이냐? 마귀 사탄이 권력을 잡게 하는 것이냐? 아니다. 형제자매가 마음속으로 깨달은 진리가 권세를 잡게 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라는 이 천성적으로 패괴된 사람이 권력을 잡게 하는 것도, 혈기가 권력을 잡게 하는 것도, 사람의 관념이 권력을 잡게 하는 것도, 사람의 거역과 대적이 권력을 잡게 하는 것도, 사람의 사악한 성품이 권력을 잡게 하는 것도 아닌, 진리가 권세를 잡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어떤 교회는 선거에서 여전히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사람이 선출되거나 교회 리더 일꾼이 의사 결정한 일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그건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 선거의 원칙은 진리 원칙에 의해 규정한 것이고,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적그리스도,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작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집에서는 형제자매들이 크게 높임을 받고, 높이 받들어지며, 형제자매라는 이 칭호, 이 집단은 하나님 눈에 존귀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형제자매가 존귀하겠느냐? 형제자매에게 진리가 있겠느냐? 대부분 형제자매들은 진리 실제를 갖추지 않았고, 일 처리에도 아무런 원칙이 없다. 또한, 하나님 집의 각 사역을 엉망으로 하기도 한다. 만약 상부에서 관여해서 문제를 제때 바로잡아 해결하지 않으면 이들 형제자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는커녕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을 숱하게 저지를 것이다. 이들에게 진리가 있느냐? 크게 높임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적그리스도는 여전히 이렇게 하는 것이냐? 그것이 바로 천성이다. 그가 진리를 부정할 구실을 찾고, 그리스도를 정죄할 구실을 찾는 것, 이게 바로 천성이 아니냐? 그가 사탄 본성을 지니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주로 적그리스도가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에 관해 교제하고 있다. 우리가 교제한 각각의 항목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기분과 관계가 있는데,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사실상 이 기분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냐? 패괴 성품,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상이 생기고, 다양한 사상의 지배 아래 다양한 관념, 관점, 각도, 입장이 생긴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양한 기분이 생겨난다. 다양한 기분이 생긴 뒤에는 하늘의 하나님을 대하고 땅의 하나님인 그리스도를 대하는 다양한 방식과 방법, 태도가 형성된다. 이 방식과 방법, 태도를 보면, 진리를 싫어하고 적대시하며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정죄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매번 진리에 관계되고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과 신분에 관계될 때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원수라는 역할을 맡는다. 일이 없을 때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 이름을 외치고, 심지어 입버릇처럼 ‘하나님’, ‘하나님’ 하며 불러 댄다. 무슨 얘기를 하건 그 칭호부터 붙인다. “하나님, 보십시오.” “하나님, 그거 아세요?” “하나님, 들어 보세요.” “하나님, 구하려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일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등등을 외친다. ‘하나님’ 하고 외치는 순간에도 그들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해 관념이 가득하고, 적대감과 경멸이 가득하다. 교회와 하나님 집, 그리스도가 다양한 환경을 마주하고, 다양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수시로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요구할 때나 웃는 낯으로 대할 때, 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상냥하고 온순한 듯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엄하게 대하거나 그들을 책망하고 훈계할 때, 그들은 반감과 혐오, 경멸의 태도로 그리스도를 대하며 심지어 멀리하고 저버리기까지 한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상과 복을 받게 하겠노라고 명확하게 약속할 때, 그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고 심지어 그런 이득을 얻기 위해 빌붙어서 환심을 사고 아첨하는 등 자신들의 존엄성과 인격을 아낌없이 희생한다. 하지만 어떤 태도를 지니든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참된 수용과 믿음이 없고, 참된 순종은 더더욱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언제까지나 멀리하고 정죄하고, 관망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저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 또 그들의 기분이 어떻든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가끔 뜻하지 않게 바뀌거나 돌아서기도 할지라도 그건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결국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그리스도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진심으로 이 평범한 사람을 자신의 주님,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적그리스도가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하는 몇 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 교제했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바로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했던 질문인데, 이 일들을 폭로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이 일들을 폭로하는 가치를 간단하게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면, 하나는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그 안에 담긴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거기서 인류의 패괴된 면면의 모습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인식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추어야 할 태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너는 네가 지금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여기에 아직도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으며, 많은 것이 사탄에게 속하는 것으로,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불순물이기에 정결케 돼야 한다. 여기에는 긍정적, 부정적 가치가 모두 존재하는데, 적어도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면 네게 이런 것들이 부정적인 것이고,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모습임을 알게 해 준다. 긍정적인 면은 바로 네게 하나님이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이 네가 이렇게 대하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 말은 곧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논리에 맞고 인정에 부합해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네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네가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좋으면 밀고 나가는 거고,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올곧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만약 다른 일을 대하는 것이라면 이런 너의 태도를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할 때 그러는 것은 아주 위험하니,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사람이 유일하게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듣기 좋은 말이든 아니면 듣기에 거북하고 거슬리는 말이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그를 진리로 받아들여 자신을 바꾸고 정결케 해야 한다. 이런 일을 폭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소극적인 면에서, 적극적인 면에서, 또 긍정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면에서 다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진리이고 창조주이십니다. 성육신으로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고 나타나시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리이므로 저희는 무조건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들 이 말에 아멘이냐? (아멘.) 나도 아멘이다. 무조건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리다. 하나님이 어떤 형식과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사람들과 생활하든, 하나님이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는 사람이 가장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다. 다음으로, 하나의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는 바로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다. 그 밖에 사람이 깨닫지 못한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것이냐? 머리를 꽉 채워서 정신적 공허함을 해결하려는 것이냐? 앞으로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냐? 정화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진리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 사람은 알아야 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패괴 성품은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느냐? 명망 있고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인류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째서 겉보기엔 똑같이 사람인데 성육신한 그리스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냐? 사람은 언어와 사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냐?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진리, 길, 생명이시지만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사람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육신 하나님의 전부를 받아들여야만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될 수 있다. 그 말은 곧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고, 진리를 얻어야 사람의 패괴 성품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네가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도리가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느냐? 지식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느냐? 관념과 상상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느냐? 해결할 수 없다. 성육신한 실제의 하나님만이 너를 도와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네가 어떤 명인이나 위인, 높은 사람을 숭배해도 소용이 없다. 어느 하나 너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고, 너를 구해 줄 수 없다. 또한, 무슨 공부를 하거나 업무, 지식을 배워도 네 현실적인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너는 말한다. “나는 그 평범한 사람이 하찮게 보여.” 그렇다면 너의 그 관점은 바뀌어야 한다. 사실이 그러하며, 하나님은 그렇게 한다. 하나님을 네 생명으로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고 출현하든 하나님은 진리이며, 이건 영락없는 사실이고 절대적인 사실임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한 후에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성육신을 대하고 이 평범한 사람을 대해야 하겠느냐? 여기에 구할 만한 진리가 있다.
적그리스도가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하는 모습들을 폭로하는 이면에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이냐? 너희가 몇 가지를 정리하면 윤곽이 뚜렷하게 잡히면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저희는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고, 이것은 진리입니다. 둘째,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춰야 할 태도는 바로 무조건적인 순종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시고, 사람은 오직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육신 하나님의 전부를 받아들여야만 패괴 성품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고 출현하더라도 하나님은 진리이며, 이는 영락없는 사실임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은 네 가지 모두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식이 어떤 진리 원칙에 관계되는지, 사람은 막상 이런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 기존에 깨달은 진리는 도리로 변해서 적용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이 도리를 아무리 많이 이해해도 소용없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역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2020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