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다
참고 복음 전파 방면의 진리를 보충하다
지난 몇 번의 예배에서 이야기했던 주제는 합격한 본분 이행 방면에 관한 것으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과 인원을 분류해 보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가 있느냐? (첫 번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 두 번째는 교회 각급 리더 일꾼, 세 번째는 각종 특수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네 번째는 보통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다섯 번째는 여가 시간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여섯 번째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총 여섯 부류가 있다. 지난번에는 첫 번째 부류에 대해 다루었다. 그것은 복음 전파 본분의 여러 원칙과 진리에 관한 내용으로, 여기에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방면에 관계된 내용, 즉 주의 사항, 관련된 원칙과 진리, 경계해야 할 것,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쉽게 발생하는 실수와 치우친 부분을 다루었다. 너희는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설교를 들은 후에 그 안의 주요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너희가 그 주제의 주요 내용을 파악하고, 관련된 진리를 마음에 새긴 다음,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런 것을 자신의 실제와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고, 자신의 실행 길이 되게 한다면, 너희는 내가 교제한 이 내용들을 완전히 소화한 것이다. 내가 말씀 한 편을 교제했는데 만약 너희가 대략적인 내용, 몇 가지 사건이나 이야기만 기억하고, 거기서 말하는 진리와 원칙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을 이야기하려 하는지도 모른다면, 이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느냐?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그 안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겠느냐? 지난번 교제한 핵심 내용에 대해 누가 한번 이야기해 보겠느냐? (저희가 정리한 내용은 일곱 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입니다. 둘째는 복음 전파 본분의 본질은 무엇인지입니다. 셋째는 복음 전파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그 내면의 관점입니다. 넷째는 복음 전파의 구체적인 실행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 원칙에 어떤 사람이 부합하고 어떤 사람이 부합하지 않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섯째는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입니다. 여섯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무단이탈하여 도주한 결과에 관한 것입니다. 일곱째는 복음 전파에 헌신한 역대 성도들에 관한 내용, 저희 또한 본분을 이행할 눈앞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서둘러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난번에 교제한 몇 가지 내용의 핵심을 대체로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아주 훌륭하다. 또 빠진 것은 없느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사람의 관점을 바로잡아 복음 전파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이 거부해서는 안 되는 책임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선민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복음 전파는 모든 사람의 직책이자 의무로, 이 역시 한 가지 내용이다. 너희는 이 진리를 교제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사람의 치우친 이해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치우쳤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은 너희가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럼 나는 왜 이 진리를 교제하려고 하겠느냐? 적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측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복음 전파에 대한 모든 사람의 치우친 이해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이 복음 전파에 관한 일을 치우치게 이해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지금 특수한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니까 복음 전파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그러니 복음 전파 측면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와 원칙,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 등은 모두 나와 무관하고, 나는 그러한 것을 깨달을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면 멍하니 있으면서 전혀 진지하게 구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으며, 듣고 난 후에도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알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줄곧 리더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자질도, 사역 능력도 갖추고 있죠. 타고난 리더감이랄까요. 아무래도 하나님이 제게 주신 본분과 이번 생에 제가 해야 할 사명은 리더 자리에 있는 것인 듯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함의인즉슨, 복음 전파의 일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예배 때 지난번 교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요약해 보라고 하면 한참 동안 노트를 뒤적이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기억력이 나빠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많아서 머리에 공간이 없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나는 모든 사람이 알도록 경고하는 바이다. 복음 전파는 어떤 부류의 사람 혹은 어떤 집단 사람들의 특수한 직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이의 직책이다. 왜 복음 전파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느냐? 왜 사람은 이런 진리를 알아야 하겠느냐? 이는 한 피조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나이와 관계없이 남녀노소 막론하고 복음 전파는 사람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이자 직책이다. 이 사명이 너에게 임해 네가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고 심지어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마땅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네가 깨달아야 할 진리이다. 이것은 간단한 도리가 아니다. 이는 진리다. 왜 이를 진리라고 하겠느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장소와 공간이 바뀌어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와 가치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진다고 해서 변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영원한 것이며, 피조물이라면 모두 이를 마땅히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영원한 진리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행하는 본분은 복음 전파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도 복음 전파 방면의 진리는 사람이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異象) 방면의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깨달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토대를 다져 주는 것으로, 생명 진입에도 이롭다. 또한, 네가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이방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니 네게는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 네가 복음 전파에 관한 진리를 깨달으면 속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사역하셔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나의 직책이야. 언제 어디서든, 내 신분과 역할이 무엇이든, 배우가 되더라도 내게는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어. 지금 내가 교회 리더여도 복음을 전하러 갈 의무가 있는 거야. 지금 이행하는 본분이 무엇이든 내게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어. 기회가 있거나 여가 시간이 있으면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해. 이건 내가 마땅히 다해야 하는 책임이야.’ 지금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지금 고정적인 본분이 있고, 고정적인 업무와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중이야.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나와 관계없어.’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책임을 미루고 사명을 회피하는 태도이고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누구든 복음 전파에 책임감이 없다면 이것은 비양심적이고 비이성적인 모습이 아니겠느냐? 네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협력하고 책임지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대충 하는 것인데, 이는 취해서는 안 될 태도이다.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업무나 분야에 관계된 본분을 이행하든 최종적으로 달성해야 할 주된 효과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이 사역해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만약 최소한의 것조차 할 수 없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은 몇 년 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무엇을 수확했느냐? 무엇을 얻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느냐?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하면서 업무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하면 입을 열지 못하고, 어떤 측면의 진리도 교제하지 못하니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억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사역의 이상(異象)도,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적어도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참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으며, 어떤 깨달음이나 인식, 이해도 없다. 그러니 네가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했겠느냐? 이러한 것에 모두 도달하지 못했으니 네게는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방금 이야기하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복음 전파는 모든 하나님 선민의 직책이자 의무이다. 이 측면의 진리를 끝까지 이야기했을 때, 모두가 이해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대가를 치르든,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든, 생명을 바칠 수 있든 사실 이런 것은 다 표면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도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 분량과 생명이 자랄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네가 하나님의 사역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각종 진리를 점차 깨닫게 되고, 복음을 전해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너의 부담이 점차 분명해지고, 이 본분을 짊어지려는 네 의지도 점점 커지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몇 년간 교회에서 리더 사역을 하였는데 교회를 이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복음 전파 본분에 대한 느낌과 감동, 부담이 점점 더 사라진다면 그는 본분을 어떻게 이행한 것이냐?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이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냐? 사람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나고 이런 내적 상태로 살 수 있다면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람이 몇 년간 진리를 추구한 적도 없고,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않고, 큰 붉은 용과 같은 관료 간부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일에 대해 아무런 부담도,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이 결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했든 그는 자기 분량이 무척 크다고, 자기는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릴 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복음 전파에 대해 말하면 뒷걸음질을 친다. 그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면서 참도를 구하고 알아보려는 사람을 만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며, 어디에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지도, 얻지도 못해 하나님을 증거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직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네 본분 범위 안에 있는 일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고 얻었다면,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을 만났을 때 왜 할 말이 없겠느냐? 이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종종 이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부담이 없는 것이다. 부담이 없는 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부담이 없는데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설사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지라도 충성할 수 있겠느냐? 합격점에 이를 수 있겠느냐? 부담이 없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복음 전파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야 하고, 복음 전파와 관련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지금 너희가 하는 갖가지 사역은 모두 복음 전파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전부 복음 전파 범위 안에 속한 사역이다. 또 전부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 사역을 확장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정복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에는 복 있게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마지막에 어떤 성과를 내야겠느냐?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얻게 해야 합니다.) 왜 이런 목적에 이르러야 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이 방면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없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고 공허한 것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꺼내 놓고 분명하고 명백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것이 진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복음 전파 방면의 진리에 공을 들이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이런 부담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왜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게 해야겠느냐? 왜 이렇게 해야 하겠느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죠. 그러니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위 문제의 본질적인 답은 아니다. 그럼 이 문제의 본질적인 답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을 가진 자들을 얻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을 가진 자들을 얻고자 하므로 복음 확장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한 무리의 사람을 얻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널리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최대한도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최대한도로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원칙 중 하나이지 이 문제의 답이 아니다. 이 단계 사역이 시작될 때부터 줄곧 말했듯이, 하나님이 이번에 와서 사역하는 것은 시대를 여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고 옛 시대를 끝맺는 것, 즉 하나님나라시대를 가져오고 은혜시대를 끝맺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모두 이 사실을 보았다.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고 진리를 선포하여 인류를 심판하며, 인류를 정결케 하고 구원한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수많은 나라에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인류는 이미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서 나와 더 이상 성경을 보거나 십자가 아래에서 살아가거나 구주 예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한편, 하나님이 현재 선포한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인생의 생존 원칙과 방식,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럼 말세 복음과 하나님의 새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은 여전히 어떤 시대에 살고 있겠느냐? 그들은 여전히 은혜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너희의 직책은 무엇이냐? 그들을 은혜시대에서 데리고 나와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기만 해서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몇 마디 전하는 것만으로 되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너희 모두가 부담을 갖고 복음 전파라는 부탁을 맡아 하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한편,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확장해야 한다. 확장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 후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너희의 체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며, 그들을 이끌어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너희처럼 새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을 들은 후 받아들이고 따르는 너희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전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고자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지금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이다. 하나님은 한 무리의 사람이나 극소수의 사람, 혹은 어떤 작은 민족을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려고 한다. 그럼 이 목적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널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널리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다양한 방식과 길을 통해 널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널리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느냐? (사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 그러려면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만약 사람이 마음속으로 항상 낡은 것들을 지키고 치우친 것들을 품으며 낡은 규례와 행동 방식을 고수하는 반면, 복음 사역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발탁되어 쓰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너희의 사상을 바꿔 줘야 하고, 너희가 어떤 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보고 그 측면에 관련된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 말해 줘야 한다. 너희가 아무리 무감각하고 우둔할지라도 나는 한결같이 쉬지 않고 말해 주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너희가 이행해야 할 본분임을, 너희가 살아가는 이번 생의 의무이자 사명임을 알게 해야 한다. 네가 듣고 나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또 계속 말해 줘야 한다. 질릴 정도로 들었다고 해도 네가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나는 말해 줘야 한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란 하나님이 선포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요구이며, 새 시대의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진리 실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가감 없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인 후 순종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의무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해가 되느냐? 어떤 이들은 “아이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는데, 이는 저희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이야기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관계가 없겠느냐?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 이 일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사람은 피조물이다. ‘창조’와 ‘피조’는 어떤 관계냐? 주동과 피동 관계이고,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의 관계이다. 창조주의 뜻을 네게 나타낸 이상, 어떤 태도로 대해야겠느냐?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다. 너는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어떤 대가도 불사하고 협력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협력에 진리를 구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이 포함되지 않겠느냐? 모두 포함된다. 네가 하나님의 요구와 부탁을 알게 된 이상, 그것은 네 사명과 연관된다. 그것은 네 본분이다. 너는 알게 된 이상,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요구와 부탁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고,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너와 무관하다면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하나님 집의 사람도 아니다. 예를 들어 보겠다. 네 부모는 너를 낳아 오랫동안 키워 주었다. 너는 집에서 먹고 거하며 집안 돈을 썼다. 그런데 집에 일이 생겼을 때 너와 무관하다며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달아난다면, 이는 어떤 작자겠느냐? 외부인이라고 한다면 많이 봐준 것이다. 사실 너는 불효막심한 놈, 사람의 탈을 쓴 금수, 짐승만도 못한 작자이다. 하나님의 뜻이 네게 나타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였고, 나는 이 말들을 너희에게 먼저 베풀어 주어 듣게 했다. 너희는 알아듣고 이해했다. 이제 내 뜻과 너희에 대한 요구 또한 알려 주려 한다. 너희는 내 사역과 말, 내가 이루려는 일을 전파하여 전 인류가 내 음성을 듣게 해야 한다. 또 내 나라의 복음을 확장하여 전 인류가 하루빨리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나라시대에 들어서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요구이다.” 이 일에 대해 듣고 어떤 느낌이 들어야 하겠느냐? 너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겠느냐? 어떤 선택을 해야겠느냐?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어떻게 다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짐이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진실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너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은 저에게 복음 전파의 책임을 맡기셨으니 이는 저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저는 깨달은 진리가 몹시 적지만, 최선을 다해 이 부탁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저는 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간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는 다 당신의 축복입니다. 그러니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증거하여 당신의 부탁을 완수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지니면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에게 명확히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람이 거부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자 의무이며, 평생의 본분이라고, 이는 모든 피조물의 본분이라고 말이다. 이 말에 하나님의 분부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당부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 사람이 실행해야 할 길과 원칙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내가 전부 몇 가지를 말했느냐?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분부와 당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저희가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네 번째는 사람이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입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네 가지를 말했다. 그럼 이제 그 네 가지에 관한 세부 내용을 교제하겠다.
첫 번째, 하나님의 분부이다. 그럼 하나님의 분부는 무엇이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미 왔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하였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시대를 바꾸어 옛 시대를 끝내고, 인류를 이끌고 새 시대로 들어갈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하나님의 뜻이 복음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복음 확장에는 최종적인 목적과 결과가 있다.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오시어 새로운 사역을 하셨다는 것, 옛 시대를 끝내고 전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전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럼 이것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느냐?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면 이 시대는 변하게 된다.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느냐? 다시 읊어 보아라. (하나님은 시대를 바꾸고자 하십니다. 옛 시대를 끝내고,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 중 한마디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모두 적었느냐? (네.) 세 번째,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이다. 이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복음 전파는 모든 피조물의 본분이자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이다. 이 진리 속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복음 전파의 본분을 받아들인 후 이 말에서 실행의 길과 원칙을 찾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 말은 진리이다. 이 말은 무엇이었느냐? (복음 전파는 모든 피조물의 본분이자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본분이자 사명이어야 한다. 본분과 사명을 어떻게 보아야겠느냐? 본분은 이행해야 할 책임이고, 이행해야 할 책임은 사람의 본분이다. 하지만 사명은 다르다. 사명은 책임보다 더 막중하고 적절하고 깊은 의미를 지니며, 무게가 있다. 적어 두었느냐? (적었습니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너희는 내가 말한 내용을 전부 문자로 기록해 두어야 마음속으로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적지 않고 이렇게 듣기만 한다면 인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만을 좀 이해한다면 어떤 측면의 진리든 정의와 개념, 윤곽만을 알게 될 뿐 그런 진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세부 내용을 어떻게 실행하고 적용해야 할지 등은 하나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처럼 많은 사람이 도리를 말하면 두세 시간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너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이 닥쳤을 때 진리로 해결하라고, 너희가 체험하고 이해한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로 해결하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제 네 번째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네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입니다.) 이 원칙과 길은 무엇에 근거하여 정해졌겠느냐? 두 가지에 근거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이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게 됐는데 그러기 싫다고 해 보자. 하나님은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 실행 원칙은 무엇이어야 하겠느냐? 네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느냐? 가감 없이, 마땅히 순종하고 받아들이되 이유를 묻지 말고 분석하거나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순종이다. 이는 진리를 실행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정의하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으로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의사이고, 하나님이 행사하는 목적이자 근원, 출발점이다. 영적인 말로는 뜻, 이상(異象)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네게 알려 준 것은 하나님이 네게 큰 방향을 주어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게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부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원칙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네가 구체적인 실행의 길과 방향을 알 수 있겠느냐?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말하면, 머리가 좋고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은 받아들인 후 바로 세부 내용을 찾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한다. 하지만 머리가 안 돌아가고 마음과 영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이 쉽다고 생각해서 세부 내용을 알려 주기도 전에 일을 처리하러 간다. 이는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이고, 너무 맹목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또 너는 반드시 그 부탁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너는 마땅히 받아들이고 헤아려야 하며, 나아가 순종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 선민과 하나님 집 사역에 도움이 되는지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원칙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후에는 바로 해당 측면의 본분과 관련된 진리를 깨닫고자 구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았으면 진리 실행의 원칙과 길을 확정해야 할 것이다. 원칙이란 무엇이냐? 구체적으로 말해서, 원칙이란 진리를 실행하여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내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게 어떤 물건을 사러 가게 시켰다고 해 보자. 그 일의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너는 구매할 물건의 규격이 얼마인지, 어떤 모델인지, 품질은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하는지, 가격은 적절한지 등을 알아야 한다. 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실행 원칙을 알게 된다. 원칙은 너에게 사이즈와 범위를 알려 주니 그 범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물건의 규격과 품질, 가격 등 측면에서 기본 원칙을 파악했다는 것은 네가 그 일의 요구 기준을 파악했다는 뜻이며, 이는 네가 기본적으로 실행할 줄 안다는 의미가 된다. 진리를 실행할 때는 반드시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원칙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이다. 본분 이행의 기본 원칙을 파악했다는 것은 그 본분을 이행할 때의 요구 기준을 파악했다는 의미이며, 원칙을 파악했다는 것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럼 여기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기초로 하겠느냐?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달은 것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이 요구한 말씀 한마디만 알았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깨달았다면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 밖에,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본분 이행의 원칙과 실행의 길도 파악해야 한다. 본분 이행의 원칙을 파악하면 적용할 수 있다. 때로는 지혜를 좀 발휘해야 하는데, 그래야 본분을 이행하면서 확실히 성과를 낼 수 있다. 원칙을 파악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만약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의 뜻이 섞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대로 처리하며,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 부합할 수 있다면, 네 본분 이행은 완벽하게 합격한 것이다. 설령 성과 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네 본분 이행이 완전히 원칙에 부합한다면, 충성을 다하고 전력을 다한 것에 속한다면 그 본분 이행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으로, 너는 이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여 이룬 성과이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을 깨달아야 사람이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을 파악하는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냐? (우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런 다음 가감 없이, 마땅히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실행과 태도이다. 그다음으로 무엇을 깨달아야 하겠느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세부 내용이 바로 원칙과 길이다. 사람이 실행해야 할 원칙과 길을 파악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그다음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주요 내용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 안에 포함된 세부적인 내용이다.
첫 번째 부류인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자. 오늘도 일부 내용을 보충했다. 그 이유는 지난번에 교제했던 주요 내용을 제시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 측면 진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네가 지금 하는 모든 일, 네가 지금 이행하는 모든 본분이 이 방향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그 바탕 위에서 행해지고, 복음 전파에 관계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비록 너는 복음 전파의 전선에서 복음 전파 대상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모두 복음 사역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이 방면의 진리를 더 분명하고 명백하게 인식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오늘 보충한 내용을 통해 너희가 이 복음 전파 방면의 본분의 무게와 중요성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앞으로 이 방면의 진리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겠느냐? 복음을 확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이 옛 시대를 끝내고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와 옛 시대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들어가도록 이끌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누구나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도 알고 있지만 복음을 전할 기운도 없고, 협력할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너는 자신이 피조물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일깨우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전하는 절실한 마음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인성이 없는 모습이다. 너는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 너의 주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헤아림도 없다. 이를 두고 인성이 없다고 하며, 이런 사람은 양심이 없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리더 일꾼에 대한 정의 및 그 생성 이유
이제 두 번째 부류인 리더 일꾼의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이 부류의 인원은 수가 많지는 않지만, 사역 성질로 볼 때 무척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또 리더 일꾼의 본분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 역시 무척 많은데,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보다도 많다. 어째서 많다고 하겠느냐? 이 측면의 본분은 관계되는 범위가 무척 넓다. 대외적으로 복음 사역을 확장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들을 양육하고 공급하며, 교회 생활을 잘해 나가야 한다. 이 밖에도 교회 사무를 처리해야 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리더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더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어떤 실행 원칙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요구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더욱 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 일꾼이 되는 것은 다양한 진리의 실행과 진입 및 사람이 걸어가는 길 등 많은 측면과 관련이 있다. 또 리더 일꾼이 되는 것은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생명 진입과 더 큰 관계가 있는데, 성품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리더 사역을 잘 해낼 수 있는지와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는 더욱 광범위하고 많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되든, 결국 몇 가지 큰 분야가 있으니 항목별로 조금씩 이야기하겠다. 그럼 너희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일단 정의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자. 어째서 정의를 해야겠느냐? 정의는 위치 정립과 같다. 즉, 사람이 이 본분 이행의 성질과 직책 범위, 그리고 어떻게 불리는가 하는 직명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본분을 정확히 정의하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 부류 사람들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지, 또 그들의 본분 이행에 어떤 요구를 하는지,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과 실행해야 할 원칙은 과연 무엇인지 등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들의 나이가 많든 적든, 신분이 높든 낮든,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든 상관없이 이 부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고, 파악하고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이 있으며,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발된 선도자, 사역자를 통상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느냐? 정확한 정의는 도대체 무엇이냐? 사람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이냐? 그들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과연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느냐? 이는 그들의 신분이나 지위를 정의하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그들의 위치는 과연 어떻게 정립되어 있느냐? 사도이냐? 그렇지 않다. 제자이냐? 제자도 아니다.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목자라는 호칭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하냐? (서 있는 위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사람이 목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아니고, 제자도 안 되며, 목자도 부적절하다면 이 본분을 이행하는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호칭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것이 더 적합하겠느냐?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 적절하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목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름은 거창하고 하는 일은 별 볼 일 없으니 말이다. 이런 호칭은 전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의 본분 이행 성질에 근거할 때 어떻게 부르고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그들을 정의하는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사역 성질, 신분, 지위와 부합하고 적절해야지 너무 거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라는 호칭으로 그들을 정의한다면 좀 거창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파수꾼은 어떠하냐? (더 거창합니다.) 네가 파수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면 파수꾼이 아니다. 목자는 어떠하냐? 목자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목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양 떼를 목양하고 돌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만약 그들이 하는 사역의 성질을 본다면 사실 적절하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의 패괴 성품으로 볼 때 목자라는 호칭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좀 거창하다. 즉,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그 호칭은 현재 사람이 하는 그 사역의 성질이나 범위와 부합하지 않으므로 명백히 부적절하다. 그럼 이 사람들에 대한 정의 중 가장 적절한 표현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입니다.) 그 호칭이 상대적으로 적절하다.
리더 일꾼인 이 부류의 사람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이냐?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크게 보면 하나님 사역의 필요에 의해서, 작게 보면 교회 사역의 필요와 하나님 선민들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 이 부류 사람의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든,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이든 그들은 일반 하나님 선민과 평등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이나 지위는 모두 똑같다. 비록 교회에 리더 일꾼이란 호칭이 있고, 그들은 리더이고 일꾼이며, 이행하는 본분이 형제자매들과는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 불린다. 이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리더 일꾼이 일반 하나님 선민들과 다른 점은 그저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의 특수성에 있을 뿐이다. 이 특수성은 특히 ‘리더십’ 역할에서 두드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교회에 몇 명이 있든 상관없이 그 교회 리더가 바로 이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리더는 무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그는 그 교회에 있는 모든 하나님 선민을 이끈다. 그는 교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그 리더가 잘못된 길을 가면, 그 교회의 모든 이가 리더를 따라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이는 교회 전체의 하나님 선민에게 무척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자신이 세운 많은 교회와 하나님 선민들을 이끌었다. 바울이 잘못된 길을 가자 그가 이끌던 교회와 하나님 선민들 역시 잘못된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더가 치우치게 행하여 제 길로 갈 경우 스스로가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이끄는 교회와 하나님의 선민들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만약 리더가 올바른 사람이고, 올바른 길을 가며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한편으로는 그가 이끄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추구할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 개인의 생명 체험과 성장 또한 다른 이들의 눈에 들어올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영향도 줄 것이다. 그럼 리더로서 가야 할 올바른 길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도록 이끌며,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은 무엇이겠느냐? 지위와 명예, 이익을 추구하고 언제나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하며, 한 번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그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네가 사람들을 네 앞으로 데려간 것은 하나님이 아닌 패괴된 인간 앞으로, 사탄 앞으로 이끈 것이다. 사람을 진리 앞으로 인도해야 비로소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것이다. 리더 일꾼이 올바른 길을 걷든 잘못된 길을 걷든 하나님 선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하나님 선민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데,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되면 좋은 사람을 따라가게 되고, 나쁜 사람이 리더가 되면 나쁜 사람을 따라가게 된다. 분별없이 누가 이끌든 남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좋은 사람을 선출해 리더를 맡기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저마다 어떤 길을 걷느냐는 리더가 걷는 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들 리더 일꾼의 영향을 받게 된다. 먼저 이 방향에서 리더 일꾼의 본분 이행과 관계된 각 진리를 교제해 보자. 하나는 올바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길인데, 이 두 가지 중 먼저 어떤 것을 교제하는 게 좋겠느냐? (잘못된 길을 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느냐? 먼저 올바른 길에 관해 말하는 것이 맞겠느냐, 아니면 먼저 잘못된 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맞겠느냐? (먼저 잘못된 길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실 모두 맞다. 하지만 두 가지 방식 중 어떤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먼저 잘못된 방식을 말한다면, 사람은 잘못된 방식에서 더 많은 올바른 길을 찾게 되고, 자신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과 인식을 많이 경계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긍정적인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얻은 후에 올바른 길에 대해 말하면, 사람은 긍정적인 것들을 더 깊이, 더 빨리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은 쓸 만하고,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먼저 잘못된 방식부터 말해 보도록 하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
사람이 교회 리더나 일꾼으로 선발되어 자기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면 뭔가 좀 우쭐대는 태도를 보이지 않겠느냐? 혹자는 “우쭐대는 태도라면 어떤 것일까요? 구름 위에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일까요, 아니면 비바람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일까요?”라고 하는데, 전부 아니다. 구름 위에 올라가는 것도, 비바람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패괴된 인류라면, 또 사탄의 패괴 성품과 본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럴 때 마음 깊은 곳이 들썩이고, 웅대한 뜻을 품으며, 일을 성공시켜 자기 실력을 크게 과시하고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겠다는 기세를 보여 준다. 이런 기세가 옳은지 그른지는 일단 차치해 두자. 리더 일꾼으로 선발됐을 때,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은 무척 복잡해진다. 무척 복잡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리더가 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길은 무엇인지 알 수 없겠지만, 타고난 본성으로 볼 때 그는 그런 기회가 오기를, 그 영광스러운 책임과 중임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약간 기뻐하고 자축한다. 무엇을 자축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수십 명 가운데서 선발됐으니 꽤 뛰어나고 실력이 있는 것 같아. 평범한 사람들보다 낫다는 거지. 평범한 사람들보다 잘 이해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거야. 나는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으면서 적잖이 헌신하고 대가를 치렀어. 사실이 증명하잖아. 나는 교회 선도자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고 진리를 깨닫도록 이끌어 줄 자격이 있어. 나보다 똑똑하고 학력 높고 말재주 좋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내가 뽑혔겠어? 내가 인성이 좋고 능력을 갖추었다는 거지.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야.’ 이것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 독백이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덧붙인 것으로, 사실 그 앞에 한 말들이야말로 그의 진짜 생각, 진짜 인식이다. 그는 ‘나는 경쟁하지도, 빼앗지도 않았지만 리더로 뽑혔어. 그러니 어쩌겠어?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잖아. 크게 한번 일을 벌여야지!’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크게 한번 일을 벌이겠느냐? 리더가 된 첫날, 그는 각 팀 책임자를 불러 모아 예배를 드리며 일종의 태도를 보인다. 어떤 태도겠느냐? 우레처럼 매섭고 바람처럼 몰아치는 기세,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기세이다. 새로 부임한 관리가 의욕이 대단하듯이, 그는 먼저 모두에게 자기 능력을 보여 준 다음 사람들이 전임 리더를 분별하고 저버리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먼저 전임 리더를 해부해 보겠습니다. 예컨대 그가 사람들을 속박한 부분, 그의 사역에 허점이 있었던 부분, 직무를 소홀히 했던 부분 등 무엇이든 교제 가능합니다. 교제를 마치고 나면 전임 리더를 정확히 분별하고 저버려 미련을 갖지 않고 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인식이 생겼다고 할 수 있죠.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한다고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오늘 예배는 전임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비판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고발해 보세요.” 사람들이 이미 교제한 적이 있다고, 전임 리더가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임을 분별해 냈으니 따로 고발할 게 없다고 해도 그는 동의하지 않고 이름을 지목하며 교제하게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교제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전임 리더와 가장 사이가 좋던 형제자매에게 폭로하고 해부하라고 한다. 교제를 듣고 ‘이 사람도 전임 리더를 분별하지 못하고, 저버리지 못했구나. 아무래도 마음속에 아직 그의 자리가 있는 것 같아. 안 되겠어. 오늘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서 전임 리더를 철저히 폭로해야지.’라고 생각한 그는 또 전임 리더와 사이가 가장 안 좋았던 사람을 불러 폭로하게 한다. 그 사람이 폭로하고 나면 그는 만족해하며 그 사람을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양성하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기편, 자기 세력을 양성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예배이다. 이 한 차례 예배로 그의 목적이 이뤄지겠느냐? 그렇게 완벽하게, 또 그렇게 빨리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겠느냐? ‘사람의 마음은 가장 종잡을 수가 없고, 가장 음흉해. 모두가 마음속으로 전임 리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과거와 실상을 알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봐야겠어. 그리고 마지막에 모두에게 나라는 사람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줘야지. 하지만 제대로 된 방식과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너무 노골적으로 굴지 말고 좀 숨겨야 한다고.’ 그의 이런 생각과 사역 방식, 출발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탄 본성에서 비롯되었다.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느냐? 리더 일꾼으로 선발되는 날, 처음에는 너희도 잘못된 길을 가지 말자고,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말고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위해 사역하면 안 되고, 욕망에 기대 사역해서도 안 된다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경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다 보면 자기 생각처럼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든 언행의 목적이 분명하고, 움직였다 하면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려 한다. 또 누가 조금이라도 불복하거나 불만스러운 심기를 드러내면 그는 불쾌해한다. 대놓고 배척하거나 공격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마음속 깊이 그 사람에게 큰 반감을 갖는다. 그럼 어떻게 반감을 드러내겠느냐? (상대를 무시합니다.) 무시하는 것은 무언의 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행동을 보이겠느냐? 예를 들어, 예배 때 그는 좋아하는 사람을 자기 맞은편에 앉히고, 싫어하는 사람은 핑계를 대서 가장자리에 배치한다. 이것이 공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행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행동은 입으로 말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겁고 심각하다. 어째서 더 심각하다고 하겠느냐?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생각과 뜻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행동하는 순간 사실이 된다. 행위가 된 것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한 것이다. 리더로 선발된 사람은 모두 각자의 바람과 뜻, 이상을 품고 사역하고 해당 본분을 이행한다. 하지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는 모든 인류는 공통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공통점은 어떤 것이겠느냐? 권력을 잡고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권력을 잡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먼저,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찰한다. 누가 자기에게 잘 아첨하고 다가오는지 보는 것이다. 그 후 주동적으로 그 사람에게 접근해 비위를 맞추든 작은 선심을 베풀든 해서 인맥을 만들고 친한 척 가장하며 자기와 관심사나 흥미, 야심, 또는 본성이 비슷한 사람들을 자기 패거리, 같은 세력으로 만든다. 같은 세력으로 만드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세력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는 권력을 잡은 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따르고 옹호하고 대변해 주기를 바란다. 즉,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잘못된 짓을 저질러도, 혹은 다른 이를 공격하고 제약해도 누군가는 따르고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언젠가 상부에서 그의 문제를 알아채 그를 교체하면, 온 힘을 다해 그를 대변해 주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의 명예를 지켜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일 처리는 이런 결과를 낳는다. 그는 어떤 방식을 썼느냐? 사람의 마음을 농락했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방식으로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기 세력 범위를 확대하는 것, 이는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는 수법 중 하나이다.
적그리스도가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쓰는 수법 중 첫 번째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다는 것은 그에게 아첨하고 다가오고 그를 믿는 사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농락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달아 그를 분별할 수 있고 그를 따르지 않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원수나 눈엣가시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격과 배척의 수법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교제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들으면서 필기하거나 녹음을 하는데, 한 젊은 자매만 필기하거나 호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됐다고 해 보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녀는 나한테 불만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 교제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내가 오면 모두가 반갑게 맞이해 주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거나 물을 따라 주거나 자리를 양보해 주는데, 그녀는 한 번도 그렇게 나를 대한 적이 없어. 아무래도 나한테 불복하는 것 같아. 방법을 생각해서 기회가 있을 때 한번 혼쭐 내 줘야겠어! 어떤 기회가 좋을까? 그녀가 못 해낼 게 분명한 일을 처리하도록 안배하면 혼쭐 낼 핑계가 생기겠지. 이게 바로 그녀를 굴복시킬 최적의 기회야.’ 곧이어 그는 그 자매를 위험한 지역에 가서 사역하도록 배치한다. 그의 속마음은 다음과 같다. ‘교계의 늙은 목사한테 복음을 전하라고 시키자. 그 늙은 목사는 여자를 좋아하는 데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니야. 그한테 전도할 수 있을지 지켜보자고. 만약 전도하지 못한다면 무슨 더 할 말이 있겠어? 불복하면 쫓아 보낼 거야!’ 그래서 그는 자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즘 대부분 형제자매들이 자매님을 무척 높이 평가하더군요. 자매님은 하나님을 오래 믿은 데다가 알고 있는 진리도 많죠. 교계의 목사가 한 명 있는데 성경 지식이 좀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자매님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 자매는 목사를 만나러 갔다. 그러자 목사는 젊고 예쁜 자매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집적거렸다. 돌아온 자매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매님을 안배했으니, 이는 자매님의 본분입니다. 그러니 자매님이 꼭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자매는 그 말을 듣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목사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 리더는 남을 공격하고 보복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했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악인이다. 만약 그도 여성이라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가겠느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가지 않고, 누구보다도 멀리 피할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괴롭히기 좋은 사람, 자신에게 불복하며 아부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기회를 잡아 음해하고 복수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 나쁜 마음, 악한 마음이 있다면 어떤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느냐? 그 나쁜 마음, 악한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본성 본질이 너무 악독하고 못된 것이 한 측면의 주된 원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 남을 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팔아넘기는 짓도 다 할 수 있다. 이 정도 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사람을 심각하게 해하고도 그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고, 심보가 몹시 악독하다. 적그리스도가 그 젊은 자매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괴롭히려고 한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괴롭히겠느냐? 그의 말을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괴롭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자매는 왜 그런 대우를 받았겠느냐?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으며,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안중에 두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런 대우를 받고 해를 입게 되었다. 분량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이렇게 사람을 해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보통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옆에 있는 직속상관인 법이지. 지금 나는 그 사람 아래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야 해. 그가 가라고 하는 대로 따르자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식으로 대해 주는 거야. 무리에서 혼자 튀면 안 돼. 남들이 아부하면 나도 아부하자. 아예 한술 더 떠서 다른 사람보다 더 제대로, 열심히 해야 이 리더를 진정시킬 수 있을 거야. 이 리더는 정말 모시기 힘들고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야!’ 이 결과는 적그리스도가 마음속으로 원하던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 수법은 사탄이 사람을 해하는 수법과 같지 않으냐? (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의 행동은 사탄을 대변한다. 사람은 사탄의 전달 통로, 대변인이 되었고, 사탄을 대신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럼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이 진정한 본분 이행이겠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리더는 리더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이런 자는 악인이고 사탄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리더가 됐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를 믿고 신뢰하며 옹호하게 하는데, 지위가 공고해지면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기 시작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대할 때, 특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대할 때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실하고, 단호하고, 악독한 수법을 써서 상대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혼내고 괴롭힌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모두 납작하게 눌러 버려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적그리스도가 이렇다. 그들이 갖은 수법으로 사람을 농락하고 억압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권력을 얻고 지위를 공고히 하며,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의 속셈과 출발점은 전부 무엇을 의미하느냐?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다. 이 본질은 패괴 성품보다 더욱 심각하며, 사탄의 야심과 간계가 오롯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단순히 패괴 성품의 표출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조금 교만하고 독선적이거나 때때로 조금 간사하게 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저 패괴 성품의 표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는 짓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며, 지위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움켜쥐고,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태는 어떤 성질을 띠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냐? 그는 사람의 마음과 선민들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고, 독립 왕국을 세우려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마땅히 누구의 자리가 있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은 이와 상반된다.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 진리의 자리가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 그의 리더 자리, 사탄의 자리가 생기게 한다. 누군가가 마음에 그의 자리가 없고, 그를 리더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그는 강한 불만을 품으며 상대를 억압하고 괴롭힌다. 적그리스도의 모든 언행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남에게 우러름을 받고 부러움을 사고 숭배받고 나아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를 하나님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내가 어느 교회에 가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일 처리할 때 내 눈치를 봐야 해. 누가 상부에 어떤 문제를 보고하려고 하든 다 나를 통과해야 한다고. 나한테 보고하는 것만 가능하지 바로 윗선과 통하는 건 안 돼.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모두가 나를 보고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고 쩔쩔매게 하겠어. 또 내가 명령을 내리고 어떤 말을 확정하면 감히 아무도 나한테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따르고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모든 일에서 나에게 복종해야 해. 여기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야!’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어조이고 목소리이며,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선민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르고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런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상부에서 내려온 사역지침은 제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 대해 책임이 있으니까요. 옳고 그름은 제가 분석하고, 결과도 제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분량이 크지 않고, 그런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교회 리더이니 전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니겠느냐? 정말 교만하여 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 이는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 아니겠느냐? 독립 왕국을 세우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영락없는 적그리스도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모든 언행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 전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째서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겠느냐? ‘적’이란 어떤 의미냐? 적대시하고 증오한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적대시하고 진리를 적대시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적대시란 무엇이냐? 맞은편에 서서 너를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며, 마치 불구대천의 원한이 가득 찬 것처럼 너와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이 진리는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진리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는 자는 전부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태도는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해도 증오심이 생기며, 누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기라도 하면 눈에 불길이 일고 핏발이 선다. 마치 복음을 전할 때 마귀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는 느낌처럼 말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대할 때 극도로 싫어하며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심지어 누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거나 진리를 교제해 주기만 해도 증오심을 품고 상대를 원수처럼 대한다. 그는 다양한 측면의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모두 몹시 싫어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매사에 진리를 구하는 것 등 이 모든 진리에 대해 그가 조금이라도 주관적인 바람을 갖고 동경하거나 좋아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그런 본성 본질로 인해 그는 이미 진리와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나아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 예를 들어, 리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형제자매의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고, 형제자매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또한 지위를 주장하지 말고 형제자매들의 질책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올바른 실행법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그는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들으라고요? 그러고도 제가 리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위신이 서겠냐고요. 위신이 없는데 어떻게 사역을 하죠?”라고 말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성품을 갖고 있으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올바른 실행법일수록 더더욱 반발심을 갖는다. 그는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 실행은 무엇이겠느냐? 음모와 수법, 강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방식과 길은 다 사악하며, 적그리스도 부류의 본성 본질을 완전히 대변한다. 그들이 자주 표출하는 속셈과 동기, 사상 관점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그럼 진리와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사람은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니까요.”라고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순종하라고? 내가 피조물인 건 맞아. 하지만 순종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지. 먼저 나 개인적으로 반드시 이득을 봐야 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는 없지. 내 이익을 1순위에 둬야 한다고. 상과 큰 복이 준비된 상황에서 순종하라고 한다면 상관없겠지만, 상도 종착지도 없다면 내가 왜 순종해야 하겠어?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순종하지 못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조건적으로 순종한다. 그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대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바보나 정직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똑똑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의 본질은 무엇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본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본질은 그들이 걷는 길을 결정하며, 그들이 걷는 길은 또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적그리스도에게는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본성 본질이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지르겠느냐?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며, 남을 혼내고 괴롭힌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하는 목적은 권력을 잡고, 하나님의 선민들을 통제하며, 독립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위가 생긴 후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을 따르지도, 진리를 추구하지도 못하는 자는 모두 적그리스도에 속한다.
적그리스도는 리더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어떤 짓을 하겠느냐? 우리는 방금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부류의 사람에게는 공통된 모습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증오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증오하는 것으로 그만이겠느냐?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배척하고 억압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데, 그 상대는 어리석고 아첨할 줄 모르며 처세 철학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비교적 열정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세 번째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 밖에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그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어떤 행동이냐?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다. 그의 수법은 무엇이겠느냐?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여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할 때 보통 어떤 말을 하겠느냐? 하나는 자격을 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때 어떤 윗선 리더를 접대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저는 하나님을 접대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무척 잘해 주셨죠. 그러니 저는 분명 온전케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목적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상부와 접촉한 적이 있습니다. 상부에서는 저를 좋게 봐 주셨죠. 열심히 추구하라는 당부도 하셨고요.”라고 말하는데, 사실 상부에서 그를 정말 어떻게 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무척 과장해서 말하며, 심지어는 없는 얘기를 날조하기도 한다. 만약 몇 명이 말을 맞춰 본다면 그는 안색이 변할 것이다. 어쩌면 상부에서 누군가에게 “당신은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이 있으니 체험 간증문 쓰기를 연습해 보세요. 생명 체험이 생기면 리더가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의 함의는 무엇이겠느냐? 설령 그가 인재라고 할지라도 연습하고 한동안 체험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연습하고 체험하기도 전에 뽐내고 거들먹거렸으니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성을 잃은 것 아니겠느냐? 설령 상부 형제가 그를 가리켜 자질이 있는 인재라고 말했을지라도 이는 그에 대한 격려나 평가에 불과하다. 그가 밖에서 이렇게 뽐내는 목적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으려는 것이다. 이는 ‘봐, 상부 형제님까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시잖아.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우러러보지 않는 거지? 내가 이 이야기를 해 주면 당신은 나를 우러러봐야 할 거야.’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가 이루려는 목적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한때 리더 자리에 있었습니다. 교구 리더, 지역 리더, 교회 리더를 역임하며 한 단계씩 내려왔다가 다시 한 단계씩 올라갔죠. 세 번의 등락을 겪은 후 마침내 제 진심이 하늘을 감동시켜 지금은 또 윗선 리더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 적이 없답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그는 “금은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도출해 낸 결론이다. 이것이 진리 실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 실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기론(奇論)이며, 황당무계한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말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혹자는 “그는 정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의 등락을 겪으면서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또 리더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말 주머니 속의 송곳은 눈에 띄기 마련인가 봅니다. 그는 언젠가 온전케 될 재목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루려는 목적 아니겠느냐? 그는 사실 이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전부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특정한 지위를 점하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함으로써 이루려는 목적이다. 그가 말하고 설교하고 교제하는 속셈이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것이라면, 이런 행동은 전부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으로, 사람들 마음속에서 지위를 점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과 방식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다 자신을 증거하여 사람들에게 숭배받는 결과를 얻는다. 이런 행동 방식은 많든 적든 거의 모든 리더 일꾼에게 존재한다. 만약 이것이 지나친 지경에 이르러 자제나 억제가 안 된다면, 또 속셈과 목적이 특히 강렬하고 명확해서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이나 우상처럼 여기게 하여 사람을 속박하고 통제하는 목적, 남들에게 순종과 숭배를 받는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전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성질이자 적그리스도의 성질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높이고 증거하기 위해 자주 쓰는 수법은 무엇이냐? (밑천을 따지는 것입니다.) 밑천을 따지는 것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느냐? 자기가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으며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길을 뛰어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얻었는지, 얼마나 많은 굴욕을 당했는지 등이 포함된다. 어떤 이는 한술 더 떠서 자기는 몇 번이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한 번도 교회나 형제자매를 팔아넘기지 않고 굳게 서서 증거했다는 등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데, 이러한 것은 전부 밑천을 따지는 것에 속한다. 그들은 교회 사역을 한다는 기치를 들고 자기 경영을 하며,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사람들 마음속에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와 동시에 갖가지 방식과 방법, 수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심지어는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척한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극력 배척하고 억압한다. 반면, 무지몽매하고 어리숙하게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분량이 작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수법을 쓰겠느냐? 미혹하고 회유하며 심지어는 위협한다. 이런 수법으로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다.
교회에는 수시로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상부로부터 ‘리더 일꾼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어긋나는 일을 할 경우, 하나님의 선민은 이에 대해 보고할 권리가 있다.’라는 설교와 교제를 들은 후 자기 교회의 리더가 사역할 때 사역지침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고는 보고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일이 리더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리더는 ‘감히 나에 대해 보고하려는 사람이 있다니 말도 안 돼! 대체 누구야?’라고 생각한다. 그 후, 리더는 교회 사람들 수십 명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들어간다. 어느 수준까지 조사하겠느냐? 모든 사람의 나이, 하나님을 믿은 기간, 예전에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현재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 누구와 연락하고 있는지, 상부와 연락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모두 한 번씩 조사하며 큰 공을 들인다. 그리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혐의가 있는 사람 두세 명을 찾아낸 후 예배 때 집중적으로 이 일에 관해 설교한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동안 지금까지 인도해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지금 이렇게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예배에서 교제해 주지 않았더라면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을 얻었고, 복음 사역에서 큰 진전을 보였습니다. 만약 제가 진두지휘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이 그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누구한테 고마워해야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한 후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사람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만약 제가 여러분한테 하나님의 말씀 서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그 책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가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한데 모일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리더가 어쩌다 한 번 잘못한 일이 있어도 꼬치꼬치 추궁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건 공연히 소란을 피우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소한 일은 우리 내부에서 해결해야지 위에 보고해서 뭐 한답니까? 보고하는 사람은 무능하고 분량이 작은 겁니다. 어떤 일이든 다 상부에 보고하는 게 적절한 처사입니까? 상부에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시간이 어디 있답니까? 해결한대도 교회 리더가 해결해야죠. 무슨 일이든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굳이 상부에 보고하는 건 상부를 방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게 보고한다면, 책망 훈계 없이 화기애애하게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상부에 보고하면 상부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기나 하세요? 상부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사자나 매와 같죠. 우리 정도의 분량으로 상부에까지 이를 수 있겠습니까? 상부에 문제를 보고한다면 좋을 게 없습니다. 크게 한 번 책망당하겠죠. 저도 여러 번이나 책망당했고요. 당신의 그 정도 분량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여차했다간 믿음을 잃게 될 텐데 그 결과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보고하겠다면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십시오. 나중에 책망받아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져도 저를 원망하지는 마시고요. 보고하고 싶다면 저도 막지 않을 겁니다. 보고하세요. 누가 보고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이렇게 겁을 주는데 함부로 보고할 사람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고하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는 못난 인간 아니겠느냐? 왜 그를 겁낸단 말이냐? 왜 그에게 겁을 먹는 것이냐? 지금 그가 너를 괴롭혀 죽이려고 할지라도 네 목숨은 그의 손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 그의 협박 몇 마디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보고하지 못한 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상부에 보고하면 상부에서 그에게 처분을 내릴까? 만에 하나 처분이 내려오지 않으면 보복당하지는 않을까? 그럼 내가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까? 다시는 보고하면 안 되겠어. 게다가 이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잖아. 다들 보고하지 않는데 내가 뭘 보고해?’라고 생각하며 위축되어 보고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을 대할 때 사정을 봐주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누가 자기에 대해 보고하고 싶어 하며,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계속 불순한 생각을 품고, 소란을 피우려고 하지. 또 시비를 걸거나 내 문제점을 보고하려고 하고. 감히 말이야! 당신은 기회를 봐서 상부와 접촉해 나를 고발할 거야. 지금은 위축되어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그렇게 할지도 모르지. 자, 내가 당신을 어떻게 손봐 줄지 지켜보라고!’ 그리하여 적그리스도는 핑계와 기회를 찾아 그 사람을 폄하하고, 형제자매들이 그에게 반감을 갖게 한 다음,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의 약점을 잡는다. 그리고 소란을 피워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 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글렀어. 리더에게 순종하지 않고 함부로 보고했다가 괴롭힘 당했잖아. 앞으로는 이 교훈을 기억해야겠어. 절대 리더에게 원한을 사선 안 돼! 지금 결정을 내리는 건 리더잖아. 리더가 동쪽이라고 하면 서쪽이라고 하지 말고, 리더가 하나라고 하면 둘이라고 하지 말자. 리더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절대 상부에 연락해서 문제를 보고해선 안 돼. 그랬다간 큰일 날 테니까! 리더에게 괴롭힘 당했는데 상부에서는 모르잖아. 누가 나서서 나를 도와주겠어?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건 직속상관이라고!’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임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문제를 보고하고 싶어도 악인에게 겁을 먹고, 사악한 세력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며, 악인이 권력을 잡고 있는 곳에서 악인에게 괴롭힘 당해 못난 인간이 되어 버린다. 원래는 그래도 정의감이 조금 있었고 취할 만한 부분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도 못해 악인과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에게 무너졌다. 모든 믿음이 사라질 정도로 무너진 그는 하나님에게 의지해 진리를 구하거나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이제 그는 적그리스도를 보면 무서워하고 겁을 먹는다. 어느 정도로 무서워하겠느냐? ‘이 세상은 악인이 권력을 잡고 있어. 그러니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든 온순하게 굴어야 해. 나는 그런 독기도 없고 간도 작잖아. 어디를 가든 기꺼이 모욕을 감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며, 상대를 조상처럼 여겨야 한다고. 그 사람이 동쪽이라고 하면 서쪽이라고 해선 안 돼. 다른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 거야. 누구의 문제든 보고하지 말자. 누구의 일이든 캐묻지도 말고. 그냥 열심히 하나님 믿는 일만 신경 쓰는 거야. 리더 일꾼한테 원망을 사지 말고, 진리 원칙을 고수하지도 말자. 빛을 동경해서도, 정의를 사랑해서도 안 돼. 이 세상에는 빛과 정의가 없으니까. 그냥 끝까지 참는 거야. 앞으로 어디를 가든 명심해야 해. 항상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그는 이 한마디 결론을 종합해 낸다.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쓰러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쓰러진 사실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겠느냐? 억압당한 후로, 그는 깜짝 놀라 간이 콩알만 해졌다. 어떤 일도 말하거나 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고, 진실한 믿음도,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도 사라졌다.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속 작은 불씨도 꺼져 버렸다. 적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짓밟히고 쓰러진 것이다. 이런 자는 못난 인간 아니겠느냐? 겁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를 어떻게 간파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에게 “당신 교회의 누구누구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훌륭합니다.”라고 답한다. 또 “당신들이 새로 뽑은 교회 리더에 대해 잘 아나요?”라고 물으면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하고, “요즘 그쪽 교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교란하는 사람은 없나요?”라고 물으면 “다 좋습니다. 괜찮아요.”라고 대답한다. 무엇을 물어보든 그의 답변은 위와 같다. 이는 겁을 먹은 것 아니겠느냐? 왜 이 정도까지 겁을 먹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고, 사탄의 사악함과 잔혹함, 잔인함, 어둠을 간파하지 못했다. 또 진리가 권세를 잡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그 의미를 몰라 겁을 먹은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무슨 질문을 받든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말만 하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는 교회의 실제 상황을 들을 수 없으며,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있기에 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그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며, 리더 일꾼이 어떤지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민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정보를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한담을 나눌 뿐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너에게 벽을 치고 있다. 그의 마음가짐은 이러하다. ‘내 어떤 정보도 알아내려고 하지 마. 내 어떤 정보나 실제 상황도 당신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아. 내게 다가오지 마. 내 입에서 교회 상황을 듣고자 하는 것은 내게 화를 가져다주는 거야. 현재의 내 생활 환경과 생활 리듬, 생활 상태를 망치려는 거지. 내 삶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마. 그 일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는 적그리스도에게 괴롭힘 당하고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서 교회의 어떤 문제도 보고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굴종한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당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상황을 보고 기뻐한다. 그는 상대를 괴롭혀서 다시는 그의 문제를 보고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며, 그곳에서 교회를 단단히 통제하고 있다. 교회에 적그리스도에게 이렇게 통제당한 사람이 많지 않으냐? 너희는 다른 이가 문제를 보고하지 못하게 제약하는 일을 한 적이 있느냐? 어쩌면 그런 일을 하고도 아직 의식 못 했을 수도 있고, 또 앞으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에게 농락당하고 통제되는 일이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혹자는 말한다. “교회에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적그리스도를 믿거나 따른 적도 없고 섬긴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저 적그리스도에게 얼마간 속박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도통 들어서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문제라고 하십니까?”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농락하고 통제하는 적그리스도의 수법을 통해 그의 본성 본질이 사탄의 본질이며, 진리나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려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적그리스도의 이런 일 처리 수법과 방식은 분명 무지몽매하고 어리석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는 확실히 그들을 미혹하고, 단단히 통제하여 그들이 모든 일을 그에게 물어보고 그의 지시를 따르게 한다. 적그리스도는 그들의 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발을 묶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 나아가는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이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초래하는 영향이자 결과이다.
지금까지 리더 일꾼의 본분을 이행하는 각 측면의 진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한, 리더 일꾼에게 존재하는 문제들도 폭로하고, 가장 심각한 부류의 모습에 관해 중점적으로 언급했다. 이 부류는 어떤 사람들이냐?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공통적인 모습은 무엇이냐? 권력을 잡고 교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권력은 그들의 목숨이자 뿌리이며, 그들이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주제이자 방향, 목표이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 부류의 모든 행동과 그들이 표출한 성품은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하고 통제하는 사탄의 수법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부류 사람의 모든 행동은 영락없이 사탄의 전달 통로이자 화신, 선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모든 행동과 모습의 주된 목적은 권력을 갖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통제하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그들이 이끄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권력 범위 안에서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통제하는 적그리스도의 수단에 대해서는 방금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며 위협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모습은 전부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얻고 사람을 점령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자 방식이다. 이는 큰 측면이다. 이제 이 몇 가지 큰 측면을 구체적으로 해부하고 교제하도록 하겠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농락하는지 해부하다
1. 작은 선심으로 사람을 회유하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첫 번째 수법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느냐? 작은 선심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때로는 좋은 것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칭찬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남들 앞에 나설 수 있는 본분, 또는 도움이 되고 모두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만한 본분이 있을 때 그런 본분을 자기가 농락하려는 사람에게 배정하기도 한다. 작은 선심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때로는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비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또 때로는 비위를 맞추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혹자는 어떤 일이 닥쳐 연약해지고 본분 이행에 열의가 사라졌을 때, 하나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서 자신의 그런 연약함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것이며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는 것, 진실한 순종이 없는 것임을 알고 가책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리더는 그런 모습을 보고 “그건 분량이 작은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됐다고요. 스스로에 대한 요구치를 너무 높게 잡지 마세요. 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시고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습니다. 당신처럼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은 사람이 가끔 좀 연약해지는 건 정상이죠. 걱정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 뜻은 연약해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계속 연약한 상태로 있을지라도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정상적인 소극성이니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정에 속박받는다. 그러면 리더는 “분량이 작아 그런 것이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게을러서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데도 리더는 질책하지 않고, 늘 비위를 맞추며 좋은 말을 해서 상대가 그를 좋게 보고, 남을 이해하는 사람,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한다. 마음속으로 ‘우리 리더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아. 정말 남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람이라니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 뜻은 그가 하나님의 선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어쩌면 이렇게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한 가지 목적은 분명하다. 즉, 사람들이 그 리더가 무척 훌륭하다고, 남의 마음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헤아리며 남들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 리더는 형제자매가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해야 하는데도 책망하지 않고, 분명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실 입는 것을 보아도 신경 쓰지도 묻지도 않으면서 조금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속셈과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아무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를 좋은 리더라고 생각하고 나를 좋게, 높게 평가하고 내게 찬성하고 나를 좋아할 거야.’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이 얼마나 손해를 보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이 얼마나 피해를 입든, 교회 생활이 얼마나 큰 방해를 받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사탄 철학을 지키며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 한다. 마음속에는 어떠한 가책도 없다. 누군가 방해하고 교란하면, 기껏해야 말로 어물쩍 넘어갈 뿐 진리를 교제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지도 않으며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석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교제하는 법이 없다. 거짓 리더는 사람들이 항상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지 폭로하거나 해부하는 법이 없고, 어떤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의 그릇된 행동 방식과 패괴 표출을 항상 눈감아 주며, 사람이 아무리 소극적이고 연약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저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고 격려의 말 몇 마디로 대충 넘어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할 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민들이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해도 해결하지 못하며, 글귀와 도리,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서 생명 진입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리더는 하나님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더 잘 이해해 줘. 우리의 분량이 작아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해. 우리는 리더의 요구에 맞출 수 있기만 하면 돼. 우리가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야. 만약 어느 날 상부에서 우리의 리더를 교체하겠다면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해. 리더가 교체되지 않도록 상부와 협상하고, 상부에서 우리 요구를 들어주도록 압박해야지. 그러면 리더에게도 면목이 설 거야.’ 사람들의 마음에 이러한 생각이 생기고 리더와 이러한 관계가 형성된다. 마음에 리더에 대해 이러한 의지, 부러움, 숭배가 생기면 갈수록 리더를 믿게 되고, 리더의 말을 듣기 원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게 된다. 이런 리더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만약 리더가 하나님의 선민과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고, 또한 그 관계를 즐기며 하나님 선민이 응당 자신을 이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리더는 바울과 다를 바 없고, 이미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은 이미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분별력이 전혀 없다. 사실, 그 리더는 진리 실제가 없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글귀와 도리만 늘어놓으며 인간관계를 유지할 뿐이다. 그는 외식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능하다. 또 그의 말과 일 처리는 사람의 관념에 맞으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는 진리를 교제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못하기에 사람들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할 수 없다. 그는 오직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만 사역하며,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사람을 우롱할 줄만 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숭배받고 앙망받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심각한 영향과 지장을 주었다. 이런 자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혹자는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적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에게 대조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걷는 길 역시 적그리스도의 길이라고, 얼른 정신 차리고 돌아서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고, 언제나 개인의 지위와 이미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지위를 얻게 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마음속에 진실한 평안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만약 적그리스도 본성이 있는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말을 듣는다면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한다. 이는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실로 회개할 줄 모른다는 증거이다. 그는 계속 지위를 점하고 지위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 선민들의 숭배와 앙망을 즐기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미혹된 사람은 모두 참도와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그를 따르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자기가 위험한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한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잘 듣고 그에게 순종하기만 하면, 아무리 건성으로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해도 눈감아 주며, 게다가 그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숭배와 앙망을 즐기고, 심지어는 아무도 드러내고 분별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보호해 준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은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않고, 진리 교제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하지 않고 오직 지위와 명예,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사람 마음속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계속 자기를 숭배하고 앙망하고 따르게 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루려는 목적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며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는데, 이런 사역 방식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야말로 너무도 역겹다! 그들이 한동안 그런 식으로 일하여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며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 진입에 아무런 진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그리스도를 자기의 영적 부모,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사람들 마음속의 하나님 지위를 그들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이 생겨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어떤 문제가 닥치든 하나님에게 기도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리더에게 물어보고 리더의 안내를 구하면서 점점 더 리더를 앙망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구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어떻게 하는 게 진리와 원칙에 부합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들은 어떤 일이 닥치든 리더가 입을 열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리더가 하라는 대로 하고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이런 지경으로 끌고 간다. 이는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선민들이 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왜 리더의 말을 살펴보거나 분별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겠느냐? 왜 리더의 말을 들으면 바로 순종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대신 리더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신, 또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대신 리더의 말을 따른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대신 리더에게 의지해 일을 처리하며, 리더의 지지와 말과 결정에 의지한다. 이 소위 리더들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우롱하여 얻은 결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자기는 분량이 작아서 구할 줄 모른다고 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라고 하면 자기는 자질이 없어서 큰 빛을 얻지 못한다고 하며, 설교를 들으라고 하면 또 설교에서 하는 말들이 너무 대단하고 깊어서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자질이 떨어지는 데다가 연약하고 모든 면에서 다 부족하니 리더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어째서 리더를 찾아가야 합니까? 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거죠?”라고 물으면 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관념이 있는 데다가 자질도 떨어지죠. 아둔하며 무감각하고요. 하나님 말씀은 때로 그렇게 직설적이지 않고, 예를 들어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 리더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적으로 알려 줍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식으로 무척 직설적이죠. 저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죠. 하나님 말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시는지,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역시 모릅니다. 한 번도 답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데다가 분량도 너무 작고, 무감각하고 어리석어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리더에게 물어봐야 해요. 리더가 대신 결정해 주고, 답을 찾아주고,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면 그렇게 하는 거죠. 저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단순하고 순종적이죠.” “단순하고 순종적이라는 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리더에게 정말 진리 실제가 있습니까? 그가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만약 리더가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을 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이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의미가 될까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리더는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맞는 말만 합니다. 그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의미지요.” 그의 말에 논리적 추리가 있지 않으냐? 전부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는 자질이 떨어지고 분별력이 없어 리더에게 정말 문제가 있어도 간파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무지몽매하고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이 원인은 잠시 차치하고, 리더 본인에 관해서만 말해 보자.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리더에게 이런 의존성과 견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리더의 수법이나 방식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얼마나 관계가 있겠느냐? 리더의 사역 방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고 100% 관계가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많은 리더가 주관적인 바람으로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다가 각종 실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행정 사무와 관련된 사역만 조금 할 줄 알고, 자신을 뽐내 우러름 받을 줄만 알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선다. 또 자신만의 방식과 방법으로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통제하며 사람의 행위와 생각을 통제하여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측면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따르게 한다.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뿐 하나님에게는 진실한 순종을 보이지 않는데, 적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크게 넘어섰다. 본분 이행에 전혀 성과가 나지 않고, 사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한다. 이런 자가 구원받는 사람이겠느냐? 사람이 리더 일꾼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에는 ‘정확한’ 실행의 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하고 충성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실행조차 없다. 아무도 이런 측면에서 교제하지 않고, 아무도 이런 측면에서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위해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의 선민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 침식을 잊은 채 머리를 쥐어짜 가며 사역한다. 이는 명백히 리더 일꾼이 되어 교회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겠느냐? 패괴된 인류의 성품과 기호가 모두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길을 가리켜 주면 너는 흔쾌히 실행하고자 하지만,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은 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 싫어하고 하나님께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의 인성 안에는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없으며, 사람이 좋아하고 동경하는 것,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진리와 상반되고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에게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라고 하면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라고 하면 더없이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수법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은 금방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아무렇게나 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불러오고, 속셈과 관점이 들어간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으면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고 다르게 대한다. 이는 사람의 내면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지위와 권세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다면, 네 모든 행동은 패괴된 인류 누구에게든 참도에 등을 돌리고 진리와 하나님을 멀리하고 저버리게 하는 영향과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오직 이 결과, 이 결말뿐이다. 이는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첫 번째 모습은 작은 선심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다. 작은 선심이란 꼭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때로는 마음에 드는 말을 해 주는 것일 수 있고, 때로는 사람의 욕망과 흥미를 충족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으며, 또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상대로 하여금 그 리더는 남을 헤아려 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충분한 포용과 사랑, 온기, 그리고 소위 이해심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는 그의 이면의 야심을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들이 좋은 물건을 헌납할 경우 그는 자기와 사이가 좋은 사람에게 조금 나눠 준다. 이렇게 작은 선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인심을 사는 것이다. 만약 교회에 쉬운 일, 밖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체면을 세우는 일이 있으면 그는 자기와 사이가 좋은 사람에게 그 일을 시킨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일 처리에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그가 좋은 일을 자신과 사이가 좋은 사람에게 배정한 후 듣기 좋은 말을 좀 해서 상대가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려는 목적을 이룬다. 이 수법은 작은 선물이나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로 끝나는 게 아니다. 여기에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상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것이다. 만약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판단한다. ‘이 열 명 중 둘은 아부를 잘하지. 내가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그들은 내 비위를 맞출 거야. 또 둘은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이익만 좀 안겨 주면 내 말을 들을 거야. 나머지 둘은 자질이 좀 있으니까 내가 고차원적인 설교를 하고, 대단한 말을 좀 하면 나한테 순종할 테고. 셋은 보아하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요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펴서 그걸 충족시켜 줘야겠어. 만약 나한테 고마워하지 않고 나를 따르지도 않는다면 결국 처리하고 제거해야지. 남은 한 명은 나한테 반대하기는 해도 큰 말썽은 부리지 못할 테니 대응하기 쉬울 거야.’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자기가 요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쓱 훑어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겠느냐? 그의 마음속에는 사탄의 정치와 철학 같은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 처리 원칙과 처세 방식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함께 지내는 것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도움이나 공급을 주고 덕이 되는 것도, 사람들과 평등하게 지내는 것도 아니며, 진리 원칙으로 일을 처리하고 교류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이런 원칙이 아예 없다. 그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모든 사람이 속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우러러보는 사람, 마음속에 내가 있고 나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공경하는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공경하지만 그다지 순종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보통 남들한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사람을 통제하는 데는 단계가 있다. 그에게 왜 이런 단계와 사상이 생기겠느냐? 권력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남들과 화목하게 지낼 경우,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 성취감이 없고, 너무나 존엄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가 아니면 두 번째를, 두 번째가 아니면 세 번째를 차지해야 하고, 평등하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이 리더를 하면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겠느냐? (권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두 권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권력을 중심으로 어떤 일들을 하려 하느냐? 먼저 네 마음을 읽고 파악하려 한다. 즉, 먼저 너를 포섭하여 네가 그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게 하고, 네 마음속 말을 끌어내서 그에 대한 네 솔직한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것을 파악한 후에는 상황에 맞춰 하나하나 손을 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마음이 자신과 맞지 않고 누군가가 그를 공경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사실을 알면 손을 써서 상대를 괴롭힌다.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적그리스도의 출발점은 권력을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권력을 얻는 방식과 수단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무엇으로 통제되느냐? 마음과 본성으로 통제된다. 사람의 마음이 통제되면, 그 사람의 사상과 생각, 뜻이 어떤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마음이 통제되는 순간, 사람은 완전히 통제된다.
2. 사람들에게 숭배받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뽐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수법에는 방금 말한, 작은 선심을 베푸는 것이 있었다. 이것 외에 또 자주 보이거나 상투적인 수법에는 어떤 것이 있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리더가 사람들 마음속에 나쁜 인상으로 남아 있다고 해 보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다지 재능은 없고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 안다고, 진리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들이 그에게서 이런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그는 온 힘을 다해 그 결점과 문제점들을 숨기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어떤 말들을 하겠느냐? 솔직하게 털어놓는 척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또 있느냐? (해명할 것입니다.) 해명 역시 숨기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 밖에, 자신의 강점과 남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숨긴다. 이는 자주 쓰는 수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은데 왜 리더로 발탁됐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십여 명에 불과했던 직원들이 나중에는 이백 명까지 늘었죠. 이건 리더십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 재능이 발휘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쇼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말을 해도 직원들이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성적을 내면 그들은 말을 듣습니다. 저한테는 증거가 되는 사실이 있어요. 제 회사는 지금 상장해 있거든요!”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그건 은사이고 이방인의 행동 방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의 일 처리에 확실히 수완이 있고 어느 정도 성과가 나자 몇몇 사람들은 의혹을 품다가 믿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일 처리 과정을 보면서 조금씩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을 미혹하고 자신의 결점을 숨겼기에 사람들은 부지중에 그에게 회유되고 미혹되어 머리를 숙이고 굴종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의 수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특기와 은사를 뽐내고, 능력과 재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역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 외에도 상대가 마음속으로 그를 우러러보게 한다. 만약 그가 평범한 사람, 혹은 지식이 없는 무식꾼이라면 누가 그를 우러러보겠느냐? 그래서 그는 일부러 졸업장을 보여 줌으로써 자기가 가방끈이 길고 학력이 높다는 것을 알려 주는데, 몇몇 사람들은 여기에 미혹된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은사와 특기, 능력을 뽐냄으로써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좋은 인상을 받게 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일을 처리할 때 늘 그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충동이나 생각이 들게 한다. 그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행동 또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하나의 수법 아니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두 가지 모습이다. 첫 번째는 작은 선심을 베푸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능력과 은사, 즉 자신의 우위를 뽐내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대중을 압도하고, 군계일학 같은 면모를 드러내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고 앙모하며 기꺼이 그의 앞에 나아가 그의 지휘를 따르고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하며, 심지어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모든 안배를 받아들이고 따르게 한다. 이는 심리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은 일종의 심리전이다. 심리전이란 무엇이냐?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통제하기 위한 사탄의 수법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고 얻는다. 그럼 사탄과 적그리스도에게는 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겠느냐? 그들은 비정상적이고 사악한 수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앗아 가며,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통제함으로써 사람들이 부지중에 그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앙모의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수법에 관해서는 방금 두 가지를 교제했다. 이 밖에도 매우 대표적인 수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사람을 미혹하고 속박하는 적그리스도의 그런 수법과 행동 방식들을 겪어 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대조하여 자기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보아도 된다.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다. 수시로 작은 선심을 베풀고 사람을 미혹하며 회유하지 않느냐? 또 언제나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은사와 강점을 뽐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특히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 자기 약점과 결점이 폭로될 때, 나아가 책망 훈계를 받아 체면과 위신이 땅에 떨어졌을 때 이런 방식과 수법으로 보완하고 사람들 마음속의 자기 지위와 명망을 만회하는 이런 일을 너희는 하지 않느냐? (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이런 일을 할 때 지각이 있느냐? 그 길은 옳지 않으니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느냐? 보통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가책을 느끼지만 명예와 체면이 너무 중요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냐? 어떤 상황이냐? (어쩔 수 없이 그럽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다면 가책을 느끼느냐? 아니면 아예 느낌이 없고, 일을 마친 후에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평소처럼 먹고 자고 하느냐? (가책을 느낍니다.) 가책을 느낀다면 그나마 괜찮다. 이는 너희가 그 정도까지 무감각하지는 않으며, 그래도 지각이 있다는 의미이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있지만, 지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인성이 없으니 위험하다.
3.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호감을 사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할 때 자주 쓰는 수법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또 한 가지 상황이 있는데, 바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고 사람 앞에서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상대를 회유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회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다른 사람보다 달갑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같고, 남들보다 더 영적이고 하나님에게 충성스러우며 본분에 열심인 것 같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의 그런 행동은 본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다른 목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행동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얼마나 훌륭한지, 본분 이행에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보여 준다. 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충성이라는 출발점이 아예 없다. 그가 이루려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의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가 그렇게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여 기꺼이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용서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어떤 행위냐?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허상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느냐? 좋은 행위, 표면적으로 볼 때 진리에 부합하는 것 같은 행동 방식이다. 진리에 부합하는 것 같은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호감을 사는 것, 이를 이런 행위의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겠느냐? 결국 사람의 호감을 사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 마음속으로 얼마간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일정한 지위를 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부류는 본분 이행에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자 하고, 일을 처리할 때 대부분 경험에 기대며, 기본적으로 큰 원칙을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진리 원칙을 구하라고 교제하면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교제할 필요 없습니다. 그 일들은 다 제 마음속에 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정말로 일이 닥쳤을 때 그는 구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의 만류도 듣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더더욱 듣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할 뿐이다. 그들이 대가를 치를 때, 그들이 하는 일이 외관상으로 엄격하고 신속하여 어느 정도 권위적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보겠느냐? 호감을 갖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눈에 띄게 진리를 어긴 부분이 없고, 일 처리 방식이 매우 노련하며, 본분 이행의 ‘충성’ 정도와 경험은 탄복할 만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사람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고 이 분야의 본분 이행에 경험이 있어. 노련하다고! 우리는 그렇게 못 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좋게 본다. 한편, 사람들 마음속 그들의 비중이 높겠느냐, 낮겠느냐? (높을 것입니다.) 비중이 높고 크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번도 진리를 구해 본 적이 없다. 한편으로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흥미가 없고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며, 무엇이 진리 원칙인지 아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순전히 한때의 열정과 좋은 마음, 여러 해 동안의 경험에만 의존한다. 하지만 남들이 이 사실을 아는 걸 원치 않기에 극력 아첨하고 대가를 치른다. 만약 그들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사실, 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 처리에 원칙이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눈치채면, 그들은 서둘러 성적을 내서 보여 주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정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지, 일 처리에 원칙이 없는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지 보십시오.” 이렇게 하다 보면 적잖은 사람이 그에게 미혹되어 “그들은 본분 이행 경험이 있고 원칙을 이해합니다. 저희는 이해하지 못하고요.”라고 말한다. “저희는 이해하지 못하고요.”라는 한마디는 무엇을 드러냈느냐?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그들의 외적인 좋은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인정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들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 마음속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더 구체적으로는 일종의 명망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명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느냐? 그들에 대한 앙망과 우러름, 심지어 의존을 가져다준다. 어떻게 의존하겠느냐? 일만 생겼다 하면 그를 찾는다. 만약 누군가가 “이건 큰일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니 상부에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하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리더한테 물어보면 되죠. 리더는 뭐든지 아니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리더 일꾼은 대부분 사역으로 바쁘고 악을 행하지 않았으니 분명 진리를 깨닫는 사람일 것이고 일 처리에 원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주장이 어떠하냐? 표면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겠느냐?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제한적이다. 만약 리더는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무슨 문제가 있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하거나 하나님 말씀에서 찾지 않고 리더에게 물어본다면 일을 그르치게 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언제나 리더 말만 듣고 리더를 앙망한다면, 몇몇 일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자칫 잘못했다간 교회 사역에 손해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람을 숭배하고 앙망하면 옆길로 새거나 문제가 생기거나 자기 생명에 해를 주고, 하나님 집과 교회 사역에 손해를 끼치기 쉽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주로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작은 선심으로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강점과 은사, 능력을 뽐내는 것이다. 세 번째는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호감을 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늘 남들이 모르는 길거리 소식을 폭로하거나 고금의 일을 논하고, 명인이니 고담준론이니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 본때를 보여 준다.”라는 익은말이 있다. 이렇게 늘 한 수 보여 주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싶어 하는데, 가끔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해 빈틈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온 힘을 다해 보완하려 하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양심과 진리에 어긋나고 본분 이행과 무관한 어떤 일을 하든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법이 없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의식하기는커녕 머리를 쥐어짜고 고심해서 자기를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수습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조해하며, 심지어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사람들에게 심어 준 자신의 좋은 이미지가 일순간에 추락할까 두려워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글솜씨가 좋고 문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자기가 좋은 리더라고, 교회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며,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 그 좋은 이미지가 사라지면 그들은 그것 때문에 신경 쓰고 대가를 치르며 머리를 쥐어짜 보완하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걷는 잘못된 길과 진리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 때문에 부끄러움과 자책을 느끼거나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이렇게 느낀 적이 없다. 그들은 갖가지 수법을 써서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데, 이것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이 교회 리더가 해야 할 사역이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며, 악을 행하여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걷는 길,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갖가지 모습에 근거하면, 그들은 리더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망치고 방해하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사람들을 자기 손아귀에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모든 행위가 아니겠느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완전히 사탄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들이 한 이런 일의 성질을 볼 때, 그들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는커녕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전부 하나님의 선민을 놓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다. 본디 하나님의 양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얻어져야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양을 자기 손아귀에 틀어쥔 채 사람들이 그들을 숭배하고 따르게 한다. 바로 이런 성질이다. 이런 사람을 리더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겠느냐? (악한 종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악한 종이라는 말이 딱이다. 적그리스도, 악한 종 모두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이 사람들은 리더 본분을 이행한다는 기치를 들고 있지만, 리더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리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탄을 대변하여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며, 하나님의 선민들을 미혹하여 참도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사탄의 성품과 본성을 드러내며, 이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진리와 하나님을 저버리며, 사람을 숭배하고 따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언젠가 그들이 사람들을 철저히 미혹하고 통제하면 사람들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르고 그들에게 순종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들은 교회 리더가 되어 하나님이 맡긴 사역과 리더 일꾼 본연의 사역을 하기는커녕 기어이 하나님의 선민에게 수작을 부리며,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하고 통제하여 분명 하나님께 속한 양들을 자기 손에 움켜쥐려 한다. 이런 자는 강도나 도적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의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은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수 아니겠느냐? 하나님 선민의 원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100%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하나님 선민의 원수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과거 중국 각지 교회에서 말하고 사역할 때 내 곁에서 녹음과 설교 원고 정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은사가 있어 머리가 좋고 반응이 빨랐지만 딱 한 가지, 상황에 맞춰 듣기 좋은 말을 잘했다. 네가 음식 맛이 좋다고 말하면 그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예전에 먹어 봤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라고 말한다. 네가 오늘 날씨가 덥다고 말하면 그는 “정말 덥네요. 땀이 다 나요.”라고 말하고, 네가 오늘 날씨가 너무 춥다고 하면 그는 또 “그러게요. 저는 털신까지 신었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솔직하고 진솔한 말을 하기 힘들어했다. 겉보기에는 열심히 추구하는 것 같지만, 정말 일이 생겨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면 숨어 버린다. 교활하고 간사한 그런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럼 왜 그런 사람을 택하신 겁니까?”라고 묻는데 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사람조차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반응이 빨라서 말만 하면 언제든 녹음을 했다. 그는 나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녹음을 정리하는 등 실질적인 일을 좀 했지만, 내 앞에서 보여 주는 모습과 교회에서 하는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 내 앞에서 그는 말을 잘 듣고 영리하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랬겠느냐? 상부와 접할 때는 그러했다. 그럼 하나님의 선민들 사이에 있을 때도 그랬겠느냐? 확신할 수 있겠느냐?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와 만나서 한동안 함께 지내봐야 한다. 그러면 그의 본성 본질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난다. 그는 지위와 허영을 매우 사랑해서 누구와 함께 있든 밑천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지, 자기한테 어떤 모습들이 있는지 뽐냈다. 그는 늘 이런 일을 하고 이런 말을 했는데, 내 앞에서 보여 주는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이 밖에,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속박받고 괴롭힘 당하는데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자기가 하는 그 사역, 자기가 이행하는 그 본분을 밑천 삼아 여기저기에서 뽐냈다. 어느 정도로 뽐냈겠느냐? 모두가 그를 앙망하고 숭배하고 부러워하여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정말 큰 고생을 했습니다! 그의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세요. 저희는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와 너무 큰 차이가 나죠!”라고 말할 정도였다. 모두가 입만 열었다 하면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보는 것이 나를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들의 인식과 사상,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마지막에 이 정도에 이르렀다. 이 정도가 될 때까지 그는 많이도 말하고 일하지 않았겠느냐? 자기가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결코 한두 마디 말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자기 속셈과 목적까지 더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하여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말을 함으로써 결국 목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떠하냐? 내 곁에서 본분을 이행한 것은 처신하는 법을 배우는 측면에서든 진리를 얻는 측면에서든 그에게는 모두 좋은 일로, 온전케 될 기회를 먼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 기회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몰랐고, 그것이 진리를 얻어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이자 토대, 원천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반대로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해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목적을 이루려 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고,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가 이렇게 자기가 한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대하고 신임했는지 떠벌리고 다니면서 그 안에 내포된 자신의 속셈을 의식하지 못했겠느냐?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이다. 의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는 의식할 수 있었는데도 왜 자신의 악행을 단속하지 못했겠느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권세와 지위만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패괴를 표출할 때, 자기가 어떻게 고난을 겪었는지 증거할 때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과 참소를 느꼈을 것이고, 자기가 하는 일이 비열한 짓,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라고 생각해서 다시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 후로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지면 조심하면서 그런 일을 끊어 냈을 것이다. 이는 무척 정상적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더라도 야심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며, 책망과 훈계가 닥치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의 본성은 왜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팽창했겠느냐?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지위를 좋아합니다.) 지위는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사람들의 숭배와 우러름, 부러움을 가져다준다. 최종적으로 그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지위, 대우를 누리고 그 지위가 가져다주는 명예와 행복,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니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그에게는 더욱 역겨운 일이 있다. 나중에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스스로가 지위의 복을 누릴 자격이 더 커졌다고 생각했다. 이 사상에 지배되어 어떤 모습을 보였겠느냐? 사람들이 그에게 더 좋은 대우를 더 많이 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겠느냐?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왜 그런 요구를 했겠느냐? 그 요구가 과하다고, 무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느냐? 그는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을 위해 많은 고난을 치렀어. 그러니까 나는 그런 자격이 있어. 그렇게 고생했기 때문에 병에 걸린 거라고. 그러니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나를 돌봐 줘야 해.’라고 말이다. 그는 병에 걸린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사람들에게 시중을 들어 달라고 하고 음식을 먹여 달라고 했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답답해지자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들고 그와 함께 밖에 나가 산책하자고 했다. 이는 정말 역겹지 않으냐? 정말 이 정도까지 아프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성이 없어도 심각하게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척 열정적으로 보인다. 교회의 일에 신경 쓰고 마음을 졸이며, 늘 앞장서서 뛰어다닌다. 그러니 그가 리더가 되었을 때 모두를 실망시킬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선민들에게 존재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기는커녕 자기 명예와 지위를 위해 힘써 일하고, 늘 자신을 뽐내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 하며,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했는지 떠들어 댄다. 결코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에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이는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바쁘게 사역을 하고, 여러 장소에서 늘 자신을 뽐내며,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아 일부 사람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고,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지위를 공고히 한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가 작은 선심을 베풀어 뇌물을 주든, 아니면 자기 은사와 능력을 뽐내든, 갖가지 방식과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의 호감을 얻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사람 마음속에 지위를 차지하든 무엇을 잃게 되겠느냐? 그는 리더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보인 여러 모습으로 인해 자신의 마지막 결말을 위한 악행도 쌓이게 됐다. 지금 와서 보면, 작은 선심으로 뇌물을 주거나 사람을 농락하든, 아니면 자신을 뽐내거나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든,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그 가운데서 얼마나 큰 실익을 얻은 것 같든, 얼마나 큰 만족을 얻은 것 같든지 간에 이 길은 바른길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냐? 분명히 아니다. 이런 방식과 수단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만할 수는 없다. 결국, 모두 하나님께 정죄당하고 하나님의 혐오를 받는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사람의 야심으로,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태도와 본질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이런 자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절대 인정하지 않고, 악을 행하고 있다고 규정한다. 악을 행한 자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느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이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했는데, 그럼 어디로 가는 것이냐? 바로 사탄에게 넘기는 것이고 사탄의 집단 거주지로 보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악령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죽는다. 즉, 사탄에게 삼켜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럼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은 과연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으로, 적그리스도의 행위와 본질이다. 더 심각한 본질은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부류의 성질과 위치를 정한 것으로, 조금도 틀림이 없다.
2019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