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2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1)

1. 노아가 방주를 만들다

오늘은 먼저 이야기를 몇 가지 해 보려고 한다. 내가 얘기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에 얘기한 그 주제들과 관계가 있는지 들어 보아라. 심오한 이야기는 아니니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전에도 한 적이 있는 옛날이야기들이다. 첫 번째는 노아 이야기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는 인류가 너무나 깊이 패괴되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온갖 악한 짓을 저질렀다. 사람의 악행이 하나님 눈에 들어오고 사람의 말이 하나님 귀에 닿자 하나님은 홍수로 이 인류와 이 세상을 멸하기로 작정했다. 그게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멸하겠다는 것이었느냐?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운 좋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멸하려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노아였다.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 살아남은 사람이다. 이 시대를 끝내고 이 인류를 멸하기로 작정한 순간,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했다. 어떤 일이었느냐? 어느 날, 하나님은 공중에서 노아를 부르며 말했다. “노아야, 이 인류의 악함이 이미 내 귀에 닿았다. 나는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하려 하노라.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짓되 방주의 크기는 내가 너에게 정확히 알려 줄 테니, 너는 각종 생물을 방주로 이끌어 들여라.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이 창조한 각종 생물이 암수 한 쌍씩 방주 안에 모여들 때 하나님의 날이 곧 오리라. 그때 내가 너에게 신호를 주겠노라.” 하나님은 이 말씀을 남기고 떠났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노아는 하나님이 한 말씀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일을 시행했느냐? 하나님이 얘기한 잣나무를 비롯해서 방주를 만들 때 필요한 각종 재료를 구하는 동시에 온갖 생물을 기를 준비를 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일은 노아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드는 일을 맡긴 이후, 노아는 ‘하나님이 언제쯤 세상을 멸하시려나? 언제 이 세상을 멸한다는 신호를 내게 보내 주시려나?’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한 모든 사항을 진지하게 마음에 새긴 채 하나하나 시행해 나갔다.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인 후부터 노아는 하나님이 얘기한 방주를 만드는 일을 그의 이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아 조금도 태만히 굴지 않고 실행해 나갔다. 하루 또 하루가 지나갔고, 일 년 또 일 년이 흘렀다. 그렇게 날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세월이 흘렀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엇을 하라고 재촉하지 않았지만, 노아는 시종일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중요한 임무를 굳게 지켜 나갔다.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은 석판 위에 글자를 새겨 놓은 듯 노아의 마음에 새겨졌다. 바깥세상의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조롱해도,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는 시종일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일을 굳게 지켜 나갔지, 단 한 번도 낙담하거나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에 새겨졌고, 매일의 생활 속에서 시행되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각종 재료를 하나씩 마련하였고, 방주는 노아의 꾸준한 작업 속에 하나님이 당부한 양식과 규격대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 갔다. 비바람이 불어도, 사람들이 아무리 조롱하고 헐뜯어도 노아는 일 년 또 일 년 그렇게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였다. 하나님은 몰래 노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지만, 노아에게 또다시 어떤 말씀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은 노아에 의해 감동되었지만 정작 노아 본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고 각종 생물을 모았다. 노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지키고 실행해야 할 지고의 명령이자,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목표와 방향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무엇을 시키든, 어떤 분부를 내리든 그는 전부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겨 자신이 일생 동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했다. 그는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전부 시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준행했다. 그렇게 방주는 나무로 한 조각 한 조각 붙여서 만들어졌다. 노아의 모든 행동, 노아의 매일매일은 다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 하나님의 분부를 위해 바쳐졌다. 겉으로 볼 때 노아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일을 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노아의 일거수일투족, 나아가 그가 어떤 일을 하려고 내디딘 모든 발걸음, 그리고 그가 손으로 한 모든 일은 다 귀하고, 기념할 가치가 있는 것이자 이 인류가 응당 본받아야 할 것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굳게 지켰고,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은 참되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방주는 지어졌고, 각종 생물 역시 방주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을 멸하기 전,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곧 닥쳐오니 얼른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신호를 주었고,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행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하늘에서 폭우가 내리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분노가 내리는 것을 목격했고,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느냐? (120년입니다.) 120년이라는 시간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어떤 개념이냐? 보통 사람은 정상적인 수명으로도 살지 못하는 세월이고, 심지어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도 이만큼 산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한 가지 일을 했고, 매일 똑같은 일만 했다. 산업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아직 정보의 유통이랄 것도 없었던 시대, 모든 것을 사람의 두 손과 노동력에 의지해야 했던 시대에 노아는 그렇게 하루하루 같은 일만 했고, 120년 동안 포기한 적도, 중단한 적도 없었다. 120년이란 대체 어떤 개념이냐? 인류 가운데 한 가지 일을 120년이나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한 가지 일을 120년 동안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120년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의 부탁을 굳게 지키면서 불평한 적도, 포기한 적도 없고, 어떤 외부 환경에도 영향받지 않은 채 끝내 그 일을 하나님이 말씀한 그대로 똑같이 완수했다면, 이는 어떤 일이냐? 이는 인류 가운데서 희귀할 뿐 아니라 보기 드물고, 심지어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이다. 인류 역사 전체의 기나긴 과정을 통틀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인류 가운데 이는 극히 드문 일이다. 공사의 거대한 규모와 난이도를 보더라도, 공사에 소모된 체력과 에너지, 그리고 공사가 지속된 시간으로 보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노아가 한 이 일은 인류 가운데 극히 드문 일이며,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자 본보기이다. 노아는 그렇게 많은 도(道)를 들은 적이 없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을 많이 선포하지 않았으므로 노아는 분명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 노아는 현대의 과학이나 지식을 알지도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 인류 가운데서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느 누구와도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알았으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고 지켜야 할지, 사람의 본래 위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믿음과 순종을 보였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 몇 가지 단순한 신조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한 부탁을 완수하기에 충분했다. 그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그가 지속한 시간은 몇 달도, 몇 년도, 몇십 년도 아니었다. 백 년이 넘어갔다. 이 수치가 놀랍지 않으냐? 노아 외에 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누군가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아가 진리를 얼마 깨달았겠느냐? 왜 노아는 할 수 있었겠느냐?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누군가는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노아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었겠느냐? 어째서 노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지금의 사람들은 할 수 없겠느냐? (지금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거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겨 대하지 못하겠느냐?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얼마 듣지도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인성과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의 인성에 가장 소중한 두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양심이고, 두 번째는 정상 인성의 이성이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는 것, 이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자 한 사람을 평가하는 최소한의 기준,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이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듣고 깨달았다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사람들을 노아와 비교했을 때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인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성이 없다면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짐승, 마귀입니다.) 짐승, 마귀라는 말이 듣기 거북할지는 몰라도 사실에 부합한다. 좀 우아하게 말하자면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인성도, 이성도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며, 짐승보다도 못하다.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는 마음에 깊이 새기고 하나님의 부탁을 인생 최대의 중요한 일로 삼아 행하고 굳게 믿으며 백 년 동안 마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진정한 사람이고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방주 만드는 일을 노아에게 맡긴 것이다. 노아처럼 그렇게 인성이 있고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에 두 번째를 찾기 힘들다.

노아가 해낸 일은 사실 딱 한 가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건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들은 다음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시킨 일을 그저 조건 없이 행했으며, 하나님이 시킨 방식 그대로 집행하고 시행했다.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득실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한 말씀만 기억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려고 하니 너는 얼른 방주를 만들어라. 완성한 다음 홍수가 닥칠 때 너희는 모두 방주에 오르도록 해라. 방주에 오르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일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사실이고, 거짓은 단 한 마디도 없어. 언제 이루어질지, 언제 실현될지는 하나님의 일이고, 지금 사람의 유일한 임무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긴 다음 서둘러 시행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노아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사실이 그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너희를 노아와 비교할 때 본질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은 다음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동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인성이 없습니다.) 노아는 사람이 최소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즉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지만, 너희는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아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지만, 너희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엄연한 사실이지만, 너희는 노아가 해낸 일의 절반은 고사하고 한구석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노아는 120년을 변함없이 지속했는데, 너희는 몇 년을 지속할 수 있겠느냐? 100년? 50년? 10년? 5년? 2년? 반년? 누가 반년이라도 지속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얘기한 나무를 찾아서 벌목하고, 나무껍질을 벗겨 응달에서 말린 다음 목재를 갖가지 모양과 크기로 다듬는 일을 너희는 반년이라도 지속할 수 있겠느냐? 대부분이 반년도 지속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다면 석 달은 어떠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석 달도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체구도 작고 피부도 약합니다. 숲에는 모기도 있고, 빈대도 있고, 개미도 있고, 벼룩도 있잖아요. 저한테 달려들면 정말 그 고통은 못 견딜 겁니다. 또 매일 나무를 베는 지저분하고 힘든 일을 바깥에서 바람과 햇볕을 맞아 가며 하다가는 이틀도 못 가서 햇볕에 타 버리고 말 거예요. 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분부하실 일 중에 좀 가벼운 일은 없을까요?” 하나님이 너에게 무슨 일을 분부할 때 네가 선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석 달도 지속하지 못한다면, 네게 진실한 순종이 있겠느냐? 네게 순종하는 실제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석 달도 지속할 수 없다면, 보름은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저는 잣나무가 뭔지도 모르고, 나무를 벨 줄도 몰라요. 벌목할 때 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쓰러지는지도 모르고요. 만에 하나 깔리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게다가 나무를 베고 나서도 전 기껏해야 한두 개 정도밖에는 짊어지지 못해요. 더 많이 짊어졌다가는 어깨랑 허리가 다 작살나지 않겠어요?” 보름도 지속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시행하라고 한다면, 너희는 뭘 할 수 있겠느냐? 컴퓨터를 다루고 명령을 내리는 것 말고 뭘 할 줄 아느냐? 노아의 시대였다면 너희가 하나님이 부르는 대상이었겠느냐? 단연코 아니었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부르는 대상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아닌 네가 살아갈 자격이 있겠느냐? 홍수가 닥쳤을 때 너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겠느냐?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면 너는 멸망의 대상이다. 하나님 말씀을 시행하는 데 보름도 지속하지 못한다면, 너는 어떤 인간이냐? 네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집행할 수 없다면, 보름도 지속할 수 없고 보름도 고생을 견디지 못한다면 네가 깨달은 그 정도의 진리는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냐? 너 자신을 단속하는 데 조금의 작용도 하지 못한다면 진리는 너에게 글자에 불과할 뿐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토록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면서 너에게 하나님 말씀을 시행하고 15일만 고생하라고 해도 견디지 못하겠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겠느냐? (아닙니다.) 노아가 받은 고통, 그가 지속한 120년과 비교할 때 너희는 노아와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비교 자체가 안 된다. 하나님이 노아를 불러서 하려는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이 보기에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큰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 신뢰할 만한 사람,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하지만 너희는 이 몇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짐작하겠지만 너희는 하나님 눈에 무엇이겠느냐? 사람이겠느냐?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그 답은 매우 분명하다. 자격이 없다! 나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15일로 줄였는데, 겨우 2주밖에 안 되는데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무엇을 뜻하느냐? 너희의 믿음, 충성심, 순종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너희가 스스로 생각하는 믿음, 충성심, 순종은 내가 볼 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스스로가 훌륭하다고 우쭐대지만 내가 볼 땐 너무나 형편없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감탄스럽고, 가장 본받을 만한 것은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굳게 지키며 순종하고 충성했다는 점이다.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골랐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하나님이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했고 노아를 불렀으며, 하나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노아 역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순조롭게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일을 완수했다. 이를 두고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바요, 이것이 바로 증거이다! 그런데 너희에게는 그런 모습, 그런 느낌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다. 그러니 너희에게는 그런 증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너희에게서 드러나는 것, 하나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치욕의 기호이고, 말했을 때 감동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 노아의 여러 가지 모습, 특히 그가 의혹을 품거나 변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100년 동안 굳게 믿으며 흔들림 없이 100년간 계속해서 방주를 만들었다는 점, 바로 그런 믿음과 의지력은 지금 사람과는 비교 불가이며,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아의 충성심과 순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여기에 사람이 소중히 여기고 본받을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지금 사람들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구호를 외치고 도리를 얘기하는 것이다. 마치 진리를 많이 깨닫고 진리를 얻은 것 같지만 노아와 비교하면 노아가 한 모든 일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얼마나 거리가 머냐! 천양지차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일에서 볼 때,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알아차렸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품성, 어떤 마음, 어떤 인격을 갖춰야 하겠느냐? 노아가 갖춘 것들을 너희는 갖추었느냐? 만약 스스로가 노아의 믿음과 인품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조건을 따지고 거래를 한다 해도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전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에게 솔직히 한마디 하겠다. “잘난 체 그만해라. 넌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 눈에 구더기만도 못한 네가 뻔뻔하게 하나님과 조건을 따지고 거래를 하려 드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구더기만도 못하다면, 하나님 집에서 개라도 하면 안 됩니까?” 안 된다. 너는 자격이 없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 집의 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볼 때 너는 집 지키는 개만도 못하다. 이 말이 너희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 듣고 있자니 기분이 씁쓸하지 않으냐? 이는 일부러 너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으로, 조금도 거짓이 아니다. 너희는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모습을 보인다. 너희는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한 부탁을 이렇게 대한다.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고, 모두 내 속마음이다. 노아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다

또 하나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는 두 명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집을 찾아왔고, 아브라함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사자들의 이번 임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뒤에서 몰래 웃었다. ‘그건 불가능하지. 내 나이가 몇인데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나에게 아들을 주신다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는 믿지 않았다. 사자는 사라의 웃는 소리를 못 들었겠느냐? (들었습니다.) 당연히 들었고, 하나님도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조용히 관찰했다. 우매하고 무지한 여자인 사라는 그 일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하기로 결정한 일은 사람의 간섭을 받겠느냐? (받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반대하고, 거절하고, 항의합니다. 의견 있습니다!” 말이 되느냐?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고, 불만이 있고, 믿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에게 해명하고, 그 안에 담긴 이치를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무지한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이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하나님 마음속에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그는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만사 만물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이 주재한다. 사람이 언제 자식이 생기고 어떤 자식을 얻는지 등을 포함해 이런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노라고 했을 때, 사실 그 뒤를 이어 하나님이 하려고 마음먹은 많은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해 놓았다. 그 아들이 앞으로 어떤 직책을 맡고 어떤 인생을 살지, 그의 후대는 어떨지 등, 이런 일련의 일들을 하나님은 이미 계획해 놓았고, 어떤 실수도 없고, 어떤 변동도 없다. 그러니 한 우매한 여자의 웃음이 무얼 바꿀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한 바를 행하였으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얘기한 대로, 하나님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무려 백 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는 백 년을 살면서도 아들이 없어서 삶이 무미건조하고 또 무척 쓸쓸했다. 백 살 된 사람이 자식, 특히 아들이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내 인생도 완벽하지는 않지. 하나님이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인생이 조금 쓸쓸하고 조금 아쉽기도 하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자를 보내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의 기분은 어떠했겠느냐? (기뻤습니다.) 기쁜 나머지 기대로 충만했다. 살아생전에 자식을 기를 수 있게 해 준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했다. 이건 정말 기묘한 일인데, 그 기묘한 일이 이렇게 발생했다. 그렇다면 그가 기뻐할 만한 일이 몇 가지가 있느냐? (후대가 생겨서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그것이다. 또 가장 기쁜 일 한 가지는 무엇이냐? (그 아이는 하나님이 친히 주셨습니다.) 맞았다. 평범한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 주었느냐? “이 아이는 내가 친히 너에게 주는 것이고, 내가 전에 약속한 아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했느냐? 아니다. 그 아이의 특별한 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친히 아브라함에게 알린 점이다. “너는 백 살에 자식을 하나 얻을 것이니, 그 아이는 하나님이 친히 너에게 주는 아이다.” 그 아이의 특별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알려 준 데다 하나님이 친히 준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축하할 만한 일이냐! 그 아이의 특별한 의의를 사람은 계속 생각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본 아브라함은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드디어 자식이 생겼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어.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주셨어!’ 태어난 그 아이를 제 손으로 품속에 안았을 때, 그의 맨 처음 느낌은 분명 이랬을 것이다. ‘나는 사람 손이 아닌 하나님 손에서 이 아이를 넘겨받았어. 이 아이는 너무나 시의적절하게 왔고, 하나님이 주신 아이야. 정성껏 기르고 가르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아이로 키워야지. 이 아이는 하나님에게서 왔으니까.’ 그가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특별한 아이였다. 게다가 나이 많은 아브라함이 그 아이를 어느 정도로 사랑했을지는 지금도 쉽게 상상이 간다. 정상적인 사람이 자식을 몹시 아끼고, 안쓰럽게 여기고, 총애하듯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울러 그는 이번 하나님 말씀이 발화되고 이루어지기까지 과정을 증거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권병이 있고, 하나님이 한 일이 얼마나 기묘한지를 느낀 한편,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을 생각하는지를 느꼈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기분이 복잡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가 속으로 하나님에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한 마디, 너희 생각에는 그것이 어떤 말이겠느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입니다.)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는 감격과 동시에 하나님에게 깊은 감사와 찬미를 바쳤다. 이 아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주겠다고 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이루기로 계획하고 결심했고, 이 아이에게서 중요한 일, 중대한 일을 이루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 이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인류 역사 전체의 발전 과정과 전 인류를 통틀어 그는 평범함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 가치와 존재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겠느냐? 아니다. 중요한 부분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이삭을 얻은 다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와 요구대로 정성껏 이삭을 길렀다. 매일 평범한 세월 속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제사를 드리며 이삭에게 하늘의 하나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삭은 조금씩 철이 들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법을 배우고, 말씀을 따르는 법을 배우고, 제사 지내는 법을 배웠다. 그는 제사를 지내는 시간, 제단이 놓인 위치도 알았다.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이삭이 막 철이 들면서 아직은 성숙하지 않을 무렵,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했다. “이번 제사에는 어린양 대신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이 이삭을 보배처럼 아끼는 아브라함에게는 마른하늘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니었겠느냐? 아브라함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물론, 30, 40세 장년이라 해도 이런 소식을 듣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뭐?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셨나?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실 리가 없는데. 내가 나이가 많고 귀가 먹어서 잘못 들은 건가? 다시 확인해 보자.’ 그가 물었다. “하나님, 저더러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까? 이삭이 당신이 원하시는 제물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했다. “그렇다, 틀림없다!” 재차 확인한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이 틀릴 리 없고,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정확한 뜻임을 알았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속으로 괴롭지 않았겠느냐?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괴로웠겠느냐? 그는 생각했다. ‘몇 년 사이 아이가 드디어 자랐는데 산 제물로 바친다면 제단 위에서 어린양처럼 도살당해야 한다는 뜻이야. 도살은 곧 죽음이고, 죽는다는 건 오늘 이후로 아들을 볼 수 없다는 말인데….’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가 감히 계속 생각할 수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계속 생각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 고통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생각을 계속한다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그저 고통일 뿐이었다. 이건 단순히 그 아이를 데려가는 게 아니었다. 며칠, 몇 년은 못 보지만 그래도 자식이 계속 살아 있고, 속으로 걱정은 되지만 자식이 다 크면 적절한 시기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식을 일단 제단 위에 바치면 사라지는 것이고 더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바쳐서 돌려보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 아이 없이 쓸쓸하게 지냈는데, 만약 계속 그렇게 지냈다면, 계속 그 아이가 없었다면 고통스러웠겠느냐?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겼다가 잃어버리면 그 고통은 너무나 크다. 그건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자식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린다는 것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노는 모습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자식을 기를 수 없고, 즐겁게 해 줄 수도 없고, 자식이 자라서 성인이 되는 것도 지켜볼 수 없고, 자식이 곁에서 함께해 주는 그런 천륜의 즐거움도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 남은 것은 오직 고통과 그리움뿐이다. 아브라함은 생각할수록 괴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은 농담도 아니고, 잘못될 리도 없어. 바뀌는 일은 더더욱 없어. 게다가 이 아이는 원래부터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사람은 마땅히, 그리고 두말없이 돌려 드려야 해. 십 년간 천륜의 즐거움은 특별한 은혜였고, 사람은 그것을 충분히 누렸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돼. 본래 이 아이는 하나님의 거야. 사람이 자기 소유로 차지해선 안 되지. 그건 사람의 사유 재산이 아니야.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왔어.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따지거나 조건을 달면 안 돼. 하물며 이 아이는 하나님이 친히 알려 주시고 친히 주셨으니 그분이 바치라고 하시면 바쳐야지!’

시간은 일분일초 어김없이 흘러가고 제물을 바쳐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갈수록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점차 차분해졌다. 어째서 차분해졌느냐? 무슨 원인으로 그가 고통에서 빠져나와 마음속으로 이 일을 올바른 태도로 대할 수 있었느냐? 그는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을 대할 때 사람의 태도는 순종이어야 하며 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는 어린 이삭을 데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여느 때처럼 준비된 어린양이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다. 이삭이 물었다. “아버지, 오늘 바칠 제물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나요? 그럼 오늘은 뭘 바칠 건가요?” 이삭의 그 질문에 아브라함은 어떤 심정이었겠느냐?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는 어떻게 했느냐? 속으로 하나님을 미워했느냐? 하나님을 원망했느냐? 저항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다음 일어난 일련의 일을 보면 아브라함은 정말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불붙일 나무를 제단 위에 놓고 이삭을 불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앞으로 불러들이는 그 장면, 그 시점에 방관자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저 노인네가 독하기도 하지. 인성도 인간미도 없게시리! 당신 아들인데 정말 모질게 그럴 수 있소? 정말 손댈 수 있겠소? 당신 마음이 그렇게 독하오? 정신이 있소, 없소?’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런 생각을 했느냐? (안 했습니다.) 그는 이삭을 곁으로 불러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준비해 둔 밧줄을 꺼내 이삭의 손발을 묶었다. 그가 한 일련의 동작을 볼 때 그가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 정말이냐, 거짓이냐? 그는 정말로 바치려고 했고, 불순물은 전혀 없었다. 하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삭을 들어 올렸다. 그 어린아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쳐도 아브라함은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직 미성년인 친아들을 제단의 불붙일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이삭은 울고 소리치고 발버둥 쳤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해 제물을 바치는 일련의 동작을 하면서 제물로 바칠 물건들을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뒤, 아브라함은 평소 어린양을 잡던 칼을 꺼내 두 손에 움켜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이삭을 겨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리려는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했느냐? “아브라함아, 멈춰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려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한 자 한 자 그의 마음을 내리눌렀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목숨을 건졌다. 오늘 진짜로 하나님에게 바쳐질 제물이 아브라함의 뒤에 있었다. 하나님이 어린양 한 마리를 미리부터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징조도 미리 보이지 않았다가 그가 칼을 들어 내리꽂으려는 순간에야 그에게 멈추라고 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브라함도 생각지 못했고, 이삭도 생각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한 일을 볼 때, 아브라함이 이번에 제물을 바치려던 건 진심이었느냐, 아니면 거짓이었느냐? (진심입니다.) 진심이었고, 불순물이나 기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혈육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이 그에게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토를 달지 않았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바쳐도 괜찮고 저 자신을 바쳐도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아들을 하나님에게 바쳤다. 어떻게 바친 것이냐?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바로 그렇게 했다. 사람이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었다가 자식이 자란 다음 다시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라고 하며 도로 가져가려고 한 것이 사리에 맞겠느냐?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이건 억지 아닌가? 장난하는 거 아닌가? 오늘은 주었다가 몇 년 후에는 다시 달라고 하다니. 가져갈 테면 가져갈 거지, 사람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자식을 제단 위에 바치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제단 위에 바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고, 죽인 다음에는 또 불로 태워야 한다.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느냐?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치라고 하는 건 무슨 뜻이냐? 이 몇 가지 일을 네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뜻이다. 네 손으로 그를 묶고, 네 손으로 그를 제단 위에 올리고, 네 손으로 칼을 들어 그를 죽이고, 그런 다음 다시 네 손으로 불을 붙이고 그를 태워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련의 일은 사람이 볼 때 하나도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사람의 관념과 머리, 사람의 윤리 철학, 도덕 풍속에 비춰 볼 때 어느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현실과 동떨어져서 살거나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의 생각과 관점을 가진 그에게 이 모든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어떻게 바라보았느냐? 고통스러워하고, 또 풀리지 않은 몇몇 의혹을 품은 것 외에 그가 반기를 들고, 거절하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욕했느냐?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이 일을 분부한 순간부터 그는 감히 등한시하지 못하고 바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동안 그는 어떤 심정이었느냐?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느냐, 아니면 고통스럽고 비통하고 침울했느냐? (고통스럽고 비통했습니다.)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내딛는 걸음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 일을 알고 난 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뒤 아브라함은 하루가 일 년 같고, 행복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으며,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신념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 바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나의 주 여호와의 이름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옳든 그르든, 이삭이 어떻게 생긴 자식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과 태도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그에게 일말의 고통도, 일말의 어려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통스러웠고, 자신만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걸 이겨 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친아들, 어린 자식을 제단 앞에 데려왔다. 그가 한 모든 것은 하나님 눈에 새겨졌다. 노아를 지켜본 것처럼 하나님은 똑같이 아브라함이 한 모든 동작을 지켜봤고, 그 모든 동작은 하나님을 감동시켰다. 비록 이 일의 궁극적인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지만 아브라함이 한 일은 인류 전체를 통틀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인류의 모범이다. 어째서 인류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냐? 아브라함은 진리를 얼마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진리나 도를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순하게 믿고, 인정하고, 말씀을 따랐다. 그의 인성은 어떤 남다른 것을 갖추었느냐? (피조물의 이성을 갖추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말에 구현되었느냐?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주 여호와의 이름은 칭송받아 마땅하며 나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볼 때 하나님 말씀이 관념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나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상 인성의 양심을 갖추었다. 이 양심은 어디서 구현되었느냐? 그는 이삭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이 달라고 하면 사람은 언제든지 마땅히 돌려 드려야지 계속 그것을 차지해서는 안 되며, 이것이 사람이 갖춰야 할 양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사람들은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있느냐? (아닙니다.) 이 부분은 어떤 일에서 구현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고 사람이 그 축복과 은혜를 얼마나 누리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라고 하면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저항하고, 때로는 고생을 싫어하고 힘든 일을 꺼리기도 합니다.) 고생을 싫어하고 힘든 일을 꺼리는 것은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유를 대고, 조건을 달고, 거래를 하려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불평하고, 건성으로 대하고, 꾀를 부리고, 육적인 편안함을 탐하는 것도 다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사람들은 양심이 없다. 언제나 하나님 은혜를 찬미하고, 하나님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지만, 다 헤아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여전히 건성으로 대하고, 여전히 대충 때우고, 여전히 속이고, 여전히 꾀부린다. 구체적인 회개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 은혜를 헤아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이 양심이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없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나님이 책망하고 훈계하면 원망스럽고 기분이 상해서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 고생하거나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에 약간이라도 어려운 점이 있거나 그 상황이 조금이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바로 싫어한다. 또 하나님이 마련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순종을 구하지 못하고, 육만 챙기려 하고, 제멋대로 굴려 한다. 이런 게 이성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에게 좋은 것만 바라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사역을 시행하고 고생을 하면 자격을 내세우고, 높은 데 앉아 지위의 복이나 누리며, 간부티를 내기 시작한다. 또 실제적인 사역은 아무것도 안 하려 하고, 시행하지 못하면서 그저 지시나 내리고 감투나 쓰려 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멋대로 날뛰며 함부로 굴려 한다. 제멋대로 굴고 막 나가는 것밖에는 다른 건 없다. 이것이 이성적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훌륭한 자식을 준 다음, 나중에 다시 앗아가겠다고 직설적으로 말씀한다면 너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아브라함과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왜 못 합니까? 제 아이는 스무 살이 다 됐는데 저도 그 아이를 하나님 집에 바쳤습니다.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답니다!” 그걸 지금 바쳤다고 하는 것이냐? 너는 기껏해야 아이가 바른길을 가도록 이끈 것뿐이다. 하지만 다른 목적도 있다. 자식이 재난 속에서 죽을까 봐 걱정인 것이다. 그런 게 아니냐? 그런 건 바치는 게 아니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분부를 듣고 난 다음 그 분부를 집행하는 어려움을 볼 때 아브라함에게, 또 모든 인류 각자에게 그 어려움의 정도가 얼마나 크겠느냐? 이 일이 가장 어려우며, 어떤 일도 이보다 어렵지는 않다. 이건 양이나 금전 따위를 바치는 것이 아니다. 몸 이외의 것, 물질적인 것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동물을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이 한순간의 열정으로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바치라고 한 그 제물은 한 사람의 목숨, 아브라함의 혈육이었다.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느냐! 또한, 그 아이에게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으니 그는 하나님이 준 아이였다. 하나님이 준 목적이 무엇이냐? 그를 성인으로 잘 기르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대를 잇게 하라는 뜻이다. 아직 미성년인 그 아이를 지금 다시 하나님에게 돌려 드려야 한다면, 그 이후의 일들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시 아이를 준 의미가 어디에 있겠느냐? 방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일을 납득할 사람이 있겠느냐? 인류의 관념으로는 납득하지 못한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심이 있기에 그걸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브라함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대체 어쩌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일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그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분부를 따를 수 있었고,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었고,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구절에 표현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었다. 반항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고 나아가 하나님에게 조건을 내세우거나 이치를 따지지도 않았다. 그는 일의 자초지종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순종하고, 말씀을 따랐다. 이것은 정말 갸륵한 일이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희 중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다. 아브라함은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하나님이 그에게 자초지종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는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 하든 사람은 묻지 말고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이 말을 아낀다면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런 건 분명하고 확실하게 물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어야죠.” 이것이 피조물이 지녀야 할 태도이냐?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았는데, 그것이 네가 알아야 할 것이냐?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너에게 이해시킬 생각이었으면 진작 알려 주었다. 알려 주지 않은 건 네가 알 필요가 없다. 네가 이해할 필요가 없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는 네가 어떻게 하는지, 순종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이것이 너희에게 어려움이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너희의 순종은 사라지고 불평과 오해, 대항만 남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너희의 모습은 정반대다. 그도 너희와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라고 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겠느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겠느냐? 그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얘기하지 않는데 어디 가서 물어보겠느냐? 누구한테 물어보겠느냐? 하나님의 일은 모두 비밀이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누가 하나님의 일을 훤히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에게 물어봐도 사람은 모른다. 자기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해도 납득이 안 되고, 이해도 안 된다. 그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냐?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관찰해도 되고, 미뤄도 되고, 기회를 기다려도 되고, 다른 선택지를 찾아도 되는 것이냐?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이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인권을 물고 늘어지면서 “저도 인권이 있습니다. 저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저더러 어리석은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저도 엄연한 사람이니 당신 말씀을 안 들어도 됩니다.”라고 말해도 되는 것이냐? 아브라함이 이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자신을 평범한 피조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이 한 말씀을 등한시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실행하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이 뭐라고 얘기하면,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 주면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으며, 사람이라면 마땅히 들어야 한다. 들었으면 실행해야 하고, 실행했으면 철저하게 순종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너의 하나님으로 확신한다면 마땅히 그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마음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의 말씀이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라면 그의 말씀에 대해 분석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네가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얘기하면 너는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브라함은 이런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이 분부 일에 순종할 수 있었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인,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고상하고 위대한, 안하무인인 사람들 눈에는 아브라함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였을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 친아들의 생명을 상관하지 않고 마음대로 제단 위에 올려 죽이려 하다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가! 이 얼마나 자격 없고 모진 아비인가! 자신의 신앙을 위해 그도 너무나 이기적이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의 눈에 비친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렇게 생각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순종했느냐? 에누리 없이 그대로 순종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하나님이 원할 때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시키는 모든 일에 따르고 순종했다. 사람의 관념으로 보든, 패괴된 사람의 눈으로 보든, 하나님이 한 이 요구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든 아브라함은 모두 순종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인격, 즉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다. 진정한 믿음과 순종은 어디에서 구현되느냐? 그건 바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피조물에게 가장 귀하고 값진 것, 가장 갸륵한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장 귀하고 가장 갸륵한 것이 지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은 교양도 있고, 지식도 있고, 현대 과학을 이해하고 있는 데다 전통문화와 패괴된 사회 풍조에 깊이 전염되고 물들고 영향을 받아 활발한 사상과 복잡한 관념을 지니며, 내면이 혼돈하다.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어서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임을 인정하고 믿는 이런 전제하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을 오만불손하고 무심한 태도, 무시하는 태도, 보고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하는 태도로 대한다. 이건 어떤 인간들이냐? 어떤 일이든 이유를 물으려 하고, 어떤 일이든 자세히 알려 하고, 결말을 알려 하는 게 마치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는 듯하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헌신, 버림을 볼 때, 하나님 믿는 일에 대해, 신앙에 대해 일종의 불굴의 태도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이 하는 모든 분부에 대해 가슴에 손을 얻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너희는 그것들을 지켰느냐? 시행했느냐? 너희는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냐? 만약 속으로 계속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네 신앙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과연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을 믿고 과연 무엇을 얻었느냐? 이런 일들은 사람이 깊이 토론할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탐구할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너희는 다들 안경을 걸친 현대의 문명인이다. 현대는 어디에 있고, 문명은 어디에 있느냐? 이 두 가지 수식어가 네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겠느냐?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교육 수준도 높고 신학 공부도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는 고전과 성경을 여러 번 읽었고, 히브리어도 할 줄 압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는 이스라엘도 여러 번 다녀오고,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도 만져 봤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는 아라라트 산에 가서 방주 유적도 봤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들림 받았다고요!”라고 말한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다른 높은 요구는 전혀 없고, 다만 착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따를 것만 요구한다. 이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아무 얘기도 필요 없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너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이야기만 알아서는 소용이 없다. 이 두 사람에게서 가장 갸륵한 점이 무엇인지 너희는 생각해 봤느냐?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되고 싶습니다.) 얼마나 되고 싶으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밥 먹을 때도, 꿈꿀 때도, 본분을 이행할 때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울 때도 되고 싶습니다. 기도도 정말 여러 번 했고 맹세하는 각서도 썼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를 저주해 달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제게 말씀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천둥 치는 것처럼 그렇게 제게 알려 주지 않으시니까요.” 그런 것들이 소용이 있느냐? 너의 그 ‘정말 되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냐? (일방적인 소원이고, 바람입니다.) 바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건 마치 한 도박꾼이 매일 도박장을 찾아가 돈을 다 잃고도 또 도박을 하려 하는 것과 같다. 이번 한 번만 끝나면 딱 끊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생각할 때도 있다. 꿈에서도 생각하고 밥 먹을 때도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가 결국 또다시 도박장으로 향한다. 매번 도박장에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매번 도박장 문을 나서면서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 평생을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한다. 너희가 이런 도박꾼과 같지 않으냐? 늘 다짐하지만 다짐을 저버린다. 하나님을 속이는 게 버릇이 돼서 이제는 달라지기가 쉽지 않다.

3.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폭로하다

방금 한 이야기는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이냐?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일이 생겼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에서 너희는 주로 무엇을 깨달았느냐?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를 줄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너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자, 피조물, 하나님 눈에 든 사람이라고 하지만, 네가 살아 내는 모습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은 후의 실행과 순종을 조금도 볼 수 없다면 ‘피조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 눈에 든 사람’과 같은 몇몇 칭호에 물음표를 그려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물음표를 그려 보니까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 알 수 없고 아주 막연해서 너 자신도 감히 단언하지 못한다. 앞서 하나님 말씀을 따른 사람에 관한 고전적인 이야기 두 개를 했다. 성경을 읽은 사람이나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거기서 ‘하나님 말씀을 따른다’는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읽어 낸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따르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번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바로 오늘날 사람의 이야기이다. 내가 하는 말 중 어떤 것은 아마 좀 듣기 거북할 수도 있고, 너희 체면과 자존심에 상처를 줘서 너희의 인격과 존엄성이 훼손될 수도 있다.

밭 한 뙈기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채소를 좀 심으라고 일렀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유기농 채소를 먹을 수 있고, 화학 비료와 농약을 사용한 채소를 살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다 같이 한 가족처럼 지내고, 또 함께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회의 흐름을 멀리하고, 사회의 다툼을 멀리하는 이런 환경을 만들면 다들 마음 놓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이것은 작은 틀에서 봤을 때의 얘기다. 큰 틀에서 얘기하자면, 채소를 길러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 확장에 일조하는 것으로,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하는 것도 적절한 처사다. 나는 채소를 심어서 주변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도 다 먹을 수 있게 하라고 했는데, 아주 이해하기 쉬운 말이 아니냐? 당시 내가 지시한 사람도 내 말을 알아듣고 자주 먹는 채소 몇 가지를 심었다. 내 생각에 채소 심는 일은 간단해서 일반 사람들도 다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의 각종 사역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에 나는 그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곳에 갔더니 사람들이 다들 자기들이 기른 채소를 먹고 있었으며, 먹고 남을 때는 닭에게 준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채소를 이렇게 많이 심었으면 생산량이 꽤 됐을 텐데 교회에 나눠 주었느냐? 다른 교회 사람들은 우리가 심은 채소를 먹었느냐?” 어떤 사람은 모른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곳 사람들은 채소를 직접 사 먹고 여기서 심은 건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각자 하는 말이 달랐다. 아무도 이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자기만 먹으면 그만이었다. 참 역겹지 않으냐? 나중에 내가 여기 책임자에게 말했다. “너희가 기른 채소를 너희가 먹는 건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먹어야지. 여기는 이렇게 많이 심어서 다 먹지도 못하는데 다른 데는 채소를 사 먹는 게 합당하냐? 전에 얘기하지 않았느냐? 이 채소들은 길러서 너희만 먹을 게 아니라 주변 교회들에게도 나눠 주라고 말이다.” 너희가 볼 때, 이런 일을 내가 굳이 여러 번 당부하고 명문화해야 하겠느냐? 내가 대대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모임을 열고 설교까지 해야 하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람이 그만한 마음도 없겠느냐? 그만한 마음도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나는 또 한 번 일렀다. “얼른 나눠 줘야 하니 시행하도록 해라.” 그가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한번 보죠.” 이런 태도였다. 얼마 후 또다시 그곳에 갔더니 밭에는 온갖 채소가 한가득이었다. 채소를 기르는 사람들에게 수확한 채소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많아서 다 못 먹을 정도이고 썩은 것도 있다고 했다. 이번에도 주변 교회에 나눠 줬는지 물었더니 자기들은 모른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며 어물쩍 넘기려 했다. 딱 봐도 아무도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고, 자기들만 먹으면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또다시 그 담당자를 찾아서 도대체 채소를 나눠 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눠 줬다고 했다. 나눠 준 상황이 어떤지 물었더니 그는 다 나눠 줬다고 했다. 여기까지 듣고 너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느냐? 그 사람들은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 충성심과 책임감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역겨운데, 더 역겨운 일은 뒤에 나온다. 나중에 주변 형제자매들에게 채소를 받았는지 또 물어봤더니 형제자매들은 이렇게 보고했다. “받긴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낸 것들이 시장에서 버린 채소만도 못했어요. 이파리도 전부 상하고 모래랑 돌까지 섞여서 먹을 수가 없었지요.” 너희는 이 말을 들으니 어떤 기분이 드느냐? 속이 끓고 분노가 치밀지 않느냐? (분노가 치밉니다.) 너희도 분노하는데 내가 화가 안 나겠느냐? 채소는 마지못해 조금씩 나눠 줬는데, 별로 시원치 않았다. 이 나쁜 짓은 누가 저질렀느냐? 여기 어떤 악인이 있어서 그가 나눠 주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내 명령에 그가 뭐라고 했느냐? “저한테 나눠 주라고 하시길래 상하거나 우리가 안 먹는 것들을 나눠 줬는데, 이것도 나눠 준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알고 난 뒤 나는 이 마귀 같은 인간을 내보내라고 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데 감히 여기서 제멋대로 날뛰느냐? 여기는 사회도, 자유 시장도 아닌 하나님 집이다. 여기서 행패 부리고 날뛰려면 나가야 한다. 널 용납할 수 없으니 내 눈앞에서 썩 꺼지도록 해라! 될 수 있는 한 멀리 사라지고, 처음 왔던 곳으로 꺼져라!” 너희가 볼 때 내가 이렇게 처리한 것이 옳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옳으냐? (이런 사람은 인성이 너무 형편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인성이 없는데도 어째서 내보내지 않은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양심과 이성도 없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지만, 악행을 저지르거나 교회 사역을 교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본분 이행과 교회 생활에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우선 남겨서 봉사하게 하고, 악행을 저질러 방해하고 교란하면 그때 내보내도 늦지 않다. 이 인간은 왜 내보낸 것이냐? 그는 하나님 집에서 활개치고 다니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해서 형제자매들의 정상적인 생활과 하나님 집의 사역에 영향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태해서 본분도 건성으로 이행한다고 했다. 그런 것이냐? 그는 전체 형제자매와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사람에 맞서고 하나님에 맞서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 집을 점거하고 하나님 집에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 했다. 결정권을 갖고 싶으면 좋은 일을 했어야지, 그는 좋은 일은커녕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고 하나님 선민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만 저질렀다. 이런 사람을 너희는 용납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도 용납하지 못하는데 내가 그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악인을 제명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자를 간파하지 못하고 속으로 나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언급하는 이 순간에도 내가 처리한 방식이 부적절하다고, 하나님 집이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건 어떤 인간들이냐? 너희는 이자가 청경채를 어떤 식으로 땄는지 알고 있느냐? 일반적으로 청경채는 통째로 캐내지 않느냐? 잎사귀를 하나씩 따서 먹는 사람이 있더냐? (없습니다.) 이 괴짜는 통째로 캐내는 게 아니라 잎사귀를 따서 먹게 했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왜 통째로 캐내지 못하게 했겠느냐? 통째로 캐내면 밭에 빈 공간이 생겨서 다시 땅을 갈고 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줄이려고 잎사귀를 따서 먹게 했다. 그가 이렇게 시켜도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들은 노예처럼 그의 말을 따랐고, 그는 거기서 결정권을 휘둘렀다. 너희가 볼 때 그를 내보내지 않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이런 자는 남겨 두면 화근이 된다. 그가 간혹 좀 괜찮은 모습을 보인 건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가 한 일은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교란하고 파괴하거나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는 태생부터가 마귀이고, 하나님과 맞서는 자이고, 적그리스도 부류에 해당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 집에 머물게 할 수 있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자를 아직도 누군가는 감싸고 있다. 그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어리석으냐? 역겹지 않으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냐? 사랑이 있으면 네가 그를 먹여 살려라. 사랑이 있으면 그가 입히는 화는 너 혼자 당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는 손해를 입히지 못하게 해라! 사랑이 있으면 그가 정리되어 나갈 때 너도 따라 나가거라. 왜 여기서 비비고 있느냐?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 무리는 태생이 마귀다! 내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는다. 내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기어이 서쪽으로 가고, 내가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기어이 동쪽으로 가면서 나와 맞서기만 한다. 말을 좀 따르는 게 왜 그리 힘든 것이냐? 내가 그에게 채소를 다른 형제자매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고 그의 몫이 줄어들었느냐? 그가 채소 먹을 권리를 내가 박탈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나눠 주지 않았느냐? 그가 직접 들고 갈 필요도 없고, 별로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는 좋은 건 못 줄망정 상한 걸 주었다. 얼마나 못된 짓이냐? 그러고도 사람이냐? 나는 채소를 나눠 주라고 했지 쓰레기를 나눠 주라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을, 손만 좀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하지 못했다. 그게 사람이냐? 그만한 일도 못 하면서 하나님에게 무슨 순종을 한다는 것이냐! 너는 각을 세우고 대항하면서도 하나님 집에서 비비며 살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냐?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신은 전에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여기서 몇 사람을 내보냈습니다. 우리는 전부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도 만류하고 싶었는데, 당신은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까?’ 마귀의 입에서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너희가 볼 때 가능한 일이냐? (불가능합니다.) 그는 설령 입으로는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일할 때는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칭송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마귀이고, 외식하는 자이다.

채소를 나눠 주는 사소한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집에 살고, 하나님의 물건을 쓰면서 결국 하나님이 다 먹지 못하는 채소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나눠 주라고 했을 때 순종했느냐? 그 말이 시행될 수 있었느냐? 사람에게서는 시행되고 집행될 수 있지만 마귀 사탄, 적그리스도에게서는 영원히 시행될 수 없다. 그는 생각한다. ‘이 채소들을 나눠 주면 나의 선행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이 채소를 먹고 나서 다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나님이 시킨 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나한테는 누가 고마워하지? 내가 막후의 영웅이야. 내가 힘을 썼고, 내가 채소를 심었으니 당신은 나에게 감사해야지. 나한테 감사하지 않고 내가 한 것을 몰라준다면 내가 심은 채소를 먹을 생각도 말라고!’ 그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냐? 악하지 않으냐? 너무나 악하다! 악인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겠느냐? 그는 태생이 마귀 사탄이며, 하나님과 대립하며 진리에 저항하고 진리를 멸시하는 자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한다면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느냐? 필요가 없다.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그를 쫓아내 버리고, 그 대신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이렇게 간단하다.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냐? (합당합니다.) 나도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를 내보내지 않으면 그는 일을 그르치고 모두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가 당신 말씀을 따르지 않으니까 못마땅하신 것 아닙니까? 단지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 뿐인데 그렇게 심각합니까? 이만한 일로 사람을 내보내다니요. 그 사람은 사실 뭘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상한 채소를 조금 나눠 준 것뿐이고, 또 채소를 나눠 주지 않아서 말씀을 따르지 않은 적이 두 번 있지요. 그저 사소한 문제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나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는 이만한 일도 따르지 못하고 여기서 훼방을 놓고 있구나. 여기는 하나님 집이고 어느 것도 네 것이 아니다.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산과 물 중에 네게 지배권이나 결정권이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너는 자기가 결정하려 하고 훼방을 놓으려고 하는데, 네가 뭔데 그러느냐? 네 것은 가져오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았고, 네 개인적인 물건을 나눠 주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너는 그저 손을 좀 써서 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네가 해내지 못하면 나는 너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집에서 나가야 하고 제명되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이다. 만약 내가 악인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도 정리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겠느냐? 그러면 하나님 집이 엉망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이 빈말이 되어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니 말씀을 따르지 않고 교란과 훼방과 억지를 일삼는 악마, 적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은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하나님 집에서 제명하고 출교함으로써 그들을 형제자매의 대열에서 정리해서 내보내고 여기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어떠냐? 이 부류의 사람을 정리해서 내보내자 모든 사역이 순조로워졌다. 채소를 먹는 사소한 일에서도 마귀 사탄은 빈틈을 노려서 자신들이 결정하려 하고 제멋대로 하려 했다. 우리는 지금 사소한 일들만 얘기하고 있다. 비록 발생한 일들이 모두 사소하긴 해도 여기에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가 관련되어 있다. 가장 근본적인 진리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정도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성품이 어떻겠느냐?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전혀 없다. 이런 자는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채소뿐만 아니라 고기도 먹고 달걀도 먹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닭을 기르되 닭에게 양식과 채소를 먹이고 방목해서 기르라고 했다. 그렇게 키운 닭에게서 나온 달걀이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낫고, 고기도 유기농에다 적어도 호르몬이 없어서 사람이 먹어도 몸에 해롭지 않다. 비록 달걀과 고기 생산량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품질은 보장이 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느냐? (네, 알아들었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얘기한 말 속에 몇 가지 정보가 담겼느냐? 첫째, 이렇게 닭을 기르면 우리는 유기농 달걀을 먹을 수 있다. 얼마를 먹든 적어도 항생제가 든 달걀을 먹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달걀에 관한 요구 조건이다. 둘째, 고기에 대한 요구 조건은 호르몬이 없어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제시한 이 두 가지가 어려운 요구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제시한 요구는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실용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후로 병아리를 사다가 길러서 달걀을 낳는 계절에 달걀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항생제 맛이 나는 게 마트에서 파는 달걀 같았다. 나는 이 사람들이 닭에게 항생제가 든 먹이를 먹인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닭 기르는 사람에게 닭들이 어떤 사료를 먹었는지 물어봤더니 골분을 먹인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닭을 키울 때는 산란을 촉진하지 않아도 된다. 정상적인 유기농 사육법대로 방목해서 기르고 정상적으로 산란하게 놔두면 된다. 우리는 달걀을 대량으로 먹으려고 닭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서 유기농 달걀만 먹을 수 있으면 된다. 그저 이 정도의 요구뿐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닭에게 항생제나 호르몬이 들어간 먹이는 주지 말라는 말이고, 닭에게 주는 사료는 다른 곳이랑은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곳에서 기르는 닭은 3개월이면 다 자라서 도축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알을 낳는다. 그야말로 알 낳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낳은 달걀이 좋을 리가 있겠느냐? 고기가 맛이 있겠느냐? (맛이 없습니다.) 나는 닭을 키울 때 방목해서 기를 것을 요구했다. 닭이 스스로 바깥에서 먹이를 찾게 해서 벌레도 잡아먹고 풀도 먹게 놔두고 사람이 곡물이나 식량도 같이 먹이면 비록 달걀의 수량은 많지 않더라도 품질이 좋아져서 닭에게도 좋고 사람에게도 좋다. 이 요구는 쉽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말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이 말을 따르는 데 어려움이 있느냐?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어려움이 없습니다.) 내 생각에도 어려움이 없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이냐! 달걀 개수에 대한 요구도 없고, 품질만 좋으면 된다.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들으면 바로 알아듣고, 간단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중에는 행동에 옮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닭 기르는 사람이 이렇게 했겠느냐? 그는 그걸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다면 그는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고, 할 수 없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 내가 이 얘기를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추워졌고, 순리에 따라 닭이 산란을 중단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를 너무나 잘 보여 주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는데 달걀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서 여전히 매일 달걀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노른자가 원래 색과 다르고, 흰자가 점점 단단해져서 갈수록 맛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이겠느냐? 내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닭들이 겨울을 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힘들게 알을 낳고 있는 거냐? 이건 좀 잔인하구나!” 나중에 알아보니 닭들은 여전히 다른 곳에서 사 온 사료를 먹고 있었다. 그 사료는 닭이 계절에 상관없이 쉬지 않고 알을 낳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지금 계절은 닭이 알을 안 낳는 게 정상이다. 우리가 달걀을 안 먹어도 되니 닭을 잘 먹여라. 내년 봄에는 또다시 알을 낳을 거고 품질도 좋을 거다. 먹는 거 밝히지 마라. 닭이 계속 알을 낳게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겨울에도 달걀을 공급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직도 닭에게 계속 다른 곳에서 산 사료를 먹이는 거냐? 앞으로 그 사료는 먹이지 마라!” 내 말이 분명하지 않으냐? 첫째, 나는 계절에 상관없이 꼭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둘째, 나는 닭에게 계속 그 사료를 먹여 가며 산란을 촉진하지 말라고 했다. 이만한 요구가 해내기 어려운 것이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또다시 우리가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을 먹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멍청하다. 내가 하는 말을 왜 따르지 않느냐? 닭이 계속 알을 낳고 있었으니 닭에게 먹이는 사료는 분명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일이다.

이것은 닭을 기르는 것에 관한 일이다. 너희는 여기서 어떤 걸 읽어 냈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거창한 것을 따를 겁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관계된 일, 하나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과 관계된 일이고, 하나님의 크신 사역과 관계된 일이죠. 당신이 얘기하는 그 말씀들은 모두 생활의 사소한 일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말씀을 안 들어도 됩니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본분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가 순종하고 말씀을 따르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에게 대항하는 데도 이유가 있고, 당신 말을 따를지 여부를 선택하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정상 인성의 생활, 가정생활에 대해 당신이 뭘 아십니까? 모르면 발언권이 없으니 우리에게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 말을 안 들어도 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는 큰일, 작은 일이 따로 없고, 하나님 말씀이라면 사람은 마땅히 따라야 하고, 마땅히 순종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따르겠지만, 진리가 아니라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진리에만 순종합니다. 소위 하나님의 도를 준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인 그 부분을 준행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의 생활에 관계된 그 말씀들, 진리와 무관한 말씀은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와 분리시키지 않았느냐? 진리를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았느냐? 진리를 공허한 것으로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했다. 나뭇잎의 모양과 색, 꽃의 모양과 색, 만물의 번식과 같은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구원받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 몸의 구조가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이런 것은 모두 진리와 관계가 없지만,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진리와 관계가 없다고 해서 너는 그런 것들의 올바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런 것들의 올바름을 부정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지은 만물의 법칙을 너는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 태도는 어때야 하느냐?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 잘 모르는 일이라면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는 것이 옳다. 연구할 필요도 없고, 너무 깊이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의 법칙을 위배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순종이다. 일상생활 중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인류의 구원과 관계없는 생활 습관, 생활 상식, 생활 규칙과 같은 것들은 비록 진리의 등급과 차원에는 닿을 수 없지만, 전부 긍정적인 사물이다. 긍정적인 사물이라면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옳은 말이다. 그 밖에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 양심은 무엇이냐? 첫 번째는 바로 말씀을 따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겠느냐? 마귀 사탄의 말을 따르는 것이냐?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냐? 위인이나 명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말을 따르는 것이냐? 다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원칙과 구체적인 실행은 무엇이냐? 옳고 그름을 분석할 필요도 없고, 원인을 물을 필요도 없고, 이해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따르고, 시행하고, 집행하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고, 바로 사람다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됨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겠느냐? 진리를 들을 자격이 있겠느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느냐? 너는 자격이 없다.

방금 닭과 달걀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사람은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느냐?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취급했느냐? 마이동풍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당신 할 말을 하세요.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 나는 당신이 하는 그런 요구에는 관심 없습니다. 당신에게 달걀만 드리면 되지, 당신이 어떤 달걀을 드시든 내 알 바 아닙니다. 유기농 달걀을 드시고 싶어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 꿈을 꾸시는군요. 닭을 기르라고 해서 이렇게 기르는데, 거기다 요구까지 하다니, 얘기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이런 자가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이건 뭘 하자는 것이냐? 뒤집어엎으려는 것이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곳이고 진리가 권세 잡는 곳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 앞에서 직접 얘기했는데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뒤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에서 더욱 불가능한 일까지 이 두 가지 일을 볼 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하나님이냐?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다, 너는 너 자신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너 자신을 믿고 있다. 그러면서 왜 아직도 여기서 비비고 있느냐? 너 자신이 바로 너의 하나님인데, 뭣 하러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내거는 것이냐? 그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얘기해도 그에게는 먹히지가 않는다. 그는 귀담아듣지 않고, 순종하지 못한다. 이런 자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너무나 멀리 있어서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내면으로 말하자면, 그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와 신경전을 벌이는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겠느냐? 결코 원하지 않는다. 사람의 뜻에 따라 판단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귀 사탄이 너에게 대립하고 사사건건 너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너 같으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사람도 그런 자는 구원하려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어도 그런 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닭을 기르는 것처럼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고, 이만한 일에서도 사람은 내가 한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

이번에는 양에 관한 일을 하나 말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역시 사람과 관계된 일이다. 봄이 찾아오자 따뜻한 봄기운에 꽃이 피고, 파릇파릇 풀이 돋고, 초록빛으로 물들며, 모든 것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양들도 겨우내 먹었던 마른 풀이 지겨워서 풀이 새로 돋아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선한 풀을 먹고 싶어 했다. 마침 이 시기에 새끼를 낳은 어미 양은 싱싱한 풀이 더욱 필요했다. 풀의 질이 좋고 양(量)이 많을수록 어미 양의 젖도 잘 나오고, 그만큼 새끼도 빨리 자라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그러면 가을쯤에는 살찐 양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사람이 이런 기대를 품으면 어떻게든 좋은 풀을 많이 먹여서 양을 살찌워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은 초지에 좋은 풀이 없으니 양이 먹어도 빨리 크지 않는구나. 좋은 풀이 어디 없을까?’라고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양을 기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양을 보러 갔는데 새끼 양이 아주 좋아 보였다. 사람을 보더니 달려와서 사람 다리에 앞발을 올리며 위로 올라와 말을 걸려고 했다. 개중에는 뿔이 자란 새끼 양도 있길래 두 뿔을 잡고 놀아 주었다. 그 새끼 양은 괜찮아 보였지만 비쩍 마르고 야위어 있었다. 나는 ‘새끼 양은 살도 보드랍고 털도 길지 않지만 뜨끈뜨끈한데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양을 기르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풀이 별로 안 좋지 않으냐? 이 초지의 풀은 양들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으냐? 땅을 갈고 새 풀을 좀 심어서 양들이 충분히 먹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가 말했다. “싱싱한 풀이 부족해서 지금 마른 풀도 먹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이 계절에 아직도 마른 풀을 먹이다니! 어미가 새끼를 낳았으니 싱싱한 풀을 먹여야지 어떻게 아직도 마른 풀을 먹이냐? 해결할 방법은 생각해 봤느냐?”라고 묻자 그는 핑계를 잔뜩 늘어놓았다. 내가 초지를 좀 갈라고 했더니 그는 안 된다고 했다. 초지를 갈면 양이 당장 먹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이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드느냐? 부담을 조금 느끼지 않느냐? (어떻게든 좋은 초지를 찾거나 다른 곳에서 싱싱한 풀을 베어 와야 합니다.) 해결할 방법은 있다. 너는 자기 배가 부르다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 방법을 좀 생각해야 한다. 양도 배불리 먹어야 한다. 나중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 말했다. “이 초지를 갈아서 새로 풀을 심을 수는 없느냐? 가을에 심더라도 내년에는 양들이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다른 곳에도 초지가 두 군데 있으니까 매일 양을 몰고 가서 싱싱한 풀을 먹이면 되지 않겠느냐? 두 초지를 번갈아가며 이용하면 양들이 신선한 풀을 먹을 수 있잖으냐?” 내가 한 말은 실천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남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항상 실천하기 쉽다고 하는데 어디 그렇게 쉽나요? 많은 양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몰고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요.” 양을 몰고 가라고 하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힘들고 핑계나 어려움도 이렇게 많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알았다고 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가 봤더니 풀이 거의 사람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이 풀을 먹고 있을 텐데 어떻게 풀이 이렇게 높이 자랄 수 있지?’ 사정을 알아보니 아예 그곳에 양을 풀어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또 핑계를 댔다. “그 초지에는 천막이 없어서 양들이 거기 있으면 햇볕을 많이 받아요.” 내가 말했다. “천막을 하나 만들어 주면 되지 않느냐? 양이 몇 마리나 된다고 그러냐? 너희가 여기서 지내면서 하는 일이 뭐냐? 이런 일에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그가 말했다. “우리를 만들 사람을 못 구했어요.” 내가 “다른 일에는 사람을 잘만 구하던데 이만한 일에는 왜 사람을 못 구한단 말이냐? 사람을 구해 보기나 했느냐? 먹는 것만 밝히고 기르는 것은 나 몰라라 하다니,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냐? 양고기는 먹고 싶어 하면서 양에게는 싱싱한 풀도 안 먹이다니, 어쩜 그렇게 비도덕적이냐!” 이렇게 닦달하자 천막이 설치돼서 양들은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양이 싱싱한 풀을 먹는 게 쉽겠느냐? 이렇게 간단한 일도 실행에 옮기는 게 그렇게나 힘들다. 매번 사람들은 핑계를 댄다. 핑곗거리나 어려움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가서 처리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린다. 나는 늘 확인하고 지켜보고 닦달해야 한다. 닦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이마저도 내가 걱정해야 하느냐? 어떤 일이든 너희를 위해서 준비하는 건데, 너희가 말을 좀 따르게 하는 게 어째서 이렇게도 힘드냐? 네게 칼산에 오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했느냐? 아니면 이 일이 너무 어려워서 시행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이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냐? 모두 네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네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다. 너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너는 어째서 해내지 못하느냐? 무엇이 문제겠느냐? 내가 방주를 만들라고 하더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게 시킨 이 일을 방주 만드는 일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이건 하루 이틀이면 되는 일이다. 한 마디면 되는 일이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방주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냐? 백 년이 넘게 걸리는 일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만약 너희가 노아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너희 중에는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분부한 대로 조금씩 조금씩 방주를 만드는 동안 너희는 옆에 서서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고 비아냥대며 그의 발목을 잡을 자들이다. 너희는 분명 그런 부류다.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태도는 전혀 없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네게 특별한 은총과 축복, 깨우침을 주길 바란다. 어쩌면 그렇게 염치가 없느냐? 너희가 볼 때 내가 얘기한 일들 중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너희 사람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너희에게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왜 관여하려 하겠느냐? 나는 의무가 아니라 단지 너희를 위해 관여할 뿐이다. 너희 중에는 이 일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고, 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다. 그러니 내가 많이 신경 써야 하고, 너희는 말씀을 따르고 협력하면 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너희는 이조차도 못 한다. 그러고도 사람이냐?

더 심한 일도 있었다. 어떤 곳에 건물을 짓는데, 높이도 높고 공간도 크고 안에 놓을 물건도 많은 편이라 물건을 쉽게 나르려면 적어도 문이 양문형이어야 하고 높이도 2.4m는 돼야 했다. 정상인이라면 모두 이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꼭 단문형에 높이도 1.8m인 문을 설치할 것을 고집했다. 남들이 아무리 제안해도 듣지 않았고, 누가 말해도 소용없었다. 이건 얼간이가 아니냐? 머저리도 그런 머저리가 없었다. 나중에 누가 내게 이 일을 알려 주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양문형 문을 달아야 하고, 문 높이도 더 높여야 한다.” 그는 마지못해 알았다고 했다. 겉으로는 동의했지만 그가 뒤에서 뭐라고 했겠느냐? “문을 그렇게 높이 내서 뭐 하려고? 좀 낮으면 어때서?” 나중에 가서 봤더니 문 한 짝은 더 냈는데, 문의 높이는 그대로였다. 문의 높이를 높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 높일 수가 없었겠느냐, 아니면 지붕에 닿아서 그런 것이었겠느냐? 어찌 된 일이었겠느냐? 그는 단지 말을 따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의 뜻은 이러했다. ‘당신이 결정해서야 되겠습니까? 여기서는 내가 어른이니 내가 결정해야지요. 내가 다른 사람들 말을 들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뭘 압니까? 당신이 건축을 압니까?’ 내가 건축을 모른다고 해서 비율도 볼 줄 모르겠느냐? 건물도 높은데 그렇게 낮은 문을 달면, 키가 190cm인 사람은 들어갈 때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문틀에 머리를 박을 텐데, 그게 무슨 문이란 말이냐? 내가 건축에 정통할 필요는 없다. 말해 보아라, 내 의견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지 않으냐? 그는 이런 실용성은 모르고, 그저 아는 것이란 규례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네는 문이 전부 그런데, 어째서 당신 말대로 문을 그렇게 높게 내야 합니까? 나보고 하라고 하면 난 이렇게 할 겁니다. 제가 필요 없으면 관두세요. 나는 이렇게 할 거고 당신 말대로는 못 하겠습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느냐? 너희가 볼 때 이 사람을 계속 쓸 수 있겠느냐? (쓸 수 없습니다.) 쓸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힘은 좀 쓸 수 있다. 비록 즉시 그를 내쫓지는 않았고, 형제자매도 참고 나도 참을 수 있지만, 이런 인성이라면 진리를 깨닫고 말고는 둘째 치고, 그가 하나님 집과 같은 이런 환경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계속 지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쫓아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교회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우선 그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없고는 차치하고, 그런 성품이라면 힘을 좀 쓰는 것에도 거드름을 피우며 자기가 결정하려 할 텐데, 하나님 집에서 그게 통하겠느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스스로를 괜찮게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 집의 기둥이자 대들보라고 생각하며 못된 짓을 일삼고 마음대로 결정하려 한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고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굳이 내쫓지 않더라도 오래 머물다 보면 하나님 집에서 언제나 진리와 원칙만 얘기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흥미를 잃는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않고, 늘 자기가 결정하려고 하지만 그게 통하지도 않고 사사건건 제한을 받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형제자매들이 대부분 진리와 원칙을 깨달을 텐데, 그가 제멋대로 굴 때, 그가 늘 어른 행세를 하며 자기가 결정하려 하고 원칙대로 일하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이 멸시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면 그가 견딜 수 있겠느냐?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사람들과는 맞지 않는다고, 자신은 태생적으로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자기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쩌다 실수로 그만 하나님 집에 발을 들였을까? 이제 보니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구나. 힘만 좀 쓰면 재난을 피하고 나중에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닐 줄이야!’ 그는 태생적으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서 한동안 지내다 보면 흥미와 의욕을 잃고, 쫓아낼 필요도 없이 제 발로 나가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어째서 뭐든 다 관여하십니까?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참견해서 위신을 세우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당신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 아닙니까?” 너희가 볼 때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되겠느냐? 사실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원래 리더 일꾼의 책임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관여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고, 앞으로의 사역에 지장을 줄 것이다. 만약 너희가 해결할 수 있고, 내 말을 따른다면 내가 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관여하지 않으면 너희는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없고, 제대로 생활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간단한 일을 하나 얘기해 보겠다. 위생이나 생활 환경 관리와 같은 사소한 일을 너희는 어떻게 했느냐? 내가 어떤 곳에 갈 때 만약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곳은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내 눈앞에서 정리해야 하고, 그 와중에 기분도 썩 좋지 않고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미리 알려 준 경우는 가 보면 그래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너희가 뒤에서는 어떤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이고 정상 인성의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한 부분이다. 너희는 모두 이렇게 나태한데 본분을 정말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나는 중국에 있을 때 어떤 곳에서는 십 년을 살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이불 개기와 말리기, 청소하기를 가르쳤고, 또 집 안에서 어떻게 난로에 불을 지피는지 가르쳤는데 십 년을 가르쳐도 안 됐다. 내가 가르칠 줄 몰라서 그런 것이었겠느냐?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불량 습성이 너무 심했다. 나중에는 더 이상 가르치지 않고, 어디 가서든 이불이 개켜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다. 어째서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겠느냐? 나는 냄새 나는 것이 싫고 역겹다. 딱 봐도 개돼지 우리만도 못한 곳인데 그런 곳에 내가 뭐 하러 머물겠느냐? 나는 그런 곳에서는 지내지 않는다. 사람은 이런 사소한 문제도 고치기 어렵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갈 경우, 지금 분명히 말하자면 너희는 그 근처에도 올 수 없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로 얘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은 네게 분석하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검토하고, 원인을 규명해서 그렇게 된 까닭을 알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시행하고 집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말씀하고, 임무를 지시하고 일을 맡긴 다음 너의 행동과 네가 어떻게 차근차근 시행하는지를 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네가 이해했는지, 네가 이 일에 대해 속으로 무슨 호기심이나 의문을 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실행에 옮기고 있는지, 네게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태도가 있는지를 본다.

한번은 우연히 몇몇 사람에게 프로그램 의상에 관한 문제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주요 원칙은 의상 색깔과 스타일이 점잖고 단정하고, 고상하고, 품격이 있어야 하며 너무 괴상하면 안 된다는 것, 돈을 너무 쓸 필요도, 특별한 디자이너가 있을 필요도 없고, 고급 유명 브랜드에 가서 구입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의상은 입는 사람을 품격 있게 만들고, 점잖고 단정해야 하고, 남 앞에 입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색깔은 어떤 것이든 괜찮다. 무대에서 별로 밝지도 예쁘지도 않거나 보기에 너무 어두운 몇몇 색만 피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다 괜찮고, 어떤 색이든 규례는 없다. 왜 이런 원칙이어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만든 만물에는 없는 색이 없다. 꽃과 나무의 색깔도 가지각색이고, 모든 식물이 다 나름의 색을 가지고 있다. 새들도 색이 가지각색이다. 따라서 우리는 색깔에 대해 어떤 관념이나 규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얘기해 놓고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또 확인했다. 다들 잘 알겠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내가 말한 원칙대로 가서 시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건 간단하지 않으냐? 그게 거창한 일이냐? 방주를 만드는 일에 비하면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 (작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보다 어려운 일이냐? (아닙니다.) 전혀 어렵지 않고 간단하다. 옷에 관한 일이라면 태어나서부터 접하는 것이므로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특히 내가 원칙 범위를 정해 주었으니 사람들이 집행하기가 더 쉬워졌다. 관건은 사람이 내 말을 따르는지, 그대로 하길 원하는지에 달렸다. 얼마 후 프로그램과 영화가 몇 편 만들어졌는데, 주요 인물들의 의상이 모두 파란색이었다. 나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의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아주 알아듣기 쉽게 얘기했다. 꼭 파란색 의상을 입혀야 한다고, 파란색 의상이 아니면 출연시키지 말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무슨 지시나 지배를 받은 것이냐? 지금 세상의 흐름이 변해서 다들 파란색 옷만 입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각종 색상과 스타일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사람들은 어느 색의 옷이나 다 입는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누가 검사했겠느냐? 누가 이 일을 통제했겠느냐? 어느 한 사람이 이 일을 지배하고 있지 않겠느냐? 분명 누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스타일이든지 간에 옷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전부 파란색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소용없었다. 그는 진작부터 다 정해 놓았다. 어떤 옷이든 전부 파란색이어야 하고 파란색이 아니면 다른 색 옷은 입지 못하게 해 놓았다. 파란색은 영적인 색을 뜻하고, 거룩함을 뜻하고, 하나님 집의 상징적인 색이니 파란색 옷을 입지 않으면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게 하고 출연할 엄두도 못 내게 했다. 내가 봤을 때 그 사람들은 끝났다. 이렇게나 간단한 일을 내가 일일이 분명하게 얘기해 줬건만, 마지막에는 확인까지 해서 양쪽이 합의를 본 다음에 그 화제를 마무리했건만 결과는 어땠느냐? 내가 한 말이 마치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 멋대로 하고, 자기 맘대로 실행했다. 아무도 내가 한 말을 시행하지도, 지키지도 않았다. 그가 당시 잘 알아들었다고 한 건 무슨 뜻이었겠느냐? 상대를 가지고 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깥세상의 길거리 아낙네들처럼 하루 종일 잡담이나 하는데 나와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그 태도는 심히 우려스럽고 일종의 위험한 신호이고 좋지 않은 신호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신호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냐? 너희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너희에게 이 일을 알려 줘야 하니 잘 들어라. 너희의 모습과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 볼 때, 재난 속에 떨어질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을 받을 것이고, 일부는 재난 속에 떨어져 연단을 받을 것이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징벌받은 자들은 바로 죽음에 이르고 멸망할 것이다. 재난 속에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은 만약 재난 속에서 연단을 통해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고, 그런 다음 굳게 설 수 있고, 간증이 있게 된다면 가장 어려운 이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희망이 없고 위험하며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잘 알아들었습니다.) 너희 입장에서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요컨대 내 입장에서 이는 좋지 않은 징조이며, 나는 이것을 좋지 않은 신호로 생각한다. 나는 너희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으니, 어떤 선택을 하든 너희 자유다. 이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기로 하고 반복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주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주제로 교제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하나님 말씀을 집행하고 시행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를 대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무척 간단한 일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이 볼 때는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이다. 물론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곧 하늘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가장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태도이고, 바로 하나님이 감찰하려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인지 궁금해하는데, 이는 간단하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솔하게 대하는 것이고, 둘째는 존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듣는 것이겠느냐?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이 있느냐? 마음이 있으면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들어야 알아들을 수 있고 실행해 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간단한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치대로 말해도 쉽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행하는지, 행할 수 있는지 여부는 너희에게 달렸으니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을 진솔하게 대하라고 하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을 존중하라고 하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당신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겁니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도 세 가지다. 자세히 듣고 내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아라. 일리가 있으면 받아들이고, 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 첫째, 너는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다음부터 계속 내가 한 모든 말을 먹고 마시고 누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둘째, 너 스스로가 너를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자 그의 신도로 인정했다면 네가 스스로를 이 평범한 성육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째는 네가 스스로를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인류 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 세 가지 중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볼 때 내가 진실하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게 얘기했거나 사실이 아닌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방금 얘기한 사항은 전부 여섯 가지인데, 각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테니 너희가 잘 생각해 보아라. 이미 많이 다룬 주제이므로 너희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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