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이 훗날의 종착지나 일시적인 누림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어떤 책망도 겪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온전케 되기 위한 것이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자 상을 받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자신의 직책을 이행하거나 본분을 완수하는 데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경지위(天經地緯)이자 사람의 천직이므로 살아가는 이상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이처럼, 사람마다 추구하는 목표는 제각각이지만 그 목적과 속셈은 모두 비슷하며, 또한 추구하는 많은 사람이 숭상하는 대상도 대부분 비슷하다.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또 수많은 신자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고 나아가 1, 2천 명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개인의 앞날이나 훗날의 아름다운 소망을 위해 추구했을 뿐,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경건한 신자들이 수도 없이 자기 올무에 걸려 죽었고, 이긴 자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적다. 사람은 패배한 원인이나 이긴 비결을 지금까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이런 비밀의 근원이 과연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들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심혈을 다해 추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이 가는 길은 앞사람들이 갔던 성공의 길이 아니라 실패의 길이다. 그러니 어떻게 추구하든 간에 그들이 가는 길은 모두 어둠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들이 얻는 것은 쓰라린 결과뿐 아니겠느냐? 과거에 성공한 사람을 따라 하는 자들도 최종적으로 복을 받을지 화를 입을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실패한 사람의 전철을 밟으며 추구하는 자들은 어떠하겠느냐? 더더욱 실패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그들이 가는 길이 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모두 헛된 길을 가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추구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결국 거기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 아무렇게나 추구한다고 득실이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기본은 마음이 정직하며, 완전히 헌신하고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일생을 바쳐 참된 믿음을 얻음으로써 모든 진리를 얻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더욱이 그리스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주를 위해 본분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보고서도 피해 자기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늘 실패한 사람이 갔던 길을 따라 추구하기 때문에, 또 늘 하늘을 거역하기 때문에 항상 실패하고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며 자신의 올무에 빠진다.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을 너무나 숭상하는 데다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늘 무턱대고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대한 위인들과 인간 세상의 풍파를 겪은 사람들마저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벌 속에서 죽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비명에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결말, 즉 그들의 죽음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실패는 더더욱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진리는 인간 세상에서 온 것이지만, 인간 세상의 진리는 그리스도가 전한 것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진리를 공급할 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까지는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얻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본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일이며,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의 종착지나 성패를 모두 하나님께 떠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 아니라 피조물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과 직접 연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베드로, 이 두 사람의 추구와 종착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들의 결과만 알 뿐, 그들의 성공 비결이나 실패의 원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한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너희의 추구도 대부분 실패할 것이고, 설령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할지라도 베드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추구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면 성공할 희망이 있지만, 네가 진리 추구를 위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너는 영영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또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베드로는 온전케 된 사람이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겪은 후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마음이 생겼고 그런 다음에야 완전히 온전케 되었다. 그가 간 길은 온전케 되는 길이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처음부터 올바른 길을 갔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가짐도 옳았기 때문에 온전케 된 것이다. 그가 간 길은 앞사람이 간 적 없는 새 길이었다. 반면 바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길을 갔다. 다만 성령이 그를 쓰려고 했고 그의 은사와 모든 장점을 이용해 사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몇십 년 동안 사역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는 그저 성령께 쓰임 받은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쓰임 받은 것은 그의 인성이 예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은사 때문이었다. 바울이 예수를 위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그를 쳤기 때문이지, 그가 기꺼이 예수를 위해 사역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그런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이 깨우쳐 주고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한 사역은 그의 추구와 인성을 대변할 수 없다. 바울이 한 사역은 종의 사역을 뜻한다. 즉, 그가 행한 것은 사도의 사역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르다. 그도 일부 사역을 했고, 비록 바울만큼 큰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사역과는 달리 자신의 진입을 추구하면서 사역했다. 베드로가 한 사역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도의 자리에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역했다. 바울도 사역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그저 미래의 소망과 좋은 종착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역하면서 연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신을 위한 상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역에는 그 자신의 체험이 없었다. 그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역을 위한 사역을 했다. 그의 사역에는 거래만 있을 뿐 피조물의 본분이나 순종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옛 성품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그가 한 사역은 그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한 것일 뿐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바울은 온전케 되는 과정도, 책망을 받는 과정도 없이 바로 사역했다. 그의 마음가짐은 오로지 상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다. 베드로는 책망과 훈계와 연단을 거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사역 목적과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다. 베드로는 사역은 그리 많이 하지 않았지만 성품이 많이 변화되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진리와 참된 변화였지, 단순히 사역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많은 사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사역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였다. 설사 그가 협력했다 할지라도 그의 체험에서 온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사역이 많지 않은 이유는 단지 성령이 그에게서 그리 큰 역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전케 되는지의 여부는 사역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상을 받고자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며, 더 나아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했다. 겉모습도 다르고 본질도 다르다. 너는 사역의 양만 보고 그들 중에 누가 온전케 된 것인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기를 추구했으며,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손에 맡길 수 있었으며,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런 각오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대로 해냈다.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한 사역은 온전케 하는 것이었고, 바울에게 한 사역은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관점이나 그들의 본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둘 다 성령 역사가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러한 역사를 자신에게 적용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반면 바울은 성령 역사를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만 공급했을 뿐,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여러 해 체험하고도 변화가 미미해 거의 천연적인 모습 그대로였으며, 여전히 과거의 바울이었다. 단지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 ‘사역’하는 법을 배우고 인내를 배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옛 성품, 즉 승부욕이 강하고 이익만을 꾀하는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사역하고도 자신의 패괴 성품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옛 성품도 벗어 버리지 못했다. 이 옛 성품들은 그의 사역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저 사역의 경험만 좀 늘었을 뿐이었다. 이 약간의 경험으로는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고, 생존에 대한 그의 관점과 그가 추구하는 의의를 바꿀 수도 없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오랫동안 사역했고, 예수를 핍박하던 때의 행위를 다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속 인식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바치기 위해 사역한 것이 아니라 훗날의 종착지를 위해 마지못해 사역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고의로 대적한 패역자였으며, 원래부터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역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했고, 그저 자신의 성격대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서 성령의 뜻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인 것이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 성령 역사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그가 한 사역이나 그가 얼마만큼 바쳤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를 아는지, 진리를 실행했는지, 추구하는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베드로도 예수를 따르면서 타고난 성품을 드러낸 적은 있었지만, 본성을 보자면 그는 처음부터 성령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께 순수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리에 순종했다. 베드로는 비록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를 시험했지만, 이런 약간의 인성의 연약함은 그의 본성과 무관하며, 훗날 그가 추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또한 그의 시험이 적그리스도의 행위라고 증명할 수도 없다. 인성의 보편적인 연약함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인데, 너는 베드로만 예외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냐?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는 것은 그가 어리석은 일을 몇 번 했기 때문 아니더냐? 반면 사람들이 바울을 그렇게 숭상하는 것은 바울이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서신을 썼기 때문 아니더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작은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단 말이냐? 베드로가 겪은 수년간의 고통스러운 체험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참된 체험이 없음을 증명할 수는 없고, 베드로가 온전케 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측량할 수 있겠느냐?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예수가 직접 선택해 수록한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이 편찬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사람의 뜻에 따라 선택된 것 아니겠느냐? 게다가 서신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결말이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베드로와 바울을 평가하게 되었다. 또 바울은 사역을 아주 많이 하고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다. 사람은 모두 외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더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바울은 몇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숭상받는 대상이었는데, 누가 감히 그의 사역을 가볍게 부정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그저 그물을 던져 고기 잡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바울처럼 큰 ‘기여’를 할 수 있었겠느냐? 기여한 것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바울이 먼저 상을 받아야 하고, 베드로보다 바울이 더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은 바울을 대할 때 단지 그의 은사를 빌려 사역했고, 베드로를 대할 때는 온전케 하고자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가 그들에게 미리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온전케 하거나 사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외적으로 기여한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과 사람이 원래부터 추구하는 길, 그리고 마음가짐을 본다. 사람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모두 사람의 관념과 안목에 따라 판단한다. 하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결말은 사람의 외적인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처음부터 성공의 길을 가고 올바른 관점으로 추구한다면 너는 베드로처럼 될 것이고, 반대로 실패의 길을 간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너의 종착지나 성패는 네가 희생한 것이나 치른 대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길이 옳은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베드로와 바울, 이 두 사람은 본질이 다르고 추구한 목표도 다르다. 이런 것들을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온전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보지만,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전혀 모르고 사람 내면의 본질을 보지 못하며 내면의 실제 분량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의 성패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바울을 숭상하지, 베드로를 숭상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쓰임 받아 공개적으로 사역한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바울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베드로의 체험은 사람들이 볼 수 없고 그가 추구한 것은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베드로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책망과 연단을 겪어 온전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겠나이다. 제가 행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만을 원하나이다. 설사 형벌과 심판을 받을지라도 기꺼이 원하나이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사역과 말, 모든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체험할수록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졌다. 반면 바울은 표면적으로만 사역했다. 비록 그도 공을 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사역을 잘해서 상을 받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사역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마음속 진실한 사랑과 현실적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울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사역하는 것에 치중하고 외적인 사역과 기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상인의 체험에 없는 도리적인 것을 중시했다. 그는 깊은 곳의 변화와 진실한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베드로의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과 참된 인식을 갖기 위함이었으며,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실제적으로 살아 내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사역은 예수에게 받은 부탁을 위한 것이자 자신이 얻고자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자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는 무관했다. 그의 사역은 전적으로 형벌과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순결한 사랑을 추구했고,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추구했다.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알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순결했다. 여러 해 연단을 겪으며 예수와 생명에 대한 그의 인식도 높아졌다. 그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자발적인 사랑이었다. 그는 보수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 반면 바울은 오랫동안 사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다. 그가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마지막에 월계관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최고의 면류관이지 가장 순결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추구했으며,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에 붙들려 어쩔 수 없이 추구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추구는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임을 증명할 수 없다. 베드로야말로 본분을 이행한,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기여하면 상을 받아야 하고 또 크게 기여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의 관점을 보면 그 본질은 거래의 성질을 띤 것이지,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 즉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면 사람에게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선을 넘어 하나님께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종착지는 그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판정되었다. 또 그들이 얼마나 많이 사역했는지,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지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추구한 것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이 가장 옳은 길이며, 옛 성품을 변화시켜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인 것이다. 성공의 길이란 피조물이 원래의 본분과 모습을 되찾는 길, 즉 회복의 길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모든 사역의 근본 취지이다. 사람의 추구에 여전히 자신의 사치스러운 요구와 불합리한 소망이 섞여 있고 성품 변화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회복의 사역과 서로 어긋나며 틀림없이 성령이 행한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구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추구가 또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

바울이 한 사역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가 마음속 깊이 얼마나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요소가 얼마나 있는지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행한 사역만 보고 그가 확실히 성령께 쓰임 받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훌륭하고 그가 행한 사역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단지 개인의 체험만을 중시했다. 가끔 사역을 해도 사람을 많이 얻지 못했으며, 몇 통 안 되는 서신도 이름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가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바울은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고, 사역이 있기만 하면 가서 했다. 그는 그렇게 하면 면류관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역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추구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흡족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하면 통회했으며, 그 후에 적합한 길을 찾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 그는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려고 했으며, 자신의 옛 성품을 조금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진리에 깊이 들어가려고 했다. 반면, 바울은 외적인 명예와 지위,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추구했을 뿐 생명 진입에서 깊이를 더하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실제가 아니라 도리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했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그를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 겨우 그 정도 사역했을 뿐이고 교회에 기여한 바도 별로 크지 않은데, 하나님은 왜 그를 온전케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간증이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어떠했느냐? 바울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너는 아느냐? 바울이 사역을 한 것은 무엇을 위함이었느냐? 베드로가 사역을 한 것은 또 무엇을 위함이었느냐? 베드로가 비록 사역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너는 아느냐? 바울이 한 사역은 교회에 공급하고 교회를 붙들어 주는 것이었으며, 베드로가 체험한 것은 생명 성품의 변화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네가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고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고, 한 사람은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성품의 변화가 있었고, 한 사람은 성품의 변화가 없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섬긴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고, 한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숭상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형상을 가졌다. 한 사람은 성결해지기를 추구했고, 한 사람은 성결해지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더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순결한 사랑은 전혀 없었다. 한 사람은 진정한 인성이 있었고, 한 사람은 진정한 인성이 없었다. 한 사람은 피조물의 이성이 있었고, 한 사람은 피조물의 이성이 없었다. 이것이 바울과 베드로의 본질적인 차이다. 베드로가 간 길은 성공의 길, 즉 정상 인성을 회복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베드로는 성공한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바울이 간 길은 실패의 길이었다. 바울은 겉으로만 순종하고 헌신할 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진리가 없는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연단과 환난, 궁핍한 생활 역시 받아들였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 아니겠느냐? 형벌이든 심판이든 환난이든 너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자, 사랑 안에 있는 순결한 요소이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이다. 너는 진리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창조주를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뿐더러 창조주께 순종하지도 않고 창조주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교회에 큰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며, 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의 서신 13권은 은혜시대를 2천 년 동안 유지했고요. 4복음서를 제외하면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바울의 13권 서신인데, 누가 그와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쓴 계시록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지만, 바울이 쓴 서신은 모두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그는 교회에 유익한 사역을 했지요. 다른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역을 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기여도를 따지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평가할 때는 사람의 본성을 기준으로 한다. 바울은 생명을 추구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결코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세부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면과 연약한 면, 피조물의 패괴 성품에 대해 모두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성품의 변화를 위한 실행의 길도 있었다. 그는 이론만 있고 실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화한 사람은 구원받은 새사람이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합격이다.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천연적인 모습 그대로인 옛 사람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자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큰 사역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너 자신의 추구와 비교해 보면, 네가 베드로 같은 사람인지 바울 같은 사람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네가 추구함에 있어 여전히 진리가 없고, 지금까지도 바울처럼 교만하고 거칠게 굴며 허풍을 늘어놓는다면 너는 패배한 인간쓰레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네가 베드로처럼 추구하고자 한다면, 즉 베드로처럼 실행하고 진실하게 변화하고자 하며, 교만하게도 방자하게도 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너는 이길 수 있는 피조물일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본질과 패괴를 알지 못했고 자신의 패역은 더욱 알지 못했다. 그는 예전에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비열한 행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크게 통회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조금 해명했을 뿐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온전히 굽히지 않았다. 비록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엎드리기는 했지만, 자신을 마음속 깊이 성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역하는 것에만 만족했다. 바울은 자신을 알아 가는 것과 자신의 옛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입에만 달고 있는 진리로 만족했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것에 만족했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더 이상 핍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난날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그저 훗날의 면류관과 일시적인 사역이고, 풍성한 은혜였을 뿐, 충분한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지난날 깨닫지 못한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인식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사역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외적인 행위에만 치중하고 변화가 아닌 인식에만 힘썼다. 그가 사역을 한 것은 전적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가 그에게 나타난 결과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의지를 가졌던 것이 아니고, 옛 성품이 책망받은 후에 사역을 한 것도 아니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그의 옛 성품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그가 지난날에 지은 죄를 속량하지 못하고 그저 당시의 교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이렇게 옛 성품이 고쳐지지 않은 사람, 즉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 더욱이 진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예수께 열납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랑과 경외가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진리를 찾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성육신의 비밀을 찾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저 궤변에 능하고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나 진리가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굽히기 싫어한 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과 상반되거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 혹은 진리를 질투했으며, 위대한 형상을 지니고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재들을 좋아했다. 그는 진리만을 사랑하고 참도를 찾는 가난한 사람들과 왕래하기를 싫어했고, 도리만 말하고 지식이 풍부한 종교계 고위층 인사들과 접촉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좋아했던 것은 성령의 새 역사가 아니었고, 그가 중요시했던 것도 성령의 새 역사 동향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진리보다 높은 규례와 도리를 좋아했다. 그의 선천적인 본질과 그가 추구한 모든 것을 놓고 보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전혀 없고, 하나님 집의 충실한 종이라고 불릴 자격은 더더욱 없다. 그에게는 가식적인 것이 너무 많고 패역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의 종이라고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천국의 문에 들어설 자격이 전혀 없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것은 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한 적이 있지만 가식적이고 불의를 행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를 악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불의를 행한 자라고 하면 딱 맞을 것이다. 그가 많은 사역을 했지만 그 사역의 양을 놓고 논해서는 안 되고, 오직 그가 한 사역의 질과 본질을 두고 논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의 경위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사역을 잘하고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나는 주님의 부담을 생각한다. 아무도 나만큼 주님의 부담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나만큼 깊이 회개하지 못했다. 나는 큰 빛 비춤을 받았고, 큰 빛을 보았으니 누구보다도 깊이 회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바울의 생각이었다. 그는 해야 할 사역을 끝낸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싸워야 할 싸움을 다 마치고 달려야 할 길을 마쳤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그가 싸우고 사역하고 달려온 것은 전적으로 의의 면류관을 위한 것이었지, 적극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사역을 대충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역은 그저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고 더 이상 양심에 참소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루빨리 사역을 끝내고, 그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싸워야 할 싸움을 다 마쳐 자신이 소망하는 의의 면류관을 빨리 얻게 되기만을 바랐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체험과 참된 인식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사역을 끝내 예수를 만났을 때 사역한 것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사역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사역으로 거래함으로써 훗날의 면류관과 맞바꾸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진리도 하나님도 아닌 오로지 면류관이었다. 이런 것을 어찌 제대로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의 속셈, 그가 한 사역, 그가 치른 대가, 그의 모든 희생은 자신의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사사로운 소망에 따라 사역했다. 그가 모든 사역에서 치른 대가는 기꺼이 원해서 치른 것이 아니라 그저 거래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그렇게 치른 대가가 또 몇 푼의 가치가 있겠느냐? 누가 또 그 깨끗하지 못한 대가를 인정할 수 있겠느냐? 누가 그런 대가에 흥미를 갖겠느냐? 그의 사역에는 내일에 대한 몽상과 아름다운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사람의 성품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길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가식적인 자비가 너무나 많았고, 그의 사역은 생명을 공급한 것이 아니라 고상한 척하며 거래를 한 것이었다. 그런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을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는 길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설사 고통받고 화를 입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추구다. 바울이 추구한 것에는 자신의 육체, 자신의 관념, 자신의 타산과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 전혀 아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따르고자 했다. 비록 베드로가 한 사역이 크지는 않지만, 그가 추구한 마음가짐과 걸어온 길은 옳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진리의 도를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사역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모두 따를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다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떤 환난과 연단도 모두 겪을 수 있어야 하고, 연약하지만 마음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명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추구하는 관점이 올바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네가 많은 사역을 하고 다른 사람도 너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정작 너 자신은 변화가 없고 조금의 간증도, 참된 체험도 없으며, 죽기 전까지도 네가 하는 일에 간증이 전혀 없다면, 이런 사람이 변화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겠느냐? 성령이 당시에는 너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때 사용하는 것은 네가 사역할 수 있는 부분이며, 사용할 수 없는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네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쓰임 받는 과정에서 점차 온전케 될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네가 얻어지는 것까지 성령이 모두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 자신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추구하는 관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 자신의 문제로, 이는 너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체험이 가장 중요하고 개인의 진입이 가장 관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으니 최소한 제가 천국에 들어가 생명의 열매를 먹게는 해 주셔야죠.”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에는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오랫동안 많은 사역을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더럽기 짝이 없다면, 네가 내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그 어떤 이에게도 특혜를 준 적이 없다. 이것은 아무도 깰 수 없는 하늘의 규칙이다! 너는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내가 온전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자신의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원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의 생명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상만 받으려고 한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다!

베드로와 바울이 지닌 본질의 차이를 통해, 너는 마땅히 생명을 추구하지 않으면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해야 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상, 너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고, 개인적인 선택과 요구가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야 한다. 너는 지음 받은 사람인 이상 너를 지은 창조주께 순종해야 한다. 너는 원래부터 너 자신을 주관할 수 없고, 너의 운명을 지배할 본능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이상 성결해지고 변화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너는 피조물인 이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분수를 알아야 하며 자신의 본분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고 교조적인 것으로 너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경로이자,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의 본질을 비교해 보면 네가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간 길 중 하나는 온전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도태되는 길이다. 그들 두 사람은 두 갈래 길을 대표한다. 비록 그 두 사람 모두 성령 역사가 있었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으며 예수의 부탁을 받았지만 각자 맺은 열매는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참된 성과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참된 성과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의 본질과 행한 사역, 겉으로 드러낸 것과 마지막 결말을 통해, 너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그 두 사람이 간 길은 가장 분명한 두 갈래 길이다. 바울과 베드로, 이 두 사람은 각각 두 갈래 길을 대표하는 가장 좋은 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두 사람을 전형적인 예로 삼은 것이다. 바울의 체험에서 핵심은 무엇이냐? 그는 왜 얻지 못했느냐? 베드로의 체험에서 핵심은 무엇이냐? 그는 어떻게 체험해서 온전케 되었느냐? 이 두 사람이 각각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비교해 보면,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이 온전케 되고 어떤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없는지, 온전케 되는 사람의 성품은 어떠하고 온전케 될 수 없는 사람의 성품은 또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실질적인 문제는 베드로와 바울의 체험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 순종하게 한다. 그는 만유를 주관하여 만유가 모두 자신의 수중에 있게 한다. 동물, 식물, 인류, 산천, 호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다. 하늘의 만물이든 땅의 만물이든 모두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며, 선택의 여지 없이 모두 그의 지배에 순종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여 만물이 다 질서를 갖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나뉘며 각각 자기 위치에 있게 한다. 아무리 큰 것도 하나님을 넘어설 수 없으며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를 위해 이바지한다. 어떤 것도 감히 하나님께 반역하거나 다른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사람도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든 만물의 관리자든 관계없이, 또 사람이 만물 가운데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작디작은 사람일 뿐이다. 그저 작디작은 사람이고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 피조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소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옳은 추구 방식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실행하는 것이 진리이며 얻은 것이 성품의 변화라면, 너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네가 추구하는 것이 육적인 복이고, 실행하는 것이 자신의 관념 속 진리이며, 성품에 어떤 변화도 없고 육신의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은 채 여전히 막연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은 네가 실패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케 될지, 도태될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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