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5]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0)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예수에 대해 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했다. 그는 영에 대해 조금 인식이 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알지는 못하였기에, “당신을 하늘의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면 꼭 따를 것이고, 성령께서 증거하셨다면 인정하옵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예수가 행하는 것을 이해하지도, 명확히 알지도 못했다. 그는 한동안 예수를 따른 후 예수가 하는 사역과 말씀에 관심이 생겼고,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겼다. 베드로는 예수가 친근하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하여 그와 접촉하고 함께하기를 원했으며, 예수의 말씀을 듣고 공급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는 동안 예수가 한 일과 말씀, 행동, 표정 등 예수의 모든 생활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겼다. 그는 예수가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예수는 겉보기에 매우 평범한 인성을 지닌 것 같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 관용이 넘쳤으며, 그가 행하는 것과 말씀하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을 얻었다. 그는 예수에게 위대한 외형이나 비상한 인성은 없어도 예사롭지 않은 특별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의 행동이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예수가 행하는 일이 평범한 사람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와 접촉하면서 예수의 성격도 일반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는 일을 행함에 있어 조급해하지 않고 침착했으며, 과장하거나 축소시켜 말씀하지도 않았다. 일상에서도 평범하지만 사람들의 선망을 자아내는 그의 성격이 표출되었다. 예수는 언행이 솔직하고 대범하며 쾌활하고 침착했지만 사역할 때는 존엄을 잃지 않았다. 베드로가 본 예수는 때로는 말씀을 아끼고 때로는 유창하고 막힘없이 말씀했다. 때로는 아주 기뻐했는데, 그럴 때면 흰 비둘기처럼 기운차고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때로는 슬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럴 때면 온갖 고생을 겪은 어머니처럼 슬퍼하였다. 때로는 용맹한 전사가 적을 무찌르는 것처럼, 때로는 심지어 포효하는 사자처럼 분노하였다. 또 때로는 환히 웃었고 때로는 슬피 울며 기도하였다. 예수가 어떻게 생활하든 베드로는 그를 끝없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베드로는 예수가 기뻐하는 모습에 즐거워했고, 예수가 우울해하는 모습에 비통해했으며, 예수가 노여워하는 모습에 전전긍긍했다. 예수의 긍휼과 용서, 사람에 대한 엄격한 요구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경외하고 사모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베드로가 예수와 여러 해를 함께 보내며 차츰 알게 된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1)

베드로에게는 절정에 이른 체험이 있었다. 그때 그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는데, 예수가 내면에서 여전히 그를 격려하며 그의 앞에 한 번 나타났다. 베드로가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느낄 때, 예수는 그에게 알려 주었다. “너는 전에 나와 함께 땅에 있었고 나 역시 너와 함께 땅에 있었느니라. 우리는 예전에 함께 하늘에 있었지만 어쨌든 그곳은 영계에 속하느니라. 이제 나는 영계로 돌아갔고, 너는 땅에 있느니라. 나는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에 너 역시 땅에 속하지 않지만 너는 땅에서 네 역할을 다해야 하느니라. 너는 종이 되었으니 네 본분을 다해야 하느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에 위안을 얻었다. 당시 그는 극도의 육체적 고통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너무나 후회스러웠던 그는 “저는 너무 패괴되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없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그의 앞에 나타나 “베드로야, 내 앞에서 세웠던 뜻을 잊었느냐? 내가 한 말들을 정말 잊었느냐? 예전에 나와 함께 세웠던 뜻을 잊었느냐?”라고 물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예수는 그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땅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에게 이미 알려 주었으니 너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너 또한 이 땅과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라’라고 했던 말을 잊은 것이냐?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이렇게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마라. 사람과 하나님이 같은 세상에 있을 수는 없지만, 내게는 나의 일이, 네게는 너의 일이 있느니라. 네가 네 일을 마치는 날 우리는 분명 같은 경지에 있을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영원토록 함께할 것이니라.”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에 위안을 받고 마음이 놓였다. 그는 그 고통을 마땅히 받아야 하고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그는 깨우침을 받게 되었다. 예수는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특별히 베드로 앞에 나타나 그를 깨우쳐 주고 인도하며, 그에게 수많은 사역을 행하였다. 베드로가 어떤 일 때문에 가장 후회했겠느냐? 예수가 그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하지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베드로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대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는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어보았다. 베드로는 예수가 한 그 말의 뜻을 알고 “주여! 저는 예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했으나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시인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땅에 거하는 아들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땅에 온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는 예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했으나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나이다.”라고 한 이 말을 늘 후회하고 통곡했으며,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는 이 일로 더욱 후회하며 슬퍼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사역과 자신의 현재 분량을 생각하며 자주 예수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닿지 못하는 것 때문에 늘 후회하고 죄스러워했다. 이러한 일들은 그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저의 가장 귀한 것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제게는 믿음과 사랑밖에 없나이다. 제 목숨과 육체는 보잘것없나이다. 제게는 오직 믿음과 사랑밖에 없나이다. 당신을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제 믿음과 사랑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에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너 역시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라.”라고 한 말씀에 특히 격려를 받았다. 후에 베드로가 매우 고통스러워하자 예수는 “베드로야, 잊었느냐?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때문에 먼저 갔을 뿐이니라. 너 역시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라. 이를 정말 잊었느냐? 내가 너에게 두 번 말했거늘 기억 못 하는 것이냐?”라고 일깨워 주었다. 베드로가 그 말씀에 “잊지 않았나이다!”라고 답하니, 예수는 다시 이렇게 말씀했다. “전에 나와 하늘에서 즐거운 만남을 가졌을 때 우리는 한동안 함께했느니라. 너도 나를 그리워하고 나도 너를 그리워하느니라. 피조물이 내 눈에 보잘것없게 보일지라도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내가 한 약속을 잊었느냐? 너는 땅에서 내가 맡긴 사명을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맡긴 사명을 완수해야 하느니라. 언젠가 내가 반드시 너를 내 곁으로 데려올 것이니라.”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더 큰 격려와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부족하기만 하나이다! 당신이 제게 죽으라고 하시더라도 저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제 영혼을 어디로 데려가시든, 당신의 이전 약속대로 이루시든 이루지 아니하시든, 당신께서 앞으로 어찌하시든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믿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지킨 것은 믿음이요, 진정한 사랑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2)

이제 너는 베드로가 간 길이 어떤 길인지 분명히 보아야 한다. 베드로가 간 길을 분명히 보았다면 지금의 사역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불평을 터트리거나 소극적이 되지 않고 뭔가를 바라지도 않게 될 것이다. 너는 베드로의 그때 심정을 체험해야 한다. 그는 몹시 괴로워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어도 좋은 미래나 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세상의 명예나 복,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으며, 그저 가장 의미 있는 인생, 즉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종종 예수께 기도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을 사랑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나이다. 비록 입으로는 당신을 믿는다고 떠들었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나이다. 저는 그저 당신을 앙망하고 우러러보고 그리워했을 뿐 당신을 사랑하지도 진심으로 믿지도 않았나이다.” 그는 항상 기도하며 뜻을 세웠고, 언제나 예수의 말씀에 격려를 받으며 이를 동력으로 삼았다. 한동안 체험한 후, 예수가 베드로에게 시련을 주자 그는 예수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이 너무도 그립고 뵙고 싶사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나이다. 저를 빨리 데려가 주소서. 언제쯤에야 제가 필요하겠나이까? 언제쯤에야 저를 데려가시겠나이까? 언제쯤에야 당신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나이까? 저는 더 이상 육체에 살길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패괴되지 않고 거역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제 모든 것을 당신께 전부 바치길 원하옵니다. 더 이상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나이다.” 그는 당시에 이렇게 기도했으나 예수가 그에게서 무엇을 온전케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시련을 받고 극도로 고통스러워할 때 예수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서 말씀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온전케 하여 한 알의 열매로 만들 것이니라. 그것은 내가 온전케 한 후의 결정체로, 난 그것을 누릴 것이니라. 너는 정말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네게 하라는 일을 하였느냐? 내가 한 말을 살아 냈느냐? 너는 나를 사랑했느니라. 나를 사랑했으나 나를 살아 냈느냐?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너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전에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일을 떠올리며 불평을 멈추었다. 다시 기도할 때는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는 다시 기도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을 떠난 적이 있고, 당신도 저를 떠나신 적이 있나이다. 우리는 이별했던 때도 함께했을 때도 있지만 당신은 그 무엇보다 저를 사랑하셨나이다. 저는 여러 번 당신을 거역하고 여러 번 당신을 슬프게 했나이다.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이까? 저는 당신이 제게 행하신 사역과 제게 맡기신 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당신께서 제게 행하신 사역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나이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당신께서 아시나이다. 제가 무슨 기능을 할 수 있는지는 당신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옵니다. 저를 당신의 지배에 맡기길 원하옵고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옵나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당신만이 아시나이다. 사탄이 이렇게 저를 우롱하고, 저 역시 당신을 거역한 적이 있으나 당신께서는 그런 이유로 저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런 것들로 저를 대하지 않으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저는 제 일생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바람이나 계획도 없사옵니다. 오직 당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행하길 원할 뿐이옵니다. 저는 당신의 쓴잔을 마시고, 저 자신을 당신의 지배에 맡기길 원하나이다.”

너희는 너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 너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맡긴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느 날 시련이 임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너희가 베드로의 체험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너희가 베드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베드로 역시 진실한 믿음과 사랑,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정직함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 너에게 정말로 베드로 같은 사랑과 믿음이 있다면, 너도 반드시 예수께 온전케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3)

베드로는 형벌 속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 저의 육은 패역한 것이니 저를 형벌하고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당신의 형벌과 심판을 기쁨으로 여기나이다. 당신께서 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당신의 심판 속에서 당신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성품을 볼 수 있나이다. 저를 향한 당신의 심판 가운데 사람들이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하나이다. 당신의 성품이 나타나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볼 수 있고, 또한 당신의 심판을 통해 당신을 향한 저의 사랑이 더욱 순결해지게 되어 의인의 모습에 이를 수 있으면, 이러한 심판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나이다. 그 속에는 당신의 아름다운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아직 패역한 면이 많아 당신 앞에 갈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나이다. 그러니 저를 더 많이 심판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열악한 환경이든 커다란 환난이든,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든 제게는 모두 귀하나이다. 당신의 사랑이 너무도 깊나이다. 저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당신이 지배하시는 대로 따르겠나이다.” 이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알게 된 인식이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간증이다. 현재 정복된 이후 너희의 모습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하나님께 정복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하나님이 저를 크게 높여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인생이 허무하고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람은 바쁜 일생을 보내며 자식을 낳아 키우고 세대를 이어 가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정복되고서야 사람의 이런 삶은 아무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이렇게 정복된 자가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겠느냐? 본보기와 모델이 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의지가 없고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반면교사이다. 설령 정복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소극적인 자는 온전케 될 수 없다. 베드로는 온전케 된 후, 즉 세상을 떠날 때가 됐을 무렵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제 수명이 몇 년 더 연장될 수 있다면 당신을 더 순수하게, 더 깊게 사랑하고 싶나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당신의 때가 되었나이다. 바로 당신이 저에게 예비하신 때가 되었나이다. 저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올라 이 증거를 해야 하나이다. 제 사랑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기를, 더 순수해지기를 바라나이다. 제가 오늘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고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음에 위안과 평안을 느끼나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고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당신께 제 자신을 전부 바치고 제 생명까지 바칠 수 있음에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느끼나이다. 하나님, 당신은 참으로 사랑스럽나이다. 앞으로 좀 더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더 사랑하겠나이다. 살아 있는 한 저는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하길 원하옵나이다. 저는 불의와 죄로 인해 당신의 심판과 형벌, 시련을 받았고, 그러면서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더 많이 보게 되었나이다. 이는 저의 복이옵니다.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나이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싶나이다. 저는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고 싶나이다. 제가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으니 말이옵나이다. 저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하나이다. 제가 당신으로 인해 십자가에 오르고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나이다. 하지만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저는 만족하지 못하나이다. 저는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완전히 충족시켜 드릴 수 없고, 당신께 보답한 것이 너무 적음을 알고 있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당신에게서 받은 사랑에 다 보답해 드리지 못했나이다. 제가 너무 부족하나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더 드나이다. 제 모든 잘못과 당신께 보답해 드리지 못한 모든 사랑을 그저 이 한순간으로 메울 수밖에 없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4)

사람은 현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해야 한다.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려면 베드로의 인식과 체험을 갖춰야 한다. 더 높고 더 깊은 것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더 깊고 순결한 사랑을 추구해야 하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생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이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베드로 같은 사람이다. 너는 일시적인 편안함에 만족하며 소극적이 되어 후퇴해 더 깊고, 더 세밀하고, 더 실제적인 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적극적인 면에 자발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또 너는 실제적인 사랑을 갖추어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타락해 살아가는 짐승 같은 삶에서 벗어나야 하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우롱하지 말고, 자기 삶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얻지 못할 진리도, 서지 못할 정의도 없다. 너는 일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느냐? 너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야 하겠느냐? 이는 모두 네 일생에서 가장 큰 일이다. 너에게 이런 의지와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기개 없는 나약한 자가 되지 마라. 너는 의미 있는 인생과 의미 있는 진리를 체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그렇게 건성으로 대해선 안 된다. 일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지나가 버리는데, 너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이런 기회가 또 오겠느냐? 사람이 죽은 후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너는 베드로와 같은 의지와 양심이 있어야 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을 우롱하지 마라.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네 일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더 의미 있게 믿을 수 있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상, 어떻게 해야 더 순결하고, 더 아름답고, 더 선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어떻게 정복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온전케 될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하고, 항상 자신은 안 된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진리가 어찌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느냐? 진리가 어찌 고의로 사람과 맞설 수 있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진리가 어찌 너를 눌러 버릴 수 있겠느냐? 네가 정의를 위하여 굳게 선다면 정의가 어찌 너를 쓰러뜨릴 수 있겠느냐? 네게 진정으로 생명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생명이 너를 피할 수 있겠느냐? 너에게 진리가 없는 것은 진리가 너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네가 진리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네가 정의를 위해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은 정의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정의는 사실을 왜곡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네가 오랫동안 추구하고도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은 생명이 네게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네가 생명에 대해 양심이 없고 생명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네가 빛 속에서 살면서도 빛을 얻지 못한 것은 빛이 너를 밝게 비추지 못해서가 아니라, 네가 빛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빛이 조용히 떠났기 때문이다. 네가 추구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치 없는 천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네게는 살아갈 용기가 없고 흑암 세력에 반항할 의지도 없다. 너는 너무 나약하다! 그래서 사탄 세력의 포위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평탄하게 살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려 할 뿐이다. 정복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자 마땅히 다해야 할 의무이다. 네가 만약 정복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그건 빛의 존재를 쫓아내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위해 고통받아야 하고, 진리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진리를 위해 굴욕을 참아야 하고, 더 많고 많은 진리를 얻기 위해 더 많고 많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너는 가정의 화목을 누리기 위해 진리를 버리지 말고, 일시적인 향락을 위해 일생의 존엄과 인격을 잃지 마라. 마땅히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을 추구하고 더 의미 있는 인생길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속되게 살며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다면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아니냐? 네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 하나를 위해 너는 모든 육적 향락을 포기해야 하며, 약간의 향락을 위해 모든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인격도 없고 존엄성도 없고 살아갈 의의도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5)

하나님이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일이며, 나아가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다. 사람은 형벌과 심판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지금은 진심으로 탄복하지만 작은 좌절만 마주해도 견디지 못한다.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벌과 심판을 더 많이 겪어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지금 너희는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이 참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고 순결한 사랑에는 더더욱 이르지 못했다. 너희는 인식이 너무 얕고 분량도 아직 부족하다. 정말 어떤 환경이 닥치면 증거하지 못하고, 적극적인 면에서의 진입이 너무 적으며,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대부분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할 뿐, 실행할 길이 없고 목표도 명확하지 않다. 온전케 된 사람은 정상적인 인성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갖춘 진리가 양심의 범위를 넘어서고 양심의 기준보다 높다. 그런 사람은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에 대해 알았고, 하나님이 사랑스럽고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하며,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점이 많아서 사람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보았다. 온전케 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다짐한 바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사랑이고 대가를 따지지 않는 사랑이며 거래가 없는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든 말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 조건을 걸지 않고, 양심적 판단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셨으니 저도 당신께 사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주지 않으신다면 저도 당신께 돌려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식이 아니다. 온전케 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에게 이 사역을 하셨다. 내가 하나님께 온전케 될 이런 기회와 조건, 자격을 얻은 이상,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체험한 것과 같다. 그는 가장 연약해졌을 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랑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하지만 저의 분량은 너무 작나이다. 저는 연약하고 힘이 없으며, 제 사랑은 너무도 유한하나이다. 당신에 대한 진심도 너무 적나이다. 당신의 사랑과 비교하면 저는 살아갈 자격도 없나이다. 저는 오로지 이 일생을 헛되이 살지 않고,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며, 더욱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칠 수 있기를 바라나이다. 피조물인 저는 당신을 만족게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며,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나이다. 비록 저는 지금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당신의 당부를 잊을 수 없고 당신의 사랑을 잊을 수 없나이다. 저는 지금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뿐이나이다. 하나님, 제 마음은 몹시 괴롭나이다. 어떻게 해야 제 마음속 사랑을 당신께 돌려 드릴 수 있나이까? 어떻게 해야 제 능력을 다해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충족시켜 드리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칠 수 있나이까? 인간의 연약함을 당신께서는 전부 아시나이다.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의 사랑에 미칠 수 있겠나이까? 하나님, 당신은 저의 분량이 작음을 아시고, 저의 사랑이 너무 적음을 아시나이다. 이런 환경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능력을 다할 수 있나이까? 저는 제가 당신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드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나이다. 하지만 지금 저의 분량은 실로 너무나 작나이다. 제게 힘과 믿음을 더해 주시어 당신께 더 순결한 사랑을 바칠 수 있도록, 나아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제가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형벌과 심판, 시련, 그리고 더 심한 저주까지도 겪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이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셨으니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나이다. 비록 지금 저는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겠나이까? 당신의 사랑과 형벌, 심판을 통해 당신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는 당신의 사랑에 만족을 드릴 수 없음을 느끼나이다. 당신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이나이다.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모든 것을 창조주께 바칠 수 있겠나이까?’ 베드로는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지만 분량이 부족했다. 그때의 베드로는 가슴이 에이는 듯 몹시 고통스러웠고,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사람은 분량이 작고 양심도 연약하나이다. 저는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나이다. 지금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나이다. 저는 오로지 최선을 다해 제 모든 것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나이다. 당신이 저를 심판하시든 형벌하시든, 베풀어 주시든 거두어 가시든, 저는 아무 원망도 없나이다. 당신이 저를 형벌하고 심판하실 때 제 마음속에는 늘 원망이 있었고, 아무리 해도 순결함에 이르지 못했으며, 당신의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사랑에 보답했나이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이다. 저는 지금 저 자신을 더욱 증오하나이다.’ 베드로는 더 순결한 사랑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는 찾고 간구하고 더욱이 자책했다. 그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으며,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자신이 증오스럽다고 느꼈다. 하지만 마음이 또 약간 슬프고 우울했으며 소극적이 되었다. 그는 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기 능력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욥의 믿음을 추구했다. 그는 욥이 당시에 그토록 큰 믿음을 가졌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욥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베푼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것도 당연하고, 하나님이 베풀고 싶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욥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칭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지금 저는 양심적으로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조금 돌려 드리는 것에만 만족할 수 없나이다. 제 생각이 너무나 패괴하여 당신을 창조주로 여기지 못하나이다. 저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기에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기꺼이 바치고, 당신이 하신 모든 일을 알고,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길 바라나이다.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옵소서. 또한 당신의 음성을 찬미하고,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칭송하게 하옵소서. 저를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소서. 저는 당신을 위해 굳게 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아름다운데, 제가 어찌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살기를 원하겠나이까? 저는 당신께서 지으셨는데 제가 어찌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 수 있겠나이까? 저는 온전히 당신의 형벌 속에서 살지언정, 그 악한 자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싶지는 않나이다. 저의 몸과 마음을 전부 당신의 심판과 형벌에 바치고 싶나이다. 이를 통해 정결케 되고 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나이다. 저는 사탄을 혐오하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나이다. 저에 대한 심판을 통해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이 나타나기를 기꺼이 원하고, 이에 아무런 원망도 없나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당신의 심판과 함께하여, 이로써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고, 악한 자의 권세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늘 이렇게 기도하고 구하여 꽤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했다. 또한 그는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았고, 더 나아가 양심의 기준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의 이런 기도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며, 그의 의지는 점점 강해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갈수록 커졌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계속 구했다. 그의 기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저는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기만 했을 뿐 사탄 앞에서 당신을 증거하지 못했나이다. 저는 사탄의 권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육으로 살고 있나이다. 저의 사랑으로 사탄을 물리쳐 수치스럽게 하고 당신의 마음을 만족게 하길 원하나이다. 또한 저의 전부를 당신께 드리고, 사탄에게는 조금도 주고 싶지 않나이다. 사탄은 당신의 원수이기 때문이나이다.’ 그는 이렇게 구할수록 더 감동받았고, 이런 일들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깊어졌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그가 도달한 경지였다. 그는 사탄의 권세를 넘어섰고, 육적인 향락과 기호에서 벗어나 형벌이든 심판이든 더 깊게 체험하기를 바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 속에서 사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저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우롱을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나이다. 저는 당신의 저주 속에서 사는 것이 기쁘고, 사탄의 축복 속에서 사는 것이 괴롭나이다. 당신의 심판 속에서 살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몹시 기쁘나이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저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고, 더욱이 저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나이다. 저는 평생 당신의 심판 속에서 살면서 당신의 보살핌을 받을지언정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나이다. 저는 당신에 의해 정결케 되기를 원하지, 고통받더라도 사탄에게 이용당하거나 우롱당하는 것은 원치 않나이다. 저 같은 피조물을 당신께서 쓰시고, 점유하시고, 심판하시고, 형벌하심은 당연하며, 심지어 저주하시는 것도 마땅하나이다. 당신께서 저를 축복하려 하실 때, 제 마음은 기쁘나이다. 그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나이다. 당신은 창조주시고 저는 피조물이나이다. 그러기에 저는 당신을 배반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도 안 되고 사탄에게 이용당해도 안 되나이다. 저는 당신의 우마가 되어야지, 사탄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나이다. 당신의 형벌 속에서 살면서 육적인 복락을 누리지 못할지언정, 당신의 은혜를 잃을지언정 저는 여전히 그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것이나이다. 비록 당신의 은혜가 저를 따르지는 않지만, 저는 당신의 형벌과 심판을 즐거움으로 여길 것이나이다. 이것이 당신의 가장 좋은 축복이고 가장 큰 은혜이나이다. 당신은 늘 위엄과 진노로 저를 대하시지만 그래도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고,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부족하기만 하나이다. 저는 당신의 집에서 살면서 당신께 저주와 형벌을 받고 매를 맞을지언정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고, 육만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며 바쁘게 살고 싶지도 않으며, 더욱이 육을 위해 살기를 원치도 않나이다.” 베드로의 이런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었다. 이것은 온전케 된 자의 체험이고 온전케 된 자의 최고의 경지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것은 그의 가장 귀한 점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 나에게 물질적 향락을 누리게 해 주어도 나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노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임하면 나는 그것을 은혜와 누림, 축복으로 여기노라.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계속 사탄의 통제를 받고 사탄에게 좌지우지됐을 것이니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하고,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노라. 설령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지 않아 내 마음이 위안을 얻지 못하고, 불처럼 타오르며 평안과 기쁨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형벌과 징계가 늘 나를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볼 수 있으며 이를 기쁨으로 여길 것이니라. 이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노라. 비록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이 무자비한 형벌, 심판, 저주, 매로 바뀌었으나 그래도 나는 이런 것들을 누림으로 여길 것이니라. 이런 것이 나를 더욱 정결케 하고 변화시키며,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더 순결하게 사랑하도록 하기 때문이노라. 또 내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게 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사탄을 위해 힘쓰지 않게 하기 때문이노라. 언젠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지 않고 내 모든 것과 모든 능력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매우 만족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나를 구원했으니 내 삶에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없어서는 안 되노라.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것이니라. 만약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나를 보살피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 것이며, 더욱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기회도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나를 떠나지 않아야만 내가 늘 하나님께 정결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엄한 말씀과 공의로운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 있는 심판이 있어야만 내가 커다란 보호를 받으며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노라. 내가 정결케 되고 사탄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살 수 있는 것, 이것이 금생의 가장 큰 복이니라.” 이것이 베드로가 체험한 최고의 경지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6)

사람이 육으로 사는 것은 인간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 심판과 형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사탄처럼 더러운데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보호이고 가장 큰 은혜야. 하나님이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해야만 사람이 깨어날 수 있고 육과 사탄을 증오할 수 있지. 하나님의 엄한 징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의 권세와 자신만의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살게 해. 심판과 형벌은 가장 좋은 구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의 형벌과 심판이 있는 한 저는 당신께서 아직 저를 떠나지 않으신 줄로 알고 있나이다. 당신이 제게 기쁨도 평안도 주지 않고 저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하시며, 수없이 채찍질하시더라도 저를 떠나지만 않으시면 제 마음이 편안할 것이나이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은 오늘날 저에게 가장 좋은 보호이자 가장 큰 축복이 되었나이다. 당신이 제게 베푸신 은혜는 저에 대한 보호이나이다. 당신은 지금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이다. 이 은혜는 당신이 보여 주신 공의로운 성품이고, 형벌이요 심판이며, 더욱이 시련이고 고난의 삶이나이다.’ 그가 육적인 즐거움을 내려놓고 더 깊은 사랑과 더 큰 보호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형벌과 심판 속에서 얻은 은혜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정결케 되고 성품이 변화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려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징계와 매가 떠나지 않게 함으로써 사탄의 지배와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빛임을,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빛이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축복이며, 가장 큰 은혜이자 가장 좋은 보호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육으로 살면서 정결케 되지 못하고 보호를 받지 못하면 점점 타락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정결케 되어야 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대하실 때 저는 기쁨과 위안을 얻었으며, 저를 형벌하실 때는 제 마음에 더 큰 위안과 기쁨이 있었나이다. 비록 제게 연약함과 말 못 할 고충이 있고 또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당신은 제 슬픔이 저의 패역과 연약함 때문임을 아시나이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없어 울고, 당신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슬퍼하고 통회하나이다. 하지만 저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고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의 형벌은 저에 대한 보호이자 가장 좋은 구원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심판은 당신의 포용과 인내를 뛰어넘나이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이 없다면 저는 당신의 긍휼과 자비를 누릴 수 없나이다. 지금에 이르러 저는 당신의 사랑이 하늘보다 더 높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사랑은 긍휼과 자비일 뿐만 아니라 형벌과 심판이라는 것을 보았나이다. 저는 당신의 형벌과 심판 속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얻었나이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이 없다면 아무도 정결케 될 수 없고, 아무도 창조주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나이다. 저는 온갖 시련과 환난을 겪고 구사일생했지만 그로써 진정 당신을 알고 크나큰 구원을 받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형벌과 심판, 징계가 저를 떠난다면 저는 어둠 속에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될 것이나이다. 사람의 육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이까? 당신의 형벌과 심판이 저를 떠나면 당신의 영이 저를 버린 것과 같고, 또 당신께서 더 이상 저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나이까? 당신이 저에게 질병을 주시고 저의 자유를 빼앗아 가셔도 저는 살아갈 수 있지만, 당신의 형벌과 심판이 저를 떠난다면 살아갈 수가 없나이다. 저에게 형벌과 심판이 없다면 당신의 사랑을 잃은 것이나이다. 당신의 사랑은 너무도 깊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나이다. 당신의 사랑을 잃으면 저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없게 되나이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나이까? 그런 어둠, 그런 삶을 견딜 수가 없나이다. 당신이 저와 함께하시면 제가 당신을 보는 것과 같은데 어찌 당신을 떠날 수 있겠나이까?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저의 가장 큰 위안을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설령 그것이 당신의 아주 작은 위안의 말씀일지라도 그리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사랑을 누리고 이제는 당신을 떠날 수 없게 되었는데, 제가 어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당신의 사랑 때문에 슬픔의 눈물을 수없이 흘렸지만 저는 항상 이런 삶이 더 의미 있고, 저 자신을 더 충실하게 하며, 스스로를 더 변화시키고, 피조물이 갖춰야 할 진리에 더 잘 도달하게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7)

사람은 한평생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며, 그 누구도 스스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패괴 속에서 살고 공허함 속에서 살며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모두 육을 위해, 정욕을 위해, 사탄을 위해 그렇게 아무 근심 없이 살아가며, 생존의 가치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은 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진리를 찾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볼지라도 어떻게 해야 사탄 권세의 통제에서 벗어날지 알지 못한다. 역대로 이런 비결을 발견한 사람이나 찾아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은 사탄을 혐오하고 육을 혐오한다고 해도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권세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도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더냐? 패역한 짓을 저지르고도 참회하지 않고, 더욱이 자신을 더럽고 패역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매우 편안하게 느낀다. 너의 편안함은 너의 패괴로 인한 것 아니더냐? 그 편안한 느낌은 너의 패역에서 나온 것 아니더냐? 사람은 모두 인간 지옥에서 살고 있고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살고 있다. 곳곳에서 유령이 사람과 함께 살면서 사람의 육체를 부패시키고 있다. 네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천당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네가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마귀의 영역이고, 인간 지옥이자 음부이다. 사람이 정결케 되지 않으면 모두 더러운 존재에 속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여전히 사탄의 포로이다.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으면 사람은 더더욱 사탄의 이 흑암 권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드러낸 패괴 성품과 네가 살아 낸 패역한 행위는 네가 아직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다. 너의 마음과 생각이 정결케 되지 않고 너의 성품이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으면, 네 전체가 계속 사탄의 권세에 좌지우지된다. 너의 마음이 사탄에게 통제당하고 너의 생각이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네 전체가 사탄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된다. 너는 지금 베드로의 기준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너는 자질을 갖추었느냐? 너는 오늘날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너는 베드로가 알게 된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네가 지금도 알지 못하는데 앞으로는 알 수 있겠느냐? 너처럼 나태하고 나약한 사람은 결코 형벌과 심판을 알 수 없다. 네가 육적인 평안과 향락을 추구한다면 정결케 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다. 네가 살아 낸 것이 사탄이요, 육이기 때문이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결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더 깊은 생명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생명을 추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온전케 될 기회가 없으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 가고 성품 변화에 들어가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종교의식에 따라 예배만 드린다면 헛수고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에 대한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진리의 진입과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 온전케 될 수 없다. 온전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행한 사역, 특히 형벌과 심판의 의의, 왜 사람에게 이 사역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런 형벌 속에서 네가 베드로와 같은 체험과 인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성령 역사를 아는 것, 그리고 성품 변화를 추구한다면 온전케 될 기회가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8)

온전케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복되는 이 단계의 사역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은 정복되어야 온전케 되는 사역을 체험할 수 있다. 네가 정복되는 역할만 맡는다면 그리 큰 가치가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확장될 때 너의 몫을 바칠 수가 없다. 그것은 네가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추구하지 않아 실제적인 생명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에서 너는 봉사자가 된 적이 있고 부각물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베드로처럼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베드로가 온전케 된 길을 따라 추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성품이 변화된 체험도 없을 것이다. 네가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너에게 간증이 있을 것이다. 그럼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 한 단계 한 단계 사역에서 저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사역을 받아들여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얻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되었지요. 그분의 형벌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분의 공의로운 성품이 임하여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고요. 바로 그분의 심판과 형벌로 보호를 받고 정결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없고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 저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알지도, 구원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늘날 저는 피조물로서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공의로운 심판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누릴 가치가 있기에 사탄에게 패괴된 피조물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누려야 합니다. 그분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심판과 형벌도 있지만 크나큰 사랑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그 사랑을 깨달았어요. 이건 제 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케 되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 가는 길이자 말하는 인식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고, 베드로의 체험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진리가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마지막까지 체험하면 반드시 심판을 통해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께 얻어지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29)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는 성결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 있을 때 그들은 성결했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며, 여호와께 충성하고 여호와를 배반할 줄 몰랐다. 사탄 권세의 방해를 받지 않았고 사탄의 독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성결한 인류였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더러움에 물들지도 않고 육에 점유되지도 않았으며, 여호와를 경외했다. 하지만 나중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독사의 독소가 생기고, 여호와를 배반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성결했고 여호와를 경외했다. 그때의 그들이 바로 진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에 의해 점점 패괴되어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람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최초의 인류에게는 여호와의 생기가 있었고, 패역이 조금도 없었으며, 마음속에 사악함이 없었다. 그때의 사람이 진정한 인류였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짐승이 되었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하고 더러웠으며, 선함도 성결함도 사라졌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탄 아니겠느냐? 네가 많은 사역을 체험하고도 변화되거나 정결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정복되기만 했을 뿐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왜 온전케 되지 못했다고 하겠느냐?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며, 육적인 향락과 일시적인 안락만을 탐하여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고,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요,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영적인 일을 알려고 하지 않고 성결해지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살아 내고자 하지 않고, 소극적인 면에서 정복된 것에만 만족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 살아가는 성결한 인류가 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없으며,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사람이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진리는 간절히 바라고 찾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고, 이 구원은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너희는 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얻어질 수도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얻으면 하나님도 너희를 얻게 된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다 들었으니 나의 이 말대로 실천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너희가 이 말을 실천했다면 나는 이 말을 통해 너희를 얻은 것이고, 동시에 너희도 이 말을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커다란 구원을 얻은 것이다. 너희가 정결함을 얻으면 진정한 사람에 속하게 된다. 네가 진리를 살아 내지 못하고 온전케 된 모습으로 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송장이자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없기에, 즉 여호와의 생기가 없기에, 너는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정복된 후에도 간증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아주 작은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일 뿐, 네가 영이 있는 산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형벌과 심판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너의 성품이 새로워지거나 변화된 것은 아니므로 너는 여전히 옛 사람이자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지, 정결케 된 사람은 아니다. 온전케 된 사람만이 가치가 있고,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인생을 얻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0)

지금 어떤 사람들은 쓰임 받고 싶어 하지만, 정복된 후에도 바로 쓰임 받지는 못한다. 사람을 사용할 때에도, 네가 지금의 말씀으로 살지 못한다면 너는 온전케 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간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도태될지 아니면 쓰임 받을지가 정해진다. 정복된 것은 그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본보기나 모델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부각물에 불과하다. 생명 성품이 변화되어 안팎으로 다 바뀌어야 진정으로 온전케 된 사람이다. 지금 정복되는 것과 온전케 되는 것이 있는데, 네가 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너는 어느 것에 이르기를 바라느냐? 너는 지금 온전케 될 조건을 갖추었느냐?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은 어떤 것이냐? 너는 어떻게 갖추고, 어떻게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겠느냐?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완전히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온전케 되고자 한다면 너는 성결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냐? 너는 형벌과 심판으로 정결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네가 정결케 되기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느냐? 네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는 형벌과 심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냐? 지금 너에게 하는 사역은 대부분이 형벌과 심판인데, 너는 너에게 하는 이런 사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네가 체험한 형벌과 심판은 너를 정결케 하였느냐? 너를 변화시켰느냐? 네게서 성과를 거두었느냐? 오늘날, 이 많은 사역, 그러니까 저주와 심판, 폭로를 너는 귀찮다고 여기느냐, 아니면 너에게 아주 이롭다고 여기느냐? 너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조그마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냐, 아니면 평안과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이냐? 그것도 아니면 형벌과 심판으로 정결케 된 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느냐? 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온전케 됨에 있어서 어떤 조건들을 갖추었느냐? 온전케 된 후에 보인 그의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냐, 그를 보지 못해서 사랑한 것이냐? 아니면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환난의 고통을 받은 뒤에 자신의 더러움과 패역, 그리고 주의 거룩함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더욱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마음이 더 순결해진 것은 형벌과 심판 때문이냐,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냐?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 너는 은혜 때문에, 지금의 작은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것이 참된 사랑이냐? 너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겠느냐? 마땅히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보고 난 뒤, 참된 사랑이 생기고, 더 나아가 완전히 탄복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베드로처럼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부족하기만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네가 추구하는 것은 형벌과 심판을 통해 정복되는 것이냐, 아니면 형벌과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되고 보호와 보살핌을 받는 것이냐? 네가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너의 일생은 의미 있는 일생이냐, 아니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생이냐? 너는 육을 원하느냐, 진리를 원하느냐? 너는 심판을 원하느냐, 편안함을 원하느냐? 너는 이렇게 많은 사역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움을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이 길을 대체 어떻게 가야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형벌과 심판이 네게서 결실을 보았느냐? 네게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이 있는지는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패괴된 옛 성품대로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더욱이 양심도 갖추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심이 있겠느냐?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인 사람이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고, 네 사역과 진입, 하는 말, 그리고 너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다. 이런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받은 사람이냐? 이런 사람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냐?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그저 인식만 있고 그것을 살아 내지는 못한 사람이겠느냐? 지금 사람에게 요구하는, 참된 인생을 살라는 것의 조건은 무엇이냐? 베드로의 기도가 입으로만 한 것이었더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란 말이냐? 베드로는 기도할 줄만 알고 진리를 행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느냐? 너는 누구를 위해 추구하느냐? 형벌과 심판 속에서 보호받고 정결케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형벌과 심판은 다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것이더냐? 심판이라 하면 모두 징벌하는 것이더냐? 설마 평안, 즐거움, 물질적인 축복, 일시적인 안락만이 사람의 생명에 이롭단 말이냐? 사람이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살 뿐 심판받는 삶이 없다면 정결케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변화되고 정결케 되려면 온전케 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느냐? 너는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해야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1)

사람들은 베드로를 얘기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가 하나님을 세 번 부인한 일, 사탄을 위해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한 일,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일 등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베드로가 어떻게 나를 알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 결말이 어땠는지에 중점을 두어 너희에게 얘기하겠다. 베드로는 좋은 자질을 갖췄지만, 바울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의 부모는 나를 핍박했고, 사탄에게 점령된 악마에 속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베드로에게 전도했다고는 할 수 없다. 베드로는 총명하고 타고난 자질이 좋아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장성한 후에는 부모의 ‘원수’가 되었다. 이는 베드로가 끊임없이 나를 알고자 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로 인해 부모와 등지게 되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 먼저 천지 만물이 모두 전능자의 수중에 있고, 또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은 사탄의 ‘가공’을 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자 직접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부모의 부정적인 면으로 인해 나의 자비와 긍휼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를 찾으려는 마음이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내 말을 먹고 마시는 것을 중시했고, 더욱이 내 뜻을 찾는 것을 중시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늘 신중했기에 영은 언제나 민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의 사슬에 매이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에 평소에 지난날 실패했던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어 자신을 다그치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또한 역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는 것을 중시했다. 그런 까닭에 부정적인 면을 통해, 더 중요하게는 긍정적인 면을 통해 더 빨리 성장하였으며, 나아가 내 앞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내 손에 맡기고 의식주마저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고 모든 것에서 나를 만족게 하는 것을 바탕으로 내 풍요로움을 누렸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베드로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을 주었는지 모른다. 물론 베드로 또한 그 시련 속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베드로는 수백 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단 한 번도 믿음을 잃고 나에 대해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를 이미 버렸다고 말했을 때에도, 그는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여전히 이전의 실행 원칙에 따라 실제적으로 나를 사랑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그가 나를 사랑할지라도 칭찬하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그를 사탄의 손에 내버릴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육신에 실제로 임하지는 않는 이러한 말씀의 시련 속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나에게 기도했다. ‘하나님, 천지 만물 중에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일이 전능자의 손에 있지 않겠나이까? 당신이 저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 제 마음은 당신의 긍휼로 매우 기쁘나이다. 당신이 저를 심판하실 때, 저는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행사가 얼마나 심오한지 더욱 느끼나이다. 이는 당신께 권병과 지혜가 가득하기 때문이나이다. 제 육체는 고통받지만, 영은 위로를 받나이다.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와 행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당신을 알고 난 후에 저를 죽게 한다 해도 어찌 기꺼이 원하지 않겠나이까? 전능자시여! 당신은 정말 저에게 보이기 싫어하시나이까? 제가 정말 당신의 심판을 받을 자격이 없나이까? 혹시 저에게 당신이 보고 싶지 않으신 것들이 있는 것은 아니나이까?’ 베드로는 그런 시련 속에서 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 쓰임 받는 것으로(나에게 심판받아 사람들이 나의 위엄과 진노를 볼 수 있을지라도) 스스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고, 시련으로 고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내 앞에서 보인 충성심과 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모범과 본보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냐? 왜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 가며 베드로의 행적을 얘기하는지 너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너희는 마땅히 이것을 너희의 행동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ㆍ제6편>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2)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예수를 따르면서 그에게서 사람에게 없는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일 년을 따르자 예수는 베드로를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뽑았다(물론, 이것은 단지 예수의 마음속 일이니 사람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음). 생활 속에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베드로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베드로는 특히 예수가 전하는 도를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베드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해 주었고, 그에게 매우 충성했으며, 그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곳곳을 다니는 예수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온유한 말씀, 그리고 먹고 입고 자고 행하는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고, 다방면으로 예수를 본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것이 옳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지난날 자신의 모든 낡은 것들을 벗어던지고 예수의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본받았다. 그때에야 베드로는 천지 만물이 모두 전능자의 수중에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선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어떠함을 받아들여 본보기로 삼았다. 베드로는 삶 속에서 예수가 자신이 한 것만이 옳다고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자랑한 적도 없으며, 도리어 사랑으로 사람을 감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일에서 예수의 어떠함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모든 것은 베드로가 본받을 대상이 되었다. 베드로는 체험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예수의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하늘에 계시는 전능자를 찾은 적이 있는데, 천지 만물의 기묘함을 보고서야 전능자의 사랑스러움을 크게 느끼게 되었나이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 참된 사랑이 있었던 적은 없었고, 제 눈으로 전능자의 사랑스러움을 본 적도 없었나이다. 오늘날, 저는 저 자신이 전능자의 눈에 들어서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이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나이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그분의 한없는 사랑스러움을 찾아냈는데, 어찌 오늘의 이 경지에만 국한된 것이겠나이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베드로에게서도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지극히 순종했다. 물론 베드로 또한 적지 않은 좌절을 겪었다. 예수가 베드로를 데리고 곳곳에서 말씀을 전할 때, 베드로는 늘 겸손하게 예수의 설교를 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따라다녔다고 교만한 적이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그가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 후로, 늘 슬퍼하며 혼자 몰래 울었다. 하지만 ‘불행’의 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베드로는 예수가 잡혀간 뒤에 혼자 배 위에서 울었고, 그 일로 인해 절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아 계속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람의 연약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에게 “당신은 가신 다음에도 다시 저희 가운데 오셔서 보살펴 주실 수 있나이까? 저희가 다시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겠나이까?”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너무 유치하고 사람의 관념도 잔뜩 묻어 있었지만, 예수는 베드로의 괴로운 심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사랑으로 베드로의 연약함을 헤아려 주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네 말이 경우에 맞지 않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게 죽은 뒤에 부활하여 40일 동안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을 약속해 주신 적이 있느니라. 너는 내 영이 언제나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그제서야 베드로는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뭔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예수는 부활 후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관념이 남아 있지 않게 하려고 베드로가 차려 준 풍성한 음식을 거절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예수를 깊이 알게 되었고, 예수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예수는 부활한 뒤에 종종 베드로에게 나타났다. 40일이 지나 승천한 후에도 베드로에게 세 번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성령의 사역이 곧 끝나고 새로운 사역이 시작될 때 나타났다.

베드로는 한평생 고기를 잡으며 살았고, 더욱이 전도의 생애를 보냈다. 베드로는 말년에 베드로전후서를 썼고,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도 여러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 역시 그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밑천으로 사람들을 훈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생명에 알맞게 공급해 주었다. 베드로는 일평생 예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으로 격려를 받아 왔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를 때 목숨을 바쳐서라도 예수의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모든 일에서 예수를 본받겠다고 뜻을 세웠고, 예수 역시 베드로에게 응답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53세가 되던 해(예수와 헤어진 지 20여 년 되던 해)에 예수는 그에게 나타나 그의 뜻을 이루어 주겠다고 했다. 베드로는 그 후 7년 동안 자신을 알아 가는 삶을 살다가 7년 후의 어느 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평범치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한 말씀의 비밀 해석ㆍ베드로의 인생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3)

흑암의 권세란 무엇이냐? 흑암의 권세란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고 결박하고 통제하는 사탄의 권세를 가리킨다. 사탄의 권세는 죽음의 기운을 지닌 권세이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멸망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여 너의 마음이 오롯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면, 너는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게 되고, 따라서 마음을 완전히 드리려고 할 것이다. 바로 그때 너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고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고 늘 하나님을 기만하고 성의 없이 대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면 사람은 모두 사탄의 권세, 즉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불신자들은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부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니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만 할 뿐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낡은 규례와 죽은 글귀에 빠져서 살고, 막연하고 어두운 삶 속에서 살게 될 뿐, 하나님께 완전히 정결케 되지도, 얻어지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 해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므로 여전히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지 못한 사람,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모두 흑암의 권세 아래에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일생 중 대부분의 시간을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산다면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였을 뿐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는 못하는 사람은 모두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으며,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유를 얻지 못하고 늘 어떤 일로 속박을 받으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결박되어 죽음의 분위기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에 충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 준 사명에 충성하지 않으며, 교회에서 역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의도적으로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형제자매들 간의 관계를 끊어 놓거나 당을 짓는 자들은 더더욱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자, 사탄에게 결박된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늘 지나친 욕망을 품으며, 이익만을 얻으려 하고 성품의 변화는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진리 실행에서 언제나 참답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하지도 않고 그저 육을 만족시키는 자 역시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며 죽음이 드리운 사람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할 때 교활하고 간사한 수작을 부리고, 하나님을 무성의로 대하거나 기만하고,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는 자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성품 변화를 중요시하지 않는 자도 모두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4)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다면 먼저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네 마음을 하나님께 활짝 열고,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지금 너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들을 하고 있느냐? 네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했느냐? 네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것이 맞느냐?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냐?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필히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됨이 솔직하지 못하고 앞에서 하는 행동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며, 겉으로는 겸손하고 인내하며 사랑이 넘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이 음험하고 교활하며 하나님께 조금의 충성심도 없는 사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전형적인 예이자 독사의 부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자신을 위해 계책을 세우고, 독선적이고, 잘난 척하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자는 사탄을 사랑하고 진리에 반하는 사람이자, 하나님을 대적하고 완전히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며, 언제나 자신과 가정의 이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 헌신하지 못하며,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은 자는 하나님 말씀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풍부함을 누리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창조했다. 그래서 사람은 그의 빛 속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부담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빛 비춤이 없으며, 그로 인해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에서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사탄과 더러움에 물든 자이며 흑암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는 사람이다. 너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고 싶으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면 성령이 역사할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네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산다면 성령이 역사할 기회가 없다.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하고, 빛 비추며, 믿음을 더해 주는 것은 모두 순간적이다.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성령 역사는 바로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면 성령의 함께함과 성령의 역사를 얻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지 않으면 사탄에게 묶여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에 빠져 살면 성령의 함께함과 역사는 없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범주 안에서 살고, 하나님이 요구한 상태 가운데서 살고 있다면, 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범주 안에서 살지 않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면, 너는 분명 사탄의 패괴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살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이 네 삶의 토대와 삶 속의 실제가 되어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하나님의 축복과 얼굴빛 속에서 살게 되고, 성령의 역사를 찾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하는 기쁨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5)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영적 상태에 있게 된다. 올바른 영적 상태 가운데서 사는 것은 바로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전제 조건이다. 올바른 상태가 없으면,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론할 여지도 없다. 사람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말에 기반해야 한다. 내 말에 따라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흑암 권세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올바른 영적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진리를 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실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과 실제 속에서 사는 사람은 진리에 깊이 진입하고 사역에 더 깊이 진입하면서 조금씩 변화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은 점차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패역 행위도 없어질뿐더러 과거의 관념과 패역을 더욱 증오하게 되며,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우러날 것이다.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육적인 것과 패역한 것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의 관념과 처세 철학, 그리고 자신의 속셈과 타산뿐이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고, 사람의 내면이 그의 말씀과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점유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말씀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달려가며,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 응당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세워져야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람은 그저 사탄에게 점령당한 구더기에 불과하다! 너 스스로 가늠해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이 네 마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느냐? 너는 어떤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느냐? 어떤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느냐? 하나님 말씀에 완전히 점유되지 않았다면, 너의 마음은 무엇에 의해 점유되었느냐? 매일의 삶 속에서 너는 사탄에게 통제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점유되고 있느냐? 네 기도는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이뤄진 것이냐? 너는 하나님 말씀에서 깨우침을 받아 부정적인 상태에서 나올 수 있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토대로 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진입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네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너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순전히 방해만 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가 몇 번이나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는 또 몇 번이나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네게 요구한 것 중, 어떤 것들이 네게서 이뤄졌느냐? 어떤 것들이 네게서 허사로 돌아갔느냐? 너는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온 힘을 다해 협력해야 한다. 어째서 사람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말하겠느냐? 정상 궤도에 진입한 사람은 먼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데, 이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 진입해야 할 공과이다. 인류는 줄곧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수천 년이나 사탄에게 결박당해 왔기 때문에 이 진입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다. 오늘 이 일을 언급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무엇이 흑암 권세에 속하는 것인지, 또 무엇이 빛 속에서 사는 것인지에 대해 분별하면 진입하기가 쉽다.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전에 반드시 사탄의 권세가 무엇인지 알아야 조금씩 벗어날 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사람 자신의 몫이다. 모든 것을 소극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인 면에서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6)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급소를 찔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두렵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관념과 상상, 패괴 성품을 드러내셨다. 일언일행, 일거수일투족부터 모든 생각까지, 우리의 본성과 본질은 그의 말씀을 통해 드러났으며, 이에 우리는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속셈, 목적,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패괴 성품까지 하나하나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 들었고, 철저히 인정했다. 그는 그를 대적한 우리를 심판하고, 그를 모독하고 정죄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림으로써, 그의 눈에 우리는 옳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사탄임을 느끼게 해 주셨다. 우리의 희망은 깨졌고,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감히 그 어떤 지나친 요구나 꾀함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우리의 꿈은 하룻밤 사이에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우리 중 누구도 상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우리는 한 번도 예수와 ‘만나거나 알고 지내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미망에 빠지고 방황했다. 우리는 낙담하고 실망했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는 그것을 쏟아 내려고 시도했고, 또 다른 출구를 찾아보려 했으며, 더더욱 우리의 구주 예수를 계속 기다려 보고, 그에게 속마음을 하소연하고자 했다. 때로 우리의 겉모습은 자연스럽고 의연해 보였으나 마음은 전례 없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때로 우리의 겉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지만, 마음은 폭풍우가 치듯 몹시 괴로웠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의 모든 꿈과 희망을 앗아 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헛된 기대를 품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주라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그와 우리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으며, 심지어 그것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의 심판과 형벌로 우리는 난생처음 이렇게 심한 좌절과 굴욕을 맛보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진정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존귀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인해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교만함과 자만심을 깨닫게 되었으며,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동일 선상에 설 수도, 함께 논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이 패괴 성품으로 살지 않고, 한시바삐 이러한 본성과 본질에서 벗어나, 더는 그의 증오와 역겨움을 불러오지 않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인해 우리는 그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고 더 이상 그의 지배와 안배에 거역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삶의 희망을 주었고, 우리는 기꺼이 그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정복 사역에서 나오게 되었다. 지옥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오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셨다! 그는 사탄을 이기고 모든 원수를 물리치셨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7)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야말로 온전케 된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네가 예언이나 비밀을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드러내고 살아 내는 것에 사람의 면모가 보이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창조된 후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변화되면 죽은 사람과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을 되살려 사람을 소생시킨다. 영이 소생하면 사람은 살아난다. 죽은 사람이란 영이 없는 시체, 영이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이 살아나면 사람은 살아나게 된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거룩한 자란 바로 살아난 사람, 사탄의 권세 아래 있었음에도 사탄을 이긴 사람을 가리킨다. 중국의 선민들은 큰 붉은 용의 잔인무도한 박해와 기만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심각한 해를 입고, 살아갈 용기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을 깨우려면 사람의 본질적인 면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해 조금씩 사람의 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언젠가 사람이 살아나면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탄 대로처럼 순탄해질 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기에 살아 내는 것에 짙은 죽음의 기운이 묻어난다. 사람에게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고, 결핍된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들은 대화나 행동거지에서도 죽음이 묻어나며, 대부분 죽음을 살아 내고 있다. 지금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이 사역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살아나지 못했고, 너희 중에는 죽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이 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이방에 신속히 복음을 확장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으며, 산 사람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은 사람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음의 그늘과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복음을 확장하는 사역을 해낼 수 있겠느냐?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사탄에게 점령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형벌을 겪지 않고서는 그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산 사람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산 사람의 증거이지 죽은 사람의 증거가 아니다. 그는 산 사람이 그를 위해 사역하기를 원하지 죽은 사람이 사역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이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이며, 영 안이 무감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한, 진리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들은 진리와 대립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비천하고 비열하고 악독하고 야만적이고 교활하고 음험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도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낼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산송장으로, 숨만 쉬는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흡족하게 할 수 없고, 나아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도 없다. 그저 하나님을 속이고 모독하고 배반할 뿐이다. 죽은 사람은 언제나 사탄의 본성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산 사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기꺼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산 사람이 될 수 있다. 산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은 사람이다. 또한 자신을 바치며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평생 헌신하는 사람이다. 산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해야 사탄에게 수치를 줄 수 있고, 산 사람만이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할 수 있다. 또한 산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진정한 사람이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죽음과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으며, 사탄의 도구, 사탄의 포로로 전락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되면서 하나님은 증거를 잃게 되었고, 유일하게 그의 숨결을 불어넣어 준 인류를 잃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증거를 되찾고 직접 그의 손으로 만들었으나 사탄에게 끌려간 사람을 빼앗아 오려면, 사람을 부활시켜 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며, 모든 사람을 되찾아 그의 빛 속에서 살게 해야 한다. 죽은 사람은 영이 없는 사람이며, 극도로 무감각해진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대적과 패역만 존재할 뿐 충성심은 찾아볼 수도 없다. 반면 산 사람은 영이 소생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며, 진리와 간증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는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의 성육신, 즉 하나님의 현현을 믿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살아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 이는 그 사람의 본성이 구제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거나 실행하지 못한다. 진리를 전혀 살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교회의 돈을 훔쳐 쓰고, 하나님 집의 밥을 공짜로 축낸다. 이런 사람은 모두 구제 불능의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만, 일부는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께 구원받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깊이 패괴되어 죽은 사람, 구제 불능의 사람, 완전히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사람, 본성이 지나치게 악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수의 사람들 또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거나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복 사역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성품이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실제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사역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그러한 사역이 없었다면, 이들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었을지라도 사탄과 죽음에 속했을 것이고, 여전히 죽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늘 이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들이 기꺼이 하나님과 협력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덕에 하나님께 얻어져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 때문에 하나님께 혐오받고 버림받아 그의 징벌과 저주 속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사람은 스스로 구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아 빛 속에서 살게 되고, 또 자신의 간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받아 징벌 속에 떨어진다. 사람은 악행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갈망과 충성심 덕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공의롭기에 산 사람에게는 축복을 내리고, 죽은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려 영원히 죽음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빛 속에 남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산 사람을 그의 나라에 데리고 가 그의 축복 안에서 영원히 그와 함께하게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 속으로 내친다. 죽은 사람은 멸망의 대상이며, 영원히 사탄에게 귀속되는 대상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 누구도 억울하게 대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집에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너는 성육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육신이 직접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종착지를 안배하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의 육신과 영이 본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의 육신이 잘못된 일을 할 리 없고, 그의 영이 잘못된 일을 할 리는 더욱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한 명도 더하거나 빼는 일 없이 살아난 사람을 전부 그의 나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러나 살아나지 못한 죽은 사람들은 반드시 사탄의 동굴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살아난 사람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8)

성령이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가는 길은 사람의 마음을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틀림없고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것임을 믿게 된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성령이 어떤 길로 가는지를 모른다면, 이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정상인의 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있는 정상인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성령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는 일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너는 기초조차 다져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인데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섰다는 것은 성령의 현재 역사의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는 말, 즉 성령이 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지금 성령이 가는 길이 곧 하나님의 현재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가는 길에 들어서려면 성육신한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가 하는 것은 말씀 사역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의 말씀, 곧 그의 현재 말씀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성육신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든 알아 가는 것이든 모두 그의 말씀에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기초로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점차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협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백성으로 굳게 서서 증거하는 실행이다. 하나님의 현재 말씀의 본질을 깨닫고 거기에 순종할 때, 사람은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 예전에는 은혜와 평안, 기쁨을 구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얻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성육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갖추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도태될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실행해야 한다. 이것을 기초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협력할 것이냐? 어떻게 백성의 증거로 굳게 설 것이냐? 어떻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것이냐?

일상생활 속에서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알고 싶다면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라.

1. 너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믿느냐?

2. 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임을 믿느냐?

3.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냐?

4. 너는 하나님이 맡겨 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맡겨 준 일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냐?

5. 너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충성을 다하기 위한 것이냐?

이상의 문제를 통해 현 단계에서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성령이 가는 길을 따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성령이 가는 길에 대해 밝히 알고 있느냐? 지금 너는 성령이 가는 길을 따라 행하고 있느냐? 너의 마음은 하나님과 가까워졌느냐? 성령의 최신 빛을 따르기 원하느냐?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바라느냐?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하나님이 말씀을 꺼내자마자 네 내면에 하나님께 협력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겠다는 다짐이 선다면, 네 마음이 이렇게 움직인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다짐도 추구하는 목표도 없다면, 그것은 네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받지 못했음을 뜻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39)

생명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실행 길은 아주 간단하다. 네가 실제 체험 가운데서 성령의 현재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다면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네가 성령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고 추구한다면, 바로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네 성품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성령의 현재 말씀에 따라 변화된다. 네가 늘 과거의 낡은 체험과 규례를 고수한다면 네 성품은 변화되지 못한다. 성령이 오늘날 한 말씀이 모든 사람을 정상 인성의 삶으로 진입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여전히 외적인 것에만 치중할 뿐, 실제에 대해 어리벙벙하고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면, 너는 성령 역사를 따르지 못한 사람이자, 성령이 인도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네 성품에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 여부는 네가 성령의 현재 말씀을 따를 수 있는지, 네게 참된 인식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는 너희가 과거에 이해한 것과는 다르다. 과거에 이해했던 성품 변화는 남을 쉽게 판단하던 네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저 한 가지 측면의 변화일 뿐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품을 스스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고난과 연단, 또는 책망과 훈계, 징계를 겪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기만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연단을 받아야 성품에 다소 변화가 보인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심판, 징계와 책망을 겪은 사람만이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침착하며 진중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현재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지라도 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말한 성품 변화란 주로 자신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즉, 육신이 고난받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며 육적인 취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성품 변화의 일면이다. 지금은 모두 성품 변화의 실제적인 모습이 하나님의 현재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여태까지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관념적 인식을 벗어던져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참된 모습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0)

생명 진입을 추구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예전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고 했지만, 사람은 사실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네가 이 단계에 진입해 체험하면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시련을 위해 기초를 닦는 일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너는 그의 말씀에 진입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형벌하겠다고 말씀하면 형벌을 받으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면 시련을 받으면 된다. 늘 하나님의 최신 말씀 속에서 살아가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너는 온전케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진입할수록 더 빨리 온전케 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진입하라고 거듭 교제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추구하고 체험하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 속으로 진입해야만 성령이 너에게서 역사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역사 방식에서 너희는 모두 경기 참가자인 셈이다. 마지막이 되면 너희가 겪은 고난이 가볍든 무겁든 모두 ‘기념품’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온전케 되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진입해야 한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성령의 일방적인 사역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즉,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너는 오직 그의 말씀 속으로 진입하는 것에만 집중하여라. 그러면 생명에 더욱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은 너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면 너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화 감동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이 이 단계 역사에서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것이며,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다짐을 하게 될 것이다. 형벌 시대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말씀이 사역의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 결과 연단을 받지 못했으며, 형벌 시대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고 정말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없이 확실하니 사람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몸부림치면서 앞날과 운명에 대한 기대를 다 내려놓게 되었다. 그 결과 헤치고 나오니 성품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겼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형벌을 겪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벌 사역이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 임한 것이고, 하나님 사랑의 정복이자 구원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전부 증오가 아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형벌 시대에 연단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성령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아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형벌 시대에 진입한 사람들은 비록 연단을 받았지만, 성령이 그들 안에서 은밀히 역사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생명 성품이 변화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아주 적극적이고 종일 즐거워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의 연단을 받지 못해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성령이 네게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므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긴다. 이러한 길을 통해야만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이렇게 온전케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다. 새로운 빛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한 번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것으로는 절대 안 되므로 반드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한 번 감동받으면 마음의 의지가 불타오르며 추구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늘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야 한다. 예전에 내가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을 감동시켜 주기를 원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생명 성품이 변화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감동을 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결한 것들(독선, 오만, 관념 등)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저 적극적으로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반드시 부정적인 것에 관련된 것들도 벗어 버려야 한다. 즉,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한편, 부정적인 것과 관련된 불결한 것들을 전부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너에게 어떤 불결한 것들이 남아 있는지 시시각각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라. 사람의 종교 관념, 속셈, 기대, 독선, 교만 등은 모두 불결한 것에 속한다. 하나님이 폭로하는 모든 말씀에 대조하여 자신에게 어떤 종교 관념이 있는지 살펴보고 참으로 인식해야 그러한 것을 벗어 버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성령의 현재 역사의 빛을 따를 때이니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종교 관념이 튀어나올 때 그것을 어떻게 벗어 버리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현재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종교인이라면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인 관념이나 전통적인 신학 이론들이 나와 방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네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는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성령의 현재 말씀만 추구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다. 성령의 현재의 빛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에게 어떠한 관념과 속셈이 있는지, 무엇이 사람의 독선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인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은 네가 알아야만 벗어 버릴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행실을 저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성령의 오늘날 말씀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품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역은 물론 사람의 실행도 있어야 한다. 두 가지 중에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1)

앞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 진리에 깊이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길이다. 너희는 모두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사명은 어떤 것이겠느냐? 그것은 다음 단계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 다음 단계에는 전 우주에서 더 큰 사역을 전개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너희는 생명 성품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향후 하나님 역사의 영광스러운 증거가 될 것이며, 다음 사역의 표본이 될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추구하는 것은 모두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이것을 목표로 추구한다면 성령이 함께할 것이다. 추구하는 목표가 높을수록 더 온전케 될 것이며, 진리를 추구할수록 성령이 더욱 많이 역사할 것이고, 추구하는 힘이 클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성령은 사람 내면의 상태에 따라 온전케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거나 온전케 되기를 원치 않으며, 그저 육적으로 평안하고 재앙만 없으면 된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고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것도 이루어 준다. 하나님은 네가 추구하는 것에 맞춰 이뤄 줄 것이다. 지금 너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느냐? 지금 네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얻어지기 위함이냐? 일상생활 속에서 너는 늘 이렇게 스스로를 가늠해 봐야 한다. 네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온 마음으로 추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이는 성령이 가는 길이다. 성령이 인도하는 길은 추구해야 들어설 수 있다.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얻어지기를 갈망할수록 성령은 네 내면에서 더 많이 역사할 것이고, 네가 추구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물러날수록 성령은 역사할 기회가 없기에 차츰 네게서 떠나갈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원하느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느냐? 너희의 모든 행동은 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얻어지며 쓰임 받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주 만유에게 하나님의 행사가 너희에게 나타났다는 것과 만물 가운데서 너희가 만물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에서 너희로 인해 증거와 영광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가장 복받은 세대임이 증명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2)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수록 부담을 갖게 되고, 부담을 가질수록 체험은 더욱 풍성해진다.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 하나님은 이 부담을 너에게 더해 주며, 너에게 맡겨 준 일에서 너를 깨우쳐 줄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이 부담을 더해 줄 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면 이 방면의 진리를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형제자매들의 생명 상태에 부담을 갖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네게 준 부담이다. 그러면 네가 평소에 기도할 때 늘 이 부담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네게 더해지면, 하나님이 하려는 것이 바로 네가 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담을 너의 부담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말씀을 먹고 마셔도 이런 부분을 중심에 둘 것이다. 너는 속으로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형제자매들이 자유를 얻고 영 안에서 누리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너는 교제할 때도 이러한 문제 해결에 역점을 둘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주로 이 방면의 말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부담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된다. 그러면 실행의 길이 더 잘 보인다. 이는 너의 부담으로 생긴 성령의 깨우침이자 빛 비춤이며, 너를 위한 하나님의 인도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네게 부담이 없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반면, 부담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길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응당 하나님께 더 많은 부담을 달라고, 더 큰 사명을 맡겨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실행 길이 더 있게 되고,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찾아내고, 나아가 성령의 감동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기도하고 훈련하며, 하나님이 준 부담과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부담을 가질수록 하나님께 더 잘 온전케 될 수 있다. 혹자는 일어나서 협력하며 섬기라 해도 싫어하는데, 그런 자는 게으르고 안락을 탐하는 사람이다. 네가 일어나 협력하며 섬길수록 더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부담이 많아지면 체험도 많아지고, 온전케 될 기회 또한 많아진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도 많아진다. 지금 이런 사람들을 온전케 하고 있다. 성령이 너를 갑절로 감동시킬수록 너는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할 때가 많아지고, 하나님께 더 많이 온전케 되고 얻어져서 마침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못하고, 태만하게 굴며 자신의 육체만을 생각하는데, 그런 자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눈먼 사람이다. 네가 이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부담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헤아릴수록 하나님이 네게 더 많은 부담을 더해 줄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그러한 고난을 받는 것도, 대가를 치르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놓치게 되니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대한 참된 부담을 느낄 것이다. 사실, 교회에 대해 부담을 갖는다고 하기보다는 너 자신의 생명에 부담을 갖는다고 말하는 게 옳다. 교회에 대해 부담을 갖는 것은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 부담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생명 진입에 대해 부담을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이다. 분명히 이해했느냐? 네가 속한 교회가 엉망진창인데도 전혀 애타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정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하는데도 본체만체한다면 이는 부담이 없는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땅히 지금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해야지, 그의 공의로운 성품이 만인에게 드러난 후에 생각하려 해선 안 된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 지금은 하나님께 온전케 될 좋은 기회다. 만약 네가 이 기회를 놓친다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처럼 평생의 한으로 남아 후회하며 죽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만민에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형벌하지 않아도 후회로 인해 너 스스로 자신을 형벌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못 믿겠거든 기다려 보아라. 어떤 자들은 바로 이 말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너는 이 말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싶으냐?

만약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찾지 않고, 온전케 되기 위해 앞다투어 추구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온전케 될 가장 좋은 기회이자, 최적의 시기이다. 이때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역사가 끝남으로 기회를 놓치고 나면 늦고 만다. 네 의지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죽도록 애써도 온전케 될 수 없다.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협력해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다. 어떤 이는 입으로 “하나님, 저는 당신의 부담을 생각하고, 당신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외치지만 실행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부담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길이 있으면 단계별로 한 걸음씩 체험하게 된다. 그렇게 부담을 가진 부분이 온전케 되면 또 다른 부담이 더해지고, 생명 체험이 깊어짐에 따라 너의 부담 또한 더 커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이 있을 때만 부담을 지려고 하는데, 얼마간 지나서 실행할 길이 없으면 부담도 사라진다. 너의 부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만 해서 완전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많은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을 갖춰야 하며,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더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만 부담이 생겨난다. 그런 부담이 생겨야 제대로 사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담만 가지고 진리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해도 안 된다. 반드시 본인이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자기가 먼저 실제에 진입해야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 주고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온전케 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3)

현시점에서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든 사람을 정상 궤도로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정상적인 영 생활을 유지하고, 참된 체험을 하며,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인데, 이것을 기반으로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들어가는 목적은 너희의 모든 언행과 마음,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시켜 너희가 하나님의 감동을 더 많이 받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많은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섰다면,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너의 생각, 불순한 의도가 바로잡히면 육적인 것을 위하던 것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 바뀌고, 불순한 의도가 생겨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게 된다. 이 정도의 변화가 있으면 생명 체험의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네가 기도 훈련을 통해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면 기도했을 때 성령의 감화 감동이 따라 온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감동이 따르고, 매번 기도를 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평온히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먹고 마실 때 현재 하나님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협력하며 어떻게 진입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 것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입의 길을 찾을 수 있고 현재 하나님 역사의 동향과 성령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다면, 이는 곧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어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지 못했다면, 너는 아직 말씀을 먹고 마실 줄 모른다는 의미이며, 먹고 마시는 방법과 원칙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현시점에서 하는 사역을 파악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는 사명을 받을 수가 없다. 현재 하나님이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지금 진입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다. 너희는 이러한 것을 알아차렸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효과가 있다면 영 생활도 정상이 된다. 어려운 상황이나 육의 질병, 또는 형제자매들이 너를 멀리하거나 너의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는 등의 어떤 시련이 임해도 너는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정상적으로 기도하고,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 네가 이러한 정도에 이르렀다면 이는 정상 궤도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어떤 이는 너무 약하고 의지가 없어 작은 일만 생겨도 훌쩍거리며 소극적이 된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의지와 각오가 필요하다. 이번에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증오하며, 다음에는 꼭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이번에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다음에 같은 일이 오면 반드시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래야 옳은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모르는데, 그런 자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고 육을 버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네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의 마음을 극복할 수 있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도 모른다면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고 육을 버릴 수 있겠느냐? 설령 버린다 할지라도 무분별하게 할 것이다. 너는 자신의 바르지 못한 마음을 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육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각이 바르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얼른 뉘우치고 옳은 길로 가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 측면에서 돌파하고 훈련하여 진입해야 한다. 네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는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바르지 못한 마음을 바로잡고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쓸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 관건이며, 성령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핵심이므로 이것을 잡아야 제대로 진입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하나님을 알기까지 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말은 명실상부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분명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오늘날 성육신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정죄받을 것이다. 그들은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오늘날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이기에 아무리 예수를 잘 믿었을지라도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치를 들고 있지만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자들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온전케 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4)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깨달은 후에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온전케 되려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자질이 부족한데, 그렇다면 대가를 치르고 주관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이 실행할수록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더 빨리 들어설 수 있다. 너는 기도를 통해 기도로 온전케 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찾아내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내어 온전케 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아가 자신의 치명적인 단점과 약점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차츰 온전케 되어야 할 것이다. 온전케 되는 길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찾아내고, 하나님 말씀의 체험에 진입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을 기초로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고 육을 버리며, 형제자매들과의 빈번한 교제를 통해 너의 체험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단체 생활에서든 개인 생활에서든, 대예배에서든 소예배에서든, 모두 체험하고 훈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온전케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더 키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탄의 패괴 성품과 불순한 의도를 벗어 버리고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즉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사탄이 패괴시킨 부분은 점점 적어진다. 그러면 너는 실제 체험을 통해 차츰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케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온전케 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5)

지금 하나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고자 한다. 바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협력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확신을 갖는 사람,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음속에 참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이며, 온전케 될 대상이자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않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자들은 온전케 될 수 없다. 늘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을 품으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자 사탄에게 속한 사람으로,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온전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온 힘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네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은 것이냐? 네 마음가짐이 옳으냐? 네 마음가짐이 옳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가짐이 옳지 않다면 이는 네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을 사랑하고 사탄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야 한다. 기도할 때 나, 이 사람은 네 눈앞에 없지만 성령이 너와 함께한다. 네가 기도하는 대상은 나, 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네가 이 육신을 믿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네가 이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느냐? 네가 이 사람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다. 너에게 이 사람을 경외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경외하라는 것과 같으니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 곧 이 사람을 믿는 것이요, 이 사람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이 너와 함께하고 하나님이 바로 네 눈앞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을 향한 기도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한다. 네가 하나님의 육신을 속일 순 있어도 하나님의 영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감찰을 통과할 수 없는 일은 모두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마땅히 내던져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기도할 때든, 형제자매와 대화하고 교제할 때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일을 처리할 때든 마땅히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네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때 하나님은 너와 함께한다. 네가 마음가짐이 바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일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네가 한 일을 열납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진심을 다해 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구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구해라.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기도가 결실을 볼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에서 기도할 때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거짓을 고하지 않고 네 속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는다면 반드시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하나님께 맹세해라. “천지 만물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여! 당신께 맹세합니다. 당신의 영이 언제나 제 모든 행동을 감찰하고, 언제나 저를 돌보며 보호해 주십시오! 저의 모든 행동이 당신 앞에서 굳게 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배반한다면 제게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저주하사 금세에도 내세에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십시오!” 너에게는 이렇게 맹세할 용기가 있느냐? 이렇게 맹세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용기가 부족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너희에게는 이러한 의지가 있느냐? 진실로 이런 의지가 있다면 이렇게 맹세해야 한다. 이러한 의지를 갖추고 하나님께 맹세하면 하나님은 네가 품은 의지대로 이루어 줄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맹세하면 하나님은 귀를 기울일 것이며, 네가 기도하고 실행한 것에 따라 네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정할 것이다. 지금은 너희를 온전케 하는 과정에 있다. 네가 진정으로 온전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야 한다. 만약 네가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거나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맹세한 대로 ‘이루어 줄’ 것이다. 그때 네가 침륜되든 형벌을 받든 그것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맹세를 했다면 그 맹세대로 실천해야 한다. 맹세하고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너는 침륜의 대상이다. 네가 말했으니 하나님은 네 맹세대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어떤 이는 기도를 마친 뒤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한다. “큰일 났어! 이제는 방탕한 생활을 할 기회도, 나쁜 일을 할 기회도, 세상을 탐하고 연연해할 기회도 다 사라져 버렸다고!” 이런 사람은 아직도 세상과 죄를 사랑하고 있으니 앞으로 틀림없이 침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을 온전케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6)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행동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네가 한 일을 하나님의 영 앞에는 내놓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육신 앞에는 내놓을 수 없다면 이는 아직 하나님의 영의 감찰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이 누구더냐? 하나님이 증거한 사람은 또 누구더냐? 그들은 하나가 아니더냐?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이 증거한 사람은 사람이라며 둘을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 아니겠느냐?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누구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냐? 성육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하나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너를 잘 대해 주지 않는데 하나님의 영이 너를 잘 대해 주겠느냐? 네가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오늘날,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고, 성육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지 보아라. 네가 한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자가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너의 모든 행동, 일거수일투족, 모든 마음가짐과 반응 하나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형제자매들과 교제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등의 영 생활, 나아가 협력하며 섬기는 일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실행해야 너의 생명이 자라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과정은 사람이 정결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수록 너는 더 정결케 되고 하나님의 뜻에 더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방종함에 빠지지 않고 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두고 살 수 있다. 또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수록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고 육을 저버릴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것은 사람이 실행해야 할 길이라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나눌 때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으려고 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더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모든 행동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다면 너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을 온전케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7)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반역자다. 그는 내면에 너무 큰 야심을 품고 있고, 패역한 성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기 싫어한다. 이런 자들은 온전케 되기 어렵다. 하나님 말씀을 선택적으로 먹고 마시거나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자기의 관념에 부합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극명한 패역과 대적이 아니겠느냐?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신파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가장 복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사람을 저주하고 형벌을 내리며 버리고 떠난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떠날 것이다. 또한,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너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해 보아라! 오늘 내가 너에게 실행의 길을 알려 주었지만, 실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너에게 달렸다. 믿지 못하겠으면 실행하지 말고 성령이 역사하는지 지켜보아라!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성령은 너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대상은 하나님 말씀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영은 너에게 더 많이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된다. 하나님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는 사람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함께함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겨 너의 실제이자 생명 공급이 되게 한다면 이는 하나님 뜻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하는 모든 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하나님은 네게 축복을 내리고 네 소유를 더 풍성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역시 너에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며, 그저 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작은 은혜를 베풀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내리거나 너의 가정에 평안을 좀 베풀어 주는 데 그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만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너의 실제로 삼아 하나님을 흡족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얻어 온전케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추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은혜시대 사람이 추구하던 것들은 이제 시대에 맞지 않는다. 지금은 추구하는 기준이 더 높아져 더 실제적이고 높은 것, 사람의 내면이 필요로 하는 바를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역대에 사람들에게 지금과 같은 사역을 한 적이 없고,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도 없으며, 이렇게 높은 요구를 한 적도 없다. 오늘날 너희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이 사람들에게 있음을 뜻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길 원한다면 너는 이것을 중점 삼아 추구해라. 네가 열심히 뛰어다니든, 헌신하든, 역할을 수행하든, 하나님이 주는 사명을 받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또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은 육적인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추구할 뿐,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이나 생명 진입은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이는 가장 눈먼 자다. 생명의 실제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내세의 영생과 금세의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자도 가장 눈먼 자다. 그러므로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일은 사람의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공급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명이 자랄수록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된다. 네가 한동안 추구하는 것이 없었다면 그것은 성령이 너를 떠났다는 의미이다.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이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는 항상 추구하는 것이 있고 갈급한 마음이 있으며 결코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는다. 성령은 각 단계마다 역사할 때 너에게서 얻고자 하는 결실이 있다. 그러나 네가 현 상태에 안주하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성령의 역사를 거부한다면 성령은 바로 너를 떠날 것이다.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감찰과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람이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되겠느냐? 누군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늘 허기를 느껴 항상 찾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면 성령은 늘 그런 사람에게 역사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일수록 더 실제적인 것을 교제할 수 있고, 진리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생명이 더 빨리 자라며 더 풍부하게 체험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 집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을 온전케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8)

성령은 각 사람에게서 가야 할 길이 있고, 모두에게 온전케 될 기회를 준다. 부정적인 것을 통해 네가 자신의 패괴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실행의 길을 찾게 한다. 이러한 것 전부가 너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또한,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 네 안에서 계속 인도하고 빛을 비춰 줌으로써 네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게 하며, 식견을 넓히고 분별력을 키우게 한다. 상태가 좋을 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기도를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고, 설교를 들을 때도 자기 상태에 결부시킬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네 안에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고 네가 긍정적인 면에서 깨닫게 한다. 이는 긍정적인 부분에서 너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상태일 때 너는 연약하고 소극적으로 변하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시 네게 빛을 비춰 주어 실행의 길을 찾게 한다. 네가 거기에서 벗어나면 부정적인 부분에서 온전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사람을 온전케 한다. 그 결과는 네가 체험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자 하는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네가 정말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자 한다면 부정적인 부분에서 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 더욱 실질적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고, 자신의 실제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련을 겪지 않으면 이런 것을 알 수 없다. 시련을 겪지 않으면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너는 예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사였고 보호였음을 깨닫게 된다. 시련에 직면하는 순간 사랑과 믿음이 사라지고, 기도가 부족해지며, 찬양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시련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하나님은 다양한 환경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다루며, 또 다양한 일을 통해 사람을 드러낸다. 사람을 책망하는 한편 사람을 드러내고 폭로하며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의 ‘비밀’을 모조리 파헤치고 밝힌다. 수많은 내적 상태를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보게 한다. 하나님은 폭로를 통해, 또한 책망, 연단, 형벌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하며, 하나님이 매우 실제적임을 알게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49)

너희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 하나님을 얻는 것일 수도 있고, 90년대의 베드로 품격, 욥보다 큰 믿음일 수도 있다. 또는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 받아 보좌 앞에 서거나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를 위해 굳건하고 힘 있게 증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든 결국 다 하나님께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네가 의인이 되고자 하든, 베드로의 품격과 욥의 믿음을 추구하든,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자 하든, 다 사람에게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즉, 네가 어떻게 추구하든 모두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며 실제 체험을 통해 실행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패역한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상적인 내적 상태에 이르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고 옳은 사람이 되어 올바른 동기로 매사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생명이 자라나기 위함이다. 네가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실질적인 일, 즉 주위에 임하는 사람, 일, 사물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의인의 길을 가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것은 트랙을 달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 네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이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든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요, 네게 행한 하나님의 사역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제와 위대함을 깨닫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이 네게 행한 수많은 사역을 깨닫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더럽고 패괴된 사람들에게 사역하며 이들을 온전케 한다. 또한 성육신하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목양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극도로 패괴된 사람들에게 크나큰 구원 사역과 정복 사역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큰 붉은 용의 심장부에 와서 가장 패괴된 사람들을 구원하고 새롭게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극심한 고통은 성육신하여 받는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크나큰 수모를 받은 것, 바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감추어 평범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는 육신을 입고 육신의 형상을 취함으로써 사람에게 그가 정상 인성의 생활을 하고, 정상 인성에 필요한 것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하나님의 영은 육신에 실체화되었다. 그의 영은 더없이 높고 위대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여 그의 영이 하는 사역을 한다. 너희 각자의 자질, 식견, 이성, 인간성, 삶을 놓고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이런 사역을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희를 위해 이토록 큰 고통을 받게 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크다. 하나님은 더할 수 없이 높고, 사람은 비천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역한다. 성육신하여 사람에게 공급하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함께 생활하기까지 한다. 자신을 한없이 낮춘 하나님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크게 찬미할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0)

오늘날의 사람은 한쪽으로 치우쳐 추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려고만 할 뿐 그를 조금도 알지 못한다. 성령의 내적 깨우침과 빛 비춤을 간과하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밑거름으로 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체험하다 보면 열의는 곧 사그라진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예전에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소극적이고, 연약하고, 눈물을 흘리고, 낙심하고, 실망하는 일이 다반사였을지라도 지금은 체험하면 할수록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책망과 깨뜨림, 시련과 연단을 겪고 나면 크게 성장하게 되고, 그런 소극적인 상태가 적어지며, 생명 성품에도 변화가 조금 생긴다. 또 연단을 많이 겪게 되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에는 법칙이 있다. 즉, 취할 만한 부분을 통해 깨우침을 줌으로써 실행의 길을 열어 주고, 모든 부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영이 해방되게 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데, 이로써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게 한다. 네가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을 알려고 하며, 진리를 실행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너를 축복해 줄 것이다. 또한, 네가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될 때 너를 더 깊이 깨우쳐 스스로를 더 잘 알게끔 하고, 자신을 더욱 뼈저리게 뉘우치며, 자신이 실행해야 할 것을 더 잘 실행하게끔 할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된다. 평소에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실행을 중시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설령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양심이나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으로 바로 돌려세울 수 있다. 사람의 성품은 모두 자신의 실제 상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깨달을 때 변화한다. 자신을 알고자 하는 사람, 자기 속내를 다 털어놓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깊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이자 사람이 얻은 것으로, 사람 자신이 거둔 성과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기틀이 잡히고, 이상(異象)을 갖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육신, 말씀, 사역에 대해 확신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고 말씀하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방해하든, 자신의 주관을 세우고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또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더욱 잘 실행한다.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기다 보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히 증거하겠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1)

분별과 순종을 중시하고, 통찰력을 중시해 영적으로 예민해지면 일이 닥칠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내면에 빛을 비추어 주고 깨우침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예민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의 영을 소생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왜 항상 사람이 무감각하고 어리석다고 말씀하겠느냐? 이는 사람의 영이 죽어서 영적인 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성장시키기 위함이며, 또한 사람의 영을 되살리기 위함이다. 영적인 일을 꿰뚫어 보고,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면, 이는 사람의 영이 소생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또다시 어떤 일에 직면할 때 즉시 반응할 수 있고, 설교를 듣거나 일이 일어났을 때도 반응이 빠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 예민해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외적인 일에는 생각이 잘 돌아가지만,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나 영적인 세부 내용을 언급하면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며, 콕 집어서 이야기해야 이해한다. 이는 모두 영이 무감각하고 어리석으며, 영적인 일에 대한 체험이 부족한 모습이다. 영적으로 예민하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짚은 말씀을 들으면 재빨리 적어 두고, 실행 원칙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체험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빨리 반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일상생활에서 그런 것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볼 때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조하면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고, 설교 교제 내용을 듣거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바로 받아들인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덥석 받아먹는 것처럼 말이다.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음식을 주어도 반응이 그렇게 빠르지 않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일이 닥쳐도 곧바로 하나님의 요구를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지난번에 하나님이 이 일에서 인도해 주었는데 오늘 또 유사한 일이 일어나면 너는 당연히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다 보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고 영 안의 어떤 상태에 대해 말씀하는 것인지를 알고, 핵심을 파악해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체험할 줄 아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이런 면에서 부족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실행 측면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실행할 마음이 있더라도 섬김이나 삶에 관련된 구체적인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해 일이 닥칠 때마다 멍하니 있는다면,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늘 교제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분별력도 생긴다. 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분별력도 없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어떻게 행했는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을 접하고 어떤 사람을 내쳐야 하는지 등의 일들은 늘 교제해야 한다.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다 보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많은 일을 꿰뚫어 보게 되며,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성령의 징계가 무엇인지,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책망이 무엇인지, 성령의 인도가 무엇인지, 환경의 마련이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의 내적 깨우침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이 패역한 성품인지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고 자신의 패역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등의 일들을 다 체험하고 이해하게 되면 기반이 다져진다. 그러면 일이 닥쳤을 때 합당한 진리로 대조하고, 합당한 이상을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으며, 매사에 원칙을 지키고, 진리에 따라 행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네 삶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축복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를 추구하는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며, 그를 살아 내고, 그를 증거하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또 그는 진심으로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 자신의 실제 상태를 아는 것과 자신의 실행, 인식을 중시하면 일이 닥쳤을 때 깨우침과 실제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범사에 실행할 길이 생기고, 분별력을 갖추게 된다. 진리를 갖춘 사람은 미혹되지 않으며, 방해되는 일이나 무리한 일을 하지도 않는다. 진리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고, 진리로 말미암아 더 많은 깨달음과 실행의 길을 얻으며, 성령 역사를 얻을 기회, 온전케 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2)

온전케 되는 것에는 조건이 있다. 너의 의지, 끈기, 양심 또 너의 추구를 통해 생명 체험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네가 진입해야 하는 것이고, 온전케 되는 길에 필요한 요건이다. 누구나 온전케 하는 사역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는 누구나 온전케 될 수 있다. 모두에게 온전케 될 기회와 조건이 주어지며, 여기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온전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주로 사람의 추구에 달려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 진리를 살아 낼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온전케 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하나님이 칭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이 없다. 다시 말해, 온전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온전케 하는 사역은 사람을 얻기 위한 것일 뿐, 사탄과 싸우는 사역이 아니다. 반면 정복 사역은 단지 사탄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즉, 사람을 정복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것이 주요한 사역이며, 전례 없는 가장 새로운 사역이다. 이번 사역의 주된 목적은 모든 사람을 정복하고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은 새로운 사역이 아니다. 육신의 사역 기간 동안 모든 사역의 목적은 주로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혜시대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전 인류를 구속하는 것이 주된 사역이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육신으로 거할 때 추가적으로 했던 사역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했던 사역이다. 예수가 사역하러 온 주요 목적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죽음의 속박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 즉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야 점차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예수가 사역하는 시기에 그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중 하나였으나 그때는 온전케 되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사역을 끝낸 후에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온전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온 것은 단기간 내에 핵심적인 사역을 완성하는 것일 뿐,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살면서 의도적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완전히 온전케 된 뒤에 사역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성육신한 목적도 의의도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람을 구원하는 단기적인 사역을 할 뿐이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나긴 사역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은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고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지만,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을 그만한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사역은 하나님의 영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육신으로 사역하는 기간에 말씀한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또한 따로 사도를 일으켜 오랜 시간 목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온전케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성육신 하나님은 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의 도를 말씀하여 사람이 깨닫게 하고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할 뿐이지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동안 계속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진리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를 완전히 얻는 날까지 사람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을 때, 온전케 되는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는 육신으로 하는 그의 사역이 끝나는 때이다. 물론 이때는 그가 사탄을 완전히 물리치고 세상을 이긴 때이다. 이때에 그는 사람이 진리에 진입했는지, 사람의 생명이 어느 정도 자랐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의 육신이 관여할 일도 아니고, 성육신한 하나님이 해야 하는 사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완수하고 육신의 사역을 끝낸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 직접 할 수 없는 사역을 할 뿐이며, 장기적인 사역이 아니라 단기간의 구원 사역을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된 사람만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3)

너희에게 하는 이런 사역은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정복한 후에는 한 무리를 온전케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많은 사역도 너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예비하는 것이다.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온전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에게 정복의 사역만 하고 끝이 난다면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지금의 사역은 앞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나는 정복하는 사역만 하지만 내가 말하는 생명의 도는 앞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예비하는 것이다. 정복 이후 사역의 중심은 바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정복 역시 온전케 하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이다. 사람은 정복된 후에야 온전케 될 수 있다. 지금은 정복에 초점을 맞추고, 이후에는 진리를 구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을 온전케 할 것이다. 온전케 되는 것은 사람의 적극적인 진입, 즉 너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이 길을 가면서 어느 정도로 체험했는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순결한지, 진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실천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사람으로서의 상식이 갖춰져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조건이다. 정복된 후 온전케 될 수 없는 사람은 봉사만 하는 존재이며, 결국에는 유황불 못에 떨어지고 무저갱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성품의 변화가 없고 여전히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온전케 될 조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사용 가치가 없는 폐기물이자 도구에 불과하며 불의 시련을 통과할 수 없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느냐? 사탄을 도대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느냐? 너희의 의지는 굳건해졌느냐? 사람으로서의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 삶이 변화되었느냐? 새로운 삶이 생겼느냐? 인생관에 변화가 있느냐? 만약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설령 네가 물러가지 않는다 해도 정복만 되었을 뿐 온전케 될 수는 없다. 이후에 너를 검증할 때, 네가 진리를 갖추지 못했고, 인간성도 비정상적인 데다가 짐승처럼 미천하다면 너는 정복만 되었을 뿐이고 정복 대상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해 주인을 보면 두려워 감히 성질을 부리지 못하는 나귀와 같은 것이다. 네가 바로 그 정복된 나귀이다. 만약 사람이 적극적인 면이 없이 소극적으로 두려움만 갖거나, 모든 일에서 우유부단하고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거나, 또는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언제나 실행 길이 없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거나,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이는 네가 아무 가치 없이 사는, 그저 정복된 나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복되었다는 것은 그저 네가 큰 붉은 용을 저버릴 수 있고, 그것의 권세에 굴복하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아무런 원망도 없이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한다는 뜻일 뿐이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어떠하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느냐?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느냐?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없다면 네가 하나님께 얻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너는 그저 정복된 나귀에 불과하다. 너에게 취할 수 있는 부분이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으며, 인간성도 결핍하다면 너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이방의 짐승이나 산송장보다 백배는 우월해야 한다. 그 정도가 된 사람이어야 온전케 될 자격이 있다. 인간성과 양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에 합당하다. 너희가 온전케 되면 그때야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온전케 된 사람이야말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만이 더 힘 있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된 사람만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4)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느냐? 어떤 부분이 포함되어 있느냐?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께 심판과 형벌을 받기를 원하느냐? 너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네가 이해한 것을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고 너에게 성령의 깨우침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온전케 될 수 없다. 다만 작은 은혜를 받아 잠시 누릴 수 있을 뿐 장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누려서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육적인 평안과 즐거움에 만족하고, 재앙도 화도 없는 안락한 생활에 만족하며, 온 가족이 화목하게 같이 살며 싸우거나 다투지 않는 것에 만족한다. 또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긴다. 사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무 속된 생각이다. 설령 네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날마다 기도하여 영적으로 큰 누림이 있고 아주 평안할지라도 네가 결국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전혀 말하지 못하고 전혀 체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시든 영적인 평안과 즐거움만 느낄 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없이 달콤하여 아무리 누려도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가 전혀 없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살아 낼 수 없다면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기도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얻어질 수도 없다.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얻는 것은 사람의 육체나 사람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온전케 하여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얻어지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말의 본질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온전케 하여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육체는 모두 육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를 얻어 봤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람의 육체는 언젠가는 반드시 썩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다. 만일 사람의 육체를 얻어 사람의 육체만 이 흐름 속에 있게 한다면, 명목상으로는 사람이 이 흐름 속에 있는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사탄에게 속해 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짐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받아들여 사람의 것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람 내면에 만들어지게 하고,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어떠함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여 진리를 살아 내게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자,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이 베푸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1.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받는다.

2.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빛 비춤 아래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는다.

4. 땅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베드로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며,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자격이 있고, 베드로와 같은 영광이 있다.

5. 세상 모든 사람이 사모하고 탄복하며 부러워한다.

6. 죽음의 모든 제약을 이겨 냄으로써 사탄에게 역사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하나님께 점유되어 새롭고 활기찬 영 안에서 살면서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7. 하나님 영광의 날의 도래를 본 것처럼 일생 동안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과 감격을 품고 산다.

8.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받고, 얼굴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거룩한 자와 같다.

9. 땅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즉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된다.

10. 모습을 바꾸어 하나님과 함께 셋째 하늘로 올라가며 육체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고,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다. 너는 지금 무언가를 얻었느냐? 하나님은 너를 얼마만큼 온전케 하였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할 때 아무렇게나 온전케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고 또한 사람이 볼 수 있는 뚜렷한 효과도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모습을 바꾸는 일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너희가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임하는 모든 사람, 일과 사물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하나님의 어떠함을 너희들 안에 더 많이 만들어지게 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땅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아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더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너희가 추구해야 하고, 너희가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할수록,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일에서 하나님 말씀의 어떠함에 진입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저 죄를 짓지 않고 관념과 처세 철학, 사람의 뜻이 없는 그런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모든 일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도 온전케 하여 더 풍성히 얻게 할 수 있다. 날마다 온전케 될 기회가 있고, 하나님께 얻어질 때가 있다. 이렇게 얼마 동안 체험하면 너는 크게 변화할 것인데, 과거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지금은 자연히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또 사람이 가르쳐 줄 필요 없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너에게 깨우침을 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모든 일에서 깨우침을 얻게 되고, 모든 체험에서 세부적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너를 인도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된 사람에 대한 약속>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555)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온전케 되는 것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체험은 너무 단편적이고 적은 부분만 포함하기 때문에 사람을 매우 좁은 범위 안에 가둘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영적으로 필요한 영양이 많이 부족해진다. 너희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일에서 체험할 줄 알아야 하고, 너희에게 임하는 모든 일에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너에게 어떤 일이 임할 때마다 너는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이로움을 얻어야 하고,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찌 되었든 너는 하나님 편에 서서 문제를 보아야 하며, 사람의 관점에서 분석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이것은 체험상의 편차다). 이 방법에 따라 체험한다면 너의 마음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가득 차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살면서, 실행할 때 쉽게 편차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앞날이 매우 밝다.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는 매우 많다. 다만 너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너희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얻어지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의지를 갖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는 의지만 있어서는 안 되며 많은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실행할 때마다 편차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은 너희 모두를 온전케 하기를 원한다. 지금 보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지 이렇게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데만 국한되어 있다.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육적인 평안을 얻기만 바랄 뿐 더 많고 더 높은 깨우침은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늘 겉으로 돌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사람의 사역, 사람의 섬김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불순물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으나, 사람 내면의 본질과 사람의 뒤떨어진 사상을 볼 때 여전히 육적인 평안과 즐거움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조건과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아직도 속되고 부패하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것을 전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고,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 믿는 것처럼 대충대충, 건성으로 대하며 그날그날 되는대로 살아갈 뿐이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고자 노력하여 더 많고 더 풍성한 것을 얻음으로써 오늘날 하나님 집에서 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더 많은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만일 네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자 하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깨우침 받기를 추구하고 허송세월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온전케 될 자격과 조건을 가질 수 있다. 너는 정말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너는 정말 모든 일을 참답게 대하는 사람이냐? 너는 베드로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너는 예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지가 있느냐? 너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보았느냐? 네가 믿는 이는 진정 예수 맞느냐? 너는 지금의 실제 하나님을 믿으면서 육신에 거하는 지금의 실제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보았느냐? 네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그가 행한 이적과 기사들이 공인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믿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진정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너는 예수의 이름만 믿을 뿐 예수의 영은 결코 믿지 않는다. 너는 예수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했는지에 대해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너무 유치하다. 너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 왔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는 네가 여러 해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밥’을 헛되이 먹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네가 숭배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찌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낯 뜨겁지 않으냐? 부끄럽지 않으냐? 너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면목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한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온전케 된 사람에 대한 약속>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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