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3]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4)

영 안의 세세한 것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성령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느냐? 사탄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느냐? 악령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느냐? 그것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느냐? 어떤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 일이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순종해야 할지 아니면 저버려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은 실제 실천 과정에서 늘 사람의 뜻에서 나온 많은 것들을 성령에게서 나왔다고 여기고, 악령에게서 온 것들을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긴다. 가끔은 성령이 안에서 인도하는 것임에도 그것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두려워 순종하지 못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성령의 깨우침이다. 그러므로 분별에 신경 쓰지 않으면 실제 체험 과정에서 체험을 할 수 없고, 체험 중에 분별에 신경 쓰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다.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느냐? 악령은 또 어떻게 역사하느냐? 무엇이 사람의 뜻에서 온 것이냐? 무엇이 성령의 인도와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이냐? 성령이 사람에게 행하는 역사의 법칙을 찾아내면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실제 체험 속에서 식견을 키우고 분별력을 갖출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탄을 파악하고 분별할 수 있다. 또한, 순종하고 추구함에 있어 흐리멍덩하지 않으며,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 성령 역사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고 올바르게 깨우쳐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게 하고 마음에 위안을 얻게 해 준다. 또한, 사람에게 믿음과 의지를 심어 주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기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성령이 역사할 때 사람은 적극적인 면에서 진입할 수 있으며, 수동적인 것도, 강제적인 것도 아닌 자발적인 태도로 진입할 수 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사람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요, 기꺼이 순종하며 자신을 낮춘다. 내적으로 고통스럽고 연약할지라도 협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하며 순종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람의 뜻도, 사람의 생각도, 나아가 사람의 기대나 속셈도 섞여 있지 않다. 성령 역사를 체험할 때 사람의 내면은 매우 성결해진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삶을 산다. 성령이 역사하고 감동시키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성을 갖춘 데다 평소에 진리를 추구하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하면 사람의 상태는 갈수록 좋아지고, 인간성은 갈수록 정상이 된다. 미련한 협력도 있겠지만 그것은 방해를 위한 것도, 나쁜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적극적인 면에서 진입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래서 정상인의 생활 법칙에 따라 사람에게 역사하고, 정상인이 실제로 추구하는 것에 맞춰 사람의 내면을 깨우치고 인도한다.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는 정상인의 필요에 맞춰 인도하고 깨우치며, 사람의 필요에 맞춰 공급하고, 사람의 결핍함과 부족함에 맞춰 적극적인 면에서 인도하고 깨우친다. 성령이 역사할 때는 실생활에서 사람을 깨우치고 인도하기에 사람은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해야만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적극적인 상태에 있고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하면 성령이 역사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격려를 받는다. 또한, 어떤 일을 마주하든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 일에서 너는 하나님이 배우라는 공과를 볼 수 있게 된다. 또 소극적이거나 연약해지지 않고,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하길 바라게 된다.

성령 역사는 어떤 효과를 내느냐? 네가 우매하든, 분별력이 없든, 성령이 역사하면 내면에는 믿음이 생긴다. 또한,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해도 자신의 사랑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협력하기를 원한다. 눈앞에 얼마나 큰 어려움이 놓여 있든 협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몰라도 소극적이거나 태만해지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는 성령의 정상적인 역사에 속한다. 성령이 역사한다 해도 사람은 실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눈물을 흘릴 때도 있고, 어떤 일을 이겨 내지 못할 때도 있다. 이것은 모두 성령의 일상적인 역사 단계에 속한다. 당시에는 이겨 내지 못해 연약해지고 불평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너의 소극적인 면이 너의 정상적인 체험을 막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너를 어떻게 공격하든, 너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기도할 때면 예전에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것 같아서 앞으로 그런 일을 맞닥뜨리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육을 저버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런 힘은 그 사람에게 성령 역사가 있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성령 역사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사탄에게서 온 역사는 어떠하냐? 사탄이 역사하면 사람은 이상(異象)에 대해 모호해지고, 정상적인 인간성을 잃고, 일할 때 불순한 의도를 품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내면에 늘 참소가 있고, 그러한 참소와 생각이 늘 내면을 교란하여 생명 성장에 제동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정상 상태로 살지 못하게 막는다. 다시 말해, 사탄이 역사하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른다. 또한, 사람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도망치고 싶고, 다른 사람이 기도할 때는 눈을 감지 못한다. 악령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망가뜨리고, 사람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상이나 생명 진입의 길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로 인해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언제나 무언가에 방해받고 통제받아 마음을 평온히 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의가 사라지고, 영적으로 가라앉는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탄 역사에서 비롯된 모습이다. 사탄의 역사로 인해 드러나는 모습은 입장을 확실히 하지 못하고, 굳게 증거하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릇된 사람,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방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무너지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향상하고자 하지도 않게 된다. 뒷걸음치고, 소극적이 되고, 자신에게 관대해지며, 죄가 커져 가는 것을 방치하고, 죄를 증오하지도 않게 된다. 또한 제멋대로 굴고 하나님이 준 감동이 사라지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여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떠날 위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5)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일인지 아니면 사탄의 역사에서 비롯된 일인지를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상태가 정상이면 영 생활과 육적 생활이 정상이며, 이성도 정상적이고 질서 있게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체험한 일이나 얻게 된 인식은 성령의 감동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과정에서 깨달음이나 얕은 인식을 얻는 것, 또는 어떤 일에서 충성하거나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있는 것은 모두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임).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는 매우 정상적이라 사람은 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이 역사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이해가 빠르기 때문에 성령이 특별히 깨우쳐 주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경우는 이해가 느리지만 성령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면 그 역시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역사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지도 거역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경영을 방해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정도로 역사한다. 감동을 주거나 깨우침을 주며, 믿음과 힘을 준다. 또한 사람이 나태해지지 않고, 육적인 쾌락을 탐하지 않으며, 진리를 실천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해하는 이런 적극적인 면에서 진입하도록 감동을 준다. 이러한 것은 전부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의 상태가 비정상일 때 성령은 버리고 떠난다. 사람 안에 있는 원망의 마음, 삐뚤어진 마음가짐, 나태하고 육체를 방종하며 진리를 배반하는 마음과 같은 이런 것은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상태가 비정상일 때, 내면이 어둠에 빠져 정상적인 이성을 잃어버리고, 성령께 버림받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끼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어 사탄이 사람에게 역사한다. 사람이 내적으로 계속 힘이 넘치고,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으면 보통 어떤 일이 임하든 그것은 다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사람을 마주치든 다 하나님의 안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너의 상태가 정상일 때, 그리고 성령이 크게 역사할 때, 사탄은 너를 흔들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기본으로 뒷받침되면 일체 모든 것이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옳지 못한 생각이 들더라도 충분히 그 생각을 따르지 않고 저버릴 수 있다. 이는 전부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어떤 상황에서 개입하느냐? 너의 상태가 비정상이고, 너에게 하나님의 감동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도 없을 때, 내면이 메마르고, 기도해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말씀을 먹고 마셔도 별다른 깨우침이나 빛 비춤을 얻지 못할 때 사탄이 쉽게 내면에서 역사한다. 다시 말해, 성령이 떠나고 네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면 많은 일이 사탄의 시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할 때 동시에 사탄도 역사한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면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교란한다. 하지만 이때 성령 역사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므로 정상적인 상태의 사람은 모두 이를 이겨 낼 수 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사탄의 역사를 이긴 것이다. 성령이 역사할 때 사람 내면에는 여전히 패괴 성품이 존재한다. 하지만 성령이 역사할 때면 사람은 자신의 패역과 속셈, 불순물을 쉽게 발견하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후회하고 회개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패역과 패괴 성품은 하나님 역사 가운데서 점차 벗어 버릴 수 있다. 성령은 매우 정상적으로 역사하므로, 역사하는 동안에도 사람은 내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연약해지기도 하며, 알 수 없는 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뒷걸음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괴롭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매우 정상적이며,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이 성령이 역사하기만 하면 사람의 상태가 바뀌고 본질적인 것들도 벗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도 사람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분량 또한 전과 같다. 다만 성령의 빛 비춤과 깨우침이 있어서 적극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으로 바뀌며, 변화가 빨라질 뿐이다. 사람이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주로 성령의 역사나 사탄의 역사다. 사람이 이런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실제적인 체험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성품의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함에 있어 관건은 이러한 일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 잘 체험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6)

성령의 역사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나 사탄의 역사는 퇴보적이고 소극적이다. 또한, 사탄의 역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며, 노래하고 싶지도 않고, 본분을 이행하는 적극성도 없어지게 한다. 성령의 깨우침에서 온 것은 강요가 없이 매우 자연스럽다. 네가 따르면 편안하고,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가책이 든다. 성령의 깨우침은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방해나 통제를 받지 않게 하며, 네게 자유를 주고, 일할 때 실행의 길을 열어 준다. 또한, 아무 제약 없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도록 한다. 반대로 사탄의 역사는 네가 하는 수많은 일을 방해한다. 기도하고 싶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 태만하게 하며, 교회 생활을 원치 않게 하고, 영 생활에서 멀어지게 한다. 성령의 역사는 너의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너의 정상적인 영 생활을 교란하지도 않는다. 많은 일이 당시에는 분별이 안 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마음이 어느 정도 밝아지고, 생각도 어느 정도 맑고 깨끗해지며, 영적인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느낌이 생기고, 내면의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점차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일부 분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부 불분명한 것들은 당시에는 분별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 드러난 모습을 보고 다시 분별하면 된다. 어떤 일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어떤 일이 성령의 지배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확실히 분별한 후에 체험에 들어가면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지 않을 것이다. 간혹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내면의 어떤 생각으로 소극적인 상태에서 나오게 될 때가 있다. 이는 네 상태가 나쁠 때도 어떤 생각은 성령에게서 비롯될 때가 있으며, 네가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있을 때라고 해서 모든 생각이 다 사탄에게서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네가 언제 적극적인 상태로 바뀔 수 있겠느냐? 한동안 소극적인 상태로 있을 때 성령은 네게 온전케 될 기회와 감동을 주어 그 소극적인 상태에서 나오게 한다.

성령 역사란 무엇이고 사탄 역사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체험 과정에서 자신의 상태나 체험에 비춰 보아라. 그렇게 하면 너의 체험에 원칙과 관련된 진리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알면 자신의 실제 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파악하면 사람과 일을 분별할 수 있으며, 힘들지 않게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전제 조건은 바른 마음가짐과 기꺼이 구하고 실천하는 모습이다. 원칙과 관련된 이런 말씀은 네가 체험할 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갖추지 못했다면, 너의 체험은 사탄의 방해로 가득할 것이며, 어리석은 깨달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사탄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발걸음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고, 사탄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는 사람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이며, 사람의 체험 과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7)

정상 인성에는 몇 가지 측면이 포함되느냐? 식견, 이성, 양심, 인격, 이 몇 가지 측면에서 정상 수준에 도달한다면, 네 인성은 합격이다. 정상인의 모습,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모습이면 된다. 그리 높은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외교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정상인이 갖춰야 할 이성, 사물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갖추고, 최소한 정상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건목수생(乾木水生)과 같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쓸모없는 말, 쓸모없는 사역은 결코 너에게 하지 않는다. 네 생활에서 드러나고 나타나는 추태들을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한다. 너희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사탄의 독소가 너무나 많다. 나는 네게 그러한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라고 하는 것이지, 고위급 인사나 유명인,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의미 없는 요구이다. 나는 너희에게 원래 있는 것들에 맞춰 사역한다. 사람에 대한 요구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지식인들이 말하는 방식과 어투를 따라 훈련한다면, 이는 옳은 방법도 아니고, 너희가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너희의 자질에 따라 최소한 지혜롭고 격식 있게 말하고, 의사 전달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다면, 요구에 부합한 것이다. 최소한 식견과 이성을 갖추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성품과 네가 드러내는 추태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들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 무슨 최고의 이성과 식견을 논하겠느냐! 많은 이가 시대가 변했다며, 겸손과 인내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전혀 없고, 성도의 품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릇되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어디 정상 인성이 있으며, 그들이 어디에 가서 증거하겠느냐? 식견이고 이성이고 전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일부 실행은 잘못된 부분이 있어 고쳐야 하고, 과거의 틀에 박힌 영 생활과 사람의 무감각하고 우둔한 모습들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바뀌어야 한다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육체를 방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고 아무렇게나 떠들어선 안 된다. 정상인의 언행이란 말에 조리가 있고, 맞으면 맞았다고 틀리면 틀렸다고 하며, 사실에 부합하고 적절하고,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품 변화에 관해서는, 정상인이라면 어느 수준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자질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함이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8)

사람이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원래 있는 것, 즉 사람이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 된다. 섬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폐단은 단계적으로 체험하고 심판받는 과정에서 점점 줄어들므로 본분을 가로막거나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섬기는 과정에서 폐단이 생길까 봐 섬김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가장 나약한 자다. 사람이 섬기는 과정에서 표현해야 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며, 속이고 대충 하기까지 한다면,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기능을 잃은 것이다. 그런 자는 이른바 ‘둔재’이자 쓸모없는 폐물이다. 그런 자를 어찌 당당한 피조물이라 칭하겠느냐? 겉보기는 화려하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자가 아니겠느냐? 만일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하면서도 신성의 어떠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대표하지도 못하는 자가 있다면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약 자신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피조물의 자리에 설 자격도 없다. 또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섬길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 보호를 받거나 온전케 될 자격은 더더욱 없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임을 잃은 후 하나님의 은혜를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증오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도가 옳지 않다고 제멋대로 떠들어 댔으며, 더 패역한 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패역한 자에게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크게 거역한 것이고 하나님께 매우 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이 행한 것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대며 욕한다. 그런 자에게 어찌 온전케 될 자격이 있겠느냐? 그것은 도태되고 징벌받을 징조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이 극에 달한 것이고 백번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뻔뻔스럽게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과 겨룬다. 이런 자에게 무슨 온전케 될 가치가 있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자신의 패역과 패괴를 증오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피조물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누릴 자격이 있고,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너희 대부분은 또 어떠하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살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의 앞에서 또 어떻게 너희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느냐? 성심성의를 다하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느냐? 너희의 희생은 어떠하냐? 너희가 나에게서 얻은 것이 아직도 적단 말이냐? 너희는 분별할 줄 아느냐? 나에 대한 너희의 충성심은 어떠하냐? 나를 섬기는 것은 또 어떠하냐?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주고 너희를 위해 행한 것은 또 어떠하냐? 너희는 가늠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의 쥐꼬리만 한 양심으로 가늠하고 비교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의 언행이 떳떳하냐? 설마 너희의 그 작디작은 희생으로 내가 베풀어 준 모든 것에 떳떳하단 말이냐? 너희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한결같아서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너희는 나에게 음흉한 속셈과 딴마음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본분이고 얼마 되지도 않는 너희의 기능이다. 그렇지 않으냐? 설마 너희는 자신들이 아예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음을 모른단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가 어찌 피조물이라 불리겠느냐? 너희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지 않느냐? 너희는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용과 풍성한 은혜를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은혜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너희 소인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라는 것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이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너희 같은 사람들, 너희 같은 둔재들은 하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전혀 없다. 오직 고난의 나날과 끝없는 징벌만이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충성을 다할 수 없다면 너희의 운명은 곧 고통이고, 나의 말과 사역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너희의 결말은 곧 징벌이다. 그 어떤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삶도 너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너희가 누릴 몫 또한 없다. 너희에게 이것은 당연한 결말이며 자업자득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49)

그 어리석고 오만한 자들은 온 힘을 다하고 본분을 이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요구가 당연한 것인 양, 손을 내밀어 은혜를 요구한다. 요구가 무위로 돌아가면 더욱 신의를 저버리는데, 이런 자에게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자질이 부족하고 이성 또한 전무하여 경영 사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본분을 추호도 이행하지 못한다. 너희의 몸값은 이미 바닥을 쳤다. 이토록 은총을 베풀었음에도 너희가 보답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극도로 패역한 것이다. 이런 것들로 너희를 족히 정죄할 수 있고, 너희의 나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비열함과 옹졸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너희가 또 무슨 자격으로 다시 손을 내밀어 요구한단 말이냐? 너희가 나의 사역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하며, 나를 굳게 증거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미 너희의 잘못이고 부족함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도리어 나를 공격하고, 나의 잘못이라고 허튼소리를 하며, 내가 공의롭지 못하다고 원망한다. 이것이 너희의 충성심이냐? 너희의 사랑이냐? 너희가 이것 말고 또 무슨 사역을 할 수 있느냐? 너희는 모든 사역에 있어 어떤 공헌을 했느냐? 얼마나 헌신했느냐? 내가 너희를 책망하지 않는 것만 해도 이미 지극히 큰 관용을 베푼 것인데도 너희는 뻔뻔스럽게 이유를 따지고, 암암리에 나를 원망한다. 그런 너희에게 인간미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사람의 본분 이행에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수없이 섞여 있을지라도 너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사역하다가 불순한 것들이 섞이는 것은 자질의 문제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패역이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한마디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이고,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점 변화하고, 또 그 과정에서 비로소 충성심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네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할수록 더 많은 진리를 얻게 되고, 더 실제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할 뿐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에 도태될 것이다. 그런 자는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자는 변화되지 않은, 화를 입을 대상이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에는 불순한 것들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악으로 가득 차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0)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협력해야 할지 모를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 원칙이 무엇이고 사탄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모른다면 실행의 길이 없을 것이다. 열정으로 추구하기만 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성과를 낼 수 없다. 이런 체험 방법은 로렌스처럼 분별력 없이 그저 체험만을 강조하는 것일 뿐, 무엇이 사탄의 역사이고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등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할지, 현재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알아 가야 할지, 하나님의 긍휼과 위엄, 공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상태와 어떤 시대를 대상으로 말한 것인지 등 일련의 일들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만약 사람이 많은 이상(異象)을 체험의 토대로 삼지 않는다면 생명은 물론 체험조차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어리석게 늘 하던 대로 순종하고 인내할 뿐이니, 이런 사람은 모두 온전케 되기 힘들다. 다시 말해, 위에서 말한 이상을 네가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는 네가 멍텅구리임을 의미한다. 언제나 이스라엘에 우뚝 서 있는 소금 기둥 같으니 그야말로 쓸모없는 폐물인 셈이다! 어떤 사람은 언제나 무턱대고 순종하기만 하고, 언제나 자신을 인식하며, 언제나 자신의 처세술로 새로운 일들을 처리하고, 언제나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사소한 일들을 ‘지혜롭게’ 처리하는데, 이런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천대받으려고 태어난 사람인 양 참고 견디기만 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니, 조금의 분별력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할 줄도, 사람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여 줄 줄도 모르니 이런 자는 체험이 없는 사람에 속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다 못해 결국에는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을 보고도 감히 일어나 정죄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명백히 성령의 역사인데도 감히 일어나 순종하지 못하고, 악령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여기며 조금의 반항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으로, 절대 하나님을 위해 중임을 맡을 수 없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는 분별력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이러한 체험 방법은 마땅히 근절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체험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1)

오늘날 이 흐름에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기 다른 역할에 따라 사람을 온전케 한다. 그러므로 네가 모든 힘을 다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너희가 아직은 온전하지 못하여 할 수 있는 역할이 한 부분이나 두 부분밖에 안 되지만 온 힘을 쏟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 온전케 될 것이다.

젊은 사람은 처세 철학이 적지만, 지혜와 식견이 부족하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사람의 지혜와 식견을 온전케 하여 채워 줄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은 성품이 안정적이지 못하기에 이 부분은 하나님께 변화받아야 한다. 젊은 사람은 종교 관념과 처세 철학이 적어 어떤 일에서든 생각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이것은 인성이 아직 굳어지지 않은 부분으로, 취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은 사리에 어둡고 지혜가 부족한데, 이는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과정을 통해 너희의 분별력이 강해져 영적인 일을 많이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점차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 나이 든 형제자매들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취할 만한 부분과 취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나이 든 형제자매들은 처세 철학과 종교 관념이 많고, 일 처리에 여러 가지 규정이 많다. 또 항상 교조적이고, 기계적이며, 융통성이 없다. 이런 것은 취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이 든 형제자매들은 어떤 문제가 닥쳐도 침착하고, 성품이 안정적이며,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깨닫는 것이 조금 느리긴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너희들은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받아들여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또 절대 판단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말고, 순종하면서 따르고 받아들여 실행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다면 온전케 될 수 있다.

젊은 형제자매든 나이 든 형제자매든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알아야 한다. 젊은 사람은 오만하게 행동하지 말고 나이 든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뒷걸음치지 말아야 한다. 또 서로의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하고, 어떠한 편견도 없이 서로를 섬겨야 한다. 젊은 형제자매와 나이 든 형제자매 사이에 우정의 다리를 놓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젊은 형제자매들은 나이 든 형제자매들을 무시하지 않고, 나이 든 형제자매들은 독선적이지 않으면 이것이 조화로운 협력이 아니겠느냐? 너희 모두에게 이러한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너희 세대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각자의 역할을 다함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2)

앞으로 너희가 복을 받을지 화를 입을지는 모두 오늘날 너희의 행위에 달려 있다.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이 시대밖에 없다. 지금 하나님이 너희를 온전케 하려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말하는 방식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그 어떤 시련이나 재앙이 닥치든 또는 어떤 일이 발생하든 어쨌든 하나님은 너희를 온전케 하려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역대에 지금과 같이 절정에 이르거나 최고의 경지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성령이 전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역대에 거의 아무도 체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계시는 없었다. 너희에게 하는 말과 너희가 깨닫고 체험하는 것 모두가 절정에 이르렀다. 너희들이 시련이나 형벌 속에서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 역사가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사역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반드시 너희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너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새롭게 깨달았다면 예수의 두 번째 강림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이 시대에서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소극적이 되는 것을 신경 쓰지 말라. 너를 소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선 내려놓고 신경 쓰지 말라. 일을 처리할 때는 찾고 구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취약점을 알게 되어도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이 든 형제자매들은 종교 관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기도하고 순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찬송할 수 있는 등등이다. 요컨대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소극적인 상태로 기다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하여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 첫째이다. 거기에 또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각자의 역할을 다함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3)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에게만 하나님을 섬길 자격과 권리가 주어진다. 나는 너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전도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버리는 등등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종교 인사들은 성경을 받쳐 들고 곳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복하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신학교에서 심도 있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여러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 구절로 사람들을 교훈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빈곤 지역’의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을 위해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중보 기도를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긴다. 너희 중에 많은 이들은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사역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형제자매들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이루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별처럼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며 턱없이 부족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섬겨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시급히 알아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기고자 한다면 우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고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가 최소한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다. 너희는 또한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현재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알고 난 후에, 너희는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아 먼저 진입하고, 먼저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할 때,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진실로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섬길 자격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를 섬길 때 너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 알고 더 분명히 이해하게 한다. 네가 이 실제에 진입할 때, 너의 체험은 더욱 깊어지고 더 실제적이 된다. 이런 체험이 있는 사람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형제자매들에게 공급할 수 있어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하고 영적인 앎이 더 풍성해지게 한다. 이 효과에 도달한 후에야 너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있고, 또한 섬기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지기(知己)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며, 하나님께 일편단심 충성하는 자여야 한다. 사람 뒤에서 한 일이든 사람 앞에서 한 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설 수 있으며,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너는 항상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지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기가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중임을 맡고 하나님의 짐을 함께 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부담으로 생각하며, 전망과 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설사 아무런 미래도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지라도, 그는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지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기는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급해하는 것을 급해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한다. 비록 육체는 고통스럽고 연약할지라도 그 고통을 인내하며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더 많은 부담을 주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런 사람을 통해 증거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을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기가 될 때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왕권을 잡게 되는 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어떻게 섬겨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4)

예수가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고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 계산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너희가 가장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지기이자 하나님 자신이다(사실, 그는 하나님이 증거한 하나님 자신이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통해 한 가지 일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중심으로 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만일 당신의 뜻이라면 이루소서. 제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계획대로 하소서. 사람이 연약하긴 하나 당신께서 어찌 그것까지 헤아리시나이까? 당신 손안의 개미와도 같은 사람이 어찌 당신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겠나이까? 저의 마음은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루기 원하오니, 원컨대 당신의 뜻에 따라 제게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소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아프고 괴로웠으나 마음속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계속 어떤 큰 힘에 이끌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곳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의 형상으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수하고, 모든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사망, 지옥과 음부는 그의 앞에서 위력을 잃고 그에게 패하였다. 그는 33년의 생애 동안, 언제나 하나님의 당시 사역에 맞춰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득과 실을 따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세례를 받은 뒤에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 인류를 구속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그에게 맡겨 완수하게 한 것이다. 그는 그 중임을 완수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을 위해 수많은 고통과 사탄의 시험을 받았지만, 낙담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사랑하였기에 그 크고 중요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오직 예수만이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행한 인류 구속 사역 실상의 일부이다.

너희도 만약 예수처럼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여 너희 육을 저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중책을 너희에게 맡겨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 조건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만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자이며,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너는 네가 하나님의 지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네가 하나님의 지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네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네가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너 자신이냐? 너는 사탄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우기고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많은 사람들은 내 뒤에서 지위의 복을 탐하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을 탐하며, 늘 육체가 편하지 못할까 걱정하기에 급급하다. 교회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공밥을 먹거나 나의 말로 형제자매를 훈계하고,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을 속박한다. 이런 사람들은 말끝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떠들어 대고,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지기라고 한다. 이는 황당무계한 논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만약 네가 마음 자세는 바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기지 못한다면, 너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마음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공짜로 밥을 먹고 항상 육적인 안락만을 탐하며, 하나님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도모한다. 또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 영의 감찰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늘 간교하게 형제자매들을 기만하고, 사람들 앞과 뒤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마치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훔쳐 먹고 포도원을 짓밟는 것과 같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지기가 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자신의 생명과 교회에 대해 부담이 전혀 없는 네가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이런 자를 누가 과연 신뢰할 수 있겠느냐? 너처럼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이 더 큰 임무를 맡길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한다면 일을 그르치지 않겠느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섬김을 행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너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다. 너희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예수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신임을 얻기 어려우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희에게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네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항상 하나님을 기만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네가 하나님을 기만하면 가차 없는 심판이 너에게 임할 것이다. 너희는 지금 막 하나님을 섬기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이 기회에, 마음부터 하나님께 드리고, 한 마음으로 두 가지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든 사람 앞에서든 너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예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기는 자로 온전케 할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에 의해 진정으로 온전케 되고, 하나님 뜻에 맞게 섬기고 싶다면, 너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예전의 관점을 바꾸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예전의 구태의연한 방법을 바꾸어, 네 안에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아지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는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다면, 결국 유다와 같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어떻게 섬겨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5)

하나님은 전 우주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를 섬길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을 예정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순조롭게 완수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여 그를 섬기게 하는 목적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하는 원칙은 물론,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까지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제로 땅에 와서 사역하며, 사람과 접촉하여 사람이 그의 행사를 더욱 분명히 알게 한다. 오늘날 너희가 운 좋게 실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너희의 무한한 복이며, 그야말로 하나님의 높여 줌이다. 하나님이 그를 섬길 사람을 택하는 데는 언제나 원칙이 있다. 사람의 상상대로 열정만 있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늘날 너희가 보다시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인도로 성령 역사가 있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패괴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섬기기란 불가능하다. 너의 성품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성품은 여전히 사탄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너의 섬김은 선의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 준다. 이는 사탄의 본성으로 섬기는 것이다. 너는 타고난 개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의 취향대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러면서 네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고,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도 싫어할 것이라고 여기며 완전히 자기 취향대로 사역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냐? 계속 그렇게 한다면, 너의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채 도리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더욱 완고해지고 패괴 성품이 더 깊이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 내면에는 네 개성을 위주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들과 네 성품대로 섬기면서 정리된 경험이 형성될 텐데, 이는 사람이 경험으로 얻게 되는 교훈이고, 또 사람의 처세술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과 종교 관원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이 각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반드시 말세에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된다. 이른바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부류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개성에 따라 자기 뜻대로 행한다면 언제라도 도태될 위험성이 있다. 또 여러 해 동안 종합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농락하고, 높은 자리에 서서 훈계하고 통제하며, 회개하거나 죄를 자백한 적도 지위의 복을 포기한 적도 없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쓰러지고야 말 것이다. 이런 자들은 관록과 경험을 내세워 거들먹거리는 바울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은 이런 자를 온전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섬김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낡은 것과 고루한 고정 관념, 그리고 과거의 모든 것을 고수하는데, 이는 섬김에 크나큰 걸림돌이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네 일생은 이로 인해 망가질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뛰어다니고, 허리가 끊어질 만큼 고생하며, 심지어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칭찬은커녕 도리어 너를 가리켜 악을 행한 자라고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반드시 없애야 할 종교적 섬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6)

지금부터 하나님은 종교 관념이 없고 과거의 자신을 내려놓으려 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온전케 할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일어나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끝없는 풍부함과 무한한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그의 기묘한 사역과 보배로운 말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종교 관념이 있거나 관록을 내세우는 자,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는 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성령을 통해 온전케 될 기회도 얻을 수 없다. 사람에게 순종하려는 의지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갈수록 패역해지고 간교해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지금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 그를 진실로 사랑하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내세우며 거들먹거리는 종교 관원들은 완전히 제해 버릴 것이다. 이렇게 고집불통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원치 않는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느냐? 너는 자신의 취향대로 사역하며 섬겼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하며 섬겼느냐? 이는 너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너는 종교 관원에 속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온전케 된 신생아에 속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령께 얼마나 인정받았느냐? 하나님이 전혀 기억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되느냐? 여러 해 동안 섬기면서 너의 생명에는 얼마나 큰 변화가 생겼느냐? 너는 이것들을 분명히 알고 있느냐?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과거의 낡은 종교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사람은 낡은 종교 관념 때문에 일생을 망치고, 사람이 종합해 낸 경험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져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생명 성장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섬기는 모든 이를 온전케 하며, 쉽게 도태시키지 않는다. 진실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이전의 종교적 행위와 규례를 버리고, 과거의 종교 관념으로 하나님이 오늘날 하는 말씀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낡은 것들을 고수하며 이를 보배로 여긴다면 더 이상 구원받을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말로 온전케 되고 싶다면 각오를 다지고 과거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이전에 행한 일이 옳을지라도, 하나님이 행한 것일지라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이전에 행한 일이 분명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이 직접 행한 것일지라도 오늘은 절대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니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사역하고 말씀할 때 과거의 낡은 것들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으며, 지나간 일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이므로 자신이 이전에 말씀한 것일지라도 고수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이전의 것들을 고집하며 내려놓지 않고 억지로 공식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네가 그렇게 한다면 말과 행동으로 방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네 일생이 이 낡은 것들에 의해 망가지길 원하느냐? 이 낡은 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느냐? 정말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한시라도 빨리 방향을 바꾸어 다시 시작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은 이전의 섬김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반드시 없애야 할 종교적 섬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7)

사역이라 하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곳곳에서 전도를 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옳긴 하지만 아주 단편적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더 많이 섬기고 공급하는 것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을 위한 사역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의 관념 속 사역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일치하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역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진입도 매우 단편적이 되었다. 너희는 모든 측면에서 더 잘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에서부터 진입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 내는 것과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역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과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람의 책임이자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다. 너희의 진입이 곧 너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과정에서 진입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섬길 줄 알며, 사람을 돌보고 공급할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사역이자 너희의 진입이며, 모든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바이다. 많은 이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곳곳에서 설교하는 것만을 중시한 나머지 개인의 체험을 망각하고, 영 생활에 진입하는 것을 간과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돌봐 온 이가 사역과 설교를 진입할 것으로 여기면서도, 개인의 영적 체험은 중요하게 진입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령 역사로 인한 깨우침을 밑천 삼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며, 설교할 때면 사명감으로 가득 찬 채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령의 음성을 쏟아 낸다. 이때, 사역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영적 체험인 양 득의양양해하며 자신이 한 말이 개인의 어떠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자신의 체험은 입 밖에 낸 것만큼 그렇게 명확하지 않고, 게다가 말하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성령이 역사하면 청산유수처럼 줄기차게 말을 늘어놓는다. 네가 이렇게 설교를 한 번 하고 나면 네 실제 분량이 생각했던 것만큼 작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성령이 이와 비슷하게 몇 차례 역사하면 사람은 자신에게 이미 분량이 생겼다고 확신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곧 자신의 진입이고, 자신의 어떠함이라고 착각한다. 늘 이런 체험을 하다 보면 개인의 진입에 해이해지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나태해져 개인의 진입을 전혀 중시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타인을 돌볼 때에는 네 분량과 성령의 역사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네 진입에 박차를 가할 수 있고, 네 체험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성령의 역사를 개인의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락의 시작이다. 그래서 너희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너희의 진입을 핵심 공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8)

사역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사람을 전부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며,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인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하나님 사역의 성과를 완벽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너희는 반드시 사역의 본질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할 자격이 있다. 즉, 모두에게 성령께 쓰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이 맡겨 준 사역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기회를 얻은 것이지만 사람이 말한 것과 깨달은 것이 전부 사람의 분량은 아니라는 점이다. 너희는 오직 사역하는 과정에서만 너희의 부족함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많은 성령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며, 더 잘 진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인도를 자신의 진입으로 여기고, 게다가 자신에게 원래 있었던 것으로 간주한다면 사람의 분량은 발전이 없다. 성령은 사람의 상태가 정상적일 때 깨우쳐 준다. 이때 사람은 흔히 자신이 얻은 깨우침을 자신의 실제 분량으로 착각한다. 성령의 깨우침이 너무나 정상적이고,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행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역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 불현듯 어떤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사실 사람이 깨달은 것은 성령의 깨우침일 뿐 자신의 실제 분량은 아니다(물론 이 깨우침 역시 사람의 협력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 다시 한동안 체험하면서 어느 정도 어려움과 시련에 봉착하게 될 것인데, 그 상황에서 비로소 진실한 분량이 드러나고, 그제서야 사람은 자신의 분량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사심, 잡념, 탐욕 등이 모두 쏟아져 나오니 말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많은 이가 이런 체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서야 예전의 깨우침이 자신의 실제가 아닌 성령의 일시적인 빛 비춤이었고, 사람은 그저 빛 비춤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쳐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전후사연 없이 분명하고 명확한 경우가 많다. 즉, 사람의 어려움을 계시에 연관시키지 않고, 직접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입 과정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이를 다시 성령의 깨우침에 연관시키면 사람의 실제 체험이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너희의 진입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성령 역사인지, 무엇이 너희의 진입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 성령 역사를 너희의 진입 속으로 끌어들여 성령의 온전케 함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너희에게서 성령 역사의 본질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성령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을 알고 자신도 알게 된다. 또한, 여러 차례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쌓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일 조금씩 더 가까워지며, 수많은 훈계와 연단 속에서 하나님에게 참된 사랑을 갖게 된다. 따라서 너희는 고통, 채찍질, 환난은 무서운 것이 아니고, 정말 무서운 것은 너희에게 성령 역사만 있고 자신의 진입이 없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임을, 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진입이 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이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은 사람의 열의를 유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진입을 위해 활로를 열어 주기 위해서이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을 알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59)

책망 훈계와 심판 형벌을 겪은 사람의 사역에는 편차가 훨씬 적고, 사역할 때 나타내는 내용도 훨씬 정확하다. 반면, 천성대로 사역하는 사람의 오차는 상당히 큰 편이다.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이 사역하면서 나타내는 것에는 천성적인 것이 너무 많아 성령의 사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자질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책망과 훈계, 심판을 겪어야만 하나님이 맡겨 준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심판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진리의 원칙에 부합할 수 없고, 행하는 것이라고는 전부 천성적인 것과 인위적인 호의에 불과하다. 책망 훈계와 심판을 겪은 사람이 사역을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할 때보다 훨씬 정확하다. 심판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것은 육적인 것과 사람의 사유일 뿐이고, 거기에는 사람의 총명과 선천적인 재능이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의 선천적인 자질에 끌려 그의 앞으로 가게 된다. 그가 나타내는 것에는 사람의 깨달음과 체험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본뜻과 어긋나고 오차도 너무 크다. 그런 사람이 사역을 하면 사람을 하나님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 준 사역을 할 자격이 없다. 자격을 갖춘 일꾼이 하는 사역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에 깊이 진입하게 할 수 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고, 게다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일을 할 수 있으며, 규례의 제약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줄 수 있고, 또한 생명이 점차 성장하고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게 할 수 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일꾼이 하는 사역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는 어리석게 사역을 하며 사람을 규례 속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는 사람에 따라 요구를 달리하지도 않고, 사람의 실제 필요에 맞춰 사역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역에는 규례와 이론이 너무 많아 사람을 실제 속으로 이끌 수 없으며, 생명이 성장하는 정상적인 실행 속으로 이끌 수도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규례를 지키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인도는 사람을 치우치게 만든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너를 어떻게 인도할지가 결정되며, 그는 너를 그의 소유와 어떠함 안으로 이끌 수 있다. 따르는 사람이 이끄는 사람의 자격 여부를 판단하려면 그가 인도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 사역의 효과가 어떠한지, 따르는 사람이 얻은 것이 진리의 원칙에 맞는지, 사람의 변화에 적합한 실행의 길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관건이다. 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역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어리석게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의 진입에 관련된 일이다. 네가 누구의 인도에 길이 있고, 누구의 인도에 길이 없는지를 분별할 수 없다면, 쉽게 미혹된다. 이것들은 모두 너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역에는 천성적인 것이 너무 많고, 사람의 뜻도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의 어떠함은 천성적인 것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듬어지면서 얻게 된 생명도, 변화를 거치며 갖게 된 실제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줄 수 있겠느냐? 사람의 원래의 생명은 사람의 선천적인 총명이나 재능을 말한다. 이런 총명이나 재능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요구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온전케 되지 않고, 패괴 성품이 책망과 훈계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매우 멀며, 사람의 상상과 단편적인 체험 등 막연한 것들이 섞여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총체적인 목표가 없고, 모든 사람의 진입에 적합한 진리가 없으며,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의 대부분이 어려운 일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뜻으로 행하는 사역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사람의 사유와 관념은 사람의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사람은 천성적으로 진리를 실행하는 본능이 없으며, 진리를 직접 깨닫는 본능도 없다. 거기에 패괴 성품까지 더해졌으니 그런 천성적인 사람이 사역을 하면 전부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온전케 된 사람은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에 대한 체험이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사역하는 과정에서 막연하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사람의 불순물도 점점 줄어들며, 그의 사역과 섬김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그가 하는 사역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고 현실적이 된다. 사람 두뇌의 사유는 성령의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사람에게는 풍부한 상상력과 합리적인 논리력, 그리고 노련한 처세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교정되지 않는다면 전부 사역을 가로막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역은 가장 정확한 수준에 이를 수 없으며, 특히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의 사역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0)

너는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 나타나는 많은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 특히 협력하며 섬기는 자는 더욱더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할 때 생기는 많은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만약 많은 체험이나 진입법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면 이는 사람의 체험이 너무 단편적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지 못하고 진리의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면 성품이 변화될 수 없다. 성령 역사의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성령 역사로 이뤄지는 성과를 알지 못한다면 악령 역사를 구분하기 어렵다. 악령의 역사와 사람의 관념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폭로해야 하며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실행상 치우친 부분이나 하나님을 믿는 어려움 등 많은 것 역시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짚어 주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사람이 소극적이나 수동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잘 파악해야지, 억지를 부리거나 무리한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람의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성령 역사의 움직임과 성령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의 어려움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문제의 핵심을 명확히 알며, 그 근원을 포착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협력하며 섬기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지, 많은 일을 명확히 알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의 체험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 너는 네가 체험한 대로 사람들을 이끌 것이다. 네가 글귀만 이해했다면 사람들을 글귀로 인도할 것이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체험했다면 그대로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의 실제로 이끌어 진입하게 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 말씀 속의 많은 진리를 깨닫고 많은 일을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사람들을 이끌어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할 것이며, 네가 이끄는 사람들도 이상(異象)에 대해 잘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초자연적인 느낌을 중시하면서 그런 것을 찾고자 하면, 네가 이끄는 사람들도 초자연적인 느낌을 중시하며 찾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네가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말하는 것에 치중한다면, 네가 이끄는 사람들 역시 말하는 것에 치중하고 실행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며, 성품에도 아무 변화가 없고 겉으로만 열심일 뿐,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소유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끄냐에 따라 길이 달라지고, 어떤 사람이 이끄냐에 따라 병사(兵士)가 달라진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쓰기 합당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개인의 의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많은 깨우침이나 하나님 말씀의 인도, 또는 하나님의 다루심이나 말씀의 연단이 있어야 한다. 너희는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평소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정리하며 받아들이거나 제거해야 한다. 이는 모두 너희가 실제에 진입하는 길이며,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다. 네가 하나님의 이런 사역 방식에 진입한다면 매일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환경이 좋든 나쁘든, 시련을 겪든 시험을 당하든, 사역을 하든 안 하든, 또는 개인 생활을 하든 단체 생활을 하든 상관없이 언제든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기회를 찾을 수 있고, 하나도 빠짐없이 언제든 모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쓰임 받기에 합당한 목자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1)

현재 많은 사람이 협력할 때 어떤 공과들을 배워야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본 너희는 대부분 함께 협력할 때 전혀 공과를 배우지 못할뿐더러 각자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 교회에서 사역할 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말하며 서로 상관하지 않고 전혀 협력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 내면의 깨달음을 교제하고 자기 안의 ‘부담’을 털어놓는 데만 신경을 쓸 뿐, 전혀 생명을 추구하지 않으니 건성으로 대충 사역하는 것과 같다. 또 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성령이 이끄는 대로 교제하면 된다고 여긴다. 너희는 다른 이의 장점을 보지 못하고 자기 성찰은 하지 않으니, 참으로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다. 너희에게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독선적인 상태가 적지 않은데, 꼭 고질병이 또 재발한 것 같다. 너희는 서로 완전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교제를 하지 않는다. 어느 교회에 가서 사역할 때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최근에 너의 내적 상태가 어떠한지 등등 이러한 교제는 아예 없다. 예컨대 관념을 내려놓거나 자신을 저버리는 이러한 실행은 너희에게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리더와 일꾼은 형제자매들이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고 힘 있게 따르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 그러나 모두가 힘 있게 따르면 그만이라고만 생각할 뿐, 스스로를 알아 가고 저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이 서로 협력하며 섬기는 것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각오와 베드로처럼 살 각오만 있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너는 어리석은 순종을 중요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너 자신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만 추구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네 각오는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지금 너희가 보여 준 모습 아니더냐? 너희는 각자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면서 온전케 되기를 바란다.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너희의 섬김을 지켜봤지만 이렇다 할 성장은 거의 없었다. 특히 ‘조화로운 협력’에 대한 공과는 백지와도 같다! 교회에 가면 너는 네 방식대로 그는 그의 방식대로 제각기 교제를 하고, 조화롭게 협력하는 경우가 극히 적으니, 아래에서 따르는 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너희 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등을 아는 이는 매우 적다. 너희는 흐리멍덩하여 이 부분의 공과를 어린애 장난처럼 여기고, 심지어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의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면서도 잘못을 범한다. 또한, 여러 해 섬긴 사람도 서로 암투를 벌이고 시기하며 분쟁을 일으키고, 각자 제 할 일만 하며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 너희의 분량 아니더냐? 너희는 매일 함께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성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직접 섬긴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너희가 어찌 어떻게 협력을 하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이스라엘인의 섬김을 본받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2)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를 섬기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나는 너희가 조화롭게 협력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섬김을 멈추게 할 것이다. 너희는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에 최소한 충성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하며, 실제적으로 공과를 배워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 사역하는 자라면 너희 밑에 있는 형제자매 중 누가 감히 너희를 책망할 수 있겠느냐? 누가 감히 앞에서 너희의 잘못을 말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모두 높은 자리에 앉아 정말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실제적인 공과를 배우지도 않고 진입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오늘날 네게 교회를 이끌게 하였지만 너는 너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관념과 생각을 고집한다. 그러면서 “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해요. 하나님께서도 다른 사람의 구속을 받지 말라고 하셨고, 지금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걸 중시하지는 않는다고요.”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각자의 생각을 고집하며 누구도 굽히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섬김에 길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 둘은 맡은 부분이 서로 다르니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교제합시다. 당신은 당신의 이상(異象)을 교제하고 나는 내 진입을 교제하는 것으로 하죠.”라고 말한다. 처리해야 하는 많은 일에 대해서는 늘 책임을 지지 않거나 건성으로 대하며, 모두가 제각기 다른 의견을 말한다. 자신의 지위, 명예, 체면은 매우 신중하게 지키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생명이 더 빨리 성장하도록 자신을 낮추거나 자발적으로 자신을 버리지는 않는다. 너희는 협력할 때 진리를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저는 이 부분의 진리를 잘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체험하셨나요?”라고 하거나 “이 부분에서는 당신이 저보다 체험한 것이 많으니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 너희는 많은 도를 들었고 섬김의 부분에서도 얼마간 체험을 했다. 너희가 교회에서 사역할 때 서로 배우거나 돕거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지 않으면 어디서 공과를 배울 수 있겠느냐? 어떤 일이 닥치면 모두 서로 교제하여 너희의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자세하게 교제한 후 결정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고, 건성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한 바퀴 돌아본 후 함께 모여서 발견한 문제와 사역 과정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까지 모두 교제하고, 자신이 얻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교제해야 한다. 이는 섬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실행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교회의 이익을 위해, 형제자매들을 이끌기 위해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서로 협력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어 더 좋은 사역의 성과를 이끌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협력이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진입한 사람이다. 협력 과정에서 적절하지 않은 말을 해도 괜찮다. 간과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교제하여 분명히 알도록 해라. 이러한 교제 후에는 다시 형제자매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어야 한다. 항상 이렇게 끊임없이 깊이를 더하며 사역해야만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범사에 교회의 이익을 지켜야지, 혼자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서로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행동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다! 이러한 자는 성품이 극도로 악하여 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데, 영락없는 사탄이자 짐승이다! 너희 가운데는 지금도 이런 일이 있다. 심지어 교제 중에 서로를 공격하며 고의적으로 변명 거리를 찾는다.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누구도 자신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으며 서로 앙심을 품은 채 상대방을 관찰하고 경계한다. 이러한 성품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러한 사역으로 어떻게 형제자매들이 공급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는 사람을 생명의 바른길로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패괴 성품을 주입시키고 있으니, 이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양심이 썩은 자로, 정말이지 너무나 패악하다! 너는 실제에 진입하지 않고 진리도 실천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다른 사람 앞에서 그 마귀 같은 본성을 드러내다니, 참으로 낯짝도 두껍구나! 형제자매들을 네게 맡겼는데 모두 너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갔으니, 너는 양심이 없는 자 아니겠느냐? 참으로 파렴치하구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이스라엘인의 섬김을 본받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3)

너는 시대적 의미가 있는 적합한 언어로 하나님이 각 시대에 나타낸 성품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너는 하나님의 말세 사역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증거할 수 있느냐? 너는 너의 목양을 기다리고 있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가련하고 가난하고 경건한 그 종교 신자들에게 자신이 보고 체험한 것을 어떻게 알려 줄 것이냐? 너의 목양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어떤 ‘인물’일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짊어진 중책과 너에게 맡겨진 사명, 너의 책임을 너는 모두 알고 있느냐? 너의 역사적 사명감은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어떻게 다음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냐? 너는 주인 의식이 강렬하냐? 만물의 주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정말로 생물과 세상 모든 물질의 주인이겠느냐? 너는 다음 단계 사역의 진전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 너의 목양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너의 임무가 무척 무겁지 않으냐?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먼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흑암 속에 떨어져 흐느끼고 있다. 길은 어디에 있느냐? 밝은 빛이 문득 유성처럼 내려와 오랫동안 인간을 억압한 이 흑암 세력을 몰아내길 얼마나 갈망하고 있겠느냐? 간절히 기대하고 밤낮으로 생각하지만 누가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느냐? 심한 고난에 빠진 그 사람들은 빛이 가로지르는 날에도 여전히 흑암의 감옥에 갇힌 채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더 이상 애곡하지 않겠느냐? 한 번도 안식을 취한 적이 없는 그 연약한 영들은 그렇게 참혹한 불행을 겪고 있다. 비정한 밧줄과 굳어 버린 역사(歷史)가 일찍이 그들을 그 속에 가둔 것이다. 그 흐느낌을 누가 들은 적이 있느냐? 그 근심하는 모습을 누가 본 적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손수 지은 무고한 인류가 그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어쨌든 인류는 해를 입은 불행한 자들이다. 비록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기는 했지만 일찍이 악한 자에게 해를 입었음을 누가 알겠느냐? 설마 너는 자신이 그 피해자 중의 하나임을 잊은 것이냐?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니, 그 생존자들을 모두 힘써 구원해 오고 싶지 않으냐?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어, 사람을 자신의 골육처럼 사랑하는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지 않으냐? 너는 하나님께 쓰임 받음으로써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느냐? 너는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으로 의미 있는 일생을 살 의지와 믿음이 있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앞으로의 사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4)

사람은 나를 믿지만 나를 증거하지 못한다. 또 내가 드러내기 전에 나를 증거하지도 못한다. 사람은 그저 내가 피조물을 능가하고 모든 거룩한 자들보다 뛰어나다는 것, 그리고 내가 행하는 사역을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부터 현재의 사람들까지, 내 영광스러운 행사를 본 사람은 나에게 큰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그 어떤 피조물도 나를 증거하지는 못한다. 오직 내 아버지만이 나를 증거하고, 내 아버지만이 피조물 가운데서 내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해도 사람은 내가 창조주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그저 나에게 요구할 줄만 알 뿐, 내가 하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를 알게 된 것은 내가 본래 무고하고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많은 비밀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며, 내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거나 사람이 내게서 이로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창조주임을 믿는 이는 드물다. 그렇기에 사람은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고, 나를 믿는 목적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실제가 너무 적고 나를 증거할 조건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참된 믿음이 너무 적고 얻은 것도 극히 적다. 그래서 너희가 ‘증거하는 것’도 몹시 적은 것이다. 게다가 너희들은 아는 것이 너무 적고 부족함이 너무 많아 ‘나의 행사를 증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너희의 의지가 강하기는 해도 진정 ‘하나님의 본질’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체험하고 본 것들은 역대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너희가 그들의 말보다 더 훌륭하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느냐? 지금 내가 너희에게 베푸는 것들은 모세보다 많고 다윗을 뛰어넘는다. 또한 나는 너희의 증거가 모세를 뛰어넘고 너희의 말이 다윗보다 훌륭하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에게 백배를 주었으니 너희도 나에게 백배로 갚아야 한다. 인류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는 이는 나이며, 내 생명을 받아들이고 나를 증거해야 하는 존재는 너희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준 본분이자, 너희가 마땅히 나를 위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모든 영광을 주었고, 이스라엘 선민들도 얻지 못한 생명을 주었으니, 너희는 마땅히 나를 증거해야 하며, 나를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쳐야 한다. 내게서 영광을 받는 자는 나를 증거해야 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는 내가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나의 영광을 받는 것은 너희의 복이며, 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은 너희의 본분이다. 너희가 그저 복 때문에 나를 믿는다면 나의 사역은 별 의미가 없어지며, 너희 역시 너희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 것은 나의 긍휼과 자비, 위대함뿐이었고, 유대인들이 본 것은 나의 인내와 구속뿐이었다. 그들은 내 영의 역사를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의 만분의 일에 불과하다. 너희가 본 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대제사장보다 더 많다. 오늘 너희가 깨달은 진리는 그들보다 더 높으며, 오늘 너희가 본 것은 율법시대보다 더 많고 은혜시대를 뛰어넘는다. 또 너희가 체험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만 알고 여호와의 뒷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의 구속만 알고 예수의 은혜만 받았으며 유대 족속의 형상을 지닌 예수를 본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여호와의 영광’과 ‘예수의 구속’과 오늘날 내 모든 행사를 보았다. 또한 직접 내 영이 하는 말을 들었고, 나의 지혜를 느꼈으며, 나의 기묘함을 깨닫고, 나의 성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내 경륜의 전부를 알려 주었다. 너희는 자비롭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을 보았고, 나의 놀라운 역사를 보았다. 또한 내게 진노와 위엄이 가득함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집에 진노를 쏟았던 내가 오늘날 그 진노를 너희에게 내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희는 하늘의 내 비밀에 대해 이사야와 요한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며, 내 사랑스러움과 존경스러움에 대해 역대 성도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나의 진리와 길과 생명뿐 아니라 요한보다도 더 큰 이상(異象)과 계시를 받았다. 너희는 더 많은 비밀을 깨달았고, 나의 본모습도 보았다. 너희는 나의 심판을 더 많이 받았고, 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너희는 말세에 태어났지만 예전 것과 지난 것들을 깨닫고, 오늘날 내가 친히 행한 것까지 체험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에 대한 내 요구는 과하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고, 너희도 내게서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역대 성도들을 향해 나를 증거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5)

너는 지금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느냐? 너는 내가 사역하는 목적과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있느냐? 너는 진정 너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너는 진정 나의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네가 나를 믿기만 할 뿐, 네게서 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나의 증거를 볼 수 없다면, 너는 내가 일찍이 도태시킨 대상일 것이다. 더구나 뭐든 다 알고 있다는 자들은 내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고, 내 집에서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또한 내 사역에서 걸러 내야 할 가라지로서 아무 쓸모도 존재감도 없는, 오래전부터 내게 혐오받은 자다. 나를 전혀 증거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나의 분노가 따를 것이고, 나의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들을 악한 자의 손에 넘겼으므로 그들에게는 나의 축복이 조금도 없다. 형벌받는 날이 오면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내가 맡은 범위의 사역만을 하고 있는데, 모든 밀을 단으로 묶고 가라지도 그 속에 넣어 함께 묶고 있다. 이것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이다. 내가 키질을 할 때 그 가라지들을 모두 걸러 낼 것이다. 그다음 알곡은 곳간에 넣고, 걸러진 가라지는 불 속에 넣어 재로 만들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사역은 모든 사람을 단으로 묶는 것, 즉 철저히 정복하는 것뿐이다. 그 후에 키질을 시작해 모든 이의 결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어떻게 나를 만족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를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지금의 충성심과 순종이며, 지금의 사랑과 증거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무엇을 증거라고 하는지,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는지 모를지라도 마땅히 너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너의 유일하고 보배로운 충성심과 순종을 내 손에 바쳐야 할 것이다. 내가 사탄을 물리친 증거는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고, 내가 사람을 완전히 정복한 증거 또한 사람의 충성심과 순종에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나를 믿는 이상 너의 본무는 나를 증거하고, 내게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며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너는 나를 어떻게 증거할 것이냐? 너는 또 어떻게 내게 충성하고 순종할 것이냐? 너는 네가 하고 있는 기능에서 충성을 다할 것이냐, 아니면 뿌리치고 그만둘 것이냐? 너는 내 모든 안배에 순종할 것이냐(설령 죽거나 멸망할지라도), 아니면 내 형벌을 피하려고 중도에 도망칠 것이냐? 내가 너를 형벌하는 것 또한 너로 하여금 나를 증거하며, 내게 충성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형벌은 다음 단계 사역을 펼치기 위함이고, 앞으로의 사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자신의 생명과 생존의 의의를 가치 없는 한 줌의 흙처럼 여기지 말고 현명하게 행동하라고 권하겠다. 앞으로 나의 사역이 대체 어떤 것일지 네가 알 수 있겠느냐?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역할지, 사역을 어떻게 전개할지 네가 알 수 있겠느냐? 너는 내 사역을 체험하는 의의를 알아야 하며, 더욱이 나를 믿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했는데, 어찌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중도에 포기할 수 있겠느냐? 내가 이토록 큰 공사를 시작했는데, 어찌 허물 수 있겠느냐? 내가 시대를 끝내기 위해 온 것은 맞다. 하지만 내가 시대를 여는 자이자 사역을 전개하는 자이며 더구나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확장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의 사역이 그저 시대를 여는 것이고, 앞으로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이며, 또 앞으로 시대를 끝내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사역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고, 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혀 가치 없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한번 너에게 알려 주겠다. 너는 내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너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를 증거하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바랐던 것이며, 나의 복음을 확장하는 것은 더더욱 내가 오랫동안 바라 왔던 것이다. 너는 내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6)

너희의 믿음은 아주 진실하지만 너희 중에 나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본 사실을 전부 증거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생각해 보아라. 지금 너희 대다수는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을 좇고, 육을 만족시키고, 육을 탐하고 누리면서 진리는 얼마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본 것을 전부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진정 나의 증인이 될 자신이 있느냐? 나중에 네가 오늘 본 모든 것을 증거할 수 없다면 너는 피조물의 기능을 잃은 것이다. 그러면 너라는 사람은 존재할 의미가 조금도 없고, 사람이 될 자격도 없다.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너희에게 수많은 사역을 했지만 네가 지금 배운 것도, 얻은 것도 전혀 없는 연고로, 나의 사역을 확장해야 할 때 어리둥절해하며 말문을 못 열고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면, 너는 역사의 죄인 아니겠느냐? 그때가 되면 심히 후회하지 않겠느냐? 낙심하지 않겠느냐? 내가 지금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무료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할 사역을 위해 기초를 닦는 것이다. 절대 ‘궁여지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마땅히 내가 하는 사역이 길거리 개구쟁이가 아니라 내 아버지를 대표하여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대표하여 하는 것이며, 너희의 기능은 그저 따르고, 순종하고, 변화하고, 증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너희가 왜 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내 아버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세 때부터 내게 너희를 예정해 주었다. 그가 너희를 예정한 것은 나의 사역을 위해서이고 또 그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로 인해 나를 믿고, 내 아버지의 예정으로 인해 나를 따르는 것이다. 이는 결코 너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증거하기 위해 내 아버지가 내게 준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내 아버지가 너희를 내게 주었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베푼 도를 지키고, 너희에게 가르친 도와 말을 따라야 한다. 너희의 본분은 나의 도를 지키는 것이고, 너희가 나를 믿는 본뜻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너희는 내 아버지가 나에게 준, 나의 도를 지키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믿기만 할 뿐 내게 속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본래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옛 뱀의 부류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희는 나의 도를 행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의 증거를 위한 것이다. 너희가 나의 도를 듣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가치가 없다. 그러면 내 아버지가 너희를 내게 준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변함없이 너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는 나의 도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7)

지금 성령이 교회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느냐? 너는 알고 있느냐? 형제자매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냐?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이냐? 지금 어떤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 소극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말씀을 끝내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해 독립적으로 생활할 줄 모르고, 스스로 영 생활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면 따라가기도 하고 힘 있게 추구하며 실행하려고도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오지 않고, 지난날에는 강요에 밀려 하나님을 따랐다. 또 지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위험한 상황 아니겠느냐? 많은 사람이 건성으로 대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만 마음이 산만하고 예전처럼 힘 있게 추구하려는 마음도 없다. 하나님이 연단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항상 내면에 힘이 없는 것 같고, 과오를 이기지 못해도 하나님께 죄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며, 통회할 줄도 모른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으며 일시적으로 누리려고만 한다. 이런 자는 누구보다 어리석은 바보다! 그들은 때가 되면 모두 버림받을 것이다! 단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 너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지 않는 자는 모두 형벌받을 것이다. 많은 이가 생명 진입, 이상(異象), 진리의 실천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진입하려고 하지 않으며, 나아가 깊이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를 망치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 어떤 사람들은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성령이 역사할수록 내면에 더욱 믿음이 생기고, 체험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심오함을 느낀다. 또 깊이 진입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크다고 느끼며, 마음이 편안하고 환해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 역사가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없다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고 더 깊이 진입하겠다고 한다. 또한 실제 체험 속에서 범사에 참답게 대하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겠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령 역사가 있다. 비록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고 모습을 감추고 말씀도 하지 않으며 음성도 발하지 않아서 때로는 사람의 마음이 연단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람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실천해야 할 진리를 지키지 못하면, 이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 연단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단계에서, 믿음이 없어 뒷걸음질 치고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도망친 것이며 나중에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 말씀을 추구하는 힘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사역은 주로 사람에게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너에게 생명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모두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고 너를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네가 지금 비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볼거리나 얻으려 하고, 어떤 새로운 것이나 움직임이 있는지 보면서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따를 수 없다. 지금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협력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에 염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축복의 말씀만 듣고 싶어 할 뿐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말씀은 듣기 싫어한다. 왜 그렇겠느냐? 바로 복을 바라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소극적이고 나약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사람을 매질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소극적이고 나약해지는 것은 마음가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이며,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사람이 소극적이고 나약해져서 뒷걸음질 치는 것은 모두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연단을 주는데, 연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무리 얼굴을 가려도, 또는 말씀하지 않거나 역사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추구하며, 설령 하나님이 너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계속 따를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향해 얼굴을 가렸다고 해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선 것이겠느냐? 사람이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것은 실제 분량이 없는 것이기에 정말 큰 시련이 닥치면 쓰러지게 된다. 하나님이 지금 음성을 발하지 않거나 그가 하는 일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주저앉고, 하나님이 계속 너의 관념에 따라 역사하고 너의 뜻을 충족시켜 줄 경우에는 일어나 힘 있게 추구할 수 있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에 의지해 사는 것이냐? 나는 많은 사람이 순전히 자신의 호기심으로 살아갈 뿐, 진실로 추구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진리에 진입하려고 하지 않는 자든, 호기심에 의지해 사는 자든 모두 위험한 소인배들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역사하는 것은 모두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람은 계속 호기심을 품고, 늘 외국 상황이 어떤지, 이스라엘은 어떤지, 애굽에 지진이 나지는 않았는지 등 뜬소문만 알아본다. 항상 이렇게 새롭고 기이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사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또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하나님의 날이 빨리 와서 아름다운 꿈이 실현되고 사치스러운 욕망이 충족되기만을 바란다. 이런 사람은 실제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고 관점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근본이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징벌받는 대상이다. 징벌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에 성령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8)

하나님이 이번 단계 사역을 할 때 사람은 어떻게 협력해야 하겠느냐? 지금 하나님은 사람에게 시련을 주고 있다. 말씀하지 않고,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며 사람과 직접 접촉하지도 않는다. 겉으로 보면 역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속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고 있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는 사람은 생명을 추구하는 측면의 이상이 있어 하나님의 사역을 꿰뚫어 보지 못해도 의심하지 않는다. 너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이루려는지도 모를지라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언제나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그를 추구한다면, 그가 언제나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반드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며, 사람을 적합한 종착지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사람에게 어떤 시련을 주든,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합한 결말을 줄 것이고, 사람이 한 모든 일과 모든 행위에 따라 그에 맞는 보응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이끌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내팽개치지는 않는다. 성령은 이 단계에서 연단의 사역을 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연단을 준다. 과거 죽음의 시련이나 형벌의 시련 사역에서 연단은 다 말씀으로 임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우선 하나님이 현재 하는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하고, 사람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연단을 하든 음성을 발하지 않든, 어쨌든 하나님의 모든 단계 사역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의 관념을 타파하며, 사람의 관념을 벗어난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 특정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는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사람에게 약속도 주고 축복도 준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도태될 것이다. 이는 네가 어떻게 추구하는지에 달려 있다. 어떻든 간에 너는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종착지가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에게 아름다운 소망을 주었지만, 사람이 추구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지금 너는 사람을 연단하고 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사람은 언제나 성품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실제 체험에서 먼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네가 진입해야 할 것을 찾고 네 부족한 부분을 찾아 네 실제 체험과 결부시켜 진입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에서 실천할 부분을 찾아 훈련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한 측면이다. 교회 생활 역시 중단해서는 안 되고 정상적인 영 생활이 있어야 하며, 현재 자신의 모든 내적 상태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바뀌든 너는 정상적인 영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영 생활을 해야 정상적인 진입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너는 영 생활을 멈추지 말고 네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모두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다. 똑같이 성령이 하는 역사지만 상태가 정상인 사람에게는 온전케 되는 것이고, 상태가 비정상인 사람에게는 시련이 된다. 성령이 하는 이 연단의 사역에 대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너무도 잘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분량이 작아 전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하기에 연단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행하든, 어떤 변화를 주든 사람은 최소한 영 생활을 정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일정 기간 동안 영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도 얻은 것이 별로 없거나 매우 적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규례적으로라도 지켜야 한다. 생명에 해를 입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이 규례를 지켜야 할 것이다. 영 생활이 정상적이지 않으면 지금 하나님이 하고 있는 사역을 분명하게 알 수 없고, 늘 너의 관념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따르고 싶어도 마음속에서 힘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행하든 사람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협력하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 없고, 사람에게 협력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성령 역사를 얻기가 어렵다. 네가 성령 역사를 얻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하나님 앞에서 네 기존의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지금은 더 깊은 인식이나 더 높은 이론 또는 더 많은 것을 갖출 필요가 없다.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원래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는 것뿐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고 더 깊이 진입하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것까지 모두 거두어 간다. 사람의 마음은 늘 안락을 탐하고 이미 있는 것을 누리려고만 하며, 조금의 대가도 치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으려고 한다. 이는 사람의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조금의 대가도 치르지 않고 생명을 얻으려고 하다니,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항상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규례적으로라도 지켜야 한다. 시련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잃지 말고, 기도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형제자매들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도 진리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영 생활이다. 늘 구하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 협력하며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기초로 분별력과 실제 진입을 추구한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내적 상태가 정상이면 하나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느끼며,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 아주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너의 상태가 좋지 못하면 하나님이 한 사역이 아무리 좋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무리 듣기 좋아도 너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할 수가 없다. 그러면 사람의 성품도 변화되지 못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69)

사람에게 믿음이 전혀 없으면 이 길을 가기가 어렵다. 지금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의 관념과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한 많은 사역과 말씀은 사람의 관념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자신이 본 것과 체험으로 얻은 것을 지킬 수 있는 믿음과 끈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든, 결론적으로 사람은 마땅히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지녀야 하며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사람은 해야 하는 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는 그 수많은 사역이 모두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연단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더욱이 형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람이 누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왔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를 누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엄하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왔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연단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며, 시련이 있을 때마다 사람이 가져야 할 간증을 지키고, 하나님을 위해 힘 있게 증거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기는 자다. 하나님이 어떻게 연단하든 너는 믿음이 넘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즉, 사람이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항상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기는 자다. 하나님이 말하는 이기는 자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포위 공격 아래에서, 그러니까 흑암 세력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고 원래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지킬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이기는 자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해 줄 때는 잘 추구하다가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 않을 때 물러선다면, 이것이 정결한 것이겠느냐? 참도라고 확신했다면 끝까지 가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이 친히 너를 온전케 하려고 이 땅에 왔음을 알았다면 마땅히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혹여 마지막에 네게 나쁜 결말을 주더라도 네가 계속 따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을 지킨 것이다. 거룩한 영체, 정결한 동정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진심이 곧 정결함이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정결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실천해야 하는 바이다.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하고, 예배하고 교제해야 할 때는 예배하고 교제하며, 찬송을 불러야 할 때는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육을 버려야 할 때 육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할 때 건성으로 하지 않으며,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설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사람이 해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전에 받은 고난과 내린 결심이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0)

하나님이 하는 매 단계 사역에는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길이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은 사람이 연단 속에서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연단, 책망,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여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는 것은 사람이 협력하고 실천하게 하려는 것이다. 연단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고 음성을 발하지 않아도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원래 있는 것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너희 모두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분명히 보았겠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검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자주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도 네가 전혀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천할 때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누릴 때도 늘 하나님 앞에서 구하면,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해지고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할 때는 매우 힘이 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어둠에 빠진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배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더라도 자기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고 진리를 실천해야 할 때 진리를 실천하면서 사람이 해야 할 것을 다 하고 원래의 이상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다음 단계 사역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나님이 은밀하게 역사할 때 추구하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하나님이 음성을 발하고 예배에서 설교할 때는 힘이 나서 듣다가도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어느새 힘이 빠지고 뒷걸음질 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대세를 따르는 사람으로, 자기 주관도, 증거도 없으며 이상도 없다! 많은 사람이 이런데, 계속 그러다가 어느 날 큰 시련이 닥치면 너는 징벌 속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주관이다. 네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의심하지 않고,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이 실천하라고 한 것을 진심으로 지킨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당부를 기억하고,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하나님의 당부를 잊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자기 주관과 증거를 지키면서 계속 승리해 나간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기는 자로 온전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는 모든 시련에서 굳게 설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굳게 설 수 있다면, 네가 바로 이긴 자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다. 지금의 시련에서 굳게 서지 못하면 나중에는 더욱 서기 힘들다. 작은 고난만 받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여 빈털터리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도 흩어져 버린다. 이는 어리석은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실제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말씀할 때는 늘 겉으로 분주하고 열성적이지만,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니 그 역시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연단을 받을 때는 적극적인 면에서 진입해야 하고, 배워야 할 공과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자신의 내적 상태와 대조해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가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연단 속에서 진실하게 추구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 잘 깨달을 수 있다. 연단 가운데서 많은 일이 임하면 너는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에 원망하며 자신의 육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자기 안에 패괴 성품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1)

하나님의 말세 사역은 사람의 크나큰 믿음, 욥보다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없으면 겪어 나갈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어느 날 큰 시련이 닥쳐 이 교회에서 몇 사람이 나가고, 저 교회에서 몇 사람이 나가고, 며칠 전까지도 잘 추구하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일이 닥치면 너는 영문을 알 수 없을 것이요,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를 보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일도 전혀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굳게 설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로 사람에게 연단을 준다. 지금 네가 받는 고난은 아직 적다. 앞으로 큰 시련이 닥치면 어떤 곳에서는 교회 사람 전체가 나가고 너와 사이가 아주 좋던 사람까지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너는 그때도 굳게 설 수 있겠느냐? 지금은 네게 임한 시련이 작기에 간신히 굳게 설 수도 있다. 지금 단계에서는 말씀으로 연단하고 말씀으로 온전케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실제적인 일들이 너에게 연단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더 심각할 경우에는 하나님도 너에게 빨리 떠나라 하고 종교인들도 와서 너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길 텐데, 그래도 네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보기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시련이다. 아직은 시련이 작지만 어느 날 어떤 집에서는 부모가 믿지 않고, 또 어떤 집에서는 자녀가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도 너는 계속 나아갈 수 있겠느냐? 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시련은 더 커질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와 분량에 따라 사람에게 연단 사역을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단계에는 사람 수가 많아질 수 없으며 오히려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런 연단을 통해야만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 책망, 징계, 시련, 형벌, 저주 같은 것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어느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고 형제자매들이 모두 힘 있게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네 마음도 고무되겠지만, 어느 날 사람들이 모두 나가 버려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종교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네가 굳게 설 수 있겠느냐? 네 마음이 방해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많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연단한다. 사람의 눈에는 어떤 방식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본뜻은 방식이 아닌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연단해 전혀 불평하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도 끝날 것이다.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것은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고, 역사하지 않고 모습을 감추는 것은 더더욱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람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지를 더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할 때는 네가 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었을 때야말로 네가 구하고 모색해야 한다.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고, 훗날의 결말이 어떻든 종착지가 어떻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 성령이 사람 내면에 역사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람이 갈급한 마음으로 구하고 하나님이 한 일에 다른 마음을 품거나 의심하지 않으며 언제든 사람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어느 단계 역사든 사람은 크나큰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 한다. 그래야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매우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알 수 있다. 체험하지 않고 모색하지 않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반드시 체험 속에서 모색해야 한다. 체험 속에서만이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신묘막측함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2)

하나님은 네가 갖은 풍파를 겪게 하고 갖가지 굴곡과 고난을 겪게 하며, 또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게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이러한 것들을 겪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또한, 너 자신의 생각과 관념, 상상, 지식, 철리, 철학, 그리고 세상에서 배우거나 부모에게서 교육받은 것들이 잘못되었음을, 그것들은 네가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도록 인도할 수 없음을, 진리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수 없음을, 네가 걷는 길은 실패의 길임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네가 마지막에 이런 것들을 알게 한다. 이는 너에게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자, 체험하고 구원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에게는 패역과 패괴 성품이 있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고 이러한 좌절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시련, 징계, 심판과 형벌 등 다양한 방식의 구원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이런 의지가 있고 이 대가를 치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사실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고 그렇게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단지 사람이 너무도 패역하여 굽은 길을 걷고 이러한 고통을 받기를 원할 뿐이다. 사람은 이런 존재이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 갖가지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단련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 가운데서 다양한 경험과 교훈을 얻게 하고, 각종 사악한 사물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후에 사람은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고 인정하며,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임을,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가장 잘 대해 주고 사람을 가장 걱정하는 분임을 인정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어느 수준까지 단련되겠느냐? 네가 “저는 다양한 환경을 모두 체험했습니다. 어떤 환경도, 어떤 사람과 일, 사물도 저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누리게 하거나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고분고분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사람의 자리를 지키며 피조물의 지위와 본분을 지키고, 고분고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원망도 선택도 없이 창조주 앞에 나아가고, 개인의 요구나 욕망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단련된다. 이 수준에 이른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럼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에게 체험하도록 어떤 환경도 배치해 줄 필요가 없다. 너희는 어떤 길을 걷기를 원하느냐? 사람의 주관적인 바람은 모두 고통을 겪지 않고, 좌절과 실패, 어려움, 굴곡, 풍파 등의 일을 겪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본성과 본질, 사람의 패역, 사람의 사상 관점 안에 있는 것들은 너무 복잡해서 매일 네 안에서 방해하고 엇갈리며, 네 안에서 날뛴다. 네가 진리의 실제에 너무 조금 진입했고 깨달은 진리도 적어 패괴 성품의 본질과 관념, 상상 등을 이겨 낼 능력이 없다면, 그저 또 다른 방식, 즉 부단히 실패와 굴곡을 겪는 방식을 받아들여 그 과정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진흙탕 속에서 구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힘들어. 지긋지긋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런 실패는 겪고 싶지 않다고. 창조주 앞에 가서 고분고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어.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바른길이야.”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네가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는 그날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지 않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냐?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다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 어떤 환경을 배치하든, 네게 어떻게 하라고 하든, 그는 늘 가장 좋은 결과를 보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에 부딪혀 좌절과 실패를 겪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실패했으니 완전히 끝이라고, 사탄에게 사로잡혔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너라는 사람이 그 일로 재기 불능이 되고 풀이 죽는 이런 결과를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겠느냐? 네가 그 일에서 실패했을지라도 진리를 구하고 실패의 원인을 찾은 뒤, 실패한 사실을 받아들여 교훈을 얻고 기억하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옳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빴어. 나한테는 사탄의 패괴 성품과 패역이 있어.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인과 거리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어.’라고 깨닫기를 바란다. 네가 하나의 현상을 깨닫고, 한 가지 일의 진상을 깨달으며, 이번 좌절과 실패를 통해 분별을 갖추고 성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성장’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얻을 수 있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습을 원한다. 하나님은 일을 할 때 각별히 마음을 쓰며, 이는 전부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거늘, 사람은 늘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바늘구멍처럼 속이 좁고 도량이 없어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거나 은혜와 축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환경을 배치해 사람이 은혜나 좋은 것들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 사람에게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하고, 그 가운데서 뭔가를 얻게 한다. 예를 들어, 네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그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너는 듣지 않고 끝끝내 먹으려 한다. 그럼 하나님은 네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그 결과 너는 병이 난다. 체험을 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 사람이 체험한 좌절과 실패, 그리고 괴로움들은 무엇으로 변모하겠느냐? 한 측면에서 보면, 네가 하나님의 각별한 마음을 깨닫게 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고 확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지게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너는 이 실패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은 진리임을 깨닫게 되며, 진리 실행의 원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패를 겪는 것은 사람에게 좋은 일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며, 일종의 단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련이 너로 하여금 마지막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진리로 여기게 한다면, 그 단련과 좌절, 실패는 헛되이 체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바울의 본성과 본질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3)

너는 “앞으로 더 큰 환난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라는 지금 한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온전케 되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욥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 욥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너는 앞으로 닥칠 시련은 욥이 겪은 시련보다 더 크고, 게다가 장시간의 형벌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간단한 일이겠느냐? 너의 자질이 향상되지 않고, 깨닫는 능력이 형편없고, 아는 것이 거의 없다면 그때에 이르러 증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웃음거리나 노리개가 될 것이다. 네가 지금 이상을 지킬 수 없다면 근간이 통째로 무너져 무용지물로 전락할 것이다! 어느 단계의 길이든 모두 가기가 쉽지 않다. 이 일을 가볍게 보지 말라. 마지막 구간의 길을 도대체 어떻게 갈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고, 미리 준비하여라. 이는 앞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고, 모든 이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의 이런 깨달음을 허투루 흘리지 말라.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쓸데없는 말로 치부하지 말라. 언젠가는 쓰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나는 쓸모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진리를 갖출 때이며, 앞날을 위해 길을 닦아야 할 때이다. 네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예비하고,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굳건히 설 수 있을지에 대해 애태워야 한다. 식충이처럼 살지 말고 앞날의 길을 위해 잘 예비해야 한다! 최대한 모든 시간을 아껴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주어 깨닫게 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3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직접 보았다. 이렇게 사역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결여된 것이 너무나 많고,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생각한 방법대로 반드시 사람들이 다 분명하게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그다음에 증거하고 사용해야 한다면 너무 늦지 않겠느냐? 그러려면 내가 언제까지 너와 함께해야 하겠느냐? 내가 백발 때까지 너와 함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 큰 환난을 겪게 하여 사람의 내면에 참된 깨달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 사역의 절차이다. 오늘 교제하고 있는 이상을 온전히 깨닫고 진실한 분량을 갖추면 앞으로 어떤 고난을 겪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굳건히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마지막 단계의 사역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다 한 후에는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예전에 “성령은 모든 이에게 사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야 할 사역이 있다.”라고 했던 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에 각자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다. 환난을 겪는 와중에 누가 누구를 보살필 수 있겠느냐? 모두 자기만의 고통이 있을 것이며, 사람마다 분량이 달라 각자의 분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남편이 아내를 신경 쓸 겨를이 없고, 부모도 자녀를 챙겨 주지 못하며, 지금처럼 서로 챙겨 주고 붙들어 주는 것과 달리 누가 누구를 챙겨 줄 형편이 못 될 것이다. 그때는 각 부류의 사람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즉, 하나님이 목자를 치는 때가 되어 양떼가 흩어지는 것이다. 그리되면 너희는 참된 리더가 없으니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지금처럼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느냐? 앞으로 성령의 역사가 없는 사람은 모두가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팔고, 아내는 남편을 팔며, 자식은 부모를 팔고, 부모는 자식을 핍박할 것이므로, 사람의 속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 마지막 구간의 길을 올바르게 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너희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일에만 사로잡혀 있다. 이 단계의 사역을 잘 체험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마지막 구간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4)

많은 사람이 훗날의 종착지나 일시적인 누림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어떤 책망도 겪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온전케 되기 위한 것이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자 상을 받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자신의 직책을 이행하거나 본분을 완수하는 데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경지위(天經地緯)이자 사람의 천직이므로 살아가는 이상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이처럼, 사람마다 추구하는 목표는 제각각이지만 그 목적과 속셈은 모두 비슷하며, 또한 추구하는 많은 사람이 숭상하는 대상도 대부분 비슷하다.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또 수많은 신자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고 나아가 1, 2천 명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개인의 앞날이나 훗날의 아름다운 소망을 위해 추구했을 뿐,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경건한 신자들이 수도 없이 자기 올무에 걸려 죽었고, 이긴 자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적다. 사람은 패배한 원인이나 이긴 비결을 지금까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이런 비밀의 근원이 과연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들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심혈을 다해 추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이 가는 길은 앞사람들이 갔던 성공의 길이 아니라 실패의 길이다. 그러니 어떻게 추구하든 간에 그들이 가는 길은 모두 어둠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들이 얻는 것은 쓰라린 결과뿐 아니겠느냐? 과거에 성공한 사람을 따라 하는 자들도 최종적으로 복을 받을지 화를 입을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실패한 사람의 전철을 밟으며 추구하는 자들은 어떠하겠느냐? 더더욱 실패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그들이 가는 길이 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모두 헛된 길을 가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추구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결국 거기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 아무렇게나 추구한다고 득실이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5)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기본은 마음이 정직하며, 완전히 헌신하고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일생을 바쳐 참된 믿음을 얻음으로써 모든 진리를 얻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더욱이 그리스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주를 위해 본분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보고서도 피해 자기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늘 실패한 사람이 갔던 길을 따라 추구하기 때문에, 또 늘 하늘을 거역하기 때문에 항상 실패하고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며 자신의 올무에 빠진다.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을 너무나 숭상하는 데다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늘 무턱대고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대한 위인들과 인간 세상의 풍파를 겪은 사람들마저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벌 속에서 죽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비명에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결말, 즉 그들의 죽음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실패는 더더욱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진리는 인간 세상에서 온 것이지만, 인간 세상의 진리는 그리스도가 전한 것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진리를 공급할 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까지는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얻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본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일이며,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의 종착지나 성패를 모두 하나님께 떠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 아니라 피조물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과 직접 연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베드로, 이 두 사람의 추구와 종착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들의 결과만 알 뿐, 그들의 성공 비결이나 실패의 원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한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너희의 추구도 대부분 실패할 것이고, 설령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할지라도 베드로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추구하는 길이 옳은 길이라면 성공할 희망이 있지만, 네가 진리 추구를 위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너는 영영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또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6)

베드로는 온전케 된 사람이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겪은 후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마음이 생겼고 그런 다음에야 완전히 온전케 되었다. 그가 간 길은 온전케 되는 길이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처음부터 올바른 길을 갔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가짐도 옳았기 때문에 온전케 된 것이다. 그가 간 길은 앞사람이 간 적 없는 새 길이었다. 반면 바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길을 갔다. 다만 성령이 그를 쓰려고 했고 그의 은사와 모든 장점을 이용해 사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몇십 년 동안 사역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는 그저 성령께 쓰임 받은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쓰임 받은 것은 그의 인성이 예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은사 때문이었다. 바울이 예수를 위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그를 쳤기 때문이지, 그가 기꺼이 예수를 위해 사역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그런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이 깨우쳐 주고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한 사역은 그의 추구와 인성을 대변할 수 없다. 바울이 한 사역은 종의 사역을 뜻한다. 즉, 그가 행한 것은 사도의 사역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르다. 그도 일부 사역을 했고, 비록 바울만큼 큰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사역과는 달리 자신의 진입을 추구하면서 사역했다. 베드로가 한 사역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도의 자리에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역했다. 바울도 사역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그저 미래의 소망과 좋은 종착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역하면서 연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신을 위한 상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역에는 그 자신의 체험이 없었다. 그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역을 위한 사역을 했다. 그의 사역에는 거래만 있을 뿐 피조물의 본분이나 순종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옛 성품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그가 한 사역은 그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한 것일 뿐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바울은 온전케 되는 과정도, 책망을 받는 과정도 없이 바로 사역했다. 그의 마음가짐은 오로지 상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다. 베드로는 책망과 훈계와 연단을 거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사역 목적과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다. 베드로는 사역은 그리 많이 하지 않았지만 성품이 많이 변화되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진리와 참된 변화였지, 단순히 사역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많은 사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사역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였다. 설사 그가 협력했다 할지라도 그의 체험에서 온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사역이 많지 않은 이유는 단지 성령이 그에게서 그리 큰 역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전케 되는지의 여부는 사역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상을 받고자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며, 더 나아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했다. 겉모습도 다르고 본질도 다르다. 너는 사역의 양만 보고 그들 중에 누가 온전케 된 것인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기를 추구했으며,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손에 맡길 수 있었으며,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런 각오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대로 해냈다.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한 사역은 온전케 하는 것이었고, 바울에게 한 사역은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관점이나 그들의 본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둘 다 성령 역사가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러한 역사를 자신에게 적용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반면 바울은 성령 역사를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만 공급했을 뿐,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여러 해 체험하고도 변화가 미미해 거의 천연적인 모습 그대로였으며, 여전히 과거의 바울이었다. 단지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 ‘사역’하는 법을 배우고 인내를 배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옛 성품, 즉 승부욕이 강하고 이익만을 꾀하는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사역하고도 자신의 패괴 성품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옛 성품도 벗어 버리지 못했다. 이 옛 성품들은 그의 사역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저 사역의 경험만 좀 늘었을 뿐이었다. 이 약간의 경험으로는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고, 생존에 대한 그의 관점과 그가 추구하는 의의를 바꿀 수도 없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오랫동안 사역했고, 예수를 핍박하던 때의 행위를 다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속 인식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바치기 위해 사역한 것이 아니라 훗날의 종착지를 위해 마지못해 사역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고의로 대적한 패역자였으며, 원래부터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역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했고, 그저 자신의 성격대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서 성령의 뜻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인 것이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 성령 역사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그가 한 사역이나 그가 얼마만큼 바쳤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를 아는지, 진리를 실행했는지, 추구하는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7)

베드로도 예수를 따르면서 타고난 성품을 드러낸 적은 있었지만, 본성을 보자면 그는 처음부터 성령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께 순수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리에 순종했다. 베드로는 비록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를 시험했지만, 이런 약간의 인성의 연약함은 그의 본성과 무관하며, 훗날 그가 추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또한 그의 시험이 적그리스도의 행위라고 증명할 수도 없다. 인성의 보편적인 연약함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인데, 너는 베드로만 예외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냐?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는 것은 그가 어리석은 일을 몇 번 했기 때문 아니더냐? 반면 사람들이 바울을 그렇게 숭상하는 것은 바울이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서신을 썼기 때문 아니더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작은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단 말이냐? 베드로가 겪은 수년간의 고통스러운 체험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참된 체험이 없음을 증명할 수는 없고, 베드로가 온전케 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측량할 수 있겠느냐?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예수가 직접 선택해 수록한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이 편찬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사람의 뜻에 따라 선택된 것 아니겠느냐? 게다가 서신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결말이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베드로와 바울을 평가하게 되었다. 또 바울은 사역을 아주 많이 하고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다. 사람은 모두 외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더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바울은 몇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숭상받는 대상이었는데, 누가 감히 그의 사역을 가볍게 부정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그저 그물을 던져 고기 잡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바울처럼 큰 ‘기여’를 할 수 있었겠느냐? 기여한 것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바울이 먼저 상을 받아야 하고, 베드로보다 바울이 더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은 바울을 대할 때 단지 그의 은사를 빌려 사역했고, 베드로를 대할 때는 온전케 하고자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가 그들에게 미리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온전케 하거나 사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외적으로 기여한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과 사람이 원래부터 추구하는 길, 그리고 마음가짐을 본다. 사람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모두 사람의 관념과 안목에 따라 판단한다. 하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결말은 사람의 외적인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처음부터 성공의 길을 가고 올바른 관점으로 추구한다면 너는 베드로처럼 될 것이고, 반대로 실패의 길을 간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너의 종착지나 성패는 네가 희생한 것이나 치른 대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길이 옳은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베드로와 바울, 이 두 사람은 본질이 다르고 추구한 목표도 다르다. 이런 것들을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온전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보지만,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전혀 모르고 사람 내면의 본질을 보지 못하며 내면의 실제 분량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의 성패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바울을 숭상하지, 베드로를 숭상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쓰임 받아 공개적으로 사역한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바울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베드로의 체험은 사람들이 볼 수 없고 그가 추구한 것은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베드로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8)

베드로는 책망과 연단을 겪어 온전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겠나이다. 제가 행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만을 원하나이다. 설사 형벌과 심판을 받을지라도 기꺼이 원하나이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사역과 말, 모든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체험할수록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졌다. 반면 바울은 표면적으로만 사역했다. 비록 그도 공을 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사역을 잘해서 상을 받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사역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마음속 진실한 사랑과 현실적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울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사역하는 것에 치중하고 외적인 사역과 기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상인의 체험에 없는 도리적인 것을 중시했다. 그는 깊은 곳의 변화와 진실한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베드로의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과 참된 인식을 갖기 위함이었으며,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실제적으로 살아 내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사역은 예수에게 받은 사명을 위한 것이자 자신이 얻고자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자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는 무관했다. 그의 사역은 전적으로 형벌과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순결한 사랑을 추구했고,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추구했다.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알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순결했다. 여러 해 연단을 겪으며 예수와 생명에 대한 그의 인식도 높아졌다. 그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자발적인 사랑이었다. 그는 보수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 반면 바울은 오랫동안 사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다. 그가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마지막에 월계관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최고의 면류관이지 가장 순결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추구했으며,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에 붙들려 어쩔 수 없이 추구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추구는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임을 증명할 수 없다. 베드로야말로 본분을 이행한,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기여하면 상을 받아야 하고 또 크게 기여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의 관점을 보면 그 본질은 거래의 성질을 띤 것이지,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 즉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면 사람에게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선을 넘어 하나님께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종착지는 그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판정되었다. 또 그들이 얼마나 많이 사역했는지,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지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추구한 것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이 가장 옳은 길이며, 옛 성품을 변화시켜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인 것이다. 성공의 길이란 피조물이 원래의 본분과 모습을 되찾는 길, 즉 회복의 길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모든 사역의 근본 취지이다. 사람의 추구에 여전히 자신의 사치스러운 요구와 불합리한 소망이 섞여 있고 성품 변화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회복의 사역과 서로 어긋나며 틀림없이 성령이 행한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구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추구가 또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79)

바울이 한 사역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가 마음속 깊이 얼마나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요소가 얼마나 있는지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행한 사역만 보고 그가 확실히 성령께 쓰임 받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훌륭하고 그가 행한 사역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단지 개인의 체험만을 중시했다. 가끔 사역을 해도 사람을 많이 얻지 못했으며, 몇 통 안 되는 서신도 이름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가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바울은 날마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고, 사역이 있기만 하면 가서 했다. 그는 그렇게 하면 면류관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역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추구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흡족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하면 통회했으며, 그 후에 적합한 길을 찾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 그는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려고 했으며, 자신의 옛 성품을 조금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진리에 깊이 들어가려고 했다. 반면, 바울은 외적인 명예와 지위,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추구했을 뿐 생명 진입에서 깊이를 더하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실제가 아니라 도리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했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그를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 겨우 그 정도 사역했을 뿐이고 교회에 기여한 바도 별로 크지 않은데, 하나님은 왜 그를 온전케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간증이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어떠했느냐? 바울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너는 아느냐? 바울이 사역을 한 것은 무엇을 위함이었느냐? 베드로가 사역을 한 것은 또 무엇을 위함이었느냐? 베드로가 비록 사역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너는 아느냐? 바울이 한 사역은 교회에 공급하고 교회를 붙들어 주는 것이었으며, 베드로가 체험한 것은 생명 성품의 변화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네가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고 누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고, 한 사람은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성품의 변화가 있었고, 한 사람은 성품의 변화가 없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섬긴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고, 한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숭상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형상을 가졌다. 한 사람은 성결해지기를 추구했고, 한 사람은 성결해지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더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순결한 사랑은 전혀 없었다. 한 사람은 진정한 인성이 있었고, 한 사람은 진정한 인성이 없었다. 한 사람은 피조물의 이성이 있었고, 한 사람은 피조물의 이성이 없었다. 이것이 바울과 베드로의 본질적인 차이다. 베드로가 간 길은 성공의 길, 즉 정상 인성을 회복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베드로는 성공한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바울이 간 길은 실패의 길이었다. 바울은 겉으로만 순종하고 헌신할 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진리가 없는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자 했으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연단과 환난, 궁핍한 생활 역시 받아들였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 것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 아니겠느냐? 형벌이든 심판이든 환난이든 너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이자, 사랑 안에 있는 순결한 요소이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이다. 너는 진리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창조주를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할뿐더러 창조주께 순종하지도 않고 창조주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0)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교회에 큰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며, 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의 서신 13권은 은혜시대를 2천 년 동안 유지했고요. 4복음서를 제외하면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바울의 13권 서신인데, 누가 그와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쓴 계시록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지만, 바울이 쓴 서신은 모두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그는 교회에 유익한 사역을 했지요. 다른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사역을 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기여도를 따지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평가할 때는 사람의 본성을 기준으로 한다. 바울은 생명을 추구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결코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세부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면과 연약한 면, 피조물의 패괴 성품에 대해 모두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성품의 변화를 위한 실행의 길도 있었다. 그는 이론만 있고 실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변화한 사람은 구원받은 새사람이자 진리를 제대로 추구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천연적인 모습 그대로인 옛 사람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자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큰 사역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너 자신의 추구와 비교해 보면, 네가 베드로 같은 사람인지 바울 같은 사람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네가 추구함에 있어 여전히 진리가 없고, 지금까지도 바울처럼 교만하고 거칠게 굴며 허풍을 늘어놓는다면 너는 패배한 인간쓰레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네가 베드로처럼 추구하고자 한다면, 즉 베드로처럼 실행하고 진실하게 변화하고자 하며, 교만하게도 방자하게도 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너는 이길 수 있는 피조물일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본질과 패괴를 알지 못했고 자신의 패역은 더욱 알지 못했다. 그는 예전에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비열한 행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크게 통회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조금 해명했을 뿐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온전히 굽히지 않았다. 비록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엎드리기는 했지만, 자신을 마음속 깊이 성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역하는 것에만 만족했다. 바울은 자신을 알아 가는 것과 자신의 옛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입에만 달고 있는 진리로 만족했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것에 만족했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더 이상 핍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난날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그저 훗날의 면류관과 일시적인 사역이고, 풍성한 은혜였을 뿐, 충분한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지난날 깨닫지 못한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인식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형벌과 심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사역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외적인 행위에만 치중하고 변화가 아닌 인식에만 힘썼다. 그가 사역을 한 것은 전적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가 그에게 나타난 결과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의지를 가졌던 것이 아니고, 옛 성품이 책망받은 후에 사역을 한 것도 아니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그의 옛 성품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그가 지난날에 지은 죄를 속량하지 못하고 그저 당시의 교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이렇게 옛 성품이 고쳐지지 않은 사람, 즉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 더욱이 진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예수께 열납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랑과 경외가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진리를 찾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성육신의 비밀을 찾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저 궤변에 능하고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나 진리가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굽히기 싫어한 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과 상반되거나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 혹은 진리를 질투했으며, 위대한 형상을 지니고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재들을 좋아했다. 그는 진리만을 사랑하고 참도를 찾는 가난한 사람들과 왕래하기를 싫어했고, 도리만 말하고 지식이 풍부한 종교계 고위층 인사들과 접촉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좋아했던 것은 성령의 새 역사가 아니었고, 그가 중요시했던 것도 성령의 새 역사 동향이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진리보다 높은 규례와 도리를 좋아했다. 그의 선천적인 본질과 그가 추구한 모든 것을 놓고 보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전혀 없고, 하나님 집의 충실한 종이라고 불릴 자격은 더더욱 없다. 그에게는 가식적인 것이 너무 많고 패역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의 종이라고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천국의 문에 들어설 자격이 전혀 없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것은 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한 적이 있지만 가식적이고 불의를 행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를 악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불의를 행한 자라고 하면 딱 맞을 것이다. 그가 많은 사역을 했지만 그 사역의 양을 놓고 논해서는 안 되고, 오직 그가 한 사역의 질과 본질을 두고 논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의 경위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사역을 잘하고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나는 주님의 부담을 생각한다. 아무도 나만큼 주님의 부담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도 나만큼 깊이 회개하지 못했다. 나는 큰 빛 비춤을 받았고, 큰 빛을 보았으니 누구보다도 깊이 회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바울의 생각이었다. 그는 해야 할 사역을 끝낸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싸워야 할 싸움을 다 마치고 달려야 할 길을 마쳤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그가 싸우고 사역하고 달려온 것은 전적으로 의의 면류관을 위한 것이었지, 적극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사역을 대충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역은 그저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고 더 이상 양심에 참소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루빨리 사역을 끝내고, 그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싸워야 할 싸움을 다 마쳐 자신이 소망하는 의의 면류관을 빨리 얻게 되기만을 바랐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체험과 참된 인식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사역을 끝내 예수를 만났을 때 사역한 것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사역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사역으로 거래함으로써 훗날의 면류관과 맞바꾸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진리도 하나님도 아닌 오로지 면류관이었다. 이런 것을 어찌 제대로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의 속셈, 그가 한 사역, 그가 치른 대가, 그의 모든 희생은 자신의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사사로운 소망에 따라 사역했다. 그가 모든 사역에서 치른 대가는 기꺼이 원해서 치른 것이 아니라 그저 거래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그렇게 치른 대가가 또 몇 푼의 가치가 있겠느냐? 누가 또 그 깨끗하지 못한 대가를 인정할 수 있겠느냐? 누가 그런 대가에 흥미를 갖겠느냐? 그의 사역에는 내일에 대한 몽상과 아름다운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사람의 성품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길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는 가식적인 자비가 너무나 많았고, 그의 사역은 생명을 공급한 것이 아니라 고상한 척하며 거래를 한 것이었다. 그런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을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는 길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1)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설사 고통받고 화를 입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추구다. 바울이 추구한 것에는 자신의 육체, 자신의 관념, 자신의 타산과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 전혀 아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따르고자 했다. 비록 베드로가 한 사역이 크지는 않지만, 그가 추구한 마음가짐과 걸어온 길은 옳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진리의 도를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사역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모두 따를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다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떤 환난과 연단도 모두 겪을 수 있어야 하고, 연약하지만 마음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명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추구하는 관점이 올바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네가 많은 사역을 하고 다른 사람도 너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정작 너 자신은 변화가 없고 조금의 간증도, 참된 체험도 없으며, 죽기 전까지도 네가 하는 일에 간증이 전혀 없다면, 이런 사람이 변화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겠느냐? 성령이 당시에는 너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때 사용하는 것은 네가 사역할 수 있는 부분이며, 사용할 수 없는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네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쓰임 받는 과정에서 점차 온전케 될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네가 얻어지는 것까지 성령이 모두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 자신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추구하는 관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 자신의 문제로, 이는 너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체험이 가장 중요하고 개인의 진입이 가장 관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으니 최소한 제가 천국에 들어가 생명의 열매를 먹게는 해 주셔야죠.”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에는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오랫동안 많은 사역을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더럽기 짝이 없다면, 네가 내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그 어떤 이에게도 특혜를 준 적이 없다. 이것은 아무도 깰 수 없는 하늘의 규칙이다! 너는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내가 온전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자신의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원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의 생명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상만 받으려고 한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482)

베드로와 바울이 지닌 본질의 차이를 통해, 너는 마땅히 생명을 추구하지 않으면 모두 헛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해야 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상, 너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고, 개인적인 선택과 요구가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야 한다. 너는 지음 받은 사람인 이상 너를 지은 창조주께 순종해야 한다. 너는 원래부터 너 자신을 주관할 수 없고, 너의 운명을 지배할 본능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이상 성결해지고 변화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너는 피조물인 이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분수를 알아야 하며 자신의 본분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고 교조적인 것으로 너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경로이자,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의 본질을 비교해 보면 네가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간 길 중 하나는 온전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도태되는 길이다. 그들 두 사람은 두 갈래 길을 대표한다. 비록 그 두 사람 모두 성령 역사가 있었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었으며 예수로부터 사명을 받았지만 각자 맺은 열매는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참된 성과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참된 성과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의 본질과 행한 사역, 겉으로 드러낸 것과 마지막 결말을 통해, 너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그 두 사람이 간 길은 가장 분명한 두 갈래 길이다. 바울과 베드로, 이 두 사람은 각각 두 갈래 길을 대표하는 가장 좋은 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두 사람을 전형적인 예로 삼은 것이다. 바울의 체험에서 핵심은 무엇이냐? 그는 왜 얻지 못했느냐? 베드로의 체험에서 핵심은 무엇이냐? 그는 어떻게 체험해서 온전케 되었느냐? 이 두 사람이 각각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비교해 보면,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이 온전케 되고 어떤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없는지, 온전케 되는 사람의 성품은 어떠하고 온전케 될 수 없는 사람의 성품은 또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실질적인 문제는 베드로와 바울의 체험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 순종하게 한다. 그는 만유를 주관하여 만유가 모두 자신의 수중에 있게 한다. 동물, 식물, 인류, 산천, 호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다. 하늘의 만물이든 땅의 만물이든 모두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올 것이며, 선택의 여지 없이 모두 그의 지배에 순종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여 만물이 다 질서를 갖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나뉘며 각각 자기 위치에 있게 한다. 아무리 큰 것도 하나님을 넘어설 수 없으며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를 위해 이바지한다. 어떤 것도 감히 하나님께 반역하거나 다른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사람도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든 만물의 관리자든 관계없이, 또 사람이 만물 가운데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작디작은 사람일 뿐이다. 그저 작디작은 사람이고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 피조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소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옳은 추구 방식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실행하는 것이 진리이며 얻은 것이 성품의 변화라면, 너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네가 추구하는 것이 육적인 복이고, 실행하는 것이 자신의 관념 속 진리이며, 성품에 어떤 변화도 없고 육신의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은 채 여전히 막연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면, 네가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것은 네가 실패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케 될지, 도태될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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