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 알아 가기[1]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1)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안다는 것은 주로 말세에 성육신한 하나님의 주요 직분이 무엇인지, 그가 땅에 와서 행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하나님이 땅에 와서(말세를 가리킴) 본보기를 제시한 후 떠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본보기는 어떻게 제시하느냐? 바로 말씀으로 제시한다. 즉, 각지에서 사역하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세에 하는 사역이다. 말씀만 함으로써 땅이 말씀의 세계가 되게 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을 받고 깨우침을 받아 영의 눈을 뜨고 이상(異象)을 환히 알게 한다. 말세에 성육신으로 땅에 온 하나님은 주로 말씀을 한다. 예수가 왔을 때에는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 율법시대를 끝내고 낡은 것들을 모두 폐하였다. 예수는 와서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열었다. 말세에는 성육신한 하나님이 와서 은혜시대를 끝냈다. 그는 와서 주로 말씀을 하며,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말씀으로 사람에게 빛 비춤과 깨우침을 줘 사람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 버린다. 예수가 왔을 때에는 이 단계 사역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와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러할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예수가 와서 행한 사역은 사람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하나님의 형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세에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한편으로는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막연한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 사람 마음속에 더 이상 막연한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과 실제적인 사역을 통해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 가운데서 아주 실제적이고 정상적으로 사역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실제를 알게 하고, 막연한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이 한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모든 것을 이룬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세에 이루려는 사역이다.
너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역은 초자연적이지 않으니 관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성육신 하나님이 이번에 와서 주로 어떤 사역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이번에 와서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이적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온 것도 아니고, 사람이 속량받게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예수가 이미 그 단계 사역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중복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와서 은혜시대를 끝내는 것은 은혜시대의 모든 관행을 폐하는 것이다. 실제 하나님은 와서 주로 그의 실제를 나타낸다. 예수는 와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주로 권능을 나타내고, 이적과 기사를 행했으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또 약간의 예언으로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게 했고 그가 바로 하나님이고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사역을 완성했다. 지금의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고,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지도 않는다. 예수가 왔을 때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일부를 대변했으며, 하나님이 이번에 온 것은 그가 이번 단계에 해야 할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중복 사역을 하지 않고, 그는 늘 새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보는 것은 실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일 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2)
하나님은 말세에 성육신하여 주로 말씀을 통해 사람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모두 설명해 주고, 사람이 진입해야 할 것을 알려 주며,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 기묘함을 모두 나타내 보여 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한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고지상함을 보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을 보았으며, 하나님은 지고하지만 가장 작은 자로 자신을 낮추고 감출 수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은 영의 위치에서 직접 한 것이고, 어떤 말씀은 사람의 위치에서 직접 한 것이며, 또 어떤 말씀은 제3자의 위치에서 한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매우 다양하며, 모두 말씀을 통해 사람이 깨닫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세에 행하는 사역은 정상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이 무리 사람들이 받는 시련이 가장 크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시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 속에 빠져드는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 시대에는 사람에게 관념도 시련도 없었다. 예수가 행한 많은 일들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했기에 사람은 모두 그를 따랐고, 그에 대한 관념도 없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받는 시련이 가장 크기에 이들을 모두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하는데, 그 환난이 바로 이 환난을 가리킨다. 오늘날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믿음과 사랑, 고난받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모두 성과가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말세에 성육신한 하나님은 바로 사람의 본성과 본질, 그리고 행위와 태도에 근거해 말씀하고, 현재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것에 근거해 말씀한다. 이는 실제적이면서도 정상적이다. 하나님은 앞날의 일을 얘기하지 않고 지난날의 일도 돌아보지 않으며, 오늘날 진입하고 실행하며 깨달아야 할 것만 말씀한다. 오늘날 만약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권능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칭 돌아온 예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악령이 가장한 것이고, 악령이 예수를 모방하여 행한 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중복 사역을 하지 않는다. 예수의 그 단계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기에 그 뒤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사역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에서 메시야가 오리라고 예언했지만 결국에는 예수가 온 것처럼 말이다. 만약 메시야가 한 명 더 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가 한 번 왔었는데 이번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 시대에 이름은 하나뿐이며, 모든 이름은 다 시대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나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항상 예수와 같아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에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예수가 행한 것과 똑같이 말세에도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중복된다. 그러면 예수의 사역은 의의도, 가치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시대에 한 단계 사역만 행한다.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마칠 때마다 악령이 곧이어 모방하고, 사탄이 하나님을 뒤따라가면 하나님은 다시 방식을 바꾼다. 너희는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마치면 악령이 이를 모방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이 무엇 때문에 예수의 사역과 같지 않겠느냐? 오늘날 하나님은 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며, 병을 고치지도 않겠느냐? 만약 예수가 율법시대와 똑같은 사역을 했다면, 그가 은혜시대의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 십자가 사역을 완성할 수 있었겠느냐? 예수가 율법시대처럼 성전에 들어가고 안식일을 지켰다면, 그 누구도 그를 핍박하지 않고 옹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겠느냐? 구속 사역을 완성할 수 있었겠느냐? 말세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여전히 예수처럼 이적과 기사를 나타낸다면, 그것이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 오직 말세에 다른 부분의 사역을 행하여 그의 경륜 중 일부를 대표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앎이 깊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3)
하나님은 말세에 와서 주로 말씀을 하는데, 영의 위치에서 말하고, 사람의 위치에서 말하고, 제3자의 위치에서도 말하는 등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씀한다. 일정한 기간마다 말씀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며, 말씀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관념을 돌려세우고, 사람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하나님의 형상을 없앤다. 하나님은 주로 이 사역을 한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오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을 행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베풀어 준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여 사람 관념 속에 있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실제적이고 정상적임을 알게 하고, 사람 마음속의 예수 형상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형상이 사람을 점유하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내면에서 오래되면 우상에 속하게 된다. 예수가 와서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적과 기사를 어느 정도 행하고, 약간의 말씀을 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하나님의 일부를 대변했을 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을 대표하여 일부 사역만 행했다. 하나님은 너무나 기묘하고 위대하여 측량할 수 없는 데다가 하나님은 한 시대에 일부 사역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주로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공급하고, 사람의 본성, 본질과 패괴 성품을 폭로하며, 사람의 종교 관념, 봉건적인 사상과 낡은 사상을 없애는 것이다. 사람의 지식, 문화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말씀으로 드러내야 정결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적과 기사가 아닌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한다. 말씀으로 사람을 드러내고, 심판하며, 형벌하고, 온전케 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한다. 율법시대에 여호와는 말씀으로 모세를 인도하여 출애굽 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간의 말씀을 했으며, 그때 하나님의 행사를 일부 나타냈다. 사람의 자질은 제한적이어서 어떻게 해도 전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고 사역했던 것이다. 은혜시대에 사람들은 또 하나님 행사의 일부를 보았다. 예수는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육신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하나님이 어디까지 보여 주면 사람은 거기까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그 정도 차원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속 사역하여 사람의 앎을 더욱 깊게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세에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실제로 너의 종교 관념을 대체한다. 하나님은 말세에 성육신하여 주로 “말씀이 육신 되고, 말씀이 육신으로 오며,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다”라는 말을 이룬다. 이 부분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굳게 설 수 없다. 하나님은 말세에 주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이 사역을 이루는데, 이것은 하나님 경륜의 일부 사역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 결국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규정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말세에 이 사역을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앎이 어느 정도에서 그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든가, 소돔을 멸할 수 있다든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베드로에게 나타났다든가 이런 것들만 알 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해야만 이러한 앎을 얘기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많이 체험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어, 하나님을 자신의 관념으로 규정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유일하면서도 정확한 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4)
지금 너희는 하나님이 말세에 주로 ‘말씀이 육신 된’ 이 사실을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에서 실제로 사역하여 사람이 그를 알게 하고, 접하게 하며, 그의 실제 행사를 보게 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며, 이는 시대별로 구분된다는 것도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이로부터 너는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역과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사역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단계 사역에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지만 예수 시대에는 이적과 기사를 어느 정도 나타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사역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그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없다거나,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논리가 아니냐?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있지만 사역하는 시대가 다르기에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시대와 사역 절차가 다르기에 하나님이 나타내는 행사 역시 다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적과 기사나 권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 시대에 행하는 실제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생기며, 그러한 앎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행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번 단계 사역에서 주로 말씀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적과 기사를 보려고 기다리지 말라. 볼 수가 없다! 네가 은혜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은혜시대에 태어났다면 이적과 기사를 볼 수 있었겠지만, 말세에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너는 말세에 초자연적인 예수를 보려고 하지 말라. 너는 단지 정상인과 똑같은 성육신한 실제 하나님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각기 다른 행사를 나타내고, 한 시대에 하나님 행사의 일부를 나타내며, 각 시대의 사역은 하나님 성품의 일부와 하나님 행사의 일부만 대변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그가 나타내는 행사 또한 달라지지만,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하고, 더욱 견실하고 진실하게 믿게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행사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너무나 기묘하고 위대하며 전능하여 측량할 수 없기에 그를 믿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그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면 너의 관점은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악령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사탄의 형상을 혼동한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날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행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많은 사역과 말씀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행사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것이지, 그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 나서야 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앎으로써 그가 어떻게 사역하고 어떤 지혜로운 방식을 쓰며,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될 때, 너는 비로소 하나님의 실제를 깨닫고 그의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앎으로써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를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을 앎으로써 생명이 성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5)
네가 어떻게 추구하든, 먼저 하나님이 지금 행하고 있는 사역을 이해해야 하고, 그 사역의 의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말세에 어떤 사역을 가져왔는지, 어떤 성품을 지녔고 사람에게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깨닫고 알아야 한다. 그가 육신으로 와서 행하는 사역을 전혀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뜻을 찾을 것이며, 또 어떻게 그의 지기가 될 수 있겠느냐? 사실, 하나님의 지기가 되는 것은 복잡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다. 명확히 알고 실행에 옮긴다면 복잡하지 않겠지만, 명확히 알지 못하면 무척 어렵고, 또한 막연한 것만 추구하기 쉽다.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서야 할 입장도 없고 자신이 지켜야 할 진리도 모른다면, 토대가 없어 똑바로 서기가 어렵다. 지금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 애증이 분명치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들은 모두 서기 어렵다. 하나님을 믿을 때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이 육신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행한 사역과 하나님이 말씀한 원칙을 아는 것이다. 또한 대세를 따르지 말고, 자신이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에 원칙이 있어야 하며,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깨우쳐 준 원래의 것들을 지켜야 한다. 이는 너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은 좌로 치우치고 내일은 우로 치우치다가 결국 실제적인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면 너의 생명에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늘 남들을 따라 하기 좋아한다. 남들이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자기도 성령의 역사라고 따라 말하고, 남들이 그것을 악령의 역사라고 하면 자신도 덩달아 의심하거나 악령의 역사라고 한다. 언제나 부화뇌동하고, 조금도 분별할 줄 모르며, 주관이 전혀 없다. 이들은 줏대도 없고 분별력도 없는 자들로, 무지렁이나 다름없다! 너는 언제나 남들이 말하는 대로 말한다. 지금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만, 어느 날 또 누군가가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다 사람이 한 것이다.”라고 하면, 너 역시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말하는 그대로 말할지도 모른다. 실은 성령의 역사인데 사람의 사역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냐? 이는 분별이 없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것이 아니냐? 어느 날, 또 어떤 멍청한 자가 뜬금없이 그것을 악령의 역사라고 말하면, 너는 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의 말에 구애받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너를 방해할 때마다 너는 입장을 굳건히 지키지 못하는데, 이는 너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열심만 있다고 해서 온전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에게 체험과 인식이 필요하다. 일할 때도 원칙이 있어야 하며, 성령의 역사를 얻어야 한다. 너에게 체험이 있으면 많은 일을 분별할 수 있고, 선과 악, 정의와 사악, 육에 속하는 것과 진리에 속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것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의 실제 분량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6)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너 자신에게 추구의 기준과 목표가 있어야 하고, 참도를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또한 과연 그것이 참도인지, 하나님의 사역인지를 가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참도를 구하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그 도에 성령 역사가 있는지, 그 말씀에 진리의 선포가 있는지, 누구를 증거하였는지, 너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참도와 거짓 도를 분별하려면 몇 가지 방면의 상식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은 사실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믿는 이유도 그 육신이 하나님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믿는 것은 역시 영을 믿는 것이다. 영과 육신이 서로 구별되긴 하지만, 그 육신은 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믿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그러므로 참도를 구별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으로는 그 도에 진리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진리란 정상적인 인성이 지닌 생명 성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요구한 것, 즉 모든 정상적인 인성(이성, 식견, 지혜, 사람됨의 상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도를 통해 사람이 정상적인 인성 생활로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말씀한 진리가 정상적인 인성의 실제에 따라 요구한 것인지, 그 진리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지, 가장 시기적절한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진리가 있다면, 사람을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체험으로 이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갈수록 사람은 정상이 되고, 사람의 인성과 이성이 온전해지며, 사람의 육체적 생활과 영 생활이 질서를 갖추고, 사람의 희로애락이 정상이 된다. 이것들이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할 내용 중 한 가지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는지, 그리고 그런 사역과 진리의 체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갈수록 가깝게 하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으로 참도인지의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도가 초자연적이 아닌 현실적인 것인지,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이 몇 가지를 갖춘다면 그 도가 참도인지 확신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이 말의 의미는 너희가 이후에 체험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를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 또 새 시대의 사역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도 아니라 너희에게 오늘날의 도가 참도임을 확신시켜 주려는 것이다. 너희가 오늘날의 사역을 꿰뚫어 보지 못하여 반신반의하지 않도록 말이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확신하였음에도 여전히 흐리멍덩하게 따르고 있다. 그런 확신은 원칙이 없는 것이고, 이런 자들은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아주 열성적으로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확신은 3할에 불과하고 의심은 5할이나 된다. 이것이 바로 토대가 없는 모습이다. 너희는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토대가 지나치게 얕은 탓에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나님은 반복되는 사역, 비현실적인 사역은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에게 파격적인 요구도 하지 않고, 사람의 이성 범위를 벗어나는 사역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의 정상적인 이성의 범위 내에 있고, 정상 인성의 이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의 정상적 필요에 따라 사역한다. 성령의 사역이라면 사람은 물론 인성도 갈수록 정상이 되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의 성품과 사람의 본질에 대해 갈수록 인식이 생기고, 갈수록 진리를 사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명은 갈수록 더 성장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갈수록 더 변화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는 본래의 뜻이다. 만일 그 도가 사람의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의 성품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더욱이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하지 못하며, 심지어 인성이 점점 나빠지고 이성도 점점 비정상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참도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거나 낡은 도일 것이다. 어쨌든 성령의 현실 역사는 아니다. 너희는 그토록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어 왔지만, 참도와 거짓 도를 분별하는 원칙과 참도를 찾는 원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이 일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에 맞장구만 친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참도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이런 자들이 또 어떻게 참도를 찾을 수 있겠느냐? 네가 중요한 몇 가지만 파악한다면, 어쨌든 미혹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분별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이며, 사람이 체험하는 과정에 갖춰야 할 것이다. 사람이 여태껏 따르면서도 조금도 분별할 줄 모르고, 인성과 이성이 여전히 제자리라면, 이는 사람이 너무 어리석은 것이고, 그 추구가 틀리고 잘못된 것이다. 너는 여태껏 추구하였지만 조금도 분별할 줄 모른다. 네가 참도를 찾았다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너는 얻었느냐? 분별이 조금이라도 향상되었느냐? 참도의 본질은 무엇이냐? 너는 참도 안에 있으면서도 참도를 얻지 못했고, 진리도 전혀 얻지 못했다. 다시 말해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패괴 성품의 변화가 없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추구한다면 결국 도태될 것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따른 이상 더는 의심하지 말고 자신이 가는 길이 바른길임을 확신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사소한 일 때문에 의심하고, 사소한 일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는 자, 흐리멍덩하게 따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지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도 없다. 복받기만을 바라고 막연한 것만 추구하는 자들에게 권고하겠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하루빨리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라!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7)
6천 년의 전체 사역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화해 왔다. 사역의 변화는 전 세계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온 인류의 발전 양상에 따라 이뤄지며, 그렇기에 경영 사역도 점차 바뀌는 것이지, 창세가 시작될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은 아니다. 창세 이전 또는 창세 직후에 여호와가 제1단계는 율법 사역, 제2단계는 은혜 사역, 제3단계는 정복 사역을 하고, 모압의 후손 중 일부에게 우선적으로 사역함으로써 우주 전체를 정복하겠다고 계획한 것이 아니다. 그는 창세 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모압 이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롯 전에는 더더욱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역은 진행 상황을 보아 가며 하는 것이다. 6천 년 경영 사역은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 창세 전에 ‘인류 발전 연표’ 같은 계획을 미리 세워 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역할 때 그의 어떠함을 직접 나타내지, 고심해서 계획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러 선지자들이 많은 예언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속 치밀하게 계획하며 사역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언 역시 현실의 사역에 따라 하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사역이다. 그는 시대의 발전과 사물의 변화에 따라 가장 현실적인 사역을 하며, 증상에 따라 약을 쓰는 식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사역한다. 그는 각 단계의 사역에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충분히 나타낸다. 그는 해당 시대의 사역에 따라 그의 지혜와 권병을 충분히 나타내기에 그 시대에 그가 되찾아 온 사람들은 다 그의 모든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는 각 시대에 행하는 사역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해야 할 사역을 하며,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정도에 맞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한 예로, 태초에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를 만든 것은 그들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증거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었고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둘 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는 그들에게 다른 사역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고 가죽으로 옷을 지어 몸을 가려 주었다. 그 후 아담에게 말씀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또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 후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동산 밖에서 오늘날의 인류처럼 살게 되었다. 태초에 그는 인류를 만들 때, 그가 만든 인류가 뱀에게 유혹당하게 한 뒤에 사람과 뱀을 저주하기로 미리 계획해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계획이 없었다. 그저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자신이 만든 만물 가운데서 새로운 사역을 했을 뿐이다. 여호와가 땅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 사역을 한 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발전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여호와는 또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그것은 그가 만든 인류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후 죄악이 아주 커졌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맞춰 여호와는 사람들 가운데서 노아 일가를 택해 살아남게 하고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사역을 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줄곧 이렇게 발전하면서 점점 더 깊이 패괴되었고, 인류의 발전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다시 말해, 인류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태초부터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이 행한 사역의 실상은 이러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각기 부류대로 나뉘는 것은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을 어떤 한 부류에 속하도록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류가 발전하면서 점차 부류가 생긴 것이다. 마지막에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인류 가운데서 하는 사역 중 어느 하나도 창세 때 미리 예비해 놓은 것은 없다.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한 단계 한 단계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한 것이다. 한 예로, 여호와 하나님이 뱀을 만든 것은 여자를 유혹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전적으로 계획한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정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일로 인해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고 다시는 인류를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인류가 얼마나 패괴되었든, 뱀이 어떻게 유혹했든 여호와에게는 자신만의 지혜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창세부터 지금까지 계속 새로운 사역을 해 왔으며, 어느 한 단계도 중복된 사역을 하지 않았다. 사탄은 끊임없이 계략을 쓰고, 인류는 계속해서 사탄에 의해 패괴되며, 여호와 하나님도 부단히 지혜로운 사역을 행한다. 그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고, 창세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사역을 멈춘 적이 없다.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래로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여 인류를 패괴시킨 그 원수를 물리쳤는데, 이 싸움은 태초부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는 것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가 그의 크나큰 구원을 받는 한편, 그의 지혜와 전능, 권병을 보게 하고, 마지막에는 그의 공의로운 성품, 즉 상선벌악(賞善罰惡)까지 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사탄과 싸우면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는 그가 지혜로운 하나님이고 그의 지혜 또한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의 만물을 모두 그의 권병 아래 순종하게 할 뿐만 아니라 땅의 만물도 모두 그의 발등상 아래에서 살게 하며, 더욱이 온 인류를 침범한 악한 자들이 그의 형벌 가운데서 쓰러지게 한다. 이 모든 사역 성과는 다 그의 지혜로 이룬 것이다. 인류가 있기 전에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지혜를 나타낸 적이 없었다. 하늘과 땅, 우주 전체에 그의 원수가 없었고, 흑암 세력이 만물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사장이 그를 배반한 후 그는 땅에 인류를 만들었고, 또 인류로 인해 본격적으로 사탄, 즉 천사장과 수천 년 동안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한 단계 한 단계 더 격렬해졌지만 어느 단계든 그의 전능과 지혜가 있었다. 이로써 하늘과 땅의 만물이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을 보고 나아가 하나님의 실제도 보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이처럼 실제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사역을 하면서 지혜와 전능을 나타내 너희에게 각 단계 사역의 실상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전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게 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실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게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온 인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8)
성령 역사는 진행 상황에 따라 행하고, 때에 맞추어 사역을 계획하며, 그때그때 행한다. 어째서 늘 성령 역사는 현실적이며 언제나 새롭고 가장 신선하다고 말하겠느냐? 사역은 창세부터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각 단계의 사역은 모두 당시에 있어야 할 성과를 거두지만, 그 어떤 단계의 사역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네가 마음속으로 계획한 것은 성령의 새 사역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의 사역은 사람이 추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그는 사람에게 현시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 그때그때 공급한다. 그는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사역 또한 사람의 현실적인 필요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그의 사역이 수천 년 전에 미리 계획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금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것도 너희의 내적 상태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행하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 내적 상태를 보고 꼭 알맞은 말씀을 하니, 그것이 바로 때마침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첫 번째 형벌 시대의 사역처럼 말이다. 형벌 시대가 시작된 후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사람에게 어떤 패역한 것들이 있었는지, 어떤 긍정적인 상태가 나타나고 또 어떤 소극적인 상태가 나타났는지, 어느 정도로 소극적이었고 최악의 상태는 어땠는지 이런 것에 맞춰 사역하면서 그것들을 소재로 취해 더 좋은 사역 성과를 거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현재의 상태에 따라 사람에게 공급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모든 단계의 사역은 사람의 실제 상태에 따라 이뤄진다. 모든 피조물이 그의 손안에 있는데 그가 주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다음 단계에 해야 할 사역을 그때그때 한 것이지, 아주 오랜 옛날에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이다! 하나님은 당시에 사역을 행하는 한편 성과를 보아 가면서 사역을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발전시켰으며, 사역의 성과를 보아 가면서 다음 단계의 사역을 하고, 많은 일을 통해 점진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사람에게 조금씩 새로운 사역을 보여 주었다. 이런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서 이렇게 역사하였고, 또 성육신해서도 이렇게 하였다. 이는 현실 상황에 따라 안배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한 것이다. 모든 사역은 창세 전에 미리 안배해 놓은 것이 아니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 둔 것도 아니다. 창세 이후 2천 년이 지난 뒤 인류가 그 지경까지 패괴된 것을 본 여호와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율법시대가 끝난 후에 은혜시대에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물론 그것은 여호와의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도 당시에 그가 본 상황에 따라 세운 것이지 아담을 만들자마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만 했을 뿐, 여호와는 율법시대에 그 사역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고, 은혜시대가 시작된 직후에야 그 사역을 시작했다. 바로 요셉의 꿈에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이 성육신하리라고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성육신 사역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사람의 상상처럼 하나님이 창세 후에 성육신의 사역을 예비해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류의 발전 정도에 따라 결정한 것이고, 또 사탄과 싸우는 상황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온 인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49)
하나님이 육신에 온 것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 몸에 임한 것이자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은 것이다. 그가 이 땅에 와서 행하는 사역은 몇 가지 절차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정해진 한도가 없다. 성령이 육신에 와서 사역하는 것도 사역의 성과에 맞춰 결정하며, 그가 육신으로 사역하는 기간도 이런 것들에 따라 정한다. 모든 단계의 사역은 성령이 직접 나타낸다. 성령 역사 역시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한 단계씩 보아 가며 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천지 만물을 창조한 사역도 마찬가지다. 그는 계획해 가면서 사역했다. 빛과 어둠을 나누어 아침과 저녁이 생기자 마침 하루가 되었고, 둘째 날에 하늘을 만들자 또 마침 하루가 되었으며, 그다음 땅과 바다, 그 속의 만물을 창조하자 또 하루가 지났다. 이렇게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사람을 만들어 땅의 만물을 다스리게 하였다. 일곱째 날에는 만물을 다 창조했으므로 안식하였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복을 내려 거룩한 날로 정했다. 거룩한 날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만물을 다 창조한 후에 비로소 정한 것이다. 또한, 이 사역도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엿새 동안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기로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아 가면서 행한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고, 그가 그렇게 말씀하지도, 그렇게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섯째 날까지 모든 만물을 다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겠다고 미리 말씀하지 않았으며, 그때 그가 보기에 좋은 대로 창조했다. 그가 모든 것을 창조하고 나니 여섯 날이 지났다. 만약 그가 다섯째 날까지 만물을 다 창조했다면 여섯째 날을 거룩한 날로 정했을 것이다. 그저 그날이 여섯째 날이었기에 일곱째 날이 거룩한 날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역도 마찬가지로 너희의 내적 상태에 따라 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영이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고 사역하며, 영이 모든 것을 감찰하면서 그때그때 사역하는 것이다. 내가 행한 것, 말한 것, 너희에게 더해 주고 베풀어 준 것은 모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현실을 떠나지 않으며 다 실제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희도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미리 정해 놓았다면 지나치게 규례를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6천 년 계획을 연구해 낸 뒤 사람에게 거역과 대적, 교활과 간사, 육적인 패괴, 사탄의 성품과 안목의 정욕, 사적인 기호가 있도록 미리 정해 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사탄이 패괴시킨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탄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탄이 이렇게 사람을 패괴시키도록 정해 놓은 뒤에 사람에게 사역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설마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도록 정해 놓았겠느냐? 인류가 모두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가 인류의 삶을 방해하겠느냐? 그렇다면 그가 사탄을 물리치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헛수고가 되지 않겠느냐? 인류가 거역하도록 어떻게 미리 정해 놓을 수가 있겠느냐? 그것은 본래 사탄의 방해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 될 수 있겠느냐? 사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너희의 생각은 나의 말과 크게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탄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라는 너희의 말대로라면 사탄은 배반할 수가 없다. 너희는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의 인식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영원히 측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 또한 영원히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는 건 한 치 오차도 없는 진실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천사장에게 권병의 일부를 주었기 때문에 천사장이 배반한 것이다. 물론 이 일도 하와가 뱀에게 유혹당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탄이 어떻게 배반했든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전능이 없다. 너희가 사탄은 만능이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고, 사탄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라는 말의 본래 뜻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싸울 때는 한 단계 한 단계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탄의 계략에 따라 자신의 사역을 정한다. 다시 말해, 시대에 맞춰 사람을 구원하고 그의 전능과 지혜를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의 사역도 은혜시대 전에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아니며, ‘첫째, 사람의 외적 성품을 변화시킨다. 둘째, 사람이 형벌과 시련을 받게 한다. 셋째, 사람이 죽음의 시련을 겪게 한다. 넷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를 체험하고 피조물의 의지를 내보이게 한다. 다섯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한 다음 사람을 온전케 한다.’ 이런 식으로 조목조목 미리 정해 놓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이렇게 계획해 놓지 않았으며, 이 시대에 와서야 계획하기 시작했다. 사탄이 역사하고 있고, 하나님도 역사하고 있다. 사탄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고 음성을 발하면서 본질적인 것들을 들추어 밝힌다. 이것이 현재의 사역이며, 또한 일찍이 창세 이래로 이런 원칙에 따라 사역하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온 인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0)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뱀도 만들었는데, 만물 중에서 뱀은 가장 독한 것이었다. 뱀의 몸에 독이 있기 때문에 사탄은 그 독을 통해 뱀을 이용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해 죄를 범하게 했고,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아담도 죄를 지었다. 이로써 그들 둘은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 당초 여호와가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하와가 아담을 유혹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들을 모두 한 동산에 두었겠느냐? 그가 그런 것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뱀을 만들고 또 그것을 에덴동산에 두었겠느냐? 어째서 에덴동산에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실과가 있었겠느냐? 일부러 그들이 먹게 했겠느냐? 여호와가 오자 아담과 하와는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여호와는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독사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결국 뱀을 저주하고 아담과 하와도 저주했다. 그들 둘이 나무 열매를 먹을 때 여호와는 알지 못했다. 인류가 패괴되어 사악하고 음란해지고 마음에 악과 불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지경에 이르자 여호와는 인류를 창조한 것을 후회했다. 그 후 여호와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사역을 했고,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살아남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고차원적이거나 초자연적이지 않다. 천사장이 배반하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천사장을 만들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사실은 이렇다. 땅이 없었을 때는 하늘에서 천사장이 가장 큰 천사였고,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를 다스렸다. 그것은 하나님이 천사장에게 준 권병이었다. 하나님 외에는 천사장이 천사 중에서 가장 컸다. 그 후에 인류가 창조되자 천사장은 땅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더 큰 일을 저질렀다. 그가 배반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권병을 뛰어넘어 인류를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사장이 하와를 유혹해 죄를 범하게 한 것은 땅에서 따로 왕국을 세워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천사장이 보니 많은 것들이 자기 말을 따르고 있었다. 천사도, 땅의 사람도 모두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땅의 날짐승과 길짐승, 나무, 숲, 산천 만물을 모두 사람, 즉 아담과 하와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들도 천사장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천사장은 하나님의 권병을 뛰어넘고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했으며, 나중에는 또 많은 천사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갖가지 더러운 귀신이 되게 했다. 인류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천사장이 패괴시켰기 때문 아니더냐? 천사장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류를 패괴시켰기 때문에 인류가 지금처럼 된 것이다.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사탄이 배반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이렇게 간단한 문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또 사탄도 만드셨을까? 하나님은 이렇게 사탄을 증오하시고 사탄은 또 그분의 원수인데, 어째서 사탄을 만드신 거지? 사탄을 만든 것은 원수를 만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원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천사를 만들었는데 그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그의 지위가 너무 높아서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필연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느 정도 살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일이 그 지경까지 전개된 것이다. 그릇된 인간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탄이 당신의 원수인데 어째서 그것을 만드셨습니까? 천사장이 당신을 배반할 줄 모르셨습니까? 당신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내다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의 본성을 모르셨습니까? 그것이 당신을 배반할 줄 뻔히 알면서도 어째서 그것을 천사장으로 삼으셨습니까? 그것이 당신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천사를 이끌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류를 패괴시킨 탓에 당신의 6천 년 경륜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냐? 너의 이런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냐?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탄이 사람을 지금 이 지경까지 패괴시키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이렇게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탄 때문에 인류를 만드시고, 그 후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전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대적하는 사람이나 거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분의 행사를 나타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더더욱 일의 진상과 다르다. 하나님께는 더러움이 없기에 더러움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지금 그가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는 것은 단지 원수를 물리쳐 자신이 만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또한 처음에는 그의 권세 아래에 있었고 그에게 속했지만 지금은 그를 증오하고 배반하고 대적하는 마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함이며, 이 마귀들을 물리침으로써 만물에게 그의 전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지금 땅의 만물과 전 인류는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 속하며, 악한 자의 권세 아래 있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자신의 행사를 나타냄으로써 사람이 그를 알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치고 그의 원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자 한다. 이 모든 사역은 그가 나타내는 행사를 통해 이뤄진다. 모든 피조물이 사탄의 권세 아래로 돌아갔으므로 그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전능을 나타냄으로써 사탄을 물리치려고 한다. 사탄이 없었다면 그의 행사를 나타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탄의 방해가 없었다면 그는 인류를 만든 뒤 에덴동산에서 생활하도록 인도했을 것이다. 어째서 사탄이 배반하기 전에는 그가 천사나 천사장에게 자신의 행사를 전혀 나타내지 않은 것일까? 만약 처음부터 천사와 천사장이 그를 알고 그에게 순종했더라면 그런 무의미한 사역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과 마귀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내면에 패역한 성품만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탄과 싸워야 하기에 자신의 권병과 모든 행사로 사탄을 물리쳐야 했다. 그렇게 사람 가운데서 하는 구원 사역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을 보여 준 것이다. 오늘날 행하는 사역은 의미 있는 사역이다. 이는 사람이 “당신이 하신 사역은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저런 사역들 모두 스스로를 방해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은 사탄을 만들어 당신을 배반하고 대적하게 하셨고, 또 인류를 만들어 사탄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하셨으면서 어째서 또 인류를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하시는 겁니까? 그 모든 것이 당신이 하신 일인데 증오하시다니요!”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속으로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정말 모순되네요!”라고 말하는 그릇된 자들이 많다. 진상을 알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서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말하다니 너무도 그릇되었구나! 하나님이 일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원망하기만 한다. “당신이 사탄을 만들고 또 사탄을 인간 세상으로 쫓아내셨죠. 그러고는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의 성품을 갖게 했으면서 용서하지 않고 몹시 증오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무척 사랑하시더니 지금은 또 인류를 증오하시지요. 당신은 사람을 미워하시기도 하고 사랑하시기도 하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모순 아닙니까?”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하늘의 상황이 그렇고, 천사장은 그렇게 배반했으며, 인류도 그렇게 패괴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너희가 뭐라고 하든 일의 자초지종이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 이렇게 사역하는 것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온 인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1)
하나님은 사람을 경영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치고,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킴으로써 사람의 운명을 끝내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 중 어느 단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어느 단계가 사람을 정결케 하고, 사람이 의를 행하게 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인류를 패괴시킨다. 사탄은 줄곧 전 우주 아래에서 사람을 패괴시키는 이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도 자신의 사역을 하지만 사탄을 상대하지는 않는다. 사탄에게 아무리 권병이 있다 해도 그 권병은 하나님이 준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신의 권병을 다 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언제나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어떤 행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사탄에게 권병을 조금 주어 천사들을 다스리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권병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처음에 하나님이 사탄에게 준 권병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쪽에서 사역을 하면 사탄은 한쪽에서 방해한다. 말세에 이르러 사탄의 방해가 끝나면 하나님의 사역도 끝나고, 하나님이 만들려는 사람도 온전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면에서 사람을 인도하며, 그의 생명은 끝없이 흐르는 생수이다. 사탄이 사람을 심각하게 패괴시켰지만 마지막에는 생명의 생수가 사람을 온전케 하기에 사탄은 끼어들어 역사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얻게 된다. 사탄은 지금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과 승부를 겨루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는 반드시 사탄의 모든 흑암 세력과 흑암 권세를 이길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육신으로 하려는 사역이자 성육신한 의의다. 다시 말해, 사탄을 물리치는 마지막 단계의 사역을 완성하여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과 싸워 이기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다! 사실, 사탄은 이미 패배했다. 큰 붉은 용 국가에서 복음이 확장된 후,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사역하기 시작해 사역의 국면을 연 후 사탄은 완전히 패배했다. 성육신은 바로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또 한 번 성육신하여 사역하기 시작하자 그 어떤 세력도 막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처음에 사탄은 자신의 지혜도 꽤 많다고 생각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또 한 번 성육신할 뿐만 아니라, 사탄의 패역을 통해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며, 이로써 사람을 정복하고 사탄을 물리치는 사역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은 사탄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사역은 사탄의 사역을 훨씬 초월한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나의 사역은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어 결국에는 나의 전능이 나타나고 사탄의 무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앞에서 사역하면 사탄은 뒤에서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께 멸망당하게 된다. 온몸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내쳐진 뒤에야 크게 깨닫겠지만, 그때는 이미 불 못에 던져져 타 버린 뒤일 것이다. 그러면 사탄은 어쩔 도리 없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온 인류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야 한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2)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은 모두 사람을 떠날 수 없다. 사역의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의 삶과 모든 활동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전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므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인류의 이익은 물론, 사탄의 간계까지 겨냥한다.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사람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 역시 고의적으로 사람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전 인류를 위한 것이고, 그의 생각은 언제나 선하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과 하나님의 생각(하나님의 뜻)은 모두 사람이 알아야 할 ‘이상(異象)’이 되었다. 이런 이상도 다 하나님의 경영이며,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이다. 반면 하나님이 사역하면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을 사람의 ‘실행’이라고 한다. ‘이상’이란 하나님 자신의 사역, 또는 사람에 대한 그의 뜻과 그가 사역하는 목적, 의의를 말한다. ‘이상’은 또한 ‘경영’의 일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영’은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사역, 즉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역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근거이자 길이며, 게다가 사람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치나 사소한 일만 중시하고 그의 사역에 대한 인식을 등한시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거니와 그의 뜻에 맞게 행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사역들을 ‘이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상은 모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 사역의 목적과 의의를 말한다. ‘실행’이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사람의 본분이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하면서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다. 이 요구는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차츰차츰 심화되고 높아진다. 예를 들어, 사람은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야 했고, 은혜시대에는 십자가를 져야 했다.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는 그와 다르다. 사람에 대한 요구는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보다 더 높아졌다. 이상이 높아지면서 사람에 대한 요구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명확해지며, 실제적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이상 역시 갈수록 실제적으로 바뀐다. 이렇게 많은 실제적인 이상은 사람이 하나님께 더 잘 순종하게 되는 데 이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도 더욱 도움이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3)
하나님나라시대에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 현실적이고, 사람의 본질과 성품 변화에 더 초점을 둔다. 이런 사역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더 잘 증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시대에 사역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이전의 어느 때보다 자신을 더 많이 공개한다. 즉, 사람이 알아야 할 이상이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한 사역이 전례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시대의 사람이 알게 되는 이상은 전체 경영 사역에서 가장 높은 이상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전례 없는 경지에 이르러 사람이 알게 된 이상도 가장 높은 이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의 실행도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 더 높아졌다. 사람의 실행은 이상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이상이 완전해진다는 것은 또한 사람에 대한 요구가 완전해짐을 뜻한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이 멈추면 그에 따라 사람의 실행도 멈추게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으면, 사람은 이전의 규례를 지킬 수밖에 없거나 아예 행할 길이 없어진다. 새로운 이상이 없으면 사람에게 새로운 실행도 없고, 완전한 이상이 없으면 사람에게 완벽한 실행도 없다. 이상이 높아지지 않으면 사람의 실행도 높아지지 않는다. 사람의 실행은 하나님의 발걸음에 따라 바뀐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식과 체험 역시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바뀐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잠시라도 사역하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그의 진노 속에서 죽게 된다. 사람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다. 오늘날 사람의 인식이 얼마나 높아지고, 체험이 얼마나 깊어졌든 하나님의 사역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해야 하는 것과 사람의 실행은 이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역에는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이상이 있고, 그에 따라 사람에게 적합한 요구를 제시한다. 그런 이상을 기반으로 삼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예 실행하지도, 끝까지 따르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그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행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지닌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는 없다. 또 사람이 제아무리 사역을 잘하고 많이 해도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든 사람의 실행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새 이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실행이 없다. 그들의 실행이 진리와 무관한 까닭은 모두 규례와 죽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새 이상이 전혀 없고, 따라서 새 시대의 실행도 없다. 그들은 이상을 잃었고, 또한 성령 역사와 진리를 잃은 것이다. 진리가 없는 자는 모두 그릇됨의 후손이자 사탄의 화신이다. 어떤 인물이든 하나님 사역의 이상이 없어서는 안 되고, 성령의 함께함을 잃어서도 안 된다. 사람이 일단 이상을 잃으면 즉시 음부로 떨어져 흑암 속에서 살게 된다. 이상이 없는 사람은 흐리멍덩하게 따르는 자이고, 성령 역사가 없는 자이며, 지옥에서 사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자이다. 성령 역사와 성육신 하나님, 그리고 전체 경영의 3단계 사역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모두 진리가 없는 사람이다. 진리가 없는 자는 모두 악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과 협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을 기반으로 삼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 협력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4)
이상(異象)에는 수많은 실행의 길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 역시 다 이상에 들어 있고, 사람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사역 역시 다 이상에 들어 있다. 예전에는 각 지역에서 특별 예배를 하거나 대예배를 하면, 한 부분의 실행 길만 강조했다. 그런 실행은 모두 은혜시대에 실행해야 했던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은혜시대의 이상은 기껏해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뿐, 그 외에 더 큰 이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구속한 사역밖에 없었으므로 은혜시대에는 사람에게 알려 줄 이상이 더는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람에게는 예수의 자비와 긍휼을 아는 것 외에 단순하고도 초라한 실행만 조금 있었을 뿐이다. 이는 오늘날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모임을 가져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말할 수 없었고, 사람이 진입해야 할 가장 적합한 실행의 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포용과 인내를 바탕으로 단순한 세부 내용들만 조금 더해졌을 뿐, 그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은 동일한 시대에 더 새로운 사역을 전혀 행하지 않았고, 사람에 대한 요구 역시 포용하고 인내하거나 십자가를 지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실행 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보다 더 높은 이상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더 많은 이상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행하지 않았고, 사람에 대한 요구 역시 유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쉽고 단순한 실행만 조금 했을 뿐, 어떻게 해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날 더 많은 이상을 말하는 까닭은 오늘날에 더 많은 사역,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보다 몇 배 많은 사역을 행했으며, 사람에 대한 요구 또한 이전 시대보다 몇 배나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사역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 사역들의 의의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이 사역들에 필생의 정력을 쏟지 않는다면 분명하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실행의 길만 말한다면 사람을 정복할 수 없고, 이상에 대해서만 말하고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사람을 정복할 수 없다. 실행의 길만 말하면 사람의 정곡을 찌를 수 없고, 사람의 관념을 없앨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철저히 정복할 수도 없다. 사람을 정복하는 도구는 주로 이상이다. 그러나 이상 외에 실행의 길이 조금도 없다면 사람은 따라갈 수 없고, 나아가 진입할 수도 없다.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른다. 이상 속에 실행이 있고, 실행 외에 또 이상이 있다. 사람의 생명과 성품의 변화 정도는 모두 이상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노력에만 기댄다면 변화의 폭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란 하나님 자신의 사역과 그의 경영을 말하고, 실행이란 사람이 실행할 길과 생존의 길을 가리킨다. 전체 경영에서 이상과 실행의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다. 이상을 없애거나 이상만 말하고 실행은 말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사람의 실행은 없애고 이상만 있다면 그것은 경영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본분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마저도 부인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없이 사람에게 실행만 요구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역은 더더욱 경영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뜻도 모르면서 무작정 막연하게 실행하기만 한다면, 사람은 영원토록 온전히 합격한 피조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부분의 내용은 모두 필수적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 즉 이상만 있고 사람의 협력과 실행이 없다면 그것은 경영이라 하지 않는다. 또 사람의 실행과 진입만 있다면, 사람이 진입하는 길이 가장 높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의 진입은 반드시 사역과 이상에 따라 차츰차츰 바뀌어야지 마음대로 변해서는 안 된다. 실행의 원칙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범위가 있다. 이 원칙들은 모두 사역의 이상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경영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으로 귀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5)
경영 사역은 인류 때문에 생겨났다. 즉, 인류가 있어서 생긴 것이지, 인류가 있기 전이나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생긴 것이 아니다. 모든 사역에서 사람에게 이로운 실행이 없다면, 즉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에게 적합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그가 행하는 사역에 사람에게 적합한 실행의 길이 전혀 없다면) 그 사역을 경영이라고 할 수 없다. 또 모든 사역에서 패괴된 인류에게 어떻게 실행하라고 요구하기만 하고 하나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능이나 지혜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높은 요구를 하든,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오래 생활하든, 사람은 그의 성품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사역을 더더욱 경영이라고 할 수 없다. ‘경영’이라는 이 사역을 간단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그에게 얻어진 모든 사람이 그의 인도를 받으며 행하는 모든 사역을 뜻한다. 이런 사역을 ‘경영’이라고 총칭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그와 협력하는 것을 통칭하여 ‘경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이상’이라고 하고, 사람의 협력은 ‘실행’이라고 한다. 하나님 사역이 높아질수록(이상이 높아질수록) 그의 성품은 사람에게 더 많이 공개되고, 사람의 관념과는 더 부합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실행과 협력 또한 더 높아진다. 또 사람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의 관념에 더 부합하지 않고, 그에 따라 사람에 대한 시련의 정도와 사람이 달성해야 하는 요구 기준도 더 높아진다. 사역이 끝날 때면 모든 이상이 완벽해지고, 사람의 실행에 대한 요구 역시 모두 완전무결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때가 바로 각기 부류대로 나뉠 때이다.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을 이미 사람에게 모두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이 최고조에 이를 때는 사역도 그에 따라 막바지에 이르고, 사람의 실행 역시 절정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실행은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경영 또한 사람의 실행과 협력을 통해야만 완전히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존재이고, 전체 경영 사역의 사역 대상이며, 또한 전체 경영의 산물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만 있고 사람의 협력이 없다면, 그의 전체 사역의 결정체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영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하나님은 사역을 하는 것 외에도 적합한 사역 대상을 택해 그의 사역을 나타내고, 그의 전능하고 지혜로운 사역을 실증해야만 그의 경영 목적을 이룰 수 있고, 모든 사역으로 사탄을 철저히 물리치는 목적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영 사역에서 사람은 필수 불가결한 일부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이 성과를 거두고 최종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사람을 제외하고는 생명을 가진 그 어떤 생물도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사람을 경영 사역의 진정한 결정체로 만들려면, 반드시 패괴된 인류의 모든 패역을 벗겨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시기에 따라 사람에게 적합한 실행을 요구하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에 상응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에 경영 사역의 결정체가 된 한 무리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은 하나님 혼자 행해서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역에 적합한, 생기 있는 사람을 통해 그의 사역을 이뤄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이들에게 사역한 후, 다시 이들을 통해 그 사역을 나타내고, 그의 이러한 증거가 피조물 가운데 나타나게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역하는 목적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홀로 사역하여 사탄을 물리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 자신을 증거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진심으로 탄복할 수 없다. 반드시 사람에게 행한 사역으로 사람을 모두 정복해야만 피조물 가운데서 자신의 증거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만 계속 사역하고 사람이 협력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 또한 영원히 사람에게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은 경영 사역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한 채 혼자 노력하고 추구하고 애쓴다면, 그것은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이다. 성령 역사가 없다면 사람이 하는 일은 곧 사탄이 하는 짓이고, 모두 거역하는 것이자 악을 행하는 것이다. 패괴된 사람이 행하는 것은 모두 사탄을 연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사탄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말씀은 이상과 실행이라는 두 부분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이상을 바탕으로 실행과 순종의 길을 찾아야 하며,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와 협력하고 그의 요구에 완전히 순종하기를 바라고,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그의 전능을 깨달으며 그의 성품을 알기를 원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이 바로 경영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결합이 바로 경영이며, 이것은 가장 큰 경영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6)
이상(異象)과 관련된 것은 주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가리키지만, 실행과 관련된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이 완성하고, 사람의 실행은 사람 스스로 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고,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은 그 자신의 직분이므로 사람과 관계가 없다. 그 사역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고, 더구나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려는 사역을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헌신하는 것일지라도, 사탄에게 넘겨져 굳게 서야 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다 사람이 해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사역을 전부 끝내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모두 사람에게 지시하고 나면, 나머지 사역은 사람이 해야 한다. 하나님은 직분 내의 사역만 할 뿐, 그 외의 사역은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길을 여는 사역만 행할 뿐, 길을 닦는 사역은 행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의 본분이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도 사람처럼 진리와 관련해 고통받거나 연단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패역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의 모든 인도에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고 어떻게 생활하든, 사람이 해내야 하는 것은 사람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뿐이다.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사람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다. 사람은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완전히 순종하고 실행해야만 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다. 하나님 자신이 행해야 할 사역을 다 하고 나면 사람은 조금씩 체험해야 한다. 전체 경영이 끝나는 마지막 때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못한다면 징벌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패역한 탓이지, 하나님이 사역을 분명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 징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별도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사람의 본분이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본분조차 다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느냐?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 놓고 또 무슨 훗날과 앞날을 바라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인류를 위한 것이고, 사람의 협력은 하나님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 한 다음에는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실행하고 협력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의 온 힘을 다하고 충성을 바쳐야지, 관념을 계속 늘려 가거나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데, 사람은 왜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는데, 사람은 왜 조금도 협력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사역하는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자신의 본분을 조금도 이행하지 못하느냐? 이렇게까지 사역했음에도 너희는 보고도 행하지 않고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자는 모두 침륜될 대상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사람은 왜 지금까지도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께는 사역이 첫째이고, 자신의 경영 사역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첫째이다. 이런 것은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한다. 너희에게 한 말은 이미 너희의 본질을 뼛속까지 짚어 냈고, 사역은 이미 전례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 도의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고, 관망하면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행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하나님이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며, 관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자는 모두 스스로 번뇌를 자초하는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어찌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어찌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자신의 충성과 본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행적’에만 관심을 두니 정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자들이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을 모두 깨닫고 실행해야 할 것을 모두 실행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줄 것이다.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모두 사람의 본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실행해야 할 것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징벌받게 될 것이다. 눈에 띌 만큼 대적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 사람은 적대시하는 자이고,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대적하는 태도를 지닌 자이다. 성령 역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이다. 말씀에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이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 자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7)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그의 마음에 합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리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사람에게 요구하며, 자신의 경영에 대해 언급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경영과 사람의 실행은 한 단계의 사역으로,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 경영을 언급하면 사람의 성품 변화와 관련되고, 사람이 해야 하는 것과 사람의 성품 변화를 언급하면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의 실행이 점차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바뀌고, 또 그의 사역이 언제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전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실행이 규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사역과 인도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의 실행이 늘 바뀌지도 않고 깊어지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실행이 사람의 뜻에서 나온 실행이자 비진리의 실행임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행할 길이 전혀 없다면, 그들은 벌써 사탄의 손아귀에 떨어져 통제를 받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악령에게 통제받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실행이 깊어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역 또한 발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의 진입 또한 정체되는데, 이것은 필연적이다. 전체 사역에서 사람이 계속 여호와의 율법만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역 역시 진전될 수 없고, 더욱이 전체 시대가 끝날 수도 없다. 사람이 계속 십자가를 지키면서 겸손하게 행동하고 인내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 역시 계속 발전할 수 없다. 6천 년 경영은 율법이나 십자가만 지키면서 인내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끝나지 않는다. 전체 경영 사역은 하나님이 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옴으로써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난, 하나님을 아는 마지막 시대의 사람에게서 끝난다. 이것이야말로 사역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왜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실행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하겠느냐? 그들이 실행하는 것이 지금의 사역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은혜시대에는 그들이 실행한 것도 옳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사역이 바뀌면서 그들의 실행은 점점 시대에 뒤떨어졌다. 새 사역과 새 빛으로 말미암아 뒤처지게 된 것이다. 성령 역사는 기존 사역을 바탕으로 몇 단계나 더 심화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존 상태에 그대로 머무른 채 낡은 방식과 빛을 고수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3년 혹은 5년 내에도 아주 큰 변화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2천 년이란 시간에는 더욱 큰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새로운 빛과 실행이 없는 것은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실수이다. 예전에 성령 역사가 있었던 사람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낡은 방식을 고수한다고 해서 새 사역의 존재가 부인될 수는 없다. 성령 역사는 언제나 앞을 향해 발전한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차츰 심화되고 변화해야지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성령 역사를 모르는 자들만이 기존의 사역에 정체되어 성령의 새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패역한 자들만이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한다. 사람이 성령의 새 역사를 따라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 실행은 분명히 지금의 사역과 동떨어진 것이고, 또한 틀림없이 지금의 사역에 방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더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굳건한 증인이 될 수도 없다. 전체 경영 사역 역시 그런 무리에게서는 끝날 수 없다. 지난날 여호와의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과 십자가를 위해 고난받은 사람들이 이 마지막 단계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이 행한 것은 모두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다. 성령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실적이고, 옛것을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사역을 따르지 못하는 자와 오늘날의 실행과 동떨어진 자는 모두 성령 역사를 대적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적하는 자이다. 그들이 이전의 빛을 지키고 있다 해서 성령 역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왜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실행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이전의 실행과 현재 실행의 구별에 대해 말하고, 이전의 그 시대에 어떻게 실행했고 현재 이 시대에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를 말하겠느냐? 늘 이런 실행의 구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성령 역사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요구하는 실행 또한 계속 달라진다. 사람이 어떤 상태에 멈추어 있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과 빛에 닿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들은 늘 자신의 것이 옳다고 여기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행하던 사역을 이미 오래전에 중단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성령 역사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사역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옮겼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새 사역을 이루려고 한다.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옛 사역만 지키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고 그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 사역을 행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경영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의 경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사람의 실행 또한 끊임없이 높아지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역하고 있고, 사람 역시 언제나 필요한 것이 있기에 이 둘의 관계는 최고조에 달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은 대업이 이루어졌다는 표시이자 전체 경영의 최종 결과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8)
각 단계마다 하나님은 사역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것을 사람에게 요구한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자에게는 모두 성령의 함께함과 징계가 있지만,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는 전부 사탄의 지배를 받으므로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이 협력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시기에 요구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징계를 받게 되며 심한 경우 성령께 버림받게 된다. 성령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성령의 흐름 속에서 살면서 성령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깨우침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성령의 징계가 있고 심지어 징벌도 임한다. 어떤 사람이든 성령의 흐름 속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기꺼이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의 축복을 받지만, 그를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은 바로 새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새 사역을 받아들인 이상, 하나님과 상응하는 협력을 해야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패역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이다. 그러나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흐름 밖에 있는 자들이니 성령의 징계나 책망 같은 것은 아예 말할 것도 못 된다. 그들은 온종일 자신의 육체와 머릿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머리로 분석하고 연구해 낸 이치지, 성령의 새 역사에서 비롯된 요구도, 더욱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으며, 축복이나 보호 같은 것은 더더욱 논할 수 없다. 그들의 언행은 대부분 지난날 성령 역사에서 비롯된 요구를 지키는 것으로, 이치이지 진리가 아니다. 그런 이치와 규례들은 그들의 집합체가 종교일 뿐, 선민이나 하나님의 사역 대상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 준다. 그들 모든 사람의 집합체는 종교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뿐, 교회라고 칭할 수는 없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새 역사가 없고, 그들의 모든 행위에서는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며, 그들의 삶은 전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함께함과 역사가 없으며, 더욱이 성령의 징계나 깨우침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시체이고, 영성(靈性)이 없는 구더기이다. 그들은 사람의 거역과 대적에 대해 알지 못하고, 사람의 온갖 악행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모든 사역과 지금의 뜻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무지한 소인배들이고, ‘신자’로 불릴 자격이 없는 인간 말종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하나님의 경영과는 관계가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도 없다. 그들의 언행은 너무나 역겹고 초라하여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지 않은 자들이 행하는 것은 성령의 새 사역과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성령은 징계하지도, 깨우쳐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성령에게 버림받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악을 행하는 자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육을 좇아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사역할 때 고의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거슬러 역행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지 못하는 것만 해도 이미 크나큰 패역인데, 하물며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역행하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59)
너희는 하나님 사역의 이상(異象)을 알고 기본 방향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적극적인 측면의 진입이다. 네가 이런 이상과 관련된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역이 어떻게 바뀌든 전반적으로 너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상이 분명해지며, 네가 진입하고자 하는 것과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도 목표가 생긴다면, 너의 체험과 인식은 더 깊어지고 더 구체적이 되며, 큰 방향을 알게 되어 네가 생명에 해를 입거나 헤매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면, 각 단계의 사역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 사나흘이나 네댓새가 지나도 돌이키지 못하고, 열흘이나 보름이 지나도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일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 너희는 적극적인 측면의 진입과 실행을 다방면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사역 이상에도 너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바로 정복 사역의 의의, 앞으로 온전케 되는 길, 환난과 시련을 통해 이루려는 것, 그리고 심판과 형벌의 의의, 성령 역사의 원칙, 온전케 되는 것과 정복되는 것의 원칙이다. 이것은 모두 이상과 관련된 진리에 속한다. 이 밖에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그리고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세 단계 사역이 있다. 또 이후의 증거에 관한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이상에 관련된 진리로, 무엇보다 기본적인 것이고 중요하다. 지금 너희에게는 진입하고 실행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그것들은 각각 절차와 세부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얄팍해서 기본적인 진리들도 실행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들도 처리하지 못한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성품이 패역한 데다 오늘날의 사역에 대한 인식 또한 너무 얄팍하고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전케 되기가 쉽지 않다. 네가 너무나 패역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며, 심지어 가장 분명한 진리마저 실행하지 못한다면, 너 같은 사람은 구제 불능으로, 정복되지 못한 자에 속한다. 너의 진입에 세부적 내용과 목표가 없다면 너의 성장은 느릴 것이고, 너의 진입에 조금도 실제가 없다면 너의 추구는 헛될 것이다. 또한, 진리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너에게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 성장과 성품 변화는 모두 실제에 진입함으로써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세부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진입하는 과정에서 세부적으로 많이 체험하고, 현실적으로 많이 깨닫고 진입한다면, 너의 성품은 빨리 변화할 것이다. 지금 너는 실행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하게 알지 못할지라도, 사역 이상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너는 진입할 수가 없다. 반드시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그 후에 진입할 수 있다.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야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더 깊이 진입하게 된다. 너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0)
태초에 인류를 창조한 후 이스라엘 사람을 사역할 기반으로 삼았고, 이에 모든 이스라엘 땅은 여호와가 땅에서 행하는 사역의 근거지가 되었다.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율법을 정해 직접 사람을 인도하고 목양함으로써 사람이 땅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여호와를 정상적으로 경배하게 하는 것이었다. 율법시대의 하나님은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었다. 그는 그저 처음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을 인도하고 가르치며 목양하기만 했기에, 그가 말씀한 내용은 단지 율례와 법도, 그리고 사람됨에 대한 상식이었지,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진리는 아니었다. 그가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은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가 행한 율법 사역은 구원 사역의 첫걸음이자 최초의 구원 사역으로, 사람의 생명 성품 변화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구원 사역부터 그가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사람과 접촉하려면 매개체가 필요했다. 즉, 도구를 통해 사람과 접촉해야 했다. 그리하여 피조물 가운데서 여호와를 대신해 사역하고 말씀을 전할 사람들을 세움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인자와 선지자가 생겨났다. ‘인자’란 여호와를 대변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사람으로, 여호와께 ‘인자’라 칭함 받았다. 이 호칭에는 여호와를 대변하여 율법을 반포하는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라는 뜻이 있다. 또한, 여호와가 보살피고 지키며 여호와의 영이 역사하는 제사장이라는 뜻과 여호와를 직접 섬기는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뜻도 담겨 있다. 그리고 선지자는 전적으로 열방과 모든 족속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주는 대언자이자 여호와의 사역을 예언하는 사람이다. 인자든 선지자든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영이 친히 세운 사람들이자 여호와의 역사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또한 백성들 가운데서 여호와를 직접 대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단지 여호와가 세웠기에 사역한 것이지, 성령이 친히 성육신해서 사역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하나님을 대변하여 사역하고 말씀을 전했다 할지라도, 율법시대의 선지자와 인자들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아니다. 그러나 은혜시대와 마지막 단계의 사역은 정반대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사역은 모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친히 행하는 것이므로 다시 선지자와 인자를 세워 그의 사역을 대신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사람의 눈에 그들의 사역은 본질과 방식 면에서 실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기에 사람은 늘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을 선지자나 인자의 사역과 혼동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선지자나 인자와 기본적으로 겉모습이 같은 데다가, 선지자보다 더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양자 간의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에 사역하고 말하는 것이 똑같아도 그 속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분별력이 너무 부족해 단순한 문제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이렇게 복잡한 문제는 더욱 분별하지 못한다. 선지자들과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들의 말과 사역은 모두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성육신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은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의 외형이 피조물의 외형이지만, 그의 사역은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본분은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말이고, 직분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적용되는 말이다.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이 사역한다 함은 단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사역한다 함은 경영을 하고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도가 성령께 쓰임 받고, 또 많은 선지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사역하고 말한 것은 그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예언이 성육신 하나님이 말한 생명의 도보다 더 대단하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인성이 성육신 하나님보다 훨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지,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하나님이 이행하는 직분은 경영과 관련된 일로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말씀하든, 사역하든, 아니면 이적을 나타내든 간에, 결국 그가 행하는 것은 모두 경영 사역 중의 큰 사역이다. 이 사역은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행하는 사역은 단지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 어느 한 단계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이 없다면, 즉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이 없어진다면 피조물의 본분도 없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고 직분을 이행하는 것은 사람을 경영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것으로, 창조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결코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그의 고유한 본질인 영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영을 하는 것이고, 성육신하여 피조물의 외형을 갖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역을 하든 모두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그의 경영 범위 내에서, 그리고 그의 인도하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다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1)
은혜시대에 예수 또한 적지 않은 말씀과 사역을 했다. 그는 이사야와 어떻게 다르겠느냐? 다니엘과는 어떻게 다르겠느냐? 그는 과연 선지자냐, 아니냐? 왜 그를 그리스도라 하겠느냐?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더냐? 다 같은 사람이고 다 말을 했으며, 게다가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말은 기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모두가 말하고 사역했다. 구약의 선지자는 예언을 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예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이냐? 이런 것은 사역의 성격에 따라 구별해야 한다. 네가 이런 일을 분별할 때는 그의 육신의 속성이 어떠한지, 그의 말씀이 깊이가 어떠한지를 보지 말고 먼저 그가 행한 사역과 그 사역이 사람에게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당시에 선지자가 한 예언은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지 못했다. 이사야,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받은 묵시는 생명의 도가 아니라 예언에 불과했다. 당시 여호와가 직접 계시해 주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 또한 많은 말씀을 했지만 그 말씀들은 생명의 도였고, 사람은 그 속에서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첫째, 예수는 생명이므로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었다. 둘째, 예수는 사람의 치우치고 그릇된 점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셋째, 예수는 여호와의 사역을 이어받아 시대를 이을 수 있었다. 넷째, 예수는 사람이 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고, 사람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낡은 시대를 끝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이라고도, 그리스도라고도 하며, 이사야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선지자와도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선지자 가운데 이사야가 행한 사역을 예수의 사역과 대조해 보면, 첫째, 이사야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없었다. 둘째, 이사야는 시대를 열 수 없었다. 그는 여호와의 인도하에서 사역한 것이지 새로운 시대를 열며 사역한 것이 아니다. 셋째, 그가 한 말은 이사야 본인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직접 계시한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몇 가지로 이사야가 한 말은 단지 예언이자 여호와를 대신해 행한 하나의 사역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여호와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그는 여호와의 종이자 사역 도구였다. 그는 율법시대에만 사역했고 여호와가 역사한 범위 내에서만 사역했을 뿐, 율법시대의 사역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행한 사역은 다르다. 예수는 여호와의 사역 범위를 뛰어넘어 사역했다. 그는 성육신 하나님의 신분으로 나타나 사역했으며, 십자가의 사역으로 전 인류를 속량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여호와가 행하지 않은 새로운 사역을 했다. 이는 바로 시대를 연 것에 속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수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말씀들을 할 수 있었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고 전 인류와 관련된 사역이지, 사람 몇을 만드는 사역도 아니고 한정된 사람을 인도하는 사역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었는지, 당시에 영이 어떻게 계시했는지, 영이 또 어떻게 사람의 몸에 임하여 역사했는지는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므로 이런 사실로는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증명할 수가 없다. 현실적인 방법은 사람이 접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영이 행한 일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도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너 또한 볼 수 없기 때문에, 단지 그가 행한 사역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행한 사역을 보면, 첫째, 예수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둘째, 예수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고, 최소한 그가 행한 사역은 하나님의 영을 완전히 대변할 수 있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즉, 예수가 행한 사역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은 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사역을 인도하며,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몇 가지로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이사야나 다니엘 같은 대선지자들과 구분할 수 있다. 이사야나 다니엘 같은 사람들은 지식수준이 높은 부류로, 모두 여호와가 인도하던 비범한 사람들이었다. 성육신 하나님이 입은 육신도 식견이 있고 이성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정상적인 인성을 갖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안으로는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인성이 있는지, 그에게 어떤 남다른 인성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에게는 초자연적이거나 특별한 점이 조금도 없고, 대단한 지식은 물론, 이론 수준도 대단하지 않다. 그가 말하는 생명과 그가 인도하는 길은 이론이나 지식에서 얻은 것도 아니고 삶의 경험이나 가정 교육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부 영이 직접 행한 사역, 즉 성육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너무 크고, 특히 사람의 관념에는 막연하고 초자연적인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없고, 정상적이지만 연약한 인성을 지닌 하나님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그릇된 관념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정상인이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 할 수 있겠느냐?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비범한 사람이라면 말씀으로 된 ‘육신’이 아니다. 그가 육신임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성육신한 이상 반드시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성육신한 의의를 완전케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선지자와 인자는 이와 다르다. 은사를 갖춘 그들은 성령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다.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아주 훌륭한 인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인성을 뛰어넘는 많은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하나님처럼 여겼다. 지금 너희는 이런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유사 이래 모든 사람이 가장 헷갈려 한 일이며, 또한 성육신에 관련된 것은 가장 심오한 일이고,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이 말은 너희가 기능을 다하는 데에도, 성육신의 비밀을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경영과 관련된 일이자 이상과 관련된 일이다. 너희가 이것들을 깨닫는다면 이상, 즉 경영 사역을 알아 가는 데 더욱 이로울 것이며, 그렇게 되면 각 부류의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에 대해 깨닫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말들이 너희에게 직접 길을 가리켜 주지는 않지만, 너희가 진입하는 데는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지금 너희의 삶에는 이상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이 너희의 진입에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계속 해결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진입할 동력을 잃게 된다. 그렇게 추구해서 어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2)
어떤 이는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과거에 선지자와 사도들이 한 사역과 어떻게 다릅니까? 다윗도, 예수님도 주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행한 사역이 서로 달랐으나 호칭은 같았어요. 왜 그들의 신분은 다른 겁니까? 요한이 본 것은 이상(異象)이었고, 마찬가지로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이 하려는 말씀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요한의 신분은 예수님과 다른 거죠?”라고 물을 것이다. 예수가 한 말씀은 하나님을 완전히 대변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역을 완벽하게 대변했다. 요한이 본 것은 이상에 속한 것이며,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완벽하게 대변할 수 없었다. 요한, 베드로, 바울이 많은 말을 했고, 예수 또한 많은 말씀을 했는데, 그들의 신분에는 왜 차이가 있는 것이냐?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한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가 대표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고, 하나님의 영이 친히 역사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사역은 새 시대의 사역으로, 누구도 한 적이 없었던 사역이었다. 그는 새로운 길을 열었고, 그가 대표한 것은 여호와이자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다윗은 어떤 호칭으로 불렸는지에 상관없이 그저 피조물의 신분을 대변하고 예수 또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고, 아무리 대단한 이적을 보였을지라도, 그저 피조물일 뿐, 하나님의 영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역했고, 또한 예수나 여호와가 열어 준 시대 안에서 사역한 것이지, 그 밖의 사역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그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구약을 보면,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예언서를 썼으나, 누구도 그들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사역하자 하나님의 영은 그가 하나님임을 증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이제는 너도 알았을 것이다! 과거의 사도며 선지자들은 각종 서신을 쓰고 많은 예언을 했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중 일부만 선택하여 성경에 실었고, 또 일부는 소실되었다. 그들의 말이 전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째서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 또한, 어째서 선택된 것과 선택되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 정말 성령의 말씀이라면 사람이 그것을 고를 필요가 있었겠느냐? 예수의 말씀과 사역은 어째서 4복음서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겠느냐? 그것은 기록한 자의 실수가 아니냐? 어떤 이는 “바울이나 신약의 저자들이 쓴 서신과 행한 사역이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람의 관념이 섞여 있다면, 당신(하나님)이 오늘날 하는 말씀에는 사람의 불순물이 전혀 없습니까? 사람의 관념이 조금도 없는 겁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이 단계의 사역은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 선지자들이 한 사역과 완전히 다르다. 신분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행한 사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매를 맞아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된 후부터 성령에게 이끌려 사역하게 된 사람이다. 그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므로 그가 교회들에 쓴 편지는 전부 예수의 가르침을 잇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주의 보내심을 받아 사역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올 때는 어떤 이름을 받들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대표해 사역한다. 하나님은 와서 곧바로 사역을 하지, 사람처럼 온전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며, 누군가의 가르침을 토대로 사역하지 않는다. 이 단계의 사역은 개인의 체험에 대한 간증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가 소유한 것에 따라 사역한다. 예를 들면, 봉사자의 시련, 형벌 시대, 죽음의 시련,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 등등의 이러한 사역은 전부 과거에 한 적이 없는 사역이자 현시대의 사역이며 사람의 체험이 아니다. 내가 한 말 중에서 어떤 것이 사람의 체험이더냐? 전부 직접 영에서 비롯된, 영의 말씀이 아니더냐? 네가 자질이 너무 부족해 명확하게 알지 못할 뿐이다! 내가 말하는 실제적인 생명의 도는 길을 안내하는 것으로, 여태껏 그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는 누구도 이 길을 체험하지 못했으며, 누구도 이 실제를 알지 못했다. 내가 이 말을 하기 전에는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이런 체험을 이야기하지 못했으며, 이런 구체적인 것들을 말하지 못했다. 이런 내적 상태를 짚어 이런 것들을 드러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오늘날 내가 인도하는 이 길은 과거의 누구도 이끌지 못한 길이다. 만약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 새로운 길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나 베드로는 예수가 인도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체험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 길을 개척한 다음에야 예수가 한 말씀과 이끌어 준 길을 토대로 체험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체험을 하고 그런 서신들을 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체험과 하나님의 사역은 다르며,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의 관념, 사람의 체험으로 얻은 인식과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내가 새 길을 이끌고, 새 사역을 하고 있으며, 요한과 여러 선지자들이 한 말이나 행한 사역과 다르다고 누차 이야기한다. 나는 먼저 체험하고 나서 너희에게 말해 주는 식으로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에 너희를 망치지 않았겠느냐? 과거의 많은 이들이 한 말도 인식 수준이 매우 높지만, 그들은 소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자들의 인식을 토대로 말한 것으로, 길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체험, 깨달음,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중에는 사람의 관념도 있고, 사람이 종합해 낸 경험도 있다. 현재 내 사역의 성질은 그들과 완전히 다르다. 나는 다른 이의 인도를 받아 본 적이 없으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또한, 내가 말하고 교제하는 것은 누구와도 다르며, 여태까지 그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오늘날, 너희 가운데 누가 사역하든 모두 내 말의 기초 위에서 사역한다. 이러한 말씀이나 사역이 없다면 누가 이러한 것(봉사자의 시련, 형벌 시대…)들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누가 인식을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도 이러한 것들을 간파하지 못하겠단 말이냐? 어느 단계의 사역이든, 내 입에서 말이 나오면 너희는 나의 말에 따라 교제를 시작하고, 내가 한 말에 따라 사역하지, 너희 중 어떤 자가 생각해 낸 길이 아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너는 이렇듯 간단명료한 문제를 간파하지 못했단 말이냐? 누군가가 생각해 낸 길이 아니고, 어떤 영적인 사람을 기반으로 생긴 것도 아니라 완전히 새로 개척한 길이다. 심지어 예수의 말씀 중 시대착오적인 것까지 많이 폐하였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천지개벽과도 같은 사역이며, 완전히 새로운 가업을 세우는 것이다. 나의 사역과 말은 모두 새로운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새 사역이 아니란 말이냐? 당시 예수의 사역도 이러했다. 그가 한 것은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 것과도, 바리새인들이 한 것과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과도 달랐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맞을까?’라며 감히 확정하지 못했다. 예수는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와서 사람을 가르치며 한 말은 전부 새로운 것이었으며, 구약의 옛 선지자들이 한 말과 달랐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확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너희 중 많은 이는 이 단계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기 전에 모두 과거의 영적인 사람들을 토대로 실행하고 진입하는 길을 갔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하는 사역은 완전히 다르기에 너희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확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과거에 어떤 길을 갔는지, 누구의 ‘밥’을 먹었는지, 누구를 너의 ‘아버지’로 여겼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와서 새 사역으로 사람을 이끄는 이상, 나를 따르는 자는 모두 내가 한 말대로 해야 한다. 네가 어떤 ‘명문가의 자제’든 너는 나를 따라와야 한다. 너는 더 이상 과거의 실행 방식에 따라 실행해서는 안 된다. 네 ‘양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됐고, 너는 마땅히 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네가 얻어야 할 몫을 구해야 할 것이다! 네 모든 것은 전부 내 손안에 있으니 너는 네 ‘양아버지’를 너무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너를 완전히 주관하지 못한다. 오늘 하는 사역은 전부 새로운 가업을 세우는 것이다. 오늘 말하는 것은 분명히 과거의 것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네가 이것을 사람의 힘만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면 너는 구제 불능의 눈먼 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호칭과 신분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3)
이사야, 에스겔, 모세, 다윗, 아브라함, 다니엘 등은 이스라엘 선민의 지도자나 선지자였다. 왜 그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겠느냐? 성령은 왜 그들을 증거하지 않았겠느냐? 예수가 사역하고 말씀하자 성령은 왜 그를 증거했겠느냐? 왜 다른 사람은 증거하지 않았겠느냐? 똑같이 사람이고 육신이며, 모두 주로 불렸다. 그들이 어떤 호칭으로 불렸든 간에 그의 사역은 그의 어떠함과 본질을 대변하고, 그의 어떠함과 본질은 그의 신분을 대변한다. 호칭은 그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 반면 그가 나타낸 것과 살아 낸 것으로 그의 본질을 대변한다. ‘주’로 불리는 것은 구약에서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어떻게 불리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본질과 원래의 신분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미혹하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고, 본래 사람이며, 다른 이를 미혹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신분이 없다. 다윗도 열두 지파에서 주로 불리지 않았더냐? 예수 또한 주로 불렸다. 왜 예수만을 성육신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것이겠느냐? 예레미야도 ‘인자’로 불리지 않았더냐? 예수도 ‘인자’로 불리지 않았더냐? 어째서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겠느냐?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더냐? 또한, 그들이 한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런 것이 호칭에 달려 있단 말이냐? 예수도 인자로 불렸지만, 그는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으로, 정사를 메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러 왔다. 바로 이 점이 예수의 신분과 본질이 똑같이 인자로 불렸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너희 중 누가 감히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한다면 어째서 에스라의 예언서와 옛 선지자들이 쓴 서적들을 없애 버렸겠느냐? 모두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너희는 어째서 감히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냐? 너에게 성령의 역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느냐? 이밖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이야기를 없애 버렸다. 네가 만약 과거에 기록된 그 책들이 전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일부 책들을 없애 버렸겠느냐? 모두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부 남겨 교회들에게 보내어 형제자매들이 보게 해야 하며, 사람의 생각을 섞어 함부로 취사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바울, 요한 등 사람들의 체험에 개인의 깨달음이 섞여 있다고 해서 그들의 체험과 인식이 사탄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개인의 체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들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들은 당시의 현실적인 체험 배경을 토대로 인식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만약 4복음서가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어째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사람이 당시 예수의 사역에 대해 한 말이 다 다르겠느냐? 못 믿겠다면 성경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아라.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한 사실이 다 다르고, 각각 ‘특색’이 있다. 식견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성육신 하나님도 사람인데 그분이 하는 말씀이 전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나 요한의 말에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다면, 그분이 하는 말씀에는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지 않단 말입니까?”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눈멀고 식견이 없는 자들이다! 4복음서를 잘 보아라. 예수가 마친 일, 예수가 한 말씀에 대한 그들의 기록은 그야말로 각기 다 다르고, 각자 자신의 견해가 있다. 만약 저자가 쓴 것이 전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같고 일치해야지, 어째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느냐?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 너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증거하겠느냐! 너의 그 인식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만약 다른 사람이 너에게 “요한이나 누가의 기록에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다면, 당신들의 하나님이 하는 말씀에는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너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 누가, 마태는 예수가 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가 한 사역을 본 후에 개인의 인식을 말하고, 회고록처럼 예수가 사역한 사실의 일부를 기록했다. 너는 그들의 인식이 전부 성령의 계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성경 외에도 영적인 사람들의 인식이 그들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는데 어째서 그것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냐? 그들도 성령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아니더냐? 너는 오늘날의 사역이 예수가 행한 사역의 기초 위에 나 자신의 견해를 더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사역을 배경으로 삼아 나의 인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가 당시에 행한 것은 어떤 사역이냐? 내가 오늘날 하는 것은 또 어떤 사역이냐? 내가 행하고 말하는 것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들이고, 오늘날 가는 길은 모두 옛사람들이 간 적이 없는 길이며, 역대의 사람들이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길이다. 그것을 오늘날에 열었으니 영의 역사가 아니겠느냐? 과거에 리더가 되었던 사람들의 사역은 성령 역사라고 할지라도 전부 다른 이가 닦아 놓은 기초 위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다르다. 예수의 그 단계 사역도 마찬가지로 혼자 새로운 길을 열고, 세상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했으며, 사람은 마땅히 회개하고 죄를 자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의 사역이 끝난 뒤, 베드로와 바울 등이 예수의 사역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승천한 다음, 그들은 그 영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설령 바울이 매우 높은 내용들을 말했다 해도 그것은 예수가 한 말씀의 기초 위에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내와 사랑, 고난받고, 머리에 수건 쓰는 것, 세례받는 것, 또는 지켜야 할 다른 규례를 전하는 것 등등은 전부 예수가 한 말씀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열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호칭과 신분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4)
당시 예수는 말씀하거나 사역할 때 규례를 지키지 않았으며, 성경의 구약 율법의 사역대로 하지 않았다. 반대로 은혜시대에 해야 할 사역에 따라 했을 뿐이다. 그는 그가 가져온 사역에 따라 행했고, 그의 계획에 따라 행했으며, 그의 직분에 따라 사역했을 뿐, 구약의 율법에 따라 사역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을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들의 말을 이루기 위해 사역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각 단계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규례를 지키거나 일부러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고자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교란하지 않았으며, 그의 이전 사역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가 하는 사역의 특이점은 어떤 규례도 지키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지자도, 예언가도 아닌 ‘실무가’로, 매우 실제적으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기원을 열고 새 사역을 시작했다. 물론, 예수의 사역으로 구약 선지자들의 말들이 많이 이루어졌고, 지금 하는 사역으로도 구약의 옛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다만 오늘은 너와 그 ‘오래된 책력’을 펼쳐 보면서 따지지 않을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사역이 많고, 너희에게 해야 할 말도 많으며, 이러한 사역과 말은 그런 성경 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사역은 너희에게 그다지 큰 의미도, 가치도 없고, 너희에게 도움이 되거나 너희를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새 사역을 할 것이며,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이루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사역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옛 선지자들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성육신 하나님이 크겠느냐, 아니면 옛 선지자들이 크겠느냐? 옛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지배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옛 선지자들을 지배하는 것이냐? 이 말을 너는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호칭과 신분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5)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은 모두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맞물려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닦는 사람이 없었다면 뒤에 온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뒤에 올 사람이 있었으니 길을 닦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사역은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씩 전해 내려오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이어질 수 있었다. 길을 여는 자가 없다면 사역은 전개될 수 없고, 하나님은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단계든 어긋나지 않고 전부 순서대로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한 분의 영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길을 연 자든, 길을 이은 자든, 결코 신분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요한은 길을 열었고 예수는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신분이 요한의 신분보다 낮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호와는 예수보다 먼저 역사했다. 그렇다고 여호와가 예수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느냐? 길을 닦거나 잇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의 본질과 대변하는 신분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려는 이상, 그는 반드시 길을 닦는 사람을 일으켜 사역하게 해야 했다. 요한은 처음에 전도할 때,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쳤다. 그는 처음부터 이 도를 전했다. 왜 그는 이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 말을 한 전후를 따지자면 요한이 먼저 천국의 복음을 말했고, 그다음에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관념대로라면 요한이 새로운 길을 열었으니, 그가 예수보다 당연히 커야 한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통해 길을 열고 주의 길을 예비했을 뿐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길을 닦았지만, 예수의 사역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사역 또한 전부 성령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여호와가 길을 이끈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역은 구약의 모든 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에서 행한 모든 사역을 대표한다. 모세는 그저 땅에서 그 사역을 지켰을 뿐이다. 그의 사역은 인성 협력에 속한다. 당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해 모세를 불렀고,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모세를 일으켰으며, 모세가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해 가나안에 들어가게 했다. 그것은 여호와가 친히 지시한 일이지, 모세가 스스로 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율법도 정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여호와가 친히 반포한 것으로, 단지 모세에게 전하게 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계명을 정했다. 게다가 구약의 율법을 폐하고 새 시대의 계명을 정했다. 어째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이는 같은 맥락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모세가 한 사역은 시대를 대변한 것이 아니며, 새로운 길을 연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가 앞에서 길을 이끌고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한 것이었다. 그는 그저 쓰임 받는 사람에 불과했다. 예수가 왔을 때, 요한은 이미 길을 닦는 단계의 사역을 마치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성령이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와서 바로 그 자신의 사역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모세의 사역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도 그렇게 많은 예언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겠느냐? 예수는 그렇게 많은 예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왜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당시 예수가 했던 사역이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아무도 단언할 수 없었고, 또한 전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한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분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역과 예언들도 직접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고, 여호와의 묵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리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말씀도, 매우 많은 예언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보기에 그렇게 높은 도를 전하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요한이나 이사야, 다윗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을 신이라고 부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다윗 신이나 요한 신이라고 그렇게 부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예수만을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는 하나님의 증거와 그가 담당한 사역, 그리고 그가 이행한 직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다윗, 여호수아, 다니엘, 이사야, 나아가 요한과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나오는 큰 인물들이 행한 사역을 통해 너는 누가 하나님 자신이고, 누가 선지자에 속하고, 누가 사도에 속하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이고, 누가 하나님 자신인지는 그들이 행한 사역의 본질과 유형에 따라 구분되고 확정된다. 네가 이러한 것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인 이유가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역을 하고 더욱이 수많은 이적을 나타냈기 때문이라면, 요한도 그렇게 많은 일과 많은 말을 했고, 모세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못하느냐? 아담은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는데, 왜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않고 그저 피조물이라고 불리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오늘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역과 말씀을 하셨다고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모세도 그렇게 많은 말을 했으니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겠죠?”라고 묻는다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은 왜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이라고 증거하셨으면서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까? 요한이 한 사역이 큽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큽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요한이 한 사역이 크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작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을까요?”라고 반문하여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 자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고 직접 이끌었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이다. 모세에게는 그런 영과 어떠함이 없었고, 그는 그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일과 예수가 한 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행하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인지, 선지자인지, 사도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지는 사역의 성질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너는 의문이 없어질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는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역대로 수많은 큰 인물들이 성경을 해석했다고 해서 너는 그들을 전부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의 해석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저 성경 해석가일 뿐,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신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곱 인을 뗄 수 있겠느냐?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일곱 인을 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 사역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는 김에 곁들여 하는 사역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사역을 똑똑히 알고 있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굳이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6천 년 사역에 굳이 ‘어린양이 성경을 해석하는 시대’를 더해야겠느냐? 그는 새 사역을 하기 위해 왔다. 다만 과거의 사역에 대해 조금 풀어 주어 사람이 6천 년 사역의 실정을 알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구태여 많은 성경 구절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는 사역이다. 너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곱 인을 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호칭과 신분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6)
은혜시대에 요한은 예수를 위해 길을 닦는 사역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할 수 없었으며, 그저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을 이행했을 뿐이다. 요한이 주의 선구자이기는 했지만 성령께 쓰임 받는 한 사람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임했고, 그때부터 예수는 사역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신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그전에 그가 어떻게 믿었든, 연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모두 직분을 이행하기 전 정상 인성의 생활이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자(기름 부음을 받자) 바로 능력이 따랐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와 함께하였으며,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권능을 행하며 능력과 권병을 가졌던 것은 직접 하나님을 대표해 사역하고, 영을 대신해 사역하며, 영의 음성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요한은 성령께 쓰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표하지 못하며 대표할 수도 없다. 요한이 하나님을 대표하려고 했다면 성령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사람의 뜻이 많았을 수도 있고 치우친 점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직접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었다. 요한의 잘못과 그릇됨은 그 본인을 대변하지만 그가 사역한 부분은 성령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그의 전부가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마 그의 치우침과 그릇됨까지도 하나님을 대변하겠느냐? 사람을 대변할 때 치우침과 그릇됨이 있는 것은 정상이지만, 하나님을 대변하는데도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성령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성령은 함부로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지 않는다. 사람들이 높이 받드는 자라고 해도 안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결국 그 자리에 온전히 설 수 없다. 성령은 사람이 함부로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요한의 경우도 성령이 증거한 사람이었고 예수의 길을 닦는 자라고 성령이 밝힌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령이 요한에게 행한 사역은 상당히 적절했다. 예수의 길을 닦는 사람으로서 예수를 위해 길만 닦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요한의 길 닦는 사역만 수호했으며, 그 외에 다른 일은 허락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를 상징하며 길을 닦는 선지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그런 사역은 성령이 수호했다. 요한의 길 닦는 사역을 위한 것이라면 성령은 모두 수호하였다. 하지만 요한이 하나님을 자처하며 자기가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면 성령은 그를 징계했을 것이다. 요한이 한 사역이 아무리 크고 또 성령의 수호를 받았을지라도 그의 사역은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성령이 요한의 사역을 수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그에게 부여한 능력은 길을 닦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역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는 예수가 아니라 그저 길을 닦는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가 중요하기는 해도 사람이 하는 사역을 성령이 허락하는지가 그보다 더 중요하다. 지난날 요한은 아주 크게 증거되었고, 그가 한 사역도 매우 크지 않았더냐? 하지만 요한이 한 사역은 예수를 넘어설 수 없었다. 요한은 그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일 뿐 직접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사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가 길을 닦는 사역을 끝낸 뒤에는 성령이 더는 그의 증거를 수호하지 않았고, 새로운 사역이 그를 따르지도 않았으며, 그도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 떠났다.
악령이 들려 끊임없이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이 대표하는 것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탄을 대표했고, 성령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하게 말하고 그럴듯하게 외쳐 대도 그들은 피조물이며, 사탄에 속한 존재다. 나는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외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다. 굳이 외칠 필요가 있겠느냐? 높이 치켜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지위나 어떤 존칭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가 하는 사역이 바로 그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하나님 자신 아니었더냐? 성육신 하나님 아니었더냐? 설마 그가 증거된 후에야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었겠느냐? 그가 사역을 하기 전부터 ‘예수’라는 이 사람이 있지 않았더냐? 네가 새 길을 열지 못하면 영을 대표할 수 없다. 영의 사역과 영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며, 영이 하는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지혜와 기묘함, 난측함, 사람을 형벌하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나타낼 수도 없다면, 네가 아무리 하나님을 자처해도 허울만 있을 뿐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왔을 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그는 계속 사역을 행하며, 또한 영을 대표해 사역한다. 네가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고,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주님이든 그리스도든 자매든 어떻게 불러도 괜찮다. 하지만 그가 하는 사역은 영의 사역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대변한다. 그는 사람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개의치 않는다. 사람이 그에게 붙인 호칭으로 그의 사역을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를 뭐라고 부르든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고 영을 대표하는 존재이며 영이 인정하는 존재이다. 네가 새 시대의 길을 개척하지 못하고 옛 시대를 끝낼 수도 새 시대를 열 수도 없으며, 새 사역도 하지 못한다면, 너를 하나님이라고 칭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7)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 비단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사역도 하나님을 직접 대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의 체험을 직접 하나님의 경영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체험’은 ‘하나님의 경영’을 뜻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그가 자신의 경륜에 따라 하고자 하는 사역이며 커다란 경영과 관계된 일이다. 반면 사람이 하는 사역은 모두 개인의 체험을 공급하고 앞사람이 개척한 길을 이어 다른 체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른 형제자매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공급하는 것은 다 개인의 체험이나 영적 인물의 영적 저술이다. 성령께 쓰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의 사역은 6천 년 계획 중 큰 경영과 관계된 사역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른 각 단계에 성령이 세운 사람으로, 자신의 역할이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 뿐이다. 그들이 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위해 적합한 길을 예비하거나 하나님이 땅에서 행한 경영 사역의 한 부분을 이어 가는 것뿐이다. 그들은 경영 안에서 더 큰 사역을 할 수 없고, 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없으며, 더욱이 아무도 하나님의 옛 시대 사역을 끝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역은 피조물이 자신의 기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할 뿐, 하나님 자신이 직분을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사역과 하나님 자신이 하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대를 여는 사역은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역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성령의 감동이나 깨우침을 받아서 하는 사역이다. 그들의 사역은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길과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는 길을 이끌어 주는 것이다. 사람의 사역은 하나님의 경영과 관련이 없고 영의 사역을 대변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가 한 사역은 모두 길을 인도하는 것으로, 새 길이든 옛길이든 모두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 지방 교회를 회복시켰든 세웠든, 결국에는 다 교회 건축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행한 것은 전부 은혜시대에 예수와 다른 사도들이 다 하지 못했거나 심화시키지 못한 사역이었다. 그들의 사역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세례를 받고, 떡을 떼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 등은 모두 예수가 사역할 당시 사람에게 요구했던 것을 회복하여 행한 것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다 성경을 지키고 성경에서 길을 찾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진전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 성경에서 새 길을 발견하고 더 훌륭하고 현실적인 실행 방법을 찾아낼 수만 있을 뿐, 하나님의 현재 뜻을 찾아볼 수 없고 나아가 말세에 하나님이 하려는 더 새로운 사역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들이 계속 옛길을 가며 새로워지지 않고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과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하는’ 실행을 고수하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과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니,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라는 말을 지켰다. 나아가 “자매는 설교할 수 없고 순종하는 사람만 될 수 있다”라는 전통 관념을 고집하였다. 그들의 그런 방식대로 계속 이끌어 간다면 성령은 영원히 새 사역을 할 수 없고 사람을 규례에서 해방시킬 수 없으며 사람을 자유롭고 아름다운 경지로 인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바꾸는 이 단계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이 친히 행하고 친히 말씀해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지금 이 흐름 밖에 있는 성령 역사는 모두 정지되어 있고, 한때 성령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 하는 사역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과 다르고, 그들의 신분이나 대표하는 대상도 다르다. 이는 성령이 하려는 사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똑같이 사역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신분과 지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도 몇몇 새로운 사역을 할 수 있고 옛 시대의 사역들을 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하는 사역은 하나님이 새 시대에 나타내려는 성품과 뜻을 나타낼 수 없다. 그저 옛 시대의 사역을 폐하기 위해 사역을 하는 것일 뿐이지,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대변하는 새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낡은 방식을 얼마나 폐하든, 또는 새로운 방식을 얼마나 가져오든, 그들은 사람을 대표하고 피조물을 대표할 뿐이다. 반면 하나님 자신이 사역할 때는 공개적으로 옛 시대의 방식을 폐한다고 선포하지 않고 시대를 열 것이라고 직접 선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행한다. 즉, 직접 자신이 가져온 사역을 선포하고, 자신이 본래 하려던 사역을 행하며, 자신의 어떠함과 성품을 나타낸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의 성품이 과거 시대와 다르고 그의 사역도 과거의 시대와 다른 것 같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저 사역을 이어 가고 더 심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을 선포하고 직접 새로운 사역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사람의 사역은 사고나 연구를 거쳐, 또는 다른 사람이 도출한 결론을 기반으로* 인식을 심화하고 실행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정해진 대로 착실히 따르고’, ‘새 신을 신고 옛길을 가는’ 것이다. 즉,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 가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친히 개척한 길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고,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1> 중에서
다른 사람이 도출한 결론을 기반으로: (직역) 다른 사람의 기초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8)
요한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삭처럼 약속으로 태어났다. 그는 예수를 위해 길을 닦았고 수많은 사역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지자에 속한다. 예수를 위해 길을 닦는 일만 했기 때문이다. 그도 매우 큰 일을 했다. 그가 앞에서 길을 잘 닦아 놓은 후에야 예수가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위해 봉사한 것에 해당하며, 그가 한 사역은 예수의 사역에 이바지한 것이다. 예수는 요한이 길을 닦아 놓은 후에 사역을 시작했으며 더 새롭고 세밀하고 구체적인 사역을 했다. 요한은 시작 사역만 했고, 더 많은 새 사역은 전부 예수가 했다. 요한도 새로운 사역을 했지만, 그는 새 시대를 여는 자가 아니었다. 요한은 약속으로 태어난 자이고, 그의 이름 역시 사자가 지어 주었다. 당시에 누군가 그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를 따라 사가랴라고 하자고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지시했다. 예수의 이름도 성령이 지시한 것이었다. 예수는 성령으로 태어났고 성령이 약속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이고, 인자였다. 요한도 매우 큰 사역을 했는데 어째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않았겠느냐? 예수의 사역과 요한의 사역에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단순히 요한은 예수를 위해 길을 닦는 자였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았기 때문이겠느냐?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치며 천국의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사역은 시작일 뿐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다. 반면 예수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낡은 시대를 끝냈으며 구약 율법도 완전케 했다. 그는 요한보다 더 큰 사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했다. 요한은 길만 잘 닦아 놓았을 뿐이다. 비록 그 역시 큰 사역을 하고 많은 말을 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는 데 그쳤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생명과 길 또는 더 깊은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했다. 요한은 큰 선지자(엘리야)다. 그는 예수의 사역을 위해 장소를 준비하고 적합한 사람들을 예비하였으며, 은혜시대의 길을 연 선구자였다. 정상인의 겉모습만 봐서는 결코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더구나 요한도 매우 큰 사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약속한 자였고, 성령이 그의 사역을 수호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사역을 통해 각자의 신분을 구별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의 겉모습으로는 사람의 본질을 구별할 수 없고, 사람 또한 무엇이 성령의 증거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과 예수의 사역이 다르고 사역의 성질 또한 같지 않으므로 이런 것을 통해 그가 정말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예수는 시작, 후속, 종결, 성취의 몇 단계 사역을 했지만 요한은 시작하는 사역만 했다. 예수는 처음에 회개의 도를 말씀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후에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마지막에는 인류를 죄에서 속량함으로써 그의 전체 시대 사역을 완성했다. 예수는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천국의 복음을 전했다. 이 점은 요한과 같다. 그러나 다른 점은 예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사람들에게 은혜시대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은혜시대에 사람이 실행해야 하는 것과 가야 하는 길은 전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또한 마지막에 그는 구속 사역을 완성했다. 요한은 이런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한 것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직접 하나님을 대표한 것이다. 사람은 약속으로 태어나고, 영으로부터 태어나고, 성령의 수호를 받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이런 설에 따르면 요한도 하나님이고, 모세, 아브라함, 다윗 등등도 모두 하나님이 된다. 이것은 몹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69)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시대를 여는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 합니까? 피조물은 대신할 수 없단 말입니까?” 너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함이다. 물론 새 시대를 여는 동시에 옛 시대도 끝낸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다. 그가 직접 사역을 전개했으므로 옛 시대를 끝내는 것도 그가 직접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긴 증거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친히 사역을 할 때마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 사역이 시작되지 않으면 당연히 옛 사역도 끝나지 않는다. 옛 사역이 끝나지 않았다면 사탄과 싸우는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와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새로운 사역을 해야만 사람이 완전히 사탄의 권세에서 나와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삶과 새로운 시작이 생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영원히 낡은 시대에서 살게 되고 영원히 사탄의 낡은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이 시대를 한 번 이끌어 주면 사람은 어느 정도 해방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이기면 그를 따르는 사람도 이긴다. 시대를 끝내는 일을 창조된 인류에게 맡긴다면 사람이나 사탄의 눈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배반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면 사람이 하는 사역이 사탄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하나님이 친히 열어 놓은 시대에서 사람이 순종하고 따라야만 사탄이 완전히 굴복할 수 있다. 이것이 피조물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다른 일은 할 필요 없이 오직 따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각자 본분을 지키고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이를 대신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피조물의 사역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또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고 사탄을 물리치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시대를 열고 나면 더 이상 친히 인간 세상에 와서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어야 사람은 본격적으로 새 시대로 들어가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하고, 피조물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이는 모두 사역의 원칙이므로 누구도 어겨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직접 한다. 그는 사역을 전개하는 분이자 사역을 끝내는 분이며, 사역을 계획하는 분이자 사역을 경영하는 분이고 나아가 사역을 이루는 분이다. 성경에서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 나는 씨를 뿌리는 자이자 곡식을 거두는 자이니라.’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경영과 관계된 이 모든 사역은 그가 직접 행한다. 그는 6천 년 경륜의 주재자이며, 누구도 그의 사역을 대신하거나 그의 사역을 끝낼 수 없다. 그가 모든 것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한 이상 온 세상이 그의 빛 속에서 살도록 인도할 것이고, 반드시 전체 시대를 끝내 자신의 모든 계획을 이룰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1>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0)
6천 년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전부 나타냈다. 은혜시대에만 나타낸 것이 아니고, 율법시대에만 나타낸 것도 아니며, 말세에만 나타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세에 하는 사역은 심판, 진노, 형벌을 대변한다. 말세에 하는 사역은 율법시대의 사역을 대체할 수 없고, 은혜시대의 사역을 대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세 단계의 사역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를 이루며, 한 분의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대를 나누어서 행한 사역이다. 말세에 하는 사역은 마무리 사역이고, 율법시대의 사역은 시작 사역이며, 은혜시대의 사역은 구속 사역이다. 6천 년 경륜이라는 이 사역의 이상(異象)은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아무도 알지 못해 줄곧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말세에는 말씀 사역만으로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를 열었지만 그것이 모든 시대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말세는 그저 말세이고 하나님나라시대일 뿐, 은혜시대나 율법시대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다만 말세에 6천 년 경륜의 모든 사역을 너희에게 보여 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을 여는 것이다. 이런 비밀은 어떤 사람도 열지 못한다. 사람은 성경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잘 이해해도 글귀를 아는 데 그칠 뿐이다. 성경을 보고 진리를 얼마간 깨닫거나 글귀를 조금 해석하고 유명한 장절을 파고들 수는 있겠지만 그 글귀 속에 담긴 뜻은 영원히 풀지 못한다. 사람이 본 것은 죽은 글귀이지, 여호와와 예수가 사역한 현장이 아니며, 또한 사람은 그 사역들의 비밀을 풀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6천 년 경륜의 비밀은 가장 신비롭고 은밀하며, 사람이 결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그가 직접 사람들에게 해석해 주거나 풀어 주지 않는 한, 그런 것이 사람에게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요, 영원히 닫혀 있는 비밀이 될 것이다. 종교계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너희 역시 오늘날 이렇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6천 년의 사역은 모든 선지자의 예언보다 더 신비로운, 창세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비밀이며, 역대의 선지자도 측량하지 못한 것이다. 이 비밀은 마지막 시대가 되어야 열리며, 이전에는 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비밀을 알고 전부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모든 종교계 인사들은 이 비밀에 정복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상이며, 사람이 가장 알고 싶어 하지만 또 가장 모르는 것이다. 너희는 은혜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예수가 행한 사역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또한 여호와가 도대체 어떤 사역을 했는지, 어째서 율법을 제정해야 했는지, 어째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했는지, 어째서 성전을 건축해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하고 또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해야 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야 이런 일들을 밝히게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4>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1)
성령의 특별한 지시나 인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은 전혀 독립적으로 생활할 능력이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섬김과 목양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그의 사역을 위해 분주히 오가며 교회들을 목양하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을 통해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성령은 사람에게서 취할 만한 부분을 통해 사역하며, 또 그 사람을 온전케 하여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든다. 사람은 이해 능력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목양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모세를 쓴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서 당시 상황에 쓰기에 적합한 부분을 많이 찾아 그것으로 하나님의 그 단계 사역을 했다. 이 단계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쓸 때 성령이 쓸 수 있는 부분을 통해 사역한다. 성령은 그 사람을 지배하는 한편, 쓰기에 합당하지 않은 부분은 온전케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기 위해 사역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선민을 이끌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사람이자 인성으로 협력하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성으로 협력하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려는 사역이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쓰는 목적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더 많이 충족시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직접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쓰임 받는 사람을 일으켜 이런 사역을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는 데 필요한 매개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담당하는 ‘통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 집에 있는 어떤 일꾼이나 사도와는 다르다. 그들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다른 일꾼이나 사도들과 사역의 본질, 그리고 쓰임 받는 배경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사역의 본질과 쓰임 받는 배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으킨 자로,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예비한 사람이며,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역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신성으로 역사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인성으로 협력하는 사역이다. 반면, 다른 일꾼이나 사도의 사역은 그저 각 시기에 교회에 대한 다방면의 지시를 전달하고 실시하는 것이거나, 교회 생활을 유지하는 일부 단순한 생명 공급 사역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일꾼들이나 사도들은 하나님께 지정된 자가 아니며, 또한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선발된 자들로, 한동안의 배양과 훈련을 거쳐 쓰기에 합당한 사람은 쓰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진다. 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선발된 자들이므로 일부는 리더가 된 후 실체가 드러났고, 또 어떤 이는 많은 악행을 저질러 결국 도태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한, 어느 정도 자질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며, 성령이 미리 예비하여 온전케 한 사람이다. 성령이 그를 완전히 인도하는 것은 물론, 특히 사역 면에서는 성령이 지배하고 주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을 인도하는 길에 오차가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사역에 책임을 질 것이며, 언제든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사람을 쓰는 것에 관하여>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2)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든, 쓰임 받는 사람의 사역이든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하나님 자신의 본질은 원래 영이기 때문에 영은 성령이라고도, 일곱 배 강화된 영이라고도 하며, 어쨌든 모두 하나님의 영이다. 단지 시대가 다름에 따라 하나님의 영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 그 본질은 여전히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원래부터 성령의 사역이며,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 또한 성령의 사역에 속한다. 쓰임 받는 사람이 하는 사역 역시 성령의 사역이다. 다만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완전한 발현으로, 조금의 오차도 없지만, 쓰임 받는 사람의 사역은 성령의 직접적인 발현이 아니고, 완전한 발현은 더더욱 아니며, 사람에게 속하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다. 성령은 역사 형식이 매우 다양하고, 어떤 조건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역사한다. 이러한 역사는 모두 각기 다른 사역의 본질을 나타내며, 시대별, 국가별로 행하는 사역도 다르다.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매우 다양하지만, 어떻게 역사하고 어떤 사람에게 역사하든 모두 서로 다른 본질을 갖는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행해지는 역사는 모두 원칙이 있으며, 역사할 대상의 본질을 대변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적합한 범위와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서 행해지는 사역은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과 다르고, 자질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도 서로 다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서 행해지는 사역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서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과 같은 사역을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떤 방식으로 하든 대상에 따라 행해지는 사역이 서로 다르며, 다양한 사람의 내적 상태와 본성에 따라 그가 역사하는 원칙도 다르다. 성령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역사할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고유의 본질에 따라 역사하지, 사람이 원래 갖고 있는 본질을 넘어서는 요구를 하지 않고, 본디 갖고 있는 자질을 뛰어넘어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에게 하는 사역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는 대상의 본질을 보여 준다. 사람의 고유한 본질은 변하지 않고,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질은 한계가 있다. 성령은 사람을 쓰거나 사람에게 역사할 때, 사람의 유한한 자질에 따라 역사하여 사람에게 얻는 것이 있도록 한다. 성령은 쓰임 받는 사람에게 역사할 때, 그 사람의 타고난 재능과 고유한 자질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한다. 고유한 자질을 모두 발휘함으로써 사역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이다. 즉, 그는 사람에게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해 사역함으로써 사역 성과를 내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서 하는 사역은 직접 영의 사역을 발현하는 것으로, 사람의 생각이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이는 사람의 은사나 체험, 선천적 조건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는 모두 사람에게 유익하며, 사람을 만들기 위해 이뤄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온전케 될 수 있는 데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온전케 될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온전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되기도 힘들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어도 결국엔 도태되고 만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완전히 온전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길은 온전케 되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저 성령의 일방적인 역사만 있을 뿐, 사람의 주관적인 협력도, 올바른 추구도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뤄지는 성령의 역사는 온전케 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역사가 된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직접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사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사역을 발현할 뿐이다. 즉,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발현됨으로써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3)
성령의 역사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통해, 그리고 서로 다른 조건을 통해 이뤄지고 완전케 된다.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이 시대 전체의 사역과 그 시대 사람의 진입을 대변하지만, 사람의 구체적인 진입과 관련된 사역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며, 성육신 하나님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 자신의 직분은 성육신이 하는 사역이며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통해 완전케 되지, 어느 한 사람이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것도, 전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들을 이끄는 사람들도 성령의 역사를 완전히 대변할 수는 없으며, 이끄는 사역의 일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 쓰임 받는 사람의 사역, 그리고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부분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시대 전체를 인솔하는 것이다. 쓰임 받는 사람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 있은 뒤에 보내심을 받거나 사명을 받아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인솔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이다. 성령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은 그 자신의 모든 사역을 수호하기 위한 것, 즉 모든 경영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자 그의 증거를 수호하는 동시에 온전케 될 수 있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 부분의 사역이야말로 성령의 완전한 사역이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 없다면, 모든 경영 사역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전 인류와 관계된 사역이자 시대 전체를 대변하는 사역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성령 역사의 모든 동향과 추세를 대변한다. 반면, 사도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 있은 이후에 이어지는 것으로, 시대를 이끌지 못하며,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성령 역사의 동향을 대변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사역을 할 뿐이며, 경영 사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하는 사역은 경영 사역의 내용이지만, 사람이 하는 사역은 단지 쓰임 받는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이며 경영 사역과는 무관하다. 신분, 그리고 행하는 사역이 대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성령의 역사라고 해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의 본질적 차이는 매우 뚜렷하다. 또한, 서로 다른 신분을 가진 대상에게 이뤄지는 성령의 역사에도 경중의 차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역사의 원칙과 범위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4)
사람이 하는 사역은 그 사람의 체험과 인성을 대변한다. 사람이 공급하는 것과 사람이 하는 사역은 그 사람을 대변하며, 사람의 사역에는 사람의 깨달음, 사람의 추리, 사람의 논리는 물론이고, 풍부한 상상력까지 모두 포함된다. 특히 사람의 체험은 사람의 사역을 더 잘 대변한다. 사람이 어떤 것을 체험하면 그 사람의 사역에 그런 성분이 묻어나기에 사람의 사역은 사람의 체험을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극적인 상태에서 체험을 했다면, 그가 교제하는 말의 대부분은 소극적인 성분이다. 그가 그동안 긍정적으로 체험하고 특별히 긍정적인 면에서 길이 있다면, 그의 교제는 다른 사람을 고무시킬 것이고, 사람은 그에게서 긍정적인 부분의 공급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이 기간에 사역하는 사람이 소극적으로 되었다면, 그가 교제하는 말에도 늘 소극적인 성분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제는 사람을 가라앉게 하며, 사람들은 그의 교제가 끝난 후 자기도 모르게 침울한 기분이 들게 된다. 따르는 사람의 상태는 이끄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사역하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대로 겉으로 드러난다. 또한, 성령의 역사는 흔히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변한다. 성령은 사람의 체험에 맞춰 역사하고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람의 정상적인 체험 과정에 따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사람은 자신이 본 것과 체험한 것을 교제하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토대로 자신이 보고 체험한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책임은 하나님의 사역이나 말씀이 끝난 후,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과 진입해야 할 것을 찾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역은 사람의 진입과 실행을 대변한다. 물론, 이러한 사역에는 사람의 경험과 교훈, 또는 일부 생각들이 섞여 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든, 사람을 통해 역사하든 아니면 성육신을 통해 역사하든, 모두 사역하는 사람이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의 고유한 어떠함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다. 성령은 아무 까닭 없이는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아무 근거 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역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람의 성품이나, 낡은 관념, 낡은 사상이 변화될 수 있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모두 사람이 보고 체험한 것이며,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도리나 관념이라고 해도 전부 사람의 사유로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크기에 상관없이 사람이 체험한 것, 본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구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으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람의 사유로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전 인류를 이끄는 그의 사역을 선포하는데, 이는 사람의 세부적인 체험과 무관하며, 그 자신의 경영과 연관된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사람의 체험이고,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함이다. 이 어떠함은 곧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으로, 사람이 갖출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체험은 하나님이 나타낸 어떠함을 토대로 보고 인식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인식한 것을 모두 사람의 어떠함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질을 토대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사람의 어떠함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하고 본 것을 교제할 수 있다. 체험하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나 사람의 사유로 닿지 못하는 것, 즉 사람의 내면에 없는 것은 교제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상상이나 도리일 것이다. 요컨대 그런 말에는 실제가 조금도 없다. 가령 네가 사회의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다면 너는 복잡한 사회관계를 제대로 교제할 수 없다. 또한, 너에게 가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가정사를 교제할 때 너는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교제나 사역은 그 사람 내면의 어떠함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을 교제할 때, 너에게 체험이 없으면 너는 상대방의 인식을 함부로 부인할 수 없고, 더욱이 상대방의 인식을 백 프로 확신할 수도 없다. 그가 교제하는 것은 네가 한 번도 체험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것이며, 네가 사고를 통해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그의 인식을 통해 앞으로의 형벌과 심판의 길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 역시 너에게 이론적인 인식으로만 남을 뿐 너의 앎을 대체할 수 없으며, 너의 체험은 더더욱 대체할 수 없다. 어쩌면 너는 상대방의 인식을 들으면서 확실히 옳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나, 막상 체험하게 되면 실행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는 상대방의 인식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중의 일부를 근본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관념을 갖고 마지못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나, 막상 체험하게 되면 너에게 관념을 갖게 한 그 인식이 오히려 너의 실행에 길이 되어 주고, 또한 실행할수록 그 말의 실제 가치와 의의를 더 잘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너는 체험을 하고 난 후에는 네가 체험한 일에 대해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인식을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인식이 진실하고 실제적인지, 어떤 사람의 인식이 이론적이고 무가치한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말하는 인식이 진리에 부합하는지를 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너에게 실제 체험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너의 체험 속에 진리가 있다면 너의 인식은 실제적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너는 체험을 통해 분별력과 식견을 키우고, 인식을 끌어올릴 수 있으며,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지혜와 상식을 늘릴 수도 있다. 진리가 없는 사람이 말하는 인식은 아무리 높아도 그저 도리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은 육적인 일에는 아주 지혜로울지 몰라도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분별력이 없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 대한 체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 있어 트이지 못한 사람이며,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네가 어떤 측면의 인식을 말하든 그것이 네 어떠함이라면 곧 네가 직접 체험한 것이고 너의 진실된 인식이다. 언제나 도리만 말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진리와 실제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도 그들의 어떠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도리 역시 고심을 거듭해 생각해 낸 것이고, 그들의 머리로 심사숙고한 끝에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 그것은 그저 도리이자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일 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5)
다양한 사람의 체험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영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할 수 없으며, 각종 영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떠함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영적인 것과 진리를 인식하려면 반드시 실제 체험이 필요하다. 너는 인성 생활의 상식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것은 또 어떠하겠느냐? 교회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을 이끄는 사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실제 체험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하며,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체험 또한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만이 일꾼이나 사도가 되어 교회들을 이끌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작은 따르는 자가 될 수 있을 뿐, 이끄는 자가 될 수 없으며,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사도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사도의 역할은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도, 싸우는 것도 아닌, 생명을 돌보고 사람의 성품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명과 중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이지, 아무나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역은 생명의 어떠함이 있는, 즉 진리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만 맡을 수 있는 것으로, 포기할 수 있고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고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체험이 없고 책망과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사역을 할 수 없다. 체험이 없는 사람, 즉 실제가 없는 사람은 실제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 측면의 어떠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인솔하는 사역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진리가 없을 경우 도태될 대상이 된다. 네가 얘기하는 깨달음은 너라는 사람이 어떤 고난의 삶을 체험했는지, 어떤 일에서 형벌을 받고 심판을 체험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시련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서 연단을 받았고, 어떤 일에서 연약했다면, 그 일에 체험이 있고, 또 그 일에서 길이 생긴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이가 결혼에서 좌절을 겪었다면, 그는 대부분 다음과 같이 교제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려야 하며, 제 일생과 결혼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제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사람 내면의 모든 것과 어떠함은 교제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말의 속도나 성량 등 체험과 무관한 일은 사람의 소유와 어떠함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저 사람의 성격이나 본성의 좋고 나쁨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을 뿐, 사람의 체험 유무와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다. 말의 표현 능력이나 기교, 속도는 훈련이 가능한 일이기에 사람의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너는 네 체험을 교제할 때 네가 마음으로 중시하는 것과 네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어떠함을 대변하지만, 사람은 내가 하는 말에 이를 수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사람이 체험한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의 어떠함이다. 어떤 이는 내가 교제하는 것이 내가 체험한 것이라고만 인정할 뿐, 영의 직접적인 발현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은 당연히 내가 체험한 것이고, 6천 년 경영 사역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는 태초에 인류를 창조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체험했는데 어찌 말하지 못할 수 있겠느냐?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꿰뚫고 있고 벌써 다 살펴보았는데, 어찌 제대로 말하지 못할 수 있겠느냐? 나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므로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다. 사람은 모두 내게서 나왔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내가 한 사역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 그 사역은 내 육신이 한 것이 아니지만 영의 직접적인 발현이고, 나의 소유와 어떠함이다. 그러기에 나는 발현할 자격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사역을 할 자격도 있다.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사람이 체험하고 본 것이며, 사람 혼자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사람의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일들만 나눌 수 있다.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말은 영의 직접적인 발현으로, 영이 이미 행했던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신이 체험한 것도, 본 것도 아니지만, 나타내는 것은 여전히 그의 어떠함이다. 육신의 본질이 영이고, 나타내는 것은 영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설령 육신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영이 이미 행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에 육신의 발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가 하는 사역을 보게 한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사람들이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과 깨달아야 할 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을 이끌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것은 붙들어 주는 사역이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인류를 위해 새로운 활로와 시대를 열고, 평범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밝혀 그의 성품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것은 전 인류를 이끄는 사역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6)
성령의 사역은 전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며,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 무익한 사역은 조금도 없다. 진리의 깊이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이 어떻게 행하든 사람에게는 전부 유익하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직접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반드시 그와 협력하는 사람을 통해 그의 사역을 나타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이 하려는 사역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한다면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사역하면 많은 불순물이 섞이게 마련이고, 이는 성령의 원래 사역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진리도 어느 정도 달라지게 된다. 따르는 사람들이 얻는 것도 성령의 원래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사람의 체험, 또는 사람의 인식이 결합된 것이다. 따르는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얻는 부분은 정확한 것이고, 얻는 사람의 체험과 인식은 사역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 사역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가 있고, 그들이 그 깨우침과 인도를 기반으로 체험하며, 그 체험 과정에서 사람의 생각과 경험, 인성의 어떠함이 결합되어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인식이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체험한 후에 실행하는 길이다. 사람마다 체험이 서로 다르므로 이 실행의 길도 완전히 같을 수 없으며, 체험한 일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이 성령의 깨우침이지만, 깨우침을 받은 사람에 따라 깨우침에 대한 인식과 실행이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실행할 때 오차가 작고, 어떤 사람은 오차가 크며, 또 어떤 사람은 완전히 틀리게 실행한다. 사람마다 이해 능력이 서로 다른 데다가 고유한 자질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편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의 진리를 듣고 저렇게 이해하며, 어떤 사람은 치우치는 면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진리의 참뜻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해한 대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이다. 이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 그가 하는 사역이 바로 그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가 이끄는 사람도 진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진다. 설령 그릇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소수일 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진리를 그릇되게 이해하는 자라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의심할 여지 없이 치우치고 그릇된 것이다. 그런 자들은 모두 그릇된 자들이다. 철두철미하게 그릇된 자들이다. 따르는 사람들의 진리에 대한 인식 정도는 대체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에게 달렸다. 물론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는 오차가 없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지만, 사역하는 사람은 완전히 정확할 수는 없고 완전히 믿을 만하다고도 할 수 없다. 사역하는 사람이 진리 실행에 길이 있고, 또한 그 길이 매우 실제적이라면, 따르는 사람도 실행의 길을 갖게 된다. 만약 사역하는 사람이 진리 실행에 길이 없고 그저 이론만 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실제가 전혀 없게 된다. 따르는 사람의 자질과 본성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사역하는 사람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따르는 사람의 진리에 대한 이해 정도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모두 사역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이는 일부분 사람에게만 적용됨). 사역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그를 따르는 사람도 그 사람처럼 된다. 사역하는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모두 자신의 어떠함이며, 또한 조금도 남기지 않고 나타낸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달성하길 원하거나 혹은 그 자신이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은 사역할 때 자신이 행한 것에 근거해 따르는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예 해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것은 진입의 방해물이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7)
책망 훈계와 심판 형벌을 겪은 사람의 사역에는 편차가 훨씬 적고, 사역할 때 나타내는 내용도 훨씬 정확하다. 반면, 천성대로 사역하는 사람의 오차는 상당히 큰 편이다.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이 사역하면서 나타내는 것에는 천성적인 것이 너무 많아 성령의 사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자질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책망과 훈계, 심판을 겪어야만 하나님이 맡겨 준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심판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진리의 원칙에 부합할 수 없고, 행하는 것이라고는 전부 천성적인 것과 인위적인 호의에 불과하다. 책망 훈계와 심판을 겪은 사람이 사역을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할 때보다 훨씬 정확하다. 심판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것은 육적인 것과 사람의 사유일 뿐이고, 거기에는 사람의 총명과 선천적인 재능이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의 선천적인 자질에 끌려 그의 앞으로 가게 된다. 그가 나타내는 것에는 사람의 깨달음과 체험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본뜻과 어긋나고 오차도 너무 크다. 그런 사람이 사역을 하면 사람을 하나님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 준 사역을 할 자격이 없다. 자격을 갖춘 일꾼이 하는 사역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에 깊이 진입하게 할 수 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고, 게다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일을 할 수 있으며, 규례의 제약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줄 수 있고, 또한 생명이 점차 성장하고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게 할 수 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일꾼이 하는 사역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는 어리석게 사역을 하며 사람을 규례 속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는 사람에 따라 요구를 달리하지도 않고, 사람의 실제 필요에 맞춰 사역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역에는 규례와 이론이 너무 많아 사람을 실제 속으로 이끌 수 없으며, 생명이 성장하는 정상적인 실행 속으로 이끌 수도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규례를 지키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인도는 사람을 치우치게 만든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너를 어떻게 인도할지가 결정되며, 그는 너를 그의 소유와 어떠함 안으로 이끌 수 있다. 따르는 사람이 이끄는 사람의 자격 여부를 판단하려면 그가 인도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 사역의 효과가 어떠한지, 따르는 사람이 얻은 것이 진리의 원칙에 맞는지, 사람의 변화에 적합한 실행의 길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관건이다. 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역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어리석게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의 진입에 관련된 일이다. 네가 누구의 인도에 길이 있고, 누구의 인도에 길이 없는지를 분별할 수 없다면, 쉽게 미혹된다. 이것들은 모두 너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역에는 천성적인 것이 너무 많고, 사람의 뜻도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의 어떠함은 천성적인 것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듬어지면서 얻게 된 생명도, 변화를 거치며 갖게 된 실제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줄 수 있겠느냐? 사람의 원래의 생명은 사람의 선천적인 총명이나 재능을 말한다. 이런 총명이나 재능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요구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온전케 되지 않고, 패괴 성품이 책망과 훈계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매우 멀며, 사람의 상상과 단편적인 체험 등 막연한 것들이 섞여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총체적인 목표가 없고, 모든 사람의 진입에 적합한 진리가 없으며,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의 대부분이 어려운 일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뜻으로 행하는 사역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사람의 사유와 관념은 사람의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사람은 천성적으로 진리를 실행하는 본능이 없으며, 진리를 직접 깨닫는 본능도 없다. 거기에 패괴 성품까지 더해졌으니 그런 천성적인 사람이 사역을 하면 전부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온전케 된 사람은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에 대한 체험이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사역하는 과정에서 막연하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사람의 불순물도 점점 줄어들며, 그의 사역과 섬김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그가 하는 사역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고 현실적이 된다. 사람 두뇌의 사유는 성령의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사람에게는 풍부한 상상력과 합리적인 논리력, 그리고 노련한 처세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교정되지 않는다면 전부 사역을 가로막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역은 가장 정확한 수준에 이를 수 없으며, 특히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의 사역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8)
사람이 하는 사역은 범위가 있고 제한적이다. 한 사람은 특정 단계의 사역만 할 수 있을 뿐,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사역은 할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규례로 이끌게 된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특정 시기, 또는 특정 단계에만 적용될 뿐이다. 사람의 체험에는 모두 범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실행하는 길과 깨달은 진리는 모두 특정 범위에 적용되며, 사람이 가는 길이 완전히 성령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받을 수만 있지, 완전히 성령으로 충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으며, 정상 인성의 두뇌 사유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범위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그들은 다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정상 인성의 삶 속에서 진리를 체험하는 것이지, 정상 인성의 삶을 벗어나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 인성의 삶을 유지하는 기초 위에서 성령이 깨우쳐 주는 진리를 체험하며, 게다가 그 진리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고, 그 깊이도 사람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다. 그들이 가는 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정상 인성의 삶이자,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 정상인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성령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상 인성의 체험을 보면, 추구하는 사람이 다름에 따라 성령이 하는 사역도 각기 다르다. 또한, 사람이 체험하는 환경과 범위가 서로 다르고, 사람의 생각과 사유가 섞이기 때문에 사람의 체험에는 서로 다른 정도의 불순물이 섞이게 된다. 어떤 진리에 대한 인식은 각자 개인의 조건 차이에 따라 다르다. 그들이 인식하는 진리의 참뜻은 완전하지 않으며, 단지 어느 한 측면, 또는 여러 측면에 국한된다. 사람이 체험하는 진리의 범위 역시 개인의 조건에 따라 다르므로 똑같은 진리라고 해도 사람마다 인식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기에 성령의 뜻을 완전히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잘 맞는다고 해도, 또 사람의 체험이 성령이 하려는 온전케 하는 사역에 매우 근접한다고 해도 사람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종만 될 수 있고 하나님이 맡긴 사역만 할 수 있으며, 그저 성령의 깨우침으로 얻은 인식과 자신이 직접 체험해서 얻은 진리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성령의 대변인이 될 자격도, 조건도 없으며, 사람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자격 또한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의 사역 원칙이 있고,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체험과 조건을 갖고 있다. 사람의 사역에는 성령의 깨우침으로 얻은 모든 체험이 포함되며, 이 체험은 사람의 어떠함만 대변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의 어떠함이나 성령의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는 길을 성령이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을 대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사역과 체험은 완전한 성령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사역은 흔히 규례에 빠지고, 사역 방식도 제한된 범위 안에 한정되기 쉬워 사람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인도할 수 없다. 따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살며, 체험 방식 또한 제한된 범위 안에 있다. 사람의 체험은 모두 한계가 있고, 사역 방식도 몇 가지로 한정되며, 성령의 사역이나 하나님 자신이 행하는 사역과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의 체험은 어쨌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어떻게 행하든 규례가 없고, 하나의 방식에 국한되지 않으며, 어떤 규례도 없이 자유롭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따른 사람이라도 그의 사역 방식에서 어떤 법칙도 도출해 낼 수 없다. 비록 그의 사역에는 원칙이 많지만,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지고 새로운 발전이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시기에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사역을 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몇 가지 인도를 할 수 있어 사람이 언제나 새로운 진입을 하고, 늘 새로운 변화를 얻게 한다. 그의 사역은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너는 그가 사역하는 법칙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야 따르는 사람들이 규례에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하는 사역은 언제나 사람의 관념을 피해 가고, 사람의 관념을 일축한다. 진심으로 그를 따르고 추구하는 사람만이 성품의 변화를 얻을 수 있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살 수 있으며, 어떤 규례의 제약이나 종교 관념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사람은 사역할 때, 자신의 체험과 자신이 달성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해 사람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의 기준은 특정 범위에 국한되며, 실행 방법 역시 매우 제한적이다. 따르는 사람까지 어느샌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살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규례나 의식이 형성된다. 만약 직접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지도 않고, 심판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일정 기간 사역을 맡긴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종교가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문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합격한 리더라면 반드시 심판을 겪고 온전케 됨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심판을 겪지 않은 사람은 설령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해도, 막연하고 실제가 없는 것만 나타내게 되며, 오랜 시간 인도하다 보면 사람을 막연하고 초자연적인 규례 속으로 이끌게 된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의 육과 사유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의 관념에 반하며, 막연한 종교적 색채가 섞여 있지 않다. 그의 사역 성과는 그에 의해 온전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고, 사람의 사유로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79)
사람의 머리에서 비롯된 사역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계의 목사나 지도자들은 은사와 직함으로 사역을 하며, 오랫동안 그들을 따른 사람들도 그들의 은사에 전염되고 그들의 어떠함에 물든다. 그들은 사람의 은사와 재능, 그리고 지식을 중시하며, 초자연적인 것들과 심오하고 비현실적인 수많은 도리(물론 이 심오한 도리는 전부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것들임)도 중시한다. 그들은 사람의 성품 변화를 중시하지 않는 반면, 설교 능력과 사역 능력 육성, 그리고 지식과 풍부한 종교적 도리 함양을 중시한다. 또한, 사람의 성품 변화가 어떠한지,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어떠한지는 중시하지 않으며,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와 비정상적인 상태는 더구나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의 관념을 일축하지도, 들추어내지도 않으며, 더욱이 사람의 부족한 점과 패괴 성품을 책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은 대부분이 은사로 섬기고, 종교적 관념과 신학 이론만 퍼뜨리며, 현실과 동떨어져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인재 양성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신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양성하여 사역을 하도록 하고,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6천 년 사역에서 너는 법칙을 찾아낼 수 있느냐? 사람이 하는 사역은 규례와 격식이 많고, 사람의 생각은 너무 교조적이다. 그래서 사람이 나타내는 것도 사람의 체험 범위 안에서 얻은 인식과 체득에 불과하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 외에 다른 것은 나타내지 못한다. 사람의 체험이나 인식은 선천적인 은사나 사람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직접적인 목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목양을 받아들일 기관(器官)만 가지고 있을 뿐, 신성의 어떠함을 직접 나타낼 수 있는 기관은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은 원천이 될 수 없으며, 그저 원천 수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사람의 본능이자,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기관과 사람의 본능을 잃는다면 그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잃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잃은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서 인식과 체험을 얻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잃은 것이다. 즉, 피조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잃은 것이자 피조물로서의 존엄성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이 신성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이다. 육신으로 나타내든, 영이 직접 나타내든 그것은 하나님의 직분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과정에서, 혹은 사역이 끝난 후에 사람이 자신의 체험이나 인식을 말하는 것(사람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본분이고, 사람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거기에는 많은 규례가 있을지라도,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조금도 여지를 두지 말고 성심성의를 다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0)
너희는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너는 사람의 사역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사람의 사역에는 사람의 체험 성분이 많고, 사람이 나타내는 것은 사람의 어떠함이다. 하나님도 사역할 때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지만, 그의 어떠함은 사람의 어떠함과 같지 않다. 사람의 어떠함은 사람의 체험과 생애(사람이 평생 어떤 체험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또는 어떤 처세 철학을 갖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이 나타내는 어떠함은 서로 다르다. 네가 사회 경험을 갖고 있는지, 가정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경험했는지는 모두 네가 나타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에서는 그의 사회적 이력을 볼 수 없다. 그는 사람의 본질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으며,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을 모두 들춰낼 수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역 행위는 더욱 잘 들춰낼 수 있다. 세상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지 않지만 일반인의 본성과 세상 사람의 모든 패괴를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어떠함이다. 그는 세상살이를 해 보지 않았지만, 세상살이에 관련된 작은 것까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의 본성을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현재나 과거의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여기에는 처세 철학이 아닌, 지혜와,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기묘함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의 어떠함으로, 사람에게 공개되기도 하고, 숨겨져 있기도 하다. 그가 나타내는 것은 비범한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영의 고유한 속성과 어떠함이다. 그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천하의 일을 알고 있다. 그는 지식도, 식견도 없는 ‘유인원’들을 접했지만 지식보다 뛰어나고 위인보다 고매한 말씀을 선포한다. 또 인성이 없고 인성의 규칙과 인성 생활을 모르는 어리석고 무감각한 사람들 속에서 살지만, 인류에게 정상 인성으로 살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동시에 인류의 비열하고 천박한 인성을 들춰낸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어떠함이며, 육에 속하는 그 어떤 사람의 어떠함보다도 높다. 그는 복잡하고 번거로우며 불결한 사회생활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패괴된 인류의 본질을 남김없이 들춰낼 수 있다. 불결한 사회생활은 그의 육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의 패역을 들춰내기만 할 뿐, 사람에게 처세 경험이나 교훈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때, 사회 조사도, 사람의 가정 조사도 할 필요가 없다. 그가 사람을 들춰내고 심판하는 것은 그의 육신이 체험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사람의 패역을 알고 인류의 패괴를 증오했기에 사람의 불의를 들춰내는 것이다. 그가 하는 사역은 다 사람에게 그의 성품을 공개하고, 그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역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육에 속한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1)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육신의 체험을 대변하지 않고, 사람이 하는 사역은 그 사람의 체험을 대변한다.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직접 진리를 선포하지만, 사람은 진리를 체험한 후에야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규례가 없고, 시간과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도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그의 어떠함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그의 사역은 다 자유롭게 이뤄진다. 사람은 조건과 배경이 없이는 사역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진리에 대한 체험도 말하지 못한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인지, 사람의 사역인지는 대조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없고 사람의 사역만 있다면, 너는 사람의 말이 고차원적이어서 아무도 해낼 수 없고, 말투나 일 처리 원칙, 사역할 때의 능숙함과 진중함도 아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만 알 뿐이다. 너희는 자질이 뛰어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우러러본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서는 그의 대단한 인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매우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역할 때 정상적이며 실제적이지만, 그것은 또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사람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사역을 보면, 그 사람의 체험이나 상상력, 추리력이 아주 높고 인성이 특히 좋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사람을 탄복하게 할 수는 있어도 경외와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사역 능력이 있고 체험이 깊으며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보며 탄복하지만, 어찌 됐든 경외하지는 않는다. 그저 감탄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사람이 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것임을 인지하며 신선함과 놀라움을 느낀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측량할 수 없고 지혜로우며 또 놀랍다는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그가 하는 사역의 비밀이 사람의 사유로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다만 그의 요구에 다다르고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그를 뛰어넘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의 사역은 사람의 사유나 상상을 초월하고,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지만, 그는 사람들 가운데 와서 새로운 길을 열어 사람을 더 새롭고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인도했으며, 그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진전과 시작을 얻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것은 탄복이 아니다. 탄복뿐만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경외와 사랑이며, 하나님의 기묘함을 느끼고, 그가 하는 사역과 말씀을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사람은 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을 받곤 한다. 충분히 깊게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지혜로움과 기묘함을 느낄 수 있다.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무궁무진한 힘이 생겨난다. 두려움이나 어쩌다 한 번씩 생기는 추앙심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형벌과 심판을 체험한 사람은 또 그의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을 느낀다. 그의 사역을 아무리 많이 체험한 사람이라도 그를 측량하지 못한다. 진실로 그를 경외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사역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사람의 관념을 일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람에게 원하는 것은 완전한 탄복이나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진실한 경외와 순종이다. 이렇게 많은 사역에서 진실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전부 그에게 탄복을 넘어선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형벌과 심판의 사역을 통해 그의 성품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그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경외심과 순종을 자아낸다. 그의 어떠함과 성품이 피조물과 같지 않고, 피조물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 피조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경외와 순종을 받을 자격이 있고, 사람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체험하고, 또 그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는 사람은 다 경외심을 갖게 된다. 그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들, 즉 그를 아예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른다고는 하나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천성이 패역한 자들이다. 그의 이러한 사역이 이루려는 성과는 바로 피조물로 하여금 창조주에게 경외심을 갖고, 그를 경배하며, 조건 없이 그의 권세 아래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역으로 이루려는 최종 성과이다. 이러한 사역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여태까지의 패역에 전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 도태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그저 탄복하거나 경원시하는 것에 그치고, 사랑이 조금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온전케 될 조건이 결핍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했음에도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에게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정은 더더욱 받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심판을 겪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자는 본성을 고치지 못하는, 극도로 악랄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모두 도태되고 징벌받을 대상이며, 또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똑같이 징벌을 받게 된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심지어 불의를 행한 사람이 받는 고통보다 더 크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2)
하나님의 사역은 어쨌든 사람의 사역과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 또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는 하나님만의 성품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 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의 사역에서 발현되고, 사람의 본분은 사람의 체험에서 체현되고 사람이 추구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의 말인지는 사역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이 밝힐 필요도,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증거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누군가를 압제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모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일이지 강요할 일도,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사람의 본분은 사람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으므로 사람이 따로 체험을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역사하는 동시에 본디 지닌 성품을 나타낸다. 사람의 사역이라면 숨길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더더욱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성품을 가릴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사역이나 말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거나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반면, 하나님은 육신을 입었으므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을 사람의 사역이나 본분으로 정의 내려선 안 되며, 하나님의 음성과 바울의 서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논하거나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사람의 교훈과 동등하게 대해선 더더욱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은 원칙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본질에 따라 구분이 된다. 절대 사역의 범위나 사역의 단기간적인 효율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 측면에서 원칙적인 오류를 범한다. 사람이 보는 것은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겉면이지만, 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의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보통 사람의 본분으로 여기고, 인간의 큰 사역을 사람의 본분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으로 여긴다면, 원칙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자유롭게 서신과 전기를 쓸 수 있지만, 그것은 성령 역사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의 지혜와 사유로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탐구해서 밝히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너희가 이 원칙적인 일들에 아무 느낌도 없다면 그것은 너희의 믿음이 참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너희의 믿음은 막연함으로 가득할 뿐이며, 원칙이 없고 어정쩡할 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양자의 본질적인 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몰지각한 믿음이 아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13편 서신’을 어떻게 보느냐>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3)
예수는 땅에 와서 33년 반 동안 살았다. 그가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였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의 일부를 얻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와서 자신을 낮추고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고통도 견뎌 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그 모든 모욕과 비방, 그리고 크나큰 고통을 견디며 십자가에 못 박혀 구속 사역을 이루었다. 그 단계 사역이 끝난 후 사람은 하나님이 지극히 큰 영광을 얻은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하나님 영광의 일부만 얻었을 뿐이다. 예수는 온갖 고통을 견뎠고, 자신을 낮추고 감추었으며,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광의 일부만 얻은 것으로,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얻은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또 한 부분의 영광이 있다. 그것은 땅에 와서 실제적으로 사역하면서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단계 사역에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했지만, 그 단계의 사역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단계에서 예수는 주로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크나큰 고통을 견뎌 냈으며, 하나님이 그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기꺼이 바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사역을 마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하나님은 이미 영광을 얻었고 사탄 앞에서 한 단계의 증거를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이 어떻게 중국에 성육신하게 되었는지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이 이미 영광을 얻은 것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희에게 수많은 정복 사역을 행하고 너희가 굳게 선다면 그의 이 단계 사역은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영광의 일부이며, 너희는 이것만 볼 뿐이다. 하지만 너희는 아직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지 못했고, 마음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지도 못했다. 너희는 아직 이 영광을 완전하게 보지 못했고, 그저 하나님이 이미 너희의 마음을 정복했다는 것만 보았을 뿐이다. 너희가 더 이상 그를 떠나지 못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에서 보아야 할까?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서 이룬 성과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실로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고, 또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으며,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많은 교회의 형제자매가 힘이 솟구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 행한 사역의 위력이 지극히 크고 말씀의 위력도 비할 데 없으며, 말씀이 권병을 지니고 중국 대륙이라는 이 귀신의 성에서도 그의 사역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 사람은 연약하지만 마음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 연약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보배롭게 여길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언젠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어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신의 앞날과 운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된다면, 하나님은 두 번째 부분의 영광을 모두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하나님의 사역이 전부 완성되면, 중국 대륙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일단락된다. 즉,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들이 모두 온전케 되면, 하나님은 영광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두 번째 부분의 영광이 동방으로 옮겨졌지만,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사역을 동방에 가져왔다는 것은 그가 이미 동방에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려고 하는 이상 반드시 이룰 것이다. 하나님은 중국에서 이 사역을 이룰 것이다. 그는 너희를 온전케 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지금 너희의 퇴로를 모두 막아 버렸다. 즉, 사람의 마음을 이미 정복한 것이다. 너는 가고 싶어도 가야 하고 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께 얻어질 때 하나님은 영광을 얻는다. 하나님이 아직 영광을 완전히 얻지 못한 이유는 너희가 아직 온전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너희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렸지만, 육체의 연약이 너무 많아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부정적인 것들을 수없이 벗어 버리고, 또 앞으로 수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고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천년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를 간략하게 논하다>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4)
예수가 당시에 행한 사역은 전 인류를 속량하는 것이었다.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았다. 그를 믿기만 하면 속량받았고, 그를 믿기만 하면 죄에 속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금씩 벗어 버려야 한다. 구원을 얻었다 함은 사람이 예수에게 온전히 얻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속하지 않고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죄에 속하지 않게 된다. 당시 예수가 했던 수많은 사역은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예수가 한 수많은 말씀을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 그 당시 예수가 해석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떠나고 몇 년 후, 마태가 그를 족보에 올렸으며, 다른 사람들도 인의적인 많은 사역을 했다. 그때는 사람을 온전케 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사역을 하기 위해 천국의 복음을 가져오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그의 사역은 모두 끝났다. 반면, 이 단계의 정복 사역은 반드시 더 많이 말씀하고 더 많이 사역하며,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예수가 이전에 행한 사역이나 여호와가 행한 사역의 비밀을 모두 열어 모든 사람이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이것은 말세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말세는 마무리하는 사역을 하고, 사역을 끝내는 시기이다. 이 단계의 사역은 네가 여호와의 율법과 예수의 속량에 대해 명확히 알게 할 것이다. 그것은 주로 6천 년 경륜의 모든 사역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네가 6천 년 경륜의 모든 의의와 본질을 이해하고 예수가 행한 수많은 사역을 알게 할 것이며, 그가 한 수많은 말씀의 의도, 나아가 성경에 대한 네 맹목적인 숭배까지 모두 명확히 깨닫게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예수가 당시에 행한 것과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는 것들도 알게 할 것이며, 모든 진리와 생명과 길을 다 깨닫고 보게 할 것이다. 예수는 왜 그 단계에서 마무리하는 사역을 하지 않고 떠났겠느냐? 그 단계의 사역은 마무리하는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의 말씀도 끝났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그의 사역 또한 모두 끝났다. 그 단계의 사역은 반드시 할 말을 다 하고 모든 사역을 마무리해야만 끝나는 이 단계의 사역과는 다르다. 예수는 그 단계의 사역에서 많은 말씀을 다 하지 않았고 밝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예수의 직분은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떠났다. 그 단계 사역은 주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한 것으로, 이 단계의 사역과는 달랐다. 이 단계 사역은 주로 마무리를 하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며 모든 사역을 끝내는 것이다. 말씀을 끝까지 다 하지 않으면 사역을 끝낼 수 없다. 이 단계는 말씀으로 모든 사역을 끝내고 이루기 때문이다. 지난날 예수가 행한 수많은 사역을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조용히 떠났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 이해했으면서도 옳다고 여기고, 틀린 것을 알지 못한다. 마지막 이 단계에서는 사역을 철저히 끝내고 마무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알게 한다. 사람 내면의 관념과 속셈, 잘못된 이해 방법, 여호와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에 대한 관념, 이방인에 대한 견해 등 치우치고 그릇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사람에게 인생의 바른길과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 그리고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면 이 단계의 사역은 끝난다.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세상을 창조한 서막이었고, 이번 단계의 사역은 사역을 끝내는 종막이다. 시작은 이스라엘 선민들 가운데서 행하여 가장 성결한 곳에서 천지를 열었고, 마지막 단계는 가장 더러운 나라에서 행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시대를 끝낸다. 첫 단계는 가장 밝은 곳에서 사역했고 마지막 단계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사역하여 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광명을 가져오며, 이 사람들을 모두 정복한다. 가장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사람을 정복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와 참하나님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탄복하게 함으로써 이 사실로 전 우주를 정복하는 사역을 행할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은 대표적인 의의가 있다. 이 시대의 사역이 완성되면 6천 년 경영 사역은 완전히 끝난다. 가장 어두운 곳의 사람들이 정복되었으니 그 외의 곳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하는 정복 사역만이 대표적 의의를 갖는다. 중국은 모든 흑암 세력을 대표하며, 중국인은 육체와 사탄, 그리고 혈기에 속한 모든 자를 대표한다. 중국인은 큰 붉은 용에 의해 가장 심하게 패괴된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을 가장 심하게 대적하는, 가장 천하고 더러운 인성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이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관념은 모두 똑같다. 자질이 좋을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들 역시 대적할 것이다. 유대인이 왜 대적하고 거역했겠느냐? 바리새인은 또 왜 대적했겠느냐? 유다가 왜 예수를 팔았겠느냐? 당시 많은 제자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뒤에도 사람은 왜 그를 믿지 않았겠느냐? 사람의 패역은 다 같은 것 아니겠느냐? 단지 중국인을 모델로 삼았을 뿐이다. 또한 정복한 후에는 본보기와 표본으로 세워 참고 대상이 되게 할 뿐이다. 어째서 늘 너희를 가리켜 내 경륜의 부속물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의 패괴와 더러움, 불의, 대적, 패역 같은 것들이 중국인에게서 가장 전반적이고 다양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삶과 사상이 뒤처졌으며, 생활 습관, 사회 환경, 출생 가정 전부 열악하고, 모든 것이 가장 뒤떨어졌다. 또 이들은 지위도 낮아서 이곳에서 사역하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다. 시범 사역을 전면적으로 행하면 이후에 사역을 전개할 때 행하기가 더 수월해진다. 이 단계의 사역이 이루어지면 이후의 사역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이 단계의 사역을 완성하여 대업이 완벽히 이루어지면 온 우주를 정복하는 사역 또한 완전히 끝나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 이상 2>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5)
오늘날 이러한 모압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것은 바로 가장 어두운 흑암 속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저주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얻고자 한다. 애초에 그들은 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사역의 성과는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설득력이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세에 얻고자 하는 영광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이지만 지금 이렇게 큰 구원을 받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다. 이 사역이 더없이 큰 의의를 지닌 것은 심판으로 이들을 얻기 때문이다. 심판은 일부러 이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다. 만약 말세의 정복 사역도 이스라엘에서 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설령 성과가 있다 해도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으며, 모든 영광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에게 사역하는 것은 가장 어두운 곳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이자, 가장 뒤떨어진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 피조물들은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사탄에게 속아 하늘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른다. 너희는 전부 마음속으로 우상과 사탄을 경배하고 있으니 가장 비천하고 뒤떨어진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가장 천한 육을 가졌으며 개인의 자유가 조금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고난을 받고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사회의 최하층 사람으로, 신앙의 자유조차 없다. 너희에게 사역하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모압의 후손인 너희에게 사역하는 것은 일부러 너희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의의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너희를 크게 높여 준 것이다. 이성이 있고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압의 후손인 저를 오늘날 하나님이 이렇게 크게 높여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군요. 저는 정말이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행한 것과 말한 것, 저의 신분과 가치로 볼 때,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들이 누린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신분이 훨씬 높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얼마나 충성했고, 베드로는 또 예수님께 얼마나 충성했습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백배나 더 충성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중국인들의 섬김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 되며, 정말로 너무 형편없다. 너희가 오늘날 이렇게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다! 너희가 언제 하나님의 사역을 찾은 적이 있더냐? 언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적이 있더냐? 언제 가정, 부모, 자식을 기꺼이 내려놓으려고 한 적이 있더냐? 아무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성령이 인도하지 않았다면 너희 중 몇이나 희생할 수 있었겠느냐? 모두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지금까지 따라온 것이다. 너희의 충성심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순종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행실대로라면 진작에 멸하고 단번에 쓸어버렸어야 한다.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큰 복을 누린단 말이냐? 그럴 자격이 전혀 없다! 너희 중 스스로 길을 개척한 자가 있더냐? 스스로 참도를 찾은 자가 있더냐? 다 놀고먹기 좋아하며 안락만 탐하는 천박한 존재들이다! 너희는 자신이 대단하게 보이느냐? 칭찬할 것이 뭐가 있느냐? 너희가 모압의 후손임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의 본성과 출생지가 최상으로 변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너희가 모압의 후손임을 말하지 않아도 너희는 뼛속까지 모압의 자손이 아니냐? 사실이 바뀌기라도 하겠느냐? 지금 너희의 본성을 폭로한 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너희의 노예근성, 너희의 삶, 너희의 인격을 보고도 너희 자신이 가장 비천한 하등 인류임을 모른단 말이냐? 그러고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더냐? 너희의 사회적 지위를 보아라. 너희는 사회의 최하층 사람들 아니냐?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는데 너희는 무엇을 바쳤느냐? 욥은 모든 것을 바쳤는데 너희는 무엇을 바쳤느냐? 많은 사람이 참도를 찾기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렸는데, 너희는 그런 대가를 치렀느냐? 그들에 비하면 너희는 이토록 큰 은혜를 누릴 자격이 전혀 없다. 오늘날 너희를 모압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너희에게 억울한 일이란 말이냐?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너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너희에게 이렇게 큰 구원과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 주었건만 너희는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 은혜를 거저 누렸다.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으냐? 이 참도를 너희 스스로 찾아서 얻은 것이냐? 전부 너희가 받아들일 수 있게 성령이 역사한 것 아니더냐? 너희에게는 본디 찾고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고, 진리를 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모두 남의 성과를 앉아서 누리며,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이런 진리를 얻었다. 그러고도 무슨 자격으로 불평을 늘어놓는단 말이냐? 너는 네 신분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느냐? 일생을 바치고 피를 흘린 자들과 비교해 보면 너희에게 불평할 것이 어디 있단 말이냐? 지금 너희를 멸한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희는 순종하고 따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너희는 그럴 자격이 없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고 나온 자들이다. 상황에 떠밀리지 않았거나 너희를 불러내지 않았다면, 너희는 결코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이렇게 기꺼이 포기하려고 했겠느냐? 누가 이렇게 기꺼이 육체적 즐거움을 내려놓으려고 했겠느냐? 모두 안락을 탐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좇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큰 축복을 받고도 또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또 무슨 원망이 있단 말이냐? 너희가 하늘의 가장 큰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해 주고, 땅에서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사역을 오늘날 너희에게 드러내 보였건만, 이것이 복이 아니란 말이냐? 너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한 것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많은 형벌을 받았고, 형벌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게 되었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거룩함을 깨닫게 되었고, 이 형벌과 사람의 더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거룩함,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진귀한 진리 아니겠느냐? 이것이 의미 있는 인생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행한 사역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너희의 지위가 낮을수록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 증명되고, 오늘날 너희를 대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매우 가치 있는 일임이 증명된다. 이는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이렇게 큰 구원의 은혜를 누린 사람은 없었다. 너희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매우 크다는 것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신실하다는 것, 즉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모압의 후손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6)
하나님은 땅에 왔지만 본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누리기 위해 성육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역하여 자신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곳, 또 가장 의의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는 곳에 강생한다. 거룩한 곳이든 더러운 곳이든, 어떤 곳에서 사역하든 그는 거룩하다. 세상 만물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그저 만물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만물은 여전히 그에게 속하고 모두 그의 손안에 있다. 그가 더러운 곳에 와서 사역하는 것은 그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러운 곳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극도의 굴욕을 참으며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다. 이는 증거를 위한 것이자, 전 인류를 위한 것이다. 이런 사역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고지상한 존재임을 더 확실히 증명해 준다. 그의 위대함과 정직함은 모두가 업신여기는 비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가 더러운 곳에 강생했다고 해서 비천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모든 피조물에게 그의 위대함과 인류를 향한 참된 사랑을 보여 줄 뿐이다. 그가 이렇게 할수록 인류에 대한 그의 흠 없이 깨끗한 사랑을 더 잘 보여 줄 수 있다. 더러운 곳에 강생했더라도, 더러움이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더라도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생활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가 행한 그 모든 사역은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 아니었더냐? 인류가 크나큰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아니었더냐? 2천 년 전에 그가 죄인들과 함께 오랫동안 생활한 것은 구속을 위해서였다. 오늘날 그가 또다시 더럽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의 모든 사역은 다 너희, 이 인류를 위한 것 아니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어찌 말구유에서 탄생했으며, 오랫동안 죄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고난을 받았겠느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어찌 두 번째로 육신을 입고 마귀들이 무리 지어 사는 곳에 강생하여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더냐? 그가 한 사역 중에 인류를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너희의 운명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하나님은 거룩하다. 이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더러운 곳에 왔다고 해도 그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일말의 사심도 없고, 그가 너무나 큰 고통과 굴욕을 참아 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너희를 위해, 너희 운명을 위해 그가 얼마나 큰 굴욕을 참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냐? 그는 높고 대단한 사람들과 돈 많고 세력 있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고, 비천하고 남들에게 멸시당하는 사람들만 구원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거룩함 아니겠느냐? 그의 공의로움 아니겠느냐?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해 그는 기꺼이 더러운 곳에서 태어나 모든 굴욕을 참고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하기에 거짓된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어느 단계의 사역이든 모두 이렇게 실제적으로 이뤄지지 않더냐? 비록 모든 사람이 그가 죄인과 함께 식사한다고 비방하고, 그가 더러운 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가장 비천한 자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조롱해도, 그는 계속해서 이처럼 사심 없이 자신을 바치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있다. 그가 참아 낸 고통이 너희보다 크지 않겠느냐? 그가 행한 사역이 너희가 치른 대가보다 많지 않겠느냐? 너희는 더러운 곳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얻었고, 마귀들이 무리 지어 사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커다란 보호를 받았다. 너희에게 또 무슨 선택이 있겠느냐? 또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느냐? 그가 받은 고통이 너희보다 더 크지 않겠느냐? 그는 땅에 와서 한 번도 인간 세상의 복락을 누린 적이 없으며, 도리어 그런 것들을 혐오한다. 땅에 온 하나님은 사람의 물질적인 대우를 누리지 않고, 사람이 즐기는 호의호식을 누리지도 않는다. 그는 그런 것들을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가 땅에 온 것은 인간 세상의 복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고난받기 위함이다. 그는 고통받기 위해, 사역하기 위해, 또 그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 그는 대사관이나 고급 호텔 같은 좋은 곳에서 살지도 않고 많은 종을 거느리며 시중들게 하지도 않는다. 너희가 본 것으로도 그가 사역하기 위해 왔는지, 누리려고 왔는지 알 수 있지 않으냐? 너희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느냐? 그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 그가 편한 곳에 태어났다면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의의 있겠느냐? 사람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겠느냐? 사람을 더러운 곳에서 구원해 낼 수 있겠느냐? 관념에 따른다면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사는 이 더러운 곳에 태어나셨습니까? 당신은 더러운 저희를 증오하고 혐오하시며, 또 저희의 대적과 패역을 혐오하시면서 어째서 저희와 함께 생활하십니까? 당신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시니 어디에서든 태어날 수 있는데, 어째서 굳이 더러운 땅에 태어나셨습니까? 당신은 매일 저희를 형벌하고 심판하십니다. 저희가 모압의 후손임을 분명히 아시면서 어째서 저희 가운데서 생활하십니까? 어째서 모압 후손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하십니까?” 너희의 이런 인식은 너무도 비이성적이다! 이런 사역만이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과 낮춤과 감춤을 알게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고, 자신의 사역을 위해 모든 고통을 받았다. 이는 인류를 위한 것이고, 더욱이 사탄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며,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세 아래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사역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모압의 후손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서
매일의 하나님 말씀(발췌문 187)
지난날, 예수는 유대에서 공개적으로 사역했지만, 지금 너희들 가운데서 하는 사역과 말씀은 은밀하기에 이방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너희들 가운데서 하는 사역은 모두 폐쇄적이다. 이 말씀과 이 형벌, 심판은 너희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모른다. 이 사역은 모두 너희들 가운데서 행하는 것으로, 오직 너희에게만 열려 있고 이방인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형벌을 받아 곧 온전케 될 것이지만 외부의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이 사역은 참으로 은밀하다! 성육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밀히 감추어져 있지만, 이 흐름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공개하고 나타내고 자유롭게 하지만, 이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지, 그 외의 이방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 지금 중국에서, 너희 가운데서 하고 있는 사역이 철저히 폐쇄적인 것은 그들이 모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알게 된다면 정죄하고 핍박하기만 할 뿐, 믿지 않을 것이다. 큰 붉은 용의 국가에서, 그러니까 이 가장 낙후된 곳에서 사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역을 공개한다면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 단계의 사역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 사역을 공개적으로 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느냐? 더 큰 위험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사역을 은밀하게 하지 않고 예수 때처럼 기세 높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면, 벌써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았겠느냐? 그것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오늘날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고 가르쳤다면 나는 벌써 온몸이 으스러지지 않았겠느냐? 그러면 사역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수 있겠느냐? 지금 이적과 기사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은 비밀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발견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 단계에서도 은혜시대의 예수처럼 사역한다면 이렇게 안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은밀하게 사역하는 것은 너희에게도 유익하고 모든 사역에도 유익하다.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 즉 은밀한 사역이 끝날 때, 이 사역은 폭발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중국에 이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중국에 왔고 그의 사역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중국이 오랫동안 쇠락하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이 중국에서 친히 사역하여 이기는 자들을 온전케 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비밀 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