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제 7 부
적그리스도와 접촉할 때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떤 리더들은 예전에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로 규정되어 교체되었는데, 한동안 지난 후 형제자매가 그 사람이 아직 사역 능력이 좀 있고 그동안 회개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행위와 태도가 좋다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그럴듯하게 한다는 것인지, 비교적 자신의 역할을 지킨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것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왕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일부 사역에 일손이 부족하기도 해서 그에게 사역을 하나 안배했다. 그 결과 두 달도 되지 않아 형제자매가 이렇게 보고했다. “얼른 그를 교체하세요. 그가 저희를 억압해서 너무 괴로워요. 그를 교체하지 않으면 저희는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어요.” 형제자매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쓰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누구를 리더로 뽑더라도 그를 뽑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모양이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사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본성이 철저히 드러난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형제자매가 모두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확실히 그들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전에는 그에게 미혹되어 상부에서 그를 처리했더니 그의 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그가 회개했다고 해서 다시 그를 발탁해 한동안 썼더니 그는 철저히 드러났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를 간파해 단체로 그를 파면하려 했다. 상부에서는 그 사람들에게 분별력이 생긴 걸 보고는 그들을 양육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기왕 그를 쓰는 것에 다들 동의하지 않으니 그를 교체했다. 이런 분별력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진리를 깨달은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렇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분별력은 진리를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이 역시 진리와 하나님이 권세를 잡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제때 분별해서 그를 교체했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그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됐다. 그는 사람을 억눌러 몹시 괴롭게 했고 인성이 전혀 없었다. 올바른 일을 하지 않으면서 형제자매의 본분 이행을 교란하는 데다가 형제자매를 밟고 올라서서 전횡을 일삼으니 누가 그를 쓰는 데 동의하겠느냐? 바보나 동의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교체되고 나면 느끼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지난번에는 상부에 의해 교체되고 이번에는 형제자매에 의해 파면되어 쫓겨났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원래 지위를 얻으려고 했는데 결국 지위도 얻지 못하고 일순간에 추락하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말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단지 패괴 성품이 몹시 심각할 뿐이라면 그 역시 반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성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어떻게 하든 옳다고 생각하며 사실도, 긍정적인 사물도,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을 가진 사람이다.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반성할 줄 모르는데, 그는 무엇을 궁리하겠느냐? ‘흥, 언젠가 내가 재기해서 당신들이 내 손안에 떨어지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럴 기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럴 기회는 없다. 형제자매가 점점 더 진리를 많이 깨닫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내적 상태, 특히 적그리스도에 대해 분별이 생기면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악을 행할 여지와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고 재기하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부에서 분별에 관한 설교를 그만하고 더 이상 그를 분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그런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는 것을 들으면 자신이 끝장났다는 것을 알고 재기할 희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폭로하고 분별하는 것은 다 옳아. 모두 내 내적 상태야. 난 어떻게 변해야 할까?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끝장나지 않을까? 버려질 거라고. 천사장의 길을 걸어 하나님을 적대해서 좋을 게 있나?’ 그가 이렇게 고민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절대 자신을 반성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으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게 그의 본성이다. 네가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든 그를 일깨워 회개하게 할 수는 없다. 회개하지 않는데 활로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고 외곬으로 파고들며 스스로 파멸을 초래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결정된다.
요즘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주제를 계속 다루고 있는데,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사람들은 들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예배 시간이 죽을 맛이고 마음속에 반발심이 들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른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깨달으려 하고, 깨닫고 나서는 자신이 변화되기를 추구한다.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언젠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걷잡을 수 없이 큰 악을 행할지도 모르고, 구원받을 기회가 사라져 파멸에 이르게 될까 봐 마음속으로 두려워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은 다르다. 그는 그런 분별하는 설교를 아무도 말하지 말고 아무도 듣지 않길 바라고 다들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어 그에게 미혹되길 바란다. 그러면 그는 흡족해한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이겠느냐? 권력을 잡는 것이다. 너희도 권력을 잡고 싶으냐? (잡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은 잡고 싶지 않겠지만 머리는 잡고 싶을 때도 있을 테니 실은 잡고 싶은 것이다. 마음속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그런 길을 가지 않기를 갈망하는 주관적인 바람이 있지만, 일이 닥치면 패괴 성품이 너를 좌우하고 부추겨서 너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킬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통제할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해야 위신과 명망이 생기고 남들이 우러러볼지 머리를 쥐어짠다. 늘 이런 것들만 생각하면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무엇에 통제된 것이겠느냐? (패괴 성품에 통제된 것입니다.) 그렇다. 사탄의 패괴 성품에 통제된 것이다. 하루 종일 육적인 이익에 관한 일만 생각하고, 항상 남과 싸우고, 싸움 끝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육체와 사탄만을 위해 사니까 특히 괴로워한다. 그래서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의지를 다지지만 결국 일이 닥치면 또 지위와 이익을 다투고, 다툼 끝에는 기진맥진하여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새 수십년이 지났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일이십 년 믿었지만 진리를 얼마나 얻었겠느냐? 패괴 성품이 얼마나 변화했겠느냐? 매일 누구를 위해 살겠느냐? 무슨 일 때문에 바쁘겠느냐? 무슨 일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겠느냐? 전부 다 육체를 위해서다. “사람 마음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지 않겠느냐? 이 말을 직접 경험하고 자세히 음미해 보아라. 이 말이 생각날 때, 이 말을 체험할 때 너는 두렵지 않으냐? 너는 “속으로 좀 두려워요. 저는 겉으로는 하루 종일 노력하고,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해요. 육체는 그렇게 하지만 마음속 생각은 전부 악하고 진리에 위배돼요. 제가 하는 많은 일의 출발점이라든가 동기, 목적은 순전히 제가 생각하는 악을 행하려는 거죠.”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악행을 저지른다. 그래서야 하나님이 기억하겠느냐? “저는 하나님을 20년 믿으면서 전부 다 버렸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스러울 게 뭐 있느냐?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에게 진지하게 따진다면 사람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그건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자 긍휼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몹시 관대하다. 생각해 보아라, 그토록 거룩하고 공의롭고 전능한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이 하루 종일 악하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만, 자신의 지위와 명리를 고려하는 일만 생각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그를 대적하고 배반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사람은 그런 생각과 속셈, 동기의 지배를 받아 대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내하겠느냐? 진리를 공급하고 양육하고 일깨운다. 또한 깨우쳐 주고, 빛 비춰 주고, 인도하고, 채찍질하고, 징계한다. 징계가 심할 때는 위로까지 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 것이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온갖 패괴 성품과 여러 표출, 행위, 생각이 모두 악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인내할 수 있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인내도 진실하긴 하나 더는 참을 수 없게 되면 포기하거나 심지어 관계를 끊기도 한다. 그럼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인내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매일매일 인내할 정도로 크나큰 인내심을 갖고 있다. 그 인내 안에는 무엇이 있겠느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뿐 아니라 너에 대한 기대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게 하는 성과와 수확을 보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런 사랑이 있겠느냐? 없다. 사람은 지식이나 소양, 한 측면의 은사나 특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남보다 신분이 고귀하고 보통 사람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런 꼴을 보인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더럽기 그지없고 깊이 패괴된 인류를 구원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얼굴을 맞댄 채 대화하고 붙들어 준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어서 다른 문제를 교제하겠다. 어떤 사람은 증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감동받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 않게 돼요.” 이 말이 좋다고 느끼고 패괴를 드러내는 문제를 정말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함,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과 사람에게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의 인성과 양심, 이성과 같은 측면을 감동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는 없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세 심판 사역을 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공급해 사람의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선포하고 공급하며,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것이다. 그는 행동이나 어떤 일을 통해 너를 감동시키거나 너의 추구 방향과 목표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인내한다고 하든,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른다고 하든, 어떻게 말씀하든 하나님은 그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일 뿐이지 사람이 듣고 나서 감동받아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그 본성 본질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토대이지 타이른다고 바뀌는 나쁜 습관이나 나쁜 버릇이 아니다. 혹은 사람이 기쁘다고 해서 또는 지식을 많이 배우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어야만 변화할 수 있고, 오직 진리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생명 성품의 변화를 얻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말씀하는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도리를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완전히 틀렸다. 하나님을 믿는 도리를 깨닫고 영적 이론을 좀 이야기할 줄 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진리란 대체 무엇이냐?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자주 말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진리를 깨달은 거야.’, ‘하나님 말씀은 모두 옳고 전부 마음에 와닿아. 그건 우리의 공통어야.’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이 과연 옳겠느냐? 진리를 깨닫는다는 게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왜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하겠느냐? 우선 진리란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진리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다. 그럼 그런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 제가 이해한 바로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든 원칙이 있고 어떻게 대할지 알며 실행의 길이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생활 속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방금 사람이 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람은 스스로가 진리를 깨달은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 속 자신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은 해결하지 못하고 길도 없고 진리와 결부시키지도 못합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방금 한 말들 중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는 사람이 실행의 길을 갖게 하고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며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줍니다.) 그렇다. 진리 원칙에 따라 비춰 보고 실행하면 그게 바로 길이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만약 도리만 깨닫고 일이 생겼을 때 운용할 줄 모르며 원칙을 찾지 못한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이냐? 진리란 모든 일을 하는 원칙이자 준칙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너희가 설교를 듣고 나서 도리만 알고 그 안에 있는 진리의 원칙과 준칙이 무엇인지, 생긴 일 중 어떤 일이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어떤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그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다 모른다. 예를 들어, 너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묻는다면, 그 문제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것은 너희가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인데, 교제하고 나면 깨닫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제하고 나서 조금 깨닫더라도 그런 일이 다시 생겼을 때 또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로 깨달은 게 아니다. 너는 그 측면의 진리의 원칙과 준칙을 알지도, 파악하지도 못한 것이다. 네가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너는 그 측면의 진리가 어떤 실제를 가리키는지, 어떤 내적 상태를 겨냥하는지 자신의 내적 상태와 비춰 볼 수 있느냐? 만약 비춰 보지 못하고 늘 자신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알지 못한다면 그게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한 측면의 진리나 원칙에 대해 말했을 때 어떤 일과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 혹은 자신의 어떤 내적 상태가 그 측면의 진리와 관련 있는지 알고 그 측면의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는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더라도 교제하라고 했을 때는 원래 말을 그대로 옮길 뿐 내적 상태나 실제 상황을 활용해 말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게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그건 진리를 깨달은 게 아니다. 그럼 대부분의 경우 너희는 진리를 깨달았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했느냐?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너희는 대부분의 진리를 듣고 나서 도리나 깨닫고 규례만 지킬 뿐 유연하게 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네가 깨달은 얼마 되지도 않는 도리조차 유용하게 쓰지 못하며 그것의 도움을 받지도 못한다. 이게 깨달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한 것이겠느냐?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계속 노력하고 공들여 고민해야 한다. 너의 인성 안에 갖춰야 할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배우거나 할 때는 진지하고 꼼꼼하게 대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싶더라도 정상인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너는 영영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엉터리로 믿는 것이다. 네 자질의 높고 낮음은 보지 않고 네가 그런 인성을 갖추었는지만 본다. 네가 그런 인성을 갖추었다면 자질이 평범하더라도 얕은 진리는 깨달을 수 있으니 최소한 진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네 자질이 뛰어나다면 너는 진리의 심층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욱 깊이 진입할 수 있다. 이는 자질과 관련 있다. 그러나 네 인성 안에 진지하고 꼼꼼하게 대하는 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늘 대충대충 되는대로 하며 흐릿한 상태로 있다면, 어떤 일을 대하든 흐릿하고 모호하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진리는 네게 영원히 규례이자 도리이고, 너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진리 추구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조금 어렵긴 하지만 어려운 정도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네가 신경 쓰고 공들이면 그 어려움은 줄어들 것이고 너는 어느 정도 얻을 것이다. 반면 네가 진리에 전혀 공들이지 않고 그저 도리와 표면적인 행동 방식에만 공들인다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진리를 체계적으로 교제하니 너희는 요령을 좀 알아내지 않았느냐? 뭔가 깨닫지 않았느냐? 여러 진리 안에 있는 것이 대학에서 배운 그 어떤 지식보다도 더 세세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몹시 세세하다. 지식 같은 것들은 사람이 기억하고 이해할 수만 있으면 끊임없는 실습과 실천을 통해 몇 년 안에 숙달할 수 있다. 학문 하나를 배울 때도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신경을 좀 쓰기만 하면 서서히 숙달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으려면 단지 머리만 써서는 안 되고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을 써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거나 체험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착실하며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이 떨어지며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너희는 경솔한 사람이냐, 아니면 세심한 사람이냐? (경솔한 사람입니다.) 그럼 위험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세심하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은 그만해라. 시도도 안 해 보고 할 수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너희가 추구하는 의지와 태도로 보면 기초적인 진리를 깨달을 희망은 있다. 그건 가능하다. 사람이 기꺼이 마음을 쓰고 대가를 지불하며 마음속으로 진리에 힘쓰면 성령은 역사하고 온전케 하지만, 마음속으로 진리에 힘쓰지 않으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기억해라. 진리를 깨달으려면 주관적으로 공들이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단지 절반의 성과만 이룰 수 있고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부분만 이룰 수 있다. 나머지 절반은 진리를 깨닫는 데 핵심적인 부분으로,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것인데, 이는 성령 역사에 기대어 이룰 수밖에 없다. 지식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은 사람이 공을 들이면 되지만 진리를 깨닫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머리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소용없고 마음을 쓰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여 이루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성령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 역사의 기초는 무엇이겠느냐? 생각은 상당히 섬세하고 마음은 충분히 조용하고 편안해야 하며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한다. 성령 역사는 아주 미묘하다.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진리 측면에 자주 공들이는 사람은 항상 성령의 깨우침을 느끼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실행의 길이 순조로우며 마음이 점점 더 환해진다. 반면 체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 역사를 느끼지 못하고 늘 정확한 길을 보지 못하며 어떤 일을 대하든 모호하고 무엇이 바른길인지 모른다. 진리를 깨닫고 실행의 길을 분명히 아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사람이 마음에 그 몇 가지 상태를 갖추면 성령은 역사한다. 그러나 네 마음이 그 몇 가지 상태에서 벗어나면 너는 성령 역사를 느낄 수 없다. 이는 추상적이지도, 막연하지도 않다. 네가 그 몇 가지 내적 상태 안에 있고 네 마음이 그 몇 가지 상태 안에 있는 채로 구하고 공들이고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성령은 네게 역사한다. 그러나 네가 정신을 딴 데 팔고 늘 지위를 추구하고 명리를 다투며 항상 행동 방식에나 관심을 쏟고 공들인다면, 하나님을 대할 때 늘 피하고 숨기고 회피하고 거절하며, 솔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고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며 꾸짖지도 않을 것이다. 성령의 꾸짖음조차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을 수 있겠느냐? 때때로 성령이 너를 꾸짖는 것은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옳고 어떻게 하면 그른지 네게 알려 주려는 것이고, 네게 그런 느낌을 주려는 것이다. 결국 너는 무엇을 얻게 되느냐? 너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 일을 한눈에 명확히 알게 된다.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그 일에서 너는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란 대체 무엇인지 명확히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너를 그렇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런 일에서 영영 무지한 상태로 남아 명확히 알지 못할 것이고, 그런 일이 닥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영문을 몰라 마음은 항상 곤죽이 된 듯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조급하고 속이 끓는데 성령은 왜 역사하지 않겠느냐? 아마 네 내면의 어떤 내적 상태가 옳지 않고 네가 반항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으로 반항하겠느냐? 네가 그릇된 관점이나 관념을 고집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네가 그 관념이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제서야 성령은 그것을 토대로 역사한다. 성령은 역사할 때 단지 네가 의식적으로 옳고 그름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방향, 목표가 무엇인지, 네가 깨달은 것이 진리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명확히 알게 한다. 너희는 이런 경험이 있지 않으냐? 만약 누군가 하나님을 십 년, 이십 년 믿었는데도 이런 세세한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경솔한 사람이다. 상투적으로 입에 발린 도리나 구호만 외치고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몇 가지 수법이나 간단한 방법만 쓴다면 발전이 없을 수밖에 없고 영영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성령도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솔한 사람은 진리에 조금도 닿지 못한다. 성령이 그를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왜 역사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의 자질이 몹시 떨어져서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역사해도 그는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원칙이라고 그에게 알려 준들 그에게 이해할 능력이 있겠느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너희는 이런 경험이 있느냐? 진리는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네가 추구하고 깨달으려고 할 때 성령은 역사하고 너는 얻을 수 있다. 반면 네가 게으르고 안일을 탐하며 진리에 공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고 네가 누구든 얻을 수 없다. 알겠느냐? 너희는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있느냐? 추구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고, 결국에는 진리를 얻는 사람이 보배가 된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부러워해도 소용없다.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진리를 추구할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해 역사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하나님은 너와 얼굴을 맞대고 말하고 교제하며, 너를 지도하고 돕는다. 왜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겠느냐? 육신이 역사하고 말하면 네게 성령의 뜻을 깨닫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 역사의 원칙과 규칙, 방식과 방법을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네게 알려 주면 너는 스스로 모색할 필요 없이 지름길로 가서 곧장 이를 수 있다. 육신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사역을 마치면 너는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누구도 이 육신을 대신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네게 명확히 알려 주지 못한다. 누구도 네게 알려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안 된다. 여기에는 실제 사례가 있다. 이는 마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천 년을 믿고도 지금 일부는 다시 구약 성경을 보며 율법을 지키고, 일부는 십자가를 지고 집 안에 십계명을 걸어 놓은 채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을 얻었느냐? 성령도 역사하긴 하지만 명확히 말하지 않아서 사람은 계속 모색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이 모색하고 얻은 것에 결론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도 네게 이렇게 하면 옳고 저렇게 하면 틀리다고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없다. 아무도 네게 그렇게 알려 주지 않는다. 성령이 너를 깨우쳐 줘서 네가 옳다고 생각한들 하나님이 칭찬하겠느냐? 너도 불확실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2천 년 전 주 예수가 남긴 말들은 성경에 기재됐다. 2천 년이 지난 뒤 주를 믿는 사람들은 주의 재림에 대해 가지각색으로 해석하는데, 정확한 해석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힘을 들인다. 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애매모호하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말들에 대해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로 해석하고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각자 이유와 주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해석이 정확하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거나 규정하지 않은 것이라면 사람이 말해 봤자 소용없다. 네 파벌이 아무리 크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하나님이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 세력을 보지 않는다. 설사 전 세계에서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옳고 진리다. 이는 영원불변의 사실이다! 각 종파가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해도 결국에는 어떻겠느냐? 네가 해석해 봤자 소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부정한다. 네가 어떻게 해석한들 하나님이 너를 거들떠보겠느냐?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거들떠보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따로 시작해 새 사역을 한 지 이제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아무리 교만하게 떠든다 한들 하나님이 거들떠보겠느냐?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 종교계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구원을 못 받나요?”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진작에 알아듣게 말했다. 종교계의 세력이 아무리 커도 소용없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들에게 진리가 있다고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시작해야 할 곳에서 시작하며 택해야 할 자를 택하는데, 종교계의 영향을 받거나 종교계에 휘둘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런데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루 종일 하나님에게 설명하려 하는데, 소용이 있겠느냐? 게다가 성경 속의 말을 물고 늘어져 제멋대로 해석하고 일부분만 취해 제멋대로 한 해석임이 틀림없어도 평생 고수하면서 하나님이 와서 이루어 주길 기다리니, 꿈도 야무지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려 한다면 그게 이성적인 것이겠느냐?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 것이겠느냐? 반항하려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과 겨루려는 것 아니겠느냐? 대재난이 내려서 사람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소용없지 않겠느냐?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 시기를 놓치게 될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때 가서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그때 물어볼 걸 그랬어. 이제 묻지도 못하네. 그럼 기도나 하자. 성령도 역사하잖아. 다 똑같지 뭐.’ 똑같겠느냐? (다릅니다.) 똑같다면 2천 년 동안 주를 믿은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 몇 세기에 소위 성도들이 쓴 말들은 너무도 미숙하고 볼품없다! 지금 각 종파의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은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받는 것, 이 두 가지에 대한 것뿐이다. 이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겠느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안에 진리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한마디,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만 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내치고 도태시켰는데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이겠느냐? 그들이 보기에는 사랑이 아니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정죄했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는 가장 불쌍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진리를 선포하고 직접 사람을 구원하는 좋은 기회가 있는데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그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추구하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깨닫지 못한다면 양심에 거리낌은 없고 최소한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다. 너희는 이제 추구하기 시작했느냐? 본분 이행을 진리 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건 일종의 협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리 추구에 이를 수 있다거나 진리 추구에 미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저 일종의 행위나 행동이며 진리를 추구할 태도를 갖춘 것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리 추구에 미칠 수 있겠느냐?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떤 일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고 본분도 엉터리로 이행하며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바보다. 그럼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게 힘들겠느냐? 힘들지 않다. 우선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환경과 이행하는 본분에서부터 시작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훈련한다면 진리 추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선 이런 원칙에서부터 시작해 구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면 조금씩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네가 얻은 깨우침이야말로 네가 깨달아야 하는 진리이다. 우선 본분 이행에서부터 시작해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실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생활 속에서 접하는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본분 범위 내의 일, 이런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다.
2019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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