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제 1 부
참고 정상 인성의 세 가지 측면을 간단히 다루다
이번 교제에서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자주 언급되는 ‘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먼저 다루겠다. 이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주 다루는 주제이자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며 매일 접하고 체험하는 주제이다. ‘인성이란 무엇인가’는 바로 그런 주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성 안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포함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인성은 흔히 어떤 것들을 드러내겠느냐? (인격과 존엄을 드러냅니다.) 또 어떤 것들을 드러내겠느냐? 양심과 이성을 드러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다루는 것들이다. 그러면 너희가 평소에 인성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이 주제와 관련 없고 자주 다루지 않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 같은 것은 평소에 늘 다루는 주제이고 자주 접할 수 있다. 너희가 자주 다루는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은 너희의 실생활과 얼마나 관련 있겠느냐? 이런 내용들은 너희의 실생활 속 실행과 진입에 어떻게 이롭고 도움이 되며 얼마나 유익하겠느냐? 너희 정상 인성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로는 또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몇 가지 측면을 말해 볼 테니 너희가 평소에 이런 주제를 접하는지 한번 살펴보거라. 인성에 관한 내용은 일단 긍정적인지 아니면 부정적인지, 정상 인성인지 아니면 비정상 인성인지는 차치하고 방금 말한 그 몇 가지 측면 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는 측면도 있다. 이런 측면도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인성과 관련 있지 않겠느냐? (관련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라는 측면과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인성과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모두 인성과 관련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지, 여러 원칙을 어떻게 지키는지, 이런 내용은 제쳐두고 인성이라는 주제만 다루려고 한다. 그럼 이 세 가지 측면은 인성과 관련이 크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무엇이냐? 너희가 다시 한번 얘기해 보거라. (첫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 개인 주변 환경에 대한 관리입니다. 세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다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인성과 관련 있습니다.) 왜 이 세 가지 측면이 모두 인성과 연관되어 있고 관련 있다고 하겠느냐? 왜 이 세 가지 측면을 나열하겠느냐? 양심과 이성 같은 측면은 왜 다루지 않겠느냐? 왜 우리가 자주 다루는 그 몇 가지 측면은 내던지고 이 세 가지 측면을 다루겠느냐? 이 세 가지 측면은 예전에 다루었던 인성과 관련된 측면인 양심과 이성, 인격과 존엄보다 수준이 더 높겠느냐, 아니면 낮겠느냐? (낮습니다.) 그럼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너희를 폄하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이게 너희의 이유이냐? 왜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실 상황과 일상생활 속의 여러 모습에서 사람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문제를 찾았기 때문에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교제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생활과 정상 인성, 일상생활 속의 여러 모습은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만 추구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등 심오한 진리만 추구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느냐? 사람은 어떤 기본적인 조건하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조건이 있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은 반드시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 정상 인성에는 양심, 이성, 인격, 존엄 이외에 방금 말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람이 인성에 관한 이 세 가지 측면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정상에 이르지 못한 채 말로만 진리를 추구하거나 구한다면 아마 다소 공허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것,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정상 인성을 갖춘 소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정상 인성이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정상 인성이 일부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리 추구에서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냐? 아마 이룰 수 없을 것이다.
1)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우선 인성에 관련된 첫 번째 측면인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생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그럼 인성과 관련 있는 사람과 일, 사물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정상 인성이라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정상 인성이라는 범위와 관련되며 정상 인성과 연관된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대인관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 측면이다. 그 밖에 배워야 할 지식이나 업무, 일상생활 속 상식도 모두 정상 인성이 이해하고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예를 들어, 목공이나 미장일을 배우는 사람도 있고 운전이나 자동차 정비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기술이자 재주인데 그런 재주를 발휘할 줄 알면 그 재주에 관한 업무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대체 어느 정도까지 배우고 어느 기준에 이르러야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최소한 완제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검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일을 아주 어설프게 해서 결과물이 형편없고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이 기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가와 관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이렇게 생각한다. ‘만들어 낸 물건은 그럭저럭 쓸 수만 있으면 돼. 3~5년 대충 쓰다가 망가지면 다시 고치면 되지.’ 이런 관점이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할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적당히 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그렇게 경솔하고 오만하며 무책임하게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이 흔히 말하는 불량 습성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맞는 것 같아.”, “그 정도면 충분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마도’, ‘십중팔구’ 식의 태도이다. 형식적으로 일을 하며, 얼렁뚱땅 넘어가고, 할 수 있는 한 일을 대충 해 나가는 수준에서 만족한다. 일을 진지하게 대하거나 세심하게 할 필요도 없으며 진리 원칙을 구하는 것은 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패괴 성품에 속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를 교만함이라 해도 옳고, 방종함이라 해도 아주 적합하지만, 가장 알맞게 표현하는 어휘는 ‘불량함’이다. 불량 습성은 대다수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데, 그저 경중 정도가 다를 뿐이다. 모든 일에서 대충 건성으로 하려 하고, 기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요령을 피우며, 시간을 적게 들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발각되지 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책임질 일이 없다면 얼렁뚱땅 넘어가면 돼. 일을 굳이 잘할 필요가 없어. 그러면 너무 번거롭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이든 숙달하는 경지까지 배우는 일이 없으며 배우는 일에 전념하거나 고생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피상적으로만 배워 전문가 행세를 하고 다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걸로 때우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냐? 이것이 좋은 태도겠느냐? 아니다. 한 마디로 묘사하면 ‘때우는 것’이다. 그러한 불량 습성은 패괴된 인류에게 다 존재한다. 인성에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어물쩍 때우면 된다는 관점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고 얼렁뚱땅 건성으로 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운전을 배우면서 운전할 때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운전하면 차량에 손상이 가해지는지 경험 많은 운전자에게 묻지도 않고 바로 운전을 시작한다. 그 결과 차를 망가뜨리고는 발로 차며 이렇게 말한다. “차가 뭐 이 따위야? 벤츠나 BMW를 몰아야지. 이런 고물차는 안 되겠어. 폐차해야 되겠군!” 이는 무슨 태도겠느냐? 물질적인 것을 대할 때 소중히 여기지도, 관리하지도 않는 데다가 일부러 부수고 망가뜨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칠칠치 못하고 부주의하게 생활하며,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든 신중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거친 사람입니다.) 듣기 좋게 말하면 거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막돼먹은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 말이 과하겠느냐? 사람의 귀천을 어떻게 구분하겠느냐?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봐야 한다. 즉, 일이 닥쳤을 때 그가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격과 존엄이 있는 사람들은 일할 때 세심하고 진지하며 마음을 쓰며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인격과 존엄이 없는 사람들은 일을 할 때 대충대충 하고 무성의하며 항상 속임수를 쓰려 하고 항상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 어떤 기술을 배우든 마음을 다하지 않고 배우지 못하며, 아무리 오래 배워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인격이 비천한 사람이다. 대다수 사람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불량 습성입니다.)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본분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대할 때 절대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 이게 바로 정상 인성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불량 습성이 심한 사람은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개를 기를 때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개가 물건을 함부로 물어뜯고 가구나 도구를 다 망가뜨린다. 이러면 손해이다. 개는 동물이기 때문에 물건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너는 개와 실랑이할 게 아니라 개를 관리해야 한다. 네가 관리를 잘 못해 동물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네 생활을 교란하게 둔다면 이는 네 인성 안에 무언가 부족한 게 있다는 뜻이다. 그럼 너는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과 별 차이가 없고 무능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개를 잘 관리할 수 있겠느냐? 개를 특정한 범위 내에 제한하거나 우리에 가둬 놓고 기르고 매일 고정된 시간에 두세 번 풀어 주어 충분히 활동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제멋대로 물건을 물어뜯는 개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운동을 통해 개의 건강도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면 개도 잘 관리할 수 있고 환경도 지킬 수 있다. 자신이 접하는 사물을 관리할 줄 모르고 올바른 태도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성 안에 무언가 부족한 게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상 인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볶음 요리를 할 때 보통 사람은 기름을 조금만 붓는데 어떤 여자는 유독 기름을 많이 붓는다.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기름을 낭비하지 말고 적당히 사용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기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볶음 요리를 할 때 실수로 기름을 많이 부으면 그냥 퍼서 땅에 버린다. 이는 낭비가 아니겠느냐? 물질적인 것을 이렇게 대하는 태도를 속된 말로 뭐라고 하겠느냐? 먹을 걸 길에 뿌린다고 하고 욕하는 말로 ‘집안을 말아먹는 여자’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다 어디서 났겠느냐? 하나님이 베풀어 주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주지 않았다면 네가 얼마나 얻을 수 있었겠느냐? 네 생명도 하나님이 준 것이다. 하나님이 주지 않았다면 네게는 아무것도 없고 넌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러면 네가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가질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보통 가정보다 더 많이 주었지만 그렇다고 네가 제멋대로 낭비한다면 그런 태도나 관점이 과연 옳겠느냐? 인성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어떻게 정의해야겠느냐? 이런 사람은 인성이 좋지 않다. 먹을 걸 길에 뿌리고 물건을 망가뜨리며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정상 인성이 없다. 하나님 집의 물건을 대할 때도 소중히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집의 물건이 비가 와서 젖을 것 같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비에 젖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 물건도 아니니까 내 알 바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가 버린다. 이게 대체 무슨 태도란 말이냐? 이기적인 것이다. 마음이 바른 것이겠느냐, 바르지 않은 것이겠느냐?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비뚤어졌다고 합니다.) 바르지 않으면 비뚤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위에는 ‘아닐 불(不)’, 아래에는 ‘바를 정(正)’이 있으면 ‘기울 왜(歪)’ 자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갖추었겠느냐?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첫 번째 측면인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중 총 몇 가지를 다루었느냐? 불량 습성, 불량함 외에 또 뭐가 있느냐? (천함과 비뚤어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거나 분석할 때 이런 속된 말들을 쓰느냐? (쓰지 않습니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 너희는 무슨 말을 쓰느냐? 거창한 말만 쓰지 이런 보잘것없는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척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기술이나 업무 관련 지식, 학위를 보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한다. ‘세상의 철밥통은 필요 없어. 난 빈둥빈둥 놀고먹으려고 하나님 집에 온 게 아니야. 나처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인재가 하나님 집에서 봉헌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을 견디며 이런 보통 사람들과 같이 먹고 살며 함께 생활하다니, 이 얼마나 고귀한 인품인지!’ 그는 자신의 인격이 특히 존귀하고 다른 사람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하며 늘 이런 것들을 즐긴다. 사실 그의 인성에는 부족한 것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 자신은 알지 못한 채 우쭐거린다. 게다가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이고 자신의 인품이 보통 사람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어떤 측면을 보더라도 그는 ‘정상 인성’의 정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그것과 거리가 멀다. 양심을 논하자니 양심이 없고, 인품을 논하자니 그것도 별로이고, 인격과 품성을 논하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여럿이 같이 살면 일부 귀중한 물건은 감히 내놓지 못하는데, 왜 그러겠느냐? 남을 믿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또 사람이 많으면 못 믿을 사람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손버릇이 나빠서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품이 나쁜 것이다. 밥 먹을 때 뒤에 아직 먹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든 상관하지 않고 일부러 제일 맛있는 음식만 끝까지 골라 먹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너무도 이기적이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남을 고려하고 배려하는데, 이는 어떤 문제를 설명하겠느냐? 그 사람은 이성적이고 마음속으로 남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좀 덜 먹고 남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 바로 인품이다. 하나님 집에는 인성을 갖춘 사람도 있고 정상 인성의 기준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 인성이 나쁜 사람도 있다. 내가 말한 이런 모습들로 살펴보면 너희 가운데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너희는 평소에 이런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네가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알아차리고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어느 정도 인성을 갖춘 것이다. 다만 정상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의식하지도 못한다면 인성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논할 수도 없다. 바로 인성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할 때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 볶음 한 접시가 차려진 것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비계든 살코기든 가리지 않고 없어질 때까지 먹는다. 너희는 동물이 먹이를 빼앗는 것을 본 적 있느냐? (본 적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동물의 경우이다. 만약 사람이 그런다면 그렇게 빼앗는 것이 정상 인성에 속하겠느냐? (정상 인성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상 인성이겠느냐? (만족할 줄 알고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 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생각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런 다음 이런 생각을 통해 다시 일을 처리한다면 더 정확하지 않겠느냐? 우선 네 생각이 올발라야 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돼지고기 볶음이 꽤 많네. 좀 더 먹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형제들만 있는 것 같아서 좀 민망하네. 어떡하지? 사람들이 먹기 시작하면 그때 먹어야지. 여자가 너무 게걸스러워 보이면 창피하잖아!’ 여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는 보통 부끄러움을 잘 탄다. 반면 남자는 대부분 ‘돼지고기 볶음이 참 맛있네. 배고프니까 일단 먹고 보자.’라고 생각하고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젓가락을 뻗는다. 하지만 비교적 이성적인 남자는 한 입 먹고 나서 이렇게 생각한다. ‘뒤에 아직 못 먹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만 먹자. 다른 사람 것도 남겨 둬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이성적인 사람이며 천성적으로 정상 인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황당하게 우기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돼지고기 볶음을 먹지 않길 바라신다면 저는 입도 대지 않겠습니다. 그게 더 인성을 갖춘 거 아닌가요?”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내가 이런 예를 들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든 사람은 올바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올바른 태도는 인성의 이성과 양심, 인격과 존엄의 관점에 서서 생각을 거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네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실행한다면 대체로 정상 인성에 부합할 것이다.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일상생활 속의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내는 모습을 말한다. 그런 모습은 너의 본직 사역과 관련이 크지 않거나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공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살아가며 실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업무나 기술을 대하든, 아니면 상식이나 지식을 대하든 사람은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추어야겠느냐? 늘 되는대로 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과연 옳겠느냐? 마음속으로 이런 일들을 건성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야 되겠느냐? 이는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관점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인품과도 관련 있다. 큰 붉은 용은 지난 몇 천 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운동이나 투쟁만 벌였지 경제는 발전시키지 않고 백성들의 삶은 신경도 쓰지 않아 결국 사람들은 되는대로 살아가는 불량 습성을 갖게 됐다. 무슨 일이든 대충 처리하고 관점도 수시로 바뀌며 무엇을 배우든 제대로 배울 생각도 없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다. 늘 관점이 바뀌어서 시장에 필요한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생산해 일단 큰돈을 벌 생각부터 할 뿐 그것을 기반으로 더 발전시키거나 연구하거나 한 단계 더 도약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중국은 경공업과 중공업, 어느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첨단 제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중국인은 “우리 중국은 5천 년 역사의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고 중국인은 선량하고 부지런하다”며 큰소리친다. 정말 그렇다면 중국은 왜 모조품만 만들어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냐? 왜 글로벌 시장에 가져다 팔 만한 물건이 거의 없는 것이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중국에 첨단 제품이 있느냐? 물론 중국인에게도 ‘최첨단’의 것이 있긴 하다. 바로 모방하고 모조품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능하고 사기를 잘 치는 것이다. 이 안에는 불량 습성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를 왜 그렇게 묘사하죠? 우리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으냐? 중국인의 일부 행동을 보면 이런 묘사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보든 민간에서 보든 중국인이 본연의 일을 제대로 하더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령 본연의 일을 좀 하다가도 사회 환경이 열악해서 제대로 일해도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일하려는 마음이 사라져서 손을 놓아 버린다.
인성과 관련된 것들, 즉 사람이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드러내는 태도, 사상, 관점이 문제를 말해 준다. 어떤 문제를 말해 주느냐?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 주고, 그 사람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인지 보여 준다. 단정하고 올바른 게 무엇이겠느냐? 전통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소양을 갖추고 예의가 바르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낡은 관습을 고수하면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럼 단정하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이런 마음 자세를 갖는다. ‘이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든 싫어하는 일이든, 내 흥미 범위 내에 있는 일이든 별 흥미가 없는 일이든, 기왕 내게 맡겨진 일이니 잘 해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부터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하면 마지막에 어느 수준까지 해내든 나는 최선을 다한 거야.’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마음 자세와 태도는 ‘착실히 하자’이다. 어떤 일을 맡은 순간부터 대충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자료를 찾지도 않고, 세심히 준비하지도 않고, 구하거나 묻지도 않는다면, 더 잘하기 위해, 그 분야의 기술이나 업무를 습득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배우려 하지 않고, 얕보는 태도, 되는대로 살자는 태도로 대한다면, 이것은 인성의 문제다. 이는 어영부영하는 게 아니냐? 어떤 사람은 “저한테 맡긴 본분이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한다. 마음에 안 들면 받아들이지 말고, 받아들였다면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이런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이 아니냐? 이를 단정하고 올바르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정상 인성은 최소한 마음을 쓰고, 진지하게 대하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태도, 그리고 착실하고 진지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갖추면 충분하다.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더라도 쉽게 바로잡을 수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형편없다. 하나님이 맡긴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신용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인성은 가치도 없고 귀중하지 않으며 비천하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이든, 아니면 교회에서 네게 맡긴 일이든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대한다면 이것이 정상 인성이 가져야 할 태도이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형제자매가 맡긴 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반드시 해낼 수 있고 잘 대할 수 있어요.”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겠느냐? 신용이 없고 부도덕하며 인성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어느 누구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대할 수 없다. 그 자신의 일도 속이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이 사람은 몹시 비천하고 가치 없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에도 마음을 쓰고 책임을 다하며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때 큰 차이가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비슷할 것이다. 분명 양심 없고 부도덕한 사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품의 차이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제게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동물을 돌보라고 한다면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집의 큰일을 처리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 성립하지 않겠느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을 맡기든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마음이 바르며 인품이 고귀하고 인격과 신용, 덕행을 가지고 있다면 귀중하고 특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든 그의 덕행과 신용으로 대할 것이다. 덕과 신용은 없으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이 일을 맡기시면 전 분명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진실하겠느냐? 이는 다소 허풍 떨며 남을 속이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고서 어떻게 믿음직해질 수 있겠느냐? 이는 빈말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 집에서 기르는 집 지키는 개 두 마리를 어떤 사람에게 보살피도록 했는데 그는 자기 집 개처럼 보살피고 관리했다. 그도 개 기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개를 꽤 잘 보살폈다. 개가 병에 걸리면 병을 치료해 주었고 씻겨 주었으며 제시간에 먹이도 주었다. 그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개를 보살피는 것을 하나의 부탁이자 책임으로 여기고 보살폈다. 이는 인성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그런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그 두 마리 개를 보살피게 됐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개가 불쌍할 정도로 말라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신경 쓰지 않았고 나쁜 기분이 식욕에도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개가 결국 그렇게 말라 버린 것이다. 그 사람은 개들을 그렇게 대했다. 두 사람이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다르겠느냐? (인성이 다릅니다.) 개를 잘 보살피던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깨달았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잘 보살피지 않던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 그 둘은 왜 그렇게 많이 다르겠느냐? 인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신용이 있어서 남에게 약속한 일은 자신이 좋든 싫든 결국 해내고 만다. 어떤 일을 넘겨받든 반드시 착실하게 완성하여 그에 대한 남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도 떳떳하다. 그는 양심이 있어서 모든 일을 양심으로 평가한다. 반면 양심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약속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는 “상대방이 저를 믿어 줬으니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잘해야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마음이 없고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는 인성의 차이가 아니겠느냐? 과연 개를 잘 보살핀 사람이 힘들다고 생각했겠느냐? 그는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떻게 일을 잘 처리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골머리 빠지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 일 때문에 자주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게 적절한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담을 짊어진 것이다. 부담을 짊어지려 하지 않은 그 사람은 같은 본분을 받았지만 받고 나서 짐이라고 생각했고 개가 짖기만 하면 그는 짜증이 나서 이렇게 꾸짖었다. “짖긴 뭘 짖어! 또 짖으면 발로 차서 죽여 버릴 거야!” 이는 인성에 차이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차이가 상당히 크다. 어떤 사람은 네가 한 가지 일을 부탁하면 성가시고 귀찮은 데다가 그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일을 또 주다니,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각종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고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변명한다. 그는 양심과 이성이 없고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유와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인성이 나쁘다는 사실을 변명한다. 인성이 나쁜 사람은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럼 그런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럴 수 없겠느냐? 그런 사람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는 정상 인성과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를 갖추고 있지 않다. 내면에 그런 본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진리와 정상 인성은 어떤 관계이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실행하려면 인성 안에 무엇을 갖춰야겠느냐? 우선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사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갖춰야만 정상 인성이 있는 것이고, 정상 인성을 갖춰야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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