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2) 제 4 부

3)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낮춤과 감춤을 어떻게 대하는가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대할 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데, 방금 구체적인 사례를 일부 폭로해 보았다. 이 방면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그리스도의 또 다른 면인 낮춤과 감춤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여전히 그 특유의 성품 본질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대할 때와 같은 본질적인 모습과 방법이 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멸시하고, 심지어 조롱하고, 정죄하고, 그런 다음 부정한다. 즉, 3부곡이다. 처음에는 먼저 관찰하고, 관찰한 다음에는 정죄하고, 정죄한 다음에는 부정한다는 말이다. 이는 다 습관적인 것이며, 그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낮춤과 감춤이란 무엇이냐? 문자적으로 볼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고,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있고,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고유한 성격과 관계된다. 겉으로 봐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아무런 야심이 없고,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으며, 사람을 얽매려 하지 않고 독심술을 연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는 말이 간단하고, 솔직하고, 분명하며 떠보거나 구슬리는 방식을 써서 사람이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원하면 얘기하고 원치 않으면 억지로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각종 내적 상태를 폭로할 때는 직접적이고 분명하다. 또 하나, 그리스도는 일 처리 방식이 간단하다. 나를 접해 본 사람은 이런 인상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좀 직설적이고 처세 수단이 없군요. 지위는 있지만 어느 그룹에서도 별달리 우월감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건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얼굴을 내밀며 인지도를 높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정말 이 지위가 없고 하나님이 증거하지 않았다면, 타고난 내 성격은 사람들과 있으면 되도록 뒤로 빠지려 하고, 나서기 싫어하고, 특기가 있어도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면 떠받들려 할 텐데 그러면 대응하기 쉽지 않아서 골치가 아프다. 따라서 나는 어디를 가든 나를 떠받들며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린다. 얘기할 일이 있으면 얘기하고, 없으면 서둘러 각자 위치로 가서 할 일을 하도록 한다. 패괴된 사람의 입장에서 이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옹호하는데요! 당신한테 푹 빠졌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할 말을 다 했고, 설명해야 할 것도 다 설명했으니 너도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난 관심 없으니 내 주변을 맴돌지 마라. 사람이 볼 때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인 당신은 그토록 큰 사역을 하셨으니 늘 의기양양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항상 우월감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는 결코 나를 따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고, 그런 우월감도 없다. 내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나는 느끼지 못한다. 너희가 볼 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이런 조건이면 그는 매일 우쭐해서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가 뭘 먹어야 할지, 뭘 입어야 할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하루 종일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겠느냐? 언제나 누군가 자신을 에워싸고 받들어 주길 바라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특히 재주가 좀 있으면 그는 늘 사람들과 회의를 열 궁리만 한다. 연설할 때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갈채를 받는 기분을 누리려는 것이다. 그에게 이것은 술과 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왜 그런 느낌이 없느냐? 나는 왜 그 좋다는 걸 못 느끼는 것이냐? 나는 왜 그 좋다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냐? 세상의 가요계나 음악계에서는 재주가 좀 있는 사람, 특히 노래와 춤이 둘 다 되는 사람은 여신이나 킹카, 천왕, 가왕, 나아가 대부, 대모, 창시자로 불린다. 이런 건 모두 좋은 이름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서열이 낮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샤오왕(小王), 샤오리(小李)로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탈바꿈해서 사람들이 앞으로는 자신을 천왕 천후로 부르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패괴된 인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뒤로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방인처럼 그렇게 나대면 안 되고, 무슨 신으로 불려도 안 되고, 무슨 왕이나 여왕으로 불려도 안 되고, 조용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이름을 첸베이(謙卑)라고 하는 건 좀 평범하기도 하고 충분히 작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니 웨이샤오(微小), 먀오샤오(渺小), 웨이천(微塵), 샤오샤오(小小)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리(沙粒)라든가 나미(納米)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진리에 집중하지 않고 저속한 부분에서 궁리를 한다. 이름을 샤오차오(小草), 샤오먀오(小苗)라고 짓는 사람도 있고, 니투(泥土), 니바(泥巴), 펀투(糞土) 등으로 짓는 사람도 있다. 하나같이 듣기 거북하고 천한 이름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무얼 바꿀 수 있느냐? 내가 볼 때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도 아주 교만하고 못됐으며, 심지어 그중 악인도 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작아지거나 낮아지지 않고 오히려 건방지고, 사악하고, 악독하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성육신해 땅에서 사역했을 때, 그 사역은 비록 간단하고 짧았지만 그것은 인류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역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부활하여 승천하고 다시는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이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다. 인류의 정상적인 사유와 논리대로라면, 성육신 하나님은 33년 반 인류에게 버림받고, 비방당하고, 정죄되고, 모욕을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으니,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후에는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서 승리와 영광의 성과를 누리고, 33년 반 혹은 더 오래 살면서 지상에서 그에 대한 인류의 경배와 앙망을 누리고, 받아 마땅한 지위와 대우를 누려야 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단계 사역을 할 때 살며시, 조용히 왔다. 아무런 의식도 치르지 않았고, 조금 재주가 있다고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인간과는 달리 “내가 왔노라, 나는 하나님 자신이다!”라고 천하에 명백히 알리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 이런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세 박사가 와서 하나님을 경배한 것 말고는, 그 후 예수 그리스도 생활은 고생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 고생과 고난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치대로라면 하나님이 영광을 얻고 사람의 죄를 사해 준 일은 인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큰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고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인류의 구속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류의 경배를 받고 인류의 추앙과 부복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살며시, 조용히, 소리 없이 떠났다. 그 후 2천 년 동안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그 과정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고, 살육이 난무했고, 온 인류의 정죄와 비방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인류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든 하나님은 계속 진리를 선포하며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울러 2천 년 동안 하나님은 분명한 말씀으로 자신을 해명하며 예수가 자신이 입은 육신이니 인류가 그를 경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만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자신의 종들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도록 각국 각지로 파견해서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 사함을 받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가 오리라고 한 메시아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자신이 한 일임을 사실로써 증명하고, 예수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고 온 인류를 구속한 예수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사실로써 증명했다. 그리고 이번의 성육신 하나님은 똑같은 방식, 똑같은 형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왔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복이자 천재일우의 기회이고, 더욱이 인류의 행운이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너희가 이걸 깨달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하나님 신분이 있는 하나님 자신은 태생적으로 교만하지 않고 신실하고,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가 인류 가운데 옴으로써 인류의 각종 패괴 성품을 마주해야 하며, 이것은 그가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같이 그에게 역겨움과 증오를 일으키는 대상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에게는 교만한 성품이 없고, 사악함과 간사함이 없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공의롭고 거룩하다. 하지만 그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의 본질에 적대되고 반대되는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장 많이 베푸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이다. 하나님의 사랑, 긍휼, 관용,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다. 패괴된 인류의 눈에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커다란 사역을 하시고, 그 큰 영광을 얻으시고, 그 많은 사물과 일을 주재하시는데 하나님은 왜 소문내지 않고 표명하지 않지?’ 사람 입장에서 그건 식은 죽 먹기다. 좋은 일 한 가지 한 것을 가지고 열 가지로 부풀리고, 좋은 일 조금 한 걸 가지고 두 배, 세 배 끝도 없이 부풀리며 구체적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그런 게 없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이 말하는 거래라는 게 없다. 하나님은 뭔가를 바라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듯 사례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패괴된 인류와는 달리 지위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내가 무얼 하든 너희는 모두 나의 좋은 점을 기억해야 하고, 내가 한 일을 마음속에 새기며 영원히 나를 기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본질이 없다. 하나님은 야심이 없고 패괴된 인류의 교만한 성품이 없다. 그는 표명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이 표명하지 않으시면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하나님의 지위가 있음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그건 하나님의 본질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었다. 그가 아무리 낮추고 감추어도, 아무리 은밀하게 일해도, 아무리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도 그의 말씀, 사역, 그리고 그의 행사 등이 사람에게서 이루는 최후의 성과는 필연적으로 피조된 인류가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기꺼이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에게는 야심과 욕망이 있고, 교만한 성품과 흉악한 성품, 사악한 성품이 있다. 그는 진리도 없으면서 사람을 점유하고 통제하려 하고, 진리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경배하기를 바란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볼 때 이는 사악한 것이 아니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선민을 두고 하나님과 다툰다. 하나님이 그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에게 다투는 본질이 있느냐? 하나님이 얻는, 피조된 인류의 경배와 순종이 다투어서 얻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는 것이냐?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인류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창조주만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만든 기계가 어떤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기계를 발명한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본떠서 만든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인류는 하나님이 만들었기에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고, 하나님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패괴된 인류를 진정한 인류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할 때 그의 권병을 사용하지 않고, 해명, 변명, 억압, 미혹, 통제라는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수단도, 방식도 없다. 그렇게 하는 건 사탄과 적그리스도뿐이다.

이만큼 교제했는데, 너희는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은 무엇이냐? 고의로 신분을 숨기고 고의로 본질과 실상을 숨기는 것이 감춤이냐? (아닙니다.) 낮춤은 인위적으로 꾸며 내는 것이냐? 억제하는 것이냐? 가장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성육신이십니다. 이렇게 존귀한 신분을 갖춘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옷을 입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의 생활을 한다. 이 모든 게 평범한데 어째서 평범한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고, 성육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신분은 존귀하니 스스로를 낮춰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낮춰 보는 것이 어떤 것이냐? 나는 스스로를 올려 보지도 않고, 낮춰 보지도 않는다. 나는 나일 뿐이고 내가 해야 할 일과 말을 할 뿐이다. 이것이 뭐가 잘못이냐? 높게 보는 것도 낮게 보는 것도 옳지 않다. 높게 보는 것은 교만이고 낮게 보는 것은 가장이고 간사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당연히 명인의 품격이 있어야 하고, 언행도 고상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능력 있는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헤어스타일과 차림새, 치장한 모습을 보십시오. 그게 신분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사람들이 우러러보죠!” 나는 말한다. “어떤 게 신분이냐? 또 사람들이 우러러보면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나는 관심이 없다. 네가 나를 우러러보면 역겹고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러니 절대 나를 우러러보지 마라.”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사회의 그 여성 기업인들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차림새를 보십시오. 딱 봐도 능력자, 엘리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좀 따라 하지 그러십니까?” 나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데 왜 그 여자들을 따라 해야 하느냐?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옷을 입는 건데 내가 왜 위장해야 하느냐? 왜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해야 하느냐? 나는 나인데,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위장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건 속이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볼 때 성육신이 어떤 이미지와 외양을 갖추고 어떤 언행을 갖춰야 그의 신분에 부합하느냐? 너희에게 기준이 있느냐? 기준이 있다. 아니면 그런 시선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기준이 있다. 그렇다면 내 기준이 진리 원칙의 범위를 벗어나겠느냐?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나만 보면 내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든 관념을 품으면서 매일같이 나에 대해 종합하고 규정하는 것이냐? 역겹지 않으냐? 그는 어째서 나를 그렇게 보느냐? 그에게 그리스도가 하는 건 뭐든 옳지 않고 부정적인 것이고, 계략이 담겨 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이냐! 하나님의 영,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양한 신분과 관점을 보면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교만함도 없고, 사탄의 야심과 욕망도 없고, 인류가 말하는 지위에 대한 욕심은 더더욱 없다. 그가 지닌 하나님 자신의 본질 이외에, 하나님의 영에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이르기까지 가장 두드러진 하나의 특징은 낮춤과 감춤이다. 이 낮춤은 꾸며 낸 것이 아니며, 이 감춤은 고의로 피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고 이런 존재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영계에서든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어서든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자 불신파이다. ‘하나님에게 그렇게 큰 권병은 없는 것 같군.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말은 좀 신빙성이 떨어지고, 하나님이 만능이라고 하면 그건 좀 맞는 것 같아. 그렇게 큰 권병이 없는데 그가 어떻게 인류를 주재하겠어? 어디서나 하나님의 지위, 하나님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데 그가 사탄을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하는데, 지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나? 지혜와 전능은 어느 게 더 클까? 지혜가 전능을 좌우할 수 있을까? 전능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라는 이 본질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간파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의혹을 품지만 그 후에 천천히 그것을 해소하는데, 체험하는 과정에서 부단히 구하고 인식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감성적인 인식이 조금 생긴다. 그러나 유독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본질과 모습,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의혹을 품은 뒤, 그것을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의혹을 품고 더욱 심하게 정죄한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사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이 크게 성공할 것을 의심한다. 하나님이 영광의 기세로 만인들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 의심한다. 의심한 후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냐?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낮춤과 감춤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야. 찬미하고 칭송할 가치도 없고, 하나님의 본질도 아니야. 이런 낮춤과 감춤은 하나님이 갖춘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낮춤과 감춤은 무능한 모습이야. 세상에서 사람은 지위가 좀 있으면 왕이나 제후, 황제가 되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동시에 복음 사역이 크게 확장되고 있으니 그리스도의 권력이 점점 커지지 않겠어?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보면 이런 일을 할 계획도 없고 이런 권력을 가질 계획도 없어. 그런 권력이나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유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내가 그를 따르면 복을 얻을 수 있을까? 다음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만국 만민을 통치할 수 있을까? 그가 이 낡은 세계를 멸하고 패괴된 인류를 멸할 수 있을까? 딱 보면 그리스도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지녔는데, 어떻게 큰일을 이룰 수 있을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늘 이런 의문을 품는다. 그리스도의 낮춤과 감춤은 모든 패괴된 인류, 특히 적그리스도가 인정할 수도, 공감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을 자신이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의심하기 위한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권병을 부정하기 위한 증거와 꼬투리로 삼아서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 뒤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관할하는 범위에서 하나님 선민들에게 무자비하고 가차 없이, 두려움도 전혀 없이 손을 댈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능력과 재주, 자신의 야심을 전혀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세력 범위, 자신이 손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수를 뻗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통제하고 자신이 미혹할 수 있는 사람을 미혹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까맣게 잊은 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님 집과 철저하게 갈라선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낮춤과 감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교제의 주된 내용은 무엇이냐? 사람이 인식해야 할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 적그리스도 편에서는 하나님 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독립 왕국을 세우기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된다. 하나님은 육신에 감춰져 있고, 말세의 이번 단계 사역은 은혜시대 사역과 형식상 다소 차이가 있다. 이번 단계 사역에서 비록 이적과 기사는 나타내지 않지만, 하나님이 한 말씀은 지난 단계 사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크나큰 굴욕을 안은 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성의 본질을 지닌 하나님 자신만이 진정으로 스스로를 낮추고 감춘 채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낮춤과 감춤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탄은 절대 할 수 없다. 사탄이 인간 세상에 와서 어떤 일을 할 때는 어떤 육신을 입느냐? 우선은 위대하고, 흉악하고, 간사하고, 사악하다. 그런 다음 사람을 우롱하고 지배하는 여러 술수와 수단에 정통해야 하고 동시에 온갖 기만술이 있어야 하고 매우 모질고 독해야 한다. 행여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고 자신을 선전해서 결국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부르고 황제로 부르면 그는 만족한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사탄의 행동과 정반대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내하고 감추며, 그와 동시에 창조주의 긍휼과 사랑으로 자신의 말씀, 자신의 생명을 사람 내면에 만든다. 이로써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아 정상 인성을 갖추고 정상 인류의 생활을 하는 진정한 피조물이 된다. 비록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일이 인류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할지라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직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친히 성육신하여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꾸준히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돕고, 붙들어 주고, 깨우침과 빛 비춤을 준다. 물론 형벌과 심판, 채찍질과 징계도 내리면서 사람이 나날이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사람이 나날이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고 생명이 나날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긍정적 사물의 실제이다. 인류 사이에서 인류는 하나님이 치른 대가를 찬미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언제 사람에게 “나는 인류를 위해 무엇을 했다. 나는 인류를 위해 대가를 얼마나 치렀다. 인류는 나를 찬미하고 칭송해야 한다.”라고 했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이렇게 요구했느냐? 아니다.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결코 조건을 내세워 사람과 교환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를 너희 가운데 두었으니 너희는 그를 잘 대하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도록 해라. 그가 시킨 일을 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해라. 나중에 대업이 이루어지면 너희 모두 공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에게 이런 의도가 있느냐? 없다.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언제나 온갖 방식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옭아매고, 통제하며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고, 이로써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그의 앞에 오게 만들려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여기저기 소문내고 광고하려고 한다. 적그리스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은 인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찬미하고 칭송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는 그것들을 업신여기고 모독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은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하는 세 가지 모습에 대해 교제해 보았다. 이 세 가지 모습에 대한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무슨 질문은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0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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