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0) 제 3 부
② 사칭한다
이어서 두 번째 항목을 교제해 보자.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얻기 위해 늘 외식한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사람의 관념에 맞는 말을 하고, 겉보기에 남들이 찬성하고 감탄하는 일을 해서 자신의 지명도를 올린다. 이 역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한 방식이다. 사칭과 위장은 차이가 있느냐? 위장하는 것과 사칭하는 것은 표면적인 행위에서 보면 통상적으로 일종의 내적 상태이고, 서로 관련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따로 교제하는 것은 사람들이 들으면 더욱 잘 이해하고, 더욱 뚜렷이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칭[假冒]’이라는 어휘는 ‘가짜[假]’가 아니라 ‘속이다[冒]’에 중점이 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왜 사칭하겠느냐? 물론 사칭에는 모두 일정한 목적이 있는데, 적그리스도의 사칭은 지위와 명망을 얻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사칭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미련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파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사람이 늘 사칭하는 짓을 저지른다면 자연히 남들에게 역겨움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호된 질책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왜 여전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이다. 바로 그는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진작에 수치심을 모르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들 마음에서 지위를 얻으려면 먼저 사람들이 그를 신임하고 높이 평가하고 숭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느냐? 그는 사람의 관념상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와 표현을 위장해 내는 것 말고도 명인이나 위인의 분위기를 흉내 내고, 명인이나 위인이 말하는 방식을 따라 해서 사람들에게서 높은 평가와 앙망을 이끌어 낸다. 이런 식으로 그는 교회에서 어느새 몇몇 사람들로부터 숭배와 치켜세움, 옹호를 받고,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영적인 사람, 명인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 흠모와 우러름을 받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분별력이 전혀 없어 본인이 속으로 좋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이면 숭배하고 우러러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주로 어떤 사람을 사칭하느냐? 영적인 사람을 사칭한다. 대다수가 영적인 사람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바로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숭배받는 영적인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과 거짓된 경건함 때문에 그들을 숭배했고, 그들이 보이는 일부 좋은 행위 때문에 그들을 숭배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서 아주 형통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지금 교회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을 숭배한다. 먼저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많고, 소위 영적인 체험과 간증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적 있고, 큰 이상(異象)을 본 적이 있고, 특이한 체험을 한 사람, 또 사람들 사이에서 잘 떠벌리고 말을 잘해서 남들로부터 숭배와 흠모를 받는 사람, 일하는 방식과 방법, 원칙이 비교적 교회 규정에 맞고 표면적인 행위가 비교적 경건한 사람, 그리고 남들이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큰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영적인 사람을 사칭하느냐? 그는 이들 영적인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사람들 눈에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그런 말과 행동은 내면에서 우러난 것이냐? 아니다. 그는 겉으로 흉내 내고 규례를 지키는 것인데, 단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이 닥치면 얼른 기도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구하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늉만 할 뿐이다. 남들이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정말 크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밖에도 병이 나서 치료받아야 하는데 가서 치료받지도 않고, 먹어야 하는 약도 먹지 않는다. “그 병은 약을 안 먹으면 악화될 텐데요. 약을 먹어야 할 때는 약을 먹고,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해야 하는 거지요. 믿음에 기대어 본분만 내려놓지 않으면 돼요.”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는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저는 두렵지 않아요!” 겉으로는 억지로 침착하고 두렵지 않은 척하고, 믿음이 가득한 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죽을 만큼 겁을 낸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얼른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남들이 모르게 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병원에 가고 약 먹는 일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는 갖은 핑계와 이유를 대면서 쉬쉬한다. 그는 또 늘 이런 말을 한다. “질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하시는 겁니다. 병 속에서 살면 병이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면 병이 없습니다. 우리는 병 속에서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면 이 병은 사라질 거예요.” 그는 겉으로는 늘 이렇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으로 사람들을 돕지만 정작 본인은 뒤에서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한다. 앞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모든 게 하나님 손에 달렸다고 하고, 자신은 병에 걸리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두려워한다. 병을 얻어 입원하는 것도 두려워하고 죽는 것은 더 두려워하는데, 참된 믿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기도한다. “저는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 원하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사람은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는데 어떻게 이런 병이 나에게 닥쳤을까? 다른 사람들은 왜 안 걸렸지?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나를 드러내시고 이 본분을 못 이행하게 하시려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혐오하시는 게 아닐까? 만약 하나님이 나를 혐오하신다면 나는 봉사자라는 건가? 하나님이 나를 봉사하도록 이용하시는 건가? 나는 앞으로 결말이 있을까?’ 입으로는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품고 하나님이 하는 일도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체하면서 남들에게는 자신이 질병에 걸려도 얽매이지 않고 의연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의연하게 순종과 충성심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이 위장하고 사칭하는 것이 아니냐? 그의 믿음, 순종은 모두 거짓이고 충성심도 거짓이다. 여기에는 참된 순종도, 참된 믿음도 없다. 참된 의지와 맡김은 더더욱 없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구하지 않고, 자신의 패괴 성품도 성찰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육적인 이익, 결말과 종착지이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 추측뿐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영적인 모습을 가장하면서 무슨 일이 닥치든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으니 원망하면 안 됩니다.”라고 한다. 입으로는 원망하지 않지만 정작 마음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 의문이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이미 본분을 포기했다. 이것이 사칭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사칭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칭한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에 서로 안부를 묻는 형제자매들이 있으면 그는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느냐? “잡담하지 마세요, 예배 중이잖아요! 여기가 어떤 자린데 그런 얘기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군요. 좀 엄숙하게 임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좀 쉬는데 이를 보게 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또 대충 때우고 싶어졌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면 얼른 하나님 말씀을 좀 읽고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세요.” 형제자매가 업무에 대해서 토론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고 기도부터 한 다음에 토론하고 얘기 나누세요.” 예배 시작 전, 기도를 안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나무라고, 규정하고, 뭐라고 한다. 본인은 언제나 아주 영적이고, 착실하고,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열심히 추구하고, 본분에도 책임감이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또 매일 시간 맞춰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영 생활도 정상적으로 영위하고, 예배도 정상적으로 참여하고, 또 예배 시간에는 꼬박꼬박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교제하면서 잡담이나 일상적인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머리가 길었으니 좀 자르세요. 날씨도 더운데 짧게 자르면 시원하잖아요.”라는 누군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꾸한다. “길어도 괜찮아요. 사역이 중요하죠. 한 이틀 늦게 잘라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옷이 해졌군요. 계속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웃어요.”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이 남들 비웃음 따위를 겁내나요? 우리가 고통을 얼마나 많이 겪었습니까? 큰 붉은 용에게 박해받는 고통도 견디면서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옷이 해졌다고 비웃음을 당하는 게 뭐 대수인가요? 하나님만 열납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좋으냐? (영적인 체하는 말입니다.) 내가 설교를 마친 다음 질문을 해서 다 같이 교제하도록 했는데 사람들이 교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한 마디로 종합해 낸다. “이번에 저는 새로운 빛 비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뭘 드셔도 헛되이 드시는 것이 아니지만 저희는 배추를 먹더라도 헛되이 먹는 것입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뭘 먹어도 헛되이 먹는 것이 아니라고 한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하나님은 저희에게 설교를 해 주셨으니 그건 밥값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교제도 못 했으니 배추를 먹어도 헛되이 먹는 것입니다.’ 일부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 말을 진리로 여기고 여기저기 퍼트린다. 그들은 자기 인식을 교제하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 등과 같은, 누구나 늘 얘기하는 대중적인 주제는 영적이지도 않고, 고차원적이지도 않고, 새로운 빛 비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한 말이야말로 새로운 빛 비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게 고차원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옳은 말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역겹고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건 바로 영적인 이해력도 없으면서 영적인 체하고,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는 체하고, 진리를 깨달은 체하는 사람들이 발명해 낸 말이다. 그런 말은 헛소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글귀와 도리를 읊어 대는 거창한 말, 빈말만 전문적으로 따라 할 뿐 진리를 실행해서 실제에 진입하는 일은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니 영적이고 도리에 맞는 말을 전문적으로 따라 하는 데만 열중하고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는 해부해 보지 않는다. 이런 자가 외식하는 자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자를 제일 혐오한다.
이른바 이런 영적인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 고담준론만 나눈다. 비밀이나 자신에 대한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 고차원적인 얘기만 해서 듣고 있노라면 도무지 지상에서 하는 말 같지 않다. 얘기하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겉돌기만 한다. 겉돈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바로 얘기하다 보면 쓸데없는 소리만 한다는 말이다. 서로 누가 하나님 말씀을 더 많이 읽었는지, 어느 편 말씀을 누가 얼마나 기억하고 얼마나 얘기할 수 있는지, 누가 얘기하는 것이 남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깊이 있고, 빛 비춤이 있는지를 겨룬다. 그들은 이런 것만 겨루는데 이를 영적인 것을 겨룬다고 한다. 가끔 다 같이 모여 요즘 근황이나 바깥일을 얘기하는데 그런 자리에 ‘영적인 사람’이 오면 다 같이 이런 일을 얘기하는 것을 보고 그는 하나님 말씀 책을 들고 구석진 곳에 가서 읽는다. 딱 봐도 이 사람은 사교성이 없고 아주 이상하지 않으냐? 내가 몇몇 사람들과 어떤 주제를 교제하다가 중간에 잠깐 쉬면서 바깥일에 대해 좀 얘기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으냐?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아무 소리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이런 뜻이다. ‘당신이 진리를 교제하면 듣겠지만 잡담을 할 거라면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지면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느냐? 기도할 곳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말한다. “하나님, 제 마음을 접도록 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 앞에 조용히 있으면서 바깥세상의 일에 끌리거나 사로잡히지 않게 해 주시고,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아주 영적인 것이냐? 그는 이것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고 요즘 내적 상태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네가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 말씀은 한 마디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떠나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가 버린 것이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위선적인 행위다. 정말 위선적이다! 그가 사칭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본인이 영적인 사람, 추구하는 사람이고, 본인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말에도 빛 비춤이 있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바깥세상의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는 등 육적인 이런 요구가 없고, 정상인들과 달리 이미 세속에서 벗어나고 저속한 취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몇 마디 나누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안 돼요. 이방인들은 못됐어요.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의 일에 끼어들었다 하면 내면이 교란을 받아요. 얼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얼른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점유되고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만 보면 피하고 말을 섞지 않는다. 정상적인 교류도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가 내세우는 근거는 이런 것이다. “이방인은 다 마귀이니 저들과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혐오하시니 우리가 마귀와 사귀고 마귀와 가까워지면 하나님도 싫어하시겠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도 싫어해야 하고 하나님이 버리시는 건 우리도 버려야 합니다.” 만약 어떤 형제자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지인과 말하고, 흉금을 털어놓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는 속으로 불만을 가진다. ‘그래도 하나님을 오래 믿은 신자인데 이방인을 봐도 피하지도 않고 저렇게 가깝게 지내다니, 딱 봐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지. 일이 닥치면 틀림없이 유다가 되겠군.’ 이렇게 그런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다. 부모가 믿지는 않지만 자녀가 믿는 것을 반대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녀가 돼서 가끔 부모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거나 부모가 아프면 집에 가서 시중들고 돌보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일이며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사람, 즉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느냐? 그도 이렇게 보느냐? 그는 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 “당신은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정을 내려놓아야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잘만 떠들더니, 제가 볼 때는 당신이 정에 더 휘둘리는 것 같군요. 부모가 하나님도 안 믿는데 그들을 버려야죠.” 상대가 대답한다. “우리 부모님은 안 믿어도 대적하지 않고 저를 꽤 지지해 주세요.” “지지해도 안 됩니다. 그래도 마귀죠.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밥을 해 줄 수 있나요?” “이건 인지상정이잖아요? 부모님께 밥 몇 끼 차려 드리면서 좀 효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당신이 왜 정죄하시죠?” “이런 사소한 일은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시더라도 우리 스스로 입장이 있고 굳게 서서 증거해야 합니다. 보아하니 당신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고도 분별력도 없고, 분량도 없고, 마귀에게도 잘해 주다니 정에 너무 휘둘리는군요!” 그는 이런 일도 정죄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남에게 정죄하고 낙인을 찍어서 본인은 분량이 있고 추구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 준다. 하지만 결국 자기 가족이 죽자 그는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고 싶어진다. “당신은 영적인 사람이 아닌가요?” 누군가 이렇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영적인 사람도 연약함이 있잖아요. 제가 지금 좀 연약해지는 것도 안 됩니까?” 이건 교활한 변명이 아니냐? 영적인 체하는 사람은 위장에 능한데 이것을 두고 사칭한다고 한다. 연약함도 없고,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믿음과 충성심이 있고, 맹세를 지킬 수 있고, 고생하고 헌신할 수도 있고, 남들이 볼 때 부적절하고 이상적이지 못한 행위가 전혀 없는 것처럼 사칭한다. 겉으로만 보면 누구나 칭찬하고 흠을 잡을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품위와 기본적으로 맞물리고 심지어 소극성도 없고 연약함도 없다. 누군가 연약함과 소극성을 띠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늘 날카롭게 꾸짖는다. “이까짓 일에도 연약해지는 건 하나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 드리는 것 아닌가요?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어쩜 아직도 연약해지나요? 어쩜 그렇게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어떤 일이 닥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법을 배우며 순종해야죠. 연약해지면 안 됩니다. 언제나 육적인 것을 좇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말은 듣기에 어느 한 마디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구구절절 빈말에 불과하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라고 했는데 그게 사람의 연약함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의 패역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고 육으로 살기에 어느 때든 연약함이 있을 수 있고, 패역이 있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사람, 형제자매들 중 뛰어난 자, 진리를 깨달은 동시에 연약하고 어린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의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그가 이런 역할을 맡으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먼저, 그들은 자신이 이미 육을 초월하고 세속을 초월했다고 생각하고, 정상 인성의 연약함에서 벗어나고 정상 인성의 육적 요구에서 벗어났다고 믿는다. 본인은 하나님 집에서 중책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했다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 입으로 약속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으스댄다. 따라서 그들은 늘 우쭐대면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가 기억할 수 있고 자기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글귀를 들먹이며 다른 사람을 꾸짖고 정죄하고, 규정한다. 또한 언제나 자신의 관념 속에서 상상하는 방법과 주장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규정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이 규례를 지키고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들어서 교회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지킨다. 그는 자신이 영적인 도리를 얘기하거나 세련된 구호를 외칠 수 있고, 앞장설 수 있고, 앞에 나서서 사역을 맡길 원하고,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만 있으면 그것이 영적인 것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지위가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사람인 체하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동시에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인 체한다. 예를 들어, 그에게 타자를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알죠. 저에게 타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계 고칠 줄 아세요?” “모든 기계는 원리가 다 같아요. 고칠 수 있죠.” “트랙터도 고칠 수 있나요?” “그런 구식 기계를 고칠 수 있는 것이 기계 고칠 줄 아는 거라 할 수 있겠어요?” “밥할 줄 아세요?” “먹을 줄 알면 할 줄도 아는 거죠!” “비행기 조종할 줄 아세요?” “배운 적은 없지만 배우면 가능하죠. 기장이 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죠.” 그는 자기가 뭐든 할 줄 알고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고장 난 컴퓨터를 수리해 달라고 했다. 그는 말로는 쉽게 고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고칠 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두 번 세 번 고치다가 컴퓨터 안에 있는 자료를 몽땅 날려 버렸다. “도대체 고칠 줄 아는 거 맞아요?” 수리를 맡긴 사람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에 고쳐 봤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어요. 다른 사람한테 맡기세요.” 정말 위장에 능하지 않으냐? 이런 부류가 바로 천사장의 성품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저는 할 줄 모릅니다.”, “저는 못 해요.”, “저는 안 됩니다.”,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결코 이런 말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에게 물어보면 아무리 할 줄 모르는 일, 본 적 없는 일이라도 이유를 지어내고 말을 지어내서 자기는 뭐든 잘하고, 뭐든 할 줄 알고,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인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하고 빛의 천사인 체하려는, 이런 인간이 아니냐? 적그리스도 부류는 언제나 뭐든 잘하는 체하려 하기 때문에 네가 그에게 다른 사람과 협력하라고, 어떤 문제를 다른 사람과 함께 토론하고, 의논하고, 교제하고, 교류하라고 하면 그는 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사람이 협력해 줄 필요도 없고 조수도 필요 없어요. 무슨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협조해 주지 않아도 혼자서 할 수 있다고요. 나는 뭐든 할 줄 알고 뭐든 할 수 있어요. 못 하는 것도 없고 도달하지 못 하는 것도 없고,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당신들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설령 어떤 것을 할 줄 안다 해도 정통하지 않은, 그런 사람인 줄 아세요? 나는 하나만 배웠지만 무엇이든 다 할 줄 압니다. 한 가지를 터득하면 만사가 통하는 법이죠. 글쓰기면 글쓰기, 외국어면 외국어 다 할 수 있어요. 비록 지금은 외국어를 전혀 못하지만 배운다면 5개국어도 문제없습니다.” 남들이 연기를 할 줄 아는지, 노래와 춤을 할 줄 아는지 물으면 그는 다 할 줄 안다고 대답한다. 허풍을 잘 치는 게 아니냐? 자기는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할 줄 아는 체하다니, 정말 천사장의 본성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하나님 믿는 동안 연약해진 적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약해질 게 뭐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했는데 연약해지면 안 되죠. 연약해지면 하나님께 면목이 없잖아요. 우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당신은 집 떠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집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집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으세요?” 누군가의 말에 그는 대답한다. “눈물은 무슨 눈물입니까? 하나님이 마음속에 계십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집 생각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가족들은 다 마귀, 사탄이에요. 저는 기도하면서 그들을 저주합니다.” 누군가 “하나님 믿는 동안 굽은 길을 간 적은 없으세요?” 하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했는데 어떻게 굽은 길을 갈 수 있습니까? 굽은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엉터리에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 같은 자질을 가진 사람이 굽은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는 본인이 뭐든 잘하고 뭐든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연약하고 소극적인 사람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연약하고 소극적인 사람은 다들 배때기가 부른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 것이냐? 어떤 연약함과 소극성은 정상적이고, 어떤 건 원인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배때기가 불렀다’는 말로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느냐?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영적인 척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척, 결함과 연약함이 없는 척한다. 나아가 자신은 패역도 없고 한 번도 과오를 저지른 적 없는 척한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또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항상 연약함 없이 강하고 자신감 넘치고 전혀 소극적이지 않은 자세를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실제 분량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태도를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든다. 사실 그가 정말 속으로 자신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정말 자신에게 연약함이나 소극성이 없고, 패괴 표출이 없다고 생각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위장과 은폐에 능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강한 면과 자랑스러운 면을 보여 주기 좋아하고, 연약하고 진실한 면은 보여 주기 싫어한다. 이 목적은 분명한데, 바로 자신의 허영과 체면을 지키고, 사람들 마음속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소극성과 연약함을 내보이고 자신의 패역이나 패괴된 면을 공개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커다란 피해를 초래할 수 있어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도 연약함과 패역, 소극적인 면이 있다고 죽어도 말하지 않는다. 설령 어느 날 모두에게 자신의 연약하고 패역한 면이 보여지더라도, 그가 패괴된 사람이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위장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패괴 성품을 지닌 평범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신의 지위가 사라지게 되고,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숭배와 앙망을 잃게 되며, 그러면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권력과 지위를 순순히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 대신 안간힘을 다해 쟁취하려 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일이 닥칠 때마다 그는 능동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과시하고 뽐내다가 문제가 생겨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서둘러 피하거나 책임을 회피한다. 만약 자기가 잘 아는 일을 만나면 잽싸게 남들에게 솜씨를 보여 주며 기회를 잡아 남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고 자신에게 은사와 특기가 있다는 걸 보여 줘서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만든다. 또 어떤 큰일이 닥쳐 누군가 그에게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어보면 그는 쉽게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지 않고 모두에게 먼저 말하라고 한다. 그가 쉽게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관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관점이 틀릴까 봐, 말했다가 반박당하고 망신당할까 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관점이 없고 그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해 함부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잘못 말했다가 비웃음을 살까 봐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그가 자기 관점을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 본모습이 드러날까 봐, 자신이 빈곤하고 가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 사람들 마음속 자신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서다. 그렇기에 모두가 자신의 관점과 생각, 인식을 교제한 후, 그는 고매한 말, 상대적으로 근거 있는 말을 가져다가 자기 관점과 인식인 양 종합한 뒤 모두에게 교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 마음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 적그리스도는 아주 교활하다. 그러니까 정말로 관점을 발표해야 하는 때가 오면 그는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를 모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자신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자질이 어떠한지, 인성은 어떠한지, 이해 능력은 어떠한지, 진리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는지 등을 알게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허풍과 큰소리를 치며 영적인 사람이나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동시에 자신의 진짜 모습과 실제 분량을 애써 숨긴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형제자매들에게 드러낸 적도 없고,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극력 숨겨 왔다.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 믿으면서 하나님께 의혹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까?”라고 하면 그는 “없었습니다.”라고 답하고,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는데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몸이 아플 때 괴롭고 집이 그립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립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더없이 굳세고 의지력이 강하며, 버리고 고난받을 수 있는 사람, 그야말로 단점과 문제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포장한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어떤 패괴나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를 형제자매로 여겨 평등하게 대하고 마음을 열고 교제한다면 그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애써 변호하고 변명하여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결국에는 사람들이 그에게 문제가 없고, 그를 완전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는 거짓으로 꾸미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이 완전무결하거나 성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부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패괴된 인류 가운데 완전무결한 사람이 있느냐? 진정으로 성결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당연히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되었고, 천성적으로 진리도 갖추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완전무결할 수 있겠느냐?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패괴된 인류는 다 더러운 것이다. 만약 누군가 성결한 척하며 자신이 완전무결하다고 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마귀이자 사탄이고 천사장이다. 바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완전무결한 사람, 성결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알겠느냐? (알지 못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그럼 그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적그리스도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건 어떤 부류냐?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맞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가장하는데, 그것도 문제를 부풀려서 자신이 사탄이니, 마귀니 하며 스스로에게 커다란 낙인을 몇 개 찍고는 아주 깊이 인식한 것처럼 가장한다. 이것은 영적인 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외식하는 자가 아니겠느냐? 그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교제할 때 스스로를 참되게 인식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한 것이냐? (적그리스도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얘기할 때는 자신의 실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빈말이나 도리만 얘기하는데 조금도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마치 깊이 인식하는 것 같지만 뉘우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겠느냐? 참된 뉘우침이 전혀 없는데 스스로를 증오하는 성과에 이르렀겠느냐? 뉘우치지 않고 자신을 증오하지도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아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인식할 때는 모두가 공인하거나 모두의 눈에 보이는 일에서만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해 궤변과 해명을 늘어놓는다. 이로써 남들이 그를 아무 잘못도 없는 데다가 스스로에 대한 인식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우러러보게 한다. 사람들은 그가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성찰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이 정말로 잘못을 저지른다면 스스로를 더 잘 인식하게 될 거야. 저런 사람이야말로 경건한 사람이지!’ 그런 그의 행위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무엇이냐?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진실되게 해부하고 인식해서 다른 사람들이 거기서 교훈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을 교제함으로써 남들이 자신을 더욱 우러러보게 만든다. 이것은 어떤 성질이냐? (자신을 증거해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게 바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지 어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냐? 이는 철두철미한 기만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얘기하는 이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함으로써 사람들이 그가 영적이고 자신을 인식할 줄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를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비열하고 추잡한 방법이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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