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6) 제 1 부
3.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의 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 중 세 번째 부분,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에 대한 교제를 계속하겠다. 이 부분은 지난번 예배에서 두 가지 소제목으로 나누어 교제했는데 그 두 가지가 무엇이었느냐? (하나는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마음대로 변조하고 해석한다’이고, 또 하나는 ‘적그리스도는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부정한다’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이 내용과 관련된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은 그 본질과 관계가 있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측면을 대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 말씀은 여러 방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가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원인 역시 한 가지가 아닌 여러 측면과 관련된다. 지난번 예배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구체적인 모습에 관해 교제했는데, 오늘은 한 가지 모습을 더 교제해 보자.
3)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본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면, 그에게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얘기하는 모든 내용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이 현실에 부합하고 이루어질지, 하나님 말씀이 사실일지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참된 믿음이겠느냐, 아니면 속으로 의심하고 관망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속으로 철저하게 의심하고 관망한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이 측면의 모습,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본다’에 대해 교제해 보기로 하자. 엿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어째서 ‘엿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느냐? (하나님, 엿본다는 건 몰래 관찰하고 훔쳐본다는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옳은 설명이다. ‘엿보다’라는 단어의 뜻은 모두 이해했을 것이다. 엿본다는 것은 바로 몰래 관찰하고 관망하는 것, 슬쩍 보면서 눈치채는 사람이 없으면 몰래 뭔가를 하는 것이다. 떳떳한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동작이다. 분명히 그런 동작을 하는 사람은 공개적 장소가 아닌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이런 짓을 한다. 따라서 이런 모습, 이런 해석에서 볼 때,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엿보는 것은 일종의 어떤 행위이냐? (진리를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진리를 멸시하는 행위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는 어째서 하나님 말씀을 대범하게,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엿보는 것이냐? 엿본다는 것은 정말 일종의 동작이냐? 엿본다는 것은 그 해석에서 볼 때 분명 겉으로 보이는 행위가 아니며,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표정, 행동에서 알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모든 생각이 암암리에 마음속에 숨어 있어서 남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고, 그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이를 두고 엿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공개적인 장소에서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태도이다. 분명히 이런 태도는 바른 태도가 아니며, 제3자의 관점, 적대시하는 관점, 또 관망하고 연구하고 의문을 품고 반발하는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볼 때,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보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는 성질이 심각하게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보는 것, 이것은 마음속에서, 사상 속에서, 남들이 모르는 일종의 관점에서 그가 표출하는 성품, 그가 표출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짜 태도이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하나님 말씀을 엿보겠느냐? 그의 입장에서 하나님 말씀 중 본인이 뒤에서 깊이 연구하고 분석할 가치가 있는 말씀은 어떤 것이냐?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얘기한 구체적인 내용 중에 적그리스도가 특별히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속으로 늘 의심하면서 관망하는 말씀은 어떤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속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엿볼 가치가 있는 하나님 말씀은 어떤 것이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과 비밀입니다. 또 사람의 앞길과 운명, 종착지에 관계된 말씀도 있습니다.) 예언, 종착지, 비밀과 같은 것은 대부분 사람이 관심을 가지며, 더군다나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영원히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비교적 관심을 가지고 늘 엿보느냐? 이 말씀들이 이루어지는지, 실현되는지, 사실로 성취된 것을 본인이 볼 수 있는지 등에 관련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약속의 말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저주에 관련된 말씀, 악인을 징벌하고 하나님 말씀을 위배한 모든 이를 징벌하는 말씀도 있다. 그리고 재난을 예언한 분야의 말씀도 있다. 이것도 역시 한 분야가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는지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언제 영광을 얻고, 언제 대업을 이루고, 언제 이 인류를 끝낼지에 관련된 말씀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전부 몇 가지이냐?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이고, 둘째는 사람을 저주하고 징벌하는 말씀이며, 셋째는 재난을 예언한 말씀이고, 넷째는 하나님이 언제 땅을 떠나고 언제 대업을 이루는지에 관련된 말씀이다. 적그리스도가 엿보기 무척 좋아하는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본질에 관련된 말씀이다. 이 한 가지를 추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믿지 않고 늘 하나님 말씀을 엿본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것을 의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엿보는 것이냐? 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근본적으로 적그리스도는 모두 불신파이자 마귀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한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철저하게 의심한다. 그가 의심한다면 어떤 짓을 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신분 본질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신분 본질에 관련된 말씀을 보고 난 뒤 그에게 지각과 반응이 없겠느냐? 그가 착실하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자신이 입양됐다고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를 자신의 친부모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 부모의 사랑과 보호, 부모가 자신의 장래를 위해 치른 모든 대가를 진짜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믿지 않을 때는 남몰래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그는 가끔 부모의 대화를 엿들으며 부모가 자신의 출생에 관해 얘기하는 건 아닌지 살핀다. 평소에도 유심히 관찰하면서, 자기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가 자기를 받았는지, 출생 시 몸무게는 얼마였는지 부모에게 캐묻는다. 그는 늘 이런 것만 알아볼 것이다. 부모가 그를 때리거나 혼내면 의심은 더욱 커진다. 부모가 무엇을 하든 늘 경계하고 의문을 품고, 부모가 아무리 잘해 줘도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의 이런 경계심, 마음속의 모든 활동과 생각, 태도는 모두 남몰래 하는 행동이 아니냐?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인지를 의심하게 되면 그는 뒤에서 분명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 역시 불신파라는 자신의 본질로 인해 분명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믿지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이런 태도가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말씀들을 대할 때 속으로 진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겠느냐? 분명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과 관련된 말씀이라면 그는 속으로 의심하고 반발하는 동시에 관망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선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다.
방금 얘기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엿보는 다섯 가지 모습은 기본적으로 비교적 개괄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이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을 엿보는 데는 구체적인 내용, 구체적인 강조점이 있다. 생명 진입에 관계된 말씀, 하나님이 사람을 위로하는 말씀, 또 비밀을 해석하는 것에 관계된 말씀, 혹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말씀 등 이런 많은 말씀에 적그리스도가 관심을 가지겠느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말씀이 하찮다. 왜 그런 것이냐?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얘기하는, 성품 변화에 관련되고 사람의 생명 진입에 관련된 그 말씀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볼 가치도, 생각할 가치도, 마음에 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며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그 말씀들이 사람의 앞날, 운명과 무슨 관계가 있지? 사람의 종착지와 무슨 관계가 있지? 그 말씀에서는 모두 작은 일만 다루니까 볼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어. 본인이 정말 괴롭고 도무지 방법이 없다면, 잠시 그 말씀들을 가져다 보면서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거나 자신이 넘지 못하는 언덕,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면 그만이야. 그 말씀들이 사람의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있나?’ 그는 성품을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고, 하나님 말씀을 생명, 길, 진리로 삼고 받아들일 생각도 전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앞날과 종착지, 권력이다. 따라서 그런 말씀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마음에 새기지도 않는다. 그 말은 곧 적그리스도가 보기에는 그 말씀들이 진리인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할 가치도 없고, 시간을 들여 분석하고 알아볼 가치는 더더욱 없다는 뜻이다. 적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운명과 종착지에 관계된 말씀, 그의 신분과 지위에 관계된 말씀, 그의 모든 이익과 관계된 말씀이라면 그건 큰일이고,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적그리스도가 몇몇 하나님 말씀의 이런 부분을 이렇게 중요하게 보고, 이 말씀들을 이렇게 중시하는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 말씀을 엿본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조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과는 좀 다르고, 좀 부적절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성취될 것임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얘기하는 것이 과연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심합니다. 그는 믿고 인정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과연 이루어질지 관찰합니다.) 그런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가 그 말씀들을 중시하는 것은 그런 말씀이 그의 욕망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만약 그 말씀들이 이루어져서 그의 야심이 채워진다면, 그가 만약 그 말씀들을 붙들고 지켜서 그런 말씀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패를 제대로 고른 것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카드가 적중한 것이다. 그가 그런 말씀을 중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속으로 그 말씀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며, 그가 속으로 그 말씀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겨 받아들였다고 할 수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이 말씀들을 중시하는 동시에 속으로 의심하고 관망한다. 그 말씀들이 시시각각, 언제 어디서나 그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부정하는 증거와 약점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시종일관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하나님이 행한 각 단계의 사역과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끌고 지나간 각 시기에 이런 말씀들이 실현되고 이루어졌는지를 본다. 명백하게도, 적그리스도가 매 순간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주시하는 동안,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대적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그의 태도는 결코 바뀐 적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연구하고, 언제나 속으로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 말과 행동을 엿보고,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을 정죄하려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일관된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받아들이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순종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려는 뜻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하나씩 교제해 보자.
(1)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엿보다
첫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엿본다.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할 때부터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 선민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상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축복과 은혜, 사람에게 약속하는 복에 관한 말씀들을 무척 많이 했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장소, 혹은 다양한 배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축복과 약속에 대해 알려 주고, 사람이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고 사람은 어떤 복과 약속을 얻게 될지 등을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이런 말씀들을 했고,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일정한 배경이나 상황에서 한 말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이런 약속과 축복은 모두 사람의 진리 추구, 성품 변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 등 긍정적인 모습과 관계가 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약속과 축복에는 모두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조건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관념 상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고, 일정한 규칙도 있다. 다양한 사람에게서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실현되고, 성취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두고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같은 일을 했더라도 하나님이 주는 대우는 다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동시에 교회 리더를 맡았는데 그중 한 명은 언제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또 항상 징계를 받아서 분량이 매우 빨리 자랐다. 다른 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둔하고, 반응도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고 발전도 더디었다. 사람 입장에서는, 동시에 같은 사역을 하며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연히 똑같이 축복을 내리고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체험하고 거둔 생명 진입 측면, 혹은 표면적으로 얻은 은혜 측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분명한 차이’는 당연히 필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축복이나 서로 다른 대우, 혹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얻는 깨우침과 빛 비춤 등 이런 수확을 하나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한다.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허영심도 강하고, 승부욕도 강하고, 시기심도 많다. 겉으로 볼 때는 헌신하기 원하고 고생도 좀 할 수 있지만,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는 못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부지런하다. 비록 같은 패괴 성품이 있지만 사람이 비교적 정직하고 겸손해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마련해 준 모든 환경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이해하고, 또한 정성껏 대할 수 있다. 이렇게 겉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사역하고, 사역의 양도 비슷하지만, 하나님은 사람 각자의 성품, 각자의 추구를 근거로 각기 다른 축복과 깨우침, 빛 비춤을 줄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도 많이 받고, 징계도 자주 받고, 수확도 더 크다. 하지만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징계를 받는 일이 훨씬 적고, 겪는 고통도 훨씬 적어서 생명 성장도 느리고, 얻는 것도 적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봤을 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얻었느냐? (고통을 많이 받고 자주 징계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과 축복을 받은 사람은 겉보기에는 징계를 받아 늘 벽에 부딪히고, 패괴를 표출해서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자주 받을 수 있다. 반면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사는 게 무척 편하고, 즐겁고, 자유롭다. 나태해도 징계가 없고, 남을 시샘해도 징계가 없고, 사역에 책임감이 없어도 징계가 없다. 그러면서도 지위의 복을 누리며 매우 편안하게 살아간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 순수하게 이해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겠느냐? 징계를 받고, 늘 벽에 부딪히고,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축복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바란다. 설령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자주 받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이런 체험과 수확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하는 축복과 약속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대할 때, 한 사람이 진리를 얼마나 깨닫고 얻었는지, 긍정적인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를 기준으로 가늠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육적인 이해득실과 물질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사람이 얼마나 얻었는지를 가늠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을 부러워하겠느냐? (징계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런 나태하고 충성심 없는, 전혀 징계를 받지 않으면서 지위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적그리스도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그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하고 축복을 내리는 이 일에서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어떻게 엿보느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축복하고 어떤 사람에게 약속을 주는지,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약속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을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관찰하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치른 사람이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의 징계와 인도를 받는 것이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바보나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손해 보는 일이고 명예를 잃는 일이잖아? 이런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나님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이렇게 실현된다고? 만약 이렇게 실현되는 거라면, 난 그런 사람은 되지 않을 거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자 추구하지 않겠어.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사역하신다면 난 받아들이지 않겠어. 그게 무슨 진리야? 사람을 구원하는 게 뭐 그딴 식이야?’ 그의 마음에는 반발심이 생긴다. 그는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축복하고 이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베풀어 준다는 사실도,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들어 준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적그리스도 주변에 하나님을 믿은 후부터 집안 장사도 잘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차도 사고 집도 사는 등 물질생활이 갈수록 나아지고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을 보며 생각한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축복을 받았구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어.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약속과 축복은 저런 사람에게서 실현되는 것이로구나.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거야. 보아하니 하나님 말씀엔 권병이 있는 것 같아.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길 잘했어. 큰 복을 얻어서 하는 일마다 잘 풀릴 거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어.’ 이 사실을 지켜본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잠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약간이나마 인정하고 믿게 된다. 물론 이 인정과 믿음 뒤에 괄호를 쳐서 ‘검증이 좀 더 필요함’이라고 덧붙인다. 일상생활에서 적그리스도는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약속이 많은 사람에게서 이루어지고 실현되었다는 각종 증거를 계속 수집한다. 적그리스도는 관찰하는 동시에 이런 증거를 수집하고,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았는지, 이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는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 살핀다. 물론 계속해서 관찰하며 증거를 모으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행위와 방식, 관점을 모방하려고 시도한다. 만약 자신도 물질적인 축복, 물질적인 대우와 즐거움을 얻게 되면 속으로 슬며시 인정한다.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구나. 실현될 수 있는 거였어. 보아하니 이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인 것 같아. 정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걸. 그분은 사람에게 축복과 약속을 베풀어 주고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면서 이익을 바라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 주실 수 있어. 뒤처지거나 해이해지지 말고 계속 믿고 따라야겠네.’ 적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망한다. 그렇다면 그가 관망할 때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느냐? 그가 대놓고 관망하면서 아무에게나 “저는 하나님의 그런 축복과 약속은 안 믿어요.”라고 하겠느냐? (아닙니다.) 겉으로 봐서는 알아차릴 수 없다. 네가 볼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열에 서서 일과 결혼, 가정 등을 버리고, 사람들과 함께 본분을 이행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으며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른다. 또한, 교란하는 말이나 소극적인 말도 하지 않고, 판단하는 말도 하지 않고, 나쁜 짓도, 교란하는 짓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겉으로 아무리 은밀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내면에서 그의 행위를 주도하고 좌우하는 것은 그의 관점과 사상이다. 그가 속으로 하나님 말씀을 관망하고 엿보는 것은 하나님에게 숨길 수 없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어느 방면이 사람에게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에게 숨길 수 없는 것이냐? 사람은 사람의 행위만을 보고, 사람이 드러내는 것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 사람이 드러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사람의 폐부를 살핀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행위,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비교적 표면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한층 깊은 생각과 본성 내의 많은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엿볼 때 적그리스도는 겉으로 시간을 바치고, 또한 육적으로 대가를 치를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에게 바치지는 않는다. 마음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바치지 않은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온 힘을 다하고 주저 없이 뛰어드는 게 아니라, 그저 겉으로 잘못이 드러나지 않고, 모든 과정의 큰 방향만 맞으면 그만이라는 자세를 추구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그의 내면 깊은 곳, 그의 폐부에 자리 잡은 한 가지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지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아닌지에 달렸어.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신분 본질이 진짜인지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 해.’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에게 진심일 수 있겠느냐?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이런 생각들은 그를 가로막고, 항상 그를 일깨운다. ‘하나님께 진심을 바치거나 전력투구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 시늉만 하면 돼. 바보처럼 굴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걸 다 쏟아붓지는 말아야지. 반드시 대비책을 마련해 둬야 해.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하나님께 내 목숨, 내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칠 수는 없지.’ 그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너희는 알아차렸느냐? (몰랐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들은 예배드릴 때나 사람들을 접할 때, 겉으로는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교류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깨달음과 인식, 체험도 교제하고, 신도들이 갖춰야 할 일부 표면적이고 평이하고 기본적인 행위와 모습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하나님에 대한 진심은 전혀 자라거나 개선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대가를 치르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몇 년을 이행하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의 생명은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모습은 어떤 부분에서 나타나느냐? 일을 만났을 때 전혀 원칙을 구하지 않고 그저 수중의 일거리만 중단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이 말한 원칙을 전혀 자신의 실행 준칙으로 삼지 않으며, 그저 표면적으로 사람이 감독하고, 단속하고, 인솔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감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약속과 축복이 누구에게서 확실히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실현되는지 명확하게 긍정하기 전까지, 자신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약속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그가 일하는 원칙과 방식, 또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일깨우는 한편, 동시에 속으로 하나님에게 따지려고 저울질한다. 그가 하나님과 입씨름을 벌이는 초점이 무엇이냐? 그는 생각한다. ‘당신의 약속, 축복은 실현되지도 않았고, 저는 본 적도 없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도 볼 수 없으면 당신 신분에 확신을 가질 수 없죠. 당신 신분에 대해 확신이 없는데 당신의 그런 말을 진리로 여기고 하나님 말씀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가 속으로 하나님과 이 일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지 않으냐? 그는 말한다. “당신은 사람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여러 가지 내용이 만약 제게서 입증되지 않으면 당신에 대한 제 믿음은 100%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언제나 불순물이 섞여 있고 완전히 믿지 못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태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이방인들이 얘기하는 ‘목표물이 명확할 때 움직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당신 약속과 축복을 실현시킬 능력을 갖추고 계셔야 합니다. 만약 당신 말씀들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당신을 믿고도 큰 복을 누리지 못하고, 부귀영화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당신의 비호를 받지 못할 거라면 뭣 하러 당신을 따르겠습니까?”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그의 사상 관점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면 반드시 이익이 뒤따라야 한다. 그들은 이익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명예와 이익,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면, 어떤 사역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남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첫 번째로 취해야 할 이익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서 언급된 약속과 축복을 반드시 얻는 것이다. 그 밖에도 교회 안에서도 명예와 이익, 지위를 누려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으면 남보다 한층 높아야 하고, 남들이 우러러봐 줘야 하고,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런 걸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누리지 못할 경우, 그는 자신이 믿는 그 하나님이 과연 참하나님인지 의문을 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그런 논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려야 한다’는 말을 진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한번 분석해 보자. 이 말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이제는 이 말이 진리가 아니라 궤변이자 사탄의 논리이며 진리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이 “나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고 절대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느냐? 하나님 말씀 중에 어디 이런 말씀이 있느냐? 하나님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렇게 한 적도 없다. 복을 받고 화를 입는 일에 관해서는 구할 진리가 있다. 어떤 말씀이 사람이 지켜야 할 명언이겠느냐?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고 말한 적 있는데, 이 말은 진리이냐 아니냐? 이 말은 사람의 말이므로 진리의 높이까지는 오르지 못하지만, 여기에 진리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진리에 부합하는 부분은 어떤 것이냐? 사람이 복을 받든, 화를 입든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렸고, 모두 하나님의 주재라는 점, 이것은 진리다. 적그리스도가 그 점을 믿겠느냐?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왜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느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복만 받으려 합니다.) (너무 이기적이어서 육적인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으려 하고 화를 입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 복을 받고 좋은 것을 얻고 은혜를 받고, 더 많은 물질적 누림을 얻고, 큰 이득을 얻는 것을 보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물질적인 축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이런 뜻이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사람을 축복하고 재앙을 없애야지 사람이 고통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당신을 믿는 일이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고도 화를 입고 고통받는다면 사람이 당신을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만사 만물이 모두 하나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걸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 원인이 무엇이냐? 적그리스도는 화를 입는 것을 겁내고, 이익을 얻고, 덕을 보고, 축복을 누리기만을 바란다. 그는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서 하나님 손에서 이익을 얻기만을 바란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이기적이고 비열한 관점을 갖고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과 관련된 말씀에서 보이는 일련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일련의 모습은 주로 적그리스도의 추구 관점과 관련되고,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이런 일을 대하는 그의 견해, 평가, 이해와 관련된다. 그는 비록 겉으로 명확하게 하나님 말씀을 비방하거나 거기에 반발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그런 말씀, 하나님이 하는 그런 일을 비방하고, 의심하고, 정죄하고, 또한 선택적인 방식을 취한다. 하나님의 이런 약속과 축복의 말씀이 일부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질 때 그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반면 하나님이 한 일이 자신의 관념 상상에 따른 약속과 축복이 아닐 때, 적그리스도는 금세 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의 정확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한다는 이 사실을 부정한다. 적그리스도의 이 모든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가 명확한 말로 자신의 관점을 퍼뜨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속으로 하나님의 그 말씀들을 관망하고 엿보는 그의 이런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명 진입 방면의 일을 교제하고,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일을 교제한다 해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지 엿보는 그런 마음과 태도를 내려놓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실현될 때는 쾌재를 부르고 환호작약하며 하나님의 큰 능력을 찬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자신의 관념대로 실현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암암리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하나님 이름을 비방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편안하고 무탈할 때, 어떤 사람들은 내적 상태가 차가웠다 뜨거웠다를 반복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가도 기분이 저조할 때는 또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하며 기분이 오락가락하는데 다른 사람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기분이 좋을 때 그는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고, 정말 위대하신 분이야. 하나님의 권병은 실제로 존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지!”라며 떠들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내뱉기조차 쉽지 않다. 큰 소리로 하나님 이름을 찬미하는 것도 그 자신이고, 속으로 하나님을 비방하고, 부정하고, 모독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것도 그 자신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으면서 남들은 치르지 못할 대가를 치르는 것도 그 자신이고, 본분에 화풀이를 하며 하나님 집 이익을 팔아넘기고, 고의로 사역을 교란하고, 본분과 사역에 고의로 소홀히 임하는 것도 역시 그 자신이다. 겉보기에는 같은 사람이지만, 그의 행위와 태도, 성품을 보면, 이런 다른 모습은 마치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보는 듯하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전혀 진리로 여기거나 하나님 말씀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보면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고, 사람이 평생 굳게 지켜야 할 진리 원칙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엿보는 첫 번째 모습,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엿보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그가 한평생 누리는 물질적인 대우, 심리적인 대우, 생활 환경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니 그는 이 방면에 무척 관심이 많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질지를 기준으로 하나님 능력의 크기와 하나님 신분의 진위를 가늠한다. 그는 속으로 몰래 이런 궁리를 하고 이런 생각을 한다. 엿보는 것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생명 진입 방면의 여러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 축복의 말씀과 관련된 것에는 눈을 반짝인다. 그런 것에는 눈을 번뜩이며 욕망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은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두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한번 쥐면 내려놓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대하는 측면의 모습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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