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에 관하여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 (제2부)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해 찾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지난번 예배에서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태도에서 제10조의 두 번째 소제목인 ‘성육신 하나님을 멸시한다’에 대해 교제했다. 우리가 해당 항목을 어디까지 교제했느냐?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입니다.) ‘기분에 따라 그리스도를 대한다’까지 교제했다. 먼저 몇 가지를 교제했는지 되짚어 보자. ‘기분대로’라고 할 때 여기서 해부한 상황은 몇 가지였느냐? (다섯 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가 쫓겨 다닐 때, 성육신에 대해 관념이 생겼을 때, 사람이 발탁되거나 교체되었을 때, 그리고 각종 상황을 마주했을 때입니다.) 대충 그런 것이었다. 너희는 이 내용들을 들을 때 단순히 그 일들을 듣기만 했느냐, 아니면 그 일을 통해 자신에게 대조해 보면서 그 안에서 진리를 얻고 깨달았느냐? 너희는 어떤 관점으로 들었느냐? (하나님이 이런 내적 상태와 모습을 폭로하고 해부하실 때 자신에게 대조해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적그리스도의 그런 태도와 완전 똑같지는 않지만 표출하는 성품과 본성 본질은 다 같습니다.) 그렇게 폭로된 내적 상태, 태도, 본질은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자신에게 이런 패괴 성품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체험이 점차 깊어지면서 몇몇 성품과 행동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얘기하는 내용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모습이 지금 너와 관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네가 전에 이와 유사한 일을 한 적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튼 이런 일들이 너와 무관하다거나 앞으로 네가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네게 이런 성품과 행동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적그리스도의 각종 태도를 교제하고 폭로한 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일 년이 넘도록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교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말해 보아라, 교제하는 이 내용들이 구체적이고 철저하냐, 그렇지 않으냐? (철저합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철저하다! 이 정도로 교제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이 원래의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즉, 이런 말씀을 하고, 이런 내적 상태와 성품, 본질을 폭로한 것이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에도 일부 사람들은 계속해서 못된 짓과 독단을 일삼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등 원래의 태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지위가 생기면 그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더욱 철저하게 드러나며,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계속 교체되고 제명된다. 이건 어찌 된 일이냐? (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없고,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들어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들이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없고, 그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그들은 천성적으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적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본질과 태도를 이렇게 자세히 교제하고 폭로해도 이들 적그리스도와 악인은 여전히 거리낌 없이, 겁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사람들은 정말 본성을 고치기 힘들고,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와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생활을 보면,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방식을 보면 그들은 전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품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 말씀들이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여서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이 말씀들이 적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어느 정도 채찍질과 같은 작용을 하느냐? 행동을 억제하고 양심 도덕의 기준을 높이는 작용을 하느냐? (조금은 작용합니다.) 만약 이런 작용마저 없다면 그래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말씀을 듣고 적그리스도의 각종 성품 본질에 대해 그나마 분별도 어느 정도 생기고, 마음속 깊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증오하게 된다. 아울러 자신의 패괴된 성품 본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좋은 모습이고,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들을수록 소극적이 되는 사람은 없느냐? 이런 말씀만 들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 ‘망했다.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내적 상태, 성품을 폭로할 때마다 전부 나와 맞아떨어졌고, 한 번도 나랑 상관없었던 적이 없었어. 언제면 내가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언제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말씀을 들을수록 소극적이 되고 궁지에 빠진다. 이 모습이 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너희는 소극적이 되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내가 적그리스도의 모습, 그에 관한 일을 폭로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 괴로우냐?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가슴을 찌르는 듯하고 부끄럽습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이든, 어쨌든 소극적이 되지 않았다면 그건 좋은 일이고, 너희는 굳게 선 것이다. 하지만 소극적이 되지 않았다고 그게 다가 아니다. 그건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최종 목표가 아니다. 그 말씀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방면의 행동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성품을 인식하고, 자신의 본질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생활에서, 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행의 길을 찾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표출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이 방면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이 말씀들은 헛되이 들은 게 아니고 네게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 적그리스도가 성육신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한 항목 중 네 번째, 그리스도가 하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따르거나 순종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교제해 보자.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하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따르거나 순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듣는 것이냐? 이 말은 기본적으로 그의 듣는 태도를 개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복종하지 않고 참된 순종도 없으며,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귀로만 들을 뿐, 마음으로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볼 때, 적그리스도의 이쪽 방면의 모습과 성품은 이 기본적인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로 볼 때, 적그리스도 부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 하나님과 사람이 좋다고 여기고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물, 자연법칙에 부합하는 사물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불복하고, 불평하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의 견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다. 그의 견해는 긍정적인 사물의 규율과 법칙에 부합하느냐? 아니다. 그의 견해는 두 가지 방면을 벗어나지 않는데, 하나는 사탄의 법칙이고, 또 하나는 사탄의 이익과 사탄의 본성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견해와 태도 역시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데, 하나는 사탄의 논리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성품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의 대변인이고,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의 선포자이자 화신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역할에 대해 궁금해하고, 연구하기 좋아하고, 또 지위가 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환심을 사고 아첨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마음속으로는 그런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지 않고, 참된 사랑과 순종은 더더욱 없다. 패괴된 인류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이런 그리스도의 역할을 볼 때, 그의 겉모습은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언행 및 인성의 여러 면도 평범하고 정상적이다. 심지어 그가 사역하는 형식과 방식, 방법 역시 어느 누가 봐도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이고, 지극히 실제적이며, 초연하지도, 공허하지도, 막연하지도 않고, 현실 생활에서 괴리되지 않는다. 요컨대, 겉모습을 봤을 때 그리스도는 높지도 위대하지도 않고, 언행이 심오하거나 추상적이지도 않고, 사람의 육안으로 관찰해서 무슨 비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너무나 실제적이고 너무나 정상적이다. 우선 성육신하여 이 모든 사역을 한 본질과 성질이 과연 어떤 것인지는 접어 두고, 오로지 성육신이라는 이 역할의 모든 표면적인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만 말해 보자. 언행, 생활 규칙, 성격, 취미, 교육 수준, 그리고 그가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는 일,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람과 함께 지내는 방식, 그리고 그가 표현해 낸, 그가 아는 일 등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볼 때 초자연하지 않고, 높지도 위대하지도 않고, 공허하지 않고, 무척 실제적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검증과 같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후에는 그리스도의 겉에 드러난 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모두 성육신이라는 범주 안에 귀결시켜 인식하고 이해하고 순종한다. 유독 적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할 줄 모른다. 그들은 그걸 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처럼 더없이 평범한 인물은 자신들에게 뭔가 부족한 것 같다고 느낀다. 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이냐?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늘 이 평범한 사람이 그다지 하나님 같지 않다고 느낀다. 또한, 항상 이 평범한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일 처리하고,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 부류의 내면을 보면 그들은 이런 평범한 사람을 그들의 주님,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부분, 실제적인 부분, 평범한 부분일수록 이들 적그리스도가 멸시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그 어느 방면의 모습도 내면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반발하기까지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엇을 포함하느냐? 때로는 사역지침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결점을 지적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부류의 패괴 본질을 폭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 가지 일의 본질과 경위를 분석함으로써 그 일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해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 가지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부류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사람들을 발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사람들을 교체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사람들을 훈계하고 책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가 사역하는 동안에 한 말씀에는 사람의 생명 성품과 관련된 진리 외에도 각종 사물에 관련되거나 인류의 지식, 여러 업무에 관련된 주제도 적지 않다. 그리스도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사람이지 현실과 동떨어져 생활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류의 생존, 생활에 관련된 이런 일들이라면 그리스도는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일들을 다루는 방식에도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 원칙이 만약 사람의 생존과 생명 진입에 관련되고, 인류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런 주제에 관련된다면 모두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언급하는 인류의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업무 측면에 관련된 일, 이런 말씀은 직접적으로 진리라고 칭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인류가 인식한 이런 화제의 관점, 태도, 원칙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인류가 한 가지 지식을 대하는 태도는 숭배하는 것이고, 이 지식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각각의 지식을 다룰 때 해부하고 분석할 수 있고, 올바르게 다룰 수 있다. 예를 들면, 너희는 한 가지 업무에 정통하고 이 방면의 지식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너희가 이 방면의 지식을 응용함에 있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너희는 어떻게 이 지식을 응용하느냐? 그 안에 진리 원칙이 있느냐?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원칙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본분을 이행할 때 지식에 기댈 것이다. 비록 나는 그 업무와 지식에 대해 정통하지 않고, 대략적으로 파악해서 원리를 조금 아는 정도이지만, 어떤 방식과 원칙으로 그 지식을 응용해야 그것을 하나님 사역에 봉사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지를 안다. 이것이 바로 차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이 점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었다고 하는 이 말씀이 과연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고 구현되었는지,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거기에서 어떤 도움을 얻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이 차원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적그리스도에게는 성육신 하나님이 아무리 봐도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시선으로 가늠하고 사람의 지식과 경험, 사람의 머리, 사람의 음모와 계략으로 바라보기에 아무리 봐도 이 사람에게서 어떤 특별한 점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가 육안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현미경, 투시경을 사용한다면 볼 수 있겠느냐? 그건 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고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다면, 영계와 통하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영계와 통하는 사람은 영계를 볼 수 있고 영체를 볼 수 있는데, 어째서 성육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탄이 영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계에 있는데,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따르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습니다.) 사탄은 매일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계와 통하는 사람이 설령 하나님의 영체를 보았다고 한들 하나님임을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니 문제의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이냐?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조상, 그의 뿌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어도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육신 하나님처럼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가 경배할 수 있겠느냐? 더욱 불가능하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무엇으로 보든 소용없다. 하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얼마나 큰 사역을 했는데, 인간 세상에서 이것은 가장 큰 이적과 기사가 아니냐? 적그리스도가 만약 인정할 수 있었다면 그는 진작부터 믿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하신 사실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언제나 불복하는 거야.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조금 나타내셔서 그에게 영계가 과연 어떤 곳인지 보여 줌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본체를 보고, 또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따르겠지.’ 그런 것이냐? 영계에서 오랜 세월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복종하지 않은 적그리스도가 겨우 몇 년 만에 복종하겠느냐? 불가능하다. 그의 본성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해서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도 그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천성이다. 그의 천성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적그리스도 부류는 영원히 하나님, 진리, 긍정적 사물과 끝까지 싸우고 대항하며, 죽어도 이를 그만두지 않는다. 이는 죽어 마땅한 대상이 아니냐?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이냐?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고,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건 죽어 마땅하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는 이 평범한 사람을 겉에서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연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말씀하고 일할 때 적그리스도에게는 온갖 다양한 태도가 생겨난다.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을 대할 때의 각종 태도로부터 그의 본성 본질을 폭로해 보자.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함께 사역이나 진리 원칙을 교제하면서 몇 가지 구체적인 실행을 얘기할 경우, 이런 것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구체적으로 그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 사역을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 등과 관련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어떤 사역도 이론을 얘기하고 구호를 외쳐서 사람들을 고무시킨 다음 각오를 다지게 한다고 끝이 아니다. 본분과 관련된 사역은 그 어떤 것도 간단하지 않고 모두 세부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어떻게 옳은 사람을 선발해서 쓸 것인가,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내적 상태를 어떻게 처리하고 다룰 것인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각종 문제를 어떻게 원칙대로 처리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독단적으로, 혹은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조화롭게 협력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된다. 그리스도가 몇몇 구체적 사역에서 사람이 시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구체적인 항목을 교제할 때, 사람은 아마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구호를 외치고 도리를 얘기하는 것은 간단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소한 사람이 에너지와 대가, 시간을 들여서 실제적으로 그 일들을 해야 한다. 적합한 사람도 찾아야 하고, 업무도 배워야 한다. 각각의 업무에 관련된 상식과 이론, 구체적인 조작 방식과 방법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난이도 높은 문제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보통 정상적인 사람은 난이도가 높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난처해하고 압박감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서 압박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해 달라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구하고, 깨우침과 도움을 구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구하고, 또한 충성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 달라고 구할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사역에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 그에게 시행하도록 했을 때, 또한 그 사역에 어려운 부분이 있을 때, 그는 속으로 반발하며 하기 싫어한다. 하기 싫어하는 태도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그는 말한다. “왜 좋은 일은 저한테 안 오는 겁니까? 어떻게 저한테는 어려운 문제만 주고, 요구만 하십니까? 제가 한가한 사람인 줄 아세요? 노예나 심부름꾼인 줄 아세요? 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일을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는데, 그럼 직접 한번 해 보세요!” 이것이 순종이냐? 받아들이는 태도이냐? 그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반발이고 대항입니다.) 어째서 반발하고 대항하는 것이냐? “가서 고기 몇 근만 사 오세요. 요리해서 다 같이 먹게.”라고 말하면 그가 대항하겠느냐? (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서 밭 좀 갈도록 해요. 밭 갈 때 돌도 좀 골라내고요. 그런 다음 식사합시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육이 고생해야 하는 일, 어렵고 압박을 받는 일 앞에서는 불만이 생기고, 하기가 싫고, 반발심과 원망이 들기 시작한다. ‘왜 좋은 일은 나한테 안 오지? 가벼운 일, 하기 쉬운 일을 할 때는 왜 내가 안 보이나? 어려운 일, 힘든 일, 지저분한 일은 나한테 시키고 말이야. 내가 착실해서 만만해 보이나?’ 그는 속으로 반발하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반발하는 것이냐? 어떤 게 더러운 일, 힘든 일이냐? 어떤 게 어려움이냐? 모두 본분이 아니냐? 배정받은 대로 가서 하면 되지 뭘 그렇게 고르려 드느냐? 이게 일부러 못살게 구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일부러 자기를 못살게 굴고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본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이건 어떤 상황이냐? 어려움이 닥쳐서 육이 고생해야 하고 편하게 있을 수 없게 됐다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조건 없이, 불평 없이 순종하는 것이냐? 어려움이 좀 있으면 하기 싫어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이라면, 자기가 볼 때 어려운 일, 안 좋은 일, 천한 일, 남들이 무시하는 일이라면 기를 쓰고 반발하고 반항하고 거절하며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하는 말씀, 그리스도의 분부, 그리스도가 교제하는 원칙을 대할 때,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고, 자신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적그리스도가 맨 처음 보이는 태도는 바로 반발하고 거절하며 속으로 반감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이익을 얻는 일에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안일함을 누리려 하고 체면을 세우고 싶어 한다. 육이 고생해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고, 심지어 남에게 미움을 사는 일이라면 그들이 기분 좋게, 기꺼이 받아들이겠느냐? 절대적인 순종에 이를 수 있겠느냐? 전혀 도달하지 못하며, 완전히 불복하고 불평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기 싫은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취향과 입맛,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만났을 때 보이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절대적인 거절, 절대적인 반발이고, 일말의 순종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다 보면 속으로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 이 일에 대해 어째서 저런 견해를 보이시지? 어째서 저렇게 주장하고 저렇게 정의하시지? 이것도 진리인가? 이것도 하나님 말씀인가? 꼭 그런 건 아닐 거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은 저렇게 기록되었고, 이성적으로 말씀하셨어. 저런 세부적이고 사소한 얘기는 없었는데 그리스도는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 세부적인 일만 얘기하고 해부하는데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는 관념도 없고, ‘이건 하나님 말씀이니까 이 말씀에서 생명과 구원, 복을 얻어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그리스도가 몇몇 일들에 대해 지닌 견해와 평론, 태도, 그리고 일부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생각이 바로 사람이 가지는 일종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마음에 관념이 생겼을 때 속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관념을 책망해 달라고 기도하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관념으로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하는 말씀을 저울질하며, 순종의 마음은 전혀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 관념이 생기면 그는 속으로 반발하고 서서히 그리스도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대립하는 태도가 생겨날 때, 적그리스도가 순종하려고 하겠느냐?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겠느냐? 그는 속으로 반발할 것이다. ‘흥, 이번에는 나한테 약점을 잡혔군요. 당신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진리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은 그 일도 논리적 추론에 따라 처리하고, 어떤 일을 판단할 때도 눈으로 본 것에 근거하시는군요. 당신이 하시는 일도 하나님 본질에 맞지 않아요!’ 그는 속으로 불복한다. 그가 불복할 때는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맞는 것 같지만, 저는 하나님 말씀을 찾아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봐야겠어요.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지 봐야겠어요. 기다리고 구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저를 인도하고 깨우쳐 주시는지 봐야겠어요. 당신이 하신 말씀은 이미 제 고려 범위를 벗어나서 제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런 건 어떤 태도이냐?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아직도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을 읽는 것이냐? (하나님, 제가 볼 때 그는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만 인정하고, 땅의 그리스도는 한사코 부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일관되게 공허한 글귀와 도리 속에 살면서 높고 위대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숭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일찍이 했던, 활자로 찍힌 말씀은 극도로 숭상하고 추앙하지만, 더없이 평범한 이 사람은 그의 마음에 아무런 지위도 갖지 못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냐? 그리스도에 대해 관념이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봐야겠어요.” 하나님 말씀만 인정하고 그리스도는 인정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크고 깊은 관념을 가졌든, 일단 활자로 인쇄되면 그들은 관념이 사라지고, 일단 문자로 만들어지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경배한다. 이는 바리새인, 종교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런 태도가 생기기 쉽고, 관념이 생기기도 쉽다. 적그리스도는 관념이 생긴 뒤에는 마음속으로 순종할 수 없게 된다. 순종은 없고 오로지 반발만 있을 뿐이다.
일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쉽게 관념이 생기느냐?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 쉽게 관념이 생기느냐?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이들이 관념이 생기기 쉽다. 관념이 생기면 그는 속으로 반발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있었는데, 당시 배경과 환경, 그리고 인류의 필요를 근거로 처음에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얘기했다. 나중에는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좀 달라져서 그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도 달라졌다. 달라진 건 큰 문제가 아닌데도 적그리스도는 트집을 잡고 관념을 가졌다. ‘전에는 그렇게 말씀했잖아. 진리라고 하면서 그렇게 실행하라고 해서 겨우 이해하고 어렵사리 실행하고, 또 지켰어. 복받을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이렇게 하라고 하시네. 대체 무슨 뜻이지? 사람을 괴롭히는 것 아닌가? 우리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거야?’ 일단 방식과 방법, 혹은 말을 바꾸면 일부 사람들이 격노할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낡은 관점, 낡은 이론, 그리고 사람의 도덕 기준과 양심 기준, 심지어 사람의 논리적 사고, 사람의 지식으로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을 저울질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한 말과 서로 어긋나거나 중간에 오류라도 생기면 그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경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은 받아들인 다음 천천히 구하고 이해하겠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반발하고, 그다음에는 마치 진리를 잘 실행하고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기라도 하듯 막연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 기도의 목적은 무엇이냐? 바로 충분한 증거를 찾아 그리스도의 말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비판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관념을 해결한다. 그러면 관념이 해결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해결될 수 없느냐?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관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관념을 내려놓지 못했고, 그 관념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는 영원히 관념을 해결할 수 없고, 영원히 관념을 내려놓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상상과 관념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대하고 이 평범한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관념이 점차 커질 수밖에 없고, 아울러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거리감과 그리스도에 대한 원망도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그가 이런 거리감과 관념을 품은 채 본분을 이행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다 보면 결국에는 무엇을 얻겠느냐? 복을 받으려는 욕망이 날로 커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요구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이다. 사람의 요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사람의 야심, 욕망, 관념, 상상 속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관념이 생기느냐? 사람은 그리스도라면 이런 말을 해야 하고, 저런 말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라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극적이고 연약해지자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또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사람에게 위안을 주셔야 해. 하늘의 하나님은 바라지도 않아. 닿을 수 없으니까. 지금은 하나님이 땅에 오셨으니 사람한테는 편리한 조건이 생긴 거야. 내가 소극적 상태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하소연해야겠다.’ 하소연할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고충과 연약함을 얘기하고, 또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사람이 속으로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위안과 듣기 좋은 말을 바란다. 자신이 더 이상 서글프지 않고, 기뻐서 위안이 되고, 더 이상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 줄 그런 말들을 하나님에게서 바란다. 그렇지 않겠느냐? 특히 이렇게 상상하는 부류도 있다. ‘사람의 연약함과 소극성은 사람 입장에서는 연약함이고 소극성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말씀 한마디로 사람을 활짝 웃게 할 수 있어. 말씀 한마디면 마음에 그 어떤 근심 고민도 사라지고, 소극성과 연약함이 한꺼번에 싹 사라질 거야. 다시 어떤 일이 닥쳐도 굳건할 수 있고, 다시는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고,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어. 그래 좋아,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좀 해 달라고 하자!’ 너희 생각에 이런 일이 닥치면 내가 어떤 말을 하겠느냐? 하나는 이 사람이 왜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고, 또 하나는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어떤 원칙들을 고수해야 하는지 교제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완벽하지 않겠느냐? 우매하고 완고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징계의 의미가 담긴 말로 자극을 좀 주어 격려하도록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부류 사람의 본성 본질을 어느 정도 폭로함으로써 늘 소극적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사람이 늘 소극적이 되는지 알도록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늘 소극적이 된 사람은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늘 소극적이 되는 것이 정상이란다. 사람이 늘 소극적이 되는 건 어린아이의 모습이야. 아이가 어른의 일을 맡아서 부담이 크니까 늘 소극적이 되는 거지. 분량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일에 대한 경험도 별로 없어서 그런 거니까 천천히 배우면 돼. 또한 부모도 책임이 있어. 부모가 잘 가르치지 않은 거니까 네 탓이 아니야.” 상대가 묻는다. “그럼 저는 어떤 패괴 성품이죠?” “그건 무슨 패괴 성품도 아니란다. 단지 나이가 너무 어린 거야. 가정 환경도 좋고 응석받이로 자라서 그래. 몇 년 지나서 성장하게 되면 좋아질 거야.” 이 말을 들으면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 거기다 꼭 안아 주면서 긍정 에너지를 전해 준다면 사람이 속으로 훈훈함을 느끼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만난다면 그렇게 하면서 좀 위로하겠지만 성인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그런 건 바보를 속이는 짓이다. 그는 사실에 입각해서 얘기하고 너에게 길을 제시해 주는 한편, 과연 어떻게 되는 건지 분명히 알려 줌으로써 네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네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네가 가는 길이 정해진다. 그리스도가 한 이 모든 일의 본질을 볼 때, 그는 사람을 속이지 않고 농락하지 않지만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실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이므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여기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갈등이 생기지 않겠느냐? 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한 데다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거리감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 둔다. 본래는 하나님이 정말 자애롭고 어머니나 할머니처럼 부드러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게 아니다. 따뜻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면 나를 이끌어 소극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어.’라는 그의 상상, 이런 요구는 실현될 수 있겠느냐? ‘내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장담하건대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지면서 다시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떤 일을 할 때도 금방 밝아지고, 실행할 길도 금방 생길 거야.’ 이런 상상은 현실적이겠느냐? 이 목적이 달성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일에서 사람이 늘 관념과 상상에만 기댄다면 그것은 통하지 않으며, 반드시 진리를 구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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