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3) 제 4 부

바리새인의 사악함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일단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성육신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하면 너희가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관해 말하자면 먼저 2천 년 전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어떤 가정과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주 예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그의 가족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인 요셉은 목수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평신도였다. 부모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는 주 예수가 태어난 가정의 배경을 상징하므로 주 예수는 평민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평민이란 무엇이냐? 평범한 백성으로, 보통의 일반적인 하층민이다. 명문 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지위와도 거리가 멀었으며 귀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대단한 사회적 지위나 가정의 배경도 없었으니 주 예수가 태어난 배경과 가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에는 주 예수가 받은 교육에 특별할 게 있었겠느냐? 신학원의 교육을 받았겠느냐? 대제사장의 훈련을 받았겠느냐? 바울처럼 많은 책을 읽었겠느냐? 유명 인사나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친분이나 교류가 있었겠느냐? 없었다. 주 예수가 태어난 가정의 사회적 지위만 봐도 주 예수가 유대교 상류층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접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유대인들 속에서 생활했고 가끔 교회에 가도 평민을 만나는 게 전부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주 예수의 성장 과정에서 그가 정식으로 사역을 담당하기 전까지 그의 성장 배경은 늘 한결같았다는 말이다. 열두 살 이후에 집안이 흥해서 부유해지지도 않았고 사회 상류층이나 종교계의 상류층을 접할 기회는 더더욱 없었으며 자라면서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 사람에게 어떤 정보를 주느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에게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고 그럴 여건도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회 환경,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고, 특별한 면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가 한 설교나 일에 관해 듣고 나서 감히 일어나 대놓고 판단하고 모독하며 정죄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정죄한 근거가 무엇이냐? 의심의 여지 없이 구약 성경의 율법과 규례들이다. 먼저 주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계속 사역했다. 또 그는 율법이나 규례를 지키지 않고 성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 사람에게도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주 예수가 한 다방면의 일들은 바리새인의 종교 관념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 예수를 증오했고 주 예수가 율법을 어겼다며 꼬투리를 잡고는 사력을 다해 주 예수를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만약 주 예수가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고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가깝게 왕래했다면 그 당시 주 예수의 처지는 아마도 달랐을 것이니 나중에 그런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평범했고 정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출신 배경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정죄당했다. 그들이 주 예수를 정죄한 근거가 무엇이더냐? 그들이 알고 있고 만고불변하다고 생각하는 규례와 율례들이다. 바리새인은 그들이 알고 있는 신학적 이론을 하나의 지식이자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았고, 심지어 그것을 예수께도 사용하고 예수를 정죄했다. 그들은 한 사람을 평가하거나 대할 때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전하는 도가 진리인지의 여부에도 근거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한 말의 근원에는 더더욱 근거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규례나 글귀, 도리로만 판단하고 정죄했다. 그들이 속으로는 주 예수가 말씀하고 행한 것이 죄가 아니고 율법을 어기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정죄하려 했던 것은 주 예수가 선포한 진리와 행한 이적과 기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주를 따르고 찬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그를 점점 더 증오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를 제거하기까지 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를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주 예수의 말씀에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주 예수의 행사가 진리에 부합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 예수가 참람한 말을 하고,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주 예수에게 이런 죄명을 씌운 것은 주 예수를 속으로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그들이 주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자,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라는 것을 사력을 다해 부인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행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실 거였으면 대단한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어야죠.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에게 훈련받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성경 지식을 알아서 성경의 모든 지식을 갖춰야 ‘성육신’이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주 예수는 이런 지식을 갖추지 않았으니 그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정죄했던 것이다. “첫째, 당신은 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하나님이 아닙니다. 둘째, 당신이 이런 성경 지식을 쌓지 못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을 테니 당신은 더더욱 하나님일 리 없습니다. 셋째, 사역할 때 성전을 나가서는 안 되는데 당신은 지금 성전 안에서 사역하지 않고 항상 죄인의 무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역은 성경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당신은 더더욱 하나님일 리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정죄하는 근거는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람의 머리와 사람이 받은 신학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이런 지식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며 근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하나님도 이를 어기며 사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리를 구하느냐?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을 구하느냐? 초자연적인 하나님, 영체의 현현을 구한다. 그러니 그들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규정하고 부인하며,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결과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는 것도 모자라 성육신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관념과 상상,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결과이자 그들의 사악한 점이다.

바리새인이 지식과 학문을 숭상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바리새인의 사악한 점은 무엇이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본성을 어떻게 파헤치고 해부하느냐? 이것은 다들 알 테니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표출하는 사악한 본성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본성을 어떻게 해부하고 간파할 수 있겠느냐? 누가 말해 보아라. (그들은 이론과 지식으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항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악한 모습 중 하나입니다.) 대항이란 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대항하겠느냐? 이 대항에는 흉악한 성품이 좀 들어 있긴 하지만 아직 사악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가 왜 대항하겠느냐? 여기에 그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이 있느냐? 그는 이런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야 해. 그것도 셋째 하늘에 말야.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고 이르지 못하며 짐작할 수도 없는 분,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 심지어 우주의 모든 생물이 우러러보는 분이어야 하나님이지! 이제 하나님이 오셨는데 목수의 집에 태어나 보통 사람을 부모로 두었어. 더구나 말구유에서 태어나서 출생 배경이 평범한 것도 모자라, 보통이나 일반적인 수준보다도 못하니 어떻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어? 정말 하나님께서 오셨다면 이렇게 오실 리가 없잖아!’ 사람이 이렇게 규정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모두 이렇게 규정한다. 사실 그들도 속으로는 주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주 예수가 하는 말이 모두 옳고, 사람이 예수를 판단했던 그 몇 가지 죄는 모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주 예수는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는데, 그가 한 설교와 말씀에 흠이 없고 꼬투리를 잡을 게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했다. ‘설마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위대하시니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시면 더 위대해야 하고 만인이 경모해야 마땅해. 명문가를 드나들며 말도 청산유수로 하고 인성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조금도 표출하지 말아야지. 또 그는 먼저 그의 지식과 학문, 그의 재능으로 성전의 성직자들을 납득시켜서 그들부터 얻어야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야.’ 그들은 주 예수의 행사를 용납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으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라면 성직자인 그들 모두도 하나님이 될 수 있고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다울 수 있으며 주 예수보다 더 그리스도에 걸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면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를 정죄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하여 선택한, 육신과 관련된 배경의 모든 면에 반항하고 경멸하고 있었다. 아직 바리새인의 사악한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이어서 교제해 보자.

하나님은 육신을 입어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만유보다 높고 큰 형상이나 신분과 지위에서 자신을 낮춰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될 때 부유한 가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 배경은 평범하다 못해 아주 가난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양심과 이성, 인성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일을 본다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사람이 경모하고 사랑할 만한 것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경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고 큰 신분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된 사실에 대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찬미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는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 마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이 긍정적인 것, 이 현상, 이 사실은 정확히 무엇을 말해 주느냐? 하나님의 낮춤과 감춤,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말해 준다. 또 하나의 사실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되지 않고 진실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허한 말이나 구호가 아니고 허상도 아니며 오히려 실제적이고 사실이다. 하나님은 친히 육신을 입어 인류의 오해와 조롱, 비방, 모독을 견뎌 냈다. 자신을 낮추어 평범한 사람이 된 그는 겉으로는 높거나 크지 않았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수준 높은 지식이나 학문은 더더욱 없었다.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바로 이런 신분,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성의 겉모습을 통해 그가 선택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모든 것은 그가 치른 대가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가를 사람이 치를 수 있겠느냐? 아무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꾸미기를 좋아해서 항상 화장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녀는 화장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맨얼굴로 외출하거나 무대에 서라고 하면 그녀가 그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창피를 주지 않는데도 맨얼굴로 외출하지 못한다. 고작 그 정도의 체면과 육적인 이익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어 사회 하층민에게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버렸느냐? 그의 존엄을 버렸다. 그렇다면 이 존엄을 하나님은 어떻게 버릴 수 있었느냐?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이 표출된다. 그렇다면 존엄을 잃어버린 것과 어떻게 관련되느냐?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무슨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육신을 입어도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분이 아닌가요? 여전히 당신을 따르고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잖아요? 사역도 하나님 당신의 사역을 하고 계시면서 무슨 존엄을 잃어버렸다고 그러세요?” 여기서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것에는 몇 가지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의 취지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를 따르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몰이해에는 무엇이 있느냐? 오해와 곡해 그리고 사람들의 경멸의 눈빛과 이상한 눈빛이 있다. 하나님은 영계에 있고, 만물 가운데 있으며, 모든 인류는 그의 발밑에 있다. 지금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같은 환경 속에서 사람과 동등하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는 인류의 조롱과 비방, 오해와 비아냥, 그리고 관념과 적대, 판단에 직면해야 한다. 그는 이런 것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과 직면하는데도 너희는 하나님에게 여전히 존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신분대로라면 이런 것을 겪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해선 안 되고,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감내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면 반드시 감내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감내해야 할 것들로, 하나도 빠뜨려선 안 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하늘의 하나님에겐 온갖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성육신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 이렇게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별 능력도 없는데? 보아하니 나 하나도 어쩌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에겐 입에 담지 못할 말이 없다! 그의 이익과 관련되거나 그의 체면에 관계되면 그 어떤 판단이나 정죄의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육신하면 비록 사람과 함께 지내고, 패괴된 인류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지위와 신분을 갖지만 사실상 그는 이와 동시에 그의 신분으로 인한 숱한 굴욕을 감내해야 하기도 한다. 존엄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감내해야 할 것이다. 즉, 그에 대한 패괴된 인류의 모든 몰이해, 오해, 의심, 시험, 거역, 판단, 기만 등에 직면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전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잃어버린 존엄이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성육신과 영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이냐? (옳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육신은 영원히 영을 대신할 수 없는 한 가지 측면이 있다. 즉, 육신은 수많은 기능상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은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이나 기후, 여러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소부재하지만 육신은 이런 것들의 제약을 받는다. 그럼 하나님의 존엄은 어떻게 훼손되었느냐? 이 일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나님에게는 원래 이런 능력이 있지만 육신의 제약으로 인해 사역하는 기간에는 사역이 끝날 때까지 성실하고 조용히 그리고 고분고분 이 육신의 사역을 지켜야 한다. 육신이 사역하는 동안 사람이 볼 수 있고, 사람의 관념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은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육신이다. 그럼 사람의 상상과 관념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지혜, 나아가 하나님의 권병이 어느 정도 제약을 받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런 제약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성육신하셔서 생깁니다.) 성육신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곤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그다지 합당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 곤란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사람이 하나님과 진실하게 지내고 왕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에 이르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나님의 육신을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육신과 왕래해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육신이 하는 말씀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들 평생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본질이나 성품은 영원히 그 육신에게서 인식하고, 보고, 인지한 것에 머물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불공평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불공평한데도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겠느냐? 오직 성육신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가장 좋은 성과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길을 택한 것이다. 성육신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과 대면하며 생활하면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여 주며 그의 성품은 물론 그의 성격과 희로애락까지 보여 준다. 사람이 이런 성품, 이런 희로애락을 보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의 본질을 인식하는 데 지장을 주며, 사람의 인식에 제약이 생기게 될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오해받을지언정 사람을 구원하는 최고의 성과에 도달하는 이런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참모습, 하나님의 진실한 신분, 지위, 본질을 인식하는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그의 존엄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이런 관점에서 본 것이다. 너희가 자세히 묵상해 보아라. 하나님이 희생하고 행한 여러 측면을 통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 중에,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가 말한 이론이나 구호와 대등한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 “하나님은 존귀하시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존귀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는 하나님의 존귀가 어떻게 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위대하고 고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존귀하시다. 이렇게나 존귀하시다.” 이것이 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면 지위가 대단해야 하고, 지식과 재능, 능력도 뛰어나야 하며, 언변이나 외모도 최고로 출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그런 존귀가 무엇이냐?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귀는 사탄이 만든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선민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살펴본 다음, 사탄의 세상에서 날고 기는 엘리트들이 모두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아라. 이렇게 대조해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몹시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은사와 재능이 있는 사람에겐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무엇보다 어렵다. 그들은 무척 지적으로 말하고 언변도 뛰어나 사람들에게 숭배받고 추앙받지만 그들의 치명적인 점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 다시 하나님 선민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특별한 은사나 재능은 없지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명예와 이익, 지위를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이다. 이방인은 어떤 사람을 숭배하느냐? 다들 높은 수준의 지식인을 숭배하고, 지체가 높은 가문의 사람을 숭배한다. 은사나 특기, 가족의 지위로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똑같다. 너희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저 그렇게 단순한 것이냐? 하나님이 왜 이렇게 안배하지 않겠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에겐 사람이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지식을 배울지 안배하는 모든 것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할 수 있으십니다.) 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유하고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안배하지 않았겠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이자 하나님의 본질이 표출된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일을 간파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고 나서 사람의 관념이 얼마나 크든,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큰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든, 얼마나 큰 조롱과 비방을 받든, 또 그가 성육신한 후 그의 존엄을 얼마나 잃어버리든 신경 쓰겠느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신경 쓰겠느냐? 너희가 만약 이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신경 쓰겠느냐? 하나님이 이토록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른 그 고심은 무엇이겠느냐?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들이 하나님을 더 잘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과 더 잘 접촉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인식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유익이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이토록 많은 대가를 치른 것이 이런 목표를 위해서냐? 그런 것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고생스럽게 6천 년 사역을 한 것이겠느냐?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나서 인류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을 따라 산 마귀처럼 살고 있는데, 가장 기뻐할 자가 누구겠느냐? (사탄입니다.) 피해자는 누구겠느냐? (사람입니다.) 그럼 누가 가장 괴롭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가장 괴롭느냐?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해서 자기도 모른다. 생긴 대로 논다고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해도 그것이 좋은 줄 모르고 한결같이 관념과 상상만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계속 거역하니 가장 괴롭고 가슴 아픈 건 사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는데 인류가 지금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잘 살고는 있는지 하나님이 관심 갖지 않겠느냐? (관심을 가지십니다.) 누구보다 관심을 갖는 건 하나님인데,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고, 사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대로 번성하며 대대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세상만사가 돌고 도는 것이다. 대대로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단지 사회 구조와 제도가 조금씩 변할 뿐이다. 그러다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는데 사람이 지각하느냐? 지각하지 못한다. 그럼 누가 가장 잘 지각하겠느냐? (하나님입니다.) 이 일에 가장 마음을 쓰는 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나 깨나 자기가 만든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재의 삶이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 무엇을 먹고 입는지, 앞날은 어떨지, 사람이 매일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사람이 만약 매일 악한 생각만 하고 온통 자연의 법칙을 어떻게 바꾸고 어길까, 어떻게 하늘과 싸울까, 어떻게 세상의 사악한 조류를 따를까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것을 보고 마음이 편하겠느냐? (편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것으로 끝나겠느냐? 그는 일을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방법을 생각하여 사람이 제대로 살게 하고, 사람됨의 도리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모든 자연법칙,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함을 알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은 사람답게 살게 될 것이니 하나님이 안심할 것이다. 하나님이 설사 이들을 떠나더라도 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사탄의 괴롭힘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보면 철저히 수치를 느끼며 실패하게 된다. 이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그럼 사탄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않는 자, 본분 이행에 전념하지 않는 자, 늘 배우자를 찾아 자립할 생각만 하는 자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에게 도태될 때까지 이들을 꾀어내고 미혹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수록,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할수록,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반할수록 그것은 더욱 기뻐한다. 이것이 사탄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렇지 않겠느냐? 사탄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모두 이런 마음이다. 그들은 누군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것을 보면, 지식을 중시하고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는 것을 보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꾀어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런 사람을 보면 공통 언어가 생기고, 함께 있으면 할 얘기가 많아 하고 싶은 얘기를 거침없이 한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을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애가 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모든 대가를 치른 원인은 무엇이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 보살핌, 염려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사람을 걱정하고 보살피며 염려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한 단계씩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추든,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게 사람을 사랑하든, 혹은 하나님이 신실하든, 위대하든,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의 대가가 가치 있고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상은 무엇을 말하겠느냐? 그가 속으로 염려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그가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의 뜻에 따라, 그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과 방향대로 살아가게 되어 더 이상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고통 속에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염려가 사라져 하나님이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계획이 크든 작든, 하나님의 이 모든 행사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 사람이 보기에 볼품이 있든 없든, 거론할 가치가 있든 없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사역 방식을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치른 그 모든 대가를 보면 하나님은 칭송할 만한 분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위대하냐, 아니면 미약하냐? (위대하십니다.) 너무나도 위대하다! 인류 중에 이렇게까지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류 중에는 모성애가 가장 위대합니다.” 모성애가 이것만큼 위대하냐? 일반적으로 자녀가 독립하여 자기 삶을 잘 이어 나가면 간섭하지 않는다. 사실 간섭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인류를 대하는 것은 어떠냐? 몇천 년을 참았느냐? 하나님은 6천 년을 참았다.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염려와 걱정 때문에 하나님은 이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토록 큰 대가가 바리새인이나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느냐? 그들에게 정죄되고 판단되며 심지어 모독당하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칭송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행사, 사람에게 찬미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그들은 찬미하기는커녕 온갖 핑계와 이론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니 이들이 가증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사악하지 않으냐? 그들의 이런 사악한 모습을 통해 그들이 지식과 학문을 숭배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으냐? 권세와 지위를 숭배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일일수록, 사람이 칭송하고 기념하며 전파할 만한 일일수록 적그리스도는 정죄하니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표출하는 사악한 본성의 일면이다. 이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의 정도가 일반적으로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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