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22) 제 2 부

3. 교회의 정의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교제를 마쳤으니, 이제 너희도 교회의 형성과 교회가 하는 사역, 교회가 이루는 성과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교회의 존재 가치와 의미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선, 교회는 사람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곳도, 사람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는 사람의 육적인 권익을 보장하거나 생활상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곳도 아니고, 사람에게 마음의 공허함을 해소해 주어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 주는 곳도 아니다. 교회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의 이런 장소가 아니라면 교회의 구체적인 정의는 대체 무엇일까? 대체 교회란 무엇일까? 성경에는 교회라는 호칭에 대해 예수가 했던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 나온다. 원문이 무엇이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입니다.) 그 말의 뜻인즉슨 몇 명이 예배하든 성령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곳은 틀림없이 교회라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이 나타나 사역을 하고 진리를 선포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면 하나님이 함께하고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 모임을 교회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만약 예배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고 공허하게 영적 도리만 이야기하며 성령 역사를 느낄 수 없다면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모임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받는다. 이렇게 함께 모여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제하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요구나 하나님의 인도와 관련 있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에게 축복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도하고, 이끌고, 함께하는 모임이라면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교회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정의이자 은혜시대에 교회에 대해 내린 정의이다. 가장 기본적인 이 정의는 당시 하나님이 사역하던 배경에서 생겨 난 것이다. 따라서 이 정의는 성립되며 정확하다. 말세의 현 단계 심판 사역에서는 하나님이 더 많은 말씀을 하고 더 큰 사역을 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정의도 당연히 은혜시대의 기본적인 정의보다 더욱 심도 있어야 적합하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 발전함에 따라 교회는 더 이상 단순히 성령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역하고, 직접 인도하고 목양하며,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이 현재 하는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거할 수 있다. 그러니 말세 교회의 정의는 은혜시대 교회의 정의보다 한 단계 더 높아졌다. 이전의 그 정의를 토대로 더욱 심화되고, 정확해졌으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게 됐다. 물론 그런 내용들은 진리를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적절하겠느냐? 우선, 기본적인 정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으며,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를 교회라고 부른다. 이 정의의 핵심은 바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교회는 하나의 장소나 집단, 단체가 아니고, 단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은 더더욱 아니다.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10여 명일 수도 있고 30, 50명일 수도 있으며, 당연히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예배할 수도 있고 그룹으로 나뉘어 예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유연하고 다양하다. 어쨌든 하나님을 따르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몇 명이 모이든 모두 교회이다. 예를 들어, 50명이 모이면 작은 교회이고 100명이 모이면 큰 교회이다. 사람 수의 많고 적음으로 교회의 규모를 구분하면 대형 교회도 있고 중형 교회도 있고 소형 교회도 있다. 사람 수가 몇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제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교회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으며,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어째서 이렇게 정의하겠느냐? 하나님이 교회에서 사역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사람들의 모임만이 교회라고 불릴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야 정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실행할 수 있고, 진실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고 하나님 말씀이 인도하기에 이 한 무리 사람들에게서 교회의 정의가 생겨난 것이다. 종교인들은 진리와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 단체에 해당한다. 이는 교회와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이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고, 오직 그리스도가 친히 목양하는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다.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여기에서 성령 역사와 성령의 인도,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다고 언급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 것이 실제적이냐, 아니면 성령 역사가 있는 것이 실제적이냐?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 것이 실제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성령 역사는 단지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어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실행 원칙을 찾도록 사람을 인도할 뿐이다. 이로써 이루는 성과가 바로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원칙을 파악한다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많은 말씀을 했으니 사람이 늘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설사 성령이 역사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설사 조금 깨닫는다 하더라도 실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말세에 직접 진리를 선포하여 친히 사람들을 인도하고 목양하며, 성령 역사는 그저 보조적인 사역일 뿐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갓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는 어른이 가끔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지만 아이가 안정적으로 걷고 뛸 수 있게 되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성령 역사는 절대적이거나 핵심적이지 않다.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원칙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런 원칙 기준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이 사람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서 이미 충분히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성령 역사를 언급하지 않겠다. 말세에 하나님이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에게 모든 진리를 하나하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기 때문에 성령 역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이다. 성령 역사는 단지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말씀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세밀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았을 때 보조적이고 유도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간단한 빛 비춤을 주거나 촉구하는 역할을 하여 사람이 생활 속에서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울 뿐이다. 지금은 하나님 말씀의 시대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인류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주도하며, 성령 역사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 사람들이 모두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줄 알며, 하나님 말씀에 기대 살아갈 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은 마음이 흡족할 것이다.

교회의 기본적인 정의에서 첫 번째 구절을 살펴보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른다’에서 이 ‘진심’은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되는대로 사는 사람도, 머릿수만 채우고 이름만 걸어 놓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떡으로 배만 불리는 사람도, 은혜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도 아니며, 어떤 속셈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심이란 무엇이냐?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설명은 바로 하나님, 진리, 창조주라는 말만 들으면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기꺼이 내려놓고, 기꺼이 봉헌하고, 기꺼이 고생을 견디려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믿음이 충만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죠?” 사람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믿은 지 10여 년 된 사람도 있고 20, 30년 된 사람도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그런 진심만 있으면 충분하다. 믿음이 충만하다고 정의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정의하면 되는 것이고, 문구에 얽매이거나 정의와 기준을 그렇게 높게 정할 필요는 없다. 그건 실제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한다. “‘진심’과 ‘믿음이 충만하다’고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한 무리 의인들의 모임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요!” 기준을 그렇게 높게 정하면 뒷부분의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다’라는 구절은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핵심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전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사탄의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 가득하다. 더욱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패역으로 가득하고 순종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이게 가장 실제적인 상황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기에 교회의 구성원인 이들 무리는 바로 이러한 실제적인 상황이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기본적인 조건은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진실로 헌신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진심이라면 어떻게 사치스러운 욕망이 있을 수 있죠? 진심이라면 어떻게 복받으려고 할 수 있죠?” 그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점차 변화한다. 지금은 교회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의하려는 것이다. 그 기본적인 개념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최소한의 요구와 기준이다. 이 몇 가지 기준은 조금도 공허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너희의 현실적인 상황에 특히나 부합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거나 너희 중 누구라도 구원하기로 뜻했을 때는 바로 이 몇 가지를 살핀다. 네가 이 몇 가지 요구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으로 데려와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 것이다. 실제적인 상황은 이렇다. 따라서 교회의 정의 첫 번째 구절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른다’라는 것이고 이것이 비교적 정확하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고 할 수 없고,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세상과 큰 붉은 용을 철저히 등진다고 할 수도 없다.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뒷부분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도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된다. 최종적으로 이 무리는 구원에 이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눈에 비친 교회 구성원의 실제적인 상황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결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교회의 정의에는 그런 내용이 없는데요.”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구절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패괴 성품이 점차 해결되지 않겠느냐?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성품 변화에 이르는 동안 너는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게 된다. 패괴 성품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그만큼 커지지 않겠느냐? 이는 서로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요소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요소도 많아진다.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요소가 많아질수록 구원받는 것에 가까워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들 무리는 어떤 사람들이냐? 구원에 이를 수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이게 바로 교회 구성원의 실제적인 상황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정의에서는 교회가 하는 사역을 언급하지 않았는데요.” 교회의 정의에 교회가 하는 본질적인 사역에 관한 구절이 있지 않으냐? (구원받기를 추구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교회가 하는 사역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자신을 인식하고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도록 인도하는 것이든 그 최종적인 목적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너희는 교회라는 이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정의는 과장되지도 않고 공허하지도 않으며, 고급스러운 단어나 표현도 없지만 교회가 형성되거나 교회를 정의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내가 교회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의 유래를 설명하고 나니 이제 이해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너희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과 교회의 정의가 아주 심오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교회의 정의를 이해하고 나면 자신이 교회를 아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느낄 것이다. 이제 교회의 정의를 명확히 설명했는데, 교회의 정의는 이토록 실제적이다. 사람은 흔히 실제적인 것일수록 피상적으로 느끼지만, 사실 모든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있고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조금도 피상적이지 않다. 교회의 정의에서 첫 번째 구절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른다’이다. 여기에서 ‘진심’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데, 진심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사람이 이 정도 진심을 갖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 경지에는 이르렀느냐? 너는 이 말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무척 이르기 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 본분을 이행하러 가자.”라고 말하고 사람이 그 말을 따른다면 그게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은 것이냐? 그것은 그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는 것일 뿐이지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은 것이 아니다.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으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이 요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각종 사람, 일, 사물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실행으로 옮겨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쉽지 않다. 오랜 시간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과 성품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점차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다는 뜻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다’라는 말은 겉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고, 마치 대다수 사람이 다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는 경지에 이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실제적인 상황을 보면 이 말은 단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일 뿐 사람은 결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다음 구절인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너는 아직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단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훈련할 뿐이다. 어떻게 노력해야 하겠느냐?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 순종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힘들다고 느껴지거나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늘 혈기를 터뜨리고 싶다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해야지 혈기를 드러내거나 제멋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인식해야 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로 변화하겠느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약 네가 리더 일꾼으로 뽑힌다면 제멋대로 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줄 알며 일정 기간 체험해야만 가능하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단지 말로만 원한다고 할 뿐 마음속에는 그럴 동력이 없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속으로 기꺼이 원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을 때 비로소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속으로 달갑지 않을 때는 네가 아무리 맹세하고 남이 붙들어 준들 소용없다.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즉, 강렬하게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방면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모두 찾아 내어 모은 다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인식해야 하며, 공책에 적거나 자신이 보기 편한 곳에 붙여 놓고 사역하다 틈이 날 때마다 보기도 하고 읽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마음속에 새기게 된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묵상하고, 자신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인지를 묵상해야 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한순간의 열정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피로 맹세하겠어요.” 그래도 소용없다. 네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금식 기도를 할게요.”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밤을 새며 고생을 견딜게요.”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있어야 하며, 그 길과 방식이 옳아야 한다. 어떤 길, 어떤 방식이든 모두 하나님 말씀을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에 공들여야 하고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비추어 봐야 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예를 들어, 사람과 왕래하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살펴보고 그것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찾아 내고, 조화롭게 협력하는 측면에서도 그 측면의 하나님 말씀을 찾아 내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측면에서는 합격된 본분 이행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찾아 내고 대표적인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또한 거짓 리더가 무엇인지, 거짓 리더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는지, 하나님이 거짓 리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관한 그런 핵심적인 말씀을 찾아 내어 공책에 쓰고 자신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두어 시간 날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자신의 생명 진입이나 성품 변화와 관련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이런 식으로 실행하고 그것에 공들이는 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이 정도로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 추구가 아니라 형식만 차리고 표면적으로 이해하며 되는대로 사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말에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존중하고, 솔직하게 대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 것,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과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이성적으로 대하는 것,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하는 것 등의 모습도 다 경배라고 한다. 하나님이 네 면전에서 한 말씀이든, 예전에 선포했던 모든 말씀이든 네가 알고 기억한 것, 네가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확신한 것 등 그런 것을 다 자신의 처신, 생활 등 모든 것의 준칙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다. 일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입맛, 의사, 관념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걸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걸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행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나의 어떤 부분을 연단하고 어떤 부분을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걸까?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 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다. 설사 네가 많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하나님에게 이런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 하나님 말씀과 관련된 일, 하나님이 네게 한 부탁, 네 본분과 책임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해야지 소홀히 하거나 건성건성 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기가 쉽겠느냐? 이 역시 쉽지 않다. 진실로 체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배한다’라는 한마디 말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실행하는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교회의 정의에서 마지막 구절은 ‘구원에 이른다’이다. 이 말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느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아주 멀고, 구원받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더욱 많다. 우선 네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이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 속의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도록 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근거로 행동할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순종하며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점차 하나님을 경배하는 단계로 넘어간다면, 너는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옳은 사람이어야 한다. 옳은 사람에게는 어떤 이점이 있느냐? 구원에 이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희망이 있다. 교회의 정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4. 교회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견해

방금 교회란 무엇인지, 교회가 하는 본질적인 사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사람의 관념 속에 자리한 교회에 대한 상상과 요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 교제했고, 마지막에는 교회의 개념을 정의했다. 정의를 마쳤으니 이제 교회라는 호칭을 정확히 인식했을 것이고,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 사람이 진리를 얻고 구원에 이르는 일에서 교회가 하는 역할,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교회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교회의 존재 가치와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에 대해서도 대표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분석하고 폭로해 보았다.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인식과 견해 중에 너희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느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사회에서 특정한 사역에 종사하거나 특정한 역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의를 실현하는 일 말이다. 사람이 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교회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왜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냐?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 실현이 교회 사역이나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인류가 말하는 정의 실현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느냐? (인류가 말하는 정의 실현은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그저 사람의 육적인 이익을 지키는 것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 정의가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말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일부 악한 세력을 처리하거나 억울한 사건과 수모를 당한 일을 바로잡는 것, 혹은 악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받는 것, 그리고 약자의 이익이 회복되고 보장되는 것 등이 바로 인류가 말하는 정의 실현이다. 그럼 이런 정의 실현은 주로 무엇을 위한 것이냐? 사람의 진리 추구와 관련이 있느냐?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는 그저 사람의 도의와 윤리를 토대로 생겨난 말로, 진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진리의 차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 차원에 미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둘은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일이다. 인류가 실현하는 정의는 어떤 것이냐? 사회적 지위가 다소 낮은 평민이 악인에게 억압당하거나 어떤 권익을 박탈당한 뒤에 악인이 응당한 징벌을 받아 평민이나 서민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적인 이익이 회복되고 보장되며 사람들 간에 상대적인 평등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없으며, 악인이 뜻대로 악을 행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당한 사람의 원통함이 해소되는 것이다. 이게 인류가 말하는 정의 실현으로, 진리와는 결코 아무 관련도 없다. 너희는 어떻게 그것이 진리의 차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 그것이 진리와 관련 있느냐? 관련 없다. 너희가 보기에 억울함을 당한 서민이나 평민이라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이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 분명히 별개의 일인데 어떻게 같은 선상에서 말할 수 있느냐? 여기에서는 진리의 차원에 미친다고 말할 수 없다. 결코 같은 일이 아니다. 만약 너희가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논쟁을 벌인다면, 대다수 사람은 이 정의 실현을 여전히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게 왜 잘못됐지? 어떻게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이 아닐 수 있지?’ 사실 이는 교회가 하는 사역과 아무 관련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고, 그런 역할을 하여 악행이나 사악한 흑암 세력은 처벌하고, 선하고 좋은 일은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겠느냐? 권선징악이 진리의 차원에 이를 수 있겠느냐? 사람은 선과 악에 관한 것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인류가 말하는 권선징악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는 상선벌악이나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관련이 없다. 사람이 선과 악을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선악에 대한 중국인의 정의대로라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이냐? 선과 악을 정의하는 토대는 무엇이냐? 불교 문화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구제하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등이 바로 선이고, 닭과 생선, 소고기와 양고기를 먹는 것은 모두 악이며 마땅히 징벌받아야 할 대상이다. 어떤 고기도 먹어서는 안 되고 어떤 생물도 죽여서는 안 되며, 죽인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기 때문에 부처 앞에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불교는 악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악과 같으냐? (같지 않습니다.)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와는 결코 관련이 없고, 진리의 차원에 미칠 수 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더욱 비상식적이고 피상적이고 가식적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물을 죽이지 않고 방생하는 것이 선이고, 악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큰 죄를 범하든, 칼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성불한다면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면서 조건도, 원칙도 없이 되는대로 사람을 구한다. 마귀도 구하고 악인이나 불량배도 구하고, 아무나 구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선이냐? 이런 사람은 바보이고 아무런 분별력도 없으며 입장이나 원칙도 없다. 아무나 구하고 아무나 용서한다면 그 선이 성립하느냐? 선이라는 단어에 걸맞지 않다. 그건 사탄 마귀가 꾸며 낸 것이다. 그들은 동물을 죽이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영혼을 집어 삼키는지 모른다. 이게 바로 그들이 말하는 선으로, 사실은 꾸며 낸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관념 속에서 권선징악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 (타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종의 문화적 배경이든, 어떤 종교의 문화적 배경이든 권선징악은 교회 사역이나 교회가 하는 증거와 관련이 없다. 너희는 이 단어가 꽤나 정의롭고 긍정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교회 사역과 관련 있고 사회에서 해야 하는 교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정의 실현’, ‘권선징악’이라는 두 단어 이외에도 ‘권익을 챙긴다’, ‘근심을 덜어 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와 같이 사람이 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이런 좋은 말 역시 교회 사역이나 교회가 하는 증거와는 관련이 없다. 이제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교회의 정의와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 그리고 교회의 존재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교제했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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