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4)
그동안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말에 관한 문제를 교제하고 해부했는데, 진실로 느끼는 바가 좀 있느냐? (전에는 이런 덕행 측면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 인식했을 뿐, 그것이 사람을 이렇게 깊이 패괴시킨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교제와 해부를 통해 비로소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각종 덕행에 관한 말이 언뜻 옳고 좋은 것처럼 보여도 사람의 사상을 패괴시키고 마비시키고 옭아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고 점점 더 멀리하게 한다는 것을, 인류가 그렇게 사탄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날까지 패괴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이렇게 자세히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이 덕행에 관한 말의 본질을 해부할 수 있겠느냐? (해부하지 못하고, 그 덕행에 관한 말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체험해도 꿰뚫어 보지 못하겠느냐? (덕행 측면의 말에 관한 문제를 좀 의식할 수는 있지만, 그런 말의 본질을 분명히 해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늘 전통문화의 명언을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고 한데 섞기를 좋아한다. 특히, 모든 사람이 표면적으로 진리처럼 보이는 것들, 인성 도덕, 양심 기준, 인성 감정에 부합하는 것들은 올바른 것, 진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긴다. 누구도 그것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부정적인 것임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에 긍정적인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전부 부정적인 것, 사탄의 독소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 너희는 이 부정적인 것들과 사탄의 독소를 인식하고 캐냈느냐? 너희의 사상 속에 아직도 이 전통문화와 비슷한 것들, 너희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느냐? 만약 정말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화근이고 악성 종양이다! 이제 너희는 많이 묵상하는 한편, 일상생활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기가 듣는 말, 그리고 자기 사상 속에서 인상과 기억에 남는 것,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귀하게 여기는 것 중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말과 비슷한 것들이 없는지 보아야 한다. 만약 있다면 더욱 분별하고 해부한 뒤 철저히 버려야 한다. 이는 너희의 진리 추구에 도움이 된다.
체험 간증 글을 쓸 때,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을 언급한 사람이 있는데, 너희는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갖춰야 할 원칙과 관계가 있는지 분별해 보아라.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성립하느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제정한 법칙과 규율에서 나온 현상이냐?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과 관계가 있느냐? 이 말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말해 보아라. (저도 예전에 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 사역을 안배할 때, 인원 배치가 적절하지 않고 원칙에 맞지 않으면 가끔 사역을 망치곤 했습니다. 반면, 원칙에 맞게 인원을 배치하면 사역을 잘 해낼 수 있었고요. 그때, 사람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고 핵심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을 인용했지요. 이제는 제가 하나님의 주재와 전능을 인식하지 못하고 늘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증거하는 말입니다. 마치 무슨 일이든 사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주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사탄을 증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이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 채 시간이 흐르면, 일이 닥쳤을 때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몹시 치우친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너희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다 그 말이 옳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며, 진리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사용하느냐? 너희가 그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의미하느냐? (그 말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분별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으로 그 말에 옳은 면, 성립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 말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왜 그 말이 긍정적인 사물도, 옳은 것도 아니라고 하겠느냐? 먼저 그 말이 사물의 객관적인 법칙에 부합하는지를 보자. 표면적으로 보면 어떤 일이든 다 사람이 하는 것 같다. 사역을 안배하는 것도 사람이고, 사역을 하는 것도 사람이며, 사역을 체크하는 것도 사람이고, 각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그 사역이 어떤 성과를 낼지, 혹은 어떤 단계까지 도달할지 또한 사람이 결정하니 말이다. 겉으로 보면 이 모든 원인과 발전 과정, 그리고 결과는 다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을 누가 주재하고 지배하고 안배하느냐? 그것이 사람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은 운명의 배치와 주재자의 지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자기가 주동적으로 모든 일을 통제하겠느냐?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안배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사람의 역할은 무엇이냐? 하나님 손안의 인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끈에 매달린 나무 인형처럼 끈이 이끄는 대로 어떤 동작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다. 사람이 매일 어디를 갈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일을 할지 등은 전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은 무척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인다. 전 과정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사람을 드러낼지, 어떤 일이 어떤 시기에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진전되며 마지막에 어떤 성과를 내게 할지, 누구를 드러내고 누구를 도태시킬지, 이 일을 통해 사람이 어떤 공과를 배우게 할지, 그 가운데서 어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식을 얻게 할지, 어떤 관점을 바로잡고 어떤 관념을 내려놓게 할지 등 하나님의 이 모든 행사를 사람이 행할 수 있겠느냐? 해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행할 수도, 해낼 수도 없다. 사람은 사건의 전반적인 발전 과정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일들을 할 뿐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일의 원인과 경과, 최종 결과, 얻게 될 성과는 아무도 예측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이는 누구냐? 오직 하나님뿐이다! 우주에서 발생하는 큰일이든, 아니면 어떤 천체의 한구석에서 발생하는 작은 일이든 전부 사람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그 모든 법칙과 진행 과정, 최종 결과를 통제하지 못하고, 누구도 그 모든 일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며, 누구도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 마지막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 모든 것의 주관자, 주재자는 오직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뿐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용은 그저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고 안배하는 크고 작은 환경,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여러 역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작용이자 역할이다. 어떤 일들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겉보기에 성과가 예상만큼 좋지 않은 것, 사람이 원치 않는 결과가 발생하고 나아가 가슴 아프고 슬픈 결과가 나오는 것, 이 또한 사람이 주재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만약 어떤 일의 최종 결과가 훌륭해서 올바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며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깊은 영향을 준다면, 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어떤 일이 마지막에 이뤄지지 않고, 결과가 그리 좋거나 낙관적이지 않다면, 표면적으로 볼 때 사람에게 올바르고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는커녕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래도 그 일의 전반적인 과정 역시 하나님이 배치하고 안배한 것이지 어떤 한 사람이 통제한 것이 아니다. 너무 멀리서 찾아볼 것 없이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일례로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일하고, 리더 일꾼으로 선발되어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을 맡을 때부터 적그리스도로 드러나고 형제자매들이 분별하고 폭로하고 마지막에 도태시키고 저버릴 때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미혹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에게 영향을 받아 생명 진입에 손해를 입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사탄의 교란에서 비롯되고 사탄의 종이 벌이는 일이지만 설마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의 발생과 발전 과정을 보지 못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어떤 결과가 생길지 모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교회와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느냐? 이 모든 것이 설마 사람이 일을 그르쳐서 초래된 것이겠느냐? 이 부정적인 사물의 등장에 대해 사람은 속으로 늘 ‘아이고, 사탄이 빈틈을 노렸구나. 사탄이 교란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그 속뜻은 ‘하나님은 왜 감시하지 않으신 거지? 하나님은 만유를 감찰하시는 분 아니었나? 어디든 존재하고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 아니었나?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어디 간 거야?’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의혹이 생겨난다. 의혹이 생겨난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이고 사람 뜻에 맞지 않고 사람이 원치 않는 결과, 더욱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는 결과가 생긴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 채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신다면, 지금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것 같은 일이 왜 벌어지는 거지? 왜 이렇게 사람 뜻에 맞지 않는 일이 교회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의혹이 생기고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그에게 “당신은 하나님께 관념이 생겼군요.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사탄을 원망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눈에는 사탄이 보이지 않으니 그 책임은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적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 집단에 돌아갈 것이며,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생명에 손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돼도 싸.”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는 마음속으로 이 모든 일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귀결 짓겠느냐?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어디에 두었느냐?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발생한 모든 일을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공허한 이론으로 귀결 지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교적 좋고 긍정적인 일, 예를 들어 성령이 크게 역사하고 사람의 믿음도 무척 커서 핍박과 환난 속에서 유다가 되지 않고 굳게 서거나 하나님 집의 재물과 형제자매들의 생명이 어떤 손해도 입지 않은 일에 관해 사람은 “하나님의 지켜 주심입니다. 이는 사람 덕분에 이룬 일이 아니라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행사입니다.”라고 말한다. 반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여의찮을 때,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 큰 붉은 용의 탄압과 체포가 임하고 교회 재물도 사탄에게 빼앗기고 형제자매들도 생명에 손해를 입고, 하나님의 선민이 사방으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교회 생활도 할 수 없게 됐을 때, 더는 예전처럼 교회 생활을 할 수 없고 형제자매들과 화목하게 모여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이행하는 그런 기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악인과 불신파가 관념을 퍼뜨려 미혹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졌을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원망할 것이다.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못하고 ‘누구누구는 악인이고, 누구누구는 사탄이며, 누구누구는 마귀야. 그가 그렇게 부주의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런 처지가 되지는 않았겠지. 그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행복하게 교회 생활을 하면서 정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을걸. 이 모든 건 다 그 사람, 그 마귀, 그 사탄, 또는 그 사탄 정권 때문이야.’라고 원망할 것이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감히 하나님에게 뭔가 불평하거나 전체 사건의 책임을 돌리지는 않지만,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 수 없는 불신이 생긴다. 불신의 생각 속에서 어떤 것들이 생기겠느냐? 사람은 “저는 이 일을 겪고 교훈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닥치든 경거망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몇 번씩 생각한 후에 행동할 거예요. 또 아무도 쉽게 믿지 않을 거고요. 어떤 환경을 마주하든 조심, 또 조심하면서 저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울 겁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느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전히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중얼거린다. ‘너무 쉽게 하나님 말씀을 믿어선 안 돼.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시거든. 그러니 믿을 수가 없다고! 지금 발생한 이 일만 해도 그래. 큰 붉은 용이 교회 사람들을 잡아가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신 거지?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되는 걸 보고 싶으신 걸까? 불신파가 사람을 미혹하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신 걸까? 정말 보셨다면 왜 가만히 계시는 거야? 왜 제지하거나 막지 않으시는 거지? 하나님은 왜 사람을 미혹하는 그가 악인이고 불신파이니 되도록 빨리 그를 멀리해서 이 모든 결과가 벌어지지 않게 피하라고 우리를 깨우쳐 주지 않으신 걸까? 불신파가 사람을 미혹할 때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신 거야? 귀띔 한마디라도 해 주셨으면 됐잖아!’ 그는 이 모든 ‘왜’에 답을 얻지 못했고, 답을 얻을 수도 없다. 결국, 이 일을 겪은 후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일은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일은 나 자신에게 기대야 해. 어리석게 굴지 말자고. 형제자매들끼리 협력해서 어려움을 이겨 내고 서로 도와야지. 다른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하고. 우리가 신경 쓸 수 있는 것도 아닌걸.’이라고 말이다. 만약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의 선민을 잡아갈 때, 교회 사역과 교회 생활이 모두 심각하게 가로막히고 형제자매들의 본분 이행도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면, 그럴 때 불신파나 적그리스도가 나와서 사람을 교란하고 미혹하며 사설과 궤변을 퍼뜨려 리더 일꾼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진 거라고 말한다면 사람은 적그리스도와 악인에게 미혹된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인정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이 벌어질 때, 사람은 그 가운데서 공과를 배울 줄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 성품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여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공과를 배우게 하는지, 어떤 이로움을 얻게 하는지, 어떤 분별력을 키우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전부 모르고 체험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일을 통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정확하다고, 그 말이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며 만유를 감찰한다’는 사실보다 더 믿을 만하고 실제적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사실 너희는 마음 깊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더 진실하다고,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좀 막연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막연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무엇 때문이겠느냐? (실제로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이 두 가지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 위안, 행복을 주는 일은 좋은 일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반면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게 하는 일들, 나아가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나 정상적인 본분 이행 환경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일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나쁜 일’에는 따옴표를 붙였다. 이 ‘나쁜 일’이 사람에게 좋은 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말 중 ‘모든 것’에는 오직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 만족, 이로움, 도움, 수확을 주는 것,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는 일만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모든 것’에 속한다. 반면 표면적으로 봤을 때, 만약 어떤 일들이 사람의 생명과 교회 이익에 손해를 주고 사람을 미혹하며 심지어 일부 사람을 도태시키거나 불행한 일을 마주하게 해서 고통을 안겨 준다면,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주재와 무관하다고, 사탄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행사라면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나타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렇게 규정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말을 무척 단편적이고 얄팍하게 이해하며, 관념 속에 제한하면서 감정적 색채를 입히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겠다. 하나님은 갖가지 곤충과 조류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저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두 익충이고 좋은 존재이겠죠. 꿀벌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각종 좋은 조류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반면, 모기는 늘 사람을 물고 바이러스를 퍼뜨리니 나쁜 존재입니다. 그러니 아마 모기는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가 아닐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식의 이해는 치우친 것 아니겠느냐? 사실, 만유는 다 하나님이 지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창조주뿐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과 생명이 없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각종 익충과 날짐승, 유익한 생물만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고, 파리나 모기, 빈대, 인류가 잔인하게 생각하는 육식 동물 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닌 것 같다고 믿는다. 설사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좋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이 사람의 관념 아니겠느냐? 사람은 사상과 관념 속에서 조금씩 이런 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다 긍정적인 사물이고 하나님이 지은 것이지만,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것,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부정적인 사물이고 하나님이 지은 게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거나 대자연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사람은 의식 속에서 늘 자기도 모르게 ‘파리, 모기, 빈대는 좋은 존재가 아니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게 아니야.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창조하지 않으신다고.’라고 생각하거나 ‘사자나 호랑이는 늘 양이나 얼룩말을 잡아먹는데 너무 잔인해. 그러니 그것들은 좋은 존재가 아니야. 또 늑대는 음험하고 교활하고 흉악하고 독하고 잔인하니까 좋은 동물이 아니야. 역시 소나 양이 좋지. 개는 더 좋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지은 존재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사람의 감정적 필요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입맛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이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다양한 동물을 창조했다. 얼룩말과 사슴 등 각종 초식 동물을 창조했고, 사자, 호랑이, 표범, 악어 등 흉포한 육식 동물도 창조했는데 그것들은 잔인해서 한입에 사냥감을 죽여 버리기도 한다. 이 동물들이 사람에게 좋아 보이든 나빠 보이든 전부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다. 혹자는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아이고, 얼룩말이 너무 불쌍하네. 얼룩말을 잡아먹다니, 사자는 너무 흉악해.”라고 말하며,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을 보면 ‘늑대는 너무 잔인하고 교활해. 하나님은 왜 늑대를 만드셨을까? 새끼 양은 얼마나 귀엽고 착하고 온순해. 온순한 동물만 만드시면 되잖아. 늑대는 양의 천적이야. 하나님은 양을 만드시고 왜 또 늑대를 만드신 걸까?’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일의 비밀을 알지 못해 마음속에 늘 관념과 상상을 품는다. 교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발생할 때, “하나님은 인류를 아끼시면서 왜 또 사탄을 만드신 걸까요? 왜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도록 허락하신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면 왜 적그리스도가 교회에 나타나도록 허락하실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물을 주재한다. 이렇게 주재해야만 만물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율과 법칙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여 적그리스도가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네가 알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어떤지 네가 알겠느냐?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글귀와 도리만 알려 줄 뿐 실제로 보여 주지 않는다면 네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명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나 악인이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면서 기온이 급변할 때 갑작스러운 한기에 버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싶다면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모든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네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 네가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네가 좋아하지 않는 부정적인 사물, 네 감정에 맞는 것, 네 감정과 입맛에 맞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을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식견을 키우고 경험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것이며, 이 사실들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각종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공과를 배워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수많은 일을 간파하며 자신을 더 충실하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이루는 최종 성과는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등장과 발전 과정에서 창조주를 인식하고, 창조주의 성품과 본질을 인식하며,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고 지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좋은 일로 보이든 나쁜 일로 보이든, 네 뜻에 맞든 그렇지 않든, 너를 즐겁고 기쁘게 하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든, 너는 그것을 배울 만한 공과가 있고 구할 만한 진리가 있는 사람과 일, 사물로 여기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벌어진 일도, 인위적인 일도, 어떤 사람이 이끌어 낸 일도, 누군가가 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재하고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다. 어떤 일의 발생이든 사람의 의지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또 누군가가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나타나고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최종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한다.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말한 대로, 내가 이야기한 원칙대로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닌지, 너희가 생각하는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옳은지, 아니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의 등장과 발전, 최종 결과까지 전부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한다.”라는 말이 옳은지 보아라. 이 두 가지 말 중에 어떤 것이 맞는지, 어떤 말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어떤 말이 사람에게 도움과 이로움을 주는지, 어떤 말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는지 보아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지배한다는 관점과 태도를 갖고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체험한다면 사물을 바라보는 네 관점과 시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반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의 시선으로 만사와 만물을 바라본다면 적어도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시비에 휘말려 사람의 책임을 추궁하고, 갖가지 일의 원인이나 여러 사건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요소 등을 분석할 것이다.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을 믿을수록 불신파의 관점은 네게서 점점 더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을 체험하든 마지막 결과는 점점 더 진리와 어긋나고,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 또한 일종의 도리와 구호로 변질될 것이다. 그럼 너는 영락없는 불신파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을 믿을수록 네가 불신파임을 말해 준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도, 하나님 말씀도 없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이 네 마음속에서 전혀 인정받거나 받아들여지거나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면, 네 마음 깊은 곳은 사탄에게 완전히 점유될 것이며, 유물론과 진화론의 사상 관점, 사탄 마귀의 온갖 헛소리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너는 눈에 보이는 사실만 믿을 뿐, 우주 만물 가운데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분은 누구도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믿지 않는다. 너는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시선으로 모든 일을 대하니 사탄이나 유물론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만약 네가 “세상 만물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라는 시선으로 모든 일을 대한다면, 설령 밝히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눈앞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체적인 일에 있어 하나님 말씀에서 답과 근본 원인, 문제의 본질과 진상을 찾을 것이다. 시비를 따지지 않고, 누구의 책임인지 추궁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대조하여 문제의 근본 원인과 걸림돌을 찾을 것이며, 전체 사건 가운데서 사람이 실패한 부분은 과연 어디인지, 사람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사람이 표출한 패괴 성품은 무엇인지, 사람의 패역은 무엇인지, 하나님과 맞지 않는 부분은 어디인지 찾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한 뜻과 목표는 무엇인지, 사람에게서 무엇을 이루려는지, 어떤 성과를 내려는지, 사람이 어떤 이익을 얻게 하려는지,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등을 구할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구체적인 사건을 분별하고 바라볼 때 네 내적 상태는 달라진다.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은 부지중에 하나님 말씀에 이끌리고 인도받을 것이며, 부지중에 하나님 말씀에서 깨우침을 얻고 방향을 찾게 될 것이며 또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지키고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을 얻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이러한 진리 원칙에 진입하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게 될 것이며, 진실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순종하게 될 것이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최종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전반적인 사건 가운데서 진상을 간파하고 공과를 배우며, 네게 닥친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안배에서 비롯되고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것처럼 ‘전화위복’이 된다. 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정죄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모든 일을 긍정적인 사물로 대하고, 마음속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심혈과 뜻, 기대가 들어 있는 일로 볼 것이다. 체험 과정에서 너는 부지중에 하나님이 전반적인 일을 배치한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깨달은 후에는 부지중에 그 안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어 전체 사건과 관련된 사람과 일을 분별하게 된다. 만약 네가 전체 사건 속에서 “세상 만물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라는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이다. 또한, 진리를 얻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관한 인식을 얻을 것이며, 그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고심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전까지는 그저 의식 속에만 존재했던,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말에 대한 인식과 체험도 얻게 될 것이다. 전체 사건 가운데서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시선으로 문제를 대한다면 너는 원망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뒷전으로 제쳐 둘 것이며, 하나님이 네게서 매우 멀어졌다고, 하나님은 너무 막연하다고,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 하나님의 모든 것은 더없이 요원하고 공허하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전체 사건의 발생과 발전, 결과는 전부 사람이 조종하며, 인위적인 요소가 사건 전반에 가득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어떤 부분의 실수는 누가 초래한 거야. 어떤 부분의 손실은 누가 부주의해서 초래한 거지. 또 어떤 부분은 누가 방해하고 교란하고 망친 거야. 그 사람을 찾아서 따져야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는 사람이나 일을 물고 늘어지며 끊임없이 시비와 옳고 그름 가운데서 살아가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피조물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 의무, 그리고 네가 지켜야 할 관점과 입장은 멀리 던져 버릴 것이며,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서 조금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전반적인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너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련도 없다. 즉, 너는 일이 닥쳤을 때 사람과 일만 물고 늘어질 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나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와 대조하여 그것을 근거로 그 일을 해부하고 그 가운데서 공과를 배우고 분별력을 키우고 믿음을 늘리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법이 전혀 없다. 전체 사건에서 네가 지키는 것은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민간의 속담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불신파의 논조이자 관점이다. 반면, 전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할 때 네가 피조물의 입장에서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의 옳고 그름이나 시비도 분석하지 않고 사람과 일을 파고들거나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주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고, 주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구한다면, 하나님이 행하고 지배하게 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진리를 갈망하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께 협력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불신파의 관점과 태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지녀야 할 입장과 관점을 지닌다면 너는 부지중에 예전에 체험하지 못한 것, 네가 갖추지 못한 진리 실제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진리 실제는 하나님이 전체 사건을 주재하여 네게서 이루고 얻으려는 성과이다. 하나님은 이루고자 예정한 것을 이루었으니 헛수고한 것이 아니다. 네게서 하나님이 이루려는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성과이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고, 어떤 일이든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벌어진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임을 알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이 만물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 사실임을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네가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만물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는다면, 욥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느낌이 무척 좋고, 감동을 받게 된다. 너희는 이 말의 진실성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냐? 욥이 이 말을 할 때의 심정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냐? (그러고 싶습니다.) 그냥 적당히 그러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몹시 원하는 것이냐? (몹시 원합니다.) 어쨌든, 그런 다짐을 하고 그런 바람도 갖고 있다. 그럼 이 바람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느냐?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며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이런 시각으로 네게 임하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해야 한다. 또 그 가운데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는 뜻과 하나님이 네게서 도달하고 이루려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머지않은 미래에 욥이 그 말을 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욥이 그 말을 할 때의 심정을 느끼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너희 중 99% 이상이 그런 심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단 한 번도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욥처럼 창조주가 만물과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무지몽매와 패역에 기인하고, 또한 사탄의 미혹과 패괴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사람은 일이 닥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불신파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대하며, 심지어는 이방인이 즐겨 쓰는 방식과 이론적 근거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판별하고 대한다. 그리하여 결국 진리와 무관한 결론, 심지어는 진리에 어긋나는 결론만을 얻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은 창조주가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한다는 사실을 계속 깨닫지 못하며, 또 욥이 그 말을 할 때의 심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욥과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의 손이 일하고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하나님이 그 일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구체적인 뜻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를 인식했다면, 마지막에 전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네게서 이루려는 긍정적인 성과와 너에 대한 하나님의 고심, 기대 등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고 네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런 일만 믿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깨달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커질 것이며, 이와 동시에 네가 창조주와 확실히 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며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충분한 검증을 얻게 될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검증과 깨달음을 얻으면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환희가 찾아오겠느냐, 아니면 고통과 우울함이 찾아오겠느냐? (기쁨과 환희가 찾아올 것입니다.) 분명히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예전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근심, 슬픔을 겪었든 그것들은 전부 연기처럼 사라지고, 뛸 듯이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이 체험을 통해 네게서 진실로 검증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 교제하는 것과 같다. 그때 네 심정은 욥과 같을 것이다. 당시 욥은 어떻게 말했느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이 표면적으로는 스스로를 한하고 회개하는 두 가지 행위로 지난 일에 대한 증오를 나타냈지만, 사실 그의 마음 깊은 곳은 기쁘고 행복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어떤 일에서, 심지어 별 볼 일 없고 눈길 가지 않는 그런 일에서 뜻밖에도 창조주의 얼굴을 보고 창조주와 얼굴을 마주하며 창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나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있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 앞에서 누가 기뻐하고 감격하지 않겠느냐? 누구든 감격할 것이며, 감동과 환희를 느낄 것이다. 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 기념비적인 일이다. 보아라, 이로운 점이 많지 않으냐? 나는 너희가 앞으로 이런 심정을 진실로 느끼고, 이런 경험과 체험을 하기를 바란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그 심정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믿는 데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이런 결과, 이런 상황을 모두가 기대해 마지않으며, 누구나 이런 경험과 체험을 하기를 바란다. 네가 이런 기대를 품고 있다면, 네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체험할 때 올바른 관점과 입장을 갖고 하나님이 가르치고 알려 준 방식대로 그 모든 일을 겪으며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준칙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너도 모르는 새에 믿음이 점점 커질 것이며, 하나님이 만물과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이 네 마음속에서 조금씩 검증받고 증명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증명된다면, 분량이 자라지 않을까 봐 걱정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어느 정도 걱정하는 것은 정상이다. 사람은 분량이 너무 작고 많은 일을 간파하지 못하니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람이 피해 갈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의 내면에는 지식, 사람, 사탄, 사회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대하는 관점에 깊은 영향을 주고, 각종 사물을 대할 때 지녀야 할 시선이나 입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입장과 시선을 지니는 것은 쉽지 않다. 긍정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물까지 체험해야 하고, 부정적인 사물을 통해 그것의 본질을 분별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더 많은 공과를 배우게 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할 수 있다.
이제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했느냐? (인식했습니다.) 이 말에 옳은 부분이 있느냐? 맞는 성분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도 없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도 없다고 인식했다면 정확하다. 이는 이론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제 실생활 속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며 각각의 일을 통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이 잘못되고 터무니없으며 불신파의 관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사실을 통해 이 말의 잘못된 점을 논증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말을 철저히 버리고 내팽개쳐 더는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 너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비록 내가 하는 말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일이 닥치면 ‘그때는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는 말이 하나도 정확성이 없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왜 또 좀 맞는 것 같지?’라고 생각하며 내면에서 갈등과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즉, 이 말을 고집해서 생겨난 각종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고, 이 말 때문에 생겨난 각종 행동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이나 일을 물고 늘어지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한 후 하나님의 말씀에서 근거와 원칙을 찾아라. 그러면 찾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생각이 트일 것이며,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너 혼자 원칙을 찾는 게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모아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고 진리 원칙을 구하여라. 그 후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가져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고 대조해 보아라. 대조하고 나서 올바른 관점을 받아들이면 잘못된 관점은 자연히 내려놓게 된다. 앞으로는 이 원칙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여라. 이 방식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관점에서 파생된 각종 행동 방식이다.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여라. 그렇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면 사람의 잘못된 관점이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한다면 일 처리 방향과 방식은 그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일의 결과도 양호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반면,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시선과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처리하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교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진리를 구하지는 않고 사람과 일만 물고 늘어지거나 시비를 가리면서 책임을 추궁한다면, 결국 몇 명한테 처분만 내리고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어떤 나쁜 결과도 보지 못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출교됐으니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닐까요? 그 나쁜 결과는 어디에 나타나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일을 겪으면서 모두가 공과를 배웠느냐?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달았느냐?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했느냐? 이런 긍정적 성과가 전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모두가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고 책임을 미루며, 일이 닥치면 얼른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려고만 하고, 책임지거나 처분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또 공과를 배우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데 생명이 성장하겠느냐? 결국, 리더 앞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리더가 어떤 언행을 보고 기뻐하는지, 어떤 언행을 보고 반감을 갖거나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최종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고 폐쇄하고 포장하고 위장하면서 누구도 솔직하게 마음을 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포장하고 경계하고 위장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왔겠느냐?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수많은 일을 겪은 후, 일이 닥치면 피하는 법을 배웠고, 다른 사람을 접하는 것과 일이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완전히 문을 닫아걸고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마음을 열지 않으며, 마음에도 하나님을 두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완전히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많은 일을 겪어도 공과를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못하며, 나아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모두 불가능하다. 오히려 사람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남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살피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수작을 부리고 더 교활하게 굴며 각종 시시비비를 더 능숙하게 처리하게 되고, 일이 닥쳤을 때 책임을 지기는커녕 남에게 전가하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아무 관계가 없어지니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이것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나쁜 발전 방향은 어떻게 생겨났느냐? 만약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원칙으로 하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찾아 근거로 삼고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면, 또 하나님 말씀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 대조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그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한다면 하나님 말씀이 활로를 열어 주어 사람이 그 일에서 방해받거나 가로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그런 일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실행의 원칙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행의 길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일이 닥쳤을 때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구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을 찾아 근거로 삼는다면 사람과 사람 간에 서로 경계하겠느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시비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설령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계속 이런 일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별종이며 모두에게 버림받는 대상이다.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일은 양호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고, 사람은 마지막에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인식하며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얻어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 올바른 목표를 이룬다면 믿음이 커질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많아질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한 생겨날 것이다. 이것이 양호한 발전 방향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 모든 일에서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관점과 입장을 지녔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관점과 입장을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양호한 발전 방향과 발전 단계가 생겨나 자연스럽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성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이나 사탄 철학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사탄 철학으로 일을 바라보고 사람과 일을 물고 늘어진다면, 그로 인한 파생물은 나쁜 것이다. 또한, 최종적으로 아무도 진리를 깨닫거나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야기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몰라 생기는 결과이다. 그래서 일부 교회에서는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겨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고 원망하고 비교하고 충돌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암투를 벌이는데,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그 사람들은 전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불신파이며, 그들 중에 진리를 구하는 사람,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면, 어떤 교회의 사람들은 분량이 작고 깨달은 진리도 많지 않지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 후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체험하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한다. 이 사람들 역시 함께 본분을 이행할 때는 가끔 다툼과 충돌이 생기고, 말싸움을 하거나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분위기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함께 무슨 일을 하든 가족이나 친척처럼 더없이 조화롭고, 서로의 마음에 간극이 없고, 사역할 때는 한데 뭉쳐 단합한다. 이렇게 조화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곳의 책임자나 주요 인물 몇 명이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고, 옳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원칙을 실행하여 진정한 성과를 냈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몇 년을 믿어도 생명 진입을 이루지 못하고, 어떤 일이 닥쳐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 채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바라보는데,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가 없다. 만약 어떤 교회에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 몇 명이 있어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안배와 하나님이 정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교회에는 성령이 역사하는 분위기가 생겨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즐거운 조화로운 분위기를 느끼면 사람의 마음가짐 역시 최고의 상태가 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로서로 손발이 맞으며, 마음 깊이 공동의 지향점과 목표, 추구의 동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매우 조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 분위기는 사람에게 믿음으로 충만한 느낌을 주기에 모두가 발전하고자 추구하고 마음속에 힘을 얻게 된다. 마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데 끝없는 힘이 솟구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느낌은 사람을 매우 즐겁게 해 준다. 누가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든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믿음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 느낌이 달라진다. 성령 역사가 없는 교회의 사람들은 대부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일이 닥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사람의 방식과 방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모든 것을 조종한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간의 느낌, 관계, 분위기가 다르다. 성령이 역사하는 분위기와 서로가 사랑하는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고, 싸늘함만 느껴질 뿐이다. 즉, 사람들이 냉랭하게 서로를 대하며, 서로 경계하고 충돌하며, 암암리에 겨루고 비교하면서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직장이나 정계, 재계의 이방인들처럼 서로 찍어 누르고 따돌리고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는 반감과 혐오감, 공포감을 줄 뿐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만약 네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인류는 사탄에게 심각하게 패괴되었다.”라는 말씀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 역사에 더더욱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다. 성령 역사가 없다면, 즉 사람, 사탄, 지식, 불신파가 권력을 잡는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너는 불편한 느낌을 받고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얼마 안 가 억압받고 답답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느낌은 사탄과 패괴된 인류에게서 온 것으로, 무척 확실하다. 이 화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지난 시간에는 전통문화에 속하는 덕행 중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에 관해 교제하였다. 오늘은 이어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 말은 방금 교제한 “사람 덕분에 일을 이루고, 사람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불신파의 관점이다. 불신파의 관점은 사람들 가운데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사람은 말을 하기 시작해서부터 사람에게서, 불신파에게서, 사탄에게서, 이 세상에서 비롯된 각종 말을 배웠다. 즉, 교육 계몽이 시작되면서 부모나 가정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며, 어떤 도덕과 사상, 인격을 갖춰야 하는지 등을 교육받았다. 그러다가 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모두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사탄에게서 온 각종 학설과 이론을 주입받는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주입받은, 사람으로서 처신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덕행이다. 이 덕행을 갖춘다면 사람들은 너를 가리켜 고상하고 존귀하고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사회에서 추앙받고 우러름을 받는 사람 말이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이 사람과 사탄에게서 온 이상, 그것은 우리가 해부하고 분별해야 할 대상이며, 나아가 저버려야 할 대상이다. 왜 이 말을 분별하고 저버려야겠느냐? 먼저 이 말이 옳은지,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맞는지를 보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자, 이런 인품을 갖춘 자가 정말 고상한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가 진리 실제를 갖추었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한, 피조물이 지녀야 할 인성과 지켜야 할 처신의 원칙을 갖췄겠느냐? 너희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느냐? 먼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너희의 말로 해석해 보아라.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으면 힘을 다해 그 일을 잘 처리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정말 그렇게 해야겠느냐? 다른 사람이 네게 어떤 일을 부탁했다는 것은 너를 존중한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는 너를 존중하고 믿으며,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래서 너는 그가 어떤 일을 부탁하든 승낙해야 하고, 상대의 요구대로 일을 적절하게 잘 처리해서 그를 기쁘고 만족스럽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럼 너는 좋은 사람인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너에게 일을 부탁한 그 사람의 만족 여부가 네가 좋은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사회에서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무척 쉬운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기준이 너무 낮으며 고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 기준을 충족하면 너는 그 일에서 덕행을 갖춘 사람이 된다. 이 말은 네가 신뢰할 만하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 신용이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그런 의미이다. 그럼 너희도 이렇게 생각하느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의 평판 기준, 판단 기준에 대해 다른 의견은 없느냐? 만약 너희가 예를 들어 이 말에 대해 반박하고, 이 말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점을 폭로한다면, 그러니까 실제 사례를 들어 이 말의 부정확성을 증명한다면 이 말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너희는 이론적으로 이 말이 분명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사실로써 이 말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오늘 일이 있어서 이웃에게 장 보는 일을 부탁했다고 해 보자. 너는 구체적으로 어떤 채소를 살지, 얼마나 살지, 언제 필요한지 등을 모두 그에게 설명했다. 얼마 후, 그가 네 부탁대로 장을 봐서 식자재를 제때 보내왔다면, 이를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신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소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다 준 사람한테 인품이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를지, 인품은 과연 어떤지 등 이런 것이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겠느냐? 설마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덕행의 기준에 이른 것이겠느냐? 고작 요만한 일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인성과 인품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의미겠느냐? 어떤 이는 “그 사람은 신용을 중시합니다. 그에게 물건을 갖다 달라고 할 때마다 어떤 것을 얼마나 부탁하든 다 들어주죠. 그는 믿을 만하고 덕행이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그를 이렇게 정의하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가 적합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웃이고, 이웃 사이에는 보통 얼굴 붉힐 일도, 서로 피해를 주는 일도 만들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이 생긴다면 앞으로 같이 지내기가 불편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런 생각에서 너를 도와줬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겸사겸사 네 부탁을 들어줬을 수도 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 데다가 너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어 이는 그에게 이득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네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면 앞으로 너에게 부탁하기가 더 편해지지 않겠느냐? 어쩌면 앞으로 네게 뭔가 큰일을 부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너는 어쩔 수 없이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중을 위한 대비가 아니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돕고 왕래하고 사귀는 것은 다 목적이 있다. 만약 그가 너를 쓸모없다고, 앞으로 별로 부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면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네 가족 중에 의사나 변호사, 고위 공무원, 혹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기에 나중을 위해 네 부탁을 들어준 것일 수도 있고, 이다음에 어디에 너를 이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너희 집에 가서 공구를 빌리는 것만 해도 수월해진다. 네가 그에게 어떤 부탁을 한다면 며칠 후 그가 뭔가를 빌려 갈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다고 해 보자. 언뜻 보기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아도 사실 그는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마쳤다. 누구의 마음도 단순하지 않다. 한번은 내가 어떤 지역에서 옷을 수선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은 수선집 여사장 딸이 본국으로 귀국하는 날이라 여사장은 차가 있는 이웃에게 딸을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택시비를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웃이 수락하자 여사장은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그 이웃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짜로 부탁을 들어주기가 싫었던 그는 느릿느릿 옷 한 벌을 꺼내 들며 말했다. “이 옷, 고칠 수 있겠어요?” 수선집 사장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표정은 ‘이 사람, 이렇게까지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흔쾌히 승낙하더니, 공짜로 데려다줄 생각이 없었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1, 2초 후에 바로 “그럼요. 거기 두고 가세요. 제가 잘 수선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며 돈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보아라, 사람 한 번 데려다주는 대가로 옷 수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손해 보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간단한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간단하지가 않다. 이 인간 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거래 심리를 갖고 있고, 누구라도 거래하고 상대에게 요구하며, 이익만 취하고 손해는 보지 않으려 한다. 혹자는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중에는 아무 이득도 없이 그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런 덕행을 갖추었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는 돈도 물질도 바라지 않고,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았을지라도 평판은 고려한다. 이 ‘평판’이란 무엇이냐? 바로 ‘나는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어. 상대가 내 앞에 있든 없든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해 주면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겠지. 최소한 몇몇 사람들이라도 내가 좋은 사람, 인품이 고상한 사람,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래도 할 만하지!’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왕 우리에게 부탁한 일이니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이 일은 끝까지 잘 처리해 주어야 합니다. 길이 이름을 남기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뒤에서 비난하는 말이나 신용이 없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죠. 우리 후손들이 억울하게 무시당하게 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역시 평판이다. 재물이 중요한 사람들도 있지만, 명예와 이익이 중요한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평판’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평판’은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느냐?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인품이 고상한 사람, 그리고 롤모델, 현자, 성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어떤 일에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천하고 이런 인품을 갖춘 덕에 영원히 칭송받으며 자손 대대로 그 덕을 누리게 된다. 보아라, 이것은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크다. 그러므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소위 덕행의 기준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출발점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저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만도 아니고, 어떤 이익이나 평판을 위해서만도 아니고, 이번 생이나 다음 생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당연히 남들에게 비난을 듣거나 나쁜 평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출발점은 단순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인성의 관점이나 인류의 사회적 책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속셈이나 출발점을 보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지키는 목적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방금 사람이 일하는 속셈과 목적, 야심과 욕망의 관점에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에 관한 말을 해부하였다. 이는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의 또 한 가지 잘못된 점은 무엇이냐? 사람은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하는’ 행동을 더없이 고상하게 여기는데, 자기가 부탁받은 그런 일이 정의로운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느냐? 만약 누군가가 네게 부탁한 일이 매우 평범한 일,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언급할 가치도 없다면, 최선을 다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 간에 왕래하고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척 정상적인 일이며,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인품이 고상하니 저열하니 하는 수준까지 갈 것도 없다. 하지만 네가 받은 부탁이 매우 중요하고, 생사나 운명, 미래와 관계가 있는 큰일인데도 평범한 일처럼 대하며 분별없이 최선을 다한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겠느냐?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정의롭고 긍정적인 일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나 손해도 주지 않고 혹은 인류에게 그 어떤 부정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도 괜찮다. 그것은 네가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이자 지켜야 할 원칙이다. 그러나 네가 받은 부탁이 정의롭지 못한 일, 다른 사람이나 인류에게 피해를 주고, 교란과 방해가 되고, 심지어는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일인데도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면, 너의 인품은 과연 어떻다고 할 수 있느냐? 인품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좋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좋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불의한 자를 따르거나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어 서로를 지기로 여긴다. 또 그 친구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상관하지 않고 친구의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서 들어준다. 친구가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하면 죽이고, 누구를 해쳐 달라고 하면 해치고, 뭔가를 망쳐 달라고 해도 들어준다. 친구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분별없이, 또 생각 없이 가서 저지른다. 그러면서 그것 역시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인성과 인품은 어떠냐? 좋으냐, 나쁘냐? (나쁩니다.) 나쁜 사람도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할’ 수 있지만, 그가 들어준 그 부탁들, 최선을 다한 그 일들은 모두 악행으로, 부정적인 사물에 속한다. 남의 부탁을 받아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복수하고, 법을 어기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는 전부 사람을 해치고 망치는 일로, 악행과 범죄에 속한다. 만약 나쁜 일을 부탁받았는데도 전통문화에 언급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따르느라 “저를 믿고 존중해서, 또 저를 남이 아니라 친한 친구로 생각해서 저한테 맡기셨으니 저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지켜서 목숨을 걸고 당신 부탁을 들어줄 것이고 절대 번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야말로 머저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머저리 중의 머저리다. 그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부탁받은 일이 간단한 일, 남과 교제하면서 있을 법한 흔한 일이라면 그 부탁을 들어줬다고 해서 덕행이 고상한지 여부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무척 중요한 일, 무척 큰 일이라면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네 자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네 능력에 맞춰 행동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일이 부정적인 일, 법에 저촉되는 일, 남의 이익이나 목숨, 나아가 미래와 앞날에 해가 되는 일인데도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기준을 지킨다면 너는 머저리다. 이러한 면에 비추어 본다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사람이 남에게 부탁을 받았을 때 지키는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정확하지 않으며, 허점과 문제점이 너무 큰 데다가 사람을 심각하게 미혹한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인 다음 가감 없이 이 말로 타인의 덕행을 평가한다. 물론 이 말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신의 덕행을 제약한다. 인간 세상에서 남에게 부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 정의롭고 긍정적인 부탁, 남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부탁,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어찌 모른단 말이냐?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덕행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한다면, 의문점이 너무 많고 문제가 너무 커서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람에게 잘못된 이념을 주입하고, 이런 일을 대하는 잘못된 원칙, 방향을 주입해서 사람의 사상을 미혹하고 마비시키고 오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떻게 분석하고 해부하든 존재 가치가 없고, 실행해서도 안 된다. 이 말은 사람에게 이로운 점이 단 하나도 없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에는 또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을 이용하고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악인들, 기득권층, 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 입장에서 이 말은 그들에게 틈탈 기회가 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조종하는 핑계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확한 타깃이 되는 사람을 이용해서 그들을 위해 일하게 만든다. 반면,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고 충성을 바치지 않는 사람들은 남이 부탁한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 덕행이 낮은 사람, 신뢰할 수 없는 사람, 우러름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 사회에서 비천한 사람으로 정의되어 미움받는다. 예를 들어, 네 상사가 어떤 일을 부탁했을 때, 네가 ‘상사가 부탁을 한 이상 어떤 일이든 수락해야 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칼 위에서 춤을 추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라는 생각에서 수락했다고 해 보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가 상사이기에 네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수시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동료지.” 하면서 너를 자극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네게 그런 이념을 주입했고, 미리 예방 주사를 놓아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게 했다. 그가 어떤 요구든 꺼내는 순간 거절하지 말고 선뜻 대답해야지 안 그랬다가는 뒤끝이 안 좋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너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인맥을 이용하고 뒷거래를 하며 뇌물을 주는 등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렇게 결국 일을 성사시켰지만, 돈을 쓴 일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고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지요. 상사가 저를 존중하고 높이 평가해 주었으니 저는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잘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실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너 자신뿐이다. 일을 해내면 사람들은 너를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일을 해내지 못하면 사람들은 너를 무시하고 멸시하며 미워할 것이다. 사회의 어떤 계층, 어떤 집단에서든 누군가가 너에게 부탁을 하면 반드시 힘닿는 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들어주어야지 거부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다른 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원만히 성사시키고 상대가 만족할 만큼 해내서 보고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상대가 관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처리해야 한다. 사돈의 팔촌처럼 너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네가 사회적으로 좋은 직업을 갖고 있거나 유명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이런저런 일을 부탁한다면, 그럴 때는 들어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사실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사회관계 때문에, 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사상의 여론적 압박 때문에 너와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 요구한 일을 너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한 사람에게 원망을 사거나 사회적 관계 하나가 줄어들 뿐이다. 어쩌면 어떤 사회 집단에서 외톨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이냐? 사실 뭐가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네가 그들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네 운명이 그들 손에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단 말이냐? 거기에는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사회적 여론이 너를 결박하고 속박하고 압박하고 있으며, 너는 어떤 사회 집단에 있든 늘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도덕 기준과 사회 여론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네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거나 피조물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 기준에 관한 말과 사회적 여론이라는 무형의 족쇄에 얽매인 것이다. 너는 왜 그것에 얽매이겠느냐? 먼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덕행에 관한 말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너는 전통문화가 가져오는 그 사회적 압박이나 사회적 여론을 뿌리칠 힘도, 용기도 없으므로 그것의 속박과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사람은 어떤 사회 집단이나 단체 속에 있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품이 고상한 사람, 좋은 사람, 신용이 있는 사람, 신뢰하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 남들에게 존경받고, 모두가 자신을 냉혈한이나 별종이 아닌 존엄성과 인간미, 의리를 갖춘 사람으로 봐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네가 사회에 녹아 들어가고, 또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들에게 도덕성이 고상한 사람, 인격과 신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떤 요구를 하든 너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만족시키고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 입에서 너라는 사람은 신용이 있고 인품이 고상하다는 좋은 평가를 얻고, 누구나 너와 사귀기를 원하게 되면, 너는 자신이 존재감 있게 살고 있다고, 사회와 사람들, 주변의 동료며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있어서 삶이 무척 풍요롭고 만족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들과 다르게 살아간다면, 네 사상 관점, 걸어가는 인생길이 그들과 다르다면 아무도 네가 도덕성이 고상하고, 신용이 있고, 일을 맡길 만하고, 존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너를 버리고 따돌릴 것이며, 너는 압박감과 슬픔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어째서 압박감과 슬픔을 느끼겠느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네 자존심은 어디에서 오느냐? 너에 대한 사회와 사람들의 인정과 수용 정도에서 온다. 만약 그들이 너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칭찬도, 높은 평가도 하지 않는다면, 네게 어떤 부러움이나 호감, 감탄의 시선도 보내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무능하게 살고 있다고, 너무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하며, 네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답답함과 괴로움에 빠져 살게 될 것이며,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들 사이에, 사회에 녹아 들어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기준은 이런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몹시 중요한 일이다. 이 또한 어떤 사람의 도덕성과 그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럼 이 판단 기준이 정말 옳으냐? 결코 옳지 않다. 심지어는 황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에 관한 말에는 분별이 필요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부탁한 일이 네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며, 네 자질로 이를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다면, 또는 네게 적당한 환경과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 양심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과하지 않고 선을 벗어나지 않은 타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줘도 된다. 하지만 그가 부탁한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네 세월을 많이 빼앗아 간다면,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네 평생의 책임과 의무, 네가 이행해야 할 피조물의 본분이 무로 돌아가고 그런 일로 대체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네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 짊어지는 책임과 의무 중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사회와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에너지와 시간, 세월, 인생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부탁한 일로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창조하고 생명을 주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다. 오직 하나님의 부탁만이 진정한 부탁일 뿐, 다른 사람의 부탁을 수락하는 것은 전부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든 네게 자신이 부탁한 일을 위해 충성과 에너지와 세월을 바치라고, 나아가 네 청춘과 일생을 바치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어떤 사람이 부탁한 일이 네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너무 많이 허비하게 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끼치며, 심지어는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데 지장을 주고,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바꿔 놓는다면, 그것은 네게 좋은 일이 아니라 재앙이다. 만약 그것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나아가 네 청춘을 빼앗아 가며,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을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런 성질에 속하는 모든 부탁은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일은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부탁을 했는데 그 일이 네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필요로 하고 빼앗아 간다면, 심지어 네 청춘과 일생을 바치게 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시간까지 빼앗아 간다면, 그자는 네 친구가 아님은 물론이요, 네 적, 원수라고까지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준 부모, 자녀, 가족들에게 평생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외에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바치고 써야 한다. 그 누구도 네게 어떤 일을 부탁한다는 핑계로 네 시간과 에너지를 독점하고 빼앗아 갈 자격이 없다. 만약 네가 권유를 듣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아들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소모한다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며, 심지어 빼앗기고 점유될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빼앗겼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진리 추구의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구원받을 확률이 줄어들었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네게 행복한 일이겠느냐, 아니면 재앙이겠느냐? (재앙입니다.) 분명히 재앙이다. 이는 다음의 상황과 같다. 한 여자아이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가 “너는 하나님을 믿어도 되지만, 반드시 나를 기다려 줘야 해. 내가 출세해서 돈을 벌고 지위를 얻어 너를 위해 집과 차, 커다란 다이아 반지를 사게 되면 그때 너와 결혼할게.”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여자아이가 “그럼 나는 그 몇 년 동안 일단 하나님을 믿거나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게. 먼저 너랑 같이 노력해야겠다. 네가 돈을 벌어서 잘나가는 사장이 되고 소원을 성취하면, 나는 그때 본분을 이행하러 갈게.”라고 말한다면, 이 여자아이는 똑똑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것이겠느냐? (어리석은 것입니다.) 너무도 어리석다! 그가 출세하도록 도와서 돈과 권력, 명예와 이익을 얻게 해 주면, 네가 잃어버린 세월을 누가 보상해 주겠느냐? 너는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 손실을 누가 보상하고 메워 주겠느냐? 또 너는 하나님을 믿는 몇 년 동안 얻어야 할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 진리와 생명은 또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이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기는커녕 다른 이의 부탁과 바람,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몇 년의 세월을 허비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얻을 기회를 놓쳐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한다. 이 손실과 대가는 너무도 크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좋다’는 말을 듣기 위해, 인품이 고상한 사람, 신용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 믿기를 포기하고 피조물의 본분 이행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양다리를 걸친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나눠 얼마간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남의 비위를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만족시켰지만 피조물의 본분은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 네가 입은 손해는 너무도 크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고, 신용이 있고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으며, 열납되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바가 아니며, 사람에게 맡긴 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외도에 속하며, 본업을 소홀히 한 것이니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는 결코 기억할 만한 선행이 아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들였지만 하나님께 기억되기는커녕 진리를 추구할 최적의 기회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소중한 세월을 잃어버렸다. 처음으로 돌아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고 할 때는 나이가 들어 에너지도, 체력도 쇠한 데다가 병까지 걸려 있을 텐데, 여기에 의미가 있겠느냐? 또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느냐? 남은 그 세월을 진리 추구와 피조물의 본분 이행에 쓰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체력이 딸리고 기억력도 떨어지며 에너지도 부족할 테니 말이다. 예배 때면 수시로 졸고, 본분을 좀 이행하려고 해도 늘 난관에 봉착하며 병에 시달릴 테니, 그때는 후회하게 된다. 네가 남에게 부탁을 받고 최선을 다한들 상대에게서 무엇을 얻겠느냐? 기껏해야 상대를 회유하고 좋은 평가를 들을 뿐이다. 사람의 좋은 평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사람의 좋은 평가는 한 푼 값어치도 없다.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그렇게 큰 고통을 겪고, 또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게 가치가 있겠느냐? 그러니 사람은 지금 무엇을 깨달아야겠느냐? 누가 네게 부탁을 하든, 어떤 일을 부탁하든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 이행이나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과 관련이 없다면, 너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네 의무가 아니고, 더욱이 네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저를 보고 덕행이 부족하다고, 친구라고 할 수 없고 의리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을 염려한다면 가서 그 부탁을 들어주어라. 그리고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보아라.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을 다 끝내지 못했는데 본분 이행으로 인해 그 부탁을 계속 들어줄 수 없게 되면 이렇게 고민한다. ‘이 일을 중도에 그만두는 건 좋지 않아. 사람으로서 신용이 있어야지. 시작이 있었으면 끝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용두사미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 내가 해 주겠다고 한 일을 중간에 그만두면 상대한테 뭐라고 말하겠어? 그건 너무 품격이 없는 거야!’라고 말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체면을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그 사람을 위해 일을 처리해 주어도 된다. 일을 다 처리한 후에 네가 무엇을 얻었는지, 그 신용을 지키고 그런 품격을 가진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큰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라. 만약 그 일이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고 진리를 얻는 데 영향을 미쳤다면, 너는 거기에 목숨을 건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그 덕행 측면의 말과 요구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굴레와 결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것들을 분별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며 그것들을 저버리기로 마음먹고 그런 것에 기대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덕행 측면의 말이 가져오는 굴레와 결박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을 것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진리를 얻을 희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교제했는데, 이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과 기준이 좀 분별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정리해 보겠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몇 가지 측면에서 분별해야겠느냐? 첫째, 단언컨대 이 말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도 아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누가 부탁을 하든, 너에게는 “저는 당신을 돕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할 권리가 있다. 만약 그 당시에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해도 이제 깨달음을 얻어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면, 들어줄 필요도 의무도 없다고 여긴다면 그 일은 거기에서 마무리 지어라. 이는 하나의 실행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니요.”라고 말하며 거절해도 된다. 둘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간단한 일,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귀고 교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최선을 다한다느니 인품이 고상하다느니 등을 논할 계제가 못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남을 도와 사소한 수고를 했다고 해서 덕행과 신용이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그 사람은 배후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남을 도와 사소한 수고를 했다고 해서 인품이 고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는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며,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이는 평범한 일에 대한 대처법이다. 그럼 특수한 일은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받은 부탁이 특수한 큰일, 네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 무척 힘들고 고생스럽게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거절해도 된다. 난감해할 필요가 없다. 이 밖에, 만약 누가 너에게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일, 타인의 이익에 해가 되는 일을 부탁한다면 더더욱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주로 무엇을 분별해야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남이 부탁한 그 일이 네 책임과 의무인지,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는, 그 일을 받아들인 후 처리하든 처리하지 않든, 잘 처리하든 잘못 처리하든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나 사람의 인품과 관계가 있는지가 분별의 초점이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네가 부탁받은 그 일이 어떤 성질을 띠는지, 합리적이고 합법적인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럼 방금 교제한 내용을 묵상하고 정리하여 너희의 생각과 관점을 말해 보아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말에 관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람은 남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으니 거절해도 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지니는 권리입니다. 그다음, 남의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처리하든 처리하지 않든, 잘 처리하든 잘못 처리하든 그것이 인품과 관련이 없으며, 사람의 인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탁받은 일이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것이라면 더더욱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악행에 속하며, 징벌받을 것입니다. 이 몇 가지를 통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관점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먼저, 사람에게 이런 일을 대하고 처리하도록 요구하는 이 말의 원칙이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 말로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 밖에도, 이 말로 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고, 사람을 결박하고 속박하는 한편, 사람을 이용하여 일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상대가 시간과 에너지, 대가를 지불해 가면서 남을 위해 이행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원치 않는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굴레이다. 그러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이 몇 가지 잘못된 점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의 존재 가치와 정확성을 무너뜨린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첫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즉, 누군가가 네게 부탁을 하면 그 일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상관하지 말고 부탁을 받은 이상 신용을 지켜야 하고 그 일을 제대로 잘 처리하여 상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이 분별없이 이렇게 실행하게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된 점으로, 원칙을 어긴 문제이다. 둘째,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덕행을 판단한다면, 그 판단 기준 또한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만약 누군가에게 나쁜 일, 악행을 부탁받아도 최선을 다한다면, 이 사회는 혼란스러워지지 않겠느냐? 셋째, 늘 이 말을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연히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여론, 사회적 압박이 형성되어 사람의 사상을 결박하고 속박하게 될 것이다. 이는 어떤 결과를 야기하겠느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과 이런 사회적 여론이 존재하기에, 너는 사회적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고, 네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며, 네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너는 부득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내면 깊은 곳의 필요도, 정상 인성의 필요도, 정 유지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압박이 야기한 것으로, 도덕적 굴레이다. 만약 네가 다른 사람의 부탁에 승낙만 하고 막상 행동하지는 않는다면, 네 부모나 가족, 동료, 친구는 너를 질책하며 “이게 뭐니? 대체 뭘 한 거야?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 승낙은 해 놓고 왜 안 하는 거야? 들어주기로 했으면 지켜야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너는 꿀리는 데가 있어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러 간다.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고, 그런 능력도 없으며, 그 일을 처리할 수 없음에도 억지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온 가족이 너를 도와 적잖은 돈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그 일을 마무리 짓는다. 너에게 부탁을 한 사람은 기분이 좋겠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겪은 터라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다. 기꺼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너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닥쳐도 너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체면을 중히 여기고 허영심이 강하며,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너를 질책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질책할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기로 해 놓고 가만히 있다니, 무슨 짓이야? 나조차도 나 자신이 별 볼 일 없어 보여. 이건 도덕성이 없는 것 아니야?’라며 너 스스로를 옭아매니, 네 사상은 이미 속박당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그 일은 너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 일을 해 봤자 어떤 이익이나 도움도 얻지 못하니, 안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몇몇 사람에게 질책을 들을 뿐이다. 그게 또 뭐가 어떻단 말이냐? 그것은 네 운명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네게 어떤 요구를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된다. 위의 세 가지에 근거하여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부했는데, 이 말의 본질이 분명히 파악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을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냐? 실행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 측면의 근거는 무엇이냐? 방금 나는 가장 중요한 점을 이야기했다. 즉, 사람은 평생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을 들어줄 어떤 의무도 없으며,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위해 살아가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는 오직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있다. 이것 외에는 누구를 위한 일도 전혀 의미가 없으며, 전부 헛수고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강요이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말은 절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를 이용하고 도덕적으로 옭아매고 통제하고 결박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부탁이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체 우주에서 피조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 사람의 본분에 충성하는 것 외에 네가 충성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나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처신의 원칙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네게 부탁을 한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네가 받은 부탁이 약간의 수고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간단히 몇 마디 하거나 조금만 움직이면 끝낼 수 있는 일, 네 자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인성과 사랑 차원에서 출발해 도와줘도 된다. 이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하지만 상대가 부탁한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심지어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한다면 네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설령 상대가 부모라고 할지라도 네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으니 그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그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줄 필요는 없다. 이는 네 권리이다. 이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세 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네게 어떤 일을 부탁했는데 그것이 많은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네 본분 이행에 교란과 영향을 주거나 본분 이행의 다짐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망쳐 놓는다면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또한, 네가 부탁받은 일이 진리 추구에 영향을 미치거나 네 진리 추구의 다짐과 발걸음을 교란하고 방해하여 중도에 그만두게 한다면 더더욱 거절해야 한다. 네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에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다 거절해야 한다. 이는 네 권리이다. 너에게는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가 있으니 그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 세월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고 이로움도, 도움도 안 되는 일은 다 거절해도 된다. 이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원칙이다. 그럼 이 몇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판단했을 때, 사람이 인생에서 받아들여야 할 부탁은 오직 어디에서 오겠느냐?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좀 공허하고 요원하다. 실제로 그 부탁은 무엇이어야겠느냐? (본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 바로 네가 교회에서 이행하는 본분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네게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거라.”라든가 “가서 리더가 되어라.”라든가 “가서 문서에 관한 사역을 하여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알려 주지는 않지만, 하나님 집의 안배를 통해 네게 본분을 맡긴다. 하나님 집의 안배는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직접 네게 알려 줄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너는 이미 체험하여 진실로 느꼈다. 네가 체험한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역과 경륜, 진리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분 아니겠느냐? 이는 부탁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맡긴 부탁 외에 다른 일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일편단심 충성을 바치라고 할 자격이 있으며,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다. 네 조상이나 부모, 고위 상사를 포함한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그런 자격이 없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여기에는 최고의 진리가 있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분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피조물이 창조주께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의 진리이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전부 진리, 생명,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얻는 것은 더없이 풍성하고 풍족하며 넉넉하고 가득하다. 사람이 진리와 생명, 길을 얻으면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바치는 시간과 에너지, 대가는 모두 긍정적인 보답을 받을 것이며, 너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20~30년간 따른 사람들도 있고, 3~5년, 혹은 10년 가까이 따른 사람들도 있다. 나는 대다수가 후회하지 않고, 많든 적든 어느 정도 수확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고, 진리는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또 너무 늦게 받아들였다고, 3~5년, 혹은 10년 더 일찍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을 믿는 몇 년 동안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헛되이 세월 보낸 것을 후회하고, 그동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요컨대,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다 얼마간 수확을 얻었고, 진리 추구가 너무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두 번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와 길과 생명을 얻고 구원받아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만약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면, 마지막에 어떤 종착지를 맞이하겠느냐? (구원받고 살아남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마지막에 구원받으면 침륜과 멸망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인류가 되어 살아남는 종착지를 얻게 된다. 즉,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 살아가면 하나님을 볼 희망이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에서 사람이 이 세 가지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한다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사람에게 충성하면 상대는 너를 덕행이 훌륭한 자라고 말할 것이고, 너는 높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겨우 이 정도의 좋은 점이 있을 뿐이다.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결코 얻을 수 없다. 네가 어떤 사람에게 충성하면 그는 네게 무엇을 주겠느냐? 기껏해야 그가 출세할 때 덕을 좀 볼 뿐이다. 그렇게만 되어도 훌륭하다. 겨우 이 정도이다. 그것이 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그것 역시 공허하지 않겠느냐? 진리와 무관한 것들은 아무리 많이 얻어 봤자 소용이 없다. 이 밖에, 네가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하면 상대의 희생양, 부장품으로 전락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네가 충성하는 그 사람이 바른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를 따르는 너는 어떻게 되겠느냐?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를 따르는 너 역시 바른길을 걸을 수 없다. 너는 그를 따라 악을 행할 것이며,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을 것이다. 그럼 끝장이다. 네가 어떤 사람에게 충성하면, 설령 좋은 일을 숱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네가 마왕이나 사탄,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면 사탄의 앞잡이, 조력자에 속할 것이며, 사탄을 위해 부장품이나 희생양이 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방인들은 “임금을 모심이 마치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한다. 마왕에게 아무리 충성해도 그것은 결국 너를 이용한 후 삼켜 버릴 것이며, 너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네 보잘것없는 목숨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왕과 사탄에게 충성한 결과이다. 마왕과 사탄은 영원히 네게 올바른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가리켜 줄 수 없고, 네가 올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인도하지도 못한다. 또 너는 그것에게서 절대 진리나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네가 그것에게 충성한 결과는 그것과 함께 파멸을 맞이하여 그것의 부장품이 되거나 그것에 의해 곤경에 빠지고 해를 입고 삼켜지는 것이다. 다 지옥에 떨어지는 결말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그가 명인, 위인, 어떤 대단한 인물이든 그에게 충성하거나 인생을 바칠 가치는 없다. 그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으며, 네 운명을 지배하고 조종할 능력도 없다. 이 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충성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부탁한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실행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서도 세 가지를 교제하였다. 전부 이해했느냐? (네.) 어쨌든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부하는 목적은 너희가 이 말의 황당함과 그릇됨을 깨닫고 이 말을 내려놓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일에서 사람이 갖춰야 할 실행 원칙과 하나님의 뜻까지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말에 관한 주요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렇다. 다만 서로 다른 몇 가지 측면과 입장에서 해부한 후,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실행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교제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했다면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에 관한 말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본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측면의 화제를 분석하는 것은 사실 간단해서 사람이 분별하고 인식하기 쉽다. 이 말 역시 도덕가들이 제시한, 사람을 마비시키고 사상을 미혹하며 정상적인 사유를 교란하는 말이다. 이 말은 정상 인성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도, 정상 인성의 이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더욱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서 온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소위 사상가, 도덕가들이 내놓은 외식하는 말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헛소리에 속하고, 더욱이 부도덕하다. 어째서 부도덕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정상 인성의 필요도, 사람의 자질 범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사람이 다해야 할 의무도,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도덕가들은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엄격히 요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하나의 분위기와 여론을 형성했으며, 사람들이 그 사회 여론에 억눌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했다. 그렇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그런 사상에 결박되었다. 사람의 사상이 결박되면 사람의 손발이 그런 말과 사회 여론에 결박될 것은 분명하다. ‘결박’이란 무엇이냐? 사람이 일할 때 자기 생각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인성의 바람과 요구를 따르지 못하며, 양심과 이성의 요구 내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왜곡된 사상과 사람이 분별하거나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사상, 이론, 사회 여론에 속박되고 결박되어 부지중에 그런 사회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살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런 말의 치우친 점과 잘못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런 말이 사람의 사상을 결박하여 야기하는 위해와 결과를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전통문화와 사회 여론이 가져오는 속박과 결박,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기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모르고, 처신의 방향과 목표, 원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동적으로 그런 전통문화 중 덕행의 각종 말에 미혹되며, 그런 그릇된 이론에 오도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이 사설과 궤변들을 분별하고 저버리기가 쉬우며, 더 이상은 사탄이 만든 사회 여론과 분위기, 사회 환경에 결박되거나 얽매이거나 억눌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대로 살아가고 생존할 수 있으며, 더는 사탄의 각종 학설과 전통문화의 궤변에 미혹되거나 결박되지 않는다. 사람이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각종 말을 철저히 내려놓을 때가 바로 사탄의 패괴와 미혹, 결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이다. 이것을 기초로 네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과 사람에게 제정해 준 실행 원칙을 깨달을 때 인생 목표가 완전히 달라지고, 새로운 인생을 얻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얻으면 너는 새로 태어난 사람, 새사람이다. 네 사상에는 더 이상 사탄이 주입한 각종 사설과 궤변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사탄에게 속하는 그런 것들을 진리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에서 진리가 사람 내면에서 생명이 되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인도하고 지배하므로 인생의 바른길에 오르고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것 아니겠느냐?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22년 7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