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2)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들을 교제했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두 가지 측면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시기, 또는 서로 다른 단계에 교회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었고, 어떤 리더 일꾼은 교체되었으며, 어떤 이는 병에 걸렸고, 어떤 이는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고 할 때,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은 전부 우연이 아니며, 저희는 이에 대해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실행의 길에 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마주했을 때는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첫 번째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심판이나 형벌, 시련, 연단이든 아니면 은혜나 축복이든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전통문화 중 덕행의 논조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해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중점적으로 교제한 화제 역시 덕행의 논조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 화제에 대해서는 꽤 오래 교제했는데,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조와 요구, 정의에 대한 것을 폭로했다. 너희는 이 화제에 대한 교제를 통해 덕행의 논조를 새롭게 인식하고 정의했느냐? 이 논조들의 본질을 분별하고 밝히 알게 되었느냐? 마음속 깊이 이것들을 내려놓고 버리며, 진리와 혼동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로 여겨 추구하거나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임하는 일들이 덕행의 논조와 관련될 때, 자신이 이 덕행의 논조들에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속박되고 결박되고 통제되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속으로 의식하고 성찰할 수 있겠느냐? 마음속으로 아직도 덕행의 논조로 자신을 속박하고, 언행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예전에 하나님께서 전통문화에 관해 교제하고 해부해 주시기 전까지는 이 덕행 측면의 사상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저에게 어떤 위해를 끼치는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 덕행 측면에 관한 논조의 오류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그것을 저버려 더는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일상생활 속에서 자세히 체험하고 파헤치고 분별해야 덕행 측면의 논조를 철저히 간파하고 저버릴 수 있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인식이 생겼다고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이 전통문화의 그릇된 사상 관점들을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임했을 때 불현듯 그 논조들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체험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전통문화의 이 그릇된 관점을 자세히 해부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문화의 논조를 대할 때 그 본질이 진리에 어긋나며 실제적이지 않고 사람을 미혹하고 해하는 것임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마음에서 철저히 이 터무니없는 관점의 해악을 제거할 수 있다. 너희는 지금 전통문화의 각종 논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이치상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좋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전통문화의 해악과 영향을 근원적으로 철저히 해결할 수 있을지 여부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덕행의 논조는 그게 어떤 것이든 전부 인류가 제창하는 덕행 측면에 관한 사상 관점이다.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가 지닌 본질에 대해서는 이미 적잖게 폭로한 바 있지만, 전에 교제한 그 몇 가지 측면 외에 반드시 폭로해야 할 덕행의 논조들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인류가 제창한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지난번에는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덕행의 논조에 대해 교제했다. 의미를 보면, 이 말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은 남성에 대한 하나의 요구이자, 사람들이 말하는 ‘사내대장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다. 우리는 남성에 대한 이 기준을 폭로하고 해부하였다. 남성에 대한 이 요구 외에 예전에 교제한,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라는 여성에 대한 논조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전통문화는 여성에게만 현실성 없고 인성에 맞지 않는 비인도적 요구를 한 게 아니라 남성에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인성에 어긋나는 논조와 요구를 제시했는데, 이는 여성의 인권은 물론 남성의 인권까지 박탈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언뜻 공평한 것 같다. 여성을 풀어 주지 않고 남성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으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을 보면, 여기에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논조가 한 측면으로는 여성에게 덕행의 기준을 제시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마찬가지로 남성이 사내대장부가 되는 행위 준칙을 규범화했다고는 하나, 이 요구 기준을 보면 공평함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성의 덕행에 대해 제시된 요구 기준은 여성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여성의 사상을 옭아맬 뿐만 아니라 여성의 두 발 또한 옭아매며, 여성에게 규방 깊이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라고,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고 여성을 훈계하는 것 외에도 여성의 행동 범위나 생활 범위를 엄격하게 규정하면서 여성에게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멀리 외출을 하지도 말라고, 사업도 하지 말고, 큰 야심이나 욕망, 꿈은 더더욱 갖지 말라고 요구한다. 심지어는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더더욱 비인도적인 논조까지 나왔다. 너희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이 정말 성립하느냐? 여자가 재주가 없는 것이 어떻게 덕이 될 수 있겠느냐? 이 ‘덕’은 도대체 무슨 덕이겠느냐? 박덕(薄德)하다는 것이냐, 아니면 유덕하다는 것이냐? 만약 재주가 없는 여자를 덕행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재주가 있는 여자는 전부 박덕하고 무덕(無德)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재주 있는 여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겠느냐? 여성의 인권을 심각하게 박탈하는 것 아니겠느냐? 여성의 존엄에 대한 일종의 모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여성의 존재를 경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며, 여성에게 불공평하고 부도덕한 처사이다. 그러니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이 어떻겠느냐? 인도적이겠느냐? (비인도적입니다.) ‘비인도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박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심각하게 박덕한 것으로, 중국 속담으로 비유하자면 ‘조상 몇 대가 박덕한 것’이다. 이 논조는 너무도 비인도적이다!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을 선동하는 사람에게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는 여자가 재주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즉, 여자가 사회사업에 참여해 남성과 평등한 지위에 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남성을 받들어 모시는 도구가 되어 착실하게 남성의 시중만 들면서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기를 바라며, 이것이 바로 유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성을 옳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부정하며, 여성이 남성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남성의 시중만 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지위에 서서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관점이 사람의 정상적인 사유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아니면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 이는 분명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에게 본능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어떤 약점이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남성이 여성을 멸시하고 여성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여성의 자유와 인권을 박탈할 핑계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생각하는 여성의 이 약점과 타고난 취약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여성은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 약점과 문제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이며,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점도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탄의 눈에 약점과 결점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 천연적인 것, 긍정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만든 자연법칙에 부합한다. 오직 사탄만이 이렇게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을 깎아내릴 수 있고,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것을 결점이나 약점, 또는 본능 면에서 부족한 문제로 보면서 확대하여 멸시하고 비웃고 비하하고 배척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여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권리와 여성의 재능과 특기를 발휘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는 종종 ‘속 좁은 여자’나 ‘계집’이라는 말이 도는데, 이는 이런 단어로 여성을 형용하여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존재로 비하하는 처사이다. 비슷한 단어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계집애 같은 남자’,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 “여자는 가슴만 크지 머리는 비었다.” 등은 전부 여성을 모욕하는 말이다. 보아라. 이 말들은 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나 여성을 일컫는 호칭을 이용해 여성을 모욕하고 있다. 이 사회와 인류가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시선은 완전히 다르며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불공평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남녀평등에 입각하여 말하고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완전히 불평등한, 남존여비의 시선으로 여성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많은 말이 생겨났는데, 여성의 특징과 여성을 일컫는 호칭으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문제를 형용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언급한 ‘속 좁은 여자’, ‘계집’, ‘계집애 같은 남자’라든가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 “여자는 가슴만 크지 머리는 비었다.” 등의 말은 여성을 형용하고 여성을 겨냥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특징이나 성별과 관련된 단어로 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비웃고 헐뜯고 폭로한다. 인성이 없는 사람을 형용할 때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짐승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그 단어로 심각하게 인성을 상실한 정도를 형용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여성을 경멸하고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에 여성과 관련된 단어로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형용한다. 이는 분명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비하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이 인류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여성에 대해 내린 정의는 불공평하며 사실에 어긋난다. 요컨대, 여성에 대한 인류의 태도는 ‘비하’와 ‘억압’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형용할 수 있다. 여성이 떨치고 일어나 일하는 것, 어떤 사회적 의무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더욱이 여성이 사회에서 뭔가 역할을 발휘하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어떤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처사이다. 여성이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말하는 것도, 심지어는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니 이는 여성에 대한 박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박해는 덕행의 요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정이나 사회, 사람들이 여성에게 제시하는 갖가지 요구를 보면, 인류가 무리 지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게 되었을 때부터 여성에 대한 박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그 박해가 언제 최고조에 이르렀겠느냐? 전통문화 중 각종 덕행 측면의 논조와 요구들이 점차 생겨나면서 여성에 대한 박해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명문화된 규정과 명확한 논조가 있기에 이것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여론과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여론과 세력은 여성에게 피할 수 없는 올무나 멍에가 되어 여성으로 사는 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인류 가운데서 살면서, 서로 다른 시기의 사회에서 살면서 굴욕을 참고 모욕을 당하며 사회의 노예, 심지어는 남성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행 측면의 이 오래된 사상과 논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에는 남성도 포함되고, 당연히 여성도 포함된다. 여성은 어느샌가 부지중에 이 덕행 측면의 논조와 사회 여론으로 스스로를 제약하게 되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당연히 이 올무와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의 이 강력한 여론 세력에 저항할 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통문화 중 각종 논조의 본질을 간파할 수도, 간파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벗어나고 싶고 그 올무와 멍에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다. 주관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다가 창조주가 사람을 지은 의미가 무엇인지, 남성과 여성의 본능을 만들어 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큰 사회도덕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생존하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회라는 큰 환경 아래에서 전통문화 중 덕행에 속하는 논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논조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종의 보이지 않는 멍에가 되었다.

여성을 박해하는 전통문화의 논조들은 여성에게만 무형의 멍에인 게 아니라 당연히 남성에게도 보이지 않는 멍에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남성 역시 이 인류 가운데 태어나 사회의 또 다른 주요 구성원으로서 이 전통 도덕 문화에 물들고 영향받기 때문이다. 이 전통 도덕 문화는 모든 남성의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내려져 남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에 영향받고 속박받는다. 예를 들어, ‘속 좁은 여자’,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 “여자는 반드시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 “여자는 반드시 순결해야 한다.” 등의 주장은 남성들이 마음속으로 철석같이 믿는 것으로, 그들 역시 이 전통문화에 단단히 얽매여 있다. 한 측면으로는, 여성을 박해하는 이 주장들은 남성의 지위를 높이는 데 매우 큰 도움과 유익이 된다. 이 큰 도움과 유익 면에서 보면, 남성은 사회에서 이 여론에 무척 큰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을 박해하는 이 여론과 주장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성들 역시 이 전통 도덕 문화에 미혹되고 영향받기 때문에 남성은 전통문화의 큰 흐름 속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온 사회가 남권 지상주의를 외치는데 어째서 남성도 피해자라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류를 유혹하고 오도하고 미혹하고 마비시키고 얽매는 전통 도덕 문화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여성은 전통문화의 도덕 사상에 심하게 해를 입었고, 남성 또한 깊이 미혹되어 적잖은 해를 입었다. ‘미혹되었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남성을 평가하고 여성을 정의할 올바른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떤 각도에서 보든, 그는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정해 준 각종 규칙, 법칙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드러내 준 긍정적인 사물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그가 근거하는 것은 전통문화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남성 또한 전통문화에 유인되고 오도되고 미혹되고 마비되고 얽매인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없다는 이유로 가엾게 생각할 것이 없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보다 높다는 이유로 흡족해할 것도 없다.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라. 사실 남성 또한 무척 불쌍한 존재로, 비교하자면 똑같이 가엾다. 어째서 똑같이 가엾다고 하겠느냐? 남성에 대한 이 사회와 인류의 정의나 평가, 혹은 남성에게 부여한 책임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자. 지난번에 교제한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남성에 대한 요구를 보면, 이 요구의 최종 목표는 바로 남성을 ‘사내대장부’로 정의하는 데 있다. 이는 모범적인 남성에 대한 호칭이다. 이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이 남성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순간, 그 남성은 반드시 그 호칭을 짊어지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호칭을 짊어지려 하면 의미 없는 희생과 정상 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수도 없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남성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내대장부가 되려면 어떤 연약함도, 두려움도 보여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강인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 피곤하다고 호소해도, 울어도 안 되고, 인성의 연약함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걱정하고 슬퍼하거나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네 두 눈은 언제나 생기 넘쳐야 하며, 네 얼굴은 반드시 의연하고 두려움 없는 빛을 띠어야 하고, 적을 대할 때는 머리끝까지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에 걸맞다. 다시 말해, 너는 평생 허리를 꼿꼿이 펴고 용기를 내야지 평범하고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범인(凡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범인을 뛰어넘어 초인이 되어야 하며, 초월적인 의지와 끈기, 인내, 강인함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즉, 남성은 먹고 마시고 문란하게 굴고 도박을 해도 되지만, 반드시 여자보다 강인해야 하고, 초월적인 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임하든 굴복하거나 위축되거나 ‘No’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겁내거나 두려워하거나 나약해진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이런 모습들을 전부 숨기고 포장하여 조금도 드러내지 말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나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사내대장부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 사내대장부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바로 어떤 사람과 일, 사물도 그의 뜻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남성이 어떤 일을 하려고 뜻이나 이상, 소망을 품었을 때, 예를 들어 나라에 몸 바치겠다거나 친구에게 의협심을 보이겠다거나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마음을 먹었다거나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거나 야심을 가졌다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누구도 그를 간섭할 수 없다. 애틋한 사랑도, 가족 간의 정도, 가정도, 사회적 책임도 그의 뜻을 바꿔 놓을 수 없고, 그가 포부와 이상, 바람을 포기하게 하지 못한다. 그의 뜻이나 그가 이루려고 다짐한 목표, 걸어가려는 길은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역시 스스로에게 언제 어느 때라도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일단 긴장을 늦추고 해이해지는 순간, 가정으로 돌아가 책임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돌보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이상과 뜻을 포기하고 걸어가려는 길과 이루려는 목표를 버리려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사내대장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못난 인간, 머저리가 된다. 이는 온 사회가 멸시하는 것으로, 당연히 남성도 그런 자신을 멸시한다. 자신의 행동에 사내대장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문제나 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멸시하며, 이 사회에서 설 곳도 능력을 발휘할 곳도 없다고, 사내대장부나 남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내대장부의 또 다른 특징은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이나 폭력, 위협 등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정신이다. 즉, 어떤 권력이나 폭력, 위협을 마주해도, 심지어는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남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백절불굴의 마음으로 포로나 겁쟁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떤 세력에도 굴복해서는 안 되며, 몸을 굽혀 보전을 꾀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임이나 의무를 위해, 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권력이나 어떤 세력에 굴복한다면, 설령 살아남아 목숨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숭상하는 전통 도덕 문화로 인해 그 행위에 모멸감을 느낀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패배해서 수모를 당하면 할복자살을 하려고 든다. 생명이 그리 가벼운 것이더냐?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뿐이다. 작은 패배나 좌절 때문에 죽겠다는 마음까지 품는다면, 이는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일이 임했을 때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전통문화의 요구에 부합하는 선택을 내리지 못하며,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증명해 보이지 못하고, 스스로가 사내대장부임을 보여 주지 못하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자살을 선택한다. 이 사상 관점을 지니게 된 원인을 파고들어 보면, 전통문화가 남성의 사상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남성의 사상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문화의 이런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남성이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할복자살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내대장부’라는 정의에 대해 남성들은 무척 분명하고 확고하게 그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남성들까지 판단하고 제약한다. 남성의 사상 관점, 그리고 이상이나 목표, 선택하는 길을 보면, 모든 남성이 전통문화에 깊이 영향받고 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영웅의 행적이나 아름다운 전설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 깊이 파고들었음을 보여 주는 사실적인 묘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전통문화에 큰 해를 입은 것 아니겠느냐? 단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이 다를 뿐이다. 여성에게는 끝도 없이 모욕하고 비하하고 제약하고 통제하지만, 남성에게는 가능한 한 부추기고 미혹하고 선동하고 교사(敎唆)하여 겁쟁이나 범인, 평범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남성에 대한 요구는 무슨 일을 하든 여성과 달라야 하고, 여성을 뛰어넘어야 하며, 여성보다 대단해야 하고, 여성을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사회와 인류, 사회의 흐름과 방향, 사회의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심지어 이 사회에서 대권을 손에 넣고 사회와 인류를 통제하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권력에는 여성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것이야말로 남성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사내대장부의 영웅적 기개라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국가가 민주 사회에 진입하고 여자와 어린이의 권익 역시 보장받게 되면서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으로 인한 영향과 속박은 어느 정도 희미해졌다. 어쨌든 수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했으며, 많은 분야와 업종에서 여성의 참여가 날로 늘고 있다. 하지만 전통문화의 사상은 이미 오래전에 인류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여성의 마음뿐만 아니라 남성의 마음에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의 관점이나 입장으로 각종 문제를 생각하고 바라본다. 물론,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으로 각 분야의 사업과 직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남녀의 불평등 문제는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전통문화 속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나라의 교육이 기본적으로 전통문화의 이 핵심 사상들을 위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회와 인류가 전통문화의 논조로 갖가지 문제를 서술하는 일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전통문화 사상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을 칭찬할 때 어떤 단어를 쓰더냐? ‘여장부’, ‘여걸’이라는 말을 쓴다. 이는 존칭이겠느냐, 아니면 폄칭이겠느냐? 어떤 여성은 “여장부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어떤가요? 저는 남성 사회에 진출해서 지위 상승을 이뤘어요. 여자지만 뒤에 ‘장부’가 붙어서 ‘여장부’가 됐잖아요.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니까 일종의 영광이죠!”라고 말한다. 이는 인류 사회의 어떤 민족, 혹은 단체가 그 여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여성이 ‘여장부’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사내대장부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동등하다는 뜻이다. 또한, 그녀의 사업이나 재능, 심지어 사회에서의 지위, 사회에 발붙일 만한 지능이나 수단 등은 남성들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 ‘여장부’라는 호칭은 많은 여성에게 있어 사회적 포상이자,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사회적 지위의 인정이다. 여장부가 되고 싶어 하는 여성이 있지 않겠느냐? 이 호칭이 듣기에는 좀 별로지만, 어쨌든 누군가 ‘여장부’라고 불린다면 이는 그 여성이 무척 능력 있고 재능이 뛰어나며, 남성이 보기에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릴 정도라는 의미이다. 그럼 남성에 대한 호칭은 어떠하냐?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 관념의 논조를 지키며, 이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성취욕이 전혀 없고, 권세나 지위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현실에 안주하고, 평범한 일이나 삶에 만족하면서 가정을 보살피는 데만 신경 쓰는 남성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사회는 그런 남성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남성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단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매우 신중하게 임한다. 그런데 이런 남성은 어떤 말을 듣겠느냐? ‘여성스럽다’, ‘속 좁은 여자’라는 말을 듣는다. 보아라. 남성을 모욕하는 말에는 저속한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여자’와 관련된 말로 남성을 모욕할 뿐이다. 여성을 추켜세울 때는 ‘여장부’, ‘여걸’ 등의 말로 그 지위를 높이고 재능을 인정한다. 반면, ‘속 좁은 여자’와 같은 말은 남성을 폄하하고 대장부 같지 않다고 질책할 때 쓰인다. 이는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현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생겨난 이 말들은 한 가지 문제를 보여 준다. 전통문화는 현대 생활과 멀어진 것 같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오래전 일 같으며, 현대인들은 인터넷이나 각종 전자용품, 또는 각종 현대적인 생활 방식에 빠져 있다. 설사 사람이 현대적인 생활 환경 속에서 더없이 안일하게 산다고 해도, 혹은 인권과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표상에 불과하다. 사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전통문화의 독소가 수도 없이 남아 있다. 비록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 같고, 사상 또한 어느 정도 해방된 것 같아도,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고 발달하는 현대 사회에서 견문을 늘려 외부의 많은 일에 지식과 식견이 생긴 것 같아도, 인류는 여전히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갖가지 덕행에 관한 논조의 그늘 속에서 살아간다. “저는 전통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무척 현대적이죠. 저는 현대파라고요.”라고 말하면서 코에 피어싱을 하고 귀에 주렁주렁 귀고리를 달며, 전위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은 여전히 전통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렇겠느냐? 그의 마음과 사상은 이미 전통문화에 물들고 얽매여 있으며, 그의 뼛속에서 생겨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설령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일지라도 전부 전통문화에 주입되고 물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전통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전부 전통문화라는 큰 틀 아래에서 생겨났다. 이런 사실은 인류가 전통문화에 얽매여 있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인류는 전통문화에 얽매여 있다. 가방끈이 긴 사람이든 짧은 사람이든, 학력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이 인류 가운데서 살아가는 한 반드시 인류의 전통 도덕 문화에 물들고 영향받게 되어 있다. 그 전통문화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학교나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정에도 존재하며, 당연히 사회의 곳곳에 존재한다. 이렇게 사람은 부지중에 이런 것들이 주입되고 거기에 영향받으며 미혹되고 오도된다. 그래서 인류 모두가 전통문화의 결박과 속박, 통제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숨고 싶어도 숨지 못하고,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사회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는 현재 상황이자 사실이다.

지난번에 교제한 덕행 측면의 논조와 본질에 근거해서 보면, 전통문화 속 덕행의 논조는 인류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덮으며, 당연히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켰다는 사실 역시 덮는다. 오늘 교제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정의는 이 덕행 논조의 또 다른 본질을 분명히 보여 준다. 어떤 본질이겠느냐? 덕행 측면의 이 논조들은 인류의 사상을 미혹하고 오도하고 옭아맬 뿐만 아니라 또 자연스럽게 각종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관점을 주입한다. 이는 사실이며, 사탄이 제창한 덕행 논조의 또 다른 본질이다. 이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방금 교제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덕행 측면 논조의 정의를 보면 이 점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충분히 설명된다. 덕행 측면의 논조는 행위상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 표면적인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만을 논할 뿐 사람과 일, 사물의 정과 반, 좋고 나쁨, 시비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인성에 부합하는 올바른 것, 도움이 되는 행위나 처신의 준칙, 원칙을 지키게 하지 않는다. 그 덕행의 논조들이 인성의 자연법칙에 위배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자 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들은 사람이 옳고 그름과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고집스럽게 규칙을 지키게 한다. 만약 지키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너를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며, 심지어는 너 자신조차 스스로를 비난할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가 인류의 사상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적인 증거 아니겠느냐?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전통문화가 인류의 사상을 옭아매고 있는 것을 진실로 구현한 것이다.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논조와 요구, 규정이 생겨나는 순간, 사회적으로 여론과 흐름,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럼 너는 그 분위기나 흐름에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감히 ‘No’라고 말하거나 거부하지 못한다. 어떤 의문이나 다른 주장은 더더욱 제기할 수 없다. 그저 그 아래 몸을 맡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로부터 미움받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며, 심지어는 사회 여론에 비난받고 이 인류에게 정죄될 것이다. 비난받고 정죄당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더는 얼굴을 들고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존엄을 잃었기 때문이다. 너는 사회도덕을 지키지 못했고, 네게는 도덕도, 전통문화가 요구한 덕행도 없기에 어떤 사회적 지위도 없다.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다양한 측면에서 네 인권은 박탈될 것이며, 심지어 생존권, 발언권, 의무를 다할 권리마저 가로막히고 제약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형성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자 위협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피해자이며, 당연히 이와 동시에 집행자이다. 너는 사회 여론에 해를 입고, 당연히 사회의 각 부류 사람에게서도 해를 입었으며, 동시에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너 자신에게서도 해를 입었다. 결국, 이 전통문화들에 해를 입은 것이다. 이러한 전통문화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무척 크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함을 갖추지 못했으며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났다고 해 보자. 어떤 직장에 가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든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져서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며 그녀를 판단하게 되면,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여자로 인식되지 않는다. 일단 이런 상황까지 오면, 그녀는 사회에서 발붙이기도, 살아남기도 몹시 어려워진다. 심지어는 어쩔 수 없이 실명을 숨기고 새로운 도시나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 여론의 세력이 대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무형의 힘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학대이고 유린이며 억압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회 환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면 가정을 돌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방의 마귀들은 그것을 두고 “살림을 내팽개쳤다”, “가정을 버렸다”, “다른 사람을 따라 달아났다” 등의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주장들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뜬구름 같은 헛소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죄명이 씌워지는 순간, 네 처지는 무척 힘들어진다. 네가 물건을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불편한 기색을 보일 것이며, 네가 가게에서 나가면 그는 뒤에서 “저 여자, 종교에 빠져서 여자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살림도 내팽개친 채로 온종일 밖을 쏘다닌대. 여자가 제대로 살림은 안 하고 바보같이 어디를 돌아다닌담? 여자라면 삼종사덕(三從四德)을 지키고 현모양처가 되어야지.”라고 수군거릴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느냐? 무척 화가 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게 그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을 심심풀이 삼아 떠들고 중요한 문제인 양 비판하며 소문을 낸다. 이는 하나의 사회 현상 아니겠느냐?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 않으냐? 예를 들어, 예전에 너와 사이가 무척 좋았던 동료가 있었다고 해 보자. 그런데 그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뒤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가득 지껄였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네게서 멀어지고 너와 관계가 안 좋아졌다. 네 업무 태도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쓸데없는 말들이 사람들 귀에 들어가는 순간, 네가 회사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기는 힘들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겠느냐? “여자가 살림이나 제대로 하지, 무슨 종교를 믿는대?” “남자가 무슨 종교를 믿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나 종교를 믿지! 그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사내대장부라면 사업에 전념해야지!” 이런 말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들이 어디에서 왔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그들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럼 그들은 왜 너에 대해 이야기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왜 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겠느냐? 어느 정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비난하는 근거는 불가피하게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국가와 정부의 태도와 관계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에 대해 비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되는대로 지껄이고 시비를 일으키며 함부로 정죄하는 것이다. 뭐라고 하든, 그들이 비난하고 판단하는 근거,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대하는 그들의 견해와 태도는 상당 부분 전통문화와 무신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여성, 혹은 남성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 외에, 전통문화의 주요 사상적 정수는 무엇이겠느냐? 하늘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무신론의 사상 관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 특히 참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몹시 배척한다. 만약 네가 미신이나 사이비를 믿거나 어떤 종교 활동을 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네가 미신 행위를 해도 그들은 네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순간, 그들은 너와 공존하지 못한다. 그들이 너와 공존하지 못하는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이방인이고, 모두 사탄을 따르며,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 큰 붉은 용의 정책과 법률에 근거해서 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전통문화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바로 국가가 탄압하고 체포하는 대상임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상대를 멸시하고 되는대로 지껄이며,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다. 또 정부에 협조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감시하고 신고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대부분 전통문화와 무신론 사상, 그리고 큰 붉은 용의 사악한 정책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판단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제대로 살림은 하지 않고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야?” “남자가 사업에 전념하지는 않고 무슨 종교를 믿는대? 제대로 된 남자라면 큰 포부를 지녀야지. 사내대장부라면 사업에 뜻을 둬야 하는 거라고!” 보아라. 이 속된 말들은 분명히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평범하고 속된 사람들은 신앙을 추구하지는 않고 육적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 추구한다. 그들의 사상은 사악한 흐름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전통문화에 깊이 결박되고 얽매여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일을 대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로, 매우 일반적이다. 사탄의 손아귀에 있는 세상에서, 사악하고 음란한 시대는 바로 이러하다.

덕행 측면의 논조는 사람에게 잘못된 개념과 관점을 주입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특수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극단적인 사상을 따르고 극단적인 행위를 하도록 교사하고 종용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말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논조는 사탄이 사람의 덕행을 규범화함으로써 벗을 대하는 일에 대해 제시한 요구이다. 이 덕행의 논조는 분명 사람이 벗을 대하는 일에 있어 비이성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사상 관점을 갖게 하며, 나아가 벗을 위해 함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한다. 이는 사탄이 덕행 측면에서 인류에게 제시한 일종의 극단적이고 과한 요구이다. 사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와 비슷한 덕행 측면의 논조는 더 있다. 그것들 역시 사람에게 극단적인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며, 전부 비인도적이고 비이성적인 논조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을 주입하는 동시에 사람이 이 비이성적인 사상과 비인도적인 논조를 따르도록 요구하며, 이 사상과 행동을 엄수하게 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일종의 우롱이자 학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예를 들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보다 더 분명히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고, 목숨은 그렇게 버리는 거라고, 남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되면 목숨을 너무 아끼지 말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을 실행하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덕행 논조의 표면적인 의미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들이 과연 무엇을 퍼뜨리고 고취시키겠느냐? 누구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것이겠느냐? 누구를 위해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을 실행하라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는 게 의미가 있나?’라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런 논조는 먼저 네 사상을 미혹하고 마비시키며, 네 시선을 어지럽힌다. 이어서 네 인권을 박탈하고, 네게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며, 그릇된 정의와 관점을 준다. 그다음에는 이 나라와 사회, 민족, 또는 사업이나 사랑을 위해 네 청춘과 목숨을 버리게 한다. 인류는 그렇게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자기 목숨을 사탄에게 건네준다. 그것도 기꺼이, 아무 원한이나 후회도 없이 말이다. 목숨을 바치는 순간,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이 무가치했으며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사탄에게 미혹되고 우롱당하고 학대당하고 짓밟히고 유린당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빼앗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전통문화 중 덕행 논조의 교육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는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에게 미혹되고 우롱당한 사람의 가련한 결말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탄이 인류를 대하는 갖가지 수법을 형용하는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먼저 마비시키고 미혹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말해 보아라. (우롱하고 학대하고 짓밟고 유린합니다.) 그다음에는 종용하고 속이고 목숨을 요구하며, 마지막에는 사람을 우롱하고 집어삼킨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면 이런 결과가 벌어진다.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 성품으로 살아간다. 만약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고 심판과 형벌 사역을 행해 인류를 구원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전부 사탄에게 학대당하고 잡아먹혀 멸망에 이르지 않았겠느냐?

인류가 퍼뜨리는 전통문화는 전부 어떤 것이냐?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말은 주로 일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죽을 때까지 마음과 힘을 다하라고 요구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 봉사하라는 것이겠느냐? 당연히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을 위한 것이다. 그럼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은 도대체 누가 통제하고 있느냐?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탄과 마왕이 통제하고 있다. 그럼 사탄과 마왕은 전통문화를 이용해 사람을 미혹시킴으로써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겠느냐? 먼저,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부흥을 이루려고 하고, 그다음으로는 사람이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천추에 명성을 남기게 한다. 사람은 이것이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마왕에게 감사하면서 기꺼이 이 민족과 사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탄과 마왕을 위해 힘쓰는 것이고, 사탄과 마왕의 통치, 지위를 위해 힘쓰는 것이며, 사탄과 마왕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지 않고, 국가와 마왕, 사업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을 위하게 하는 거라며 번지르르한 말을 당당하게 늘어놓지만, 사실 그것은 사탄과 마왕의 통치, 지위를 위해 자신의 일생과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미혹하고 우롱하고 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전통문화가 내놓은 갖가지 논조는 사람에게 실생활 속에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사람의 책임과 본분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전반적인 사회의 틀 속에서, 다시 말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어떤 덕행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덕행의 논조도 인류가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특히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신조이다. 이 신조는 사람에게 민족과 국가, 사회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근면 성실하게 죽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덕행을 갖춘 사람,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며, 모두가 존경할 만한 사람, 자손 대대로 기억할 만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에서 ‘온몸을 바치다’라는 말은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의 본능이나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생각해 보면, 문제는 크지 않다. 이 말은 사람에게 일하고 사업을 대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런 태도는 틀리지 않으며, 정상 인성의 기준에 상대적으로 부합한다. 사람은 일할 때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할 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는 것이다. 정상 인성과 양심, 이성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며, 과하지 않은 요구이다. 그런데 과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죽을 때까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죽을 때까지’에 문제가 있다. 너는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데 그치지 말고 네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죽어서야 끝나는 것이고, 죽기 전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즉, 네 목숨과 인생을 바치되 사심을 갖지 말고 평생 포기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만약 중도에 포기해서 죽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자기가 원할 때 능력 범주 안에서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지만 죽을 때까지 버티지는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다면, 다른 일을 찾거나 쉬면서 몸과 마음을 보양하여 천수를 누린다면, 이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은 좋은 덕행을 갖춘 것이 아니다. 이 기준이 어떠하냐? 올바르냐? (옳지 않습니다.) 이 기준은 분명 정상 인성의 본능과 정상 인성의 마땅한 권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한다.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여태까지 얼마나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어떤 일을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두는 순간, 너는 덕행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반면, 네가 적당히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면, 너는 좋은 덕행을 지닌 사람이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전통문화 중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 기준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겠느냐? 그것이 사람에게 공평하고 인도적이겠느냐? (공평하지도, 인도적이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것은 정상 인성의 범주 안에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이 선택하기를 원치 않으며, 양심과 이성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 기준의 주된 의미는 사람에게 개인의 선택과 바람, 이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네 자질과 재능이 이 사회와 이 인류, 민족, 국가, 통치자에게 봉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마땅히 무조건 복종해야지 다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사회와 민족, 국가를 위해서, 심지어는 통치자를 위해서 죽는 날까지 네 일생을 바쳐야 한다. 네 평생의 사업에 두 번째가 있어서는 안 되며, 어떤 다른 선택지가 있어서도 안 된다. 너는 민족과 인류, 사회, 국가, 나아가 통치자를 위해서만 살아가야 한다. 오직 그것들에 봉사해야지 어떤 개인적인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사심은 더더욱 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네 청춘과 정력을 바쳐야 하며, 나아가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그래야 훌륭한 덕행을 지닌 사람이다. 이 인류가 이런 훌륭한 덕행을 뭐라고 부르느냐? ‘대의’라고 한다. 그럼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는 또 어떤 형태로 전해지느냐? 사람들이 수시로 언급하는 “큰 협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소위 ‘큰 협객’이라면 마땅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과 부모, 아내, 아이, 형제, 자매를 위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기 위한 것이겠느냐? 그런 것을 위한 게 아니다. 반드시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고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의 또 다른 형태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에서,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은 그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논조에 불과하다. 이런 논조로 사람을 유인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를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죽을 때까지 몸 바치는 대상은 누구겠느냐? (국가와 민족입니다.) 그럼 누가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느냐? (통치자입니다.) 그렇다. 통치자이다. 어떤 사람, 어떤 독립된 단체도 국가와 민족을 대표할 수는 없으며, 오직 통치자만이 국가와 민족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가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민족, 통치자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통치자와 마왕을 위해 죽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게 한다. 이 논조가 적용되는 대상은 사회나 이 인류 중 변변찮은 사람이 아니다. 그 대상은 사회와 인류, 국가, 민족, 특히 통치자에게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왕조, 어떤 시기, 어떤 민족에게나 다 특별한 은사와 능력, 재능을 지녀 사회에 ‘판매’되고 통치자에게 이용당하며 추앙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있으며, 또 사회와 민족, 국가, 통치자의 통치 범위 안에서 그 재능과 특기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통치자의 눈에 더 훌륭하게 인류를 통치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보좌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런 사람은 종종 통치자에게 이용당한다. 통치자는 이들이 사사로운 마음은 버리고 큰 뜻만을 품으며, 의협심을 발휘하여 큰 협객이 되기를, 마음속에 오직 국가와 백성만 품으며 언제나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기를,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하면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근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면, 심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고자 한다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한 통치자의 유력한 조력자이며, 나아가 어떤 시기 어떤 민족이나 사회, 심지어 전 인류의 영예로 인정받을 것이다. 만약 어떤 시기,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혹은 소위 ‘큰 협객’이라고 칭할 만한 의사들이 있어 사회와 인류, 국가, 민족, 통치자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다면, 그 시기는 인류에게 찬란한 역사의 시기로 남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큰 협객은 몇이나 되느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굴원, 제갈량, 악비 등이 있습니다.) 중국 역사상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나라와 민족, 백성의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명인들은 실제로 여럿 존재한다. 또 중국 국내외 역사를 보면 정치권에든 민간에든, 정치인이든 협객이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전통문화의 논조를 지킨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를 충실히 지키고 또 국가와 백성을 위하고 걱정하는 사상을 충실히 지켰다. 또 이런 덕행의 논조를 준수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행동할 것을 엄격히 요구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명예를 위해서, 앞으로 누군가가 자신들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문화 사상에 물들고 영향받아서 그런 행위를 보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인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사람에 대한 전통문화의 이런 요구가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적절하지 않으냐?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든, 얼마나 많은 은사와 재능을 지니고 얼마나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든 그의 신분과 본능은 사람의 신분과 본능이며, 그는 이 범주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은사와 자질을 갖췄고, 보통 사람보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명하며, 일 처리 방식과 방법이 좀 더 다양하고 융통성 있고 효율적이고 성과를 낼 뿐이다. 이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그 신분과 지위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이 아무리 영민하고 은사와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영원히 지음 받은 인간의 생존 규칙을 따라야 한다. 개를 예로 들어 보겠다. 크든 작든 뚱뚱하든 말랐든, 무슨 품종이고 나이가 몇 살이든 개는 다른 개를 만났을 때 보통 냄새를 맡아 상대의 성별과 성격, 자신에 대한 태도를 판별한다. 이런 교류 방식은 개의 생존 본능이자 규칙, 법칙으로, 이는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칙 속에서 생존한다. 머리가 아무리 영민하고 학식이 아무리 높아도, 자질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완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큰 사업을 해도 너는 매일 6~8시간은 잠을 자야 하고 세끼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한다.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프고 물을 좀 적게 마시면 목이 마르다. 또 자주 운동을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지고 각종 질병에 걸린다. 이는 정상적인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이 규칙은 누구도 깨뜨리거나 벗어날 수 없다. 이 점에 근거하면, 네 능력이 어떻든, 자질과 재능이 어떻든 너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이다. 네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두어 바퀴 돈다고 해도 결국에는 땅에 떨어질 것이며,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또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하며,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이는 사람의 본능이다. 이 본능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니 너는 영원히 바꿀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네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규칙을 어길 수 없으며, 이 범주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능력이 있든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바뀌지 않고, 피조물의 신분과 지위는 바뀌지 않는다. 설령 네가 인류 가운데서 특별하고 뛰어난 공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너는 여전히 사람이다. 위험을 마주하면 여전히 공포를 느낄 것이고, 당황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이며, 심지어는 대소변을 지릴 것이다. 어째서 그런 모습을 보이겠느냐?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인 이상 너는 사람이 지녀야 하는 이런 모습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자연법칙으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뛰어난 공을 숱하게 세웠다는 이유로 절대 초인이나 이인(異人), 범인이 아닌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너는 정상 인성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것이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국가와 백성을 걱정해야 한다고, 마음속에 온 민족과 국가를 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마음이 넓을수록 무대도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범한 생각을 지녔다는 이유로 절대 비범한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특별한 은사나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인류에게 대단한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평범한 사람과 달라지거나 그들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또 정상 인성의 법칙과 생존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비인도적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범인을 뛰어넘는 재능과 생각,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나아가 범인을 뛰어넘는 일 처리 능력과 사람을 바라보고 통찰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범인보다 어떤 부분이 뛰어날지라도 육으로 사는 한 계속 정상 인성의 생존 규칙과 법칙을 따라야 한다. 반드시 정상 인성의 생존 규칙과 법칙을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비현실적이고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것이 인도적이겠느냐? 이는 그의 인성에 대한 일종의 유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내게 이런 은사와 재능을 주셨으니 나는 범인과 다르다. 또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마음에 천하와 백성, 민족, 국가, 세계를 품어야 한다.” 말해 두겠는데, 마음에 그런 것들을 품는 것은 부담을 더하는 일이다. 그것은 통치 계급과 사탄이 더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마음에 품는 것은 죽음의 길에 오른 것이다. 네가 마음에 천하와 백성, 민족, 국가, 통치자의 이상과 바람을 품고자 한다면 일찍 죽을 것이다. 마음에 그러한 것을 품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화약통이나 화약 포대 속에 두는 것과 같다. 이는 무척 위험한 일로, 아무 의미도 없다. 마음에 이런 것들을 품을 때, 너는 스스로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야 해. 국가와 민족의 대업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기여할 거야. 내 목숨을 이 인류에게 바칠 거라고.’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웅장한 뜻이 가져다주는 것은 요절, 비명횡사, 또는 멸망이다. 보아라. 마음에 천하를 품은 역사 속 명인 중 몇 명이나 제명에 죽었더냐? 어떤 이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어떤 이는 통치자에 의해 극형에 처해지고, 어떤 이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으며, 어떤 이는 밧줄에 목이 졸려 죽었다. 마음에 천하를 품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사람이 국가의 대업과 민족의 부흥, 나라와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고 품을 수 있겠느냐? 마음에 부모나 자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책임과 하늘이 준 사명만 품어도 훌륭하다. 그것으로도 이미 네 책임을 다한 것이다.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거나 큰 협객이 될 필요는 없다. 언제나 마음에 천하와 민족, 국가를 품으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야심이 지나치게 크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다. 네게 그렇게 큰 배포가 있느냐? 야심이 너무 큰 것 아니냐? 네 야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냐? 마음에 그런 것들을 품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누구의 운명을 지배하고 주재할 수 있겠느냐? 너 자신의 운명조차 어쩌지 못하는데 마음에 천하와 민족, 인류를 품으려 하다니, 그것은 사탄의 야심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재능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를 지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고,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또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짓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사랑스럽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련하고 가소로우며, 정말 너무도 어리석다!

사람으로서는 가정에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또 어떤 사회단체나 집단에 있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책임을 다하며 사회의 법률과 규칙, 제도를 지키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되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람이 해야 할 것을 하는 게 적절하다. 가정과 사회, 국가, 국민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칠 필요는 없다. 하나님 집에서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네 본분을 이행하면 그만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온종일 마음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선민, 하나님의 경륜, 3단계 사역, 인류 구원 사역을 품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것들은 품지 않아도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평범한 사람, 하찮은 존재이며, 하나님 손안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네가 지켜야 할 입장과 네 책임은 네 본분을 성실하게 잘 이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네게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게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덕행의 논조는 ‘사람에게 능력과 배포, 의협심이 있으면 마땅히 떨치고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쳐야 하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또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책임을 버리며, 스스로를 이 사회와 인류 가운데 두고 민족의 대업과 국가 부흥의 대업, 전 인류를 구원하는 대업을 짊어져야 한다. 죽을 때까지!’라고 요구한다. 이는 극단적인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극단적인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스스로를 무척 위대하게 생각하게 된다. 특히 특별한 재능이나 큰 야심, 욕망을 지닌 사람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겨 대대손손 명성이 전해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이번 생에 어떤 사업을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전통문화의 관점을 몹시 중시하고 숭상한다. 전통문화가 제시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태산같이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같이 가벼운 죽음도 있다.”라는 말처럼 반드시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태산같이 무거운 죽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소한 이익을 위해 죽는 것도, 범인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죽는 것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죽는 것도, 자연법칙을 따르다가 죽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대업과 민족의 부흥,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또 인류의 흐름을 이끌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인류의 이 비현실적인 생각은 스스로를 첨예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이 좋은 날들을 보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날은 없다. 첨예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순간,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추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과 달라진다. 그는 큰 뜻을 펼치고 대업을 이루고자 하며, 떨치고 일어나 큰일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조금씩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오직 정치계라는 무대만이 사람의 욕망과 야심을 충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정치권은 너무 어둡습니다. 저는 정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지만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강호의 문파에 가담한다. 또 혹자는 “저는 강호의 문파에 가담하지 않고 홀로 다니는 협객이 되겠습니다. 제 특기를 발휘해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탐관오리와 토호, 악질 지주, 악당들을 집중적으로 처단하며, 평범한 민중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가든 다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바른길이 아니다. 사람의 논조가 아무리 사회적 흐름과 민중의 입맛에 맞아도 어쩔 수 없이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인류는 늘 국가와 백성에 대한 걱정, 마음에 천하를 품는 것, 큰 협객, 국가적 대의 등을 추구 목표로 삼아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 “저는 평생 농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면서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저는 평생 소와 양을 치며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 논조를 이런 데다가 쓰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야심과 비현실적인 욕망을 품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말을 쓴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이 훌륭한 말을 이용해 내면의 욕망과 야심을 가리려는 것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는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고, 마음에 천하를 품겠다는 비현실적이고 변태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했다. 이 논조가 얼마나 많은 의인과 지사들을 해쳤는지 모른다.

방금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를 해부했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교제했는데, 전부 이해가 되느냐? (네.) 어쨌든 이제 이 논조가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긍정적이거나 실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그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요구하는 논조가 아니겠느냐? ‘목숨을 빼앗아 가는 논조’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사실 그것은 네 목숨을 빼앗아 간다. 네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평생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는 것이 더없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그런 사람은 배포가 더없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배포가 그렇게 크면 더는 삶의 자질구레한 일을 마음에 담을 수 없게 되고, 배우자와 아이를 돌보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진다. 배포가 그렇게 큰 사람이 가슴에 특별한 것을 품지 않으면 되겠느냐? 가슴에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만 담는다면 너무 속된 것 아니겠느냐? 범인들이 담을 수 없는 것, 즉 민족이나 국가의 대업, 인류의 운명 등을 담아야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사명을 맡기려 한다.”라는 말에 어울릴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사람은 더더욱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는 데 매진하게 되며, 이 덕행 측면의 논조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와 인류의 운명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야 해. 그게 바로 내 필생의 사업이자 추구야.’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결과, 국가와 민족의 위업을 짊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쳐서 피를 토하며,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이 인성이고 무엇이 인정인지 알지 못하며,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증오인지 역시 모른다. 심지어는 국가와 백성을 너무 걱정하다가 눈물마저 말라 버리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국가와 민족의 대업을 놓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는 목숨을 요구하고 빼앗아 가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의 죽음이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이런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허한 사상과 이상을 놓지 못한 채 결국 억울하게 한을 품고 끝을 맞이한다. 어째서 억울하게 한을 품고 끝을 맞이한다고 하겠느냐? 마음속으로 민족과 국가, 인류의 운명, 통치자가 그에게 준 사명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짧은 삶이 안타까운 것이다. 몇천 년 더 살 수 있다면, 이 인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는 평생 마음에 천하를 품고 살다가 마지막에도 그것을 놓지 못하며,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사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니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는 사탄의 미혹과 전통문화의 해악을 받아들여 자신을 구세주로 여겼다. 이것이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너무도 가련하다! 말해 보아라. 지난날, 만약 굴원이 민족의 대의라는 전통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겠느냐?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끝냈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바로 전통문화의 피해자이다. 아직 삶이 마지막 장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었으니 말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갔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지 않았겠느냐? 정상적인 죽음을 맞지 않았겠느냐? 만약 그가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말은 목숨을 빼앗아 가고 요구하는 논조이다. 사람이 이 사상에 물드는 순간, 온종일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근심 걱정으로 죽을 지경이 되어도 현실을 바꿔 놓지 못한다. 이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사상 관점이 목숨을 빼앗아 간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상 관점이 바로 목숨을 빼앗아 가고 요구하는 관점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그 누가 마음에 품을 수 있겠느냐? 그 누가 짊어질 수 있겠느냐? 이는 자기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왜 자기 주제를 모르겠느냐? 사람이 자초한 것이겠느냐? 사람이 주동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느냐? 사실 사람은 피해자이다. 누구에게 해를 입었겠느냐? (사탄이 주입한 사상 관점에 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 사탄에게 해를 입었다. 사탄은 사람에게 그러한 사상을 주입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천하와 백성을 품고,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며, 협객, 의사가 되어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이를 도와줘야 한다. 인류의 운명을 위해 기여하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야지 무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서는 안 된다. 가정에서의 책임이니 사회적 책임이니 하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것은 전부 버러지보다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너는 버러지가 아니며, 참새가 되어서도 안 된다. 마땅히 독수리가 되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야 한다. 큰 뜻을 품어라.” 사람은 이렇게 선동되고 고취되어 머리가 멍해진 채로 ‘그렇고말고! 나는 참새가 될 수 없어. 독수리가 되어서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오를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과, 아무리 노력해도 날아오르지는 못하고 마지막에 힘이 빠져 추락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너는 참새도, 독수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피조물입니다.) 그렇다. 너는 평범한 사람, 평범한 피조물이다. 하루 세끼 중 한 끼를 굶는 것은 괜찮지만, 며칠 동안 굶으면 안 된다. 너는 늙고 병들고 죽게 될,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은 약간의 재능과 은사가 있다고 안하무인격으로 굴며, 사탄에게 선동되고 유혹당하고 종용되고 미혹되어 멍해진 채로 스스로가 정말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거들먹거리며 구세주의 자리에 앉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려고 하고, 사람의 사명과 책임, 의무, 그리고 하나님이 준 가장 귀한 생명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명을 중시하거나 아끼지 않으면서 국가의 대업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마음에 천하를 품고,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려 한다. 이것이 가장 귀한 인격이고 가장 고상한 도덕이라고,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이러한 사상을 주입하여 사람이 피조물의 신분, 평범한 사람의 신분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인 일들을 하도록 미혹하고 부추긴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몰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극단을 향해 간다. 극단을 향해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놓은 본능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죽음의 길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하나님은 인류에게 어떻게 요구하느냐? 사실 무척 간단하다.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면 된다. 하나님은 네게 초인이나 위인이 되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고, 날개를 주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한 적도 없다. 그저 두 팔과 다리를 주어 땅에서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필요할 때는 뛸 수 있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네게 준 오장육부는 음식을 소화하고 흡수하며, 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하루에 세끼를 먹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너에게 자유 의지와 정상 인성의 사유를 주었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을 주었다.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잘 이용하고, 육의 생존 법칙을 따르며, 자신의 몸을 지키고, 하나님이 시킨 일을 착실하게 해서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면 그만이다. 무척 간단하다. 하나님이 네게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하더냐? 자학하라고 요구하더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다. 자학하지 말고 상식을 갖춰 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으며, 몸이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 또 오래 앉아 있었으면 몸을 좀 움직이고, 병이 나면 진료를 받으며, 하루 세끼 식사와 정상 인성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하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업무 지식이 있으면 공부하고 훈련받아야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한 각종 실행 원칙은 전부 정상 인성의 사유가 이를 수 있는 것, 사람이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정상 인성의 범주를 전혀 넘어서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들로, 하나도 비상식적인 것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초인이나 위인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덕행 측면의 논조는 사람에게 한사코 초인이나 위인이 되기를 추구하라고 한다. 국가와 민족의 대업을 짊어지라고 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이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완전히 상반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안전을 지키고, 사람이 시험이나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며, 사람의 목숨을 보호해 준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초인이 되라거나 마음에 천하를 품고 국가와 백성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만물을 주재하고 지배하며, 인류를 주재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척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일에는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마음에 천하와 인류, 국가, 교회, 하나님의 뜻,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대업을 품는 것이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 네가 해야 할 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과 본분, 하나님 집에서 각 시기에 네게 제시한 요구들이 포함된다. 간단하지 않으냐? 실행하기 쉽지 않으냐? 무척 간단하고, 실행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은 늘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스스로를 너무 소중히 여기거나 육을 돌봐서는 안 돼. 고난을 많이 겪어야지. 밤에는 너무 일찍 자지 말아야 하고. 너무 일찍 자면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밤을 새워 가며 본분을 이행해야 된다고.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새벽 두세 시까지는 버텨야 해.’라고 생각하는데, 그 결과 몸이 버티지 못하고 피로로 망가지며, 걷기도 힘든 지경이 된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다가 지쳐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한 결과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특별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매일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테고. 하나님 집에서는 오직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기만 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 죽도록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분 이행에 책임감을 갖고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으며, 대충 건성으로 시간만 때우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다. 몇몇 리더 일꾼은 사람들이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면서 효율을 구하지 않고 시간과 정력만 소모시키는데, 이는 사실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자 어떤 사람들은 몸에 문제가 생겼다. 허리가 안 좋아지고 무릎에도 통증이 생기며, 컴퓨터만 봤다 하면 눈이 침침해지니 어찌 된 것이겠느냐? 이는 누가 초래한 문제겠느냐? (스스로가 초래한 일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밤 10시에 시간 맞춰 자라고 요구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밤 11~12시가 되어야 잠을 청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휴식에도 영향을 준다. 또 어떤 이는 정상적으로 쉬는 사람을 보고 안일을 탐한다고 정죄하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다. 제대로 쉬지 않으면 어떻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에 대해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 무엇이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야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이해하여 늘 극단을 달리면서 다른 사람을 속박하는데,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몇몇 그릇된 부류는 분별력이 전혀 없어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그렇게 밤을 새워야 한다고, 일이 바쁘지 않아도 밤을 새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졸려도 자지 말고, 병이 나도 말하지 말며, 진료는 더더욱 받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진료를 받는 건 너무 시간 낭비고,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서 말이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사람은 왜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황당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냐?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 밤 10시에 시간 맞춰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는 등 반드시 8시간의 수면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이 밖에도 거듭 강조하는데, 업무 외에 남는 시간에는 몸을 관리하고 운동을 하며 음식을 건강하게 규칙적으로 섭취해야 한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 항상 원칙과 규칙을 지키지 않으며 쓸데없이 밤을 새우고 아무거나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몸에 병이 나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니 그때는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다. 최근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원칙 없이 제멋대로 본분을 이행해서 생긴 문제 아니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는 몸의 자연법칙을 어겼다. 법칙을 어겼으니 병이 나기 마련이다. 몸 관리 상식을 몰라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운동할 때는 운동하고, 규칙적으로 식사해야지 폭음하거나 폭식하고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며 편식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 감정 조절을 잘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에 집중하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생길 것이고, 공허하거나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면 사람의 내적 상태는 온전히 정상이 되고 몸도 건강해진다. 나는 너희에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전부 너희 스스로가 규칙적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안배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결국, 그 원인은 사람이 너무 어리석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데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집 안에서 본분을 이행하느라 밖에 나가 햇빛을 쐬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게 되면 운동 기구를 두고 일주일에 한두 번 운동하게 하는데, 이는 인체의 건강 법칙에 부합한다. 적당히 운동하지 않으면 당연히 병이 생기며, 이는 사람의 정상적인 삶에도 영향을 준다. 내가 안배를 한 후 누가 운동을 얼마 만에 한 번씩 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확인할 필요는 없다. 나는 책임을 다했고, 말을 했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알려 주었다. 거기에 거짓은 전혀 없으니 그대로 실행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제대로 듣지 않는다. 자기는 젊고 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 스스로도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니 내가 마음을 졸여 봤자 쓸데없을 것이다. 나중에 병에 걸렸을 때 남을 원망하지나 마라. 사람이 몸 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먼저 그릇된 사상 관점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게으름이라는 치명적인 문제 때문이다. 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는 사실 건강 관리에 유의하고 많이 운동해도 좋아진다. 하지만 나중에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을지언정 지금 당장은 몸을 관리하고 운동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바로 게으름 때문이다. 사람이 게을러서 운동하기 싫어하면 무슨 말을 하든 소용이 없다. 그러다가 결국 병에 걸리면 남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스스로 잘 알 테니 말이다. 매일 정상적인 운동량을 확보해야 한다. 나는 매일 적어도 한두 시간은 산책을 하고, 필요한 운동을 한다. 그러면 체질이 강화되어 쉽게 병에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도 가뿐해진다. 몸을 관리하는 목적은 질병 예방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인체의 정상적인 필요이기도 하다.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어리석게 굴지 말고 식견을 키우라는 것이다. 자기 몸에 미안한 짓을 하지 말고 인체의 자연법칙을 따라야지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 너무 지나치게 육만 돌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원칙은 파악하기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사실 파악하기는 쉽다. 사람의 실행 여부에 달렸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또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이냐? 늘 기상천외하게 굴며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병에 걸리지도, 늙지도 않을 거야. 당연히 죽지도 않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꿈 같은 소리다. 하나님은 그런 초자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에게 약속을 주며,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 하나님께 구원받고 아름다운 종착지에 들어가기를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사람에게 병에 걸리지도, 늙지도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으며,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 또한 하지 않았다. 물론,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식의 요구를 한 적도 없다. 본분을 이행하고 교회 사역을 하는 과정에 사람이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하고, 무엇을 버리고 헌신하며 포기해야 할지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자신의 육적인 삶이나 육적인 필요를 대할 때는 상식을 지녀야지, 몸의 정상적인 필요를 어겨서는 안 되며,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규칙과 법칙을 어겨서도 안 된다. 물론,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상식이기도 하다. 만약 사람이 육적인 필요와 규칙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고, 전혀 상식이 없이 오로지 상상과 관념에만 기대며, 심지어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기 육을 대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릇되게 이해한 것이다. 이런 자질을 갖고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전부 의문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육을 어떻게 대해라고 요구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네게 그 규칙대로 육을 대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니 관념과 상상에 기대지 마라. 알겠느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물들고 영향받아 육을 대하는 법과 정상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한다.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 있는 삶인지 모른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죽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보자.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정상인답게 살아가게 하여 구원받는 기준에 이르게 하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중병이나 암에 걸려 ‘하나님이 나를 죽게 하시는구나. 내게 생명을 바치라고 하시니 순종해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며, 그런 생각을 가진 적도 없다. 이는 전적으로 사람의 오해이다.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느냐? 모든 사람은 정해진 수명까지 살 수 있다. 다만 수명이 다를 뿐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때가 있고, 적당한 시간과 장소가 있다. 이는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으로, 하나님은 그가 정해 놓은 한 사람의 수명과 죽는 장소, 방식에 따라 그 일을 성취하지 그 누구도 어떤 일 때문에 갑자기 죽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삶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며,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죽음, 즉 육적인 생명의 끝 역시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든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든,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본분 이행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위해서 언제라도 생명을 바칠 준비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너는 그런 준비를 할 필요도, 그런 마음을 품을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그런 계획이나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네 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 생명은 본디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이 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생명을 가져다가 어디다 쓰겠느냐? 네 생명이 값어치가 있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값어치의 유무 따위는 말할 것이 못 된다. 그저 너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이 네 생명을 가져가길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가져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자신에게 중요하고, 그의 본분과 의무, 책임, 그리고 하나님이 맡긴 일에 있어 중요하며, 당연히 하나님의 전체 경륜 중 사람이 맡은 역할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네 생명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 어째서겠느냐? 생명을 가져가면 너는 죽은 사람이 되므로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네가 살아 있어야, 하나님이 주재하는 이 인류 가운데서 살아 있어야 네 생명이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고, 네 생명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본분을 다할 수 있다. 네 생명은 이런 형식으로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나님을 위해 죽겠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이 말들을 입에 달고 다니거나 염두에 두거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해 두어서도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늘 하나님을 위해 죽고자 하고, 자신의 본분을 위해 헌신하며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면, 이는 가장 천박한 일이다. 또한, 이는 가장 무가치하며, 경멸받고 버림받을 일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네 생명이 없어진다면, 너는 육이라는 형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데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겠느냐? 만약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하나님은 사역으로 누구를 구원하겠느냐? 구원이 필요한 인류가 없는데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전개되겠느냐?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존재하겠느냐? 계속될 수 있겠느냐?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자기 몸을 잘 관리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 아니겠느냐? 가치 있는 일 아니겠느냐?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위해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함부로 말하면서 죽음을 가볍게 입에 담고, 생명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패역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가장 패역한 사람, 남들에게 경멸받고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함부로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쉽게 자신의 생명을 끝내려 하고,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지 않게 한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 아니겠느냐? 함부로, 너무 쉽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겠느냐? 네 목숨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원할 때 언제든 가져갈 수 있다. 굳이 네가 바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바치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한다면 하나님이 네 사정을 봐주겠느냐? 너와 상의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 목숨을 가져다 어디에 쓰겠느냐?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둔다면 너라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륜에는 한 사람이 줄어드는데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하겠느냐? 정말 기뻐하고 만족할 존재는 누구겠느냐? (사탄입니다.) 네가 목숨을 바친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네 목숨을 가져가면 하나님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득이겠느냐, 실이겠느냐? (실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는 득이 아니라 실이다. 하나님은 네가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생명을 갖고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하는 데 협력하여 길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의(義)이자 네 생명의 존재 가치이고 의미이다. 만약 네 생명이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면, 네가 이것을 위해 건강히 살아가는 거라면, 이는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 진정한 봉헌이자 협력이며, 가장 만족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것은 육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가운데서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이 주입한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을 저버리며,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와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창조주의 권세 아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며,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모습이며, 사람의 생명이 존재하는 가치이자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에게든 죽음은 최종 종착지가 아니며, 생명의 존재 가치나 의미도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 존재하는 것, 자신의 본분을 위해 존재하고 피조물의 본분과 직책을 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사탄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존재 가치이자 생명의 존재 의미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 볼 때, 사람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전통문화의 논조와 완전히 다르다. 사탄은 늘 사람을 죽게 하려고 한다. 사탄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며, 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려고 궁리한다. 사람은 사탄 마왕에게서 전통문화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을 받아들인 후, 늘 국가와 민족, 또는 자신의 사업, 사랑, 가정을 위해 생명을 바치려고 하며, 자기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 언제 어디서나 몸 바쳐 죽을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이 준 생명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 아끼지 않고, 자신의 남은 생과 하나님이 준 생명을 소유한 기간에 자기 본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사탄의 궤변과 헛소리를 받아들여 늘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치려고 하고, 언제라도 하나님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한다. 사실, 네가 정말 죽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위해 죽는 것이며,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할 수 있으며,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함으로써 어떤 여한도 없이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와 주재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생명이 사라지면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제시한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덕행의 논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류의 생명에 대한 우롱이자 유린이다. 사탄은 인류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노리개로 여긴다. 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한 후 이런 사상으로 살아가면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생명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게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이 준 가장 귀한 생명을 함부로 버리는데, 이는 대역무도한 짓이다. 그게 언제이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마지막 기한이 오지 않았다면, 누구도 생명을 버리겠다는 말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며, 네 본분과 창조주가 네게 맡긴 사명, 부탁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어떤 피조물의 생명이든 오직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고, 창조주의 주재와 지배, 안배를 위해 존재하며, 또 오직 창조주의 증거와 창조주의 인류 구원 사역을 위해 존재하고 그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보아라. 인류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관점은 사탄과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인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반면,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인류가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받을 가치도 없으며, 온통 더러움과 패역, 사탄이 주입한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사탄을 숭배하고 따르며 심지어 하나님을 적대시한다고 해도 인류는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고, 인류에게는 하나님이 준 숨결과 생명이 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만이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이 언제나 인류를 돌봐 주고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이 인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준 인류만이 마지막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증거하는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사역하고 일을 맡기고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이는 진실이다. 깨달았느냐? (깨달았습니다.) 그럼 사람은 하나님, 즉 창조주의 뜻을 깨달은 후 자신의 육적인 생존 법칙과 육적인 생존 필요, 육적인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여기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원칙은 무엇에 근거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다. 그럼 그 실행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탄이 주입한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또 사람을 마비시키고 해하고 옭아매는 사탄의 관점들, 예를 들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라는 논조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점을 폭로하고 확실히 인식하여 이런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이 밖에, 적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인류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는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고, 모든 언행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히 실행할 수 있게 되며,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 말로 귀결하는 것이 정확하다.

오늘은 주로 죽음과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해 교제하였다. 사탄은 사람의 생명을 짓밟고 유린하고 빼앗아 가며, 사람에게 어떤 사상과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주입함으로써 사람을 미혹하고 마비시킨다. 이를 통해 사람이 천박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망친다. 말해 보아라.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죽고 싶어 하면서 함부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이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겠느냐? 이 인류가 생존하고 존재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류의 생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귀하게 여겨 아낀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그럼 사람은 하나님의 이 말씀 가운데서 어떤 실행의 길을 얻어야겠느냐? 하나님이 준 가장 귀한 생명과 숨결을 소유하며 살아 있는 동안 진리를 깨닫고자 열심히 추구하고, 하나님의 요구 원칙대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해야지 여한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언젠가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창조주를 증거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생명을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사탄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행사와 사역을 증거할 수 있다면 사람의 생명은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사람의 생명이 가장 빛나는 시기에 이르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얻으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증거할 때, 또 창조주의 주재와 행사, 본질, 신분을 증거할 때, 네 생명의 가치는 정점과 절정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목적과 의미는 너희가 생명의 존재 가치와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 말에 근거하여 네가 가야 할 길을 선택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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