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지금까지 몇 차례의 교제를 통해 누구나 다 아주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은 이제야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하고, 정말로 사람과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처럼 이렇게 참되게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체험했던 적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식 측면에서든 실행 측면에서든 새로운 수확을 거두었고 인식도 어느 정도 높아졌다. 자신이 과거에 그릇되게 추구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사람의 체험이 너무 얕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하나님 성품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이러한 인식은 단지 일부분의 감성적 인식에 불과하며, 이성적 인식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체험 과정에서 조금씩 깊이를 더하고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할 때, 주관적으로 말하면, 사람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하나님이 대체 어떤 하나님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성품은 어떤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떤지 등등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크게 줄어들고, 아무리 해도 순수하고 완벽한 믿음에 이를 수 없게 된다. 설사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한 적이 있을지라도, 혹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한 것 같은 체험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는지, 무엇으로 인해 노하고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 것이다. 너의 믿음은 막연함과 상상, 주관적 소망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진실로 믿고 따르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이런 성경 이야기와 사례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각 단계 사역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행했는지를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했던 당시의 초지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이 그의 생각을 어떻게 실현하고 그의 계획을 어떻게 준비하고 전개해 나가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이 6천 년 경영 사역 기간에 가졌던 모든 구체적인 뜻과 진실한 마음, 그리고 각 시기, 각 시대에 인류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매사에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태도를 보여 주는지, 어떤 성품을 나타내는지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더 잘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실제와 진실성을 더 잘 느끼게 된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는 목적은 사람에게 성경의 역사(歷史)를 이해시키고자 함이 아니고, 성경 구절과 성경 속 인물에 대해 잘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시대 사역의 일부 배경을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면면을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더 실제적이고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조금씩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한층 더 잘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한층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대한 인식은 모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더 커지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순종과 경외심이 생기게 함으로써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숭배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도, 부화뇌동하는 자도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고 인식하여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지도 저버리지도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네가 하나님의 참된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대해 아직도 어렴풋하고 애매모호하고 흐리멍덩하다면 너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앞으로 나오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마음이 닫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에는 불순물이 가득하고,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맹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따를 수 있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과 경외심이 생길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바이다. 그가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검증을 이겨 내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교제하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대해 교제하든, 혹은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에 담긴 뜻과 하나님의 생각에 관해 교제하든, 또한 어느 측면에서 교제하든, 어떤 시각으로 교제하든,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더욱 확신하게 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진실하게 이해하고 체험하게 하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와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더욱 진실하게 이해하고 체험하게 하는 데 있다.

창세 이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행사를 돌아보다

오늘 우리는 먼저 인류 창조 이후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리하고, 창세부터 은혜시대가 정식으로 시작될 때까지 하나님이 어떤 사역들을 행하였는지 간단하게 훑어보면서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를 토대로 하나님의 경륜 절차를 죽 훑어보면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생기게 된 배경, 기원과 발전 과정을 확실하게 알아보고,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 즉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핵심과 근본 취지도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이러한 내용을 알려면, 우리는 아득하고 고요한, 인류가 없던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친히 첫 번째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 첫 번째로 가졌던 생각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 즉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창조하여 그와 함께 생활하고, 그의 동반자가 되어 주며, 그의 곁에 함께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 살아 있는 사람은 그의 말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그와 대화할 수도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으로 친히 흙을 취해 마음속으로 그리던 첫 번째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살아 있는 존재에게 아담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는 처음으로 가족과 동반자가 생긴 즐거움을 느꼈고, 처음으로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느꼈으며, 또 처음으로 염려하는 마음도 느끼게 되었다. 그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위안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처음으로 생각이나 말씀이 아닌, 손으로 친히 행한 일이었다. 그런 생명체,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렇게 뼈와 살이 있고 형상을 갖춘 데다 하나님과 대화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전에 경험해 본 적 없었던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꼈고, 진정으로 자신의 책임감을 느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그 생명체에 대한 염려가 생겼다. 그러면서 또한 그 살아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감화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 생명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그런 사람을 더 많이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는 하나님에게 첫 번째 생각이 들면서부터 생긴 일련의 일들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게는 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행한 그런 일들로 인해 당시에 즐거움을 느꼈든, 책임감을 느꼈든, 아니면 사람에 대한 염려를 느꼈든, 그와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전례 없던 외로움과 슬픔을 진정으로 느꼈다. 그는 사람이 그의 사랑과 염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그가 사람을 위해 일련의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기쁜 와중에도, 사람이 그에게 가져다준 즐거움과 위안은 어느새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슬픔과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당시 하나님의 심정과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일련의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은 즐거움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아픔으로 변했으며, 아울러 초조함까지 어려 있었다. 그에게는 그런 사람, 그런 인류가 더 이상 그의 말씀을 대답 없이 듣기만 하는 사람, 그가 일할 때 어떻게 그와 협력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 더욱이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도 전혀 무관심한 그런 인류가 아니라, 가능한 한 일찍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뜻을 깨달아 그를 따르는 사람, 그와 한마음 한뜻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제일 처음 행한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지금의 인류에게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한 후에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그의 경영을 전개해 나갔고, 또한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기뻐하는 자를 얻으려고 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일련의 첫 번째 사역을 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수로 세상을 멸한 일을 보았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기록에는 노아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노아는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사역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 이 땅에서 그의 분부대로 한 가지 일을 하게 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노아가 방주를 다 만들자, 하나님은 처음으로 홍수로 세상을 멸해 버렸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 인류 창조 이후 처음으로 인류를 그렇게 극도로 증오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런 인류를 홍수로 멸하기로 처음으로 단호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인류와 언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언약은 무지개를 증거로 삼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와 세운 첫 번째 언약이기 때문에 그 무지개 또한 하나님이 사람과 세운 언약의 첫 번째 증거가 되었다. 그 증거는 실물로 존재하며, 그 실물이 바로 무지개인 것이다. 바로 이 무지개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은 항상 윗 세대의 인류를 잃은 아픔을 느끼고, 또한 이 무지개의 존재는 과거에 윗 세대 인류에게 발생했던 일을 하나님께 계속 귀띔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발걸음을 늦추려 하지 않고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계속해서 그다음 단계의 경영을 진행해 나갔다.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사역을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첫 번째 적임자로 택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처음으로 택한 적임자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류 구원 사역을 그 사람에게서 시작하고, 그 사람의 후손 가운데서 자신의 사역을 전개해 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보게 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행한 일이다. 뒤이어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택하고, 이스라엘의 선민 가운데서 그의 율법시대 사역을 전개해 나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또 처음으로 사람이 지켜야 할 조례와 법도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사람이 어떻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절기 혹은 일하는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그렇게 구체적이고 규범적으로 정해 주었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최초로 일상의 규례와 원칙을 그렇게 상세하고 규범적으로 정해 준 것이었다.

‘최초’, ‘처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그러한 사역을 한 적이 없었고, 그 사역이 전대미문의 사역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비록 과거에 인류와 각종 생물과 생명체를 창조한 적은 있을지라도 그런 사역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사역들은 다 사람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사람과 관련된 사역으로, 모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고 경영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후 또 처음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고 의연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욥을 선정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탄에게 사람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사례이자, 처음으로 사탄과 내기를 하여,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사탄에게 치욕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처음으로 얻은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이후 처음으로 얻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얻은 후, 더욱 절실하게 그의 경영을 계속하고, 그가 하려고 했던 다음 단계 사역을 하며, 다음 단계 사역에 적합한 사람과 사역 장소를 예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여기까지 교제하고 나서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진실로 이해하게 된 것이 있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이번 사업을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할 때 그저 생각으로만 하는 것도, 말로만 하는 것도, 더욱이 아무렇게나 하는 것도 아니라, 계획과 목적, 기준을 갖고 그의 뜻을 담아 이 모든 일을 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이번 인류 구원 사역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얼마나 중대한 의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역이 얼마나 어렵든, 이 사역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얼마나 크든, 인류가 얼마나 나약하든, 인류의 패역이 얼마나 깊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의 심혈과 대가를 지불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경영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안배하고, 그가 만들려는 모든 사람과 행하려는 모든 사역을 주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전례 없던 일이다. 하나님은 처음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고 이토록 큰 대가를 치르면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큰 사업을 벌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기울인 심혈과 지불한 대가,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 자신의 지혜와 전능, 자신의 모든 성품을 남김없이 인류에게 조금씩 나타내고, 조금씩 공개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나타내고 공개하는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 우주에서 하나님이 경영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 이외에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고,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그가 경영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인류를 그 무엇보다도 중히 여긴다. 비록 그가 그런 인류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고, 또 그런 인류가 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그를 거역할지라도, 그는 그 어떤 원망도 후회도 없이 여전히 사람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그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언젠가는 그의 말씀의 부르심에 깨어나고, 그의 말씀에 감동을 느끼며, 그가 바로 창조주임을 알게 되어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오늘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이 아주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낀 듯하다. 하지만 사람의 느낌이나 일부 인식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영원히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시 하나님이 왜 인류를 창조하였는지, 또 어떤 배경하에서 그가 바라는 인류를 얻고자 했는지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들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어 누구나 다 확실히 알게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마음과 생각, 하나님의 단계별 시기별 사역은 모두 그의 전체적인 경영 사역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각 단계 사역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의 경륜 사역의 유래를 깨달은 셈이며, 또한 이를 토대로 하나님에 대한 앎도 함께 깊어질 것이다.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하나님이 창세 초기에 했던 모든 일들은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정보’에 불과하고, 사람의 진리 추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네가 체험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말한 것들이 한두 개의 정보에 불과하거나 약간의 비밀에 불과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의 생명이 자랐을 때, 너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자리가 생겼을 때, 혹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너의 이해가 좀 더 분명해지고 깊어졌을 때, 너는 내가 오늘 한 이 말들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는 어느 정도로 이해했든 상관없이, 이 일들을 이해하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일과 사역을 생각으로 하든 몸소 하든, 처음으로 하든 마지막으로 하든,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그의 목적과 생각이 들어 있으며, 그러한 생각과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하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알고 나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말씀하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 더욱 확신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믿음, 이 두 가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해하고 인식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라면, 사람이 얻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이 생명이 네 내면에 만들어지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심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둘 수 있는 성과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면, 심지어 그러한 일들을 따져 볼 생각도, 중요시할 생각도 없다면 내가 분명히 말해 주겠다. 네가 지금의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믿는 것을 추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으며, 진정한 구원은 더더욱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인 결과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새겨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믿음도 생기게 된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새겨보는 과정에서 점차 조금씩 하나님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자신이 하나님과 했던 거래, 하나님께 했던 요구, 혹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욕망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열한 것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너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인지 보게 될 것이며, 네가 그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경지에는 기만도 간사함도 없고, 어둠도 사악함도 없으며, 오직 진실함과 신실함, 광명과 정직함, 그리고 공의로움과 선함만 있을 뿐이며, 사랑과 배려, 긍휼과 관용이 충만하여, 너에게 사는 것의 행복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하나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으로 가득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권병으로 충만하다. 거기에서 너는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왜 기뻐하는지, 왜 근심하는지, 왜 슬퍼하는지, 왜 노하는지 등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만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고,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에 들어와야만 너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볼 수 있으며 너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또한 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얼마나 사랑할 만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반해 네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 심지어 너의 가족, 너의 반려자,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언급할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으며 비천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는 그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위해 더 이상 대가를 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너는 자신을 낮춘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높고 큼과 지고지상함을 보게 되고, 더욱이 네가 예전에 별것 아닌 일로만 생각했던 하나님의 행사에서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와 하나님의 관용, 너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포용과 배려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너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너는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주변 사람과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에 대한 사랑과 이른바 ‘보호’ 혹은 너에 대한 걱정 모두 언급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너의 최고의 사랑이자 최고의 보물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일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하나님의 본질은 참으로 거룩하며, 하나님께는 간사함도, 사악함도, 질투도, 분쟁도 없고, 오로지 공의와 진실함만 있으며,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어떠함을 사모하고 추구하고 동경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이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는 토대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아 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배워야 하는 공과이자, 성품 변화와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모든 이가 평생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성육신하여 사역하다

우리는 방금 하나님이 처음으로 행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더 많은 소유와 어떠함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구약이나 율법시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시작하자, 우리의 발걸음도 그에 따라 은혜시대, 즉 은혜와 구속으로 충만한 시대로 들어갔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또 한 번 처음으로 매우 중요한 일을 행하였다. 새 시대의 그 사역은 하나님께 있어서나 인류에게 있어서나 모두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점은 하나님이 또 처음으로 한 새 사역이며, 그 새 사역은 바로 사람도, 만물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일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과 신분을 지니고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새 사역은 그가 이미 율법시대의 사역을 끝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더 이상 율법 아래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율법의 형식으로, 율법의 원칙과 규례에 맞춰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즉, 율법을 위주로 하는 모든 사역은 영원히 멈추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 새 일을 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또 새로운 시작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도해야만 했다.

그 일이 사람에게 희소식이 될지 흉보가 될지는 사람의 본질에 달렸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 아니라 흉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할 때, 율법의 조문과 규례만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흔히 지난 사역을 가지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흉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은 순수하고 마음이 열린 자,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는 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인류가 생긴 이래, 하나님이 처음으로 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생활했으며, 사람에게서 태어난 인자의 방식과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살면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처음으로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깨뜨렸고, 또 모든 사람의 상상을 넘어섰으며, 아울러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실익’을 안겨 주었다. 하나님은 구시대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의 오래된 사역 방식과 사역 ‘스타일’을 버렸다. 더 이상 그의 사자를 통해 그의 뜻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구름 속에 ‘숨어’ ‘우렛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군림하며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말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전과 완전히 다르게’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식,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 즉 말씀이 육신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그의 그 시대 사역을 펼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에 인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고 난감해했다. 하나님이 또 한 번 전례 없던 새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새 시대에 어떤 새 사역들을 행했으며, 그러한 새 사역들을 통해 우리가 또 하나님의 어떤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알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1) 예수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다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12: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우선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는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런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될 터였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린 상태였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깼으며, 사람에게 그가 더 이상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그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어도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들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며,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하고자 할 때, 즉 그가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할 때, 사람이 지난날의 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새 사역을 가져올 때,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각도, 방식으로 사람에게 나타나고, 사람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는다.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실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이 모시고 절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 반대하고 대적해도 개의치 않는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고,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마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있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며,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진다. 그가 어느 단계의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되며, 또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고,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도였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도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상과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자유라곤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가 뒤따라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하면 안 되며 모레는 이사하면 안 된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과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하나님께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가리킨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이’는 성육신한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 아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말씀은 현재에 적용해도 효과가 있고, 현재 상황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비록 오늘날의 사람과 율법시대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역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의 본성 본질은 같다. 사람은 지금과 같은 사역의 배경하에서도 여전히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비슷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본분 이행을 직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큰 붉은 용과 싸우는 것을 인권 보호로, 자유와 민주 쟁취를 위한 정치 운동으로 여기며, 약간의 기술을 요하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종교적 교리로 간주하여 지키는 등등의 행동을 한다. 사람의 이러한 행동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는 것’과 성격이 같지 않으냐? 다만 2천 년 전의 사람은 형체가 있는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했지만, 오늘날의 사람은 형체가 없는 성전에서 자신의 경영을 할 뿐이다. 규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규례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고, 지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며, 사업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본다. 나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들을 보면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높다고 칭송하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본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일단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거나, 자신의 경영과 사업을 할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을 멀리 버려두고 자신이 열중하는 사업에만 몰두하며,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의 뜻을 일찌감치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2천 년 전 성전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경영을 했던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느냐?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씀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지금 너희는 어쩌면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때의 사람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임을 알려 준다. 비록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 있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 물질들이 너에게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므로 그 어떤 값나가는 물질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네가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다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주겠다. 너는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 음식은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그 자리에 앉아서도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사람의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마음이 매우 급하지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기갈을 느끼지 않겠느냐? 너는 그러한 느낌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 구경을 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거나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너희는 그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마음은 있으나 힘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배부른 한 끼 식사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일시적인 육적 안락과 만족도 아니라,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너의 전 존재가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너희는 이후의 체험 과정에서 내가 오늘 왜 너희에게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사람에게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자, 사람이 한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진리가 너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내적 상태와 결부시킬 수 있느냐? 너는 실생활에서 먼저 자신이 경험한 사람, 일, 사물이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진리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수 있다. 너에게 닥친 일이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도 모른 채 곧장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비교적 맹목적인 행동에 속하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선 너에게 닥친 일들이 어떤 유형의 일인지,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네 체험에 상응하는 진리를 찾은 다음에 그 상응하는 진리에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어떤 규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거나 어떤 공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니며, 규칙도 아니다. 진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며, 살아 있는 것이다. 또한 피조물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칙이자, 사람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법칙이다. 너는 체험 과정에서 이러한 것을 많이 체득해야 한다. 너는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진리를 떠날 수 없다. 네가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현된 것이고, 진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자체가 바로 진리이다. 다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나타내는 것을 진실되게 구현한 것일 뿐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전부 구체화하고 명문화했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하게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증오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더욱 직설적으로 알려 준다. 하나님이 선포한 이런 진리의 이면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하나님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을 통해서도 그 효과에 도달해야 한다. 사람이 실생활 밖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약간의 인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도리와 문자적 의미에 국한될 뿐, 진정한 하나님 자신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내용의 범위는 모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그리고 예전에 일어난 그 일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나님이 일찍이 나타냈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고 더 깊이 있게, 더 다양한 측면에서, 다원적으로 하나님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직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이 한 말씀과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잘 알 수 있고 게다가 더 전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사람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례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이 좀 더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현재 하나님이 선포한 심판과 형벌의 말씀, 진리들을 한 글자, 한 구절씩 분석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면, 너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속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죽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면, 사람은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사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언어로 당시 하나님 마음속에 있던 구체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당시 심정, 즉 정서 혹은 마음과 생각까지 전부 사람에게 알려 주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공식도, 전설도 아니고,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사람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려는 데 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더 광범위하게 알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며, 또한 하나님이 나타낸 이러한 성품들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과 인류에 대한 염려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전부 느꼈으리라 믿는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했던 사역에서, 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육신을 통해 나타나며, 또한 인성을 통해 사람이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은 인자에게서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지니고 사는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신성을 나타내는 모습도 보았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발현된 모습을 통해 사람은 실제적인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반면, 창세 이후부터 율법시대가 끝나는 시점까지, 즉 은혜시대 이전에 사람이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모두 하나님 신성의 일면이었다. 즉, 하나님이 비물질적인 세계에서 행하고 말씀한 것, 사람이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에서 발현된 것들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무 높고 큰 분이라 가까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겨 준 인상은 대부분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도 사람에게 너무 신묘막측해서 도저히 종잡을 수도, 알 방법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묵상하거나 체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모든 것은 아주 요원해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마치 하늘 끝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거나 혹은 하나님의 어느 한 가지 생각을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자 더욱이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일부 구체적인 사역을 하면서 구체적인 말씀을 하고, 구체적인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거나 볼 수 있는 분명한 인식을 갖게 했지만, 그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비물질세계에서 나타낸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사람이 이해하고 알게 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그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념을 줄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상이 여전히 ‘가까이하기 어렵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체’라는 범위에 머물게 했다.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구체적인 물건이나 형상으로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항상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정하여 하나님을 물질화, 인간화하려는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생김새는 어떤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기호와 성격은 어떤지 등등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의 필요 또한 잘 알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한 것이다. 그 방식은 인성으로도 사역하고, 신성으로도 사역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사역한 기간에 사람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았다. 예를 들면, 그가 춤을 추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고,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혹은 어떤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의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예수는 신성을 대표하는 사역도 많이 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역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상적인 육신에 실체화됨으로써 사람은 그를 보거나 만질 수 있었고, 또한 더 이상 하나님을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사람은 인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자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었다.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은혜시대에 예수가 말씀했던 한 가지 비유에 대해 알아보자.

3) 길 잃은 양의 비유

마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비유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여기에서 비유의 표현 방식은 인류 언어에 있는 수사법의 일종으로, 인류의 지식 범주 안의 것이다. 만일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했다면, 사람은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은혜시대에 인자가 한 것이라 사람에게는 아주 편하고 따뜻하며, 친근하게 느껴졌다.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그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다. 이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했던 사역을 대변하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한 태도를 대변했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이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양으로 비유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에게 행한 사역의 한 가지 원칙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로 당시 사역에 대한 결심과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우월함’이다. 즉, 그는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에게 말씀하고, 그의 뜻을 표현할 수 있다. 심오해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하거나 ‘번역’해 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그의 뜻과 그가 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한편, 그는 또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그리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나아가 사람의 언어와 지식으로 말씀하고 사역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을 친근하고 가깝게 대할 수 있는 존재로 느끼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하는 데에 금기가 있느냐?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 사람의 언어나 사람의 대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과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뜻도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를 이용했으며, 사람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진심을 느끼고, 그 기간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았다. 이 비유는 율법 아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또한 대대로 은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사람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 자신이 말한 것이냐,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말씀한 것이냐? 겉으로는 예수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확실히 느끼게 하고, 또한 이 말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이 말을 보충해야 했던 것이다. 비록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고, 예수의 낮춤과 감춤을 드러낸 말이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든, 영계에서 사역하든, 사람의 속마음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보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던 문제, 즉 인자가 하는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말씀을 하면서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전제를 추가해야만 말씀이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사람이 그의 말씀의 정확성을 믿도록 할 수 있었으며, 말씀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가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인자의 처지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의 지위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의 이 말씀은 사실 사람에게 ‘절대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은 내 뜻이 아닌, 너희 마음속에 자리한 그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 것이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 것이었다. 이 말씀이 사람에게 주는 풍자적 의미가 크지 않으냐? 그는 성육신으로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본체에 없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의심받고 버림받는 것을 참아야 했으며, 또한 사람의 무감각과 둔감함을 감내해야 했다. 인자의 사역 과정은 사람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하는 과정이자, 사람의 대항을 경험하는 과정이고, 더욱이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소유와 어떠함과 본질로 끊임없이 사람의 신뢰를 얻고 사람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탄과 실제로 전쟁을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과 대결을 펼쳤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을 통해 인자는 그의 낮춤, 그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그의 사랑과 지혜로써 그의 사역을 완성하였고, 그가 얻고자 한 사람을 얻었으며, 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를 얻어 그의 보좌로 ‘돌아갔다’.

이어서 아래의 두 구절을 보자.

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5)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한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나타내고자 하는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해당 시기에 인자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서 표현하든 그의 목적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고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울러 더 많은 경우에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의 목적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이 말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고,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또한, 이 비유로 사람은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말씀을 할 때의 위치와 배경을 사람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성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 상상이나 사람이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또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그의 태도를 전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직접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형식 면에서도 율법시대를 뛰어넘는다.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피라.’라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더없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사귀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 이 단계의 사역과 유사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적인 측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면 인간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한 때는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했을 때 성장 과정에서 인성으로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며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은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현실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그때는 인자가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使者)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 가운데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모두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까지 전부 살해당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공급하고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육신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났기에, 하나님이 느낀 위안은 실로 참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이룰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더욱이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 행운이자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거둔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해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막힘없이 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결말을 보았으며,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겠느냐?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되겠느냐? 그 노래는 어떤 노래여야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심정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느냐?

이어서 아래의 구절을 읽어 보자.

6) 산상수훈

복에 대하여(마 5:3~12)

빛과 소금에 대하여(마 5:13~16)

율법에 대하여(마 5:17~20)

노에 대하여(마 5:21~26)

간음에 대하여(마 5:27~30)

이혼에 대하여(마 5:31~32)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보복에 대하여(마 5:38~42)

원수 사랑에 대하여(마 5:43~48)

구제에 대하여(마 6:1~4)

기도에 대하여(마 6:5~8)

7) 예수의 비유

씨 뿌리는 비유(마 13:1~9)

가라지 비유(마 13:24~30)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누룩 비유(마 13:33)

가라지 비유 설명(마 13:36~43)

보화를 감추는 비유(마 13:44)

진주를 찾는 비유(마 13:45~46)

그물을 치는 비유(마 13:47~50)

8) 계명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선 ‘산상수훈’에 포함된 항목들을 보자. 이 내용들은 모두 무엇과 관련 있느냐? 확실히 이 내용들은 율법시대의 규례보다 훨씬 수준 높고 구체적이며 사람의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다. 지금 말로 하자면, 사람의 실제 실행에 더 가까운 셈이다.

아래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너의 ‘복’에 대한 인식, ‘율법’에 대한 인식, ‘노’에 대한 정의, 간음한 자를 대하는 태도, 사람이 이혼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이혼에 대한 언급과 규정, 맹세, 보복, 원수를 사랑하는 것, 구제 등에 대한 것들이 있다. 이런 내용들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실천해야 하는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 일부 내용은 현시대에 가져와도 적용할 수 있지만, 현재 사람에 대한 요구와 비교하면 다소 얕은 수준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접하게 되는 비교적 기초적인 진리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의 생명 성품과 관련된 사역에 착수했지만, 이는 율법에 기반을 둔 사역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이나 규제가 진리와 관계가 없겠느냐? 물론 관계있다! 이전의 규례든 원칙이든 아니면 은혜시대의 수훈이든 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과 관련이 있고 당연히 전부 진리와 연관된다. 하나님이 무엇을 선포하든, 어떤 방식과 언어로 선포하든, 그 기초와 근원, 그리고 출발점은 모두 그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이 현재 시각으로 볼 때 다소 깊이가 얕을지라도 진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훈 중에 하나라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조항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어떤 조항이든 다 진리이다. 어떤 조항이든 모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람됨의 원칙과 범위로,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저 당시 사람의 생명으로는 그런 것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사람의 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예수는 단지 이 정도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이 정도 범위 안에서 이렇듯 깊지 않은 교훈을 통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과 범위 안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살던 사람들로선 이러한 도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예수가 전한 도 역시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어서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각 내용을 보자.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인데, 씨를 뿌리는 것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가라지의 비유이다. 농작물을 심어 본 자나 성인이라면 가라지가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세 번째는 겨자씨의 비유이다. 겨자가 무엇인지는 너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보도록 해라. 네 번째는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이 누룩은 일상생활에서 발효에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그 아래의 여섯 번째는 보화를 감추는 비유이고, 일곱 번째는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는 그물을 치는 비유이다. 이 모든 비유의 소재는 사람의 생활에서 취했으며, 모두 사람의 실생활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비유는 사람에게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정상인이 되어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생활상의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과 소통하며,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사람의 다양한 생활 방식을 직접 보고 겪었으며, 이 생활 체험들은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가 되어 주었다. 물론,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기도 했다. 그는 사람에게 진리와 하나님 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할 때, 위의 몇 가지 비유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주었다. 이러한 비유는 다 사람의 생활과 관련이 있으며, 이와 동떨어진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농부가 씨 뿌리는 모습을 보았고, 가라지와 누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사람이 보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에 보화를 감추는 비유와 보물을 찾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예수는 평소 고기 잡는 사람들이 그물을 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예수는 이렇게 인류의 생활과 관련된 행위들을 직접 보았고, 또 그러한 생활을 체험했으며, 모든 정상인처럼 하루 세 끼 먹으며 일하고 쉬는 등 평범한 사람의 삶을 체험하고, 타인의 생활도 직접 목격했다. 이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고 보며 예수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삶을 살지, 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갈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실제 생활을 경험하며 예수는 삶의 고단함을 보았다. 인류가 사탄의 패괴하에서의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사는 삶과 죄 가운데서 사는 삶의 고단함과 비참함을 보았다. 그는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경험하는 동시에, 패괴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몸소 느꼈다. 또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가 사탄과 죄악에 의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참상을 보고 느꼈다. 예수는 이러한 것들을 신성으로 보았느냐, 아니면 인성으로 보았느냐? 예수의 인성은 매우 실제적으로 존재했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본질, 즉 신성으로도 보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자신, 그러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직접 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본 예수는, 그때 성육신으로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육신에서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가 직면할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서 무기력한 인류를 볼 때마다, 율법 아래에서 불쌍히 살며 힘없이 발버둥 치는 인류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아파 왔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마음은 더 절박해졌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든,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되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짊어질 부탁이 무엇인지 갈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담당할 사역, 즉 사람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하는 사역을 한시바삐 완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게 하고, 하나님도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더는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키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쳐 희생하길 원했으며, 또한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하루빨리 그 사역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인류의 삶의 참상을 본 그는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더 빨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게 될지, 얼마나 큰 굴욕을 참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자신을 바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 제물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며, 죄 속에서 살아가고 생존하던 인류의 처지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는 신념뿐이었다. 그의 신념과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다 인류의 구원과 관계가 있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다음 단계의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그는 육신에서 사는 성육신 하나님으로서 정상 인성이 있었고, 정상인이 지닌 감정과 이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류의 삶을 보았을 때, 그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공급하거나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오직 그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목격하고 체험한 후, 인류를 죄 가운데서 헤매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아주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 소망을 위해, 그는 자신이 하루빨리 십자가로 나아가 인류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할 때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인류에 대한 성육신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과 드러난 성품은 평범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더냐?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서 살면 무엇을 보겠느냐?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 모든 것에 맞닥뜨리면,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다! 비록 성육신 하나님이 겉으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또 사람의 지식을 배우고 사람의 언어를 쓰며, 심지어는 사람의 방식과 화법을 빌려 그의 뜻을 표현할 때가 있다고 해도, 그가 인류를 대하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패괴된 인류와 결코 같지 않다. 게다가 그가 서 있는 위치와 차원은 패괴된 인류 중 누구도 닿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진리이므로 그가 입고 있는 육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생각과 인성이 나타내는 것 역시 전부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육신이 선포하는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며, 이는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공급이다. 패괴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관련된 몇몇 사람만을 마음에 수용할 수 있고,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이도 단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자기 집의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만을 생각한다. 비교적 ‘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도 고작 어느 친척이나 친한 친구를 생각할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를 떠올릴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의 위치와 차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패괴된 인류와 완전히 다르다. 그 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보잘것없어 보여도, 심지어 사람에게 아무리 멸시를 당해도, 그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태도는 그 어떤 사람도 갖출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신성의 위치에서, 창조주의 차원에서 인류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마음으로 인류를 대한다.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의 차원이나 패괴된 사람의 관점으로 인류를 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의 안목으로, 사람의 지식과 규칙, 학설 등을 평가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이런 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고 패괴된 인류가 이를 수 있는 범주이다. 반면, 하나님이 인류를 볼 때는 하나님의 시각과 본질, 소유와 어떠함을 평가 기준으로 삼으며, 이 범주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패괴된 인류의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 차이는 각자의 본질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이고, 본질의 차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차원을 결정한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발현을 보지 못했느냐? 예수가 행하고 말씀한 것들은 다 그의 직분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련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 본질의 선포와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설사 그에게서 얼마간 인성적인 면이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의 신적 본질과 발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인성적인 면이 정말 인성의 발현이겠느냐? 패괴된 인류가 드러내는 인성은 그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다. 그가 진짜 패괴된 인류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신성의 위치에서 인류의 죄악된 삶을 대하겠느냐? 단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이다. 패괴된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 살고 있어서 죄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누구나 그렇다. 마치 돼지가 진흙탕 속에서 살면서 불편함을 전혀 못 느끼는 것과 같다. 돼지는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잘 먹고 편히 잔다. 돼지우리를 깨끗이 청소해 주면, 돼지는 오히려 불편해하며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는 또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더없이 자유롭게 살 것이다. 돼지 자체가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때, 돼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더러운 동물이다. 그래서 아무도 돼지를 집 안에 두고 기르지 않는다. 사람이 돼지를 보고 대할 때의 느낌과 돼지가 자신에게 가지는 느낌은 영원히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사람과 돼지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육신한 인자와 패괴된 사람 역시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만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류와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육신이 받은 고난은 어떤 것이었겠느냐?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겠느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의 본질을 몰라 항상 그를 사람처럼 대함으로써 서글프고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그 고통이 실로 너무 크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은 무고하고 죄가 없음에도 사람과 똑같이 고통받고, 사람과 함께 박해와 비방, 수모를 당하며, 아울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오해와 패역도 참아 내야 했으니 그 고통은 정말이지 헤아릴 수도 없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너희가 말하는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 있어서 진정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진정한 고통은 무엇이겠느냐? 육신을 입은 하나님에게는 무엇이 진정한 고통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마치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기간에 인류에게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하고, 늘 이렇게 자신을 낮춰 보잘것없는 육신에 은밀히 거하니 매우 괴로우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심지어는 종종 이를 소소하게 찬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다르고 거리가 멀다. 너희에게 사실을 말해 주겠다. 하나님의 영이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든, 하나님에게 있어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단지 성육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말해 보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평범한 정상인이 되었을 때, 그는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생활한다. 그럼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보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는 그러한 생존 방식과 법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혐오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왜 혐오하겠느냐? 인류의 생존 방식, 법칙은 무엇이더냐?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더냐? 무엇을 근거로 삼았더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 모든 것은 사탄의 논리와 지식, 철학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생존 법칙 아래 있는 인류에게는 인성도, 진리도 없으며, 전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의 본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정반대이다. 그의 본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함 등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충만하다. 이러한 본질을 갖춘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살아가니 그 심정이 어떠하겠느냐?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고통스러운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보고 듣고 접하고 체험하며 대면한 것들은 모두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 즉, 그는 패괴된 인류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패괴가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그와 공통된 언어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겠느냐? 인류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고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으냐? 게다가 사람이 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모두 죄, 그리고 사악한 시류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대할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느냐? 이러한 일을 대하는데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느냐?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와 함께 생활하는 자들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이러한 고통이 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신경을 쓴 적이 있느냐? 누가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냉대와 무감각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어떤 이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있어 사람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 받은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말 그러하더냐? 하나님은 이를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번도 육신이 받은 고통 때문에 불평이나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없으며, 사람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사람의 모든 것, 즉 패괴된 삶과 사악함, 사탄에게 통제받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이 모든 죄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인류에 대한 혐오는 날로 커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참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은 크나큰 고통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발현되지 못했고,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위로해 보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 계속해서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본질 때문에 인류의 사악함과 패괴와 죄악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고,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육신은 이로 인해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을 너희는 보았느냐? 분명 너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는 누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이어서 아래 구절을 보자.

9)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1)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요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2)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요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가 행한 이적과 기사 중에서 이 두 가지만 골랐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적과 기사이며,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대표적인 두 가지 이적과 기사이다.

먼저 첫 번째 구절,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를 보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개념이냐? 보통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느냐? 일반인의 식사량으로 계산해 본다면, 기껏해야 두 사람이 먹기 충분한 양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에게 주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몇 사람에게 나눠 주었느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해 오천이라는 수는 너무 많지 않으냐? 수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봤을 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숫자의 차이는 너무 커서, 한 사람당 한 입만 먹는다 쳐도 오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는 이적과 기사를 하나 행하였다. 그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을 뿐만 아니라 여분까지 있게 하였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라는 성경 기록처럼 말이다. 이 이적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았고, 하나님은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전능하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는데, 만일 음식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없었을까? 당연히 가능했다! 이것은 이적과 기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그 기묘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결코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 평범한 일이라면 왜 여기서 굳이 설명하고 있겠느냐? 그것은 이 기적의 뒤에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오천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보자. 그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더냐? 성경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겠느냐? 분명 알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부는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고, 일부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거나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문으로 알게 된 예수에 대해 단지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를 따른다고 할 수는 없었고, 더욱이 잘 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예수가 이 오천 명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저 배부르게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는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면서 예수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배만 채우려 하는 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겠느냐? 여기서 예수의 마음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 및 본질과 관련된다. 한 끼 배불리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한 오천 명 앞에서, 예수는 그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은혜를 내려 주고 싶었을 뿐, 결코 이 오천 명이 그를 따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이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좇아 왔으며, 원하는 것은 배를 채우는 것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기적을 보기 좋아하는 오천 명의 눈을 열어 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한 것이다. 예수는 실제 사건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오천 명이 그저 배불리 먹기만 바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상대로 어떤 말씀도, 설교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기만 했다. 그는 결코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처럼 그 사람들을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그의 주재하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시야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면, 필요하다 느낄 경우 누구든 그의 은혜를 누리게 한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떡과 물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예수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받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었다. 혹자는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데는 원칙이 있어, 믿지 않는 사람은 보살펴 주지도 지켜 주지도 않으며, 은혜를 내려 주는 일은 더더욱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그가 만든 살아 있는 피조물이기만 하면 누구든 관리하고 보살펴 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안배하며 주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이다.

떡과 물고기를 먹은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들과 따지지 않았다. 배불리 먹이고 난 후,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너희는 아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설교라도 했더냐?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는 어디로 갔더냐? 성경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기적을 행한 후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들에게 뭔가 요구라도 했더냐? 그들을 증오했더냐? 그런 일은 없었다. 예수는 절대 자신을 따를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그는 인류의 타락함을 보았고, 인류가 그를 저버렸다고 느껴 마음이 아팠다. 또한, 그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과 함께할 때 느낀 인류의 우둔함과 무지함은 그의 마음을 아주 슬프고 힘들게 했다. 그래서 그는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어 했다.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더 상대하는 것도, 나아가 그들에게 정성을 쏟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는 다만 그들을 선대하며 은혜를 베풀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그들을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발현하여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으며, 인자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해 주었다.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하든, 어떠한 결과가 생기든 그는 창조주의 신분으로 모든 피조물을 대했으며, 그에게서 발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일을 하고 나서 또 조용히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측면의 성품이겠느냐?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게는 사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할 수 없다! 본질을 보았을 때,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오천 명은 어떤 사람들이더냐?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모두가 하나님께 적대적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절대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의 본질은 확실히 하나님께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적대감을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 버렸다. 이 방식이 바로 ‘선대’다. 즉,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봤을지라도, 하나님 눈에 그들은 여전히 피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죄인들을 선대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이다. 이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태도를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을 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과 염려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류에게 들인 정성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너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표현이 무엇이겠느냐? 누군가는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박애’라고 한다. 이 두 표현 중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적합하지 못하다. 이 말은 보통 가슴이 넓고 정이 많은 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나는 이 표현을 아주 혐오한다. 이 표현은 대상도 가리지 않고 원칙 없이 무턱대고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리석고 멍청한 자들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피치 못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들어갈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더 적절한 표현이 두 가지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첫 번째 표현은 ‘더없이 크다’이다. 이 표현에는 시적인 느낌이 있지 않으냐? 두 번째 표현은 ‘광대하다’이다. 내가 이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는 실제적 의미가 담겨 있다. ‘더없이 크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데, 이 실물은 아무리 커도 사람이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분명 존재하기에,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확실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줄 수 있다. 이차원적으로 보나 삼차원적으로 보나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상상할 필요가 없다. ‘더없이 크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는 해도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만물이 함께 누리고, 또 모든 피조물이 다방면적으로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만물이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자양분을 얻어 살아가고, 만물의 생존이 하나님 사랑의 면면을 나타내며, 시시각각 누리는 그 사랑을 헤아리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반면 측량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자양분을 주고 공급하는 비밀을 사람이 가늠하기 어렵고,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 특히 인류를 대하는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창조주가 친히 만든 인류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쏟았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크다’라고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크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해하며, ‘창조주’라는 말의 실제 함의를 더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피조물’이라는 호칭의 진정한 의미까지 깊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대하다’라는 표현은 보통 무엇을 묘사하느냐? 큰 바다, 우주 등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광대한 우주, 광대한 바다 등이 있다. 사람은 우주의 광활함과 심오함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끝없이 상상하고 우러러보지만, 그 오묘함과 심오함에 대해 바라만 볼 뿐 닿을 수는 없다. 바다를 생각할 때, 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광활함을 떠올리고, 그 신비함과 포용력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광대하다’라고 묘사한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과 깊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사랑의 능력이 무한하고 광대함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존엄과 거스를 수 없음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이제 너희는 내가 ‘광대하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크다’와 ‘광대하다’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묘사해도 손색이 없지 않겠느냐? 전혀 손색이 없다! 인류의 언어 가운데 오직 이 두 표현만이 가장 적절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비교적 근접하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다면, 이 두 표현을 사용했겠느냐? 분명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너희가 이해하고 체험한 것은 아직 입체적인 공간의 차원에는 오르지 못하고 단지 평면적인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표현이 궁색해지고 심지어는 알맞은 말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한 두 표현에 대해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너희가 체험하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고, 범위도 좁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께는 사심이 없다고 말했더니 너희는 그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겠느냐? 이는 너무 협소한 범위 아니겠느냐? 너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첫 번째 이적과 기사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보았다. 몇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이야기들은 간단한 줄거리로 간단한 현상들만 알게 해 주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았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며,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낼 때, 마음의 소리도 함께 표현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가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 그를 알고 그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이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그와 협력해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행했던 이런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무언의 표현이다.

이어서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라는 구절을 보자.

너희는 이 구절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예수가 행한 이 이적과 기사는 위에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죽은 자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이적과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그 시대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이 성육신했기에 사람은 그의 겉모습과 실제적이고 미미한 면만 보았다. 설령 예수의 성격을 좀 알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본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본질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이는 전부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사로의 사건을 증명하고 사실의 진상을 알고자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에게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특정한 행사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본질을 증명할 수 있지만, 두서없이 일하는 법은 없으며, 매사에 계획과 절차가 있다. 그저 합당한 시기와 기회를 찾아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함으로써 사람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그의 권병과 신분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성경 구절을 보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 나오는데” 예수는 이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 한마디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예수는 제단을 쌓지도 않았고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이것을 이적과 기사라고 해야겠느냐, 아니면 명령이라고 해야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술법이라고 해야겠느냐? 겉으로 보면 이적과 기사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 시대에 적용해도 이적과 기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혼을 부르는 술법이라고는 할 수 없고, 사악한 요술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 이적과 기사는 창조주의 권병이 드러낸 매우 평이하고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병이자 능력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 권병이 있고, 그 영이 육을 떠나 저승으로도, 혹은 마땅히 가야 할 다른 곳으로도 가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언제 죽고, 죽은 뒤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며, 사람과 일, 사물이나 공간적, 지리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만물과 생령은 다 그의 주재하에 있기 때문이다. 만물 또한 그의 말씀과 권병으로 인해 생겨나고 살아가며 또한 소멸한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 역시 그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이 지닌 권병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목적은, 바로 사람의 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사람과 사탄에게 증명해 보이고, 알려 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성육신해서도 변함없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물질세계와 볼 수 없는 영계까지 주관한다는 것을, 사람의 모든 것은 결코 사탄의 주관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지닌 권병의 표출이자 발현이며, 또한 하나님이 인류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만물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방식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방식이자, 그의 능력과 권병으로 인류에게 가르쳐 주고 공급해 주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또한, 비언어적 형태로 인류에게 창조주가 만물을 주관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방식이자, 창조주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그의 실제 행사를 통해 알려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무언의 방식으로 인류에게 준 가르침은 영구적이고 영원불멸한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마음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놀라움과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이 사건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일을 잘 아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깨달음과 이상(異象)을 확고히 해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러한 권병이 있을지라도,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인류의 생사를 주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지라도, 이는 결코 그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의미 없는 일을 행한 적이 없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더없이 가치 있는 최고의 보물들이었다. 그는 절대 ‘사람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유일하고 주된 사역 목표나 항목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병을 나타내기에 충분했고, 예수의 신분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반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일을 한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본업에 힘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취지를 벗어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현 단계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무엇을 이뤄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엄격하게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을 한다. 만일 패괴된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춘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을 알리려고 능력을 과시할 것이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어 다른 이를 통제하고 집어삼키려는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이는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함으로, 패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성품도, 본질도 없다. 그가 일하는 목적은 과시가 아니라 사람을 더 많이 깨우치고 이끌어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성경 속에 이러한 사례는 아주 적다. 사례가 적다고 해서 예수의 능력이 유한하거나 그가 행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전혀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일은 아주 실제적인 의미가 있으며, 성육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기적을 보이거나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가르침과 공급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역을 더 많이 행하였다.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일은 예수가 직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인 아주 작은 단편적 사건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본질 속에 ‘과시’라는 요소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지 않은 것은 일부러 자제하거나 환경적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며,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 때, 예수는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한마디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마디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말씀으로 이루었다. 즉, 명령의 말씀에 의해, 권병의 말씀에 의해 만물이 그렇게 생겨났고 일들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한 말씀처럼 하나님 자신의 권병과 창조주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온 권병이며, 그 권병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서 나타나고 육신에 실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권병과 능력은 창조주에게 속하며, 창조주가 실체화한 인자에게 속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실을 통해 사람을 가르쳐 알게 한 내용이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10)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의 판단

막 3:21~22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11) 예수가 바리새인을 꾸짖다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함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만은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말로써 인자를 거스르는 것은 사함 받을 수 있으나 말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것만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

마 23:13~15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희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고 가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벌을 받으리라)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으려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게 되면 너희보다 배나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도다”

위의 두 부분의 말씀에는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의 판단’이라는 첫 번째 내용을 보자.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은 예수와 그가 행한 일에 대해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막 3:21~22)라고 평가했다. 예수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판단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거나 터무니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사를 직접 보고 듣고 내린 결론이다. 비록 그들이 정의를 견지한다는 간판을 내걸어 그 결론에 근거와 이유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졌을지라도, 예수를 판단하는 그들의 위세는 그들 스스로도 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고만장했다. 예수를 증오하는 그들의 광기 어린 기세는 그들의 야심과 그들이 지닌 사악한 사탄의 몰골,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악독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들이 예수를 판단한 그런 말들은 바로 그들의 야심과 질투, 그리고 진리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추하고 악독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행한 일의 근원, 예수의 말씀과 행사의 본질을 살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미친 듯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예수의 모든 행사를 공격하고 비방했다. 심지어 예수의 그 영, 즉 성령이자 하나님의 영을 함부로 비방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입에서 나온 ‘그가 미쳤다’, ‘바알세불’, ‘귀신의 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알세불과 귀신의 왕이라 하고,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의 사역을 미쳤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알세불과 귀신의 왕이라고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정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모독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본질은 사탄, 악마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본질과 완전히 같다. 그들은 패괴된 인류를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사탄의 화신을 대변했다. 그들은 인류 가운데 있는 사탄의 출구이자 사탄의 공범자이며 심부름꾼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비방하는 본질은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고 하나님과 맞서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본질,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그들의 태도, 그들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들은 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 그들의 행위를 성령 모독죄로 정했다. 그 죄는 다음 성경 구절과 같이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사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만은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 “말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것만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한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구절에 내포된 실제 의미에 대해 말해 보자. 즉,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현하는지 그 비밀을 밝혀 보자.

우리가 나눈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 있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관련 있다. 위의 두 성경 구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두 구절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혹자는 하나님의 노를 보았다고 말한다. 혹자는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면 사함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보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이 두 구절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태도와 처리 방식이 담겨 있다. 이 태도와 처리 방식이 바로 “말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것만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했을 때, 즉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은 결론을 하나 내놓았고, 그 결론이 바로 하나님이 준 결과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함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만은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마 12:31), “위선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마 23:13) 그러나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한 후,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를 미쳤다고 말한 자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에 기록이 있느냐? 그들이 무슨 벌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느냐? 단언하건대 없다. 여기서 ‘없다’라고 한 것은 기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상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결말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없다’라는 말은 어떤 일들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원칙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그를 모독한 자, 그를 대적한 자, 심지어 그를 비방한 자, 그리고 고의로 그를 공격하고 훼방하고 경멸한 자들을 대함에 있어, 못 본 척, 못 들은 척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증오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했으며, 나아가 공개적으로 그들의 결말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모독하는 자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한 것이다. 또한, 그가 장차 그런 자들의 결말을 어떻게 결정지을지에 대해서도 알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마친 후, 실제로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사람이 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한, 사람은 그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나 결정의 원칙을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을 처리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태도를 거의 볼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일을 행하는 원칙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실제로 닥치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다시 말해, 죄를 선포하거나 결말을 정하지 않고 실제로 닥치는 일을 통해 직접 벌하거나 악행에 대한 보응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닥치는 일을 통해 주는 그러한 벌은 사람의 육체를 대상으로 하며,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자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말씀으로 저주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한다. 그들이 받는 벌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결말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벌이나 죽임을 당하는 결말보다 훨씬 더 엄중하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구원하지 않고, 그들에게 더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지 않으며,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겠다고 뜻을 결정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방임’의 의미는 무엇이냐? 이 단어 자체의 의미는 우선 한쪽으로 제쳐 놓고 상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 ‘방임’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사탄이 처리하도록 넘겨주어 하나님이 더 이상 책임지거나 관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자가 미치거나, 실성하거나, 멍청해지거나, 살거나, 죽거나 혹은 지옥으로 떨어져 벌을 받아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다는 의미다. 이는 그 피조물이 창조주와 완전히 무관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그러한 자들에게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뜻을 정하는 경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봉사를 이용할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부각물로 쓸 수도 있으며, 또는 그런 사람에게 특별한 처리 방식이나 대응 방식을 취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런 부류에 대해 정한 처리 원칙이자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비방하고 모독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건드릴 경우 그 결과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영원히 사탄에게 넘겨주어 영원토록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사탄의 먹잇감이자 노리개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욥이 사탄에게 시험당할 때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게 한 상황에서도 욥은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 하물며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져 장악된 자, 하나님의 보살핌과 긍휼, 창조주의 주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창조주를 경배할 권리와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피조물이 될 권리를 빼앗겨 창조주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긴 자가 받게 될 사탄의 박해는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지 않겠느냐? 욥에 대한 사탄의 박해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 사람의 목숨마저 사탄에게 넘겨준다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나 나귀로 환생하고, 어떤 사람은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에 사로잡히거나 빙의되는 등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사탄에게 넘겨진 후, 일부 사람들이 맞게 될 결말과 말로이다. 외적으로 볼 때, 당시 예수를 비방하고 훼방하고 정죄하고 모독했던 자들은 어떤 결과도 감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모두 처리하는 태도가 있다. 하나님이 각 부류 사람의 결말에 대해 모두 명확한 말씀으로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으로 말씀하기보다는 직접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말씀이 없다고 해서 결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쩌면 그런 경우의 결말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겉으로 볼 때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말씀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태도를 밝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그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어 하지도,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의 모든 행동, 본성 본질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고, 그를 직접 사탄에게 넘겨주며, 그의 영, 혼, 육을 모두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싶을 뿐이다. 그런 자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혐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누군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더는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만들고, 그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그를 직접 처리하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가 되고, 사탄이 통제하고 삼키고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사탄에게 넘겨줄 정도가 된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끝난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영원히 잃고, 피조물로서의 자격도 다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한 벌이 아니겠느냐?

이상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도 다음 세상에서도 절대 사함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자, 이 성경 말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제 이해가 되었느냐!

이어서 아래의 구절을 읽어 보자.

12)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요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1:16~17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기록은 예수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했던 일과 말씀이다. 우선, 부활한 후의 예수와 이전의 예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그는 여전히 이전의 예수였느냐? 성경에서는 부활한 후의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 이때의 예수는 더 이상 육신이 아닌 영체였다. 육신의 제약을 초월했기에 문이 닫혔어도 사람들 가운데 올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를 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와 육신에서 살았던 예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비록 이때의 영체와 이전의 예수 사이에 형상의 차이는 없었지만, 이때의 예수는 사람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죽음에서 부활해 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체는 이전의 육신보다 훨씬 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의문스러운 존재였다. 동시에 사람은 예수에 대해 더 큰 거리감을 느꼈고, 신비하고 예측 불가한 존재라 여겼다. 이런 인식과 느낌은 사람을 모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던 과거 시대로 데려갔다. 그러므로 부활한 후의 예수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게 하고, 또 그의 존재와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을 입증하며, 이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그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시기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와 사람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과 예수가 인류를 구속한 사역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을 터였다. 한편, 부활한 예수가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났다는 이 사실은, 사람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은혜시대에 자리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은 예수가 ‘사라지거나’ 혹은 ‘말없이 떠났다고’ 해서 지난 시대, 즉 율법시대로 퇴보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은혜시대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율법 아래 있던 인류도 이때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원에 진입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사건이 지닌 다양한 의미이다.

그는 영체였는데 어떻게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었겠느냐? 이는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의의와 관련이 있다. 이 구절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보통 영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게다가 예수가 부활했을 때는 그가 맡은 사역을 이미 완수한 후였다. 이론적으로 볼 때, 예수가 원래의 형상으로 다시 사람들 가운데 와 그들을 만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영체가 도마와 같은 사람에게 나타남으로써, 그 현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도마에게 나타났을 때, 예수는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을 만지게 하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했다. 이는 예수가 부활한 후에 말하거나 행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말하거나 행하려고 했던 일이다. 도마의 의심은 그때에야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기간에도 줄곧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도마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겠느냐?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는 본질이 변하지 않은 원래의 예수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단지 죽음에서 부활하고 영계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뿐이다. 그는 원래의 형상과 성품, 그리고 육신에 거할 때 얻은, 사람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그렇게 예수는 부활한 자신의 영체를 보게 하고, 그 영체의 존재를 만지고 느끼게 해서 도마가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게 했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늘 의심하며 믿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도마의 믿음은 직접 보고 만져 봐야 하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자들의 믿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을 뿐, 하나님이 보낸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전혀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믿게 하기 위해, 예수는 도마에게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전과 부활 후, 도마의 의심에 변화가 있었느냐? 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의 영체가 친히 나타나 직접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져 보게 하는 것 말고는, 도마의 의심을 해결하거나 내려놓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못 자국을 느껴 보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도마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가 부활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도마는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다. 그때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와 만나 함께하며 그를 따르고 알아 갈 기회와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케 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예수의 현현과 이 말씀은 의심 많은 자들의 믿음에 결론을 내렸고 심판을 행했다. 그는 의심 많은 자들과,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의 실제 말씀과 행사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의심을 품은 채 따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게 되는 날은 오직 하나님의 대업이 철저히 이루어지는 날일 것이며, 그날은 당연히 그들의 의심이 심판받는 날일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완고한 의심으로 인해 그들의 믿음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강퍅함으로 인해 그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림 속 떡으로 허기를 채우려는 헛수고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이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에, 설령 예수의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졌을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은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도마에게 한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아주 명확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즉, 부활한 예수는 당시 33년 반 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한 바로 그 예수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부활했어도 그의 모든 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몸에 못 자국이 생기고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지만, 그의 성품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람에 대한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사람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왔으며 죄와 고난과 죽음을 이겼음을 알려 주었다. 그의 못 자국이 바로 사탄을 이긴 증거이며, 속죄 제물이 되어 전 인류를 성공적으로 구속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사람에게 그가 이미 인류의 죄를 짊어졌으며, 구속 사역을 완수했음을 알려 주었다. 돌아와서 제자들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현현으로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오늘 실제로 너희 앞에 서 있기에 너희가 보고 만질 수 있다. 나는 너희와 늘 함께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는 또 도마의 일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훈계하고자 했다. 즉, 예수를 믿으면서 그를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예수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은 복 있는 자임을 알려 준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난 사건은 은혜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수의 현현과 그가 도마에게 한 말씀이 후세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매우 크며, 그 의미도 영구적이다. 도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의심이 많고 음흉하고 간교하여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들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믿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그들의 의심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들이 의심 많고 간교한 사람임을 깨닫고 인식하고 인정하며, 나아가 예수의 존재와 부활을 진실로 믿도록 기회를 주었다. 도마의 사건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자 메시지로, 도마처럼 의심을 품으면 어둠 속에 빠지게 되니 그런 자가 되지 말라고 더 많은 사람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도마처럼 주의 옆구리를 만져 보고 못 자국을 느껴 봐야만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검증하거나 가늠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떠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도마처럼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는 그런 자가 되지 말고, 순수하고 정직한 자가 되라고 요구했으며,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믿고 따르는 자는 복되다고 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아주 작은 요구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주는 훈계였다.

위의 내용은 모두 의심 많은 자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를 정직하게 믿으며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들을 했을까? 이는 우리가 이어서 보게 될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대화를 보면, 예수는 베드로에게 반복적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즉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더 높은 요구 기준을 보여 준다. 다그치고 캐묻는 이 말씀은 질문이자, 나아가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였다. 그는 이런 식의 질문을 통해 사람이 반성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했다.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물어보았으나, 실은 베드로에 대한 질문을 빌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더 많은 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다만 베드로가 복이 있었기에 그 부류 사람의 대표로 예수가 친히 하는 질문을 받았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도마에게 했던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비해 베드로에게 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에서는 그의 엄격한 태도와 당시의 절박한 마음이 훨씬 더 잘 느껴진다. 예수는 본성이 간사하고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지게 함으로써 그가 곧 부활한 인자임을 믿게 했고, 그의 신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다. 예수는 도마를 엄하게 꾸짖지 않았고, 그에 대해 명확한 말로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지만,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결정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예수가 한 이 말씀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한 요구나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참된 믿음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예수의 요구 역시 그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이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으며,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사람을 깊이 반성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예수의 질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책감과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예수의 애타고 슬픈 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염려와 보살핌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순수하고 정직한 자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과 엄격한 요구를 깨닫게 된다. 예수의 간단한 질문을 통해, 사람은 주님이 기대하는 바는 단순히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너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서 사랑이란 바로 헤아림과 순종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며 목숨까지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랑이란 하나님께 위안을 드리고, 하나님이 증거와 안식을 누리도록 하며,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자 본분이며, 또 사람이 평생 준행해야 할 도이다. 이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와 모든 온전케 되는 사람에게 던지는 예수의 요구와 당부였다. 바로 이 세 번의 질문이 베드로가 인생 여정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를 인도하고 격려해 주었다. 또한, 예수가 떠날 때 했던 질문은 베드로가 온전케 되는 길로 가게 해 주는 한편, 주를 사랑함으로써 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께 순종하고 위안을 드리며, 주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일생과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바치게 해 주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두 유형의 사람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첫 번째는 그를 믿고 따르며,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며, 은혜시대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후에 먼저 가장 의미 있는 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도마에게,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말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대변하지 않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성을 대변하지 않느냐? 도마에게 행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자가 되지 말고, 오로지 믿으라고 훈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베드로에게 행한 사역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의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에게는 명확하게 요구하고 추구할 목표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부활한 예수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말씀했으며, 그들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사람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남겼다. 즉, 성육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지냈던 기간이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영체가 된 다음이든, 인류에 대한 그의 염려와 요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제자들을 염려했으며, 모든 사람의 상태를 훤히 알고 있었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가 된 후에도 당연히 육신에 거할 때처럼 각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사람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육신으로 있는 동안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부활한 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성육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100% 확신시켰을 뿐이다. 그의 현현과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은 사람이 평생 추구하는 최대의 이상과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은혜시대의 사역이 인류 가운데 완벽히 실현되게 했다. 이에 따라, 은혜시대 예수의 구원 복음은 점차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에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만일 네가 당시의 도마나 베드로이고, 일생 중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만났다면, 그 일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느냐? 그 사건을 하나님을 믿는 삶에서 가장 크고 좋은 이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평생의 에너지를 가장 큰 이 이상을 전파하는 데 쏟을 수 있겠느냐? 예수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이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도마와 베드로의 사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 친히 인간 세상에서 인류의 삶을 겪었다. 그렇게 인류의 타락과 삶의 실상을 보고 난 후,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기댈 곳 없는 인류의 슬픔과 가련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인성과 육신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 그리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 더 염려하게 됐다. 너희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한다’는 표현으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를 걱정하고 관심을 보이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이 표현이 인류의 언어에서 온 아주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그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것에 대해, 너희는 체험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끼고 음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성품 변화 추구를 바탕으로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가야 한다. 예수의 현현은 인성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품었던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심정을 자신의 영체, 즉 신성에 실체화하고 옮긴 것이다. 그의 현현으로 인해, 사람들은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와 보살핌을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시대를 개척하고 열어 나가며, 또 시대를 종식하는 분임이 강력하게 입증되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모든 사람의 믿음을 견고히 했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확증을 주었으며, 새 시대 사역의 국면을 열었다.

13)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눅 24:30~32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4) 제자들이 예수께 구운 생선을 드리다

눅 24: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어서 위의 구절을 보자. 첫 번째 구절은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은 것과 성경을 풀어 준 것에 관한 기록이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가 구운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한 기록이다. 이 두 구절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예수가 떡과 구운 생선을 먹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희는 어떤 장면을 연상했느냐? 예수가 너희 앞에 서서 떡을 먹는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혹은 예수가 너희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사람과 함께 생선과 떡을 먹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주님과 아주 가깝고 주님이 친근하게 느껴졌다면 그 느낌은 맞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들과 마주 앉아 떡과 생선을 먹음으로써 얻으려던 효과였다. 만일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과 대화만 나눠, 사람이 그의 뼈와 살을 느끼지 못하고 멀리 있어 닿을 수 없는 혼 같은 존재로 느낀다면 어떠했겠느냐? 사람이 실망하지 않았겠느냐? 사람이 실망감을 느끼면 버려진 기분이 들지 않았겠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그 거리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겠느냐? 사람은 틀림없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경원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고, 은혜시대 이전의 관계, 사람과 하늘의 하나님의 관계로 돌아가게 됐을 것이다. 사람이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체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사라지게 한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에 거할 때 쌓아 놓은 사람과의 거리감 없는 친근한 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영체가 두려워 피하려 들거나 말없이 바라만 볼 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그를 따르고 의지하고 앙망하지 못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람이 그를 알고 그에게 다가오며, 그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 너의 가족과 자녀가 너를 만나도 알아보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늘 너를 피할 때, 그들을 위해 네가 행한 모든 것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너는 어떤 심정이겠느냐?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마음이 찢어질 듯 슬프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때 하나님이 느끼는 심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뒤에도 여전히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났고,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다. 사람을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하나님은 사람 역시 하나님을 가장 친한 존재로 여겨 주길 바랐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을 얻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할 수 있다. 이제 너희는 내가 부활한 예수가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준 부분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구운 생선을 드린 구절을 고른 이유를 알겠느냐?

예수는 부활한 후, 그야말로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일련의 일들을 하고 말씀을 했다.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들어 있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사람과 쌓은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세심한 보호도 담겨 있다. 그리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도 녹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이 부활한 예수는 영계로, 사람이 영원히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더 이상 사람에게 친근했던 주님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그는 사람에게 지위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경원시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몹시 어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체로 나타난다면, 또 한 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길 터였다. 더군다나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너무 높고 큰 존재이고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므로 더 이상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은 죄가 있고 더러우니 영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오해할 터였다. 사람의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는 육신에 거할 때 늘 했던 일들을 행했다. 예를 들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는 성경 기록과 같은 것을 말이다. 또한,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기도 했다. 예수가 행한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원래의 예수라고 느꼈다. 비록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부활했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그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다. 사람들 눈앞에 서 있는 인자는 여전히 원래의 예수였다. 그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에게 참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변함없이 자비와 은혜와 포용으로 충만했으며, 여전히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였다. 그는 예전처럼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함께 성경을 얘기하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피와 살이 있어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었다. 사람은 이러한 인자를 아주 친근하고 편하게 느꼈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인자를 마음 놓고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앙망하기 시작했으며, 망설임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은혜와 축복,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기 위해 기도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기간에, 그를 따랐던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신분과 말씀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저 관망했을 뿐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예수가 육신에 거하는 동안 했던 말씀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나아가 그것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그를 직접 보거나 부활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부인하던 마음이 점차 반신반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 부활한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떡과 구운 생선을 먹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예수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영체는 모두에게 마치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눈앞에 서 계신 이 인자가 바로 영원부터 계셨던 그분이구나. 형체도, 뼈와 살도 있는 이분은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먹고 생활하셨구나….’라고 말이다. 이때 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참되고 아름답고 오묘한 느낌을 주었고, 또 지극한 기쁨과 행복, 충만한 감동을 주었다. 예수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지극히 낮췄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의 친근함과 사람에 대한 염려,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와의 짧은 만남은 그를 본 사람들에게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상실감과 막연함, 당황스러움과 불안감, 초조함, 크나큰 그리움, 무감각이 들어 있던 사람의 마음이 위안을 얻은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는 희망과 의지처가 생겼고, 눈앞에 서 있는 인자가 바로 영원하고 든든한 요새요, 견고한 망대요, 피난처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그의 마음과 사역은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현을 통해 사람에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곁에 있으며,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한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목양하며,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고, 더 이상은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 예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염려해 주고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람의 영원한 의지처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의 가족이며, 그를 의지하면 더 이상 외롭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는 것을,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속죄 제물로 삼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했던 이러한 사역들이 사람에게는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부 참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더없이 중요한 일들이었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했던 기간은 어려움과 고난이 가득했지만, 그는 뼈와 살이 있는 영체로 나타남으로써 성육신하여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었다. 그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직분을 시작했고, 또 성육신의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 자신의 직분을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를 가져왔으며 그 시대를 시작했다. 또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펼쳤으며, 은혜시대에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이끌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확실히 시작과 끝이 있고, 절차와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 기묘한 행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관통하는 일관된 맥락은 바로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하나님의 떨쳐 버릴 수 없는 염려의 마음이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행한 모든 일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기대와 염려, 세심한 관심과 보호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보았느냐? 이런 것들을 볼 때, 너희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않더냐? 만일 너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가 부활한 후에 너희 앞에 나타나고, 형상이 있어 너희가 그를 볼 수 있었다면, 그가 너희 앞에 앉아 떡과 생선을 먹으며 성경을 풀어 주고 너희와 얘기를 나누었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기쁘지 않았겠느냐? 가책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전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피하려는 마음, 반발심, 그리고 의심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좀 더 정상적으로 바뀌지 않았겠느냐?

너희는 이 짧은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 성품의 어떤 작은 흠이라도 발견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더냐?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에 어떤 간사함이나 사악함이 있더냐? 단언컨대, 없다! 그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전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의 발현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나는 너희가 이 말씀들을 보고 깨달은 것들이 앞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 유익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말씀들이 너희에게서 갈수록 좋은 성과를 거둬 너희가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도 가까워지길 바란다.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싫증 내지 말고,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귀찮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의 발현과 거룩한 본질이 너희에게 동기 부여가 되어 광명과 정의를 갈망하게 되기를,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자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 우리는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성육신하여 행한 일에 관해 얘기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기간에 나타낸 성품을 보았고, 하나님이 지닌 여러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았다. 이 여러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은 아주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드러나고 발현된 모든 본질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성육신하여 인성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모든 방식과 그 성품의 측면은 다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육신의 방식으로 인류에게 임한 것은 아주 중요하며, 육신으로 행한 사역 역시 더없이 중요하다. 또한, 그가 나타낸 성품과 뜻은 육으로 사는 모든 사람, 패괴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더욱 중요하다. 이것을 너희는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알고 나니,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었느냐? 이 문제에 있어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세 가지 충고를 하겠다.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절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둘째,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지위를 주고 어떤 사역을 담당하게 하든, 하나님이 어떤 본분을 맡겨 너를 높여 주든, 네가 예전에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바쳤든, 절대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셋째,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하나님이 네게 행한 일과 마련해 준 일, 그리고 네게 닥친 일을 네가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순종할 수 있든 없든, 절대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다면 너는 비교적 안전할 것이며, 쉽게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자!

2013년 11월 23일

이전: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다음: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