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3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경영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낯선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경영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 자신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로 인해 인류의 구원은 아주 모호한 일이자 공허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아름다운 종착지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을 따르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사람이 어떻게 협력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경영과 분리될 수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류는 하나님의 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류와 하나님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되었다. 나아가 지음 받은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등 사람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들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대오에 점점 더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과 관련된 화제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단지 복을 받거나 재난을 피하거나 출세를 하기 위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 분명히 알 수 있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더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나님의 경영이 사람에게 아주 심오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경영과 관련되어 있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과 관련되어 있으며, 인류의 생명과 삶, 그리고 인류의 종착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서 행하고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매우 현실적이고 의미가 있으며, 사람이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이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사역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런 경영이 또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만 오로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을 언급하면 그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지루한 문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영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도 건성으로 대할 뿐 보배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생명의 일부로는 더더욱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복을 받는 것이다. 그 외에 그들의 목표와 전혀 무관한 일은 귀찮아하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는 것이 가장 정당한 목적이며, 또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현재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의 상태가 이렇다. 그들의 목적과 속마음은 얼핏 들으면 아주 정당한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며, 청춘을 바치고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심지어 오랫동안 외지에 나가 동분서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취미도 인생관도 바꾸고, 심지어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까지 바꾸지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바꾸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꿈을 경영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며, 그 길이 얼마나 멀든, 얼마나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죽음까지 불사한다. 어떤 힘이 그들을 그토록 끊임없이 바치게 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의 양심이겠느냐? 그들의 위대하고 고상한 인격이겠느냐? 사악한 세력과 끝까지 맞서겠다는 결심이겠느냐?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그들의 믿음이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려는 충성심이겠느냐? 아니면 단 한 번도 사적으로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는 그들의 희생정신이겠느냐?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심혈을 쏟아붓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기적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바쳤는지는 차치하자. 그들의 행위만 해도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다니, 거기에 사람과 밀접한 이익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우리는 지금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노골적인 이익 관계, 그러니까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는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다. 피고용인의 수고는 오직 고용인이 주는 품삯을 받기 위함이다. 이런 이익 관계에는 애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없고 베풂과 연민만 있다. 또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과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관계는 없고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만 있다. 상황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겠느냐? 또 이런 관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확신컨대, 모두가 복을 받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처럼 난감하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자기 경영을 하면서 하나님의 경영을 등한시한다는 사실이고, 가장 크게 실패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꿈꾸는 종착지를 구상하고, 어떻게 해야 가장 큰 복과 가장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비참하고 가증스럽고 가련한 자신의 모습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꿈과 소망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계산하지 않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느냐?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그의 경영을 완성하는 데 긴밀하게 협력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 몸과 마음을 쏟아붓는 사람이다. 날마다 하나님께 두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얼마간 헌신하고 빚을 받아 내려는 사람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얼마간 바친 뒤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기대 살아가려는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늘에 올라가 복받는 일에만 관심 있는 냉혈 인간을 증오한다.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회를 틈타 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은 더더욱 증오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무엇인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사역하는 틈을 타 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앞날과 운명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 반감을 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득한 우주에 수많은 생령이 번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법칙을 따라 순환하며, 불변의 법칙을 지키고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이야기를 갖고 떠나고, 산 사람은 또 죽은 사람의 역사적 비극을 재연하며 살아간다. 인류는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는 왜 죽는가? 누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가? 누가 이 인류를 창조했는가? 이것이 정녕 대자연의 조화일까? 인류가 진정으로 자기 운명을 지배할 수 있을까?’ 인류는 수천 년간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던졌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문제에 집착할수록 과학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커졌다. 과학은 사람의 육에 일시적인 만족과 짧은 누림을 주었지만, 영혼 깊은 곳의 고독과 적막, 감출 수 없는 공포,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인류는 그저 눈으로 볼 수 있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과학 지식으로 심령을 마비시키고 있었을 뿐, 비밀 탐구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인류는 우주 만물의 주재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인류의 시초와 미래는 더더욱 알지 못한 채 그저 속절없이 법칙에 따라 살아가기만 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고 또 그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만물 가운데서, 또 하늘 위에서 태고부터 영원까지 계신 그분이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가 목도한 적이 없는 분이요, 인류가 안 적이 없는 분이며, 인류가 한 번도 존재를 믿지 않았던 분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선조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인류에게 생명을 부여한 분이요, 인류가 살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분이고, 오늘날까지 인류를 인도한 분이며, 나아가 인류가 유일하게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분이다. 그는 만물을 주재하며, 우주 만물의 생령을 주재한다. 그는 사계절을 주관하며, 풍상설우(風霜雪雨)의 변화를 조절한다. 그는 인류에게 햇빛을 선사하고, 밤의 장막도 베풀어 주었다. 그는 하늘과 땅을 펴고, 인류를 위해 산과 강과 호수, 그리고 그 속의 생물까지 준비했다. 그의 행사는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의 능력 역시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의 지혜는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의 권병 역시 모든 곳에 존재한다. 이 모든 규율과 법칙은 그의 행사를 구현하고, 그의 지혜와 권병을 나타낸다. 누가 그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누가 그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만물은 다 그의 눈앞에서 살아가고, 더욱이 그의 주재하에서 살아간다. 그의 행사와 능력 앞에서 사람은 그가 분명히 존재하며,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외에는 어떤 존재도 이 우주를 주관할 수 없고, 더욱이 인류에게 이토록 무한히 많은 것을 공급해 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행사를 알든 모르든, 또 하나님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너의 운명을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 영원히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권병은 인류가 알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고,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이 모든 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사람이 직접 목도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하나님이 곧 이룩할 사실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보는 가운데서 살고 또 하나님이 보는 가운데서 죽는다. 인류는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살고 또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두 눈을 감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순환하며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 온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다. 하나님의 경영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그의 존재를 알게 하고, 그의 주재를 믿게 하며, 그의 행사를 보게 하고, 또 그의 나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고, 수천 년 동안 경영해 온 사역이다.

하나님은 창세 이후 그의 경영 사역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경영 사역의 핵심이 바로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다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은 1분 1초나 눈 깜빡할 사이, 또는 1~2년이 아니라 수천 년에 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해와 달, 각종 생물, 인류의 양식과 생활 환경 같은, 사람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더 많은 것들을 창조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 경영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하나님은 인류를 사탄에게 내주었고, 그리하여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차 하나님의 첫 번째 시대 사역, 즉 율법시대의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율법시대가 이어진 수천 년 동안 율법시대의 인도에 익숙해지고 무심해진 인류는 차츰 하나님의 보살핌에서 멀어졌다. 그로 인해 율법을 지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보호가 사라졌고, 그들은 성전에서 제단을 지키며 생활할 뿐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사역은 그들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율법을 고수하며 입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는 자신들만이 여호와의 백성이자 선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조용히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하나님은 사역할 때 항상 한 곳에서 조용히 떠나 또 다른 곳에서 소리 없이 새로 개척한 사역을 하는데, 둔감한 사람이 보기에는 천일야화와도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사람은 항상 낡은 것을 둘도 없는 보물로 여기고, 낯설고 새로운 것을 보면 원수나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새로운 사역을 하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만물 가운데서 가장 늦게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여호와의 율법시대 사역에 이어 하나님은 또 예외 없이 두 번째의 새 사역, 육신을 입는 사역을 시작했다. 즉, 성육신하여 사람으로 10년, 20년이란 오랜 시간을 보내며 신자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자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바울이라는 자가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다. 결국 그는 치심을 당했지만 사도가 된 뒤에도 예전 본성을 버리지 못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갔다. 그는 사역하는 기간에 많은 서신을 썼다. 불행하게도 후세 사람들은 그의 서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받아들였고, 그것을 신약 성경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이 대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인류에게 성경이 생긴 후 가장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는 사람이 너무나도 어리석기에 저지른 잘못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은혜시대 사역 기록에 사람의 서신이나 영적 깨달음을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으로 둔갑시켜 넣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찌 몰랐단 말이냐? 이것들은 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니, 다시 주제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하나님의 두 번째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 즉 십자가에 못 박힌 뒤에 하나님은 이미 사람을 죄에서(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오는 사역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인류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았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사람의 죄가 더 이상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고, 사탄이 사람을 참소하는 빌미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 미리 겪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속죄 제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육신, 즉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속량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사탄에게 잡혀갔던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하나님께 구원받게 되었다. 당연히 이 사역은 율법시대보다 진일보하고 한층 더 깊어진 하나님의 경영이었다.

하나님의 경영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이고, 무엇이 창조주인지,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어째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이런 인류를 사탄에게 내주어 사탄이 제멋대로 패괴시키게 한 뒤, 다시 사탄의 손아귀에서 단계적으로 빼앗아 옴으로써 인류가 완전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탄을 저버릴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영이다. 이는 어쩌면 신화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쩌면 이해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사람이 이것을 신화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나아가 이 우주 궁창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의 육안으로는 이 물질세계 뒤에 숨어 있는 더 기묘하고 무서운 세계를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의의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의의를 전혀 모르고,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인류를 원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은 아담과 하와 같은 인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경영은 바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순종하는 인류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인류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으나 더 이상 사탄을 아비로 삼지 않고, 사탄의 추악한 몰골을 간파하여 저버린다. 또한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추함과 거룩함의 차이를 알며,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탄의 사악함 역시 깨닫는다. 그런 인류는 더 이상 사탄을 위해 힘쓰지 않고, 사탄에게 절하지도 사탄을 섬기지도 않는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얻어진 인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의 의의이다. 이 경영 사역에서 인류는 사탄이 패괴시킨 대상인 동시에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며, 또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산물이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면서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차츰차츰 빼앗아 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는 더 현실적이지만 사람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역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채찍이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면모 또한 사람에게 더 뚜렷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인류는 속량받은 뒤 정식으로 하나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편하게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인류는 오히려 하나님의 ‘호된 공격’을 받았다.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이와 같은 세례를 ‘누려야’ 했다. 이런 대우를 받자 사람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가 비싼 대가로 사 온 양인데, 하나님은 어째서 나를 이렇게 대하시는 걸까? 설마 하나님이 그분 방식으로 나를 조롱하고 드러내시려는 걸까?’ 그렇게 수년을 겪으며 보냈고, 인류는 연단과 형벌의 고난을 통해 풍상고초를 다 겪어 본 사람으로 거듭났다. 비록 과거의 ‘광채’와 ‘낭만’은 잃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됨의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이 오랫동안 사람을 구원한 그 고심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차츰 자신의 야만성을 증오하는 한편, 길들이기 어렵고 하나님을 수없이 오해하며 하나님께 지나치게 바랐던 스스로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지나간 일은 사람이 참회하는 기억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은 사람이 새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은 날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몸이 건강해지면서 우뚝 일어나 전능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줄곧 내 곁에 있었다. 그의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히 그렇게 감동적이었다. 그의 마음은 늘 그렇게 자신이 만든 인류를 염려하고 있었으며, 그의 두 손은 늘 처음처럼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 사람은 마치 에덴동산에 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은 더 이상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더 이상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한다. 또한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보며 가장 귀한 제물을 바친다. 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모든 경영 사역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할 수 있든 없든,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역이 가져다준 도움과 이익은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지금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랑과 생명의 공급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웃는 얼굴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근본 취지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을 빼앗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 9월 23일

이전: 부록2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

다음: 부록4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