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오늘은 관념의 문제에 대해 계속 교제해 보자. 관념의 문제는 전에 두 번 교제한 적이 있는데, 오늘 한 번 더 교제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전에 교제했던 내용은 나중에 너희끼리 다시 교제하며 조금씩 묵상하고 체험해 보도록 해라. 이런 주제는 하루 이틀에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겪어 보고 체험해 봐야 차츰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너희가 기억에 의존해서 교제하는 것은 단지 말만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 후에는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생활에서 일정 기간 체험해야 비로소 진실된 인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다. 이 두 가지 방면의 관념은 사람의 추구와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나아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 사람이 선택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 두 번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지금 관념이란 과연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상상, 이것이 일종의 관념이다. 이런 상상은 주로 언행이라는 외적인 방식에서 드러나고, 또한 일상생활의 의식주 같은 세부적인 일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바와 걷는 길에 대한 상상, 그리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요구와 상상, 오해 등이 있다. 이 오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냐? 왜 오해라고 하는 것이냐? 오해라고 하면 분명 정당한 생각이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전혀 맞지 않고 서로 위배되는 것, 혹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지식에서 비롯된 사람의 뜻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과도, 하나님의 사역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런 관념, 상상, 오해, 요구가 생겨날 때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이미 절정에 달했다는 의미이다. 그때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겠느냐? (간격이 생깁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간격이 생길 때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무척 심해진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면, 즉 하나님이 하는 몇몇 일에 불만이 생기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성품에 의심이 생긴다면, 그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반발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이 오해로 인해 사람의 마음에 간격이 생기는 동시에 곧바로 반발심이 들게 된다. 진리에 반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반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불만을 품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시는 건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찬성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곧 “저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제 선택입니다. 저는 다른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 하나님 요구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겠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건 어떤 행위냐? (대드는 행위입니다.) 반발이 생긴 후에는 곧바로 대들고 맞선다.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지 하나의 관념으로도 간격이 생기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얼른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그 간격이 점점 커져서 두터운 벽이 될 것이고, 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신성 측면의 본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과연 하나님인지 의심이 들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도 싫어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싫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수록 멀어진다. 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는 바람에 자신의 인격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본인에게 생긴 일이 그의 이익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반발심을 품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 관념에 맞지 않게 사역하는 것에 극도로 불만을 품는다.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념과 오해를 품는다. 이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간격이 생겨난 후, 사람이 관념대로 살면서 드러내는 각종 패괴 성품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구하지도, 기다리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나아가 경외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먼저 연구하고 판단한 다음 정죄하고, 그런 후에는 반발할 것이다. 이런 행위는 구하고, 기다리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이런 긍정적인 모습과 정반대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는 부정적 사물에 속하고,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패괴 성품은 그의 행위를 통제하고 그의 생각을 통제하고, 또한 그가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는 태도와 속셈, 관점을 통제한다. 사람이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또한 반발하면, 그다음으로 취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대항하는 것입니다.) 대항할 것이다. 사람이 대항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소극적이 되고, 본분을 내팽개칩니다.) 소극적이 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일을 게을리하고 본분을 내팽개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관념을 퍼뜨립니다.) (판단합니다.) 판단하고 관념을 퍼뜨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행위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을 배반하고 참도를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마귀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난 것인데, 철저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언제든 하나님에게서 떠날 수 있게 된다.

방금 얘기한,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행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일을 게을리하고 본분을 내팽개칩니다.)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한다. (그리고 관념을 퍼뜨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자. 관념을 퍼뜨리는 것에 불평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때로는 원망이 섞이기도 하는데, 그 뜻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도 공의롭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저는 사람은 안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거기에는 원망이 담겨 있다. 일을 게을리하고, 관념을 퍼뜨리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행위들도 비교적 심각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배반이다. 이 네 가지는 비교적 분명하고 심각하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성질을 띤다. 이 몇 가지에서 또 어떤 구체적인 모습이 너희가 생각나거나 본 적 있거나 혹은 전에 가졌던 모습이냐? (선동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퍼뜨리고 싶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선동합니다.) 이것은 관념을 퍼뜨리는 행위에 해당하는 모습 중 하나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도할 때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세요. 제가 한 일이 옳아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드러날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이 말은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이고 떳떳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복과 불만이 숨어 있다. 이것은 속으로 대항하는 것이고 일을 게을리하고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이 또 있느냐? (일을 게을리하는 행위에는 자포자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도 있습니다. 어쨌든 자신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본성을 지녔으니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다고, 하나님이 멸하시려면 멸하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일종의 소리 없는 대항이다. 사실 진정한 내적 상태는 소극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일은 이해가 안 되고, 사람이 간파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생각이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하나님의 안배에 깊이 반발하고, 무척 불만스러워하고 불복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한 것임을 인정하고, 별다른 요구도 없는데, 여전히 이것을 대항의 정서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어째서 이렇게 규정하겠느냐? 사실, 그의 의식에는 그 일을 정죄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은 잘못된 겁니다. 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 일은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일을 게을리하는 건 그 일 때문입니다.”라며 규정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의 잠재의식에 있는 그의 내적 상태는 이렇지 않고, 그에게는 이런 의식이 없다. 단지 속으로 조금 불복하고, 불만스러워하거나 불평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도 하나님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할 수도 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 그의 주관적인 바람에서 볼 때, 그의 의식에서는 이렇게 정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든 그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행위를 대항이고, 일을 게을리하는 것이라고 하고, 소극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냐? 소극성 자체는 일종의 반발이자 대항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우선 사람에게 자포자기하고 일을 게을리하는 내적 상태가 생길 때, 사람은 속으로 이 내적 상태가 잘못된 것이라고 의식할 수 있느냐?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의식할 수 있다. 믿은 지 2~3년밖에 되지 않아서 설교를 많이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일을 잘 알지 못하지만, 3년 이상 믿으면서 자주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면 모두 의식할 수 있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고 의식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대항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먼저 구해야 한다. 무엇을 구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왜 이렇게 배치했는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구해야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태도다. 또 무엇이 있느냐?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기까지는 절차가 있다. 그렇다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실행은 무엇이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저 공허한 말 몇 마디로 형식만 거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 저는 순종하기 원합니다. 당신께서 환경을 마련하고 안배해 주셔서 제가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순종하지 않으면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이런 빈말 몇 마디면 잘못된 내적 상태가 바뀌겠느냐?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이키기 위해서는 실행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돌이킬 수 있느냐?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한편,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틀렸음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건 두 가지 실행법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과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훌륭한 방법이고 전부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가 가장 실용적이다. 어느 것이 실용적이고, 어느 것이 빈말이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실용적인 방법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너에게 직접 알려 주지 않는다. 또한 네가 깨닫도록 갑자기 너에게 빛 비춤을 주지도 않고, 마침 네가 깨달아야 할 말씀을 바로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주지도 않는다. 이런 방법들은 사람에게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방법이 너희에게 효과가 있겠느냐? 효과적인 방법은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다. 효과가 없는 방법은 듣기에는 아무리 그럴싸해도 이론에 불과하고, 말에만 그칠 뿐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느 방법이 실용적이냐? (두 번째인 하나님이 진리이고 자신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이성을 갖추어 자신을 내려놓고 부인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전에 제가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고 동의했고, 저도 마음속에 별다른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 외에 제 마음가짐도 옳은데, 어떻게 틀릴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를 내려놓지 못하고 부인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너의 이 ‘옳음’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너는 틀린 것이다. 네가 아무리 순종하는 태도가 있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도, 혹은 입으로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더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소극적인 상태로 살아간다면, 이 본질은 역시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아직도 자신이 틀렸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틀렸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오해와 관념이 생겼을 때는 우선 하나님은 진리이고,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으므로 분명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일종의 형식이냐? (아닙니다.) 만약 네가 단지 이런 실행법을 형식적으로나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인식할 수 없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이 하는 일이 진리에 부합하고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봐야 한다. 일단 마음가짐은 보지 마라. 간혹 마음가짐은 옳지만 실행 원칙이 틀릴 때가 있다. 이런 경우가 많으냐, 적으냐? (많습니다.) 네 실행 원칙이 틀렸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어쩌면 네가 구했지만 원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전혀 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좋은 마음과 열정에 따라, 자신의 상상과 경험에 따라 행동해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너는 상상할 수 있느냐? 네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실수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너는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난 후에도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한다면, 그건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잘못이다. 가장 큰 잘못은 네가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하고 원칙을 어겨서 손실이나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일을 잘못 처리한 뒤에도 억지를 부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에게 대항하며 하나님 사역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부인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고 심각한 잘못이다. 사람의 이런 내적 상태를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자신이 한 일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주재가 옳다는 것과 거기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인식하고 말고를 떠나, 우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대항하는 내적 상태다. 이런 내적 상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가장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방금 얘기했던,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실행 방법은 사람에게 그다지 실제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별로 실제적이지 않다면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닌가요? 구해 깨달을 수 있는 것들도 구할 필요 없습니다. 이 단계는 건너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사람은 구할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은 이해가 치우친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은 조금 요원해서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름길을 가는 비교적 현실적인 방법은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이 틀렸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다음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절차이다. 이 절차는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실행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 각종 상상과 요구,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내려놓는 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주제는 더 깊이 교제하지는 않겠다. 계속해서 지난 두 차례 얘기했던 관념에 관한 문제를 교제해 보자.

지금까지는 주로 사람이 관념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 오해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그 간격으로 하나님에게 반발심을 갖게 된다고 교제했다. 반발심은 어떤 성질이냐? (대항하는 것입니다.) 대항하고 거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드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뿌리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고, 게다가 삼각한 상태라면 병세가 어쩌면 이렇게 빨리 악화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병은 몸속에서 일찍부터 생긴 것이며 뿌리까지 있었던 것이다. 밝혀진 그날에 병이 생긴 게 아니라 밝혀진 그날에 병이 발견된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들게 되는 것은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예상할 수 있느냐? 절대 아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초심이냐? “나는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야. 그저 하나님을 만난 뒤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고, 그런 다음 입신양명해서 내 인생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멍청하고 바보 같고 악한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계획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며 좋은 사람이 되려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자 한다. 비록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하나님의 최소한의 요구에는 도달하려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바람이냐? 그런데 어쩌다 끝에 가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되었느냐? 사람 스스로도 속으로 내키지 않고 또 어찌 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얘기를 할 때면 기분이 좋지 않고, 괴롭다.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나? 다른 사람이 그런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것은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한 것과 같다. 베드로가 한 말은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지만 그가 드러낸 모습은 그의 소망과 지향하는 바에 이르지 못했다. 사람의 연약함은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다. 일이 닥치면 사람의 패괴가 드러난다. 사람의 본성 본질, 사람의 패괴 성품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주도한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으면 각종 관념이 생기고, 각종 욕망과 요구가 생기고, 또 각종 패역 행위가 생겨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 믿을 때의 초심도 아니고, 사람이 속으로 원하고 바라던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이런 결과를 빚어낼 수 있다. 이 관념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앞날, 운명, 종착지가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품는 오해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 본질, 하나님 성품에 대한 관념을 해결해야 한다. 이 관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이해하고, 알고, 인식해야 한다. 그럼 이런 관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느냐?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역시 몇 가지 실제 사례를 얘기해 사람의 그 관념과 태도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사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살펴보고, 반면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펴보자. 이 두 가지를 구분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서로 대조해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하나님이 사람을 주재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방식과 하나님의 사역을 확실히 인식하고 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 이상 관념을 갖지 않게 되고, 하나님과의 간격도 사라지고, 마음속에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드는 내적 상태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그런 문제는 직접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어느 방면의 관념 문제든 그 해결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진리와 연결시켜야 하는데, 어떤 일이든 다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역시 하나님의 사역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일부 사례를 근거로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사역의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고 주재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방식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아보자. 한 가지 사례가 어쩌면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관련될 수 있고, 또 어쩌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 방식, 한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는 것과도 관련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과도 관련될 수 있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알게 하려면, 내용 없이 그저 하나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6천 년 사역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한다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너희가 보기에 적절한 것 같으냐? 받아들이기 쉽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이 6천 년 사역을 하는데, 두 번째 단계 사역은 유대에서 했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했고, 거기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라고 얘기했다고 하자. 이렇게 얘기하면 잘 이해가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면서 세상의 여러 인종을 어떻게 대하고, 속으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땅은 어떻게 경계를 짓고, 왜 그들을 각각 다른 땅으로 구분했고, 특히 어떤 좋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사람의 바람대로 되지 않지만 어떤 악인이 사는 곳이 훨씬 좋은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건 사람의 일상생활 가운데서의 성품 변화, 생명 진입과 비교적 요원하고, 게다가 비교적 추상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요원하고 추상적이라고 하는 것이냐? 현실 생활 속에서는 이상(異象) 방면의 진리만 아는 것, 이를테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주재하고 이끄는지와 같은 진리의 세부적인 내용만 아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현실 생활 속 문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고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시 생활 속에서 사람이 보고 듣고 느낀 사례부터 얘기하고, 그런 후에 너희가 거기서 식견을 넓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혹은 그 이야기의 내용이 어떤 사람, 어떤 일에 관계되든 상관없다. 심지어 그 이야기는 네가 전에 했던 일들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야기 자체가 가져오는 효과는 사람에게 오늘 얘기한 주제와 관계된 한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얘기하는 것은 모두 나름의 목적이 있고, 모두 그 일 자체가 지녀야 하는 가치, 그 일에서 나타나는 진리와 관계가 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첫 번째 사례다. 오래전,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늘 저희에게 말씀하시고 설교하십니다. 말씀을 많이 하시다 보면 어떤 때는 기침도 하시게 되죠. 하나님께서 설교도 순조롭게 하시고 기침도 덜하시라는 뜻에서 저희가 시럽형 기침약을 보내 드립니다.”라며 시럽형 기침약을 보내왔다. 그 약을 가져온 것을 보고 어떤 형제가 말했다. “이게 기침약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쓰는 약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함부로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리면 안 됩니다. 마셨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약입니다. 독성 없는 약은 없으니까 마시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죠!” 옆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려 깊은 생각이야. 그렇다면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릴 수 없지.’ 당시에는 나도 그 약이 필요 없어서 우선은 두기로 했는데, 나중에 사용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 일은 그렇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일이 그걸로 끝이겠느냐? 아직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 그 약 사건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 그 형제가 그 약병을 들고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발견 당시에는 반쯤 남은 상태였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그 형제는 그 약을 몽땅 마셔 버렸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일이 오늘 얘기하려는 관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우선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어떤 울림이나 충격을 주었느냐?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은 무엇이고, 어떤 충격을 받았느냐? 대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 그건 하나님께 바친 건데 어떻게 사람이 마실 수가 있지?’ 이것이 첫 번째 충격이다. 두 번째 충격은 이렇다. ‘계속 마시더니 다 마셔 버렸네!’ 충격 외에 또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너희는 그 형제가 한 일, 그의 이런 모습들, 즉 이야기 전체에서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이 생겨나지 않겠느냐? 우선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제쳐 두고, 그 충격이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지부터 얘기해 보자. 사람은 단지 양심에 불편한 느낌이 좀 들 수 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도 못한다. 그다음에는 도의나 도덕, 신학 이론, 글귀와 도리에서 비롯된 질책과 비난이 생기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다. 진리에 관련되는 얘기를 하자면, 이 사건 자체에 대해 사람이 품게 되는 관념이나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구 등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해 사람이 품는 관념과 생각이다. 네가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패역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느 날 하나님의 제물 중에서 네가 무척 좋아하거나 아주 필요한 물건을 발견하여 너에게 아주 큰 유혹이 되는 상황에서 네가 하던 대로 횡령한다면 그 순간 너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충격은 단지 양심의 작용, 인성의 도덕적 기준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가 일으키는 작용이 아니다. 네가 이 일에서 생긴 관념을 해결하고, 이 일에서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런 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해결되고, 그런 일에서 진리를 깨닫고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일에서 사람은 어떤 관념을 갖게 되고, 또 어떤 관념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대항하겠느냐? 우리는 이런 내용을 교제해야 한다. 그 일이 발생했을 당시 그 형제는 속으로 가책을 느꼈을지 대답해 보아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약을 몽땅 마셔 버린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석하기 매우 쉽다. 그렇지 않으냐? 첫 모금부터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전혀 거리낌도 없었고,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한 모금 마셔 보곤 더 마시지 않았다면 가책을 느낀 셈이다. 그것은 중간에 멈추고, 결국에는 자제해서 더는 마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제는 그러지 않고 끝까지 다 마셨고, 만약 더 있었다면 그것도 마셨을 것이다. 이로써 그에게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이것은 너희가 알아야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하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과 방식도 알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관념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은 사람을 이런 태도로 대하시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시네요. 예전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하게 할 수도 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고, 네가 하나님에게 오해를 품을 수 있고, 이 방면에서의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에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약입니다. 독성 없는 약은 없으니까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리면 안 됩니다. 마시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죠!” 그가 이렇게 말한 속셈과 목적은 무엇이냐? 그 말은 진심이냐, 거짓이냐? 그건 진심이 아닌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진실된 말이 아니다. 그 후에 그가 취한 모든 행동, 그가 드러낸 모든 것을 보면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다. 그러면 그의 그런 거짓말, 그런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느냐? (아무것도 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그 말을 했을 때는 진심이 아닌 거짓이었다. 하나님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긍정적으로 인도하거나 소극적으로 나무라는 방면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사람 내면에 간혹 양심의 가책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건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다. 이 형제가 당시 가책을 느꼈느냐? (못 느꼈습니다.) 그는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까지 그럴싸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옆에서 지켜보았다. 왜 그랬겠느냐? 사실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려고 그랬겠느냐?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막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사실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일 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알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 진실한지 거짓된지, 속으로는 과연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지,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은 이미 파악하고 있고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형제가 그 말을 한 뒤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첫째,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둘째, 하나님은 그것은 제물이니 사람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점을 그에게 깨우쳐 주지도 않았고, 그 점을 의식하게 해 주지도 않았다. 그럼 이 의식을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상 인성에 이러한 의식이 마땅히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면 그 사람들은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한 짓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몰라서 그러는 거고, 알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지요. 이것이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먼저 그는 ‘이것은 하나님의 제물이니 사람이 손대면 안 된다’는 도리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만약 몰랐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막기 위해,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 일을 그에게 알려 주지 않고 모르게 했겠느냐?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진심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사람을 드러내려고 그러셨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네게 어떤 일이 생길 때 그런 일은 모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너에게는 구원일 수도 있고, 파멸일 수도 있다. 그동안 하나님은 지켜보고 있으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너를 일깨워 줄 어떤 상황도 마련하지 않는다. 또 깨우침의 방식으로 너에게 그런 짓을 하면 상상 못할 결과를 빚을 테니 그래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인성적이라고 알려 주지도 않았다. 사람에게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다. 사람에게 이런 의식이 없는 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당시에 일깨워 주지도 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만약 양심이 있고, 어느 정도 인성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를 바탕으로 일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그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그 일에 모른 체했겠느냐? 여기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존엄성과 인격, 정상적인 인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고, 마음속에 하나님도 없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 일에서 그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구원의 방식일 때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다 의도적이다. 네가 만약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드러냄은 네게 시련이자 구원이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드러냄은 네게 도태이자 파멸이다. 그렇다면 지금 볼 때 이 형제에게는 하나님의 드러냄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도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복이 아니라 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그가 약을 몰래 마셨을 때 하나님이 상황을 빌려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으면 그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게 아닌지요? 그가 도태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그저 순리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순리대로 일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가 병을 따서 마신 첫 모금과 마지막 모금의 성질에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본질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의 인성, 그의 추구, 그리고 그의 믿음이 철저하게 드러난 것이다.

구약 시대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몰랐다. ‘장자는 무슨, 그게 뭐 별거라고? 바꾼다고 대수야? 그래도 전과 똑같이 사는 게 아니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문제를 무척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는데,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교회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숱하게 많은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것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성질이 아니냐? 더 심각하지 않으냐?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이번 한 번의 기회뿐인데 이 기회를 놓치면 완전 끝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작 기침약 때문에 결국 도태되었는데, 파멸이라는 결말과 맞바꾼 것이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사실 믿기 힘들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이 일은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과 같이 법을 위반하고 범죄를 저질렀다면 기껏해야 죽은 뒤 징벌받고 몇 번 윤회하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왜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이 일이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먼저 그 기침약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사실 그 약이 그다지 값비싼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하나님께 바쳤다면 그 본질은 달라진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물은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제물에 손대선 안 됩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제물이란 무엇이냐? 제물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봉헌한 것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제물’이라고 통칭한다. 제물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 돈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 가치가 어떠하든, 그것은 전부 하나님께 속하며, 사람이 처분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제물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처분 가능하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것에 손대서는 안 되고, 누구도 그것에 눈독 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써도 되지 않을까요? 시간이 흘러 못 쓰게 되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안 된다. 이것은 원칙이다. 제물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가치가 있든 없든, 사람이 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본질은 바뀐 것이다. 그 물건이 제물이 된 순간부터 그것은 창조주의 소유이며 창조주가 지배한다. 제물을 대하는 법은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한다면, 하나님이 지닌 물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같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떤 제물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그 사람 소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있든 없든 어쨌든 손에 넣으면 그 사람 소유가 되는 것이고, 그 물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주장이 어떠하냐? 잘못된 게 아주 분명하다.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더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바친 물건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제물이라고 정의된 상황에서 사람이 그것에 눈독 들인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다들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 일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이 일을 통해 사람은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물을 사람이 착복하거나 흥청망청 낭비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징벌받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을 저질렀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에서 하나님을 거스를 때라야 하나님은 노를 발한다. 특히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하나님의 제물을 대할 때는 반드시 신중히 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확실히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데, 믿음도 있고, 헌신도 하며, 또 대가도 치를 수 있어 모든 모습이 훌륭하지만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 집이 물자가 풍부한데, 하나님 선민들이 헌금할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옷, 그리고 여러 약재 등도 봉헌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 선민들이 하나님께 봉헌을 이렇게나 많이 하니 하나님 혼자서는 이 많은 걸 다 쓰지도 못하실 거야. 복음을 확장하는 데 일부 사용한다 해도 역시 다 사용하지는 못해.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리더 일꾼들이 어느 정도 나누어 가져야 하지 않나?’ 그는 이것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속으로 ‘부담’을 느꼈다. 그는 궁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이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으니 나도 좀 써야 해. 안 그러면 세상이 멸망할 때 이 많은 제물이 그냥 낭비되는 거잖아? 리더 일꾼에게 나눠 주는 것도 공평한 일이야. 하나님 집에서는 누구나 평등해. 우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으니까 하나님의 것이 우리 것이고, 우리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도 해. 내가 하나님 제물을 좀 누려도 별것 아니야.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니 그냥 쓰지 뭐.’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동했다. 그는 욕망이 조금씩 커지면서 제물에 눈독 들이더니 마음에 죄책감도 없이 물건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니 제물을 조금 누리는 건 별것 아니야. 설령 하나님이 아셔도 용서해 주실 거야. 우선은 좀 누리고 보자.’라며 자위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제물을 훔쳐 먹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건 좀 오래돼서 안 먹으면 상할 거야! 이렇게 많은 건 하나님 혼자 다 쓰지 못하시고,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부족해. 그러지 말고 내가 관리하자! 그것도 그렇지만, 이 많은 돈을 세상 종말의 날까지 다 못 쓰면 어쩌지? 우리 각자 좀 나눠 가지자.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구현되는 거야! 비록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이런 원칙을 주신 건 아니지만, 우리끼리 알아서 해도 되지 않을까? 이건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거야!’ 그는 허울 좋은 온갖 이유를 내세운 다음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 행동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죄책감도 점점 사라졌다. 아마 그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내가 써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이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너희 생각에 이것이 큰일이냐, 사소한 일이냐?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 일이 심각하다고 하는 것이냐? 이 일은 교제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교제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일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계된 일이고, 또한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척 큰 일이고, 그 성질도 무척 심각하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경고해야 할 건 무엇이겠느냐? 절대 하나님 제물에 눈독 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아니죠. 형제자매가 봉헌한 것은 하나님 집과 교회에 바친 것이니 모두의 공동 재산입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냐? 이 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에게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으면 이런 이론을 만들어 낸다. 이 일은 또 무엇에 관계되느냐?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은 하나의 공동체야. 여기가 좋은 공동체임을 보여 주려면, 이곳에 사랑과 포용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먹고 마시고 사용하면서 모든 물건을 평등하게 분배해야 해. 예를 들면, 누구나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똑같이 분배하고 똑같이 사용해야지.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도 차별하지는 않으실 거야. 만약 어떤 사람한테는 양말 한 짝도 없는데 하나님께는 많이 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그를 구제하셔야 해. 또 하나님의 그 제물들은 형제자매들이 봉헌한 거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시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에게 좀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이것이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사람은 강제로 하나님 물건을 차지하면서 허울 좋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이요,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똑같이 나눠 가지려 하는데, 어떤 물건이든 똑같이 나누려고 하면서 늘 ‘평균주의’만 외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대동적 세계, 인류의 조화, 아름다운 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나타나야 할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특히 하나님 집에서라면, 밥을 굶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밥 굶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말고 마땅히 하나님의 제물로 그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마땅히’라는 것은 관념이 아니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집도 여전히 가난해요.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하나님은 마땅히 제게 은총을 베푸시고 복을 베풀어 주셔야죠. 그래야 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죠!” 너는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바꾸려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자 사치스러운 욕망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이런 속셈을 품는다면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거래하는 사람이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양심과 이성이 없다. 다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사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행정 법령,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부당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이 나서서 저지해 주셔야 해. 그게 하나님의 구원이고 사랑이지.’ 이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사역해서 사람을 구원하느냐?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서 사람을 구원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 말고도, 하나님 생각에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사람의 양심과 인성이다. 만약 네 인성 안에 양심과 인격, 이성이 없으면, 그러니까 일이 닥쳤을 때 네 양심과 이성이 정상적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네 행위를 단속하고 규범화할 수 없고, 네 속셈과 관점을 교정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선 네 양심과 이성이 작용하게 한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너는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건 옳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겠어?’ 너는 진일보로 구하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진입할 것이다. 하지만 이 첫발조차 떼지 않고, 양심을 갖추지 못한 탓에 속으로 가책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그 모든 요구와 진리는 무엇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춘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방금 한 형제 얘기를 했는데, 그에게 만약 양심이 있고, 이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면, 시럽형 감기약을 보고 나서 그가 어떤 행동을 취했겠느냐? 어떤 태도를 보였겠느냐? ‘이건 하나님께 드리는 거니까 분명 좋은 거겠지.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릴 게 아니라 내가 마시자.’ 이런 생각이 든 순간, 그에게 만약 양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약병을 따서 첫 모금을 마셨겠느냐?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이냐? (양심의 지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그를 통제하고, 그의 양심이 작용했다면 이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첫 모금을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일의 결과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고 전혀 다른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그런 마음이 생긴 뒤 양심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병뚜껑을 따고 첫 모금을 마신 것이다. 그 후에는 가책도 참소도 없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자기 뜻대로 됐다며 즐거워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기회를 잘 잡는지 보라고. 당신들은 멍청해서 이런 일을 잘 모르지. 여문 생강이 매운 법! 누구 하나 이런 생각도 못 하고, 감히 이렇게 하지도 못할걸. 나나 되니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지. 그랬다고 어쩔 건데? 첫 모금을 마셨는데 본 사람 누가 있어?’ 그는 이득을 봤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한술 더 떠서 그것이 특별한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이 거듭될수록 돌이킬 수 없었고, 약을 끝까지 다 마실 때까지 그는 양심의 참소도,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양심과 이성의 경고가 전혀 없었다. “이 물건은 네 것이 아니야. 하나님이 마시지 않고 버리신다 해도, 개나 고양이에게 줘 버리신다 해도 너에게 준다고 하시지 않은 이상 사용하면 안 돼. 그건 네가 누려야 할 물건이 아니야.” 그의 양심은 이렇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냐? 바로 짐승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 양심이 없으면 그렇게 행동한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건만, 그 형제는 오래전에 이 일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기억력이 좋다면 아마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때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의 심각성과 그런 일을 저지른 성질이 무엇인지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규정하고 드러내고 도태시켜 이런 결말을 줄 때, 하나님이 규정하는 원칙과 근거가 무엇이냐? (그의 본성 본질에 근거합니다.) 양심의 지각이 없고, 이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조건을 갖추었겠느냐? 이런 본질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그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은 누구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 안에 담긴 뜻은 무엇이냐? (불신파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형제자매도 아니라 불신파이다. 그의 어떤 모습에서 그가 불신파임을 알 수 있느냐?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말하고 행동할 때는 전부 자신의 뜻, 자신의 관념과 상상, 기호를 따를 뿐,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양심의 작용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자기 이득만 챙기려 한다면, 그러고도 그의 마음에 하나님 자리가 있겠느냐? 전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행동과 말의 동기와 출발점, 방향, 그리고 그에게서 표출되는 것이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오로지 자기 이익, 자신의 목적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전혀 가책이나 단속을 받지 않는다. 그의 이런 행위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공기로 생각합니다.) 맞았다. 그야말로 딱 맞는 말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하나님이 사람 곁에서 언제나 사람을 감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런 단속도 받지 않고 행동했겠느냐?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게 하나님은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어떤 존재라 하든,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도하든, 하나님을 얼마 동안 믿고 어떤 일을 하고 얼만큼의 대가를 치르든 관계없이, 그의 언행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본성이 전부 드러난다. 그가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모독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난 왜 느껴지지 않지? 또 하나님 제물을 훔쳐 먹으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신다고 하는데, 여태껏 제물을 훔쳐 먹고 벌을 받은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이 무슨 사역을 한다는 거야? 사람을 또 어떻게 구원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나무랐지? 누구를 징벌했지? 난 본 적이 없어.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봉헌한 건 마음대로 써도 돼. 오늘 내가 맞닥뜨렸으니 이건 내 거야. 내게는 특별한 은혜지 뭐. 먼저 보거나 먼저 맞닥뜨린 사람이 임자고, 하나님이 그 사람한테 은총을 베푼 거야.” 이건 무슨 논리냐? 사탄, 강도의 논리다. 마귀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자에게 진실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듣고도 이렇게 마귀적인 말을 쏟아 내다니, 조금이라도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들은 설교는 다 어디로 갔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확신하고,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다. 비록 몇 년을 따르며 어느 정도 고생도 하고 대가도 치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막연한 하나님, 상상 속의 하나님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단지 공기로 정의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전혀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상대해 주시지 않는데 그 사람들은 왜 아직도 하나님 집에 남아 있습니까?” 그들은 힘을 쓰고 있다. 힘을 쓴다는 건 어떤 개념이냐? 진리에 관심이 없거나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지만 복과 맞바꾸려고 힘을 좀 들일 수밖에 없다. 비록 겉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욕을 퍼붓거나 대항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사탄 부류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별로 좋지 않은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속으로 이런 자들을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구원하지도 않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겠느냐? “너는 이 측면의 진리를 잘 모르니 잘 듣고, 저 측면의 진리를 모르니 열심히 묵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에게 말하겠느냐? 또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게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거나 그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많이 줘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줘야 하느냐?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것에는 원칙이 있다.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속 역사한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 혹은 진리에 닿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는 하나님이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지처럼 사방으로 떠돌아다닌다. 그에게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도 볼 수 없고,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일을 하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는 그저 힘만 쓸 뿐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다. 단지 그뿐이냐? 사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조금은 누릴 수 있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기도 한다. 그가 중병에 걸렸을 때도 하나님이 그를 낫게 해 주고, 심지어 그에게 특별한 재주를 베풀어 주거나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이적과 유사한 일을 행하거나, 특별한 일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정말 제대로 힘쓰며 교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념은 어떠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지요. 그럼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다가 다 쓰면 그냥 버리실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잊지 마라. 하나님은 창조주다. 모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어느 종교 어느 교파 사람도, 어느 인종에 속하는 사람도 하나님 눈에는 다 피조물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했다. 이 말은 창조주인 하나님이 일할 때의 한 가지 원칙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해서 최후에 그에게 어떤 결말을 주든, 혹은 그에게 결말을 주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할지 말지, 그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가 하나님 집과 하나님 사역을 위해 어느 정도 일하고 힘을 쓸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에 따르면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막연하고 어렴풋해서 있는 듯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저 성의를 다하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어느 정도 은혜를 베풀고, 현생에서 축복하고 보호해 줘서 그들이 하나님 집의 온기를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누리게 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현생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너그러우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으니 더 나아가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 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이건 사람의 관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데, 너는 그런 사람 마음에 하나님을 심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그에게 아무리 많은 진리를 교제하고 아무리 많은 말을 해 줘도 소용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은혜와 축복, 보살핌, 보호만 조금 베푸는 것뿐이다.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 은혜도 누리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깨우침과 빛 비춤까지 주시면 그가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진리를 알아듣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정해졌다. 그래서 하나님도 무의미하거나 소용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게 아니에요. 가끔은 그도 징계를 받거나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어느 정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사역에 관계된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갖추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도 속으로 다 생각이 있고,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 커다란 능력을 조금 나타내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기준이 있다. 사람은 반드시 진실된 믿음을 갖추어야 하고, 진리를 사랑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하는 것에도 기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평소에 심판과 형벌을 자주 받습니다.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일종의 기호가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어떻게 아니라고 확정할 수 있느냐? 구원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인데 그래도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내리겠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또 이 부분에서 사람의 오해도 있다. 너희가 볼 때 하나님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대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끔 맞닥뜨리는 것은 무엇이냐? (징계입니다.) 그렇다, 징계다. 하나님을 공기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전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결코 받아들일 리 없으며,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런 본질과 태도를 가진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들의 본성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려는 올바른 마음가짐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와서 복받기를 바랄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약간의 축복과 은총, 보살핌과 보호를 베푸는 것 말고, 어떤 방식으로 창조주가 해야 할 일을 하느냐? 바로 말씀으로 일깨우고, 경고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훈계하고, 책망하고, 꾸짖고, 징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는 사역은 여기까지이고, 이것이 한계다. 하나님이 하는 이 사역으로 사람에게서 거두게 되는 효과는 무엇이냐? 사람이 고분고분 단속을 받고, 하나님 집에서 착실하게 하나님을 위해 힘쓰고, 교란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것으로 그들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이냐? 그들이 받은 은혜와 축복, 보호와 보살핌,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 등이 그들에게서 성품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들의 성품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 사역으로 이루게 되는 효과는 무엇이냐? 그들이 행위에서 어느 정도 단속을 받고, 규칙을 지키게 한다. 겉으로 볼 때 조금 사람다운 모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말을 잘 듣고, 축복과 은혜 때문에 억지로라도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고, 규례와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따르며 일 처리하게 된다. 그저 이뿐이다. 이 정도가 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냐? 아직도 부족하다. 그들의 행동이 기본적으로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 원칙에 따라, 또 일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행위에 변화가 생긴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위에 변화가 생긴 이상, 그 성품도 변화에 이르게 한다면 그건 더 좋지 않겠느냐? (그들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닿을 수 없고, 이를 수 없다. 이것도 한 가지 원인이다. 가장 주된 원인이 무엇이냐? 그건 바로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아예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일부 알아듣는 사람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 말씀은 정말 좋은데, 안타깝게도 실행을 못 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게 수술대에 올라 심장 이식을 받는 것보다 힘들어요.” 자기 이익이 손해를 볼 때, 자신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 그는 마음이 심란해서 실행하지 못한다. 지쳐 죽어도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 내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는 영원히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진리입니까?” 그는 몰라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돈이 벌립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베풀어 주시나요? 종착지가 바뀔 수 있는 겁니까?”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진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가 어떤 의의가 있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 즉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이 그가 볼 때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 곧 창조주임을 모르고, 창조주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니냐? 일부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 생각과 관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 집에서 기꺼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기꺼이’에 따옴표를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느냐? 하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혹은 복을 받아야 할 필요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는 경우가 있다. 또 하나는 다른 출구가 없어서 억지로 잠시 이렇게 따르면서 약간 본분을 이행하거나 힘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 속으로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저 힘을 들이며 본분 이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축복과 맞바꾸려 할 뿐이다. 그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따르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은 시대를 끝내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비록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심장 이식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지 않는 것을 탓할 수 없다. 그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탓해야 한다. 그에게 그런 복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우선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 책망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관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심판과 형벌 역시 하나의 관문이고, 시련과 연단은 또 다른 관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못해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순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안주하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무척 사랑해서 진리를 얻기 위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과 책벌을 견디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관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높여 주심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해서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심판과 형벌을 겪고 난 뒤, 시련과 연단도 받아들이며 여전히 진리를 추구한다. 시련과 연단이 아무리 커도 거기서 하나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헌신하고, 책망과 훈계를 아무리 받아도 힘들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또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은 후 철저하게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된다. 이것이 하나님 사역을 겪은 뒤 도달하게 되는 최고의 단계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의 채찍질과 책벌이라는 관문만 통과한 사람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라는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분명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채찍질과 책벌이라는 단계까지만 하고 더 이상 역사하지 않고, 나머지는 사람의 선택과 자각에 맡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른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떤 뜻이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할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일, 미래, 집, 배우자, 감정 등 모든 것에 시달리는데, 이런 건 결과적으로 어떠냐? (진리와 무관합니다.) 그렇다. 진리와도 무관하고 하나님 사역과도 무관하다. 네가 그러는 건 쓸데없이 시달리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는 과정이 아예 없이 그저 발버둥치고 시간을 때우는 것일 뿐이다. 그건 연단받을 때의 시달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건 너 스스로가 자신에게 시달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너를 연단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래도 하나님이 너를 연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일방적인 착각일 뿐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연단받을 자격도 없다. 형벌과 심판이라는 관문도 아직 통과하지 않은 주제에 하나님에게서 시련과 연단을 바란다면 그게 가능하겠느냐? 구름 잡는 생각 아니냐? 시련과 연단이 일반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냐? 일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이 일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책벌한 뒤, 만약 그의 교만한 성품 때문에, 그의 강퍅함, 간사함과 사악함,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성품 때문에,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이나 많은 일에서 그에게 심판, 징계, 뚜렷한 채찍질을 하여 그가 하나님에게 징계받은 이유를 알게 한다. 이로써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생겨나고, 성품에도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진리에 대해 참된 순종이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이런 사역은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집에서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합격’에는 아주 많은 조건도 필요 없고, 그저 순종과 충성심 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우선은 그 사람 자체가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한다.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야 진리를 받아들일 선결 조건을 갖춘 것이다.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하나님의 채찍질과 책벌을 받아들일 때 진리를 구하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다음 하나님이 비로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절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만약 하나님 집에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하나님 주재에도 전혀 순종하지 않고 본분 이행에도 합격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잘 안 풀리거나 혹은 드러나거나, 혹은 책망과 훈계를 만났을 때 기껏해야 하나님의 책벌, 징계를 받을 뿐이다. 심판과 형벌은 아예 받지 않으며, 시련과 연단은 더더욱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과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사역하는 대상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사역을 하는지, 그리고 사람에게 역사할 때 사람의 생명 진입이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또 사람이 적어도 어떤 본질과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교제해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은 어떤 것이었느냐? 사람의 생각은 이렇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고, 곧바로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도 뒤따를 거야. 그러니 우린 항상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를 받으며 가정과 감정, 지위, 앞날을 박탈당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감정과 지위, 앞날 때문에 시달리는 거야.” 이런 말이 정확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중 단어 하나를 사람이 생각하는 영적인 용어로 바꾸는데, 왜 그런 것이냐? 사실 사람의 시달림은 발버둥치고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그것을 시련과 연단으로 생각해서 이를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말한다. 그건 커다란 착각이다. 이는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며, 전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오해가 아니겠느냐? 그건 오해다. 이런 오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에 의존하면서 이런 오해가 생겨난다. 나중에 사람은 그 오해를 여기저기 마구 선전하고 퍼뜨려서 결국 이런 ‘시달림’에 대한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사람이 교체된 것 때문에 소극적으로 지내는데 지위 때문에 시달리고 있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위 때문에 시달리는 것은 시련과 연단을 겪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위를 잃어서 감정적으로 좌절한 것뿐이고, 실패해서 내면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말하는 ‘시달림’이 하나님이 말하는 연단과 차이가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진정한 연단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느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내리기 전에 많은 준비 사역을 한다는 점이다. 일단 사람을 선택하는데, 하나님은 옳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하나님 눈에 옳은 사람인지, 그가 갖춰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얘기했다. 먼저 인성 면에서 적어도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하고,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책망과 훈계, 징계, 채찍질을 여러 해 겪어야 한다. 아마 너희는 징계와 채찍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여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징계, 채찍질은 비교적 무형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는 사람이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있으며, 특히 명확한 언어와 어조가 있어서 그게 어떻게 된 건지 다 알 수 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원칙을 위배했을 때, 혹은 함부로 굴었을 때, 혹은 독단을 일삼았을 때,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에 해가 되는 일을 했을 때 책망을 받는다면, 이것이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책벌과 징계는 어떤 것이냐? 예를 들면, 팀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충성심도 없고, 진리 원칙과 교회 규정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교체되었다. 이것은 책벌이냐 아니냐? 이것이 일종의 책벌이다. 표면적으로 교회에서 처리한 것이든 어느 리더가 교체한 것이든, 하나님 입장에서 그건 하나님이 한 일이고, 하나님 사역의 일부다. 이것이 일종의 책벌이다. 또한 사람이 평소 내적 상태가 좋을 때는 빛 비춤도 있고, 새로운 깨달음도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내적 상태나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사역을 엉망으로 하고 드러났다면 이는 책벌이냐, 아니냐? 이것도 일종의 책벌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심판과 형벌에도 해당하느냐? 아직까지 이런 것들은 심판과 형벌로 치지 않는다. 그러니 시련과 연단에는 더더욱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받는 책벌일 뿐이다. 책벌의 형태는, 때로 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마다 체면을 구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본인이 지금까지 잘해 오던 일에서 길을 찾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이 다 책벌에 해당한다. 물론 때로는 옆사람의 지적을 통해서, 혹은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사람이 망신을 당하고 속으로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책벌이다. 만약 하나님의 책벌이 있다면 이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좋은 일이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모두 좋은 일이다. 최소한 하나님이 너를 책임지고 있으며,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너에게 역사하고 일깨우면서 이끌어 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직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 담긴 한 가지 뜻은, 이후 하나님은 아마 계속해서 너를 책벌하고 징계할 것이고, 네가 좋은 태도를 보이고 옳을 길을 가게 될 경우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의 일은 얘기하지 말자. 지금은 하나님이 너를 여러 번 책벌하고 징계할 것이고, 그 후에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네가 순종하기 때문에, 네가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를 심판하고 형벌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가벼운 책망과 훈계는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만 아직 겪지 않았을 뿐, 이미 많은 사람이 겪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양심의 감각에 따라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가책을 받고, 하나님 말씀이 바로 귓가에서, 혹은 마음에서 일깨워 주고 있음을 느낀다. “난 그러면 안 돼. 그건 패역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이자 권면, 경고이다. 사람이 겪는 책망과 훈계에는 몇 가지가 있다. 리더 일꾼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형제자매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상부의 책망과 훈계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책망과 훈계도 있다. 아마 이런 책망과 훈계를 겪은 사람들은 많겠지만,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를 겪은 사람은 적다. 적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그럼 시련과 연단은 어떻겠느냐? 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 그 거리는 더 멀고 더 요원하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서 입가에 물집이 생겼어요.” “하나님께 심판과 형벌을 받았어요. 일 하나 잘못하고,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며칠 동안 두통에 시달렸죠. 이번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어떤 건지 알았어요.” 지금까지 사람이 해 오던 이런 생각들은 오해가 아니냐? 하나님에 대한 오해 중에는 이런 오해가 가장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오해한다. 이 오해가 일으킨 부정적인 작용 때문에 사람은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는 줄 아는데, 그건 완전히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는 일과 너무나 맞지 않다.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다다를 수 있겠느냐? 분명 거리가 있을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 책망과 훈계를 겪고, 말씀의 일깨움과 권면을 겪었지만, 그게 다다.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이 단계까지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째서 책망과 훈계, 말씀의 일깨움, 징계, 책벌은 심판과 형벌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이 겪은 말씀의 일깨움, 책망과 훈계, 책벌과 징계로 볼 때 그것으로 이룬 성과가 무엇이냐? (표면적 행위가 구속을 받았습니다.) 행위에 일부 변화가 발생했다고 해서 이것이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고, 설교도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성품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저희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행위만 조금 변화된 건 너무 가련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언제부터 저희를 구원하시는 겁니까? 언제면 저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몇 측면의 하나님 사역을 겪은 사람들이 어떤 수확과 변화를 거두었는지 한번 얘기해 보자. 방금 누군가 행위에 변화가 좀 있다고 했는데, 그건 좀 두루뭉술한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사람이 교회에 처음 와서 본분을 이행할 때, 책망과 훈계를 겪지 않았을 때, 사람은 모두 싸움닭 같고, 다 결정권을 갖고 싶어 한다. 마음속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어. 교회에는 인권과 자유가 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망과 훈계, 징계를 겪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한 후에는 감히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사실 그렇다고 완전히 점잖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개념이 좀 생기고 도리를 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다른 이가 하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면 옳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것이 많이 점잖아진 것 아니겠느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행위 면에서 일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온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권면과 일깨움, 그리고 위로를 받음으로써 변화된 것이다. 때로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징계, 책망, 훈계가 필요하고, 원칙을 교제해 주면서 이 일은 반드시 이렇게 처리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알려 주어야 한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 진리가 저기 놓여 있는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하나님이 최고이고, 진리가 최고이며, 하나님 집은 진리가 다스리는 곳이다. 이런 이론적인 기초가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깨어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원래는 미개하고 방종하고 전혀 단속받지 않고 행동하던 사람, 규칙이 무엇이고 하나님 믿는 게 어떤 건지 모르고, 하나님 집은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좋은 마음과 열정, 그리고 ‘위대한’ 포부와 바람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일깨움과 권면, 양육과 목양, 책망과 훈계를 받고, 또 여러 차례의 채찍질과 징계를 받으면서 점차 인성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어떤 변화겠느냐? 사람됨의 도리를 알게 되고, 자신이 과거에는 너무나 사람답지 못했다는 것을, 경박하고, 미개하고, 콧대 높아 누구에게도 불복하고, 말하는 것도 사람답지 않고, 행동도 버릇없고, 진리도 구할 줄 몰랐다는 것을, 하나님 믿는 일을 그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가면 되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 등을 인식하게 된다. 한마디로 미개함이 철철 넘쳤으면서도 그래도 자기는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충성,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다 사람의 상상에 해당하고 사람의 좋은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중 일부는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들을 전부 부인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진리를 최고로 여기고, 범사에서 진리가 다스리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한 이 말씀들이 내면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얼마나 크게 작용했든, 결론적으로 이 말씀이 옳은 말씀이고, 진리이고, 긍정적 사물의 실제임을 누구나 이론적으로 이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내면 깊이 받아들였다. 그 후에는 무형의 채찍질과 징계를 겪고, 의식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어느 정도 생겨난다. 처음 하나님을 막연히 상상하던 때부터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또 나아가 하나님이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러한 느낌을 가질 때, 사람의 사상 관점, 일을 바라보는 관점, 도덕적 기준, 그리고 사유 방식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너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간사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해도 속으로는 간사한 것이 안 좋다는 것도 알고,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범죄이고 사악한 성품이라는 것도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예를 들면, 지금도 너는 교만한 성품이 있다. 이따금 자제하지 못하고 자주 드러내고, 하나님도 자주 거역하면서 언제나 저 혼자만 잘났다며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자기가 모든 걸 결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이 패괴 성품임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비록 두드러진 변화는 없지만 행위에 이미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비록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아서 성품에는 아직 변화가 없지만, 너는 내면 깊이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밝히 알게 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것이 네 행위를 이끌고 바꾸면서 네가 갈수록 사람답게 살게 되고, 네 양심에 차츰 지각이 생기게 된다. 만약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르면 마음이 편치 않고, 그 일을 언급했을 때는 그렇게 무감각하지 않고 속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너는 뉘우치고 고치려 할 것이다. 비록 그 방면의 성품이 당장 바뀌지는 않지만, 네 내적 상태를 짚어 주면 너는 본인에게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음을 의식한다. 너는 내면에 지각이 있고 이 지각이 네 행위를 바꾸고 있다. 이런 변화는 단지 행위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변화가 진행 중이고, 또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이 성품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건 결코 성품 변화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다소 거북하게 느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큰 변화도 성품의 변화가 아니라고 하시면, 도대체 성품이 변화된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어떤 변화가 성품 변화에 해당합니까?” 이 문제는 일단 접어 두자. 조금 전에 얘기했던, 사람이 이미 이룬 변화, 즉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이 사람에게 일으킨 작용과 사람에게서 이룬 효과에 대해 계속해서 얘기해 보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사상 관점을 열심히 바꾸는 사람은 일을 만나면 이를 인지하고 대조해 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일은 진리에 맞지 않아요. 하지만 제 관점을 아직 내려놓지 못해서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이는 단지 의식한 것뿐이고, 네 관점이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이것이 네 관점이 바뀌고 그 관점을 내려놓았다는 뜻이냐? 그렇지 않다. 네 관점은 바뀌지 않았고, 너는 아직 그걸 내려놓지 못했다. 이것은 네 패괴 성품이 아직도 원래 그대로이고, 아직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네 의식, 네 내면에 이미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만 그렇고, 주관적인 바람일 뿐인데, 하나님 말씀은 아직 네 생명이 되지 않았고, 네 실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실제가 될 때, 너는 네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의 관점을 응용해서 일체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의 생명 진입은 어느 단계에 도달했느냐? 너는 이미 네 관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도 여전히 네 관점대로 살아가고, 여전히 네 관점으로 하나님 사역을 가늠한다. 네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이 네게 마련한 상황을 판단하고, 네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대한다. 이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황당하지 않으냐? 사람은 고작 그만한 도리를 깨닫고서는 하나님의 행사를 가늠하려 하는데 그건 너무 교만하지 않으냐? 너는 지금 단지 하나님 말씀이 좋은 말씀, 옳은 말씀이라고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표면적인 행위로 볼 때 너는 명백히 진리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판단하는 일을 하지 않고, 또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한 명의 이방인에서 하나님을 따르며 성도의 품위를 갖춘 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너는 근본적으로 사탄 철학, 사탄 이념, 사탄의 법칙, 사탄의 지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생명이 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인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기간에 네 행위, 네 일 처리 방식에는 분명 어느 정도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단지 행위와 방법의 변화, 내면의 염원과 의지의 변화일 뿐이고, 기껏해야 사상 관점의 변화일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아마 지금 너는 한순간의 열정, 한순간의 충동으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지만 네가 무척 꺼리는 일에서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하면 그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좋은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모든 걸 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기꺼이 흘리겠습니다. 제 한평생 후회도 원망도 없습니다! 결혼도 포기하고, 세상에서의 앞날도 포기하고, 모든 부귀영화를 다 포기하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방도 다 견디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이 네 관념에 맞지 않을 때는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는 가장 아끼고 마음에서 가장 내려놓기 힘든 것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무척 곤란해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평생 육적인 안일을 탐하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지도 좋은 옷을 입지도 않을 수 있고, 매일 정말 힘들고 고생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며 육체가 가져다주는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배가 네 관념에 맞지 않을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한다. 늘 반발하고 거역하면서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은 바치려고 하면서 어째서 하나님에게 진실한 말 한 마디 털어놓지 못하느냐?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하면서 어째서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에는 충실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위해 목숨은 바치고자 하면서 어째서 정에 휘둘려 행동하거나 인간 관계를 지킬 때 너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은 일어나 지키지 못하느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냐? 이미 하나님 앞에서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어째서 한 번 교체된 것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해서 몇 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하고, 마음에 반발과 원망, 오해와 소극성을 한가득 품느냐? 그건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속으로는 지위를 가장 아낀다는 뜻이고, 그건 네 치명적인 약점과 관계된다. 그래서 교체된 후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너에게 비록 행위 변화는 있지만 생명 성품 변화는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행위는 어느 정도 있지만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주 적고, 진실된 순종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많은 이들이 단지 행위가 변화되고 있고, 사상 관점에 변화가 생겼는데,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고자 하는 염원과 뜻을 가지고 있고, 마음속으로 원망도 없는 정도이다. 너희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었겠느냐?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너희가 전에 얘기한 그 체험 간증들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과는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도 못한다. 네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았다면 네 성품에는 변화가 시작되지 않은 것이고,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네가 생각하는 변화는 단지 행위상의 변화일 뿐이다. 행위상의 변화에는 너 자신이 협력한 공도 있고, 네 좋은 인성의 일면도 있고, 또 하나님이 역사한 효과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여기까지만 사역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후로는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주로 어떤 사역을 하느냐? (심판과 형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주된 방식은 심판과 형벌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은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왜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이 사역이 아직 사람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냐? 현재 사람의 내적 상태와 분량, 현재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한참을 못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역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사역할 수 없다는 말이 하나님이 더 이상 사역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아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무얼 하느냐? 교회를 정결케 하고 있다.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 적그리스도, 악령, 악인, 불신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자, 힘쓰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자를 모두 정리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정돈이라고 하고 키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정돈은 이 기간에 하는 주된 사역이냐? 아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그것 말고도 말씀을 통한 일깨움, 양육과 목양, 책망과 훈계, 책벌과 징계 등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너희들에게 역사한다. 어느 정도까지 하느냐?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기본 조건을 갖추었을 때, 하나님은 심판 사역을 시작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너희 추측과 판단에 의하면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시작하겠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은 다 때가 있다. 그는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의 경영 사역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가 하는 일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 모두 절차가 있다. 그 절차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각 단계 사역은 모두 이뤄야 할 효과가 있고, 하나님은 그 효과를 확인하면 다음 단계 사역을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효과를 낼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할지 하나님은 속으로 다 생각이 있다. 하나님은 함부로 하지 않고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한다. 사람에게서 효과를 낼 수 있는 일만 하고, 효과와 무관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 선민들의 분별력을 키워 줄 반면교사가 필요할 때는 교회에 거짓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악령, 악인, 그리고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를 나타나게 하여 사람에게 분별력을 키워 준다.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생긴다면, 그 사람들은 봉사를 다한 것이고, 그들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그때는 하나님 선민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교회는 즉시 그들을 정리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다 절차가 있고, 이 절차는 모두 사람 생명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이 안배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 교회에 왜 적그리스도, 악인이 나타나는지, 사람은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른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내버려두십니까?” 그러다 그게 다 사람에게 공과를 배우고 분별력을 키워 주기 위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 뜻을 깨닫는다. 처음에 사람은 악인에 대해 분별이 없어서 교회에서 악인을 출교시키면 관념을 갖는다. 그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출교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반감을 품는다. 그러다 한동안 체험이 쌓여 진리를 깨닫고 악인에 대해 분별이 생기면, 또다시 악인이 출교되어도 관념을 품지 않고 반감도 갖지 않는다. 다시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상황을 마주하면 분별할 수 있게 돼서 악인이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고발하고 제명시킨다. 그러면 악인은 하나님 집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사람의 이런 분별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하나님이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런 일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일할 때는 절차가 있다. 이 절차는 사람 생명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정작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 잘 모르고, 어리벙벙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속 사역하며 사람에게 많은 공과를 마련해서 배우게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효과에 이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하든 말든 인내심 있게 일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할 때, 한 번 잘못해서 책망했는데 다음번에 또 잘못하면 또 책망하고, 또 드러나면 또다시 책망한다. 사람이 인식이 생기고 더 이상 무감각하지 않으며, 비슷한 일을 다시 만나면 전기에 닿은 듯 예민해져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역사한다. 그러면 된 것이다. 하나님도 더는 역사하지 않는다. 다시 이런 일이 닥쳤을 때는 너 스스로 처리하고, 원칙에 맞게 처리할 수 있으니 하나님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는 네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네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절차다. 네가 그걸 체험하면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 이는 부인할 수 없으며 100% 확실한 사실이다.

방금 하나님의 사역 절차가 사람의 성품 변화와 관계가 있다고 얘기하였다. 사람이 행위가 좀 달라지고 규칙을 좀 알고 좀 사람다워지게 하면 하나님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두는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혜시대에 사역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성품 변화입니다.) 그렇다. 성품 변화야말로 진정 구원받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행위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성품상의 변화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기준이다. 방금 전 행위 변화를 나타내는 모습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 등은 명백히 행위상의 변화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탁에 충성심이 없고, 건성으로 대하고 속이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성품 면에서 아직 변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람은 그저 행위에서만 꽤나 바람직할 뿐이다. 비교적 성도의 품위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고, 비교적 인성적으로 행동하고, 존엄성과 인격을 어느 정도 갖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좋은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든, 그것이 진리 실행과 무관하고, 양심과 이성,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성품 변화와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아무리 규칙에 맞게 행동하고, 아무리 말 잘 듣고, 아무리 목숨을 바치고 의지가 크다고 한들 너희가 지금 나타내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 요구가 너무 높아서 그런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람이 지금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어째서 아직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너희가 볼 때 지금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이 순종이냐? (아닙니다.) 그렇다. 지금 말을 잘 듣는 건 단지 이성이 조금 있는 것일 뿐이고, 그건 다 하나님의 징계 덕분이다. 이는 완전히 하나님이 징계로 도달한 효과다. 하나님이 간곡하게 거듭 얘기해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고, 도덕성을 환기시킨 결과, 약간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기 시작하고, 개념 있게 행동하고, 무슨 일을 할 때 물어볼 줄도 알고, 원칙에 위배되게 행동하면 약간의 가책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요컨대 행위의 변화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는 조건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상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하나님은 사람의 성품 변화를 원한다. 성품 변화에 해당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냐? 여러 가지 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격이 되느냐?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특히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범사에 진리를 구해야 하고, 환난과 시련이 닥쳤을 때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감독하는 사람이 없거나 시험을 만난 상황이라 해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악행을 조금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눈에는 합격이고, 정식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한층 더 나아가서 그들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어떤 신호, 어떤 기준이 있는지 너희는 아느냐?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를 통해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조금씩 회복하고, 아울러 행위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고, 궁극적으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는 이 말에 동의하느냐? (동의합니다.) 훌륭하다. 하지만 이건 단지 그중 하나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하나님에게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우선 하나님의 부탁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즉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본분에 마음과 힘을 다하는지, 충성스럽게 이행할 수 있는지를 본다. 요컨대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삶, 사람이 일상에서 종사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이것을 하나의 조건, 하나의 평가 기준으로 삼겠느냐? 너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한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 사람이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부탁한 것인데, 사람이 양심이 있을 때 이를 대하는 방식과 양심이 없을 때 대하는 방식, 사람이 이성이 있을 때 대하는 방식과 이성이 없을 때 대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양심과 이성, 이것은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그 밖에 양심 지각이 좀 있고, 이성이 좀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회복하면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느냐? 진리 실제를 갖추게 되느냐? 여전히 부족하다. 하나님은 또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어떤 길을 가는지를 본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에 다다를 수 있느냐? 우선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악을 행한다면 완전히 끝장이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구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부탁을 대할 때 너는 양심과 이성으로 그것을 대하는 것은 물론, 더 많게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네게 닥친 일이 네 관념과 상상에 맞든 안 맞든, 너는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너의 순종하는 태도이다. 단지 하나님이 한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옳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이냐? 결코 아니다. 순종하는 태도의 실제적인 일면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너는 생명 진입도 깊지 않고, 분량도 아직 너무 작고, 진리 실제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도 아직 충분히 깊지 못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면,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너는 완전한 순종에 다다르기 전에 반드시 순종하는 태도를 먼저 갖춰야 한다. 즉,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진리이자 네 실행의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네가 원칙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규례로 여겨 지켜서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일종의 순종하는 태도이다. 아직은 네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진리를 많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볼 때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제 순종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틀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은 진리요, 공의다. 하나님은 잘못할 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이 하는 많은 일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제 관념에 맞든 안 맞든 무조건 말 잘 듣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설령 남들이 바보같이 순종한다고 너를 판단해도 개의치 말고, 속으로 하나님은 진리이고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이고, 순종하려면 당연히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지녀야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고 “저는 눈에 티끌 하나도 용납 못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저를 속일 수 없죠. 전 꽤 머리가 좋다고요. 저더러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죠! 뭐든 저한테 오면 우선 연구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제 뜻에 맞을 때라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게 순종하는 태도이냐? 이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순종하려는 마음가짐도, 순종하려는 의사도 없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라 해도 연구해야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저는 연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말씀해도 저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피조물인 건 맞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절 바보로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네가 말한다면 끝장이다. 이건 진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성도 없다.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짐승이 아니냐? 사람이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이성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를 측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생각 하나를 온 인류가 6천 년 동안에도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사람이 한순간에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해 온 많은 일을 이미 인류에게 밝혔다. 하지만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아마 네가 지금 문자적으로는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20년이 지나야 진정으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한 바와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마땅히 이성을 갖추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개미나 구더기에 불과한 사람이 창조주를 측량하고자 한다면 그건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비밀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진리를 직접 알기 쉽게 얘기해 주지 않고 늘 구하게 만든다고 원망을 늘어놓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고 비이성적이다.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 주는데, 너는 얼마나 깨달았느냐? 하나님 말씀을 너는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 사역에는 다 절차가 있다. 만약 하나님이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 말세 사역을 알려 주었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은혜시대에 예수는 죄인의 형상으로 온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 만약 당시에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너희도 그저 개념적인 이론만 조금 이해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 성품의 진정한 일면,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당시 행사의 출발점과 계획 등, 이런 진리는 사람이 절대로,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본질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걸 측량할 수 있겠느냐? 네가 창조주를 측량하려 한다면 그건 너무 비이성적이다. 너는 너무 거만하고 주제넘다! 사람은 하나님을 측량하려 하지 마라. 사람은 그저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충분히 얻은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이것이 이성이 있는 것 아니냐? 이것은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 이것이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갖춰야 할 조건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정해진 기간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개개인의 추구와 의지, 진리를 갈망하는 정도에 달려 있고, 개개인이 타고난 양심과 이성, 자질, 그리고 깨닫는 능력에 달려 있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춘 사람은 곧바로 언행과 행위에 한층 변화가 생긴다. 어떤 변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건 어떤 뜻이냐? 네가 자기 언행에 일부러 거짓말하는 성분이 줄어서 80%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간혹 나쁜 습성으로 인해, 환경이나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너는 죽은 파리를 삼킨 것처럼 속으로 여러 날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다음 변화가 생겨서 갈수록 거짓말이 줄어들고 내적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볼 때 너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면 성품이 변화된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아니다. 그건 단지 행위상의 변화일 뿐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행위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하고 속이려는 속셈이 없고 말과 행동에 거짓과 기만이 하나도 없다. 말과 행동이 갈수록 진실해지는데, 갈수록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어떤 일을 네가 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설령 그렇다고 인정하면 뺨 맞거나 벌 받는다고 해도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설령 얘기하면 큰 책임을 져야 하고, 죽거나 멸망할 수 있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할 수 있고, 이렇게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중 한 가지 실행 기준을 선택하는 일이 너에게 별로 문제 될 게 없고, 모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실행해 낼 수 있다. 외부 환경의 구속, 혹은 리더 일꾼의 지적, 혹은 하나님이 곁에서 감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도 스스로가 이미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외부 환경의 구속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라거나 양심의 가책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남들의 비웃음 혹은 감독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가 진리에 부합하는지,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너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기준을 이미 기본적으로 통과했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이다.

지금까지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조건에 대해 교제했다. 첫째는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고, 둘째는 순종하는 태도이고, 셋째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 조건은 어떻게 판단하느냐? 기준이 무엇이냐? (일부러 거짓말하는 경우는 적고 진실을 말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점, 이 한 가지는 너희가 판단할 줄 알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이다. 두 번째는 순종하는 태도이다. 순종에 포함된 세부 내용 중 주된 것은 하나님 사역에 대해 연구하지도 분석하지도 않고, 오로지 순종하는 태도만 가지는 것이다. 그 밖에도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여 거짓말이 갈수록 줄어들고,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말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관적인 면에서의 협력, 즉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최선을 다해 진리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은 사람의 주관적인 면에서 이루게 되는 효과이다. 정직하게 살 수 있어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이 역시 주관적인 면에서 사람이 열심히 추구해 도달하게 되는 효과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주요 조건이 있다. 우선 너희에게 단서를 줄 테니, 내가 말한 내용에 따라 묵상해 보면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을 때, 일생에서 사람이 잘못한 일이 많겠느냐, 적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행위가 많겠느냐, 적겠느냐?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거역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의 마음이 있는 것은 곧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양심과 이성, 이것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사람이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도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전혀 회개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어떤 인간이냐? 전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진실로 변화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이냐? (회개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조건에 관계된 것인데, 반드시 회개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동안, 사람은 어리석음과 무지 때문에, 또한 각종 패괴 성품 때문에 항상 패역을 드러내고,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원망을 품고 비뚤어진 길로 나아가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은 나머지 한동안 소극적으로 지내며 사역을 게을리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사람의 일생 중에는 어떤 단계에서도 패역 행위가 있다.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일이 닥쳤을 때도 하나님이 한 것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데, 겉으로는 순종할 수 있어도 내심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내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여기에는 한 가지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무엇이든 다 알면서도 자신이 한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 잘못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구하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전에는 말도 잘 안 듣고, 분량도 작고, 어리석고 무지해서 언제나 당신을 거역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제는 인식했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무슨 태도냐? (뉘우치는 태도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도 갖추었지만, 잘못한 일에서만큼은 반성할 줄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예전 일은 지나갔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어떤 행위냐? 이런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냐? (강퍅함입니다.) 강퍅함이고, 완고하게 외곬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옛날에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뭐라고 말했느냐?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악한 길에서 떠났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 이것은 사람에게 크나큰 기회다. 어떤 기회이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기회다. 본분을 이행하든 구원받기를 추구하든, 진실된 회개가 없이는 계속해 나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각 단계마다 하나님이 네게 징계하고 책벌하든, 혹은 일깨우고 권면하든, 너와 하나님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는데도 네가 뉘우치지 않고 계속해서 본인 생각을 견지하고 본인 관점과 태도를 고수한다면, 비록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너와 하나님 사이에 발생한 충돌,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와 원망, 패역이 해결되지 않고, 네가 마음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도태시킬 것이다. 네가 맡은 본분을 내려놓지 않은 채 여전히 본분을 지키고 있고,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충성심이 있어 사람이 볼 때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한 가지, 너와 하나님과의 의견 충돌이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네가 진리로 해결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날로 깊어지고, 언제나 하나님이 틀리고 너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뉘우치지 않은 것이다. 너의 패역과 관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줄곧 자리 잡고 있어 이로 인해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고,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대립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이 뉘우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나의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바로 창조주가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네가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창조주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이 너에게는 빈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네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너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의 마음을 지니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뉘우치지 못한 일이 많은데, 지금 뉘우치면 늦지 않겠습니까?” 늦지 않다. 한편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제가 뉘우칠 게 뭐가 있습니까? 예전 일은 이미 다 지나갔고 잊었는데요.” 하루라도 네 성품에 변화가 없고, 하루라도 네가 본인이 한 것 중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 하나님과 합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엉킨 매듭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이고, 이 일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성품이 네 내면에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각과 관점, 태도가 네 내면에 있으면, 적절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런 관점이 또다시 튀어나와 너와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또다시 폭발할 것이다. 그러니 예전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발생하는 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뉘우쳐야 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너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이것도 일종의 순종하는 태도다. 하지만 좀 더 적절히 말하자면,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고 창조주를 대하는, 일종의 뉘우치는 태도이고, “창조주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사실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네가 뉘우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혹은 패괴된 인류가 옳은 것이라고 공인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긍정적 사물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지닌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신분을 인정하고, 그의 본질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뉘우치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사람이 잘못한 게 없으면 뭘 뉘우쳐야 합니까?” 설령 당장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너는 미리 회개 방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네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진리다. 진리를 깨달으면 너는 부적절하게 처리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고, 속셈과 마음가짐, 즉 성품 방면에 관계된 문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부지불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라 너와 하나님 사이가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지만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서 자기 위치에 제대로 서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면 마음에 매듭이 생긴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느냐? 우선은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뉘우치는 마음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1~2년 리더를 했는데 자질 부족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고 실제적인 사역도 할 수 없어서 결국 교체되었다. 만약 그가 교체된 뒤에 순종할 수 있고, 또 계속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잘못되지 않았어. 내가 자질이 너무 뒤떨어져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마저 지체시켰어. 하나님 집에서 날 출교시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야. 난 정말 뻔뻔해. 계속해서 이 자리에서 버티면서 내가 정말 대단한 사역을 한 것처럼 생각했어. 너무 비이성적이야!’ 그가 자신을 증오하고 속으로 후회하는 것은 일종의 뉘우치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난 그 오랜 시간 리더 자리에서 지위의 복만 추구했어. 도리만 얘기하고, 도리로만 무장하고, 생명 진입은 추구하지 않았어. 이번에 교체되니까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부족한지 알게 되었어. 하나님은 잘못하시지 않았고 나는 순종해야 해. 전에 지위가 있을 때는 형제자매들도 참 잘해 주고 어딜 가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다들 아는 척도 안 해 주네. 사람들한테 버림받았구나. 이것도 당연한 거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이야.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지위가 어디 있겠어?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그건 결말도, 종착지도 아니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부탁은 나더러 높은 자리에 서서 그 지위를 누리라는 게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거야.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해. 비록 순종이 꽤 어렵지만, 그래도 순종해야 해. 하나님은 잘못 하실 리 없어. 설령 내가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해도 그건 다 진리가 아니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진리야!’ 그가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뉘우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양심 있고 이성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 평가가 높은 평가냐? 아직도 그리 높은 평가는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이성이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 입장에서는 이미 대단한 일이고,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주 잘한 일이다. 그다음 이 사람이 어떻게 추구해야 본인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바꿀 수 있을지는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만약 진정한 회개 없이 지위를 잃었다고 본분도 충성스럽게 이행하지 않고 건성으로만 임한다면 완전 끝장이다. 바로 도태될 사람이라는 말이다. 속으로 여전히 ‘내가 리더를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공은 없어도 내 딴에는 애썼어. 또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도 적지 않게 했어. 성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 어쨌든 빈둥대지 않았다고. 빈둥대지 않은 점을 봐서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대로 날 도태시키시면 안 되지. 이젠 지위가 없는데도 아직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네. 이건 사람을 갖고 노는 거 아냐?’라며 원망한다면, 교체된 후에는 어떤 본분도 이행할 의욕이 없다면 이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냐? 충성심도, 순종하는 마음도, 뉘우치는 마음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는 가련하지 않으냐? 너무나 가련하다. 그동안 그는 헛되이 믿은 것이다. 오랜 시간 설교를 들었어도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못했고, 남들에게 온통 글귀와 도리를 얘기했지만 자기는 전혀 행하지 못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남들에게는 숱한 도리를 얘기했지만 결국 자기가 안고 있는 그만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니 너무나 가련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으려 하느냐? 교체되고 나서도 거기서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시달리면서 전혀 순종하지 않았다. 이건 쓸데없이 시달리는 것이 아니냐? 네가 뭣 때문에 시달리든 전혀 무가치하다! 다른 건 둘째 치고 교회에서 너를 자리에서 교체하자 너는 화를 내고, 겨루었다. 이것만 봐도 너는 사람 될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피조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이치를 따지려고 하느냐? 네가 아무리 따지고 들어도 소용없다.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었으면서 그만한 순종도 없는데, 지금껏 하나님을 믿은 성과는 어디에 있느냐? 가련하고, 가증스럽고, 역겹다! 본인에게 주어진 자리를 벼슬로 생각했는데, 지위가 생겼다고 그것이 성품 변화를 의미하느냐? 그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냐?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너에게 맡긴 부탁을 벼슬로 생각하다니, 역겹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 벼슬이 어디 있느냐? 역대 성도 중에도 벼슬을 맡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했지만 그를 어떤 벼슬에 앉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벼슬’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건 상도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부탁도 아니니 내려놓아야 한다. 벼슬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칭찬할 수 있겠느냐?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 절대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려면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얘기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네가 창조주와의 사이에 구세주와 구속받은 사람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하나님에게 구원받고 싶다면, 반드시 네 위치를 바로잡고 네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위치와 지위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네 위치는 무엇이냐?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누구냐? 짐승이 아닌 사람이다. 언제든 너는 자신이 피조물이자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네가 서야 할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와 축복을 좀 베풀어 주면 너는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춘 채 너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위로해 주는 것은 너를 높여 주는 것인데, 너는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인간이냐? 이런 게 사람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 같은 피조물은 인정하지 않으니 한쪽으로 물러나라!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지도 않는데, 온전케 할 리가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온전케 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확실히 이해되지 않느냐? 그러니 뉘우치는 마음을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건 일종의 마음가짐인 동시에 일종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되고 싶다면 마땅히 갖춰야 할 중요한 실행 원칙이다.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가 올바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위대하지도, 영예롭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너는 하찮고 천하며 사탄에게 패괴된 피조물이다. 창조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다. 너는 벌써 구원받은 사람도,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이것이 네가 갖추어야 할 이성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은 합격한 본분 이행, 순종하는 태도,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 회개의 마음, 이렇게 네 가지이다. 너희가 이 네 가지를 잘 기억하면 일이 닥쳤을 때 자신과 대조해야 한다. 그것이 순종과 관계된 일이라면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요구하는데, 하나님 말씀에 대조해 보니 네가 아직도 멀었음을 알았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한다. 분석하지 말고 이치를 따지지 마라. 네가 이치를 따지면 하나님은 네가 역겨워진다. 하나님이 너를 역겨워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만회할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얼른 뉘우치는 것이다. 사소한 일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해서도, 그런 다음 계속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하나님을 모른 체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외면하고 원치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돌이키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말만 해 봤자 소용없다. 하나님에게 듣기 좋은 소리는 필요 없다. 하나님은 네 태도와 실행, 그리고 네가 앞으로 걸어가는 길과 네 모습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네 감언이설 몇 마디에 감동받는 평범한 사람으로 치부하지 마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태도를 본다. 네가 뉘우치면 하나님은 네가 강퍅한 사람에서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 하나님과 겨루지 않는 사람이 되었음을, 네 강퍅함이 조금 변화되고, 네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네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을 보고 곧이어 네게 어느 정도 일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 한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느낌에 의지하지 마라. 네 느낌이 정확하냐? 하나님이 너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느껴지더냐? 너는 하나님이 마음 아파할 때 느낌이 있었느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디서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네 느낌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느낌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느낌을 가늠하려 하지도 마라. 다 소용없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외면해서 네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깨우침도 얻지 못하고, 인정도 받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억해야 할 건 피조물의 책임과 본분을 계속 다하고, 사실을 말해야 할 때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외면하고 원치 않는다고 해서 예전의 거짓말을 다시 갖고 와서 여전히 과거의 방식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완전히 끝장이다. 그건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너는 본분을 지켜야 하고, 순종해야 할 때는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네가 뉘우친 것을 보고 하나님은 마음이 누그러지고, 너에 대한 진노와 분노를 조금씩 거두어 간다.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는 것이 너에게는 좋은 징조가 아니냐? 전환의 계기가 네게 주어진 것이다. 네가 느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안색을 살피는 데 집중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입장을 알고자 지나치게 요구하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맡겨 준 본분과 알려 준 실행 원칙, 하나님이 실행하고 걸으라고 알려 준 길에 따라, 이런 것들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이 널 어떻게 대하든 너에게 신경을 쓰든 말든 네 할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너란 사람을 인정할 것이다. 인정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하든, 너에게 신경을 쓰든 말든, 네게 은총과 축복, 빛 비춤과 깨우침, 보살핌과 보호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을 얼마나 느꼈든, 너는 끝까지 하나님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피조물이 지켜야 할 자리를 변함없이 지켰고, 하나님 말씀을 네 인생의 목표와 방향, 진리 그리고 인생의 최고 격언으로 삼았다. 이런 모습의 본질은 무엇이냐? 너는 속으로 창조주가 너의 생명, 너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심할 것이고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정상인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품 변화의 기본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바탕으로, 사람이 깨닫고 이루게 된 변화가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느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의 신분을 인정하고, 자기 본분을 책임지는 태도를 지니며, 진리에 대해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갖추고 나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할 것이다. 구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 걸 갖추면 성품이 이미 변화된 것 아닌가요? 이미 많이 변화되었는데, 뭘 더 심판하고 형벌하신다는 건가요?” 하나님은 무엇을 심판하고 형벌하느냐? 사람의 본성 본질, 즉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를 갖추고,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사람 내면의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었겠느냐? 변화된 것은 없다. 단지 약간의 행위 변화만 있는 것인데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직 근본적인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즉, 하나님이 너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기 전에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원히 문자적이고 표면적인 인식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자신의 패괴 본질과는 대조하지 못하는데, 괴리와 차이가 아주 크다.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기 전에는 아무리 네가 훌륭하고, 착실하며, 규칙을 잘 준수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생각하더라도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게 있다. 바로 네 성품에 아직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의 그런 실행 방법이나 방식은 단지 행위상의 변화로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인성일 뿐이다. 정직함과 순종, 뉘우치는 마음, 충성심 등은 인성에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들이고, 양심과 이성은 물론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기 전에 네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합격한 본분 이행, 순종하는 태도,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 회개의 마음, 사람이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추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이제는 다들 개념을 조금 잡았을 것이다. 사악함을 예로 들면, 사람은 늘 하나님을 시험하고, 뜬금없이 하나님을 연구하려 하며, 또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의문을 품고는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추측하며 늘 궁금해한다. 이는 사악함이 아니냐? 지금 자신의 어떤 내적 상태, 어떤 모습이 이런 성품에 해당하는지 사람이 알고 있겠느냐? 잘 모른다.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는 동안 하나님은 네가 자신의 추한 모습과 여러 내적 상태를 솔직하게 밝히게 하여 너 자신이 속으로 잘 알게 만든다. 물론, 자신을 솔직히 밝히는 게 그다지 창피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최소한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하나님 심판의 말씀과 하나님이 폭로하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고, 진심으로 수긍하게 하고 그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알게 한다. 그러면 너는 이게 다 네 내면에 있는 것이고, 일종의 행위나 일시적인 표출이 아닌 네 성품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는 동안 너는 계속해서 드러날 것이다. 네 패괴 성품으로 인해 책망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너는 고통받고 시달릴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사악한 모습의 일종이다. 사람은 자주 하나님을 의심하면서도 결코 그것이 사악함이라고 의식하지 못한다. 이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고 형벌할 때, 네가 하나님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이 사악함임을 알게 할 것이다. 너는 사악한 성품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사악한 성품으로 네가 믿는 하나님을 대하고, 네 하나님과 겨루며 그를 의심한다면 너 역시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너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네게 이런 패괴 성품이 있기에 하나님은 상황을 만들어 너를 연단함으로써 너도 모르게 자신의 관념과 상상, 논리적 사고, 사상 이론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때 너는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연단인데, 패괴 성품 때문에 연단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만약 네가 그것을 패괴 성품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인에게는 그런 모습이나 내적 상태가 없고, 본인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 자신에게는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심판할 때 네가 연단을 받겠느냐? (받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자신이 패괴 성품을 표출했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알고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데도 여전히 이치를 따지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면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연단이 이루어진다. 네가 하나님이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것, 자신이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못할 때, 네게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너희에게 지금 이런 고통이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적어도 패괴 성품에서만큼은 연단을 겪지 못했는데, 단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과오로 인해 꾸지람과 징계의 고통을 조금 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연단이 아니다. 만약 너희가 이런 삶에 진입하고 이런 길을 걸으며 “저는 더 이상 정이나 지위 때문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전 정말로 연단받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하나님과 합하지 않고 패괴 성품이 깊이 뿌리내려서 아무리 애써도 벗어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연단하시고 드러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네가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면 너는 구원받는 길에 접어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니 너희는 아마 그날이 오기를 갈망하고 기대하겠지만, 너희 중에 그런 대접을 받을 복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이는 분명 엄청나게 좋은 일이고, 엄청나게 큰 복이다. 사람이 구원받기란 쉽지 않다. 창조주가 정말 너를 마음에 들어 하고 너를 선택하여 그를 따르는 자가 되게 한다면, 그것이 네가 구원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창조주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고, 네게 그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걸어 나온 뒤, 성품에 변화가 생기고 창조주의 마음에 합하게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결과다. 지금은 너희 중 누가 그날을 맞이할 복이 있는지, 또 누가 이런 구원을 받을 복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외모를 보면 알 수 있느냐? 자질을 보면 알 수 있느냐? 교육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느냐?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느냐? 이런 것으로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 집안은 삼 대째 주님을 믿습니다. 저는 모태 신앙이고요. 그러니 전 분명 구원받을 수 있을 거예요.” 멍청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하나님은 그런 걸 보지 않는다. 대대손손 하나님을 믿은 바리새인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도태되었고,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성품 변화와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 많은 관념을 품는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진리를 자주 교제해서 해결해야 한다. 이는 아주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이유, 인류가 패괴된 정도, 심판과 형벌을 통해 해결하려는 문제와 이루려는 성과,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 등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하나님에 대한 관념, 패역과 대적이 생기기 쉬우며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며 온전케 되는 길을 갈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으로 도태되느냐? 이런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한다면 심판과 형벌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모두 해결되지 않겠느냐?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해결될 것이다. 남은 문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진리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희는 죄 사함을 받았는데 어째서 또 심판과 형벌을 겪어야 합니까?” 죄 사함을 받은 건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심판과 형벌은 사람이 죄와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완전히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을 속량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주었고, 하나님나라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한다. 이는 두 단계의 사역이다. 종교계에서는 수많은 엉터리 작자들이 늘 심판과 형벌에 대해 관념을 품고, 죄 사함이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며 물고 늘어지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거부한다. 이런 자들과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사람과 마주쳤을 때, 만약 그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거나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줘도 되지만 그가 한사코 진리를 거부한다면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구원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관념을 얼마나 가지고 있든 모두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진리를 많이 구하면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성을 갖추고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수많은 관념과 그릇된 생각, 소극적인 내적 상태가 생긴다. 그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소극적인 내적 상태는 ‘나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했어. 마땅히 매사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아야 해. 그런데 왜 나한테 환난이 임한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흔하게 보이는 내적 상태이다. 이 밖에도, 다른 내적 상태도 있는데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생활 여건이 좋고 잘 누리는데 자신은 힘들고 가난하게 산다면서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의 성과가 자신보다 뛰어날 경우, 질투하거나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의 가정이 화목하거나 단란해도, 다른 이의 자질이 자신보다 조금만 뛰어나도, 본분 이행 과정에서 약간 피곤해져도, 조금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겨도 소극적으로 변한다. 한마디로,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관념 상상에 맞지 않으면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추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도와주어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소극적으로 변하는 문제는 해결하기 쉽다. 그러나 만약 그가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서 늘 소극적이 되고 하나님께 관념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그를 한쪽에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뜻이 너무 강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 관념을 가지며, 개인적인 요구를 한다. 이는 너무도 비이성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범하는 것과 같지 않으냐?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혹자는 “저는 수시로 소극적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까지 저를 상대하지 않으시니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로군요!”라고 말하는데, 이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알고 있느냐?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지, 어떤 사람을 징계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언제나 인내와 긍휼과 은총만 베풀면서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전부 구원하고, 어떤 죄를 범했든 전부 사면하여 마지막에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 아니겠느냐? 만약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은 심판 사역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수시로 소극적이 되는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있다. 사람이 수시로 소극적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고 그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했는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 진리를 깨달아 소극적인 것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만약 사람이 수시로 소극적이 된다면, 이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임하면 바로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는 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겠느냐? 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이는 분명 그들이 하나님께 관념과 오해가 있으며, 게다가 한 번도 진리를 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진리를 대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상대할 리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겠느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한쪽에 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믿고 말고는 너에게 달렸다. 네가 진정으로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달하도록 노력하지도 않으면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가고 싶으면 속히 가라.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너에게 강요하지 않으니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붙잡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너는 분명 피조물이거늘, 언제나 피조물이 아닌 천사장이 되고 싶어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싫어하면서 늘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한다. 이는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이다. 너는 분명 평범한 사람이면서 언제나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지위와 신분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모든 것에서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라고, 큰 복을 얻고 모든 사람을 초월하려 한다. 이는 비이성적이다. 비이성적인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그런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지금 저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럼 저도 더는 힘을 쓰지 않겠습니다!” 누가 너더러 힘을 쓰라고 하더냐? 네가 힘쓰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강요하지 않으니 썩 물러가거라. 하나님 집에서도 잡지 않는다. 네가 기꺼이 힘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집에서는 요구가 있다. 네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네가 이행한 본분이 하나님 집에 가져오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반드시 너를 도태시킬 것이다. 네가 힘을 쓰고 싶어도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힘을 쓰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고 온전케 될 수 있다면, 이것은 어마어마한 복이다.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하나님이 네게 사정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너에게 사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할 때는 특정 대상을 상대로 선택적이고 원칙적으로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너는 합격한 본분 이행, 순종하는 태도,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 회개의 마음이라는 하나님의 이 몇 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정식으로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고, 정결케 하며, 온전케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심판과 형벌을 겪으려면 고통받아야 해!” 고통받는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 너에게 그런 자격이 없으면 그 고통도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역해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냐? 심판과 형벌을 거부하는 자, 심판과 형벌에서 도망치는 자는 결국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구든, 하나님을 대할 때 그의 태도가 어떻든, 하나님이 요구하는 태도와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 말씀은 거기에 있으니 네가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고 싶으면 해라. 하기 싫거나 못 하겠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에게 사정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너를 징계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싫다면 좋다. 너는 이미 어느 정도 은혜를 누렸으니 얼른 세상으로 돌아가거라. 강요하지 않으니 어서 가거라. 네게는 천국의 복을 누릴 자격이 없고, 그 복은 네가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여기에 담긴 뜻이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 일깨움과 권면도 없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제법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해도, 본분을 게을리해도, 멋대로 하나님을 판단해도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대적해도 속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제물을 훔쳐 먹고 남용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러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그렇게 큰 악행을 저지르고 몇 년이 지나도 반성하거나 전혀 회개하지 않고, 본인이 어떤 징벌을 받고 어떤 결말을 맞을지 예감하지도 못한다. 정상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일종의 예감이 그에게는 없다. 하나님이 그에게 전혀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태도의 일종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이미 완전히 포기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왜 포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경시한다. 그런 사람은 깃털의 무게에도 못 미치고, 개미보다도 가벼운 존재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의 결말은 이렇게 정해진다. 어느 날 그런 자가 “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을 저의 주님, 저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이런 사람도 있다. “저는 후회합니다. 지금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기회가 있느냐? 늦었다. 그는 본성이 마귀라 영원히 달라질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뉘우치고 아무리 목놓아 운다고 한들 달라질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제물에 절대 눈독 들여서는 안 된다. 훔치거나 쓰려는 생각조차 해선 안 된다. 정말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면 큰 화로 이어져 네 결말에 영향을 줄 것이다. 결말이 한번 정해지면,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아무리 떠올리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땐 이미 늦었다. 지금 하나님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결말이 이미 정해진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얘기하거나 누구에게도 알려 준 적이 없다. 본인들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허송세월하고 있다.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모르니 그야말로 머저리들이고 쓸모없는 것들이다.

두 가지 사례를 더 얘기하겠다. 먼저 얘기한 사례는 한 형제에 관한 얘기였는데, 이 두 가지 사역의 주인공은 두 명의 여성 리더였다.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둘 다 낮은 지위가 아니었다. 지위가 낮지 않기에 큰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한 이방인과 교류했는데, 그 이방인의 기업이 자금 융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파산할 지경에 처했다. 교회 리더인 이 여자는 현금을 지배할 수 있었기에 그 이방인은 그녀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상부에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거기서 몇십만 위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사람의 돈은 빌려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돈만큼은 제물에 해당하기에 누군가 하나님 제물을 건드린다면 징벌받아야 한다. 그 여자는 사적으로 제물을 유용한 데다 그것도 적지 않은 금액을 유용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교회에서는 그녀가 일을 해서 갚도록 처리했다. 이건 교회에서 처리한 방식이고 사람이 처리한 방식이다. 여자는 돈을 갚을 수 있었고, 겉으로 볼 때 썩 괜찮은 태도였다. 이것이 뉘우쳤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막가파식의 겁대가리 없는 멍청이 같은 그런 행위는 그의 성품,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사람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느냐?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느냐? 하나님 제물에도 감히 함부로 손을 대서 자기 돈이나 되는 듯이 처리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분배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손대면 안 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마음속에 원칙도 없고, 최소한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없었다. 자기가 리더니까 그 돈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감히 그 돈을 유용한 것이다. 그가 돈을 유용한 뒤에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했느냐? 하나님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았고, 교회에서 그녀를 처벌했다. 그녀의 결말은 이 몇십만 위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영원히 제거되고 버림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다면 그것은 선을 넘은 것이다. 행정 법령에 관련 조항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제물을 유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행위임을 하나님 선민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 여자가 제물을 유용할 때 하나님이 관여했느냐? 하나님은 관여하지도 막지도 않고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짓을 할 때, 제지하지도 질책하지도 않고 경고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돈은 빠져나갔다. 문제는 그 여자가 막 좋아하고 있을 때 드러났다. 그 여자는 교회에서 처리되자 훌쩍훌쩍 울었고, 그 뒤에는 일을 해서 돈을 갚기 시작했다. 사실상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돈이겠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돈이 아니라 그 일에서 사람이 드러낸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태도였다. 하나님은 이걸 중요하게 보았다. 사람이 바로 돈 때문에 하나님 성품을 거스른 일은 죽어 마땅한 짓이 아니냐? 당연한 것이다! 네가 조금 소극적이거나 연약하고, 혹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가끔 불순물이 섞이고, 혹은 때로 높은 자리에 앉아 지위의 복을 누릴 경우, 하나님은 이것을 패괴 성품의 표출로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의 제물에 손을 대고, 그것도 하나님과 상의하지도 않고 승낙을 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다면 이건 어떤 문제냐? 제물을 훔쳐 먹은 행위다. 그건 어떤 성품이냐? 천사장의 성품이요, 사탄 성품이다. 하나님 제물을 훔쳐 먹는 일은 배반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저지른 어떤 짓을 하나님이 배반이라고 했느냐? (하나님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그 여자는 하나님의 제물을 자기가 지배하려 했는데, 그건 자기를 누구로 생각한 것이냐? (하나님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렇다. 그녀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생각했고 바로 이 부분이 잘못이다. 그래서 그녀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성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성질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말이 사라진 것이다. 결말이 사라졌는데 이는 지금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의한 대로 나중에 어떤 징벌을 겪게 될지는 나중 일이다. 이는 둘 중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 여자는 간이 정말 컸다.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모두를 속이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지르며 뒷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얼마나 미련하고 경박하냐? 그녀에게 순종이 조금이라도 있었느냐? 구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제물, 하나님 물건을 지배하고 싶어서 어느 누구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누구와 상의도 교제도 하지 않고, 혼자서 전권을 행사하며 그 일을 처리했다. 처리한 후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제물에 손을 대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나요?” 그런 것이냐? 아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어떻게 분배할지와 관련해서 교회에는 원칙이 있는데, 네가 원칙에 따라 처리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다. 만약 원칙을 알려 줬는데도 원칙대로 하지 않고 기어이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지르며 따로 놀고, 사사로이 그 일을 처리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짓이다. 이것이 첫 번째 여자의 이야기다.

두 번째 여성 리더의 이야기도 제물에 관계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교회에서 교회당으로 사용할 건물을 하나 샀는데 건물에 인테리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인테리어를 하려면 설계도 해야 하고 자재도 사야 해서 돈이 들어간다. 하나님 집의 일이고 하나님 집의 경영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때는 당연히 하나님 집의 돈, 하나님의 제물을 써야 하며, 이 돈은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여자는 당시 리더로 있으면서 이 공사를 책임졌다. 그녀가 공사를 맡긴 사람은 갓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작자였다. 나중에 여자는 그 이방인과 결탁해서 고급 용품을 많이 사들이느라 돈을 마구 낭비했다. 이건 하나님 집의 돈을 편취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제물을 편취하고, 낭비한 것이다! 그 이방인은 거기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그가 그 돈을 쥘 수 있었던 게 그 여자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그건 그녀가 혼자서 성사시킨 일이다. 여자는 그 이방인이 그런 일을 하도록 허락했고, 문제를 발견한 누군가가 고발하려 하자 극구 만류하고 남을 위협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겨서 하나님 집에 손해를 안겼을 뿐 아니라 많은 제물에도 손해를 입혔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동안 하나님이 그녀를 질책했느냐?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지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지각이 없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몇 가지 사실로 증명이 된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처음부터 그 이방인이 뭘 하려는지 알았지만 제지한 게 아니라 방임하고 묵인하는가 하면, 계속해서 돈을 던져 주었다. 그 결과 갈수록 씀씀이는 커지고 결국에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자가 다 알고도 돈을 던져 주는 동안 하나님은 무슨 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하지 않았다. 이 일에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돈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하고 하나님이 당연히 그 여자를 저지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사가 끝난 후 하나님 집에서 조사를 해 보니 제물 손실이 상당했다. 그 여자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겠느냐?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교회에서 그녀를 처리해서 또 한 명의 여자가 돈을 갚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여자가 벌인 짓은 어떤 성질이냐? 리더가 되어서 제물을 사용하는 일에 책임감도 없고 제대로 점검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외부인과 결탁해서 하나님 집을 속이고 하나님의 제물을 편취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앞선 사례보다 더 심각한 성질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런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결정짓겠느냐? 멸망이다. 징벌하고 말고는 나중 얘기다. 이런 사람은 아마 언젠가는 하나님에 의해 악령과 귀신이 군거하는 곳에 버려질 것이다. 현세에서 육은 멸해지고 영혼은 더러운 귀신과 악령에게 짓밟히고 더럽혀질 것이다. 내세는 너무 먼 얘기이니 거론하지 않겠다. 이것이 바로 결말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그렇게 처리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는데도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겠느냐? 사랑도, 긍휼도, 자애도 없고 오직 진노뿐이다. 하나님은 그 일만 생각하면 증오가 일고 혐오감이 든다. 왜 이렇게까지 혐오하겠느냐? 그 여자는 참도임을 분명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속죄 제물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 어떤 결말과 종착지, 구원도 모두 사라졌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을 거스른 결과이다.

너희가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 쉬운 일이냐? 사실 그럴 기회도, 그럴 상황도 그렇게 많지 않다. 기회도 적고 확률도 낮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이렇게 기회도 적고 확률도 높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를 수 있느냐? 두 여자는 모두 20년 넘게 하나님을 믿고, 수년간 설교를 듣고, 리더 일꾼도 오래 했는데 어째서 이런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느냐? 인성 면에서 볼 때, 그녀들은 인성도 없었고, 양심과 이성도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면에서 볼 때, 그녀들은 진실된 믿음을 갖추지 못했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그녀들의 행동에는 ‘두려움’도 없고, 최소한 지켜야 할 선도 없었다. 그녀들에게는 이런 고민도 없었다. ‘일을 이렇게 처리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뒤탈이 생기지는 않을까? 일을 이렇게 처리한 후에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하나님이 아시면 어떻게 될까? 이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해. 이건 내 결말에 관계되는 일이야.’ 그녀들은 그런 일들을 생각할 줄 몰랐다. 이건 문제가 아니냐? 그런 일들을 생각할 줄 몰랐다면 그녀들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었겠느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를 수 있었고, 그토록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 만약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 경우 그는 고민할 것이다. ‘돈을 빌려 달라고? 이건 하나님의 돈인데, 한순간 그에게 우러름 받을 생각으로 돈을 빌려줬다가 그가 갚지 못하게 되면 그 돈은 무슨 수로 메우나? 설령 메울 수 있다 해도 돈을 빌려주는 건 무슨 행위지? 하나님의 돈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돼. 만약 손을 댄다면 그건 무슨 성질일까?’ 이런 걸 고려해야 하기에 다른 사람이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얼떨결에 빌려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려하지 않거나 고려했지만 그런 결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본 것이냐?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 것이냐?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그건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결말을 정할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보응할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걸 겁내지 않고, 보응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일반 사람에게 믿음이 50~60% 있으면 신중히 행동하고, 행위에 구속을 받는다. 믿음이 30%라면 아마 구속을 좀 받지만 기회가 생기면 아무래도 제 뜻대로 할 수가 있다. 기회가 많지 않거나 기회가 무르익지 않으면 자제할 수 있고,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의 성분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온갖 나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짐승이다.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하는 짓은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짐승이라 할 수 있고, 더 심하게 말하면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러 온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일 수도 있는데, 하나님 사역을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내린 규정이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너무나 정확하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잘못된 게 없고,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아주 정확하다. 아울러 하나님은 일하고 사람의 결말을 규정할 때 사람의 일시적인 모습만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두 여자는 20년 하나님을 믿고도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결말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는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바, 그들이 선택한 길을 볼 때,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은 그들이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의 인성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성의 변화는 그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겠느냐? 행동에 절도가 생기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생기고, 판단 기준이 생기고, 정상 인성의 이성과 사유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알게 되면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두 여자는 진리를 추구해 본 적이 없었고, 이런 최소한의 선, 그런 사유조차 없었다. 그녀들은 무슨 일이든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었는데, 이런 본성은 그녀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게 바로 그녀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신앙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된 원인이다.

두 가지 사례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오늘 정말 커다란 수확을 얻었습니다. 최고의 진리를 얻었습니다. 하나님 물건은 절대 손을 대서도 안 되고, 눈독을 들여서도 안 되고, 절대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건드렸다가는 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냐?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네가 그 물건을 건드리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속으로 하나님에 대해 지니는 태도다. 네가 하나님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고, 정말 자신의 결말을 생각한다면 어떤 일들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시험에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두려워하는 게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다. 그렇다면 그 두 여자가 그런 짓을 벌이는 동안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일이 전개되도록 내버려두었는데, 그 두 마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곤 전혀 없는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사탄의 시험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그녀들이 철저하게 드러나고 파멸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가 아니냐?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니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람을 처리하고 사람에게 보응할 때는 사람의 수단을 쓰는데, 바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최저선과 원칙이 있고, 하나님만의 방식이 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보응할 때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기에 너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하나님 손에서 다 해결이 되었다. 몇 년이 흐른 후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고통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깨우침과 빛 비춤, 혹은 하나님이 정상 인간에게 누리도록 베풀어 주는 모든 대우를 앗아간 뒤에는, 그 사람은 완전히 비인간적이 된다. 하나님 눈에는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라 짐승이자 다른 종이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했다. 이런 자는 악인이냐, 선인이냐? 둘 다 아니다. 하나님이 볼 때, 하나님의 명부에서 이런 자들은 이미 삭제되고 없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뭐라고 정의하느냐? (짐승이자 인간의 탈을 쓴 금수입니다.) 아직도 어떤 자들은 부러워할 것이다. “밖에서 일하고 돈 벌면서 이방인들하고 같이 지내면 사는 게 얼마나 편안한데요. 교회에서처럼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본분 이행하며 고생할 필요도 전혀 없고요.” 너에게 알려 주겠는데, 그의 힘든 날은 뒤에 있다. 하나님 집에서 막지 않을 테니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 해도 좋다. 사람의 힘든 날은 육적인 질병과 같은 고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 고통이 어느 정도에 달하면 사람이 형용할 방법이 없다. 이를테면 정신적인 타격, 특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은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다. 이것은 더욱 극심하며 마음의 고통에 속한다. 그 두 사람은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지르고 하나님 성품을 거슬러서 그런 불행을 맞이했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사람이 어떤 과오를 범하고 어떤 짓을 하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큰 사랑은 끝이 없고, 하나님이 진심으로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사람의 관념이며, 이걸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는 너무 많은 상상과 너무 많은 사람의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규정한다면 하나님이 일을 할 때에는 원칙도 없고, 하나님은 아무런 성품도 없는데,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실로 존재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고 확실하게 존재하고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이 모습은 그가 사람에게 하는 여러 가지 일,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로 나타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처리해도 본인은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까?” 방금 얘기한 사례들을 보면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정말 공기와도 같다면 그가 하는 일은 원칙과 최저선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텅 비어서 사람의 생활 속에서 실행될 리 없고 사람의 생활, 사람의 행위 및 어떤 모습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이론, 일종의 주장,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많은 일을 통해 사람에게 그의 태도를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사역에 대해 갖는 각종 관념과 상상의 큰 줄기는 거의 다 교제했다. 큰 줄기는 주로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 품은 갖가지 관념 상상과 생각, 그리고 성품 변화에 대한 갖가지 관념 상상이 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는 원칙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대해서도 사람은 많은 상상을 품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람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개념이 흐릿하고 명확하지가 않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아직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이 사역들과 관계된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심판 형벌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대해 기본적으로 대략적인 정의를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인식이 생겼으면 그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먼저 하나님에게 이런 요구 기준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요구 기준은 유연한 것이냐? 좀 높아도 되고, 낮아도 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은혜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을 보면 이 기준이 엄격하고, 잘 규정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영원히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2천 년 전에도 그것을 바꾸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온전케 되는 사람이 그때보다 더 많아질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말씀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역도 조금만 했고, 사람에게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 진리가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아주 많은 진리를 사람에게 알려 주어서 하나님 뜻을 아주 많이 알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기준과 진리를 선포해서 사람에게 알게 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역사하며 협력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결부해 보면 이 시기에 하나님은 아주 많은 사람을 온전케 하고자 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한두 명이 아니라 한 무리를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 이 정보에 비추어 볼 때 너희 대부분은 온전케 될 희망이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한번 노력해 보자. 실패할지언정 지금은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지금 무릎을 꿇는 것은 어떤 모습이냐? 겁쟁이, 쓸모없고 무능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태도다.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온전케 되는 조건과 기준을 모두 명확하고 알기 쉽게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으니 그다음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사역을 어떻게 실행하고 거기에 협력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기간에 몇 번을 실패하든,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라. 자신은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네 자질이 부족한 걸 하나님이 모르겠느냐? 본인 자질이 부족하다고 인정했다면 하나님 눈에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교만하고 독선적이어서 자기 자질이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네가 인정할 수 있는 건 잘한 일이고 좋은 태도다. 어떤 사람은 체험을 얘기하면서 본인의 인성이 부족하고 나쁘다고 인식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인식이 없느냐? 자기 인성이 부족하고 나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건 네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자신에게 대조할 수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말이다. 최소한 너는 솔직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이방인들 중에 자기를 안 좋게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안 좋아도 다들 좋게 말한다. 그가 행한 악행을 매우 좋은 일, 커다란 선행으로 포장하는데 사실 관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좌절을 만나도, 아무리 실패하고 넘어져도 앞에 놓인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에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 말씀이 인도하고 이끌어 주면 사람은 바른길을 갈 수 있다.

오늘은 세 가지 사례를 얘기해 보았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여러 가지 관념과 상상을 알기 쉽게 교제해 보았는데, 잘 이해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너희가 알아들었다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받아들일 자질과 그릇을 갖추었다는 뜻이고, 그러면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이런 진리들은 어째서 한두 시간, 두세 시간으로는 명확히 얘기할 수 없는 것이냐? 앞에서 사전 내용을 충분히 얘기해야 뒤에서 세부 내용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전 내용부터 얘기하지 않으면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너희가 따라오지 못한다. 내가 사전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얘기하면 너희가 알아듣는 데 무척 애를 먹는다. 나는 너희가 이해하고, 분별하고, 이런 일이 과연 어떻게 된 건지, 사람이 어떻게 순수하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도록 사례를 먼저 소개한 다음 다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얘기했다. 너희가 여기에 이를 수 있다면 내가 얘기한 보람이 있다. 사람이 이 방면의 진리를 듣고 개념을 좀 잡는 데서부터 이 방면의 진리를 철저하게 인지하기까지, 하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했고, 하나님이 말씀한 이 측면의 진리가 네 어떤 방면의 패괴 성품에 관계되고, 하나님이 왜 너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지 마음속 깊이 알게 된다. 이 정도까지 깨달으려면 한 단계가 걸린다. 너는 이런 진리를 자신의 패괴 성품과 언행, 생각과 연관 짓고 실제와 결부해서 대조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느새 그 진리들을 차츰 깨닫게 되고 거기에 눈이 뜨일 것이다. 만약 대조해 보지 않고, 오늘 받아 적고 내일 꺼내서 보고 외우고, 외운 다음에는 못 들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 주게 되면 너는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얻은 게 아니다. 네가 도리를 얘기할 줄 알게 되는 날부터, 그 진리는 너에게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마치 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진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한번 도리로 변한 진리는 네게서 효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너는 진리를 자신의 실제가 되게 해야 한다. 모든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구하고 교제함으로써 점차 본인에게 구현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진리에 몇 가지 측면의 내적 상태가 있고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 깨닫고, 하나님이 한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이래야만 진리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너희가 지금 깨달은 것은 무엇이냐? (도리입니다.) 진리를 막 접했을 때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일종의 도리이다. 하지만 도리를 깨닫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사람에게 일정한 자질도 있어야 하고, 이해 능력도 있어야 한다. 집중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평온하고 한결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이 ‘당신은 지금 쓸데없이 어떤 일에 대해 얘기하시는데,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아요. 저는 설교를 듣고 싶지 어떤 일에 대해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라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내 얘기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졸음이 쏟아지고, 이해가 안 되고, 따라오지 못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고 자질도 부족하다. 영적인 사람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 듣고 싶지 않아서 물도 마시고 하품도 하면서 계속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하는 얘기는 외부적인 일이라 너무 깊이가 없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영계에 관한 얘기가 내 입맛에는 딱인데.’ 일부 사람들은 이런 태도였다. 그는 리더 자리에 오래 있어서 고차원적인 설교나 거창한 이론, 삼층천의 언어를 좋아하고,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점점 신이 났다. 만약 교회 내부의 일이나 실제 체험한 일을 얘기하면, 특히 사람의 심리적 움직임을 해부하는 얘기를 하면 늘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의욕을 잃곤 했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이런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느냐? 이런 사람이 사역을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런 사람이 좋으냐? 진리 교제는 현실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좋아할 수 있느냐? 내가 볼 때는 아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는데 아주 위험한 것이다.

2018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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