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6) 제 3 부

이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의 주장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요구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해 큰 너그러움과 넓은 도량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겠느냐? 사람이 이 말대로 행동하려면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참아야겠느냐! 욕심도 바람도 없어야 하며, 또한 적게 누리면서 많이 고통받고 대가를 치르고 일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해도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되며, 그럭저럭 괜찮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이것이 고상한 덕행의 특징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도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까? 이는 가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인데, 이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볼 때는 다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교만해!”, “저 사람은 못됐어.”, “저 사람은 이기적이야!”, “저 사람은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해!”, “저 사람은 너무 게을러!”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조금 게을러도 괜찮아. 나는 자질이 좋으니까 게으르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잘한다고!’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단점을 꼬치꼬치 따지고 트집을 잡지만, 자신을 대할 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으면 베풀고 대충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고 요구한다면 이것 때문에 얼마나 괴롭겠느냐?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느냐? 몇 명이나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도 해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모두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있고, 이기적인 존재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사탄 철학을 신봉하는 데 열을 올린다. 또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신봉한다. 만약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고 무슨 일이 임하든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네 이익을 취할 때 기쁘게 “제 몫을 취하셨군요. 저는 당신과 따지지 않을 겁니다. 저라는 사람은 속이 넓어 당신을 뭐라 꾸짖지도 않을 거고, 보복도 하지 않을 거예요. 충분히 이득을 취하지 못하셨다면 더 가져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하라고 요구한다면 이것이 현실적이겠느냐? 몇 명이나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패괴된 인류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느냐? 단언컨대, 이 현상은 좀 비정상적이다. 어째서 비정상적이라고 하겠느냐? 패괴 성품이 있는 사람, 특히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은 모두 자신을 위해 이익을 좇고 다투지, 절대 다른 이를 생각해 주면서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현상이 비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관한 말은 사회 도덕 학자가 인성의 배경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에게 제시한, 사실과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임이 분명하다. 이는 쥐한테 구멍을 파지 말라고 하고, 고양이한테 쥐를 잡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요구가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칙에 어긋납니다.) 이런 요구는 분명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무척 공허하다.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그대로 행할 수 있겠느냐? (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행할 수 없으면서 남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슨 문제겠느냐? 좀 무책임한 것 아니겠느냐? 적어도 무책임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는 외식하는 것이다. 분명 스스로도 행할 수 없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관대하고 마음이 넓은지, 도덕적으로 얼마나 고상한지를 표방하니, 이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말하든, 이런 말은 아주 공허하고 거짓의 의미가 들어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외식하는 말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말과 유사한 것으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과시하는 것으로, 자신은 덕행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표방하거나 사람들에게 덕행이 고상한 모범, 본보기로 추종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인류 가운데서 어떤 부류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교사나 의사가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숭배하는 공자, 맹자, 노자 등 소위 성인이나 명인, 위인들이 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제기한 그 주장이 아무리 황당해도, 그 요구의 성립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 또한 사람의 품격과 행위 측면의 요구에 불과하다. 적어도 사람은 그 요구를 실행하고 싶어 하지 않고, 요구에 이르기가 쉽지도 않다. 그것은 사람이 정상 인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덕행에 관해 제창한 하나의 기준이자 요구이다. 그것이 무척 공허할지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할지라도, 그 요구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나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주장과 같이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속셈과 동기를 갖고 있든, 정말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든 없든, 결국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이 자신을 도덕적인 정점에 올려놓는다는 것에 근거하면 그 사람은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비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것 아니겠느냐? 네가 그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겠지만, 정말로 실행하라고 요구하면 해내지 못한다. 어째서 해내지 못하겠느냐? 그에게는 교만한 성품, 사탄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와 지위나 권세, 명리를 놓고 다툴 때 그에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지키라고 한 다음 그가 실행하는지 보아라. 그는 절대 해내지 못하고, 게다가 너를 외면할 것이다. 네가 “당신도 실행할 수 없는 말을 왜 했습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요구를 했죠? 당신은 외식하는 사람 아닙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가 승복하겠느냐? 네가 폭로해도 그는 승복하지 않는다. 어떻게 폭로해도 승복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좋은 작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실행할 수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자는 그야말로 사기꾼이고, 외식하는 위선자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것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나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말처럼 사람의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이 측면의 덕행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지, 실행 가능한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나 준칙이 될 수 없다. 어쩌면 네가 정말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하며, 무슨 일을 하든 남을 먼저 고려하고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굴지도 않아 매우 공평무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네게는 사회적인 책임감과 도덕심이 있어 네 주변 사람들, 너와 함께하고 왕래하는 사람들 눈에 고상한 인격과 인품을 지닌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네 행위는 한 번도 어떤 질책이나 비난을 받을 일이 없으며, 언제나 큰 칭찬, 나아가 감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눈에 비치는 너는 진정으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러한 겉모습,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일치하겠느냐?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 목적이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어둡고 사악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그 목적이 어째서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인성이 패괴 성품에 통제되고 조종되기 때문이다. 인성의 모든 생각, 그것은 사람이 말하든 말하지 않든,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부정할 여지 없이 패괴 성품에 주도되고 통제되고 조종당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속셈과 목적은 음험하고 사악하다. 사람이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든 없든, 이 측면의 덕행을 겉으로 제대로 보여 주든 그렇지 않든, 그의 인성은 이러한 덕행에 영향을 받거나 통제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럼 진정으로 인성을 조종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가려진 인성 본질,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모습이다. 사람의 본모습은 곧 사람의 인성 본질이다. 사람의 인성 본질이란 과연 무엇이겠느냐? 주로 사람의 기호, 추구,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진리를 대하거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들만이 사람의 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다. 단언컨대, 무릇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욕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마음속의 지위와 명망, 사회적인 지명도를 추구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지위욕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이 좋은 덕행에 가려진 가운데서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그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전부 그들의 패괴 성품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며, 패괴 성품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누군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행할 수 있든 없든, 제대로 해낼 수 있든 없든, 그의 인성 본질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바로 그것이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좌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위장과 가식에 능한 사람이고, 좋아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미혹하는 사람이며, 본성이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이다. 또 이런 사람일수록 지위와 권세를 깊이 사랑하고 추구한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옳아도,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추구와 본성 본질, 심지어 야심은 언제든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훌륭해도 인성 본질을 가릴 수는 없고, 그들의 야심과 욕망을 가릴 수도 없으며,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추악한 본성 본질을 가릴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은 더없이 황당하다. 또한, 야심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과 행위로 차마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야심과 욕망을 숨기려 시도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교회의 적그리스도나 악인들에게 대입해 보아도 좋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공고히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심지어는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팔아치운 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치른 대가와 겪은 고난 중 일부는 평범한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와신상담의 정신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추구 목표는 지위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상이다. 그들이 행한 것 중 진리와 관련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든,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과연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이 표면적으로 살아 낸 좋은 행위로 그들의 결말을 정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행위와 모습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그러면 상대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 속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을 실행했다고 해서 절대 그들의 덕행을 기억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야심과 그들이 지위를 추구하면서 걸어간 길 때문에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마땅히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준칙을 분별해야 한다. 이 황당한 판단 기준을 철저히 부정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지 등에 근거하여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성을 지녔는지 정의 내려야 한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오류가 생기거나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 쉽다. 네가 사람에게서 온 원칙과 논조로 다른 이를 그릇되게 분별하고 바라본다면, 그 일에서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을 바라보는 근거가 옳지 않아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전혀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서로 적대되거나 다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굳이 그 논조를 준칙으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함으로써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확정 짓고자 한다면, 진리 원칙을 완전히 위배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분명 과오를 범할 것이며, 잘못을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들을 분명히 하고 나면 하나님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근거와 원칙, 준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너 자신의 각도에서 보면 어떻겠느냐? 너는 최소한 무엇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아야 정확한지, 어떤 준칙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진리에 부합하고 사실 진상에 부합하며 절대 오류나 잘못이 생기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정말로 알게 된다면 전통문화의 것들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사람의 논조나 이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전통문화에서 온 것들과 사람에게서 비롯된 각종 주장, 관점을 철저히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바라보고 분별하는 데 진리 원칙이 생기며,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거나 하나님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다. 또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는 동시에, 사물의 본질이나 사람의 본질을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확증을 얻어, 사람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각종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규정이 모두 옳고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확증을 얻는 동시에 당연히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에 점점 더 믿음과 인식이 생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사람이 마땅히 살아 내야 하는 실제임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는 과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얻는 과정이다.

진리 추구의 목적은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람 내면의 인성과 생명이 점차 변화한다. 최종적으로 봤을 때 이 변화가 바로 수확이다. 여태까지 너는 전통문화를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잘못을 깨달았으니 더는 그러한 각도에서 일을 바라보지 않으며, 전통문화를 근거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겠느냐? 아직도 모르겠다면, 이는 네가 아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어떤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네 근거와 방법, 준칙과 원칙을 말할 수 있다면, 또 그 진리 원칙들로 사람을 분별하고 대할 수 있다면, 그때 진리는 네 내면에서 역할을 한 것이고, 그것은 네 사상이나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진리가 네 내면에 뿌리를 내려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진리가 네 내면에서 하는 그 역할은 최종적으로 네게 어떤 도움을 주겠느냐? 그것이 네 처신이나 네가 선택하는 길,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주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 처신이나 네가 선택하는 길에 영향을 준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가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겠느냐, 아니면 멀어지겠느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분명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면, 갈수록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겠느냐, 아니면 의혹과 오해를 품고 억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겠느냐?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이 기꺼운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너는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는다. 진리가 네 내면에서 역할을 하고 너는 그것에 대해 확증을 얻는다. 너는 만사와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숨겨진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부합한다는 확증을 얻는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실증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이 커질수록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점점 더 정상이 되고, 너는 갈수록 기꺼이 피조물이 되길, 하나님이 너의 주재자가 되길 원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성분 또한 점점 많아지게 된다. 이 관계 개선이 어떠하냐? 좋지 않으냐? 이는 훌륭하고 양호한 발전 결과이다. 그럼 나쁘고 악성적인 발전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존재를 점점 더 믿지 않고, 하나님께 오해와 의혹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것이다. 결과적으로 너는 어떤 일에서든 확증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지 못함은 물론이요, 갖가지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경계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데 그래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럼 그다음 어떤 상황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한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이 눈앞에 다가왔다.”라고 하면 너는 “저는 보지 못했는데요!”라고 하면서 믿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면 훗날 좋은 종착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 너는 “좋은 종착지는 어디에 있지요? 안 보이는데요!”라고 하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 되면 뭐가 좋은가요? 얼마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죠? 정말 복이 있나요? 그게 복받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할 것이다. 또 하나님이 “너는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주재하시나요? 왜 저는 느끼지 못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주재하신다면 왜 저를 가난하게 하신 건가요? 왜 제가 병까지 걸리게 하신 거죠?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데 왜 제 일은 이렇게 순조롭지 않은 겁니까?” 네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께 진정한 믿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각종 일이 임할 때 원망만 늘어놓으면서 전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악성적인 결과로 바뀌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재하신다면 제 병을 바로 낫게 해 주시고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게 해 주셔야 할 텐데 지금 저에게 임한 일들은 왜 이렇게 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겁니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나마 있던 막연한 믿음조차 사라져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악성적인 결과, 악과(惡果)이다. 너희는 그런 지경에 이르고 싶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지경까지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이 모든 비결과 방법은 진리 안에 있고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너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고 인도하는 방법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고, 너는 하나님이 배치한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확실히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체험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근거를 찾게 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게 되어 네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에서 실행의 원칙과 실행의 방법을 찾게 된다. 네가 그 방법대로 실행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네 내면에 들어가 생명이 되고, 너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에서 살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고,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입장과 관점, 시선으로 일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할 것이며, 네가 점점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진리를 더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으며, 진리에 관심이 없다면, 어느 지경까지 가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마지막에 최악의 결과는 아무리 믿어도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느끼지 못하며, 많은 일을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만을 인정할 뿐, 구원받을 희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보지 못한 채 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여전히 막연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논조인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네 번째 덕행의 주장은 무엇이냐?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데는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한발 물러나서 마음을 넓게 쓰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분쟁을 그치고 편안하게 지내려는 일 처리 방식 아니겠느냐? 서로 끝없이 보복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평생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100살까지 살든, 수백 살까지 살든 인생은 짧디짧게 느껴지는 법이다. 온종일 복수며 살육 같은 일만 생각하며 지내면 내면세계에 평안함이 없고 삶도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 원한을 덕으로 갚기로 한 것이다. 사람이 평생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해를 입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데 늘 보복이나 증오의 정서 속에서 살아가면 하루하루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덕가들은 사회 풍조와 사회 안정, 단결을 위해 이것을 출발점으로 사람들에게 하나의 도덕 준칙을 제시하여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고, 증오하거나 살육하지도 말고, 원한을 덕으로 갚는 법을 배우라고 훈계했다. 한때 너를 해한 사람일지라도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한다고, 지난 악감정을 잊고 정상적으로 지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를 감화시켜 증오감을 없애고 사람과 사람 사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렇게 하면 조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 너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직장 동료든, 너는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지,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조금씩 사랑을 보여 준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말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상상에 기대어 하는 말 아니겠느냐? 아름다운 세상이라니, 대체 뭐가 아름답다는 것이냐! 누가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지, 누가 이 인류를 패괴시키고 있는지 보아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덕행의 주장이 무엇을 바꿔 놓을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꿔 놓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 주장도 사람의 덕행 품격에 관해 제기한 특정 요구이자 사람에 대한 특정 규범으로, 사람이 증오나 살육 같은 문제를 직면했을 때, 증오와 살육을 내려놓고 평안한 마음으로 자신을 해한 사람을 대하며, 덕행으로 증오와 살육을 사그라뜨리고 살육을 줄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 덕행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한 역할을 한다. 또 어느 정도 증오와 원한을 불식시키고 원한으로 인한 살해를 줄이는 등 사회 풍조와 치안, 사회의 조화로움에 일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일조의 전제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거기에는 하나의 큰 사회 환경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다. 먼저, 사람에게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력이 있다면 ‘내가 복수하려는 그 사람은 나보다 세력이 강할까, 약할까? 만약 내가 그에게 복수한다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복수에 성공해서 그를 죽인다면 나한테 죽음의 화가 미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먼저 이런 결과를 따져 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따져 본 후에 깨닫는다. ‘그는 지지자가 많고 사회적으로 세력이 커. 게다가 잔인하고 악독하지. 그한테 해를 입었어도 복수할 방법이 없으니 꾹 참는 수밖에. 하지만 이번 생에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야.’라고 말이다. 옛말에 “원한이 있는데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라고 했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런 처세 철학이 들어 있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처세 철학은 한 측면으로는 사회 환경이나 사람의 패괴 성품과 매우 깊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생겨났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꾹 참으면서도 겉으로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처럼, 증오와 원한에 의한 살인을 내려놓은 것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는 양측의 힘 차이가 현저하여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복수한다면, 온 가족이 죽음의 화를 입고 상상하기 힘든 결과가 초래될 테니 그렇게 꾹 참고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한이 사라지겠느냐? 원한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큰 원한의 경우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상대가 네 가족을 죽이고 네 집안을 풍비박산 내며 네 지위도 명예도 땅에 떨어뜨려 네가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인성에 갖춰져 있는 것으로, 인성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증오를 품는 것은 무척 정상적인 일이다. 그것이 혈기에서 비롯되었든 아니면 본능이든, 그것도 아니면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이는 매우 정상적이다. 개도 누가 자기한테 잘해 주고 먹여 주고 도와주면 그 사람을 따르고 믿으며, 누가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히면 그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는 건 물론이요, 냄새나 목소리만 비슷한 사람을 봐도 싫어한다. 개조차 이런 본능이 있는데 사람은 어떻겠느냐! 사람의 생각은 동물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렇기에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나 억울한 일이 임했을 때 마음속에 적대감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원인이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럭저럭 양보하며 안전을 꾀하고, 분노를 꾹 참으며 당장은 그 화를 삼킨다. 이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한 측면으로는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한,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회의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보자면,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지 않고 복수하고 원수를 살해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어쩌면 구속될 수도 있고, 징역을 살게 될 수도 있으며, 심각할 경우 사형 판결이 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면 사람이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나 억울한 일을 직면했을 때,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하든, 아니면 사회적, 법적인 구속력이라는 각도에서 보든, 마음속 깊은 곳, 또는 머릿속에서 원한을 아예 지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말로 공격을 당하거나 놀림이나 비방을 당하는 등의 작은 상처 앞에서도 사람은 원한을 덕으로 갚지 못한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이 인성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괴롭힘 당하고 상처를 받을 때, 인성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것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기꺼이, 기쁘게 “저를 괴롭히세요! 당신은 세력이 강하고 악독하니 마음대로 저를 괴롭히십시오. 저는 원한을 덕으로 갚을 것이니, 당신은 제 고상한 인격과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절대 복수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어떤 감정을 품지도 않을 거고, 화를 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전부 농담으로 여기겠습니다. 당신이 한 말들이 아무리 제 인격을 모욕하고 제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제 이익을 침해할지라도 괜찮습니다. 마음대로 말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정으로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다. 당장 원한을 품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이미 훌륭하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원한을 덕으로 갚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특수한 배경에 제약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거나 날조했거나 거짓으로 지어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이 심각한 박해나 피해를 입으면 원한과 보복 심리가 생긴다. 원한이 너무 커서 심각한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거나 바보가 되어 원한에 대한 지각이나 반응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무릇 정상 인성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차별하고 깎아내리고 조롱하고 비웃고 빈정대고 피해를 주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나아가 자신의 인격이나 존엄을 짓밟고 유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누구도 지난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기꺼이 덕행으로 거짓된 보답을 하지 못한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주장은 패괴된 사람에게 더없이 보잘것없고 무력하며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사람의 패괴가 아무리 깊을지라도, 악인이나 상대적으로 인성이 선량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타인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최소한의 존중을 해 주기를 바란다. 만약 누군가 아무 이유 없이 항상 네게 아부한다면 너는 기쁘겠느냐? 좋겠느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왜 좋지 않겠느냐?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느냐? 항상 ‘나를 세 살배기 어린애로 아는 건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한가? 내가 그런 일을 했나? 괜히 왜 나한테 아부하는 거야? 역겹지도 않아?’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람은 아첨하는 말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런 말은 상대에게 일종의 모욕이다. 사람은 최소한의 존중 외에도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길 바라느냐? (진실되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진실은 고사하고, 괴롭히지만 않아도 괜찮다.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존중하고 괴롭히지 않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공평하게 대해 주기를 바란다. 만만해 보인다고 괴롭히거나 네가 별로라고 멀리하지 말고, 늘 네게 아첨하거나 아부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는 다 역겨운 마음이 들게 한다. 너는 그저 사람들이 너를 공평하게 대해 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으냐? 공평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사고의 범주에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이상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보아라. 사람들은 왜 포청천을 좋아하겠느냐? 모두가 포청천의 판결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가 전부 허구이고 마음대로 꾸며 낸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것을 좋아하겠느냐? 어째서 그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겠느냐? 사람은 이상 세계 속에서, 사고의 범주에서,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긍정적인 세상, 상대적으로 좋은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상대적으로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모두에게 이런 환경이 보장되어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네가 악한 세력에게 괴롭힘 당할 때, 정의를 펼치고 억울한 상황을 호소할 곳이 있으며, 또 그런 권리도 주어져서 최종적으로 억울함을 풀 수 있고, 어떤 굴욕이나 억울함도 품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억울함을 풀 곳이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아니겠느냐?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바다. 사람은 공평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지, 어떤 불공평한 대우도, 혹은 그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도 호소할 곳이 없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을 무척 괴롭게 하는 일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요구 기준은 실생활 속 인류의 패괴 실상과 거리가 무척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덕행의 요구는 사람의 뜻에 맞지 않으며, 객관적인 사실이나 실생활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상주의자가 제시한 주장이기도 하다. 이 이상주의자들은 치욕을 참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취약 계층의 심리가 어떤지 이해하지 못한다. 취약 계층이 아무리 억울한 일을 겪어도, 그들의 존엄과 인격이 아무리 큰 굴욕을 당해도, 심지어는 그들의 신변 안전에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이 이상주의자들은 이런 실정을 알지 못한 채 그들에게 분쟁을 마무리 짓고 편하게 지내라고, 보복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모욕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사회의 하층민으로 태어났고, 노예 감입니다. 남에게 억압받을 운명을 타고났다고요. 그러니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원한을 덕으로 갚으십시오. 사회 풍조와 사회 안녕을 위해 힘을 보태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당신의 인성 중 가장 좋은 덕행을 펼쳐 사회에 기여하세요.”라고 말이다. 이는 하층민들에 대한 통치 계급과 사회 상류층의 착취를 변명하고, 그들에게 편리를 제공해 주고, 그들을 대신해 취약 계층의 심리와 정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목적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법률과 사회 제도, 그리고 모든 종족과 민족의 규정, 제도가 공명정대하다면, 인성 법칙에 어긋나고 비객관적인 이 주장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통치 계급과 권세를 지닌 악인들이 취약 계층을 착취하고 짓밟도록 길을 열어 주고 편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는 취약 계층을 위로하여 복수하지 못하게, 부자나 상류층, 통치 계급을 적대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소위 사상가, 교육가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덕적인 정점에 서서 사람들에게 좋은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는 기치를 들고 이 주장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 갈등을 증폭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사회가 더 불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회가 공평하다면, 이런 주장으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하고 요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사회나 사람들 사이에 공평성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법적인 제재를 받고, 국가의 법이 권력보다 크다면,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성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공직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서민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부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빈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은 서민이나 빈자, 사회 하층민을 대상으로 제기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도덕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예를 들어, 네가 공직자에게 “당신은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면 공직자는 “제가 무슨 원한을 갚겠습니까? 누가 감히 저를 괴롭힐 수 있죠? 누가 감히 제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저에게 ‘아니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감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를 죽이고 그의 집안을 쓸어 버리며, 구족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보아라. 공직자에게는 원한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당신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덕행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덕행을 갖춰야 한다고요.”라고 하면 그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사람을 기만하는 거짓말이다. 어떻게 말하든,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말은 사회 도덕 학자들이 사회의 하층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주장이며, 나아가 사회 하층민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주장이다. 그 목적은 통치 계급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또한 통치 계급에게 잘 보이는 데 있다. 그리하여 사회 하층민들을 계속 노예처럼 부리는 것, 그러니까 대대손손 노예로 부려도 원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이런 사회의 법률과 제도는 확실히 불공평하며, 진리가 주권이나 권세를 잡고 있지 않고, 공평과 공의가 권세를 잡고 있지도 않다. 반대로 사람의 사악함과 권세가 주권을 잡고 있다. 누가 공직자가 되든 마찬가지인데, 서민이 공직자가 되어도 똑같을 것이다. 이는 이 사회 제도의 본질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라는 말에서는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이 말은 명백히 정치색을 띠고 있다. 이는 통치 계급이 사회 하층민들을 더 잘 통치하고, 부리기 위해 제시한 덕행 측면의 요구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요구는 인성의 정상적인 요구나 필요에 맞지 않을뿐더러 인성의 인격이나 존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의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이 요구는 진정한 인성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이는 행할 수 없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아예 제시해서는 안 되는 요구이다. 그것은 통치 계급이 국민들을 더 잘 통치하고 통제하기 위해 제시한 주장이자 하나의 수단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주장을 제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율법시대든 은혜시대든, 지금의 하나님나라시대든 하나님은 이런 방식과 주장, 혹은 요구에 의거하여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한 적이 없다. 사람에게 덕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의 덕행이 어떠하든, 덕행과 관련된 이 주장들은 하나님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오직 사람의 본질이 어떠한지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의 주장은 하나님 집에서 성립하지 않고, 분석할 가치도 없다. 네가 원한을 덕으로 갚든 원한을 복수로 갚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원한을 갚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겠느냐?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이 일을 바라보고 대해야겠느냐?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 보자.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고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는 원칙이 있으니 누구도 손을 뻗어 다른 이 대신 원한을 갚고 불평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집에는 그런 일이 없으니 교회에서는 당연히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이러한 각도에서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로서, 교회에는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는 원칙이 있고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히 말해 주고 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상응하는 징벌을 받는다. 단, 언제 어떤 징벌을 받을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징벌하는 원칙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과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공의 성품,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 있으며, 위엄과 진노가 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님께 상응하는 징벌을 받을 것이다. 이는 법률보다 높고 인성보다도, 세상의 법보다도 높다. 이는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일도, 인성의 바람에 부합하지 않는 일도 아니며, 더욱이 모두가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르게 하기 위한 일도 아니다. 네가 도덕적인 정점에 서서 이 일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는 데는 하나님의 원칙과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행할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겨야지, 사람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과 무관하다. 그럼 ‘원한을 갚는’ 일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겠느냐? 혈기로 일을 처리하거나 상대에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네게 잘못을 저지르고 너를 괴롭히고, 나아가 너를 해치고자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처리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일에는 모두 방법과 원칙이 있고, 의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있다. 어찌 됐든, 원한을 덕으로 갚는 덕행의 주장 역시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원한을 덕으로 갚을 수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를 가리켜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무던하며 다른 사람과 따지지 않는다고, 도량이 넓고 덕행 면에서 봐 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인성이 과연 어떤지, 이 주장으로 판단하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려면 그가 추구하는 바와 걸어가는 길,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2022년 3월 26일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관련 콘텐츠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