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5) 제 1 부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를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다음 사람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제해 주셨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측면과 관련해 깨달아야 할 진리의 원칙을 중점적으로 교제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진리 추구와 관련해서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하는 화제이자 부정적인 화제, 즉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행위에 관해 교제하였다. 이 화제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든 후 하나님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요구에 관해서도 몇몇 예를 드는 등 기본적으로 이러한 세부 내용을 교제하였다. 큰 항목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의 인식이나 실행, 진리에 대한 이해 등에 관련된 세부 내용이 적지 않았다. 오늘 다시 한번 간단히 되짚어 보자. 사람이 생각하는 옳은 행위를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냐? 종합적인 결론과 개괄적인 정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결론을 냈느냐? 예배 때 이 일에 관해 교제한 적이 있느냐?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차례 교제를 통해,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좋은 행위는 그저 하나의 행위일 뿐 진리가 아니며, 그런 행위는 전부 사람이 자신을 위장하는 수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종합한, 외적 행위에 관한 결론을 보면, 이 행위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냐? 이 좋은 외적 행위들이 과연 사람의 본질과 관계가 있겠느냐? 이 좋은 외적 행위들은 사람의 눈에 몹시 적절하고 보기 좋아 보인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과 칭찬을 받게 하고, 좋은 인상과 평가를 남기게 한다. 그러면 이 좋은 인상이 사람이 지닌 패괴 성품의 본질과 일치하겠느냐?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좋은 행위의 성질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그저 외관상의 행동과 포장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외관상의 행동과 포장이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다고 여기는 행위는 그저 사람의 외관적인 행동과 포장에 불과하다고, 바로 이런 성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도, 정상 인성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표면적인 행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숨기고, 사람의 사탄 본성 본질을 숨기며, 사람의 눈을 기만한다. 사람이 이런 좋은 행위를 실행하는 목적은 오직 남들의 호감과 우러름, 존중을 얻기 위해서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솔직하게 함께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며, 사람답게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좋은 행위들은 내면에서 비롯된 정직한 행동이 아니며, 정상 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도 아니다. 이 좋은 행위들은 결코 사람의 본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부 사람의 위장, 가장에 속하는, 패괴된 인류의 장식품으로, 인류 죄악의 본질을 가린다. 이것이 사람의 좋은 행위의 본질이자 그 이면에 숨겨진 진상이다. 그럼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지난 두 번의 교제에서 우리는 사람이 행위 면에서 살아 내고 행동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했는지 언급했다.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기한 이 요구들의 전제는 무엇이냐? 기본 조건은 무엇이냐?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배경과 전제로 제기한 요구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제기한 요구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부 정상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제기한 요구들이다. 그럼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에 최소한 갖춰져야 할 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제시한 예시 중에는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자제할 것, 방탕하게 굴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등이 있었다. 또한, 은혜시대에는 인내하고 포용할 것 등을 언급했다. 하나님이 제기한 이런 요구들이 하나의 행동에만 국한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준칙을 제시했다. 준칙이란 무슨 뜻이냐? 요구 기준이다. 한 사람으로서 어떤 것을 살아 내야 정상 인성을 갖춘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제기한 그 요구들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가 언급한 것들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중 일부에 불과하다.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등은 전부 정상 인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요구로서, 진리보다 낮고 진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본적인 기준이다.

우리가 방금 종합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었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를 실행하거나 살아 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눈에 정상 인성을 갖춘 자로 보일 것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느냐? 그 사람이 행위와 행동, 살아 내는 부분에서 이미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준칙을 갖추고, 정상 인성의 기준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진실한 신앙이 있든 없든, 만약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며 다른 이의 이익을 점하면서 입으로 늘 상스러운 말을 한다면,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 체면 등의 이익과 관련될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다른 사람을 때리고 상처 입힐 수 있다면, 심지어 간음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면,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로 인성을 살아 내는 부분에 여전히 이런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인성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비정상입니다.) 네가 이방인을 판단하든,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든, 하나님이 제기한 이 행위 기준은 그저 인성을 판단하는 최저 기준,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얼마간 버리고 헌신하며 대가를 치르지만, 하나님이 제기한 행위 기준에는 늘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서 그런 사람에게는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모습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성을 살아 내는 것조차 인류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이르지 못하니, 인성이 무척 뒤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악평을 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최소한의 판단 기준은 바로 그의 행위가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에 미치는지 보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자제하는지, 언행에 성도의 품위가 보이는지,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남의 이익을 점하지는 않는지, 가족이나 형제자매를 대할 때 사랑이나 포용, 인내를 보이는지, 부모를 대할 때 힘닿는 만큼 책임을 다하는지, 뒤에서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는지 등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인성이 과연 어떠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일단 신경 쓰지 마라. 먼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는지, 그의 언행이 하나님이 제시한 행위 기준에 이르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제시한 행위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살아 내는 정도에 따라 그의 인성에 ‘평범, 부족, 매우 부족, 최악’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순서대로 배열하면 정확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나 공공장소에 있을 때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등 나쁜 손버릇을 보인다면, 그의 인성은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손을 뻗어 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욕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그저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며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원하는 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은 부모나 형제자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 심지어 이방인 친구들한테까지 그런 말을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귀가 더럽혀질까 봐 피하고 싶어질 정도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인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항상 돈만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 잘 먹고 잘 입는 사람, 가정 형편이 여유로운 사람이 있으면 늘 그의 이익을 점하려 하고, 말을 빙빙 돌려가며 뭔가 얻어 내려 한다. 혹은 공밥을 먹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공짜로 쓰거나 물건을 빌리고 안 돌려준다. 그가 점한 이익이 크지는 않아서 횡령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손버릇이 나쁜 이런 행동은 정말 비열하고 치사하며, 사람들에게 멸시당한다. 더 심각한 사람들은 미색에 눈이 멀어 수시로 이성에게 추파를 보내고 간음까지 저지르며 남녀 관계에서 죄를 짓는다. 이런 사람 중에는 싱글도 있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나이가 많은데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더 심각한 경우는 동성의 몸에 관심을 갖고 집적거리는데, 그야말로 역겹기 짝이 없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가 모든 것 위에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뒤에서 자주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보거나 부처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우상을 숭배한다. 또 어떤 이는 바늘로 인형을 찌르면서 남을 저주하고 접신을 하는 등 사술을 부리는데, 이는 더욱 심각한 행위이다. 이런 자는 불신파에 속하며,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행하는 일의 내용이 가볍든 무겁든, 일단 이런 모습이 있다면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비정상적이고 불순물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행위는 그릇되고 황당하여 그야말로 죄를 범하는 행위에 속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매우 요염하게 차려입으며, 이방인처럼 섹시해 보이려 하고 세상의 흐름을 좇으며, 성도의 모습이 전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는 얌전하게 입는데 집에 돌아가면 이방에서 유행하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의 복장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 않고, 이방인과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시시덕거리면서 말하고 행동하는데 자제하지 않고 몹시 방종하다. 이런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과 성적인 매력, 인기를 얻는 것, 남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추구하여 온종일 단장하고 꾸미며 이성을 유혹한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 내는 것은 매우 뒤떨어진다. 복장과 화장, 언행 모두 제약받지 않고 성도의 품위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준칙으로 판단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무척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체적인 사례들로 볼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살아 내라고 요구한 행위는 정상 인성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며, 당연히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렇게 살아 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정상인 같은 것이며, 최소한의 정상 인성을 갖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세부 내용들을 보면, 인성을 살아 내는 것들이 거짓도, 꾸며 낸 것도, 남을 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모습이자 실제이다.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조금의 기만도 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또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남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으며, 존엄 있게 살 수 있다. 이 밖에도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성도의 품위, 그리고 정상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네가 살아 내는 이런 것은 전부 긍정적인 것들이며,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낸 것이다.

좋은 행위의 본질과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의 본질, 이 두 가지를 모두 분명하고 확실히 이야기했다. 그럼 사람이 어떻게 실행하고,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관한 문제에서 극단으로 달리거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들이 인성과 무관한 삶의 사소한 일들과 관련이 있겠느냐? 그릇된 사람들은 이 일에 관해 밝히 알지 못한다. 혹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교제해 주신 이상 우리는 삶 속의 모든 사소한 일을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구마를 쪄서 먹는 것과 구워서 먹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영양가가 있을까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전혀 관련이 없다.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는 생활 상식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먹어서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먹든 상관없다. 이렇게 단순한 상식까지 가져와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로 여겨 실행한다면, 이는 그릇되고 황당한 사람 아니겠느냐? 현재 어떤 사람들은 진리와 무관한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지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을 진리로 여겨 탐구하고 연구하며, 심지어는 여럿이서 함께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까지 한다.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영이 심각하게 통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진리로 여겨 구하는 것은 우습고도 혐오스러운 일이며,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모르며, 삶 속의 가장 단순한 상식 문제조차 알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럼 그 나이 먹도록 헛산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왜 그 잡스러운 일들을 예배 때 가져와 진리를 구하는 화제로 삼고 교제하며 토론하겠느냐? 주된 이유는 이해가 그릇된 데다가 영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지하게 따지려 드는 배경은 무엇이겠느냐? 왜 그런 마음과 생각이 생겼겠느냐? 왜 고구마를 먹는 일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토론하겠느냐? 내가 교제한 문제들이 너무 세부적이어서 늘 글귀만 따지며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겠느냐? 이런 문제나 현상이 나타날 때,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꼭 원숭이를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는 본래 산이나 숲에서 사는 동물이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행동거지며 생활 습관이 상당 부분 인류와 비슷한 데다가 한때는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졌지만, 어떻게 말하든 원숭이는 원숭이다. 원숭이는 숲이나 산에서 살아야 한다. 만약 원숭이를 집으로 데려와 사람과 함께 살게 한다면, 이는 잘못 아니겠느냐? 원숭이를 사람으로 대해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는 대체 원숭이냐, 아니면 사람이냐? 만약 너희가 사람이라면 너희에게 말할 때 아무리 입이 아프고 아무리 고생해도 마땅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원숭이라면 내가 너희를 사람으로 대하면서 입이 아프도록 진리와 하나님 뜻에 관해 말하는 것이 타당하겠느냐? 가치가 있겠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그럼 너희는 사람이냐, 아니면 원숭이냐? (사람입니다.)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는 예배 때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교제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너희도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지지는 않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파란색 옷을 입을까, 아니면 흰색 옷을 입을까? 흰색 옷을 입는다면 어떤 흰색을 입을까? 어떤 흰색이 성결해 보이고 성도의 품위에 맞을까? 나한테 파란색 옷이 어울린다면 어떤 파란색을 입어야 할까? 어떤 파란색이 더 하나님이 제기한 요구 준칙에 맞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너희는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져 본 적이 없느냐? 헤어스타일을 어떤 식으로 할지, 어떤 높낮이와 어조로 말하는 게 성도의 품위에 맞을지 생각해 본 사람은 없느냐? 이러한 일에서 진지하게 따져 보지 않았느냐? 한때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져 보며 공을 들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머리를 노란색이나 빨간색, 혹은 더 이상한 색으로 염색하기를 좋아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염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는 머리를 물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3년이 지난 후에야 확실히 깨달았다. 머리를 무슨 색으로 염색할지, 어떤 스타일로 할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핵심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지, 진리를 사랑하는지 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무관한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따지던 사람들이 이제 조금씩 그런 일에 공을 들이는 게 아무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문제들은 진리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것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는 문제일 뿐, 진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맞으면 된다. 너희는 모두 한때 이런 일들을 두고 얼마간 고민하거나 막막해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두고 예배 때 논쟁을 벌이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성 생활의 사소한 문제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전부 사실이다. 그럼 그런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근거하여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느냐? 또다시 특별한 일들이 임했을 때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비록 그 극단적인 행위들, 예를 들어 고구마를 먹는 방법과 같은 문제는 사라졌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또 특별한 문제가 나타난다면 한동안 막막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예를 들어 보아라. 어떤 문제에서 한동안 막막해졌느냐? 너희가 보기에는 여성이 화장하는 것이 잘못 같으냐?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으냐?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도의 품위에 맞으며, 야하고 짙은 화장만 아니면 됩니다.) 야하고 짙은 화장만 아니면 적절하다. 어떤 사람들은 “야하고 짙은 화장이 적절하지 않다면, 화장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느냐? (아닙니다.) 화장하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으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한다. 여기에서 부합하는 원칙은 야하고 짙은 화장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준이다. 그럼 여성이 어느 정도까지 화장을 해야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겠느냐? 그 기준은 어디에 있겠느냐? 야하고 짙은 화장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화장이 야하고 짙은 화장에 속하겠느냐? 이 선을 분명히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세부 내용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보아라. 야하고 짙은 화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얼굴은 너무 희게 화장하고, 입술은 너무 붉게 칠하며, 눈은 너무 검게 표현하여 보는 사람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귀신 같고, 원래 모습이나 면모를 알아볼 수 없어 보는 사람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몇몇 나라나 민족 그리고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화장을 매우 짙게 한다. 예를 들어, 술집이나 나이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더냐? 그들은 모두 짙은 화장을 하는데, 이는 남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들이 화장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데 있다. 이런 화장은 야하고 짙은 화장에 속한다. 그럼 어떤 종류의 화장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겠느냐? 커리어 우먼이 하는 옅은 화장으로,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는 선을 넘지 않으면 된다. 중국 노년층의 화장 유행은 이미 한물갔다. 나이가 들었지만 특별한 신분이나 지위가 없는 평범한 서민이 밖에 나갈 때 늘 화장하고 단장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자를 보며 늦바람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서양은 다르다. 만약 네가 사람을 만나거나 일할 때 전혀 화장도 하지 않고 꾸미지도 않는다면 상대는 네가 일을 존중하지도, 일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문화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한 단정하고 성실해 보이는 선에서 화장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장을 해도 남들 눈에 정직한 사람으로 보여야지, 음탕한 마음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원칙으로, 매우 간단하다. 어떤 사람들은 “외출할 때 화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저는 화장하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구해 보아라. 하나님이 화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냐?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 집에서도 사람에게 화장을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만약 네가 화장을 좋아한다면 이런 준칙과 범위를 말해 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화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화장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외출할 때 거지처럼 꾀죄죄하게 하고 나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외출 전에 옷매무시를 만지지도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채 “괜찮아. 나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깨닫고 있으니까 뭘 입든 상관없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차림새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의 최저 기준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네 인격과 존엄을 욕보이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존중받아야 한다. 경건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제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며 성도의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이런 인상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외적 행위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부담이나 어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추상적이지 않으며 이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외적 행위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교회 생활에서 수시로 토론하는 주요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끔 얘기하는 것은 괜찮지만, 진리를 구하는 화제로 자주 가져와서 열심히,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어떤 사람들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느냐? 고구마를 먹는 방법 같은 문제를 가져와서 진리를 구하는 화제인 양 예배 때 토론하고 교제하고, 심지어는 여러 번의 예배에서 그 일을 교제하는데 교회 리더가 제지하지도 않는다. 이는 다 영이 통하지 않고 그릇된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배 때 토론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나 사람의 패괴 성품에 관한 문제다.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생활에서 영원불변한 화제이다. 반면, 정상 인성의 외적 행위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평범한 내용이 교회 생활이나 예배 때 주요 교제 화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 때를 제외하고 형제자매들 사이에 서로 지적하고 일깨워 주며 교제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교제하고 토론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정상적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 영향을 줄 것이고, 사람의 생명 진입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생활이니, 진리를 교제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네게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지 밝히 알 것이다. 늘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 진리 원칙과 무관한 일을 따지고 늘 가치도 없는 일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지식과 학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차림새에 무척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이상한 복장을 해서는 안 되는지 캐묻는다. 또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지 캐묻는다. 이 밖에도 장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캐물으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날이 언제쯤 올지 캐묻는다. 그들은 이런 일에서 진리를 구해 올바른 답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한 명확한 말씀은 없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대하는 원칙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지 않는다면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복을 얻으려 할 뿐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핵심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이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 교제하기를 중요시하는 법 없이 늘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캐물으면서 그것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명확한 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리더 일꾼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자기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고 늘 옆길로 가려 한다. 어찌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고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언제나 무골호인이 되어 본분 이행에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혼자 결정하며 제멋대로 군다. 왜 이것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따지거나 파고들거나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어찌하여 그런 것이냐? 너는 왜 일이 임했을 때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며 스스로를 규정하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고 교회는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는 것이냐? 이것들이 문제 아니겠느냐? 교회 생활에서 교제하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교회를 구분하고 인원을 정리하면, 너는 늘 불만과 관념을 품으며 소극적인 것을 퍼뜨린다. 이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파고들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늘 지위를 추구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며, 자신의 지위를 경영한다. 이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교제하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교회는 인원 정리 사역 중이다. 그런데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내면 정리되지 않겠지. 성과를 좀 유지해서 정리당하지만 않으면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간사한 성품을 드러낸다면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패괴 성품이나 사람의 본성 본질과 관련된 문제가 고구마를 먹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겠느냐? 예배 때나 교회 생활 시간에 가져와서 교제하고 해부하여 하나님의 선민들이 분별력을 키우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들은 훌륭한 반면교사의 사례 아니겠느냐? 이런 패괴 성품의 문제들은 사람의 성품 변화나 구원받는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니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왜 이런 것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핵심적인 문제를 예배 때 가져와 진리를 구해 해결하기는커녕 사소하기 그지없는 쓸데없는 일들을 끝도 없이 교제하고, 작은 문제 하나를 두고 예배 시간 내내 이야기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잡아먹는다면, 이것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계속 그대로 간다면, 너희는 모두 자질도 떨어지고 어리석은 데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고, 진리에 이르지도 못하는 폐인이 될 것이다. 너희는 예배 때 교제해야 할 것들을 교제하지 않고,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끝도 없이 교제한다. 또 언제나 진리와 관련이 없는 것, 개인의 그릇된 이해나 사소한 일에 속하는 것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며 모두 함께 토론하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이는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진전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니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일은 마땅히 ‘교란’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이는 고의적인 교란이니, 이런 사람은 제약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예배 때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제하며, 패괴 성품의 문제, 본분 이행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잡일들, 일상생활의 상식과 관련된 일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문제는 형제자매들끼리 교제하여 해결할 수 있으니 예배 때까지 교제할 필요는 없다.

교회에는 늘 그릇되게 이해하고, 의미 없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좋은 행위에 관해 교제한다고 하니 그는 정말 행위 측면에 공을 들이는데, 왜 그런 것을 교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왜 이러한 측면의 문제를 교제해야겠느냐? 이 문제를 교제하여 어떤 성과를 내려는 것이냐? 일단 왜 이 문제를 교제해야 하는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좋은 행위와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준칙에 관한 화제는 어떤 상황에서 제기되었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화제를 교제할 때 제기했다. 이 문제는 사람의 진리 추구 방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보이는 좋은 행위는 모두 진리와 관련되고 상관이 있다. 반면, 진리 실행과 관련이 없는 행위는 사람 눈에 아무리 좋아 보여도 진리와는 무관하다. 혹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좋은 행위가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는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교제를 전제로,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해부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한편, 사람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제기한 준칙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 정상 인성의 살아 냄을 판단하는 준칙을 알게 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마지막에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좋은 행위들이 진리의 준칙이 아니며, 진리와 상관도, 관련도 없음을 알려 주는 성과를 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행위를 지키는 것이 진리 추구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오직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준칙에 도달해야만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기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사람이 제창하는 좋은 행위가 모두 위장이요 거짓이고, 쇼나 연기를 하는 것임을, 사탄의 간계가 들어간 그릇된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오늘 그것들을 빼앗고 없애면 사람은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느냐? 마음속으로 ‘그럼 대체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지? 하나님이 요구하신 행위 준칙은 대체 뭐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준칙, 그리고 세부적인 가르침들은 이렇게 간단하다. 하나님이 요구한 그런 실제를 살아 내기만 하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일에서 지나치게 파고들거나 막막해하거나 어리벙벙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 인성으로 살아 내야 하는 기준에 도달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하나 해결한 것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길에서 장애물을 하나 제거하고 걸림돌을 하나 해결한 것 아니겠느냐? 적어도 지금까지 사람이 숭배해 온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표면적인 행동은 더 이상 사람의 추구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표면적으로 살아 내려는 목표가 아닐 것이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하는 기준도 아닐 것이다. 그 자리를 자제할 것, 성도의 품위를 갖출 것 등으로 대신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요구들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준칙이자 정상 인성으로 살아 내야 하는 모습이다. 이러면 진리 추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과 목표, 방향이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정해졌으니,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목표는 더 이상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등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의 살아 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드러내는 행위로서 위장도, 사탄의 간계도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화제에 관계된 좋은 행위와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준칙에 대한 교제 내용이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진리 추구의 기본 방향과 목표를 정해 준다.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진리를 추구하기 전까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네 목표가 올바를 것이다. 그 목표는 인위적인 행동이나 포장,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한, 인성의 정상적인 살아 냄이다. 이 화제가 진정한 진리 추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지만, 진리 추구라는 큰 방향에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이며, 사람이 알아야 하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행위 준칙이다. 교제한 이 화제가 진리 추구나 진리의 준칙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나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한 행위 준칙과 관련이 있고, 당연히 어느 정도는 진리의 준칙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사람은 이러한 문제들 또한 알아야 한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요구도 사람이 지켜야 할 준칙이니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이러한 측면의 문제를 알게 되면 최소한 정상 인성의 살아 냄과 외적 행동에 있어서 더 이상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남자는 반드시 신사여야 하며, 여성을 위해 문을 열어 줘야 하고, 여성이 자리에 앉을 때는 의자를 빼 주고, 공공장소에서는 레이디 퍼스트를 지켜야 한다는 등 서양인들이 요구하는 좋은 행위를 분별한 후에는 적어도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정상 인성의 살아 냄과 행위를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음으로, 또 사상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버려 더는 그것에 영향받거나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너희가 해야 할 것들이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저런, 그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 자리에서 당장 그를 바라보며 “틀렸습니다. 여기는 하나님 집인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게 중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사람이 살아 내야 하는 모습도 아닙니다.”라며 눈짓을 보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리더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저를 노자매라고 부르지 않고 바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그가 제 이름을 부를 자격이 된답니까? 제 손자가 그보다 나이가 많을 겁니다. 그러니 그건 저를 무시하는 처사 아니겠어요? 그는 상냥하고 친절하지도, 가까이하기 쉽지도 않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면 리더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이 관점이 어떠하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적 행위나 태도를 근거로 할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판단하는 원칙이다. 그럼 리더 일꾼을 판단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지,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이끄는지, 교회의 문제들을 진리로 해결하고 몇 가지 핵심적인 사역들을 잘 해내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 선민들의 본분 이행 상황은 어떤지, 각 업무와 사역의 진전은 어떤지, 불신파나 악인, 적그리스도를 제명했는지 등이 교회의 핵심 사역이다. 리더 일꾼을 판단할 때는 주로 이 몇 가지 사역을 제대로 해냈는지를 보면 된다. 이 몇 가지 사역에서 다 성과를 냈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이다. 행위 면에서 좀 결점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외적 행위만을 보는 것은 리더 일꾼을 판단하는 적합한 기준이 아니다.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 리더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이모나 할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으니 예의를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한다면 그 리더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고, 하나님의 선민들은 제대로 리더를 고른 것이다. 그는 교회의 여러 사역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있으며, 복음 사역까지 제대로 해낸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 그 리더에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등의 좋은 외적 행위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사역에 협력하지 않거나 그를 곤란하게 하거나 약점을 잡아 그를 판단한다면, 그런 행동은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리더 일꾼을 원칙 없이 대하는 행동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태도이다. 그런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에 속한다. 만약 어떤 리더 일꾼이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죄까지 한다면, 이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느냐? 이는 바로 전통문화의 관점에 근거해 사람을 쓰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 부정적인 결과이다. 만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리더 일꾼을 뽑는다면, 이는 정확하고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진행을 지킬 수 있어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소위 ‘좋은 행위’에 대해 해부하고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관해 교제한 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시선과 판단 기준, 시야가 달라졌고, 판단 결과 또한 달라졌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그 결과는 분명 정확하고 공정하며 객관적이고 모두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판단하는 시선과 방식, 근거가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라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느냐? 좋은 사람을 모함하고 정죄하거나 외식하는 사람에게 미혹되어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근거가 잘못되었기에 마지막 결과 역시 잘못되고 공정하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의 본질을 교제하고 해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매우 큰 관계가 있다! 그것은 정상 인성의 살아 냄, 표면적인 행동이나 드러냄과 관계가 있을 뿐이지만, 사람이 올바른 준칙,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준칙을 알게 되면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 처리함에 있어 모두 옳고 규범화된 근거와 준칙을 갖게 된다. 그러면 이런 측면에서 진리 추구의 방향과 길, 목표는 더욱 정확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더욱 정확해지고 규범화될 것이다. 이 화제가 좀 평이하기는 하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긴밀한 관계가 있으니 전혀 공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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