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제 3 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중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이 있다. 사람은 보통 다른 요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에 대해 너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너희의 관점이 하나님이 말한 진리 원칙과 모순되지는 않느냐? 밝히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규례만을 지키고 글귀와 도리만을 말하는 사람은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늘 관념을 품으며, 뭔가 모순되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는 모순되지 않으며 무척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영이 통하고,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때로 밝히 알지 못하면서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너희에게는 문제점도, 어려움도 무척 많다. 그저 너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는 너희의 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가 옳은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보자. 어떠하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는 확실하며, 부정할 수 없고, 주저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말씀은 옳다. 그럼 무엇이 옳겠느냐? 하나님은 왜 이런 요구를 했겠느냐?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알고 있느냐? 또 모르는구나. 어째서 늘 모르는 것이냐? 글귀나 도리를 말할 때는 끝도 없이 늘어놓으면서 진리와 관련되기만 하면 모르니,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그럼 너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실행할 것이냐? 이는 진리와 관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라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라고 하셨으니 효도하자.’라고 생각해 효도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따르고, 부모가 아프면 침대맡에서 시중을 들고 물을 따라 주며, 맛있는 요리를 해 드렸다. 명절이 오면 부모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 주고, 평소 부모가 피곤해 보이면 어깨와 등을 안마해 주었다. 또 부모에게 뭔가 어려움이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서 해결해 주니, 부모는 무척 만족했다. 부모에게 효도한 너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정상 인성을 살아 냈기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보십시오. 부모님은 제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변했다고, 효도할 줄 알고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무척 좋아하시죠. 하나님을 믿는 게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자식이 효도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바른길을 걷고 사람답게 살아가니 이방인들보다 훨씬 낫다고요. 저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 요구대로 행동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변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죠. 꼭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더군요. 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으니, 하나님도 틀림없이 만족하셨을 겁니다. 저를 보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라고, 성도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하시겠죠.”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네게 외지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너는 하나님이 맡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여겨 수락했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하나님이 맡긴 일을 지켜야 한다고, 둘 다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집에 가서 상의할 때, 네 부모는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이 불효막심한 놈! 그렇게 힘들게 키워 놨더니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겠다는 거야? 네가 가 버리면 우리 둘은 누가 돌봐 준다는 말이냐? 우리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누가 병원에 데려다 준다는 거야?” 부모의 반대 앞에서 너는 고민에 빠졌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셨지만, 부모님은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걸 막고 계셔. 부모의 말을 따르려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럼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시겠지.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본분을 이행하러 가면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테고. 이를 어쩌지?’ 너는 ‘하나님께서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하셨으니, 이것을 지키자. 본분을 이행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고는 본분을 내팽개치고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편치 않았다. 부모에게 효도는 했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해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언젠가 진리를 깨닫고 본분 이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집에서 나와 본분을 이행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시고, 또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 아닙니까? 대체 제가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겠느냐? 이는 더더욱 하나님의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냐? 더더욱 진리를 실행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혹자는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도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고 진리도 실행해야죠. 이건 쉬운 일입니다. 집안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며, 가정부를 고용한 다음 나가서 본분을 이행하는 겁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돌아와서 부모님을 살핀 후 별일 없으면 그냥 가고, 일이 있으면 이틀 정도 머무르면 됩니다. 계속 밖에서 지내면서 돌아오지 않거나 집에만 있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요. 이렇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이 방법이 어떠하냐? (통하지 않습니다.) 이는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그럼 이런 상황이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충과 효를 모두 지킬 수 없다면 본분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고, 그다음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 대해 더 높은 요구를 했다. 너는 어떤 것을 지켜야겠느냐? (더 높은 요구를 지켜야 합니다.) 더 높은 요구대로 실행하면 옳겠느냐? 진리에 높고 낮음과 새롭고 오래된 것의 구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할 때는 무엇에 따라야겠느냐? 무엇을 진리 실행이라고 하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 실행은 서로 다른 시간, 장소, 환경, 배경 조건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 이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를 지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일, 본분을 완수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현시점 말씀이고 요구겠느냐?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리더 일꾼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버릴 줄 알아야지, 부모 곁에서 효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상황이다. 이 밖에 평범한 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부모 곁에서 효도해도 된다. 열심히 효도해도 뭔가 상은 없고 축복을 얻을 수도 없겠지만, 효도하지 않는다면 인성이 없는 것이다. 사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일 뿐,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이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어쨌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다. 그럼 현재 실행해야 할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입니다.) 그렇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다.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힘쓰는 것에 불과하다.
좀 전의 그 질문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셨고, 그 후 진리 실행과 본분 이행,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에 관해 더 높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이 중에서 먼저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금 너희는 더 높은 요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이론적으로는 옳다. 어째서 이론적으로는 옳다고 하겠느냐? 그러니까 이 일을 규례와 공식에 맞춘다면 답은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생활 속에서는 이 말이 통하지 않고 이루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럼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겠느냐? 먼저 네가 직면한 상황과 생활하는 환경, 그리고 처한 배경이 어떤지 봐야 한다. 네가 생활하는 환경과 처한 배경을 볼 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너는 형식적으로 부모와 떨어질 필요가 없으며, 형식적인 의미에서 버리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그러하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합니다.) 그렇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네 부모가 막지 않고, 그들 역시 믿으면서 네가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는 것을 무척 지지하고 독려해 준다면, 너와 부모는 평범한 의미의 육체적 혈연관계가 아니라 형제자매 관계이다. 그러니 너는 형제자매의 관계로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 외에도 자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며,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너는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즉 네 마음이 그들에게 속박받지 않는 상황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생활 속 문제들을 처리해 줄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이 생명 진입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 믿는 것을 부모가 막지 않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관계는 지켜야 하고, 너는 네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째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을 돌봐 주어야겠느냐? 너는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 때문에 너에게는 하나의 책임이 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 때문에 너는 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그들이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고 네 발목을 잡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환경적 영향이나 방해로 인해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다면, 규례를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배치를 따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무리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교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이 충돌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것은 실행 원칙이고 진리이다. 네게는 부모에게 효도할 책임이 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겠지만, 감정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모 중 한쪽이 몸이 안 좋아 입원했는데,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고 해 보자. 네가 본분 이행으로 정신이 없어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럴 때는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이 일에 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에 따라야 한다.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 그를 데려가려 한다면, 너도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순종하겠지만, 마음이 무척 괴롭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간미이자 인성으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울어도 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운다면, 또 본분 이행을 할 생각이 없고 돌아가서 부모를 보고자 한다면, 그래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면, 너의 그 효도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감정 속에서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너는 하나님이 맡긴 일을 포기했으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힘닿는 데까지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에 빠져서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난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저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요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배경이 있다. 여러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책임을 다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큰 병에 걸릴지, 죽게 될지 등을 네가 결정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살지, 언제 죽을지, 어떤 병으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등이 너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 혹자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 저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병에 걸리지 않게, 특히 암이나 불치병에 걸리지 않게 확실히 보장해야죠. 그분들이 100살까지 사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릇된 인간 아니겠느냐? 이는 그야말로 사람의 상상이지, 절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다. 너 자신이 100살까지 살지조차 분명하지 않은데 부모에게 100살까지 살라고 하다니, 이는 황당무계한 소리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네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양심과 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느냐? (부합합니다.) 물론 방금도 말했듯이,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모가 가로막는다면, 그들의 본성 본질은 불신파이고 이방인이며, 나아가 악인, 마귀이다. 그들은 너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과 너는 아예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가정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왔지만, 그들은 너와 같은 것을 전혀 추구하지 않고 인격도 다르며, 나아가 기호와 동경하는 것도 다르다. 너는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네게 그들을 버리고 저주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여전히 성립한다. 그들과 함께 살 때, 너는 계속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지켜야 한다. 이 일이 모순되느냐?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너는 간만에 집에 돌아갔을 때 부모에게 요리해 주고, 만두를 만들어 줘도 된다. 조건이 되어 건강 용품을 사 준다면 그들은 무척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 얘기가 나왔을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고 너를 욕한다면, 꼭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다. 그들과 접촉할 조건이 된다면 그렇게 실행해라. 만약 접촉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배치이니 서둘러 그들을 멀리하고 피해라. 이 원칙은 무엇이냐?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너와 이야기할 화제가 없으며 같은 추구 목표도 없다면, 또한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고 핍박한다면, 너는 그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본질을 간파하여 버려도 된다. 물론,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욕하거나 너를 저주하면 너 또한 마음속으로 그들을 저주해도 무방하다. 그럼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면 다해라. 그러나 만약 기회가 없거나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이미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한시바삐 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이런 부모에 대한 효도란 자식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즉, 자식으로서 해야 할 바를 다하며, 부모를 노엽게 하거나 욕하고 때리거나 학대하거나 싸우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다. 이는 인성의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지킬 때 실행해야 할 원칙이다. 이것이 쉽겠느냐? 너는 혈기로 그들을 대하면서 “당신들은 마귀요, 불신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저주하셔서 유황불 못, 무저갱 속에 빠뜨리고 18층 지옥에 떨어뜨릴 것입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적절한 환경에서 필요하다면 자식으로서 책임을 다해도 되지만, 필요하지 않거나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또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생략해도 무방하다. 그들과 만나고 함께 지낼 때 자식으로서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고,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 원칙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부모까지 포함해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원칙이 있어야지, 혈기에 기대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모가 핍박한다고 해서 그들을 욕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이방인,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이 무척 많다. 그들을 모두 저주하고 욕할 것이냐? 그들을 욕하지 않았으면 네 부모도 욕하지 마라. 그들을 욕하지는 않았으면서 네 부모를 욕한다면, 너는 혈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마귀라고, 살아 있는 사탄이자 사탄의 앞잡이라고 욕하며, 지옥에 빠지라고 저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긍정적인 태도를 꾸며 낸다고 해서 너를 열납하거나 네게 인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네 그런 행동에 감정과 혈기가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너무 극단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까지 포함해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혹은 악인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그들을 대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으로, 공평하게 대하되, 다만 부모를 대할 때는 책임감을 더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네 인생관과 인성이 그들과 맞든 맞지 않든, 너는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니, 그들을 피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근거해라. 만약 그들이 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해도 힘닿는 데까지 효도의 책임을 다해야 하며, 최소한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이 너를 가로막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지지해 준다면, 원칙대로 실행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잘 대해 줘야 한다. 요컨대, 어떻게 하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변하지 않으며,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일에서 원칙을 지키고,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을 다하면 된다.
이제 하나님이 왜 사람의 행위 측면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다른 것들은 다 사람 스스로가 처신하는 행위 규범에 관한 요구였다. 그런데 왜 하필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관해서만 다른 요구를 했겠느냐? 말해 보아라.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본성 본질이 어떠하겠느냐?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힘들게 그를 낳아서 기르고, 어렵사리 성인으로 키운 것은 사실 그에게 큰 행복이나 기쁨을 얻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부모는 그저 그가 성인이 된 후에 행복하게 살면서 걱정만 끼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제구실을 못 하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삶을 잘 꾸려 나가지도 않는다. 부모에게 기대 살아가는 캥거루족이 되어 효도는커녕 부모를 협박하고 재산을 받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악질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어떠하냐? (인성이 나쁩니다.) 자신을 낳아 주고 키워 준 사람에게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니, 이런 면을 봤을 때,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겠느냐? (양심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든 때리고 욕할 수 있다. 거기에는 부모까지 포함되는데, 부모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하면서 내키는 대로 때리고 욕하며, 기분이 나쁘면 부모에게 화풀이하고, 그릇을 던져 부모를 겁에 질리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데다가 자기 부모조차 함부로 학대하는 자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짐승입니다.) 짐승이다.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사실,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며, 아껴 주고 지켜 주는 것은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면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부모를 노엽게 하고 학대한다면 양심이 찔리지 않겠느냐? 정상인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를 화나게 했다면 며칠 동안 괴로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혈질이라서 순간적으로 발끈한 마음에 부모에게 성질을 부릴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과는 하지 않을지라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점으로, 정상 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인성이 없는 사람들은 부모를 학대하면서도 느끼는 바가 없다. 어릴 때 부모에게 맞은 일을 평생 기억하면서 성인이 되어 자기도 부모에게 손을 올리고 되갚아 준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맞아도 대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서른 살 이후에 부모에게 맞아도 가만히 있으며, 맞아서 아파도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면모이다. 그가 왜 소리 한 번 내지 않겠느냐?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그렇게 때린다면 수긍하고 가만히 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누구일지라도 그렇게 맞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욕 한마디만 들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부모가 때리면 대들지도, 화내지도 않고 참겠느냐? 인성에 양심과 이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는 ‘부모님이 나를 키워 주셨으니 나를 때리는 게 잘못됐을지라도 참아야 해. 게다가 부모님은 나 때문에 화가 나신 거잖아. 나를 때리시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말을 안 들어서 부모님을 화나시게 한 거니까, 난 맞아도 싸!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에 갖추어야 할 이성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상 인성의 이성은 그에 대한 부모의 행동을 참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이다. 그럼 참지 못하고 되갚아 주는 사람이 이런 인성을 갖추었겠느냐?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갖추지 않았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부모를 때리고 욕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그는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조차 그렇게 대하는데, 자신과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더더욱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데, 양심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대하겠느냐?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한다면, 반항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보아라. 사람이 갖춘 양심과 이성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어느 정도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고 규범화하여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며,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임한 모든 일을 대하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많은 화근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것을 기초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을 택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없고, 이러한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어떤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한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욕할 수도, 모독할 수도, 고발할 수도, 팔아넘길 수도 있으며, 하나님에게 복수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하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지지 않겠느냐? 인성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늘 혈기로 복수하며, 인성과 이성에 제약되지 않는다. 그는 극단적인 사상과 말을 생각해 내기 쉽고, 그 후에는 극단적인 행위를 하며, 양심도 이성도 없는 행동을 수도 없이 저질러, 마지막에는 수습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진리 실행에 관련된 교제는 이만하면 다 한 것 같구나. 결국에는 인성으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겠느냐? 이것이 처신하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요구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인성을 검증하고 확정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양심과 이성 없이 부모를 대한다면, 그는 분명 인성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혹자는 “그럼 그의 부모가 인성이 안 좋아서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런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자식으로서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 부모를 학대하는 사람은 분명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든, 평소 사람이 인성을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든, 결국 외적 행위와 관련된 그런 행동을 하나님이 언급한 이상 그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그 요구들이 진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기준으로, 모두 의미가 있기에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행위 준칙과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간에 어떤 연관성과 차이가 있는지 면면을 교제하였다. 이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좋은 행위에 관해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지 않으냐? 이 부분의 교제를 마친 뒤, 우리는 또 사람의 행위와 삶을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가르침에 대해 교제하면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그중에는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이득을 점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등이 있었다. 물론, 이는 중요한 항목으로, 더 세부적인 것들도 있으나 더는 말하지 않겠다. 그럼 이러한 교제를 한 후, 너희가 얻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실행해야 할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필요가 있겠느냐?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 상냥하고 친절하며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 여자가 온화하고 우아하며 교양 있고 사리 밝을 필요가 있겠느냐? 남자가 사나이 대장부가 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물론 누차 교제했듯이,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그것들은 분명히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는 도구로서, 강력한 미혹성을 지니고 사람을 기만한다. 너희는 자신에게 그러한 사상과 관점, 행위와 태도가 없는지 성찰해야 한다. 만약 있다면 한시바삐 진리를 구해 해결한 다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너희는 자신이 지난날 전통문화에 기대 살아갈 때, 어떤 내적 상태였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 후, 다시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자제하고 성도의 품위를 지키며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 것 등을 기준으로 처신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보아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홀가분하고 자유로우며 편하고 평안한지, 더 인성을 갖고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면을 쓴 것처럼 매우 가식적으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점점 더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인지 살펴보아라. 실제로 체험해 보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해야만 자유로워지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너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나이 많은 형제자매를 만나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또한, 민망해하면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큰 무례라고 생각한다. 네 마음속에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전통 관념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노인을 보면 온화하고 예의 바르고 교양 있게 행동하면서 허리를 15~90도까지 굽히며 공손히 대한다. 너는 나이가 많은 사람 앞일수록 더 고분고분하게 군다. 그렇게 고분고분한 태도가 좋으냐? 그것은 줏대도, 존엄도 없이 사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를 보면 아이처럼 귀엽고 활발한 척 꾸미고, 동년배를 만나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어른 행세를 하면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다중 인격자 아니냐? 태도 변화가 무척 빠르지 않으냐?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할아버님, 할머님이라고 하고, 연장자를 보면 숙부님, 이모님, 형님, 누님이라고 하며,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보면 아우, 동생이라고 한다.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호칭과 애칭을 붙이는데, 그것이 무척 적절하고 정확하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뼛속에 뿌리를 내려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더더욱 ‘하나님을 믿으니까 예의 바르고 교양을 갖춰야 해. 교양 있고 사리 밝아야 한다고. 이방의 문제아처럼 버릇없고 반항하면서 사람들의 비호감을 사면 안 돼. 모두에게 사랑받으려면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해서 더욱 엄격하게 자신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사람들에게 나이에 따라 다른 존칭과 애칭을 붙인 후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런 다음 점점 더 ‘나를 보라고. 하나님을 믿은 후로 달라졌잖아.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거야. 나는 어떤 연령대를 만나든 다 호칭을 부를 수 있어.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거나 주변 사람들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라고 생각한다. 이 좋은 행위들을 실행한 뒤, 그는 자기가 인성을 갖추고 예의 바르니 하나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남까지 속이는 짓 아니겠느냐? 지금부터 이런 것들은 전부 버려야 한다. 예전에 다밍과 샤오밍의 이야기를 해 준 바 있다. 그 이야기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이려고 할아버님, 할머님이라고 부른다. 너는 그를 무척 존중하고 있다. 그럼 그에 대한 네 존중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느냐? 너의 얼굴을 보면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건방지고 오만한 꼴이다. 또 누구보다도 오만하게 일을 처리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기는커녕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혼자 알아서 하는 등 인성이 전혀 없다. 지위가 있는 사람을 보면 어르신님, 이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꾸미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그렇게 위장한다고 해서 네게 인성과 덕행이 생기겠느냐?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그런 너를 보고 더더욱 역겨워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계된 일이 임하면 어김없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치우고,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인성을 가졌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모님이라고 부르다니, 이는 위장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장을 참 잘도 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기는커녕 팔아 치우는, 팔이 밖으로 굽는 존재이니 하나님 집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너희는 자신의 어떤 사상과 관점, 태도, 행동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인류가 공인하는 ‘좋은 행위’에 속하는지 성찰해 보아라. 사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들이다. 그 무가치한 것들을 절대 지키지 말고 한시바삐 내려놓아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뭐가 안 좋습니까?”라고 하는데, 그런 행동을 보면 내가 너를 역겨워하고 증오하게 되니,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 또 혹자는 “당신이 역겨워하시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당신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라고 하는데, 네가 나와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역겨워하는 이유는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니 하루빨리 그런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 위장하지 말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지도 마라. 서양인들은 이런 면에서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그냥 이름을 불러도 무방하다. 굳이 어색하게 할아버지니 할머니니 하고 부를 필요가 없으며, 사람들이 너를 판단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당하게 이름을 부르면 상대는 아주 좋아한다. 성인이든 어린아이든 모두 그렇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네가 상대의 이름을 아는데도 미스터라든가 혹은 이모라고 부른다면 상대는 좋아하지 않으며, 너를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너는 어리둥절해진다. 서양 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다르다. 중국인은 전통문화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언제나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고, 선배가 되어 남들의 존중을 받으려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을 하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老)’자를 붙여 노할아버지, 노할머니, 노숙부, 노백부라고 하고, 큰아주머니, 큰아버지라고도 부른다. 나이가 많은 사람, 아니면 큰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역겹지 않으냐?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못된 습성 아니겠느냐? 너무도 역겹다! 이런 사람은 남들에게 존중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혐오받고 멸시당하며 멀어지고 버림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통문화의 이러한 부분을 폭로하고 내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것들에는 다 사탄의 성품과 간계가 들어 있기에 사람이 처신하는 방식과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당연히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사람의 눈을 가려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면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중국인은 전통문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물론, 나라마다 각국의 전통문화가 있으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어떤 논조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다를지 몰라도 그 성질은 동일하다. 즉,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없고 패괴 성품이 있기에,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고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고 사람이 실천하기 쉬운 몹시 기만적인 행위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사로, 고상하고 남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로, 인격과 존엄을 갖춘 사람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전통문화가 사람의 눈을 가리고 기만하며,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탄이 이러한 전통문화로 사람의 인성을 패괴시키며, 사람을 오도하여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도둑질하거나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고 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요구에 상반되는 것, 반기를 드는 것 아니겠느냐? 사탄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은 어떻게 이 표면적인 방식과 행위, 삶으로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는가 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었느냐? 표면적인 행위로 남들의 신뢰를 얻어 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처신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의 신임과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그런 자야말로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차이가 있지 않으냐? 이 차이는 무척 크다. 하나님은 너에게 처신하는 법을 알려 주지만, 사탄은 위장하고 남을 기만하는 법을 알려 준다. 이 차이가 무척 크지 않으냐? 그럼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이제 알겠느냐? 어떤 것이 바른길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른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바른길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행위에 대해 어떤 요구를 하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 규범이나 계명 혹은 율법일지라도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올바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바른길, 긍정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탄의 말은 아무리 사람의 입맛에 맞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해도 사람을 기만하고 패괴시키니, 바른길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탄의 간계가 들어 있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오늘 교제한 내용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이것이 진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관계있습니다.) 예전에 너희는 이 측면의 진리를 알고 있었느냐? (밝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밝히 알게 되었느냐? (예전보다는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것은 향후 진리 추구와 인성을 살아 내는 것, 그리고 인생의 추구 목표, 방향에 전부 도움이 된다.
2022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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