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2) 제 1 부

지난번 예배 때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교제했다. 일단은 한번 되돌아 보자.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더냐? 너희는 지난번 교제가 끝난 후에 묵상해 보았느냐? 어떤 내용은 교제를 마친 후에 묵상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생활 속에서 실제로 체험하고 경험해야 진정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네가 묵상한 내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고,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묵상했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진리 추구와 관련된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크게 몇 가지 항목을 포함하는지 정리해 보았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갖가지 그릇된 생각과 관점,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후, 세부적으로 진리 추구의 다섯 단계에 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진리 추구와 관련하여 사람에게 존재하는 소극적인 상태나 그릇된 관점, 그리고 진리 추구에 대한 오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핑계와 이유가 그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내용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총 5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분류 항목이 많지는 않지만, 그것과 연관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무척 많았다. 먼저 진리 추구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인식과 이해를 폭로하였고,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의 어려움과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려고 대는 핑계와 이유, 구실에 대해 폭로하였다. 진리 추구에 대해 사람이 드러내는 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와 인식 방법은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보이는 생활 방식과 추구,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것들은 전부 사람이 드러내는 구체적인 태도나 모습과 관련이 있다. 그다음으로는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에 근거하여 진리 추구의 길에 대해 구체적인 실행법과 실행 단계를 제시하였다. 너희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해했느냐? (네.) 정말 이해했느냐? 왜 말이 없느냐?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 좀 더 교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바로 진리 추구이다. 진리 추구란 무엇이더냐? 진리를 추구할 때 사람이 보이는 모습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이 드러난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해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는데, 장애물이 너무 많다. 자신의 갖가지 어려움들로 인해 진리 추구라는 이 일은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 보이며, 쉽지 않게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놓고 보면 답은 무척 간단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를 사람은 왜 실천하지 못하겠느냐?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스스로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또 본분을 다할 수 있고 기꺼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고 자랑한다. 이렇듯 좋은 태도를 기반으로 하는데 왜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못하느냐? 이렇듯 좋은 인성과 인격, 뛰어난 명성, 추구하고자 하는 다짐, 이상, 소망, 사람의 주관적인 노력,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태도, 진리를 갈망하고 받아들이는 긍정적이고 올바르며 발전적인 태도 등을 기초로 하는데 왜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없겠느냐? 왜 진리 추구에 이르지 못하겠느냐?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본성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는 데 그 근원이 있습니다.) 정확한 대답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탄에게 속하며, 사탄에게 속하는 것은 하나님, 진리와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과 속성, 추구법과 인생관을 저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그릇된 것들을 내려놓고 육적인 기호에 등 돌리고 육이 좋아하지 않는 것, 사람에게 없는 것, 사람이 무시하고 혐오하여 내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움이 큰 것이다. 너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네 고유한 생명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사람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는 일을 사람이 하려 하겠느냐?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원치 않는다. 백 번, 천 번, 만 번 물어봐도 원치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사탄에게 속하는 자기 고유의 것들을 내려놓기 힘들어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너희 역시 절실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느꼈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육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고, 사탄의 본성 본질에 속하는 자신의 생명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며, 자기 고유의 사탄 속성과 사탄 본성을 저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탄 본성이 있는 사람,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본심에 어긋나는 일이며, 바라지 않는 바이다. 그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 내면의 속성은 사탄에게 속한 것으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듣고 깨닫게 된 후에도, 오직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려 하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는 사람, 그런 의지와 이상,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할 수 있으며, 진리에 기대 살아가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사탄 본성과 사탄 성품에 가로막혀 실행하지 못한다. 사실, 실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다. 네게 가장 좋아하는 옷과 액세서리, 즐겨 사용하는 물건, 좋아하는 일과 직업, 특기와 취미 등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너는 이러한 것들을 저버리고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게 네 육과 사탄 성품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면 이는 몹시 어렵다. 적절하지 않은 말로 표현하자면 오리보고 홰에 오르라 하는 셈이고 황소보고 나무를 타라고 하는 격이니, 너무 힘든 것이다. 고양잇과 동물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고기가 아닌 풀을 먹으라고 한다면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평생 소박하게 살라고 한다면, 약간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육적인 어려움은 그게 무엇이든 별것 아니다. 육적인 안일을 꾀하지 않는 것, 매일 잠을 줄이고 10년을 한결같이 고생하는 것, 의식주 모두 부족하게 사는 것 등 이런 식으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의지가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또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사람에게 육을 저버리고 사탄을 배반하며 오롯이 하나님의 요구와 말씀대로 행동하라고, 진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든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의 문제는 모두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한 번 굳게 마음을 먹거나 자제하거나 규례를 지켜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진리를 실행할 수도, 갖출 수도 없다. 패괴된 인류에게 진리 추구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사탄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 사탄 성품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질이 떨어진다거나 성미, 성격이 나쁘다거나 이렇다 할 특기, 은사, 재능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패괴 성품에 있다. 패괴 성품은 사람의 손발, 마음과 생각, 사상, 사유, 영혼 깊은 곳을 단단히 통제하여 진리 추구의 길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3년, 5년 믿어도 어떤 수확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10년, 20년, 30년 믿었는데도 보잘것없는 수확만 얻은 사람도 있고, 아예 어떠한 수확도 없이 두 손이 텅 빈 채 더없이 빈곤하고 가련한 사람도 있다! 30년을 믿었건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가난하고 눈먼 상태인 것이다.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헤쳐나와야 하는지 모르고, 하나님을 오해할 때는 어떻게 그 오해를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또 역경을 만나면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르고,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저 주관적인 의지로 극복하고 인내로 끝까지 버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느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고, 사건은 지나갔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자는 소극적인 상태에 몇 번이나 빠졌든, 하나님을 몇 번이나 오해하고 관념을 가졌든, 몇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연약해졌든, 지금까지 조금의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관한 인식이나 경험, 체험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마음과 영혼 깊은 곳이 텅 비어 있다. 또 진리에 어떤 느낌도 없고, 하나님 말씀에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다.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대한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은 빈곤하고 눈이 멀고 가련한 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럼 사람이 왜 그 지경에 이른 것이겠느냐?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느냐? 이 또한 마찬가지로, 문제의 근원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 기인한다. 이것이 객관적인 원인이다.

사람이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지 그 객관적인 원인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이야기했다. 이제 주관적인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주관적인 원인은 이러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과 모든 말씀을 통해, 그리고 실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자신과 대조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한 적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많은 것을 바치고 헌신하며, 큰 노력을 기울이고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렀을지라도 이는 그저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초기에 하나님을 따른 자들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 20대에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 50대가 되었는데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가정과 결혼을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가가 크지 않으냐? (큽니다.) 청춘을 버리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결과가 어떠하냐? 크나큰 대가를 치렀지만, 마지막에 얻은 것은 자신이 지불한 것에 부합하지도 않고 같은 값도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대가를 치를 때의 태도와 의지, 그리고 시간과 양, 정도로 보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간증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어야 마땅하다. 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얻는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 진리 실제에 진입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추론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저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을 뿐, 사람이 살아 내는 것이나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연구하고 토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이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현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지 2~3년쯤 된 사람 중에는 체험과 간증이 있는 자가 꽤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키고 정직한 사람이 되게 했는지, 진리 추구의 길에서 어떻게 진리를 깨닫게 했는지, 자신의 패괴 성품, 교만함과 간사함, 패역, 지위욕, 야심과 욕망 등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증거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2~3년밖에 믿지 않았는데도 체험과 간증이 있고, 하나님 말씀에 깊이 느낀 바가 있으며, 하나님 말씀의 진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20~30년간 믿은 사람들은 그렇게 큰 대가와 고난을 치르고 그렇게 많은 길을 뛰어다녔는데도 마음 깊은 곳과 정신세계가 여전히 텅 빈 듯 공허한 것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그런 상태에서 수시로 막막함을 느끼며 “저는 막막함을 많이 느낍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너는 하나님을 20~30년이나 믿었으면서 어찌하여 아직도 막막함을 느낀단 말이냐? 보아하니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수시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연약해져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 그런데 뭘 얻었지?” 그들은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연약해질 때, 지위와 이익을 잃고 허영심이 충족되지 않을 때 늘 하나님을 원망한다. 또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고, 지난날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믿으며 직장과 결혼, 가정,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내려놓고 결연히 하나님을 따른 것을 후회한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려는 마음을 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후회할 거라면 애당초 왜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을 20~30년 동안 믿으면서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듣고 하나님의 수많은 사역을 체험했는데도 마음 깊은 곳이 여전히 공허하고, 수시로 혼돈과 막막함, 후회, 불만에 사로잡힌다. 심지어는 앞길이 막막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이런 사람을 가련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혹은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근황을 알게 될 때면 나는 그들에 대해 어떤 예감과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상태와 정신세계가 왜 이리 익숙한 것이겠느냐?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 집에 남아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이 무엇으로 버티고 있겠느냐? 은혜로 구원받겠다는 마음가짐이겠느냐? 끝까지 따르면 반드시 구원받을 거라는 마음가짐이겠느냐? 아니면 요행 심리 같은 것이겠느냐? 전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겠느냐? 이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는 바울의 말과 같다. 이 말을 분석해 보자. 간단히 말해서, 이 말은 거래의 성질을 띠고 있으며, 거래의 태도, 생각, 계산이 있고, 욕망과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에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면류관과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복과 좋은 종착지를 얻고자 추구하고 있다. 그럼 그 좋은 종착지와 복을 어떻게 얻는 것이겠느냐? 무엇으로 맞바꾸는 것이냐? (그들은 고된 사역과 희생, 헌신, 고통과 대가로 맞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자면, 싸워야 할 싸움을 끝내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다 끝냈으니 이제 당연히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해 놓은 좋은 종착지와 복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은 두말할 것 없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도,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려는 태도와 생각도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용해 하나님이 인류에게 약속한 복을 맞바꾸겠다는 생각뿐이다. 방금 말한 그 사람들은 늘 정신세계가 공허하고 마음 깊은 곳에 의지처가 없지만, 시종일관 그렇게 대가를 치르고 고통받으며, 자신의 싸움과 달려갈 길을 끝까지 견지한다. 그들은 무엇에 의지하느냐? 그들이 고수하고 맹신하는 바울의 명언이 그들의 ‘믿음’을 지탱해 준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겠다는 야심과 욕망이며, 거래로 복을 얻겠다는 꿈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한 체험이나 인식, 하나님 사역에 대한 인식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의지하지 않는다.

앞에서 교제한 사례를 보면,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실질적인 어려움을 수없이 맞닥뜨리며, 패괴 성품에 결박되거나 속박되고, 숱한 좌절과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성령 역사에 의지하기만 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온전히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베드로가 그 선례였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데만 집중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데만 만족할 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을 10년, 20년, 30년 동안 믿어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진실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어떤 체험이나 인식도 말하지 못한다. 예배 때 체험 간증을 말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다.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글귀 도리를 말하는 사람도 진리를 실행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성립하겠느냐? 글귀 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설령 그의 행동이 겉으로 볼 때 진리에 어긋나는 점이 없고 좋은 일, 좋은 행위라고 할지라도 이 좋은 일, 좋은 행위를 어떻게 진리 실제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모른다. 그는 사람이 행하는 좋은 일, 좋은 행위를 모두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황당하지 않으냐? 그것이 종교인의 사상, 관점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이렇게 그릇되게 이해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무엇이 진리를 깨닫는 것인지, 무엇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평가하고 분별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정말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채 관념과 상상대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데만 만족한다면, 네가 행한 그 모든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네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네가 행한 그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저 너의 기호와 개인적인 이해, 일방적인 바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는 다 너 스스로 좋아하고 원해서 한 일이다. 너는 그저 네 개인적인 욕망과 다짐, 이상을 충족시킨 것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모든 행동은 진리와도, 하나님의 요구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네 행동은 전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며, 너는 스스로의 이상과 명예, 지위를 위해 사역하고 싸우고 뛰어다닌 것이다. 이는 바울과 다를 바가 없다. 네가 평생 힘들게 사역한 것은 전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으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이는 분명 바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저는 스스로 원해서 힘들게 사역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거래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네가 하나님과 거래를 하든 하지 않았든, 네 생각과 태도에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분명한 뜻이 있었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계획과 목적이 있었든 없었든, 너는 힘들게 사역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 것으로 천국의 상과 면류관을 얻으려 했다. 그러니 네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그 문제의 성질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 사람이 복을 얻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한, 바울의 추구와 성질이 같다. 무엇이 같겠느냐? 힘쓰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등의 좋은 행위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약속한 복을 얻으려는 성질이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조금의 차이도 없이 성질이 같다. 네가 바울의 길이 아니라 베드로의 길을 걷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물을 것도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을 인식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는 데 집중하며,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이고, 베드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베드로의 길을 걸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리켜 준 길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어떤 길을 걸으면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되는지 분별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왜 바울의 길을 걷게 됐는지 참되게 돌아보고, 어떤 성품에 지배되어 바울의 길을 걷게 됐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는 교만함, 간사함, 사악함 등 네 패괴 성품 중 가장 두드러지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패괴 성품에서부터 착수하여 반성하고 해부하여 자신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고 증오하는 성과를 낸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도, 진리를 실행하기도 쉬워진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교만한 성품을 예로 들어 간단히 교제해 보자.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남과 교제할 때 등 어떤 일에서든, 어떤 곳 어떤 환경에서든 너는 자신이 어떤 교만한 성품을 드러냈는지 시시각각 성찰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네가 의식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교만한 성품과 생각, 그리고 네 속셈과 목적을 파헤쳐야 한다. 특히 늘 높은 곳에 서서 남에게 훈계하려 드는 것,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 것, 모두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 다른 이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말이 옳지 않은데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하는 것, 마음속에 항상 다른 사람을 이끌려는 경향이 있는 것, 리더 일꾼의 책망과 훈계가 임해도 불복하고 이치를 따지며 상대를 거짓 리더 일꾼이라고 정죄하는 것, 언제나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하는 것, 늘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늘 명인이나 위인이 되고자 하고 남들 앞에 나서서 우러름과 숭상을 받고자 하는 것 등 자신이 드러낸 패괴를 반성하고 해부하면, 교만한 성품이 더없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혐오하고 역겹게 여기게 되며, 나아가 교만한 성품을 증오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일에서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한 측면으로는, 말할 때 어떤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드러냈는지, 어떤 허풍을 치면서 교만하고 비이성적인 말을 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일을 할 때 관념과 상상, 야심과 욕망에 기대 어떤 황당하고 비이성적인 일을 저질렀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렇게 반성해야 자신을 인식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자신을 진실로 알게 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실행의 길과 원칙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켜 준 길과 원칙대로 실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사귀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렇게 한동안 실행하면, 한 달 혹은 두 달쯤 지났을 때 이 부분에서 마음이 밝아지고 어느 정도 수확이 생겨 달콤한 결실을 맛볼 수 있다. 그러면 정직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이는 아직 진리에 대해 깊은 인식을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미 어느 정도 감성적인 인식과 실행의 길을 얻은 것이다. 또 말로는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교만한 성품이 사람에게 주는 해악과 인성에 끼치는 왜곡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은 늘 허풍을 치고 터무니없는 말, 남을 기만하는 헛소리를 하며, 큰소리를 치고 구호를 외치고 고담준론을 늘어놓는다. 이는 교만한 성품의 갖가지 표출 아니겠느냐? 이런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도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네가 마음속으로 이런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히 정상인의 이성을 잃은 것임을 인식하고, 교만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성이 아닌 마귀 본성을 살아 내는 것임을 인식한다면, 패괴 성품이 곧 사탄의 성품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사탄과 패괴 성품을 증오할 수 있다. 이렇게 반년, 혹은 1년을 체험하면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 후 다시 교만한 성품이 드러나면 바로 의식하여 그것을 저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렇게 하면 조금씩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고, 정상적으로 남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며, 더는 거짓말이나 교만한 말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말, 솔직한 말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이성이 생긴 것이자 정직한 사람의 면모를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러한 진입이 곧 너의 수확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네가 수확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이렇게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면, 어떤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든 진리를 구해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 또 이렇게 한동안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을 체험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와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네가 그런 진리로 네 교만한 성품을 해부하면 네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을 것이며, 마음속이 밝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교만한 성품이 사람에게 패괴를 가져다주고, 추악한 몰골로 살게 한다는 것을 밝히 알게 되며, 사람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낼 때의 갖가지 패괴된 상태를 분별하게 될 것이다. 해부하면 할수록 사탄의 추태를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이고, 마음속으로 점점 더 사탄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리기가 쉽다. 이 정도까지 인식하고, 관련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밝히 깨닫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전부 정상 인성이 갖추고 살아 내야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면, 더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고, 진리 실행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임을,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전부 자발적이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이와 함께 진리를 더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들이 모여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점차 생겨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무슨 일을 대하든 올바른 관점과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이 진실한 인식과 올바른 관점은 점차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는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으로, 누구도 박탈하거나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긍정적인 것들이 조금씩 모이면, 내면 깊은 곳이 훨씬 충실해졌음을 느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마음속이 공허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하며 인생이 밝다는 것을 보았을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난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이 더없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너는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 것이며, 네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교제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낼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진리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더 큰 믿음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네 본분을 잘 이행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 것이다. 네가 진실한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때, 네 마음은 점점 더 밝아지고, 진리 실행에 더 분명한 길이 보인다고 느끼게 된다. 이와 함께 네 부족한 점과 실행해야 할 진리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체험 간증은 남에게 이로움과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너 자신도 진리 추구에서 수확을 거두고, 진실로 하나님께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여 패괴 성품의 결박과 속박, 고해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 자신 역시 점점 더 믿음을 갖고 진리를 추구하여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체험은 진실한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진실한 증거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지루하고 의미 없으며 공허하다고 생각할 리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진실한 인식이 생기면, 마음 깊은 곳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며, 충실하고 매우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이 그런 상태, 그런 경지에서 살아가면 자연히 자기 자신에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자제하기를 강요하지 않게 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육을 저버리는 데에만 집착하지 않고 적극적인 면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을 알아 가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 밖에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아 갈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한순간의 느낌 같은 데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 실행의 원칙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일이 닥쳤을 때 자제하지 못해 성질이 나고 기분이 나빠졌다든가, 오늘 또 화를 냈다든가, 오늘 또 어떤 일을 제대로 완벽하게 못 해냈다든가 하는 등의 사소한 일들이 네 진리 실행을 막지 않는 한, 그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마땅히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한편,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를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진리를 실행하면 생명이 빠르게 성장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또 마음이 더 이상 공허해지지 않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기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그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사람이 그 수준에 이르렀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실제에 완전히 진입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진리 실제가 아니라 표면적인 좋은 행위,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상태에 진입하고자 한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은 여전히 공허하고, 정신세계는 여전히 의지할 곳이 없다. 어찌하여 의지할 곳이 없겠느냐? 어떤 일을 마주하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혼자만의 생각에 기댈 뿐, 진리의 원칙을 실행하지 않으며,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그저 자제하려고만 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모른다. 다행히 사람의 육체에는 한 가지 본능이 있으니, 바로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오직 누리지 못할 복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육체에는 타고난 본능이 있다. 바로 복을 많이 누리는 것은 안 되지만, 고생은 아무리 해도 괜찮으며 인내하고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좋으냐? 이것이 장점이겠느냐, 아니면 단점, 결점이겠느냐? 그 말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은 전부 헛소리이다. 이는 빈말로, 네 어떤 문제도, 실질적인 어려움도 해결해 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그 말은 네 패괴 성품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네가 인식하고 의식하며, 깊게 느낀 바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방인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마당에 사는 게 두려울쏘냐?” “겨울이 왔는데 봄이라고 멀리 있겠는가?” 이 말들은 꽤나 대단해 보이지 않느냐? 무척 고무적이고 철학적이지 않으냐? 이방인들은 이 말들을 “영혼의 닭고기 수프”라고 부른다. 너희는 이런 말들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싫어하느냐? 혹자는 “저희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얘기니까요. 저희가 좋아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너는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구절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진리로 여기느냐? 어떤 구절에 느낀 바가 있고 진입했으며 어떤 구절을 얻었느냐? 네가 이방인들의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아도 소용없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그것의 본질을 분별하지 못한다. 이방인들의 그런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의 말이 옳든 그르든 진리와는 무관하다. 설령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고, 맞는 말 같아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미치지도 못한다. 그것은 전부 진리에 어긋나고 진리를 적대하는 말들이다. 이방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들과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의 말을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여기면 그만이다. 헛소리란 무엇이더냐? 사람과 사람의 삶, 사람이 걷는 길, 사람이 구원받는 데 어떤 도움도 가치도 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은 전부 헛소리, 빈말에 속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사나 사람이 걷는 길과 상관이 없는 헛소리로, 긍정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사람이 그 말을 들어도 삶이 달라지지 않고 예전대로이며, 그것은 어떤 사실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만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진리는 사람의 운명과 사상, 관점, 정신세계를 바꿀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패괴 성품을 없애고 사람의 속성을 바꿔 사람의 사탄 속성을 진리에 속하는 속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사람이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산다면, 이는 생명이 변한 것 아니겠느냐? 생명이 변한 것이란 사상과 관점이 변하고, 사람과 일을 보는 시각, 태도, 관점이 변한 것이며,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이방인의 말들은 전부 빈말, 헛소리이며,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방금 이야기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오직 누리지 못할 복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헛소리, 빈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고난을 겪을 수 있다고 한들 무엇이 어떻단 말이냐?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는 명리와 지위를 누리기 위해 고난을 겪었으니 네가 겪은 고난은 어떠한 가치도, 의미도 없다. 사실상, 네가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고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마음과 생각조차 파악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다면, 생명 진입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고난을 겪은 게 가치가 있겠느냐? 아무 가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진리를 얻기 위해 겪는 고난은 가치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공급해 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름으로써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 사역이 전개되게 하고,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장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행위는 전부 수확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나, 그 은총은 그저 하나님의 긍휼, 관용이자 사람에 대한 후대이며, 나아가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일 뿐이다. 어떤 은혜겠느냐? 물질적인 축복이다. 오직 그뿐이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바더냐?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이더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날부터 네가 바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 물질적인 축복뿐이었느냐? 너는 이러한 것들을 원하느냐?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것들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네가 구원받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보아하니 너희는 생각이 분명하고, 무엇이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지 이해하는 것 같구나. 또 어리석지 않으며,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중한지 잘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는 아직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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