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제 2 부)

이제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추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에 근거하여 처신하느냐? 양심, 처신의 마지노선, 도덕에 근거한다. 이런 것들은 진리와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양심, 처신의 마지노선, 도덕이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양심에 따라 처신하면 기껏 해 봤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뿐, 하나님의 요구에는 한참 못 미친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처신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진리에 닿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으며, 진리 원칙에 따라 자신을 단속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의지를 다지며 이렇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 진리를 향해 노력할 겁니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감시하고 단속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따라 실행하고, 공적인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며, 일 처리에 원칙과 선을 두고,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일,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죄짓게 되는 것이라면,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라도 저는 스스로 제약할 것이고 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내적 상태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귀중품을 보관하게 했는데,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고 해 보자. 내막을 아는 사람이 있는 상황일 때 너는 그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파손하지 않도록, 또는 도난당하거나 망가뜨리지 않도록 잘 보관하면서 마음속으로 늘 이 일을 생각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욕심이나 점유욕을 갖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그 물건을 완전히 거룩하게 구별하였으니 좋은 사람 아니겠느냐? 지금까지만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탐내어 점유하려는 마음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직책에 충성을 다하며 마음과 책임을 다해 그 물건을 보관하니 마음을 다하고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변화가 생긴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외지로 발령이 났다. 그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환경이 변한 것 아니겠느냐? 환경이 변했고 검증의 시간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너도 마음의 변화 없이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그 물건을 보관하고,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난 후, 내막을 아는 사람들의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이 물건을 탐해서는 안 돼.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니까!’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 (지금까지는 좋은 사람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이냐? ‘좋은 사람’의 기준으로 가늠하면, 이 정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네 집에 큰일이 생겨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수중에 돈이 부족하다면 환경은 또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환경이 변했으니 검증의 시간이 또 다가온 것이다. 처음에는 너도 돈을 빌릴 궁리를 하겠지만 여러 번 시도했는데도 빌리지 못하면 마음이 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보물을 보관하고 있잖아? 돈을 지키고 있으면서 돈을 빌리려 다니다니 멍청이 아냐? 내가 그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없잖아. 게다가 여기에 그냥 놔두기보다는 내가 쓰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안 쓰면 바보지!’ 또 ‘이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 아니겠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이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며 더 좋고 그럴싸한 생각을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느껴지고, 이삼일 고민해 봐도 마음이 평온하고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돈을 쓰자!’라고 결정하게 된다. 어떠하냐?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생각이 변했겠느냐? (환경 때문입니다.) 그럼 환경에 문제가 생긴 것이겠느냐? 환경으로 그가 바뀌어진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정확하겠느냐? 예전에 환경이 두 번 바뀌었을 때는 왜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느냐?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경이 되지 않으면 사람 내면의 진실한 생각과 성품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에 그는 하나님에게 충심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다른 생각도 품지 않았고, 생각이 갈팡질팡하지도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제물을 보관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 물건을 노린 적 없었다. 얼마나 좋은 사람이냐! 하지만 생활 환경이 변해 막다른 궁지에 처하자 생각이 많아지고 제물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 그에게 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속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적당한 환경이 닥치자 그런 생각이 샘물처럼 자연스럽게 솟아 나왔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예비한 거라는 ‘근거’까지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근거’를 찾아냈을 때, 그의 사악한 본성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충성심, 선량함, 정의감은 다 어디로 갔겠느냐?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보여 준 그의 모습은 꾸며 낸 것이었겠느냐? 그것 또한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다. 다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얕은 표면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인성의 표면적 현상에는 얼마간 거짓 이미지가 있는데, 때로 사람들은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해 쉽게 미혹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반년이나 1년 동안은 꽤 좋은 모습을 보이지만, 1년이 지나면 소극적으로 변하며, 2년이 지나면 도망쳐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돈을 벌러 가는 사람도 있고, 세속적인 삶을 살러 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반년이나 1년 이내의 모습만 보고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반년 또는 1년 동안의 모습은 사실 거짓 이미지이자 일시적인 열정에 불과하다. 환경과 시험이 임하면 본모습과 하나님을 믿는 속셈, 불순물이 드러난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이것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대체 사람의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하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람의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성 속에 있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하십니다.) 그렇다. 사람 본성 속에 있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모두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특히 노인들은 늘 “다른 사람의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주지 않고, 남의 물건도 탐하거나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것일 뿐, 진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해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것도 해내지 못하면서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탐욕이 생기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로채 버린다. 이는 본성에 지배된 결과다. 환경이 허락하기만 하면 생각을 거칠 필요도 없이 사람 내면의 사악한 본성, 흉악함, 탐욕, 그리고 간사한 성품이 표출된다. 방금 말한 예에서, 제물을 점유한 그 사람의 어떤 생각과 모습이 간사함이냐? (그는 하나님의 제물을 점유하고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이며 탈출구를 마련해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간사함이고, 자신과 남을 속이는 짓이다. 자신을 기만했고 하나님도 기만하려 한 것이다. 이런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속이고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도록 위안을 얻는다. 그 밖에 그럴싸한 거짓말을 꾸며 내고, 그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려 했다. 이것이 간사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사함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해 네 본성 속에서 뭔가 일을 저지르려는 생각이 들 때, 우선 양심이 네 내면에서 작용하며, 그다음에는 네가 깨달은 진리도 작용해서 너의 그런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네가 생각하고 여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너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런 일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건 하나님께 죄짓는 거야. 사악한 짓이라고! 그렇게 하는 건 진리에 부합하지 않아. 그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짓 아니겠어? 어떤 순간이 와도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건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고, 하나님께 속하는 거야.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비록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물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니 절대 건드리면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실제 분량이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사람의 선의와 도덕적 마지노선에 의지한다면 자신을 단속할 수 있겠느냐? 제물을 훔쳐 먹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이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오직 네가 깨달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만이 너의 마음과 행동 방식을 단속할 수 있고,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결정할 수 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사람이 이런 성과를 내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것이 또 있겠느냐? 없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환경에 직면하든, 그것이 시련이든 시험이든 하나님에 대한 너의 충심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 네가 다짐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큰 환경에 직면하더라도, 그 일이 설령 너에게 아무리 큰 시험이라 할지라도 너의 의지와 일 처리 원칙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굳게 서서 증거한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는 그 일로 너에게 시련을 주지 않을 것인데, 너는 이긴 것이고 굳게 선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분량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를 수 없습니다.) 아직 이르지 못했다. 이는 진리가 아직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과 독소, 그리고 도덕과 처신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사람의 본능, 하나님을 믿고 나서 파악한 일부 영적인 도리와 말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는 늘 ‘진리를 얻었어. 하나님을 믿고 깨달은 게 많아. 난 변화했고 수확을 거뒀어.’라고 생각하는데, 이 수확이란 무엇이냐? 사실 표면적인 것으로, 그저 행위가 좀 제약받고 비교적 규범화된 것뿐이다. 또한 사상적, 심리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할 수 있고,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설교를 듣고, 본분을 이행하며, 긍정적인 사물을 점점 더 많이 접하게 되는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좀 받을 수 있는데, 이는 교회 환경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이자 변화이다. 그런데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는 얼마나 크고 많겠느냐? 이는 사람의 추구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 실제 측면에서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인데, 단계마다 약간의 수확과 인식이 있을 것이다. 다들 마음속으로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짐작하고 느끼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느낀 것은 무엇이냐? 바로 늘 사람의 선의에 따라 열심히 의도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사람이 보기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일, 남에게 참소나 질책을 받지 않는 일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설령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진리 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양심에 따라 일 처리를 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지나치게 심오하고 추상적이어서 사람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하루하루 그럭저럭 지낸다. 양심과 지각조차 없어 양심의 기준에 따라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본분 이행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밥만 축내고 공짜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마음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만약 네가 그에게 “당신처럼 살면 어떤 느낌이에요?”라고 물으면, 그는 “하나님의 뜻은 지극히 높아서 닿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악을 행하지도 않았으니 마음이 평온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눈에는 그도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데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어쩌면 그는 “저는 양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합니다. 놀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아요. 게다가 대가도 많이 치른다니까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진리 실행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한가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함께 교제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인지 살펴봐야 한다. 늘 양심의 기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행위를 갖추는 기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무골호인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진리의 차원으로 추구하고 진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네가 늘 양심을 충족시키고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이 범주 내에서만 일을 하게 되고, 이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인데, 이는 진리가 너와 늘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너의 행동과 말이 늘 진리와 무관하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기가 무척 힘들다.

고대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모두 ≪논어≫나 ≪도덕경≫, ≪삼자경≫과 같은 책을 읽었다. 마치 경문을 읊는 것처럼 온종일 머리를 흔들며 입으로는 ‘옛말에 이르길’과 같은 말들을 달고 다녔는데, 책 몇 권을 읽고 당시(唐詩)나 송사(宋詞)를 몇 수 외우면 지식이 있다고 생각해서 항상 남을 가르치며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평생 정의로운 일 같은 건 한 번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자기가 읽은 그 성현들의 책 몇 권에 따라 처신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어떤 일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충 되는대로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혼자 마음속으로 흡족해하면서 자기가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남들은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긴다는 말이 딱이다. 너희는 절대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늘 자기가 지식과 인의(仁義)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고, 자신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좋은 사람, 군자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의리를 무척 중요시해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을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말을 실행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혼인을 하지 않고 수양을 하면서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일념으로 성현들 책만 읽으며 바깥세상의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소위 ‘좋은 사람’들이 진정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며, 말하고 행동할 때 양심을 좀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리 실제를 갖췄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정말 악을 행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호의를 갖고 늘 선의를 베풀며 남을 도우는데 그것을 이유로 자기가 대단한 선인(善人)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전통문화의 가르침으로 사람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언제나 도덕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들이 권력을 쥐고 지위를 얻는다면, 하나님에게 맞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잔혹하게 박해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본성 안에 악독함이 있으며, 그들의 본성이 사탄 본성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언제나 지식과 전통문화로 살아가는 자는 외식하는 사람이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러한 전통문화나 지식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의 본질이 전부 사탄의 철학과 논리, 법칙이며 사람을 해하는 지식과 문화임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전통문화와 지식을 꿰뚫어 보지도, 분별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혹자는 어떤 지식은 남을 좋은 사람이 되게 도울 수도 있고, 남이 선행을 하도록 가르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지식은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규례이며, 진리와 적대되는 궤변이다. 사람의 지식이 얼마나 높고 깊든, 인간의 패괴된 본질과 자신의 본성, 패괴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는 가장 얄팍한 도리이자 무엇보다 사람을 미혹하는 도리 아니겠느냐? 유가 학설이나 ≪도덕경≫과 같은 소위 중국의 고전적인 성현의 책에 나오는 말들이 언뜻 보기에는 전부 맞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적인 말이자 외식하는 사설, 궤변이며, 사탄의 독소이자 논리이다. 이러한 것들을 진리라고 받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매일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왜 진리를 추구 목표로 삼지 못하는 것이냐? 이런 자는 바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 지극히 우매한 사람이자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에 속한다.

진리란 무엇이냐? 먼저, 처세 철학은 진리가 아님을 확실히 해야 한다. 또 명인이나 위인의 좌우명은 진리가 아니고, 유가나 도가의 말들, 패괴된 인류에게 이어져 내려온 것들, 모두가 공인하는 좋은 행위나 행동 방식, 사람의 사상을 지도하는 것들, 이론 등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기꺼이 남을 돕고 선행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적어도 마음씨가 착하고 남을 가엾게 여길 줄 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그들이 사람을 돕는 데는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 없이 사람을 돕는 자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런 자는 무골호인, 무골충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런데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원칙 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대하는 방법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네게도 잘한다면 너는 효도하겠느냐? (효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효도하겠느냐? 형제자매와 다르게 대한다면,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며, 부모가 나이가 들면 곁에서 돌봐 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가지 않는다면, 이러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럴 때는 상황을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집 근처에서 본분을 이행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고 부모도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자식의 책임을 다해 부모의 일손을 도와주면 된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돌봐 주고, 부모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위로해 주어라. 또 경제적인 여건이 된다면 적당히 영양 보조 식품을 사 주어라. 하지만 네가 본분으로 바쁜데 부모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또 부모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책임이나 의무에 불과한 이상, 네 의무가 본분과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일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의무가 꼭 본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분 이행을 선택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지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만약 조건이 된다면 그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도 되겠지만, 당장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하러 가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겁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만, 진리 실행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 만약 지금 네가 본분이 없고 외지에서 사역을 하지도 않으며 부모 곁에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부모를 돌봐 주며 최선을 다해 부모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덜 고생을 하게 해도 되지만, 그것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부모가 인성이 좋지 않고, 늘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가로막고,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하는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을 저버려야 합니다.) 이럴 때는 저버려야 한다. 너는 의무를 다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네게는 그들에게 효도할 어떤 의무도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한 가족이고 너의 부모겠지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을 신봉하고 마왕을 받들며 사탄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고, 한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적이나 원수로 여기니 네게는 그들을 돌봐 줄 의무가 없다. 그들을 철저히 저버려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 중 어떤 것이 진리겠느냐? 당연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부탁이 있는데 그것은 네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 책임은 진정한 책임으로, 창조주 앞에서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이자 인생의 큰일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그저 자식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절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이고, 천직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에게 효도하는 것으로, 본분 이행에도, 진리 실행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교제하면 너희 스스로 구분이 되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 중 또 어떤 것들이 진리로 여겨지더냐? (사회에서 자주 말하는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 또한 부정적인 사물로, 진리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마귀적인 말이다.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는 어떤 배경에서 생긴 것이냐? 사회에 나타난 이런 단어, 황당한 이야기, 혹은 유행어들은 모두 똑같은 배경을 지닌다. 너희는 이런 유행어들이 어떤 배경에서 생겼는지 알고 있느냐? 중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갈수록 사악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것을 숭배한다. 마귀가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다 따르고 있다. 도저히 보고 있지 못하여 비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누구도 거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사악함은 이미 흐름이 되어 어떤 집단도 이 사악한 흐름을 막지 못한다. 모두가 나라의 사회적 기풍이 갈수록 못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마가 완전히 권력을 잡고, 국가와 국민들을 완전히 통제하였다. 마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누구도 막을 방법이 없다. 정권을 쥔 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일로 사람을 미혹하고 기만하면서 그것이 긍정 에너지에 속한다고 말한다. ‘긍정 에너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인이 말하는 긍정 에너지는 무슨 뜻이더냐? 그들이 말하는 정직한 기상 혹은 좋은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사실, 이 긍정 에너지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 사악한 흐름의 범람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사악한 흐름의 발전 추세를 제지할 수 있겠느냐? 제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도 바꿔 놓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는 듣기에 매우 강력한데 왜 어떤 일도 바꿔 놓지 못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그것은 아이들이 온종일 인터넷에 빠져 있는 상황조차 바꿔 놓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지난날, 사람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과 의리, 양심과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웃 간에 서로 오고 가는 정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심이 각박해져서 서로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심지어는 이웃에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않고, 구조를 요청하는 모습을 봐도 더더욱 관여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에게 긍정 에너지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겠느냐? 그럼 예전의 그 사회에는 늘 긍정 에너지가 있었겠느냐? 그렇지 않다. 전부 똑같다. 긍정 에너지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 어떤 실제적인 내용도 없는 공허한 이론으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말해 보아라. 옛날 사람들이 나쁘겠느냐, 요즘 사람들이 나쁘겠느냐? (요즘 사람들이 나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냐? 너희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은 냉혹하고 가족 간에 정이 없으며, 진정한 친구도 없고, 의리나 양심을 중요시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항상 “양심이 돈이 돼?”, “양심이 뭐라고, 돈 많이 버는 게 최고지!”라는 말을 하며 양심을 잃었다. 물건을 팔 때 무게를 속이는 것도, 검은돈을 버는 것도 정상이다. 누구에게든 사기 칠 수 있고, 누구라도 해할 수 있다. 반면, 고대의 상인들은 장사에 원칙이 있었는데, 물건값을 바꾸지 않았고, 상도덕을 지켰으며, 사람을 기만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 사람들이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낫다’는 말은 무엇에 초점을 맞춘 것이냐? 사실, 양심과 살아 내는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이 기준에 근거해 판단한다면,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보다 낫다. 옛날 사람들은 훨씬 소박했으며, 양심과 염치가 있고 처신에 마지노선이 있었다. 최소한 양심에 지나치게 어긋나는 일,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일, 오명을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돈을 벌고 이름을 알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요즘 사람들은 너무 못됐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요즘 사람들이 너무 못된 것은 어디에서부터 발전해 온 것이겠느냐? 고대에서부터 한 세대 한 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 아니겠느냐? 요즘 사람이라고 해서 고대 사람들과 다를 건 없다. DNA도, 외모나 생김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생활 여건이 고대보다 좀 나아졌고, 좀 더 복잡한 것들을 배우며, 익힌 각 분야의 전공이 많아지고, 지식은 고대인보다 높고 능력도 고대인보다 훨씬 크고, 교만한 밑천이 생겼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못됐다고 말하는 게 과연 정확하겠느냐? 이 말이 정확한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우리는 이 일을 이렇게 논증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다루는 내용이 조정이나 강호의 일이든, 아니면 백성들 가정의 일이든 전반적인 줄거리에 분쟁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진실한 일면이다. 인류는 권력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로 죽어라 싸워 댄다. 사람의 본성이 남김없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탄의 몰골이다. 그럼 네가 본 그것들이 한 시대에서만 발생하는 일이겠느냐? 지구상의 어떤 지역이 풍토가 좋지 않고 더러운 귀신들이 군거하고 있어 사람들이 심각하게 싸우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그 몇몇 사람의 유전자가 나쁘고 본성이 호전적인 것이겠느냐? (전부 아닙니다.) 그럼 그 분쟁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권력과 지위, 이익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계층을 막론하고 끝없이 싸우고 다투는데,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싸우고 죽도록 다툰다. 이 현상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전 인류 역사 발전의 축소판을 통해 볼 때, 또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볼 때 인간의 본성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사람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모든 시기, 모든 단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내용은 동일하고, 그 본질 역시 모두 같다. 사람이 싸우는 목표와 원인, 근원이 전부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두 권력과 지위를 위한 것이고, 결국 다 이익을 위한 것이다. 싸우는 수법의 기원 또한 동일한데, 전부 사탄의 본성과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싸우는 수법과 방식이 왜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겠느냐? 그것은 100% 사람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머리를 쥐어짜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고 해치고 서로 망치고 속이고 기만하는 등 함정과 사기의 수법을 전부 동원한다. 큰 정치적 분쟁이든, 평범한 집안싸움이든 전부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진면목이자 인간의 본모습이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지만 여전히 똑같은 인류이고, 인류를 패괴시킨 것 역시 똑같은 사탄이다. 비록 외부 환경은 조금씩 변했지만, 환경의 변화가 사람의 본성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방식과 수법은 어느 정도 달라졌지만, 싸우는 본성이나 출발점은 전혀 변함이 없다. 본성도 근원도 싸우는 목적도 동일하다.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이다. 너희는 옛날 사람들이 낫다고 했는데, 어떤 점이 낫겠느냐? 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전통문화에 제약받아 좋은 일을 조금은 했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발전했지만, 현재 삶의 질이 얼마나 좋든, 사람이 지닌 지식과 문화 수준이 얼마나 되든, 식견이 얼마나 넓든 사람의 본성은 줄곧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더 사악하고 노골적으로, 거리낌 없이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얼마나 많은 진리를 선포하든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더더욱 싫어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지금 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지만 줄어들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착하다고, 여전히 나쁘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진공 속에서 살아가겠느냐? 그가 한 그 정도의 좋은 일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그것은 그저 좋은 행위, 좋은 마음에 불과하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일, 하나님을 믿어 좋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일로 정부에 박해받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너를 원수로 여기고 비웃을 것이다. 만약 네가 체포되고 박해받을 위기에 처해 그의 집에 좀 숨어 있기라도 하면 그는 경찰에 신고해 너를 정부에 넘길 것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 구해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좋은 사람을 악마의 손아귀에 넘겨 짓밟히게 하고 심지어는 박해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어떤 모습이 그의 본성을 대표하겠느냐? 후자가 바로 그의 본성이다. 사람을 구한 자도, 사람을 죽음에 밀어 넣은 자도 그 사람이다. 이런 자는 과연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마귀겠느냐? 사탄 본성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한, 사람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어떤 점이 맞느냐? (그가 실행한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외적인 행동과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본성은 하나님과 적대적입니다.) 그의 본성이 하나님과 적대적이라는 말은 맞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어째서 하나님과 적대적인 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적대적이라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그런 것들이 전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이 겉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경건해도, 아무리 기꺼이 남을 돕고 선행을 베풀어도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들으면 반감을 갖고 좋아하지 않으며,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싫어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세부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왜 이 말이 진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가정을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수시로 그의 집을 찾아가 수색하며 그의 부모를 괴롭히고, 그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이웃사람들은 “양심도 없지. 부모를 봉양하지도 않고 말이야. 효도는 고사하고 부모에게 이렇게 많은 폐를 끼치다니 불효자야!”라고 비난했다. 이 비난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이 이방인의 눈에는 옳은 것으로 보이지 않겠느냐?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런 관점은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윤리에 부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신의 기준에도 부합한다. 그 기준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든, 예컨대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할지, 부모를 어떻게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지, 부모에게 얼마나 보답해야 할지 등의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그 기준은 이방인의 눈에 긍정적인 사물이자 긍정적 에너지, 옳은 것으로 보이며, 어떤 집단에서도 질책받지 않는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기준은 바로 이런 것인데, 네가 이런 것들을 해내야 남들 눈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 너 또한 이렇게 처신하는 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게다가 너는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평가하고 제약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만약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네 처신의 기준 안에는 분명 이 한 가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할 것인지, 어떻게 부모의 걱정을 덜어 줄 것인지, 어떻게 부모를 자랑스럽게 하고 체면을 살려 주고 조상을 빛낼 것인지 등은 네 마음속에서 처신의 기준이자 방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듣고 난 후, 네 관점은 바뀌기 시작했다.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처신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임을 아직 확신하지 못했을 때, 너는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모순적인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끊임없는 양육과 목양을 통해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너는 비로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의 전통 관념과 상상 속 처신의 기준을 철저히 저버렸다.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으면,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할 때 이방인의 판단과 정죄의 말에 통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네 마음속 낡은 전통 관념들은 어떻게 사라졌겠느냐? 설마 네가 나쁘게 변한 것이겠느냐? 네 마음이 강퍅해지고 양심이 없어진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사실 네 양심은 변하지 않았고, 너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다. 네 성격과 기호, 양심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 모두 변하지 않았다. 그럼 왜 이방인들에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을 들어도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고 기쁜 것이겠느냐? 이는 크나큰 변화이다. 어째서 이렇게 바뀔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일부 진리를 깨달았고, 올바른 평가 기준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이 하는 말이 전부 궤변임을 분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저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혈육 간의 정도 없이 아주 냉혹합니다. 마치 냉혈동물처럼 변한 것 같다니까요.”라고 헛소리를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한다. 설마 정말 하나님을 믿은 후 진리가 사람을 냉혹하고 무정하게 만들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이룬 성과이다. 그럼 이 성과는 어떻게 이룬 것이겠느냐? 무엇이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을 바뀌게 했겠느냐? 언제부터 바뀌기 시작했겠느냐?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관점을 바꿔 인생과 갖가지 사물을 대하는 관점을 이방인과 다르게 변화시킨 것이다.

지난날, 사람은 언제나 양심에 기대 일을 처리하고 다른 이를 판단했다. 늘 양심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고, 또 늘 소문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남들에게 비웃음당하거나 오명을 남기거나 “양심도 없는 사람 같으니. 제대로 된 작자가 아니야.”라는 욕을 들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마지 못해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서 대충 환경에 대처해 왔다. 이제 이런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진리 원칙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과거 이방인의 관념과 궤변에 얽매였을 때, 사람은 어떤 상태로 살아갔느냐? 예를 들어, 네 부모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네게 “얘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우리 가문을 빛내야 해!”라고 주입시켰다고 해 보자. 이 말은 네게 어떤 의미였겠느냐? 일종의 격려였겠느냐, 아니면 제약이었겠느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통제로 작용했겠느냐? 사실 그것은 하나의 통제이다. 그들은 사람이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말과 이론으로 네게 하나의 목표를 설정해 주고는 네가 그 목표를 보며 살게 했다. 그리고 결국 너는 자유를 잃었다. 어째서 자유를 잃고 그것에 통제되었겠느냐? 사람은 모두 조상을 빛내는 것이 좋은 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을 빛내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 쓰레기, 못난 인간, 멍청이가 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너를 무시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 너는 열심히 책을 읽고 능력을 키워 조상을 빛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한 모든 행동이 무형의 족쇄가 되어 너를 결박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조상을 빛내는 것은 부모의 요구이기에, 부모는 네가 잘되고 앞으로 좋은 날을 맞이하고 가문을 빛내게 하기 위해 한 것이기에 너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활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네게 무형의 고통이자 족쇄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은 이런 것들을 긍정적인 것, 진리, 바른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을 지키거나 따르며, 부모의 말과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만약 네가 이 말대로 살아가고 노력하며 네 청춘과 삶을 모두 바친다면, 결국 뛰어난 사람이 되어 좋은 날을 맞이하고 조상도 빛내며 너 또한 사람들 앞에서 빛이 나겠지만, 네 내면은 갈수록 공허해질 것이다. 너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앞으로의 종착지는 무엇인지, 사람이 살면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인생의 비밀들을 너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얻지도 못했다. 그러니 너는 부지중에 부모의 그 좋은 마음 때문에 망쳐진 것 아니겠느냐? 네 청춘과 인생은 소위 “너를 위해서야.”라는 부모의 말에 의해 망치게 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를 위해서야.”라는 네 부모의 말이 과연 옳겠느냐, 아니면 틀렸겠느냐? 어쩌면 네 부모의 출발점은 정말 너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네 부모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냐? 네 부모에게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고 조상을 빛내야 한다’는 부모의 말을 위해 살아간다. 이 말은 그에 대한 깨우침이었고, 그는 평생 부모의 그 말에 영향을 받아 왔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부모의 말은 그의 인생의 기점이자 노력해야 할 방향, 목표였다. 그 결과, 그가 평생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든, 얼마나 존엄 있게 살고 성공했든, 사실 그의 그 인생은 망쳐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부모의 그 말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망쳐지지 않겠느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에게 목표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목표겠느냐? ‘좋은 날을 맞이하고 부모님의 체면을 세워 드리자’라는 것으로, 똑같은 말이다. 부모가 그에게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 이 말을 목표로 살아가며, 조상을 빛내고 뛰어난 사람, 고상한 사람, 존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의 목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사회에서 옳다고 여기는 수많은 도리나 주장, 논조를 받아들이면 인생에서 이 ‘옳은 것’들을 노력의 방향과 기반, 동력으로 만들어 버리며, 결국 한 치 오차도 없이, 남김없이 그 목표를 위해 살면서 눈 감는 순간까지 분투하게 된다. 어떤 이는 심지어 눈 감는 순간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의 삶은 이토록 가련하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 소위 ‘옳은’ 것들, ‘옳은’ 교육, ‘옳은’ 주장, 그리고 부모의 기대를 조금씩 내려놓게 되지 않겠느냐? 네가 이 소위 옳은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더 이상 전통문화에 관련된 말을 근거로 일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더는 전통문화에 관련된 말에 결박되는 일이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것들에 결박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게 되지 않겠느냐?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족쇄가 가벼워질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수많은 관념과 상상, 속셈, 불순물, 그리고 사람의 처세 철학과 간사한 생각, 패괴 본성 등을 지니고 있다. 언젠가 이러한 것들이 해결되고 완전히 진리에 기대 살아가게 되면, 그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이고,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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